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나뭇잎숨결 2023. 11. 26. 09:01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강 훈

 

 

 

       - 목 차 -

Ⅰ. 퍼거슨(Ferguson)과 올바른 도식

Ⅱ. 유비(analogy) 대 모사(imitation)

Ⅲ. 감각(perception) 대 억견(doxa)

Ⅳ. 억견에 들어가기

Ⅴ. 플라톤의 잘못된 설명

Ⅵ. 정의로움(justice)의 그림자들

Ⅶ. 인식과 억견의 단계들(levels)

 

 

 

    Ⅰ. 퍼거슨(Ferguson)과 올바른 도식

 

이제 플라톤의 빛(Light)의 비유에 관한 퍼거슨 (A.C. Ferguson)의 세 가지 논문(Classical Quarterly, 1921, 1922, 1934)이 출판된지 50년 이상 지났다. 태양, 선분(Line), 그리고 동굴의 비유에 관한 그의 설명은 그 설명의 모든 주된 주장들과 대부분의 세부사항에 있어서, 비록 설득력은 없지만, 나에게는 근본적으로 옳은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이 가끔 모순에 빠진다는 것에 비추어, 이러한 비유의 해석에 대해 많은 학문적 불일치가 있다는 사실은 꽤 많은 해석가들이 주어진 자료를 가지고 가장 일관된 구조를 구성하려할 때 결코 옹호될 수 없고 그리고 철학적으로 어떤 가치도 없는 견해들을 플라톤의 탓으로 돌렸었다라는 사실보다 더 놀랄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먼저 바르게 이해해야 할 것은 도표이다. 퍼거슨과 달리 나는 동굴의 비유를 빛의 유비(analogy)의 부분으로 여기고, 그래서 나의 도표는 두 개의 남다른 특징들, 즉 하나의 수평선과 하나의 수직선을 갖는다. 플라톤이 「국가」편 517b1에서 우리에게 하도록 요구한 것처럼, 앞서 언급된 모든 것에 동굴의 비유를 유비의 연장으로서 덧붙이는 나의 방법이 수평선의 특징이다. 그리고 수직선의 특징은 생성(becoming)의 세계와 존재(being)의 세계 사이를 나누는 선으로부터 가시적인 유비적 설명항(explicans;유비항)과 예지적인 유비적 피설명항(explicandum;피유비항) 사이를 나누는 선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러한 독특한 구분법은 가시적인 대상(the visible)과 억견의 대상(the opinable;doxaston)에 대한 개념들 사이의 뚜렷한 구별을 보증하는 효과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동굴에서의 삶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 즉 억견(opinion)에 지배되는 삶을 위한 도표 상의 위치를 발견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인쇄상의 편의를 위해서 나의 도표는 선분의 비유의 실제 비율들(proportions)을 무시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비율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어렵지 않게 그 실제 비율들이 지켜지고 있는 것처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굴을 나타내는 것(S1, S2)과 그것의 해석(S5, S6)에 내가 첨부한 것들에도 또한 4:6:8:12::6:9:12:18과 같은 합당한 비율들이 서로간에 그리고 원래의 부분들에, 이렇게 양쪽에 주어질 수 있다.

이제 나는 플라톤의 유비의 사용에 관해서 좀 더 이야기 하고(Ⅱ), 도식안에서의 그 고유한 탁월성을 억견에 부여하고(Ⅲ과 Ⅳ), 플라톤의 몇 가지 실수와 그것의 결과적 혼동을 설명하고(Ⅴ), 동굴의 비유를 해석하고(Ⅵ), 그리고 그 전체를 플라톤 인식론의 더 넓은 문맥 안에 배치(Ⅶ)할 것이다.

 

  생성의 세계 존재의 세게
가시적인 것으로의 의견의 대상일 수 있는 것으로의 직관으로 알 수 있는 인식할 수 있는
태양의 유비   507a-509c   태양빛에 드러난 상위의 세계    
 
예) 정의로움의 현상 
예) 나무
선분의 유비
509d-511e
  상들
예:나무의 그림 자 간접적으로 봄
상의 본들
예:나무
직접 봄
  형상들에 관한 가설적 진리들:제일원리 없이 형상들에관한 범주적 진리들 :제일 원리를 가지고
상상
eikasia
믿음
pistia
억견
doxa
추론적 사고
dianoia
순수 사유
noesis 
동굴의 유비
514a-534e
동굴의 불빛 위와 동일 위와 동일 예)
정의로움의 상의 그림자들
예)
정의로움의 상들
위와 동일 위와 동일
사물들의 상(images)의 그림자들 상들
예)3-D
사물들의 본들
    S1   S2   S3   S4    S5    S6     S7    S8
가시적인 예지적인

    Ⅱ. 유비(analogy) 대 모사(imitation)

 

우리쪽에서 그리고 이따금 플라톤 쪽에서, 때때로 서로 얽혀진 채 자주 나타나는, 몇 가지 해석상의 혼동과 불일치는 한 가지 것을 다른 것에 비유하는 두 가지 방법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 간단히 그것들은 (1)유비적인 유사함(analogical likeness)-여기에서 x y를 의미한다(x La y)-과 (2)복사본/원형의 유사함(copy/original likeness) 혹은 모사(imitation)-여기에서 x y는 비교된다(x Lc y)-이다. 유비(analogy)는 모두 y에 관한 것이고 x에 관한 것이 전혀 아니지만, 비교(comparison)는 동등하게 x와 y에 관한 것이다.

