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에 대한 고찰
The Understanding of Actual entity in Alfred North Whitehead
문창옥 박사의 <현실적 존재> 이해를 중심으로
전 철
1. 들어가며
연속의 자연과 유동하는 우주를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연속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시간을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량없이 연속적인 우주를 불연속적인 인간 사유로 포착하는 것 자체가 이미 불가능한 시도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지성은 분절화와 공간화의 기관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이 열어놓으신 이 우주의 깊이를 유한한 지성을 가지고 온전히 헤아릴 수 없음을 뼈저리게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화이트헤드의 논의가 참으로 어렵다는 세간의 평가에 대한 정당한 근거를 추적해 본다면, 우리는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은 지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는 인간 지성의 한계를 한탄하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생성하는 우주를 사변으로 끈질기게 포섭하려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물상화된 기존의 관념과 언어를 새롭게 가공하고, 수학과 논리학과 물리학을 동원하여 사유의 궁극적인 일반화인 형이상학을 축조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우주시대를 가장 구체적이면서 정확하게 해명했다는 화이트헤드의 치밀한 우주론과 새로운 형이상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은 어려운 길이지만, 그의 낮선 언어를 따라가야만 할 것이다.
그 낮선 언어의 정글을 탐험하면서 제일 처음 직면하게 되는 관념은 바로 <현실적 존재>가 될 것이다. 어쩌면 화이트헤드의 사변은, 우주의 궁극적인 사물인 현실적 존재를 둘러싼 체계적이며 종합적인 분석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 대하여 매우 체계적으로 탁월하게 분석한 문창옥의 『화이트헤드 과정철학의 이해』에 나타난 현실적 존재 해명을 중점적으로 독해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현실적 존재를 생성하는 존재로서, 그리고 진정한 존재로서 정리하고 있다.
2. 생성하는 존재 : 현실적 존재
진정 존재는 생성보다 더욱 근원적인 사태인가?
문창옥은 생성/존재, 경험/사유, 變/通, 차이/동일성, 타자/자아, 물질성/정신성, 결정/자유, 과거/미래라는 상호 길항적인 관계항을 바탕으로 화이트헤드 형이상학의 가장 핵심적이고 근본적 개념인 현실적 존재를 설명해 나아간다. 문창옥은 화이트헤드의 데카르트에 대한 비판을 일단 언급한다.
화이트헤드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근원적 유형의 현실적 계기라는 입장을 택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그 이후의 전개 과정에서 데카르트는 정신적 실체를 변화에 말려들지 않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음을 화이트헤드는 지적한다. 이는 데카르트 자신의 논의선상에서 일탈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고 데카르트가 언표(言表)할 때마다 자아ego인 현실적 계기는 달라지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이러한 오류는 인간 사유의 고질적 병폐로 지적인 주어-술어라는 표현형식에 기인한다고 분석한다. 바로 이 주술구조에서 파생된 실체-속성의 도식이 사유의 동일성이라는 관념을 축조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사유의 동일성은 경험에서 피어오르는 잠정적인 추상일 뿐이다. 즉 사유하는 나는 경험하는 나의 특수 사례일 뿐이다. 실로 경험에서 사유가 나오지, 사유에서 경험이 나오지 않는다. 變을 통하여 通이 나오지 그 역은 아니다. 또한 차이에서 동일성이 나오지, 동일성에서 차이가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을 화이트헤드는 그대로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에 일반화 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현실적 존재는 그것의 경험, 곧 생성 가운데 존립한다. 이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의 원리”(principle of process)로 정식화 된다.
존재의 자기창조는 능동적인가 수동적인가?
문창옥은 현실적 존재의 특성을 설명한다. 현실적 존재는 자신의 주체적 경험의 산물이며, 그런 의미에서 자기창조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이는 무로부터 새롭게 출현하는 창조가 아니라 다수의 타자를 자기화 하는 과정이라는 의미에서 창조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 존재는 타자들을 주체적으로 ‘자기화’ 하는 과정 가운데 창조한다는 의미와, 타자의 ‘제약’ 하에 창조된다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서 현실적 존재는 무에서부터 등장하는 전혀 새로운 존재가 아니며, 과거의 여건의 산물이기에 현실적 존재는 절대 자유를 향유하는 존재일 수 없다. 이는 현실적 존재가 존재들 간의 관계성을 기본 축으로 하는 ‘존재의 상대성’을 그 안에 담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적 존재는 과거로부터 주어진 조건들 속에서 자신이 궁극적으로 무엇이 될 것인지를 자유로이 선택하고 결정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과거의 여건에 대한 본질적인 의존에서 벗어나는 관념 또한 현실적 존재는 그 안에 간직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자유와 결정성(Freedom and Destiny)의 범주를 통하여, “현실적 존재의 합생은 내적으로 결정되어 있으되, 외적으로는 자유롭다”고 정의한다. 여기에서 ‘내적’, ‘외적’이라는 용어는 상관적-관계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서 현실적 존재의 탄생의 배경은 ‘내적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 주어진 여건을 현실적 존재가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외적으로’ 자유가 허용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현실적 존재는 정신인가 물질인가?
