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역사철학- 아틀란티스 신화를 중심으로 -
백 경 옥(대구가톨릭대)
[한글 요약]
플라톤의 아틀란티스 신화는 대체로 두 가지 관점으로 읽혀지고 있다. 그 하나는 아틀란티스의 이야기가 사실의 보고로서 간주되어야 한다는 입장으로서, 고대 문명에 관한 단서가 오늘날까지도 보고되고 있다고 보는 견지를 바탕으로 한다. 그 둘은 플라톤의 아틀란티스 테마 취급은 해석되어져야 할 신화라고 믿는 입장이다.
이 논문에서는 이 두 가지의 신화 읽기 방식은 비록 그 함의는 다르지만, 플라톤이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한 문학적 창작 속에서 역사의 교훈을 찾고자 했다는 점에서 상호연관성이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러한 관점은 플라톤의 말년의 저작들인 <티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의 배경을 고찰하면 더욱 설득력을 가진다.
두 종류의 신화 읽기를 통하여 플라톤은 철학적 신화인 아틀란티스 이야기에서 이성과 지성 그리고 역사와 경험의 교훈을 바탕으로 하는 이상국가 건설에 관한 비젼을 제시하고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주제분야 : 플라톤의 역사철학, 이상국가론
주 제 어 : 아틀란티스 신화, 소프로쉬네, 알레고리, 이성,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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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59년에서 351년 사이에 플라톤은 당시 유행하던 가공의 대화 형식으로 쓴 <티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에서 소크라테스와 제자 티마이오스, 그리고 크리티아스 간의 철학적 논의를 통하여 당대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국가상을 보여주고자 아틀란티스 섬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 후 고도로 발전한 문화의 종말에 관한 이야기인 아틀란티스 신화는 오랫동안 플라톤의 시적 환상에서 비롯된 이상국가에 관한 논의라고만 여겨져 왔다.
19세기 후반 근대 고고학의 눈부신 발전과 더불어 청동기 문명 유적지에 대한 발굴 성과가 발표되면서, 아틀란티스 신화를 비롯하여 여타 고대 그리스 신화들의 역사적 개연성을 입증해 줄 증거들이 제시됨에 따라 아틀란티스 신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행해지게 되었다. 1909년 프로스트는 아틀란티스 신화에 관한 플라톤의 진술이 국가론적 논의가 아니며, 수 년 전 발견된 미노아 키클라데스 문화의 종말과 관련되어 있다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2천 년 이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온 플라톤의 아틀란티스 신화가 미노아 문화의 모사(模寫)라는 가설을 제시하면서 신화들의 현실적 본질을 해명하려 했다. 이 같은 프로스트의 혁신적인 가설은 당시의 학계에서는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발발할 시점에 이르러 그리스 고고학자 스피리돈 마리나토스가 산토리니 섬(청동기 시대에는 티라로 불리웠다)을 발굴하면서 그때까지 웃음거리로 간주되었던 프로스트의 가설이 현실감 있고 신빙성 있는 근거를 가지고 있음을 입증해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후 수많은 학자들이 아틀란티스 신화에 관하여 유래 없이 많은 저서와 논문을 내놓게 되어 서양지성사에서 그 어떤 이슈도 이 만한 주의를 끌어본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서 아틀란티스 신화는 사실의 보고로서 오늘날까지 그 단서가 발견되어지고 있다고 보는 방향과 해석되어져야 하는 신화로 보는 방향으로 읽혀지고 있다.
플라톤은 아틀란티스 신화를 전하면서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강조하지만, 신화의 기능과 효용성에 대한 플라톤의 사상을 전제로 볼 때 많은 근대학자들은 아틀란티스 신화가 플라톤이 만들어낸 강력한 문학적 창작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플라톤과 그의 동시대 그리스인들은 관습적으로 신화를 정치적 풍자의 출발점으로서의 이야기 틀을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플라톤은 신화는 발전될 수 있는 것으로서 고대 전설을 수집하고 체계화하여 꾸밀 수 있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화는 플라톤에게 있어서 자신의 사상을 드러내는 유용한 도구로써 그가 신화를 통하여 당대 내지 근접한 시대의 정치적·역사적 현실을 비유적으로 전해주고 있다는 점을 추론해 낼 수 있다. 실제로 아틀란티스 신화에 묘사된 한 문명의 성장과 팽창, 그리고 두 큰 군사력의 대결 및 쇠퇴의 과정은 플라톤이 살고 있던 시대에서 멀지 않은 과거에 아테네인들이 경험했었던 역사적 사건과 청동기 그리스인들이 경험했던 역사적 사건에 유사하게 드러나 있다.
