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 철학에 있어서 예술비평의 원리에 관한 연구*
강 손 근**
[한글 요약]
이 논문은 플라톤의 문예비판을 예술비평이라는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평가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서 탐색의 성격을 띠고 있다. 따라서 {국가}에 나타난 문예비판과 {이온}에서 가해지고 시인비판을 중심으로 플라톤의 철학에 있어서 예술비평을 원리적인 면에서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
{이온}에서 플라톤은 시인의 음송술을 기술의 보편성과 전문성에 의거하여 비판하면서 영감의 문제를 도입하지만, 비판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역시 테크네 즉 기술의 문제였다. 그리고 영감과 관련하여 해석의 문제가 논의됨으로서 플라톤에 있어서 문예창작의 문제를 원리적인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국가}Ⅹ에서의 문예비판의 원리가 되는 것은 미메시스 즉 모방이지만, 플라톤은 문예비판의 가장 근본적인 규준으로서 קՑՈ՜ՔՇՒ를 제시한다({법률}). 이 קՑՈ՜ՔՇՒ는 미메시스의 원리이자 창작의 지표임을 확인하게 된다.
주제분야 : 플라톤철학.
주 제 어 : 기술, 영감, 해석, 미메시스(ՌԿՌՇՓՉՒ), 오르토테스(קՑՈ՜ՔՇՒ)
Ⅰ. 서언
예술비평에 대한 방법론적 자각 및 목적의식이 철학으로부터 분화되기 이전의 시기에도 예술에 대한 비평적 사유 내지는 활동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철학의 테두리 안에서의 일이기는 했으나, 예술에 대하여 비평적인 사유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던 사람은 플라톤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실제로 미학의 근본이 되는 중요한 문제들에 대하여 그 당시로서는 시대를 앞지르는 통찰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미메시스는 감각하는 주체의 작용으로서 영상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포이에시스(ՐՏԿՇՓՉՒ)'와 관계하여 예술비평의 원리가 되기 때문이다.
예술모방설 및 그것에 의거한 시인추방론 때문에 플라톤은 수세기 동안 매우 호된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시(예술)가 매우 중요한 교육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당시의 그리스적 사정에서 생각해보면, 시가 청소년의 교육에 미칠 도덕적 영향을 우려했던 플라톤의 관점은 그렇게 혹평을 받을 정도로 무리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플라톤 이전에도 헤라클레이토스나 크세노파네스 등이 이미 도덕적 관점에서 호메로스를 비난했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시와 시인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은 오히려 불가피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플라톤이 그의 대화편의 여러 군데에서 언급했던 시를 비롯한 예술에 관한 논의들은 "완전히 이치에 맞는 비평의 한 형식"이라고 인정해도 아무런 지장은 없을 것 같다.
비평을 "구체적인 예술현상을 주제로 하여 거기에서 발견되는 여러 가지 의미를 논하고, 또 작가와 감상자들에게 지침을 주는 활동"이라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 철학에 있어서 문예비판(예술비평)과 그 원리의 위상을 고찰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실제로 플라톤이 "문학과 예술"에 대해 비판할 때, 그는 어떤 관점에서 무엇을 원리로 하여 비판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 플라톤이 예술을 비평할 때 비평의 원리로 삼았던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국가} Ⅱ·Ⅲ·Ⅹ권에 나타난 문예비판과 {이온}에서 가해지고 있는 시인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플라톤은 시를 비롯한 대부분의 예술장르에 해당하는 활동을 미메시스로 규정하고 있다. 특히 {국가} Ⅹ에서는 존재론적으로 최하위에 오는 상을 만들어내는 작용으로서의 미메시스는 포이에시스와 겹쳐서 이른바 시인추방론으로 일컬어지는 문예비판의 원리가 되고 있다.
당시 그리스에는 예술의 모든 범위를 포괄하는 일반적인 개념은 없었으나, 넓은 의미에서 테크네 속에 일군의 예술영역을 포괄하는 것으로 미메시스가 있었다. 본래 이 말은 종교적인 무용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감정의 표출이나 성격의 표현에 역점을 둔 개념으로서의 미메시스가 오늘날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과 같은 모방적 재현의 의미에로 변모하는 것은 플라톤에 있어서다. 그는 비극뿐만 아니라 연기를 수반하지 않는 서사시에도 이 개념을 적용하고, 다시금 회화와 조각까지도 미메시스의 활동으로 파악했다. 이리하여 [미메시스를 취지로 하는 테크네]의 범주 아래에 대부분 예술에 상당하는 영역이 포섭되었다.
고 하는 사정을 생각하면, 플라톤이 미메시스를 예술비판의 원리로 삼고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예술을 미메시스로 파악하는 플라톤의 예술론은 모방설로서 잘 알려져 있다. 예술을 미메시스 즉 모방에 입각하여 비판할 때, 다시 그 모방의 원리적인 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법률}Ⅱ권에서 플라톤은 ԼՑՉՒ, קՑՈ՜ՔՇՒ, ؉եՅ-ՋԿՁ를 모방판정의 세 가지 규준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메시스를 플라톤 철학에 있어서 예술비평의 원리로 볼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이온}에서는 플라톤이 {국가}에서와는 다른 관점에서 시인을 비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이온}에서는 시인과 그의 창작이 영감에 의해 비판을 받고 있다. 이 관점은 {국가}에서 취한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온}에서는 영감과 더불어 해석의 문제도 언급되고 있다.
Ⅱ. {이온}에서의 시인비판과 해석의 문제
1. 시인비판―기술과 영감
고대 그리스에 있어서 문예가 교육(ՐՁՉՄՅԿ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은 대표적인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교육상의 최대 관심사는 시로 구가되고 있는 사항에 대한 충분한 이해력을 함양하는 것에 있다.
