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플라톤의 폭력에 대한 이해*

나뭇잎숨결 2023. 11. 26. 09:00

플라톤의 폭력에 대한 이해*

 

-최양석(연세대)

 

[한글요약]

본 연구의 주제는 플라톤의 폭력에 대한 이해이다. 플라톤을 중심으로 인간사회에서 폭력이 발생하는 원인을 살피고, 폭력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으며, 폭력을 배제하기 위한 가능하고 정당한 수단은 무엇인지 탐구한다. 이를 위해 먼저 2장에서 폭력 이해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논한다. 3장에서는 폭력을 용인하는 소피스트들의 정의관을 비판하는 플라톤의 정의관을 고찰한다. 4장에서는 피시스와 노모스의 관점에서 폭력을 배제하려는 플라톤의 주장을 논한다. 5장에서는 국가와 정치체제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문제를 다룬다. 6장에서는 폭력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해주는 영혼의 정화와 법의 준수, 교육을 살펴본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플라톤에서는 신에게서 세계에 이르는 일련의 존재론적 체계가 있다. 그것은 신에서 로고스로, 로고스에서 피시스로, 피시스에서 노모스로 연결되는 체계이다. 이러한 체계에서 볼 때, 플라톤에서 폭력은 신의 뜻, 로고스, 피시스, 노모스를 지키지 않을 때 발생한다고 보겠다. 그러므로 플라톤에서 폭력은 직접적으로 드러나기보다는 무엇 무엇에 대한 반대가 폭력이 된다. 즉 그에게서 폭력은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주제분야: 고대철학, 사회철학, 정치철학
주 제 어: 플라톤, 폭력, 신, 로고스, 피시스, 노모스

 

 

 


I. 들어가는 말
 
폭력은 지나간 과거의 문제가 아니고 한 지역의 문제도 아니고 지금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전 지구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폭력은 만연하고 있지만 폭력 그 자체를 분석하고 성찰한 경우는 드물다. 우리는 폭력을 단순히 무력을 사용하는 행위 정도로 이해하고 있을 뿐 막상 그 개념을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폭력의 문제를 학문적 이론으로 근거 지은 인물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다. 플라톤에서 폭력의 문제에 대한 이해가 폭력의 연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폭력문제를 보다 엄밀하게 제기하고 이 문제를 이론적으로 보다 상세하게 구명하기 위한 토대가 된다. 플라톤은 그리스의 서정시, 비극시, 그리고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의 역사서에 나타난 학문적으로 체계화되어 있지 않은 일상적인 폭력현상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아테네의 정치가 폭력적인 권력을 휘두르고 있을 때, 인간의 공동생활에 좋은 국가형태와 나쁜 국가 형태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체계적이고 철학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정당한 지배자인 왕과 부당한 지배자인 폭군, 정치적 지배방식과 전제적 지배방식을 개념적으로 구별하고 논쟁적으로 대비시킨 것은 기원전 4세기의 아테네라는 특수한 상황에 근거한 것이지만, 이러한 구분과 대비는 17, 18세기의 혁명적 변혁기까지 유럽의 정치사상에 결정적 의미를 갖는다.
본 연구는 플라톤을 중심으로 인간 사회에서 폭력이 나타나는 원인을 살펴보고, 폭력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으며, 폭력을 배제하기 위한 가능하고 정당한 수단은 무엇인지 철학적 정치적 관점에서 추적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이를 위해 먼저 2장에서 형이상학적인 근거를 논구한다. 3장에서는 폭력을 용인하는 소피스트들의 정의관과 이를 비판하는 플라톤의 정의관을 고찰한다. 4장에서는 피시스와 노모스를 분리하며, 피시스와 노모스에 의하면 부정의를 따르고 행하게 된다는 소피스트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플라톤의 주장을 살펴본다. 5장에서는 실제 폭력이 등장하는 국가와 정치체제에서 폭력의 문제를 다룬다. 그리고 6장에서는 폭력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해주는 영혼의 정화와 법의 준수와 교육을 다룬다.

 


2. 폭력 이해를 위한 형이상학적 기초

1) 플라톤의 우주론

플라톤은 {티마이오스} 편에서 우주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영원히 존재하고 생성하지 않는 원형으로서의 이데아와 항상 생성하면서 결코 존재하지 않는 생성으로 나눈다. 전자는 이성에 의한 사유에 의해서만 파악되며, 후자는 지각에 의한 독사로 파악되며 비이성적인 것으로 항상 생성 소멸하며 전자를 모방한 가시적인 것이다. 그리고 49A에서는 이것들 외에 제 3의 것으로서 이성에 의해 파악되기 힘들고 어두운 상인 생성의 어머니를 말하고 있다. 생성은 원형으로서의 이데아를 아버지로 제 3의 것인 공간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난 아들이다. 이같이 모든 생성은 필연적으로 어떤 원인에 의해 생성된다. 원인 없이는 생성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우주의 원인을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로 신적 원인이다. 데미우르고스는 항상 동일하게 존재하는 이데아를 원형으로 하여 이 세상을 가장 선하고 아름답게 만들려 했다. 바로 데미우르고스가 생성되는 것들의 가장 진정한 원인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다른 것으로부터 활동성을 얻는 종속적 원인이 있다. 이것은 이성적 사유와 다른 것으로서 우연적이고 무계획적으로 움직이는 운동 원인이며, 맹목적 자의적 운동원인이다. 이 원인은 필연에서 나온 것이다. 종속적 원인은 신적 원인에 의해 필연적 수단과 조건으로 조작될 때 우연과 맹목에서 벗어나 제 1원인인 이성을 돕는 보조 원인이 된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보조원인이라 할 수 있는 냉온, 경중, 농축, 희박 등을 모든 것들의 원인으로 놓는 착오를 범했다. 플라톤은 이런 원인 외에 이성을 모든 것들의 진정한 원인으로 설정했다. 필연에 근거한 물체적인 것은 제 1원인에 보조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적 질서에 저항하거나 방해되기도 한다. 사고는 최고의 탁월한 원인이며 영혼 속에 내재한다.
플라톤은 29A에서 47D까지 우주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를 논했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되도록 이데아에 비슷하게 하려는 데미우르고스의 제작 목표에서 찾을 수 있다. 우주의 진정한 목적 혹은 원인은 결국 데미우르고스가 전형으로 삼고 바라보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선의 이데아이다. 그는 이 우주를 살아있는 지적 존재로 참 실재로 향하는 영혼의 존재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세계에는 저 이데아와 같은 합리적이고 질서와 조화 그리고 선과 미 한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고 불합리하고 무질서한 악하고 어두운 측면이 있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런 측면을 설명하기 위해 필연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 세계에서 생기하는 모든 현상에 있어 인간의 예견 목적 동기 등의 요인과 전혀 우발적인 예측 불가능한 요인을 구별했는데, 바로 이 상반되는 두 요인을 자연에도 그대로 적용했던 것이다. 플라톤은 필연이 가능한 이성에 설복되어 질서와 조화가 깃든 세계상 즉 윤리적으로 선으로 수렴되는 세계상을 구상한다. 데미우르고스가 필연을 설복시키려 무한히 애를 쓰지만 물질 그 자체가 갖는 본성의 한계를 무시할 수 없다. 비합리적이고 단지 필연적인 운동과 변화들은 인과적이요 비계획적인 결과로서 자연에 항상 일어난다.

