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편에서 로고스와 형상 - で꿈と이야기의 내용을 중심으로 강 철 웅 서울대 철학 1. 머리말 전해지는 플라톤의 대화편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분석적이고 체계적인 논의를 담고 있는 [테아이테토스]편은 ぢ앎(epistēmē)이란 무엇인가?っ를 주제로 하여 소크라테스의 대화상대자인 젊은 수학자 테아이테토스가 앎의 정의로 될 만한 것들을 제안하면 가능한 한 그 의미를 살려주거나 기존의 영향력있는 교설들과도 연관시켜서 그것들이 담고 있는 함축들을 살펴본 후에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디알렉티케(변증술)의 전형적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플라톤이 이전 대화편들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고 생각되는 앎의 で전통적と 정의(즉 로고스를 가진 참된 doxa)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며 결국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별다른 긍정적 결과 없이 아포리아로 대화편을 마감하고 있다는 점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며, 이 글은 이 아포리아에 대한 해명을 시도한다. 따라서 이 아포리아 바로 앞에 위치하면서 아포리아를 유발하는 주된 계기가 되는 소크라테스의 で꿈と이야기에 대한 해석상의 여러 문제들이 이 글의 주된 검토대상이다. 이 대화편의 아포리아적 종결에 대해 제기된 여러 해석들은 모두 이 대화편이 이전 대화편들과 달리 형상에 대한 명시적 언급을 하고 있지 않은 이유에 대한 나름의 대답들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이 물음에 대한 가장 간단한 대답은 형상의 문제가 이 대화편의 논의와 별 상관이 없기 때문에 언급되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대답은 앎이 무엇인가의 탐구에 있어 그 대상으로 대답하는 것은 적절한 대답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플라톤이 이전 대화편들에서 doxa와 앎을 나누면서 그 차이를 대상의 차이(감각대상과 사유대상)로 그리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앎에 대한 이 대화편의 논의가 이전의 이런 생각들과 무관하게 전개될 수는 없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예컨대 총은 아무 것도 겨냥하지 않아도 총일 수 있으므로 그 지향대상에 대한 언급없이 그것을 규정할 수 있지만, 무엇에 대한 앎(tinos epistēmē)이 아닌 앎은 도대체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대상으로 대답하는 것도 앎의 본성에 관한 질문에 유의미한 대답일 수 있다는 생각도 그럴듯하다. 따라서 위의 대답은 형상이 주제적으로 부각되고 있지 않다는 표면적 현상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과연 형상에 대해서 플라톤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기에 그것이 앎의 논의의 전면에 나타나 있지 않은가라는 정당한 질문을 봉쇄하는 것이다. 이제 이 문제에 대해 일단의 해석가들은 형상론이 대화편 이면으로 잠복한 것은 형상을 끌어들이지 않고 하는 앎의 논의가 성공적일 수 없음을 보임으로써 형상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플라톤 자신의 극적인 구성이라고 보는 반면, 이에 반대하는 다른 해석가들은 플라톤이 이 대화편에서 명제적 앎을 주된 고찰의 대상으로 삼고 정의하려 했으므로 형상론에 대한 이전의 긍정적 태도를 버렸거나 무시하고 있다고 본다. 이 글은 대립되는 이 두 입장이 나름대로 강한 입지점을 갖고는 있으나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저자의 의도를 축소하거나 지나치게 자유롭게 저자의 의도를 확장함으로써 해석상의 무리를 수반한다는 판단아래, 두 입장이 안고 있는 난점들을 해소 내지 극복하면서 이 대화편을 온전히 일관되게 읽어낼 수 있는 해석의 입장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런 목적을 위해 이후 이 글은 이 대화편의 전체논의를 텍스트 순서 및 내용상 구분점에 따라 정리하고(제2장), 이 대화편의 해석사를 필자 나름의 시각으로 분류, 정리하며(제3장), 1, 2부의 핵심적 논변의 분석과 더불어, 제3부의 소크라테스의 で꿈と이야기 해석의 문제를 중심으로 기존해석들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필자의 해석을 제시한 후(제4장), 논의를 정리, 반성하는(제5장) 순서로 진행될 것이다. 2. 앎에 대해 제안된 세개의 정의 2.1. 앎의 정의문제의 제기(도입부: 143d-151d) 젊은이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는 소크라테스에게 테오도로스가 장황한 칭찬과 함께 테아이테토스를 소개하며, 이 젊은이의 자질을 확인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포리아를 느끼는 で하나의 작은と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여 함께 살펴보자고 제안한다(145d-e): 배우는 것은 배움의 대상에 관해 보다 지혜로워지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들은 지혜에 의해 지혜롭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아는 것들에 있어서 지혜롭기도 하다. 그러므로 앎과 지혜(sophia)는 같은 것이다. 바로 이 결론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난감해하고(aporō) 있는데, 그 이유는 앎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충분히(hikanōs)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데 있다. 즉 ぢ앎이 곧 지혜다っ라고 말하는 것은 단지 동의어를 제시하는 것일 뿐 앎의 정의로서 적당치 못하다는 것이다. 계속되는 재촉에 못이긴 테아이테토스가 드디어 앎의 정의로 생각되는 것을 내놓는데,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 산수학 등 테오도로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들과 구두 만드는 기술을 비롯한 여타 제작인들의 기술들 모두와 각각이 앎이라는 것이다. 이 정의는 소크라테스에 의해 곧바로 기각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정의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 요건조차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즉 앎을 でtinos(누구의 혹은 무엇에 대한) 앎と으로 정의하는 것은 피정의항이 정의항 속에 다시 등장함으로써 정의의 형식적 요건을 위반하고 있으며, 앎 자체(epistēmē auto)에 대한, 간단한 말로 된 경계확정(dihorizein)이 아닌 그 사례들의 열거로 대답하려 함으로써 끝이 없는 길(aperantos hodos)을 우회하고 있다는 것이다. 2.2. 지각으로서의 앎(제1부: 151d-186e) 이 문제가 사실은 で작은と 것이 아니라 で아주 어려운 것들에 속하는と 문제이므로 앎들을 하나의 로고스(정의)로 부르기를 시도해보라는 소크라테스의 격려를 받은 테아이테토스가 드디어 정의의 요건을 만족시키는 대답을 내놓기 시작하는데 그 첫번째 것은 ぢ지각(aisthēsis)이 앎っ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테제가 프로타고라스의 인간만물척도설과 같은 주장을 하는 것으로 간주하며, 이를 다시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설과도 연결지어 총체적인 비판을 시도한다. 즉 프로타고라스의 인간만물척도설(152a2-4)을 플라톤은 ぢ인간 각자에게 나타나는(phainetai) 그대로 각자에게 있다っ로 해석하고(152a ff.), 다시 で나타남と을 で지각と과 동일시하여, ぢ각자가 지각하는 그대로 그에게 있다っ는 주장으로 이해한다. 또한 이 테제는 일종의 秘義 형태로 ぢ어떤 것도 그자체 그자체에 즉하여(auto kath' hauto) 하나가 아니며 で무엇と(ti) 혹은 で어떠어떠한 무엇と(hopoionoun ti)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가 で있다と고 말하는 모든 것은 사실 생성하고 있는 것이다っ(152d2-e1)라는 가르침으로 간주되어 헤라클레이토스 등의 만물유전설과 연결된다. ぢ각자에게 나타나는(즉 각자가 지각하는) 그대로 각자에게 있다っ는 프로타고라스의 교설은 헤라클레이토스의 교설과 만나서 ぢ각자가 지각하는 그대로 각자에게 생겨난다っ는 주장이 된다는 것이다. 이 두 교설은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대상 쪽에도 주체 쪽에도 귀속되지 않고, 운동하는 양자가 서로 만날 때 지각자에게 고유하게(idion) 생겨나는, 양자 사이의 어떤 것(metaxy ti)이라는 지각이론을 공유한다고 간주된다. 이렇게 첫번째 테제가 당대의 영향력 있는 교설들과 연관됨을 밝힌 후 소크라테스는 먼저 프로타고라스의 테제를 비판한다. 1, 2차 반박(161b-162d, 163a-164b)은 주로 사람에의 논증이나 귀류법적 형태(peritropē)로 전개되며, 이 과정에서 플라톤은 (반박)논변은 설득술(pithanologia)과 그럴듯함(to eikos)이 아닌, 논증(apodeixis)과 필연성(anangkē)에 호소해야 한다(162d-163a)는 방법론적 반성을 덧붙인다. 이 반박에 대한 프로타고라스 측에서의 재반론과정에서 그의 테제는 doxa의 영역에까지 확장되고(170a3-4), 테제는 지각영역에서의 상대성의 인정일 뿐, 좋음이나 유익함의 문제에 있어서는 전문가가 따로 있다(171d-172b)는 주장으로 정리된다. 이어 철학자와 연설가를 대비하는 여담(172c-177c)이 다소 장황하게 이야기된 후, 소크라테스는 테제의 치명적인 약점인 で미래의 일と(to mellon)을 논의에 끌어들여 적어도 미래의 일에 대해서는 더 현명한 사람이 있고 그가 척도라고 비판한다(177c-179b). 이 강력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난공불락으로 남아있는 각자의 겪음(pathos)의 확실성에 대해 따져보기 위해 で流動하는 존재と(pheromenē ousia)를 내세우는 헤라클레이토스주의의 비판(181b-183c)으로 넘어가는데, 유전론자들은 그들의 전제(hypothesis)에 맞는 적극적인 표현들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들에게는 で도대체 그러하지 않다と(oud' houtōs)는 절대부정적인 표현만이 적합하여 철학적 논의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비판된다. 이상의 논의로써 헤라클레이토스 이론이 논박되고 프로타고라스 테제가 약화된 후, 지각작용의 통일된 주체로서의 영혼의 도입논변(184b-e)과 영혼이 육체의 능력들을 통해 지각하는 대상(즉 감각질)과 구분되는, 영혼 자신이 자신을 통해 숙고하는 で공통된 것と(koina)의 도입(184e-186e)논변을 통해 테아이테토스의 테제 자체가 비판적 고찰과정을 거쳐 기각된다. 이 논변들의 결과로서, 앎은 직접적인 겪음들(pathēmata) 속에 있지 않고 그것들에 대한 -우시아(실재)와 유익함에 관련된- 추론(analogismata; syllogismos) 속에 있음이 밝혀진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실재와 진리를 포착할(hapsasthai) 수 있지만 겪음 속에서는 불가능하므로. 따라서 지각과 앎은 같은 것이 아니다. 2.3. 참된 doxa로서의 앎(제2부: 187a-201c) 이제 앎은 지각과 같은 것이 아님이 밝혀졌으므로, 우리는 앎을 지각에서가 아니라 영혼 자신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들에 관해 전념할 때 가지는 그 무엇에서 찾아야 한다. 이것을 테아이테토스는 でdoxazeinと(판단함, 믿음, 생각함 혹은 의견을 가짐 등등)이라 부르며, 다시 이 doxa는 두 종류 즉 참된 것과 거짓된 것으로 나뉘기에 그 중 참된 doxa가 곧 앎이라고 제안한다. 이 제안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앞선 논의에서 생겨난 한 포인트(즉 ぢ非존재의 doxazein은 불가능하다っ(167a7-8)는)로 되돌아가서 거짓된 doxa의 문제를 살펴볼 것을 제의한다. 