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플라톤의 ꡔ파이돈ꡕ을 중심으로, 죽음과 철학

나뭇잎숨결 2023. 11. 26. 08:59

플라톤의 ꡔ파이돈ꡕ을 중심으로, 죽음과 철학

 

-플라톤의 ꡔ파이돈ꡕ을 중심으로-

 

최성환(중앙대 철학과)

 

1. 현대 사회와 죽음: 왜 다시 ꡔ파이돈ꡕ인가?

 

   현대 사회는 기술과 과학 그리고 제반 사회적 조직들에 의해 움직여 나가는 ‘관리되어지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우리의 깊은 경험들을 평준화하고 일반적인 기록의 대상으로 표면화한다. 그런 연유로 인간의 죽음 마저 거의 사망 명부의 대상, 사망 시간으로서만 보이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현대 사회를 이끌어 가는 지배적인 의식에, 적어도 외면적으로는, 상응하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죽음이란 생물학적으로 조건지어진 그리고 동시에 삶의 절대적인 종말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한다.1) 

   이런 상황에 직면해서 죽음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과연 어떤 기회를 가질 수 있는가! 이 글의 주제인 플라톤의 ꡔ파이돈ꡕ을 통해서 전설처럼 들리는 경이로운 기억과 희미해진 모습들을 현재화하는 그 이상의 의미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일까?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펼치는 사고의 유희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희망이 부재한 현실’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하다. 따라서 철학적 반성이란 시대의 통념들과 대결해야만 하고, 이를 위해서는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거리두기’는 철학이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스스로의 전통에 대한 성찰을 통해, 모범적인 방식에서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전통은 현재의 가능한 교정방식”이 될 수 있다.2) 이것은 철학이 과학적으로 관리된 세계의 자명성을 분석하고, 그것을 철학사에 제시된 물음의 조명 아래 검토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런 배경에서 먼저 우리는 과학이 죽음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하는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과학은 외적인 요소로서의 죽음, 타자들의 죽음을 다루는 것이지, 예컨대 과학자 자신의 죽음, 실존적 죽음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탐구되어지는 것은 결코 종말을 선취하는, 그를 통해 당혹해진 그리고 이 당혹감을 소화하는 죽음에 대한 의식이 아니다. 죽음은, 그것이 우리의 고유한 죽음에 해당된다면, 우리 모두가, 과학자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모든 순간에서 가지는 바로 그런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과학의 이러한 태도는 우연히 생겨난 거부(Versagen)가 아니라, 방법적 강요의 결과이다. 경험과학의 방법(경험, 관찰, 실험, 가설, 이론 그리고 검증 등)은 과학적 지식의 방법적 요소들이고, 이것들은 왜 죽음이 외부로부터의 접근이외의 방식으로 주제화될 수 없는가를 분명하게 말해준다. 죽음의 내면은 외부로부터 다가오는 고찰방식에 대해서 굳게 닫혀있다. 이 방식은 의식의 경험으로서 죽음과, 죽음이 가지는 현실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를 밝혀낼 수 없다. 비록 경험과학이 생명을 특정한 한계까지 연장할 수 있다 하더라도, 생명과 죽음을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로서 적절하게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3)

   그렇다면 철학이 과연 이 물음에 있어서 과학의 제한성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인식대상으로서의 영혼의 개념은 이미 선험적 논과에 대한 칸트의 주장을 통해(형이상학의 종말에 대한 역사철학적 주장과 무관하게) 효과적으로 비판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제 인간의 절대적인 무상성만을 주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인간이성의 상황은 무엇인가? 칸트를 통해서, 그리고 또한 관념론 이후의 철학적 전개를 통해 정당화된 인식이 남아 있다: 인간 이성은 유한하고 한계 내에 머물러 있다. 이 한계가 인간 이성에게 절대자와 초월자의 차원에로의 (인식적으로 완수될 수 있는) 접근을 방해한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해명된 것인가? 진정 주의가 필요한 부분이 바로 여기이다. 만약 인간 이성이 제한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면, 또한 적어도 과학이 스스로를 잘못 이해하고 과대 평가할 수 있는 것이라면, 형이상학의 종말이라는 주장도 내적인 자기모순 때문에 너무 성급한 것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절대적 무상성에 관한 주장도, 철학이 의심의 눈으로 보아야할 ‘이성의 월권’(eine Anmaßung der Vernunft)이 아닌가? 그래서 인간의 절대적인 무상성에 관한 표현은 불멸의 영혼실체에 관한 표현과 똑같이 과잉된 것이며 비판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철학은 죽음에 대해서도 단지 무지함을 고백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며, 끊임없는 사색적인 모색을 추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플라톤의 ꡔ파이돈ꡕ에서 교훈을 얻고자 한다. 그 교훈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죽음은 (시대를 지배하는) 과학적인 사유를 통해 온전히 해명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며, 끊임없이 새롭게 물어져야할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이다. 둘째, 죽음은 실존적인 상황에서만 진정한 대화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사건이며, 이 마주함에서 결국 개인의 선택을 통해 죽음과 화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이성적) 한계이자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이다.