2) 플라톤 우주론의 의미

{티마이오스}에는 인간과 신의 원초적인 대립이 존재한다. 한편에는 영원히 존재하는 원형으로서의 이데아가 있는 반면, 다른 한편에는 변화하고 생성하는 인간이 있다. 첫 번째 것은 지성과 사유의 영원한 존재이고, 두 번째 것은 비이성적인 감각과 연결되고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며 결코 실재하지 않는 가멸적 존재이다. 첫 번째 것은 지성적이고 절대적인 생명 그 자체, 지성적이고 아주 완전한 절대적 존재이며 명령자이다. 두 번째 것은 감각적인 육체이다. 이것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으며 변화와 생성의 지배를 받는다. 첫 번째 것은 모델 그 자체이며, 두 번째 것은 모델의 복사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과 인간은 따로 따로 존재하며, 인간에게 구원은 없다.
이와 함께 {티마이오스}에는 신과 인간의 우주론적 조화가 존재한다. 신이 세계의 영혼과 육체의 만들었듯이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혼과 육체의 만들었다. 이 만듦은 지성에 의한, 필요성에 의한 행위이며, 지성과 필요성은 각각 신적 원인 필요원인이다. 이러한 만듦을 위해 신의 섭리는 지혜, 영혼, 육체와 원인들 중 가장 완전한 원인을 사용한다. 그리고 수학적 비율에 따른 혼합에 의해 세계의 영혼은 물론 인간의 영혼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혼 속에는 지성계와 감각계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며, 신이 내재되어 있다. 인간은 영혼 내에 신을 분유함으로써 신과 조화될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의 존재론적 본성이다. 그리고 최고 존재인 신이 가지계를 거쳐 감각계로까지 내려오게 된다.
{티마이오스}에는 인간이 운명적인 부패의 구원을 위해 신에게로 나아가는 길이 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의 영혼에는 지성계와 감각계, 같음과 다름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조건 속에서 존재와 변화 사이에 자리하는 근원은 오류의 원인이 될 수 있으며, 인간의 움직임 특히 영혼을 추락시킬 수 있다. 영혼의 추락은 영혼의 조화를 깨뜨리고 인간은 영혼과 지성보다는 육체와 감각을 더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상태는 영혼의 병, 즉 쾌락, 고통, 욕망, 광란, 무지의 발광을 초래한다. 그러나 인간은 신적인 뛰어남이 존재하기 때문에 조화와 전체의 움직임에 대한 지식으로서 또 본래의 본성과 일치하는 명상을 통해서 신이 인간에게 제시한 생명을 완전하게 완성시킬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신에게로 나가는 길이다. {티마이오스}에서 가지계와 가시게는 서로를 정당화하면서 확인하고 있다. 즉 {국가}에서 이상성에 적합하지 못한 것으로 남아있는 현실성은 {정치가}를 거치면서 차츰 그 가치를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법률}에서는 이상성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의 진정한 윤리성을 강조하게 된다. 이것은 이상성이 현실 속에서 자신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요소를 발견함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이의 모델을 {티마이오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3. 정의와 부정의

1) 소피스트들의 정의관

도시가 생기기 이전의 헤시오도스의 세계에 있어서 dike(정의)는 하늘과 땅 사이가 분리된 것처럼 두 차원에서 작동하였다. 왜소한 보이오티아(Boeotia) 농부의 차원인 지상의 이곳에 있어서 dike는 선물의 독식자들인 왕들의 변덕에 종속하는 사실의 결정이었다. 하늘에서의 그것은 접근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군주의 신성이었다. 기록된 글자에 의해 공중에게 알려진 결과로서의 dike는 여전히 이상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엄격한 인간적 차원으로 구체화되었다. 그것은 법이다.
소피스트들은 "의도적으로 부정의를 행동하는 것, 치사하고 부정하게 처신하는 것과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강하고 가장 현명한 영혼, 즉 가장 정의롭고 훌륭한 영혼의 행동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344 c에 의하면 충분할 정도로 이루어진 부정의는 가장 강하며, 인간에 있어 가장 바람직하며, 정의보다 더 충실한 것이다. 그리고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 글라우콘은 두 가정적인 사람 즉 부정의한 평판을 갖는 정의로운 사람과 정의로운 평판을 갖는 부정의한 사람을 비교한다. 부정의한 사람은 정의를 위한 평판을 갖는 사람에게 생기는 모든 사회적인 선들 즉 부귀, 권력과 지위를 요구한다. 정의로운 사람은 부정의를 위한 평판 때문에 "채찍질 받고 고통 받으며 그리고 결박될 것이고 그의 눈은 식어버릴 것이고, 마지막에는 모든 악을 겪을 때 그는 심한 고통을 다 겪게 될 것이며, 그리고 사람들은 정의롭기를 원해서는 안 되고 정의로운 척 하기를 원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아데이만토스는 361 e-362 a에서 정의는 항상 그 결과 때문에 칭찬 받으나 그 자체 때문에 칭찬 받지 않으며, 덕은 고된 반면에 악은 쉽고 신은 매수되어 과거의 잘못을 보고도 못 본 채 한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러한 소피스트의 정의는 사악함이다. 이 정의는 아첨이 분출하는 개인적 욕망과 정치가와 권력자들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수사학적 설득의 한 형태이다. 이런 정의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현세와 현세에서의 잠정적 행복뿐이다. 이 정의는 상대주의의 표현으로서, 이 상대주의는 오직 인간만을 모든 것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플라톤은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명제를 논박한 후 "신은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한다. 프로타고라스 유명한 명제 "인간은 만물의 기준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들 존재의 기준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그들 비존재의 기준이다." 이 명제에 의하면 윤리적 실천차원에서는 인간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절대적 무신주의이며 각자 나름의 기준이기 때문에 절대적 상대주의이다. 인식론적 입장에서 보면 이 명제가 대중설득의 무기이기 때문에 더 심각하다. 이 명제에 의하면 어떤 오류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무오류성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어떠한 방법에 의든지 각자의 판단은 정당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소피스트들의 판단은 가시적 감각적 사물에 의거한다. 가시적인 것은 바로 가지적인 것이며, 감각은 곧 앎이며, 감각과 표상에 의해 인지된 사물은 본질이며 진리이다. 기준들이 무수하게 많은 것은 이 감각의 상대성의 결과이며, 따라서 인간 기준에 의하면 모든 개인은 진리 속에 존재하게 된다.