테아이테토스의 동의를 얻은 소크라테스는 거짓된 doxa가 도대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가를 다섯 가지의 경우 즉 각각 i) 앎/모름을 모순적인 것으로 전제하는 경우, ii) 非존재를 생각하는 것으로서, iii) 어떤 있는 것을 다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allodoxia)으로서, iv) 앎/모름 사이에 배움, 기억, 망각 등을 도입하여(で밀랍と논변), v) 앎의 소유(ktēsis)와 소지(hexis) 즉 가능적 앎과 현재적 앎을 구분해서 볼 경우(で새장と논변) 등으로 나누어 그 가능성을 탐색하는데, 모두 대답에 실패하여 결국 거짓된 doxa 문제를 완전하게 해명하지 못한 채 원래의 주제로 돌아오게 된다 이 작업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앎이 무엇인지 충분히 잡기도 전에 거짓된 doxa를 먼저 탐구한 데 오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반성한 후 소크라테스는 두번째 테제를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비판한다(200d-201c): 법정에서 연설가나 변론가는 배심원들에게 정해진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난 일들의 진실을 충분히 가르칠 수 없다. 그들은 설득(즉 믿게 만드는 것)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본 자만이 알(eidenai)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배심원들이 들어서 판단함으로써 온당하게 설득될 때 그들은 앎 없이 옳게 판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판단과 앎은 같은 것이 아니다. 2.4. 로고스를 가진 참된 doxa로서의 앎(제3부: 201c-210b) 두번째 테제가 기각되자 테아이테토스는 사실 그 둘이 다르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제서야 생각이 났다면서 그 이야기를 토대로 다음과 같이 세번째 테제를 제안한다(201c9-d3): ぢ로고스를 가진 참된 doxa가 앎이며 로고스없는 것은 앎 밖에 있다.っ 즉 ぢ그것들의 로고스가 없는 것들은 알 수 없는 것들이고, 로고스를 가진 것들은 알 수 있는 것들이다.っ 그 이야기의 상세한 내용을 기억할 수 없다는 테아이테토스에게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들은 で꿈と이야기를 소개하고, 테아이테토스는 자기가 들은 내용과 같다고 동의한다. 소크라테스가 제시하는 で꿈と이야기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201d- 202c): 1차적 원소들은 명명만 가능할 뿐 로고스를 갖지 않는 반면, 이 원소들로부터 합성된 것들은 그것들이 엮어져 있듯이 그것들의 이름들도 함께 엮어져서 로고스가 된다. 이리하여 원소들은 로고스없고 알 수 없으나 지각은 되는 데 반해, 합성체들은 알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참된 판단에 의해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로고스없이 참된 판단을 잡는 자는 참된 생각은 하고 있으나 아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로고스를 주고받을 수 없는 자는 아는 자가 아니므로. 반면 로고스를 덧붙여 잡으면 그는 완전한 앎을 가진 자가 된다. 소크라테스는 로고스와 옳은 doxa를 떠나서 앎이 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에 일단 이 이야기 자체는 で그럴듯하다と(eikos)고 인정하지만, 원소는 알 수 없으나 합성체의 무리는 알 수 있다는 주장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원소(즉 철자)와 음절의 예를 들어, 음절들은 로고스를 가지나 원소들은 로고스가 없다고 놓으면 で꿈と논변은 음절이 i) 원소 전부(ta panta)를 말하든가, 아니면 ii) 그것들이 함께 놓여질 때 생기는 단일형상(hen ti eidos)을 말하든가 둘 중 하나라는 딜레마에 빠진다는 반론을 제기한다(202c-204a, 205a-e). i)이라면 원소 중 어느 것도 모르면서(で꿈と의 전제에 따라) 원소 전부를 안다(지금의 논변에 따라)는 불합리한 결론이 나오고, 이를 피하려고 ii)를 취하면 원소도 음절과 같은 정도로 알 수 있고 말할 수 있거나, 아니면 양자가 동일하게 로고스없고 알 수 없는 것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딜레마에 빠진다. 그러므로 음절은 알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나 원소는 그렇지 않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 경험적 사례(즉 글자학습의 예, 음악학습의 예 등)를 통한 반론이 추가된다(206a-b). 이렇게 で꿈と이야기의 で가장 세련된と 부분을 비판한 후에, 소크라테스는 で그럴듯하다と고 인정했던 세번째 테제에 주목하여 테제에 나오는 로고스의 가능한 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각각이 참된 doxa를 앎으로 전환시켜 줄 수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논의한다(206c-210b): で사고를 말로 표현함と이라는 첫째 의미의 로고스는 옳은 doxa를 가진 자는 누구든 그것을 로고스와 함께 가질 수 있음이 분명하기에 옳은 doxa와 앎을 구별하는 특성으로 사용될 수 없다. で원소를 통한 열거(diexhodos)と라는 둘째 의미의 로고스는 누군가가 우연히 모든 원소를 순서에 맞춰서(hexēs) 썼다면 옳은 doxa와 함께 로고스를 가지고서 쓴 것이지만 아는 자라고 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불충분하다. で각각의 것이 다른 것들과 그것에 의해 구별되는 바 차이를 잡음と이라는 셋째 의미의 로고스도, 옳은 doxa에 로고스를 덧붙여 잡는다는 것은 차이성에 대한 doxa를 덧붙이는(prosdoxasai) 것이거나 차이성을 아는(gnōnai) 것이거나 둘 중 하나일텐데 전자는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잡으려는 악순환을 발생시키며 후자는 정의항 속에 피정의항을 포함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되므로 불충분하다. 이 세가지 의미의 로고스 중 어떤 것도 참된 doxa를 앎으로 전환시키지 못함이 보여졌기에 세번째 테제도 결국 기각된다. 따라서 지각도 참된 doxa도 참된 doxa에 붙여진 로고스도 앎일 수 없다고 소크라테스는 최종적으로 결론내린다. 3. [테아이테토스]편에 대한 이제까지의 해석들 필자는 이 대화편 해석의 큰 줄기로서 두 개의 입장, 즉 형상에 대한 면식(acquaintance)적 파악을 앎의 본질적 형태로 보는 초·중기 입장을 플라톤이 이 대화편에서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보는 입장(콘포드(F.M. Cornford)류의 で전통적と 해석)과 명제적 앎으로 입장을 바꾸었다고 보는 입장(라일(G. Ryle)류의 で의미론적と 해석)이 대립하고 있다고 본다. 콘포드(1935)에 대해 라일(1939, 1952)이 반론을 제기한 후 두 입장 간의 논쟁이 앎의 명제적 성격을 주제적으로 다루면서 1960년대까지 계속되었고, 이후 논의들도 두 입장 중 하나를 명시적으로건 암묵적으로건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어떤 식의 입장정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이런 대립의 상정은 이 대화편 해석의 문제에 접근하는 데 유용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더욱이 라일의 문제제기가 바로 제3부 で꿈と이야기의 해석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で꿈と이야기 해석의 문제에 있어서도 이런 대립을 염두에 두고 입장을 정리하는 일이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본다. 3.1. 전통적 해석 で전통적と 해석이라고 필자가 명명한 입장은 콘포드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해석자들의 입장을 가리킨다. 콘포드는 형상에 대한 명시적 언급의 결여를 형상없이는 우리가 (앎의 정의에 있어서) 제대로 나아갈 수 없으며 앎이라는 것도 도대체 있을 수 없음을 보이기 위해 숙고된 장치로 본다. 그는 제1부에서 플라톤이 형상을 억제된 형태로나마 분명히 언급하고 있거나(여담 부분: 172b-177c) 형상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만들거나(유전설 반박 부분: 179c-183c) 영혼의 숙고대상으로서의 형상을 드러내고 있거나(코이나 논의 부분: 184b-186e) 하고 있다고 해석하며, 이렇게 형상이 대화편 이면으로 잠복하게 된 것은 이전 대화편들과 중복되는 내용을 피하면서도 형상에 대한 면식적 파악으로서의 앎이라는 이전의 테제를, 형상없는 앎의 정의가 실패로 돌아감을 보임으로써 역설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플라톤의 의도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제2부의 거짓된 doxa 논의 역시 형상을 끌어들이지 않고 거짓된 doxa 설명에 얼마만큼이나 도달할 수 있는가를 보이기 위한 것으로서, 이 문제는 형상을 끌어들여 논의하는 [소피스트]편에서 해결된다고 본다. 제3부의 で꿈と과 그 비판을 통한 세번째 테제 논의도 이런 제한 하에서(즉 구체적 개별사물들만이 알려질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로고스의 목록열거에서도 플라톤 자신의 관점이 배제되어 있으며, 결국 이런 고려 하에서 자연스럽게 우리는 ぢ참된 앎은 지각되는 사물들이 아닌 可知的인 형상들(과 그들에 대한 진리)을 그 대상으로 가진다っ는 플라톤 자신의 입장을 추론해낼 수 있다고 그는 해석한다. 이러한 콘포드의 해석에 대해 제3부 해석과 관련된 라일의 반론(1939, 1952)과 1, 2부 해석과 관련된 로빈슨(R. Robinson)의 반론(1950)이 제기되었는데, 제3부 해석은 1, 2부 해석과 분리될 수 없으며 로빈슨의 반론을 견뎌내지 못하면 콘포드적 해석은 근본적으로 수정되어야 하거나 라일적 해석을 상대하기에 역부족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라일적 해석을 살펴보기 전에 로빈슨의 반론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3.2. 로빈슨의 해석 로빈슨의 반론은 그의 논문제목이 보여주는 대로 두가지 점 즉 형상과 실수논의에 관련된 플라톤의 의도에 대한 콘포드의 해석을 반박하고자 한다. 먼저 형상에 대해 그는 형상에 대한 명시적 언급의 결여를 형상론에 대한 플라톤의 비우호적 태도의 표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제1부 여담 부분이 이곳의 대상들과는 달리 완전함, 불변함, 영원함, 신적임 등의 속성들을 가지는 대상들로 이루어지는 제2의 세계가 있다는 이론인 형상론을 암시한다고 볼 수 없고, 유전설 반박 논변이 보이려는 바는 어디엔가(즉 이 세계에) 확고한 무엇이 있다는 점일 뿐이며, 코이나 부분에서도 코이나가 형상을 가리킨다는 게 분명치 않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형상이 언급되고 있다는 해석은 형상의 부재에 의해 형상을 부각시키려 한다는 해석과 일관적이지 못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제3부에 대해서도 구체적 개별사물들을 정의할[즉 알] 수 없다는 것으로부터 형상들이 있다는 것이 따라나오지 않으므로 콘포드의 추론은 타당하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그는 로고스에 관한 제3부 논의를 자신의 교설 중 하나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면서도 그 교설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어떤 플라톤적 절차의 예로 간주한다. 