플라톤은 <국가>를 저술할 때만 하드라도 역사에 대한 관심을 별로 나타내 보이지 않았으나, <티마이오스>·<크리티아스>·<법률>에는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에 대한 관심이 강화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만년의 플라톤의 지적 경향이 구체적이며 감각적인 현실로 기울어졌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그리하여 플라톤은 크리티아스의 입을 빌려 구체적인 사건을 통하여 얻는 증거를 바탕으로 이상국가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의도는 이상국가는 이미 초기 아테네에서 실현되었다는 전제하에 펼쳐진다(Crit. 110C, 111E, 112B-D).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바람직한 국가의 상을 찾고자 했던 플라톤으로서는 역사는 좋은 교과서였다. 그에게 역사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젊은 시절 플라톤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었을 법한 몇 가지 중대한 역사적 사건을 상기해야 한다. 그가 12세였을 때 아테네와 식민지인 시실리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였고, 군복무가 시작되었을 때인 18세 때인 기원전 409년에는 그는 아마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전하여 스파르타와 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명문가의 자제로서 사회 현실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을 플라톤의 경우 이 전쟁들에 관한 많은 사실들을 전해듣거나 직접 경험하였을 것이다. 특히 그가 청년기에 접어들었던 기원전 404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아테네의 패배로 막을 내렸을 때 느꼈을 실망과 씁쓸함 등에 관한 기억과 전후의 아테네에서 일어났던 정치적 혼란-30인의 참주정 수립과 민주정 인사에 대한 정치적 박해, 그리고 스승 소크라테스에 대한 정치보복 재판 등등-을 목도하면서 바람직한 국가상에 관한 상념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만년의 그의 저술들에서 '구체적 현실', 다시 말하면 감각적 세계 내지 정치적 사건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그의 경험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이유에서 아틀란티스 신화를 시실리 원정과 아테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스파르타의 비유담으로서 읽는 관점과 다른 한편으로 아틀란티스 신화를 청동기 그리스 역사-미노아 문명과 아테네, 트로이 문명과 미케네-에 대한 의사사화로서 읽는 관점은, 공통적으로 플라톤의 문학적 창작에서 역사에 대한 철학적 메시지를 찾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상호연관이 있는 읽기 방식이라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비유담으로서의 아틀란티스 신화와 의사 사화로서의 아틀란티스 신화에서 공통적으로 추론해 낼 수 있는 플라톤의 역사에 대한 철학적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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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은 그의 대화편 <티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에서 사이스로 여행을 갔던 솔론이 이집트 신관으로부터 들은 것을 몇 대를 거친 후에 전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고전기 그리스 시대로부터 훨씬 오래 전에 존재했었다고 여겨지는 초기 아테네와 아틀란티스 섬의 충돌, 그리고 쇠망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 두 대화편에 언급된 아틀란티스 섬의 전설에 얽힌 이야기는 '훌륭한 나라'(to kalliston kai ariston genos)의 실례를 찾고자 하던 소크라테스, 티마이오스, 크리티아스, 헤르모크라테스 등의 대화에서 시작된다.
