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편 Ⅴ권에서 '많은 아름다운 것들'(ta polla kalla)은 특수한 대상들인가?
정준영(성균관대 )
Ⅰ
플라톤은 {국가}편 V권에서 인식(epist m )과 판단(의견:doxa)을 각기 다른 능력(힘:dynamis)으로 구별하고 있다. 그는 이 두 능력을 구별하는 근거를, 각기 다른 대상과 관계하고 다른 기능(ergon)을 한다는 데서 찾고 있다.(477cd) 그는 두 능력을 구별하기 위해 먼저 인식은 '있는(인) 것'(to on)에, 무지는 '있지(이지) 않은 것'(to m on)에 상관한다고 말한다.(477ab,478c) 그리고 플라톤은 "동일한 대상에 관계하며 동일한 작용(기능)을 해내는 것은 동일한 능력으로 부르되, 다른 대상에 관계하여 다른 작용(기능)을 해내는 것은 다른 능력으로 부른다"(477d)는 가정에서, 판단의 대상(ta doxasta, to doxaston)은 있음(임)과 있지(이지) 않음 양쪽에 관여하는 것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판단의 대상은 전통적으로 가지적(可知的) 영역(to no tos topos)의 것인 이데아(idea, eidos)와 대비되는 특수한 대상들(particular objects)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의 대상에 대한 예로 텍스트에서 제시되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ta polla kala)과 관련해서 몇몇 학자들이 중요한 반론을 제기한 적이 있다. 일찍이 머피는 "ta polla(여럿, 많은 것들)는 엄밀한 의미에서 개체(individuals)를 지시한다기보다는 특수한 유형에 가까운 것(quasi-specific types)을 지시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나아가 거슬링은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특수한 것들(particular things)이나 특수한 대상들로 보면 텍스트를 이해할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하기까지 한다. 이들의 주장은 오랜 동안 다른 연구자들에게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978년에 와서야 화이트에 의해 거슬링의 견해에 대한 논박이 시도된다.
머피나 거슬링의 견해가 오랜 동안 논의의 주 무대에 오르지 못한 것은, 그들의 견해가 플라톤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 방식과 상치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인 듯하다. 전통적인 플라톤 이해에 따르면, 이데아와 특수자들을 구분하는 것은 플라톤의 가장 기초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통적으로는 플라톤이 두 세계설(Two-World Theory)을 펼쳤다고 생각되었음에랴!
그러나 필자는 거슬링의 견해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나아가 필자는 거슬링이 제기한 문제를 제대로 고려해야만 플라톤이 의도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슬링의 견해에는 많은 애매한 구석이 있고, 또 지나친 주장을 펼치기도 하기 때문에 화이트의 비판이 모두 부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필자의 생각에 이러한 논쟁은 기초적인 개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서 비롯된 측면이 없지 않다. 필자는 거슬링이 제기한 문제를 거슬링과는 다른 개념을 사용하여 분석하고 거슬링과 화이트 등의 입장을 비판한 뒤, 이것이 플라톤 해석에 미치는 영향을 간략히 제시해 볼 것이다.
Ⅱ
플라톤 철학에서 '판단의 대상'은 보통 특수한 대상들로 간주되며, 대립적인 특성들(opposite properties)을 갖는 것으로 제시된다. 이를테면 우리가 살펴 보려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과 연관해서도 플라톤은 "이 많은 아름다운 것들 가운데 추해 보이지 않을 그런 것이 있을까?"(479a)라는 반문을 던지기까지 한다. 또한 플라톤은 우리가 큰 것들이라거나 작은 것들이라 말하게 될 그런 것들이 각기 그 양쪽에 언제나 관계할 것이라고 말한다.(479b) 그리고 그는 이것을 "있음(임)과 있지(이지) 않음 양쪽 모두에 관여하는 것"으로 표현한다.(478e) 이와 같은 언급은 {국가}편에서도 숱하게 등장하고 있지만, {파이돈}편에서도 유사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판단의 대상이 되는 특수자들(particulars)은 모순적인 처지에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게 된다. 어떤 것이든 있으면서(이면서) 있지(이지) 않은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플라톤 철학에서 특수자들의 존재론적 지위는 애매하거나 불합리한 것으로 남게 된다. 이런 불합리는 플라톤 철학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자 할 때 아주 심각한 문제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알렌과 같은 이는 플라톤이 이데아를 끌어들이는 대표적인 논변을 '대립자들에 의거한 논변'(argument from opposites)으로 규정한 바 있다. 플라톤은 '감각에 의해 지각될 수 있는 것들'(ta aisth ta)이나 '판단되는 것들'(ta doxasta)이 언제나 대립적인 것들을 함축한다고 보았으며, 이것이 세계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이데아를 도입했다는 것이다. 즉 플라톤의 존재론에서 핵심적인 것은 보통 이데아 이론으로 알려져 있는데, 플라톤이 이데아를 도입하는 논변 가운데 하나가 대립자들에 의거한 논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알렌의 주장은 {국가}편뿐 아니라 다른 대화편에서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이런 관점이 맞다면, 이데아 이론은 대립적인 존재를 가정함으로써 도출된 것이기 때문에 이론의 정합성이 깨질 수 있으며, 이런 점에서 특수자들의 지위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파이돈}편 102이하를 보면 플라톤은 특수자들이 대립적 특성들을 지니기 때문에 상충(conflict)의 문제를 낳으며, 이것을 이론적으로 해결하려면 이데아가 도입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를테면 "심미아스가 소크라테스보다 키가 크지만, 파이돈보다는 작다고 말할 경우"는 상충의 문제를 낳는데, 플라톤은 이러한 문제를 이데아를 도입하여 심미아스가 큼의 이데아에 관여(metechein)할 때는 크지만, 작음의 이데아에 관여할 때는 작게 된다고 설명한다.
알렌은 플라톤의 이러한 논변을 잘 부각하고 있다. "대립자들이 대립자들을 함축한다는 것이 인정된다면, 그 대립자들을 내포하는 용어들의 뜻이나 의미는 이런 용어들이 적용되는 사물들과 동일시될 수 없다. 만일 F와 G가 대립자들이라면, 'F'와 'G'는 뜻에 있어서 다르다. 그러나 가정에 따라, F인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또한 G이고 역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만일 'F'와 'G'의 의미가 F인 사물들 및 G인 사물들과 동일하다면, 'F'와 'G'의 의미는 동일할 것이다. 이것은 불합리하다." 이것을 풀어서 설명해 보면, 이를테면 아름다운 것들은 추한 것들인데, 아름다움(F에 해당된다.)과 추함(G에 해당된다.)은 대립자들인 만큼 '아름다움'과 '추함'은 의미에 있어서 다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이 대립적인 것들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가정에 따라 대립자들은 대립자들을 함축하며, 따라서 아름다운 것들은 추한 것들을 함축하게 된다. 이것은 앞서 심미아스의 예처럼 큰 것들 가운데 하나인 심미아스가 작은 것이 된 데서 확립된 가정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움'과 '추함'의 의미가 아름다운 것들 및 추한 것들과 동일하다면, 아름다운 것들이 추한 것들인 만큼, '아름다움'과 '추함'의 의미 또한 동일하게 되어 불합리한 결과가 도출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들이나 추한 것들과 같은 특수자들 이외에 이러한 특성이 성립하는 이데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특수자들과 따로이 설정되는 특성을 유명론적 입장에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어떤 특정한 용어의 의미를 바로 그것이 지시(reference)하는 것에서 찾고 있으며, 이런 맥락에서 아름다움이나 추함과 같은 특성은 존재론적 개입(ontological commitment)을 하게 된다. 따라서 아름다움이나 추함과 같은 이데아가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렇게 볼 때 특수자들이 대립적인 것들이라는 점이 플라톤 철학에서 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플라톤이 이데아를 도입하는 논변 가운데 하나라면, 플라톤 철학은 심각한 난점을 지닐 수도 있다. 대립자들에 의거한 논변의 핵심적 내용인 특수자들이 대립적 특성들을 지닌다는 주장이 어떤 특수자이든 있으면서(이면서) 있지(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플라톤의 존재론에서 특수자들은 모순적 존재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데아 이론은 모순적 존재를 가정하여 성립한 것이기에 이론의 설득력은 반감될 수밖에 없겠기 때문이다.
Ⅲ
{국가}편 V권에서 '많은 아름다운 것들'은 바로 이런 면에서 추한 것들로 언급된다. 그리고 거슬링의 문제 제기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특수한 것들로 보면, 이런 언급이 불합리해 보일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거슬링은 무엇보다도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등장하는 문맥에 주목하고 있다. 플라톤은 475b에서부터 V권 말미까지 철학자(애지자)를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hoi philotheamones) 및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들'(hoi phil kooi)과 대비하고 있는데, 문제가 되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은 다음과 같은 논의를 통해 등장한다.
