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적 논의 방법
박 성 호*창원대 철학
요약문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권 제3장과 제2권 제2장에서 자신이 추구한 윤리학 연구의 방법에 관한 많은 중요한 점을 제안한다. 그는 우리에게 윤리적 문제들에 관한 논의에서 정밀성을 기대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윤리학에서 정밀성이 기대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일반적 설명은 환경의 다양성에서 발생하는 도덕 의식을 모호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특수한 설명은 그 자신이 정밀성의 특징이라고 간주하는 단순성을 불가피하게 결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추구한 방법에 의해서 그리고 그 자신이 말하듯이 개연적인 전제로부터 도출된 개연적 결론은 어떻게 윤리적 원리로서 수용될 수 있는가? 필자는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논의와 「변증론」의 논의 사이에서 보여지는 유사점에 주목하여 그의 윤리학적 논의 방법을 이해하고자 한다. 「변증론」에서 제시된 변증술적 추론은 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는 개연적인 통념의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추론의 결론은 전제와 마찬가지로 확실하지 않고 개연적임에 틀림없다.
윤리학에서 그런 전제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것’ 또는 ‘다른 방식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표현된다. 이런 개념의 구체적인 예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윤리학적 견해들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견해들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자신의 윤리설을 주장한다. 그런 통념적 전제에서 결론을 논의해 가는 방법은 흔히 귀납이라고 번역되는 에파고게이다. 이것은 「변증론」에서 말하는 변증술적 추론에 해당한다.
통념적 전제는 두 가지 의미로 구분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제한적 통념의 전제로부터 추론된 결론의 정밀성은 기대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한적 통념이 다루어지는 이유는 개별적 상황에 관한 상충하는 추론들 때문이다. 그러나 통념적이라는 말을 개연적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에 그는 아포리아를 포함하는 모든 비제한적 통념들을 변증술적 문제로서 참고하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따라서 정밀성이 기대되어서는 안된다는 이유를 단지 에파고게라는 방법 탓으로만 이해하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윤리학적 논의는 “에파고게에 의한 확증”을 통하여 윤리적 제1원리에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형이상학」에서 감각적 지각, 기억, 경험, 지식이라고 기술한 지적 진보의 네 가지 단계이다. 그는 이러한 검토 과정에서 제한적 통념의 제한적 선뿐만 아니라 무제한적 선을 함께 고려함으로써 이론의 일반적인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시도한다.
※ 주요어 : 논의의 정밀성,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 통념, 실천적 추론, 변증술적 추론, 지적 향상, 도덕적 성격, 제한적 선과 무조건적 선.
Ⅰ. 도덕 이론의 정밀성 문제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첫머리에서 윤리학 연구의 목적과 방법에 관해 언급한다. 선에 관한 지식이 우리의 생활에서 중요성을 지니며 더 나아가 선에 관한 지식이야말로 가장 우위적이고 가장 으뜸가는 기술(정치학)에 속한다는 것이 연구의 목적 또는 가치라고 그는 강조한다. 그렇지만 윤리학적 논의는 “주제가 허용하는 만큼의 정밀성을 가지면 충분할 것이며… 개연적인 출발점에서 논의함에 있어서는 개연적인 결론에 도달함으로써 만족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경고한다.
윤리학 연구의 목적과 윤리학적 논의에 관해서 언급하는 이 대목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과연 그가 찾고자 했고 또 제시하려는 윤리학적 원리가 어느 정도로 확고한 도덕적 기초를 제공해 줄 수 있을까? 정밀성이 윤리학에서 기대되어서는 안된다고 그가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그 자신은 윤리학적 논의를 정치학적 탐구라고 규정하고 이것의 탐구 목적은 지식에 있지 않고 행동에 있으며 그것의 연구 대상은 본성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관습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대답은 1104a에서도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위에 관한 모든 문제들과 인간을 위한 선이 무엇인가 라는 문제들”에 관한 논의는 주제에 알맞게 요구되어야 한다고 앞에서 말했듯이, “윤곽적일 뿐만 아니라 정밀하지 않게” 제시되어야 하고 “고정 불변적이지 않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윤리학적 주제의 개연적 결론은 윤리학 연구의 목적에 관한 그의 주장에 비추면 충분한 조건으로서 용납되기는 어렵다. 그 목적에 관한 언급뿐만 아니라 그는 ‘옳은 규칙을 준수하여κατὰ τὸν ὀρθὸς λὀγον’ 행위해야 한다는 일종의 보편적 원리를 윤리학적 논의에서 기초로서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윤리학적 논의가 정밀할 수가 없다는 주장은 그의 윤리학적 논의 방법이 합리주의적 요소와는 전혀 무관한 경험적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주제에 관한 보다 강한 귀납추론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해석되어 버릴 소지가 있다. 왜냐하면 실천적 추론의 탁월한 능력을 지칭하는 실천지φρὀνησις라는 지적인 덕ἀρετή의 역할을 해석할 때에 흔히 논란이 되는 주요 귀절에서 윤리적 원리들은 과학적 지식을 위한 논증에서와 같이 실천적 추론에서도 직관(누스νούς)의 역할에 의해 파악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실천적 추론을 단순히 귀납의 방법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만약 그의 윤리학 논의에서 합리주의적 요소가 있다면 그가 말하는 누스의 역할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므로, 윤리학적 방법으로서 실천적 추론의 특성과 이런 추론의 정밀성이 기대될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게 이해될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옳은 규칙ὀρθὸς λὀγος에 관한 설명은 뒤로 미루어 제6권 제13장에서 실천지(실천적 추론)와 연관해서 논의된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도덕 이론의 정밀성 문제는 실천적 추론이라고 불려지는 그의 윤리학적 논의 형태에 있어서 누스의 역할과 함께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그의 저서가 전부 그러하듯이 EN 역시 그의 강의 노트로 써 놓았던 것이어서 쉽게 이해되도록 문학적 기교가 발휘된 체계적인 논의가 아니고 그래서 거기에서 우리의 의문을 해소시켜 주는 그 자신의 대답을 곧 바로 찾아내는 일은 쉽지가 않다. 그리고 기존의 그리스 철학의 지배적인 전통이나 플라톤처럼 사물의 배후에 깊이 파고들어 그 바탕에서 끌어내는 철학과 비교할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의 복잡성에 더욱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그의 윤리학적 지식은 귀납추론에 근거를 두는 개연성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인상이 앞설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입장은 각각의 개별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의 물음에 대한 절대적인 옳음이 없음을 전제한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이러한 문제는 그가 사용한 윤리학적 논의의 방법과 관련해서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말해 그의 윤리학적 지식의 정밀성에 관한 문제는 그의 윤리학적 논의 방법이 윤리학적 주제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이해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이 대상을 드러내는 절차에 관한 기술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적 지식도 그가 사용한 윤리학적 논의 방법에 의해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윤리학적 논의에서 출발점이 되는 개연적인 전제와 이것으로부터 도출되는 개연적인 결론의 의미가 분석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존의 윤리설의 방법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방법에 의해 덕론을 구성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존의 윤리설 및 플라톤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그가 제안하려고 하는 윤리학적 방법이 무엇인지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그의 윤리학적 접근법을 EN, Topica, 그리고 Analytica Priora 등과 연결해서 해석함으로써 윤리학은 “주제가 허용하는 정도의 정밀성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주장의 이유를 찾고자 한다. 그리고 위의 물음들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아니지만 EN 제6권 제3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윤리학적 논의 방법이 Analytica Posteriora와 연관됨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 Analytica Posteriora Bk.Ⅱ, 19에서 위의 물음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Ⅱ. 플라톤 및 기존 이론에 대한 비판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의 목적과 연구 대상을 지식이 아니라 훌륭한 행동 또는 옳은 행동이라고 밝히고(제1권 제3장), 그리고 도덕교육 및 그 방법의 필요성에 대해서 플라톤의 견해를 지지한다: “플라톤이 말했듯이 우리는 마땅히 기뻐해야 할 것을 기뻐하도록 그리고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을 겪을 줄 알도록 아주 어렸을 적부터 특별한 방법으로 교육시켜야만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론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주요 내용 중의 하나는 옳은 행동을 위한 지적인 덕(탁월함)에 해당하는 실천지φρὀνησις이다. 실천지는 인간을 위해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식별하는 기준 즉 로고스λόγος에 의거해서 행동할 수 있는 성격의 상태이고, 그 옳은 행동은 각 개별적인 상황에서 로고스에 따라 지행을 일치시키는 실천지의 소유자에 의해서 성취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언한다. 따라서 그의 윤리학은 옳은 행위의 기준과 이것을 판단하는 실천지 교육에 있어서 필요한 자신의 논의 방법을 전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로고스는 그의 윤리설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의 하나로서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reason이라고 번역되고 있다. D. Ross는 EN의 그 귀절들에서 그 용어가 이성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 터득된 어떤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성의 원리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로고스라는 말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다른 문맥에서 합리적 원리, 합리적 근거, 올바른 규칙( ὀρθὸς λόγος) 뿐만 아니라 때로는 논증, 추리, 추리과정 등의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다. 그의 윤리학에서 로고스는 먼저 이성의 기능이라는 논리적 의미와의 관련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실천지에 의해 도덕적 행위가 선택되어 실행될 때 도덕적 성품이 없어서도 안되지만 옳은 행위의 원리에 대한 파악이 결부되지 않을 수 없으므로(제6권 2장) 로고스는 인식의 기능과도 관련이 있다. 그 다음 “옳은 행동은 실천지의 소유자에 의해 성취되므로” 행위 원리에 관하여 숙고하는 추론 기능λογιστικὀν의 아레테(탁월성)인 실천지는 도덕적 판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적 조건으로서 언급된다. 그러나 실천적 추론의 아레테인 실천지의 역할이 행위 목적을 직관하는 능력인가 그렇지 않으면 어떤 행위 목적에 대한 수단을 선택하는 능력인가 라는 문제에 관해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실천지는 결코 이해하기 쉬운 개념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윤리학 이론에서 로고스의 논리적․인식론적 의미뿐만 아니라 실천지의 역할은 결국 아리스토텔레스 나름의 윤리학적 방법과 관련해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지의 역할에 관한 결정적인 대답을 시사하는 귀절이라고 자주 인용되는 EN. 1143a 35-b 6에서 로고스는 논의 또는 추론의 형식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추론의 서로 다른 두 가지 형태에서, 즉 과학적 증명을 제시하는 논증ἀπόδειξις과 실천적인 추론에서 직관νούς의 역할이 규정된다. 그에 따르면 실천지에도 논증의 직관에 상응하는 실천적 직관의 작용이 있다. 그런 직관의 기능으로 실천적 추론이 구성되고 그 실천적 추론이라는 방법에 의해 윤리적 원리들ἀρχαὶ이 확립된다고 논한다. 그 원리들은 세간의 여러 견해들이 지니고 있는 여러가지 난점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면서 밝혀지는 것이다. 심지어 소크라테스 이전의 이론을 비판할 때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찰과 실험에 근거한 논증을 자주 사용할지라도 그런 논증보다는 자신의 철학 체계로부터 이끌어 낸 이론적 반론을 중요시한다. 모든 견해를 이렇게 검토할 수 없다면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수의 견해와 가장 유력한 견해들을 검토하고 또한 여러가지 견해들 중에서 미심한 것을 제거해 감으로써 윤리적 원리들이 밝혀질 수 있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구상이다. 여러가지 견해들의 문제점들을 제기하는 검토를 통하여 어떤 것은 논박하고 또 어떤 것은 지지함으로써 “난제를 해결하는 것은 문제의 답을 찾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은 그의 윤리학적 방법을 암시한다. 따라서 그의 윤리학적 이론은 실천적 추론이라는 그 자신의 윤리학적 논의 형태 또는 방법과 관련해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주장하려는 실천지 개념의 설명을 위해서 소크라테스를 비판하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사람이 절제나 용기 등의 윤리적 덕(ἠθική ἀρετὴ)을 위한 도덕적 성품을 어느 정도로는 자연적으로 가지고 태어나지만 “엄격한 의미의 선κύρίως ἀγαθὸν”을 위해서는 반드시 실천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연적 성품ἕξις의 덕과 지적인 덕인 실천지의 관계에서 후자의 덕을 엄격한 의미의 덕이라고 규정하는 대목에서 소크라테스를 비판한다. 오로지 엄격한 의미의 덕이 실천지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실천지를 잘못 파악하는 주장에 대한 비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가 “모든 덕이 실천지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 것은 옳지만, 모든 덕이 실천지의 형태이라고 말한 것은 옳지 못하고”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탐구는 일면으로는 옳은 반면 다른 일면에서는 그릇된 길로 빠졌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적 덕이란 ‘올바른 규칙에 따르는’κατὰ τὸν ὀρθὸς λόγος 성품ἕξις이라는 정의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윤리적 덕이 ‘올바른 규칙에 따르는 상태’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올바른 규칙을 포함하는’μετὰ τού ὀρθὸς λόγος 성품임을 밝히려고 한다. 그런 성품의 탁월성이 바로 실천지라는 지적 덕이다. 그는 실천지야말로 도덕적으로 옳은 규칙에 관한 지식이며 그런 실천지를 소유하는 자는 자신의 정신 속에 옳은 규칙을 가지고 있다는 설명을 시도한다. EN 1103a 2에서 ‘엄격한 의미의κύρίως’ 덕이 되는 실천지는 마치 행위자가 부친의 충고에 따르듯이 단지 옳은 규칙에 따르기만 하는 상태가 아니라 행위자 스스로 옳은 원리를 판단(소유)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뜻은 EN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하려는 실천지의 추론적 기능과 관련된다. 그러므로 그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에 있어서 모든 덕은 에피스테메 형태였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그는 자신의 독특한 윤리학적 논의 형식을 제시하고 그런 논의의 탁월한 능력이 곧 실천지라는 엄격한 의미의 지적인 덕이라고 설명한다.