2) 플라톤의 정의관

플라톤에 의하면 정의는 신에 의해 인간에 주어진 몫에 알맞게 행동하는 것, 오류와 실수의 네메시스를 정화하는 것이 정의이다. 정의는 "디케-네메시스의 사자"를 맞이하는 것이다.(법률 717 d) 님프 네메시스는 정의(Dike)의 딸이며 운명(Moira)의 여신으로서 아테네의 한 신전에서 숭배되었다. 네메시스라는 말은 인간적 오만에 대한 신들의 복수, 분개, 질투를 뜻한다. 인간이 오만함을 갖고 있는 한 신들은 벌로서 그들의 네메시스를 준비한다. 즉 운명적인 실명, 불행, 천상의 복수 등이 인간에게 주어진다. 플라톤에서 네메시스가 휘브리스에 주어지는 것은 신인동형설적인 질투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질서를 세우려는 신의 섭리에 의해서이다. 휘브리스(hybris)라는 말은 두가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오만의 지나침, 건방짐, 폭력 등이며, 다른 하나는 모욕, 훼손 등이다. 휘브리스는 철기시대에 귀족적 오만에 익숙하게 몸에 배게된 비이성적 요소들이다. "철기 시대의 도래로 인하여 강한자는 모든 기존의 예의를 상실하였고, 수치심은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먼 세계로 날아가 버렸기 때문에, 그러한 이상들은 보다 더 강력한 것이 되었다. 이처럼 이완된 개인적 정렬과 hybris로 인하여 분명하게 남겨졌던 삶의 방식과 더불어, 사회적 관계는 폭력, 간계 독재와 부정의로 특징지어졌다."
플라톤은 "인간은 의도적으로 악을 행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면서 소피스트적인 정의를 거부한다. "가장 큰 악은 부정의를 행하는 것이며, 부정의를 당하는 것과 행하는 것 중에서 선택이 불가피하다면 나는 차라리 부정의를 당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플라톤은 정의는 아름답고 좋고 유익하며 필요하고, 부정의는 추하고 나쁘고 해롭고 불필요하다는 공식으로서 정의를 윤리적인 질서에 제한시켜 논하고 있다. 부정의한 생활은 가장 추하고 가장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실제로 정의롭고 성스러운 생활보다 더 불쾌한 것이다.『고르기아스』에서 소크라테스는 폴로스에 반대하여 불의를 행하는 것이 영혼을 나빠지게 하는데, 이것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대의 악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 폭군 노릇을 하는 것과 같이 불의를 행하는 것은 불의를 당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불의를 행하고 처벌을 면하게 되는 것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영혼 속에 있는 악을 공고히 할 뿐인데, 반면에 처벌은 교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타고라스} 330 c 3이하에서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과는 반대로 정의가 불경스러울 수 있거나 경건이 부당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에 반대한다. 절도 없는 사람은 인간에게서 실제로 해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며, 반면에 절도 있는 사람은 참으로 좋고 유익한 것을 추구한다. 그런데 참으로 좋고 유익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현명하며, 반면에 해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러므로 정의와 절제는 완전하게 별개일 수 없다.
플라톤에 의하면 쾌락과 정열과 만취의 은상인 육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인간은 스스로를 완성하거나 인간 속에 있는 신을 발견해야 한다. 자신 그 자체를 아는 것이 진정한 정의이다. {에우티프론}에서 플라톤은 인간에 내재하는 신을 발견하는 것이 정의이므로 경건심은 자연히 정의와 연결된다고 주장하며, 이 정의는 조화와 피조물간의 우정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법률}에 의하면 "신은 모든 것의 기준이 되어야하며, 이것은 최고수준에서 또한 인간이 모든 것의 기준이 아닌 것보다 훨씬 이상의 정도에서이다."


4. 노모스와 피시스

1) 소피스트들이 본 노모스와 피시스

다원적 사회구조의 발전과 이로 인한 새로운 입법의 필요성으로 인해 노모스는 일상적 개념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시스에 대한 새로운 개념은 노모스의 존재기반에 변화를 초래하게 된다. 노모스와 피시스에 대한 새로운 개념의 형성은 여러 세대를 걸친 축적된 경험적 관찰의 결과이다. 소피스트들은 자연법과 관습법의 위반자와 무신론자들 또는 신성모독자들과 이들의 자손이 어떠한 벌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남을 지배하고 있다고 현실적으로 판단했다. 따라서 노모스 자체가 비판될 뿐 아니라 노모스와 사실간의 갈등이 지적된다. 이 같은 상황이 소피스트들의 활동근거이다.
소피스트들에 의하면 법은 인간적 제도의 협정일 뿐이다. 글라우콘에 의하면 부정의는 자연의 법이며 정의는 인간들 사이의 계약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법은 신적인 것이 아니다. 소피스트들은 노모스를 비판하고 사회의 개혁을 시도하면서 피시스로 복귀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노모스에 대한 새로운 개념은 피시스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고르기아스}의 칼리클레스에 의하면, 피시스에 의한다면 사실상 가장 추하고 가장 해로운 부정의를 따르는 것이며, 노모스에 의한다면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노모스는 약자와 다수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피시스에서 가장 요령 있는 것만이 원칙이며 약자에 대한 강자의 지배와 강자의 우월성은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칼리클레스는 이 피시스가 진정한 피시스라고 본다, 고로 그는 피시스에 반대되는 노모스는 수정되어야 한다. 소피스트들에게 법률은 세상과 인간과 신의 지배로서의 힘을 정당화한다. 강자들을 위한 노모스가 바로 정의이다. 소피스트들은 현실주의를 택하며 현실주의에서 오직 부정의, 불경건, 정치적 덕에 반대되는 모든 것들만이 설명되고 있을 뿐이다.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 구원 국가 또는 올바른 판단으로서의 앎으로 이끌어가며, 이와 반대로 소피스트들은 감각적이고 즉각적인 쾌락이나 비이성적인 것 무지와 개인의 자의식이 결코 나쁘지 않다고 주장한다. 갈등적인 인간성이 신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나름의 존재근거를 가질 수 있다고 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소피스트들의 피시스는 법률과 관습의 감각적 평가로 초래된 감각, 쾌락 등의 즉각적 동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소피스트들에 의하면 피시스는 어떠한 대상에 대해서도 적당한 이름을 부여하지 못하며, 피시스의 이름을 부여하는 사람들에서의 용법과 관습의 문제이다.

