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개념 최초 설정: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37c-37e.]
시간관념의 역사(Histoire de l’idée de temps)
- 벩송의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02-1903)
- 리끼에(Camille Riquier, 1974-) 편집, PUF, 2016, pp. 103-117(P. 395).
벩송이 보기에 철학사적으로 또는 문헌 적으로 시간을 설명한 최초의 문헌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편이라고 한다. 정확하게 37c-37e에 있다. 사실상 인간이 필요에 의해 시각을 측정한 것은 이집트의 해시계에서 유적들을 보아 오랜 역사를 거쳐 왔을 것이다. (54ULA)
시간은 세는 것일까? 재는 것일까? - DI 2장 시작에서 단위의 설정을 제시하고, 그 설정은 수로 되어 있다고 하였을 때, 그것은 피타고라스의 것인 줄 알았다. 물론 삶에서 경험적으로 세는수의 추상화가 하늘의 공간의 절단에 의해 재는선분의 추상화된 단위로서 수보다 먼저일 것이다. 즉 수학사에서도 수의 발생으로 산수가 먼저이고, 기하학은 토지를 재거나, 하늘에서 별들의 운행을 땅위에서 재는 설명, 즉 천구의에 의한 설명에서 나누어진 것을 24시간 또는 12단위 시간으로 정했을 것이다. -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벩송이 시간에 관하여, 추측에 의한 단위가 아니라, 문헌상으로 수에 의한 단위의 설정이 ?티마이오스?편의 38a라고 한다. (54ULB)
- 다음 강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나올 이야기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간(시각)은 수를 세는 것에 있다. 이 말은 플라톤이 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기하학적 사유에 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걷는 걸음과 같은 경험을, 그림자의 이동 등과 같은 구체적 실험에서 보듯이 시간의 흐름을 걸음걸이 또는 변화의 단위로 셀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런 셀 수 있다는 사고는 제논의 선분의 분할에 대해 반박하지 못한다. 정지에서 정지로 이동을 운동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55MKE)
시간의 문제를 플라톤 이래로 영원의 상아래서 시간의 계열 또는 배열을 파악하려는 스콜라주의가 있는가 하면, 지속의 상 위에 펼쳐지는 시간의 무한히 열림이 있다. 들뢰즈는 지도리가 열렸다고 표현하는데, 시간의 미래는 비결정적이고 또한 생산적이며, 창조적이다. 이런 징후가 드러나는 실례로는 근본적으로 배우고 익히는 학습론에서 자기의 소양을 만드는 문예론에서는 예술(기예)작업이, 작은 선행들로 덕을 쌓아가는 덕도론에서, 보살에 이르는 점수론으로 가는 과정에서 보살에 이르는 수렴점 없는 열린 깨달음으로 이룰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실행은 진리치의 개념과 판단, 그리고 최후의 심판과는 전혀 무관하다. 영원의 추상을 실재성으로 믿기 때문이다. - [내가 이른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오징어 게임”이 중등교육의 도덕론에 조폭론을 섞어 놓았다고 보는데, 도덕론의 도가 먼저가 아니라 덕이 먼저이다. 즉 그 게임은 닫힌 세계이다. 이와 유사하게 천공스님이라는 화면을 보면 경상도와 조선일보의 이야기를 듣는 자들이 들을 수 있게 하는 것도 도덕론을 깔고 있는데 잘하면 돈 번다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천공이 박근혜와 윤석열을 도처럼 상층의 형상의 모방자로 놓고서 설명하는 부활도 계속 주장하면 부활이 실재하는 것으로 여기는 네오스콜라주의의 것, 즉 거짓도 자꾸 말하면 진실처럼 된다는 괴벨스의 것을 닮았는데, 이를 좋아하는 시절도 있지만, 치기에서 벗어날 때가 중등시절을 지나가는 것이다. 그 시절에는 무협지, 삼국지연의, 서유기를 읽지 않더라도 주변에서 이야기로 듣지 않는가. - 동쪽의 빛에서 찾으려 ... 미래는 알 수 없다. 학습에서, 문예에서, 덕도에서, 점수에서, 노력과 실행, 투쟁(가투)과 전투(사투)에서(전쟁이 아니라)... 평화통일 영세중립 코리아로 (54U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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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1903년 1월 16일 회기(Séance) 103-117.
