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수학적 대상의 존재 방식에 관한 연구*

나뭇잎숨결 2023. 11. 26. 08:58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수학적 대상의 존재 방식에 관한 연구*




김 완 수**서강대 철학


서 론

제1장 문제제기와 연구방법과 연구현황

1. 본문의 주요핵심 문제는 현재에도 문제되고 있는 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수학 적 대상들(수와 기하학적 도형들)의 존재방식에 관한 것이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들이 서로 거리가 멀다거나 혹은 정반대된다고 하는 주장들에 대하여 반론을 펴는 것이 이 논문의 테마이다.
이런 연구를 왜 해야 하는가 하는 필연성은 수학적 대상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과 플라톤과 같은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고 논리적이라는 이론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형성하고 있느냐 하는 이유이다. 수학적 대상이 존재적이라는 것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제13권 1076a 36-37에서 특히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 “따라서 우리들에게 논쟁거리가 되는 것은 존재에 관한 것이 아니고 존재 방식에 관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는 수학적 대상의 존재의 존재 방식이 의미를 갖는 것이다. (형이상학 1076a 26): 특별히 형이상학 1076a 36-37에 있는 그의 표현도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의문점은 존재에 관한 것이 아니고 존재방식에 관한 것이다. 플라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과 문제의 전환을 통하여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로 하여금 수학에 관한 플라톤의 존재론적인 이론의 이런 전환에로 밀어 넣게 한 특별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인 것이다.
우리들은 오늘날 구라파 3국(영․독․불)에서 널리 유통되고 있는 바, 수학적 대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용어를 대상(일반)의 개념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은) 수학은 인간 사유의 산물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다). 이 ‘수학’이란 용어를 통해서 ‘존재들’이라는 말을 우리들은 사용한다: 예컨대,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 제 13권 M3 1078a 29-30에서 증명하듯이, 유티데모스 290 b-c에서 수학에 근거한 존재의 발견에 관해서, “기하학자들은 존재에 관하여 논의하고 또 그 존재들은 존재한다고”라고 말하고 있다. 어쨌든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1076a 17․23․25․33 구절들에서 수학들의 대상을 통하여 수학이라는 용어도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런 의미의 용어를 제1장 3에서 우리가 수학의 특별한 학문과 그런 학문의 대상들에 관해서 충분하게 언급할 때에 사용할 것이다.
2. 우리들의 연구의 방법

본 연구의 무게중심은 수학적 대상에 관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의 입장들의 차이점들에 대한 연구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기본적인 이론들의 발전전개과정과 형성 과정을 잉태케 한 전제들에 대한 보다 더 자세한 음미와 논증을 해야 함은 이제 필연적인 과제로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음미와 논증은 수학의 현대 이론적인 문제들에 의존 하는 문제의 영역에까지 확장되지는 않는다. 그 이유의 하나는, 그렇게 되면 추상된 수만큼 많은 의미를 가지는 특수한 학문들에로 진입해 들어갈 필요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서 철학자뿐만 아니라 특수한 학자(과학자)의 적절한 무장화가 요구되어진다. 또 다른 이유의 하나는 추상화된 수들의 인식, 다르게 부르자면 수학적인 분석은 지금까지 획득된 모든 응용영역과 연속적인 전개 과정 속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연구방법은 먼저 역사적인 기원을 찾아서 파헤치는 것으로서 그것도 원전에 의거할 것이다. 물론 그에 관계되는 참고문헌을 살펴보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둘째로는 해석적 방법과 비판적 방법이다. 우리들이 연구하고자 하는 문제를 밝혀서 그 해결책을 줄 것이다. 이러한 우리들의 문제에 비례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전을 그들의 의미에 따라 해석하고 언어의 분석적인 방법을 통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수행할 것이다. 오늘날 많은 철학적 문제들이, 그들의 논리적인 일치와 연관 아래서, 보다 더 잘 해석되어지고 해결되어지기 위하여, 이 문제 그 자체에 언급하는 우리들 언어의 어휘들과 명제들의 의미의 문제들에로 나아가는 것 이것은 하나의 기본적인 방법이요 열매를 맺는 방법이다. 그런데 아무도 실패의 위험에 부딪치지 않고 쉽게 그의 연구로부터 그 방법을 이탈할 수는 없다. 이 방법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언어의 다의성의 방법으로서 있었으며, 오늘날 언어 분석철학에서 다행히도 잘 승계되고 있다. 언어에 의한 문제들의 분석과 이것들에의 심화의 방법을 현재의 연구에다 우리들은 적용할 것이다.

3. 앞으로 우리가 따라 갈 이러한 연구방법을 갖고서, 플라톤의 학설을 전개하고 해석한 뒤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수학적 대상의 존재방식에 관하여 플라톤적인 이론을 형성하게된 원인과 동기를 밝히려고 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의 형성과정의 원인을 제공하고 이것으로부터 전제들을 정립케 한 특별한 문제들은, 플라톤에 있어서는 언제나 수학의 특수한 학문인식의 방법의 문제에 있어서 변증법과 이데아론의 현존인가 하면,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는 플라톤적인 변증법과 이데아론의 부재(不在)요, 이들과는 반대로 하나의 새로운 존재론과 목적론적인 자연학의 등장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 외에, 일면(一面) 플라톤과 아카데미에 의한 바 (유우독소스, 머나이크모스, 스페시포스, 크세노크라테스, 테아이테토스) 수학을 높이 평가하는 일과, 타면(他面),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자연학적인 탈(脫)수학적인 평가는 아리스토텔레스로 하여금 수학적 대상의 존재방식에 관하여 플라톤적인 이론을 전환하는 과정으로 가게 하는 결론에 이른다. 따라서 우리들의 연구의 목적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전개하는 이러한 전환은 왜 일어나며 무엇을 의미하는지(결과적으로 플라톤을 떠났는지)를 음미하여야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양상(방식) 그 자체에 따라서 문제를 본다는 것 즉 수학의 존재론적인 문제를 논리적인 것으로 전환시킨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로 하여금 이러한 전환을 가져오게 한 원인과 동기에 대한 탐구와 연구에 관하여 이 연구의 목적을 두게 된다. 우리가 지지하려고 하는 연구의 입장은 수학적 대상의 존재양식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플라톤에 대한 그의 다른 존재론적인 이론과 그의 하나의 목적론적인 자연학의 실현의 결과이다는 것이다. 이 실현 역시 플라톤의 요청(구)이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의 지지를 논증하기 위하여 이 연구의 제2장에서 1)고대 아카데미에 있었던 수학적 대상의 존재양식에 관한 플라톤적인 이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 2)수학의 존재양식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독특한 적극적인 이론에 관하여 논의할 것이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로 하여금 이러한 전환에로 몰고 간 원인과 동기를 전개할 것이다. 그 원인들과 동기들이란, 한편은 고대 아카데미에서 수학의 우위성이론(수학을 높이 평가)과 티마이우스편에서의 자연의 수학 이론화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 하나의 새로운 존재론의 정초와 목적론적 자연학의 실현의 노력이다. 이러한 방향제시외에도 수학의 존재양식(방식)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새로운 이론이 전개되고 있으며 형성되고 있다. 우리 논문의 이런 부분이전에 특별히 한 부분에서 플라톤의 이론을 논의할 것이다. 거기에서 플라톤은 피타고라스의 이론으로부터 그의 입장을 분리시키고 있다. 우리들은 플라톤의 이런 이론을 두개의 상이한 단계들로 자세하게 논의 할 것이다. 여기에서 감각대상(메논과 국가론 6권의 끝)외에 수학적 대상의 존재론적인 근거가 밝혀지도록 할 것이며 거기서 필연적인 결론이 도출될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필연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 문제의 일반적인 틀을 요약해야 한다. 이것들(틀)은 지금까지의 우리들의 연구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들의 연구의 구체적인 문제가 그의 의미에 있어서 더 잘 밝혀질 것이며 더 잘 이해되어지는 것이다.

4. 문제의 일반적인 윤곽에 관한 지금까지의 연구와 우리들의 구체적인 문제

현재의 이 연구에 있어서 우리들이 하고자 하는 분석들은 고대(古代) 수학의 분야에 있어서 훌륭하게 작업하여 얻은 모든 것들을 다 취급할 생각은 없다. 고대 수학에 있어서는 그 연구와 토론이 수많은 특수하고도 구체적인 문제들에 관하여 정확하게 아주 심도있게 논의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방향에 대해서는 스타마티스가 우리들에게 다행히도 말해놓았다. 우리들은 직접적이고도 필연적인 방법으로 우리들의 논문의 구체적인 테마들과, 그의 분석의 통일성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그러한 문헌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한 문헌을 갖고 그 유익성을 판가름할 것이다. 거기서 구체적인 관점에서의 비판적인 토론과 검증(檢證)을 할 것이다.

4.1.튜빙겐학파와 그 비판(그 반대 전열)

연구의 틀에 있어서 가장 일반적으로 우리들 시대에 튜빙겐학파가 활약하고 있다. 이 학파는 과도한 방법으로 확률적인 입장을 지지하고 나선다. 튜빙겐학파는 그들의 논리적인 전개에 있어서 엄밀한 논증적 확실성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결론의 도출에 있어서 요청되는 분명성을 결(缺)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판적인 논의에 의하여 밝혀질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 논의 중인 학파와 함께 정확하게 그 문제를 전개할 것이다. 거기서 튜빙겐학파의 분석은 우리들의 고유한 분석의 특별한 문제들과 조화를 이룰 것이다. 이 학파의 대표자들, 그의 학위논문(Arete bei Platon und Aristoteles, Heidelberg, 1959)을 튜빙겐에 제출한 H. J. Krämer와, 튜빙겐에 그의 교수자격 논문을 제출한 K. Gaiser (Platon's ungeschriebene Lehre, Stuttgart, 1968)는 그들의 논문들에서 하나의 오래된 문제를 철학적인 방법과 해석으로써 새롭게 하였다. 이 문제는 플라톤의 쓰여지지 않은 학설의 문제이다. 이것을 통하여 이들은 대화록에는 없는 바 수학주의적인 플라톤을 더 필요로 한다는 그(플라톤)의 영상을 만들어 내었다. 튜빙겐학파들이 전개한 바와 같이, 쓰여지지 않은 학설의 가장 기본적인 이론들은 다음과 같다: 1)이데아는 수(數)이다. 2)모든 사물들과 이데아 자체들은 두개의 원초적인 원리 ― 일(一)과 무규정적인(無規定的)인 쌍수로 환원된다. 3) 기하학적인 차원과 존재의 존재론적인 영역사이에 하나의 일치가 존재한다. 4개의 기본적인 수(數)들과 영혼의 인식론적인 능력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서이다. 4)모든 위의 이론들의 구술적인 전개의 정신적인 공간이 아카데미 학교이다. 이 연구에 있어서 주요 지시내용들은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증거와 설명들이다. 이것들은 오늘날 플라톤에 관한 간접적인 전통으로서의 연구로 특징지워지고 있다. 이 문제의 입장의 방법은 현대독일학계에 대단한 논의를 야기시키고 있으며 두개의 서로 대립되는 관찰 이론들이 되고 있다. 튜빙겐학파를 위해서 그리고 또 과도하고 비음미적인 방법에 의하여 일어났던 바 아주 명백하게 센티멘탈한 출현은 K. Oehler이다. 그의 연구는 플라톤의 쓰여지지 않은 학설의 문제(Das Problem der ungeschriebene Lehre Platons)중에서 “비합리적인 표상을 제거한 플라톤(Der entmythologisierte Platon)이다 (J. Wippern에 의하여 출판되었음. Darmstadt 1972. 106․107․122․1123). 올바른 비판이 아닌 바 더욱 날카로운 것은 ‘앎’ 지(誌)(Gnomon 37/1965. p. 131-144)에 있는 K. Gaiser의 책에서의 K. H. Ilting의 비판이다. 다른 해설자들은 하나의 중간적인 길을 걸어갔다. 이들 해설자들 사이에는 H. G. Gadamer가 더욱 중요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우리들의 이 논문에서는 오래된 문제가 되어버린 모든 문제들을 다 검토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미 A. Brandis는 그의 저서 “이데아와 선(善)에 관한 잃어버린 아리스토텔레스의 책(De perditis Aristotelis libris de ideis et de bona, 1823)"를 통하여 플라톤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영상의 분석과 재건을 통한 전제들을 창안해 내었다. F. A. Trendelenburg도 베를린대에 제출한 그의 학위논문(Platonis de ideis et numeris doctrina ex Aristotele illustrata, Leipzig, 1826)에서 이 테마를 또 논의하였다.

