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아리스토텔레스의 유한주의 내에서‘가능태적 무한’ 개념의 수용 가능성*

나뭇잎숨결 2022. 2. 12. 10:31

아리스토텔레스의 유한주의 내에서 ‘가능태적 무한’ 개념의 수용 가능성*

 

                                         

-조 명 동

 

 

 

     목     차

 

Ⅰ. 아리스토텔레스의 유한주의

Ⅱ. 무한 개념의 필요성

Ⅲ. 가능태적 무한

Ⅳ. 맺는 말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적 무한(to apeiron dynamei)에 대한 논의는 결코 기대만큼 그렇게 분명하거나 체계적이지는 않다.”1)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he- dynamis)’에 대한 논의는 그의 체계 속에서 매우 독특하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그의 형이상학적 저술들(「형이상학」, 「자연학」 등등)에서 ‘가능태’ 개념은 그 중요성이 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특히 변화(he- metabole-) 또는 운동(he- kine-sis)2)과 관련하여 이 개념을 매우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는 ‘가능태(he- dynamis)’와 ‘완결태(he- entelecheia)’, 그리고 ‘현실태(he- energeia)’라는 개념들을 도입하므로써 그 자신 이전의 희랍 사상가들 사이의 오랜 논쟁거리였던 형이상학적 또는 자연철학적 문제들3)을 해결해 보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이 개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체계 내에 도입한 개념들 중에서도 핵심적 개념 집단을 이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개념 집단은 그리 선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그중에서도 특히 ‘가능태’ 개념은 우리에게 더욱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이기를 꺼리고 있다. 더우기 그 개념 중 「자연학」 제3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하고 있는 ‘가능태적 무한(to apeiron dynamei)’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개념들 중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유한주의자로 불리우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것이 무한하다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일차적으로 ‘무한’이란 개념을 거부하고 있다고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유한주의자라고 불리우는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무한’을 전적으로 배제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자연학」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또 다른 많은 난제들(203b30-2, 206a9-10)을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유한주의적 입장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무한’을 단적으로 배제시킴으로써 야기될 난제들을 피하기 위해 소위 ‘가능태적 무한’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체계 내에 도입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그래서 필자는 이 글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적 무한’ 개념을 그의 「자연학」 제3권을 중심으로 재조명해 보고, 그리고 그가 제시한 이 ‘가능태적 무한’ 개념이 그 자신의 유한주의 내에서 수용될 수 있는지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유한주의에 대해 알아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적 무한(to apeiron dynamei)’ 개념이 그의 유한주의에 도입된 개념이고 또한 이 글이 궁극적으로 그 개념이 그의 유한주의 내에서 수용가능한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유한주의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우선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의 첫 단계로서 우리는 간략하게나마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동시대인들과 함께 기본적인 입장으로 갖고 있었던 자연과학적 입장들을 지적해봐야 할 것이다. 어느 인간도 자신이 속해 있는 그 시대의 지식적 수준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거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예외는 아니다. 특히 경험과학적 방법론에 나름대로 충실했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그가 갖고 있던 자연과학적 입장은 그의 전체 체계 내에 큰 영향을 미쳤고 또한 그로인한 많은 오류들이 그의 체계 내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특히 그의 철학적 체계에 좋지 않은(현대인의 시각에서) 영향을 미쳤던 그의 자연과학적 입장들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한주의를 알아본 후에 우리는 그가 왜 무한 개념을 필요로 했는지 그리고 어떠한 무한 개념을 필요로 했는지를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능태적 무한’이란 개념을 끌어들인 것은 그가 자신의 유한주의 내에서도 어떤 무한 개념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무한 개념을 필요로 한 이유와 그리고 그가 필요로 한 무한 개념의 종류를 언급해 보자. 그 다음으로 그의 소위 ‘가능태적 무한’을 다루기에 앞서 ‘가능태’의 의미를 점검해 보고 그리고 나서 그 ‘가능태’ 개념 중에서 ‘가능태적 무한’의 경우의 ‘가능태’의 의미를 드러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가능태적 무한’의 의미를 밝혀 보자. 끝으로 우리는 이렇게 해서 밝혀진 ‘가능태적 무한’ 개념이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유한주의 내에 수용될 수 있는지를 물음으로서 이 글을 마치게 될 것이다.