시간이론에 대해 플라톤에게서, ?티마이오스?37a-38에서 묘사된 이론을 보자. 플라톤은 신 즉 위대한 데미우르고스, 위대한 예술가[기술자]는 세계영혼을 구성했다. 사물을 움직이게 하고 활성화하가도록 숙명 지워진 영혼을 구성했다. (103)
“아버지, 즉 세계의 생성자는 영원한 신들의 이미지, 즉 세계영혼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환희로 가득차서 무척 황홀했고, 그는 이것을 자기의 원본(모델)에 더욱 닮게 하고 싶었다(ἔτι δὴ μᾶλλον ὅμοιον πρὸς τὸ παράδειγμα).이 모델은 그 차제로 영원히 살아있는 존재(ζῷον ἀίδιον, 생명체)이다. ... 그는 통일성[단일성] 속에 남아있는 영원성을 제작한다. 그리고 거기에 우리는 시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왜냐하면 날(일日)들, 달(월月)들, 연(年)들은 하늘의 탄생이전에 있지 않았고, 그리고 하늘을 조직화하면서 신은 탄생을 기계적으로 만들었다(Dieu emmachina la naissance).” (103) [인용문 첫 구절은 구약성서와 매우 유사해서 놀랍다. 베낀 것인가? - 플라톤 당대에 돌고 있는 이야기들일까? - 게다가 이 구절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의 마지막 구절과 동일하다.]
“거기에 영원의 모방자이며, 수에 따라서[κατ΄ ἀριθμὸν κυκλουμένου / kat’ arithmon kukloumenou] 구르는 시간의 두 형식들이 – 과거와 미래 – 있다. 시간은 수를 순환한다.” (104)
“따라서 시간은 하늘과 더불어 태어났다. 이것들이 함께 생겨나고, 이것들의 해체는 언제가 일어날 수 있다고 가정하면, 함께 해체된다. 시간은 영원한 자연의 모델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모델은 [현재] 있는 그대로 완전히 영원성이므로(ἐστιν ὄν). 그러나 시간은 매 순간에 있었을 것이고 또 있을 것이라고 말해야만(γεγονώς τε καὶ ὢν καὶ ἐσόμενος)할 것이다. 이리하여 오직 영원성으로부터 사람들은 영원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은 매순간에 있었고, 있을 것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104)
이런 이행의 연속으로, .. 플라톤은 신이 제1원의 내부에 다른 원들을, 거기에서 다른 별들이 돌게 하도록, 제작한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104)
이것이 시간에 관계하는 ?티마이오스?의 구절[이행]이며, 이런 이행은 매우 중요하다. 이런 이행 또는 이전(transition)을 어떤 이들은 오늘날 두 가지 철학이라 부르고, 우리는 플라톤의 두 관점이라 부를 것이다. (104) [영원의 운동(큰 원운동)과 그 아래 여러 운동(작은 운동들)을 부동과 운동의 관점으로 보게 되면 영원과 시간이라는 두 가지 관점이 된다.]