두 대화편의 대화에 나타난 신화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즉 그들이 살고 있던 시점에서 9000년 전의 아테네는 '훌륭한 나라'로서 모든 규정과 제도가 잘 갖추어진 곳이었고 사람들은 일체의 훌륭함(arete)을 갖추고 있었다. 한편 당시의 아틀란티스 섬은 고도로 발달한 문명국가로서 리비아와 아시아를 합친 것보다 컸던,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으로 부른다는 해협 앞에 위치한 엄청난 세력이었다. 법률을 지키며 신을 경외하는 군왕들로 결성된 강대하고 놀라운 세력을 가지고 있던 이 섬은, 왕들에게서 신적인 요소가 약해지고 그들이 부당한 야망과 세력을 추구함에 따라 점차 다른 많은 섬과 대륙의 일부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점차 해협 안쪽의 이집트에 이르기까지의 리비아와 티레니아에 이르기까지의 유럽을 지배하였다. 이 모든 지역이 하나로 결집되어 아테네와 이집트, 해협 안쪽의 모든 지역을 단번에 예속시키려 했으나 아테네가 용기(arete)와 강력함으로 이들을 물리쳤다. 그러나 그 뒤에 몇 차례의 엄청난 지진과 홍수가 일어나고, 고난의 일주야가 지나는 사이에, 아테네의 모든 전사(戰士)들은 한꺼번에 땅 밑으로 빠져 들어가 버렸고, 아틀란티스 섬도 마찬가지로 바다 아래로 가라앉아 사라져 버렸다.
이 신화에서 플라톤이 본보기로 삼고자 하였던 나라는 초기 아테네였으나, 신화의 내용이 상세하고 몽상적인 색채를 띠고 있기 때문에 아틀란티스 섬에 대한 관심이 훨씬 더 큰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플라톤이 절정에 달한 세력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그 침략을 방어한 세력, 그리고 양자가 같은 운명에 처해졌다는 내용의 청동기 전설을 소재로 하여 이상국가론을 제시한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가 <티마이오스> 등을 저술할 무렵의 그리스의 정세를 이해하여야 한다.
당시의 아테네는 자국의 제국적 팽창 정책으로 인하여 발발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게 패한 이후 쇠퇴기에 접해 있었고, 플라톤은 개인적으로 세 차례에 걸친 시실리 방문에서 이상국가 건설을 위한 시도가 수포로 돌아간 쓰라린 경험을 한 직후이기도 하였다. 기원전 4세기 중반 무렵 스파르타의 지배권이 붕괴된 이후 그리스 세계는 가히 무정부 상태라 할 만한 상황에 놓여 있었는데, 당시 서부 지역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행사하였던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니시우스는 시실리와 이탈리아의 그리스인들을 군사독재정으로 다스렸다. 그러나 일찍부터 정치적 자유를 누려왔던 그리스인들로서는 민족적 정치적 통일체를 선호하지 않았으므로 디오니시우스가 기원전 367년에 사망하자 그의 제국은 곧 분열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태는 그리스적인 정신 속에 깊이 내재하고 있는 분열의 경향에서 일차적으로 기인하지만,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가장 완벽하고 진보적인 형태인 민주정이 시민적 규율과 전체 이익을 우선시하는 국가의 존재에 필수적인 조건들과 그리스인들의 개인주의적 특징과 조화시킬 수 없다는 데서 기인하였던 것이다.
소년기에 들었을 법한 아테네의 시실리 원정 실패에 관한 이야기에서 역사적 교훈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몸소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니시우스를 찾아가서 이상국가 수립을 위한 정치적 조언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던 플라톤으로서는 무정부상태에 빠진 그리스인들에게, 더 정확하게는 시라쿠사의 참주에게 경고성 풍자화를 제시함으로써 사태를 적절히 조절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미 팔순을 바라보는 연로한 플라톤은 풍부한 인생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체적 현실'을 들어서 이상국가 건설에 대한 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를 하였던 것이다. 그는 청동기 전설을 과거의 사건에 변형 적용시켜서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 자신의 시대의 급박한 위험을 지적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의사 사가( 似史家)라기보다는 정치 풍자가로서 시실리 원정 실패라는 몸서리치는 기억과 자신의 시라쿠사에서의 경험을 되살려서 아틀란티스 신화를 통하여 비유함으로써 아테네인들에게 역사의 교훈을 거울삼아 바람직한 정부의 형태를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의도를 드러내는 데 아틀란티스 신화는 좋은 파라데이그마가 되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플라톤은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니시우스와 그의 후계자 디오니시우스 2세의 초청을 받아 세 차례에 걸쳐 시실리 섬의 시라쿠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비록 방문한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지만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강대했던 시라쿠사의 놀라운 병기와 가장 긴 순환 성벽 등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기원전 4세기 중반 아테네에서 결코 볼 수 없었던 뛰어난 기술과 각종의 건조물을 세우는 데 사용되었을 막대한 시라쿠사의 부와 위용에 압도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그 때 받은 인상이 비록 변형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아틀란티스 섬에 대한 묘사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시라쿠사 시가(市街)와 아틀란티스 시가가 유사하다는 사실 못지 않게 중요한 사실은 신화 속의 국제 관계와 시실리 원정기의 동지중해의 국제 관계가 유사하다는 점이다. 