 

2. 실존적 죽음과 철학적 성찰

 

   ꡔ파이돈ꡕ은 소크라테스의 생애의 마지막 순간을, 즉 그가 죽음을 직면해서 그의 제자(친구)들과 나누는 대화를 담고있다. 대화 상대자는 테베 출신인 피타고라스 학파의 심미아스와 케베스이고, 사건의 보고자는 고향 엘리스로 돌아가던 파이돈이다. 그는 귀향 중에 플리우스에 들러 역시 피타고라스 학파에 속하는 에케크라테스에게 대화의 전말을 알려준다. 영혼불멸에 대한 논쟁은 소크라테스가 케베스를 통해 에우에노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해주기를 청함으로써 시작된다: “그러니까, 케베스, 이 말을 에우에노스에게 해주고, 잘 있으라고도 말해주게. 또한, 만약 그 삶이 건전한 마음 상태에 있다면, 되도록 빨리 나를 쫓아오라고 일러주게나(...).”(61)4) 이 말을 들은 대화 상대자들의 놀라움을 향해 소크라테스는 “에우에노스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철학자]이 아니란 말인가”라고 반문한다. 이 반문에는 철학은 그 본질상 반드시 죽음에의 각오를 함축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대화 상대자들의 반론들과 특히 심미아스의 간청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소신에 대해 변명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한다. 그의 소신은 다음과 같다: “진정으로 철학과 함께 생애를 보낸 사람은 내가 보기에 죽음에 임하여 확신을 갖고 있으며, 자기가 죽은 뒤에는 사후세계(하데스)에서 최대의 좋은 것들을 얻게될 것이라는 희망에 차 있을 것이 당연하다(...).”(63/64)

   이러한 ꡔ파이돈ꡕ의 첫 장면에서 우리는 영혼불멸에 관한 플라톤의 주장이 임박한 죽음의 실존적 상황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주장은 다른 철학적 정리(定理)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죽음에의 각오와 그 각오에 깔려있는 피안의 삶에 대한 희망을 해명하고, 그 각오를 가능한 반론으로부터 방어하려는 이론적 시도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미 언급한 죽음에 대한 경험과학의 이해와 연관해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피타고라스 학파에 속한 심미아스와 케베스를 상대로 논의를 전개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피타고라스 학파와 더불어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종교적 연대와는 무관하며, 수학적 탐구, 음악적 이론 그리고 우주론적 인식의 대표자였고, 그 시대의 자연과학, 생물학 그리고 의학에 정통했다. 이것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그 하나는 ꡔ파이돈ꡕ의 저자인 플라톤이 피타고라스 학파, 특히 자연주의적(유물론적)으로 발전해온 전통과의 결별을 시도하며, 그를 통해 하나의 비판적 의도를 관철시킨다는 점이다.5)  

   또 다른 하나의 해석은 영혼불멸에 대한 이성적 접근의 한계를 대화 참여자 모두가 자기 성찰적으로 공감한 내용과 연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107a, 114c) 대화 참여자들, 특히 심미아스와 케베스가 제시했던 관점들이 만약 당시의 학문적 수준에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던 한계를 표출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래서 모두  죽음에 대한 당시의 통념을 나타낸 것이라면, (아스클레피오스에데 닭을 바치고자 하는) 마지막 장면으로의 전환은 이성에게 새로운 길의 모색이라는 과제를 안겨다준다. 죽음에 대한 지금까지의 대화(이성적인 논의)가 죽음에 연루되지 않은 관점에서 말해진 것이라면, 즉 하이데거의 표현처럼 존재의 진정한 드러남이 아니라, 죽음에 대해 그냥 지껄이는 말(Gerede)이라고 한다면, 죽음에 직면한 소크라테스의 실존적 의식에게 죽음의 존재는 어떤 방식으로든 ‘말을 걸어오게’ 되고, 이것이 용해되어 마침내 그의 마지막 표현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독배를 마시기 전 욕실로 향하면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정해진 운명이 나를 이제 어느새 부르고 있네. 비극의 주인공이 함직한 말이겠지만 말일세(..).(115a)