EN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독자적인 윤리학적 탐구 방법은 플라톤에 대한 비판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제1원리ἀρχαὶ로부터 출발하여 논의λόγος하는 것과 제1원리를 향하여 논의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옳은지 묻고 심의한 것을 옳은 일이었다고 평가하고 그 양자가 서로 다른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됨을 강조한다. 이 귀절에서 로고스λόγος는 일반적으로 추론 또는 논증이라는 뜻도 내포하지만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은 자신의 윤리학적 방법을 제시하려는 의도를 함축하고, 그런 방법은 구체적으로 ‘에파고게’ 또는 ‘변증술적 추론’이라고 지칭되고 있기 때문에 논의라고 번역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윤리학적 논의의 출발점으로서 대상에 관한 언급을 보면 이런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잘 알려진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나위가 없지만, 잘 알려진 것에는 두 가지 의미 ― 하나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이라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그 자체로(무조건적으로, 또는 자연적으로) 잘 알려진 것이라는 의미 ― 가 있는데,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대상들 중에 어떤 것들은 우리의 인식이고 다른 것들은 그 자체에 관한 인식이다. 윤리학적 논의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다.
그러면 그가 윤리학적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물음을 해결함으로써 그의 윤리학적 주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는 특징은 「분석론후서」에 따르면 제1원리ἀρχαὶ의 조건들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특징들 중에서 근본적, 직접적이라는 특징은 동일한 조건이라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왜냐하면 어떤 원리를 논증하는 다른 우선적인 원리가 없는 경우를 근본적이라고 부르고, 무엇을 설명하는 다른 중간 개념이 없는 경우는 직접적이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 특징은 그가 말하는 추론의 넓은 뜻에서 보면 제1원리의 동등한 조건이고 또 그런 원리들은 연역에 의해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가 윤리학적 논의의 출발점이라고 규정하는 ‘잘 알려져 있음’의 의미는 근본적 또는 직접적이라는 제1원리의 특징과 연관해서 해석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제1원리의 ‘설명적’이라는 특징은 ‘잘 알려져 있는 것’을 필요로 하며, EN에서 ‘잘 알려져 있는 것’은 ‘가르침’을 위한 출발점이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음’이라는 의미는 귀납과 연역에 관한 언급에서 나타난다. 그는 「분석론후서」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가르침은 ‘이미 알려진 사실에 관한 지식들’로부터 출발하며, 모든 가르침은 귀납ἐπαγωγή이나 연역συλλογισμὀς에 의해 진행된다고 말한다.
먼저 가르침은 귀납을 통하여 진행된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제1원리는 연역에 의해 증명될 수 없지만, 귀납은 연역이 출발점으로 삼는 제1원리 또는 보편적인 것을 제공한다고 그는 말한다. 이런 이유로 그가 말하는 윤리학적 제1원리들은 귀납에 의해서 설명․획득되는 것이다. 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론후서」 71a5-10에서 귀납ἐπαγωγή이라는 용어에 포함되어 있는 동사 ‘ἐπάγειν’의 의미를 ‘학생에게 지도하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로스는 학생들로 하여금 개별적인 것에 함축된 보편적인 것을 알려줌으로써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에로 ‘이끌어 간다’는 뜻으로 적절하게 해석한다. 왜냐하면 71a5-10에서 귀납이란 “명백하게 알려진” 개별자 안에 함축된 보편적인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라고 언급되기 때문이다. 또한 「변증론」에서도 귀납은 개별자들로부터 보편자에로 나아가는 통로이라고 언급하고 있듯이 가르침은 귀납을 통하여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귀납은 개별적 사실들로부터 일반적 명제를 추론하는 과정이 아니라, ‘잘 알려져 있는 것’이라는 어떤 주어진 일반적 명제를 개별적 사례들을 통하여 검증하는 절차를 의미한다. 윤리적 논의에서 귀납의 절차와 의미는 그의 윤리학적 방법과 관련해서 다음 장에서 논의할 것이다.
그 다음 EN에서 연역을 통하여 가르쳐지는 대상은 에피스테메ἐπιστήμη를 가리킨다. 에피스테메는 EN에서 강조하려는 윤리적 실천지φρὀνησις와 구별되는 것이다. 거기에서 “에피스테메는 논증(아포데잌시스)할 수 있는 능력의 상태”라고 불려진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논증(아포데잌시스)은 이미 규정된 그리고 참인 전제의 제1원리들로부터 출발하여 과학적으로 증명을 제시하는 넓은 의미의 논리적 추리이다. 논리적 추리의 전제인 제1원리들은 논증에서는 불변적이며 또한 그 자체로 잘 알려진 것들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윤리학적 논의의 방법에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들이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전자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고 표현되고, 후자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은 곧 ‘실천지φρὀνησις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에피스테메와 실천지는 둘 다 잘 알려져 있는 것들로부터 출발하는 추론συλλογισμός이라는 넓은 의미에서나 그런 추론 능력의 상태라는 점에서는 구별되지 않는다. 게다가 윤리학적 주제에 관한 논의의 형태가 때로는 ‘쉴로기스모스συλλογισμός’라는 용어로 표현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EN에서 쉴로기스모스는 반드시 행하여야 할 행위를 다루는 일종의 논의 방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적 추론 방식을 특히 논증적 추론의 능력 상태와 뚜렷하게 구별하면서 자신의 윤리학적 논의 방법을 생각하고 있으며 그런 논의․추론에서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사실에 관한 지식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을 비판함으로써 제시하고자 했던 윤리적 방법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어떻게 제1원리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이 될 수 있고 또한 획득될 수 있는가? 그리고 제1원리를 알거나 이해하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 이러한 문제에 대한 EN에서의 윤리학적 논의 방식과 관련 있는 「분석론후서」 제II권 제19장의 주석에서 반즈는 첫번째 물음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을 귀납(에파고게)의 과정에 의해서라고 해석하고, 두번째 물음에 대한 대답을 직관(누스)이라고 해석한다. 이것이 지식 획득의 방법과 인식 능력에 해당하는 서로 다른 대답이라고 간주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즈는 전혀 불일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반즈의 이러한 해석과 EN 1139b에서 제1원리의 획득 방법이 귀납이라는 설명에 의하면 윤리학적 제1원리의 획득 방법에는 합리주의적 요소가 결코 없는 듯하다. 즉 로고스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연역적으로 논증(증명)되지도 않고 본유적인 것도 아니다. 또 자명한 것에 관한 직접적인 심적 파악에 의해 획득되지도 않는다. 마음의 활동은 개별적인 경우들의 감각-지각으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가 에파고게라고 불렀던 과정에 의해서 보편자의 파악에로 나아간다. Metaphysics에서도 그 단계를 지각, 기억, 경험, 지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역시 EN 1139b에서도 “모든 가르침은 이미 알려져 있는 것에서 출발하며… 연역이 출발점으로 삼지 않을 수 없는 아르케들은 귀납ἐπαγωγή에 의해서 획득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체로 해석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에파고게를 우리가 알고 있는 경험주의적인 귀납추론과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가 기술하고 있는 과정이 단순한 귀납추론의 표준적인 형식과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실천지φρὀνησις라는 지적인 덕ἀρετή의 논리적 기능에 관해 논란이 되는 귀절에서 윤리적 원리들이 실천적 추론에서 직관(누스νούς)의 역할에 의해 파악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에파고게라고 불려지는 그의 윤리적 방법에서 합리주의적 요소가 있다면 실천적 추론에서 누스의 역할이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Ⅲ. 통념과 변증술적 추론
잘 알려져 있는 견해로부터 윤리학적으로 논의하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이나 행복에 관한 여러 가지 정의를 검토할 때에는 이것이 어떤 전제로부터 이끌어 낸 논리적 결론인지 검토할 뿐만 아니라 그 주제에 관한 일반적인 견해에 비추어서 고찰해야만 한다고 제안한다. 이처럼 EN의 서두에서 그는 윤리학적 논의의 출발점을 규정하고 다른 부분에서는 논의의 주제와 방법을 좀더 분명하게 암시한다: “우리에게 알려진 사실들을 드러내어 먼저 그 난점들을 논의한 후에 가능한 한 모든 통념ἔνδοξα의 진리성을 확립해야만 한다.” 모든 통념들을 검토하지 못할 경우에는 보다 많은 그리고 가장 권위 있는 견해의 진리성을 확립해야만 한다는 주장을 그는 덧붙인다. 통념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엔독사는 ‘평판이 나 있는 견해’를 가리킨다. 어떤 특정한 주제에 관한 통념들이 보통 혼란스럽고 심지어 그 통념들 사이에는 명백히 모순이 드러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대체로 그 통념들이 적어도 진리의 한 측면을 나타내고 있음을 가정하고 도덕적 또는 정치적 주제에 관한 진지한 논의를 위해서 통념들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통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적 논의에서 출발점이 되는 중요한 개념이고 또한 앞장의 논의와 연결하여 이해하면 통념은 그의 실천적 추론의 출발점으로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것’을 가리킴에 틀림없다.