4.2. 로방(L. Robin)과 슈텐쩰 (J. Stenzel)의 의견일치

아직까지도 그 가치를 갖고 있는 바로 로방의 저서(아리스토텔레스가 본 이데아와 수(數)에 관한 플라톤 이론: La theorie platonicienne des Idees et des Nombres d'apres Aristote. Paris, 1908)는 금세기 초에 뛰어난 입장을 갖고 있는 것이다. 로방은 그의 저서에서 이데아, 수학과 원리들의 플라톤적 이론에 관한 조직적인 해석을 주려고 노력하였다.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것(이데아론)을 정초한 것과 같은 방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비판)을 해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튜빙겐학파는 로방의 기본적인 이 저술 없이는 오늘날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데 튜빙겐학파는 매우 늦게 이 저술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한 것처럼 보인다. 로방의 연구가 주로 슈텐쩰의 연구에로 되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방의 저술은 오래 전에 플라톤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영상을 전개하고 있으며 이러한 자료를 확대 연구한 결과(튜빙겐), 플라톤의 쓰여지지 않은 이설에 관한 더 나아간 연구를 통하여 더 나은 전제들을 창안해 냈던 것이다. 그러나 로방의 저술 속에서 결(缺)여하고 있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플라톤이 플라톤의 대화편에 어느 정도로 발견되어질 수 없는가하는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위의 이론에 관한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전이 하나 같지 않고 이론 자체에 반대하는 그의 논쟁을 통하여 분별된다는 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로방은 그의 연구에서 실현하지 못하였지만, 대화편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이설로서 진술한 것 자체와 비교하지 않았다. J. Stenzel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수(數)와 형태(Zahl und Gestalt by Platon und Aristoteles, Leipzig - Berlin, 1924)”라는 그의 저술 속에서 비록, 일정한 범위 안에서 이것을 확실하게 실행하였으며, 플라톤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상을 만들어내는 문제들 중의 전체는 아니라 할지라도, 이 두 가지들(수와 형태)을 하나의 관계로 가져오도록 노력하였다. 그리고 나서 슈텐쩰의 차이점은 요점적으로 다음과 같은 입장의 논증으로 집중된다 : 플라톤의 분류의 방법은 이데아와 수의 문제를 통하여 기본적인 의미를 가지지만, 이데아와 수학의 문제에 관한 한, 플라톤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일반적인 영상에 있어서는 로방의 저술 속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4.3. E. Frank의 저술

로방과 슈텐쩰의 저술 사이에 “플라톤과 소위 피타고라스 학파”(Plato und die sogenanten Pythagoreer. Halle, 1923)”라는 프랭크의 연구가 있다. 이 연구는 플라톤과 피타고라스 학파와의 관계와, 플라톤이 이들로부터 받아들였던 영향력에 관하여 깊이 연구하였다. 그것은 그 당시 신칸트학파의 철학의 방법의 정신에 반대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그 정보와 그 전개에 있어서 매우 유용한 프랭크의 이러한 연구는 수많은 페이지에 달하는 것으로서, 상상력의 한 부분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소산은 아니라는 것이다.
프랭크의 파라독스적인 입장은, 소위 피타고라스학파의 모든 수리철학은 플라톤에 의존하고 있으며, 최초로 고대 아카데미의 틀에로 발전 전개되어 갔다는 것이다. 그 외에 플라톤과 아카데미(p. 239, 291)에 의존하는 이론으로서 E. Frank(p. 219)에 의한 소위 피타고라스(주의자들)학파의 수학의 출현은 수학주의자로서의 플라톤의 영상에로의 길을 훨씬 이미 더 잘 열었던 것이다. 튜빙겐학파는 다른 방법으로 훨씬 늦게 그것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4.4. 플라톤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초상화에 있어서의 특수한 문제들

플라톤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초상화를 재현한다는 것은, 10세기이래 그런 연구에 관한 대규모 토론의 대상이 되었으며, 일반적이고 특수한 문제들에 관한 것이고, 이는 어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들은 이미 플라톤의 쓰여지지 않은 이설의 일반적인 문제를 언급하였다. 특수한 문제들이란 다음과 같다. 1. 플라톤과 고대 아카데미에 있어서의 수(數)의 성격의 문제와, 주로 형상적인 수(數)의 문제. 2. 플라톤에 있어서 수(數)의 일반성의 문제 : 그것은 형이상학 987b33-988a1에 나오는 바, 다른 것들 가운데서도 가장 의미심장한 것 중의 하나인 것이다. 3.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수학적 대상의 존재양식의 문제는 우리들 연구의 주요한 테마이기도 하다. 계속하여 Ⅰ에서 특수한 문제에 관하여 언급할 것이다.

4.5.1. 플라톤의 형상적인 수(數)들의 문제, 수들로서의 이데아와 수(數)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용어들과의 필연적인 차별화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형이상학(M1 1076a8-37; M2 1076a38-1077b16; M3 1077b17-1078b6)에서 플라톤의 이데아적인 수(數)를 이데아적인 수와 이데아들의 수로서 파악하고, 이데아도 수를 가지고 수(數)들도 이데아를 가진다고 한다(질(質)적인 사물을 움직이는 핵심은 수(數)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수와 질(質) 사이는 다른 것이다. 즉 이데아는 수요, 수로서 나타난다든지, 수들의 이데아가 존재한다 하여도 마찬가지로 수(數)와 이데아 사이의 관계가 정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플라톤의 이데아적인 수를 이데아 수(Idealzahl; Stenzel)로 파악함,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용어들(1086a2-14, 69a33-36, 1090a7-20)이 플라토니스트들 중의 누구에게 속하는지 알 수 없음(τινές, ἔνιοι, οἱ μέν, οἱ δέ, ὁ δέ, ἄλλος τις 등), 수는 척도로서의 이데아(Φιλόπονος)임, 점-선-평면-입체의 존재론적 해석(Gaiser)을 통한 플라톤의 수를 논증함, 이데아적 수(Ideenzahl)와 이데아의 수(Idealzahl)의 혼용(Ilting) 등등을 통하여 플라톤의 의도한 바가 논의되고 있으나, 이데아, 수와 사물과의 관계가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4.5.2.

Cherniss는 대화 속에 없는 것은 플라톤의 학설이라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튜빙겐 학파에 대한 반대). ‘이데아는 수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논증은 플라톤의 이론이 아니라고 한다. 쓰여지지 않고 구전으로 내려오는 것이 보존되어 있지만, 쓰여지지 않은 것을 너무 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더구나 ‘가장 높은 것’(τό πλέον)으로서의 ‘일자’라는 용어는 플라톤의 간접적인 전래의 원천으로부터 온 것이다. 이데아와 수의 관계는 (나아가서 사물과의 관계) 아카데미아의 수수께끼라고 Cherniss는 주장한다. 구전 외에 다른 어떤 것도 플라톤 이전에 남아있지 않고, 오직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과 쓰여지지 않은 학설이 남아있을 뿐이다. 따라서 Cherniss의 쓰여지지 않은 학설에 대한 무조건적인 부정은 안전한 것이 되지 못한다. 필레보스편에 현상적 이론적 수학과 실제적(응용적) 수학 사이의 상당한 의미 있는 구분에도 나타난다. 튜빙겐학파(Krämer, Gaiser)의 쓰여지지 않은 것에 대한 과도한 평가를 너무 최소화하고 있으며, 수가 이데아라는 주장의 타당성을 밝히고 있는 필레보스편의 논설을 Cherniss가 간과하고 있지나 않나 하는 것이다. 특히 이데아의 분류의 방법에서 수의 의미가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4.5.3.

Becker는 수학적 존재론(Mathematische Existenz, Halle 1927)에서 형상적 수(플라톤)에서 관습적인 수에로의 이행을 주장하나(Stenzel에서 답변되어진다) 플라톤 자신이 관습적인 수, <테아이테토스 198c>(기호적인 수, 합리적인 수, 수적 연속의 수)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4.5.4.

Th. Heath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수학적 존재의 방식에 관한 연구라기 보다는 순수한 형상적인 수학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 Wedberg의 플라톤의 수학의 철학(Plato's philosophy of mathematics, 1955)은 Th. Heath의 주저술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수학의 대상의 존재방식에 관한 저술이긴 하나, 유감스럽게도 Stenzel, Frank, Robin의 저술과의 비판적인 토론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불란서 계통의 학자의 연구는 Mugler의 <플라톤과 그의 시대에 있어서 수학적 연구, Strassbourg 1948>에서 그리스 수학의 대표자로서 유클리드를 내세우고, 고대 아카데미의 학문연구에서 플라톤의 수학의 대상의 존재방식이라는 철학의 방법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B. C. van der Waerden은 「각성하는 학문」을 그리스 수학의 역사를 통하여 전개하고 있으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수학을 자세히 취급하지 않았으며, Th. Heath의 테마도 취급하지 않고 있다. Waerden의 저술을 기초로 A. Szabo의 ‘그리스 수학의 근원들’(Anfänge der griechischen Mathematik, Budapest, Wien 1969)이 나타난다. 언어의 의미의 분석적 방법을 통하여 그리스 수학의 기본적인 원리를 밝히고 플라톤의 수학의 가치(고가)를 역사적으로 상승시켰지만, 그러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수학적 대상의 존재방식에 대해서는 음미하지 않은 것이다. 앞으로 위와 같은 연구가들의 연구들을 토대로 철학과 수학, 수학적 대상의 존재론적인 중간 과정(존재방식)을 자세히, 그것도 비판적으로 논의할 것이다.


본론 : 플라톤에 있어서 수학적 대상의 존재방식

제1장 피타고라스학파에 의한 수학의 존재론

우리들 연구의 문제에 관한 기원전에 있어서 작은 역사적인 서론을 논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피타고라스주의자들에 있어서 수의 존재론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에만 국한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피타고라스학파들은 수(數)를 유일한 실재라고 주장한다. 형이상학 987b27에 다음과 같이 논증되어 있다 : “사물들은 수이다.” 또 형이상학 1083b11-12에는 물체들은 수로서 구성되어 있다고 논증하고 있다. 형이상학 987a19에 수는 모든 사물들의 실체이다라고 논증하고 있다. 이미 우리들은, 이오니아 철학으로부터 오는 보편적인 인식 이전에 존재는 하나의 특수한 질료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수로써 혹은 수의 관계로서(985b26-29)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 있음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주장들의 존재론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 수는 우주의 사물들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며, 수들 이외에는 생각되어 질 수 없는 것이다.(986a17). 수가 사물들의 실체라는 견해는, 수학이 구체적인 사물들 속에 존재한다는 관계들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H. Hasse와 H. Scholz의 결론은 아마도, 모든 사물의 수학적인 성격에 관한 피타고라스 학파의 주장은 구(球)들의 지속적인 조화에 관한 주장으로부터 오는 음악적인 음정의 수적 형성의 가능성의 발견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985b31-32).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직도 피타고라스에 의하여 하늘은 조화이며 수에 의하여 지배된다는 것(986. 9,3,21)을 주장한다. 이것은 항성들의 회전들, 그들의 거리가 수에 대하여 비례하고 또 수의 로고스 자체 안에서 비례한다는 바, 그 회전들은 음악적인 음정에 상응한다는 것을 의미함이 틀림없다. 우리들이 보아온 바와 같이, 피타고라스 학파들은 우주의 조화의 이데아를 존엄하게 갖고 있는 것이다. 그 이데아는 유비의 이론에 의하여 연구되고 표현되어진다.

 

1. 무리수(無理數)의 발견

그러나 모든 것들의 수적 구성과 우주의 조화에 관한 피타고라스 학파들의 이러한 생각은 바로 애매성(불확실성)으로 규정되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려움의 이유로 막다른 골목길에서 충돌한 바, 그 어려움들이란 피타고라스의 학파로부터 온 발견 이전에 있었으며, 그것은 불균형(비대칭)의 발견이기 때문이다. 불균형의 개념은 최초로 사각형의 변(辺)에 대한 대각선의 원리의 연구에 있어서 피타고라스에 의하여 논증되었다. 피타고라스학파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논증하였다: 한 사각형의 변에 대한 대각선은 불균형적인 길이이며, 공통척도를 갖지 아나하고, 같은 낚시줄로 된 직각 삼각형의 변은 낚싯줄에 대하여 완전한 로고스를 갖지 못한다. 이들은 √2는 딱 떨어져서 말해진 수를 제공하지 못한다. 당황스런 이런 발견물은 수의 하나의 새로운 종류(에이도스)이다. ― 오늘날 우리들은 이것들을 무리수라고 부른다. 말로 잘 할 수 없는 ― 무리수는 끝까지 채워지지 않는 채 남아있다. 새로운 십진법 수일 지라도 그렇다. 십진법 수를 우리들은 상(商)에로 추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일정한 질서를 따르기는 하지만 끝을 갖지는 않는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한다. 즉 A크기는 B크기에 무리수적이다. 사각형의 예에서, 변의 단위 길이의 다수를 나타내는 수에 대하여 대각선의 단위 길이의 수를 나타내는 것의 수의 로고스(내용)는 무리수이다. 이 발견은 그리스 수학적 사유의 과정에 있어서 뒤흔들림이었으며 무거운 비판에로 인도되었다 : 이 비판은, 무리수의 도입 이후에 오늘날까지 일어나고 있으며, 과학과 철학에 있어서 아주 어려운 탐구를 하게 되었다. 마치, 우주의 구조의 연속과 불연속에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다.
꼭 필요한 원전이 없어서 우리들은 주의 깊게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다 : 메타폰티온의 사람 히파소스가 무리수를 발견한 최초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암불릭호스에 의하면 무리수의 논증은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일어났다. 프로클로스에 의하면 이 발견은 특별히 피타고라스에 속한다. 위의 사실과는 반대로 Fritz는 그의 다른 흥미로운 연구에서 프로클로스의 연속되는 원전의 진실성에 의한바, 설득적인 것이 아닌 방법에 대하여 의심하고 있으며, 히파소스에 의하여 어떤 논증적인 논의 없는 무리수의 발견을 말하고 있다. S.Heller도 확율적인 구성과 결론으로 성격화되어져야 하는 Fritz의 이런 견해들을 채택한다. <<유리수와 무리수의 본성을 처음으로 말한 자>>(이암불록호스 : 피타고라스의 생애의 의미, 246)와 “어떤 사람들은 비논리와 무리수에 관하여 말하는 자가 이것을 받아 들인다”고 주장하였다라는 논증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선언하고 있다: 피타고라스 학파들에 의한 무리수의 발견은 그 학파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 중 어떤 사람에 의하여 논증되었는데, 그렇다고 하여 그 어떤 사람은 히파소스의 단편들에 관한 딜스에 의한 위의 논증들의 요약문이 그것으로부터 문제된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W. K. C. 걷스리는, 피타고라스 학파는 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그래서 제자들은 학파의 모든 가르침을 특히 그의 스승에게 의존하였다고 한다. 히파소스에 관하여 걷스리는, 그는 처벌받았다고 주장한다. 히파소스는 학파이외의 사람들에게 논증하였기 때문이다. 혹은 기하학적인 발견을 통한 명예를 파타고라스에게 그것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논쟁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은 걷스리에게 있어서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생각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이 발견이 무리수라는 것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암불릭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과두적인 선(線)에 반대하여 민주적인 척도의 수용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요청하였다 한다. 구체적으로 히파소스는, 피타고라스학파의 과두적인 질서에 반대하여 민주적인 반응 속에서, 다른 두 사람들과 더불어, 정치와 통치자의 문제에 관하여 중요한(얼굴-열쇠) 역할을 연출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만인의 통치자와 의회에의 참여를 지지하였던 반면에, 과두적인 질서는 국가정치가 파괴되는 것을 방해하였기 때문이다. 메타폰티온 사람 히파소스는 피타고라스의 제자들의 저 서클(단체)에 속한다.: 이 제자들은 수학자로서 성격지워졌으며 그리고 학술적으로 피타고라스의 학설에 몰두하였으며 제자들의 다른 서클에 반대하여 그의 완전한 완성화에 몰두하였다. 이들은 청강생들이다. 이들은 고대 피타고라스 학설의 지지자이었으며 스승의 말씀에 따르는 자이다.