유사함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유비가 된다. 가장 기본적인 유비는 숫적 유비인데, 예를 들어 3대 6은 4대 8과 마찬가지이고 이것은 3과 6의 관계가 4와 8의 관계, 즉 ‘~의 절반’의 관계임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단지 동일성(identity)만을 사용했다. 우리가 숫자로 표현되지 않는 용어들과 관계들을 도입하고 나서야 유사함이 시작된다. 즉 건강과 신체의 관계는 덕과 영혼의 관계와 마찬가지이다. 혹은 그 관계의 동일성을 상세히 설명하자면, 건강이 신체의 완성인 것처럼 덕은 영혼의 완성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관계의 동일성뿐만 아니라 파생된 유사함을 가지고 있다. 즉 건강과 덕은 각각이 어떤 것의 완성이라는 점에서 유비적으로 유사하고, 시각과 이성(reason)은 각각이 어떤 것의 최상의 능력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리고 빛과 진리는 각각이 어떤 최상의 능력의 실천을 위한 필요 조건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등등... 그러나 명백한 이유때문에 두 개의 숫자들은 각각이 어떤 숫자의 절반이라는 점에서 유사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유비의 일반적인 형식은, La가 유비적 유사함일 떄, R(a,b,c,d,...) La R(a´,b´,c´,d´,...) 이다. 예를 들어 눈이 태양으로부터 발산되는  안에서 생성(becoming)을 깨닫는 것처럼, 정신은 선(the good)으로부터 발산되는 진리 안에서 존재를 깨닫는다. 비록 류개념(genus)을 그것의 적절한 종개념(specification)으로 바꾸어 놓는 것, 예를 들어 ‘깨닫는다(apprehends)’를 좌측에는 ‘본다(sees)’로 그리고 우측에는 ‘이해한다(understands)’로 바꾸어 놓는 것이 편리한 것으로 자주 알려지긴 하지만, 고딕체로 표시된 것처럼, 양쪽 측면에서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동일시된다. 또한 유비적인 유사함을 두 개의 완결된 관계적인 구조들 안의 상응하는 항목들 사이뿐만 아니라 그러한 두 개의 완결된 관계적인 구조들 사이에서도 성립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리하다. 그러나 우리의 예에서 이것은 생성과 존재 사이에서 성립되지는 않는다라는 것이 주목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이들(생성과 존재)은 그 안에 두 개의 유사한 구조들이 담겨있는 두 개의 완전히 닮지 않은 세계들이기 때문이다.

유비들은 the a,of a´, the a of b'등등과 같은 형식, 예를 들어 ‘진리의 빛(the light of truth)’, ‘영혼의 건강(the health of the soul)’같은 형식의 은유들을 자주 일으키고, 그리고 아마도 모든 은유는 몇몇 유비 안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 플라톤은 자신의 유비를 표현하기 위해서 그 유비 자신으로부터 파생된 은유들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즉 정신은 자신의 대상들을 본다고 자주 말해지고(「국가」517c1), 진리는 빛이란 말로 말해지고, 무지는 어둠이란 말로 말해진다(518a5-b4). 그러나 이러한 용법들은 그 사용법 자체의 독립적인 지위를 얻기 위해 그것들의 은유들을 통해서 성장해온 고대의 입장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다. 약간 다른 경우가 517a9인데, 그곳에서 동굴의 그림자들과 상들(images)이 의미하는 것은 단지 은유적으로만 정의로움(justice)의 그림자들과 상들이라고 인정된다.

플라톤의 유비의 기능은 설명적인데, 즉 덜 알려진 지성(intellect)과 그 대상들의 본성을 더욱 잘 알려진 지성과 그것의 대상들로 대체해서 설명한다. 여기에서 그의 관심은 오직 지적인 것에만 한정되어 있다(여기에서 지적인 것은 인식(knowledge)뿐만 아니라 의견(opinion)도 포함한다). 어떤 점에서도 그 어떤 가시적인 것도 상징화되지 않는다. 즉 가시적인 것과 지적인 것 사이에는 어떤 대조도 없고, 가시적인 것은 어디에서도 지적인 것의 불충분한 관계로서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이것이 바로 시각적인 것이 애매성 없이 상징화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이유이다. ~인 것처럼 ~하다(as -, so -), 혹은 La의 관계는 때때로 대칭적인 것으로 여겨지는데, 특히 수로 표시되는 예들에 있어서 그렇다. 그러나 여기에서 플라톤의 유비와 같은 설명적인 유비는 비대칭적이고, 그래서 나는 La를 다음처럼, 즉 왼쪽에는 유비적 설명항(explicans)이 오른쪽에는 유비적 피설명항(explicandum)이 위치한다고 생각한다.

모사의 유사함은 약간의 주석을 필요로 한다. 이 유사함은 <파이돈>편 이후로 형상들에 대한 패러다임 이론(paradigmatic theory)의 발생적인 유비에 있어서의 류적인(generic) 관계로서 잘 알려져 왔다. 즉 심미아스의 초상화가 심미아스 자신의 모사본인 것처럼, 동일한 것들(equalities)은 동일성 자체(Equality itself)의 모사본들인데, 여기에서 모사본은 원형을 닮았지만 그것에는 미치지 못한다(<파에드로스>73e9-74e4).

그래서 플라톤이 우리에게 하나의 것을 다른 것과 닮게 하라고 말할때, 그는 유비적인 유사함을 의미했을 것이고, 그리고 그는 모사본의 유사함을 의미했을 것이고, 그리고 그는 때때로 유비적 유사함과 모사본적 유사함 모두를 어떻게든 의미하려 했던 것 같다. 가장 나쁜 실수는 동굴을 상위 세계의 모사본이 아니라 상위 세계의 유사물로 여기는 것이다. 만약 내가 옳다면, (S1+2) Lc (S3+4)이고, 그리고 이 전체는 (S5+6) Lc (S7+8)의 유사물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의견과 인식의 관계는 모사본과 원형의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국가>510a9-10). 나는 이것에 관해서는 Ⅳ절에서 더 말할 것이다.

 

    Ⅲ. 감각(perception) 대 억견(doxa)

 

태양의 비유에서 플라톤이 시각과 시각의 대상들에 대해서 말할때, 그는 억견과 억견의 대상들은 물론이고 감각과 감각의 대상들을 포함하려고 의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낮은 선분이 감각 일반에 관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리고 플라톤이 때때로 이 세계를 감각의 대상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그리고 가끔은 억견의 대상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특징지운다 하더라도, 이 비유의 문맥상 감각될 수 있는 것들의 계층이 의견의 대상들(opinables;doxasta)의 계층과 동일시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리 신중하지 못한 플라톤 자신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여전히 유효하다.