"...'아름다운 것(아름다움) 자체'(auto to kalon)라든가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한결 같은 상태로 있는' 아름다움 자체(auto kallos)의 어떤 '본모습'(이데아)도 전혀 믿지 않으면서 '많은 아름다운 것들'(polla ta kalla)은 믿는 고지식한 사람(...), 저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더러 내게 말하게 하고 대답하게 하라고 말일세. '보십시오. 이 많은 아름다운 것들(ta polla kalla) 가운데 추해 보이지 않을 그런 것이 있습니까?(...)'라고 말일세."(478e-479a)
이에 대해 글라우콘은 "이것들(많은 것들, 여럿의 것들)은 어느 면에서는 아름다우면서도 또한 추하게 보이는 게 필연(anank )적이"라고 대답한다.(479b) 거슬링의 핵심적인 주장은 바로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특수한 대상들로 보면, 이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특수자들이 대립적인 특성들을 소유할 수(can)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특수자들이 불완전하게 양쪽의 특성 모두를 소유할 수밖에 없다(must)는 것을 의미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올바른 행위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모든 올바른 행위가 또한 올바르지 않게 나타난다는 진술을 반대자들(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왜 받아들여야 하는지가 전혀 명백하지 않다는 것이다. 거슬링은 더나아가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진정한 대상으로 취하면 플라톤이 물리적 대상의 지위와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설명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는데, 479d에서 소크라테스가 논의의 내용을 요약할 때 정작 대상에 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없다고 분석한다. 그래서 거슬링은 "아름다움이나 다른 여러 가지 것에 관련된 다중(多衆)의 'ta nommima'가 '있지(이지) 않은 것'과 '순수하게 있는(인) 것'의 중간 어딘가에서 맴돌고 있다"는 479d의 언급에서 "ta nommima"를 관례(customary rules)로 해석한다. 즉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대체하는 말로 보이는 "ta nommima"가 특수자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볼 수 없는 많큼, '많은 아름다운 것들'은 특수한 대상들이 아니라 유형(type)으로 봄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화이트는 거슬링이 주장하는 유형의 예를 발견할 도리가 없다는 점에서 비판한다. 이를테면 화이트는 거슬링의 주장을 "...라고 불리는 유형은 그것의 개별자들(tokens) 가운데 어떤 것은 두배이고 어떤 것은 반이라는 점에서 두배이면서 반이다"와 같이 이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이때 빈 칸에 들어갈 예를 생각해 낼 수 없다고 비판한다. 이런 점에서 화이트는 반이면서 두배로서의 다른 유형들을 갖는 유형들의 경우와 반이면서 두배로서의 개별자들(tokens)을 갖는 유형들의 경우를 거슬링이 혼동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화이트는 거슬링의 기초적 물음, '모든 올바른 행위가 또한 올바르지 않게 나타난다는 진술을 반대자들(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왜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서, 플라톤의 전체 논증은 어떤 이에게는 올바르게 나타나지만 다른 이에게는 부당하게 나타나는 것에 근거한다고 답변한다. 즉 우리로서는 아닐지 몰라도 플라톤으로서는, 현재 상황에서 우리가 올바른 행위로 판단하는 것보다 더 올바른 행위가 어떤 상황에서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음직하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479b에서 "anank "의 의미를 너무 강조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ta nommima"의 문제와 관련해서 화이트는 "ta nommima"를 'opinions'로 해석하면서, 이것은 대상들의 특성을 그 대상들에 관한 의견에 귀속시키는 환유적 용법이기에, 플라톤이 {국가}편 V권에서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특수한 대상들로서 논의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Ⅳ
결국 거슬링과 화이트의 논쟁은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유형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특수한 대상들로 볼 것인가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약만으로는 그들의 논쟁이 왜 발생했는지 별로 분명하지 않을 듯싶다. 필자의 생각에 문제의 출발점은 플라톤이 판단의 대상에 대해 '있으면서(이면서) 있지(이지) 않다'는 규정을 한 데서 시작된다. 이런 규정을 받아들이면 판단의 대상은 모순적인 것이 될 터이고, 이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에 문제의 발단이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오웬은 '대립자들의 공존'(compresence of opposite)이라고 표현했는데, 크로스와 우즐리와 같은 이들은 플라톤이 실제로 모순적인 것을 언급했으며, 이것은 플라톤이 관계 논리를 오해했던 데서 비롯된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이런 견해에 대해 진지한 반박을 가하고 있다. 이를테면 {국가}편 436b이하에서는 "동일한 것이 동일한 부분에 있어서 그리고 동일한 것에 대해서 상반된 것들(대립적인 것들:t nantia)을 동시에 행하거나 겪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언급되고 있는데, 이 언급을 고려하면 플라톤이 V권에서 모순적 존재를 가정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로 436b이하의 언급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을 예상케 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크로스와 우즐리의 주장대로 플라톤이 모순적인 것을 가정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렇다면 '있으면서(이면서) 있지(이지) 않다'는 규정은 실제로는 특수한 대상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유형에 대한 것이라는 거슬링의 견해가 설득력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거슬링의 견해에 따르면, 플라톤이 모순적인 특수자들을 가정한 것으로 보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앞서 3절에서 인용한 부분(478e-479a)을 보면 플라톤은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고지식한 사람이 믿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또한 '많은 아름다운 것들'은 판단의 대상 가운데 하나로 언급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특수한 대상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거슬링의 논변은 텍스트 문맥을 고려할 때 받아들이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이에 대해 블라스토스는 거슬링과는 달리 전통적 입장을 고수하면서, 플라톤이 '많은 아름다운 것들'로 개체들(individuals)을 의미한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블라스토스 역시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모순적인 것으로 간주하는가?
블라스토스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추한 것들로 언급되긴 하지만, 플라톤이 그것들을 자기 모순적인 것으로 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플라톤이 'x is F and not-F'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 'x is F in relation to y, and not-F in relation to z'을 의미한 것으로 본다. 즉 텍스트의 'x is F and not-F'는 'x is F in relation to y, and not-F in relation to z'에 대한 생략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그가 주목하는 대목은 {향연}편 211a 부분이다.
"아름다움 [자체]는 어떤 점에서 아름답고 어떤 점에서 추한 것도 아니고, 어떤 때는 아름답고 어떤 때는 추한 것도 아니거니와, 어떤 것에 비해서는(어떤 것을 관계로) 아름답고 어떤 것에 비해서는(어떤 것을 관계로) 추한 것도 아니며, 어떤 사람에게는 아름답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추하다는 점에서 어떤 경우에는 아름답고 어떤 경우에는 추한 [그런] 것도 아니다."
이런 언급을 보면, 아름다움 자체는 특수한 맥락(context)에 따라 대립적인 것이 되는 그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특수한 아름다운 것들의 경우는 어떤가? 블라스토스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의 경우도 특수한 맥락에 해당하는 한정사를 부가하면, 플라톤이 모순적인 것을 주장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어떤 아름다운 것이 다른 관점이나 다른 때, 그리고 다른 것에 비해서(다른 것을 관계로), 다른 사람에게 추하게 되는 일상적인 경우를 떠올릴 수 있고, 이 경우에는 특수한 맥락에 의해 한정이 되었기에 모순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블라스토스의 관점에 서면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특수한 대상들(혹은 개체들)이라는 전통적 입장을 고수하면서 그것들이 모순적인 것이라는 난점은 피할 수 있게 된다.