그렇다면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궁극적인 현실적 존재는 정신인가 물질인가 하는 물음을 우리는 던질 수 있다. 화이트헤드는 존재의 정신성과 물질성이라는 배타적 특성을 현실적 존재에 융회(融會)시킨다. 문창옥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간결하게 압축한다. “현실적 존재의 정신성은 개념적 능력(conceptual capacity), 즉 새로움을 낳는 능동성의 함수이며, 현실적 존재의 물질성은 과거를 반복하는 수동성의 함수이다.” 현실적 존재는 이런 의미에서 배타적 특성인 물리적인 극과, 연대적이며 창조적 특성인 정신적 극을 양극적으로 포섭하고 있다. 현실적 존재는 배타적이며 물리적인 과거를 여건으로 하여 창조적이며 미래를 새롭게 창출하는 과정의 단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 존재는 과거적 성격의 물리적 국면과 미래적 성격의 정신적 국면을 동시에 점유하고 있다.
현실적 존재는 후속하는 존재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현실적 존재는 과거로부터의 맺혀진 點이며 미래를 향하여 새롭게 펼쳐질 滅이다. 즉 현실적 존재는 點滅이다. 그렇다면 현실적 존재가 미래의 타자의 여건이 되며 소멸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현실적 존재는 주체적으로 소멸할 뿐 객체적으로는 불멸한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객체적 불멸성”(objective immortality)로 정의한다. 현실적 존재의 객체적 불멸성은 후속하는 새로운 현실적 존재의 생성을 조건짓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현실적 존재는 주체적으로 사라지지만 후속하는 타자에 의하여 규정된다. 이런 의미에서 현실적 존재는 “자신의 생성의 직접성을 관장하는 주체”로서의 현실적 존재와, “객체적 불멸성의 기능을 행사하는 원자적 피조물인 자기초월체(superject)”라는 두 측면의 존재성을 갖는다. 문창옥은 ‘주체’와 ‘자기초월체’를 ‘창조적 과정’과 ‘창조적 산물’과의 관계로 이해한다. 공간적으로 유한자의 죽음이 무한자에게 귀환된다는 고전적인 관념은, 시간적으로 존재의 죽음은 결국 후속하는 타자에게 불멸성을 남긴다는 관념으로 전진한다.
현실적 존재 전체의 존재양식은 어떤 원리를 지니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한 계열 속에서의 현실적 존재의 존재방식을 다루었다면, 현실적 존재 전체를 포함하는 여건들을 논의할 필요가 있겠다. 여기에서 문창옥은 현실적 존재에 대한 논의에 화이트헤드의 <궁극자의 범주>에 대한 논의를 첨가시킨다. 즉 이접적인 다자(disjunctive many)로 주어진 현실적 존재들은 새로운 현실적 존재의 경험 속에서 일자(one)로 통일된다. 화이트헤드는 다자가 복잡한 통일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사물의 본성으로 보았다. 창조성(creativity)은 바로 다자의 내용에 새로움을 도입하는 새로움의 원리이다. 우주는 바로 이 궁극자의 원리를 품으며 전진한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우주는 항상 일자이다. 왜냐하면 우주는 그것을 통일하는 하나의 현실적 존재를 입각점으로 삼지 않고서는 개관될 수 없기 때문이다.”
3. 진정한 존재(res vera)
존재는 생성이다. 이는 과정의 원리이다. 이 원리는 모든 존재의 의미를 현실적 존재와의 관련 속에 해명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이어진다. 현실적 존재의 활동과 유리된 존재는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공허한 추상이다. 화이트헤드의 존재론적 원리(ontological principle)는 바로 알지 못하는 곳으로부터 세계 속으로 유입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분명하게 정식화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존재론적 인식론적 원리에 적용된다. 즉 존재론적으로 모든 존재는 구체적인 현실태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존재일 수 있는 것이고, 존재에 대한 설명 또한 구체적인 현실태에 의거해야 함을 의미한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서구 합리적 전통의 형이상학은 현실태를 비현실적 존재(추상관념)에 의해 해명하였음을 지적한다. 구체적인 것에 의해 추상적인 것을 설명하고자 해야 하며 추상에 의해 구체적인 것을 설명하고자 해서는 안된다. 또한 인식론적으로 인간이 품을 수 있는 모든 사유와 관념은 구체적인 경험에서 발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 존재는 경험의 대상인가, 사변의 산물인가?