 

3. ꡔ파이돈ꡕ의 논증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신념을 변명하는 출발점은 철학의 본질에 대한 규정이다. ‘죽음의 연습으로서의 철학’은 단지 죽음이 육체와 영혼의 근원적인 분리라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하다. 이 전제가 인간의 영혼이 육체의 방해를 벗어나 이데아에 대한 순수한 인식을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결국 죽음 이후에서야 비로소 철학의 목표는 완전하게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플라톤이 사용한 철학 개념, 이른바 참된 존재자에로의 추구가 영혼, 이데아 그리고 불멸뿐만 아니라 죽음의 사건에 대해 내적인 유사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6)

   그러나 케베스는 곧바로 죽음이 영혼의 해방이라는 전제를 문제시 삼는다. 그의 주장은 어쩌면 영혼이 육체에서 떨어져 빠져나온 직후, 마치 숨(pnuema)이나 연기처럼, 산산이 흩어져 날아가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70a) 이제 소크라테스는 영혼이 죽음에서 그리고 죽음을 넘어서서 계속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만 한다. 이 문제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먼저 두 가지 논증을 펼치나 상대자를 만족시키지 못하며, 이어진 세 번째 논증도 두 사람을 완전히 설득하는 데 실패한다. 그들의 반론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네 번째 그리고 마지막 논증을 제시하며, 이것이 ꡔ파이돈ꡕ의 마지막을 형성한다.

    첫 번째 논증계열(70d-72e)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신화적이고 철학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전통과 연관되며, 이것은 불멸적인 우주적 생명과 우주 순환의 원형의 상징인 디오니소스의 신화에서, 죽음을 벗어난 ἄπειρον(무제약자), 헤라클레이토스의 영원한 생명의 불, 그리고 ἀρχὴ(원질)까지를 총망라하고 있다.7) 동시에 소크라테스는 윤회라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표상을 기억해낸다. 이 표상은 영혼이 사후에 지하세계로 들어가서 시간을 보낸 후, 다시 다른 육체에 태어나기 위해 지상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이다. 이 연관을 소크라테스는 오래된 정리(定理), 즉 생성(출생, genesis)을 갖는 모든 것은 그것의 대립물(ta enantia)로부터 생성한다는 주장을 통해 정초한다.(70d/e) 대립물의 모든 쌍에는 두 가지 방식의 생성이 상정된다. 따라서 상응하는 대립물로서 생명과 죽음 사이에는 이중의 생성을, 즉 생명이 있는 것으로부터 죽음이,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생명이 된다는 것을 가정해야만 한다. 첫 번째의 것은 그 자체로 분명해 보이고, 두 번째 것은 우주적 순환에 대한 직관에서 근거된다. 그러나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이끌어내는 귀결은 다음과 같은 암묵적인 전제 아래에서만 가능하다, 즉 무조건 살아 있는 것이 죽은 것이 되고, 죽은 것이 살아 있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죽어있음과 살아있음이 기체(Substratum, ὑποκείμενον)의 상태로서 간주되어야 하고, 따라서 기체 자체는 관련이 없어야만 한다. 바로 이 기체가 영혼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과 죽음의 대립에 선행하며, 육체적 출생과 육체적 죽음이라는 이중적 발전과정으로부터 보존되어 남는 실체이다. 이 첫 번째 논증에 상응하게 죽음과 생명은 상이하고 서로 교대하는 상태들이다. 그러나 이 논증은 아직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과연 이 논증을 통해 이 상태의 변화에서 보존되어 남는 영혼이 더 자세히 규정될 수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자연철학적으로 근거된 사고가 자신의 고유한 죽음에 직면한 철학자를 위안할 수 있고, 논증을 통해 정당화될 그의 죽음에의 각오를 해명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나 또한 다른 물음이 제기된다: 정말 그것이 죽은 자의 영혼인가 또는 그것이 우리가 왜 영혼이라 불러야하는지를 아직 제대로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실체 일반인가? 이런 근거에서 대화 상대자 케베스는 “기억”이라는 개념을 통해 새로운 표어를 도입한다.(72e) 이 표어는 명백히 대화편 ꡔ메논ꡕ과 그 안에서 논의된 상기설 (Anamnesislehre)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ꡔ메논ꡕ, 80d). 이제 상기설을 통해 위에서 주장된 인간 영혼의 새로운 재생이 논증되어야 한다. 상기설의 도입은 지금까지의 논의의 맥락에서 관건이 되는 것이 단순한 실체가 아니라, 인간의 인식적인 영혼(이성혼)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준다. 이어지는 논증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감각세계의 사물들은 서로 유사하거나 또는 동일하다는 것, 그리고 어느 정도 선하고, 아름답고, 정의롭다는 것, 이것들을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감각세계 자체에서 결코 획득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아마 이것들을(동일함 자체, 정의로운 것 자체, 선한 것 자체 등등) 이미 알고 있었고, 감각세계의 대상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으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예를 들어 수학에서 필연적이고 보편 타당한 지식을 갖고 있고, 감각적으로 지각된 관계에서 이끌어낼 수 없는 합법칙성을 인식한다. 이런 배경에서 플라톤은 ꡔ메논ꡕ에서 이런 종류의 지식을 우리가 그대로 인정하면서 이해할 수 있다면 다음의 사실을 받아들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의 인식적인 영혼이 태어나기 이전에 어떤 지식을 가졌었는데, 출생하면서 이것을 잃어버렸다가, 지금의 현존에서 다시 기억한다는 것이다. 상기설은 우리의 인식이 인간 영혼의 선재(Präexistenz)를 통하여 선천적 조건들을 가지며 보편타당한 인식을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관계를 밝혀준다. 결론적으로 상기설에 근거하여 타당한 인식의 필수적인 조건으로서의 영혼의 선재는 같은 방식으로 타당한 것으로 증명되었다.8)