결국 형상은 단지 이 대화편의 주제에 적절하지 못하다는 이유 때문에 부재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그리고 제2부 실수논의에 대해 그는 논의 전체의 기초를 이루는 근본적인 실수가 플라톤에게 있다고 보는데, 그것은 바로 지각이 앎이라는 제안을 기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ぢ생각함은 일종의 기관없는 감각(sensing without organs) 혹은 초감각적 지각(extrasensory perception)っ이라는 전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전제를 받아들이면 생각함은 일종의 감각이고 감각은 오류불가능하므로 실수는 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로빈슨의 해석에 대한 전통적 입장에서의 비판은 주로 형상론에 집중되어 있고 실수문제에 관해서는 설득력있는 비판이 제기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형상에 관한 그의 해석은 제1부 여담부분의 여러 귀절들(174b3-4, 175b9, 175c2 등)이 초·중기의 에이도스(형상)를 언급하는 것으로 볼 만하고, 악의 존재 논의(176a3-177a9)에서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선하며 정의로운 제2의 세계가 상정되고 있으며, 문맥상 지각으로 파악되는 대상과 별도로 어떤 다른 능력에 의해 파악되는 대상을 인정하(려)는 강한 지향을 밑바탕에 깔고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다만 유전설 반박 부분을 현상계의 완전한 유전(total flux)을 전제로 삼은 연역적 추론으로 보는 콘포드적 해석에 대한 그의 반론은 나중에 런씨맨도 지적하듯이 플라톤이 형상들에 대한 앎을 가진다는 것이 지각세계에 대한 앎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으로부터 도출된다고 믿지 않으면서도 양자를 동시에 믿었을 수 있다는 점에서 타당한 일면이 있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는 이 부분의 논의를, 형상이 존재하지 않으면 지각세계는 완전한 유전상태에 있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에 대한 앎은 고사하고 어떤 지시도 불가능한데, 지각세계에 대한 지시나 앎 혹은 어떤 유의미한 언명이라도 가능하기 위해서는 형상의 존재를 가정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귀류법적 논변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코이나 부분에 대한 로빈슨의 반론은 콘포드의 비일관성을 지적하는 소극적인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핵포쓰의 비판만으로도 충분히 논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 로빈슨의 반론 중 필자가 보기에 강력한 부분인 실수문제에 대해 살펴보면, 사실 플라톤 자신의 것이라고 로빈슨이 말하는 생각함이 일종의 기관없는 감각이라는 전제는 단순히 다른 경험주의자나 어떤 소피스트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또 면식적 앎과 명제적 앎의 혼용도 대화편 곳곳에서 보여지며 이를 플라톤 자신의 것이 아닌 で보이기 위한 실수と로 단순화하기 어렵다. 면식적 앎과 명제적 앎을 플라톤이 거의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맥도웰이 잘 보여주고 있다. 맥도웰을 따라 ぢ앎을 알지 못한다.っ(mē eidotas epistēmēn: 196d10; epistēmēn mē eidōs: 147b4-5)는 표현과 ぢ그것[즉 앎]이 도대체 무엇인지 우리가 알지 못한다.っ(ouk eidosi ti pot' estin: 196d8)는 표현을 비교해 보자. で안다と는 말을 사용할 때 희랍어 어법의 표준적 방식인 ぢ나는 앎을 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っ(oida epistēmēn ti estin: I know knowledge what it is.)은 영어의 표준적 방식인 ぢ나는 앎이 무엇인지(를) 안다.っ(I know what knowledge is.)와 중요한 차이를 가진다. 즉 여기서 4격명사 で앎と은 동사의 직접목적어 역할을 하며 で그것이 무엇인지と(what it is)는 생략가능할 수도 있는 일종의 부사절-영어에서는 명사절로서 동사의 직접목적어 역할을 하지만-이다. 따라서 196d10, 147b4-5의 ぢ앎을 안다っ는 표현은 で그것[즉 앎]이 무엇인지と가 생략된 표현으로서 의미에 있어서 196d8의 ぢ앎이 무엇인지 안다っ는 표현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며 이런 connaître와 savoir를 동일시하는 플라톤의 관용어귀가 자연스럽게 앎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을 で앎と(knowledge)과 で앎이 무엇인지と(what knowledge is)가 함께 지칭하는 바 대상에 대한 면식의 문제로 그가 이해하게끔 만들고 있다. 대상-주체 관계와 명제-주체 관계를 특별히 구분하지 않는 플라톤이 생각을 일종의 감각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실수논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컨대 제2부 제2논변에서 非존재를 생각함(doxazein)의 가능성을 보이는 데 실패하게 되는 것은 생각함을 봄과 같은 어떤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있는 뭔가(on ti)가 아닌 것을 생각하는 것은 생각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새장논변에서도 마치 사람이 새를 잡듯 생각은 정신적 접촉이어서 어떤 사물을 접촉하면 그것은 거기에 있다는 생각이 전제되어야만, 논변이 함축하는 불합리한 귀결들, 즉 앎이 곁에 있는데 영혼은 전혀 무지하다 등의 귀결들이 불합리하다고 간주될 수 있다. 이렇게 앎을 일종의 정신적 접촉으로 봄으로써 플라톤은 실수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데 실패하게 된다. 3.3. 의미론적 해석 で의미론적と 해석이라고 필자가 명명한 입장은 주로 제3부에 대한 라일의 해석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해석자들의 입장을 가리킨다. 라일은 플라톤이 현대 논리적 원자론(logical atomism)의 원형인 で꿈と이론의 검토와 비판을 통해 이름부르기(naming)와 말하기(saying)를 구분하고 있고, 결국 앎은 그 표현으로 이름이 아닌 문장이나 진술을 필요로 하며 문장이나 진술이 표현하는 것은 다수성(적어도 이중성)임을 밝히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런 해석을 토대로 그는 이 대화편에서 플라톤이 이전의 형상론을 고려하고 있지 않거나 오히려 비판하고 있다고 본다. 라일의 해석은 이후 여러 해석가들에 의해 상이한 방향으로 발전, 세련화하는데, 여기서는 이것들을 크게 셋으로 나누어 정리하고, 그러는 가운데 부각되는 전통적 해석과의 대립점들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총괄적으로 검토하겠다. <1> 크로쓰의 해석: で(로고스 속의) 논리적 술어と로서의 형상관 크로쓰의 입장은 소크라테스의 で꿈と과 그 비판을 단어와 문장에 관한 논리적 원자주의 이론과 연결시키는 라일 해석의 핵심적 라인은 따르면서도 형상론에 관한 입장(즉 형상 비판 혹은 포기)은 받아들이지 않고 나름대로의-즉 로빈슨의 자기비판적 설명에 빠지지 않는 방식으로의- 형상론 해석을 통해 [테아이테토스]편에서도 여전히 형상론이 유지되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는 형상을 대면에 의해 궁극적으로 알려지는 단순한 명명가능자로 보는 정설에 반대하는 형상론 해석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형상은 실체적 존재자라기보다는 定式(formula)에 훨씬 가깝다. 그것은 로고스 속의 논리적 술어이지 논리적 주어가 아니다. 로고스는 우리에게 에이도스를 보여주는 데 필수적이다. 형상에 관해 일차적으로 플라톤이 관심을 가지는 앎은 로고스가 수반된 앎이지 대면에 의한 앎이 아니다. 이런 크로쓰의 해석에 대해 전통적 해석라인에 서 있는 블럭(1956)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플라톤은 x 자체(auto to x)를 x의 에이도스로 간주했으며, ぢx는 무엇인가?っ라는 질문은 ぢx 자체는 무엇인가?っ라는 질문으로 환원된다. 따라서 이 질문에 대한 어떤 대답에서도 x의 에이도스는 x 자체와 같은 것으로서 논리적 주어일 것이다. 에이도스는 단순한 정식 이상의 것, 즉 정의의 대상인 반면, 로고스는 각 사물의 ...임(to on hekastou)을 가리킬 수 없다([제7서간] 342a-e). 요컨대 x 자체 즉 x의 에이도스는 진술의 술어나 정식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에 대해 로고스를 주는 바 우시아이다. 이 비판은 크로쓰 입장의 핵심인 논리적 술어로서의 형상관을 물리치기에 충분한 전거와 논리적 타당성을 갖고 있다고 판단된다. 또한 다음 장에서 검토하겠지만 사실 크로쓰가 받아들인 라일적 입장도 텍스트 독해상의 난점들을 안고 있음으로 해서 그의 입장은 어느 쪽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으로 되어 버린다. <2> 햄린과 레셔의 해석: 에피스테메와 그노시스의 구분 햄린은 블럭의 입장에 대한 반박논문에서 で꿈と 반론부분(203a ff.)과 제2의미 로고스 해명부분(207a ff.)에서의 상이한 용어사용(전자는 で그노시스と(gnōsis)와 그 파생어들을, 후자는 で에피스테메と를 사용)은 플라톤이 앎의 두 의미를 구분했음을 시사하며 에피스테메가 직접적 대면에 의한 앎임을 시사하는 어떤 것도 여기에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햄린의 주장은 다시 블럭에 의해 다음과 같이 비판된다: で꿈と이론 개진 부분에서(202c) で에피스테메를 가짐と은 단순히 で그노시스못함と(ou gignōskein)의 반대말로 사용되며, 209e에서 에피스테메를 참된 doxa + 차이성의 그노시스로 정의하는 것이 불합리한 이유는 '그노시스'가 정의항인 '에피스테메'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cf. 209e8-210a1). 여기서 햄린이 발견해내고자 하는 중요한 구분을 소크라테스가 하려 했다면, 그 용어들을 이처럼 동일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블럭의 이러한 강력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다시 의미론적 해석라인에서 햄린을 계승한 주장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레셔의 해석(1969)이다. 그는 플라톤이 면식에 의한 앎에는 で그노시스と를, 지적 앎[즉 명제적 앎]에는 で에피스테메と를 채택함으로써, 앎에 대한 포괄적 용어인 で에이데나이と(eidenai)의 두 의미를 구분하려고 시도한다고 본다. 그런데 이 점을 보이려 한 햄린의 주장이 위에서 지적된 문제점들을 가지므로 그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근거들을 댄다: 첫째, で꿈と 반박 전에 소크라테스가 인정하는 것(즉 참된 doxa와 로고스를 가짐이 앎을 가짐에 필수불가결함(202d6-7)과 그 자체로 취해진 글자들에 대해서는 어떤 로고스도 주어질 수 없음)과 반박 시작 부분에서의 플라톤의 용어법(즉 で꿈と이론을 승인할 때는 で에피스테메と를 사용하고 의심이나 불일치를 표현할 때는 で그노시스と 및 그 파생형을 사용)으로부터 우리는 단순자에 대해서는 그노시스가, 복합자에 대해서는 에피스테메가 가능하다는 결론을 충분히 내릴 수 있다. 둘째, 앎에 대한 세 희랍어 용어에 관한 라이언즈(J. Lyons)의 연구가 상대적 빈도나 규칙성에 있어서 이런 용례들을 구분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셋째, 블럭이 제시한 209e의 귀절은 테아이테토스에 대한 앎[즉 그노시스]을 시험대상으로 삼아 에피스테메가 참된 doxa + 로고스임을 보여줄 로고스의 의미를 찾는 세번째 시도라는 맥락에서 등장한 것으로서, 이런 의미의 로고스가 부적절하다는 결론과 함께 대화편이 실패로 끝나는 이유는 테아이테토스가 여전히 그노시스가 에피스테메와 같은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러한 레셔의 논의 역시 블럭의 햄린 비판에 대해 결정적인 옹호를 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즉 그의 논의는 통계상의 상대적 빈도에 의존하고 있고, 과연 어근을 가지고 만들어낸 이런 단순한 이분법(dichotomy)이 플라톤의 앎에 관한 어휘의 복잡성을 제대로 다루어낼 수 있을지가 의문시되며, 209e의 귀절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정의항에 피정의항이 들어감으로 해서 발생하는 불합리함을 지적하는 자연스런 논변의 흐름을 놓치고 있으며, で꿈と 반박의 요점을 단순자의 그노시스가능성(gnōston)-에피스테메가능성(epistēton)과 구분되는-으로 봄으로써 で꿈と이야기 반박논변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점에서 그노시스와 에피스테메를 플라톤이 명백히 구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에는 여전히 빈약한 전거와 논리에 의존하고 있다. <3> 파인의 해석: で앎의 상호연관 모델と 파인은 [테아이테토스]편에서 플라톤이 앎은 명제적 표현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현대 원자론과 연관되어 있다는 라일의 견해는 받아들이지만, 그의 로고스 해석을 수정함으로써 라일적 해석을 상당히 세련된 형태로 발전시킨다. 