2) 플라톤이 본 노모스와 피시스

노모스는 플라톤 이전의 옛 의미는 관습, 방법 또는 태도를 의미했으나, 플라톤에서는 거의 모든 용례에서 특히 {국가}와 {법률}에서는 성문법이든지 또는 불문법이든지 간에 법의 의미를 갖는다. 노모스를 관습으로 규정할 경우 노모스는 불문법이 된다. 즉 전통적 종교 또는 아폴론의 권위와 일치하는 관습상의 법칙들이 된다. 이 노모스는 전통과 종교에 의거한 사회생활을 개인에게 규율한다. 그러므로 개인과 사회의 존재를 위한 절대적 기준이 된다. 따라서 노모스는 사회의 팽창, 발전, 복합성에 영향을 받은 개체의 분출을 억제하는 전체적인 도구가 된다. 플라톤에 의하면 노모스는 본질적으로 피시스와 일치하는데, 그것은 피시스가 자연 자체이기 때문이다. 피시스는 현실세계에 대해서 사물들과 섭리적 법칙들의 총체이며, 현실문제에 대해서 개별적 성격과 성향을 규정하는 존재기반이며 존재원리이다. 피시스는 표상을 넘어서는 존재들의 본질 또는 본질적 실체이며, 현실적이고 표상적인 모든 사물들과 사유들의 개념과 아레테를 규정한다. 피시스는 선의와 형평과 신적 권위에 의존하는 모든 법칙들의 총체이며 자연법이다.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에 의해 노모스의 존재기반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한 피시스에 노모스를 결합시키려고 한다. 소피스트들은 노모스는 피시스와 독립된 별개의 것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다수는 고립된 개인보다 훨씬 강하며, 개인에게 법률을 부과하는 다수에 의해서이다. 따라서 법은 뛰어난 자들, 힘쎈 자들의 법이다. 그러나 이 다수조차도 정의는 불평등이 아닌 평등 속에서 성립되는 점과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이 창피한 일인 것은 노모스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피시스에 의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피시스만을 주장하거나 노모스만을 주장하는 사람 모두 피시스로 유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에 의하면 노모스와 피시스는 서로 모순되지 않으며, 가장 훌륭한 자는 가장 현명하며 지성적이고 이성적인 자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간에 피시스에 의거함은 당연한 일이다.


5. 폭력이해의 근본구조

1) 국가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문제

플라톤에서 국가는 인간의 필요가 그 시발점이다. 국가에서 인간들은 의식주의 필요를 보다 효과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해 서로 결합한다. 그러나 플라톤에서 중요한 점은 이상국가의 이론을 수립하기 위해 국가를 인간에 선재하는 공동체로서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는 것으로 본 점이다. 그에 의하면 국가와 개인 사이에는 같은 덕성이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개인의 영혼에는 국가에서 볼 수 있는 같은 부분 또는 같은 그 부분의 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인에게는 개인과 사회와 국가와 종교는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단일체 속에서 서로 융합되어 있었다. 따라서 개인을 말할 때 특별한 개인이 아니라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일반적인 개인을 총칭하는 것이다. 가족과 집단성 속에서 개체성으로서의 개인은 사회적 국가적 전체성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과 국가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또 개인은 국가에 종속된다. 가족에 있어서의 이기주의나 자립적인 개인은 국가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과 국가는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개인보다 더 크다."(국가 368 e) 여기서 크다는 것은 양적일 뿐만 아니라 질적인 것까지 포함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개인적, 가족적, 사회적 생활은 아주 완전히 혹은 부분적으로 국가의 단일성 속에서만 그 존재이유를 갖는다. 이런 관점에서 사회적 체계는 형성된다. 국가 속의 계급들과 그 덕목은 국가적인 정의와 관계한다.
국가에서 인간 영혼은 지혜, 용기, 절제의 덕목이 각각 지배자 계급, 전사계급, 일반 시민 계급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 세 덕목의 완전한 조화가 정의로 규정되었다. "다른 계급의 기능을 침범하고 세 계급이 혼합된다면 국가에 가장 큰 손해가 초래될 것이며, 그야말로 큰 범죄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위계적 구조의 유지는 국가의 제1관심사이다. 그러나 {법률}에서 그는 기능의 상호침범과 계급의 변화를 어느 정도 계급들이 합법적 범위를 넘어서서 국가 그 자체를 해치지 않는 조건에서 인정하고 있다. 국가에서 계급분류의 기준은 영혼의 질이었으나, 법률에서는 여기다 재산의 양이 부가되었다. 노예들은 비록 그들이 부유해지고 그 부로서 사회 지위를 바꾸기에 충분하여도 계급을 바꿀 수는 없다. 노예는 이상국가의 현상을 유지하는 데 봉사하여야 한다. 이런 플라톤의 태도는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정의는 국가이익의 완전한 일치 이외의 것이 아니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플라톤에서 개인은 국가의 일원이다. 그리고 개인은 가족의 일원이다. 개인을 국가에 완전히 결합시키듯이 가족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갖는다. 가족은 전통에서처럼 국가에 귀속되어야 한다. 이 같은 관점에서 플라톤은 부녀자, 아이들 공동체와 모든 재산의 공유제를 주장한다. 효율성을 위해 여자는 남자와 동등하며 동등한 교육의 권리가 있다. 그리고 부인과 자녀의 공동소유와 출산, 결혼, 재혼의 통제도 효율성과 기하학적 우생학적 필요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것은 이러한 제도의 효과가 선의 근원, 가장 큰 선의 근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법률} 제 1권에서 크레이니아스는 크레타의 입법자들은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입안했다고 말한다. 모든 도시가 다른 모든 도시와 자연적인 전쟁 상태에 있는 데, 그 전쟁은 사실상 전령관이 포고하는 것이 아니라 영구히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외적과의 전쟁이나 국가 간의 전쟁에 관해, 최상의 입법자는 전쟁이 자신의 국가에서 발발하는 것을 억제하거나 또는 전쟁이 일어나면 서로 싸우는 사람들을 우정 속에서 화해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며, 평화와 선의 속에서 확보된 국가의 행복이라는 최상의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사려분별이 있는 입법자라면 결코 전쟁을 위해 평화를 명하지는 않을 것이며, 만약 그가 전쟁을 명한다면 평화를 위한 것일 것이다. 그는 국가 조직이 전쟁을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많은 승리가 승리자들에게 자멸적이었으며 장차 자멸적일 것이나, 교육은 결코 자멸적이지 않다"는 것을 지적한다.
플라톤은 국가와 개인을 전쟁과 싸움에서 보호하기 위해 빈부문제가 중요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국가와 법률에서 가난함과 부유함이 그 극단의 형태로 발전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국가의 수호자는 모든 수단을 통하여 이 가난함과 부유함이라는 두 개의 악이 그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공동체에 나타나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는 나태함과 무위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낳고, 다른 하나는 추잡함과 악행을 하려는 충동을 낳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이상국가를 다스리는 사람으로서 {국가}에서는 철학자, {법률}에서는 입법가, {정치가}에서는 정치가를 상정하고 있다. 이들은 먼저 arete를 갖춘 사람이어야 하고 arete를 교육시킬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는 "부, 명예, 야망, 이익, 쾌락 어느 것도 아닌 국가를 위한 절대적 필요에 의한" 지도자이다. 그의 본성은 절제와 정의와 일치한다. 이기주의는 어떠한 가치도 갖지 못한다. 이런 목적을 위해 그의 공민권은 제한되어야 한다. 이들은 공동식당을 가져야 하며 군인들처럼 병영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 금과 은은 그들이 거래해서도 안 되고 만져서도 안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 자신을 보존하게 될뿐더러 국가도 보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한 번 재산을 축적하기 시작하면, 그들은 매우 빨리 폭군으로 변할 것이다.
그는 진리 발견을 위해 철학을 수행해야 하며, 본성상 종교적이어야 한다. 이 점은 철학자로서의 의무가 규정되고, 또 형이상학적 전체성이 그 정당화와 검증의 필요에 의해 신에 의탁하지 않을 수 없음에 비추어 명백히 드러난다. 그는 "신의 특별한 은총을 받는 자"(국가 93 a, 492 e)이며, 제우스의 입법가, 텔포이 신정의 입법가이다. 국가를 다스리기 위한 수단인 법은 {정치가}에서 정치가에게 절대적 필요로 나타나지 않지만, {법률}에서는 입법가에게 필수적인 것이 된다. 플라톤은 현실에서 그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고 법은 점차 가장 덜 나쁜 방법으로 등장한다. 이상국가의 효과적 실현과 다스림을 위해서 지도자는 점점 더 구체적인 수단을 필요로 한다. 즉 {정치가}에서의 정치학과 {법률}에서의 법이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플라톤은 그의 지도자에게 거짓말의 권리와 그릇된 자들에 대한 설득의 권리를 부여하고 있다. 그는 국가의 단일성을 위한 국가의 자유를 위한 장인이기 때문에 "다양한 시민들과 군중들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입법을 하는 한에서" 이 권리를 갖는다.