   그러나 대화 상대자들은 상기설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이 이론이 영혼이 사후에도 지속함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한다. 여전히 영혼이 사후에 사라져버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77b) 비록 소크라테스가 앞선 두 논증의 연관성을 제시하면서, 즉 상기설과 자연의 순환 정리(das Theorem des Kreislaufes der Natur)에 의해 출생 이전과 똑같이 사후에도 영혼이 존재할 수 있음을 주장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대화 상대자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 자신도 만족시키지 못한다.(77b/77e) 그 까닭은 순환 정리가 이런 물음을 해명하는 데 적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식적인 영혼(이성혼)이 사후에도 계속 존재한다는 것을 확실히 보장해주지 못한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이성혼이 보편적인 영혼실체로서 뿐만 아니라 그 자신으로, 즉 인식적인 영혼으로 계속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한다. 이것은 특히 영혼의 이성적 특성을 고려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데아와 영혼의 관계에 대한 (ꡔ파이돈ꡕ의) 핵심논증이 전개된다. 분해(소멸)되는 것은 단지 부분으로 구성된 것이다. 단순한 것은 분해될 수 없다.(78c) 이데아는 자기 자신에게 근거하고, 자기 자신과 동일하며, 지속적인 형태이며 불변적이기 때문에 단순하며 따라서 소멸될 수 없다. 영혼은 자신의 인식을 통해 감각세계(κόσμος ὁρατός)가 아니라 비가시적인 예지적 세계((κόσμος νοητός)를 향하기 때문에 육체와는 반대로 스스로 이데아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것은 영혼이 인식에 있어서 감각을 신뢰하게 되면 가변적이고 감각세계의 동요로 내몰아지며 미혹된다는 사실이 또한 말해준다.(79c) 그 반대로 영혼은 영원하고 불변적인 이데아에 속함으로써, 즉 영혼에게 고유한 인식대상에 대한 성찰을 통해 오류로부터 벗어나고 안정을 찾으며, 이 상태를 바로 지혜(phoronẽsis)라 부른다.(79d) 육체와는 반대로 영혼이 불변적이고 영원한 이데아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되고, 신적인 것, 불멸적인 것, 이성을 통해 인식 가능한 것과의 유사성에 근거해서 영혼은 “완전히 또는 거의 소멸하지 않는”(80c) 것이어야만 한다.9)

   이제 이어서 피안에서의 영혼의 운명과 철학적 삶의 형식에 대한 논의가 전개된다. 죽음을 통해 육체와 영혼은 분리되어, 육체는 사멸되고 영혼은, 육체에서의 그의 삶이 더렵혀지지 않았다면, 자신이 유래한 비가시적이고 신적이며 영원한 이성의 왕국으로 간다. 어떤 경우이든 죽음은 육체의 무상함으로부터의 영혼의 해방이다. 철학은 이러한 해방된 분리를 위한 준비이다. 이는 철학을 통해 영혼이 자기 자신에게 자신에게 돌아가며, 이데아를 조망하고 인식함에 있어서 자신의 참된 존재에 도달함으로써 성취된다. 이를 통해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라는 것(80e/81a), 더 나아가 대화의 출발점을 형성했던 이해되지 않았던 소크라테스의 태도도 정당화된다. 또한 순수한 영혼과 순수하지 못한 영혼에 대한 구별을 통해서 단지 순수하지 못한 영혼만이 죽음과 재생의 순환에 빠져들며, 철학자의 순수한 영혼은 재생의 수레바퀴를 떠나 이성의 영원한 세계에 돌아가서, 최종적으로 그리고 신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모든 영혼은 파괴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는 불멸한다. 그러나 육체로부터 그리고 감각세계로부터의 최종적인 해방은 단지 철학적인 영혼에게만 부여된다. 그것은 이 영혼이 육체의 삶 속에서 이데아의 조망을 준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모든 영혼이 불멸이지만 구원은 단지 철학자에게만 가능하다.10)