사실 호메로스, 헤시오도스, 아이스퀼로스 등의 시인들은 당시 이미 "진리를 말하는" 자로서 철학보다 앞서서 "지식의 아버지, 혼의 교도자"로서의 지위를 파이데이아(ՐՁՉՄՅԿՁ)의 세계에서 확립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사정은 당시 철학 쪽으로부터의 반발을 싸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시와 철학 사이에 오랜 대결상태를 만들었다. {국가} Ⅹ(607d5-6)에서 "철학과 시 사이에는 오래된 일종의 불화(ՄՉՁՖՏՑ֤)가 있었다"고 플라톤 자신이 시인하고 있듯이 {국가}에서의 이른바 그의 시인 추방론도 바로 이러한 대립의 전통에 서 있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파이데이아의 시점으로부터 문예나 음악이 배척당하는 수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분명히 문예일반의 전체적인 부정은 아니고, 애초 파이데이아 그것 자체가 전통적인 교육이나 윤리의 지평을 초극하여 가려고 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폴리스의 논리로서의 일반적인 교육윤리나 소위 예술의 교육적 효과의 관계만을 문예의 유일한 관계로 삼는 것도 경솔한 생각인 것이다. 또한 문예라고 하는 활동영역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바로 창작론이나 해석론에의 길을 막는다고 하는 것으로는 반드시 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
고 하는 입장을 받아들여서, 우선 {이온}에 있어서 시인(음송시인)비판과 거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기술과 영감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온}에서 주제가 되어 있는 것은 시의 음송술(ؙՁեՓمՓՉՊ׃ ՔֲՍՇ)이고, 이 음송술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주장되고 있는 것은 시인의 시작에 있어서나 음송시인의 작품해설에 있어서나 모두가 이성과 기술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적 활동에 있어서 지식이나 기술을 부정하는 쪽에 이 대화편의 주된 논지가 있고, 그것의 부정과 동시에 그것에 시적 영감이 대치되어 있다. 그런데 시적 활동이 기술에 의해서가 아니라 영감에 의해서 가능하다면, 기술과 영감의 대치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문제는 우선 {이온}에서의 기술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면 분명해질 것 같다.
여기서 기술이라 함은 어떤 것을 대상으로 하는 지식이다. {이온}에서 시적 활동의 기술 또는 작품해설술(ՐՏՉՇՔՉՊԾ)이라고 하는 것은 ① 어떤 것에 대한 시인의 말에 대한 해명(ִՎՇբՅՉՓՈՁՉ), 시인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תՔՉ ՋԽբԽՅՉ ՜ ՐՏՉՇՔԾՒ), 결국 시인의 생각(ՄՉՁՃՏԿՁՉ)을 해명하는 것이고, ② 어떤 것에 대하여 시인이 바르게 말하고 있는지(קՑՈՙՒ ՋԽբՅՉՃ),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식별(բՉբՍ՞-ՓՊՅՉՍ, ՄՉՁբՉբՍ՞ՊՅՉՍ), 시구가 교묘하게 말해지고 있는지(ՊՁՋ،Ւ ՋֲբՅՉՍ, Յ ՋԽբՅ-ՉՍ), 그렇지 않은지를 판정(ՊՑԿՍՅՉՍ, ՄՉՁՊՑԿՍՅՉՍ)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①, ②의 능력을 가진 자라고 해서, 그 사람이 작품해설의 능력을 습득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 검토된다. 먼저 ①에 대해서 생각하면, 어떤 것에 대한 기술을 가진 사람은 그 기술의 영역에 속하는 사항을 몇 사람이 말할 때, 그들이 똑같이(ץՌՏԿՙՒ) 말하든지, 다르게(ՄՉՁե՜ՑՙՒ) 말하든지 간에, 그들의 말에 대하여 그 의미를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면 항해술의 영역에 속하는 사항에 대하여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 모두가 말하고 있지만, 전자의 시구를 해명할 수 있는 자는 당연히 후자의 시구에 대해서도 그것을 할 수 있어야만 한다. 더구나 그러한 말에 대한 해명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항해술을 습득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②에 관하여 보면, 어떤 동일한 것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 정당한 논자를 알아내는 사람은 부당한 논자를 알아내는 사람이 아닌가, 즉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은 동일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대상이 되고 있는 영역에 대한 기술을 가진 자가 아닌가 하는 것이 확인된다({이온} 531a-532d).
그런데 이와 같은 기술을 가진 사람은 당연히 ① ②의 능력을 어떤 시인에 대해서도 발휘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논의된다. 따라서 호메로스와 그 밖의 시인들에 관해 한결같이 정통해있지 못하고, 호메로스의 시구에 대해서만 해명 및 시구의 정부를 식별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기술과 지식에 의하여 말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시에 관한 기술은 하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온} 532c). 여기에서 우리는 {이온}에서 행해진 기술에 대한 논의의 핵심을 볼 수가 있다. 넓은 의미의 [시에 관한 기술(ՐՏՉՇՔՉՊԾ)] 즉 음송술에 관한 분석이지만 사실은 그 논의의 배후에 있었던 것은 기술에 대한 하나의 정의를 시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떤 특정한 시인에 대해서만 통용되는 음송술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기술이 보편성을 가진다고 하는 것을 지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의 논의의 골자를 요약하면 기술은 그것이 관여하는 전 대상영역에 관하여 유효하게 기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기술은 보편성을 가진다는 것이다.(532c7-533c3).
논의는 계속해서 각각의 기술은 제각기 다른 특정한 전문영역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다시 말해 기술은 전문성을 가진다고 하는 것을 통해 기술에 대한 두 번째 정의가 시도된다(538a1-7). 예를 들면 의술과 산술은 별개의 기술이고, 그것은 전술의 식별능력·해명능력이 작용하는 대상영역이 별개인 것에 의한다. 따라서 "어떤 하나의 기술에 의하여 식별하는 것을, 다른 기술에 의해서는 식별할 수가 없는"(537d) 것이다. 이것은 {국가}에서 "우리들이 기술들은 각기 다른 것으로서 그 때마다 말하는 것은 물론 그 각각이 다른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346a)라고 하는 언명과 완전히 일치한다. 호메로스의 시 가운데는 여러 가지 사항이 다루어지고, 따라서 여러 가지 기술이 다루어야 할 영역에 언급한 군데가 있지만, 각각의 사항에 대해서는 각각의 영역의 기술을 가진 자가 있는 셈이고, 그들의 시구를 검토할 수가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전문가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음송술에 의해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필연적인 결론으로 도출된다. 이와 같이 보편성과 전문성이라는 기준을 음송술에 적용해보았을 때, 음송술은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기술성이 의심스럽다는 것이 판명된다. 따라서 음송술은 그것이 대상으로 하는 전문영역을 가지고 있는지가 의심스럽게 되고, 음송술이 기술로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되는 것이다. 정리해서 말하면 {이온}에서 논의된 음송시인 이온의 음송술은 이상과 같은 기술의 보편성과 전문성을 모두 결여한 것으로서 판명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플라톤의 문예론은 시인추방론과 등치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상의 것을 토대로 하여 시인의 영감론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문예론은 한편으로는 창작론적 계기를 적어도 창작의 이념적 지표를 분명하게 한다는 형태로 포함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다. 게다가 그 포이에티케(ՐՏՉՇՔՉՊԾ)는 분명히 테크네(ՔԽՍՇ) 내지 에피스테메(ִՐՉՓՔԾՌՇ)로서의 ՐՏՉՇՔՉՊԾ이다. 내용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ՅՑԿ ՐՏՉՇՔՉՊׄ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이러한 해석의 입장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플라톤에 있어서 문예창작(ՐՏԿՇՓՉՒ)의 문제를 원리적인 측면에서 살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플라톤의 철학에 있어서 예술비평의 원리를 살펴볼 수 있는 거점은 확보한 셈이다.