「국가」편 523-5에서 플라톤은 그 예들이 단지 시각에 의해서만 직접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그러한 개념들(예 손가락)과 그 예들이 대립자들(opposites)이 서로 혼동되어 감각에 전해지는 그러한 개념들(즉 크고 작은, 두껍고 얇은, 거칠고 부드러운, 희고 검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一)과 다(多) 그리고 수 일반)을 구별한다. 혼동을 일으키고 생각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종류의 것들이고, 이것들을 연구함으로써 정신은 실재하는 것을 보도록 방향을 바꾸게 된다.

이제 억견의 대상들로부터 감각적 대상들을 구별하려고 할때, 그것들이 자신들의 대립자들과 함께 감각에 나타난다고 플라톤이 말하는 바로 그런 것들을 억견의 대상들로 인정하는 것은 특히 그릇된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매우 유사한 항목들의 계층이, 억견이란 말이 거기에서 사용된 것처럼, 실질적으로 억견에 결정적인 것으로 「국가」편 476-9에서 이미 표면에 나타났었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부르는 것들은 단지 어떤 한 방식에서만 아름답고(즉, 어떤 조건 하에서), 또한 어떤 다른 방식에서만 추하다. 그리고 옳은/정당한, 신성한/신성하지 않은, 두배/절반, 큰/작은, 가벼운/무거운, 등등에도 동일한 상황이 적용된다. 그러한 모든 것들은 애매하고(epamphoterizein), 그리고 그것들은 존재와 비존재 사이를 방황하고 있기 때문에 억견의 적당한 대상들이다.

실질적으로 동일한 대조가 플라톤에게 있어서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즉 <알키비아데스(111bff)>에서부터 <에우티프로(7b-d)>와 <파에드로스(263a-c)>와 <정치가(285dff)>까지, 주로 논의된 개념들과 논의되지 않은 개념들 사이의 대조로서 되풀이 된다. 여기에서 가장 관련이 있는 것은 <정치가>편의 구절인데, 그 구절에서는 (1)‘감각적인 상들(sensible images)’을 가지는 개념들, 즉 단지 감각에 의해서만 그 본성이 파악될 수 있는 그러한 감각적인 예들을 구성하는 개념들과 (2)그렇지는 않고 단지 말에 의한 변증술(dialectic)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정치적 수완과 같은, 가장 중요한 개념들을 구분한다. 분명히 식물들과 동물들과 가공물들과 ‘가시적인 영역’인 S4에 있는 모든 것들은 전자의 계층에 속하고, 반면에 <국가>편의 중심적인 주제, 즉 정의로움(justice)은 후자의 계층사이에 있게 될 것이다.

이제 나무에서부터 정의로운 행위에 이르는 모든 개개의 것, 즉 짧게 말하면 생성의 세계안의 모든 것들이 감각과 억견 양쪽 모두의 대상이라고 주장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플라톤이 생각했던 방식은 아니다. 즉 <국가>편의 476-9와 523-5에서는 S4의 내용물들과 손가락들을 일반적으로 억견의 대상들의 계층으로부터 제외시켰을 것이고, <정치가>편의 285 ff에서는 올바른 것과 올바르지 않은 것, 그리고 모든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형체가 없는 것들’의 예들을 감각될 수 있는 것들의 계층으로부터 제외시켰을 것이다. 만약 <정치가>편의 이론이 <국가>편의 이론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면, 우리는 진리 자체에 호소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소크라테스를 볼 수 있고 그리고 그가 정의롭다면, 그러면 우리는 정의로운 것을 볼 수 있다 라고 하는 논증은 모호한 것이다. 즉 보여지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신체이고, 정의로운 것은 그의 보이지 않는 영혼이다. 그리고 동일한 상황이 영혼의 모든 성질들에도 성립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떤 올바른 행위를 볼 수는 있지만, 그 행위의 보여질 수 있는 성질들이 그 행위의 정의로움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 행위가 세 사람에 의해 행해지고 있고 짐을 넘겨주는 일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 행위가 정의롭다라는 것을 볼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것이 저것보다 크다는 것을 보거나 느낄 수는 있지만, 이것이 크다, 즉 이런 종류의 큰 것이다라는 것을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런 후자 형태의 판단은, 직접적인 비교가 행해지지 않는 방식으로, 감각뿐만 아니라 기억과 계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극단은 S4에서 발견되는 종류의 감각될 수 있는 실체들(substances)인데, 이것들은 대립자들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애매하지 않고 따라서 억견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또 다른 극단은 정의로움의 예들과 같은 억견의 대상들(애매한 대립자들)인데, 억견의 대상들은 우리가 이것들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매우 동떨어져서만 감각에 의존하는 그러한 대상들이고(왜냐하면 감각없이는 우리는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당연히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이고, 그의 정의로움에 대해서는 더더구나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것들은 비감각적인 것으로 온당하게 분류될 수 있다. 그리고 양 극단 사이에 어느 정도는 감각될 수 있고(<국가>523-5) 또한 억견의 대상이기도 한(<국가>476-9) 거대한 무리의 개별자들(particulars)이 있는데, 예를 들어 흰/검은, 거친/부드러운, 큰/작은, 하나/다수 등등이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1)플라톤은 그의 비유에서 억견의 대상들을 위해 S3+4와는 꽤 다른 자리를 필요로 하고, 비록 S3+4가 감각될 수 있는 것 일반의 계층과 동일시된다 하더라도 그는 그 자리를 필요로 했을 것이고, 그리고 (2)이러한 자리는 감각될 수 있는 억견의 대상들과 감각될 수 없는 억견의 대상들 모두를 포함해야 할 것이다. 이 자리, 즉 S5+6이 알맞은 곳에 확고히 자리를 잡으면, 동굴의 내부는 의미해야 할 중요한 무엇인가를 가지게 된다.