그렇다면 현실적 존재가 진정한 존재(res vera)라면,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인가? 또한 현실적 존재는 어디까지 구체적 존재인가? 화이트헤디안 사이에서도 이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많은 논객들은 “현실적 존재는 직접적인 경험의 대상인가, 아니면 형이상학적 추상관념인가?”, “현실적 존재는 존재(entity)인가, 결합체(nexus)인가? 사회(society)인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 왜냐하면 화이트헤드는 심지어 원자보다 더 미세한 소립자인 전자도 결합체로 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현실적 존재는 우리의 사변을 동원해서 이해할 수 있는 미세하면서도 궁극적인 entity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현실적 존재를 우리의 구체적인 감각경험 속에서 발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 존재는 경험의 대상인가 사변의 대상인가? 라는 절박한 물음에서부터 형이상학의 접점이 열리는 것이다.
문창옥은 이에 대하여 “화이트헤드의 철학과 추상의 역리”에서 전개되었던 내용을 요약해서 제시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그의 우주론에서 ‘현실적 존재’를 가장 구체적인 존재로 상정하고 있고, 어떤 의미에서 나머지 범주들은 모두 이를 분석적으로 해명하기 위한 도구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실적 존재는 고도의 추상적인 관념인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렇기에 그것은 가장 현실에 접근하고 있는 관념이라고 문창옥은 이 논문에서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고도의 추상관념일수록 구체적인 현실을 조명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를 구체적인 사물임에는 틀림 없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형이상학적 도식 속에서 가장 궁극적인 우주의 구성요소로서의 구체적인 사물인 것이다.
따라서 문창옥은 현실적 존재의 구체성은 일차적으로 그의 체계 내적인 지위에 있어 구체성을 의미하며 체계 외적인 직접 경험의 대상이라는 의미에서는 구체성이 아니라고 본다. 그러므로 현실적 존재의 구체적 존재성은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적 도식 밖에서는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이며, 그렇기에 체계 밖에서 구체성의 상응자를 찾으려는 것은 애당초 빗나간 시도라고 비판하고 있다.
4. 나가며
우리가 위에서 조명했듯이, 현실적 존재는 우주를 구성하는 조각난 단편이 아니라, 펄떡거리는 경험의 방울이다. 또한 우리의 우주는 바로 이 현실적 존재라는 기본적인 단위들이 합종연횡하며 복잡다단한 연대성을 기반으로 하여 순간 순간 새로움을 창출하는, 생동하는 무대이다. 하나님도 예견하지 못하였던 새로움을 우주는 현재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성과 물질성을 통합하는 개념인 현실적 존재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각질화 되어버린 낡은 개념을 거부하면서, 상식적인 물리적 세계 이면에 있는 정신성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준다. 그에 의하면 돌은 당연히 결합체이자, 세계에 와해되지 않으며 자신을 지켜 나아가는 고도의 사회이다. 물론 돌이라는 사회는 일종의 '신비'에 가까운 고등의 유기체인 인간과 같이, 자신을 규정하면서 자신을 초월하는 적극적인 생명은 없다. 하지만 변화하는 세계 안에서 돌은 자기 동일성을 지켜내며 견고하게 자신을 계승해 나아가는 소극적인 생명이 그 안에 있다. 현대물리학은 돌의 내부에 격동하는 분자들의 사회를 예증한다.
현실적 존재는 플레로마의 우주적 경험을 머금고 출현하면서 동시에 순간적으로 소멸하는, 마치 클레아투라와 같은 깊이를 지닌 존재이다. 그러나 그 존재는 소멸하면서 후속하는 우주에 자신의 고유한 경험을 불멸의 형태로 각인(刻印)시킨다. 그리하여 존재가 이루지 못한 청춘의 꿈은 비극의 결실로 마감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존재의 운동방식, 땀과 노고, 사랑, 증오, 소망, 꿈의 역사는 고스란히 4차원 시공연속체에 결코 사라지지 않고 끔찍하게도 영원히 불멸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주는 지금도 끊임없이 길쌈하고 수고한다.
