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에 있어서 영혼의 三分*
김 윤 동**경북대 철학
플라톤은 오르페우스-피타고라스적 영혼관으로부터 크게 영향받았다. 이들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원래 신적인 본성을 가졌는데, 육체의 감옥에 갇히게 되면서부터 神性이 훼손되는 위기를 맞는다. 따라서 일생동안 영혼을 정화(淨化)하는 일이 이 地上에서의 삶의 목표가 된다. 육체는 사멸적인데 반해 영혼은 불멸적이다. 플라톤은 <파이돈>편에서 이러한 神的, 불멸적인 영혼을 이데아와의 유사성에 근거하여 논리적으로 증명하려 하였다. 그런데 영혼은 자신의 신적인 초월성으로 인하여 육체와 긴장된 대립관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욕망과 감정같은 심리적 현상은 모두 육체적인 것으로 분류되고 오직 지혜를 사랑하고 이데아를 인식하는 예지적인 부분만 영혼에 속한다. 플라톤은 <국가>편에서 이러한 극단적 이원론을 포기하고 영혼과 육체의 화해를 시도하며 영혼을 三分하기에 이른다. 이리하여 영혼과 육체의 대립은 三分된 요소들의 갈등현상으로 설명된다. 이것은 분명히 영혼론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이 영혼을 이성, 격정, 욕망의 세 부분으로 분할했을 때, 그 근거를 국가의 三分이라는 외적 요인과 심리적 갈등이라는 내적 요인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국가> 4권에서 시도되는 三分의 논증은 논리적 결함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세 부분들이 8, 9권에서 그 의미가 확장된다. 이성, 욕망, 격정이 각각 전체인간처럼 의인화적으로 설명되므로 각 부분들은 또 다시 세 부분으로 분할되어 무한소급에 빠지게 된다. 이런 문제들로 말미암아 부분들의 실재성보다 전체 영혼의 세 경향성 내지 세 측면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있다. 이리하여 부분의 지지자들과 반대자들로 나눠진다. 영혼전체(一)와 영혼의 부분들(多)사이의 관계는 플라톤 자신도 주저한 문제이다. 초기 이데아론에서 이데아의 단일성과 독립성이 후기에 와서 결합가능성으로 변모하여 , <소피스트>편에서 존재는 운동과 생명을 가진다. 즉 살아있는 生命은 '一' 과 '多'를 동시에 포함한다. 이로써 三分的 영혼은 一이면서 동시에 多가 된다. 원래 '生命의 힘'을 의미한 프쉬케가 플라톤에 와서 철학적 근거를 얻게 된 것이다.
<국가>편 10권에서는 이성적 부분만이 불멸이라고 주장하며, 후기저작인 <티마이오스>편도 <국가>편과 같은 노선에서 영혼의 三分과 이성의 불멸을 말한다. <파이돈>에서 <티마이오스>까지 이어지는 영혼론의 발전과정에서 플라톤은 대체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 주요어 : 영혼, 불멸, 단일성, 三分, 전체영혼, 부분들, 일관성
Ⅰ. 영혼의 단일성
희랍인들의 의식구조 속에서 프쉬케(psyche)의 의미는 상당한 변천의 과정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호머는 프쉬케를 '생명체 안에서의 생명의 원리' 혹은 '살아있도록 하는 힘'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의 프쉬케는 살아있는 것들에 대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지만, 생명체가 죽은 후에는 육체를 떠난 유령 혹은 그림자같은 존재밖에 되지 못한다. 호머의 이러한 영혼관은 내세보다 현세를 중시하는 당시 희랍인들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호머적 인간은 안락하고 행복한 저 세상의 삶 보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들지라도 이 지상의 육체적 인생을 영속하고자 원할 것이다. 이러한 희랍의 풍토에 오르페우스敎가 들어오면서 영혼의 개념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색깔을 지니게 되었다. 오르페우스敎徒들은 무엇보다도 영혼의 불멸성을 믿었다. 이 지상의 어떤 행복도 저 세상의 영원한 기쁨과 비교할 수 없으므로 이 生에서의 목적은 육체로부터 영혼이 해방되어 영원한 본향에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육체(soma)는 영혼의 감옥(sema)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끊임없이 영혼의 정화(淨化)를 추구해야 한다. 정화에 정화를 거듭한 영혼은 마침내 윤회(輪廻)의 수레바퀴를 벗어나 神들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오르페우스敎의 강력한 영향 하에서, 피타고라스는 영혼의 불멸성, 영혼의 정화, 출생의 수레바퀴 같은 개념을 그대로 전수하였으나, 단지 정화의 방법과 수단에 있어서 오르페우스敎徒들과 달랐다. 피타고라스敎徒들은 그들의 주신(主神)을 광란, 도취, 황홀을 상징하는 디오니소스 대신 지성(知性)과 지혜의 神 아폴론으로 삼았다. 따라서 영혼의 정화는 엄밀한 지적(知的)수양, 즉 수학적 훈련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들에게서 인간의 지적 능력 내지 지성은 불멸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이 지성의 활동을 통해서 구원과 해방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Grube의 말대로, 피타고라스의 이러한 영혼 개념이 플라톤의 <파이돈>편에서 강력히 표현되고 있으며, 끝까지 플라톤과 함께 남아있다. <파이돈>은 주지하다시피 영혼의 불멸성을 증명하기 위한 대화편이다. 윤회설과 상기설에 의한 증명, 영혼과 이데아와의 유사성(類似性)에 의한 증명, 가설의 방법에 의한 증명이라는 세 단계의 절차가 시도된다. 그리고 여기서 부각되는 영혼의 성격은 이데아와의 유사성이다. 증명의 과정에서 이데아는 '비복합적인 것(to asyntheton)'이다. 복합적인 것은 언제나 수시로 변하여 결코 동일하게 남을 수 없지만, 비복합적인 것은 항상 동일하고 恒存的인 성질을 지닌다.