이러한 통념으로부터 출발하는 추론의 형태는 Topica에서 ‘변증술적 추론’ὁ διαλεκτικὸς συλλογισμός이라고 불려지고, EN에서는 그런 추론적 기능λογστικὀν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지적인 탁월성(덕)이 실천지(프로네시스)라고 불려진다. 실천지와 에피스테메는 지적인 탁월성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구별된다. 논증과 추론의 차이점에 근거하여 다음 두 가지 지적인 덕이 구별된다. 에피스테메는 과학적 증명의 능력을 포함하기 때문에 이런 논증과는 다른 형태의 추론 기능과 관련이 있는 프로네시스(실천지)와 구별된다.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적 주장에서는 논증과 추론이라는 두 종류의 구분이 명백하게 시사된다. 전자는 과학적 증명을 제시하는 논증(아포데잌시스)이고 후자는 사람들끼리 논쟁하는 가운데에서 발견되는 변증술적 추론이다. 논증은 「분석론후서」의 주제이고 Topica에서는 변증술적 추론의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변증술적 추론은 EN에서든 Topica에서든 제1차적이고 참인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논증(아포데잌시스)과 대조적인 것으로 규정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적 논의 방법에서는 그가 말하는 변증술적 추론과 이것의 중심 개념인 통념이 매우 중요하다.
그가 통념을 변증술적 추론의 출발점(명제)으로 삼는 것은 행위의 문제에 관한 많은 사람들 또는 철학자들의 견해들 중에는 옳은 판단이 있을 수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Topica 105b 10-14에 따르면 모든 경우 혹은 많은 경우에 참이라고 여겨지는 의견은 아르케로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물론 여러가지 견해들은 제각기 다른 관점에서 또는 가끔 다의적인 언어로 언급되어서 서로 모순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윤리학의 주제는 ‘다른 방식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최선의 [행위] 목적이 이러저러한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참이라고 받아들여지는 여러가지 통념적 견해들이 윤리학적으로 논의될 수 있다. 이러한 여러가지 통념들은 변증술적 추론의 출발점이 된다. 예컨대 탐구의 어떤 주제에 관한 여러가지 통념들을 전제πρὀτασις로 취하고 이 전제에 대하여 다시 ‘~인가 ~이 아닌가’라는 형식의 변증술적 문제πρὀβλημα를 제기하여 주제로 설정한다. 예컨대 최고선이 아름다운 것, 혹은 유쾌한 것, 유익한 것이라는 통념들 각각에 대해서 ‘최고선은 아름다운 것인가? 혹은 유쾌한 것인가? 혹은 유익한 것인가?’라는 물음을 변증술적 논의에서 전제로 삼는다. 다시 이런 물음 각각에 대해 ‘~인가 ~이 아닌가’라는 형태로 물음을 제기하여 변증술적 탐구의 주제로 삼아서 이런 물음을 해결해 가는 것이 그의 실천학적 주제에 관한 변증술적 추론이다. 이때 그가 생각한 윤리학의 임무는 통념들의 진리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1145b1-7에서 주장하는 윤리학적 논의의 주제와 방법은 통념적인 견해들을 들추어내고, 그것들에서 명백한 모순을 검토하여, 그 가운데 잘못이 밝혀진 견해들을 버리고, 그 이후에 남아 있는 일반적 진리를 논리적으로 이끌어 내는 것이다.
윤리학적 연구 방법이 정밀하지 못하다는 표현과 그 이유는 그가 말하는 통념의 개념과 먼저 관계 있다. 그런데 변증술적 추론에서 전제가 되는 통념ἔνδοξα의 개념을 번역하기는 쉽지가 않다. Pickard-Cambridge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의견들’이라고 표현하고 Tricot는 ‘개연적 전제들’이라고 표현한다. Le Blond는 그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여 단일한 개념으로 결합될 수 있다고 논한다. 물론 그가 객관적이라는 의미와 내적인 개연성이라는 의미를 분리하고 있지만, 그러나 객관적인 개연성이라는 개념이 통념의 주된 의미로 간주되는 주장에 반대하여 J.D.G. Evans는 Topica A1과 An. Pr. b27(70a 2-7)의 해석을 근거로 삼아 비판하고 있다. 그는 An. Pr. b27에서 통념적ἔνδοξος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또는 ‘사람들이 대체로 어떠하다고 알고 있는’ 개연적εἰκός인 전제를 뜻한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가능한 것과 대다수 사람들이 발생할 것이라고 믿는 것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상세한 설명과 명백한 구분이 없기 때문에 통념의 개념이 어떤 단일한 개념으로 번역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EN으로부터 인용된 귀절에서 표현된 통념적인 전제들이란 ‘일반적으로 그럼직하다고 알고 있거나 그럼직하지 않다고 알고 있는 의견들’을 가리키지만 그러나 엄격하게 두 가지 의미로 세분된다. 통념적 전제들이 “모든 통념”이라고 해석될 경우에는 비제한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견해를 지칭하겠지만 그러나 “보다 많은 또는 가장 권위 있는 견해”라는 뜻으로 해석될 때에는 제한적인 통념의 개념을 의미한다. 1145b 7 이하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변증술적 추론에서는 “모든 통념들을 검토하지 못할 때에는 보다 많은 그리고 가장 권위 있는 견해의 진리성을 확립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무조건적으로 비제한적인 견해들이 통념적 전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Le Blond가 제한적인 의미의 통념과 비제한적인 의미의 통념을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번역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Evans의 지적은 정당하다.
통념의 구별은 다음의 귀절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래되고 철학자들의 동의를 얻고 있는 견해”라는 제한적인 통념에 비추어 선과 행복에 관한 정의를 모색한다. 여기서 통념은 분명히 대표성 있는 누군가의 견해를 가리킴에 틀림없다. 유명하다고 평판이 있는 사람들(sophoi 또는 gnorimoi 또는 endoxoi)의 견해이다.
제한적 통념과 비제한적 통념의 이러한 두 종류의 구분은 비록 뚜렷하지는 못하지만 Topica 100b 20-23에서 언급된다. “모든 사람에게 혹은 대다수의 사람에게 혹은 현인들에게, 요컨대 그들 모두에게 혹은 그 대다수에게, 혹은 가장 유명하다고 평판이 나 있는 사람들에게 그러하다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들”이 통념적인 전제에 관한 정의이다. 그리고 특히 104a 8-10에서는 변증술적 문제에서 통념적 전제에 반대되는 역설적παρἀδοξος 견해를 제외시킴으로써 변증술적 추론의 출발점인 통념적 전제는 더욱 제한되고 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의 견해가 상충할 때에 역설은 일반적으로 승인되기 않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입장은 윤리적 판단과 행위 사이의 연관에서 어떤 윤리적 속성의 실재와 그것에 관해 인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평판이 있는 어떤 특정인의 윤리적 판단이 옳음을 전제하고 있다. 이 근거는 EN 제1권 제4장에서 명시된다. 제1권 제1-3장에서 윤리학의 목적과 주제 및 취급 방법에 관해 소개된다. 즉 윤리학의 주제인 선에 관한 지식은 우리의 삶에서 우위적이고 가장 으뜸가는 기술(정치학)에 속하지만 그러나 윤리학적 논의는 개연적인 출발점에서 논의함에 있어서는 개연적인 결론에 도달함으로써 주제가 허용하는 만큼의 정밀성을 가지면 충분할 것이라는 주장을 서론으로 삼고 있다. 이어서 제4장에서는 선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면서 선에 관해 “지금까지 주장된 다른 모든 의견들τὰς δόξας을 검토하는 것은 별로 소득이 없는 일일 것이다. 단지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유력한 것들 혹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보이는 의견들만을 검토하면 충분할 것이다” 라고 주장함으로써 합리적인 논거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는 제한적인 통념이 윤리학적 설명의 출발점이라고 표현된다. 그러므로 윤리학적 설명의 통념적 전제는 객관적인 가능성의 외연 개념으로 간주될 수 없다. 왜냐하면 Evans의 지적처럼 객관적 가능성은 제한적인 통념적 견해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도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대다수 또는 평판이 있는 사람들의 견해’가 바로 윤리학적 논의 형태의 변증술적 추론에서 통념적 전제의 외연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사실로부터 변증술적 추론은 먼저 통념에 근거하고 있고, 그 다음 윤리적 문제에 적용할만한 것이라는 두 가지 뚜렷한 특성이 지적될 수 있다.