그녀의 입장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플라톤은 모든 앎은 로고스(즉 설명)를 필요로 한다(KL)고 주장하는데, 거기에다가 앎은 앎에 기초해 있어야 한다(KBK)고 믿는다. 이 둘이 합쳐지면 대상 o를 알기 위해 나는 (KL에 의해) o의 참된 설명을 산출해야 하지만 (KBK에 의해) 나는 설명 속에 언급된 어떤 대상을 알아야만 한다는 퇴행이 발생한다. 이 퇴행이 직선적으로 무한한가, 아니면 순환적인가를 고찰하는 과정에서 그는 KL과 KBK를 존속시키고 있으며, KTDL의 적어도 수정된 버젼(version)은 존속시키고 있다. 이런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녀는 で꿈と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で꿈と이론에서 원소와 복합자 간의 AK(알 수 있음에 있어서의 非대칭성)는 で꿈と이론가의 KL과 복합자만 설명을 가진다는 AL(로고스에 있어서의 非대칭성)로부터 귀결되며, 여기서 AL은 그의 로고스 해석(사물의 원소들의 이름들의 엮음(EE))으로부터 나온다. AL을 해석하는 두 방식은 로고스를 해석하는 두 방식 즉 로고스를 문장이나 진술(logoss)로 보는 방식과 설명이나 근거(logosk)로 보는 방식에 의존한다. で꿈と의 세부적 논변과 문맥이 제공하는 근거들에 의해 후자의 해석을 받아들이면 で꿈と이론이 주장하는 바는 "알려지기 위해 어떤 것은 완전히 분석되어야 하며 완전한 분석은 사물의 모든 원소의 열거로 이루어진다. 설명을 결여한 기본원소들이 있어야 이 열거가 완수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녀에 의하면 AK 공격(202d8-e1)으로 향해진 소크라테스의 で꿈と이론 반박은 KL이나 AL 중 적어도 하나를 거부해야 했다. 소크라테스는 넌지시 KL을 시인하고(202d6-7) 대신 AL과 EE를 기각한다. EE(따라서 AL)에 대한 플라톤의 대안은 다음과 같은 수정판 KTDL로 표현되는 で앎의 상호연관 모델と(the interrelation model of knowledge)이다: ぢx에 대한 앎은 x를 동일한 분야 내의 다른 적절하게 상호연관된 대상들과 고유하게 관련지우는 설명을 산출하는 능력을 가진, x에 대한 올바른 믿음이다.っ 이 모델에 따르면 설명(즉 분석)은 로고스를 결여한 원소에서 끝나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것들의 구성인자 즉 원소를 앎에 의해 복합자를 알며, 원소의 앎은 다시 그것들을 서로서로 그리고 여러 복합자들에 관련지움에 있다. 요컨대 플라톤은 설명이 어딘가에서 끝난다는 で꿈と의 확신을 거부하고 대신 설명이 주어진 장 안에서 순환적으로 계속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파인의 해석은 제3부의 여러 논변에 대한 탁월한 분석을 토대로 이후 대화편들과의 연속성까지 고려한 독창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으며, 만일 우리가 그녀의 결론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테아이테토스]편에서 플라톤이 이전 대화편들에서의 앎의 정의를 유지하면서도 그것을 이후의 후기 대화편들과도 잘 연결될 수 있을 만한 형태로 발전시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대화편의 아포리아적 종결이 파인의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으며 で꿈と이야기가 개진되고 비판되는 문맥도 그녀의 해석에 우호적이지 않다는 점을 다음 장에서 보게 될 것이다. 4. 앎의 정의에 있어서 로고스와 형상 -で꿈と에 관한 한 해석 이제까지 우리는 기존의 [테아이테토스]편 해석들을 대립되는 두 입장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는데, 이 장에서는 이런 입장들이 이 대화편 해석에 있어서, 특히 제3부 で꿈と이야기의 해석에 있어서 갖고 있는 문제점들은 무엇이고 그 문제점들을 해소하면서 이 대화편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방식은 어떤 것인가를 고찰하겠다. 먼저 1절과 2절에서 1, 2부의 핵심논변을 각각 분석한 후, 3절과 4절에서 で꿈と이야기에 대한 해석상의 문제들을 제기하고 필자 나름의 해결책을 모색하겠다. 4.1. 제1부 코이나 도입 논변(184b-186e)의 분석 <1> 코이나 논변 이전의 논의 ぢ지각이 앎っ이라는 테아이테토스의 첫번째 테제는 で나타남と과 で지각함と을 동일시하는 다음과 같은 보충적 전제에 의해 프로타고라스의 인간만물척도설과 연결된다: x가 a에게 F로 나타난다 iff a가 x의 F임을 지각한다(여기서 x는 대상, F는 감각질, a는 지각자를 가리킴). 두 테제가 연결되기 위해 양자의 동일시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은 이후(161d, 170a 등) 프로타고라스 테제가 doxazein을 포함하는 것으로 밝혀진다는 데서 분명해진다. 161d3에서 (플라톤에 의해 해석된) 프로타고라스의 테제는 ぢ각자가 지각을 통해서 판단하는(doxazē(i)) 것은 무엇이든지 그에게 참이다っ라는 주장으로 서술된다. 이렇게 되면 프로타고라스의 테제와 연결된 테아이테토스의 테제는 ぢ지각을 통한(dia) 판단이 그 지각자에게 참이며 바로 그것이 앎이다っ라는 주장이 된다. 테아이테토스의 테제를 본격적으로 비판하기 전에 먼저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의 일반적 형태의 테제(즉 인간만물척도설)를 소위 '페리트로페'(peritropē) 논변과 미래의 일(to mellon)에 관한 논변을 통해 비판함으로써 그의 테제가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을 축소한다(169d-172b, 177c-179c). 이 비판을 정리하면서 헤라클레이토스의 유전설 비판으로 넘어가기 전에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언급을 한다: ぢ각자에게 현전하는(paron) 겪음(pathos)-그것들로부터 그의 지각들과 그것들[즉 지각들]에 따른(kata) 판단들이 생겨나는데-과 관련해서 볼 때, 이것들[즉 지각들과 지각에 따른 판단들]이 참되지 않다고 공격하기는 보다 어렵다っ(179c2-4). 여기서 ぢ지각에 따른(kata) 판단이 참이다っ라는 입장이 바로 위에서 말한 테아이테토스의 테제가 취하는 입장인데, 프로타고라스 테제의 입지가 축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격되지 않은 부분으로서 테아이테토스의 테제가 남아 있으며, 이 입장은 ぢ아마도 반박불가능(anhalōtoi)할지도 모른다っ(179c5)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이 소크라테스의 말을 문자그대로 받아들이면 ぢ지각이 오류불가능하고 참이다っ라는 입장을 플라톤에게 귀속시키는 해석(쿠퍼(J.M. Cooper) 등)이 가능하다(cf. 152c). 지각과 그에 따른 판단이 예컨대 ぢ이것은 (나에게) red로 보인다っ와 같은 문장으로 표현된다면 그것은 참이며 수정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는 테아이테토스 테제의 반박을 계속하며, 결국 184b-186e에서 반박을 마무리한다. 이 반박논변은 잠시 후에 살펴보기로 하고 반박불가능성에 대한 위 해석의 문제점을 검토해보자. 사실 위에서 예로 든 형태의 판단은 적어도 그 판단자 자신의 겪음 내지 경험에 관해서 볼 때는 참이며 수정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 형태의 판단이 제1부에서 검토되는 지각(에 따른) 판단의 전형적인 경우인지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프로타고라스의 테제는 단지 그의 테제에 친숙한 지식인들만이 아니라 평범한 보통사람들의 판단도 (그들에게는) 참이다라고 주장하는데, 이 때 그는 그들이 그들에게 보여지는 것에만 한정되는 판단들을 하고 있고 또 (그들이 실수를 피하려면)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보통사람들은 어떤 붉은 것을 볼 때 대개 ぢ이것은 (내게) red로 보인다っ라고 말하기보다는 ぢ이것은 red이다っ라고 말하며, 사실 ぢ나는 이것이 red라고 생각한다고 생각한다っ는 반성적 사유를 모든 일반인의 판단에 무리없이 적용하기는 힘들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일반인의 판단이 그들의 사적 세계 내에서 언제나 참이라고 말하는 프로타고라스의 테제는 (따라서 그 부분으로서의 테아이테토스의 테제는) 위에서 예로 제시된 형태의 지각판단을 전형적인 검토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테아이테토스와 프로타고라스의 테제는 ぢ각 지각자가 그러그러하다[혹은 ...이다]라고 지각에 의해 판단하는 것은 또한 그에게 그러그러하다[혹은 ...이다]っ라는 것이다. <2> 코이나 도입 논변(184b-186e) 코이나 논변에서 지각판단이 앎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명제적인 내용 혹은 구조를 가지지 않는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숙고를 거치지 않은 판단이라는 점에서이다. 이 논변에서 지각(혹은 지각판단)은 being에 다가가지[혹은 being을 포착하지](tychein ousias; ousias hapsasthai: 186c,d) 못한다는 점에서 앎이 되지 못한다고 논의되는데, 이 でbeing에 다가감と을 명제적 구조를 가지게 됨으로 간주하는 해석은 이제까지의 논의가 맞다면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이 논변의 표적은 ぢ어떤 것이 그러그러하다라는, 지각에 따른 판단이 바로 앎이다っ라는 주장인데, 단지 이런 판단이 명제적 구조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논변함으로써 이 주장이 반박될 수 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해석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지각이 판단과 다르고 판단이 앎에 필수적이라는 점이 이 논변의 핵심이며, 판단의 요소(즉 명제적 내용)를 결여한 어떤 것으로서의 지각이 앎이라는 주장이 반박대상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앞으로 드러나겠지만 이 논변이 보이려는 바는 지각판단이 숙고에 의한 판단과 다르며 후자가 더 앎에 가깝다는 점이며, 반박대상도 (명제적 내용은 갖지만 숙고를 거치지 않은) 지각판단이 앎이라는 주장이다. で공통된 것と(koina)을 도입하면서 플라톤은 동사 でaisthanesthaiと(지각하다)를 슬그머니 でdianoeisthaiと(사유하다)로 대체한다(185a4). 즉 그는 두 감각에 대해 공통된 것(ta koina)은 사유의 대상이지 지각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계속되는 논의에서 플라톤은 코이나와 감각질들을 목적어로 삼는 동사를 でepiskopeinと(숙고하다)으로 대체한다(185e2,7). 물론 185c8의 でhekastaと(각각의 것들)와 185d2의 でtallaと(다른 것들)는 코이나를 지시하며 でaisthanesthaiと의 목적어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것은 코이나가 감각을 통해 지각가능하다는 함축을 담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수사적 질문의 문맥 속에 사용된 것으로서 결국 소크라테스는 수사적 질문을 통해 코이나가 숙고(episkopein)의 대상이라는 테아이테토스의 올바른 대답을 이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ぢ어떤 것들[즉 코이나]은 영혼 자신이 스스로를 통해서(autē di' hautēs) 숙고하는 데 반해, 다른 어떤 것들[즉 감각질들]은 영혼이 육체의 능력들을 통해서 숙고한다っ(185e6-7)는 데 대해 테아이테토스의 동의를 얻어낸다. 여기서 で스스로를 통해서と란 다른 어떤 것을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제 でaisthanesthaiと와 대비되는 것으로 부각되는 でepiskopeinと(혹은 동일계열의 동사인 で(epi)skepsasthaiと)이 어떤 행위를 지시하는지를 살펴보자. 우리는 이 논변에서 이미 이 동사(및 동일계열 동사)가 간접의문을 목적어로 취하는 구문에 사용되었음(185b)을 간과할 수 없다. 185b4-5의 で...인지 아니면 ...인지를 숙고함と(eite [...] eite [...] episkepsasthai)은 질문행위를 지시하고 또 185b10의 で...인지를 숙고함と(skepsasthai ar')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각행위와 달리 숙고행위는 질문을 던진다. 때로는 영혼은 숙고함에 있어서 실제로 참 여부를 가릴 수 없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예컨대 ぢ소리와 색깔이 짠지 아닌지?