현실적 존재는 결코 고답적인 철학적 논변 뿐이거나 현대물리학과 수학을 바탕으로 구획되어진 딱딱한 추상개념만은 아니다. 우리의 우주가 경탄할 만큼 유동적이고 영속적인 무대임을 매우 구체적으로 깨닫게 한다. 시간의 소멸 속에서 모든 유한한 존재는 쇠하여도 그 존재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부활하고, 불멸한다. 시간적인 삶의 가련한 혹은 소중한 의미, 감추어진 정신인 물질에 대한 새로운 인식, 날이 저물어도 새로움과 희망을 품고 끊임없이 밝은 아침을 여는 우주의 창조적인 운행에 대한 깨달음. 실로 현실적 존재는 오늘의 우주를 경험하는 우리 신학도에게 저 우주의 경이로움과 기쁨, 혹은 슬픔을 볼 수 있는 깊은 시선을 건네준다.
그러나 왜 하필이면 어느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어찌하여 이렇게 황량하고 드넓은 우주를 경험하고 있는가, 혹은 왜 어느 누구도 아닌 어떤 특정한 개인과 조국과 민족이 어찌하여 질병과, 가난과, 세상의 고통과 죽음을 처절하게 만나야만 하는가에 대한 백두의 대답은 여전히 침묵으로 남아 있다. 우주 안에서의 모든 존재는 어떻게 자신의 삶을 경험하고 마감하며 우주와 연대하는가를 백두는 매우 섬세하고 웅장하고 대담하게 그려냈을 지언정, 왜 나의 영혼은 여기에 이렇게 서 있는가에 대한 소박한 물음에 그는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것은 개개인의 영혼, 혹은 고통을 경험하는 이웃들이 결국은 헤아리고 깨달아야 하는 과제일까. 아니면 신학이 해명해야 할 그만의 고유한 몫일까. 아니면, 혹시 문명이 우리에게 암암리에 조장해 왔던 인격적인 동일성의 관념 마저도 활짝 벗어 던져야만 한다는 백두의 강변을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기 때문일까.
1) 문창옥, 화이트헤드 과정철학의 이해 (서울 : 통나무, 1999). 이하 {과정철학} 으로 표기.
2) {과정과 실재}, pp.37-54.
3) A.N. Whitehead(오영환 역), {과정과 실재 - 유기체적 세계관의 구상}(서울:민음사, 1991), 170. 이하 PR로 표기.
4) 화이트헤드는 인류의 사유방식 안에서 극복되어야 할 9가지의 사고습성을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첫째, <사변철학에 대한 불신>이다. 그에 의하면 사변(思辨)은 '공허한 언어놀음'이 아니라 사물의 본성을 추구함에 있어서 절실히 요구된다.
둘째, <명제의 충분한 표현으로서의 언어에 대한 신뢰>이다. 그에 의하면 언어는 직관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는 시(詩)를 요청한다.
셋째, <능력심리학을 함의하고, 또 그것에 함의되어 있는 철학적 사고의 양식>이다. 경험의 본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심리학에 호소하기 어려운 이유는 심리학의 상당부분이 감각론적 신화라는 가설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의식과 감각, 정서와 목적, 인과 작용과 같은 매우 추상적인 관념에 기반한 <능력>이라는 관념과 이에 기반한 사고양식을 그는 거부한다.
넷째, <주어-술어라는 표현 형식>이다. 주술구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라는 권세의 산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일실체설>과 <술어설>은 제일실체들의 이접(離接)과 속성들의 연접(連接)이라는 결과를 그의 한계로 안고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산물인 보편자와 개별자, 다른 개별적 실체 속에 내재할 수 없는 개별적 실체, 관계의 외재성의 구조는, 하나같이 우주의 <연대성>을 애시당초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천년간을 지탱해 온 착종된 사유의 금형(金型)인 저 논리학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논법(論法)으로 우주를 설명하기에, 그만큼 그의 언어가 우리에게 생소하고 난해하게 다가올 뿐이다.
다섯째 비판은 <지각에 관한 감각주의적 학설>이다. 감각주의적 원리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수용의 주체적 형식 없이 그대로 마음에 품는 것이다. 하지만 화이트헤드는 사물의 질서에 대한 감각 이상의 무엇인가를 주체는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느낌에서 우리 자신을 사상한다면 다수의 사물들만 남아 있을 뿐이다.
여섯째는 <공허한 현실태의 학설>이다. 주체적인 관계를 결여해도 주체를 넘어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진정한 사물이 <공허한 현실태>이다. 하지만 화이트헤드는 그러한 <공허한 현실태>를 거부한다. 화이트헤드가 거부하는 <공허한 현실태>는, 미시물리학에 있어서 대상에 대한 파악에는 이미 주체가 관여되어 있다는 과학적 발견과 유사성을 보여 준다.