Ⅳ. 윤리학적 논의 방법의 특성
통념들이 그의 윤리학적 추론에서 전제가 되는 방법적 특성 때문에 “주제가 허용하는 정밀성에 만족해야만 한다”는 그의 주장이 절대적인 선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는다고 이해될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윤리학적 논의에서 제한적이든 비제한적이든 통념들을 출발점으로 삼는 이유는 윤리학적으로 통념적 견해들을 공격하거나 방어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그의 윤리학적 논의에서 일차적으로 고려되는 통념들은 제한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변증술적으로 논의하는 주제에서 역설이 제외되지만 그러나 전적으로 배제되지는 않는다. 역설적 견해도 변증술에서 참조되는 경우에는 하나의 입론Thesis으로서(104b 20, 34), 즉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에 모순되는 신념 또는 생각의 한 형태로서만 고려될 뿐이지 그 자신이 의도하는 윤리학적인 검토를 위해서 취급되지는 않는다. 입론이 통념과 구별하여 표현되는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통념의 개념과 차이성을 명백히 밝히기 위해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론이 하나의 신념 형태로서 고려되는 것은 그가 변증술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아포리아와 전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변증술적 문제는 아포리아를 지니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의 변증술적 논의는 통념적 명제로 구성된다. 예컨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듯이 ‘좋음은 유익함인가?’ 라는 질문 형태의 명제는 그에 있어서 논의를 구성하는 전제가 된다. 이러한 명제와 변증술적 추론에서의 문제는 질문의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101b 29). ‘좋음은 유익함인가 그렇지 않는가’라는 질문 형태는 논의의 전제에 해당하는 명제와 구별하여 변증술적 문제라고 불려진다. 하지만 그는 명제와 문제를 수적으로 동일하며 성질도 동일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때 전문가적인 견해라고 해석될 수 있는 제한적 통념을 변증술적 문제로 다루는 이유는 개별적 상황의 문제에 관한 대립적 또는 상충하는 추론들 때문이거나 그런 문제들은 만족할만한 설명을 찾기 어려운 난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변증술적 추론에 의존하는 그의 윤리학적 방법은 근본적으로 에파고게라고 불리는 일종의 귀납적 추론이며 이러한 방법론적 특성 때문에 “윤리학은 주제가 허용하는 정도의 정밀성으로 충분하다”는 것인가? 본고의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명백하게 제시하는 이유는 윤리학의 연구 과제는 지식ἐπιστήμη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것이다. 또한 EN에서 그런 대조는 과학적 지식의 탐구ζήτησις와 행위 원리에 관한 숙고의 차이점으로 구별되기도 한다. 그러나 제한적인 통념 즉 평판이 있는 특정한 전문가 또는 대다수의 사람에 의해서 받아들여지는 견해로서의 윤리적 판단과 윤리적 행위의 연관을 개연성의 관계로 설명함에 만족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윤리학적 설명에서 과학적 논증과 같은 정밀성을 결여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이런 점 때문에 그의 주장은 특정한 전문가의 윤리적 판단을 지지하거나 거부하는 상대주의로 연결된다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기존에 일반적으로 그럼직하게 받아들여지는 견해들로부터 논의를 출발하고 그것들을 검토할 때에는 각각의 견해의 독특한 주장을 주의 깊게 고려해야 함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통념적이라는 말을 개연적이라고 표현하는 경우에는 아포리아를 포함하고 있는 변증술적 문제들을 참고하려는 뜻을 가리키기 위해서 ‘통념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Topica 제8권 5장에서와 104b4-5에서 논의되는 변증술적 논쟁거리는 다양한 주제에 관한 통념적 견해이고, 경험이 풍부하며 평판이 나 있는 사람들의 견해와 평범한 대중들 사이에서 상충하는 문제들이다. 아포데잌시스가 아르케 또는 참인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추론하는 것인 반면에 변증술적 추론은 통념으로부터 출발하여 추론한다는 점에서 이 두 가지의 추론 종류가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윤리학적 논의에서 정밀성이 기대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이유를 에파고게(귀납)라는 방법의 탓으로만 이해하기보다는 그의 윤리학적 논의가 “에파고게에 의한 확증”을 통하여 제1원리에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이해될 경우에 그의 윤리설이 상대주의라는 비판이 극복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윤리학적 논의는 Topica에서 변증술적 추론이라고 불려지는 논의의 방식에 의해 다양한 통념들을 검토함으로써 윤리학적 주제에 관한 여러 측면에서 난점을 제기하여 하나 하나의 점에서 참과 거짓을 식별해 나가는 방법이라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에파고게는 개별자로부터 보편자에로 나아가는 통로”로서 연역적 추론보다 더 설득적이고 명료할 뿐만 아니라 에파고게는 감각에 의해서 더 잘 알게 되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절차이다. 또한 이러한 변증술적 추론의 유용성을 말하는 Topica의 대목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각 개별 학문의 아르케들이 각각의 주제에 관한 통념으로부터 따져 묻는 것은 변증술적 추론에만 특유한 것이라고 언급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상대주의적 개연성을 넘어서는 일반적인 정당성은 특정인의 제한적 통념이 아니라 비제한적인 통념과 관련될 때에만 확립될 수 있다. 그의 형이상학이 자신의 윤리학적 기초라는 관점을 고려하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는 비제한적인 통념에 내포된 무조건적인 윤리적 선의 절대적 형식과 무관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사실 인간 행위에 대한 법적인 규칙과 달리 덕의 요건은 관습처럼 대중적 행위의 관행과 의사소통의 과정에서 다듬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절차에서 덕의 기준은 한편으로는 설득과 유인 등에 의해 형성되고 또 대중적으로 평가되는 권위들에 의해서 재생산된다. 이러한 도덕적 권위는 정신적 권위로 승인되는 제한적 통념에 의해 결정된다. 이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천 가능한 윤리적 판단 능력으로서 실천지를 제한적 통념에 비추어 설명하는 것은 그가 윤리학적 논의의 절차라고 불렀던 에파고게에 의한 검토 과정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도덕적 요구는 그때 그때의 개별적 상황의 요건을 목표로 하지 않고 행위의 보편적 규칙 또는 원리를 준수하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 덕의 기준은 무조건적으로 준수해야만 하는 요건이다. 그리고 변증론자는 통념들로부터 전제를 이끌어내고 또한 그 통념의 범위가 일반적이기 때문에, 변증술적 탐구의 범위는 보편적일 수 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에파고게에 의한 검토 과정에서 제한적인 선뿐만 아니라 무제한적인 선을 함께 고려함으로써 이론의 일반적인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근거로서 EN은 “사람들이 무조건적인 선을 추구하지만 옳지 못하다. 무조건적인 선이 자신을 위해서도 선임에 틀림없지만,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선인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한적인 선으로부터 비제한적․무조건적 선에로 나아가는 지적 향상이라는 그의 윤리학적 과제와 유사성은 「형이상학」에서도 언급된다. “행동에 있어서 우리의 과제가 각 개인을 위해서 선인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무조건적으로 선인 것이 각 개인을 위한 선이 되도록 만드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더욱 알기 쉬운 것에서 출발하여 본성적으로 알기 쉬운 것을 자기 자신에게 알기 쉬운 것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윤리학적 논의에 알맞은 정밀성으로 족하고 개연적 결론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서 제안하는 에파고게라는 방법은 상대주의적 한계를 극복하고 지적인 향상을 추구하는 절차라고 이해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윤리적 선에 관한 인식과 그것의 평가 대상인 행위 및 성품 사이의 특수한 필연적 연관을 설명하는 정밀성 그리고 이론적인 단순성을 결여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면서까지 EN에서는 윤리적 선에 관한 옳은 대답의 윤곽적인 설명을 제시하겠다고 말한다.
이때 윤리적 인식과 행위 사이의 필연적 연관을 개념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조건을 취할 수밖에 없다. 그때 그때의 개별적 상황에 합당하게 올바른 반응을 보이는 윤리적 판단자의 내적인 도덕적 감수성으로서 “합당한 도덕적 성향”이 조건으로 취해진다. 윤리학적 논의를 위해서 배우는 자는 올바른 도덕적 진리관을 지닌 성격을 소유해야만 한다고 말하지만 이러한 조건에 관한 상세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실천지를 설명하는 EN의 중요한 대목에서는 실천적 추론에서 누스라는 능력이 강조된다. “누스νούς는 양 방향의 극단 즉 제1원리와 최종 원리를 파악한다. 논증ἀπόδειξις에서 누스는 불변적인 제1원리를 파악하지만, 실천지에 관계하는 실천적 추론에서 누스는 ‘우연적인 것ἐνδεχόμενος’과 ‘다른 하나의 전제τής ἑτέρας προτάσεως’를 파악한다. 왜냐하면 일반적 규칙이 특수한 경우들에 기초를 두고 있듯이 우연적인 사실들은 목적의 파악을 위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른 하나의 전제’는 실천적 추론을 귀납의 과정으로 해석하고 또한 그런 추론 기능의 탁월성을 지칭하는 실천지라는 덕의 역할이 행위 수단의 파악 능력이라고 해석하는 입장에 따르면 실천적 추론의 소전제가 된다.
그런데 본고의 앞에서 논의되었듯이 윤리학적 제1원리를 획득하는 귀납의 과정 또는 방법을 의미하는 용어는 에파고게이다. 그리고 실천지의 능력을 설명하는 위의 귀절에서 누스는 귀납적 과정이나 지식 획득의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 또는 이해의 일종임을 내포하고 있다. 누스라는 용어는 종종 합리주의적 의미로서 직관intuition이라고 번역된다. 그렇다면 개별적 경우들에 관한 지각으로부터 보편적인 인식에로 진행해 가는 과정이 어떻게 합리적 능력에 의해서 수행될 수 있는가 라는 문제가 발생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누스는 제1원리 또는 보편자를 파악하고 있는 마음의 상태ἕξις로서 episteme와 대조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화인과 어윈도 바로 이런 문제 의식에서 누스를 오성understanding이라고 번역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누스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제1원리들 중에서 중요한 하나의 것은 정의이다. 그의 윤리학의 주제는 선 또는 덕에 관한 정의이다. 에파고게 즉 개별적인 경우에 관한 귀납적 연구에 의해서 그런 과제가 해결된다. 예컨대 유덕한 행위들을 관찰함으로써 덕에 관한 정의에 도달한다. 이런 지식은 발견의 과정상 마지막에 얻어지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그의 Metaphysics에서 지각, 기억, 경험, 지식의 단계로 설명된다. 이런 절차가 만족할 정도에 이르게 될 경우 덕 또는 선의 정의는 제1원리로서 윤리학적 설명의 기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절대적․비제한적 선의 이해에 도달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 또는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절대적인 선은 도덕적 논의에서 마지막으로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윤리학적 논의에서 변증술적 추론의 방법은 어떤 문제의 난점들을 제기하는 절차에 의해서 보편적인 선에 관한 지식을 위해 도움이 될 수 있으므로 모든 관점에서 논의하는 철학적 기술을 증진시킬 수 있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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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ristotle's Method in the Ethical Discussion
- Park, Sung Ho -
In Nicomachean Ethics Bk.1 ch.3 and Bk.2 ch.2 Aristotle makes a number of important points about the method to be pursued in a ethical work of the type on which he is embarking. He warns us against expecting that the discussion of ethical problems will be characterized by the degree of precision that is to be expected in other forms of discussion. What is the reason for saying so? Aristotle's reason for saying that precision beyond a certain degree in not to be expected in ethics is as follows. Firstly, any general account in bound to obscure the conscious of obligation that arise from the varieties of circumstance. Secondly, the particular account will inevitably lack the simplicity which he regards as characteristic of precision.
Then how can the probable conclusion which is derived from his method be admited as a ethical principle? Taking notice of the similarity in discussion between Nicomachean Ethics and Topica, I will understand Aristotle's method in the ethical discussion. Since a dialectics begins with endoxa which are probable but not absolutely certain, conclusions of a dialectical syllogism must be of the same character-probable but not certain.
Aristotle describe such a endoxic premise in Ethics as 'what is known to us'. It is an accepted meaning which is a generally accepted idea about a ethical judegment. We move from individual cases, beginning with perception, to a grasp of the universal, by means of a process Aristotle calls epagôgê. This is usually translated as induction, although not every interpreter thinks that what he has in mind is what we understand as inductive inference. Aristotle describe such a process in Topica as a dialectical syllogism.
In a process of epagôgê or a dialectical syllogism Aristotle distinguished between qualified endoxon and unqualified endoxon. For there is conflict opinions in a ethical problem. He confirms ethical principle by means of a process of epagôgê. As for the acquisition of first principles in ethical judgement, Aristotle appeals to what sounds somewhat like an inductive procedure. Beginning with the perception of particulars, which are "better known to us"(qualified endoxon), and moving through memory and experience, we arrive at knowledge of universals, which are "better known in themselves"(unqualified endoxon).
※ Key Words : precision, what is known to us, endoxon, dialectical syllogism, qualified and unqualified good.