그런데 복합적인 것이나 또는 본래부터 복합적인 것에 있어서는, 그것이 복합된 그 방식에 의해 분해됨을 당하는 것이 제격일세. 하지만 만일에 복합된 것이 아닌 어떤 것이 있다면, 분해됨을 겪지 않게 되는 것은, 정녕 그러한 것이 있을 수 있다면, 이것에 있어서만 어울리지 않겠는가?(78c)
이데아가 비복합적인 단일성으로 인하여 불멸적이고 영원하듯이, 영혼도 이데아와 유사하므로 역시 불멸적일 수 밖에 없다는 논증이다. 이 증명의 타당성 여부는 별도의 주제이므로 차치한다하더라도,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영혼의 신적(神的), 불멸적, 예지적, 단일적, 불가분적, 자기동일적 성격을 굳게 확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육체는 사멸적, 복합적, 가분적(可分的), 비동일적(非同一的) 성질을 지닌다. 그러므로 육체에는 속히 분해되는 것이 어울리지만, 영혼에는 분해되지 않는 것이 어울린다.
그런데 인간은 단일한 성질의 영혼과 복합적 성질의 육체가 결합된 존재이다. 이는 오르페우스적, 피타고라스적 전통에 따라 사멸적인 육체감옥에 불멸적인 영혼이 갇혀 있는 셈이다. 엉혼과 육체간의 이러한 극단적인 대립은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는 예지적 성질 이외의 모든 것을 육체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한다. 다시말해서 육체와 관련되는 욕망과 감정들을 철저히 육체적인 것으로 분류하는 것이 <파이돈>의 특징이다.
… 우리들의 영혼이 육체적인 惡에 의하여 오염되어 있는 한에 있어서, 우리들이 갈구하는 바의 것을 만족하게 얻을 수 있는 일은 결코 없을 것 같네. … 왜냐하면 육체는 자기의 불가결한 양육을 위해 우리들로 하여금 부단히 분망하게 만들것이니 말이지. … 육체는 갖가지의 욕정과 욕망, 공포로써 그리고 온갖 환상과 하고많은 어리석음으로써 우리를 그득차게하여, …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고 말거야. 육체와 그 갖가지의 욕망은 전쟁과 불화 그리고 싸움거리만을 안겨줄 뿐이니 말이지.(66b-c)
이 인용구에서 볼 수 있듯이 육체는 영혼을 괴롭히고 타락시키는 영혼의 감옥이외의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다. 육체감옥안에 오래 복역하는 동안 육체의 소욕과 유혹에 넘어가는 영혼은 원래의 순수성과 신성(神性)을 상실하여 출옥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원래의 본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파이돈>의 말미에 서술되는 신화(神話)는 육체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영혼과 패배한 영혼이 사후(死後)에 각각 어떤 운명을 겪게 되는지를 보여준다(107c-114c). 엄청난 죄과 때문에 도저히 치료될 수 없는 자들, 즉 육체적 요소들로 인해 심하게 오염된 영혼은 타이타로스 심연 속으로 내던져져서 다시는 나오지 못한다. 이에 반해 '뛰어나게 경건한 생활을 영위한 자들'은 육체의 감옥에서 풀려날 때 神들의 안내를 받아 지상에서 순수한 거주지로 올라가 福樂을 누린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애지활동에 의해 충분히 정화된 자들'은 향후 영원히 육체없이 살게 된다. 이처럼 <파이돈>의 인간은 불가피하게 영혼과 육체간의 대립 내지 적대관계에 놓여있지만 가능하면 육체적인 것과의 접촉을 피하는 일이 보다 더 인간다운 삶임을 보여준다. 애지활동(philosophia)은 곧 '죽음의 연습' 이다. 육체와의 결별, 육체로부터의 해방이 갇힌 영혼의 궁극적 소원이다. 육체와 영혼의 분리라는 플라톤의 이러한 엄격한 이원론은 앞서 말한대로 오르페우스적, 피타고라스적 영혼관에 직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육체 = 사멸 = 惡> 이라는 등식과 <영혼 = 불멸 = 善> 이라는 등식에 입각하여 동물적 요소인 육체와 神的요소인 영혼이 어색하고도 불편한 만남을 가지면서 인간적 삶이 영위된다고 하는 데서 이들은 모두 공통적이다. 마치 근세의 데카르트가 정신과 육체가 어떻게 상호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가를 설명하는 일로 고민하였듯이, 플라톤은 이데아와 유사하고 神的인 성질을 가진 영혼이 동물적인 육체와 맺는 관계에 대해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이돈>에서는 여하튼 양자간의 관계가 극단적 대립으로 일관하였다.
Ⅱ.영혼의 三分
플라톤은 <국가>편에서 잘 알려졌듯이 영혼의 세 부분을 다루고 있다. <파이돈>의 영혼 對 육체라는 엄격한 대립구조에서 영혼은 절대로 분할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영혼이 이데아와 친족(親族)이라는 것은 이데아의 단일성처럼 영혼도 단일한 성질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 단일성으로부터 불멸성의 도출이 시도되었다. 그런데 만일 영혼이 분할된다면 영혼의 비복합성이 파괴되고 따라서 불멸성이 증명되지 못한다. 이러한 부담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이 영혼의 부분들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사정은 무엇인가? <파이돈>에서의 단일한 영혼과 <국가>에서의 三分된 영혼 사이에는 단절이 있을 뿐인가 아니면 발전적으로 연결되는가? 나아가서 플라톤은 영혼을 二分하거나 보다 많은 부분들로, 즉 多分하지않고 왜 하필 三分하였는가? <파이돈>의 영혼론에서 <국가>의 영혼론에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서, <국가>에 앞서는 대화편들 중에서 三分이론의 흔적이 있는가? 또한 <국가>뒤에 오는 작품들 가운데서 三分이 재확인 되는가? 영혼론에 관련된 모든 대화편들에서 사상의 일관성이 있는가, 아니면 내부적 모순을 보여주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모두 영혼의 三分을 둘러싸고 발생하고 있다. 그렇다면 Hackforth의 말대로 三分된 영혼의 문제는 모든 플라톤의 문제들 중에서 '가장 성가신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최근까지 이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결을 보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플라톤 자신이 여러 작품들을 통하여 개진한 영혼의 이론들에서 일관성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영혼에 관한 플라톤의 이해를 작품 연대순을 따라 개략적으로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파이돈>편에서 영혼은 단순한 것이지만, <국가>편 4권에서 영혼을 三分하면서 복합적인 것으로 서술된다. 다시 <국가>편 10권에서는 영혼이 참된 本性에 있어서는 비복합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파이드로스>편에서는 肉化되기 전의 영혼이 이미 三分的이며, 神들의 영혼도 三分的이다. 다시 <티마이오스>편에서는 영혼의 이성적 부분만 불멸한다고 주장하면서, <법률>편 10권에서는 이성이외의 것들, 즉 소원, 반성, 예견, 충고, 의견, 기쁨, 슬픔 등을 세계영혼에로 돌린다. 이와 같이 반전(反轉)에 반전을 거듭한 플라톤의 영혼론에서 확고한 일관성을 찾아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플라톤 자신도 도처에서 영혼에 관한 고찰의 어려움과 사색의 한계를 실토하고 있다. Hackforth는 플라톤의 영혼론에서 발견되는 비일관성의 이유를 '종교적, 오르페우스-피타고라스적인 神的 영혼'의 개념과 '운동의 원인으로서 보다 현세적이고 과학적인 개념으로서의 영혼'사이에서 끝까지 동요한 데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영혼론의 전개과정에서 노출된 불일치성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 흐르는 일관성의 脈을 찾으려는 많은 시도가 있어왔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영혼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을 유지하는가 아니면 일관성이 없는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염두에 두면서 문제의 발단이 된 <국가>의 영혼론에로 되돌아가 보자.