 

    Ⅰ. 아리스토텔레스의 유한주의

 

1. 고대 희랍인들의 사유에 있어서 과학적 사유와 철학적 사유의 구분은 분명치가 않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로부터 철학적 사유만을 가려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자칫 그의 사유 전체를 망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코노가 지적한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이 대부분 거짓이고 그리고 그의 과학적 지식이 그의 철학적 사유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으므로 그의 사유체계를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의 잘못된 과학적 지식들을 지적해 봐야할 것이다.4

일반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은 상식과 경험적 관찰로부터 출발하여 합리적 사유를 통해 일반화에 이르는 과정으로 일컬어지고 있다.5) 그것은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친숙한 것으로부터 우리에게 지성적으로 친숙한 것으로 나아가는 과정’6)이다. 이는 오늘날의 자연과학자들의 방법론의 기본적 요소, 즉 경험주의적 태도와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오코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경험주의적 태도를 그의 철학적 체계에 많은 오류를 야기시킨 원인들 중의 하나로 지적하고 있다.7) 왜냐하면 자연과학에서 필요로하는 관찰자료란 단순히 자연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사실들에 대한 관찰이 아니라 어떤 의도된 특정상황 하에서 기대되어지는 내용과 실제 실험을 통해 나타난 결과물에 대한 관찰내용 사이의 상관관계이기 때문이다.8)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엄청나게 방대한 관찰자료들의 놀라운 가치에도 불구하고 그의 경험주의적 태도는 그의 사유체계 전체에 많은 오류를 야기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자연학은 생물학의 한 연장선 상에 있다. 그에게 있어서 자연은 ‘자기 안에 운동의 원인을 내포하고 있는 것들의 총합’9)이고 그의 자연학의 핵심 주제가 바로 ‘운동(he- kine-sis)’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의 가장 큰 특징은 목적론적 설명이다. 그리고 이 목적론적 설명은 다윈 이전까지 서양 생물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총합인 우주를 하나의 유기체로 간주하므로써 자연학을 하나의 폭넓은 의미의 생물학처럼 다루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자연학에 있어서도 목적론적 설명은 자연학 전체를 지배한 중요한 한 요인으로서 작용하고 있다. 생물학에 있어서 목적론적 설명이 이미 거짓으로 밝혀진 것처럼, 자연학 일반에 있어서도 목적론적 설명 역시 받아들이기 어려우므로 그로인해 아리스토텔레스가 거기에 기초해서 설명한 많은 것들 역시 현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위 4원소(ta stoicheia)-즉, 흙(he- ge-)과 물(to hydo-r)과 공기(ho ae-ra) 그리고 불(to pyr)-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과거의 4원소론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10) 그러나 그는 왜 그것들만이 원소들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그리고 어떤 비율로 결합하여 사물들을 구성하는 지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다.11) 다만 ‘(그것들 이외에는) 어떤 것도 (원소로서) 관찰되지 않는다(phainetai d' ouden)’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204b30-5). 물론 그가 말하는 4원소들을 단순히 네 종류의 물질들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것들은 오히려 그것들이 대변하는 어떤 질들로 이해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그렇게 4원소론에 집착하는 지는 확실치 않으며, 그리고 그의 이러한 집착 역시 그의 사유의 한 한계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속성들이 대립쌍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했다.12) 이는 4원소들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자연학」 제1권에서 그는 원리들을 기체적 원리(hypokeimenon) 하나와 대립쌍으로서 속성적 원리들(t'anantia) 둘을 제시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속성들을 대립쌍으로 보는 이유는 그가 변화를 대립적 속성들 간의 상호전환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모든 속성들은 대립쌍을 이루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일종의 부정의 속성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고, 따라서 지나치게 많은 속성들을 상정하므로써 복잡한 존재론을 이끌어들일 위험성이 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 제1권에서 속성적 원리들 중 하나는 결여(he- stere-sis)일 수도 있다는 견해를 잠시 나타내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뚜렷한 언급은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의 기본적 입장 중에서 현대인들이 가장 수용키 어려운 것들 중의 하나는 그의 전체 공간(ho- holos) 개념과 원소들의 본성적 운동(he- phora) 개념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시대인들의 종교적 믿음과 우주론의 영향을 받아 전체 공간을 구형으로 생각했다.13) 그리고 그는 공간이 여섯개의 부분들 - 즉, 상하(tano- kai kato-), 전후(emprosthen kai opisthen), 좌우(aristeron kai deksion) - 을 가졌다고 말한다(205b31-3). 