2) 정체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문제

플라톤은 역사 혹은 신화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크로노스시대에서 정치체제의 이상적 모델을 찾고 있다. 크로노스의 지배는 신적 지배이며, 대화편의 다른 정치체제는 인간적 지배이다. 크로노스를 떠나서는 오직 인간적 로고스의 독재만이 있을 뿐이다. 이 같은 것은 플라톤이 정치체제 차원에서도 신에 의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법에 의해 신정체제가 실현될 것이지만 {국가}에서는 신정체제로부터 격리된 가시적 체제들만이 정체분석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정치체제의 변질과 다양성은 인간적 휘브리스와 피시스에 의한 것이다.  플라톤에서 지배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그는 "정치가"에서 가족 구성원에 대한 가장의 경제적 지배, 노예에 대한 경제적 지배, 시민에 대한 정치가의 정치적 지배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모든 지배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라는 면에서 원칙적으로 같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형태의 지배관계를 이론적으로 고찰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지식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한다. 플라톤은 자유민에 대한 자유민의 지배와 비자유민과 노예에 대한 자유민의 지배를 나누어야 한다고 본다. 지배에 복종하는 사람들의 신분이 다르면 지배권 행사의 양태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주인의 소유물인 노예는 주인의 생활 활동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으므로 주인의 노예에 대한 지배는 단지 주인의 의사에 의해서만 결정되며 제한할 수 없고 법과 법률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의 관심은 가정을 중심으로 해서 형성된 최고의 공동체인 폴리스에서 행해지는 여러 형태의 지배에 관심을 기울인다.
플라톤은 {국가} 7, 8권에서 인간 영혼에 상응하는 다양한 정체들을 인간 영혼과의 관계에서 분석하고 정치체제들의 윤리에 대한 위계질서를 제시한다. 그 정상에는 귀족정체, 또는 군주정체, 다음으로는 금권정치와 과두정체, 민주정체,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제정체이다. 기하학적 수로부터 멀어진 이들 정체들은 신정정체와 같은 상태와 존재양식을 가질 수 없다. 이 위계질서의 판단기준은 정의와 부정의, 행복과 불행이다. 이 정체 중 최선의 것은 가장 정의롭고 행복하며, 폭력 투쟁의 정체는 가장 부정의하고 불행하다. 이들 두 최선, 최악의 정체 사이에 명예 야망 권력의 정체, 부유함과 가난함의 재산의 정체와 자유와 관용과 평등의 정체가 자리한다. 이 기준은 전적으로 윤리적이다.
완전한 국가는 귀족 정치의 국가다. 그러나 두 상위 계급이 결합하여 다른 시민들의 재산을 나눠 가지며 그들을 사실상 노예 상태로 전락시킬 때, 귀족 정치는 금권정치로 변하는데 이는 기개적 요소의 우세를 나타낸다. 다음으로 금권정치가 과두정치로 변할 때까지 배금의 경향이 증가하여 정치권력은 재산에 의존되게 된다. 그러므로 가난으로 고통 받는 계급은 금권정치 하에서 생기며, 마침내 가난한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을 내쫓고 민주주의를 설립한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특징인 자유에 대한 엄청난 사랑은 반동을 거쳐서 참주정치(전제정치)로 흘러간다. 처음에는 전사가 허울 좋은 핑계로 호위자가 된다. 그러나 곧 핑계를 벗어 던지고 쿠테타를 감행하여 폭군으로 변한다. 참주정는 범죄계급에서의 가장 사악한 살인자의 정부이다. 그들은 정적을 살해하고 부자의 재산을 몰수하므로 공포시대를 도입한다. 권력에 남아있기 위하여 참주는 덕이 있는 모든 사람을 사회로부터 제거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그의 통치행위에 위험요소이기 때문이다. 참주는 환자에게 약을 투약하는 좋은 내과의사와 정반대이다. 왜냐하면 의사들은 가장 사악한 요소를 도려내고 최선의 요소를 남겨두나 참주는 그 반대의 것을 하기 때문이다. 참주적인 국가가 국가에서의 최악의 요소들에 의하여 통제되는 것처럼 참주적인 개인은 그의 영혼에 있는 최악의 요소들에 의해 통치된다. 과두정치의 집정자와 민주정치와 같이, 참주는 쾌락에 몰두하게 되나 그들과 달리 전혀 쾌락을 절제하거나 억누르지 못한다. 그는 불필요한 쾌락들 중에서 가장 무법적이고 난폭한 쾌락을 추구한다.
{정치가}에서 정체의 분리의 방법은 수에 의한 것이다. 일인의 명령에 의한 체제는 군주정체, 다수의 명령에 의한 체제는 귀족정체 혹은 과두체제, 그리고 대중의 명령에 의한 체제는 민주정체이다. 다음으로 합법성과 불법성에 의한 분류이다. 법에 의해서는 왕권정체와 독제정체가 일인에 의한 정체에서, 귀족정체와 과두정체가 다수에 의한 정체에서, 의법적 민주정체와 탈법적 민주정체가 대중에 의한 정체에서, 각각 합법성과 불법성의 기준으로 분류된다. 합법적 분류는 왕권정체, 귀족정체, 의법적 민주정체이며, 불법적 부류는 독제정체, 과두정체, 탈법적 민주정체이다. 『정치가』에서 플라톤은 합법적 정체들 중에서 군주정체는 가장 좋은 것이며, 민주정체는 가장 나쁘다고 한다. 불법적 정체 중에서 민주정체는 가장 좋은 것이며 군주정체는 가장 나쁜 것이다. 그러나 합법적 정체로서 가장 좋은 민주정체도 나쁜 집합에 속하며, 합법적 정체로서 가장 나쁜 민주정체도 좋은 집합에 속한다. 왜냐하면 "다수에 의한 정부는 관직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 분할되기 때문에, 모든 점에서 약하며 다른 정부들과 비교했을 때, 어떤 거대한 선이나 어떤 거대한 악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6. 폭력의 극복을 위한 처방