 

    Ⅳ. 억견에 들어가기

 

억견은 태양의 비유에 있는 구절(<국가>508c4-d9)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그곳에서 태양빛 아래의 사물들에 향해져 있는 분명한 시선은 ‘밤의 빛’ 아래의 사물들에 향해져 있는 어둠 그리고 거의 눈이 먼 시선과 대조된다. 따라서 이러한 후자의 상태는, 어둠과 섞여 있고 생성·소멸하는 것에 그 주의력이 향해져 있는 영혼의 억견 상태를 상징한다(d7). 여기에서는 밤의 빛이 달과 별들이라고 말해지지도 않고(그리고 실제로 퍼거슨은 밤의 빛을 인공적인 빛이라고 여긴다), 밤의 빛 아래에서 보이는 사물들이 태양빛 아래에서 보이는 것들과 동일하다고 말해지지도 않는다. 그래도 역시 어떤 독자들은, 동일한 대낮의 사물들이 달빛 아래에서 보여지기 때문에, 태양빛 아래의 세계를 밤의 세계와 동일한 것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편 476-9에서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의 대상들이 인식(knowledge)의 대상들과 다르다면, 억견에 대한 불충분한 유비일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이 이러한 유비를 가지고 억견을 더이상 다루지 않고, 나중에 동굴의 비유에서 그 유비를 더욱 풍요롭고 융통성 있는 유비(즉, 전체의 그림자 세계안에서 실재 태양의 불충분한 모사로서의 기능을 하는 가짜 태양을 수용할 수 있는 유비)로 대체시키고 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동굴의 비유의 이야기를 말한 후에, 플라톤은 우리에게 ‘이전에 말해졌던 것에 다음과 같은 상(像;eikōn) 전체를 덧붙이라고’ 요구하는데(<국가>517a8-b6), 즉,

(i)가시적인 장소를 동굴에 비유하고, 동굴안의 불빛을 태양의 힘에 비유하는 것, 그리고

(ii)위쪽을 향한 여행과 위에 있는 것들에 대한 시각을 예지적인 장소로 향하는 영혼의 오름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제 (i)에서의 유사함은 설명적인 유비의 유사함일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플라톤은 그가 태양과 관련지어 선(the good)에 대해서 말하는 그런 방식으로 지하의 불과 관련지어 태양에 관해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는 아마 자신이 태양빛에 드러난 사물들과 관련지어서 형상들에 관해 말하는 그런 방식으로 동굴의 불빛과 관련지어서 태양빛에 드러난 세계에 관해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유인 즉, 만약 동굴이 억견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는 태양빛에 드러난 장엄하게 분명한 세계를 불길하게 혼동된 억견의 세계와 동일시 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단계에서, 어떤 나쁜 것을 어떤 좋은 것을 의미하는 것과 동일시 하는 것은 거의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동굴을 상위 원형 세계의 모사본이나 혹은 불충분한 관계로 여기는 것은 매우 일리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동굴이 상위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는 억견의 대상들이 인식의 대상들과 맺고 있는 관계와 완벽하게 유사한 상태(비록 원래의 대체된 밤의 빛과 태양빛의 관계는 그렇지 않지만)에 있기 때문이다. 즉, 플라톤이 몇 페이지 전에 말했던 것처럼(510a9-10), 억견의 대상들과 인식의 대상들의 관계는 모사본과 원형의 관계와 같다. 우리는 또한 (S1+2 Lc 3+4) La (S5+6 Lc S7+8)를 제안할 수 있다.

(ii)에서의 유사함은 (i)에서의 유사함, 즉 유비와는 꽤 다르게 표현되고, 실제로 완전히 다르다. 거의 논쟁의 여지없이, (S1+2에서 S3+4로의 이동) La (S5+6에서 S7+8로의 이동)이다.

S5와 S6에 대한 나의 위치 선정과 설명은 517d8-9에 의해 확실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플라톤은 신적인 것의 관조로부터 인간적인 것의 관찰에로 이동한 사람을 법정과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정의로움의 그림자들 혹은 그 그림자들의 원래의 상들’(좀 엉성한 표현이지만 ‘정의로움의 상들 혹은 그것들의 그림자들’보다는 더 적절한 표현)에 관해서 논쟁하고 있는 자라고 말한다. 따라서 (S1 Lc S2) La (S5 Lc S6)이다.1) 그러나 플라톤은 여기에서 내가 이미 언급했었던 계획을 사용하고 있고, 그 계획을 일으키는 유비로부터 이끌어진 은유안에서 S5와 S6을 서술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동굴의 불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전히 물어보아야만 하는 것처럼, 우리는 또한 S5와 S6의 은유적 표현인 동상(statue)과 그림자 뒤에 숨겨진 것이 무엇인지를 여전히 물어보아야만 한다. 나는 몇 가지 제안을 나중에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먼저 나는 몇 가지 문제에 직면해야만 한다.

 

    Ⅴ. 플라톤의 잘못된 설명

 

원본을 상세하게 정독하면, 동굴의 비유에 대해 아무런 결점도 없이 해석하는 그 어떤 해석도 우리는 기대할 수 없다. 우리가 지향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해석은 다른 해석들보다 더 훌륭한 철학적 의미를 산출하면서, 남아있는 예외들을 보다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그러한 해석이다. 533e7 ff는 나의 설명에 큰 타격을 주는 구절이다. 즉,

(1)첫 번째 부분을 순수사유(지식;epistēmē)라 부르고, 두 번째 부분은 추론적 사고(dianoia)로, 세 번째 부분은 믿음(확신;pistis)으로, 그리고 네 번째 부분은 상상(eikasia)이라 부르자.

(2)뒤의 두 부분을 합하여 억견(의견;doxa)이라 부르고, 앞의 두 부분은 인식(noēsis)이라고 부르자.

(3)억견은 생성에 관한 것이고, 인식은 존재에 관한 것이다.

(4)존재와 생성의 관계는 인식과 억견의 관계와 같다.

(5)인식과 억견의 관계는 순수사유와 믿음의 관계 그리고 추론적 사고와 상상의 관계와 같다.

(6)억견의 대상(doxaston)과 인식의 대상(noēton)을 더 구분하지는 말자.