2. 피타고라스의 견해의 가치와 우리들의 연구의 테마에로의 이행

무리수의 발견으로부터, 모든 사물속에는 수와 수적인 도형들이 숨어 들어 있으며, 이런 사물들은 가리워진 수들이라는 피타고라스 학파들의 견해의 의미는 매우 크며 그 이후의 학문적인 연구와 오늘날 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다. 이 견해는 하나의 발전의 원리이다. 그 원리는 자연계의 현대적인 수리형성주의 까지 도달하였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칸트적인 명제를 택하고 있다. 칸트적인 명제에 의하면 자연학문들의 모든 지류는, 수학이 이들 속에 포함되는 만큼 그 만큼 많은 학문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즉 수학은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1080b 16-17)라는 구절 속에 무게의 중심이 있다는 이 견해는 하나의 큰 토론의 시작이 고대에서부터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비되는 입장에 따라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 속에 절정에 달하였다.


제2장 피타고라스 학파들로부터 온 것으로서의 수학적 대상의 존재론적인
근거에 관한 플라톤의 학설

피타고라스 학파들에 대한 플라톤의 크나큰 기여는 순수한 수와 순수한 기하학적인 도형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논증하려는 노력 속에 있다: 이것들은 우리들이 주의하고 잘 보는 것들(경험)과 혼합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플라톤은 그의 이 노력에서 필연적으로 “일 자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하였다. 그 일자 존재는 감각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동시에 수가 사물 속에 그들의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던 피타고라스 학파에게 대답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감각적인 것과 사유적인 것의 두 위상들의 본질적인 분리인 바 분리의 플라톤적인 주장은 수학속에 강력한 지지를 발견하다.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관찰한다 : (분리는) 이데아 이론의 발생의 현존에 있어서 다른 것들 사이에 플라톤에 의하여 고양되었으며, 수학의 의미는 그것의 이해를 통하여 고양되었다. 이제 문제는 플라톤이 어떻게 하여 이런 견해에 도달하였나 하는 것이다.

1. 상기(想起) 이론의 존재론적인 의미 그리고 그것의 수학과의 관계
(<>82b-86a)

소크라테스에 의하여 생생하게 살아있는 방법으로 기하학의 하나의 기본적인 학습이 일어난 메논편 82b-86a의 구절의 연구는, 상기의 개념은 플라톤으로 하여금, 수학은 이데아 이론의 지지를 위하여 가장 기본적인 모형이라는 것을 드러내게끔 하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한 논증은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명제로서 일어난다.
명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한다. 즉 탐구와 학습은 상기이며 상기명제의 개념은 소크라테스와 소년과의 토론에 의하여 밝혀진다. 그 소년은 주어진 사각형 ΑΒΓΔ의 두배되는 하나의 사각형의 만듦의 문제를 풀었던 것이다. 그 사각형은 주어진 사각형(82d)과 꼭 같은 변을 갖고 있다. 문제는 새로운 사각형의 추구되어지는 변이 무엇이냐(얼마이냐)하는 것이다. 첫 번째의 실패한 대답 이후에 소크라테스의 도움은 필요할 것이었다(82c,e-83a,b,e). 그래서 아동은 다음과 같은 것을 밝히게 되었다. 즉, 새로운 사각형의 추구되어지는 변은 주어진 사각형의 대각선 변이다(84e-85a,b).


Α Δ D″





Β Γ Ε 메논 85a-b




Α″ Ζ Β″

이 전체(ΒΔΕΖ)는 저것(ΑΒΓΔ)의 몇 배가 되는가? ― 네 배.
우리들에게는 두 배가 되었어야만 한다. (메논 84d-e)

ΒΔ라는 보조선은, 주어진 사각형의 대각선 변은 그것은 소크라테스에 의하여(85a) 그어졌다. 그것은 문제를 풀기 위한 하나의 창의적인 사고이다. 이 논의를 통하여 플라톤은 무엇을 밝히려 하는가? 사동은 토론 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인데 이 경우에 그의 영혼 속에는 참된 판단(85c)이 존재했었다. 하나의 인식의 감추어지고 본래적으로 남아있는 것으로서 이다. 그의 영혼은 그것(참된 판단)을 그의 선재의 상태에서 획득한 것이었다. 참된 판단이란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적절한 그리고 연속적인 질문들을 통하여 그것들(참된 판단들)이 깨어나고 인식들이 된다.(85c,d)
<<자기자신이 자기자신으로부터 인식을 획득한다>>라는 표현은 상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85d). 여기에는, 아직도 인간이 아니었던 하나의 상태가 문제된다. 그 상태는 플라톤에 있어서는 과거의 시간이다.<다른 시간에 이미 배웠었다는 것이다.(85e-86a)>. 그 시간은 현생의 상대성과 관계하여 볼 때, 절대적이며 이데아적인 것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다. 불사적인 영혼은 그 자신과 함께 선재적인 상태의 상기의 충분성을 가져온다. 따라서 <상기는 플라톤에 있어서는 하나의 표현이며 아마도 다른 것들 사이에 지시되어지기 위한 더 나은 표현이며 수학적 대상의 이데아의 객관성이다. 동시에 상대적인 것에서 절대적인 것이 분리되어 나온다. 상기는 따라서 존재론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다. 동시에 상기라는 이러한 표현은 이데아를 채우려하는 바 불가능한 저지점과 우리들의 실제적인 능력사이 있는 과정이다. 둘째로, 여기서 플라톤은, 수학적 문제에 관하여 올바르게 질문받은 사동이 올바른 답변을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을 탐구하고 있다: 이 문제에 접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확실하게 사동은 그의 첫 번째 시도로서는<올바른>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으나, 적절한 탐구를 통해서 오류의 전제들을 부정하고 드디어 옳은 것에 관하여 충분한 확실성에 따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상기는 사동에게 잊어진채 존재하고 있으며, 엄격하고 탐구적인 사유의 필연성과 기하학적인 도형의 필연성을 갖는다. 그래서 드러나 지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플라톤은 선천적인 것을 논증하기를 추구한다. 우리는 현대적인 용어로 수학의 성격, 동시에 수학적 인식의 형이상학적인 정초라고 말한다. 이미 우리들은 최초의 양(量; 크기)의 철학적인 발견, 수학적 인식의 선천적인 성격의 발견이전의, 이점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것이 관찰되어야만 한다. 즉 메논편의 이 원전에는 수학적 대상의 존재방식에 관해서는 말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발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이들 분석의 목적은 전제들이 창조되어지고, 이 문제를 정초하여 그 해결에로 이끌고 갈 수 있는 능력이 음미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수학적 (대상의)인식의 선험적인 성격은 메논편에 있어서 수학적 대상의 형이상학적인 전제의 가능성의 필연적인 용어이다. 그러나 이것은 수학의 선험적인 성격이 수학대상들을 규정하려는 노력에서 수학의 대상을 만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플라톤의 차이점은, 현상존재론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런 정도의 점에 있는 것이다. 플라톤은 분리하는 선을 그어서 그것을 분리하려고 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완전히 존재하는 바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수학적 대상이 논증되는 이러한 존재론은 이점에 있어서 요청으로서 특징지워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수학적 존재론이) 영혼의 상기의 신화적인 방법으로써 논증되어지는 한, 이러한 형이상학은 남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의미있는 방식으로 플라톤의 하나의 기본적인 방향설정이 규정되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수학은 가장 기본적인 모형이며 감각세계에 속하지 않는 대상의 존재의 방식이 논증되어지는 동기가 된다.
플라톤은 언제나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수준을 사물들의 하나의 본질의 두 개의 분리되지 않은 견해들로서 파악한다. 따라서 플라톤적인 인식론의 원인규명은 분명하게 ((본질 그 자체))와 관계한다. 여기에 대한 주요 논증을 화이돈 78c의 다음 구절에서 발견한다: <<그것의 존재의 원인을 말하는 바 존재 그 자체>>.

2. 수학적 대상의 이데아의 존재를 논증하는 플라톤의 원전구절과 야기된
어려움들에 대한 토론

여기에서 우리들은 플라톤의 일정한 구절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다. 거기에는 수학적 대상의 존재론적인 전제가설에 관한 로고스(이유)가 있으며, 이 입장의 수용에서 오는 어려움을 밝히게 된다. 플라톤은 화이돈에서 3의 이데아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우수의 이데아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104d, 104e). 서간문 Ζ권(6) 342a에 이데아와 이데아 단계화들의 인식에 대한 로고스(설명; 정의)가 있다 : 그 단계들은 인식에 도달하기 위하여 요청되는 것인데, 그것들은 다섯 단계로 되어 있다 ; 1. 이름 (예컨대 원(圓)이라는 단어), 2. 정의 : 모든 점들이 동일하게 중심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 3.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감각적인 사물(영상물 Εϊδωλον). 이것은 지워지거나 파괴될 수 있는 것이다. 4. 원(圓)의 이데아(원 자체)가 언급되는 것으로서 사물 자체와 관계하는 인식의 단계이다. 이 인식은, 플라톤에 의하면, 추상화해서 수행하는 것이 아니고 존재론적으로, 플라톤적인 용어를 빌린다면 본질-실체(οἰσία)라는 충전된 의미에 있어서 자체 존립하는 것이다. 즉 참되고 정확하고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론 529b에 있는 플라톤적인 다음과 같은 표현이 이해되어질 수 있다 : 정확성에 관한 위의 인식을 가진 기하학자는, 플라톤에 있어서, 하나의 순수한 인식으로서 기하학의 개념 발견을 진행하는 것이다 : 응용적이며 양적인 측정을 하는 일이 없이, 그렇게 진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 《저 시간 이전에 동일한 이데아를 보았음에 틀림없는 것이다 : 동일한 것들을 처음 보았을 때 그것들 모두는 동일한 것 ― 이데아가 되기를 원하지만 결핍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화이돈 74e-75a).》
그러나 수와 기하학적 도형들의 이데아에 관한 이러한 이론은 수많은 어려움들을 내포한다. 즉 누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면 곧장 바로 어려움들이 발생하게 된다 : 플라톤이 수의 이데아나 혹은 도형의 일반적인 이데아가 일반적으로 존재하는지 하는 문제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런 문제의 경우에 대한 타당한 대처는 플라톤적인 원전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나서 무규정적인 모든 각 개체의 자연수의 이데아가 존재하는지, 혹은 첫 번째 10개의 수의 이데아가 존재하는지 하는 문제는, 탐구 중인 대화 속에는 답변되지 않고 그것에 관한 증거의 결핍에 이르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은 플라톤에게 있어서 쉽지 않을 것이다. 만약 플라톤이 각 자연수에 상응하는 이데아를 받아들였다면, 그때 이데아의 끝없는 무한 배진을 가지게 되고, 이것은 그로서는 원하는 결과가 아닌 것이다. 플라톤의 원전에서는 수의 이데아로서 갖고 있는 모형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화이돈 104d에서 발견된다. 이 수들은 3을 넘지 않는 수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플라톤의 원전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첫 10개의 수의 이데아를 우리가 가지는 것이 논증되어지는 구절이다. 이점에서, 플라톤은 첫 10개의 수를 이데아로서 받아들였던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에도 불구하고. 대화편 속에서는 하나의 적극적인 구절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을 관찰해야만 하겠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과 같을 때 더 어려워진다. 즉 왜 플라톤은 수의 이데아를 받아들였는가 하는 질문에 답변하려고 노력할 때이다. 이 문제를 이미 로벵(Robin)은 특별하게 강조해서 다음과 같이 일컬었다. 즉 왜 플라톤은 이데아수(數)를 받아들였는가? 아마 로벵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명 속에서나, 그가 하려고 했던 플라톤의 이런 이론의 비판에 있어서나 이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올바르게 말하고 있다. 로벵은 그의 책 450~451쪽에서 계속하여 충분한 답변을 하려고 노력하면서 다음과 같이 올바르게 말한다 : 하나의 수의 이데아는 하나의 분리 독립된 모델이다 : 그들 사이에 있는 같은 수들이 그 하나의 독립된 원형에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들의 이데아인 [그] 둘이 있어야만 한다. 셋들의 모델이 되는 [셋의 이데아], 이 모델은 이데아적인 모델이다. 왜냐하면 다(多)의 단위적 통일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다(多)로부터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로벵은 원초적인 10진법의 수들을 통해서만 필연적으로 그러한 원형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플라톤적인 원전이 아니라, 형이상학 1084a29-32 원전을 지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왜 수의 이데아를 받아들였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로벵이 준 올바른 답변은 우리들의 지식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며 시리아노스에서 발견된다.
시리아노스에 있어서 이데아와 이데아적인 수는 원형의 성격을 갖는다 : “모형적인 성질에 의하면 수(數)와 모든 것들의 이데아적인 수는 제한되어 있다.” 여기에 우리들은 ‘둘’인 사물들에 대한 둘의 이데아와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관계는 예컨대, 좋은 사물들에 대한 좋음의 이데아의 관계에 대한 유비와도 같다. 유비적인 방법으로 플라톤은 천문학의 인식을 통해서도 말하고 있다. 천문학의 일(事)은 국가론 529c-d에서 그(플라톤)에 의하여 성격지어진다 : 즉 별들의 참된 운동의 발견이다. 그 운동들로부터 그들의 “보이는 운동들”(可視的 運動들)은 대단할 정도로 제한되어 있다(진리를 결(缺)하고 있다). 플라톤에 의하면 운동이 있는데, 그 안에는 그들의 참된 숫자적인 관계들을 가진 참된 속력과 참된 느림이 존재하고 있다. 이런 관계들은 사유되어지는 것이다(로고스와 사유에 의하여 보여지고, 시력에 의해서는 보여지지 않는다). 모든 참된 도형들도 마찬가지다(529d).
여기서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본다. 즉 플라톤은 자연을 순수한 경험적인 현상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 뒤에 있는 운동의 참된 수적인 관계, 그리고 참된 도형들을 추구하고 영원한 존재를 생성적인 존재로부터 최고의 높은 수준에 놓고 있다.