다시 {이온}의 문제로 돌아가서 시적 영감이라는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앞의 기술론의 논의로터 이온의 호메로스의 시에 대한 음송술이 기술과 지식에 의해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판명되는 데서 이온의 호머에 대한 재능은 기술이 아니라 영감, 즉 신적인 힘으로서의 영감에서 유래한다는 것이 주장되는 것이다(533d, 536c,d, 542a). 그리고 이온의 음송술 뿐만 아니라, 걸작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시들도 영감에 의해서 씌어진다고 하는, 즉 시인의 詩作도 기술이 아니라 신적인 힘으로서의 영감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534c, 535c). 이와 같은 일종의 신적 광기라 할 수 있는 엔투시아스모스(ԽՍՈՏՕՓՉՁՓՌ՜Ւ)(533e6-8)야말로 시적 활동에 있어서 불가결의 조건으로 간주되고 있다(533e6-534b).
이 신적 광기라는 개념은 "이성의 부재"(ՍՏՒ Ռ׃ ՐԼՑՅՓՔՉՍ)(534d) 또는 "정기를 가지고"(ֹՌեՑՏՍՅՒ ՍՔՅՒ)(534a)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라든지 또 신이 시인들로부터 "이성을 빼앗는다"(ִՎՁՉՑՏ՝ՌՅՍՏՒ ......ՔשՍ ՍՏՍ)(534c)든지 하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망아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이 의미도 결국은 이성의 상실, 즉 주체의 상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기술을 담당해야 할 주체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임과 동시에 기술의 결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한다.
시인은 가볍고 날개 달린 생물이어서, 영감을 받아 제정신을 잃게 되어 이성이 더 이상 그 속에 남아 있지 않게 될 때까지는 시를 지을 수가 없다(534B3-6)
고 하는 표현에서 우리들은 {이온} 전체의 기조라고 할 수 있는 아이러니컬한 여운을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해 시인의 제정신과 이성을 희생시킨 다음에야 비로소 詩作은 그 원천을 신적인 것에 둘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는 제정신(ֹՌեՙՍՑ), 이성(ՍՏՒ), 기술(ՔԽՍՇ), 지식(ֹՐՉՓՔԾՌՇ)이라는 측면과 광기(ֹՊեՑՙՍ), 神氣(ֹՍՈՅ-ՏՒ ִՍՈՏՕՓՉԼՆՅՉՍ), 신들림(ՊՁՔԽՅՓՈՁՉ, ՊՁՔՏՊՙԾ), 열광(ՂՁՊՅ՝ՅՉՍ), 요약해서 말하면, 신적 은총(ՈՅԿՁ ՌՏזՑՁ), 신적 힘(ՈՅԿՁ Մ՝ՍՌՉՒ)이라는 측면의 대치를 통해서 분명해진다.
그러나 이와 같이 분명해진 신적 광기가 예술의 영역에 도입되면 포이에시스는 테크네 보다는 영감(ՌՁՍԿՁ)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고, 또 ՐՏՉՇՔՉՊԾ는 {변명}, {이온}, {메논}, {파이드로스}에서 전개되었던 플라톤의 예술적 광기(ՌՌՁՍԿՁ, ִՍՈՏՕ-ՓՉԼՌ՜Ւ)의 사상에 의해 가장 본질적인 점에서 그 존재 이유를 박탈당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ՐՏՉՇՔՉՊԾ를 ՔԽՍՇ나 ִՐՉՓՔԾՌՇ의 영역에서 논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앞에서도 플라톤에 있어서 포이에티케는 분명히 테크네 내지는 에피스테메로서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언급했지만, 포이에티케와 테크네 및 에피스테메의 관련은 {소피스트}와 {향연}에 있어서의 언급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소피스트}에서는 도구와 관계되는 기술이나 모방의 기술이나 모방의 기술( ՌՉՌՇՔՉՊԾ) 같은 모든 기술은 만드는(ՐՏՉՅזՍ) 것에 대한 능력을 그 자신 속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기술을 통틀어서 제작술(ՐՏՉՇՔՉՊ׃Ս)로 규정하고 있으며(219a-b), 또 시작에 한정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모방(ՌԿՌՇՓՉՒ)은 제작(ՐՏԿՇ-ՓՉՒ)의 일종"이라고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265b). {향연}에서는 "무엇이든지 없던 것이 있는 것에로 옮아갈 때, 그 원인이 되는 것은 포이에시스(ՐՏԿՇՓՉՒ)이고, 모든 기술의 과정은 제작적이다"(205b-c)라고 하면서, 모든 제작적 활동의 일부분, 즉 음악과 운율에 관계되는 것만을 따로 떼어서, 그것에 그 전체를 포괄하는 이름을 붙이고, 그런 의미에서 포이에시스(ՐՏԿՇՓՉՒ)에 종사하는 사람이 포이에테스(ՐՏԿՇՔԾՒ)로 불린다는 것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205c).
이로써 플라톤의 문예론에 있어서 포이에티케는 테크네 내지는 에피스테메로서의 포이에티케임이 확인됨으로써 또 포이에티케와 미메시스가 의미상으로 서로 겹친다는 것을 추론할 수가 있을 것이다.
2. 해석의 문제
앞에서 살펴본 것은 {이온}에서의 플라톤의 시인비판의 토대에 해당하는 음송술과 관련된 기술론을 중심으로 한 기술과 영감의 문제였다. 바로 그 문제와 관련하여 음송술이 논의되는 곳에서 해석(ֲՑՌՇՍՅԿՁ)의 문제가 제기되는데, 그 부분({이온} 534 e-535a)을 우선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신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훌륭한 시들(Ք֤ ՊՁՋ֤ ՔՁՔՁ ՐՏՉԾՌՁՔՁ)이 인간적이거나 인간의 능력에 의한 것이 절대 아니고 신성하며 신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시는 순전히 신의 통역이고 그 각각에 관련된 것은 모두 신적 힘에게 소유되는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의도했던 것이다. 이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목적으로 충만한 신은 천하디 천한 시의 형태를 빌어 가장 좋은 노래들을 한다.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하고 소크라테스가 이온에게 동의를 구했을 때,
그렇게 생각해요: 소크라테스, 당신의 말은 상당히 감동적이었어요. 그리고 훌륭한 시인들(ՐՏՉՇՔՁԿ)이 이러한 신의 음성을 통역하는 것은 신의 뜻이라는 것을 나는 믿어요.
