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플라톤 철학으로 본 몸

나뭇잎숨결 2023. 11. 26. 08:57

플라톤 철학으로 본 몸 

 

철학아카데미(http://www.acaphilo.co.kr/)의 강의록



플라톤 철학으로 본 몸

미셀 푸코가 "혼은 몸의 감옥이다."라고 했을 때, 그 대척점에 있는 인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철학자는 플라톤입니다. 흔히 플라톤이 "몸은 혼의 감옥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에게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플라톤이 과연 이 말을 어떤 대목에서 한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무슨 까닭으로 이 말을 했을까, 그리고 도대체 이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형이상학적인 배경이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플라톤이 서양 철학사를 방향짓는 거대하고 막강한 사유의 틀로서 특히 근대의 철학을 '저 멀리서' 기초짓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할 때, 그리고 20세기 후반에 들면서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애매한 사상적 기류가 바로 이 플라톤의 사유의 틀을 뒤집어 엎는 데서 성립하는 경향이 있음을 고려할 때, 이러한 우리의 궁금증은 더욱 절실해집니다.

플라톤이 몸을 혼의 감옥으로 표현한 대목을 찾아 그 의미들을 되새기다보면 플라톤의 형이상학적인 얼개가 어느 정도 드러날 것이고, 아울러 그가 몸을 어떤 방식으로 취급하고 있는가가 드러날 것이라 봅니다.

1. 몸은 혼의 감옥이다.

플라톤이 몸을 혼의 감옥이라고도 하고 무덤이라고도 합니다. 이와 유사한 표현을 한 대목들을 몇 가지 제시하면 이렇습니다.

"지혜를 찾는 자는 누구나 철학이 자신의 혼을 사로잡자마자 그의 혼이 몸 속에서 손과 발이 묶인 도리없는 수감자임을 알게 되고, 그래서 직접 실재를 보지 못하고 감옥의 창살을 통해 볼 수밖에 없고 전적인 무지에서 허우적거림을 알게 된다."

"아마도 우리는 실제로 죽어 있을 것이다. 왜냐 하면 나는 언제가 우리의 현자들 중 한 사람이 우리는 지금 죽어 있다, 우리의 몸은 무덤이다, 욕망들이 그 속에 존재하는 혼의 부분은 본성상 이리저리 흔들린다 하는 등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에서 빛나는 빛은 순수했고 우리 역시 순수했다. 지금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바 몸이라 부르는 감옥에, 단단한 껍데기 속에 사는 굴처럼 단단히 묶여 있다. 그런데 그런 감옥의 더러운 얼룩이 없었다."

"그것(몸 soma)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약간의 변환이 허용된다면 더욱 다양하게 해석된다. 어떤 사람은 몸이 현재 우리의 삶에 매장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는 혼의 무덤(sema)이라 한다. 그리고 또 다시 혼이 몸에게 지시 사항을 주기 때문에 몸을 혼의 지표라고 한다. 아마 오르페우스 시인들이 그런 이름을 창안한 것 같은데, 그들은 혼이 죄의 벌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몸은 혼이 그 속에 감금되어 죄값을 치르기까지 안전하게 지켜지는 테두리이거나 감옥이라는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여기에서 우리는 플라톤이 혼과 몸을 적대적인 관계로 보고 있다는 것을 단박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의도와 배경은 매우 복잡하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됩니다. 몇 가지만 중요한 플라톤의 생각들을 여기에서 꺼집어 내 봅시다: 1) 지혜를 찾는 철학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2) 철학은 혼으로 할 수밖에 없는데, 그 혼이 몸의 방해를 받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몸의 영향에서 벗어나 순수한 밝은 빛 가운데 나아가야 한다. 3) 혼이 몸에 갇히거나 묻힌 것은 이전의 업보에 따른 필연적인 과정이다. 4) 혼은 몸을 통해 자신의 상태를 나타낸다. 이 네 가지 정도로 플라톤의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는데, 이것들에 대해 하나하나 그 형이상학적인 배경과 의미를 알게 되면, 플라톤 철학에서 몸이 어떻게 사유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이미 눈치챘겠지만, 이를 해명하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기사 도대체 철학이라는 말이 붙은 것치고 쉬운 것이 하나라도 있겠습니까?

2. 참으로 존재하는 것과 참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의 구분

플라톤의 철학에서는 많은 이분법이 나타납니다. 혼과 몸, 이성(지성)과 감각, 가지적인 것과 가시적인 것, 조화로운 것과 엉클어진 것 등의 이분법을 들먹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저 밑에서 떠받치고 있는 근원적인 이분법이 있겠는데, 그것은 바로 참으로 존재하는 것과 참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 간의 구별입니다.