제3장 국가론에 있는 수학적 대상의 존재론적인 실체(본질),
수학의 특수 학문에 대한 변증법의 방법적인 차이점

1. <국가론>에 있어서 수학과 존재론 사이의 관계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수학의 특수학문의 발견의 방법과, 그에 맞서서 철학적인 사유의 기본적인 방법, 변증법적인 방법을 대응시킴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노력을 하고 있다. 변증법은 여기서 기본적인 기준이다. 플라톤은 존재론적으로 수학적인 대상들을, 가지적인 것과 사유적인 대상의 일반적인 영역에 자리매김하려고 하기 위한 것이다(509d).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수학의 특수한 학문인식에다 물음을 던진 이 점에서, 그 물음은 어느 정도로 이데아 이론의 형성과정을 통한 전제들을 포함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 수학과 존재론 사이에의 관계에 관한 어려운 문제의 정초가 일어나는 것이다. 플라톤은 보편적인 방법으로 국가론 510c-e, 525b,d, 526b, 527b,e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수학이 갖고 있는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차이점을 통찰하였다. 그가 논증하려고 하였던 것은 수학의 대상은 이데아와 어떤 유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 곳에서 플라톤의 이러한 확신의 논증이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예컨대 수학은 진리에로 나아가는 길로서 성격지워지는 것이다(국가론 525b). 그리고 나서 525b 구절에서 플라톤은 로고스-논리에 관한 학습(수학)은 특별하게 위(上)로 영혼을 인도하고, 그것(수학)은 수 자체에 관하여 대화해야만 하며, 누가 보이거나 혹은 접촉되는 물체들을 가지는 수(數)들을 늘어놓으면서 영혼과 대화한다면, 결코 받아들이지 않고, 순수한 수학(“수 자체에 관한 것”)의 주장을 우리들은 갖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순수한 단위의 개념은 국가론 526a와 필레보스 56d,e에서 답하고 있다. 위의 사실로부터 국가론 527b 구절이 생각되어질 수 있으며, 그 구절은 수적이고 기하학적인 학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의 인식이며, 생성하여 소멸하는 것의 인식이 아니다. 이것을 통하여 이 인식들은,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인식 자체에 도달하는 바, 525c) 순수한 인식과 진리의 직관에로 인도되는 하나의 수단이라고 강조한다(527d,e). 테아이테토스 195e에 그것들을 인식하도록 허락해야 하는 수의 로고스가 논의될 때에는, 여기에 수학이 플라톤에 있어서 이성인지 아니면 이해의 인식적인 능력에 상응하는지 하는 문제가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들이 연구하는 이 장(章)에서 그 원전의 의미와 어려움들이 일어나는 바 기본적인 원전은 국가론 5권 510e-511e에서 발견된다. 프로클로스는 국가론을 통한 그의 회상록에서 중요한 이러한 원전을 일정한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로 올바르게 분석하고 있다. 예컨대 같지 않은 권들의 원전이나, 다른 작은 문제들에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이 원전이 문제들을 갖고 있으며, 또 지금 우리 연구의 이 장과 그 다음 장에 그것들을 다시 문제삼으려고 하는 것이다.
프로클로스는 크게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선(線)의 비유의 분할(구분)은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을 드러내 준다는 것이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또 플라톤은 거기에서 분리된 구분들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한편으로 존재의 연속적이며 통일성을 가진 하나의 진행의 길을 드러내기를 원하면서, 하나의 선으로서 동일한 연속을 그려내었다(표현하였다). 그것은 첫 번째의 영원한 생산성으로부터 두 번째의 상사성과 상호성을 통하여 수행하며, 헛되이 존재를 분리시키지 않는다.”

2. 논의되고 있는 원전에 있어서 플라톤에 의한 가설의 개념

국가론 510e-511a에 플라톤은 수학 연구의 방법을 정초하고자 노력한다. “나는 자네가 이를테면 이 점(다음과 같은 점)을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네. 즉 기하학이나 계산(산술), 그리고 이와 같은 것들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홀수와 짝수, 도형들, 세 종류의 각(角), 그리고 각각의 탐구에 따른 이런 등속의 다른 것들, 이것들을 이미 알고 있는 것들로서 가정한다는 것을, 또한 이것들을 가정들로 채택하고서는, 이것들에 대해서는, 모두에게 명백한 것들로서, 자신들에게도 남들한테도 더 이상의 아무런 설명도 해줄 필요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말일세. 이 가정들에서 출발하여 곧 나머지 것들을 거쳐서는, 애초에 고찰을 시작하게 된 대상에 이르러 일관성있게(모순되지 않게) 결론을 내리게 된다는 것도 말일세.”
플라톤에 의하면 수학자들은 가설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을 하지 않고 이것을 사용한다. 이 가설들은 아주 명백하고 알려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가설 자체의 힘은(권위는) 그 자체에 의하여 주어지고 문제가 없다(510c). 이미 이 점에서 우리들은, 취소할 수 있는 것의 성격을 가지는 현대 가설들과 그에 따르는 차이점을 갖는다. 이러한 가설들은 수학자들에 있어서는 출발점이다. 모순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방법으로 그들의 발견의 문제를 논증할 수 있게 된다. 플라톤은 이러한 가설들을 기수, 우수, 도형들과 각(角)의 세 가지 종류들이라고 부른다(510c). 이 점에 있어서 어려운 문제는 수학자들과 플라톤에 있어서 가설의 의미이다.
가설이란 말은 아래에 놓여 있는 것, 즉 다른 것에 의존해 있는 기초로서 타당할 수 있다(다른 것에 의하여…)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알고 있다. 즉 수학이란 …한다면 이러이러하다는 인식이다. 그의 전제들은 논증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전제들을 갖고 일시적으로, 전제들이 논증되거나 혹은 부인되거나 하는 그 점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이 작업하는 그런 것이다. 510c-511e 원전에 다음과 같은 것이 뒤따른다. 즉 가설을 통한 수학에 있어서의 연구의 방법은, 플라톤이 그 시절에 가르쳤던 기본적 역할을 지배하였으며 수행하였다.
이 시점에서 비슷한 토론자의 동의를 갖고 있는 가설은 공통성에서 나오는 탐구의 기초요, 초석이 된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진다. 이것을 통하여 플라톤의 변증법에서는 합의라고도 불린다. 이 합의를 통해서 탐구자와 인식자는 합일하게 된다(테아이테토스 155a-b). 이 점에 있어서 플라톤에 있어서 수학자들이 사용하는 가설들은, 거기서 수학적 명제들이 논리적인 엄밀성들이 도출되는 바 증명되지 않는(무증명적인) 원리들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K. v. Fritz는 수학자들의 규범적인 구성(물)은 최초로 그리스인들에 의하여 논의되었다고 올바르게 말하였지만, 그는 수학에 관하여, 최초로 플라톤에 있어서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비논증적인 원리에서부터 시작하는 논증적인 인식에 관한 것으로서의 견해를 논증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국가론 510c-d 원전은 K. v. Fritz의 그러한 견해를 지지할 수 없다는, A. Szabo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이 둘 중의 누가 옳은가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논증적인 원리들에 관하여, 그리고 거기서 나온 명제로부터 말하고 있다(분석론 후서 A. 1076a, 31-34). 수학자나 기하학자의 누구도,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공리들의 진위에 관한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형이상학 Γ. 3. 1005a 29-31).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 이외에, 비판적인 음미(검문)에로, 분석론 후서 A. 3. 72b5에서의 두 견해들을 갖고서 나아간다. 그들 중 하나의 견해는 다음과 같은 것을 주장한다 : 즉 일반적으로 하나의 논증적인 인식은 존재할 수 없다고 하며, 다른 하나는 모든 것들이 다 논증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논증적인 인식은 비논증적인 원리들에로 환원된다는 것이다(분석론 후서 A. 3. 72b, 18 등...). 따라서 우리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위의 견해들은 플라톤 국가론 510c-d의 견해들을 야기시킬 수 있다는 것이며, 이 구절은 특히 수학자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제의 주의깊은 탐구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원리와 가설 사이를 구분하고 있다는 것을 논증해준다(분석론 후서 A. 10, 76b 23-24) : 거기에서 모든 논증적인 인식의 각 류(類)의 원리들은 비논증적인 것으로 인식된다고 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한다. 즉 하나의 원리는 가설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설은 그 자체로 필연적이거나 필연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분별은 수학의 연구 방법의 플라톤적인 기술(記述)에 대한 하나의 비판으로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론 510c-d 원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만약 플라톤에 있어서 수학에 있어서의 가설이 비논증적(증명불가능한)인 원리를 의미한다면(국가론 533c, 이것은 특히 기하학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때 비논증적인 원리로부터 논증적인 인식으로서의 수학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만 그의 특성을 빚지고 있다는 K. v. Fritz의 의미는 설득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국가론 510c-d에서 가설을 수학의 논증적인 지식의 비논증적인 원리로 받아들이는 A. Szabo의 견해는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3. 수학의 연구의 방법에 있어서 플라톤의 비판과 일치(합의)의 공통점

플라톤은 그러나, 가설들과 원리들의 개념논리적인 차이점을 드러내면서 변증법에서는 참된 원리는 비가설적인 것인 반면에, 수학자들은 가설들을 원리들로서 취급한다고 한다. 이 견해에 의하면 가설과 원리 사이의 차이점은 511b에 지시되어 있다 : 가설들은 변증법가들에 있어서는 시작점이지만 원리들은 아닌 반면에, 수학자들은 가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가설들을 떠나서 원리 자체들에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비가설적이며 만유의 존재론적인 반석이 되는 원리 그 자체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511a, c-d).
이 점에 관심을 가지면서 플라톤에 의한 수학의 연구방법의 표출화는, 어떻게 하여 플라톤이 이것(수학)과 변증법의 연구의 방법 자체를 비교하고 있는가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수학과 변증법 사이의 공통적인 하나의 점이 있는데, 이것은 플라톤에 의하면 수학적 인식의 핵심적인 대상은 사유적인 이데아(에이도스)라는 것이다(510d, 511a) : 이러한 사유적인 것을 에이도스(이데아, 형상)라고 학자들은 말하며, 그것(수학)의 탐구에 관하여 영혼은 가설을 사용하게 하고 원리에로 올라가지 못하며, 가설을 넘어서서 그 위로 한계를 넘어갈 수 없는 것으로서이다(국가론 6권 511a). 수학자들은 그들의 탐구에 있어서 보조수단으로서 도형그림 그리기를 사용한다(510d). 그것은 그러나 그들의(보조수단) 인식론적인 지식의 주요 대상이 아니다. 비록 그들이 이것들(보조수단들)로부터 탐구를 발전시키고 그들의 사유를 명백히 한다고 할지라도, 핵심적인 대상은 예컨대 사각형 자체이거나 혹은 대각선 자체이거나이며(510d), 수학자들은 그들의 연구에 있어서 이것에 대하여 주의력을 고정시킨다. 그림으로 그려진 사각형은 핵심적이요 완전한 사각형으로 인하여 존재하는 것을 지칭한다. 거기에서는 동일한 종류이며, 작거나 크거나 간에, 하나의 결정적인 접근으로 이루어진다(ἔοικε, 510d) : “그들은 눈에 보이는 도형들(형상들)을 추가로 이용하며, 이것들에 관해서 논의를 하되, 그들이 정작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런 도형들이 아니라 이것들이 닮아보이려고 하는 원래의 것들에 관해서이고, 그들이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은 정사각형 자체나 대각선 자체 때문이지, 결코 그들이 그리고 있는 것 때문이 아니며, 이 또한 다른 것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국가론 6권 510d).”
감각적이고 수학적인 대상은 원형을 만들어내는 것을 규정하지 못하며, 이것과 동일화할 수 없다. 경험의 영역에 있어서 수학적 사유적 에이도스의 기술(記述)의 불완전한 관계만이 존재한다. 이러한 관계는 방법적인 다리를 만들어낸다. 이 다리는 수학의 인식을 억견 즉 감각적인 사물들의 영역과 결합시킨다. 이해(수학)는 감각의 원초적인 추상에로 나아가기 위하여 감각적인 정도 단계의 영상들을 사용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선(線)의 비유에 있어서 이해의 부분은 확신의 부분을 바로 뒤따르며, 이 속에서 영혼은 확신의 이전 단계 속에서 영상과 같은 것을, 즉 확신의 이전 단계에서 원형으로서 취했던 바 대상을 사용하고 있다(511a). 따라서 감각적인 세계와 그 수학적인 표현 사이의 관계는 플라톤에 의하면 직접적이며 연속적인 것이다. 수학적인 인식의 핵심 대상인 바 사유적인 형상(이데아)은 플라톤에 의하면 순수하게 완전한 어떤 실재로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수학자들이 거기서 시작하는 바, 수학적 인식의 핵심적 대상과 감각적 소여들의 관계는, 이데아와 감각적인 위치, 이 두 위치들에 관한 이데아 이론의 정확한 증명이다. 이 점에서 우리들은, 플라톤은 이데아론을 증명함에 있어서 수학에서 그 논증을 발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4. 존재론적인 차이와 수학적 인식의 가능한 지식의 한계들

그러나 변증법과 수학의 대상은 사유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때, 이것은 그것이 존재론적인 피륙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511e에 변증법의 인식에 의하여 발견되어지는 바 사유의 부분은 소위 기술(技術)들 즉 수학적 인식들의 대상인 바 부분보다 더 의미있고 더 명확하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수학의 탐구의 방법은 판단으로써 전개되는 이해의 인식론적인 능력에 의하여 발생하며, 그것은 이성(사유)에 의한 것은 아니다(511d). 그러나 그것은 왜 이(것)들이 사유대상의 다른 부분에 속하는 대상과 관계할 때 누스(사유지성)를 갖지 않는지를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511b). 이러한 대상들이 “원리에 의한 사유적 존재들”(511d)이라고 할 때, 수학자들 자신들이 이것들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주요 방해물은 그들(수학자들)은 이 원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의 가설을 넘어서서 더 진행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 “그가 말하기를, 나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겠네 하고 말하였네.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납득이 갑니다. 왜냐하면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엄청나고 훌륭한 것으로 생각되니까요. 그러나 선생님께서 한계를 분명히 하려고 하신 점은 분명히 알겠습니다. 실재(實在)하는 것들 중에서, 문답형식으로 관찰되는 것은, 소위 과학적인 기술로 취급되는 것보다 더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과학적 기술에서는, 시원(始原)으로 더듬어 올라가 고찰하는 것이 아니고, 기본적 가정(假定)을 전제로 하여 고찰하는 것이므로, 감각에 의하지 않고 사고(思考)에 의하여 사물을 관찰하게 마련이지만,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관찰하는 것이 아니고, 가설에서 출발하여 관찰하기 때문에, 그 대상에 대하여 감각을 통하지 않고 알게 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와 같은 사물은 시원을 알게 되면, 동시에 모든 것을 올바로 알게 될 것입니다.”(511c-d)
반대로 지성은 가설을 원리로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비가설적인 것에로 가는 길인 바 출발점으로 발견하고서, 만유의 원리인 것(511b), 그리고 종합적인 관찰로부터 오는 바 보조적인 수단들을 사용하는 바가 없이 순수한 이데아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하는 것이다(511c).
이미 이런 논증들(비가설적)로써 플라톤은 수학의 가능적 지식과 인식의 논증의 한계를 밝히려고 하였다. 이것이 성공하기 힘들다는 것은 그의 가설을 발견하는 것이며, 가설을 통해서 그리고 수학을 통해서 아직도 더 높은 가설에로 상승하는 이유를 밝히는 일이다(510c, 511c-d, 533b-e).