라고 이온은 동의하였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음송가(ؙՁمՄՏו)는 시인들의 통역(ՐՏՉՇՔ،Ս ֲՑՌՇՍՅ՝ՅՔՅ)이 아니겠나?"라고 하자 이온은 역시 받아들인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그럼 자네는 통역의 통역(ֲՑՌՇՍՇԽՙՍ ֲՑՌՇՍׄՒ)인 셈인가?"라고 하자 이온도 그렇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이온}의 주인공 이온과 더불어 호메로스의 시를 음송하는 음송시인(ؙՁمՄՏԿ)은 [통역의 통역](ֲՑՌՇՍԽՙՍ ֲՑՌՇՍԾՒ)으로 규정된다. 여기서 시인은 단지 통역자(ֲՑՌՇՍՅ՝Ւ)로서의 지위에 머물게 된다. 따라서 그에게는 독자적인 예술적 능력은 인정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시인의 Մ՝ՍՁՌՉՒ로서의 詩法(ՐՏՉՇՔՉ-Պ׃ ՔԽՍՇ)은 인정되지 않는다." 헤르메네이아를 이런 소극적인 입장에서 해석하지 않고, 적극적인 입장에서 플라톤의 예술론을 평가하여 마니아와 엔투시아스모스의 문제를 오히려 시인의 적극적인 본질규정에 언급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견해를 받아들이면, "시인은 보통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신의 말걸기를 알아듣고, 그 神語를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 人語에로 옮기는 통역자"로 해석할 수가 있으므로, "해석(헤르메네이아)이란 초월적인 것을 인간의 말로 옮기는 하강의 고투였으며", "일상성의 피안에 있는 이념적인 것의 구상화의 수속(즉 미메시스 Ռ-ԿՌՇՓՉՒ)으로서, 즉 예술창작 그 자체였다"라고 해석할 수가 있다.
今道友信에 따르면
해석은 폴리스 시대에서는 애초 시인의 창작과정의 정신적인 영위였다. 신의 이데아의 주입을 받은 시인은 그 人語를 초월하는 내용을 우리들에게 이해할 수 있는 한의 말로 통역하는(ֲՑՌՇՍՅ՝ՙ) 것에 의하여 암시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러므로 플라톤은 시인도 대체로 예술적 창작자라고 불러서 ֲՑՌՇՍׄՒ Ք،Ս ՈՅ،Ս(신들의 해석자)이라 하고 있다. 해석이란 초월적인 것을 인어에로 옮기는 하강의 고투였다. 그 하강 조작을 행할 수 있는 시인은 이미 그 영위에 앞서서, 신들과의 향연의 자리에로 초월하기 위해 초대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해석은 일상성의 피안에 있는 이념적인 것의 구상화의 수속으로서, 즉 예술창작 그 자체였다. 작품은 이렇게 하여 우리들에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폴리스의 공동의 대지에 있어서, 그것을 향수하면서 군무의 도취에 있어서 신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는 것도 가능하다. ……그것은 이미 규정적 존재자는 아닌 바의 가능성의 形象이다. 이 가능성으로부터 하나의 현실태를 현상시키는 정신의 반복적 행위, 그것이 없고서는 작품이 그 의미를 나타내지 않고, 작품으로서 완결되지 않는다. 이 작품완결에로의 사고조작이 현대의 해석이다. 이것은 신들의 사상으로부터의 하강적 구상화, 사물화로서의 작품화라고 하는 往古의 해석과는 바로 역으로, 사물로서의 작품의 한 상태로부터, 거기에 잠재하는 예술적 가치의 빛남의 射程의 극점에까지 상승하는 것에 의하여 성립하는 바의 예술화인 것이다. ……해석은 이미 신을 전하는 시인의 業이 아니라, 공작물을 시에로 끌어올리는 향수자의 노력이다. 혹은 시인의 업으로부터 무사이의 경지에 이르려고 하는 등고이다.
이와 같이 헤르메네이아가 神言의 해석이라는 적극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보면, 이 ֲՑՌՇՍՅԿՁ(해석)에 있어서 미메시스는 초월적인 것을 구상화하는 수속으로서 영감과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파악할 수가 있을 것이다..
3. 예술해석으로서의 ֲՑՌՇՍՅԿՁ
이상에서 우리는 {이온}의 헤르메네이아가 神言의 해석이라는 적극적인 의미로 파악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다음으로 "플라톤에 있어서 해석의 존재론적 위치와 방위 및 그 구성계기"를 살펴보기로 한다.
예술작품의 해석을 구체적으로 개별적으로 실행할 때에 해석이라는 기술이 필요하다. 예술비평은 하나의 기술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예컨대 법률을 자세하게 배우더라도 법정에서 소송을 관철한다든지, 변호를 다한다든지 하기 위해서는 아직 불충분하고, 승소에로 이끌기 위해서는 일종의 언론적 기술이 요구된다고 하는 것과 똑같은 사정에 있다. 왜냐하면 조문해석과 그 적용은 바로 경험적 기술에 속하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평가작업은 당연히 비평과 연결되어 있다. 비전문가가 행하는 평가작업은 단순한 경험에 지나지 않지만, 전문가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평가작업은 오직 그 때뿐인 ― 말하자면 단발적인 ― 경험을 초월하고 있다. 즉 기술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비평은 하나의 기술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술비평을 기술이라고 생각하는 관점에서, 플라톤의 {이온}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플라톤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활동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적 해석(연주적 해석과 방위를 하나로 하는)의 존재를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온이 말하는 해설적 해석에 대하여 소크라테스가 정통성 및 정당성을 주장한 음송으로서의 연주적 해석은 궁극적으로는 이데아론이라는 형이상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술창작(시작, 음송)의 원인 및 그 과정과 예술적 가치의 유래를 <자석>(ԬՁբՍׄՔՉՒ ՋԿՈՏՒ)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는 부분({이온} 533c9-535a2)을 검토해보기로 하자.