Ⅴ
그렇다면 애초에 "이 많은 아름다운 것들 가운데 추해 보이지 않을 그런 것이 있을까?"라는 텍스트의 반문을 통해 거슬링이 제기한 물음은, 생략법적 표현을 고려하지 못한, 잘못 놓인 물음인가? 하기야 플라톤은 인식의 대상을 단순히 '있는(인) 것'으로 표현했다가 '완벽하게 있는(인) 것'(to pantel s on)이나 '순수하게 있는(인) 것'(to elikrin s)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며, 무지의 대상에 대해서는 단순히 '있지(이지) 않은 것'으로 표현했다가 '어떤 식으로도 있지(이지) 않은 것'(to on m da )이라거나 '전적으로 있지(이지) 않은 것'(to pant s m on)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로서는 판단의 대상과 관련해서도 단순히 '있으면서(이면서) 있지(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떤 점에서는(p s) 있으면서(이면서) 있지(이지) 않은 것'이란 표현을 기대하게 된다. 이 후자의 방식으로 판단의 대상이 규정되면, 그것이 특수한 대상들이라 해도 모순적인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우리는 딱 한 대목이긴 하지만 'p s'라는 낱말을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블라스토스의 견해대로 플라톤이 생략법을 사용했다고 볼 것인가? 그렇지만 이렇게 볼 경우, 다른 대부분의 대목에서는 'p s'가 사용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플라톤은 자신의 주장을 펴는 데 있어서 상당히 부주의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플라톤을 부주의한 사람이 아니라고 볼 수만 있다면, 그런 해석은 블라스토스의 해석보다 선호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그런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등장하는 논의의 문맥이다. 플라톤은 475b에서부터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진실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님을 논증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플라톤은 '구경을 좋아 하는 사람들'은 꿈꾸는 상태에 있으며, 또 그들의 사고(dianoia)는 판단(의견)이라 할 수 있는 반면,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깨어 있는 상태에 있으며, 이 사람의 사고는 인식(gn m )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476cd) 그런 다음 플라톤은 인식과 판단을 구별하려 한다. 이런 구별이 정당화된다면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치자(治者)로 적합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 철학에서 '인식'(epist m )이란 말은 인식 능력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인식 작용, 나아가 인식 내용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된다. 그리고 '판단'(의견:doxa)의 경우도 판단 능력, 판단 작용, 판단 내용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이것은 비단 플라톤의 경우만이 아니라 당시의 언어 습관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이것을 의식했는지 자신이 논의하는 '인식'과 '판단'이 '능력'(dynamis)임을 분명히 선언해 놓는다.(477bc) 그리고 이 능력을 종류(eidos)로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477c) 그렇다면 플라톤은 주관의 상태와 연관해서 특수한 상태를 고찰하고 있는 게 아니라 종류로서 고찰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를테면 '헬레네는 아름답다'와 같은 주관의 특정한 판단 상태를 고려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형(type)으로서의 판단을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식의 대상 및 판단의 대상에 대해서도 특수한 대상이 아니라 유형을 고려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유형을 고려한다면 왜 '많은 아름다운 것들'은 다수(pl thos)로 표현되는가? 이 표현은 그것이 실제로 특수한 판단들의 특수한 대상들임을 시사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는 플라톤이 '하나와 여럿'의 문제를 고려할 때, '여럿'이 가지고 있는 의미 때문에 표현까지도 수에 있어서 다수로 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 이를테면 플라톤은 {소피스테스}편 237d에서 단수로서의 '어떤 것'(ti)은 하나(hen)에 대한 징표로, 양수(兩數)로서의 '어떤 짝들'(tine)은 둘(dyo)에 대한 징표로, 다수로서의 '어떤 것들'(tines)은 여럿(polla)에 대한 징표로 언급하고 있다. 이때 'polla'는 'polys'의 중성 복수(혹은 다수)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개념적으로 '여럿'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음에 틀림없다. 또한 {파르메니데스}편 128b이하에서 역시 'polla'가 복수로 사용되지만, 이 경우에도 '하나'에 대비된 '여럿'이란 단일한 개념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국가}편에서 'ta polla'가 복수로 사용되었다고 해서 단순히 그것이 특수한 것들을 가리킨다고 쉽사리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국가}편에서도 플라톤이 'ta polla'를 비슷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 대목에서 마주치게 된다. 490ab에서 플라톤은 "있는(인) 걸로 생각되는 '많은 각각의 것들'(ta polla hekasta)에는 머물지 아니 하고 나아가되, '각각인(-ㄴ) 것 자체'(auto ho estin hekaston)의 본성을..."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이와 비슷한 표현 방식은 493e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auto ho estin hekaston'은 이데아를 가리킬 때 플라톤이 사용하는 공식적 표현(fomula)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문맥에서 'ta polla hekasta'가 대비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가지적(可知的) 영역에 대해 'auto ho estin hekaston'이 사용되듯, 가시적(可視的) 영역(ho horatos topos)에 대해 'ta polla hekasta'가 사용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또한 이때 'ta polla'와 함께 'hekasta'가 사용된다는 것은 'ta polla' 뒤에 'kala'(아름다운 것들)와 같은 것이 임의의 항(term)으로 부가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479a의 '많은 아름다운 것들'(ta polla kala) 또한 비슷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고, 이렇게 이해할 때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유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이 밖에 적어도 몇 가지 물음에 대답을 해야 한다. 필자는 앞에서(4절)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고지식한 사람이 믿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는 만큼, 특수한 대상들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필자의 주장은 양시론(兩是論)에 빠진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필자는 이 곤경을 충분히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형이상학자가 특수자들(particulars)을 다룰 경우를 생각해 보자. 형이상학자는 분명 특수자들을 세계 속의 대상들(objects)로서 다룰 것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자들은 정말로 개별적인 특수자들(individual particulars)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즉 개별자들로서의 특수자들(particulars as tokens)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유형으로서의 특수자들(particulars as type)을 다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특수한 대상들이지만, '개별적인 특수한 대상들'이 아니라 '유형으로서의 특수한 대상들'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이런 개념 사용이 온당하다면, 거슬링이나 화이트, 블라스토스 모두 개념상의 혼란을 겪고 있다고 할 것이다. 실제로 거슬링은 507b에서 '많은 것들'이 (눈에) 보이는 것(horasthai)으로 언급된다는 점에서 대상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거슬링은 이때의 '많은 것들'이 봄의 대상이지 사고의 대상은 아니라는 점에서 특수자들에 대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거슬링의 기초적 주장을 생각할 때 이해하기 어려운 언급이다. 이 '많은 것들'이 봄의 대상이긴 하지만, 플라톤은 그것들을 유형으로서 다루기 때문에 '많은 것들'이 특수한 대상들일 수는 없다는 말인가? 오히려 플라톤이 '많은 것들'을 유형의 차원에서 다루긴 해도 역시 특수한 대상들로서 다룬다고 말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는가?
블라스토스의 경우도 이러한 개념적 혼동을 보이고 있다. 그는 '많은 것들'을 대상들이라고 하면서 거슬링에 반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대 히피아스}편 293c의 언급과 관련해서 "동일성의 기준이 적절히 다를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하기만 하면, 비록 다른 개인들에 의해 수행되더라도, 동일한 행동이나 관습이 동일한 기술에 일치하는 것이 될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정작 이것은 거슬링의 견해와 별반 차이가 없는 언급으로 보일 수 있다. 왜냐 하면 블라스토스가 동일한 기술에 일치하는 것으로 제시하는 '동일한 행동'은 분명 유형 차원의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거슬링의 견해를 자신과는 다른 해석으로 간주한다. 이런 점에서 그 또한 개념적 혼란을 겪거나 거슬링의 견해에 숨겨진 진의를 보지 못한 듯하다. 한편 화이트는, 거슬링이 '대립적인 것들로서의 다른 유형들을 갖는 유형들'과 '대립적인 것들로서의 개별자들을 갖는 유형들'을 혼동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거슬링 자신이 개념적 혼란을 보이는 만큼 화이트를 탓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해석에 따를 때 그가 요구하고 있는 유형의 예로는 바로 텍스트에서 제시되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개별적인 특수자인 헬레네가 동일한 관점에서 동일한 부분에서 동일한 것에 대해서 아름다우면서 아름답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형을 다룰 때는 특수한 맥락과의 연관이 제거되어야 한다. 특수한 맥락과 연관된 한정이 붙는 한, 그것은 개별자(token)이지 유형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수한 맥락이 배제된 유형의 차원에서 바로 '많은 아름다운 것들'은 추한 것들로 나타나게 된다. 이런 점에서 화이트의 비판이 우리의 해석에까지 적용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Ⅵ
그러나 화이트가 제기한 문제와 연관해서 이런 대답으로 충분할 것 같지는 않다. 왜냐 하면 우리가 특수한 대상들이 개별자로서가 아니라 유형으로 다루어진다고 봄으로써, 개별적인 특수자들이 더 이상 모순적인 것이 되지는 않겠지만, 유형은 그래도 모순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조던과 같은 이는 플라톤이 맥락의 관계(relation of context)를 모순으로 오해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유형으로 보더라도 어떻게 그것에 대해 '있으면서(이면서) 있지(이지) 않은 것'이란 규정을 할 수 있는지, 또 플라톤이 왜 그런 규정을 하게 되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있으면서(이면서) 있지(이지) 않은 것'이란 규정이 등장하는 문맥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플라톤은 판단의 대상에 대해서 이런 규정을 할 때, 곧잘 '보인다'(나타난다:phainesthai)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판단의 대상을 유형의 차원에서 볼 때 판단의 능력에 의해서는 '있으면서(이면서) 있지(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해석이 맞다면, 판단의 대상이 '있으면서(이면서) 있지(이지) 않은 것'으로, 즉 모순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은 세계를 판단의 능력만으로 바라보았을 때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인식의 능력까지 갖춘 지혜를 사랑하는 이에게는 판단의 대상이 더 이상 모순적인 것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플라톤이 이와 관련된 명시적인 언급을 하지 않고 있기에 언뜻 보면 이런 해석은 너무 대담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한데 동굴의 비유에서는 애지자가 '좋음의 이데아'를 보고 난 다음, 다시 가시적인 영역으로 내려 와서 어두운 것들을 보는 과정이 묘사되고 있다. 520c를 보면, "[애지자는 어두운 것을 보는 데] 일단 익숙해지고 나면, 그곳 사람들보다도 월등하게 잘 보게도 될 것이며, 각각의 상들이 도대체 무엇이며 또 어떤 것들의 상들인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가지적 영역을 보고 난 뒤에는 이제 특수한 것들이 더 이상 모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말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앞서 필자는 플라톤이 특수한 것들이 대립적인 것들이라는 점에서 이데아를 도입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특수한 것들이 모순적인 것들로 보이기에 이데아가 도입되었다는 것 이외의 다른 말이 아니다. 즉 지각이나 판단의 능력만으로 세계를 설명하고자 할 때는 이론적인 비일관성, 즉 상충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데아가 도입된다. 그리고 이데아가 도입됨에 따라 대립적인 것들로 보이던(phainesthai) 현상은, 이제 이데아에 대한 관여로써 설명이 된다. 결국 이데아는 플라톤에 있어서 이론적 존재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플라톤 철학에서 특수자들의 대립성은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인식론적인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인식의 능력까지 갖추게 되면 그러한 대립성은 해소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주제와 연관해서 중요한 것은, 특수자들이 대립적 성격의 것으로 나타나게 된 것은 특수자들을 상황(맥락)에 속박된 방식으로 보지 않고, 유형의 차원에서 고려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헬레네가 아름답다'는 것은 개별적인 판단에서는 모순적인 것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유형의 차원에서 보게 될 때 특정한 상황이나 맥락은 제거되고, 이로써 '많은 것들'(ta polla)은 대립적인 것들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성의 난관에서 벗어나려는 동기(motive)가 인식의 능력에 대한 희구로 발전되게 되는 것이다.