   지금까지의 논증을 통해서 영혼 불멸의 문제가 모두 해명된 것처럼 보이나 대화상대자들은 이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뜻을 표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둘에게 질문과 반론을 제시할 것을 권한다.(85b) 이제 제시되는 대화 상대자의 반론들은 소크라테스의 지금까지의 논증을 근본적으로 문제시하는 결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들은 당연히 영혼이 비물질적이고, 비가시적이며, 아름답고, 신적인 어떤 것이라는 것을 수용한다. 특히 케베스는 더 나아가, 영혼이 한번 육체에 존재한다면 선재해야할 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계속 존재해야하는 것으로 사유되어야 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두 사람에 따르면 결코 영혼이 절대적으로 무상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 아니며, 여전히 영혼이 아주 멈추어 불처럼 꺼져버리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먼저 심미아스의 주장은 악기의 방식에 따라 영혼이 조화(화음)로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조화를 만들어내는 악기가 파괴되면 조화 자체도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된다는 결론이 나온다.(85e/86d) 따라서 조화(영혼)는 악기의 나무나 현(육체)보다 우월할지라도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악기의 성질에 따라 변한다. 이런 발상은 한편으로 하나의 비유로서 이해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적으로 정위된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상당한 친밀감을 표현하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주장, 즉 그것의 본질에 따라 육체로부터 해방된 그리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영혼에 대한 사상에서 벗어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것은 심미아스의 표현법에서는 조화사상이 거의 자연주의화되었으며, 육체에 종속된 기능적 크기로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소크라테스의 논박이 펼쳐지며 그것은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먼저 조화사상은 이미 심미아스가 수용한 상기설과 모순관계에 놓인다. 영혼이 육체에 종속적인 조화라는 생각은 육체로 들어가기 앞서서 영혼이 이미 존재한다는 생각에 모순된다.(91e/92b) 둘째, 조화사상은 이성이 육체의 욕구를 거부하고, 그렇게 거부의 능력(Nein-Sagen-Können)에 따라 지도기관의 기능을 넘겨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해명할 수 없다.(94b/d) 마지막으로 육체적인 기체에 종속적인 조화는 “다소”라는 등급적인 차이를 허용한다. 만약에 기능적이고 종속적인 조화의 표상을 확고히 한다면, 하나의 영혼이 다른 영혼에 비해서 ‘다소간의’ 영혼이 되어야만 하는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에 봉착한다. 이로부터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결론을 도출한다: 조화사상은 영혼에 적용될 수 있지만 그것의 실체적인 본질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단지 가능한 질적인 관계의 규정으로만 적용 가능하다.(93a 아래)

   인간 영혼의 단순한 기능적 이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박에는 영혼 불멸의 근거로 작용하게 되는 인간의 도덕적인 자명성과 인간에 대한 해석이 포함되어 있다. 이 해석은 이성을 통해 규정된 의지의 가능한 지도능력과 인간 행위의 도덕적 평가에 관한 것이다. 이를 통해 소크라테스는 자연주의화된 피타고라스학파의 전개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사람이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기능적, 즉 육체적 또는 생리적 원인으로 돌아가서 해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11)