엘레아학자들이 제기한 문제는 한 사물이 지속하는 사물이 되느냐를 어떻게 모순 없이, 불합리 없이 인정할 수 있는가?이다. 하나가 있고 또 그 자체가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모순된 것이라는 것이다. (104-105)
따라서 거기에 겉보기에 부조리(불합리)가 있다. .. 그러나 실재성은 어린이도 어른도 아니고, 그것은 진보이며, 진화이며 생성이다. 정신의 관점에서 각 항들, 어린이, 청소년 장년 노인이 있지만 그것은 실재성이 아니다. 진실한 실재성은 변화, 생성, 연속적 이전(la transition continue)이다. (105)
두 사실(어린이와 어른)이 동시에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엘레아학자들은 변화를 부정하는데 이른다. 플라톤은 그것(변화)을 설명하고, 그것을 보존하기를 원했다. (106) [벩송은 엘레아학자의 오류는 점 또는 사실이 부동이라는 점에서 출발했기에 착각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변화이며 움직임이고, 엘레아학자는 정신의 관점에서 그 움직임의 잘려진 단면(항)을 부동으로 삼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들에 현재 실재하는 것은 그 하나의 점밖에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유명한 동굴의 비유... 마술적 등불(une lanterne magique)의 예. .. 푸른색, 붉은색, 화면이 있고, 우리는 변화 생성을 갖는다 또는 적어도 우리에게 그것의 현상이 주어진다. (106)
이것이 플라톤주의의 해결 원리이다. 이 원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매우 명시적으로 제기되었다. .. ?형이상학?의 제7권에서. .. “우리의 학설에서 이런 난점은 우리가 두 반대들을 인정한다는 사실에서 물리쳐 진다.” (106-107)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름 부른 어떤 제3의 원리, 그것은 반대에 밑에 감춰져 있는 것이며, 더 좋게 말하자면 물질(휠레, ἡ ὕλη)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이미 훨씬 덜 깨끗한 형식으로 인정했던 제3원리이다. 그것은 플라톤에게 무한이었고, 큼, 작음, 규정되지 않았던 어떤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데아들에게, 즉 이행하는 성질들에게 기저(substratum)로서 사용된다. (107)
[또 다른 문제거리를 간단히 제시하면 존재와 무 사이에 비결정이 양자 바깥에 무한(무한인지, 무한정인지, infini ou indéfini)이 남는다. 전자는 스콜라주의자들의 문제이고(차이), 후자는 생명론자의 문제이다(차히). (54UKH)]
기저와 같은 의미의 구절이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있다. 그는 우리에게 수용체(ce réceptacle)이라고, 각인을 받아들일 운명을 지닌 물렁한 대상(to ekomageion, ἐκμαγεῖον)이라고 한다. 그리고 들고 나는 사물들이 있다(ta ephionta kai eksionta,εἰσιόντα καὶ ἐξιόντα) / 덧붙여서 이데아들의 모방작용들이다(ontōn ton mimēmata; τῶν ὄντων ἀεὶ μιμήματα) (107)
따라서 화면, 수용체, 영원한 사물들의 반사가 있다. (107)
?폴리테이아?의 7권의 원문이 있는데, 플라톤은 변증론자의 임무를 매우 분명하게 구별하는데, 변증론자의 임무는 다양한 사물들을, 영원한 이데아들로 변하는 사물들을 해결하는 것이다. (107)
플라톤주의의 해결에서 원리가 이것이다. 이런 설명의 본질적인 것, 즉 생성의 환원(축소)의 본질적인 것은 다음 형식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변화와 생성은 축소인 것으로서, 어떤 하락(실추)인 것으로서 생각될 것이다. (107-108)
이 모든 색깔들은 섞이고 뒤섞이고, 우리가 사는 세계를, 또한 우리가 우리의 눈 아래 갖는 변화는 현상들을 생산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의 지각작용에주어지는 것이 있다. (108)
그러나 우리가 과학을 구성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채색된 유리들로 거슬러 올라가야하고 그리고 특이 빛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 플라톤은 이데아들의 이데아를 빛이라 불렀다. 가지적 세계의 태양이다. 그것은 선의 이데아이다. 철학자의 역할, 변증론자의 역할은 이런 이데아들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108)