한 두 가지를 변경한다면, 이러한 지침들은 나의 도표상에서 설명될 수 있다. 즉, S3+4의 상태는 억견이라 불려지는 것이고, 생성되는 모든 것을 그 대상으로 갖는다. 그리고 S7+8의 상태는 사유가 되고, S8의 상태는 지식이 된다. 지금 말한 것은 위의 (1)에서 (3)까지를 다루는 것이다. (4)와 (5)는 이제 다음과 같은 것을 제시한다. 즉,

  R(존재, 생성) La R(S7+8, S3+4) La R(S8, S4) La R(S7, S3).

만약 S-의 단계들을 정신의 상태들로 여긴다면, 그리고 그 대상들이 진리에 관여하는 만큼 그 상태들도 명확성에 관여한다는 511e2-4의 규칙을 따른다면, R은 (적절한 면에 있어서) 보다 우세한 관계가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La는 여기에서 더이상 설명적인(explanatory) 유비를 나타내지는 않고 오히려 순전히 양적인(quantitative) 유비를 나타낼 것이다. 왜 상황이 이러한지는 곧 분명하게 될 것이다.

보다 수준 높은 교육에 관한 강연의 거의 끝부분인 이 구절은 509-10 안에 있는 유비에 해당하는 진술, 즉 사실상 하나의 사소한 변경을 가지고 있는 (1)안의 바로 그 용어들로부터 거의 반복되지 않는다. 즉, 이 구절은 명백한 유비인 R(S3, S4) La R(S7, S8)을 생략하고 있다. 그러나 매우 놀랍게도, 이 구절은 한번도 아래쪽의 선분을 시각(seeing) 혹은 가시적인 것에 연결시키지 않는다. 대신에 이 구절은 부적절하게 억견을 위쪽에 있는 인식(knowledge)과 비교하면서 단호하게 아래쪽의 선분을 억견과 동일시하고, 그래서 2대 2의 설명적인 유비로 신중하게 시작했던 것을 네 가지 용어의 진행으로 변경시킨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S3+4는 실제로 유비적으로 분할하는 선을 가로질러 넘어서 나의 S5+6부분을 차지했고, 그리고 어떤 유비적 설명항(explicans)도 남겨놓지 않아서 결국 어떤 설명적인 유비도 남겨놓지 않으면서 그것 자체에 의해 유비적 피설명항(explicandum)이 되었다. 그 결과 발생한 양적인 유비들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더 나쁘게도 인식(knowledge)의 한 종류인 추론적 사고(dianoia)의 명료함은, 만약 우리가 509d6-8의 비율들을 개입시킨다면, 이제는 억견(doxa)의 한 종류인 믿음(pistis)의 명료함임이 밝혀진다. 아랫쪽의 선이 이제 유비적 피설명항(explicandum) 그 자체라는 것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이유 때문에 플라톤이 억견의 대상들을 구분하길 꺼린다는 사실(534a5-8)에 의해서 더 분명히 입증된다. 그러나 어째서 이전으로 소급하여 509-10을 간단히 언급하지 않는가? 분명히 그 이유는 그곳에서 구분된 것은 억견의 대상들이 아니라 가시적인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정확하게 암시한 것처럼, 억견의 대상들을 구분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일 것이고, 그리고 그는 어디에서도 그렇게 하자고 제안하지 않았다. 나는 다소 신중한 내 자신의 제안을 짤막하게 하고자 한다.

나는 플라톤의 이 불운한 책략의 출처가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즉 509-11이후로 그는 억견에 관해서는 매우 많이 말했었으나, 단지 인식에 관해서만 말하기 위해 구성된 선분의 비유에서는 억견에 해당하는 어떤 적당한 준비도 하지 않았었다. 그는 죄수들의 두 가지 시각적인 혹은 정신적인 상태들에 어떤 용어들을 적용하지도 않았고 그 상태들이 의미하는 억견의 두 단계에 어떤 용어들을 적용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동굴의 비유를 선분의 비유에 연결시키는 것과 관련된 어떤 간결한 방법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노골적으로 가시적인 것과 억견의 대상을 동일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설명도 없이, 오래된 용어인 상상(eikasia)과 믿음(pistis)을 새로운 주제에 적절하게 다시 적용하면서, 억견의 대상 대신에 가시적인 것을 사용한다.

이 구절의 모순을 인정하게 되면, 509-11의 일관성을 옹호하는 것은 사소한 일에 구애되어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533e7 ff에서 당황하게 될 때까지는 모든 일이 만족스럽다고 생각하고 싶다. 첫째로, 511e5에서 선분의 비유는 여전히 명백하게 설명적인 유비이다. d6 ff에서의 네 가지 상태들은 상태의 진보(progression)로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유비적으로 배열된 것(an arranged analogon)이다. 즉, 그 유비는 진술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509d9와 그 부분들의 비율들은 단호하게 ‘더 분명한(S4, S3) La 더 분명한(S8, S7)’을 제안한다. 둘째로, 추론적 사고가 억견과 영혼(nous)사이에 있다라는 진술(511d4-5)은, 나의 도표가 막연히 나타내는 것처럼, 사실이고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술은 우리에게 아랫쪽의 선을 억견과 동일시하도록 요구하지도 않고 드러내놓고 유혹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어쨌든 그것은 우리가 거절해야만 할 유혹이다. 왜냐하면 아랫쪽의 선은 인식을 상징하는 것이고, 우리는 억견을 인식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는데 거의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째로, 진리와 관련해볼 때, 모사본과 원형의 관계가 억견의 대상과 인식될 수 있는 것(gnōston, 510a9)의 관계와 같다는 진술은 선의 두 아랫부분들 사이의 진리의 차이와 478-9에서 그렇게 힘들게 논한 억견과 인식 사이의 명료함의 차이를 그저 동일시하는 것이다. 퍼거슨이 주목한 것처럼, 억견의 대상/인식의 대상이란 용어는 플라톤에게 있어서 그 밖의 곳에서는 단지 그 구절에서만 발견되는 것이고, 그리고 거기에서도 단지 네 번만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그 용어를 다시 지칭하는 분명한 언급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지배적인 비율은 이미 익숙한 인식/억견의 명료함의 차이로부터 선분의 비유에 개입되고, 원형의 영역인 S4와 복사본의 영역인 S3사이의 진리의 차이에 적용되며, 따라서 그 영역들에 부합하는 상태들 사이의 명료함의 차이에 적용되고, 그래서 마침내 S8과 S7사이의 명료함의 차이에 적용된다.