영혼의 三分은 <국가>에서 처음 시도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어떤 학자들은 그 기원을 피타고라스가 말한 '세 종류의 삶'에서 찾는다. 이렇게 본다면 이 이론은 통속적 윤리학의 단편으로서 플라톤의 고유성을 인정할 수 없게 된다. 반면 다른 학자들은 이에 반대하면서 영혼의 三分이 영혼론의 발전에 있어서 '매우 큰 진전'이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양자 중 어느 쪽이든 간에 <육체 對 영혼>이라는 二分論的 대립에서 보여주는 영혼의 단일성에서 영혼의 세 부분이라는 복합성에로 옮긴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국가> 4권에서 플라톤은 영혼의 三分에 대한 계기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 한 나라가 올바른 나라인 것으로 생각된 것은 이 나라안에 있는 성향이 다른 세 부류가 저마다 제 일을 했을 때이며, 그리고 또한 이 나라가 절제 있고 용기 있으며, 또한 지혜로운 나라인 것도 바로 이들 세 부류가 처한 상이한 처지와 상이한 습성으로 인하여서였네. … 그렇다면 여보게나 개인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이와 똑같은 종류들을 자신의 혼 안에 지니고 있어서, 나라에 있어서의 그것들과 똑같은 처지로 인해서 나라의 경우와 똑같은 이름들로 불릴 자격이 당연히 있다고 우리는 판단할걸세. … 어쨌든 우리는 다시금 혼에 관련된 사소한 문제와, 즉 혼이 그 안에 이들 세 가지 종류를 지니고 있는지 없는지 하는 문제와 마주치게 되었네.(435b-c)
위의 구절로 미루어 보건대 영혼의 三分은 국가에서 세 계급의 三分과 평행적 대비를 이루면서 등장하였다. 지혜, 용기, 절제라는 세 德이 이상국가에서 계층별로 실현되듯이, 개인의 영혼에서도 평행적으로 대응한다는 것이 플라톤의 확신인 듯 하다. <국가>에서 영혼을 굳이 三分한 이유는 국가와 개인이 이러한 평행적 일치관계를 갖기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正義의 본성에 관한 탐구를 주제로 하는 <국가>에서, 국가적 正義는 세 부류가 가지는 세 가지 德의 조화에서 성립하고, 마찬가지로 개인의 正義는 영혼의 세 부분에서 실현되는 세 가지 德의 조화로 말미암아 가능하다. Woods에 따른다면, 만일 영혼의 조화가 正義이고, 부조화가 不義라면, 서로간의 조화 혹은 부조화를 이룰 요소들 내지 부분들이 반드시 구분되어야 한다. 따라서 영혼의 분할이 <국가>의 중심위치를 차지한다. 또한 그는 영혼의 三分구조가 이상사회의 구조를 반영하므로 三分은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국가이든 개인이든 간에 正義가 성립하려면 세 가지 德이 있어야 하고, 세 德들이 실현되려면 이들의 실현장소인 세 계급 혹은 세 부분이 있어야 한다. <국가>편의 목적이 正義를 定義하는 데에 있다면, 영혼의 三分은 Woods의 말대로 대화편 전체에서 중심위치를 차지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개인의 正義와 국가의 正義가 과연 대응관계에 있는가 하는 문제는 별도의 논의가 요구되는 사항이다. 비록 양자간의 구조적 일치성에 논리적 오류가 발견된다하더라도, 그리고 플라톤이 이러한 착오를 의식하였건 하지 아니하였건 간에, 국가와 개인의 유기체적 통일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신념 위에서 아무런 증명의 절차도 거치지 않고 大文字인 국가의 正義에서 小文字인 개인의 正義에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이 발생한다. 만일 국가와 개인이 평행적 대비관계에 있다면, 어느 편이 우선인가? 플라톤이 국가를 먼저 다루고 난 다음, 이를 개인에 적용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개인에서 출발하여 국가에로 확장하는가? 전자라면 개인은 '작은 국가(mini-city)'가 되고, 후자라면 국가는 '큰 개인(super-individual)'이 된다. 各 편의 해석에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겠지만 논의의 범위를 좁히기 위해 이에 대한 상론(詳論)은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국가>에서 표현된 아래의 구절에 따라 正義와 관련된 한에 있어서 국가와 개인의 지위는 동등하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그렇다면 '正義'의 개념 자체의 관점에서는 정의로운 사람과 정의로운 나라는 아무런 차이도 없고 닮은 것일세.(435b)
Ⅲ. 三分의 논증과 문제점
국가와 개인의 대응관계에서 영혼의 三分을 도출해낸다면, 이것은 三分의 원인을 영혼 외부에서 찾는 일이 된다. 이럴 경우 앞서 살펴본 대로 양자간의 구조적 일치여부가 시빗거리로 대두되는 문제점을 안는다. 따라서 플라톤이 영혼을 三分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요인을 영혼 내부에서 발견하려는 시도가 요청된다.