Ⅶ
여기서 우리는 거슬링과 화이트의 논쟁을 다시 한 번 되새길 필요가 있겠다. 애초에 거슬링의 문제 제기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추하다는 것을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왜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있었다. 거슬링의 대답은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특수한 대상들이라면 이런 물음은 이해할 수 없기에 유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필자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은 특수한 대상들이기는 하지만, 개별자들(tokens)로서가 아니라 유형(type)으로서의 특수한 대상들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해석의 장점은 거슬링의 문제 제기에 대해 답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판단의 대상 가운데 하나로 언급되는 문맥(478e-479a)을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필자의 해석은 유형의 예를 제시하는 데 있어서 전혀 부담을 갖지 않는다. 왜냐 하면 필자는 유형으로서의 특수자들에서는 특정 맥락에 대한 한정어를 제거하는 것이 기초적인 것으로 보았기에, 바로 특정 맥락이 배제되어 언급되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 '많은 큰 것들'을 비롯한 '각각의 많은 것들'(ta polla hekasta)이 바로 그런 예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ta nommima"와 연관해서는 단순히 '관례'로 보지 않고 '관례에 따라 여겨지는 것들'로 해석하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Ⅷ
이제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유형으로서의 특수자로 해석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점검해 볼 때이다. 필자의 해석에서 판단의 대상을 유형으로 볼 수 있었던 근거 가운데 하나는 {국가}편 V권에서 판단이 능력으로, 그리고 이런 점에서 종류(eidos)로 다루어진다는 데 있었다. 따라서 필자는 대상의 영역도 종류의 차원에서, 즉 유형의 차원에서 다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해석했다. 그런데 이것은 플라톤이 인식에 대해서는 틀릴 수 없음(infallibility)의 기능을, 판단에 대해서는 틀릴 수 있음(fallibility)의 기능을 부여하는 것과 밀접한 연관을 가질 수 있다.
플라톤은 개별적인 판단에 대해서는 참된 판단도 있고, 거짓된 판단도 있다고 말한다. 이런 경우의 '판단'은 개별자(token)로서의 판단이지, 유형(type)으로서의 판단이 아니다. 이런 경우의 '판단'을 유형으로서의 판단과 구별하지 않으면, 동일한 판단이 참이면서 거짓일 수도 있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역설을 낳게 된다. 따라서 플라톤 철학에서 '판단'이란 동일한 낱말이 경우에 따라 다른 차원에서 논의되기도 한다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참된 판단이나 거짓된 판단을 언급할 때의 '판단'은 능력의 차원에서 언급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판단 내용의 차원에서 언급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이 '판단'을 능력의 차원에서 말할 때는 '참'이라거나 '거짓'이라고 하지 않고, '틀릴 수 있는 것'이라고 규정을 한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대상과 연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개별적인 판단의 대상이 아름다우면서 추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맥락에서 헬레네는 아름답게 나타날 수도 있고, 다른 맥락에서 헬레네는 추하게 나타날 수도 있다. 그래서 상황(맥락)에 따라 '헬레네는 아름답다'는 판단이 성립하기도 하고, '헬레네는 추하다'는 판단이 성립하기도 한다. 그러나 헬레네가 동일한 관점에서 동일한 부분에 있어서 그리고 동일한 것에 대해서 아름다우면서 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헬레네가 동일한 사람(개별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에게 동일한 관점에서 동일한 부분에 있어서 그리고 동일한 것에 대해서 동시에 아름다우면서 추하게 나타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판단이 성립할 수조차 없게 될 터이니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것은 '헬레네'는 유형으로서의 특수자로 승격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이 헬레네와 같은 개별적인 특수자를 두고 '있으면서(이면서) 있지(이지) 않은 것'이라는 규정을 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플라톤은 유형으로서의 특수자들을 언급할 때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과 같이 이미 일정한 특성을 포함한 'ta polla hekasta'라는 공식적 표현(formula)의 방식을 취한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 방식은 '아름다움'과 같은 특성이 대립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희구하도록 독려한다. 이리하여 플라톤은 언제나 어떤 관점에서든 어떤 것에 대해서든 동일한 것으로서 아름다움 자체를 요구하는 길로 들어선다. 이런 점에서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유형으로서의 특수자로 해석하는 것은 플라톤 철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사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지금까지 숨겨 놓고 꺼내지 않았던 문제의 보따리를 열을 시점이 되었다.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왜 블라스토스처럼 상황(맥락) 속박적인 것으로, 그것들이 대립적인 것들로 보이는 것을 생략법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즉 특수자들의 대립성을 해소하는 방식이 왜 꼭 유형의 측면을 고려하는 방식이어야 하는가? 이에 대한 일차적 답변은 이미 이루어진 셈이다. 우리는 이미 플라톤이 '판단'을 능력의 차원에서 종류로 다루고 있음을 보았고, 이에 따라 대상 또한 유형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그런 식으로 길을 걸었다고 해서 그의 주장이 곧바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특수자들이 대립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상황(맥락)에 따라(상황에 속박시켜서) 해석함으로써 모순을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플라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플라톤과는 다른 길에 서서 대답할 수 있지 않을까? 정말 블라스토스가 한 대로 'x is F and not-F'를 'x is F in relation to y, and not-F in relation to z'라는 방식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만일 이런 해석의 길이 가능하다면 플라톤은 자신이 설정한 특수자들의 대립성이라는 문제를 단순하게 본 것일 게다.
그러나 우리는 {테아이테토스}편에서 플라톤이 이 문제를 충분히 의식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거기서 플라톤은 프로타고라스를 내세워 특수자들의 대립성이 가져 오는 문제, 즉 상충의 문제를 상황 속박적인 방식으로 해소하려는 시도를 고찰하고 있다. 프로타고라스의 길은 상충의 문제를 극단적으로 상황(맥락)에 속박시켜 해소하려는 상대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상대주의적 설명은 플라톤에 따르면 의미의 지반을 무너뜨리고 만다. 그래서 {테아이테토스}편에서 플라톤은 의미의 지반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주관의 능력으로서 '동일한 혼'(h aut psych )이, 그리고 대상 쪽에서는 공통적인 것들(ta koina)이 확보되어야 함을 보여 준다. 이것은 상대주의의 길과는 다른 길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모순적인 것이 아니라 판단의 대상이라는 측면에서, 즉 인식론적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물음은 남는다. 플라톤 철학에서 특수자들의 존재론적 지위는 어찌 되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티마이오스}편과 같이 어려운 대화편을 통해 따로이 살펴 봐야할 중요한 문제이다.