5. R. M. Hare의 견해에 대한 반대와 수학 철학에 관한 플라톤적인 견해

수학의 특수한 인식에 있어서 플라톤의 이런 비판은 일정한 어려운 점들을 갖는다. 그것들은 밝혀져야만 한다. 하나의 점은, 수학적 인식의 위와 같은 불가능성은 수학의 인식 그 자체에 관한 것인지 하는 점이다. R. M. Hare는 곧장 “플라톤과 수학자들”이라는 그의 연구에서 원전 510c-d에 관해서 언급하면서 플라톤은 수학에 대하여 과오, 적어도 그 당시의 수학자들의 오류를 발견하고 수학자들을 비판한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여기 R. M. Hare가 사용하는 거짓(fault)이라는 용어는 플라톤의 이 원전 구절의 전체 통일성으로부터 방어될 수 없다. 왜냐하면 수학자들이 설명못하는 연구에 있어서, 그림으로 그려진 도형들과 가설들은 수학자들이 플라톤에 의하면, R. M. Hare가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그들의 연구에로 성공적으로 전진하지 못한다는 것을 논증해준다. 수학의 특수한 인식에 관한 플라톤의 비판은 수학에 대한 지지의 표지를 우리들에게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수학의 올바르고 정확한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는 것을 결론으로 이끌어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밝히고자 원하는 것은, 예컨대 수학이라는 특수한 인식에는 일어나지 않는 것, 즉 모든 시대에 걸친 철학의 문제와 일(事)이라는 것이다. 특수한 인식의 모든 전제들이 연구방법에 있어서의 사유와 검증 아래에서 주어질 때, 그때 이 사유는 특수한 인식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에 속한다.
각 특수한 인식은 자기 관습적인 것과 정당성을 가지고 있으며(그 자체가 옳다), 제안할 수도 풀 수도 없는 것은 버리고, 그리고 자기 자신의 그리고 접근가능한 문제들을 취급하는 것은 옳은 것이다. 특수한 인식의 틀 안에서 연구의 이러한 방법은 의심할 것 없이 올바른 것이다. 이것은 플라톤과 뜻을 같이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설득력있는 방법을 통하여 철학의 문제들과 특수과학, 수학의 위치의 방법 사이에 차이점을 제안하고 있으며, R. M. Hare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것과 같이, 수학자들과 그들의 인식을 비난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수학적) 인식은 철학적인 피륙의 문제들을 놓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라는 수학의 특수한 인식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은, 수학의 인식은 그 자체적인 인식에서는 언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들을 관찰해야만 한다. 1. 플라톤의 사유의 방법은 수학을 보조에로 향하고 있다. 그리고 변증법을 탐구의 목적으로 하고 있다. 2. 철학에 대한 수학의 관계는 플라톤에 의하여 수학이 철학의 일이 되며, 변증법으로써 일어나는 것과 같이, 수학의 특수한 인식을 정초하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인식론적인 소여로서 존재하는 것과 같이.
플라톤은 다른 곳에서도 이 문제의 의미의 중대성을 지시하고 동일한 해결을 주기 때문에,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지시하고 있다 : 여기서 우리들은 하나의 기본적인 플라톤의 입장 앞에 있다는 것이다. 유우티데모스편에서는 국가론 511b-d에서와 마찬가지로 수학과 변증법 사이의 차이점이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290b-c) : “기하학자들, 천문학자들, 그리고 계산하는 자들도 사냥꾼들이다. 그들은 각각의 경우에 그림 그리는 자들이 아니라, 사물의 실재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먹이를 어떻게 사용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냥하는 것만을 힘쓸 때, 이성적인 것 자신은 그들의 발견들을 적절히 사용하는 변증법가에게 넘겨준다. 그들은 결코 순진한 바보가 아니다.”
수학자들은 존재를 발견할 수 있으나, 그러나 이러한 발견을 더 옳게 사용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 연구를 더 나은 연구를 위해 변증법가들에게로 넘긴다. “그들의 아무도 바보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플라톤에 의하면, 모든 시간에 걸쳐서 철학의 문제가 머물러 있는 바 그것을 (발견하는) 그들의 인식에 있어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자들은 저런 수학자들이라고 규정되어진다. 이 점(다음과 같은 점)에 있어서 플라톤의 믿음을 갖고 있다 : 첫째 발견으로서 수학은 한계들을 갖는다. 그리고 둘째로 이 기본적 원리들은 수학에 의존해 있고, 이들은 수학의 특수한 인식에 의하여 더 이상 기초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 방법을 적용하는 철학의 인식에 의하여 기초화되어진다.
그러나 위의 원전의 연구에 의하여 플라톤이 수학의 높은 가치를 평가절하했다는 사실은 사실이 아니거나, 혹은 플라톤은, 수학으로서 수학이 발견되어지는 방법과는 다르게 발견되어져야 한다는 것과 같이, 그렇게 제안한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는 것이 드러난다. 플라톤은 사유적 형상의 인식에 있어서 탐구의 수학적 방식처럼 인도하는 사유의 변증법적인 방식은 수학적 방식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메논에 반대하여 문제를 형성하는 것은 여기서는 거의 명백하다. 메논에 있어서 수학의 선천적인 성격이 발견되었다. 그 성격은 변증법적인 모형적인 의미에 의하여 가지는 그런 것이다. 국가론에 있어서 변증법은 수학의 실제적인(실용적인) 의미를 통하여 이유를 말해주는 위치에 있다.
변증법의 방법을 향한 수학적 인식의 방법의 선택과 비교는 플라톤의 다른 원전에도 답변된다. 필레보스 58a에서 플라톤은, 다른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변증법만을 제외하고, 수학이 갖고 있는 정확성, 순수성, 명확성과 진리성 때문에 다른 모든 인식들에 반대하여 수학적 인식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철학과 수학(사유적 형상) 사이의 공통적인 성격, 즉 그것은 플라톤에 있어서 국가론의 제6권 끝에 확실해진 것이다. 이 두 인식들도 사유의 대상의 영역을 탐구하고, 그러므로 이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는 논구는 플라톤이 서로 서로 연구의, 연구하는 두 상이한 방법들을 발견하지 못하여 비교하지 못하도록 방해 않는다. 수학과 철학을 대응적으로 대조하는 이것은 필연적으로 일어나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 방법만으로써 플라톤은 수학적 대상의 존재론적인 가설(본질적 본성)에 관한 그의 입장을 논증하고 정초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존재론적인 근거를 이루는데, 그것은 여기서 계속하여 중간비유매개라는 성격을 통하여 하나의 새로운 특수한 의미를 가진다.

제4장 플라톤에 있어서 수학적 대상의 존재론적 중간­중재

위의 분석 이후에 이미 분명하게 어려움의 핵심이 구별되어진다. 분명하게, 정확하게 이데아의 종류들은 국가론 6권 끝 511d에 사유의 영역의 분류에 있어서 하나의 근원적인 이중 역할을 해준다는 것이다. 거기서는 추론적 사고로서의 수학의 인식은 누스(직관)로서의 철학의 인식으로부터 구분되는 것이다. 이데아의 종류들은 이 영역(추론)의 위(位)의 부분의 인식의 대상들이 분명히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데아 종류들은 사유 대상의 아랫부분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플라톤이 수학의 인식론적인 인식의 주요 대상은 사유적 형상(510d, 511a)이며 그림 그려진 도형들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수용한다. 문제는 다음과 같은 물음이다. 즉 사유대상의 영역의 위의 부문에 있어서 사유적 형상의 대상의 성격은 아래의 것으로부터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플라톤이 국가론의 제 6권을 썼을 때, 플라톤 자신이 사유의 영역의 두 부분(수학과 철학)에 있어서 사유적 이데아들의 이중 역할의 어려움들 자체에 대한 하나의 충분한 해결을 주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이 점에 있어서 어려운 문제는 존재일반의 영역에 있어서 수학적 이데아들의 존재론적인 분류이다. 즉 의견대상과 사유대상 사이의 것이다. 토론에 의한 원전의 더욱 더 주의 깊은 관찰은 이 시점에서 두 개의 가능한 해석 앞에 우리들이 서 있음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1. 사유대상의 영역의 이러한 분류는 하나의 존재론적인 차이이다. 2. 이러한 분류는 변증법의 연구와 수학의 특수한 인식의 연구의 방법들의 순수한 차이들이라는 것이다. 만약 우리들이 두 번째의 해석(방법)을 받아들인다면, 이데아와 수학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수학이 사유되어진 것들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들을 일면으로 보면 수학자들에 의하여 발견되어지는 것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변증법가들에 의하여 발견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해석에 반대하면 변증법과 수학은 동일한 존재를 다루지 않고, 이들은 그들 사이에 방법에 관한 것만을 다룰 뿐이다. 따라서 방법론만의 하나의 차이로서 사유대상의 구분-차이가 생각되어질 수는 없다. 두 방법들이 상이한 결과를 가진 동일한 존재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추론적 사고(διάνοια)라는 수학의 연구의 방법은 지성으로 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학적 형상들에 의하여 일(작용)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가장 정확한 인식을 통하여 노력하는 한에 있어서, 지성은 다른 것들 사이에 작용할 수 있으며, 더 높은 단계에로의 수학적 형상에 관계하는 것이며, 다만 다른 방식에 의한 것일 뿐이다. “수학자들은 원리에로 상승하지 않고 연구하는 것으로서, ... 누스(지성)는 이런 것들에 타당하지 않다는 것으로 당신에게 보이는 것이며...”라는 표현(511c-d)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 수학이 아니고 다른 관점에서 변증법의 대상인 바 수학적 형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지성은 이것들(수학)에 관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관점에서 우리들은 사유 대상의 다른 부문(511b)을 발견한다.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가장 높은 것(511d)이며, 사유 대상의 인식능력이 그것에 대응한다. 그러나 원전에 제2차적인 부문도 언급하고 있다. 그 부문은 존재론적으로 최상급과는 독립되는 부문이며, 그 부문에는 추론적 사유의 인식론적인 능력이 상응하고 있는 것이다. 즉 수학의 소유이며 누스가 아니다(“ἀλλ’ οὐ νουν”)(511d,e) : “이러한 4개의 부문들에 답변하면서, 영혼에 일어나는 이런 4개의 상태들을 ‘생각하여라’: 지성(νοησιν)을 가장 높은 곳에, 추론적 사유를 두 번째에, 확신(믿음)을 세 번째에, 마지막에 감각적 그림자를 놓아라 : 그들을 비례에 의하여 조정하여라. 그들이 진리에 참여하며 존재하듯이, 그렇게 명확성과 정확성에 있어서 참여하는 것이다(국가론 6권 511d-e).”
이 점에서 사유 대상의 두 부문들의 존재론적인 차이점(최고위-차선위 부문)과, 위에서 말한(해석한) 첫 번째 해석의 정당성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존재론적인 이러한 차이점의 평가는 중간(μεταξύ)의 성격을 통하여 명확한 방법에 의하여 플라톤에 의해 일어난다. 수학적 탐구의 기관, 추론적 사고(διάνοία)는 억견과 누스(지성) 사이에 들어간다(511d) : “추론적 사고라고 불리우는 것은 기하학자들의 추론적 사고이며, 이들의 소유이며, 누스(지성)의 소유는 아니다. 억견과 누스(지성) 사이에 있는 것이며, 그들의 추론적 사고인 것으로서인 것처럼 보인다”(국가론 6권 511d). 결과적으로 추론적 사고의 유비, 두 번째 부문은 변증법의 대상과 감각적인 대상 사이의 존재 일반의 영역에 놓여진다. 모든 인식 능력들(영혼에 있어서의 성질들 511d)은 플라톤에 있어서 이들에 상응하는 존재론적인 부문들을 갖는다. 1.1에서 우리가 증명할 것으로서 상응하는 대상들의 영역을 갖는다는 것이다. 국가론의 이러한 전개들은 수학의 영역의 인식론적인 중간-중재는 동시에 존재론적인 중간-매개이다라는 사실에서부터 하등의 애매성들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1. 로스와의 비판적인 논쟁

영국 연구의 분야에 있어서 다른 것들과 비교하여 W. Ross의 가장 좋은 책 “플라톤의 이데아론”(Plato's theory of Ideas, Oxford 1951)은, 사유대상의 영역의 구분에 관하여 언급되고 있는 “국가론”의 원전을 음미하려고 하는 그의 해석에서 나온 결론의 명확성과 삼단논법의 논리성을 통하여 우리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 사유 대상의 영역의 구분에 있어서 로스는 “전체적인 강조는 추론적 사고와 지성적 사고 사이의 차이점 위에 놓여지나, 어떤 것도 현실적으로 그들의 대상들 사이에 차이점에 관하여 말해지지 않고 있다”(pp. 68-69)는 것을 받아들인다. 이것으로부터 그는, 국가론의 이런 원전의 주요 목적은 그 다음 바로 국가론 7권 속에서 그들의 심층적 연구를 통하여 수학의 특수한 인식과 철학 사이에의 차이점에 준비적으로 빛을 던져주는 것이다라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대상들 사이의 차이점은 억견과 지성적인 도형식 아래에 있는 원전의 처음에만 강조되었으나, 그러나 끝에서는 인식 능력의 구분으로서 끝났다는 로스의 논변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로스는 선(線)의 비유의 모든 문맥을 다음과 같은 하나의 해석을 하는 그 점에로 달아나기 때문이다. 그 문맥은 정확하게 부문들 ― 최고, 제2위의, 제3위의, 마지막 부문 ― 에 관해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511b, d-e). 이 부문들은 존재론적으로 대상의 부문들이며, 거기에 인식론적인 능력들이 상응한다(p. 51의 분석적인 도형을 보라).
다른 곳에서의 로스의 결론 즉 추론적 사고의 대상들은 중간(μεταξυ)이 아니고 수학적인 이데아(p. 65)라는 결론은 정확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어져야만 한다. 그 이유는 한편으로는 디아노이아(추론적 사고)는 억견과 지성 사이에 중간역할을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추론적 사고와 그것의 대상 수학적 이데아는 대상의 제2번째 부문들에 대응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최상위의 부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로스는 이 점에서 잘못을 범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추론적 사고의 대상은 수학적인 종류들이며, 두 번째 부문(511e)에는 수학적 이데아 자체들의 존재론적인 분류는 없다는 플라톤의 검증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 제2부문은 최상위 영역과 존재론적으로 독립된 부문이며, 추론적 사고의 일반적인 능력의 유비로서 대상의 일반적인 영역으로 볼 때는 존재론적으로 중간 자리를 가지는 것이다. 로스가 나아가서 이 점에서 이 “국가론” 원전의 연구로부터 이해하지 못한 것은 다음과 같다 : 추론적 사고의 인식론적인 능력에 의하여 수학의 대상인 바 수학적인 이데아가 있다는 것이며, 다른 면으로 보면 수학이 아닌 변증법의 대상인 수학적 형상의 이데아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 “이것들에 대해서는 누스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며, 누스는 원리에 의한 사유적 대상들에 관한 것들이긴 하지만...”(511d). 로스는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 위와 같은 필연성과 이것(원전)에서부터 나온 필연적인 차이점을 고려함이 없이 수학적 이데아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결핍이 그의 분석(pp. 65-69)에 있어서 특징지워질 수 있으며, “국가론”의 논의되고 있는 원전에 있어서 “중간 형상들”에 관하여 슈리아노스의 증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서이다. 국가론은 그를 수학적 형상의 이러한 상이점 형성에로 인도하며 나아가서 로스가 받아들이지 못한 수학적 대상의 존재론적인 중간-중재에로 인도하는 것이다(pp. 65-69).
추론적 사고와 직관적 사고의 대상의 존재론적인 차이에 관하여 방법론적인 차이점이 병행하여 위의 원전에로 향해야 한다는 문제에 관하여 우리들의 입장을 다음과 같은 논의를 통하여 지지할 것이다.