1) 영혼의 정화

국가를 윤리화하는 일은 국가의 구성원인 개인도 윤리화하는 것이다. 개인의 윤리화는 국가를 윤리화를 위한 실현 또는 준비과정이다. 플라톤은 {법률}에서 영혼과 영혼 돌보기의 중요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 중에서 영혼은 신들 다음으로 가장 신성하고 또 참으로 그 자신의 소유이다." 그리고 "땅 속에 있거나 또는 땅위에 있는 모든 금도 덕과 바꾸기에 충분하지 않다." 플라톤에 있어서 인간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덕의 본질적 요소는 건전한 영혼, 즉 내적 질서와 조화를 갖는 영혼의 소유에 있다. 영혼의 덕은 지혜, 용기, 절제, 정의로 분류된다.  이 네 가지 덕을 획득할 때 인간 내에서뿐만 아니라 국가 내에서 완전한 조화 즉 정의를 성취할 수 있다.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은 영혼과 육체가 결합되어 있는 존재이며, 그 결합은 일시적인 것이다. 인간에서 영혼은 최고로 중요한 존재이며, 불멸하며, 선재하며, 육체의 사후에도 존재한다. 플라톤은 오르페우스-피타고라스의 윤회설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철학적으로 증명하려 한다. {파이돈}에서는 영혼의 단순성을 강조하며, {국가}에서는 영혼을 삼분하고 있다. 이성, 기개, 욕망 등의 구분이 그것이다. 인간영혼의 3중 구조론에서는 지혜, 용기, 절제의 덕목이 각각 지배자계급, 전사계급, 일반시민계급에 해당하며, 세 덕목간의 완전한 조화가 정의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법률에서 지혜, 용기, 절제에 대한 병적인 상태는 몰상식, 비열, 방탕으로 규정한다. 그는 국가에서 무지에서 출발하여 이성의 결여를 거쳐 질서에 이르는 위계질서를 세 영혼 속에 부여하고, 지혜로운 자의 기쁨만이 순수한 기쁨이라고 하고 있다. 즉 탐욕스러운 영혼, 조급한 영혼, 철학적인 영혼 가운데 탐욕스러운 영혼은 금전과 이익만을 추구하고, 조급한 영혼은 승리와 명예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부정의에서 정의로 이어지는 위계질서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첫 번째 영혼은 욕망의 폭력에, 두 번째 영혼은 야망에 가득 차서 지배욕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이 두 영혼은 정의에 합당치 않으며 지혜로운 자의 영혼만이 고통과 기쁨에서 벗어나 진정한 앎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영혼의 세 부분 중에서 폭력과 관계되는 부분은 욕망과 기개 부분이다. 욕망에서 부는 육체적인 욕망이 만족이 되는 주요한 도구이므로 부를 사랑하거나 이득을 사랑하는 요소이다. 그는 육체적인 만족과 부가 전형적인 목적들이었던 그런 욕망을 상정했다. 기개는 올바르게 교육된다면 참된 용기가 되지만 잘못 교육된다면 맹목적인 잔인성 아니면 방자함으로 타락한다. 그것은 경쟁의식이나 호전성으로도 발전하므로 균형을 잃은 기개적 요소는 단순히 무차별적인 호전성의 근원이 된다. 그래서 만인에 대항하는 만인의 파괴적인 전쟁으로 끝날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와 {법률}에서 덕(arete)와 악(kakia)의 관계를 구체화한다. 인간적 이성은 영혼의 조건이며, 이성을 통하여 아레테에 참여하며, 이성이 없으면 "욕망, 겁, 과도, 분노, 무지, 탐욕, 나태" 등의 악으로 퇴락한다. 인간은 이성적인 영혼과 더불어 비이성적이고 탐욕적인 영혼을 갖고 있다. 인간본성의 이중성 때문에 인간은 덕과 악 사이에서 중용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인간적 유약함에도 불구하고 덕의 실천을 통하여 인간에게 주어졌던 신성을 가능한 한 모방해야 한다.