그러나 이번의 것은 알기 어렵네. 우리가 다음의 각 행위를 하는 것이 우리 안에 있는 동일한 부분으로 하는 건지, 아니면 세 가지 부분이 있어서 각각의 다룬 부분으로 다른 행위를 하는지는 말일세.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것들 중의 한 가지로는 배우고, 다른 한 가지로는 발끈하며, 셋째 것으로는 음식과 생식 또는 이것들과 동류인 것들과 관련된 쾌락을 요구하는지, 아니면 이런 각각의 행위를 우리가 일단 시작하면, 그것을 혼 전체로 하는지 말일세. 이를 제대로 결정짓기는 어려운 것일세.(436a-b)
플라톤은 영혼의 단일성과 복합성문제를 위와 같이 제기하면서, 영혼의 三分을 영혼내부의 갈등현상에서 도출해낸다. <파이돈>에서의 영혼은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는 예지적 능력이었다. 욕망과 이에 유사한 모든 심리현상은 육체적인 것 내지 육체에 귀속되는 것으로서, 영혼 즉 예지(nous)와 육체와의 갈등이 있을 뿐, 영혼 자체 내에서의 문제는 전혀 있을 수 없었다. Grube가 말했듯이, 영혼과 육체의 대립에서 영혼 內에서의 갈등에로 나아간 것은 플라톤의 영혼론에 있어서 '가장 가치있는 발걸음'이다. 이제 플라톤은 영혼의 내부에서 영혼의 부분들 간에 화해 혹은 대립의 현상이 있음을 다음의 순서로 논증한다.
(1) 동일한 것이 동일한 부분에 있어서 그리고 동일한 것에 대해서 상반된 것들(t'anantia)을 동시에 行하거나 겪은 일은 없을 것이 분명하네.(436b)
(2) 따라서 이러한 것들에서 이것이 사실로서 드러나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면, 그것들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여럿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될 걸세.(436b-c)
(3) 만일에 목말라하는 혼을 반대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혹시 있다면, 그건 바로 이 목말라하는, 마치 짐승을 이끌 듯, 그걸 마시려는 쪽으로 이끌고 가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이 혼 안에 있는 게 아니겠나?(439b)
(4) 따라서 우리가 이것들을 두 가지 서로 다른 것들로 보고, … 헤아리게 되는 부분은 理性的 부분(logistikon)이라 부르는 반면, … 사랑하고 배고파하며 목말라하거나 또는 그 밖의 다른 욕구들과 관련해서 흥분상태에 있게 되는 부분은, 어떤 만족이나 쾌락들과 한편인 것으로서 비이성적이며 욕구적인 부분(epithymetIkon)이라 부른다해도 결코 불합리하지는 않을 걸세.(439d)
위와 같은 논증의 순서를 따라 플라톤은 영혼이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말하고, 우선 이성과 욕망의 부분을 먼저 확보한다. 그리고 뒤이어서 영혼의 세번째 부분인 '격정(thymos)'이 있음을 증명한다. 그런데 이러한 논증의 절차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첫 번째의 원리에서 '상반된 것들(t'anantia)'이라는 말이 희랍문헌에서 모순율에 관한 최초의 표현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에 반해 Crombie 는 위의 원리를 모순율로 보는 것은 오류라고 비판한다. 즉 한 사람이 동일한 것에 대해 pro-attitude를 가짐과 동시에 pro-attitude를 갖지 않는 것은 분명히 모순율이다. 그러나 한사람이 동일한 것에 대해 pro-attitude와 동시에 anti-attitude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오류라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pro-attitude와 anti-attitude를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논리적 참임에 비해서 후자는 하나의 경험적 명제라고 본다. 예를 들어, 담배를 끊기 원하는 흡연가가 담배에 대해 pro-attitude를 가짐과 동시에 anti-attitude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만일 Crombie의 이러한 견해를 수용한다면, (1)의 원리는 '모순율'이라기보다 '반대의 원리' 혹은 '갈등의 원리'로 命名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그렇다면 영혼의 내부적 갈등현상에서부터 영혼의 세 부분을 연역해낸 플라톤의 논증이 최초의 전제 (1)에서 붕괴된다면, 그의 三分이론은 무산되고 마는가? Crombie는 플라톤의 논증이 오류이므로 갈등의 원리를 진지하게 취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三分의 合法性이 문제로 남는다. Crombie는 이에 대해 영혼의 三分이 영혼론적이라기 보다, 다시 말해서 영혼 내부의 갈등현상에서라기 보다 윤리적인 근거에서 확립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Miller는 三分의 영혼론이 윤리적 내지 종교적 원리와 다른 원리라는 점에서 견해를 달리한다. 그에 의하면 Crombie의 분석이 그럴듯하다 하더라도, 플라톤의 논증이 단순히 단어들의 논리적 혼동에 근거한다고 볼 수 없다. 이 논증의 근저에는 영혼의 動機(motivation)가 고려되었다고 본다.
이를테면 자네는 욕구하는 자의 영혼은 언제나 그 욕구 하는 대상을 실상 갈구한다거나, 자신에게 이루어지기 원하는 것을 끌어당긴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437b-c)
여기서 목마른 자의 영혼이 물을 갈구할 때, 그것을 '끌어당긴다'는 식의 신체적 행위로 표현한다면, 물을 거절할 경우 '떼밀어 낸다'로 표현한다. 이때 두 動機는 '끌어당김'과 '떼밀어냄'과 같은 반대(enantia)로 간주된다. Miller는 Crombie처럼 갈등의 문제를 가볍게 처리하지 않고 오히려 갈등하는 動機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초기의 영혼들을 改正하였다고 본다. 그렇다면 三分的 영혼론은 윤리적 정치적 이론으로부터 끌어온 범주를 영혼에 단순히 부과한 것이 아니다. Crombie와 Miller의 대립이 보여주듯이, 전자는 '갈등의 원리'에 내재한 논리적 결함을 들추어내어 갈등의 의미를 희석시킨 반면, 후자는 갈등의 현상을 動機들의 갈등으로 심화시켜 三分의 영혼론적 근거를 확립하였다.
여하튼 플라톤은 영혼 내부의 갈등 현상을 통하여 갈등들을 일으키는 세 요소를 이성, 격정, 욕망으로 확정하였다. 처음의 例는 이성과 욕망간의 갈등에 관한 것이었다.