신화에서는 아틀란티스 섬을 통치했던 10명의 왕들이 우호적 관계 속에서 법과 제도를 존중하며 부와 번영을 누렸으나 끝내는 그들에게서 신적인 요소가 약해지면서 해외로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쓰게 되었고 급기야는 초기 아테네에게 저지당하였다고 당시의 국제 관계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페르샤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을 기반으로 하여 제국으로 변신하여 마치 페르샤가 그러했던 것처럼 힘으로 남의 땅을 짓밟는 오만을 저지르는 일련의 국제 관계를 모사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투키디데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시라쿠사의 장군 헤르모크라테스가 아테네를 페르샤 전쟁 후에 새로운 페르샤가 되었으며, 패배한 참주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비난하였다. 특히 시실리 원정 시에 아테네인들이 보여준 과도한 야망은 결국 페리클레스 사후 아테네의 분열과 쇠퇴를 초래한 원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아테네 역사가 아틀란티스 신화의 모델이 되고 있음을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아테네는 전성기의 아틀란티스처럼 많은 도시를 장악하였으나 결국 스파르타에 의해 그 지배권을 빼앗김으로써, 마치 아틀란티스가 초기 아테네에게 패하고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 사라진 것 같은 재앙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틀란티스는 현실으리 아테네라는 것이다.
시실리 원정 실패라는 역사적 사건을 비유적으로 드러내어 플라톤이 강조하고자 했던 점은 과도함과 오만함에 대한 경고였다. 아틀란티스 신화에 나타나 있듯이 플라톤은 신적 요소의 감소, 혹은 휴브리즈를 저지른다는 것은 곧 통치자가 신에 대한 경건심이 미약해져서 법률을 제대로 지키지 않음으로써 초래되는 현상으로 보았으며, 이런 현상으로 인하여 다른 나라를 침탈하게 되고 그 결과 자국의 재앙을 초래하게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절제되지 않은 권력욕과 야망이 초래한 쇠망에 관한 역사적 교훈은 비단 시실리 원정 사건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원전 4세기에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그리스 세계를 제국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하였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승자 스타르타 또한 플라톤에게는 아틀란티스 비유담의 소재가 될 수 있었다. 그가 23세였던 기원전 404년에 스파르타는 27년에 걸쳐 치루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자가 되어 전 그리스를 지배하게 되었고, 그 시기에 관한 끔찍한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스파르타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아테네의 적대국으로 여겼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본받아야 하는 관습과 특성을 가진 가장 이상적인 국제(國制)를 가진 국가로 간주하고 이상국가의 모범을 그 정부 형태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는 스파르타인들의 절제, 인내, 용기, 훈련, 군사 기술, 교육 등을 찬양하는가 하면, 그리스의 지배자가 된 이후의 스파르타가 지나친 야망과 편협한 교육 프로그램과 도덕적·지적 가치에 대하여 무관심한 것 등에 관하여 비판하였다. 실제로 스파르타는 플라톤이 살아있을 동안 급격히 쇠퇴하였으므로 아틀란티스 테마로서 스파르타를 비판하고 역사의 교훈을 찾고자 하는 데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었다.
아틀란티스는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 사라졌으나 아테네는 비록 전성기에는 결코 미치지는 못하였지만 아직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플라톤은 아테네가 아틀란티스처럼 지상에서 사라져 잊혀진 국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바람직한 제도와 추구되어야 할 이상이 필요하다고 보고, 소위 "차선(次善)"의 국가 형태인 초기 아테네의 제도 second best(timia deuteros), 즉 혼합 정체를 취한다면 역사기의 아테네는 결코 쇠퇴하지 않으리라고 보았다.