박 성 호*창원대 철학
요약문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권 제3장과 제2권 제2장에서 자신이 추구한 윤리학 연구의 방법에 관한 많은 중요한 점을 제안한다. 그는 우리에게 윤리적 문제들에 관한 논의에서 정밀성을 기대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윤리학에서 정밀성이 기대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일반적 설명은 환경의 다양성에서 발생하는 도덕 의식을 모호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특수한 설명은 그 자신이 정밀성의 특징이라고 간주하는 단순성을 불가피하게 결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추구한 방법에 의해서 그리고 그 자신이 말하듯이 개연적인 전제로부터 도출된 개연적 결론은 어떻게 윤리적 원리로서 수용될 수 있는가? 필자는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논의와 「변증론」의 논의 사이에서 보여지는 유사점에 주목하여 그의 윤리학적 논의 방법을 이해하고자 한다. 「변증론」에서 제시된 변증술적 추론은 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는 개연적인 통념의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추론의 결론은 전제와 마찬가지로 확실하지 않고 개연적임에 틀림없다.
윤리학에서 그런 전제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것’ 또는 ‘다른 방식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표현된다. 이런 개념의 구체적인 예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윤리학적 견해들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견해들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자신의 윤리설을 주장한다. 그런 통념적 전제에서 결론을 논의해 가는 방법은 흔히 귀납이라고 번역되는 에파고게이다. 이것은 「변증론」에서 말하는 변증술적 추론에 해당한다.
통념적 전제는 두 가지 의미로 구분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제한적 통념의 전제로부터 추론된 결론의 정밀성은 기대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한적 통념이 다루어지는 이유는 개별적 상황에 관한 상충하는 추론들 때문이다. 그러나 통념적이라는 말을 개연적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에 그는 아포리아를 포함하는 모든 비제한적 통념들을 변증술적 문제로서 참고하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따라서 정밀성이 기대되어서는 안된다는 이유를 단지 에파고게라는 방법 탓으로만 이해하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윤리학적 논의는 “에파고게에 의한 확증”을 통하여 윤리적 제1원리에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형이상학」에서 감각적 지각, 기억, 경험, 지식이라고 기술한 지적 진보의 네 가지 단계이다. 그는 이러한 검토 과정에서 제한적 통념의 제한적 선뿐만 아니라 무제한적 선을 함께 고려함으로써 이론의 일반적인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시도한다.
※ 주요어 : 논의의 정밀성,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 통념, 실천적 추론, 변증술적 추론, 지적 향상, 도덕적 성격, 제한적 선과 무조건적 선.
Ⅰ. 도덕 이론의 정밀성 문제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첫머리에서 윤리학 연구의 목적과 방법에 관해 언급한다. 선에 관한 지식이 우리의 생활에서 중요성을 지니며 더 나아가 선에 관한 지식이야말로 가장 우위적이고 가장 으뜸가는 기술(정치학)에 속한다는 것이 연구의 목적 또는 가치라고 그는 강조한다. 그렇지만 윤리학적 논의는 “주제가 허용하는 만큼의 정밀성을 가지면 충분할 것이며… 개연적인 출발점에서 논의함에 있어서는 개연적인 결론에 도달함으로써 만족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경고한다.
윤리학 연구의 목적과 윤리학적 논의에 관해서 언급하는 이 대목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과연 그가 찾고자 했고 또 제시하려는 윤리학적 원리가 어느 정도로 확고한 도덕적 기초를 제공해 줄 수 있을까? 정밀성이 윤리학에서 기대되어서는 안된다고 그가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그 자신은 윤리학적 논의를 정치학적 탐구라고 규정하고 이것의 탐구 목적은 지식에 있지 않고 행동에 있으며 그것의 연구 대상은 본성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관습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대답은 1104a에서도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위에 관한 모든 문제들과 인간을 위한 선이 무엇인가 라는 문제들”에 관한 논의는 주제에 알맞게 요구되어야 한다고 앞에서 말했듯이, “윤곽적일 뿐만 아니라 정밀하지 않게” 제시되어야 하고 “고정 불변적이지 않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윤리학적 주제의 개연적 결론은 윤리학 연구의 목적에 관한 그의 주장에 비추면 충분한 조건으로서 용납되기는 어렵다. 그 목적에 관한 언급뿐만 아니라 그는 ‘옳은 규칙을 준수하여κατὰ τὸν ὀρθὸς λὀγον’ 행위해야 한다는 일종의 보편적 원리를 윤리학적 논의에서 기초로서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윤리학적 논의가 정밀할 수가 없다는 주장은 그의 윤리학적 논의 방법이 합리주의적 요소와는 전혀 무관한 경험적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주제에 관한 보다 강한 귀납추론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해석되어 버릴 소지가 있다. 왜냐하면 실천적 추론의 탁월한 능력을 지칭하는 실천지φρὀνησις라는 지적인 덕ἀρετή의 역할을 해석할 때에 흔히 논란이 되는 주요 귀절에서 윤리적 원리들은 과학적 지식을 위한 논증에서와 같이 실천적 추론에서도 직관(누스νούς)의 역할에 의해 파악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실천적 추론을 단순히 귀납의 방법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만약 그의 윤리학 논의에서 합리주의적 요소가 있다면 그가 말하는 누스의 역할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므로, 윤리학적 방법으로서 실천적 추론의 특성과 이런 추론의 정밀성이 기대될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게 이해될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옳은 규칙ὀρθὸς λὀγος에 관한 설명은 뒤로 미루어 제6권 제13장에서 실천지(실천적 추론)와 연관해서 논의된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도덕 이론의 정밀성 문제는 실천적 추론이라고 불려지는 그의 윤리학적 논의 형태에 있어서 누스의 역할과 함께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그의 저서가 전부 그러하듯이 EN 역시 그의 강의 노트로 써 놓았던 것이어서 쉽게 이해되도록 문학적 기교가 발휘된 체계적인 논의가 아니고 그래서 거기에서 우리의 의문을 해소시켜 주는 그 자신의 대답을 곧 바로 찾아내는 일은 쉽지가 않다. 그리고 기존의 그리스 철학의 지배적인 전통이나 플라톤처럼 사물의 배후에 깊이 파고들어 그 바탕에서 끌어내는 철학과 비교할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의 복잡성에 더욱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그의 윤리학적 지식은 귀납추론에 근거를 두는 개연성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인상이 앞설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입장은 각각의 개별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의 물음에 대한 절대적인 옳음이 없음을 전제한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이러한 문제는 그가 사용한 윤리학적 논의의 방법과 관련해서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말해 그의 윤리학적 지식의 정밀성에 관한 문제는 그의 윤리학적 논의 방법이 윤리학적 주제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이해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이 대상을 드러내는 절차에 관한 기술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적 지식도 그가 사용한 윤리학적 논의 방법에 의해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윤리학적 논의에서 출발점이 되는 개연적인 전제와 이것으로부터 도출되는 개연적인 결론의 의미가 분석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존의 윤리설의 방법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방법에 의해 덕론을 구성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존의 윤리설 및 플라톤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그가 제안하려고 하는 윤리학적 방법이 무엇인지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그의 윤리학적 접근법을 EN, Topica, 그리고 Analytica Priora 등과 연결해서 해석함으로써 윤리학은 “주제가 허용하는 정도의 정밀성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주장의 이유를 찾고자 한다. 그리고 위의 물음들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아니지만 EN 제6권 제3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윤리학적 논의 방법이 Analytica Posteriora와 연관됨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 Analytica Posteriora Bk.Ⅱ, 19에서 위의 물음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Ⅱ. 플라톤 및 기존 이론에 대한 비판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의 목적과 연구 대상을 지식이 아니라 훌륭한 행동 또는 옳은 행동이라고 밝히고(제1권 제3장), 그리고 도덕교육 및 그 방법의 필요성에 대해서 플라톤의 견해를 지지한다: “플라톤이 말했듯이 우리는 마땅히 기뻐해야 할 것을 기뻐하도록 그리고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을 겪을 줄 알도록 아주 어렸을 적부터 특별한 방법으로 교육시켜야만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론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주요 내용 중의 하나는 옳은 행동을 위한 지적인 덕(탁월함)에 해당하는 실천지φρὀνησις이다. 실천지는 인간을 위해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식별하는 기준 즉 로고스λόγος에 의거해서 행동할 수 있는 성격의 상태이고, 그 옳은 행동은 각 개별적인 상황에서 로고스에 따라 지행을 일치시키는 실천지의 소유자에 의해서 성취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언한다. 따라서 그의 윤리학은 옳은 행위의 기준과 이것을 판단하는 실천지 교육에 있어서 필요한 자신의 논의 방법을 전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로고스는 그의 윤리설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의 하나로서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reason이라고 번역되고 있다. D. Ross는 EN의 그 귀절들에서 그 용어가 이성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 터득된 어떤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성의 원리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로고스라는 말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다른 문맥에서 합리적 원리, 합리적 근거, 올바른 규칙( ὀρθὸς λόγος) 뿐만 아니라 때로는 논증, 추리, 추리과정 등의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다. 그의 윤리학에서 로고스는 먼저 이성의 기능이라는 논리적 의미와의 관련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실천지에 의해 도덕적 행위가 선택되어 실행될 때 도덕적 성품이 없어서도 안되지만 옳은 행위의 원리에 대한 파악이 결부되지 않을 수 없으므로(제6권 2장) 로고스는 인식의 기능과도 관련이 있다. 그 다음 “옳은 행동은 실천지의 소유자에 의해 성취되므로” 행위 원리에 관하여 숙고하는 추론 기능λογιστικὀν의 아레테(탁월성)인 실천지는 도덕적 판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적 조건으로서 언급된다. 그러나 실천적 추론의 아레테인 실천지의 역할이 행위 목적을 직관하는 능력인가 그렇지 않으면 어떤 행위 목적에 대한 수단을 선택하는 능력인가 라는 문제에 관해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실천지는 결코 이해하기 쉬운 개념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윤리학 이론에서 로고스의 논리적․인식론적 의미뿐만 아니라 실천지의 역할은 결국 아리스토텔레스 나름의 윤리학적 방법과 관련해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지의 역할에 관한 결정적인 대답을 시사하는 귀절이라고 자주 인용되는 EN. 1143a 35-b 6에서 로고스는 논의 또는 추론의 형식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추론의 서로 다른 두 가지 형태에서, 즉 과학적 증명을 제시하는 논증ἀπόδειξις과 실천적인 추론에서 직관νούς의 역할이 규정된다. 그에 따르면 실천지에도 논증의 직관에 상응하는 실천적 직관의 작용이 있다. 그런 직관의 기능으로 실천적 추론이 구성되고 그 실천적 추론이라는 방법에 의해 윤리적 원리들ἀρχαὶ이 확립된다고 논한다. 그 원리들은 세간의 여러 견해들이 지니고 있는 여러가지 난점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면서 밝혀지는 것이다. 심지어 소크라테스 이전의 이론을 비판할 때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찰과 실험에 근거한 논증을 자주 사용할지라도 그런 논증보다는 자신의 철학 체계로부터 이끌어 낸 이론적 반론을 중요시한다. 모든 견해를 이렇게 검토할 수 없다면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수의 견해와 가장 유력한 견해들을 검토하고 또한 여러가지 견해들 중에서 미심한 것을 제거해 감으로써 윤리적 원리들이 밝혀질 수 있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구상이다. 여러가지 견해들의 문제점들을 제기하는 검토를 통하여 어떤 것은 논박하고 또 어떤 것은 지지함으로써 “난제를 해결하는 것은 문제의 답을 찾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은 그의 윤리학적 방법을 암시한다. 따라서 그의 윤리학적 이론은 실천적 추론이라는 그 자신의 윤리학적 논의 형태 또는 방법과 관련해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주장하려는 실천지 개념의 설명을 위해서 소크라테스를 비판하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사람이 절제나 용기 등의 윤리적 덕(ἠθική ἀρετὴ)을 위한 도덕적 성품을 어느 정도로는 자연적으로 가지고 태어나지만 “엄격한 의미의 선κύρίως ἀγαθὸν”을 위해서는 반드시 실천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연적 성품ἕξις의 덕과 지적인 덕인 실천지의 관계에서 후자의 덕을 엄격한 의미의 덕이라고 규정하는 대목에서 소크라테스를 비판한다. 오로지 엄격한 의미의 덕이 실천지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실천지를 잘못 파악하는 주장에 대한 비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가 “모든 덕이 실천지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 것은 옳지만, 모든 덕이 실천지의 형태이라고 말한 것은 옳지 못하고”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탐구는 일면으로는 옳은 반면 다른 일면에서는 그릇된 길로 빠졌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적 덕이란 ‘올바른 규칙에 따르는’κατὰ τὸν ὀρθὸς λόγος 성품ἕξις이라는 정의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윤리적 덕이 ‘올바른 규칙에 따르는 상태’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올바른 규칙을 포함하는’μετὰ τού ὀρθὸς λόγος 성품임을 밝히려고 한다. 그런 성품의 탁월성이 바로 실천지라는 지적 덕이다. 그는 실천지야말로 도덕적으로 옳은 규칙에 관한 지식이며 그런 실천지를 소유하는 자는 자신의 정신 속에 옳은 규칙을 가지고 있다는 설명을 시도한다. EN 1103a 2에서 ‘엄격한 의미의κύρίως’ 덕이 되는 실천지는 마치 행위자가 부친의 충고에 따르듯이 단지 옳은 규칙에 따르기만 하는 상태가 아니라 행위자 스스로 옳은 원리를 판단(소유)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뜻은 EN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하려는 실천지의 추론적 기능과 관련된다. 그러므로 그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에 있어서 모든 덕은 에피스테메 형태였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그는 자신의 독특한 윤리학적 논의 형식을 제시하고 그런 논의의 탁월한 능력이 곧 실천지라는 엄격한 의미의 지적인 덕이라고 설명한다.