1.1 로스의 견해에 반대가능한 논의들

Α. 논의 중인 원전의 전체 맥락(선(線)의 비유) 509d에서 출발-시작한다. 거기에서 눈으로 보는 류(類)의 부문과 사유적인 류(類)의 부문에 있어서 선(線)의 첫 번째 양분법이 있다. 이 부문들은, 510a에서 근원적으로 첫 번째로 강조되어짐으로서, 대상의 부문들이며, 방법들의 부문들만이 아닌 것이다. 감각적 그림자와 믿음은, 영상들, 동물들, 생물들, 그리고 인공적인 대상들로서 외적인 존재성들을 언급하고 있다.

Β. 추론적 사고의 방법의 부문(이론의 방법)은 수학적 존재들만을(510d) 지시하는 것이다 : “수학자들은 사각형 자체에 관해서 그리고 대각선 자체에 관해서 로고스(설명)를 만들면서, 이것들이 이것들처럼 보이는 것에 관해서 추론적 사고를 하면서...”(수학적 이데아 자체의 추구에 관해서(511a)).

Γ. 수학적 대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이 말해진다 : 수학자들은 추론적 사고를 통하여 필연적으로 수행하나, 그러나 지성적인 사고에 의한 자들은 감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것들(수학적)을 직관한다.

Δ. 존재의 어떤 부문에 관한 수학자들의 언급은 국가론 533c 원전에서도 강조되고 있다 : “우리들은 그것들(추론적 사고)을 본래 존재의 어떤 것으로 취하는 것이라고 말하였으며, 기하학과 그런 것에 속하는 것들을, 존재에 관하여 꿈꾼다(희망한다)는 것을 보고 있는 바 다른 많은 기술들.”

Ε. 변증법의 방법(이론의 방법)이 거기에 대응하는 사유의 영역에 있어서 변증법은 방법론적으로 만유의 비가설적인 원리를 지향하게 된다(511b). 거기에서는 모든 사유적 존재의 존재론에 관해서 문제삼는다 : 사유적 존재들은 하나의 원리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것들을 통하여 수학자들은 수행한다. (수학자들에 있어서) 누스는 이것에 대해서는 타당하지 않다(511d). 511c 원전에 있어서 “변증법의 인식에 의해서 존재와 사유에 관해서 이론적으로 사유한다는 부문은 수학적인 대상의 영역보다 더 정확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존재론적인 차이점을 가지며, 위의 모든 논의들로부터 추론적 사고와 사유적 사유(대상)의 대상은 동일하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그의 이론의 방법만이 다르다는 것이다.

Ζ. 로스의 견해에 반대하는 마지막 논의로서 ‘그의 국가론에 대한 기억’이라는 프로클로스의 하나의 원전을 꺼내어보자. 그 원전은 이전의 장에서도 기억하였던 것이다. 프로클로스는 선(線)의 비유를 받아들이고 있다. 즉 선의 비유에 있어서는 방법론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동시에 또 존재론적인 단계구분에서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프로클로스는 존재들을 통하여 그리고 선(線)이 묘사하는 존재론적인 연속성을 통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고 프로클로스는 다음과 같은 것을 강조하고 있다.; 즉 모든 것의 동일하지 않은 분절은 구분된 존재론적이고 그들에 상응하는 인식론적인 구분들의 가치를 명백히 하고 있으며, 계속하여 비동일성은 존재론적인 비동일성의 비유(연상)으로서 서술되어 진다; <<모든 것을 4개의 구분들을 나누고, 하나는, 연속적이며 하나로된 길을 나타내려고 하나의 선으로 그러한 연속적인 선을 그렸다. 존재를 빈 것으로 분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비동일성의 연속적인 비연속성에 따라 영상을 놓으면서...>>. 프로클로스는 선(線)의 비유에서 추론적 사유의 존재와 사유적 존재의 차이점을 부각시키고 사유적 존재들을 추론적 사유를 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p.291-292). 누구나, 국가론에서 플라톤은 수학적 대상의 분리된 류(類)의 가능성을 생각하지도 않았다고 말하며 또 정확하게 Ross의 견해를 따르고 있는 바 Wedberg의 견해에 반대하여 동일한 논의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끝으로 “중간단계에 관하여” 라는 Annas의 연구는 플라톤에 의한 수학의 중간-매개의 문제를 방법적으로는 옳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언제나 상이한 문제성(p. 156-161)을 갖는 수학에 관한 <플라톤의 대화들로부터 온 상이한 원전들을 완전하게 언급하고 추구하기 때문이며, 이것들로 부터 다음과 같은 잘못된 결론에로 나아간다 : 대화의 이 부분들에 있어서는 수학의 중간 매개는 답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매개)을 그들의 테마로 갖지 못한 것이다. Annas는 그가 해석하는 바(p.16-164) 국가론 6권 끝의 원전 자체의 해석에 관하여도 성공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510e-511e의 원전의 논리적인 연속을 정확하게 해석하지 못하고 있으며, 해석을 511a와 역설적으로 마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언급이나 취급없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언표, 실현화연구도 없는 체, 특히 거기에 놓여있는 511c-e 의미심장한 원전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원전에서, 우리들은 플라톤에 있어서 수학적 대상의 중간 매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Annas의 연구의 테마이기도 하다. 이미 우리들은 마지막 연구관찰은 다음과 같은 안나(Annas)의 최정적인 결론들(p.164)을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즉 대화편들속에는 수학의 중간-매개가 답변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에 위에서 이루어진 우리들의 분석들과 관찰들은, 우리가 믿건데, 국가론에서 수학의 존재론적인 중간-매개를 드러내 주고 있으며, “중간이데아들”이라는 시리아누스의 논증의 정당성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위에서 우리가 해석하였지만, 안나는 그의 연구에서 그것을 인식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2. H. Cherniss의 견해를 부정함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은 것을 논증한다.; 수학적 대상들은 플라톤에 있어서 이데아와 감각대상 사이에 놓여지며, 다음과 같은 점에 있어서 이데아에 대하여 다르다; 수학적 대상은 많은 복사물들을 가지지만, 이데아는 한번만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감각적인 대상들과 이데아들 곁에 사물들의 수학적인 대상들이 중간에 있다라고 말하고 감각적인 것들과 다르면서 영원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존재하며, 이데아들의 어떤것들은 닮은 여럿들이지만 다른 이데아 자체는 하나 각각일 뿐이다(Met. 987 b14-8)>>.
주석자들 중에서 시리아노스는 국가론509d-511, 주로 511d의 원전에서 수학의 중간-매개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이러한 증거를 비교하고 옳게 언급하고 있으며, <<중간 이데아>>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우리들은 말하였다. 우리들이 곧 밝히게 될 하나의 일정한 참고문헌은 시라아노스의 이 증거와 우리가 해석하였던 Proclos의 원전을 무시하는 바, 그 문헌은 수학적 대상의 중간-매개가 문제된 위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증거와 국가론 511d사이에 하나의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그 문헌에 있어서 수학의 인식론적인 능력으로서의 추론적 사유의 중간-매개만이 강조되고 수학적 대상의 중간-매개가 아닌 바가 강조된다. Cherniss는 이 모순을 받아들이고 원전적인 원천을 억지로 놓지는 않고 있다. “대화편 속에서 중간류를 발견하는 모든 탐구들은 제거되어진다”라는 그의 결론은 강제적인 방법으로 이끌어 내진다. 왜냐하면 Cherniss는 511d,e 국가론의 원전을 충분하게 탐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원전은 추론적 사유의 중간-매개와 그의 대응적인 존재론인 부문, 제 2차적인 부문에 관해서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나아가서 플라톤이 수학적 이데아를 받아 들였다는 것은, 이러한 이데아들은 중간-매개를 가질 수 없다라는 Cherniss가 원했던 결론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리아노스의 위의 증거를 보자). 수학적 대상의 중간-매개를 대화편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 Cherniss의 견해에 반대되는 다른 기본적인 논증은 필레보스편166d-e이다. Cherniss는 이것을 다음과 같은 점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무규정자와 일자사이의 수를 완전히 파악하기 전까지는 다(多)에 대한 무규정자의 이데아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원전에 의하면 수(數)는 무규정자와 일자사이의 중간자 위치를 갖고 있는 것이다. 수(數)의 존재론적인 중간-매개는 이점에서 플라톤에 의하여 방법적인 수단이다; 수단의 의미가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성립한다. 수학은 그들이 갖고 있는 충족성을 증명할 수 있다. 즉 무규정적 현상의 다(多)를 하나의 방법으로 조정할 수 있는 충족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일(一)과 다(多), 규정성과 무규정성의 문제는 이 점에서, 플라톤에 있어서 일(一)과 다(多) 사이에 있는 모든 다성(多性)의 수를 인식할 때만 풀릴 수 있다고 한다. 위의 증거들로 부터 수학적인 이데아의 중간-매개자와 수학자체의 중간-매개자가 결론으로 모아진다. 그리고 수학의 중간 위치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증거와 국가론의 상응하는 증거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는 것이 보여진다.

2.1 Cherniss의 견해에 반대할 수 있는 논의들

A. 인식론적인 것은 플라톤에 있어서 존재론적인 것이다; 필레보스 78c; <<이 존재는 존재의 로고스(이유)를 우리들이 주는 그런 것이다. >>. 따라서 플라톤이 다음과 같은 것을 강조하는 한(恨) 수학의 인식론적인 능력으로서 추론적 사고는 억견과 지성 사이의 중간 보조적인 단계로서 점목되고 있다.; 이것들 사이의 연속성을 안전하게 함으로써, 수학적 대상들은 플라톤에 있어서 감각과 이데아 사이에 발견되어 질 것이다. 위에서 검문되었듯이,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영역은 플라톤에 의하면 사물의 하나의 실체의 분리할 수 없는 견해들이라는 한에 있어서이다. 선(線)의 비유에 있어서 질적인 단계화에 비례하여 방법론적(인식론적인) 계단들이 언급되고 그들에 상응하는 존재론적인 계단들로써 균형을 이룬다. 현상은 플라톤에 있어서 어떤 사람의 영혼 속에 있어서의 현상이 아니다. 즉, 사유에 있어서의 주관적인 명징성이 아니다. 그러나 이데아의 존재와 병행하여 실재적(實在的)인 독립된 존재이다; 사유하는 주관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B. 시리아노스는 형이상학 P.4,1-20에 있어서의 그의 비망록에서 “국가론에 있어서 플라톤에 있어서 감각적 대상과 이데아 사이에 수학적 대상의 매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었다; Platon 은 감각대상과 이데아 사이의 추론적 사유를 받아들이는 것 같이 보인다.
그 아래에는 학습적인 것-대상들이 놓여진다. ― 그 가운데는 원리들, 기하하적인 것들, 대수학적인 것들 그리고 조화로운 것들-- 명확하지 않은 것과 명확한 것을 논리적인 것으로써 주로- 이성적인 것으로 그리고 국가론의 선의 비유에 있는 추론적인 것으로 다시 구분할 수 있다. 그의 비망록 p.82,20-26에서 시리아노스는 플라톤의 위와 같은 견해를 다음과 같은 것을 통하여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추론적 이데아들을 티마이오스편에서 Platon은 영혼들에 있어서 제작자라고 놓는다라고 말한다. 유비를 통하여, 기하학적인 것, 대수학적인 것들을 정리하면서이다. 국가론의 선의 구분에 있어서 영상들은 이성적인 것들에 속하기도 하고 (그는 이것을 이성적인 것이라 부르는 것을 가치있게 생각하지 않았다) 원론적으로 감각적인 것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화이돈편에서는 상기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학문은 중간적인 이데아 이외 다른 어떤 것의 상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3. 수학적 대상의 중간-매개설은 플라톤의 쓰여지지 않은 학설이다라는
튀빙겐 학파의 입장의 부정

체르니스의 견해는 형이상학 987b 1-18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논증에서 강조되고 있으나 플라톤의 대화록에서는 답변되지 않는다는 Charniss의 견해를 튜빙겐 학파도 이 특수한 문제를 그 자체로 음미하여 해결하는 데 관심을 갖기 보다는, 플라톤의 구술적인 학설에 관한 그 학파의 일반저인 입장을 지지하려고 하고 있다.
여러가지 생각으로써 수학적 대상의 존재론적인 중간-매채는 플라톤의 쓰여지지 않은 학설이라는 것을 논증하려는 튜빙겐 학파의 노력을 살펴 보아야만 하겠다. Krämer와 Gaiser 의 논의들은 이 점에서 약간 타당치 않으며 그 자체가 확실성의 성격을 갖지 않은 그림자들이다. 형이상학 987b 14-18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과 아카데미에 있어서 플라톤의 구전적 학설과의 상호관계,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위의 논증은 이 구전적 학설을 그 근거로서 가진다는 것은 원전으로부터는 논증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학적인 본질들은 플라톤의 세속적인 학설에 있어서 이데아와 현상계 사이에 고유한 존재영역을 형성하였던 것이다>>는 Krämer의 주장은 증거되지 않은 논증으로서 남아있게 된다.; 61번의 주석은 오류이며 그의 주장의 논증에 들어가지 않는다; 왜나하면“선(善)에 관하여”라는 아리스토크세노스의 설명과 논증은 플라톤의 구전적인 학설 안에서 수학의 중간-중매에 관하여 야기하지 않고 위의 주석에 관해서 언급하는 형이상학의 구절들도 그렇지(매개) 않다. 차원들의 연속으로써(점, 선, 평면, 입체) 수학의 중간-매개를 플라톤의 구전적인 학설속에서 논증하려는 Gaiser의 또 다른 노력은 K,Gaiser 자신으로부터의 논증 이전에 나오고 있다; 즉, 차원들의 연속성은 플라톤 자신의 학설에 있어서 이데아와 현상계사이의 모든 것을 종합하는 존재론적인 구형(완전성)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점에서 그것은 ‘차원들의 연속성과 존재의 차이적’인 영역들 사이의 유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차원(次元)들의 중간 매개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함으로써 Gaiser는 하나의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쓰여지지 않은 학설) 그가 증명하려고 하는 이 학설의 입장의 문제는, 이 경우에 그의 입장을 지지하는 경우가 될 수 없는 바 수학의 중간매개의 특수한 문제와 혼돈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국가론 511d,e의 원전에서 수학의 존재론적인 중간매개의 특별한 분석과 해석은, 이 원전이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987b 14-18에 있어서 원천이라는 것을 논증하려고 노력하였다. 나아가서 시리아노스도 여기에 관하여 업급하고 있다. 위에서 우리들이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아카데미에 있어서 플라톤의 구전(口伝)적 학설이나 혹은 선(善)에 관하여 라는 강의에서가 아니라 국가론의 위의 원전에 있어서 수학의 중간매체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논증을 관계시켜서 옳게 말한 사람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점이 있다. 왜냐하면, Krämer와 Gaiser는 플라톤에 관한 간접적인 전통으로서 시리아로스의 다른 증명들을 언급하고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꼭 그래야만 하겠지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 위하여 유비적인 문제의 실현을 목적으로 위의 의미심장한 증거는 취하지 않고 있다.