っ(ar' eston halmyrō ē ou: 185b10)라는 질문 같은 것을. 이 경우 우리는 이 질문에 두 종류의 개념이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한다(희랍어 구문의 특성상 생략된 주어를 논외로 하면 말이다). 하나는 で짜다と(halmyrō)에 해당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で...이다と(eston), で...아니다と(ou)에 해당하는 것이다. 전자가 육체의 능력 즉 미각을 통한 것이라면 후자는 영혼자신을 통한 것이다. 바로 이런 질문으로부터 소크라테스는 코이나 즉 で...임と[혹은 で있음と](estin)과 で...이 아님と[혹은 で있지 않음と](ouk esti)을 추출해낸다(185c). 영혼의 숙고행위는 다시 で되새김(epaniousa)과 비교(symballousa)를 통해 판단을 시도함と(krinein peiratai)으로 서술된다(186b). 즉 딱딱한 것의 딱딱함과 부드러운 것의 부드러움은 영혼이 촉각을 통해 지각하지만, 이 감각질들의 우시아 즉 양자가 있다[혹은 ...이다]는 것과 양자의 상호 반대임과 반대임의 우시아는 영혼이 스스로 되새기고 상호간에 비교함으로써 판단하기를 시도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지각과 달리 숙고는 질문을 제기하고 제기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지각된 것(즉 감각질)들을 재차 삼차 되풀이하여 떠올려보고 그것들을 상호간에 비교해보는 등의 작업들을 거친 후에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판단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가리킨다. 186b-c에 의하면 육체를 통해 영혼에 연결되는 겪음들[혹은 인상들] (pathēmata)을 지각하는 것은 인간이든 동물이든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본성상 할 수 있는 일임에 반해서, 이 겪음들에 대해 우시아와 유용성에 비추어 추론하는 것은 많은 수고와 교육을 통해 힘들게 그리고 오랜 시간을 두고 이루어진다. 우리는 앞에서 테아이테토스와 프로타고라스의 테제가 앎의 후보로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 지각에 따른 판단이라고 말하였는데, 지각이 별 무리없이 지각판단으로 동일시된 것은 아마도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특수성에 기인하는 것 같다. 무슨 말인가 하면 사실 겪음(pathos) 및 doxa와 구분되는 지각의 단계를 인간에 있어서 명확히 특정화(specify)하기 어려운데, 그것은 언어를 사용하여 사고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어떤 겪음에 의해 육체가 촉발(affiziert)된 후 그 겪음이 일단 마음(플라톤적 용어로는 영혼)에 의해 뭔가로서(als etwas) 감지(aware)되면 곧바로 거의 동시에 언어화되기 때문이다. 언어의 옷을 입기 이전의 것이면서도 겪음과는 달리 뭔가 주관적인, で...로서と(als etwas)의 형식이 개입된 것이 플라톤에 의하면 지각인데, 인간의 경우는 언어상용습관 때문에 doxa와 구분된 그 자체로서의(kath' hautēn) 그것을 떼어내어 말하기가 매우 어렵다. 아마도 우리는 doxa의 단계가 존재하지 않는 동물의 경우로부터 그것의 대략적인 모습을 짐작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4.2. 제2부 마무리 논변(200d-201c)의 분석 제1부에서 앎의 후보로서 검토되고 있는 것이 지각판단이라는 점은 제2부 시작부분과 마무리부분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아마도 판단은 제2부의 주제이고 따라서 지각판단도 제1부의 검토범위 밖에 있다고 반론이 제기될 법도 한데, 이런 반론은 다음과 같은 점들을 고려할 때 별다른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제2부 서두(187a)에서 소크라테스는 이제 앎은 지각이 아니라 영혼 자신이 스스로(autē kath' hautēn) 존재하는 것들(ta onta)에 대해 전념할(pragmateuētai) 때의 상태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테아이테토스는 그것에 でdoxazeinと이란 이름을 붙인다. 다시 테아이테토스가 참된 doxa와 거짓된 doxa를 나누고 참된 doxa에 앎의 자격을 부여하고 나서 두 사람은 거짓된 doxa에 대한 긴 여담을 나누게 되는데, 이 여담 가운데 등장하는 doxa의 용어설명(189e-190a)을 통해 우리는 제2부의 논의대상인 doxa의 범위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용어설명에 의하면 사고한다(dianoeisthai)는 것은 영혼 자신이 스스로(autē pros hautēn) 자신이 숙고하고 있는 것들에 관해 자세히 끝까지 가보는 로고스(이야기 혹은 따짐)이다. 영혼이 사고할 때 영혼은 스스로 자신에게 묻고 대답하고, 긍정하기도 부정하기도 하면서 대화하고(dialegesthai) 있는 것이며, 결정을 보아서 (대화하는 양자가) 동일한 것을 의심없이 긍정하게 될 때 이것을 영혼의 '판단'(doxa)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판단하기=말하기이며 판단=자신에게 침묵으로 말해진 로고스이다. 187a에서처럼 여기서도 で영혼 자신이 스스로と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 표현은 코이나 논변에서 で지각을 통한と 숙고와 대비되는 표현이었다. 지각을 통한 숙고의 결과가 바로 지각판단이라면 여기서 영혼 자신이 스스로 숙고하고 있는 것에 대한 로고스로서의 사고의 결과가 바로 doxa이며, 이 때의 doxa는 지각판단을 포함하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제2부에서 지각판단은 논의되지 않으며, 그것은 이미 제1부에서 논의되었다. 이 점은 제2부 마무리 논변(200d-201c)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이 논변에서 우리는 서로 상충하는 듯이 보이는 두 구분에 접하게 된다. 그 하나는 가르침과 설득의 구분이고, 다른 하나는 봄과 들음의 구분이다. 강탈사건이나 여타 폭력사건을 심리하는 아테네의 법정에서 소위 연설가 혹은 변론가들은 배심원들에게 사건의 진실을 가르칠 수는 없고, 배심원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믿게 만들(즉 배심원들을 설득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물시계에 의해 그들의 가용시간이 짧게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들에게 충분한 시간이 허용된다면 그들은 사건의 진실을 충분히 [혹은 적절하게] 가르칠(didaxai hikanōs)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198b에 따르면 가르치는 것은 앎을 넘겨주는(paradidonta) 것이다. 따라서 이 가르침/설득 구분논변에서는 앎의 전달가능성이 배제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본 자만이 알 수 있는(idonti monon estin eidenai: 201b8) 것들에 대해 배심원들이 들어서(ex akoēs) 판단함으로써 올바르게 확신했을 때 그들은 앎 없이 옳게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 봄/들음 구분논변의 요점은 앎에 필수적인 요소인 직접적 대면이 참된 doxa에는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며, 따라서 지각판단도 여기서 반박되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이 논변은 앞의 논변과 달리 앎의 전달가능성을 극단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두 논변이 보여주는 듯한 상충은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우선 우리가 전해받고 있는 아테네 법정에서의 재판과정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하여 추측해볼 때 첫째 논변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배심원들을 설득하는(혹은 시간이 허용된다면 적절하게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소송당사자들이 아닌 법률(혹은 수사학)전문가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들은 보통의 경우 목격자가 아니므로 그들이 전달하고 있거나 혹은 시간이 허락하는 경우 전달할 수 있다고 말해지는 것은 둘째 논변에 비추어볼 때 앎이 될 수 없고 기껏해야 참된 doxa이다. 이렇게 보면 첫째 논변에서도 앎의 전달가능성이 주어져 있다고 볼 만한 근거는 없게 되어 앎의 전달가능성에 있어서의 외견상 상충은 일단 해소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앎의 전달가능성에 주목하여 두 논변의 외견상 상충을 해소시키는 것만으로 전체논변의 함축이 충분히 드러난다고 볼 수 없다. 여기서 보다 주목을 요하는 것은 첫째 논변에서 시간이 충분히 허용되는 경우에 배심원(들)이 도달하게 되는 상태가 앎일 수 있는지 여부이다. 이 경우 연설가는 일어난 사건의 진실을 충분하고 적절하게 가르치며 배심원은 그것을 배운다. 이 때 배심원이 배운 것은 단순한 참된 doxa 이상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배심원은 숙고를 통해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밝히려고 애쓰고, 그 과정에서 연설가는 그가 옳게 판단하는 데 충분하고도 적절한 근거들을 제시하여 결국 배심원은 올바른 판단을 내리게 되는데, 이 때 그의 판단은 그저 일어난 일과 맞아떨어진다는 점에서 (우연히) 참인 것만은 아니다. 그의 참된 판단은 적절하게 근거지워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논변에서 두번째 테제 기각의 이유로 제시되는 바, 앎과 다르게 참된 doxa가 결여하고 있는 계기는 아마도 적절한 근거로서, 둘째 논변이 제시하는 봄의 결여라는 계기와 공존한다. 전자는 참된 doxa에서 앎으로의 전환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약한 반론인 반면, 후자는 전환가능성을 배제하는 강한 반론이라 할 수 있겠다. 첫째 논변에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질 경우의 배심원의 참된 판단 즉 적절하게 근거지워진 참된 doxa는 과연 앎인가? 사실 이 문제는 엄밀히 말하면 제2부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지만, 둘째 논변의 정신에 비추어 보면 이 경우도 일단 대답은 부정적일 것임에 틀림없다. 적절한 근거를 가진 판단도 직접적 대면이 전제되지 않은 경우 앎이 될 수 없다는 주장으로 해석할 수 있는 둘째 논변은 이제까지의 대화편 논의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제1부에서 앎의 후보로서 제시된 지각판단을 배제하고 영혼 자신의 숙고로부터 결과된 판단 중에 참인 것을 새로운 후보로 삼아서 전개해 온 제2부의 논의가 앎에 있어서 직접적인 대면 혹은 직관이라는 요소의 강조에 의해서 단절을 겪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아이테토스는 첫째 논변의 함축에 계속 주목함으로써 논의는 제3부로 넘어와서 で꿈と이야기의 내용과 함축을 논구하게 된다. で꿈と이야기는 이제까지의 논의들을 정리하면서 앎의 세번째 정의를 세우려 한다. 4.3. 제3부 で꿈と이야기의 해석에 있어서 기존입장들의 문제점 <1> で꿈と이야기 해석상의 문제 제기 이제 본격적인 분석을 위해 먼저 で꿈と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는 텍스트 부분(201d8-202c5)을 인용해보자. 자, 그럼 (자네의) 꿈 대신 (내) 꿈을(onar anti oneiratos) 들어보게. 왜냐하면 나도 어떤 사람들로부터(tinōn) 다음과 같이 들은 것 같으니 말일세: ぢ① 그것들로부터 우리 자신과 다른 것들이 합성되어 있는(syngkeimetha) 바 1차적인( 것들), 말하자면 원소들(ta prōta hoionperei stoicheia)은 로고스를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각각은 그 자체로써(auto kath' hauto hekaston) 이름만 부를 수 있고 다른 어떤 것을 덧붙여 말하는 것은 -있다[혹은 ...이다]라거나 없다[혹은 ...이 아니다]라고- 불가능하므로.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이미 존재[혹은 ...임](ousia)나 非존재[혹은 ...