이온이 호메로스에 관하여 아는 것이 많다는 그 재능은 기술이 아니라 영감에서 비롯하는 것인데, 그것은 일종의 신적인 힘으로서 마치 자석과 같은 것이어서 신들의 통역인 시인은 자석으로서의 신의 자력에 이끌려서 즉 영감으로 채워져서(ִՍՈՏՕՓՉԼՆՏՍՔՅՒ) 노래부르며, 통역의 통역으로서의 음송시인도 시인을 매개로 하여 자력에 의하여 시를 읊고, 청중도 역시 이 자력의 연쇄에 관여하여(ՊՁՔՅ՜-ՌՅՍՏՉ) 예술에 도취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이온} 533c9-535a2). 여기서 자석의 힘에 비유되고 있는 이 예술적 광기의 연쇄는 신들의 ՄՉԼՍՏՉՁ로부터의 수직적 하강으로서 표현되고 있는데, 그것을 역으로 뒤집어 보면, 반대 방향인 수직적 상승으로서의 헤르메네이아의 연쇄라고 생각할 수 있으므로, 시인과 음송시인의 관계는 작곡가와 연주가의 관계로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 비유만으로는 바로 그 연쇄의 맨 끝에 있는 청중(향수체험을 하는 자)의 해석과 신들의 ՄՉԼՍՏՉՁ에로 작품을 매개로 하여 접근하는 해석적 상승의 가능성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청중은 단지 무우사(ԬՏՓՁ)여신의 힘에 이끌리는 것만으로는 해석자로서의 기능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오히려 무사 여신한테서 오는 예술적 광기 속에서, 해석의 중요한 계기라 할 수 있는 ՊՑԿՓՉՒ 즉 예술체험을 쌓고 또 깊이 생각함으로써 정말로 아름다운 것 선한 것을 가려내는(ՄՉՁՊՑԿՍՅՉՍ)({이온} 539e4.) ՍՏՒ의 구조를 상실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음송시인에게 연주가로서의 자격이 요구되는 것처럼 여기서 말하는 해석자에게도 마땅한 Մ՝ՍՁՌՉՒ가 요구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하나의 중요한 물음이 제기된다. 해석의 중요한 계기로서의 ՊՑԿՓՉՒ를 미적 판단으로 볼 수 있다면, 이 ՊՑԿՓՉՒ는 어디에 어떤 근거로 성립하는가를 묻는 것에 의해 플라톤적 해석은 개개의 인간에게 ՊՑԿՓՉՒ의 척도를 인정하여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소피스트적 해석과 결정적으로 갈라진다는 것이 藤田一美의 주장이다. 그는 그러한 논거를 로스스가 아니라 뮤토스의 영역에서(더 정확하게는 뮤톨로기아), {심포지움}의 디오티마의 말인 사랑(ֹՑՙՒ)을 전거로 하여 찾는다.
디오티마에 의하면, 사랑은 영원히 단일의 모습 즉 불변의 자기동일을 가지고 항존하며({심포지움} 211b1-2), 그 밖의 모든 아름다운 것의 근거가 되는 미(Քש ՊՁ-Ջ՜Ս)에로의 열렬한 동경을 가지는 애미자(ՖՋ՜ՊՁՋՏՒ)의 파토스(ՐԼՈՏՒ)이다. 그리고 애지적 활동(ՖՉՋ՜ՓՏՖԿՁ)의 대상인 지식(ՓՏՖԿՁ)은 가장 아름다운 것이므로, 사랑을 뛰어난 애지자 즉 철학자(ՖՉՋ՜ՓՏՖՏՒ)의 파토스로 보는데는 큰 어려움은 없을 것 같다.그것은 {파이드로스}를 읽어도 분명하다.
ՖՉՋ՜ՊՁՋՏՒ로서의 ՖՉՋ՜ՓՏՖՏՒ는 지상의 여러 가지 아름다운 것으로부터 근거로서의 미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인데, 그것은 이 세상의 개개의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출발하여, 저 아름다움을 향하여 위로 올라가되 마치 사다리를 올라가듯이 하나의 아름다운 육체로부터 두 개의 아름다운 육체로, 또 그 둘로부터 모든 아름다운 육체로 나아가고, 아름다운 육체로부터 아름다운 일과 활동에로 나아가며 활동에서 아름다운 지식 내지 학문에로 나아가서, 마지막으로 저 아름다움 자체만을 알게 되는 완전한 학문에로 나아가, 마침내 미 그 자체를 알게 되는 과정이다({향연} 211c6-9).
藤田一美에 따르면 이 미의 이데아에로의 등고의 두 번째 계단인 아름다운 영위에는 예술활동이나 예술체험이 포함되고, 거기에 {이온}에 있어서 신들의 디아노이아(ՄՈԼՍՏՉՁ)에 照應하는 미의 이데아에로 향하는 로고스에 의한 예술해석의 존재론적 위치와 방위(多로부터 一에로의 수직적 지향성)가 정립된다.