자, 도식적 형식 하에 이데아들 이론의 속에 본질적인 것이 있다. ... 플라톤은 사실상으로(en fait)가 아니라 권리 상으로(en droit) 개념들은 언어 속에 있다. 개념들은 현대인이 언어를 말했듯이, 부분적으로 협약적[합의적]인 어떤 것이, 인간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이 개념들은 그 자체로 현존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지각 작용의 세계에서 [나중에] 만날 것, 그것은 뒤섞인 개념, 타락한 개념이다. (108-109)
따라서 이데아들의 이론 속에 그러한 것이 있다. 그리고 다른 것들도 있다. 특히 수학에서 빌려올 필요처럼, 기하학에서 이데아[관념]이 있다. 이것은 플라톤 시대에 구성된 유일한 과학이었다. (109)
그런데 기하학자는 실재적이고 불완전하고 변화하는 도형들을 완전하고 움직이지 않는 모델로 스스로 옮겨간다. (109)
우리가 지적인 모델에서 순수 이데아들로 옮겨가듯이, 완전하고 불변하는 이데아들의 모델이 변하고 불완전한 사물과 관계는, 기하학자의 도형들이 실재성의 도형들과 같다. 이처럼 우리는 거대한 수학을 가질 것이며, 다른 수학은 특별한 경우일 뿐일 것이다. (109)
우리는 플라톤의 세계를 가질 것이고, 두 조류[경향]의 합류점에서, 하나는 사람들이 언어에 따라서 창조했던 조류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인 수학에 의해 열려진 길을 따라서 창조했던 조류이다. (110) [프레게가 언어와 산술학이 공통기반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것도 이런 관점일 것이다. ]
당신들은 플라톤의 대화편들 속에서 신화들, 즉 우화들이 큰 위치[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 신화들 몇몇은 길게 이어지는 은유이고, 비유이며, 시적인 환타지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시인이 되기로 해서 시작했고, 그는 전 생애에 시인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파이드로스(Phèdre)?편에서 인간의 이야기[신화]가 나오는데, 그 인간들은 뮤즈의 음악을 들으면서 먹고 마시는 것을 잊어버려서 매미들로 변했다.
다른 신화들도 있다. 이방인들의 입에서 전해진 것으로 ... 디오티마의 신화(Diotime de matinée), 에르의 신화(Er l’Armenien), 티마이오스(Timée) .. (110)
신화들의 내용에 관한 것, 그것은 결국 동일한 것이다. 즉 항상 영혼(l’âme)의 문제가 있다. 인간영혼이든지, 세계영혼이든지, 우주영혼이든지. 그리고 플라톤의 의미에서 신의 문제 또는 신들의 문제가 있다. (110-111) [왜 영혼(psychē)에 관한 것은 신화로 풀려고 했을까? 움직이는 전체에 대해 분석이나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신화는 공상일까? 아니다. 그래서 이야기와 우화가 필요하고, 그리고 살아본 마지막에서야 과정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54UKH)]
변화가 설명되는 것은 신에 의해서 이다. 신과 영혼은 플라톤에게서 운동(mouvement)과 발생(génération, 생성)의 원리들이다.(111)
사람들은 신화가 플라톤 철학에서 부차적이라 생각한다. ... 생성의 과정은 변증법적 형식으로 될 수 없고, 이야기 즉 신화의 형식으로 될 수 있다. (111) [운동과 지속을 다룰 수 없었기에, 플라톤에게서는 생성 과정을 기하학적 또는 수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어서, 신화 속에서 이야기 한다. - 1830년대 이래로 안으로 실증적 탐구가 시작되면서 신화로 된 이야기가 실증 과학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신화들의 의미와 가치에 관해서 일치하지 않으나, 신화들을 부(2)차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데 일치한다. 사람들은 신화들을 즉 영혼과 신의 이론들을 플라톤에게서 마치 항상 짝으로 나란히 나아가는 두 가지 것들로서 간주한다. (111)
사정은 완전히 변했다. 5년 전부터 즉 플라톤의 논리에 관한 루토슬라브츠키(Wincenty Lutoslawski, 1863-1954)의 작업이래로 변했다. 이 철학자는 수많은 작업들 이요하면서, 스타일측정법(stylométrique)을 플라톤에게 적용했다. (111)
사람들이 추측들에 했던 분류작업은 선결문제 미해결의 오류(Pétition de principe)에 닮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대화편들을 플라톤 철학의 진화에 관해 선천적으로 행했던 가설에 따라서만 분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12)