… 혼 안에는 마시도록 시키는 것이 있는가 하면, 마시는 걸 막는 것이, 즉 그러하도록 시키는 것과는 다르면서 이를 제압하는 게 있지 않은가?(439c)
이성과 욕망의 충돌과 대립은 뚜렷이 부각되지만, 격정적 부분은 보다 덜 선명하게 등장한다. 우선 격정은 욕망과 갈등을 일으키는 성질로 例示된다. 아글라이온의 아들 레온티오스가 사형 집행자 옆에 누운 시체들을 목격하고 나서, 한편 보고 싶기도 하고, 다른 한편 외면하려 하면서 갈등하다가 마침내 보고 싶은 욕구에 압도당하여 두 눈을 부릅뜨고 시체 쪽으로 달려가, '보려무나, 너희들 고약한 것들아! 그래, 저 좋은 구경거리를 실컷 보려무나'라고 소리친 것은 분노(orge) 즉 격정이 욕구와 별개의 것으로서 때로는 욕구들에 대항해서 다툰다는 것을 보여준다.(439e-440a)
'갈등의 원리'에 의해 격정적 부분은 욕망적 부분과 반대되기 때문에 이것과 다르다는 것이 확립된다. 이에 비해 격정은 이성적 부분과 친화적인 것으로 묘사되어 양자간의 차별성이 논증되지 않는다.
가령 욕구가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헤아리는 부분(logismos)을 거스르도록 강요할 때,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꾸짖으면서 자기 안에서 그런 강요를 하는 부분에 대해서 분개하는데 이런 사람의 격정이 마치 분쟁하고 있는 두 당파 사이에서처럼 이성(logos)과 한편이 되는 경우 말일세.(440a-b)
영혼의 三分논증에 있어서 '갈등의 원리'자체에서 논리적 결함이 지적되었듯이, 부분들에 대한 논증에서도 문제점들이 발견된다. Annas가 올바로 지적하듯이,<국가> 4권에서의 '부분들'은 플라톤이 실제로 필요로 하고 또 <국가>전체에 걸쳐 사용하고 있는 부분들과 같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4권에서 갈등의 원리 내지 반대의 원리에 기초해서 부분들이 구분되었다면, 9권(581b-c)에서는 경험에 입각하여 세 가지 다른 종류의 삶에서 부분들의 相異性이 발견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세 부분들에 대해 보다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플라톤은 이성을 '헤아리는 부분'(to logistikon, 439d)과 '지혜를 사랑하고 배우기를 사랑하는 부분'(to philosophon, to philomates, 581b)이라고 규정한다. 배우기를 좋아하는 성향은 진리를 찾고 인식을 증가시키는 데에 기여한다. 이성은 세 부분들 중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이며, 지식을 확장하는 데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부분이다. 이성은 또한 다스리는 기능을 갖고 있다. 다른 부분들은 자기만을 돌보는데 반하여, 이성은 영혼 전체를 위하여 무엇이 최선인가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三分논증에서 예시된 이성과 욕망간의 갈등관계에서 이성은 건강에 해로움에도 불구하고 마시려 애쓰는 욕망적 충동을 억제하는 조절기능의 정도에 그쳤다. 플라톤이 진정으로 원하는 이성은 Hume의 수동적 이성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고 영혼전체의 德을 실현하기 위해 다른 부분들은 적극적으로 지배하고 다스리려는 욕구를 가진 이성이다.
다음으로 욕구적 부분(to epithymetikon)은 4권에서 육체적 욕망들, 즉 음식, 음료, 수면, 성욕 등에 집중되어 있다(437b-d). 여기서 욕망은 원초적 생물적 욕구에 한정되었다. 그런데 9권(580d-581a)에서는 이것이 '돈과 소유를 사랑하는 부분'(philochrematon, philokerdes)이라 불린다. 이러한 것들을 사랑하는 자들은 오로지 이를 획득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9권의 초두에 나오는 '참주정체를 닮은 사람'도 역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돈과 소유의 획득에서 자기만족을 얻으려할 때, 단순히 육체적 욕구에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헤아림으로 대처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욕망의 부분은 三分의 논증에서 보다 더 확장된 의미에서 신념과 이성적인 요소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격정적 부분(to thymoeides)은 앞의 두 부분보다 애매한 성격을 지닌다. 三分의 논증이 이성과 욕망간의 갈등을 부각시킨 후에 등장시키는 격정은 이성과 욕망의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이것은 사람을 생각하기보다는 느끼도록 하지만, 이러한 감정들이 이성에 근거하며, 만일 이성이 결여될 때에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성적이다. 격정은 이성적인 것이 호소되는 한에서 이성처럼 보이지만, 충동들이 들어오는 한에서 욕망처럼 보인다. 이러한 점에서 격정은 양자의 중간에서 자기 고유의 영역을 갖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격정적인 부분은 항상 헤아리는 부분에 복종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오히려 욕망과 짝하여 반란을 일으킬 소지가 없지 않다. 이를 뒷받침하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이처럼 혼에도 이 셋째 것, 즉 격정적인 부분이 있는가? 나쁜 양육으로 인해 타락되지만 않는다면, 본성상 헤아리는 부분을 보조하는 것으로 말일세.(441a)
Robinson은 이 대목에 착안하여 영혼의 三分이 국가의 三分과 대응관계에 있음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서 격정적 부분의 지위가 애매함에도 불구하고 세 부분 중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국가의 보조자 계급, 즉 戰士의 계급에 대응하기 위해서이다. 이 경우에 영혼의 三分에 대한 정당성 문제에서, 영혼을 구성하는 부분들 자체에서 결함이나 모호함이 발견될 때, 흔히 영혼과 국가의 평행적 대응이라는 외부요인에서 합법적 근거를 끌어오고 있다. 격정이 한편으로는 원초적인 충동으로 언급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훈련의 결과에 따라 복종하기도 반역하기도 한다는 설명은 이것의 애매성을 더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9권(581a-b)에서는 '승리를 좋아하고 명예를 좋아하는 부분'(philonikon, philotimon)으로 의미가 확장된다. 이 의미와 더불어 격정적 부분이 이성적 부분과 명확히 구분되기 힘든 점을 함께 고려할 때 격정 안에서도 이성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Ⅳ. 부분과 전체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성, 격정, 욕망의 세 부분은 4권에서 서술된 것 보다 8, 9권에서 그 의미가 더욱 확장되었다. 말하자면 이성은 이성적 작용 뿐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욕망을 가지며, 격정은 이성적 요소와 욕망의 요소를 함께 갖추고 있으며, 욕망도 욕망의 충족을 위한 이성적 판단을 구비하는 것으로 이야기되었다. 그렇다면 세 부분은 각자 자기 안에 다시 이성, 격정, 욕망이라는 하부구조를 가지게 되며, 또 다시 그 아래의 세 부분으로 분할되는 무한 소급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이것이 플라톤의 의도는 아니다. Cross와 Woozley는 이러한 상황이 결국 부분들의 各各을 擬人化한데서 발생하였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이성과 욕망이 '갈등을 일으킨다'라거나, 이성이 욕망을 성공적으로 '지배하였다'등의 표현을 글자 그대로의 의미라기보다 비유적인 사용으로 해석해야한다. 만일 각 부분의 의인화를 그대로 받아들여, 한 사람의 영혼이 세 요소로 구성된다면 의인화된 세 요소 위에 무엇으로 '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반면 세 요소를 포괄하는 실체가 없다면, 그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책임질 수 있는가? 이러한 어려움은 다음과 같은 두 視覺대립에서 발생한다. 한편으로 영혼을 하나의 단일체로, 즉 세 요소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전체로 생각하며, 다른 한편으로 이 요소들이 때로는 결합하고, 때로는 대립하면서 행동들을 산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영혼 내에서 일어나는 갈등현상으로부터 영혼의 三分을 시도하였지만 그 부분성이 강조될 때 야기되는 어려움들을 예견치 못하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음과 같은 의심의 구절들이 플라톤의 예견을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다.