"그러니까 제 판단으로는 먼저 다음 것들이 구분되어야 합니다. '언제나 존재하는 것'(to on aei)이되 생성(genesis)을 갖지 않는 것은 무엇이고, '언제나 생성되는 것'(to gignomenon aei)이되 결코 존재(실재)하지는 않는 것은 무엇인지 말씀입니다. 분명히 앞엣것은 '합리적 설명(logos)과 함께하는 지성에 의한 앎(이해)'(noesis meta logou)에 의해 포착되는 것으로서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aei kata tauta) 것인 반면에, 뒤엣것은 '비이성적인 감각'(aisthesis alogos)과 함께 하는 의견(판단: doxa)의 대상으로 되는 것으로서, 생성·소멸되는 것이요, 결코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성을 갖지 않고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이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합리적인 설명과 함께하는 지성에 의한 앎에 의해 포착되는 것이라는 플라톤의 생각은 참으로 특이한 것입니다만, 어쨌든 플라톤은 이렇게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 즉 영원한 무엇을 찾아 헤맨 것 같습니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하는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플라톤은 삶과 죽음의 경계 사이에 놓여 있는 인간의 운명, 그러한 운명에 얽매어 고통을 비롯한 온갖 일시적인 감정에 휘둘리는 것을을 벗어나고자 한 것일까요? 그래서 죽음이 전혀 없는 영원한 상태를 구하고, 사멸하는 몸과는 달리 불사의 혼을 중시한 것일까요? 이에 관한 논의는 플라톤의 형이상학에 매설되어 있는 플라톤의 심사를 하나하나 깨내는 작업이기에 또는 그 당시 사람들의 형이상학적인 욕구에 깔려 있는 사회 전체적인 인생관을 들추어 내는 작업이기에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버립니다. 다만 오늘날 생성과 사건과 일정한 상태를 중시하는 형이상학적 분위기가 주도한다고 해서 플라톤을 '죽일 놈'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점만을 지적해 두고자 합니다.

아무튼 플라톤이 이렇듯 지성에 의해서만 포착될 수 있는 영원히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을 추구함으로써, 플라톤 철학에서 혼과 근원적으로 구분되는 몸은 저절로 치워버리거나 극복되어야 할 문제덩어리 내지는 골치덩이로 취급될 것은 당연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플라톤은 몸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몸에 관해 상당히 정치한 이야기들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3. 몸(물체)의 근원은 기하학적 도형이다.

몸에 관한 플라톤의 이야기, 특히 [티마이오스]에서 보이는 이야기는 상당히 복잡합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플라톤의 우주론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 하면, 플라톤은 이 우주(cosmos 혹은 pan) 내지는 천구(ouranos)를 혼과 몸통이 결합한 하나의 살아 있는 거대한 생명체로 보고, 인간도 몸과 영혼이 결합해서 하나의 생명체로 봄으로써 유비 관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우주는 진시로 '선견(先見)과 배려(pronoia)'에 의해서 '그 안에 혼(생명)을 지녔으며 또한 지성을 지닌 살아 있는 것'(zoon empsychon ennoun te)으로 된 것이라 말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우주의 물질적인 구성이 곧 인간의 몸 구성과 직결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거죠. 간략하게마나 플라톤의 우주론을 살펴 보고, 그 결과 나타나는 바 플라톤의 몸에 관한 정말 골치아픈 생각, 즉 "몸의 근원은 도형이다."이라는 논제를 따져 보고자 합니다.

1) 우주 이전의 것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플라톤에서 우주는 만들어진 것 즉 생성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우주를 만드는 이, 흔히 제작하는 이로 알려져 있는 데미우르고스(demiourgos)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데미우르고스가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이 우주를 만든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본(paradeigma)이 될만한 것을 보고, 이미 있는 어떤 재료들을 갖고서 만든 것이라는 것이죠. 이때 우주는 이 본의 형태(모습: idea)와 성능(dynamis)을 갖추게 할 경우에라야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아름답게 된다는 것이고요. 또 이 우주가 아름다운 것으로 보아 반드시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여기서 그 본이 어디에 있었던 것인가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흔히 플라톤의 철학을 이데아의 철학이라 할 때, 천상계에 미리 있었던 이데아들 즉 형상(形相)들을 끄집어 올 수밖에 없겠습니다: " '똑같은 상태로 있는 형상'이 있다는 데 동의해야만 하는데, 이것은 생성되지도 소멸되지도 않는 것이며, 자신 속에 다른 것을 다른 곳에서 받아들이지도 않고 또한 자신이 그 어디고 다른 것 속으로 들어가지도 않는 것이며, 그리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다른 식으로 지각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은 '지성에 의한 이해(앎)(사유: noesis )가 그 대상으로 갖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를 플라톤은 존재(ousia)라고 합니다. 문제는 몸과 관련해서 관심을 갖게 되는 우주의 재료겠지요. 이 재료는 아낙시메네스가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불, 흙, 물, 공기의 사원소입니다. 여기에다 에테르를 넣어 오원소를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플라톤은 에테르를 공기의 일종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사원소설이 맞을 것 같습니다. 우주가 생기기 이전부터 이 네 가지 원소가 있었는가가 궁금해집니다. 플라톤은 있긴 있었는데 혼돈된 상태로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를 뭉뚱그려 생성(genesis)라 합니다: "형상과 같은 이름을 갖고 그것과 닮은 둘째 것은 감각에 의해 지각될 수 있고 생성되는 것이며, 언제나 운동하는 것이요, 그리고 어떤 장소(topos)에서 생성되었다가 다시 거기에서 소멸하는 것이면, 감각적 지각(aisthesis)을 동반하는 판단(의견: doxa)에 의해 포착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 두 가지 말고 우주가 생기기 전에 한 가지 더 있었는데 그것은 공간(chora)의 종류라고 합니다: "또한 이와 달리, 셋째 것은 언제나 존재하는 공간의 종류로서, [자기의] 소멸은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생성을 갖는 모든 것에 자리(hedra)를 제공하는 것이지만, 이것 자체는 감각적 지각을 동반하지 않는 '일종의 서출적 추론'에 의해서나 포착될 수 있는 것으로 도무지 믿음(확신)의 대상으로 될 수 없는 것입니다."