내가 요약하건데, [루토슬라브츠키의] 이런 분류는 다음과 같다: [1]. 소크라테스 대화편들이 있다. 이데아들의 이론에 대한 흔적이 아직 없다. [2], 이런 이론의 소묘를 포함하는 대화들, ?크라틸로스?, ?심포지움(향연)?, ?파이돈?. [3] 이데아들의 이론이 제시된 대화편들, 플라톤 학설의 정점을 이룬 대화편 ?폴리테이아?, ?파이드로스?이며, ?파이드로스?편에서는 새로운 것이 그려진다. (112-113)
이들 대화편 다음으로 [4] 플라톤 사유의 비판적 시기, ?테아이테토스?, ?파르메니데스?, .. [5] 이전[변화]의 대화편들 ?소피스테스?, [6] 플라톤 사유의 마지막 국면, ?티마이오스?, ?크리티아스?, ?법률?편이다. 루토슬라브스키에 따라면 이데아들의 이론을 포기하고 영원한 이데아들의 개념작업에 이르렀다. 이 마지막 대화편들에서 이데아들은 그 자체로서 존속할(subsister)수 없다고 그는 이해했다. (113)
플라톤은 이데아들의 이론을 포기하고 변형하여, 영혼과 신(ψυχή et θεός)을 제일 평면(le plan, 위상)으로 이행해서, 이 둘을 진실하고 절대적인 실재성으로 세운다. (113)
나는 루토슬라브츠키의 분류를 보존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 속에 의심스런 것이 있다. ... 그러나 루토슬라브츠키의 결론들에 관해서 유보해야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플라톤에 의해 이데아들의 이론의 포기에 관한 것이다. .. 사람들은 플라톤을 분명하게 인식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주의의 이런 형식을 전혀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또한 그가 플라톤의 철학을 전적으로 이데아들의 이론이라는 것을 고려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113-114)
내가 덧붙여 말하건데, 사람들은 플로티노스를 아직 잘 못 이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플라톤이 이데아들이 신의 표상작용들이라고 또 이데아들이 신 속에 있다고 말했다면, 이데아들과 신성 사이의 연결을 찾으려 했던 또한 플라톤에 가능한 한 충실하려고 했던 플로티노스는 분명히 이런 견해를 받아들이려 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철학이 아주 다른것이라고, 또한 그는 이데아들, 가지적인 것들, 노에타(les noēta, νοήτα)를 마치 투사작용 즉 신적 통일성의 축소처럼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114)
따라서 거기까지 플라톤주의 마지막 개념작업을 따르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유지해야 될 것이 있는데, 이데아들의 이론이 구성되었다는 것에서부터 플라톤의 주의는 이데아론으로 우회하고, 새로운 문제들에 접근하였다는 것이다. 마치 이데아론이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이끈다고, 그리고 그는 거기서 전력을 다하여 벗어나기를 원했던 것처럼 말이다. (114) [이데아들을 영원성으로 만들면 자기 폐쇄회로(막다른 골목)에 빠지고, 변하고 있는 영혼을 설명할 길이 없게 된다. 즉 스스로 노력하여 완성으로 가는 길이 막히게 된다. 순환논증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막다른 골목은 어떤 것인가? 분명히 큰 난점이다. 일단 영원한 이데아들에 가기 위해 사물의 세계를 거슬러 올라가서,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내려오는 것은 큰 남점이다. .. 우리[영혼, 인식]는 영원한 것 속에 있는데, 어떤 이유로 영원한 것에서 나오며, 왜 이데아들과 다른 것이 있는가? .. 문제는 왜 이데아들이 있는가를 아는 것이 아니었고, .. 문제는 왜 사물들이 있는가, 왜 이데아들과 다른 것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114-115)
이 문제의 해결은, 조금 전에 우리가 읽었던 ?티마이오스?편의 구절에서 이것의 원리를 발견한다. 문제는 어떤 것인가? 우리는 영원한 것 속에 있고 거기서 나오기 위한 어떠한 이유도 없다. 그런데 영원성은 그 자체로서 충분한데, 왜 변하는 사물들이 있는가? .. 일단 영원성이 제기되면, 그것을 제기한다는 사실에 의해서, 사람들은. 마치 거기에 포함된 또한 내용이 된 어떤 것이 필연적으로 있는 것처럼, 또한 마치 잔돈이 금화 한 닢 속에 내용으로 되는 것처럼, 동시에 제기한다. (115)