잘 알고 있게나, 글라우콘! 내 판단대로 이제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이용했던 그런 방법들로는 이 문제를 우리가 결코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리란 걸. 이 문제의 고찰에 이르는 길은 더 길고도 먼 또 다른 길일 테니까 말일세.(435d)
영혼의 전체(一)와 부분(多), 혹은 단일성과 복합성의 문제에 있어서 플라톤 연구가들은 마치 빛의 파장설과 입자설이 대립하듯이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부분들'의 지지자들이며, 다른 하나는 '부분들'의 반대자들이다. 전자의 편에 Woods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는 영혼의 조화가 正義이므로 이 조화를 이룰 부분들이 반드시 구분되어야한다는 입장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상사회의 세 부류가 분명히 다른 부분들로 구별되듯이, 이에 대응적 구조를 지닌 영혼도 정확히 세 부분들로 분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혼의 세 요소는 실제적 부분들이지 심리적 현상의 세 종류가 아니다. 플라톤은 행동들의 분명한 출처를 확립하고자 한 의도에서 영혼을 三分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영혼의 三分을 단순히 심리적 현상의 세 종류로 해석하여 삼분의 논증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단정한다.
이에 반해, 반대자들의 대표로 Cross와 Woozley를 들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들은 부분들의 실재성을 강조할 때 발생하는 어려움들을 직시하면서, '부분들(parts)'이라기보다 '경향성들(tendencies)', '원천들(springs)', '動因들(drives)'로 다루는 것이 연구를 올바른 방향으로 진전시키는 일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영혼의 단순성과 복합성의 문제는 전통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주제로서 아직 미해결이지만 그 자체로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복합성의 의미를 약화시킴으로써 문제의 소지를 감소시켰기 때문이다. Crombie도 이와 유사한 입장이다. 이들은 三分된 부분들의 실재성이 가져오는 난점들을 피하기 위해 전체 영혼의 '세 경향성' 내지 '측면들'(aspects)로 옮겨갔다. 그러나 이 진영은 앞서 지적한 대로, 플라톤이 행한 三分의 논증을 너무 가볍게 여긴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한편 Annas는 기본적으로 '부분들의 지지자들'편에 서서 난관을 극복하려 애쓴다. 그에 의하면, 전체로서의 사람(whole person)의 행동을 부분에 입각하여 설명하려할 때, 이 부분이 전체인간의 작은 복제품으로 의인화될 수 있다. 부분이 다시 전체인간의 특징을 산출하면, 이를 설명하기 위해 부분의 부분들을 또다시 의인화하게 되는 무한 소급에 빠진다. Annas는 이것을 Homunculus Problem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는 이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三分論이 인간의 의도적 행동을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서, 즉 왜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최소한의 시도로서 지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양 진영의 팽팽한 대립가운데서 어느 한편의 손을 주저 없이 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 이유를 짚어보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한다.
<파이돈>에서의 영혼은 단일성을 잃지 않으며, 이데아를 인식하는 기능 이외의 것을 갖지 않는다. 플라톤의 초기 사상에서 이데아와 현상계가 철저히 분리되듯이, 이데아와 유사한 영혼도 육체와 엄격히 분리되어 육체로부터의 독립성을 유지하고자 한다. 초기의 이데아는 독립성과 분리성 그리고 초월성이 강조되는 시기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데아는 자신의 절대적 배타성과 독립성으로 말미암아 현상계의 운동을 설명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플라톤의 후기 이데아론은 이데아의 배타적 불변성에 대한 손상을 감수하면서라도 이데아들간의 결합을 시도한다. 이와 비슷한 구조로서 <파이돈>은 영혼의 불멸성과 단일성, 그리고 순수성을 확립하기 위한 의도로 쓰여졌다. 그러나 초월적 이데아만으로는 현상을 구제할 수 없었듯이 불멸적이고 신적인 영혼은 자기의 육체를 구제의 대상으로가 아니라 敵으로 간주한다. 神的인 영혼은 이 땅위의 육체 속에 잠시 갇혀 있는 동안 순수성을 잃지 않으려고 최대한 신경 쓰다가 때가 차면 감옥을 나오듯이 빠져나와 저 세상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러한 사람은 동물적 육체와 신적 영혼이 얼마간 대치하고 있는 존재이며, 소크라테스적이라기보다는 오르페우스-피타고라스적 인간이다. 소크라테스의 德은 육체와 대립하고, 불멸적이며 신적인 영혼만으로는 실현될 수 없다. 경건, 용기, 절제, 우정 등의 德들이 육체적인 것과 협력없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예지적인 것 이외의 모든 심리적 현상들을 육체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하는 <파이돈>의 영혼관만으로서는 땅 위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해야할 인간의 德들을 설명할 수 없다.