정준영(성균관대 )
Ⅰ
플라톤은 {국가}편 V권에서 인식(epist m )과 판단(의견:doxa)을 각기 다른 능력(힘:dynamis)으로 구별하고 있다. 그는 이 두 능력을 구별하는 근거를, 각기 다른 대상과 관계하고 다른 기능(ergon)을 한다는 데서 찾고 있다.(477cd) 그는 두 능력을 구별하기 위해 먼저 인식은 '있는(인) 것'(to on)에, 무지는 '있지(이지) 않은 것'(to m on)에 상관한다고 말한다.(477ab,478c) 그리고 플라톤은 "동일한 대상에 관계하며 동일한 작용(기능)을 해내는 것은 동일한 능력으로 부르되, 다른 대상에 관계하여 다른 작용(기능)을 해내는 것은 다른 능력으로 부른다"(477d)는 가정에서, 판단의 대상(ta doxasta, to doxaston)은 있음(임)과 있지(이지) 않음 양쪽에 관여하는 것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판단의 대상은 전통적으로 가지적(可知的) 영역(to no tos topos)의 것인 이데아(idea, eidos)와 대비되는 특수한 대상들(particular objects)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의 대상에 대한 예로 텍스트에서 제시되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ta polla kala)과 관련해서 몇몇 학자들이 중요한 반론을 제기한 적이 있다. 일찍이 머피는 "ta polla(여럿, 많은 것들)는 엄밀한 의미에서 개체(individuals)를 지시한다기보다는 특수한 유형에 가까운 것(quasi-specific types)을 지시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나아가 거슬링은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특수한 것들(particular things)이나 특수한 대상들로 보면 텍스트를 이해할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하기까지 한다. 이들의 주장은 오랜 동안 다른 연구자들에게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978년에 와서야 화이트에 의해 거슬링의 견해에 대한 논박이 시도된다.
머피나 거슬링의 견해가 오랜 동안 논의의 주 무대에 오르지 못한 것은, 그들의 견해가 플라톤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 방식과 상치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인 듯하다. 전통적인 플라톤 이해에 따르면, 이데아와 특수자들을 구분하는 것은 플라톤의 가장 기초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통적으로는 플라톤이 두 세계설(Two-World Theory)을 펼쳤다고 생각되었음에랴!
그러나 필자는 거슬링의 견해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나아가 필자는 거슬링이 제기한 문제를 제대로 고려해야만 플라톤이 의도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슬링의 견해에는 많은 애매한 구석이 있고, 또 지나친 주장을 펼치기도 하기 때문에 화이트의 비판이 모두 부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필자의 생각에 이러한 논쟁은 기초적인 개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서 비롯된 측면이 없지 않다. 필자는 거슬링이 제기한 문제를 거슬링과는 다른 개념을 사용하여 분석하고 거슬링과 화이트 등의 입장을 비판한 뒤, 이것이 플라톤 해석에 미치는 영향을 간략히 제시해 볼 것이다.
Ⅱ
플라톤 철학에서 '판단의 대상'은 보통 특수한 대상들로 간주되며, 대립적인 특성들(opposite properties)을 갖는 것으로 제시된다. 이를테면 우리가 살펴 보려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과 연관해서도 플라톤은 "이 많은 아름다운 것들 가운데 추해 보이지 않을 그런 것이 있을까?"(479a)라는 반문을 던지기까지 한다. 또한 플라톤은 우리가 큰 것들이라거나 작은 것들이라 말하게 될 그런 것들이 각기 그 양쪽에 언제나 관계할 것이라고 말한다.(479b) 그리고 그는 이것을 "있음(임)과 있지(이지) 않음 양쪽 모두에 관여하는 것"으로 표현한다.(478e) 이와 같은 언급은 {국가}편에서도 숱하게 등장하고 있지만, {파이돈}편에서도 유사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판단의 대상이 되는 특수자들(particulars)은 모순적인 처지에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게 된다. 어떤 것이든 있으면서(이면서) 있지(이지) 않은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플라톤 철학에서 특수자들의 존재론적 지위는 애매하거나 불합리한 것으로 남게 된다. 이런 불합리는 플라톤 철학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자 할 때 아주 심각한 문제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알렌과 같은 이는 플라톤이 이데아를 끌어들이는 대표적인 논변을 '대립자들에 의거한 논변'(argument from opposites)으로 규정한 바 있다. 플라톤은 '감각에 의해 지각될 수 있는 것들'(ta aisth ta)이나 '판단되는 것들'(ta doxasta)이 언제나 대립적인 것들을 함축한다고 보았으며, 이것이 세계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이데아를 도입했다는 것이다. 즉 플라톤의 존재론에서 핵심적인 것은 보통 이데아 이론으로 알려져 있는데, 플라톤이 이데아를 도입하는 논변 가운데 하나가 대립자들에 의거한 논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알렌의 주장은 {국가}편뿐 아니라 다른 대화편에서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이런 관점이 맞다면, 이데아 이론은 대립적인 존재를 가정함으로써 도출된 것이기 때문에 이론의 정합성이 깨질 수 있으며, 이런 점에서 특수자들의 지위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파이돈}편 102이하를 보면 플라톤은 특수자들이 대립적 특성들을 지니기 때문에 상충(conflict)의 문제를 낳으며, 이것을 이론적으로 해결하려면 이데아가 도입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를테면 "심미아스가 소크라테스보다 키가 크지만, 파이돈보다는 작다고 말할 경우"는 상충의 문제를 낳는데, 플라톤은 이러한 문제를 이데아를 도입하여 심미아스가 큼의 이데아에 관여(metechein)할 때는 크지만, 작음의 이데아에 관여할 때는 작게 된다고 설명한다.
알렌은 플라톤의 이러한 논변을 잘 부각하고 있다. "대립자들이 대립자들을 함축한다는 것이 인정된다면, 그 대립자들을 내포하는 용어들의 뜻이나 의미는 이런 용어들이 적용되는 사물들과 동일시될 수 없다. 만일 F와 G가 대립자들이라면, 'F'와 'G'는 뜻에 있어서 다르다. 그러나 가정에 따라, F인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또한 G이고 역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만일 'F'와 'G'의 의미가 F인 사물들 및 G인 사물들과 동일하다면, 'F'와 'G'의 의미는 동일할 것이다. 이것은 불합리하다." 이것을 풀어서 설명해 보면, 이를테면 아름다운 것들은 추한 것들인데, 아름다움(F에 해당된다.)과 추함(G에 해당된다.)은 대립자들인 만큼 '아름다움'과 '추함'은 의미에 있어서 다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이 대립적인 것들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가정에 따라 대립자들은 대립자들을 함축하며, 따라서 아름다운 것들은 추한 것들을 함축하게 된다. 이것은 앞서 심미아스의 예처럼 큰 것들 가운데 하나인 심미아스가 작은 것이 된 데서 확립된 가정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움'과 '추함'의 의미가 아름다운 것들 및 추한 것들과 동일하다면, 아름다운 것들이 추한 것들인 만큼, '아름다움'과 '추함'의 의미 또한 동일하게 되어 불합리한 결과가 도출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들이나 추한 것들과 같은 특수자들 이외에 이러한 특성이 성립하는 이데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특수자들과 따로이 설정되는 특성을 유명론적 입장에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어떤 특정한 용어의 의미를 바로 그것이 지시(reference)하는 것에서 찾고 있으며, 이런 맥락에서 아름다움이나 추함과 같은 특성은 존재론적 개입(ontological commitment)을 하게 된다. 따라서 아름다움이나 추함과 같은 이데아가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렇게 볼 때 특수자들이 대립적인 것들이라는 점이 플라톤 철학에서 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플라톤이 이데아를 도입하는 논변 가운데 하나라면, 플라톤 철학은 심각한 난점을 지닐 수도 있다. 대립자들에 의거한 논변의 핵심적 내용인 특수자들이 대립적 특성들을 지닌다는 주장이 어떤 특수자이든 있으면서(이면서) 있지(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플라톤의 존재론에서 특수자들은 모순적 존재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데아 이론은 모순적 존재를 가정하여 성립한 것이기에 이론의 설득력은 반감될 수밖에 없겠기 때문이다.
Ⅲ
{국가}편 V권에서 '많은 아름다운 것들'은 바로 이런 면에서 추한 것들로 언급된다. 그리고 거슬링의 문제 제기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특수한 것들로 보면, 이런 언급이 불합리해 보일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거슬링은 무엇보다도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등장하는 문맥에 주목하고 있다. 플라톤은 475b에서부터 V권 말미까지 철학자(애지자)를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hoi philotheamones) 및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들'(hoi phil kooi)과 대비하고 있는데, 문제가 되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은 다음과 같은 논의를 통해 등장한다.