2) 최초의 물체들(몸들)의 탄생

아무래도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성 즉 본인 형상을 따라 모상(eikon)인 우주로 만들어지는 혼돈된 재료들일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이 혼돈된 재료 즉 생성은 애초 어떤 상태이며 그것이 어떻게 해서 어떤 방식으로 우주로 만들어지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지요. 플라톤은 이에 대해 상당히 곤혹스러워 하는 흔적을 보이면서, 이를 생성의 어머니라기도 하고, 유모(tithene)라기도 하고, 수용자(hypodoche)라기도 하고, 새김바탕(ekmageion)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눈에 보이지 않고 형태도 없는 종류의 것으로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어떤 점에서는 지극히 당혹스런 방식으로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 것에 관여하는 것으로서 또한 가장 포착하기 힘든 것으로서 말한다면, 우리가 잘못 말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아무튼 이 생성의 어머니는 아직 지성이 개입하지 않은 순수한 물질의 상태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를 플라톤은 '필연(ananke)의 산물들'이라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주의 탄생은 지성(nous)과 필연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결합에 대한 설명이 재미있습니다: "이 우주의 탄생이 실은 필연과 지성의 결합으로 해서 혼성된 결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성은 필연으로 하여금 생성되는 것들의 대부분을 최선의 것을 향해 이끌고 가도록 설득함으로써 필연을 다스리게 되었으니, 이런 식으로 그리고 이에 따라서 필연이 슬기로운 설득에 승복함으로써 태초에 이 우주가 이렇게 구성되었습니다." 그러면 생성의 어머니인 필연이 지성의 설득에 승복함으로써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가 궁금해집니다. 생성의 어머니인 필연은 지성의 설득에 승복하기 전에는 무질서했다는 건데요. 문제는 지성의 설득이 실은 마치 필연 자체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우선 이야기된다는 것입니다. 필연은 평형을 이루지도 못하고 온갖 방향으로 기우뚱거러며 흔들린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운동을 하게 되니 더욱 흔들린다는 것이고요. 그런 흔들리는 운동에 의해 마치 키로써 곡식을 가려내듯이 가장 닮지 않은 것들은 최대한 멀리 떨어지게 하고, 가장 닮은 것들은 같은 곳으로 최대한 모이게 하는데, 바로 이 때문에 이것들은 서로 다른 지역(공간)을 점유하게 되면서 점점 질서를 갖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비례(비율: logos)도 없고 척도(metron)도 없던 상태에서 질서를 갖추게 되고, 그럼으로써 맨 먼저 생겨난 것이 불, 흙, 물, 공기와 같은 물체들(몸들: somata)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지성의 설득이란 바로 필연의 운동이라 할 수밖에 없는데, 그 참 풀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만약 앞서 주 12)가 달린 문장의 이야기를 중시하면 아주 골치아파집니다. 거기에서 생성은 항상 운동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운동에 의해 지성과는 상관 없이 저절로 이렇게 질서를 갖추게 되는 꼴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이 운동은 무질서한 운동이고, 지성에 의해 설득되기 시작해서 하는 운동은 질서 있는 운동이라 해버리면 아주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3) 최초의 물체들은 과연 어떤 질서를 받아들인 것인가?

필연인 생성이 지성의 설득을 받아들여 불, 흙, 물, 공기라는 최초의 물체들이 탄생했는데, 말하자면 지성에 의해 필연이 질서 있는 운동을 하게 되고 그래서 질서를 갖추게 되었는데 도대체 그 질서란 것이 무엇인가라는 것이 문젭니다. 그저 네 가지로 나누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게 되면, 네 가지의 속성들을 제대로 말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풀어내는 과정에서 플라톤 특유의 기가 막힌 또는 너무나 사유 일변도인 면모를 한 눈에 보게 됩니다.