이 아님](mē ousia)를 그것에 덧붙이는 것이 될텐데, 누군가가 바로 그것 자체만을 말한다면 아무것도 그것에 덧붙여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해서(epei) で바로 그것と(auto), で저것と(ekeino), で각각と(hekaston), で...만と(monon), で이것と(touto)[혹은 で그と(to)] 및 다른 많은 그러그러한 것들도 덧붙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돌아다니면서 모든 것에 덧붙여지는데 덧붙임을 당하는 그것들과는 다르므로. 그런데 그것이 말해질 수 있고 자신의 고유한(oikeios) 로고스를 가진다면 다른 모든 것들 없이 말해져야 한다. 그런데 이 1차적인 것들 중 어떤 것도 로고스로써 말해지기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름만 가지고 있어서- 이름불려지는 것만 가능하므로. 반면에 이것들로부터 이미 합성된 것들은 그것들이 엮어져 있는(peplektai) 것처럼 그렇게 그것들의 이름들도 함께 엮어져서(symplakenta) 로고스가 된다. 왜냐하면 이름들을 함께 엮음(symplokē)이 로고스의 본성(ousia)이므로. 이리하여 원소들은 로고스 없고(aloga) 알 수 없으나(agnōsta) 지각은 되는 것(aisthēta)인 데 반해, 합성체들(syllabai)은 알 수 있고(gnōstai) 말할 수 있고(rētai) 참된 판단에 의해 판단할 수 있다(alēthei doxē(i) doxastai). ② 그런데(men oun) 누군가가 뭔가에 대한 참된 판단을 로고스 없이 잡을 때마다 그의 영혼은 그것에 관해 참되게 생각은 하고 있으나(alētheuein men) 아는 것은 아니다(gignōskein d' ou). 왜냐하면 로고스를 주고받을 수 없는 자는 그것에 대해 모르는 자(anepistēmōn)이므로. 그러나 로고스를 덧붙여 잡으면 이 모든 것들을 할 수 있게 되고 그는 앎에 관하여 완전한 상태가 된다(teleiōs pros epistēmēn echein).っ라고. 자네 자신은 그 꿈(to enhypnion)을 이렇게 들었는가, 아니면 다르게 들었는가?(번호매김과 강조는 인용자의 것) で꿈と의 で외부적 출처と 논의가 무성했고 해석가들 사이에서 거의 정설이 되다시피 했지만, 플라톤이 출처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점이 이 논의의 의미를 반감시킬뿐만 아니라 결정적인 결론을 얻기가 사실상 어렵다는 점 또한 이 논의의 생산성을 약하게 만든다. 필자가 판단하기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이야기의 출처보다는 오히려 위 인용문 ①(201e1-202b7)과 ②(202b8-c5) 사이에 간과할 수 없는 괴리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사실 런씨맨이 올바로 지적하는 대로 ②는 ①로부터 도출되기 어렵다. ①이 주장하는 바는 지각만 되고 명명만 되며 알 수는 없는 단순자들은 그 이름들이 로고스 속에서 결합될 때만 알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참된 doxa에 의해 doxazein될 수 있다는 점이고, ②가 주장하는 바는 참된 doxa가 앎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로고스를 덧붙여잡음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①에서 로고스는 지각/(참된) doxa(·앎)을 구분해주는 기준인 데 반하여, ②에서 로고스는 참된 doxa/앎을 구분해주는 기준이다. ①의 로고스가 바로 라일의 의미론적 해석이 플라톤이 앎의 필요조건이라고 간주했다고 보는 로고스라면, ②의 로고스는 파인 등은 플라톤이 앎의 필요조건이라고 간주했다고 보는 반면, 콘포드 등은 여기서 플라톤이 말하고 있지 않다고 보는 로고스이다. 요컨대 ①의 로고스가 진술 혹은 문장을 가리키는 logoss라면, ②의 로고스는 정의, 설명 혹은 근거 등을 지칭한다고 말할 수 있을 logosk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의미의 로고스 해석을 가진 ①과 ②가 で그러므로と(men oun)라는 말로 연결될 수 있는가? 런씨맨에 의하면 ①과 ②간의 불일치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202b8의 でounと의 추론적 힘을 최소화하는 방식과 202b7의 두번째 でkaiと를 で...뿐만 아니라と로 번역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는데, 어느 쪽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먼저 후자는 ぢ원소들이 로고스 없고 알 수 없으나 지각은 되는 것인 데 반해, 합성체들은 참된 판단에 의해 판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알 수 있고 말할 수 있다.っ라고 옮김으로써 원소도 판단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드러내려는 방식인데, 런씨맨이 옳게 지적하듯이 이는 아주 이상한 でkaiと의 용법을 상정하는 것이다. 또한 でkaiと의 그런 번역이 설사 가능하다 치더라도 ぢ참된 판단에 의해 판단될 수 있다っ라는 표현이 먼저 원소에 대한 기술인 전반부에 등장한 후 그로부터 그 표현이 합성체에도 적용되기를 기대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런 기술일 것이라는 점을 무시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문장의 자연스런 독해는 ぢ합성체는 참된 판단에 의해 판단될 수 있으나 원소는 그렇지 못하다っ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ぢ복합자에 대해 참된 doxa를 가질 수 있다는 で꿈と이론가의 주장이 원소들에 대해 참된 doxa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っ는 파인의 독해는 그럴듯하지 않다.) 여기까지는 런씨맨의 분석이 타당하다. 그러나 전자쪽 해결방식이 불가능하다는 그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는 데니스튼(J.D. Denniston)의 연구에 기대어 플라톤에서 でounと의 非추론적 의미는 대화체의 귀절들에만(예컨대 [카르미데스] 154d6, [파이돈] 61d3 등) 등장한다고 주장하는데, 오히려 데니스튼은 대화체 귀절이 아닌 곳에서도 플라톤이 이 말을 變移的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르기아스] 465d7-466a3). 202b8의 でmen ounと이 이런 의미로 사용된 것일 가능성은, 적어도 플라톤 용어연구의 결과만을 가지고 볼 때는 배제하기 어렵다. ①과 ②가 で그러므로と라는 접속어로 연결된다는 런씨맨의 관찰이 이런 일정한 제약을 가진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그를 계속 따라가보자. 그는 양자의 불일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결방식을 제시한다: 즉 플라톤은 다른 곳으로부터 끌어온 논변을 자신의 변증적 목적을 위해 통합시키고 있으며, ①만이 で꿈と이야기 자체이고 ②는 で꿈と이야기가 아니라 세번째 테제의 요약에 불과하다라고. 이런 그의 해결은 몇가지 점에서 불만족스럽다. 그의 해결방식이 でmen ounと에 대한 독단적 번역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지각/(참된) doxa(·앎)의 구분기준으로서의 로고스를 제시하는 ①만을 で꿈と이야기로 보면 참된 doxa/앎의 구분기준으로서의 로고스를 제시하는 논변을 들었다는 테아이테토스의 말(201c9-d3)은 넌센스가 될 것이고(그런 넌센스는 이 대화편에서 그 지적 능력이 격찬을 받고 있는 젊은 수학자에게 걸맞지 않은 것이다), 앞의 인용문에서 따옴표로 묶인 부분이 화법상 일관적일 뿐만 아니라 그 인용 후 소크라테스가 똑같이 들었는가를 묻고 테아이테토스가 시인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면, 그 중 일부만을 원래의 で꿈と이야기-외부적 출처를 가진-로 한정하고 나머지 일부를 플라톤 자신의 삽입으로 보는 것은 다소 작위적인 독해가 아닐 수 없다. 그런 독해상의 자연스러움을 포기하고 원래의 で꿈と이야기와 플라톤 자신의 삽입을 분리해야만 할 필연성은 발견하기 어렵다. 이제 で꿈と이야기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반론이 KTDL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AK에 대한 것이고, AK를 수반하는 KL과 AL 가운데서도 AL을 비판하는 데 초점이 있다는 파인의 주장을 염두에 두면서 소크라테스의 반론제기 부분을 검토해 보자. 파인의 주장대로 소크라테스가 KTDL 자체에 대해서는 일단 で그럴듯하다と고 인정하고, AK에 대해 불만족을 표명하면서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ぢ로고스와 옳은 doxa를 떠나서 무엇이 앎일 수 있겠는가?っ(202d6-7)라는 언명이 KTDL에 대해 긍정적 성격을 인정하는 표현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KTDL이 이후 206c 이하에서 로고스에다 어떤 값을 집어넣더라도 앎의 정의로서 만족스럽지 못함이 논의되고 있다는 점은 우리가 이 언명을 단순히 문자그대로 받아들여서 KTDL을 앎의 정의의 필요조건으로서 플라톤이 인정하고 있다는 결론-이런 결론은 콘포드와 라일 모두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며 파인도 마찬가지다-을 내리는 데 다소 주저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KTDL에 대해 긍정적인 듯한 이 언명과 KTDL에 대해 부정적인 듯한 로고스 해석 부분의 논의는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다음 절에서 다시 다루기로 하고 이제 で꿈と이야기 개진부분에서의 괴리가 뒤의 로고스 해석 부분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살펴보자. 소크라테스는 복합자에 못지 않게 단순자가 알려질 수 있다는 점을 길게 논의한 후에(즉 で꿈と이야기가 함축하는 AK를 반박한 후에), 앎의 정의로서 제안된 KTDL에서 로고스에 상이한 해석들을 줄 수 있음을 검토한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여기서 검토되고 있는 세 의미의 로고스는 상호배척적으로 제시된다기보다는 제2의미는 제1의미를, 제3의미는 제2의미를(따라서 제1의미도) 전제한 상태에서 보다 KTDL에 어울릴 만하게 그 외연을 점차 축소시키는 형태로 진전된다. 즉 말로써 사고를 표현함이라는 제1의미는 요소들을 열거함이라는 제2의미에 전제되어 있고, 이 두 의미는 다시 대상을 여타의 것들과 구별해 주는 징표의 진술이라는 제3의미에 전제되어 있다. 이 세 의미 모두 복합자에 대해서만 앎이 가능하다는 で꿈と의 AK 전제 하에서 검토되고 있으며, 제1, 제2의미는 진술 혹은 문장을 가리키는 logoss이며 제3의미는 정의를 가리키는 logosk이다. 이렇게 보면 앞에서 で그런데と(men oun)로 연결된 ①과 ②의 괴리는 세번째 테제인 KTDL에 상이한 로고스 해석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문제제기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2> 라일류 해석의 문제점 비판 이제 で꿈と이야기 해석에 있어서 기존 해석의 문제점들을 검토해 보자. 먼저 라일류 해석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1) 이 해석은 で꿈と이야기 개진 부분에서 제1부와 일정정도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보이는 부분을 설명해낼 수 없다. 즉 왜 지각가능한 것인 원소들의 합성체의 예로서 で우리と로 표현된 바 사람이나 음절이 제시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만족스럽게 대답할 수 없다. 2) 이 해석은 logoss와 logosk 모두 반박, 기각의 과정을 겪고 있다는 점을 무시하고 있다. 이 해석에 의하면 で꿈と이론은 이름의 기능을 명제적 복합자의 기능으로부터 구별하는 플라톤 자신의 이론이라는 것인데, 그런 구별이 플라톤의 중심테제라면 그 자신이 일정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검토하고 결국 반박, 기각되는 이론 속에 그것을 끼워넣는다는 것이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오해의 소지를 많이 남기는 표현방식인가 하는 것이다. 3) 앞에서 검토한 대로 で꿈と이야기에는 로고스의 의미의 일정한 轉移가 있는데, 라일의 해석은 logoss만을 で꿈と에 귀속시킨다(파인은 예외). 