그런데 이 방향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관찰자에 대해 상대적인 것만이 아니라 전체 공간의 절대적인 방향이기도 하다(205b33-4). 이러한 그의 공간 개념은 또한 원소들의 본성적 운동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각 원소들은 각각의 고유한 공간(topos tis hekastou)들을 갖고 있고 이 자신의 고유 공간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바로 본성적 운동이다(205b21-2).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불은 항상 위로 가려하고, 흙은 아래로 내려가려고 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자기 모순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공간의 절대적 부분에서 중심이 아래라면 나머지 다섯 부분과의 관계가 분명치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관되게 진공(kenon)의 실존을 부정하고 있다. 이것은 운동에 대한 관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마찰의 존재로부터 이 세계가 지속적인 운동을 방해하는 뭔가로 가득차 있다고 생각했다(214b12-9). 여기에서 그는 만약 진공이 실존한다면, 물체의 운동은 방해받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물체의 속도는 점점 빨라져서 그 속도가 무한대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215a19-22, 215b23). 그러나 오코노는 ‘공간이 꽉 차 있어서 물체의 속도가 유한하다’는 것으로부터 ‘진공이 실존한다면, 그 안에서의 물체의 속도는 무한대로 증가할 것이다’라고 유추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라고 주장하고 있다.14) 「자연학」 제3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무한의 실존 부정의 또 다른 근거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 그는 진공이 실재한다는 것을 이 세계 안의 물질들이 어느 곳에 편재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나서 물질들이 다른 어떤 곳이 아닌 바로 이 어떤 곳에 편재해 있어야 할 아무런 근거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공의 실존을 부정하고 있다(205a35). 그러나 물질들이 편재해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 물질들의 편재를 부정할만한 충분한 사유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후세이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류들의 근거를 그의 물질관이 표피적 물질관이었다는 데서 찾고 있다.15)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의 강도 차를 ‘희박(to manon)과 응집(to pyknon)’의 정도차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이 두 개념은 오늘날의 개념과는 다르게 진공의 실존을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고려되고 있다. 이는 나안(裸眼)에 의한 관찰에만 의존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소위 ‘미시(微視)적 세계관’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2. 찰튼은 자신의 한 논문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유한주의를 그가 어떤 종류의 무한을 어떻게 부정하는가를 앎으로써 이해한다”고 말하고 있다.16)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유한주의도 그가 부정하고 있는 무한의 종류와 그것을 부정하는 근거를 통해 이해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무한과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문제시 했던 것은 ‘무한한 몸체가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는 첫째로 ‘원리적 무한이 있는가?’, 둘째로 ‘우시아적 무한이 있는가?’, 셋째 ‘속성적 무한이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한한 감각가능한 몸체가 있는가?’를 묻고 있다. 이러한 물음의 방식은 그가 앞선 사람들의 논증들을 재검토하고 그것의 모순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관철해 나가는 자신의 일반적 방법론에 따른 것이다.17)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철학자들이 무한을 원리(arche-)로 제시한 데에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그 첫째는 모든 것들은 원리이거나 또는 자신의 원리를 가져야만 하는데, 그런데 ‘무한’은 그것의 정의상 자신의 한정자, 즉 원리를 가질 수 없으므로 자신이 원리일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203b3-15). 둘째는 생성(he- genesis)과 소멸(he- phthora)이 가능키 위해서 스스로는 생성과 소멸을 겪지 않는 불사(athanaton) 불멸(ano-lethron)의 신적인 원리인 무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203b13-5). 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론은 단순하면서도 조금은 부실해 보인다. 그는 4원소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원리로서 관찰되지 않는다는 것(204b33-5)과, 생성과 소멸은 원소들의 일종의 자리바꿈으로 설명할 수 있으므로 굳이 무한을 그것의 원리로 둘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208b9-11).