어떤 물체이건 형태(eidos)를 가지고 있고 깊이(bathos)를 가진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 깊이를 가진 형태를 면의 성질을 가진 것이 둘러싸고 있다고 말하면서, 결국은 물체들을 면들의 미묘한 구성으로 풀어냅니다. 면 중에서 특히 삼각형을 중시합니다. 모든 면 중에서 최소의 직선으로 구성된 것이 삼각형이니까 아마도 삼각형을 모든 면의 근원적인 요소로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 중에서도 직각 부등변 삼각형과 이등변 삼각형을 중시합니다. 그러면서 "이것을 우리는 불 및 다른 물체들의 시초(원리: arche)로서 상정하고서, 필연성을 동반하는 그럼직한 설명을 따라 나아갈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로써 이루어지는 기하학적인 물체 구성에 대한 플라톤의 설명은 아주 복잡하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기로 합니다. 다만 그 결론만을 말하면, 흙은 가장 잘 움직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정육면체의 도형을 부여하고, 불에는 가장 잘 움직이는 도형인 삼각뿔 형을 부여하고, 물은 둘 사이 중에서 덜 움직이는 도형(정20면체)을, 공기에는 둘 사이 중에서 더 잘 움직이는 도형을 부여합니다. 그러면서 이 도형들을 아주 미세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면서 불의 요소(stoicheion) 및 씨(sperma)라 부르고, 아울러 물의 요소 및 씨, 공기의 요소 및 씨, 흙의 요소 및 씨라 부릅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너무나 작아 전혀 보이지 않는데, 이것들이 모여 덩어리를 형성하면 우리 눈에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이렇게 사원소들의 도형적인 성격을 정해놓고서 자연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들을 사원소들의 충돌과 해체, 재구성 등으로 아주 복잡하게 '과학적으로' 설명합니다. 예컨대 "물이 불에 의해서 쪼개지거나 혹은 공기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경우에, 하나의 불의 입자와 두 개의 공기의 입자가 구성되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공기의 조각들은 해체된 하나의 입자(부분)에서 두 개의 불의 입자가 생겨날 것입니다."라는 식입니다. 물론 이러한 설명의 배경에는 불의 도형 입자 두 개가 모이면 공기의 도형 입자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기하학적인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아주 재미있죠. 근대 과학자들이 자연을 '기하학으로 된 책'이라는 식의 말을 할 때, 그것이 플라톤의 입장을 얼마나 진하게 반영하고 있는가를 알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4) 플라톤은 과연 이원론자인가?

자, 중요한 것은 이렇듯 플라톤이 필연이 지성에 의해 자진해서 설득당하면서 얻게 된 질서란 바로 이 같은 기하학적인 원리였다는 것이고, 그 기하학적인 원리가 물체들의 이합집산, 충돌, 해체 및 재구성으로 이루어지는 자연 현상의 근본이라는 것이지요. 이를 필연 내지는 생성이 형상을 받아들이는 수용자임을 감안해서 보면, 기하학적인 원리란 바로 형상인 셈입니다. 또 이를 몸 내지는 물체의 본성에 관련해 보면, 플라톤은 몸 내지는 물체와 그 모든 운동 방식을 기하학에 바탕을 둔 지성적인 방식으로 환원해서 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재미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사원소의 요소 및 씨가 되는 미세한 도형 입자들이 과연 물체(또는 몸)냐 아니면 라이프니츠와 같은 정신적인 단자냐 하는 것인데요. 이는 결국 필연인 생성의 유모가 뭐냐 하는 문제로 귀착됩니다. 저 앞에서 구분한 것이 있지요. 지성에 의해 포착되는 바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과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것' 말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 두 가지밖에 없다고 하면, 분명히 필연인 생성의 유모는 후자에 속한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 본 것처럼,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것'은 생성의 유모를 바탕으로 해서 이윽고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생성의 유모를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것'이라 보기는 힘듭니다. 그러니 이 생성의 유모는 형상처럼 그저 흔히 말하듯 정신적인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한데요. 그렇더라도 물체들과 같은 수준의 것 또한 분명히 아니라는 것이지요.

아무튼 우리는 플라톤에 따르면, 대략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쳐 우주가 탄생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우주 이전에 존재, 생성,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데미우르고스와 지성이 있었다. → 2. 데미우르고스가 지성이 생성인 필연을 설득하여 질서를 집어 넣도록 한다. 이때 데미우르고스가 본으로 삼고 있는 것은 존재 즉 형상이다. → 3. 필연(생성)에 형상(존재)가 새겨져 만들어진 것이 사원소들의 씨들이다. → 4. 사원소들의 씨들이 모여 덩어리가 되면 흔히 우리가 보고 말하는 사원소들이다.