"...'아름다운 것(아름다움) 자체'(auto to kalon)라든가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한결 같은 상태로 있는' 아름다움 자체(auto kallos)의 어떤 '본모습'(이데아)도 전혀 믿지 않으면서 '많은 아름다운 것들'(polla ta kalla)은 믿는 고지식한 사람(...), 저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더러 내게 말하게 하고 대답하게 하라고 말일세. '보십시오. 이 많은 아름다운 것들(ta polla kalla) 가운데 추해 보이지 않을 그런 것이 있습니까?(...)'라고 말일세."(478e-479a)
이에 대해 글라우콘은 "이것들(많은 것들, 여럿의 것들)은 어느 면에서는 아름다우면서도 또한 추하게 보이는 게 필연(anank )적이"라고 대답한다.(479b) 거슬링의 핵심적인 주장은 바로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특수한 대상들로 보면, 이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특수자들이 대립적인 특성들을 소유할 수(can)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특수자들이 불완전하게 양쪽의 특성 모두를 소유할 수밖에 없다(must)는 것을 의미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올바른 행위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모든 올바른 행위가 또한 올바르지 않게 나타난다는 진술을 반대자들(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왜 받아들여야 하는지가 전혀 명백하지 않다는 것이다. 거슬링은 더나아가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진정한 대상으로 취하면 플라톤이 물리적 대상의 지위와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설명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는데, 479d에서 소크라테스가 논의의 내용을 요약할 때 정작 대상에 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없다고 분석한다. 그래서 거슬링은 "아름다움이나 다른 여러 가지 것에 관련된 다중(多衆)의 'ta nommima'가 '있지(이지) 않은 것'과 '순수하게 있는(인) 것'의 중간 어딘가에서 맴돌고 있다"는 479d의 언급에서 "ta nommima"를 관례(customary rules)로 해석한다. 즉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대체하는 말로 보이는 "ta nommima"가 특수자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볼 수 없는 많큼, '많은 아름다운 것들'은 특수한 대상들이 아니라 유형(type)으로 봄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화이트는 거슬링이 주장하는 유형의 예를 발견할 도리가 없다는 점에서 비판한다. 이를테면 화이트는 거슬링의 주장을 "...라고 불리는 유형은 그것의 개별자들(tokens) 가운데 어떤 것은 두배이고 어떤 것은 반이라는 점에서 두배이면서 반이다"와 같이 이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이때 빈 칸에 들어갈 예를 생각해 낼 수 없다고 비판한다. 이런 점에서 화이트는 반이면서 두배로서의 다른 유형들을 갖는 유형들의 경우와 반이면서 두배로서의 개별자들(tokens)을 갖는 유형들의 경우를 거슬링이 혼동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화이트는 거슬링의 기초적 물음, '모든 올바른 행위가 또한 올바르지 않게 나타난다는 진술을 반대자들(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왜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서, 플라톤의 전체 논증은 어떤 이에게는 올바르게 나타나지만 다른 이에게는 부당하게 나타나는 것에 근거한다고 답변한다. 즉 우리로서는 아닐지 몰라도 플라톤으로서는, 현재 상황에서 우리가 올바른 행위로 판단하는 것보다 더 올바른 행위가 어떤 상황에서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음직하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479b에서 "anank "의 의미를 너무 강조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ta nommima"의 문제와 관련해서 화이트는 "ta nommima"를 'opinions'로 해석하면서, 이것은 대상들의 특성을 그 대상들에 관한 의견에 귀속시키는 환유적 용법이기에, 플라톤이 {국가}편 V권에서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특수한 대상들로서 논의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Ⅳ
결국 거슬링과 화이트의 논쟁은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유형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특수한 대상들로 볼 것인가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약만으로는 그들의 논쟁이 왜 발생했는지 별로 분명하지 않을 듯싶다. 필자의 생각에 문제의 출발점은 플라톤이 판단의 대상에 대해 '있으면서(이면서) 있지(이지) 않다'는 규정을 한 데서 시작된다. 이런 규정을 받아들이면 판단의 대상은 모순적인 것이 될 터이고, 이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에 문제의 발단이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오웬은 '대립자들의 공존'(compresence of opposite)이라고 표현했는데, 크로스와 우즐리와 같은 이들은 플라톤이 실제로 모순적인 것을 언급했으며, 이것은 플라톤이 관계 논리를 오해했던 데서 비롯된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이런 견해에 대해 진지한 반박을 가하고 있다. 이를테면 {국가}편 436b이하에서는 "동일한 것이 동일한 부분에 있어서 그리고 동일한 것에 대해서 상반된 것들(대립적인 것들:t nantia)을 동시에 행하거나 겪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언급되고 있는데, 이 언급을 고려하면 플라톤이 V권에서 모순적 존재를 가정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로 436b이하의 언급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을 예상케 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크로스와 우즐리의 주장대로 플라톤이 모순적인 것을 가정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렇다면 '있으면서(이면서) 있지(이지) 않다'는 규정은 실제로는 특수한 대상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유형에 대한 것이라는 거슬링의 견해가 설득력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거슬링의 견해에 따르면, 플라톤이 모순적인 특수자들을 가정한 것으로 보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앞서 3절에서 인용한 부분(478e-479a)을 보면 플라톤은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고지식한 사람이 믿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또한 '많은 아름다운 것들'은 판단의 대상 가운데 하나로 언급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특수한 대상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거슬링의 논변은 텍스트 문맥을 고려할 때 받아들이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이에 대해 블라스토스는 거슬링과는 달리 전통적 입장을 고수하면서, 플라톤이 '많은 아름다운 것들'로 개체들(individuals)을 의미한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블라스토스 역시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모순적인 것으로 간주하는가?
블라스토스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추한 것들로 언급되긴 하지만, 플라톤이 그것들을 자기 모순적인 것으로 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플라톤이 'x is F and not-F'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 'x is F in relation to y, and not-F in relation to z'을 의미한 것으로 본다. 즉 텍스트의 'x is F and not-F'는 'x is F in relation to y, and not-F in relation to z'에 대한 생략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그가 주목하는 대목은 {향연}편 211a 부분이다.
"아름다움 [자체]는 어떤 점에서 아름답고 어떤 점에서 추한 것도 아니고, 어떤 때는 아름답고 어떤 때는 추한 것도 아니거니와, 어떤 것에 비해서는(어떤 것을 관계로) 아름답고 어떤 것에 비해서는(어떤 것을 관계로) 추한 것도 아니며, 어떤 사람에게는 아름답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추하다는 점에서 어떤 경우에는 아름답고 어떤 경우에는 추한 [그런] 것도 아니다."
이런 언급을 보면, 아름다움 자체는 특수한 맥락(context)에 따라 대립적인 것이 되는 그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특수한 아름다운 것들의 경우는 어떤가? 블라스토스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의 경우도 특수한 맥락에 해당하는 한정사를 부가하면, 플라톤이 모순적인 것을 주장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어떤 아름다운 것이 다른 관점이나 다른 때, 그리고 다른 것에 비해서(다른 것을 관계로), 다른 사람에게 추하게 되는 일상적인 경우를 떠올릴 수 있고, 이 경우에는 특수한 맥락에 의해 한정이 되었기에 모순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블라스토스의 관점에 서면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특수한 대상들(혹은 개체들)이라는 전통적 입장을 고수하면서 그것들이 모순적인 것이라는 난점은 피할 수 있게 된다.