그런데 혼합 정체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는 중용 metriotes 혹은 절제 sophrosyne의 미덕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중용은 통치자의 권위와 백성의 주권 사이의 합법적인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헌법인 혼합헌법을 수용함으로써 지켜질 수 있다. 플라톤은 중용과 절제의 이론 위에 만들어진 왕정과 민주정의 두 모태 헌법을 가장 좋은 헌법을 보았으며, 중용과 절제 없이 그 어떤 미덕도 뿌리내릴 수 없으며 이성적인 선택과 그 선택을 유지하는 힘을 가질 수 없으며 법 nomos를 규제할 수 없게 된다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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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은 아틀란티스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강조하였지만, 20세기 이전까지 거의 모든 학자들은 아틀란티스 신화를 플라톤의 시적 알레고리로 읽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에게해의 청동기 역사에 대한 지식이 급격히 증가하게 되자 아틀란티스 신화를 의사 사화( 似史話)로 읽는 관점이 대두하게 되었다.
1939년 크레테 섬을 발굴했던 마리나토스는 크레테 섬이 오랜 세월 동안 바다 밑에 가라앉았다고 전해졌던 아틀란티스 섬일지 모른다고 보았고, 1969년 그리스의 지진학자 갈라노폴루스는 마리나토스 교수가 에게해의 화산섬 산토리니에서 아크로티리 유적을 발굴하면서 보여준 놀라운 수준의 문명의 흔적을 보고 그곳이 아틀란티스 신화의 무대라고 주장하였다. 아틀란티스에 관한 연구자들 중 특별히 돋보이는 학자는 루체인데, 그는 아틀란티스에 대한 플라톤의 기록에 역사적 사실이나 고고학적 발견과 일치되는 진술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다.
에게해 지역은 동지중해 화산 지대로서 선사 시대 이후 수 차례의 화산 폭발과 해일·지진 등으로 인한 재앙이 휩쓸고 갔던 곳이다. 아틀란티스에 관한 기록은 오늘날까지의 고고학적 성과를 토대로 볼 때 지중해 동부 지역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집트인들도 알고 있었던 역사 시대의 대재난은 산토리니 섬의 화산 폭발이다. 화산 폭발의 시점은 대개 기원전 1628년 가을 아니면 1525-1500년 무렵으로 추정되는데 엄청난 힘을 가진 쇳물보다 뜨겁게 이글거리는 마그마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들끓는 가스로 만들어 날려버렸다. 화산의 폭발력은 수소폭탄 150개의 위력에 맞먹는 것으로서 그 여파로 둥근 형태의 섬은 무너져내려 상당 부분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검정구름은 키클라데스 제도에서 터키의 서부, 로도스 섬에서 북아프리카 동부 지역에 어둠을 드리우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화산재는 그린랜드의 빙하 지역까지 날아갔다. 하늘에서 끝없이 쏟아지는 화산재가 당시 가장 고도의 발전을 이루었다고 평가되는 문명의 중심지 중 하나인 산토리니 섬을 뒤덮어버렸다. 자연 재해의 습격으로 인하여 무너질 때까지 산토리니를 비롯하여 에게해 일대에 산재되어 있던 미노아 문명은 그 우수함을 자랑하였다. 다층 가옥을 건축할 수 있는 능력, 상수 공급 및 지하의 배수 시설, 벽화의 엄선된 모티프와 파스텔 톤의 채색이 표현된 미적 감수성 등은 골고루 갖춘 문화적 수준을 가지고 있었고 산토리니는 그 중심에 있었다.
고고학자들이 산토리니의 작은 마을인 아크로티리를 현재까지 대략 십분의 일을 발굴하고 평가하였는데, 도시 전체에서 화산재를 비롯한 각종의 퇴적물을 제거하려면 상당한 세월-최소한 300년-이 소요된다고 한다. 그러나 완전히 발굴이 되지 않는다고 하드라도 이 유적지의 문화적 수준과 함몰의 형태 등을 비추어 볼 때 아틀란티스는 에게해에 가라앉은 세계였다는 이론에 대해 의구심을 표현하는 사람들의 의심을 해소해 주기에 부족하지 않다는 것이 중론(衆論)이다.