이렇게 보면 결국 3단계가 가장 문제인 셈이지요. 사원소의 씨들은 곧 가장 작은 단위의 사원소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들이 기하학적인 도형이라 말입니다. 기하학적인 도형으로 된 것이라고 하면 간단할 것 같은데, 플라톤은 마치 기하학적인 도형으로 된 물질을 자꾸 잘게 쪼개어 들어가면 곧 기하학적인 도형 자체가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단 말이죠. 바로 여기서 지독하게 헷갈리게 되는 것이지요. 왜냐 하면, 그렇게 되면 기하학적인 도형 자체가 모여 흔히 우리가 보는 사원소와 같은 물체들이 되는 것이니까요. 요컨대 플라톤은 최초의 물체들을 기하학적인 도형이라는 정신적인 입자로 보느냐, 아니면 기하학적인 도형을 지닌 물질적 입자로 보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생성(필연)이 도대체 어떤 성질의 것이냐가 가장 문제가 되겠지요. 만약 원소들의 씨가 바로 기하학적인 도형 자체이고, 기하학적인 도형 자체가 물질적이라고 말해 버리면, 플라톤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됩니다. 흔히 말하는 이원론자가 아니게 되는 것이지요. 아무튼 이런 복잡한 문제가 플라톤의 이야기에 매설되어 있다는 점만을 짚고 넘어 갑니다. 이에 관해서는 저의 연구가 거의 일천하기 때문에 그저 문제만 던져 놓고 꽁무니를 빼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에 봅시다.

3. 우주의 몸과 혼

대우주와 소우주의 유비 관계를 앞서 이야기했습니다만, 플라톤은 대우주의 몸과 혼을 말하면서 근원적으로 몸과 혼의 관계가 어떠한가를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1) 완전한 우주의 물체적 형태

플라톤은 데미우르고스가 천구(ouranos)를 만들 때 완전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봅니다. 이는 물론 온 우주의 운행이 완전한 구형체이고, 원 운동을 한다는 것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는 이것을 그것들(불, 흙, 물, 공기) 전부를 써서 완전하여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 하나뿐인 전체로 구성했습니다. 형태도 이것에 적절한 동류의 것을 부여했습니다. 그 자신 살아 있는 것으로서 자신 안에 모든 살아 있는 것을 포용하게 되어 있는 것에는 가능한 모든 형태를 자신 안에 포용하는 형태가 적절할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는 그것을 중심에서 모든 방향으로 끝점들에 대해서 같은 거리를 갖는 구형으로 둥글게 돌려 만들어 냈는데, 이것은 모든 형태 가운데서도 최대의 자기 동일성을 지닌 것입니다." 플라톤은 자기 스스로에게 닮은 것즉 동일성(tauton)을 띤 것을 아주 탁월한 것으로 보고, 자기 스스로를 닮지 않은 것 즉 타자성(thateron)을 열등한 것으로 봅니다. 자기 스스로를 닮기 위해서는 다른 부분들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원은 다른 도형들에 비해 가장 탁월합니다. 사각형의 모서리와 변은 전혀 닮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각형은 원보다 열등합니다. 그러나 사각형을 비롯한 모든 정다각형은 원과 내접해 들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탁월한 것은 열등한 것들을 포용할 수 있는 것이지요. 재미있는 것은 플라톤이 우주의 몸의 구조를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우주가 살아 있는데 왜 눈이 없느냐 하면, 자기 이외의 바깥이 없으니 볼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 귀가 없는냐도 마찬가집니다. 그리고 왜 다리도 발도 없느냐 하는 것은 아주 재미있는데, 그 까닭은 우주를 만들면서 데미우르고스가 회전 운동 외에는 다른 여섯 가지 운동(앞 뒤, 좌우, 위 아래의 운동)을 배제했기 때문이고, 회전 운동에는 발이 전혀 필요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 우주의 몸통을 다스리는 우주의 혼

이렇게 우주를 둥글게 만든 까닭은 그 속에 우주의 혼이 잘 깃들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혼이 깃들지 않으면 지성이 깃들 수 없고 지성이 깃들지 않으면 결코 아름답거나 훌륭한 것일 수 없기 때문에, 우주를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데미우르고스는 혼이 깃들 수 있도록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는 지성을 혼 안에 혼은 몸통 안에 함께 있게 하여 이 우주를 구성하였는데, 이는 자기가 완성해 낸 제작물이 그 본성에 있어서 가능한 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훌륭한 것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의 중심에 혼이 자리잡게 한 다음, 이것이 전체를 통해서 뻗치도록 했으며, 더 나아가서 이 몸통을 혼으로 밖에서 감쌌습니다. …바로 이 모든 것으로 해서 그는 우주를 행복한 신으로 생겨나게 했습니다."

문제는 이 우주의 혼이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선 데미우르고스는 우주의 혼을 우주의 몸통보다 더 먼저 만들었다는 사실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늦게 만들어진 것은 먼저 만들어진 것보다 열등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플라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출생에 있어서도 훌륭함에 있어서도 몸통보다 앞서고 연상인 혼이 몸통의 주인으로, 그리고 다스림을 받는 몸통을 다스리는 것으로 구성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미리 지적할 것은 플라톤이 기본적으로 혼이 몸을 다스린다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혼이 몸을 잘 다스리면 별다른 문제가 없겠는데, 혼이 몸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문제가 발생할 거라는 것을 미리 예측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플라톤에서 혼, 특히 지성의 혼이 몸을 잘 길들이는 것을 아주 중요한 것으로 여깁니다: "필연에 의해 혼이 몸들 속에 심길 때마다, 그리고 이것들(혼과 몸이 결합되어 있는 생물들)의 몸에 있어서 일부가 드나들 때마다 첫째로 감각적 지각이, 둘째로 욕망이 함께 생기는 것은 필연적일 것입니다. 그들이 이것들을 지배하게 될 경우에는, 그들을 올바르게 살 것이나, 이것들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될 경우에는, 올바르지 못하게 살 것입니다."