 2) 법률의 준수

국가의 절대성을 위한 플라톤의 해결책은 현실성의 측면에서는 준법이며 이상적인 측면에서는 법의 보전인 것이다. 가장 훌륭한 정체인 신정체제에는 법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의 법은 신법, 자연법, 피시스와 노모스이다. {정치가}에서 법은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정치체제의 기준이 된다. 법이 있는 체제는 좋고, 법이 없는 체제는 나쁘다. 이때의 정치체제 내에서의 법은 성문법이다. 철학가와 정치가는 열등한 체제들의 생존을 위해 악인들을 금지시키고 처벌하기 위해 입법가가 되어야 한다. 정치체제 내에서 성문법이 없으면 정의와 부정의, 폭력과 덕이 혼동된다. 성문법의 필요성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그는 성문법 대신에 왕의 학문과 관습법을 선호한다. 법은 으뜸가는 것이지만 더욱 좋은 것은 법에 힘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신중함을 갖춘 사람에게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은 가장 유익한 처방을 만드는 방법으로는 가장 훌륭한 것과 가장 정의로운 것을 한꺼번에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행동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성이 존재하므로, 항상 가치 있는 절대적인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항상 절재적인 것으로 남아있는 것이 결코 그렇지 않는 것에 적용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공동체의 관습이 국가에서처럼 성문법보다 바람직하게 된다.
국가는 참된 국가조직이어야 한다. 민주주의, 과두 정치, 참주 정치는 모두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계급국가이고, 그것들의 법률은 특수한 계급들의 이익을 위하여 가결된 것이지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법률들을 가지고 있는 국가들은 진정한 국가조직이 아니라 붕당이며, 정의에 대한 그것들의 개념은 단순히 무의미할 뿐이다. 정부는 어떤 사람에게도 출생이나 재산에 대한 고려 때문에 맡겨져서는 안되고, 개인의 성격과 지배에 대한 적합성에 따라야 한다. 지배자들은 반드시 법에 복종해야 한다. 법률이 지배자들보다 위에 있고 지배자들은 법률보다 낮은 국가는 신이 내려주실 수 있는 모든 구원과 축복을 가진다.
{법률}에서의 입법 및 법률에 관한 내용은 신법 및 자연법에 다른 성문법의 제정, 성문법에서의 중용적 요소, 필요에 의한 준법, 성문법의 보조로서 관습법의 가치를 논한다. 진정한 입법에 있어 신법과 자연법은 {국가}에서 변증법에 의해, {정치가}에서 정치학에 의해 발견된 원칙이다. 성문법이 참고해야 할 제1의 것은 신법과 자연법이다. "입법가는 신들의 존재와 모든 진리를 인정하는 전통적인 원리들을 지지해야 하며, 신들이 원래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 주면서 법 그 자체를 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들은 올바른 이성에 일치하는 지성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 원리에 의해 제정된 성문법은 중용이며 황금의 원칙으로서, 지배자들만을 위한 것도 아니고, 갖지 못한 자들을 위한 것도 아니다. 법은 산술적이 아닌 기하학적 종합으로서 오직 공동체만을 위한 것이다. 성문법이 자연법과 신법을 해석한 것이기 때문에 법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바르게 제정된 법률의 지배 하에서는 진정한 조화만이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가족, 재산, 범죄 등에 관해 입법한다. 입법의 원칙은 공동체의 자유, 합리성, 단일성을 위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 정치권력의 분립과 권력의 상호통제가 필수적이다. "너무 큰 권력이나 통제받지 않는 권력을 제정하지 말아야 한다." 또 하나의 원칙은 좋은 질서 뿐 아니라 가장 덜 나쁜 질서를 목적으로 입법해야한다. 이것은 열등한 영혼을 위한 것이다. 가장 좋은 질서, 오직 철학적 영혼만을 위한 질서만 있다면 합리성을 간직할 수는 있지만 열등한 영혼의 자유는 법체계 속에서 위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입법은 조급하고 탐욕스러운 영혼들을 포괄하는 차선질서의 윤리성을 정의하여야 한다.
훌륭한 입법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시민들에게 준법의 의무가 주어진다. "가장 우수한 자는 국법에 대한 영광스러운 봉사에서의 승리자이다." 왜냐하면 법에 복종하는 것은 신에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의 정신 속에는 공동체의 존재이유뿐 아니라 신의 섭리가 깃들어 있다. 신과 공동체와 법은 서로 같은 수준에 있게 된다. 윤리와 같이 입법하기 어려운 분야에서는 관습법 혹은 불문법이 성문법과 같은 가치를 갖는다. 관습과 불문법이 입법가에 의해 정화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들은 전통적인 제사 또는 종교를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교육

국가의 중요한 기능은 인격을 개발하고 마음을 훈련하는 교육에 있다. 그러므로 국가의 많은 부분이 교육의 무제에 할애하고 있다. 입법자와 사법관은 모두 법률을 보전하는 역할을 하지만 사법관의 역할은 보다 교육적이다. 법이 구체적인 사항 즉 윤리에 적용되지 못하는 사실은 입법의 한계성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다. 윤리적 측면에서는 사법관이 행하는 교육에 의해 열등한 영혼들을 구하게 된다. 법은 다양성을 전부 포괄하지 못하므로 법에 의해 모든 범죄를 처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법체계만의 엄격한 적용으로는 교육적 효과를 얻을 수 없다. 플라톤에서 국가는 단순하게 경제적 문제만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선한 삶 속에서 정의의 원리들에 따라 인간을 발전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현재 우리는 이러한 말의 의미(상인, 선장 등등)에서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시민성의 이상적 완성을 사람이 추구하게 하고 그에게 올바르게 통치하는 방법과 복종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발달 초기로부터 덕의 교육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교육으로서 특징 지워지게 될 유일한 훈련이다. 부의 습득이나 체력의 습득, 아니면 지성과 옳음과는 별도로의 영리함의 습득에 목적을 두는 그 밖의 종류의 훈련은 수단적이고 자유적이 아니어서 전혀 교육이라 할 만한 가치가 없다." 인간은 운이 좋은 천성과 적절한 교육을 받으면 가장 신성하고 문명화된 동물이 되지만, 불충분하고 그릇된 교육을 받으면 그는 지상의 피조물 중에서 가장 야만적인 동물이다. 그런 이유로 입법가들은 아동들의 교육이 이차적이거나 부수적인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플라톤은 가능한데까지는 교육은 의무적이어야 하고 그런 법칙은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소녀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교육적 효과는 놀이이다. 어린 시절부터 미래의 시민들은 규칙준수를 연습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공동체를 위한 훌륭한 준비이기 때문이다. 규칙이 잘 지켜지는 놀이와 사법관이 행하는 교육을 통해, 아이들과 범죄자들은 비록 법이 성문법의 형태로서 포괄적이지 못한다 할지라도 정의와 덕이 법에 내재되어 있으며 공동체 생활을 위해 정의와 덕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국가의 지도자 교육은 교육계획에 의한 철학가 양성을 위한 지적 교육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철학적이다. 철학가가 국가의 대표가 된다해도 신정체제는 완전히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시민들은 다양하여 철학적 영혼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자발적 복종이 아니라 맹목적 추종만이 있을 것이다. 지배자들의 정의는 피지배자들에게는 부정의이며, 철학적 영혼의 행복은 탐욕스럽고 조급한 영혼들에게는 불행일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자 교육뿐만 아니라 시민교육도 필요하다.
철학가 교육은 {법률}에서도 계속 존재하지만 시민교육이 철학자 교육 못지않게 강조된다. 그것은 시민교육 없이 폭력의 배제는 힘들기 때문이다. 윤리에 관해 입법하는 것은 어렵지만, 윤리 및 지성을 위한 교육체제에 대해 입법은 가능하다. 교육은 법의 테두리 내에서 "법이 정당하다고 명시한 원칙", "덕 있는 사람과 가장 나이든 사람들이 모두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것"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그의 교육 목적관에는 보수주의적 경향이 발견된다. 모든 교육보수주의자 가운데 당연 가장 위대한 보수주의자는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사상가 플라톤이다. 전시대를 통하여 보수주의자들의 모토는 "플라톤으로 돌아가자"였다. 어린 시절부터 시민들은 이 원칙에 따른 교육을 받아야 한다. "훌륭한 교육을 받아 좋은 성격을 갖게 되면 인간은 보통 모든 존재들 가운데 가장 신성하고 가장 부드러운 존재가 되지만, 충분하고도 잘 이루어진 교육을 받지 못하면, 인간은 땅이 만들어낸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야만적인 것이다."