개인의 德과 국가의 德을 함께 고찰하는 <국가>는 불가불 神的 영혼과 동물적 육체가 화해할 수밖에 없다. 영혼이 육체 속에서 육체와 만나려면 자신의 단일성이 포기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이를 고수하면 <파이돈>의 영혼으로 남기 때문이다. 단일하고 이데아와 유사한 불멸의 영혼은 이제 肉化(incarnation)될 때, 세 부분으로 분할된다. <소피스트>에서의 존재개념은 이데아의 결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뒤나미스(dynamis)'로 변화한다. 이 '힘'은 타자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활동성이며, 운동, 생명, 영혼, 프로네시스를 갖는다(247e-249a). 그렇다면 Miller 의 말대로, <파이돈>의 단일한 영혼에서 <국가>의 三分的영혼에로 넘어가게 된 것은 뒤의 <파이드로스>에서 '운동의 원인'으로서의 영혼으로 발전하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국가>에서 영혼이 '운동의 원인'으로 직접 언급되지 않지만 이성, 격정, 욕망의 세 부분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현상들이 영혼의 운동현상이라고 보는 데에 무리가 없을 것 같다. <파이드로스>와 <법률>의 영혼이 '운동의 원인'으로서 이데아와 현상을 연결시킨다면, <국가>의 영혼은 '갈등의 원인'으로써 단일한 예지적 영혼과 육체 사이에 교량역할을 수행한다.
Ⅴ. 영혼론의 일관성
그렇다면 <국가> 10권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많은 것으로 복합되어 이루어진 것이, 그 복합이 가장 훌륭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한, 영원히 존속하기란 쉬운 게 아닐세 … 혼이 진실로 어떤 것인지를, 그것이 육신과의 결합으로 말미암아 훼손된 상태로 있는 것을 보지 말고, 그것이 순수한 상태가 되었을 때는 어떤 것인지를 추론에 의해서 충분히 검토해야만 하네.(611b-c)
4권에서 三分된 영혼과 10권에서의 '순수한 상태의 영혼'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플라톤은 영혼이 육체와 결합함으로 말미암아 훼손된 상태를 海神 글라우코스에 비교한다. 이 神은 해초와 돌들이 그에게 덧붙어 자라서 원래의 모습을 알아 볼 수 없다고 한다(611c-d). 인간의 영혼도 마찬가지로 이 地上의 생활로 말미암아 土石들이 온통 들러붙어 참 모습을 알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의 눈길을 지혜의 사랑에로 돌려야 한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지혜를 따르면 지금의 바다에서 밖으로 나와, 붙어 있는 돌과 따개비들을 떼어 낸다면 원래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611e).
그 때에야 혼의 참된 本性을 보게 될 것이니, 그것이 여러 가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일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인지, 또는 그것이 어떤 식으로 지내며 그리고 어떤 상태에 있는지도 보게 될 걸세.(612a)
위와 같은 플라톤의 설명을 따른다면, 영혼의 三分은 분명히 육체와의 결합으로 인한 것이다. 그리고 영혼 안에서의 갈등적 요소는 육체와 영혼의 연합 때문에 야기된다. '순수한 상태'의 영혼은 지혜를 사랑하는 영혼으로서 이것만이 불멸적이다. <파이돈>의 불멸적 영혼은 <국가> 4권의 三分的 영혼을 거쳐, 10권에서 다시 단일성과 불멸성을 회복한 셈이다. 이렇게 본다면 <파이돈>에서 <국가>에 이르는 영혼론의 전개는 비록 완전한 의미에서는 아닐지라도 일관성을 유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복잡한 문제는 <파이드로스>와 함께 발생한다. 246a에서 영혼은 두 마리 날개 달린 말(馬)과 이를 몰아가는 마부(馬夫)에 비유된다. 이것은 흔히 영혼의 三分에 대한 언급이라고 해석된다. <국가> 611c에서 '가장 순수한 상태'의 영혼의 本性이 단일하다고 말한 것에 비추어 볼 때, 욕망과 격정을 상징하는 두 말이 여기에 포함된 사실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Guthrie 는 이 부분이 <파이드로스>에서 발생하는 어떤 어려움보다도 어렵다고 실토한다. 지혜와 인식을 추구하는 영혼의 부분만이 불멸적이며 神에 가까운 것인데, 어떻게 완전히 육체를 벗어난(discarnate) 영혼이 욕구적 부분을 가질 수 있는가? <국가>에서 영혼의 三分, 즉 복합성은 영혼이 육체와 결합함으로 인해 발생하였다. 이러한 난관에 봉착하여 다음의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 첫째는, 두 말과 마부의 비유가 神話的으로 표현된 것이므로 글자 그대로 해석하거나 세부적인 것을 따질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그 다음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모순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후자의 Hackforth 는 앞서 언급했듯이 플라톤이 모든 육체적 기능과 분리된 영혼, 즉 오르페우스-피타고라스적인 영혼과 자신 및 타자들에 대한 운동의 근원으로서의 영혼, 즉 보다 현세적이고 과학적인 영혼 사이에서 동요했기 때문에 그의 영혼론에서 일관성을 발견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플라톤에 있어서 <파이드로스>나 <법률>에 나타난 '운동의 근원'으로서의 영혼 개념은 神的이고 불멸적인 영혼과 단순히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아에 유사한 영혼이 현상계의 육체와 결합하여 이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데에서 등장하였다. 이런 견해에서 볼 때, 플라톤은 두 세계 혹은 두 영혼 개념 사이를 단순히 왕래한 철학자라고 할 수 없다.
<파이드로스>의 이 대목과 다른 대화편들 사이의 표면적 불일치를 윤회(輪廻)개념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입장도 있다. Guthrie는 영혼이 윤회가운데 있고 肉化와 再肉化할 운명이라면, 영혼이 육체 속에 있거나 바깥에 있거나 간에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본질적인 차이는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 있는 영혼과 이를 벗어나서 자기가 있던 곳으로 탈출한 영혼간의 차이이다. 불멸적 영혼은 神性을 내포하고 완전한 순수성을 소유하지만, 윤회가운데 있는 영혼은 地上的이고 육체적인 흔적을 여전히 가진다. 따라서 그는 격정적 요소와 욕망의 요소들을 육체적인 것에 귀속시킨 <파이돈>의 영혼이 <파이드로스> 의 마차(馬車)비유와 다르다는 전통적인 해석에 반대한다. <파이돈>의 81a 이하에서 육체적 욕망과 쾌락에 자신을 넘겨준 영혼은 육체를 떠날 때, 여전히 육체적인 것에 침투되어 있는 상태로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인간영혼 뿐만 아니라 神들의 영혼도 마찬가지로 마부와 두말에 비유한 점을 함께 고려할 때, 그것이 윤회 중에 있는 영혼의 三分이라고 까지 해석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러한 해석은 물론 <국가>의 三分的 영혼과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시도된 것이지만, 앞서 언급한 Taylor의 말대로 神話的인 세부사항에서부터 형이상학의 원리를 끌어내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파이드로스>에서는 '운동의 원인'으로서의 영혼개념만을 취하고, 마차비유는 三分的 영혼론과 관련된 철학적 이론으로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플라톤 자신도 이에 대한 망설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영혼의 본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오래 이야기할 거리이며 가장 확실한 것은 神만이 그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246a)
<티마이오스>는 69c이하에서 영혼의 三分的 원리를 설명한다. 영혼의 불멸적 부분은 데미우르고스가 직접 창조한 것으로서 신체의 머리 속에 자리잡는다. 이 부분은 따라서 데미우르고스의 삶에 참여하고 神들과 親族이다(41c). 下位의 神들은 영혼의 사멸적 부분을 만드는 임무를 부여받고 이것을 신체의 저급한 부분들에 배치한다. 사멸적 영혼은 다시 '보다 나은 것'과 '보다 못한 것'으로 양분되는 데(69e), 이것은 <국가>의 격정적 부분과 욕망적 부분에 대응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영혼의 三分과 이성적 부분에만 불멸을 인정하는 시각은 <티마이오스>와 <국가>에서 일치한다.