Ⅴ
그렇다면 애초에 "이 많은 아름다운 것들 가운데 추해 보이지 않을 그런 것이 있을까?"라는 텍스트의 반문을 통해 거슬링이 제기한 물음은, 생략법적 표현을 고려하지 못한, 잘못 놓인 물음인가? 하기야 플라톤은 인식의 대상을 단순히 '있는(인) 것'으로 표현했다가 '완벽하게 있는(인) 것'(to pantel s on)이나 '순수하게 있는(인) 것'(to elikrin s)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며, 무지의 대상에 대해서는 단순히 '있지(이지) 않은 것'으로 표현했다가 '어떤 식으로도 있지(이지) 않은 것'(to on m da )이라거나 '전적으로 있지(이지) 않은 것'(to pant s m on)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로서는 판단의 대상과 관련해서도 단순히 '있으면서(이면서) 있지(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떤 점에서는(p s) 있으면서(이면서) 있지(이지) 않은 것'이란 표현을 기대하게 된다. 이 후자의 방식으로 판단의 대상이 규정되면, 그것이 특수한 대상들이라 해도 모순적인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우리는 딱 한 대목이긴 하지만 'p s'라는 낱말을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블라스토스의 견해대로 플라톤이 생략법을 사용했다고 볼 것인가? 그렇지만 이렇게 볼 경우, 다른 대부분의 대목에서는 'p s'가 사용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플라톤은 자신의 주장을 펴는 데 있어서 상당히 부주의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플라톤을 부주의한 사람이 아니라고 볼 수만 있다면, 그런 해석은 블라스토스의 해석보다 선호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그런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등장하는 논의의 문맥이다. 플라톤은 475b에서부터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진실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님을 논증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플라톤은 '구경을 좋아 하는 사람들'은 꿈꾸는 상태에 있으며, 또 그들의 사고(dianoia)는 판단(의견)이라 할 수 있는 반면,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깨어 있는 상태에 있으며, 이 사람의 사고는 인식(gn m )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476cd) 그런 다음 플라톤은 인식과 판단을 구별하려 한다. 이런 구별이 정당화된다면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치자(治者)로 적합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 철학에서 '인식'(epist m )이란 말은 인식 능력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인식 작용, 나아가 인식 내용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된다. 그리고 '판단'(의견:doxa)의 경우도 판단 능력, 판단 작용, 판단 내용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이것은 비단 플라톤의 경우만이 아니라 당시의 언어 습관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이것을 의식했는지 자신이 논의하는 '인식'과 '판단'이 '능력'(dynamis)임을 분명히 선언해 놓는다.(477bc) 그리고 이 능력을 종류(eidos)로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477c) 그렇다면 플라톤은 주관의 상태와 연관해서 특수한 상태를 고찰하고 있는 게 아니라 종류로서 고찰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를테면 '헬레네는 아름답다'와 같은 주관의 특정한 판단 상태를 고려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형(type)으로서의 판단을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식의 대상 및 판단의 대상에 대해서도 특수한 대상이 아니라 유형을 고려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유형을 고려한다면 왜 '많은 아름다운 것들'은 다수(pl thos)로 표현되는가? 이 표현은 그것이 실제로 특수한 판단들의 특수한 대상들임을 시사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는 플라톤이 '하나와 여럿'의 문제를 고려할 때, '여럿'이 가지고 있는 의미 때문에 표현까지도 수에 있어서 다수로 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 이를테면 플라톤은 {소피스테스}편 237d에서 단수로서의 '어떤 것'(ti)은 하나(hen)에 대한 징표로, 양수(兩數)로서의 '어떤 짝들'(tine)은 둘(dyo)에 대한 징표로, 다수로서의 '어떤 것들'(tines)은 여럿(polla)에 대한 징표로 언급하고 있다. 이때 'polla'는 'polys'의 중성 복수(혹은 다수)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개념적으로 '여럿'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음에 틀림없다. 또한 {파르메니데스}편 128b이하에서 역시 'polla'가 복수로 사용되지만, 이 경우에도 '하나'에 대비된 '여럿'이란 단일한 개념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국가}편에서 'ta polla'가 복수로 사용되었다고 해서 단순히 그것이 특수한 것들을 가리킨다고 쉽사리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국가}편에서도 플라톤이 'ta polla'를 비슷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 대목에서 마주치게 된다. 490ab에서 플라톤은 "있는(인) 걸로 생각되는 '많은 각각의 것들'(ta polla hekasta)에는 머물지 아니 하고 나아가되, '각각인(-ㄴ) 것 자체'(auto ho estin hekaston)의 본성을..."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이와 비슷한 표현 방식은 493e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auto ho estin hekaston'은 이데아를 가리킬 때 플라톤이 사용하는 공식적 표현(fomula)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문맥에서 'ta polla hekasta'가 대비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가지적(可知的) 영역에 대해 'auto ho estin hekaston'이 사용되듯, 가시적(可視的) 영역(ho horatos topos)에 대해 'ta polla hekasta'가 사용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또한 이때 'ta polla'와 함께 'hekasta'가 사용된다는 것은 'ta polla' 뒤에 'kala'(아름다운 것들)와 같은 것이 임의의 항(term)으로 부가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479a의 '많은 아름다운 것들'(ta polla kala) 또한 비슷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고, 이렇게 이해할 때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유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이 밖에 적어도 몇 가지 물음에 대답을 해야 한다. 필자는 앞에서(4절)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고지식한 사람이 믿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는 만큼, 특수한 대상들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필자의 주장은 양시론(兩是論)에 빠진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필자는 이 곤경을 충분히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형이상학자가 특수자들(particulars)을 다룰 경우를 생각해 보자. 형이상학자는 분명 특수자들을 세계 속의 대상들(objects)로서 다룰 것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자들은 정말로 개별적인 특수자들(individual particulars)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즉 개별자들로서의 특수자들(particulars as tokens)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유형으로서의 특수자들(particulars as type)을 다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특수한 대상들이지만, '개별적인 특수한 대상들'이 아니라 '유형으로서의 특수한 대상들'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이런 개념 사용이 온당하다면, 거슬링이나 화이트, 블라스토스 모두 개념상의 혼란을 겪고 있다고 할 것이다. 실제로 거슬링은 507b에서 '많은 것들'이 (눈에) 보이는 것(horasthai)으로 언급된다는 점에서 대상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거슬링은 이때의 '많은 것들'이 봄의 대상이지 사고의 대상은 아니라는 점에서 특수자들에 대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거슬링의 기초적 주장을 생각할 때 이해하기 어려운 언급이다. 이 '많은 것들'이 봄의 대상이긴 하지만, 플라톤은 그것들을 유형으로서 다루기 때문에 '많은 것들'이 특수한 대상들일 수는 없다는 말인가? 오히려 플라톤이 '많은 것들'을 유형의 차원에서 다루긴 해도 역시 특수한 대상들로서 다룬다고 말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는가?
블라스토스의 경우도 이러한 개념적 혼동을 보이고 있다. 그는 '많은 것들'을 대상들이라고 하면서 거슬링에 반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대 히피아스}편 293c의 언급과 관련해서 "동일성의 기준이 적절히 다를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하기만 하면, 비록 다른 개인들에 의해 수행되더라도, 동일한 행동이나 관습이 동일한 기술에 일치하는 것이 될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정작 이것은 거슬링의 견해와 별반 차이가 없는 언급으로 보일 수 있다. 왜냐 하면 블라스토스가 동일한 기술에 일치하는 것으로 제시하는 '동일한 행동'은 분명 유형 차원의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거슬링의 견해를 자신과는 다른 해석으로 간주한다. 이런 점에서 그 또한 개념적 혼란을 겪거나 거슬링의 견해에 숨겨진 진의를 보지 못한 듯하다. 한편 화이트는, 거슬링이 '대립적인 것들로서의 다른 유형들을 갖는 유형들'과 '대립적인 것들로서의 개별자들을 갖는 유형들'을 혼동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거슬링 자신이 개념적 혼란을 보이는 만큼 화이트를 탓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해석에 따를 때 그가 요구하고 있는 유형의 예로는 바로 텍스트에서 제시되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개별적인 특수자인 헬레네가 동일한 관점에서 동일한 부분에서 동일한 것에 대해서 아름다우면서 아름답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형을 다룰 때는 특수한 맥락과의 연관이 제거되어야 한다. 특수한 맥락과 연관된 한정이 붙는 한, 그것은 개별자(token)이지 유형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수한 맥락이 배제된 유형의 차원에서 바로 '많은 아름다운 것들'은 추한 것들로 나타나게 된다. 이런 점에서 화이트의 비판이 우리의 해석에까지 적용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Ⅵ
그러나 화이트가 제기한 문제와 연관해서 이런 대답으로 충분할 것 같지는 않다. 왜냐 하면 우리가 특수한 대상들이 개별자로서가 아니라 유형으로 다루어진다고 봄으로써, 개별적인 특수자들이 더 이상 모순적인 것이 되지는 않겠지만, 유형은 그래도 모순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조던과 같은 이는 플라톤이 맥락의 관계(relation of context)를 모순으로 오해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유형으로 보더라도 어떻게 그것에 대해 '있으면서(이면서) 있지(이지) 않은 것'이란 규정을 할 수 있는지, 또 플라톤이 왜 그런 규정을 하게 되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있으면서(이면서) 있지(이지) 않은 것'이란 규정이 등장하는 문맥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플라톤은 판단의 대상에 대해서 이런 규정을 할 때, 곧잘 '보인다'(나타난다:phainesthai)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판단의 대상을 유형의 차원에서 볼 때 판단의 능력에 의해서는 '있으면서(이면서) 있지(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해석이 맞다면, 판단의 대상이 '있으면서(이면서) 있지(이지) 않은 것'으로, 즉 모순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은 세계를 판단의 능력만으로 바라보았을 때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인식의 능력까지 갖춘 지혜를 사랑하는 이에게는 판단의 대상이 더 이상 모순적인 것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플라톤이 이와 관련된 명시적인 언급을 하지 않고 있기에 언뜻 보면 이런 해석은 너무 대담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한데 동굴의 비유에서는 애지자가 '좋음의 이데아'를 보고 난 다음, 다시 가시적인 영역으로 내려 와서 어두운 것들을 보는 과정이 묘사되고 있다. 520c를 보면, "[애지자는 어두운 것을 보는 데] 일단 익숙해지고 나면, 그곳 사람들보다도 월등하게 잘 보게도 될 것이며, 각각의 상들이 도대체 무엇이며 또 어떤 것들의 상들인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가지적 영역을 보고 난 뒤에는 이제 특수한 것들이 더 이상 모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말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앞서 필자는 플라톤이 특수한 것들이 대립적인 것들이라는 점에서 이데아를 도입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특수한 것들이 모순적인 것들로 보이기에 이데아가 도입되었다는 것 이외의 다른 말이 아니다. 즉 지각이나 판단의 능력만으로 세계를 설명하고자 할 때는 이론적인 비일관성, 즉 상충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데아가 도입된다. 그리고 이데아가 도입됨에 따라 대립적인 것들로 보이던(phainesthai) 현상은, 이제 이데아에 대한 관여로써 설명이 된다. 결국 이데아는 플라톤에 있어서 이론적 존재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플라톤 철학에서 특수자들의 대립성은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인식론적인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인식의 능력까지 갖추게 되면 그러한 대립성은 해소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주제와 연관해서 중요한 것은, 특수자들이 대립적 성격의 것으로 나타나게 된 것은 특수자들을 상황(맥락)에 속박된 방식으로 보지 않고, 유형의 차원에서 고려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헬레네가 아름답다'는 것은 개별적인 판단에서는 모순적인 것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유형의 차원에서 보게 될 때 특정한 상황이나 맥락은 제거되고, 이로써 '많은 것들'(ta polla)은 대립적인 것들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성의 난관에서 벗어나려는 동기(motive)가 인식의 능력에 대한 희구로 발전되게 되는 것이다.