이런 해석은 で꿈と이 개진되는 문맥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앎의 특성으로서의 로고스를 너무 약하게 해석한다(즉 doxa/앎의 차별성을 제시해주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4) 이 해석은 면식적 앎/명제적 앎을 플라톤 자신이 선명하게 구분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이런 구분이 선명한 형태로 플라톤 자신에게 의식되었는가 혹은 그런 구분을 독자가 해주기를 그가 의도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그 대답이 부정적이라는 점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위의 1)과 관련하여, で꿈と이야기를 제1부와의 관련하에서 해석하자는 제안이 여러 해석가들에 의해 제출된 바 있다. 마이어호프(H. Meyerhoff)가 옳게 지적하는 대로 플라톤이 で꿈と을 서술할 때 앞에서(156f.) 이미 유사한 이론적 모델 혹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 바 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따라서 제1부의 서술과의 연관성을 고려하면 우선 여기서의 원소가 감각질을 가리키는 것으로 상정해볼 수 있으며, 이런 감각질의 이름을 모은 진술 혹은 판단에 앎의 성격을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이 で꿈と이야기 비판의 한 함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で꿈と이야기는 앎에 관한 제1부에서부터의 논의를 압축적으로 조망하고 전체논의를 정리하려는 의도하에서 제시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3> 콘포드류 해석의 문제점 비판 한편 콘포드류 해석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1) 이 해석은 대화편의 의도를 지나치게 축소시키며, 이전 대화편들과의 조화를 목표로 플라톤 자신의 생각으로 보이는 것까지도 모두 타인에게 돌린다. 그러나 앞에서도 살펴본 바 있듯이 이 대화편에서 나타나는 아포리아들 가운데는 형상론을 받아들임으로 해서 생기게 된 것들도 있으며, 그것들을 무시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앎의 정의가 형상을 상정하면 곧바로 아포리아에서 벗어나서 앎을 정의할 수 있게 된다는 보장도 없다. 2) 이 해석이 희망하는 것처럼 제4의 로고스가 나와도 앎의 정의가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적어도 이 대화편 내에는 없다. 물론 제3부가 で꿈と이야기의 조망(perspective) 하에서 논의되고 있다는 점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で꿈と이야기의 전제(구체적 개별사물들만이 알려질 수 있다는 전제)를 벗어나면 곧바로 KTDL이 앎의 정의가 될 수 있다는 점이 따라나오지는 않는다. 3) 이 대화편에서 플라톤은 앎의 대상으로서 형상이외의 것들(예컨대 태양, 테아이테토스나 소크라테스 등의 개별 인간, 헤시오도스의 마차, 재물탈취 따위의 강력사건 등)을 언급하고 그것들의 앎을 정의하고자 하는데, 그 정의가 실패하였다는 것만으로 그것들에 대해서 앎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까지도 플라톤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은 다른 대화편들과의 조화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는 해석인 것 같다. 이 대화편에서 플라톤은 이전의 교설을 확인하기 위해 고도의 기교를 사용하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입장 즉 현상계에 대한 앎에 일정한 지위를 부여하는 입장을 비록 전면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일단 긍정적 논의의 대상으로 받아들인 상태에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4) 이 대화편의 실수논의가 단순히 형상론 배제에 의해 생겨난 で보이기 위한 실수と에 불과하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문제제기 및 이후의 해결이라는 [소피스트]편과의 연결은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작위적이다. 게다가 콘포드의 해석방향이 옳다 해도 힉켄의 주장대로 [소피스트]편에서는 이 대화편의 실수문제 중 하나만, 즉 非존재[혹은 ...이 아님](mē on)의 문제만 형상 다름(heteron)의 도입을 통해 해결하고 있다는 점은 실수문제가 [소피스트]편에서도 부분적으로만 해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 그친다. 4.4. 로고스와 형상 : 중도적 해석의 입장 지금까지 우리는 이 대화편을 해석하는 기존의 두 입장이 갖고 있는 문제점들을 살펴보았는데, 그렇다면 이전 대화편들과 비교해 볼 때 이 대화편에서 플라톤이 보여주는 의미있는 발전을 인정하면서도(콘포드와 다르게), 이전 입장과의 조화가능성을 보여주는(라일과 다르게) 해석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 장에서 필자는 이 물음에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1> 지각, (참된) doxa, 앎의 구분기준 앞에서(4장 1절) 살펴본 대로 제1부에서 지각/doxa 구분은 명제적 내용을 가지느냐 여부가 기준이 아니며, 제1부의 핵심논변인 184b-186e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명제적 내용이 아니라 마음의 숙고행위이다. 가나야마(Y. Kanayama)가 올바른 해석을 제공하고 있듯이, 제1부에서 겪음/지각/doxa가 구분되며(179c), 우리가 감각질을 대하는 혹은 다루는 인지방식을 i) 고통을 겪는 것에 견줄만한 느낌, ii) 그것을 F(어떤 성질이나 특징)로서 감지함(암묵적 판단), iii) 명시적 판단 등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할 때, 지각은 i)에 해당하는 겪음과 iii)에 해당하는 doxa 사이에 위치하는 ii)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i)은 주의, 감지, 명제적 내용 등의 요소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ii)와 구별되며, ii)는 언어와 단어의 사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iii)과 구별된다. 이 해석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지각과 doxa는 명제적 내용을 가지느냐 여부에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명제적 내용이 언어구조 속에서 명시화되느냐 내지는 숙고나 생각을 통해 마음이 적극적으로 존재와 진리에 이르려고 열망하느냐(eporegesthai), 즉 공통된 것(koina)의 파악에 다가가느냐 아니면 개별적이고 私的인 것(idia)에만 머무느냐 여부에서 구별되며, 이런 구별이 제1부의 핵심적 주제이다. 이런 숙고행위의 결과를 doxa라고 간주하는 기술(189e-190a)을 토대로 논의를 전개하는 제2부는 따라서 이런 숙고를 거친 판단들을 앎의 후보로서 다루게 된다. 이 숙고를 거친 doxa-그 중 거짓인 것은 제외하고 참된 doxa-는 제2부 마무리부분에서 결론의 참 여부에서가 아니라 대상에 직접 대면하는가 여부에서 앎과 차이나는 것으로 그려진다. 여기서 들어서 판단하는 자의 참된 doxa와 대비되는 목격자의 앎은 대상 혹은 사실에 대한 직접적 대면의 성격을 가진다. <2> 인식동사를 사용하는 플라톤의 용어법을 통해 나타난 앎의 성격 이제까지의 분석(특히 3장 2절)을 토대로 할 때, 플라톤에 있어서 앎은 면식적 성격과 명제적 성격 간의 불가피한 연관 하에서 논의된다. 이는 플라톤 언어에 있어서 자연스러웠던 것인 바 진리(alēthes)와 존재(on)의 불가분적 관계에 크게 영향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거쓰리의 분석에 따르면 전자는 참(true)일 뿐만 아니라 실재적(real)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며, 후자는 실재적일 뿐만 아니라 참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면식적 앎과 명제적 앎의 구분은 で알다と 동사의 두 용법-즉 목적어로 대상 4격이 오는 경우와 that절이 오는 경우-의 구분과 맞물려 있는데, 현대 불어(connaître/savoir)나 독일어(kennen/wissen), 고전 라틴어((co)gnoscere/scire)의 경우와 달리 희랍어의 경우 이런 구분에 그대로 대응하는 인식동사의 용법을 찾아보기 힘들다. 즉 gignōskein;gnōnai/ epistasthai(;eidenai) 간의 구분이 위 언어들에서의 구분에 그대로 대응하지 않는다. 플라톤 텍스트에서 이런 식의 대응을 상정하는 햄린, 레셔 등의 논의는 전거상의 문제점들이 많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 대화편에서 (그리고 다른 여러 대화편들에서도 마찬가지로) 인식동사를 사용하는 플라톤의 어법을 살펴보면 플라톤이 어떤 대상에 대한 앎을 그 대상이 바로 그것인 바의 그 무엇(to ti; whatness)을 아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전자는 대상에 대한 명제화 이전의 어떤 직관 같은 것을 가리키고(で발견한다と, で본다と 등), 후자는 그 대상의 무엇에 대한 언표를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적인 앎의 논의들에서 명제적 앎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과 플라톤의 그것이 구분됨을 본다. 즉 현대적인 그것들은 플라톤의 입장에서 보면 진정한 앎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존재 즉 무엇(to ti)을 보여주기보다는 어떠어떠함(to poion ti)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그의 저작이라고 인정되고 있는 [제7서간] 342a7-344d2에서 그는 앎의 단계를 나열하면서 이름(①)과 로고스(정의)(②)와 참된 존재의 모상(③) 및 이 셋을 통해 생겨나는 앎(epistēmē)(④), 이 넷을 잡아야 참된 존재(alēthōs on)(⑤)에 대한 완전한 앎(teleōs epistēmē)에 참여할(metochos)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이 넷(①, ②, ③, ④)은 언어(logos)의 허약함 때문에 존재 즉 무엇을 보여주기보다는 어떠어떠함을 보여주려 하므로 이 넷 각각은 영혼의 무엇(to ti) 추구에 있어서 아포리아와 불명료함(asapheia)을 제공하는 원인이다. 여기서는 참된 doxa와 ①, ②, ③에 대한 앎(④)이 동렬에 배열되어 있는 점(342c4-5)이 특이하며 ①, ②, ③을 통한 앎과 ⑤에 대한 완전한 앎이 구분되어 있다. <3> 두 종류의 앎 상정과 아포리아 제1부에서 지각/doxa의 구분기준으로서 부각되지 못한 명제적 성격을 갖느냐 여부는 で꿈と이야기에서도 부분적으로만 고찰될 뿐 지각/앎 구분의 결정적 기준으로 역할하지는 못한다. (단지 여기서는 단순자의 앎을 부정하는 견해와 감각질 혹은 감각대상의 복합물에만 앎을 인정하는 견해를 비판하는 것이 주목표다.) 다시 말하여 진술 혹은 문장으로서의 logoss는 지각/(참된) doxa(및 앎)의 구분기준으로 설정되지만, 사실상 지각도 명제적 내용을 포함하며 단지 코이나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데서 차이난다는 점이 제1부에서 논의되었으므로, logoss는 명제적 내용 포함여부보다는 코이나 사용여부를 가리키는 기준이다. logoss에 의해 지각은 배제되고(이것이 で꿈と 인용문 ①) 다시 참된 doxa/앎의 구분기준으로서 logosk(정의)가 제시되는데(이것이 で꿈と 인용문 ②), 이것 역시 doxa차원에 포함되거나 아니면 순환적 정의로 귀결되거나 한다는 이유로 기각된다. 