아무튼 플라톤은 우주의 혼을 세 가지가 혼합된 것으로 봅니다. 그 절차는 아주 복잡합니다. 우선 불가분적이고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존재와 물체들에 있어서 생성되고 가분적인 존재 그리고 양자의 중간에 있는 셋째 종류의 존재를 일단 혼합해 놓습니다. 그리고 동일성과 타자성과 양자의 중간쭘 되는 것을 하나로 혼합해 놓습니다. 그런 다음 혼합된 전자와 혼합된 후자를 함께 섞어서 하나를 만듭니다. 그런 뒤 다시 이 전체를 적절한 부분들만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지막에 적절한 부분들만큼 나누는 작업이 상당히 복잡한 수학적인 계산으로 이루어집니다. 조화 평균(a와 b가 양 끝수일 때 두 수의 조화 평균은 2ab/(a+b))과 산술 평균(a+b/2)의 관계를 이용하고, 2배수와 3배수를 이용합니다. 우주의 몸통을 기하학적인 원리로 창조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주의 혼은 수학적인 원리를 이용하여 만든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엄청나게 많이 만들어진 수의 계열들을 둘로 나누고, 두 길이를 이어 두 개의 원으로 만들어 하나는 바깥을 돌게 만들고, 다른 하나는 그것과 X자 모양이 되도록 해서 안으로 돌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데미우르고스가 바깥쪽 원운동은 동일성의 운동이고, 안쪽 운동은 타자성의 운동이라 불렀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주도권을 동일성과 한결같음을 유지하는 회전 운동(periphora)에 주었다는 것이지요. 애초 뒤섞어 놓은 동일성과 타자성이 이렇게 해서 우주의 혼의 기본 구조가 됩니다. 그런 다음 안쪽으로 도는 운동들에 대해 여러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대충 눈치를 챘겠습니다만, 우주의 혼의 이 운동들이란 천구 전체와 천구 속의 항성들과 행성들의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주 혼의 제작을 말한 다음, "천구의 몸통은 가시적인 것으로서 생겨난 반면에, 그 혼은 비가시적이고 헤아림과 조화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어서,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고 언제나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도, 최선의 존재에 의해서 생겨난 것들 중에서는 최선의 것입니다."라는 말을 덧붙여 혼의 탁월성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4. 혼에 따라 태어나는 인간의 몸 - 혼이 도구인 몸

플라톤은 인간의 몸이라고 해서 무슨 특별히 다른 생물들의 몸과 급격하게 단절될 수 있는 탁월한 것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혼이 물체들(몸들)과의 관계에서 어떠한 처지에 있게 되는가에 따라 인간의 몸도 되고 짐승의 몸도 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윤회설의 깔려 있습니다.

인간의 몸이 만들어지는 것은 생물들 중에서도 신을 가장 공경하는 부류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을 가장 잘 공경하기 위해서는 물론 앞에서 말한 것처럼 혼이 몸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감각적 지각과 욕망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신성한 것을 제대로 알 수가 없고, 제대로 알지 못하니 제대로 공경하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분명코 혼은 듣거나 보거나 어떤 종류의 고통이건 즐거움이건 간에 그럼 모든 흐트러짐으로부터 해방될 때, 즉 혼이 실재를 모색하면서 가능한 한 모든 물리적인 접촉과 연합을 피하면서 몸을 무시하고 가능한 한 최대로 몸으로부터 독립될 때 가장 잘 반성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골치아픈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아니 그냥 처음부터 몸과 동떨어진 순수 혼을 만들어 신들을 공경하게 하면 되지 뭐땜에 이렇게 몸과 혼을 결합시켜 몸을 욕하고 비방하고 '못살게 구느냐'는 것이지요. 아마도 이 부분은 플라톤으로서는 어쨌건 살아 있는 우리 인간들의 현실을 바탕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다 보니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서 생각하게 됩니다. 다만 이는 그의 윤회설과 '몸은 혼이 그 속에 감금되어 죄값을 치르기까지 안전하게 지켜지는 테두리이거나 감옥이다'라는 그의 업보설에 관련지어 생각하면 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렇듯 인간의 몸이 인간의 혼이 을 그렇다면 인간의 몸이 어떻게 해서 신적인 것들을 공경하는 혼을 담을 수 있는가가 궁금해집니다. 이에 대해 플라톤은 아주 재미있게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신들로 언급된 천체들)은 구형인 우주의 형태를 모방하여 둘인 신적인 회전(동일성과 타자성의 회전)을 구형체 속에 묶어 넣었는데, 이 구형체는, 우리가 지금 머리라 일컫는 것으로서, 가장 신적인 것이고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주인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이 지성적인 혼을 담을 수 있는 것은 바로 둥근 머리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플라톤은 다른 짐승들의 머리가 둥글지 않고 뾰족하거나 길죽한 것은 지성적인 혼을 담을 수 없도록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온 몸은 이 머리를 운반하기 위한 이동 수단으로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머리의 얼굴 부분의 기관들은 혼의 모든 선견과 배려를 위한 기관들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신이 시각을 고안해 준 것은 하늘(우주)에 있는 지성의 회전들을 보고서 이것들을 우리 쪽의 사고(dianoia)의 회전들을 위해 우리가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소리나 청각 그리고 말도 같은 목적을 위한 것이라 말합니다.