EN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독자적인 윤리학적 탐구 방법은 플라톤에 대한 비판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제1원리ἀρχαὶ로부터 출발하여 논의λόγος하는 것과 제1원리를 향하여 논의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옳은지 묻고 심의한 것을 옳은 일이었다고 평가하고 그 양자가 서로 다른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됨을 강조한다. 이 귀절에서 로고스λόγος는 일반적으로 추론 또는 논증이라는 뜻도 내포하지만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은 자신의 윤리학적 방법을 제시하려는 의도를 함축하고, 그런 방법은 구체적으로 ‘에파고게’ 또는 ‘변증술적 추론’이라고 지칭되고 있기 때문에 논의라고 번역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윤리학적 논의의 출발점으로서 대상에 관한 언급을 보면 이런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잘 알려진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나위가 없지만, 잘 알려진 것에는 두 가지 의미 ― 하나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이라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그 자체로(무조건적으로, 또는 자연적으로) 잘 알려진 것이라는 의미 ― 가 있는데,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대상들 중에 어떤 것들은 우리의 인식이고 다른 것들은 그 자체에 관한 인식이다. 윤리학적 논의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다.
그러면 그가 윤리학적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물음을 해결함으로써 그의 윤리학적 주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는 특징은 「분석론후서」에 따르면 제1원리ἀρχαὶ의 조건들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특징들 중에서 근본적, 직접적이라는 특징은 동일한 조건이라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왜냐하면 어떤 원리를 논증하는 다른 우선적인 원리가 없는 경우를 근본적이라고 부르고, 무엇을 설명하는 다른 중간 개념이 없는 경우는 직접적이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 특징은 그가 말하는 추론의 넓은 뜻에서 보면 제1원리의 동등한 조건이고 또 그런 원리들은 연역에 의해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가 윤리학적 논의의 출발점이라고 규정하는 ‘잘 알려져 있음’의 의미는 근본적 또는 직접적이라는 제1원리의 특징과 연관해서 해석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제1원리의 ‘설명적’이라는 특징은 ‘잘 알려져 있는 것’을 필요로 하며, EN에서 ‘잘 알려져 있는 것’은 ‘가르침’을 위한 출발점이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음’이라는 의미는 귀납과 연역에 관한 언급에서 나타난다. 그는 「분석론후서」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가르침은 ‘이미 알려진 사실에 관한 지식들’로부터 출발하며, 모든 가르침은 귀납ἐπαγωγή이나 연역συλλογισμὀς에 의해 진행된다고 말한다.
먼저 가르침은 귀납을 통하여 진행된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제1원리는 연역에 의해 증명될 수 없지만, 귀납은 연역이 출발점으로 삼는 제1원리 또는 보편적인 것을 제공한다고 그는 말한다. 이런 이유로 그가 말하는 윤리학적 제1원리들은 귀납에 의해서 설명․획득되는 것이다. 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론후서」 71a5-10에서 귀납ἐπαγωγή이라는 용어에 포함되어 있는 동사 ‘ἐπάγειν’의 의미를 ‘학생에게 지도하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로스는 학생들로 하여금 개별적인 것에 함축된 보편적인 것을 알려줌으로써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에로 ‘이끌어 간다’는 뜻으로 적절하게 해석한다. 왜냐하면 71a5-10에서 귀납이란 “명백하게 알려진” 개별자 안에 함축된 보편적인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라고 언급되기 때문이다. 또한 「변증론」에서도 귀납은 개별자들로부터 보편자에로 나아가는 통로이라고 언급하고 있듯이 가르침은 귀납을 통하여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귀납은 개별적 사실들로부터 일반적 명제를 추론하는 과정이 아니라, ‘잘 알려져 있는 것’이라는 어떤 주어진 일반적 명제를 개별적 사례들을 통하여 검증하는 절차를 의미한다. 윤리적 논의에서 귀납의 절차와 의미는 그의 윤리학적 방법과 관련해서 다음 장에서 논의할 것이다.
그 다음 EN에서 연역을 통하여 가르쳐지는 대상은 에피스테메ἐπιστήμη를 가리킨다. 에피스테메는 EN에서 강조하려는 윤리적 실천지φρὀνησις와 구별되는 것이다. 거기에서 “에피스테메는 논증(아포데잌시스)할 수 있는 능력의 상태”라고 불려진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논증(아포데잌시스)은 이미 규정된 그리고 참인 전제의 제1원리들로부터 출발하여 과학적으로 증명을 제시하는 넓은 의미의 논리적 추리이다. 논리적 추리의 전제인 제1원리들은 논증에서는 불변적이며 또한 그 자체로 잘 알려진 것들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윤리학적 논의의 방법에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들이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전자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고 표현되고, 후자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은 곧 ‘실천지φρὀνησις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에피스테메와 실천지는 둘 다 잘 알려져 있는 것들로부터 출발하는 추론συλλογισμός이라는 넓은 의미에서나 그런 추론 능력의 상태라는 점에서는 구별되지 않는다. 게다가 윤리학적 주제에 관한 논의의 형태가 때로는 ‘쉴로기스모스συλλογισμός’라는 용어로 표현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EN에서 쉴로기스모스는 반드시 행하여야 할 행위를 다루는 일종의 논의 방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적 추론 방식을 특히 논증적 추론의 능력 상태와 뚜렷하게 구별하면서 자신의 윤리학적 논의 방법을 생각하고 있으며 그런 논의․추론에서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사실에 관한 지식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을 비판함으로써 제시하고자 했던 윤리적 방법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어떻게 제1원리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이 될 수 있고 또한 획득될 수 있는가? 그리고 제1원리를 알거나 이해하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 이러한 문제에 대한 EN에서의 윤리학적 논의 방식과 관련 있는 「분석론후서」 제II권 제19장의 주석에서 반즈는 첫번째 물음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을 귀납(에파고게)의 과정에 의해서라고 해석하고, 두번째 물음에 대한 대답을 직관(누스)이라고 해석한다. 이것이 지식 획득의 방법과 인식 능력에 해당하는 서로 다른 대답이라고 간주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즈는 전혀 불일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반즈의 이러한 해석과 EN 1139b에서 제1원리의 획득 방법이 귀납이라는 설명에 의하면 윤리학적 제1원리의 획득 방법에는 합리주의적 요소가 결코 없는 듯하다. 즉 로고스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연역적으로 논증(증명)되지도 않고 본유적인 것도 아니다. 또 자명한 것에 관한 직접적인 심적 파악에 의해 획득되지도 않는다. 마음의 활동은 개별적인 경우들의 감각-지각으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가 에파고게라고 불렀던 과정에 의해서 보편자의 파악에로 나아간다. Metaphysics에서도 그 단계를 지각, 기억, 경험, 지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역시 EN 1139b에서도 “모든 가르침은 이미 알려져 있는 것에서 출발하며… 연역이 출발점으로 삼지 않을 수 없는 아르케들은 귀납ἐπαγωγή에 의해서 획득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체로 해석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에파고게를 우리가 알고 있는 경험주의적인 귀납추론과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가 기술하고 있는 과정이 단순한 귀납추론의 표준적인 형식과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실천지φρὀνησις라는 지적인 덕ἀρετή의 논리적 기능에 관해 논란이 되는 귀절에서 윤리적 원리들이 실천적 추론에서 직관(누스νούς)의 역할에 의해 파악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에파고게라고 불려지는 그의 윤리적 방법에서 합리주의적 요소가 있다면 실천적 추론에서 누스의 역할이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Ⅲ. 통념과 변증술적 추론
잘 알려져 있는 견해로부터 윤리학적으로 논의하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이나 행복에 관한 여러 가지 정의를 검토할 때에는 이것이 어떤 전제로부터 이끌어 낸 논리적 결론인지 검토할 뿐만 아니라 그 주제에 관한 일반적인 견해에 비추어서 고찰해야만 한다고 제안한다. 이처럼 EN의 서두에서 그는 윤리학적 논의의 출발점을 규정하고 다른 부분에서는 논의의 주제와 방법을 좀더 분명하게 암시한다: “우리에게 알려진 사실들을 드러내어 먼저 그 난점들을 논의한 후에 가능한 한 모든 통념ἔνδοξα의 진리성을 확립해야만 한다.” 모든 통념들을 검토하지 못할 경우에는 보다 많은 그리고 가장 권위 있는 견해의 진리성을 확립해야만 한다는 주장을 그는 덧붙인다. 통념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엔독사는 ‘평판이 나 있는 견해’를 가리킨다. 어떤 특정한 주제에 관한 통념들이 보통 혼란스럽고 심지어 그 통념들 사이에는 명백히 모순이 드러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대체로 그 통념들이 적어도 진리의 한 측면을 나타내고 있음을 가정하고 도덕적 또는 정치적 주제에 관한 진지한 논의를 위해서 통념들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통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적 논의에서 출발점이 되는 중요한 개념이고 또한 앞장의 논의와 연결하여 이해하면 통념은 그의 실천적 추론의 출발점으로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것’을 가리킴에 틀림없다.