   그러나 케베스에 의해 제시된 주장은 지금까지의 논의과정의 기초에 관여하기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86e/88b) 이미 케베스는 영혼이 선재하며 사후에도 계속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그는 영혼이 힘과 시간적인 지속에서 육체를 월등히 앞선다는 것을 수용한다. 그러나 그는 과연 오래 산다는 것과 불멸한다는 것을 동일시할 수 있는가 라고 반문한다. 윤회를 거듭하며 이루어지는 영혼과 육체의 관계를 그는 직공과 옷의 관계에 대한 비유를 통해 제시한다. 어떤 직공이 자신이 짠 옷을 많이 입어서 그것들이 모두 소멸하고 난 후에도 살 수 있어도, 그가 죽기 전에 짠 어떤 옷보다도 그가 먼저 죽는다면 그는 결코 옷보다 더 오래 사는 것이 아니게 된다. 이런 일이 영혼과 그것을 감싸고 있는 육체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혼불멸에 대한 주장은 영혼이 근본적으로 불사한다(ἀθάνατος)는 것, 죽음이 없고 무상하지 않다는 것을 논증할 수 있어야 한다. 케베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박의 핵심은 영혼이 본질적으로 생명의 형상(εἶδος)에 관여하고 있고12), 따라서 생명의 원천으로서 무상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있다. 특히 그는 생성소멸을 물질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는 자연주의적 입장을 부정하고, 사물의 궁극 원인으로서 이데아의 존재를 가정하여 영혼불멸에 관한 주장을 펼친다. 그의 근거지음은 이데아설의 두 가지 전제에 연결된다. 먼저 어떤 이데아도 그것의 고유한 대립으로 넘어갈 수 없다는 주장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생명의 형상이 죽음의 형상과 어떠한 공통점도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주장은 대상의 본질적인 특성은 이 특성과 대립하는 특성들에 의해 대체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이 본질적으로 영혼에 속하면(그 까닭은 단지 영혼만이 생명을 가지고, 반면 육체는 단순히 살아있는 것으로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혼은 죽음의 형상을 받아들일 수 없다. 죽음에 이르러서도 영혼은 소멸하지 않고, 단지 벗어나도록 강요될 따름이다. 그런 연유로 영혼은 이중적 의미에서 불사적이다(ἀθάνατος): 죽음이 없다(todlos), 왜냐하면 영혼은 생명의 형상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상하지 않다(unvergänglich), 왜냐하면 이 형상에 비본질적으로(per accidens)가 아니라, 본질적으로(per se) 관여하기 때문이다.(105e)

   이제 우리는 ꡔ파이돈ꡕ의 논증의 마지막 지점에 서 있다. 영혼이 본질적으로 생명의 형상에 관여함을 통해 영혼은 죽음 자체의 형상을 결코 가질 수(또는 취할 수) 없으며, 따라서 불멸한다. 영혼이 파괴될 수 없는 현존을 가진다는 것은 영혼의 본질개념으로부터 이끌어진 하나의 존재론적 증명이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로 남는 것은 인식적인 영혼, 인식원리로서의 영혼이 아니라 생명원리로서의 영혼, 우주론적인 원리로서의 영혼이 논증의 결말과 목표가 되었다는 점이다. 어떻게 두 영혼개념이 연관되는지는 여전히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 남게된다.13)        

 

4. ꡔ파이돈ꡕ의 논증의 문제점들

 

   지금까지 전개된 논증들을 전체적으로 평가할 때 몇 가지 본질적인 문제가 야기된다. 먼저 전제된 영혼개념과 연관해서 볼 때 지금까지의 논증들이 통일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생명원리로 이해된 영혼 불멸에 대한 증명이 동시에 인식적인 본질로서의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증명을 포함하는지 여부도 여전히 의심의 대상이다. 또한 이데아 세계에 대한 영혼의 인식관계가 과연 이성혼의 불멸성을 보장할 수 있는가 하는 것도 의심스러워 보인다. 둘째, 지금까지의 논증에서는 (엄밀하게 사유된) 영혼의 개별적인 항존은 근거되지 않았다. 재육화(再肉化)의 이념은 인격적인 정체성의 표상과 너무 분명하게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우리가 플라톤에게서 (윤회에 근거된) 영혼의 도덕적 평가가 인격성을 도덕적 개별성으로부터 사유하는 최초의 그리고 중요한 전진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러나 모든 영혼의 육화에서도 동일한 것으로서 경험될 수 있는, 즉 영혼의 인격적 정체성을 위해 본질적인 자기관계가 결여되어 있다.14) 셋째, 플라톤에게 있어서 죽음은 육체로부터 영혼의 분리로서 윤회의 순환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덧없는 사건이다. 죽음은 영혼의 본질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과 관계한다. 죽음은 자신의 최상의 질과 형태를 철학자의 죽음에서 획득한다, 그것도 이 죽음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는 한에서. 철학자의 죽음은 순환으로부터 영혼을 해방시키고 참된 것, 선한 것 그리고 아름다운 것의 조망에서 자신의 안식을 찾는다. 모든 다른 죽음은 참된 삶으로 해방되는 이 최상의 죽음을 위해 죽어간다.