고고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볼 때 산토리니 섬에서의 화산 폭발과 그로 인한 문명의 파괴에 대한 기억이 900 여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왜곡되거나 과장되어 플라톤의 문학적 창작의 소재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시적 진실은 비록 왜곡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 사실을 바탕에 두고 있다고 볼 때 그의 "절대적으로 진리를 말한다"는 언급은 이중의 알레고리로 해석할 수 있다.
한편 청동기 그리스 역사에서 일주일 사이에 사라진 섬 아틀란티스를 연상시키는 고고학적 자취를 더듬을 수 있는 곳은 산토리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1990년 미케네 지역의 티린스를 발굴한 장거는 기원전 1200년대의 홍수와 지진으로 매몰된 티린스 유적에서 플라톤의 아틀란티스 신화를 연상시키는 자취를 발견하였다.
주지하듯이 아틀란티스 신화의 기본 구도는 초기 그리스 문명과 아틀란티스라 불리우는 강력한 해외 세력간에 발생한 전쟁과 그 후일담이다. 청동기 그리스사에서 해외 원정과 문명의 붕괴 소실이라는 현상을 실증적으로 설명해 줄 비교적 설득력 있는 사건은 오랫동안 전설로 치부되어 왔던 트로이 전쟁일 것이다. 하인리히 슐리만 이후 많은 고고학자들이 트로이를 발굴하면서 호머가 전해주었던 미케네인들과 트로이인들의 전쟁과 관련된 일련의 이야기들을 상당 부분 역사적으로 규명해 내었다. 이런 작업을 통하여 이집트 신관이 솔론에게 전한 사라진 섬 아틀란티스에 관한 이야기는 실은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가 와전·윤색된 것이라는 가설이 도출되는데, 발굴 결과를 근거로 추론해 보면 미케네는 초기 아테네이며 트로이는 아틀란티스가 된다.
미케네는 기원전 1400-1200년 사이에 절정에 달했던 청동기의 그리스 제일 가는 왕국으로서 문자의 사용, 관료제도 및 잘 조직된 사회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왕성한 해외 무역 활동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그리고 해외 원정을 단행하였고 그 후 자연 재앙으로 인하여 붕괴되었다. 고고학적·지질학적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1200년대 미케네 지역의 티린스는 지진을 동반한 홍수로 크게 파괴되었는데, 이 같은 상황은 신화에서(Tim 25D) 땅 밑으로 가라앉아 사라진 아테네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한편 미케네의 적수였던 트로이는 아틀란티스가 되는 셈인데, 이러한 가정에 뒤따르는 몇 가지 문제점과 근거를 개괄해 보면 의사 사화로서의 아틀란티스 신화의 성격이 보다 선명해진다. 아틀란티스가 트로이를 모사했다고 가정할 때 무엇보다 먼저 전자는 섬인데 비해 후자가 반도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의 관계에 대해 의아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집트 상형 부호에서 섬 island라는 용어는 종종 단순히 사막 지역이나 해안 나일 강 너머에 있는 외국 땅을 표시할 때 널리 사용되는 용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양자의 관계는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또한 "아시아와 리비아를 합한 것보다 큰"(24E)이라 표현도 땅 넓이 자체보다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보는 견해가 있음을 감안한다면 트로이의 영토가 반드시 문자 그대로 만큼 광활하지 않다고 하드라도 아틀란티스로 모사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아틀란티스 군대의 함대 수 1200(Critias 119 B)에 가까운 1185척을 능가한다는 트로이 원정군 함대 수(Iliad 22. 147-156)의 예에서나, 황소를 죽여서 그 피를 기둥에 뿌리고 사지는 불에 굽는 예식(Critias 119E-120A)을 치렀던 아틀란티스 귀족들의 풍습과 유사한 예식이 트로이에서도 치루어졌음을 시사하는 장소가 트로이 6시의 고고학적 기록에서 발견되는 점 등을 통하여 이집트인들이 트로이 전쟁을 아틀란티스로 모사하였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아틀란티스 신화가 이집트 판 트로이 전쟁일 것이라는 가설에 대한 반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트로이 시가지에 대한 발굴 성과가 증가하면 할수록 동지중해의 그 어떤 중요한 발굴 유적지보다 트로이는 아틀란티스와 유사한 점이 많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왜곡되고 윤색된 산토리니 섬의 함몰과 문명의 소실에 관한 전설, 혹은 트로이 전쟁과 미케네 문명의 파괴에 관한 전설에서 플라톤은 냉혹하고 비이성적이며 억제할 수 없는 자연의 큰 힘을 느꼈을 것이다. 