플라톤에게서 영원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어떤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이데아들은 자신 속에 갇힌 어떤 것인 선의 이데아 속에 어느 정도 감겨져 있기 때문이다. .. 가능한 한 모든 것에 접근되는 어떤 것을 가정해보자. 그 어떤 것은 수학자가 말하는 것처럼 모든 것에 접선으로 되어 있고, 어떤 것이 접선과 같은 관계는 움직이는 성질이 그 극한의 관계와 같은데, 어떻게 우리 스스로 이런 사물을 표상하는가? .. 변하고 있는 사물 전체가 그 자체로 돌고 있는 또한 수에 따라 순환하는 구형(球形)이라고 가정해보자. 모든 부분들도 움직인다. (115)
이데아들을, 선의 이데아를, 영원성 속에서 영원한 어떤 것들 각각 속에 감겨짐을 제시하면서, 우리는 어떤 것, 규칙적으로 그 자체로 돌고 구(球)를 제시할 것이다. 그것이 시간이다. 구의 운동 그것이 시간이다. .. 우리는 모든 변화들을 가질 것이고, 우리는 생성의 세계를 가질 것이다. (115-116)
나는 막 해결책을 정식화 했는데, 그 해결책은 실재 상으로 플라톤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다. 우리는 다음 강의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간 이론을 연구할 때, 보게 될 것이다. 이런 시간이론의 모든 본질적인 것, 즉 모든 요소들은 적어도 ?티마이오스?편의 구절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 요소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거했던 것 보다 더 많은 어떤 것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월성과 존재 근거를 만든 것이다. 이것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거부했던 그럼에도 그가 마치 받아들이는 것처럼 행한 세계의 영혼과 더불어 모든 것을 거기서 발견한다: 세계의 영혼, 즉 데미우르고스, 예술가 신, 세계의 배열자를 아리스토텔레스는 보존하지 않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데미우르고스가 전혀 아니며, 사유의 사유(noēseōs noēsis, νοήσις νοήσεως)이다. (116)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소위 신화적 요소를 제거하는데 그쳤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 더하여, 원인성의 이론을 우리에게 부였다. 원인성 이론의 본질적인 것은 결과가 원인 속에 함축되어 있는 생각이다.
원인성의 이론, 이런 이론은 플라톤에게서는 있지도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신(thēos), 데미우르고스, 사물배열의 신이라는 요소에다가, 원인이라는 신을 덧보태야 한다고 믿었다. (116)
따라서 여기에[플라톤에게서] 어떤 것이, 즉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있는 것보다 적게가 아니라 더 많은 것이 있다. 그리고 더 많은 어떤 것이란, 신화적 특성을 이루는 것이며, 따라서 이점에서는 학설적으로 열등한 특성이지만 말이다. (117) [신화를 이용한 것은 논리적(추론적)을 따라 갈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이고, 이것을 직관을 통해야 아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부(기억)과 연관하여 의식하고 있음에도 논리적으로 설명 안 되는 것이다. 변화, 생성, 운동, 지속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54ULA)]
다음번에,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간 이론에 접근할 것이다. (117)
(7:25, 54U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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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본명 아리스토클레스(Aristoclès 427-347; 80살) 플라톤이란 ‘어깨가 넓음’을 의미한다. 이데아의 철학자. (출생시 소크라테스 나이 42살이었고) [그리고 그가 18년 후에 배울 수 있을 있었다면, 소크라테스 나이 60살이었으며 10여년을 따라다니며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384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 Ἀριστοτέλης, 전384-322: 62살) 스타지르(Stagire)에서 탄생. (플라톤 나이 43세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367년(17살)에 플라톤의 나이 예순 살에 아카데미아 입학했다고 한다.