{이온}의 비유와 디오티마의 뮤토로기아(ՕՈՏՋՏբԿՁ)와의 관련은, {파이드로스}에서 ՖՉՋ՜ՓՏՖՏՒ의 ՐԼՈՏՒ로서의 ֹՑՙՒ(즉 ִՑՙՔՉՊՏՍ ՐԼՈՏՒ)는({파이드로스} 265b6) ִՍՈՏՕՓՉՁՓՌ՜Ւ와 똑같이 신의 賜物(ՈՅוՁ Մ՜ՓՉՒ, ՈՅוՁ ՌՏזՑՁ)로서의 ՈՅוՁ ՌՁՍԿՁ라고 규정되는 것에 의해서도 보증된다. 그리고 이 ՈՅוՁ ՌՏזՑՁ로서의 ՖՉՋ՜Փ՜ՖՏՕ ՌՁՍԿՁ(ִՑՙՔՉՊ׃ ՌՁՍԿՁ라고도 말해지고 있다)는 바로 ՔԽՍՇ의 하나의 본령인ՊՑԿՓՉՒ의 계기를 가지는 것에 의하여 단순한 예술적 도취를 초극한다. 즉 그것은 미의 근거에 대한 사색( ՋՏբՉՓՌ՜Ւ ՁדՔԿՁՒ)으로서의 ՖՉՋՏՓՏՖԿՁ와 자신을 인도한다. 덧붙여서 말하면 ֹՑՙՒ신(ֺՑՙՒ)은 다이몬(神靈)으로서 직접으로는 회화할 수 없는 신과 인간의 중개자 즉 해석자(ֲՑՌՇՍՅ՝Ւ)이고, 말하는 것( ՋԽբՅՉՍ)과 언어(Ջ՜բՏՒ)의 고안자였다. 이 중간자적 존재(ՌՅՔՁՎ՝) ֺՑՙՒ에 대한 규정은 ՈՅԿՁ ՌՁՍԿՁ로서의 ֹՑՙՒ를 자신의 ՐԼՈՏՒ로서 일상적인 Ք՜ՐՏՒ를 초월하여 자신을 중간자로 화하게 하여 [할 수 있는 한 신과 닮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삼는ՖՉՋ՜ՓՏՖՏՒ에 대해서도 mutatis mutandis에 타당한다. 즉 ՖՉՋ՜ՓՏՖՏՒ도 철저히 Ջ՜բՏՒ에 관계하는 것으로서 헤르메스적인 해석자의 성격을 一面에서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논거를 토대로 하여 {이온}의 비유에는 작품을 발판으로 하여 시인의 ՄՉԼՍՏՉՁ 다시금 신들의 ՄՉԼՍՏՉՁ에로 한없이 접근하려고 하는 ՖՉՋ՜ՓՏՖՏՒ의 해석적 상승의 가능성을 도출해내면서, 이 플라톤적 ֲՑՌՇՍՅԿՁ와 소피스트적 ֲՑՌՇՍՅԿՁ의 상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소피스트적 ֲՑՌՇՍՅԿՁ가 예술작품을 자기의 활동의 장으로 삼으면서도, 그 목적을 <ՐՅՑו צՌԾՑՏՕ(ՐՏՉՇՔՏ, ִՐ،Ս) ՄՅՉՍשՍ ՅסՍՁՉ>로 삼는 것에 대하여, 플라톤적 ֲՑՌՇՍՅԿՁ는 "작품을 발판으로 하여 해석하는 정신 자체가, 점차로 물질적인 영역을 초월하여, 정신적인 가치에로 나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예술해석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예술학적 또는 역사학적 영역을 넘어서 인식론 및 단적으로 이데아론으로서 나타나는 독자적인 존재론, 형이상학적 영역에 봉착한다. 바꿔 말하면 예술해석의 문제는 그 철학체계에 정위된다.
이러한 해석의 구성계기를 고찰하기 위하여, 시험삼아 플라톤에 있어서 ֲՑՌՇՍՅ-ԿՁ의 용례를 살펴보면, 이미 말했던 용례 이외에 異國語의 번역, 다이몬에 의한 神言의 인어에로의 번역, 감각적 지각(ՁיՓՈՇՓՉՒ)이 지각된 것(ՁיՓՈՇՔՁ)을 혼( ՕԾ)에 전달하는 것, 논의(Ջ՜բՏՒ)의 논리적인 연관의 해명, 법률의 해설, 사유내용의 언어화 등의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상의 용례로부터 판명되는 것처럼 ֲՑՌՇՍՅ՝Ւ는 어떠한 의미에서의 異質의 차원을 중개하는 자이고, 그 권능으로서 만약 二分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면, 자신이 상관자가 되는 해석대상의 眞相(֤ՋԾՈՅՉՁ)의 파악(ִՍՍՏՅזՍ, ՅԿՄԽՍՁՉ)과 心中에 파악된 것(ֹՍՄՅՉՎՉՒ)의 주로 언어(Ջ՜բՏՒ)를 매체로 하는 표현(ֶՍՄՅԿՊՍՕՓՈՉ)을 ֲՑՌՇՍՅԿՁ의 본질적 계기로서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두 계기는 바꿔 말하면 철학의 본질에 접촉하는 문제로 되고 해석자는 궁극적으로는 철학자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소크라테스가 이온에게 호메로스의 ՄՉԼՍՏՉՁ의 철저한 연구를 요구했던 것은 그의 ؙՁՙՄՉՊ׃ ՔԽՍՇ에로의, 따라서 또 그것이 의거하는 ؙՇՔՏՑՉՊԾ에의 비판의 발단이었지만, 그것은 바로 대상파악(인식)의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덧붙여서 말하면 ؙՇՔՏՑՉՊԾ는 대상의 진상(Քש ԼՋՇՈԽՒ)나 본성(՝ՓՉՒ)을 파악하는 방법으로서의 변증법(ՄՉՁՋՅՊՔՉՊԾ)을 결하기 때문에, "학문 이전의 예비적 지식(Ք֤ ՐՑש ՔׄՒ ՔԽՍՇՒ ֢ՍՁբՊՁזՁ ՌՁՈԾ-ՌՁՔՁ)"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소피스트도 이온도 다같이 훌륭하게 하는 것(ՊՁՋ-،Ւ ՋԽբՅՉՍ)>을 자기의 기술(테크네)의 증거로서 표방하는 자였지만, 플라톤에 따르면, "철저히 진실을 추구하지 않으면 또 무슨 일에 대해서도 충분히 말하는 자로 될 수는 결코 없기" 때문이다. …… 인식과 표현을 두 계기로 하는 해석은 이와 같은 방법론적 자각을, 특히 플라톤에서는 인식론적 자각을 결하는 것을 허용받지 않는다. 해석자에게 철학적 자질이 요구되는 까닭이다. 이 해석의 두 계기를 염두에 두고, 플라톤적 해석은 작품을 장으로 하는 정신의 가치에로의 遭遇(inventio)의 체험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가치 즉 존재 그 자체(ՍՔՙՒ Ս)로서의 미가 하나의 구체적 형상으로서의 작품을 예술이게 하는 근거로서 밝혀지게 되는 것이다. ֲՑՌՇՍՅՕՒ(해석자)가 통역으로 번역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상의 인용을 통해서 플라톤에 있어서 해석의 존재론적 위치와 방위 및 그 구성계기를 살펴보았다.