이렇게 볼 때, <파이돈>에서 육체와 극단적 대립을 보여준 神的 영혼은 <국가> 4권에서 三分되면서 자체 내에서 갈등을 겪고, 종국적으로 이성이 다른 부분들을 지배하는 正義의 德을 추구한다. 그리고 10권에서는 지혜를 사랑하는 이성적 부분만 불멸적이었다. 이 부분은 <파이돈>의 이데아적 영혼과 같다. 그런데 <파이드로스>에서는 肉化되지 않은 상태의 영혼도 三分된 듯한 마차의 비유를 말한다. 이 비유는 <국가>에서 <복합성 = 肉化> 와 <단일성 = 脫肉>의 공식을 파괴하는 듯이 보이지만, 가볍게 神話的 비유로 처리함으로써 위기를 넘겼다. 만년의 저작인 <티마이오스>는 다시금 영혼의 三分과 이성적 부분만의 불멸이라는 <국가>의 요지와 같은 脈을 유지한다.
지금까지 논의한 바와 같이 본 논문의 중심테마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플라톤의 영혼론이 <파이돈>에서 <티마이오스>에 이르기까지 일관성있게 발전하는가, 아니면 일관성을 상실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일관성을 지지하는 편에 서서 영혼론의 발전과정을 추적하고, 또 일관성의 근거를 제시하려고 애썼다. 다른 하나는 <국가>에서 주로 논의된 바, 三分된 영혼의 전체와 부분의 문제이다. 영혼의 전체성을 강조할 때, 부분들은 전체 영혼의 세 측면 내지 세 경향성으로 해석되고, 영혼의 부분성을 강조할 때 이와 달리 부분들이 실재성을 갖는다. 플라톤은 영혼론에서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의 전 체계에서, 이데아(一)와 현상들(多)간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logon didonai) 하였다. 초기사상에서 현상들과 대립하는 이데아가 후기에서 현상들과 화해하는 이데아로 변모하면서 존재개념은 운동, 생명, 영혼을 포괄하게 되었다. 이데아와 유사한 영혼은 육체와 대립하다가 육체와 결합하면서 운동의 원인이 되고 살아있는 生命으로 나타난다. 이데아와 현상, 영혼과 육체는 연합과 통일을 이룬다. 神的인 영혼도 아니고, 可死的 육체도 아닌 三分된 영혼은 살아있는 생명으로서 전체와 부분의 신비로운 有機的 통일을 이룩한다. 프쉬케의 고전적 의미인 '살아있는 생명의 원리'가 플라톤에 와서 철학적 근거를 획득한 것이다.
참 고 문 헌
Adam, J., The Republic of Plato,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9.
Annas, J., An Introduction to Plato's Republic, Oxford University Press, 1982.
Crombie, I. M., An Examination of Plato's Doctrines I, Routridge & Kegan Paul, 1969.
Cross & Woozley, Plato's Republic, Macmillan, 1989.
Grube, G. M. A., Plato's Thought, Hackett, 1980.
Guthrie, W. K. C., Plato's Views on the Nature of the Soul, in Plato Ⅱ,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71.
Hackforth, R., Plato's Phaedrus, Cambridge University, 1972.
Miller, F. D., "Plato on the Parts of the Soul", in Plato, Critical Assessment Ⅲ, Routledge, 1998.
박종현, {플라톤의 국가}, 서광사, 1997.
Robinson, T. M., Plato's Psychology,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95.
Taylor, A. E., "Plato's Divine of the Soul", in Plato's Ethics, A Grand Series, 1995.
Tripartition of the Soul in Plato
- Kim, Youn Dong -
Plato was deeply affected from Orphic-Pythagoreans psychology. According to their theory, soul had originally divine nature. But it faces the crisis of loosing its divinity because of incarnation. Therefore the purpose of man's life becomes the purification of the soul logically on the basis of the similarity with Idea. Soul is opposed to body because of its own divine transcendence. Desire and emotion belong to the bodily element, on the contrary, the intellectual part is classified with the soul.
In Republic, Plato gives up this extreme dualism and tries to reconciliate soul and body. At last, he tripartites the soul. Contrast between soul and body is explained by the conflicts of tripartite elements. This is the development of Plato's psychology. When he divides the soul into three parts, namely, reason, spirit, desire, we can find the ground from the external cause of tripartite of the state and the internal cause of the psychological conflicts. However, in book Ⅳ, the argument of tripartition implies logical faults. Also three parts extend their meaning in book Ⅷ, Ⅸ. Reason, desire, spirit are personified as a whole person. Then each parts are divided into three parts again and fall into regress.
Some scholars attempt to explain the parts into three tendencies or aspects owing to these problems. Plato himself is frustrated with the relation between the whole soul and its parts. Simplicity and individuality of Idea in the earlier period are changed to the possibility of union in the later period. In Sophist, Being has motion and life The living life contains 'one' and 'many' at once. Therefore tripartite soul implies 'one' and 'many' together. Psyche, meaning 'power of life' originally, obtains the philosophical basis in Plato. In the tenth book of Republic, he insists the only rational part is immortal. In Timaeus like Republic, he also persists the tripartition and the immortality of the soul in the same context. Plato preserves the consistency in the developing process of the psychology from Phaedo to Timaeus.
※ Key Words : soul, immortality, simplicity, tripartition, whole soul, parts, consisten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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