일곱째, <순수한 주관적 경험으로부터의 이론적 구성물로서의 객관적 세계에 대한 칸트적 학설>이다. 화이트헤드는, 의식은 경험을 전제로 하지만 경험은 의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고 본다. 화이트헤드는 우주를, 객관적 여건이 주체적 만족으로 이행해 들어가면서 주체를 형성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관에서부터 세계가 출현한다고 보는 칸트적 학설과는 달리, 화이트헤드는 세계로부터 주체가 출현한다고 이해한다.
여덟째, <귀류법에 의한 독단적 영역>이다. 귀류법(歸謬法)은 어떤 명제가 참임을 증명하려 할 때 그 명제의 결론을 부정함으로써 가정 또는 공리등이 모순됨을 보여 그 결론이 성립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귀류법은 수학이나 자연 과학에서 애호되는 논증법의 하나이다. 하지만 수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사상이나 철학에 귀류법을 남용하는 것에 반대한다. 사상이나 철학이 궁극적인 일반성을 정확히 표현한다는 것은 '목표'이지 '출발점'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귀류법의 남용으로 말미암아 거짓으로 판명되는 하나의 전제 때문에 의해 사상이나 철학 전체를 버리는 것은 목욕물과 아기를 모두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마지막으로 <논리적 모순이 선행하는 오류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지적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하나의 사상이나 철학체계에 있어서 <논리적 모순>이란 오류중에서 가장 근거가 없는 것이고, 대개는 사소한 것이라고 당대의 논리학자인 화이트헤드 자신은 말한다.
특히 이러한 9가지의 잘못된 사고습성 가운데에 넷째, <주술구조>에 관한 논의는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과 세계를 실체와 속성의 관계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사고를 간접적으로 비판한다. 또한 여섯째, <공허한 현실태>에 관한 논의는 세계와의 관계성을 배제해도 하나님은 독립해서 존재할 수 있다는 사고를 간접적으로 비판한다. 실질적으로, 우주에 관한 궁극적인 해명을 보여주고 있는 화이트헤드의 신학은 하나님과 세계의 긴밀한 상호 관계로 귀결된다. 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은 세계가 하나님을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이다.
화이트헤드가 지적한, 극복되어야 할 인류의 사고방식 9가지는 PR xiii(42) 참조. 신과 세계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논의는 PR 제5부 2장 신과 세계, pp.342-351(588-603) 참조. cf. 전 철, “화이트헤드의 인간이해”, 『신학의 미래』 (한신대학교, 1997). in http://theology.co.kr/article/white-human.html
5) 의식, 사고, 감각지각은 경험의 사례에 있어서 비본질적 요소들이다 PR 104.
6) 현실적 존재가 어떻게 생성되고 있는가how and actual entity becomes라는 것이 그 현실적 존재가 어떤 것인가what that actual entity is를 결정한다는 것. 따라서 현실적 존재에 대한 두 가지 기술은 서로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 존재의 <있음>은 그 <생성>(生成)에 의해 구성된다. 이것은 <과정의 원리>이다. PR 81.
7) {과정철학}, pp.39-40.
8) <있는 것>의 본성에는 모든 <생성>을 위한 가능성이 속해 있다는 것, 이것 은 <상대성의 원리>principle of relativity이다. PR 80.
9) PR 88.
10) 바둑은 '내적으로' 결정된 바둑판에, '외적으로' 새롭게 흑과 백의 판을 짜 나간다.
11) {과정철학}, p.41.
12) 각 합생에는 창조적 충동creative urge의 이중적인 측면이 있다. 한 측면에는 단순한 인과적 느낌의 발생이 있고, 다른 한 측면에는 개념적 느낌의 발생이 있다. 이 대조되는 이 두 측면은 현실적 존재의 물리적 극physical pole과 정신적 극mental pole이라고 불린다. 이 두 극은 현실적 존재들에 따라 그 상대적인 중요성이 달라지긴 하지만, 어떠한 두 현실적 존재도 이 양극 가운데 어 느 하나를 결여하고 있을 수 없다. ... 따라서 현실적 존재는 본질적으로 양극적인 것으로서, 물리적인 극과 정신적인 극을 가지고 있다. PR 432.
13) {과정철학}, p.47.
14) PR 78.
15) PR 231-32.
16) 생성 과정이 임의의 특정 순간에 순응하고 있는 모든 조건은 그 근거를 합생의 현실세계 속에 있는 어떤 현실적 존재의 성격에 두고 있거나 아니면 합생(合生)의 과정에 있는 그 주체의 성격 속에 두고 있다. PR 24.
17) 오영환 외, {과학과 형이상학} (서울 : 자유사상사, 1991), pp.483-509.
18) {과정철학},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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