초기 아테네는 제도가 우수했고 지도자들도 결코 아틀란티스의 지도자들처럼 오만하거나 신에 대한 경건심을 망각하지 않았던 이상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진과 홍수로 사라지게 되었다는 신화적 표현에서 그는 비이성적 자연의 큰 힘 앞에 무력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아마도 그는 인간은 신의 손에 의하여 움직여지며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인형에 불과한 존재라는 사실을 간파하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역사 속에서 본 인간은 쇠퇴하기 마련이며 한시적 존재였으므로 제한된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여 질서 있는 세계를 창조하여야 한다는 경고성 메시지를 아테네인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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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역사가 이집트에 비해 일천했던 그리스에서는 지식인이라 할지라도 이집트인들에 비해 편협한 과거관을 가지고 있었다. 솔론의 오래된 조상이 니오베 같은 인물로 소급된다는 사실을 이집트 신관이 비웃었다는 사실은 역사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지식이 저급하였음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 이러한 지적 수준은 플라톤 시대에 와서도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설명이 필요없었던 원시신화로써는 과학과 철학의 정신으로 사물과 사태를 설명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그리스인들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게 되면서 과거를 전해 줄 새로운 지적 패러다임이 필요하게 된다. 이 같은 배경에서 플라톤이 원시신화에서 한 단계 진전된 철학적 신화로써 '역사'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나라'의 예를 역사 속에서 찾고자 하였던 그는 역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였다. 즉 그는 아틀란티스의 오만함을 예거하여 아름다운 나라 혹은 이상국가는 과도함과 오만함을 경계하고 이성과 중용 및 절제의 미덕을 지킬 때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정체상으로는 왕과 백성이 각각의 주권을 균형 있게 행사하는 혼합정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은 미덕을 지키는 나라에서 가능하다고 하였다.
한편 그는 사라져 버린 아름다운 나라의 예를 통하여 인간의 한계 및 인간과 자연의 한계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그는 초기 아테네가 아틀란티스처럼 자체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자연세계의 결점-비이성적 폭력- 때문에 사라졌음을 강조하면서 죽어야 할 인간의 한계를 비유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역사는 보다 이성적인 세계로 점진적으로 작용하는 진보의 과정을 밟되 완전히 이성적인 상태에 도달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개의 경우 역사의 진보는 정신이나 이성의 계획 하에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초기 아테네와 아틀란티스를 각각 선과 악으로 대비시켜서 대결 구도 속에 넣고, 역사 세계에서 절대선 혹은 순수이성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이성과 지성을 존중하되 절제와 중용의 미덕을 한 번 더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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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Plato's Philosophy of History
- The Atlantis Myth -
Paek, Kyong-Ok (Catholic University of Daegu)
Generally it can be said that commentators on Plato's description of Atlantis fall into two classes. One of them is the viewpoint that the story of Atlantis is to be taken as a report of fact, such that clues about this ancient power may still be found today. The other standpoint is that Plato's treatment of Atlantis is a myth that must be interpreted.
This paper takes the viewpoint that both commentators are different in its implications but are related to each other as Plato tried to find historic precept in the literary writing based on historic fact. This standpoint of views are clearer when Plato's later writing and are looked into.
Through two kinds of reading about the myth, conclusion that in his Atlantis, Plato presents the vision of establish the ideal city on the basis of reason, intellect and teaching of history and experience is drawn.
Key Words : Atlantis Myth, Sophrosyne, Allegory, Nous, Rea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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