결국 이 비율은 보는 것(seeing)과 아는 것(knowing)간의 명료함의 차이에 적절하지 못하게 적용될 수 있다. 이 비율이 <티마이오스>편의 문맥에서 적절한 비교라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국가>편에서의 철학적인 논쟁은 아니고, 플라톤은 실제로 여기에서 그 비율을 적용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 비율이 원래 도출된 인식/억견의 대조에 그 비율을 다시 적용하기 전에, 가시적인 것이 534에서 억견의 대상으로 변형되고 그 때문에 인식될 수 있는 원형의 순수한 복사본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

 

    Ⅵ. 정의로움(justice)의 그림자들

 

선에 관한 인식과 선에 관한 참된 관념들-후자는 여기에서 추론적 사고에 포함된다-에 더불어, 그것에 관한 잘못된 관념들도 있다. 실제로 선에 관해 선(the good)이 힘이거나 쾌락이거나 혹은 지식이라는 그러한 대부분의 관념들은 잘못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움, 정의로움 등등의 본성에 관해서도 잘못된 관념들이 있다. 이러한 잘못된 관념들은 소피스트들과 정치가들의 특징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믿음들은 훌륭하거나 올바르거나 혹은 아름다운 특수한 것들(particular things)에 대한 것이고, 그 믿음들은 소피스트들과 정치가들 그리고 철학자들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서도 주장된다. 특수한 것들에 관한 이러한 믿음들중의 어떤 것들은 옳고 어떤 것들은 틀렸지만, 그 믿음들은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여전히 억견으로 간주된다.

비록 정의로움의 본성에 관한 잘못된 믿음들이, 478-9에서 제기된 억견을 위한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그래서 지식이 아닌 것(무지;agnoia)의 부분들처럼 보이지만, 그것들 또한 억견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X를 선한 것으로 가정하면, X가 선(the good)이라는 판단은 완전하게 (선한) 것에 관한 것이 될 것이고 따라서 인식(knowledge)이 되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선하고 다른 어떤 면에서는 선하지 않은 소크라테스를 선하다고 하는 판단은 적절한 억견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쾌락이 선이라는 판단은 완전하게는 선하지 않은 것이 될 것이고 따라서 지식이 아닌 것(agnoia)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무식함(apaideusia)은 바로 이런 종류의 지식이 아닌 것(agnoia)처럼 보일 것이고, 따라서 동굴의 비유의 주된 착각들인 선에 관한 이런 잘못된 판단들은, 어떤 용어에 포함되더라도, 대략 S5+6에 적당하게 자리가 정해질 수 있다. 그래서 억견의 세계는, 가장 부패하고 해로운 참주의 사상들로부터 철학자들(철학적으로 사색하지는 않고 있는)의 가장 훌륭하고 가장 친절한 사상들에 이르는 사상의 모든 영역을 포함한다.

그 중에서도 동굴의 비유에서 명예를 차지하려는 경쟁자들은 ‘마치 권력이 위대한 선이기라도 하듯이 권력을 차지하려고 경쟁하는’(520d1) 정치가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잘못된 선의 빛 안에서 행동한다. 그리고 선에 관해서 잘못된 생각들을 하는 것이 무식함(apaideusia)의 절정이기 때문에, 동굴의 삶은 잘못된 혹은 가장된 선을 상징하는 어떤 것을 제외하고는 그 조건(514a2)을 거의 상징할 수 없다. 그래서 잘못되거나 가장된 선은 단지 동굴의 횃불, 즉 가짜 태양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횃불이 상징하는 가짜 선은, 플라톤이 선 자체(the good itself)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은 ‘어떤 다른 선도 알 수 없고, 비록 그가 그 선의 어떤 상을 파악한다 하더라도 억견에 의해서 그것을 파악한 것이지 인식에 의해서 파악한 것은 아니다’(534b8ff)라고 말할때, 그가 말하는 그 상(image;eikōn)일 것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암시들외에 동굴의 비유의 풍부한 세부사항들을 거의 해석하지 않는다. 그리고 비록 그가 정의로움의 상들과 정의로움의 상들의 그림자들(S2와 S1에 대응하는 S6과 S5)을 구분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그 은유의 이면을 조사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동굴밖의 장황한 절차들이 잇따르게 되는 감금으로부터의 해방과 그림자들로부터 인형들과 횃불에로의 전환은 교육의 초기 단계들과 네 가지 수학적 대상들(mathēmata)의 적용을 의미하지만, 어떤 세부적인 해당사항들도 제시되지 않는다. 아마도 플라톤은 자신이 다른 곳에서 충분한 안내를 이미 제공했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러한 과업을 우리에게 남겨놓은 것 같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특정한 대목은 바로 <국가>편의 그렇게 많은 주제들을 미리 논하고 있는 <고르기아스>편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는 정의로움과 관련된 두 단계들에 대한 플라톤의 구분(465c1-3)을 손쉽게 발견한다. 즉 한 단계는 정부의 두 권력기관인 입법부와 사법부의 적절한 기능들인데, 그 기능들은(<국가>편이 제안한 것처럼) 정의로움의 상들(images)을 가지고 권력을 행사하도록 고안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단계는 첫번째 기능들을 모조한 궤변과 수사학이고, 따라서 이것들은 정의로움의 상들의 상들에 관여할 것이다.