   이런 문제점과 함께 우리는 논증계열의 마지막 부분에서 행한 발언들을 음미해볼 수 있다. 심미아스는 지금으로서는 소크라테스가 제시한 논증을 아직 의심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논의들이 다루고 있는 것들의 중대성 때문에” 그리고 “인간의 약점”에 의거해서 모든 의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전혀 실망하지 않고 심지어 심미아스에게 동의를 표한다. 더 나아가 그는 애초에 타당한 것으로 간주된 가정들도 한층 더 명확하게 검토되어야하고,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후에서야 비로소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선택’의 순간을 맞이한다고 말한다.(107a/b)

   분명히 소크라테스는 그의 마지막 논증을 엄격한 증명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논증은 한계에 도달했고, 불멸성에 대한 어떠한 증명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잠정적인 결론이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야할 것은 ‘유한한 인간이성’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영혼불멸설에 대한 명백한 논박도 똑같이 가능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과학적인 해명에 근거한 만연된 회의가 결코 인간 삶의 깊은 차원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성과 소멸 그리고 자연과정에 대한 증가한 과학적 통찰도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서 계속 사유의 길을 재촉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것은 종교적인 확신에 대한 어떠한 심급(Instanz)도 될 수 없는 것이다.15) 

   이런 맥락에서 앞서 이루어진 소크라테스와 심미아스의 대화는 유한한 인간 이성이 나아갈 길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심미아스는 영혼 불멸에 대해서 확실히 규정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에서 아마도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일이지만, 그런 노력을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나약한 인간’, 칸트식으로 표현하면 ‘게으른 이성’이 하는 방식이라 말한다. 그는 두 가지 방식을 제시하는 데, 그것은 “사실이 어떤 지를 배우거나 알아내야만 하거나, 또는, 이게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인간의 주장들(hoi anthropoi logoi) 가운데서 최선의 것이되 가장 논박하기 힘든 것을 취하여, 마치 뗏목처럼, 그 위에 실리어서 모험을 하며 삶을 항해해 나가야만 하거나”이다. 이것이 인간에게 부여된 최선의 선택이라고 심미아스는 첨언한다: “한결 더 견고한 배에 올라, 곧 신적인 이치(logos theios tis)에 의존해서 더 안전하고 덜 위태로운 항해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85d) 이에 소크라테스는 기꺼이 동의를 표한다.(85e)

   이런 관점에서 지금까지의 소크라테스가 제시한 모든 논증들은 영혼이 불멸한다는 가정의 논박불가능성을 입증하려는 노력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논증들은 하나의 믿음을 근거하는 것이지 하나의 지식을 근거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는 자연스럽게 아스클레피오스에 바칠 닭에 관한 부탁의 장면과 함께 ꡔ파이돈ꡕ의 종착점에 도달했다. 이 장면은 상징적으로 철학적 사변이 영혼의 불멸을 가능한 것으로 사유할 수 있고 그리고 이러한 희망을 모든 모순되는 심급들을 제거하는 방식에서 근거할 수 있지만, 그러나 단지 종교적인 방식에서만 더 적절하게 이 희망을 표현할 수 있고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이 ꡔ파이돈ꡕ의 증언이며, 칸트에게까지 그리고 칸트를 지나서까지(예를 들어 K. 포퍼) 타당성을 가지는 표현이다.16) 

 

5. Exkurs: 철학자로서의 소크라테스의 실존적 죽음

 

   이제 ꡔ파이돈ꡕ의 마지막 장면들을 “ꡔ파이돈ꡕ의 시적인 설득력이 논증의 논리적 증명력 보다 훨씬 강하다”라는 가다머의 주장에 의거해서17) 다시 한번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ꡔ파이돈ꡕ은 죽음을 눈앞에 둔 소크라테스가 펼치는 최후의 철학적 논변을 담고 있다. 그 주제 또한 철학의 중심문제(Kardinalfrage)라고 할 수 있는 영혼(의 불멸)에 관한 것이다. 이 주제는, 물론 플라톤의 각색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 너무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육체적 죽음을 눈앞에 둔 그에게 그다지 많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어쩌면 그가 개인적으로는 평생 동안 유지해온 신념이자, 동시에 고대 그리스 세계를 지배하는 세계관에 대한 철학적 평결이라고 할 수 있다. 육신에 대한 사형선고는 이미 내려진 상태였다. 그 평결의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 그 수수께끼를 소크라테스 생애의 최후의 순간에서 풀도록 해보자.