Ⅲ. ՌԿՌՇՓՉՒ의 원리로서의 קՑՈ՜ՔՇՒ
{국가} Ⅹ에서, 존재론적으로 세 번째의 가장 낮은 단계에 위치하는 산물을 만들어내는 작용인 미메시스는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ՐՏԿՇՓՉՒ(창작)와 겹쳐서 시인추방론을 전개하는 근거가 된다. 그런데 모방은 일반적으로 어떤 대상에 대한 모방이다. 다시 말해서 모방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원상으로서의 모방대상이 전제되지 않을 수 없다. 플라톤에 의하면 시인은 "허구적인 설화(ՌՈՏՒ)를 구성해서 사람들에게 들려주는"({국가} Ⅱ 377d) 존재로 규정되고, 시인은 예를 들어 ՍՏՇՔ՜Ս에 속하는 덕 그 자체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덕을 분유한 인물 내지 행위의 특정한 국면을, 특정한 시점으로부터, 어떤 한정된 시간의 틀 안에서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회화와 마찬가지로 역시 본성으로부터 세 번째인 작품, 즉 모방으로 생각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시가 모방으로 규정되는 이상 당연히 시는 모방작품(Քש ՇԿՌՇՌՁ)으로서 모방대상(Քש ՌՉՌՇՈԽՍ)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시가 도덕적 배려 아래에서 향수자의 혼 속에 선한 성격을 만들어내어야 한다면, 필연적으로 모방대상도 그것에 대응할 만큼 뛰어난 특성을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가 선한 것을 모방대상으로서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그 대상을 모방한 완성된 작품이 곧 훌륭한 작품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을 것이다. 즉 모방대상이 지니고 있는 가치가 그대로 모방작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필수적인 제약으로서 생각되는 것이 다름 아닌 모방작품이 그 모델이 되는 모방대상을 진실하게 또는 정확하게 표현하는 문제, 즉 원상과 모상 사이에 성립해야 할 동일성 또는 유사성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플라톤은 문예비판의 가장 근본적인 규준으로서 קՑՈ՜ՔՇՒ(진실성 또는 정확성)를 제시하고 있다({법률} Ⅱ. 667b-668b). 문예가 일종의 모방술(ՌՉՌՇՔՉՊԾ) 내지는 영상제작술(ՅדՊՁՓՔՉՊԾ)로서 규정되었던 당시에는 작품에 묘사된 것과 같은 원물로서의 대상 사이에 성립하는 유사성(ץՌՏՉ՜ՔՇՒ)의 문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했을 것이다. 이 영상제작술에 있어서 קՑՈ՜ՔՇՒ란 모상이 성질과 분량에 있어서 그 대상과 같음(דՓ՜ՔՇՒ)을 의미한다({법률}Ⅱ 667d 6). 그러나 플라톤은 {법률}Ⅱ(670b-c)에서 문예에 대해서는 Քש ֢ՋՇՈԽՒ와 ץՌՏՉ՜ՔՇՒ라는 말 이외에 ՐՑՏՓԾՊՅՉՍ이라는 말을 중심으로 하여 ק-ՑՈ՜ՔՇՒ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Քש ՌՉՌՇՈԽՍ에 본래 속해야 할 성격을 그대로 Քש ՌԿՌՇՌՁ에 부여하여 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법률}Ⅱ. 669b-670Aa에서 언급되는 קՑՈ՜ՔՇՒ의 반대인 ֠ՌՁՑՔԿՁ(잘못)의 구체적인 예들을 보아도 분명하다. 플라톤은 {크라틸로스}(Kratylos) 430c에서도 Քש ՐՑՏՓ-ԾՊՅՉՍ Քש ՌՏՉՃ이라는 같은 말을 사용하여 영상제작의 קՑՈ՜ՔՇՒ에 관해 설명하는 것을 보아도, 그것들은 קՑՈ՜ՔՇՒ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임을 확인할 수 있다.
플라톤에 의하면, 문예작품을 판정할 때 그 작품의 קՑՈ՜ՔՇՒ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모방된 대상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이 קՑՈ՜ՔՇՒ를 알아야 비로소 작품이 작품으로서 뛰어난 것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할 수가 있다. 따라서 문예를 올바르게 비판하려고 하는 자는, 첫째로 무엇을 모방하였는가, 둘째로 어느 정도로 올바르게 모방했는가, 셋째로 모방이 어느 정도 뛰어나 있는가 하는 세 가지 요소를 식별하여 판단을 내려야 한다({법률}Ⅱ 668b-669b). 여기에서 모방판정의 세 번째 기준인 '작품이 우수한(ՊՁՋ՜Ւ Յ)지 어떤지' 하는 것은 문예작품에 대한 궁극적인 가치판단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그것의 의미를 굳이 '미적'과 '도덕적', '형식'과 '내용'을 구별해서 특별히 한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법률} Ⅱ. 668a-b에 따르면, 예술(ՌՏՕՓՉՊԾ)은 모방의 기술이고, 그 모방의 올바름(קՑՈ՜ՔՇՒ)이란 모방된 원상 본래의 양과 질이 그대로 재현되었을 때, 거기에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קՑՈ՜ՔՇՒ는 전체로서는 미의 원상과의 유사성(668b 2)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국가} 393b1-394c 5에서 표현형식으로서의 모방(ՌԿՌՇՓՉՒ)과 서술(֢ՐՁբբՅՋԿՁ)을 구별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ՌՏՕՓՉՊԾ가 전체로서는 ՌԿՌՇՓՉՒ라고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ՌԿՌՇՓՉՒ의 원리로서의 קՑՈ՜ՔՇՒ가 갖는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여기에서 ՌԿՌՇՓՉՒ의 의미를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미메시스는 플라톤에 있어서 적어도 광협 두 가지 의미로 파악된다({국가} Ⅲ 393b11-394c5). 하나는 협의의 미메시스로서 ֢ՐՁբբՅՋԿՁ(이야기로서의 객관적 묘사)에 대비시켜지는 것이고, 마치 작자 자신이 여러 가지 등장인물로 완전히 되어버리는 것과 같은 표현형식(impersonation)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이 수법은 행위자에 의한 행위의 모방적 재현으로서의 비극이나 희극에 전체적으로 쓰여지고, 서사시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형식이 병용된다. 그러므로 협의의 ՌԿՌՇՓՉՒ는 문예로서의 ՌՏՕՓՉՊԾ에만 적용되는 고유한 개념이다. 다른 하나는 광의의 ՌԿՌՇՓՉՒ로서, 그것은 근대의 예술이념인 expressio(표출)과 대비되는 것으로, 어떤 대상을 모방하면서 표출하는 것 즉 재현(repraesentatio)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재현이란 이미 어떤 형태로서의 실재성(realitas)을 가지는 것을, 매체를 통해서 異質의 내지는 異相의 실재의 토포스에로 自己轉位시키는 것이고, 따라서 전체로서는 Քש ՔՏ ՊՁՋՏ ՌԿՌՇՌՁ로서 규정되는 예술작품은 자신 속에 또 ՌԿՌՇՌՁ ՐՁՑՁՄ-ՅԿբՌՁՔՏՒ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재현이라고는 해도 모방의 대상의 존재의 위상에 따라서는 그 동일성이 단적으로 양해되지 않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고, 흉내내다 또는 비슷하게 하다라고 하는 매우 일상적인 구체성을 띤 ՌԿՌՇՓՉՒ의 原義가 타당성을 잃는 일이 있다. 따라서 ՌԿՌՇՓՉՒ에 있어서든 그 원리로서의 קՑՈ՜ՔՇՒ에 있어서든 매우 이념적 형이상학적인 색채를 내포하는데다가 플라톤 자신이 의식적으로 이 두 개념의 진폭의 크기를 활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므로, 플라톤의 문예창작의 원리를 그대로 ՌԿՌՇՓՉՒ의 원리로서 고찰할 수 있는 여지는 생기는 것이다.