혼에 대한 몸의 도구성은 아름다움에 대한 파악에서 잘 나타납니다: "아름다운 개별적인 것들에서 출발하여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천국의 사다리를 한 계단 한 계단 오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즉 하나의 아름다운 몸(물체)에서 두 개의 아름다운 몸(물체)으로, 두 개의 아름다운 몸(물체)에서 모든 아름다운 몸(물체)에로 올라가야 한다. 또 물체적인 아름다움에서 제도들의 아름다움으로, 제도들에서 배움에소 그리고 배움 일반에서 아름다움 것 자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지식으로 올라가야 한다. 급기야 무엇이 아름다움인가를 알게 된다." 말하자면, 형상적인 아름다움을 알기 위해서는 차근차근 몸적인 아름다움을 거쳐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이런 까닭에 몸은 혼이 적절히 잘 이용해야 할 도구로 자리매김됩니다. 물론 잘 이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역이용당하는 날이면 타락을 면할 길이 없는 셈이고요. 타락하게 되면 죽어서 지옥(hades)을 돌다가 다시 개나 쥐로 태어나는 것이지요. 왜냐 하면, 그 혼에 맞는 몸을 찾아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물체적인 것의 현전에 의해 오염된 영혼은 가시적인 세계 속으로 질질 끌려 들어가 하데스 또는 비가시적인 것의 공포에 시달리면서 무덤 주위를 배회하게 된다. …사악한 영혼들은 과거에 행한 나쁜 짓 때문에 벌로서 이러한 장소들을 강제로 방황하도록 되어 있다. 그들은 급기야 다시 한번 몸 속에 갇히게 될 때까지 계속 방황한다."

4. 몸은 혼의 기호 내지는 지표다.

이러한 그의 윤회설에 입각해서 보면, 이 땅에 몸을 지니고서 태어나는 것은 전생에 사악한 업보가 있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어떤 몸을 지니는가는 플라톤에게서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식물의 경우에는 욕망의 혼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의한 운동이 결여되어 있고, 그래서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뿌리를 내려 고착해 있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몸의 형태가 곧 혼의 상태를 나타내는 기호 내지는 지표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는 우리 인간의 몸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아직 말하지는 않았는데 플라톤은 혼을 불멸의 것과 사멸하는 것으로 나눕니다: "목마른 자의 혼(마음)은, 그것이 목말라하는 한, 마시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하고자 하지 않고 마시기만을 갈구하며 이를 위해 서두르네. … 그들의 혼 안에는 마시도록 시키는 것이 있는가 하면, 마시는 걸 막는 것이, 즉 그러도록 시키는 것과는 다르면서 이를 제압하는 게 있지 않은가?" 여기에서 이미 두 가지 종류의 혼을 나누는 근거를 들고 있습니다. 이를 플라톤은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신적인 것들의 창조자는 그 자신이 되었지만, 사멸하는 것들의 종족을 만드는 일은 그 자신의 소산물들(천체들)한테 지시했습니다. 이들은 혼의 불사하는 원리를 넘겨받아서는, 다음으로 신을 모방해서 이것을 사멸하는 물질로 빙 두르게 하였으며, 또한 이것을 위한 운반 수단으로 몸 전체를 주고서는 이 몸 속에 또 다른 종류의 혼을, 즉 사멸하는 종류의 것을 추가로 거주케 하였으니, 이것은 그 자신 속에 무섭고 불가피한 감정들(pathemata)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멸하는 종류의 혼은 이기기를 좋아하는 용기와 격정에 관여하는 혼과 음식물에 대해 그리고 몸의 본성 때문에 필요하게 되는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욕구(욕망)를 갖는 부분으로 나뉩니다. 전자는 횡경막을 경계로 해서 머리에 가깝게 하고, 후자는 횡경막에서 배꼽까지에 두게 됩니다. 그리고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불멸의 혼은 "신적인 씨를 품게 될 부분을 모든 방향에서 구형이도록 만든 다음, 골수의 이 부분을 뇌(enkephalos)라고 이름지었다."라고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머리에 있게 됩니다.

몸이 혼의 기호 내지는 지표라는 것은 이런 기본적인 몸 구성 원리뿐만 아니라 그때그때의 몸과 혼의 상태에도 적용됩니다: "실로 내가 보기엔, 몸이 건강하다고 해서, 몸이 자신의 '훌륭함'(훌륭한 상태: arete)에 의해서 혼을 훌륭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훌륭한 혼이 자신의 '훌륭함'에 의해서 몸을 최대한 훌륭한 것이게끔 만들어 주는 것 같으이."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정신에 건강한 몸이 나온다는 식이지요.