이러한 통념으로부터 출발하는 추론의 형태는 Topica에서 ‘변증술적 추론’ὁ διαλεκτικὸς συλλογισμός이라고 불려지고, EN에서는 그런 추론적 기능λογστικὀν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지적인 탁월성(덕)이 실천지(프로네시스)라고 불려진다. 실천지와 에피스테메는 지적인 탁월성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구별된다. 논증과 추론의 차이점에 근거하여 다음 두 가지 지적인 덕이 구별된다. 에피스테메는 과학적 증명의 능력을 포함하기 때문에 이런 논증과는 다른 형태의 추론 기능과 관련이 있는 프로네시스(실천지)와 구별된다.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적 주장에서는 논증과 추론이라는 두 종류의 구분이 명백하게 시사된다. 전자는 과학적 증명을 제시하는 논증(아포데잌시스)이고 후자는 사람들끼리 논쟁하는 가운데에서 발견되는 변증술적 추론이다. 논증은 「분석론후서」의 주제이고 Topica에서는 변증술적 추론의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변증술적 추론은 EN에서든 Topica에서든 제1차적이고 참인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논증(아포데잌시스)과 대조적인 것으로 규정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적 논의 방법에서는 그가 말하는 변증술적 추론과 이것의 중심 개념인 통념이 매우 중요하다.
그가 통념을 변증술적 추론의 출발점(명제)으로 삼는 것은 행위의 문제에 관한 많은 사람들 또는 철학자들의 견해들 중에는 옳은 판단이 있을 수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Topica 105b 10-14에 따르면 모든 경우 혹은 많은 경우에 참이라고 여겨지는 의견은 아르케로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물론 여러가지 견해들은 제각기 다른 관점에서 또는 가끔 다의적인 언어로 언급되어서 서로 모순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윤리학의 주제는 ‘다른 방식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최선의 [행위] 목적이 이러저러한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참이라고 받아들여지는 여러가지 통념적 견해들이 윤리학적으로 논의될 수 있다. 이러한 여러가지 통념들은 변증술적 추론의 출발점이 된다. 예컨대 탐구의 어떤 주제에 관한 여러가지 통념들을 전제πρὀτασις로 취하고 이 전제에 대하여 다시 ‘~인가 ~이 아닌가’라는 형식의 변증술적 문제πρὀβλημα를 제기하여 주제로 설정한다. 예컨대 최고선이 아름다운 것, 혹은 유쾌한 것, 유익한 것이라는 통념들 각각에 대해서 ‘최고선은 아름다운 것인가? 혹은 유쾌한 것인가? 혹은 유익한 것인가?’라는 물음을 변증술적 논의에서 전제로 삼는다. 다시 이런 물음 각각에 대해 ‘~인가 ~이 아닌가’라는 형태로 물음을 제기하여 변증술적 탐구의 주제로 삼아서 이런 물음을 해결해 가는 것이 그의 실천학적 주제에 관한 변증술적 추론이다. 이때 그가 생각한 윤리학의 임무는 통념들의 진리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1145b1-7에서 주장하는 윤리학적 논의의 주제와 방법은 통념적인 견해들을 들추어내고, 그것들에서 명백한 모순을 검토하여, 그 가운데 잘못이 밝혀진 견해들을 버리고, 그 이후에 남아 있는 일반적 진리를 논리적으로 이끌어 내는 것이다.
윤리학적 연구 방법이 정밀하지 못하다는 표현과 그 이유는 그가 말하는 통념의 개념과 먼저 관계 있다. 그런데 변증술적 추론에서 전제가 되는 통념ἔνδοξα의 개념을 번역하기는 쉽지가 않다. Pickard-Cambridge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의견들’이라고 표현하고 Tricot는 ‘개연적 전제들’이라고 표현한다. Le Blond는 그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여 단일한 개념으로 결합될 수 있다고 논한다. 물론 그가 객관적이라는 의미와 내적인 개연성이라는 의미를 분리하고 있지만, 그러나 객관적인 개연성이라는 개념이 통념의 주된 의미로 간주되는 주장에 반대하여 J.D.G. Evans는 Topica A1과 An. Pr. b27(70a 2-7)의 해석을 근거로 삼아 비판하고 있다. 그는 An. Pr. b27에서 통념적ἔνδοξος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또는 ‘사람들이 대체로 어떠하다고 알고 있는’ 개연적εἰκός인 전제를 뜻한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가능한 것과 대다수 사람들이 발생할 것이라고 믿는 것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상세한 설명과 명백한 구분이 없기 때문에 통념의 개념이 어떤 단일한 개념으로 번역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EN으로부터 인용된 귀절에서 표현된 통념적인 전제들이란 ‘일반적으로 그럼직하다고 알고 있거나 그럼직하지 않다고 알고 있는 의견들’을 가리키지만 그러나 엄격하게 두 가지 의미로 세분된다. 통념적 전제들이 “모든 통념”이라고 해석될 경우에는 비제한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견해를 지칭하겠지만 그러나 “보다 많은 또는 가장 권위 있는 견해”라는 뜻으로 해석될 때에는 제한적인 통념의 개념을 의미한다. 1145b 7 이하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변증술적 추론에서는 “모든 통념들을 검토하지 못할 때에는 보다 많은 그리고 가장 권위 있는 견해의 진리성을 확립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무조건적으로 비제한적인 견해들이 통념적 전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Le Blond가 제한적인 의미의 통념과 비제한적인 의미의 통념을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번역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Evans의 지적은 정당하다.
통념의 구별은 다음의 귀절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래되고 철학자들의 동의를 얻고 있는 견해”라는 제한적인 통념에 비추어 선과 행복에 관한 정의를 모색한다. 여기서 통념은 분명히 대표성 있는 누군가의 견해를 가리킴에 틀림없다. 유명하다고 평판이 있는 사람들(sophoi 또는 gnorimoi 또는 endoxoi)의 견해이다.
제한적 통념과 비제한적 통념의 이러한 두 종류의 구분은 비록 뚜렷하지는 못하지만 Topica 100b 20-23에서 언급된다. “모든 사람에게 혹은 대다수의 사람에게 혹은 현인들에게, 요컨대 그들 모두에게 혹은 그 대다수에게, 혹은 가장 유명하다고 평판이 나 있는 사람들에게 그러하다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들”이 통념적인 전제에 관한 정의이다. 그리고 특히 104a 8-10에서는 변증술적 문제에서 통념적 전제에 반대되는 역설적παρἀδοξος 견해를 제외시킴으로써 변증술적 추론의 출발점인 통념적 전제는 더욱 제한되고 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의 견해가 상충할 때에 역설은 일반적으로 승인되기 않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입장은 윤리적 판단과 행위 사이의 연관에서 어떤 윤리적 속성의 실재와 그것에 관해 인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평판이 있는 어떤 특정인의 윤리적 판단이 옳음을 전제하고 있다. 이 근거는 EN 제1권 제4장에서 명시된다. 제1권 제1-3장에서 윤리학의 목적과 주제 및 취급 방법에 관해 소개된다. 즉 윤리학의 주제인 선에 관한 지식은 우리의 삶에서 우위적이고 가장 으뜸가는 기술(정치학)에 속하지만 그러나 윤리학적 논의는 개연적인 출발점에서 논의함에 있어서는 개연적인 결론에 도달함으로써 주제가 허용하는 만큼의 정밀성을 가지면 충분할 것이라는 주장을 서론으로 삼고 있다. 이어서 제4장에서는 선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면서 선에 관해 “지금까지 주장된 다른 모든 의견들τὰς δόξας을 검토하는 것은 별로 소득이 없는 일일 것이다. 단지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유력한 것들 혹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보이는 의견들만을 검토하면 충분할 것이다” 라고 주장함으로써 합리적인 논거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는 제한적인 통념이 윤리학적 설명의 출발점이라고 표현된다. 그러므로 윤리학적 설명의 통념적 전제는 객관적인 가능성의 외연 개념으로 간주될 수 없다. 왜냐하면 Evans의 지적처럼 객관적 가능성은 제한적인 통념적 견해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도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대다수 또는 평판이 있는 사람들의 견해’가 바로 윤리학적 논의 형태의 변증술적 추론에서 통념적 전제의 외연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사실로부터 변증술적 추론은 먼저 통념에 근거하고 있고, 그 다음 윤리적 문제에 적용할만한 것이라는 두 가지 뚜렷한 특성이 지적될 수 있다.