본래 미메시스로서의 문예의 판정규정인 קՑՈ՜ՔՇՒ는 어떻게 해서 문예창작의 원리가 될 수 있는 것일까? {국가} Ⅹ에서의 문예의 성격규정과 관련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 사물의 본질 또는 진실(ՍՏՇՔ՜Ս으로서의 이데아), ⒝ 그 이데아를 분유한(Ռ-ՅՔԽՊՅՉՍ) 감각적 사물, 즉 모방대상(Քש ՌՉՌՇՈԽՍ), ⒞ 문예작품 속에 묘사되는 ⒝의 모상이 각각 구별되고, 그러한 서열이 반드시 부당하지 않다고 하면, ⒞의 문예작품의 קՑՈ՜ՔՇՒ란 결국 직접적으로는 ⒝에 대한 충실성에 의해 성립하고, 그 충실성을 매개로 해서 간접적으로 ⒜에 대한 올바름이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의 ⒝에 대한 올바름은 ⒝에 관한 주관적 감각상을 작품 속에 충실하게 재현하는 기교적 측면을 빼고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 주관적 감각상이 ⒝를 잘 모방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모방할 것인가 하는 의도를 명확하게 하고, 또한 그 모방대상에 본래 어떠한 성격이 갖추어져 있는가에 대한 통찰도 불가결하다. 이 통찰은 당연히 ⒜의 탐구와 식견을 기다려야만 심화될 수 있는 것이므로, ⒞의 ⒝에 대한 충실성의 요청의 철저화는 ⒞의 ⒜에 대한 충실성 ― ⒜를 얼마만큼 분유하고, 그것을 실현하고 있는가 라고 하는 의미에서의 ― 에 대한 통찰을 매개로 하여, ⒜ 그 자체의 탐구와 인식도 적지 않게 요청되는 것이다. 다만 모방의 올바름이란 본래 모방판정의 한 기준이므로, 시작의 장면에 있어서는 적어도 그 필요성이 명확하게는 문제되지 않는다고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시가 모방으로 규정되고, 모방이 '무엇에 대한' 모방인 한, 모상의 원상에 대한 충실성으로서의 올바름이 우선적으로 요청되는 것도 이론적으로는 필연이다. 그러므로 그 올바름을 추구하려는 노력은 모방작품의 판정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시인에게 있어서도 그것을 자기의 창작원리로 삼는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ՌԿՌՇՉՒ의 원리로서의 קՑՈ՜ՔՇՒ는 第一義的으로 시적 인식의 지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קՑՈ՜ՔՇՒ의 의미를 다시 규정하면 다음과 같다.
第一義적으로 시적 인식에 있어서 실존해석 내지 대상파악의 올바름이고, 궁극적으로는 근거(아이테이아), 본질(퓨시스), 범형(파라데이그마)으로서의 이데아적 세계와의 올바른(קՑՈ՜Ւ) 관계에 서는 것이다.
둘째로는 물론 파악된 것의 그것에 適應하는 표출(praesentatio)의 정확함이고, 그것은 형상적 측면에 머물지 않고, 부분과 전체 혹은 부분 상호의 적합성(Քש ՐՑԽ-ՐՏՍ)이나 조화(֠ՑՌՏՍԿՁ) 혹은 措辭(ؙׄՌՁ), 선율(ՌԽՋՏՒ), 율동(ԁՑՕՈՌ՜Ւ), 운률(ՌԽ-ՔՑՏՍ) 등 표현형식의 정확함까지도 의미하고 있다. 즉 קՑՈ՜ՔՇՒ는 존재론으로부터 기법론에 미치는 창작의 지표인 것이다.
극히 원리적으로 말하면, 미메시스로서의 문예는 이러한 קՑՈ՜ՔՇՒ를 창작의 지표로서, 그 속에 여려 가지의 ՌԿՌՇՌՁ를 가지는 작품을 마치 하나의 像으로서 彫琢하고, 전체로서는 美의 이데아의 모방으로 불리우는 데에 적응하는 것으로서 일을 끝내지 않으면 안 된다.
Ⅴ. 결 언
이제까지 앞에서 서술해온 것은 {국가}에 나타난 문예비판과 {이온}에서 가해지고 있는 시인비판을 중심으로 플라톤의 철학에 있어서 예술비평의 원리를 살펴본 것이다.
플라톤은 기술의 보편성과 전문성이라는 관점에서 시인의 활동을 검토함으로써 시인의 활동이 기술과 지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주장하고 시인의 활동의 근거를 신적인 영감에서 찾는다. 음송시인 이온의 재능에 대한 비판의 과정에 영감이 도입됨으로써 {국가}에서의 미메시스에 의한 시인비판과 이 영감에 의한 시인비판 사이에는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플라톤의 철학의 근본적인 입장에서 볼 때는 플라톤이 시인에 대해 어느 정도 일관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문예론이 한편으로는 창작론적 계기를 포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온}의 영감론은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온}에서 논의되는 해석의 문제는 예술창작의 문제를 원리적인 측면에서 파악할 수 여지를 내포하고 있다는 보여주고 있다. 영감과 모방에 각각 근거를 두고 있는 시인에 대한 플라톤의 두 가지 관점은 여기서 예술비평의 원리로서의 미메시스에로 포괄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다.
따라서 플라톤 철학에 있어서 창작과 작품과 감상자라고 하는 예술의 존재방식 전체를 포괄하는 관점에서 예술비평을 문제 삼는다면 플라톤은 미에시스를 예술비평의 주된 원리로 삼고 있다는 것을 위의 고찰에서 확인할 수가 있었다. 여기서 관심을 끄는 것이 다름아닌 {법률}에서 제시되고 있는 모방판정의 규준으로서의 קՑՈ՜ՔՇՒ(올바름)가 미메시스의 원리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의 고찰은 플라톤을 예술비평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보기 위한 탐색작업으로서 藤田一美씨의 앞서 언급한 두 논문에 의거하여 구성해 본 것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본론에서의 관점이나 주장은 그로부터 차용한 것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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