Ⅶ
여기서 우리는 거슬링과 화이트의 논쟁을 다시 한 번 되새길 필요가 있겠다. 애초에 거슬링의 문제 제기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추하다는 것을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왜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있었다. 거슬링의 대답은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특수한 대상들이라면 이런 물음은 이해할 수 없기에 유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필자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은 특수한 대상들이기는 하지만, 개별자들(tokens)로서가 아니라 유형(type)으로서의 특수한 대상들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해석의 장점은 거슬링의 문제 제기에 대해 답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판단의 대상 가운데 하나로 언급되는 문맥(478e-479a)을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필자의 해석은 유형의 예를 제시하는 데 있어서 전혀 부담을 갖지 않는다. 왜냐 하면 필자는 유형으로서의 특수자들에서는 특정 맥락에 대한 한정어를 제거하는 것이 기초적인 것으로 보았기에, 바로 특정 맥락이 배제되어 언급되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 '많은 큰 것들'을 비롯한 '각각의 많은 것들'(ta polla hekasta)이 바로 그런 예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ta nommima"와 연관해서는 단순히 '관례'로 보지 않고 '관례에 따라 여겨지는 것들'로 해석하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Ⅷ
이제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유형으로서의 특수자로 해석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점검해 볼 때이다. 필자의 해석에서 판단의 대상을 유형으로 볼 수 있었던 근거 가운데 하나는 {국가}편 V권에서 판단이 능력으로, 그리고 이런 점에서 종류(eidos)로 다루어진다는 데 있었다. 따라서 필자는 대상의 영역도 종류의 차원에서, 즉 유형의 차원에서 다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해석했다. 그런데 이것은 플라톤이 인식에 대해서는 틀릴 수 없음(infallibility)의 기능을, 판단에 대해서는 틀릴 수 있음(fallibility)의 기능을 부여하는 것과 밀접한 연관을 가질 수 있다.
플라톤은 개별적인 판단에 대해서는 참된 판단도 있고, 거짓된 판단도 있다고 말한다. 이런 경우의 '판단'은 개별자(token)로서의 판단이지, 유형(type)으로서의 판단이 아니다. 이런 경우의 '판단'을 유형으로서의 판단과 구별하지 않으면, 동일한 판단이 참이면서 거짓일 수도 있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역설을 낳게 된다. 따라서 플라톤 철학에서 '판단'이란 동일한 낱말이 경우에 따라 다른 차원에서 논의되기도 한다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참된 판단이나 거짓된 판단을 언급할 때의 '판단'은 능력의 차원에서 언급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판단 내용의 차원에서 언급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이 '판단'을 능력의 차원에서 말할 때는 '참'이라거나 '거짓'이라고 하지 않고, '틀릴 수 있는 것'이라고 규정을 한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대상과 연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개별적인 판단의 대상이 아름다우면서 추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맥락에서 헬레네는 아름답게 나타날 수도 있고, 다른 맥락에서 헬레네는 추하게 나타날 수도 있다. 그래서 상황(맥락)에 따라 '헬레네는 아름답다'는 판단이 성립하기도 하고, '헬레네는 추하다'는 판단이 성립하기도 한다. 그러나 헬레네가 동일한 관점에서 동일한 부분에 있어서 그리고 동일한 것에 대해서 아름다우면서 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헬레네가 동일한 사람(개별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에게 동일한 관점에서 동일한 부분에 있어서 그리고 동일한 것에 대해서 동시에 아름다우면서 추하게 나타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판단이 성립할 수조차 없게 될 터이니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것은 '헬레네'는 유형으로서의 특수자로 승격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이 헬레네와 같은 개별적인 특수자를 두고 '있으면서(이면서) 있지(이지) 않은 것'이라는 규정을 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플라톤은 유형으로서의 특수자들을 언급할 때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과 같이 이미 일정한 특성을 포함한 'ta polla hekasta'라는 공식적 표현(formula)의 방식을 취한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 방식은 '아름다움'과 같은 특성이 대립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희구하도록 독려한다. 이리하여 플라톤은 언제나 어떤 관점에서든 어떤 것에 대해서든 동일한 것으로서 아름다움 자체를 요구하는 길로 들어선다. 이런 점에서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유형으로서의 특수자로 해석하는 것은 플라톤 철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사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지금까지 숨겨 놓고 꺼내지 않았던 문제의 보따리를 열을 시점이 되었다.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왜 블라스토스처럼 상황(맥락) 속박적인 것으로, 그것들이 대립적인 것들로 보이는 것을 생략법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즉 특수자들의 대립성을 해소하는 방식이 왜 꼭 유형의 측면을 고려하는 방식이어야 하는가? 이에 대한 일차적 답변은 이미 이루어진 셈이다. 우리는 이미 플라톤이 '판단'을 능력의 차원에서 종류로 다루고 있음을 보았고, 이에 따라 대상 또한 유형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그런 식으로 길을 걸었다고 해서 그의 주장이 곧바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특수자들이 대립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상황(맥락)에 따라(상황에 속박시켜서) 해석함으로써 모순을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플라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플라톤과는 다른 길에 서서 대답할 수 있지 않을까? 정말 블라스토스가 한 대로 'x is F and not-F'를 'x is F in relation to y, and not-F in relation to z'라는 방식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만일 이런 해석의 길이 가능하다면 플라톤은 자신이 설정한 특수자들의 대립성이라는 문제를 단순하게 본 것일 게다.
그러나 우리는 {테아이테토스}편에서 플라톤이 이 문제를 충분히 의식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거기서 플라톤은 프로타고라스를 내세워 특수자들의 대립성이 가져 오는 문제, 즉 상충의 문제를 상황 속박적인 방식으로 해소하려는 시도를 고찰하고 있다. 프로타고라스의 길은 상충의 문제를 극단적으로 상황(맥락)에 속박시켜 해소하려는 상대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상대주의적 설명은 플라톤에 따르면 의미의 지반을 무너뜨리고 만다. 그래서 {테아이테토스}편에서 플라톤은 의미의 지반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주관의 능력으로서 '동일한 혼'(h aut psych )이, 그리고 대상 쪽에서는 공통적인 것들(ta koina)이 확보되어야 함을 보여 준다. 이것은 상대주의의 길과는 다른 길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모순적인 것이 아니라 판단의 대상이라는 측면에서, 즉 인식론적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물음은 남는다. 플라톤 철학에서 특수자들의 존재론적 지위는 어찌 되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티마이오스}편과 같이 어려운 대화편을 통해 따로이 살펴 봐야할 중요한 문제이다.
'사유(思惟)'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0) | 2023.11.26 |
---|---|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편에서 로고스와 형상 (0) | 2023.11.26 |
플라톤의 폭력에 대한 이해* (0) | 2023.11.26 |
플라톤의 ꡔ파이돈ꡕ을 중심으로, 죽음과 철학 (0) | 2023.11.26 |
플라톤에 있어서 영혼의 三分* (0) | 2023.1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