제5장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수학의 존재방식의 전환(변화)의 기본적인
동기로서 수학에 관한 플라톤의 존재론적인 이론의 두 기본적인 결과들

1. 고대 아카테미에 있어서 수학의 우월평가

우리가 이전 장(章)들에서 길게 전개했던 수학에 관한 플라톤의 존재론적인 이론과 이런 인식에 대한 그의 높은 가치평가는 아카데미 학교의 기본적인 결과들을 가져왔으며 이 문제에 관한 다른 아카데미 회원의 입장들의 차이점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992a 32-33에서 고대 아카데미에서의 수학의 우위평가를 논증하고 있다. 거기서 그는 다음과 같은 것을 강조하고 잇다; 즉, 아카데미 안에서 ‘수학은 철학이 되었다’. <<이들에 있어서는 수학이 철학이다.>> 1080b 14-16 원전에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페시포스의 입장에 관하여 언급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데아나 혹은, 특수한 수들이 아닌 “자체 차원인 실체”로서 감각적인 대상들과 분리된 수학적인 수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그의 주위의 입장들에 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스페시포드에 있어서 수(數)들은, 플라톤에 있어서 이데아가 갖는 위치를 갖고 있으며 존재자들 중에서도 첫번째로서 성격화되어진다(1083a 20-24).아리스토텔레스의 증명에 의하면, 크세노크라테스와 그를 둘러싼 다른 사람들은 수학적인 것을, 특수한 수와 동일시하거나 혹은 이데아를 수학(들)과 동일시 하는 자라고 하였다(1080b 21-23, 1076a 20-21 1069a35, 1086a 8-9).; <<이데아적인 수와 수학적인 수는 동일한 것이다>>. 아카데미 학교안에서의 제 3의 방향은 유우독소스와 그의 제자 메비크모스(퀴니코스 학파)의 방향이다. 그 방향은 그러나 수학의 존재론에 관한 플라톤적인 입장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풀루타르코스는 ‘윤리학’에서 우리들에게 유우독소스와 두 다른 사람들의방향을 통해 하나의 증거를 제공한다.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할 때이다 : 즉 플라톤은 유우독소스, 아르히타, 미네흐모스에 반대하여 비난을 하고 있다 : 왜냐하면 그들이 그것(기하학)을 감각적인 대상들에 되돌릴 때 이들은 기하학의 선(善)에 정확하게 종사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플루타르크는 다른 원전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논증하고 있다 : 플라톤은 유우독소스와 아르히타에 반대하여 화가 나서 분노하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생각에 의하면 이들(E&A)은 기하학을 파괴시켰기 때문이다 : 이들이 기하학을 감각적인 대상들에다 되돌리는 한에서다. 물론 수학의 존재론에 대한 큐지크스의 학파의 입장은 스페시포스와 크세노크레테 사이의 첨예한 대립을 야기 시킨 것이다. 위의 사실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이 도출되어 나온다 : 아카데미아의 학교 안에 위의 세 가지 방향들은 상이한 방법에 따라 그 각 방향에 수학의 존재론의 문제에 관여하고 있었고 방법자체에 의하여 차이점을 논증하였으며, 그 인식에 대한 그들의 평가를 나타내 준다. 유우독소스와 메나이흐모스의 견해들이 수학의 존재론의 문제에 관하여 플라톤의 입장들을 떠난다는 사실은 유우독소스 ― 메나이흐므스의 방향이 고대 아카데미의 학교 안에서 수학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 다음과 같은 사실은 알려져 있다 : 즉 플라톤이 항성운동의 복잡한 문제를 연구한 유우독소스에게 기울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유우독소스는 그의 동위원운동중심 이론을 통한 약간 발전적인 방법에 의해 기하학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점에 있어서 (여기서) 우리들은 이 문제에로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들의 연구의 영역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고대 아카데미아에 있어서 수학의 우위평가의 이런 환경 안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특수한 (고유한) 입장을 전개하고 있다 : 그 입장이란, 수학의 존재론에 관한 한의 플라톤, 스페시포스와 크세노크라테스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결과이다. 이것은 형이상학 마지막 두 권 M과 N에서 관찰되고 있다 : 거기에서 수학의 존재론의 문제들이 논의되고 있으며 거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판적인 토론에로 나아가며 고대 아카데미아와 플라톤의 입장들을 검문(檢問)하고 있다(M. 7,8). 그러나 병행하여 다음과 같은 것이 아주 그럴 듯하다 : 스페시포스에 있어서 이데아와 이데아적인 (특별한) 수의 입장포기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것이다. 스페시포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에 연대적으로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학설은 양자 사이의 중립에 서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점에서 수학의 존재론에 있어서 그들을 분리시키는 차이점 보다, 스페시포스부터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는 하나의 다리를 통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페시포스로부터 그의 전개에 있어서 영향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용인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스페시포스는 이에 하나의 입장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에 부합하는 의미인 바, 이데아와 이데아적인 수의 포기를 전개하였다는 것이다.
유우독소스의 방향은 아마도 다른 한편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것이다. 유우독소스와 그의 학파의 연구의 대상이었던 바 기하학은 감각적인 것들에서 귀납한다는 것, 이데아는 사물들 속에 있다는 유우독소스의 입장 (형이상학 99/a, 1079b 18-23)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변환시킨 것이며 계속하여 발전 전개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우독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의 관계의 기본적인 점들이 존재한다 : 그래서 누구라도 높은 확률성을 가지고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즉 이 경우에 있어서 유우독소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일정한 필연적인 자극을, 그의 특수한 입장들의 더 나아간 발전을 통하여, 주었던 것이다. 이 입장들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론들, 고대 아카데미아의 입장들과의 파괴에로 들어갔던 것이며 특별한 방향과 철학적으로 독립된 것이다.
이것들 이외 다음과 같은 심플리키우스의 두 가지 증거들을 우리는 갖고 있다 : 이 증거들은, 천문학의 인식에 있어서, 유우독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에 하나의 관계를 통하여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 1. “하늘에 관하여 (p.422 Heidelberg)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 대한 그의 회고에서 심플리키오스 는 다음과 같은 것을 논증한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소위 발전 전개된 구(球)운동의 문제에 관한 한 유우독소스와 칼리폰을 따르고 있다. 2. 이 회고 p. 493에서 심플리키오스는 다음과 같은 것을 논증하고 있다 : 즉 유우독소스가 맨 먼저 발전적인(자유로운) 구(球)운동들의 문제를 일으켰으며 발전 전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폴레마르코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같이 아테네에서 유우독소스의 규명들을 고치고 보충하였다. 이미 이 시점에서 유우독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에 하나의 관계가 확실하게 확정지워진다는 사실이다. 그 관계는 그러나 부정(不正)으로 인한 관계가 아니다. 왜냐하면 유우독소스가 한편으로는 별들의 질서를 수학적으로 밝히기를 노력하였던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구(球)들의 하나의 순전히 수학적인 이론화 방향으로 전진하고 있으며, 이것을 자연의 철학으로서 연구한다. 여기에 방향을 갖고 있다는 바 목적의 개념을 알고 있다. 하나의 그러한 목적론은 우리들에게 알려진 유우독소스의 우주론에는 없는 것이다. 유우독소스는 아카데미 안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에 기하학에 경험의 방법을 깨트렸다. 그 방법은 기하학으로부터 기계론(자)에로, 유우독스로부터 아르히티스와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서 아르키메데스에게로 인도하는 것이다.