이제 입법부와 사법부의 작업은 적어도 선과 정의로움의 참된 본성을 보았던 사람, 즉 인형들에 의해서 상징되는 정의로움의 상들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또한 그 상들의 빛 안에서 교화되지 않은 사람들이 그 상들을 보는 것이 잘못된 선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런 사람에 의해서 수행될 것이다. 문제되는 상들은 개별적인 법률들과 사법적인 결정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 상들은 기껏해야, 개별적인 법들과 사법적인 결정들이 그 본성에 의해 정당할 수 있는 그 정도까지만, 단지 제한적으로 정당할 것이며, 그리고 또한 부당함을 희생시켜 가면서만 제한적으로 정당할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이상 국가에 있어서조차 수호자들은 가장 나쁜 일만을 할 수 있는데, 이 나쁜 일이 생성의 세계 특히 인간의 본성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국가들의 교화되지 않은 지도자들은 그 일을 가장 나쁘게 혹은 적어도 불완전하게 보이게 할 것이다.

의회와 법정의 정의를 이 세계나 어떤 다른 세계에 있는 최선의 것이라고 여기고, 말하자면 잘못된 선의 빛안에서 국가를 가능한 한 풍요롭고 강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믿는 그들 중 더 나은 자는 (플라톤의 훌륭한 은유를 빌리자면) 그들의 빛에 따라 최선을 다하고 철학자들이 하듯이 정의의 동일한 상들에 관하여 맞게 혹은 틀리게 판단한다(왜냐하면 잘못된 원리에 의해 만들어진 판단이 여전히 참일 수 있기 때문에).

교화되지 않은 사람들 중 가장 나쁜 자는, 쾌락이라는 미끼로 마치 그것이 어떤 굉장한 가치라도 있는듯이 어리석은 자들을 속이고 그러는 동안에 단지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자기들은 관심도 없는 공공의 선에 대해 염려하는 척한다(<고르기아스> 464d1-3,502e5-8). 이처럼 정의의 상들의 그림자들(S5)을 구성하는 것이 이런 사람들의 법률과 사법상의 행위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S6을 철학자에게 남겨두면서, 모든 교화되지 않은 자들, 심지어 그들 중 더 나은 자들까지도 S5에 해당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구분이 어떻게 만들어지든지 간에, 그림자를 이론화하는 이론가들, 즉 고르기아스, 폴루스, 그리고 칼리클레스에게 우리가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 <고르기아스>편은 동굴의 그림자같은 삶이 의미하는 것에 대한 연장된 설명으로서 보여질 수 있다.

사물들의 상들의 그림자들을 소개하는 자들은 시인들인데, 그들은 사물들의 실재적인 좋음이나 나쁨에 대한 상들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물들이 무지한 대중들에게 좋거나 혹은 나쁘게 나타나는 가에 대한 상들을 말로 그려낸다(<국가>602b1-4). 즉 그들은 덕의 상들을 모사하며(600e5), 그들이 만들어낸 것들은 진리로부터 두 번째(혹은 그리스인들이 세었던 것처럼 세번째) 떨어져 있다.

 

    Ⅶ. 인식과 억견의 단계들(levels)

 

동굴의 비유의 억견은 <국가>편 476-9에서 정의된 억견과 동일한 것이고, 전문적인 개념이다. 인식/믿음의 구분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터무니 없는 결론을 가지기 때문에, 플라톤이 이 구분을 가장 나쁜 것으로 여겼음에 틀림없었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플라톤이 지금 여기에서 가지고 있는 생각을 완전히 오해하는 것이다. 그는 인식(epistēmē)과 억견의 일상적(colloquial) 의미들을 파악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있다. 즉 그는 자신이 안 것을 철학자의 정신상태와 억견을 사랑하는 자(philodoxos), 즉 전형적인 동굴의 거주자의 정신상태 사이의 중요한 인식론적 구분으로 만들고 있고(<국가>480a6), 그는 이러한 일상적 용어들을 제한된 문맥에서 사용하기 위한 대조적인 용어들로서 빌려온다. 그 밖의 다른 곳에서는 그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그리고 플라톤의 일반적 인식론의 폭넓은 체계에서 이 대조를 관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나는 인식과 믿음을 세 종류의 명제와 비교하여(vis-à-vis) 나타내는 표를 제시한다. 결과로 발생하는 여섯겹의 배열은 나의 직접적인 목적에 도움을 줄 것이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어떤 더 나아간 구분들을 수용하도록 확장될 수도 있다. 내가 제시한 모든 증거는 인식론적인 구절들, 혹은 보다 일반적으로는 사변적인 구절들에서 취해진 것이고, 그리고 그 증거는 단순히 우연적인 사용은 아니다.

 

                         인식과 믿음의 단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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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믿음의 대상들            인식(knowledge)의 단계들     믿음(belief)의 단계들

=알려지거나 믿어진

명제들의 주어들(subje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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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된 개념들의 형상들        K1                           B1

예)‘정의(justice)는 ~이다’    철학자들에게 있어서만         변증술을 거치지 않은

 

억견의 대상들(Doxasta)        K2                           B2

논쟁의 여지가 있는 개별적인   K1을 전제로 한               K1이 없는

것들 예)‘이것은 정의롭다’     철학자들에게 있어서만

 

감각의 대상들(Aisteta).        K3                           B3

확실한 개별적인 것들         개인적인 면식(acquitance)      소문    

예)‘이것은 나무다’           즉, 직접적인 정보              즉, 간접적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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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대조]

<국가>편 476-9과 동굴의 비유에서의 대조는 K1과 K2의 사선상의 대조이다. 철학자와 억견을 사랑하는 자가 서로 다른 정신 세계에 산다고 할때, 각각의 관심의 주된 대상이 다를 것이라고 기대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실로부터 어떤 것에 대한 인식을 비철학자에게 돌리거나 혹은 인식능력을 형상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 돌리는 것이 결코 적절하지 못하다라고 결론짓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일 것이다.

 

[억견의 대상들에 대한 인식]

만약 수호자들이 신들이나 수호자들 자신들로부터 참된 억견을 선물로 받게 될(<메논> 99b11-100a2) 죄수들 중 가장 훌륭한 자들보다 더 적절한 지도자들이라면, K2는 확실히 요구된다. 그리고 실제로 플라톤은 수호자들이 ‘훌륭하고 정의롭고 선한 것에 대한 진리를 보았기 때문에, 상들(images)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들의 내용을 알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국가>520c4-6 그리고 506a4-7 참조).