O
204 플로티노스(Plotin, Πλωτῖνος; lat.. Plotinus 204-270) 이집트 리코폴리스에서 알렉산드리아 학파. ?엔네아데스(Les Ennéades, Ἐννεάδες, 254-270)?. 그는 세계에 대한 이해로서 세 가지 기저(trois « hypostases »)를 깨닫게 되었다. 일자(L'Un, ἐν), 지성(L'Intelligence, l'Intellect, νουϛ), 영혼 (L'Âme, ψυχη) [이말로 보면 중간에 점으로서 일자, 상층의 지성, 심층의 영혼이다. / 학설상 일자에서 누스로 그리고 영혼으로 연결되면 누스는 자연자체가 된다.]
1623 에쉬나르디(Francesco Eschinardi ou François Eschinard, 1623-1703) 이탈리아 제수이트 신부, 수학자. 그가 마술적 등불(une lanterne magique)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 빛을 투사하여 그림을 크게 보는 것으로, 첫 발명자는 17세기에 독일에서는 제수이트 신부인 키르헤(Athanase Kircher, 1602-1680)이고, 프랑스에서 신부 드 샬(De Châle, s.d.)이라 한다.
1768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문헌학자.
1772 헤르만(Johann Gottfried Jakob Hermann ou Gottfried Hermann, 1772-1848) 독일 문헌학자.
[1803 리터(Franz Ritter, 1803-1875) 독일 고전 문헌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소포클레스 연구자.]
[1808 클뤼거(Franz Theodor Kugler, 1808-1858) 독일 역사가, 예술사가.]
1814 젤러(Eduard Zeller, 1814-1908) 독일 철학사가.
1830 캠벨(Lewis Campbell 1830–1908) 스코틀랜드 고전학자. The Sophistes and Politicus of Plato Greek text with English notes (1867)
1832 곰페르츠(Theodor Gomperz, 1832-1912) 오스트리아 철학사가. 고전문헌학자.
1840 디텐베르거(Wilhelm Dittenberger, 1840-1906) 독일 고전 문헌학자, 비석글자연구자(Epigraphiker) .
1842 지벡(Gustav Hermann Siebeck, 1842-1920) 독일 철학교수.
1843 블라스(Friedrich Wilhelm Blass, 1843-1907) 독일 고대 문헌학자.
뢰퍼(Roeper, ?-?) / Frederking, ?-? / Hoefer, ?-? / Shanz, ?-?
Kugler, ?-? / Walbe ?-? / Tiemann, ?-? / Van Cleef, ?-?
1858 예히트(Richard Jecht, 1858-1945) 독일계(독일지방이 아닌) 역사학자.
1862 뤼미에르 형제(Auguste 1862-1954, Louis 1864-1948 Lumière) 프랑스 기술자, 산업가. 영화와 사진의 역사에 초기 중요한 역할 했다.
1863 루토슬라브츠키(Wincenty Lutoslawski, 1863-1954), 폴란드 철학자. 작가. 독일의 철학자인 타이히뮐러(Gustav Teichmüller, 1832-1888)의 제자. ?Principes de stylométrie appliqués à la chronologie des oeuvres de Platon (1898)? Sur une nouvelle méthode pour déterminer la chronologie des Dialogues de Platon, mémoire lu le 16 mai 1896 à l'Institut de France... (1896)
- 루토슬라브츠키(1863-1954)는 타이히뮐러(Teichmüller, 1832-1888)의 제자이다. 그는 플라톤 작품의 연대기적 확립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그는 플라톤의 논리(la logique)의 기원과 발전을 고려하면서, 슐라이에르마흐(Schleiermacher, 1768–1834), 헤르만(Gottfried Hermann, 1772-1848), 젤러(Eduard Zeller, 1814-1908)같은 학자들의 권위와 단절하기에 이른다.
1873 곰페르츠(Heinrich Gomperz, 1873-1942) 오스트리아-미국 문헌학자. 오스트리아 문헌학자 테오도르 곰페르츠(Theodor Gomperz)의 아들이다.
1893 트리꼬(Jules Tricot, 1893-1963), 아리스토텔레스 문헌 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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