   먼저 소크라테스가 바치는 닭 한 마리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의 최후의 목소리는 다음과 같다: “오오,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 빚진 것이 있네. 기억해 두었다가 갚아 주려나.”(118a) 왜 소크라테스는 이 빚을 최후의 순간에 기억했을까? 독배를 들고 마시려는 순간 소크라테스가 한 말을 기억해보자: “오오 에케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아주 태연히 조금도 떨지 않고 또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평상시와 조금도 다름없이 그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잔을 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에게 드리는 뜻으로 한 방울 떨어뜨려도 되나요? 안 되나요? 어떻습니까?” 그러자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오오 소크라테스, 여기서는 마실 만큼 밖에 갈지 않습니다.” “알았소. 그러나 저 세상에 가는 여행을 잘 하도록 내가 기도드릴 수는 있을 테지. 또 드려야만 되고. 내 기도대로 이루어지리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잔을 입술에 대고 조용히 기쁜 낯으로 그 약을 마셨습니다.(117b/c)

   이 대목에서 눈길을 끄는 몇 가지 단어들이 있다: ‘여기서는’, ‘여행’, ‘기도’, ‘조용히 기쁜 낯’. 먼저 ‘여기’는 당연히 감옥을 뜻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중적인 감옥 속에 갇혀있다. 육체라는 감옥과 현실적인 감옥. 결국 ‘여기’는 현실세계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라 이해될 수 있다. 이 현실세계는 ‘신에게 드리는 뜻으로 한 방울’을 용납하지 않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교만하고 무지몽매한 인간들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움직여나가는 세계이며, 칸트가 말하듯이 ‘믿음의 자리’가 확보되지 못한 인간이성의 월권의 장이다. 소크라테스의 표현은 현실세계에 대한 연민을 담고 있으며, 인간들의 오만함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이다.

   둘째, ‘여행’이라는 표현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감정의 표출일 것이다. 그는 여전히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여행을 하는 기분으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운명에 대한 감사인가, 다가 올 죽음에 대한 불안인가? 심미아스가 말한 ‘뗏목 위의 항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공감을 기억해 보라! 이제 남은 선택은 기도밖에 없다. 그리고 기도대로 이루어지리라는 소망은 정말 간절해 보인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이 보다 더 진솔한 인간적 표현이 있는가?18)

   소크라테스는 그에게 붙여진 죄목과는 달리 믿음이 두터웠고, 자신의 삶에 신이 함께 한다고 생각한 사람으로 전해진다.19) 그래서인지 소크라테스는 확신에 차 있다. 이를 나타내주는 것이 “조용히 기쁜 낯”이라는 표현이다. ꡔ변명ꡕ에서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가 모르는 어떤 것을 안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혹시 죽음이 가장 큰 선이 아닐는지는 아무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가장 큰 해악임을 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29a) 소크라테스의 신념은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신의 가호가 있다는 것이며, 이는 지적 통찰에 의해 인도되는 도덕적 행위가 궁극적으로 신학적 차원도 포함한다는 것을 뜻한다.20)

   그러나 지금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음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하데스에로의 여행을 “정해진 운명”이라 부른다.(115a)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말한 사후세계에서의 영혼의 삶에 대해서도 “이것들이 내가 이야기한 그대로라고 자신 있게 주장한다는 것은 지각 있는 사람에게 전혀 적절치 못하다”(114d)고 말한다.21) 결국 그에게 있어서 다른 선택은 부질없는, 더 나아가 지금까지의 삶과 신념에 위배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운명에 순응한다.(64a/116e/117a) 또한 아테네 시민으로 향유한 일흔이라는 그의 나이가 결코 갑자기 닥쳐오는 죽음과는 다르게 이미 삶의 종착점을 바라보고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자신의 삶을 정리할 수 있는 시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소크라테스(타인)의 죽음은 여전히 슬픔의 대상이다.(117d/e) 또한 죽음의 선택은 소크라테스의 몫이라고 해도 죽는 일에 대해서는 그도 여전히 초보일 수밖에 없다. 그가 형리(刑吏)의 도움을 받아 아마도 덜 고통스럽게(아니면 제대로) 죽는 길을 택하려 했다는 점은(117a/b) 오히려 인간적으로 보인다.

   철학자가 아니었더라면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전혀 다른 양상을 띠었을 것이 분명하다. ‘생사라는 이름의 유희’를, ‘큰 모험’을 함부로 시도하는 것이 철학자에게 얼마나 무거운 책임을 안겨주는가를 실감나게 해주는 대목이다.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스스로의 삶에 대해 자신의 죽음을 통해 정당화하려는 고귀한 자세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