방금 말한 내용은 수호자들이 억견을 갖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가?  만약 억견이 억견을 사랑하는 자들, 즉 단지 다수의 개별자들만을 숙고하고 감탄할 뿐이지 형상들을 깨닫지는 못하는 사람들의 장기간의 우매한 상태를 의미한다면(467b4-8,c2-7,479e1-480a12), 수호자들은 억견을 갖지 않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확실하게 억견의 대상들을 고찰할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고, 그리고 아무리 짧다 하더라도 어떤 그러한 고찰이 억견으로 간주된다면(478d5-9,479d7-9), 본인이 앞서 암시했던 것처럼, K1/B2 대조의 문맥에서는 수호자들이 매우 자주 억견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K2/B2 대조의 문맥에서는, 그들이 인식할때 logos와 더불어 참된 억견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사소한 의미를 제외하고는, 그들은 억견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들에 관해 자신들이 들은 많은 것을 그들이 믿는다고 가정하면, 그들은 B3단계에서 많은 억견을 가지게 될 것이다.

 

[형상들에 관한 억견(B1)]

나는 바로 전 절에서, 좋음(goodness)과 정의의 본성에 관한 잘못된 믿음들이 <국가>편 476-9의 다소 전문적인 분류에 있어서 엄밀히 말하면 억견보다는 무지(ignorance;agnoia)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이미 제안했었다. 그러나 보다 일상적이고 느슨한 의미에 있어서 억견은 무지를 포함했을 것이고, 이것은 플라톤이 <법률>편 863c1ff에서 따르는 용법이다. 거기에서 그는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에서의 결점이 악행의 세 가지 원인들 중의 하나이며, 두 개의 비이성적인 부분들이 나머지 원인들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이 결점은 ‘최선의 것에 관한 억견’(864a1,b7)을 포함하고 있는 일종의 무지이다.

 

억견이 인간의 영혼들 안에서 지배적이고 영혼들을 인도하는 한, 어떤 방식으로든지 국가나 개인은 이런 선이 생겨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따라서 비록 때때로 실수를 한다 하더라도, 이 선에 따라 행해지는 모든 행동과 이 선의 규칙에 복종해야 하는 인간의 모든 역할은 인간 생활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정의롭고 또한 가장 유익한 것으로 간주되어야만 하네.(<법률> 864a1-6)

 

여기에서 플라톤은 그가 <국가>편에서 마지못해 인정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 즉 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 선에 관한 이성의 오인에 의해서 여전히 길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의 죄는, 그가 무지할 뿐만 아니라 독선적이고 세력이 있다면 그 죄가 더욱 심각하고 엄청나겠지만, 여전히 부정한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부정은 비이성적인 것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다.

 

[K3 대 B3]

이 대조는 모든 대조중 가장 평범한 것이다. 이 대조는 생성의 세계 내부의 확실한 개념들 사이에서 가장 기본적인 단계로 작용하고, 이것은 플라톤이 인정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강조하는 대조이다(<메논>98b1-5). 이 길이 라리사(Larisa)로 가는 길이며(<메논>97a9-b7), 이 방법이 피리를 만드는 방법이며(<국가>601d10-e5), 이 사람이 폭행죄를 저질렀다(<테아에테투스>201b7-c2)는 사실을 어떤 사람은 진정으로 믿는 반면에, 다른 사람은 그 사실을 안다. 각각의 경우에서 아는 사람은 그러한 주장에 어떤 적합한 정당성(justification;logos), 즉 ‘나는 그곳에 간 적이 있다’, ‘나는 피리를 연주한다’, ‘나는 그가 폭행하는 것을 보았다’와 같은 말-수학자나 철학자가 줄만한 종류의 logos들(<국가>534b8-c5)이 아니라 각각의 주제에 보다 적절한-을 줄 수 있다. 인식이 어떤 적절한 종류의 로고스와 참된 억견이라는 것은 플라톤이 실제로 작용한다고 생각했던 가설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 특징(distinction)의 본성은 여기에서는 논쟁되지 않고, 단지 그러한 특징이 있다는 사실만이 논쟁된다.

우리는 적어도 실천적 기술의 단계에서 <고르기아스>편의 기술(technē)과 경험(empeiria)의 대립(465a2-7)을, 기술들 자체에 적용시키기 보다는 기술들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주로 적용시키면서, K3/B3 범위에 또한 위치시킬 수 있다(<국가>533b1-6 참고). 즉 피리를 만드는 어떤 사람들은 그 기술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단지 경험적인 이해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국가>533b1-6). 그리고 어느 누구도 요리법에 대한 기술을 가지지 않아서, 요리학은 아직까지는 없다. 그러나 플라톤은 요리학이 생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고 있다(<고르기아스>500e4-501c5). 그리고 그는 <고르기아스>편에서는 다만 경험적이라고 보았던 수사학을 <파에드로스>편에서는 실제로 있다고 분명히 밝힌다.

일반 사람들과 비교하면, 수호자들은 K3에서는 매우 부족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식은 변증술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리고 그 인식은 생활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것(<국가>539e2-5)을 제외하고는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확실한 개념들의 형상들이 차지하는 인식론적인 위상에 관해 다소 의문이 있는데, 왜냐하면 예를 들어 손가락이 무엇인지를 알고 따라서 그 형상을 아는 것은 감각(<국가>523c11-d6, 524d9-e2)과 명시적인 정의(<정치가>285d10-286a4)를 넘어서는 것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 ‘억견에 의해서 감각(perception)을 통해’ 그 상들이 파악되고 공간에서 생성·소멸하는(<티마이오스>52a4-7) 그러한 형상들은 <티마이오스>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런 형상들의 존재가 참된 믿음과 더불어 인식의 존재에 의해 전제되긴 하지만(<티마이오스>51d3-2a4), 플라톤은 그것들이 어떻게 알려지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 형상들은 <국가>편에서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나타날 뿐이며, 그래서 나는 나의 표에 그것들을 포함시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