이런 몸과 혼의 관계로다 더 재미있는 것은 몸과 혼의 균형 문제입니다. 혼의 상태에 따라 필연적으로 몸의 상태가 마련되는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몸의 상태와 혼의 상태가 어긋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몸의 상태는 실제로 몸 바깥에서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들 중 불과 공기에 의해 내부에서 뜨겁게 되기도 하고 차게 되기도 하며, 흙과 물에 의해 건조해지기도 하고 습하게 되기도 하는데, 몸을 이 운동들에 내맡기게 되면 몸은 그것들에 압도되어 완전히 파멸될 지경에 이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육을 통해 항상 몸의 운동이 안팎에서 잘 조화가 되도록 해야 하고, 방황하는 성질들과 부분들을 질서정연하게 만들어야만 좋은 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몸을 제대로 운동하지 않을 때, 혼과 몸의 균형은 깨지게 됩니다. "혼이 몸보다 더 강해서 너무 격정적일 때는, 혼이 온몸을 뒤흔들어 놓아 안에서부터 질병들로 채워 갑니다. … 다른 한편으로 혼에 비해서 너무 강하고 큰 몸이 왜소하고 허약한 마음과 결합하게 될 때는, 인간들에게는 본성상 두 가지 욕구, 즉 영양에 대한 욕구와 지혜에 대한 욕구가 있기 때문에, 더 우세한 것의 운동들이 지배하게 되어, 자기 쪽 것은 증대시키면서도, 혼의 부분은 둔하고, 더디 배우며 잘 잊게 만듦으로써, 가장 큰 질병인 무지(amathia)를 생기게 합니다. 둘 다에 대한 단 한 가지 구제책은 혼이 몸을 제쳐놓은 채로도 또는 몸이 혼을 제쳐 놓은 채로도 활동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둘이 자신들을 지켜서 균형을 이루어 건강하게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몸의 질병과 무지의 질병은 다같이 혼의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5. 왜 하필이면 몸이 아니고 혼인가?

마지막으로 플라톤이 혼을 중시하는 까닭 중 아주 재미있는 부분이 있어 소개하지 않고 지나가면 아까울 것 같아 이를 소개하려 합니다. (물론 소개하지 않으면 아까운 것이 한 두 개이겠습니까마는.) 소크라테스가 프로타르쿠스라는 인물에게 묻습니다: "프로타르쿠스 자네는 최고도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삶을 살려하는가?" 프로타르쿠스가 대답합니다: "물론입니다." 몇몇 이야기가 이어진 뒤, 소크라테스가 말합니다: "그러나 만약 자네가 이성, 기억, 지식 그리고 올바른 판단이 없다면, 내가 생각건대 자네는 우선 자네가 만끽하고 있는가 어떤가를 필시 모를 것이 아닌가." 다시 프로타르쿠스가 대답합니다: "물론입니다."

여기에서 플라톤은 몸은 결코 지성이나 기억이나 지식의 주체가 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지요. 그러면서 제아무리 몸을 통한 즐거움을 만끽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더욱이 지성적인 혼으니 역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설사 몸의 즐거움을 중시한다손 치더라도 그 중심에는 지성적인 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혼이 몸보다 더 중심이 된다는 것이지요.

6. 플라톤 철학에서의 몸

대충 살펴보았습니다만, 플라톤 철학의 얼개는 엄청나게 복잡하고 뭇 문제에 걸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몸에 관심을 집중시켜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정돈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혼이 몸을 받아 생명을 이루는 것은 전생의 죄값에 의한 것이다.

2) 혼이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자기 동일적인 회전 운동을 하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들을 알지 못하고서는 행복할 수 없다.

3) 혼이 이를 알려 하는데 몸이 방해를 한다. 그러므로 몸을 벗어나야 한다. 그러고 보니 몸은 혼의 감옥이다.

4) 그런데 혼이를 이를 아는 데에 가장 좋은 것은 신적인 우주를 아는 것이다.

5) 신적인 우주를 알기 위해서는 우주의 몸통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혼은 몸을 필요로 한다.(혼은 몸이 없이는 물체적인 것을 볼 수 없는 것으로 된다.) 또 몸은 혼의 도구가 된다.

6) 그러나 진정 신적인 우주란 우주의 혼이다. 그러므로 우주를 바라보면서 우주의 몸통을 거쳐 우주의 혼을 알기 위해서는 몸으로부터 야기되는 감정들을 억제·제거하고 순수한 혼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

7) 현실의 삶에서는 몸의 상태와 혼의 상태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런가 하면, 플라톤에서 몸에 관련된 애매모호한 부분들이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이 정돈될 것 같습니다.

1) 사원소의 씨들인 기하학적 도형은 물질적인가 정신적인가?

2) 사원소의 씨들의 원재료인 필연 혹은 생성의 유모는 가시적인 것인가 비가시적인 것인가, 아니면 제 3의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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