이 두 로고스는 で꿈と이야기의 전제 하에서 고찰되고 있기는 하지만 で꿈と이야기의 전제를 벗어나서 형상을 대상으로 하는 동일 형식의 정의를 구성하고 그에 걸맞는 제4의 로고스 해석을 부여한다고 해도 이 대화편에서 추구되고 있는 앎의 정의에 곧바로 도달하게 되리라는 보장은 주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이 대화편에서 플라톤이 관심을 두고 있는 앎은 이전 대화편에서의 그것보다 그 외연이 확대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형상에 대한 앎과 더불어 현상계에 대한 앎에도 일정정도의 긍정적 성격을 부여한 상태에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기에 이 대화편은 앎의 단도직입적인 정의를 얻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위에서 언급한 [제7서간]의 부분이 암시하는 바를 따라 이 대화편을 다시 살펴보면 플라톤이 이 대화편에서 두 종류의 앎을 상정하고 있다는 것은 앞의 で꿈と 인용문 ②의 말미에서 で앎에 관하여 완전한 상태と(teleiōs pros epistēmēn echein: 202c4-5)를 상정하는 데서 간접적으로 시사된다. で꿈と이야기는 참된 doxa에 logosk를 덧붙여 잡으면 앎에 관하여 완전한 상태 즉 완전한 앎에 도달한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이제까지의 논의에서는 보이지 않던 で완전한と(teleios)이라는 부가어가 앎에 덧붙여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부가어가 별다른 의도없이 사용된 것이 아니라면 앎에 있어서의 두 종류의 구별 즉 완전한 앎과 불완전한 앎의 구별이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부가어가 다소 갑작스럽긴 해도 별다른 반성없이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은 で꿈と이야기의 AK 비판 논변(202c-206b) 이후 KTDL에 적용가능한 로고스의 해석들을 검토하는 논변(206c-210b)을 시작하면서 다시 제3부(나아가 대화편 전체)의 문제(to prokeimenon: 206c2)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소크라테스의 언명에 이 표현이 다시 (최상급의 형태로) 언급된다는 데서 드러난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현하의 문제가 ぢ참된 doxa와 더불어 로고스가 덧붙여진 것이 가장 완전한 앎(hē teleōtatē epistēmē)이 된다っ(206c3-5)는 언명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앎의 정의로서의 이 KTDL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임이 밝혀지는데, 그런 결론에 이르는 논변과정에서 플라톤은 두 종류의 앎을 모두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두 종류의 앎의 상정은 [파이돈]편에서 언급된 바 있는 두 종류의 존재의 상정(thesis)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이후 [필레보스]편에서 다음과 같이 명시적인 형태로 언급된다: ぢ우리에게 있어서 다음과 같은 점이 동의되었다: 즉 어떤 쾌락이 다른 쾌락보다 더 참되게 쾌락이며 어떤 기술(technē)이 다른 기술보다 더 엄밀하다(akribestera). [...] 그리고 (어떤) 앎은 (다른) 앎과 다르다. 즉 하나는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들을 바라보는(apoblepousa) 데 반해, 다른 하나는 생성·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늘 동일한 관점에서 동일한 상태로 존재하는 것들(kata tauta [...] kai hōsautōs onta aei)을 바라보는 것이다. 참의 견지에서 숙고할 때, 후자가 전자보다 더 참되다(alēthestera)고 우리는 결론내렸다.っ([필레보스] 61d7-e4: 강조는 인용자의 것) 이 인용문에서 보듯이 완전한(혹은 진정한) 앎은 형상을 대상으로 하는 앎이며 불완전한 앎은 현상계를 대상으로 하는 앎이다. 결국 현상계에 대해 일정정도의 긍정적 지위를 부여하면서(콘포드의 해석과 달리) 그것의 앎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형상에 대한 앎이 전제로 깔려 있어서 양자를 포괄하는 정의가 이루어져야 하기에 아포리아로 끝난다(이 점에서는 이 아포리아가 플라톤 자신의 것이라고 보는 힉켄의 해석이 오히려 그럴듯하다). 비록 정의는 어렵지만 현상계의 앎이란 것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현상계에 대한 참된 doxa와 어떤 의미의 로고스를 떠나서 있을 수 없을 것이다(202d6-7). 그러나 이런 참된 doxa + 로고스가 곧바로 진정한(완전한) 앎은 되지 못하며(206c3-5 + 210b1-2) 따라서 완전한 앎(즉 형상의 앎)은 현상계에 대한 앎(doxa를 떠나지 못하는)과 구분된다. 결국 양자를 포괄하는 앎의 정의는 찾기 어렵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이런 아포리아에도 불구하고 형상에 대한 앎으로서의 진정한 앎에 대한 확신은 유지되며 현상계에 대한 앎은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doxa차원에서 멀리 벗어날 수 없다는 테제 역시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변한 것이 있다면 현상계에 대한 긍정적 관심과 결국 실패로 끝났긴 하지만 그것에 대한 앎의 가능성 여부를 타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후기에 와서 플라톤은 이전에 일종의 가설로 놓고 들어갔던 교설들이 가진 난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여전히 그 가설에 대한 확신은 유지된다. <4> 이름/로고스 구분 끝으로 で꿈と이야기의 이름/로고스 구분을 이후 대화편들에서 구체화되는 이름(onoma)/로고스(logos)/실재(ousia) 혹은 사물자체(auto tourgon, to pragma auto)라는 트리오와 비교해 보자. 이 트리오가 등장하는 이후 대화편들의 서술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각 사물 혹은 실재(ousia)에 대해 두가지 방식의 지칭(hekaterōs prosagoreuein)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이 이름과 로고스(정의)이다. 각 사물을 충분히 아는 자는 이 둘 다를 알아야 한다. 각 사물 자체를 파악하기 위한 디알렉티케의 실행과정에서 우리는 이름만이 아니라 그 로고스를 충분히 잡아서 이름과 더불어 그 로고스에서도 서로 합의해야 한다. (이 대화편들에서의 이름/로고스 구분은 앞서의 logosk 해석(정의)과 잘 연결된다.) 이 대화편들에서는 동일 실재에 대해 그 지칭방식으로서 이름과 로고스가 있을 수 있다고 서술되는 반면, '꿈'이야기에서는 단순자에는 이름만 있을 수 있고, 로고스는 복합자에 대해서만 가능하다고 서술되며 이름은 지각과, 로고스는 앎과 연관된다. 이런 차이는 で꿈と이야기가 플라톤 자신의 견해와 일정한 거리가 있음을 말해준다. 이 후기 대화편들에서도 (초·중기에서처럼) 로고스를 줄 수 있음은 아는 자의 표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이 앎의 증명이 될 수 있는 충분조건일 수는 없다는 점이 [테아이테토스]편에서 보여지고 있으며 이후 [제7서간]에서 이 점은 더욱 분명히 표명된다. 즉 초·중기 대화편의 소크라테스에게는 정의할 수 있는 능력 그 자체가 앎의 증명이었으나 플라톤의 발전된 교설에서는 이것조차도 충분치 못했던 것 같다. 5. 정리 및 반성 이제까지 우리는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편을 그 마무리 부분인 제3부를 중심으로 하여 해석상의 여러 문제들을 검토하였다. 우리의 논의가 옳다면 플라톤은 이 대화편에서 KTDL을 앎의 완전한 정의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가 로고스를 라일류 해석처럼 logoss로 받아들이건, 전통적 해석처럼 이 대화편에서 유보된 것으로 받아들이건, 아니면 파인처럼 logosk로 받아들이건 간에 앎을 일의적으로(즉 KTDL로) 정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는 것이 이 대화편의 표면상 결론이며, 이 표면상의 결론을 뒤집을 만한 대화편 이면의 플라톤의 의도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런 식의 부정적 귀결 즉 아포리아는 불만족스러운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여러 해석들이 제출된 바 있으나, 우리가 그런 전제를 반드시 받아들여야만 할 필연성은 발견되지 않으며 이는 플라톤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가 이전 대화편들에서와는 사뭇 다른 태도로 현상계 및 앎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은 이 대화편 도처에서 읽을 수 있다. 이런 태도를 단순히 형상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한 교묘한 방법으로 이해하는 전통적 해석은 이 점을 올바로 드러내지 못하고 플라톤의 의도를 지나치게 축소한다는 한계를 가진다. 그렇지만 플라톤이 이 대화편에서 이전의 견해를 버리고 앎의 명제적 성격을 드러내려 했다는 대안적 해석 역시 텍스트 상의 근거가 미약하며, 상호연관 모델이라는 수정된 형식의 KTDL을 제안하고 있다는 파인의 해석 또한 플라톤의 원래의 의도를 지나치게 확장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플라톤은 겪음/지각/doxa의 구분을 통해 지각과 doxa가 명제적 내용을 가지느냐 여부에서가 아니라 코이나를 잡느냐 여부에서 구분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으며, 따라서 명제적 내용을 가지느냐 여부가 앎과 앎 아닌 것과의 절대적 구분점이라는 식의 의견을 개진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에게 있어서는 면식적인 앎과 명제적인 앎이 구별되지 않은 채로 있다. 이런 점에서 양자의 구별을 플라톤의 것으로 전제하는 의미론적인 해석은 전거상의 지지를 확보할 수 없다. 앎의 정의에 실패하게 된 이 대화편의 아포리아는 플라톤이 で완전한と 앎으로서의 형상에 대한 앎과 더불어 참된 doxa와 로고스를 떠나서는 규정될 수 없는 현상적 앎을 하나의 로고스(정의)로 파악하고자 한 데서 연유한 것이며, 이런 앎의 두 종류 상정은 이전 대화편에서의 앎에 대한 서술과 모순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관심의 확장 내지는 태도의 변화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아포리아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이 형상에 대한 앎으로서의 진정한 앎에 대한 확신을 유지하고 있으며, 현상계에 대한 앎은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doxa의 차원을 떠날 수 없다는 생각 역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단순히 신화적으로 혹은 가설적으로 놓고 들어갔던 교설들이 비판적으로 조명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테아이테토스]편을 여러 초·중기적 잔재(예컨대 정의추구→아포리아로 종결, 여담에서의 형상의 암묵적 긍정, 무지의 자각 강조 등)에도 불구하고 후기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게 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이제까지의 논의는 [테아이테토스]편을 가능한 한 대화편 내에 머물러서 그 내적 상호연관을 통하여 해석하고자 하였는데, 이런 논의의 결과들은 비슷한 시기의 유관 대화편들(특히 [파르메니데스]편과 [소피스트]편 및 [정치가]편)에 대한 심도있는 분석과 연결되어 거시적으로 조명되어야 한다. 아마도 이 대화편에서 보여지는 KTDL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참된 doxa 일반에다가 뭔가(즉 로고스)를 덧붙이는 모델(additive model)-즉 で로고스를 가진と(meta logou)의 で...를 가진と(meta)을 단순한 부가(addition)로 간주하는 KTDL 해석-을 가지고는 앎을 제대로 설명해낼 수 없다는 점의 강조일지 모른다. 우리가 이후의 후기 대화편들에 나타나는 디알렉티케의 모습을 계속 추적하면, 참된 doxa들의 집합 중 어떤 것들 즉 대상의 우시아 혹은 그것의 그것임(to ti)을 드러내줄 수 있을 것들만이 KTDL의 값으로 고려되고, 로고스가 나눔과 모음의 방법을 통해 대상들간의 상호연관을 포착함으로써 대상의 우시아를 드러내줄 수 있는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을 때, 그런 참된 doxa와 로고스의 적절한 결합관계-단순한 부가가 아닌-로 앎을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글에서는 이것에 대한 보다 심화된 연구를 포괄하지 못했으며, 이후의 철학사적 논의맥락 속에서의 적절한 자리매김과 더불어 차후의 과제로 남기겠다. 참 고 문 헌 1) 원전 Platon, Theaetetvs, in Burnet, J.(ed.), Platonis Opera, Vol. 1 (Oxford Clarendon Press: 19001-19878-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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