7. 결론

플라톤에서는 신에서 세계에 이르는 일련의 존재론적 체계가 있다. 그것은 신에서 Logos로, Logos에서 Physis로, Physis에서 Nomos로 연결되는 체계이다. 이러한 체계에서 볼 때 플라톤에서 폭력은 신, 로고스, 피시스, 노모스를 지키지 않을 때 발생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를 논문을 요약하면서 이야기해보자.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우주론을 전개하면서 {국가}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된 이상국가의 계획을 상기시키면서 나중에 {법률}에서 실현될 이상국가의 모델을 추구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신의 섭리에 의한 우주론 속에서 신과 인간을 대비시키면서 신의 제작에 의해 인간과 세계가 생겨났음을 제시하면서 소피스트적인 계약의 덫 속에서 방기된 인간성을 구제하고 있다. 그에게서 개인 가족 사회 국가 체제 법률 등 모든 것은 그 이론적 실천적 완전성을 위해 신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신의 뜻을 어기는 것, 신적인 로고스를 어기는 것이 플라톤에서는 가장 폭력적인 것이 된다.
플라톤은 인간적 부정의의 표본이며 현실주의적인 소피스트의 정의를 공박한다. 그는 윤리적 실천을 위해 정의를 행복에 결합시킨 다음 이론적 차원에서 정의를 신에 결합시키고 있다. 신은 정의롭고 지혜롭고 전체적이며 이 신의 도움으로 인간의 부정의와 비양심적인 게으름 등을 극복해야 한다. "신법으로서 범법을 다스리는 것"이 정의이다. 플라톤이 볼 때 신과 결합되어 있는 정의를 지키지 않는 것은 폭력적인 것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잘못된 정의관을 가진 소피스트들은 폭력 옹호론자가 된다.
소피스트들은 성문법, 불문법 등의 모든 법, 한 마디로 노모스(nomos)를 비판한다. 이들은 노모스에서의 관습, 법 등의 의미가 피시스라는 존재기반을 갖고 있지 않으며, 갖고 있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피시스를 보장해주지 못할 뿐 아니라 인간의 피시스를 침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피시스는 인간을 지상에서 활동하게끔 하는 신의 표현이다. 그리고 소피스트들의 노모스를 비판하면서 노모스의 존재기반은 신이라고 생각한다. 소피스트들과 반대로 플라톤은 피시스에 기초한 노모스의 수립을 원한다. 이 노모스는 소피스트 이전의 피시스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노모스이며,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법률, 즉 정신의 신적인, 경탄할 만한 노모스인 것이다. 플라톤의 입장에서는 피시스와 노모스는 신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를 무시한 채 행동하는 것은 타락과 질병인 폭력의 시작이다. 플라톤은 신법, 자연법, 불문법, 관습법, 성문법 등 여러 형태의 법을 제정하는데, 이들은 신법에서 성문법에 이르는 위계질서를 가지고 있다. 국가와 정체에서 현실적으로 발생하는 폭력은 이러한 법률을 지키지 않을 때 발생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플라톤에서 폭력은 직접적으로 드러나기보다는 무엇 무엇에 대한 위반이 폭력이 된다. 즉 그에게서는 대부분 간접적으로 폭력이 드러난다. 플라톤은 신, 로고스, 피시스, 노모스를 예측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를 어기는 것은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이를 어기는 예측불가능성을 폭력이라고 넓게 보고 있다.


참고문헌

국내문헌

김내균,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의 정의개념에 대한 고찰, "서양고전학 연구", 1991
  --  , 초기 그리스철학자들의 존재론에 나타난 정치철학적 사유, "중앙대학교 인문과학 논문집" 제 35집, 1992
김재홍 역, J. P. 베르난트, 그리스 사유의 기원, 자유 사상사, 1994
남경희, F. M. 콘포드, 종교에서 철학으로, 이화여대 출판부, 1995
박만준. 이준호 역, G. L. 디킨슨, 그리스인의 이상과 현실, 서광사, 1989
박종현, 그리스 사상의 이해, 종로서적, 1982
심재우 역, 헬라 만트, 폭정론과 저항권, 민음사, 1994
양문흠 역, G. C. 필드, 플라톤의 철학, 서광사, 1986
이진우 역, A. 바루치, 정치철학, 서광사, 1991
이윤기 역, 토마스 벌핀치,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 대원사, 1996
이태수, 호메로스 서사시에 나타난 신의 모습, "희랍라틴 문학 연구", 성균관대학교 출판사, 1993
조대호 역, 조지 톰슨, 고대사회와 최초의 철학자들, 고려원, 1992
조요한, 그리스 자연 철학자들의 신관, "박종홍 박사 환력기념 논문집" 1966
  --  , 그리스 철학의 정의관, "정의의 철학", 대화출판사, 1977
  --  ,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경문사, 1991
한국 서양 고전 철학회 편, 서양 고대 철학의 세계, 서광사, 1995


국외문헌

Adamson, R., The Development of Greek Philosophy, London, 1908
Aristotle, The Nicomachen Ethics, Harvard University Press, 1934
   --- , The Politics of Aristotle, Claendon Press, 1948
Burnet. J., Early Greek Philosophy, Black, 1930
Cherniss, H. F., Aristotel's Criticism of Presocratic Philosophy, Johns Hopkins Press, 1935
Dover, K. J., Greek Popular Morality in the Time of Plato and Aristot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4
Foster, M. B., The Political Philosophies of Plato and Hegel, Clarendon Press, 1973
Hardie, W. F. R., Aristotle's Ethical Theory, Clarendon Press, 1980
Jasper, Karl., Plato and Augustine, Brace & World. 1962
Platon, The Dialogues of Plato. Translated into English with analyses and introduction, Clarendon press, 1953
Spragus, R. K., Platos Philosopher King, University of South California Press, 1976
Woozley, A. D., Law and Obedience, Duckworth, 1979

 

 

 

 

 

 

 

 

 

 

 

 

 


[Abstract]

 


                   A Platonic Reflection on Violence


                                             Choi Yang-suk(Yonsei Univ.)

This paper is an attempt to reflect on the problem of violence from the Platonic viewpoint. This paper reviews Plato's philosophical and political thoughts in which the problem of violence appears. The problem of violence in Plato is a problem of a very wide scope and extension. This paper first clarifies the concept of violence and then briefly summarizes the teachings of Plato on violence.
As one looks into the problem of violence in the writings of Plato, he finds the concept of violence is connected with the concepts of the will of god, logos, physis and nomos. The problem of violence appears in man's acts against one of them. Generally, all acts that are opposed to these concept are acts of violence. Various forms of acts of violence can also take place on the part of the holder of political power as well as on the part of individuals who are obliged to submit to that power.
This paper then reviews problems which necessarily arise in the study of violence in Plato's philosophy. Plato's metaphysical understanding of violence and his thorough analysis of the concepts of god, logos, physis and nomos is opposed to that of the sophists and represents a synthesis of the Greek wisdom. One can easily discern in Plato's concept of violence elements of relevance to the problem of violence in our contemporary society. Plato's reflection on violence provides us with basic principles for evaluating the various forms of violence of our days. 


Key words : Plato, god, logos, physis, nom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