Ⅳ. 윤리학적 논의 방법의 특성
통념들이 그의 윤리학적 추론에서 전제가 되는 방법적 특성 때문에 “주제가 허용하는 정밀성에 만족해야만 한다”는 그의 주장이 절대적인 선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는다고 이해될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윤리학적 논의에서 제한적이든 비제한적이든 통념들을 출발점으로 삼는 이유는 윤리학적으로 통념적 견해들을 공격하거나 방어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그의 윤리학적 논의에서 일차적으로 고려되는 통념들은 제한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변증술적으로 논의하는 주제에서 역설이 제외되지만 그러나 전적으로 배제되지는 않는다. 역설적 견해도 변증술에서 참조되는 경우에는 하나의 입론Thesis으로서(104b 20, 34), 즉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에 모순되는 신념 또는 생각의 한 형태로서만 고려될 뿐이지 그 자신이 의도하는 윤리학적인 검토를 위해서 취급되지는 않는다. 입론이 통념과 구별하여 표현되는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통념의 개념과 차이성을 명백히 밝히기 위해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론이 하나의 신념 형태로서 고려되는 것은 그가 변증술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아포리아와 전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변증술적 문제는 아포리아를 지니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의 변증술적 논의는 통념적 명제로 구성된다. 예컨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듯이 ‘좋음은 유익함인가?’ 라는 질문 형태의 명제는 그에 있어서 논의를 구성하는 전제가 된다. 이러한 명제와 변증술적 추론에서의 문제는 질문의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101b 29). ‘좋음은 유익함인가 그렇지 않는가’라는 질문 형태는 논의의 전제에 해당하는 명제와 구별하여 변증술적 문제라고 불려진다. 하지만 그는 명제와 문제를 수적으로 동일하며 성질도 동일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때 전문가적인 견해라고 해석될 수 있는 제한적 통념을 변증술적 문제로 다루는 이유는 개별적 상황의 문제에 관한 대립적 또는 상충하는 추론들 때문이거나 그런 문제들은 만족할만한 설명을 찾기 어려운 난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변증술적 추론에 의존하는 그의 윤리학적 방법은 근본적으로 에파고게라고 불리는 일종의 귀납적 추론이며 이러한 방법론적 특성 때문에 “윤리학은 주제가 허용하는 정도의 정밀성으로 충분하다”는 것인가? 본고의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명백하게 제시하는 이유는 윤리학의 연구 과제는 지식ἐπιστήμη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것이다. 또한 EN에서 그런 대조는 과학적 지식의 탐구ζήτησις와 행위 원리에 관한 숙고의 차이점으로 구별되기도 한다. 그러나 제한적인 통념 즉 평판이 있는 특정한 전문가 또는 대다수의 사람에 의해서 받아들여지는 견해로서의 윤리적 판단과 윤리적 행위의 연관을 개연성의 관계로 설명함에 만족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윤리학적 설명에서 과학적 논증과 같은 정밀성을 결여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이런 점 때문에 그의 주장은 특정한 전문가의 윤리적 판단을 지지하거나 거부하는 상대주의로 연결된다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기존에 일반적으로 그럼직하게 받아들여지는 견해들로부터 논의를 출발하고 그것들을 검토할 때에는 각각의 견해의 독특한 주장을 주의 깊게 고려해야 함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통념적이라는 말을 개연적이라고 표현하는 경우에는 아포리아를 포함하고 있는 변증술적 문제들을 참고하려는 뜻을 가리키기 위해서 ‘통념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Topica 제8권 5장에서와 104b4-5에서 논의되는 변증술적 논쟁거리는 다양한 주제에 관한 통념적 견해이고, 경험이 풍부하며 평판이 나 있는 사람들의 견해와 평범한 대중들 사이에서 상충하는 문제들이다. 아포데잌시스가 아르케 또는 참인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추론하는 것인 반면에 변증술적 추론은 통념으로부터 출발하여 추론한다는 점에서 이 두 가지의 추론 종류가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윤리학적 논의에서 정밀성이 기대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이유를 에파고게(귀납)라는 방법의 탓으로만 이해하기보다는 그의 윤리학적 논의가 “에파고게에 의한 확증”을 통하여 제1원리에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이해될 경우에 그의 윤리설이 상대주의라는 비판이 극복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윤리학적 논의는 Topica에서 변증술적 추론이라고 불려지는 논의의 방식에 의해 다양한 통념들을 검토함으로써 윤리학적 주제에 관한 여러 측면에서 난점을 제기하여 하나 하나의 점에서 참과 거짓을 식별해 나가는 방법이라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에파고게는 개별자로부터 보편자에로 나아가는 통로”로서 연역적 추론보다 더 설득적이고 명료할 뿐만 아니라 에파고게는 감각에 의해서 더 잘 알게 되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절차이다. 또한 이러한 변증술적 추론의 유용성을 말하는 Topica의 대목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각 개별 학문의 아르케들이 각각의 주제에 관한 통념으로부터 따져 묻는 것은 변증술적 추론에만 특유한 것이라고 언급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상대주의적 개연성을 넘어서는 일반적인 정당성은 특정인의 제한적 통념이 아니라 비제한적인 통념과 관련될 때에만 확립될 수 있다. 그의 형이상학이 자신의 윤리학적 기초라는 관점을 고려하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는 비제한적인 통념에 내포된 무조건적인 윤리적 선의 절대적 형식과 무관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사실 인간 행위에 대한 법적인 규칙과 달리 덕의 요건은 관습처럼 대중적 행위의 관행과 의사소통의 과정에서 다듬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절차에서 덕의 기준은 한편으로는 설득과 유인 등에 의해 형성되고 또 대중적으로 평가되는 권위들에 의해서 재생산된다. 이러한 도덕적 권위는 정신적 권위로 승인되는 제한적 통념에 의해 결정된다. 이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천 가능한 윤리적 판단 능력으로서 실천지를 제한적 통념에 비추어 설명하는 것은 그가 윤리학적 논의의 절차라고 불렀던 에파고게에 의한 검토 과정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도덕적 요구는 그때 그때의 개별적 상황의 요건을 목표로 하지 않고 행위의 보편적 규칙 또는 원리를 준수하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 덕의 기준은 무조건적으로 준수해야만 하는 요건이다. 그리고 변증론자는 통념들로부터 전제를 이끌어내고 또한 그 통념의 범위가 일반적이기 때문에, 변증술적 탐구의 범위는 보편적일 수 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에파고게에 의한 검토 과정에서 제한적인 선뿐만 아니라 무제한적인 선을 함께 고려함으로써 이론의 일반적인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근거로서 EN은 “사람들이 무조건적인 선을 추구하지만 옳지 못하다. 무조건적인 선이 자신을 위해서도 선임에 틀림없지만,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선인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한적인 선으로부터 비제한적․무조건적 선에로 나아가는 지적 향상이라는 그의 윤리학적 과제와 유사성은 「형이상학」에서도 언급된다. “행동에 있어서 우리의 과제가 각 개인을 위해서 선인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무조건적으로 선인 것이 각 개인을 위한 선이 되도록 만드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더욱 알기 쉬운 것에서 출발하여 본성적으로 알기 쉬운 것을 자기 자신에게 알기 쉬운 것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윤리학적 논의에 알맞은 정밀성으로 족하고 개연적 결론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서 제안하는 에파고게라는 방법은 상대주의적 한계를 극복하고 지적인 향상을 추구하는 절차라고 이해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윤리적 선에 관한 인식과 그것의 평가 대상인 행위 및 성품 사이의 특수한 필연적 연관을 설명하는 정밀성 그리고 이론적인 단순성을 결여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면서까지 EN에서는 윤리적 선에 관한 옳은 대답의 윤곽적인 설명을 제시하겠다고 말한다.
이때 윤리적 인식과 행위 사이의 필연적 연관을 개념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조건을 취할 수밖에 없다. 그때 그때의 개별적 상황에 합당하게 올바른 반응을 보이는 윤리적 판단자의 내적인 도덕적 감수성으로서 “합당한 도덕적 성향”이 조건으로 취해진다. 윤리학적 논의를 위해서 배우는 자는 올바른 도덕적 진리관을 지닌 성격을 소유해야만 한다고 말하지만 이러한 조건에 관한 상세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실천지를 설명하는 EN의 중요한 대목에서는 실천적 추론에서 누스라는 능력이 강조된다. “누스νούς는 양 방향의 극단 즉 제1원리와 최종 원리를 파악한다. 논증ἀπόδειξις에서 누스는 불변적인 제1원리를 파악하지만, 실천지에 관계하는 실천적 추론에서 누스는 ‘우연적인 것ἐνδεχόμενος’과 ‘다른 하나의 전제τής ἑτέρας προτάσεως’를 파악한다. 왜냐하면 일반적 규칙이 특수한 경우들에 기초를 두고 있듯이 우연적인 사실들은 목적의 파악을 위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른 하나의 전제’는 실천적 추론을 귀납의 과정으로 해석하고 또한 그런 추론 기능의 탁월성을 지칭하는 실천지라는 덕의 역할이 행위 수단의 파악 능력이라고 해석하는 입장에 따르면 실천적 추론의 소전제가 된다.
그런데 본고의 앞에서 논의되었듯이 윤리학적 제1원리를 획득하는 귀납의 과정 또는 방법을 의미하는 용어는 에파고게이다. 그리고 실천지의 능력을 설명하는 위의 귀절에서 누스는 귀납적 과정이나 지식 획득의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 또는 이해의 일종임을 내포하고 있다. 누스라는 용어는 종종 합리주의적 의미로서 직관intuition이라고 번역된다. 그렇다면 개별적 경우들에 관한 지각으로부터 보편적인 인식에로 진행해 가는 과정이 어떻게 합리적 능력에 의해서 수행될 수 있는가 라는 문제가 발생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누스는 제1원리 또는 보편자를 파악하고 있는 마음의 상태ἕξις로서 episteme와 대조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화인과 어윈도 바로 이런 문제 의식에서 누스를 오성understanding이라고 번역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누스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제1원리들 중에서 중요한 하나의 것은 정의이다. 그의 윤리학의 주제는 선 또는 덕에 관한 정의이다. 에파고게 즉 개별적인 경우에 관한 귀납적 연구에 의해서 그런 과제가 해결된다. 예컨대 유덕한 행위들을 관찰함으로써 덕에 관한 정의에 도달한다. 이런 지식은 발견의 과정상 마지막에 얻어지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그의 Metaphysics에서 지각, 기억, 경험, 지식의 단계로 설명된다. 이런 절차가 만족할 정도에 이르게 될 경우 덕 또는 선의 정의는 제1원리로서 윤리학적 설명의 기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절대적․비제한적 선의 이해에 도달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 또는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절대적인 선은 도덕적 논의에서 마지막으로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윤리학적 논의에서 변증술적 추론의 방법은 어떤 문제의 난점들을 제기하는 절차에 의해서 보편적인 선에 관한 지식을 위해 도움이 될 수 있으므로 모든 관점에서 논의하는 철학적 기술을 증진시킬 수 있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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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ristotle's Method in the Ethical Discussion
- Park, Sung Ho -
In Nicomachean Ethics Bk.1 ch.3 and Bk.2 ch.2 Aristotle makes a number of important points about the method to be pursued in a ethical work of the type on which he is embarking. He warns us against expecting that the discussion of ethical problems will be characterized by the degree of precision that is to be expected in other forms of discussion. What is the reason for saying so? Aristotle's reason for saying that precision beyond a certain degree in not to be expected in ethics is as follows. Firstly, any general account in bound to obscure the conscious of obligation that arise from the varieties of circumstance. Secondly, the particular account will inevitably lack the simplicity which he regards as characteristic of precision.
Then how can the probable conclusion which is derived from his method be admited as a ethical principle? Taking notice of the similarity in discussion between Nicomachean Ethics and Topica, I will understand Aristotle's method in the ethical discussion. Since a dialectics begins with endoxa which are probable but not absolutely certain, conclusions of a dialectical syllogism must be of the same character-probable but not certain.
Aristotle describe such a endoxic premise in Ethics as 'what is known to us'. It is an accepted meaning which is a generally accepted idea about a ethical judegment. We move from individual cases, beginning with perception, to a grasp of the universal, by means of a process Aristotle calls epagôgê. This is usually translated as induction, although not every interpreter thinks that what he has in mind is what we understand as inductive inference. Aristotle describe such a process in Topica as a dialectical syllogism.
In a process of epagôgê or a dialectical syllogism Aristotle distinguished between qualified endoxon and unqualified endoxon. For there is conflict opinions in a ethical problem. He confirms ethical principle by means of a process of epagôgê. As for the acquisition of first principles in ethical judgement, Aristotle appeals to what sounds somewhat like an inductive procedure. Beginning with the perception of particulars, which are "better known to us"(qualified endoxon), and moving through memory and experience, we arrive at knowledge of universals, which are "better known in themselves"(unqualified endoxon).
※ Key Words : precision, what is known to us, endoxon, dialectical syllogism, qualified and unqualified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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