2. 티마이우스편에서의 자연의 수학화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대 방향화

수학의 우위성에 대한 충분한 증거들을 티마이우스 53c-57d에서 우리들은 발견한다. 티마이우스편에서는 질료의 기하학적인 이론이 묘사되고 있다. 플라톤은 여기서 질료의 4개의 상태들을, 소위 4원소들을 일정한 기하학적인 도형들로 환원시키고 있다; 즉 불은 4면체로, 공기는 8면체로, 물은 20면체로, 땅은 6면체로 환원하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정확하게 다음과 같은 명제의 부연설명이다. 즉 신(神)은 혼돈을 수와 도형을 통하여 질서 지우고 있다는 것이며 [티마이우스 53b, 57d도 (삼각형을 만들고)], 거기에서 야나라스에 의하면 “수학의 생산”에 관한 논의도 있다고 한다. 그 경우의 틀안에서 플라톤의 수학적 자연학의 이데아를 여기서 우리는 구분할 수 있으며 다음과 같은 것은 확실하다 ; 즉 플라톤은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향아래에 있다는 점에로 끝난다는 것이다. 수학이란 그에 의하면 물리적인 실재성이 기술(記述)되고 설명되어질 수 있는 언어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Ch. Mugler는 다음과 같은 것을 강조하고 있다 : 티마이우스편은 우리들에게 기하학을 그에 상응하는 물리적인 이론에의 방법적인 적용의 역사에 있어서 첫 번째 예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티마이우스편에서의 자연학의 전제의 현존은 Parmenides편에서와 같은 논쟁논리의 수준이 아니라, 티마이우스편의 전개는 전체적으로 그럴듯한 신화(29d)로서 성격화되어진다. 순수한 이론적인 구조로서의 전 플라톤적인 이론은 경험을 다루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자연학에 대한 의미있는 어떤 상호변화적인 해결을 형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우주의 신체의 탄생이전에, 플라톤에 의하면, 논리적이며 어디에서나 발견되어지는, 그의 영혼이 만들어졌다. 신(神)은 영혼을 변하지 않는 것을, 변하고 부분을 가지는 존재와, 존재의 제3의 류(이데아) 안에서(영혼), 결합시켰다. 그 다음 신(神)은 세 개의 존재들을 혼합하였다. 그 혼합을 수적인 유비와 척도로써 부분들로 분리시켰다(35a). 티마이오스편 35a-39e에 의하면 우주만유의 조화는 수적인 조화로서 우주의 영혼으로부터 생성되어 나온다. E. 뮤쵸풀로스는 그의 학위논문의 맨 마지막 장에서 이점에 관하여 전체적인 영구적 현존화로써 그리고 참고문헌의 문제를 둘러싼 자신의 입장을 충분한 참고문헌적인 해석으로써 지시하였다(pp.348-385). 플라톤은 음악적인 조화와 별들의 체계를 보이지 않는 수들과 그들의 화음의 원초적인 표출들로서 생각하고 있다. 우주 속에 있는 모든 운동은 조화적이며 수적인 관계들, 구(球)형의 우주적인 육체의 모든 끝들로써 표현되어 질 수 있다. 우주 육체는 4원소들로써 구성되어 있으며(32b-c), 끝들은 그의 중앙으로부터 완전한 끝의 유비로서 같은 거리를 갖고 있다(33 b-c).
4원소적인 물체들은, 불․공기․물 그리고 땅, 플라톤에 의하여, 4면체․8면체․20면체․6면체는 대응적으로 환원된다. 이 원소 물체들은 복합적이며, 그들의 복합적인 요소들은 무규정적으로 작은 삼각형의 도형구조물이다(티마이우스 53c, 54b-55c). 삼각형은 부등변삼각형이거나 이등변삼각형이다. 부등변삼각형들은, 여러 개로 복합차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세 개의 입체들, 이등변 삼각형면체, 8면체, 그리고 이십면체를 만들어 갖는 대신에, 등변삼각형은 4면체를 형성한다. 삼각형의 두가지 종류(로부터) 중의 이등변삼각형은 하나의 단일한 본성(형상(태))을 가지는 반면에, 부등변삼각형은 무규정인 형상(태)들을 갖는다. 많은 부등변삼각형들 중 하나가 가장 좋은 것이다. 두 번이나 반복되면 이것은 세 번째 삼각형을 만드는 것이고, 그것이 등변삼각형인 것이다(54a-b). 삼각형으로부터 질료적인 물체의 구성에 관한 한, 이 시점에서, 다음과 같은 Sachs의 견해가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티마이우스편에서 자연의 수학화를 가질 수 없으며 플라톤의 삼각형들의 수학적인 도형들로부터 질료적인 물질의 구조(성)의 견해(이해)는 비논리적이다 : 플라톤적인 삼각형들은 삭스의 이해에 따르면, 공간이 아닌 물리적인 질료로부터 형성된다는 것이다. 삭스의 이런 견해에 반대하여 Gaiser는 질료적인 물체들이 형성되어 있는 삼각형들은 질료적이다는 것이다. Gaiser에 의하면 티마이우스편에서의 도형들의 표면들은 질료들이 아니고 수학적인 한계들이고 척도들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플라톤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적인 이론을 우위적인 것으로 여긴 것이다. 데모크리토스와 플라톤에 의하여 해석된 것과 같이, 만약 질료의 분류의 학설의 종말을 해석한다면, 마음과 같은 두 가지 견해를 가질 수 있다. 1.질료의 분류에 있어서 누구나 더 이상 분할하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는 아주 작은 부분에까지 접근한다. 그리고 2. 질료의 분류에 있어서 누구나 아직도 더 분류할 수 있으나, 더 이상 질료의 수준이 아닌 바(Platon), 부분에로까지 접근할 수 있다. 두 번째 견해에 참여하고 있는 현대물리학자 하이젠버그는 “플랑크의 발견과 원자설의 철학적인 근거”라는 제목아래 행한 베를린 강연에 의하면 그는 다른 것들 중에서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 “삼각형들은 질료가 아니며, 수학적인 본성들이다”라고. 왜 요소적인 물질적인 종류를 통하여 해야하는가라는 물음은 플라톤에 의하여 수학에로 환원되었다. 현상의 최후의 뿌리(근원)은 따라서 질료가 아니라, 수학적인 법칙, 균형적 조화, 수학적인 본성이다.
질료의 문제의 수학적인 실현에로 인도해주는, 플라톤의 티마이우스편에서의 노력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공격당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고 있다. 즉, ‘수학은 운동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 비록 아리스토텔레스가 운동에 대한 그의 분석에 관해서 시간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바 : 시간을 (운동) 전후와의 관계로 한계되어지는 운동의 수로서 생각하여 말하는 것이다(자연학 11, 21gb2)라고 하지만 자연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은 주로 목적론적인 원리에 기본하고 있다 : 목적론적 자연의 과정의 작용(일)의 인식은 수학의 우위성에 대하여 정의(定義)적으로 반대하는 그 자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는 필연적이다. 이 우월성은 고대 아테네에 있어서는 그런 것이었다. 티마이우스편에 있어서 일어났던 자연의 수학화에 대하여 Aristoteles는 반대한 것이다. 신화가 아닌 자연학의 주체화와 과정화에 대한 동기는 동시에 존재론적인 동기로서도 성격화되어진다 :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론을 자연존재의 경우에 있어서의 견해로부터 풍요에로 환원하고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것을 알고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존재론을 자연존재에로의 환원과 목적론적인 자연학의 과정화의 일에 대한 인식은 거기서 두 개의 가장 기본적인 원인들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강한 비판에 의하여, 수학의 존재론에의 문제에 관해서 플라톤과 고대 아카데미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덜 논리적인 방법을 통하여 수학적 대상의 존재방식에 관한 플라톤적인 이론을 변환하게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새로운 이러한 이론은 ― 이런 표현을 사용하기 위하여 ― 자연학의 그림자 속에서 있게 된다. 왜냐하면 자연학은, 수학적인 대상의 존재의 방식에 관한 플라톤과 고대 아카데미아에 대한 새로운 이론에 대한 반대되는 이론의 가능성의 더 나은 용어나 혹은 정확한 동기가 된다. 그래서 이런 방법으로 수학의 의미는 물리학을 통한 것이다. 이런(수리) 물리학은 티마이우스편의 신화에 있어서 중심적인 입장을 가지는 것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는 이제 거의 의미없는 것이 된 것이다.
우리들의 분석을 통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비적인 원전에 관하여 우리들이 드러내려고 하는 바 우리들의 논문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 수학적 존재의 존재방식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플라톤에 대한 그의 존재론적인, 차이적인 이론과 아카데미아에 있어서 플라톤의 요구이기도 했던 바 목적론적인 자연(학)의 실현화의 결과이라는 것이다.
아카데미 안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눈(빛)은 자연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것이 운동에 나타났던 것과 같이, 그리고 식물과 동물의 왕국안에 유기체들의 종류들에로 향하고 있었다. 완전태는 형상의 단순한 조용한 연속성일 뿐만 아니라 이런 방향을 조화시키는 것으로서의 이런 삶의 담지자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에 관한 학설을 땅의 생물학적인 형태에로 바꾸어 가져갔다. 거기에는 살아있고 변화하는 형상으로서 종류는 원리의 견지아래서는 수학적 개념과는 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질적이며 역동적인 원리이며 측정(도)와 유비의 원리가 아니다. 따라서 이들(측정도-유비)는 양적이며 정(靜)적인 원리이다. 자연의 수학화, 플라톤의 그 때의 수단으로써 그것을 놓은 바, 수학화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는 과장적이다. 수학의 능력들은 목적론적인 자연학의 영역에 있어서 그에 있어서는 제한되어 있다. 거기에서 모든 자연적인 현상은, 그 때에만,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충분히 설명되어진다. 그것이 어떤 일정한 목적에 대한 관계를 받아들일 때이다. 따라서 수학과 특히 플라톤적인 이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은 이러한 견해 아래에서 이해되어진다. 그들의 가치의 변화로 플라톤에 의하여 전개되는 것의 어떤 낮은 단계의 기능에 있어서이다. 플라톤과 고대 아카데미에 의하여 일어났던 것과 같이, 수학의 우월성과 형이상학의 영역에 있어서 그들의 위치는 목적론적인 자연학을 근거 지울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작은 수학을 필요로 하였다. 수학의 존재론은 이 점에서 자연학 이전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이데아의 이론의 잉여가 남아있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희생되고 만다. 이 점에서 하나의 수리물리학의 이데아도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폐기되는 것이다. 수리물리학은, 신화적인 플라톤적 방법에 의해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면, 그 다음의 연구에 대한 안전한 진짜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의 그러한 발전 전개를 방해하였다. 그것은 중세의 사유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수학의 존재론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인 해석이 이러한 물리학에 대하여 독립된 특수한 인식으로서의 테마화한다는 사실은 제거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특별한 관심도 정확하게 구분될 수 있겠다. 즉 우리들의 연구의 바로 다음 장(章)에서 분석하게 될, 수학과 자연학 사이의 관계를 명확하게 밝힐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학의 깊은 조예가였다. 이것은 분석론후서 A권으로부터도 명백히 드런났다. 무관심은 이득을 통해서 배제된 관심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위의 분석을 통하여 고대 아카데미의 저러한 분위기(환경)가 간략하게 소개되었다 : 이 분위기로부터 수학의 존재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의 원천의 원인과 동기들이 이해된다. 이제 우리들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원전의 분석에로 나아가 보자. 그래서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비판을 통하여 플라톤과 아카데미아에 관하여 살펴보고, 두 번째로 수학의 존재방식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특별한 적극적인 이론을 통하여, 어떻게 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수학적 대상의 존재의 방식에 관한 문제를 놓고, 풀려고 노력하는가, 반면에 그가 어떻게 하여 플라톤의 존재론과 다른 존재론을, 자연에 관한 목적론적인 이론을 가지고 전개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지면 관계상 결론에서 핵심적으로 간략히 논하기로 하고 결론을 맺기로 한다.

결 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이 형이상학 M1(1076a8-37), M2(1076) M3(1077b17 -1078b6)에서 핵심적으로 플라톤과 플라톤주의의 수론을 비판하고 있다.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의 추상이론과 단위론을 내세움으로써 관계성을 강조하면서 독립성까지도 문제삼는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떤가? 논자(論者)는 플라톤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비판했던 내용을 이미 그의 대화록을 통하여 피력했다는 것을 논증하였다. 플라톤 자신이 물리적 수와 이것과 분리된 수 자체를 구분하고 있으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수학적 대상이 현실적 개별자들과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주장하는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단위론이나 추상이론 자체가 수 자체가 없으면 곧 그 수 자체에서 나오는 불변하는(고유한) 원리 (임의성의 한계)가 없으면 난관에 봉착한다는 것이다. logistike(수들이 덧셈, 뺄셈 등을 통해서 서로 관계하는 여러 방식들을 다루는 것)로써 arithmetike(어떻게 수를 셀 수 있는가, 수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를 다룰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물리적 수와 수 자체를 구분하였듯이, 플라톤은 단위에 대해서도 유사한 도식을 제공하여 두 가지로 구분한다. 우리가 한 마리의 소와 양을 ‘둘’로 셀 때 양(羊)과 소는 각각 하나의 단위이지만 이종적(異種的: heterogeneous)이다. 하지만 그의 표현에 의하면 철학자들이 숫자 2를 셀 때, 그 각각 단위들은 동종적(同種的 : homoge- neous)이며 정확히 서로 같은 것이다. 그러나 수를 구성하는 단위가 서로 같은 것이라고 상정함으로써 그 이후에 많은 문제를 야기시킨다. 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의 핵심은 같은 질(質)의 많은 양(量)이 다른 질을 산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가령, 예컨대 1과 2는 수(數)로서 서로 다른 특성들을 띠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같은 1이 모여 2라는 수를 만들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플라톤에게 수는 어떤 것의 수라는 것이다. 물리적 수는 물리적 대상에 대한, 수 자체는 순수 단위들에 대한 수이다. 플라톤에게 수는 숫자 세어진 것들의 모임과 잘 구별되지 않으며, ‘2’가 무엇인지는 아직 잘 불분명하다. 플라톤의 수에 대한 이론 중 또 하나 특이한 것은, 그가 수(數)라는 말을, 짝수와 홀수라는 말의 동의어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짝수와 홀수는 자연수를 구성하는 수(數)이다. 따라서 플라톤에게 있어서 수는 양수 전체가 된다(프레게의 Anzahl). 많은 학자들이 플라톤의 수는 기하학적인 것이며 그의 수 개념은 정수 뿐 아니라 기하학이 다루는 유리수와 실수 전체를 포괄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기하학에 대한 플라톤의 관심과 그의 저작 테마이테토스에서 무리수에 대한 언급들이 이 주장을 지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의 대화록 안에서 그의 수에 대한 개념은 기하학과는 무관한 듯하다. 1과 2에 관해서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소 차이가 나지만 플라톤의 진의를 잘 파악해야 할 것이다. 플라톤은 첫 번째 수를 1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로는 2라고 하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1을 수가 아닌 수의 기원 혹은 근거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명하게 플라톤의 수가 이데아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플라톤에게 있어서 형상은 우선 일반용어들이 지칭하는 대상이다. 그리고 수(數) 역시 그런 일반용어들에 포함되므로 수가 가리키는 것은 수의 형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수의 존재론적 근거가 그의 형상이라고 보는데는 문제가 있다. 예컨대 A와 B가 붉다라고 말한 경우에는 A와 B 각각이 붉다고 말할 수 있지만, A와 B가 둘이라고 말할 경우에는 A와 B 각각이 둘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 ‘둘’은 각각 따로는 하나이다. 즉 수는 다른 사물의 다른 속성과는 다르다. 그러나 또 한편 플라톤은 사물의 어떤 속성이 참여하듯이 하나 자체, 둘 자체에 참여한다고 말한다. 수가 형상이라는 것에 대하여 하나는 긍정적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이다. 수는 이데아를 가지므로 이 이데아에 참여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제3인간 비판론에 의해 공격당하지만 이데아가 강력하니까 아무 문제가 없다. 수가 이데아라는 주장(튀빙겐)도, 아니라는 주장(Robin)도 모두 다 해소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는 달리, be(Ειναι) 동사의 다의성은 그의 저서 “Category”에서 이미 자세히 다루어지고 있듯이, 그(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반드시 현실적(실재적) 존재를 함축하는 말이 아니다. einai의 의미를 여러 가지로 다루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수(數)는 그 중 어떤 의미로도 (플라톤적으로) einai한다고 말할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명히 수(數)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플라톤과는 구별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주의자들의 말은 무의미하거나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數)외에 다른 수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누스적 직관(플라톤)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것들은 무의미하다고 한다. 플라톤의 數이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은 직접적으로 논박하기 보다는 그 이설이 문자그대로 해석될 때는 부조리한 함축을 낳게 된다는 귀류법을 사용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실체가 있고 수(數)가 있으며, 수계열은 단위를 중심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시간이나 장소, 수 등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개별적 실체 즉 물리적 대상들에 의존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이나 공간 등의 성질들이 실체에 의존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런 정도로는 어떤 의미에서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환원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M권 3장에서 수학자는 다음 두 가지 작업을 하는 것으로 기술되고 있다. 수학자들 역시 물리적 대상들을 탐구하지만 단지 물리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관심에 본질적인 속성들만을 탐구한다. 예를 들어 수학자가 사람을 탐구할 때는 기하학일 경우에는 연장을 가진 존재로서, 산술적인 경우에는 셀 수 있는 것으로 탐구한다. 그러나 그(수학자)에게 사람이 포유류라든지 두 발 가졌다는 것 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수학의 본성은 그것이 다루는 대상은 무엇인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그것을 다루는지, 즉 그것의 방법론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그 이상의 것 ― 이데아계와 현상계를 잇는 중간 매개 ― 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바대로 수가 사물로부터 단위를 추상하여 구성된다면 우리는 ‘1’이외의 수는 만들어 낼 수도 또 셀 수도 없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동일한 사물은 수(數)적으로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1에서 2가 성립되려면, 2를 구성하는 단위들은 적어도 어떤 차별성이 없을 경우에는 많은 1과는 다른 2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러나 추상이론에 따르면 공통된 어떤 요소를 빼고 나머지 요소는 사상시켜 버리므로, 서로 다른 사물에서 추상된다면, 사건이나 관념에도 우리가 수를 부여한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다른 두 대상에서 각각의 차이점들을 모두 배제하여 양자(兩者) 모든 것이 내용이 전혀 없는 어떤 것들이 되도록 추상하더라도, 여전히 양자(兩者)는 서로 다른 것으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추상이론만으로는 이것들이 왜 여전히 다른 것으로 남게 되는지 설명할 수가 없다. 형상으로서의 수의 독립성에 반대하고 수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수의 구성요소로서 단위(單位)를 도입하지만 이 역시 여러 난점이 나타나는 데, 단위는 서로 관계하기 위해서 같아야 하지만 동시에 수(數)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차별성(差別性)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수는 중간적 존재라는 플라톤의 이설 ― 동일성과 차이성을 동시에 가지는 것으로서 ― 의 타당성이 다시 논증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수를 개별적 실체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주장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즉 수를 다른 성질들처럼 보는 듯하지만, 그것들과는 다르게 어떤 의미에서도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데, 무엇인가 허전하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에게 어떤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하는 지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은 그의 추상이론이다. 그러나 추상이론은 수의 기원 및 수학적 수에 대한 올바른 설명을 충분하게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다. 수를 물리적 개별적 대상들에 한정시키게 됨으로서 수학의 보편성(generality)을 설명하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말하듯이, 수는 수로서 따로도 존재하고 사물과 이데아를 연결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보편적 존재의 존재여부를 확증하는 직관적 이성에 대한 합리적 논변이 남는다.



참 고 문 헌

1. 원전
* 아리스토텔레스 전집(H. Bonitz <형이상학> 편집, 주; W. Jaeger <형이상학> 편집, 주; W. D. Ross <형이상학 및 기타> 편집, 주)
* 플라톤 전집 (J. Burnet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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