 

무한이 속성이 아닌 그 자체로 우시아(ousia; 실체; 개체)라는 피타고라스 학파와 플라톤의 주장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시아에 대한 자신의 정의를 통해 반박하고 있다. 첫째 우시아는 나뉠 수 없다(204a9-12). 만약 나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18) 둘째로 우시아는 일종의 몸체이므로 겉면에 의해 제한되어져 있다(204b5-7). 마지막으로 개체는 반드시 자신의 부분들을 가져야한다(204a8-12).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무한이 나뉠 수 있으면서도 부분을 가질 수 없고(200b18-20, 204a24-34), 또한 어떤 양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204b5-7) 속성들인 수와 양보다도 덜 필연적이라고 논박하고 있다(204a19-20).

무한을 속성으로 다루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크기와 갯수에 있어서 무한의 존재 유무를 따지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이를 정의에 의해(logiko-s), 그리고 자연학적 논의에 의해(physiko-s) 논박하고 있다. 몸체의 정의가 ‘표면에 의해 제한되어진 것(to epipedo-i ho-rismenon)’이므로 크기에 있어서 무한한 몸체는 감각적으로도 사유 속에서도 있을 수 없다(204b5-7). 또한 수가 정의상 ‘헤아려질 수 있음(arithme-ton)’이므로 그리고 무한수는 헤아려질 수 없으므로 수적으로 무한히 많은 몸체도 있을 수 없다(204b8). 더우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속성들은 항상 대립쌍을 이루어야 한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변화를 가능케 하는 중요한 원리 중 하나이다. 그런데 만약 몸체가 복합적인 것(syntheton)이라면, 속성들은 항상 대립자들 간에 동수여야 하고 모든 면에서 구분점들을 가져야 하므로 그것들은 숫적으로 유한해야만 한다(204b11-22). 반대로 무한을 단순한 속성(haploun)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대립자를 갖지 못하므로 속성으로 간주될 수 없다.

 

‘양적으로 무한한 감각적 몸체가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공간 개념 그리고 절대 공간 개념에서 이를 논박하고 있다(205a7-205b1, 205b24-206b8).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감각적 몸체는 자신의 전체와 부분들에 고유한 공간들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무한한 감각적 몸체가 있다면, 그것은 동질적(homoeides)이거나 이질적(anomoion)일 것이다. 만약 그것이 동질적이라면, 각 부분들의 위치가 결정될 수 없으므로 이는 그의 절대적 공간 개념에 어긋난다(205a13-9, 205b24-206b8). 또한 그것이 이질적이라면, 각 부분의 공간들은 각기 대립자들을 담고 있어야만 하고, 그리고 그것들의 수는 동수여야 하므로 그것들의 전체는 결코 무한할 수 없다(205a19-25).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무한한 공간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무한한 공간이 있을 수 없다면, 또한 무한한 감각적 몸체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3. 무어(A. W. Moore)는 무한의 지배적인 개념 집단으로 미결성(uncompletability)의 의미를 가진 보다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개념 집단과 완결성(completion)의 의미를 가진 보다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인 개념 집단을 들고 있다.19) 무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무한을 미결성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무한 개념을 일종의 수학적 개념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무어의 주장은 「자연학」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들을 통해 충분히 지지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한을 수와 양의 개념에 부수적인 것으로 받아들였고 무한을 ‘어떤 것(특정 양) 밖에 항상 또 다른 어떤 것이 취해지는 것(206b33-207a15)’으로 정의하고 있다. 또한 그는 사람들이 무한과 완전성을 동일시 하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207a15-32). 따라서 우리가 무한의 개념 집단에 대한 무어의 구분을 받아들인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무한 개념을 수학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찰튼은 그의 한 논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어떤 것이 취해져도 그것 넘어 항상 다른 어떤 것이 취해진다”는 무한 개념으로부터 ‘결코 초과할 수 없는 가장 큰 존재자가 있다’는 주장을 유도해 내고 있다.20) 그는 207a33-5 와 206b18-19, b20-1 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 한다:

 

i) x는 한 물리적 실재성이고, 그리고 모든 y에 대해, y가 한 유한 양이면, x가 y보다 더 크다는 조건을 만족시키는 그러한 x가 있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찰튼은 다음과 같은 보다 더 강력한 주장을 이끌어 낸다:

 

ii) y는 한 유한 양이고, 그리고 모든 x에 있어서, x가 한 물리적 실재성이면, x가 y보다 더 크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조건을 만족시키는 그러한 y가 있다.

 

찰튼은 이와같이 ‘무한 양이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넘을 수 없는 양이 있다’는 말을 함축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우주를 유한한 것으로 상정했다고 말하고 있다.21) 그러나 오늘날 일부 천체 물리학자들의 주장처럼 우주가 끝없이(무한하게, 또는 비규정적으로) 팽창하고 있다고 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찰튼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반대했을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첫째는 팽창을 설명할 어떠한 인과적 메카니즘도 관찰되지 않으며, 만약 우주의 팽창이 성장에 의한 것이라면, 추가적 질료의 계속적인 공급이 있어야 하고, 만약 팽창이 희박에 의한 것이라면, 우주는 어떤 가열인을 가져야만 한다.22) 둘째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았다. 그래서 우주는 그것이 유기체인 한은 크기와 성장에 한계가 있어야 한다.23) 이러한 찰튼의 주장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우주를 양적으로 유한한 전체로 생각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양적으로 ‘최대 존재자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로부터 우주를 유한한 전체로 생각했다고 인정해도 여전히 다루어야 할 문제가 하나 있다. 우주가 양적으로 유한하다 할지라도 그 안의 존재자들의 수는 무한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양적인 측면에서 무한 보탬은 부정하고 있으나 무한 분할은 가능한 것처럼 보고 있고, 반면에 수적으로는 무한 나눔은 부정하나(수는 하나의 단위로부터 구성된 체계이므로 최소 단위인 일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단위자이므로 나뉠 수 없기 때문에), 무한 보탬은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206b12-33).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수와 양은 서로 대립적이면서, 또한 반대급부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어떤 양은 그것을 무한히 나누면, 나뉘어진 것의 크기는 점점 작아지지만 그것의 수는 점점 커지기 때문이다(206b12-33).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무한수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지는 않고 있다. 왜냐하면 수는 정의상 ‘헤아려질 수 있음(arithme-ton)’이나 무한수는 헤아려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한한 우주가 무한수의 부분을 갖는다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 일종의 공생관계를 갖고 있는 보탬 측면에서의 수에 있어서 무한과 양적인 것의 무한 분할을 그는 절대적으로 부정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음에 다뤄질 무한의 필요성과 가능태적 무한에서 다시 언급되어질 것이다. 다만 미리 언급되어져야 할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에 있어서도 현실적인 무한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흔히 ‘무한’은 ‘집합’과 결부되어 언급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 당시의 수학에서 집합은 오늘날의 그 개념과 매우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 지적되어져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집합 개념은 ‘어떤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것들의 모임’24)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 당시의 집합 개념에서 그것의 원소들은 실재하는 것들에 한정되어 있었다. 후세이는 이와 관련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해지는 그 순간에 그것의 원소들이 모두 실재하지 않는 한 집단을 실재하는 것처럼 다루기를 거절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25)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유한주의는 우주 전체를 수와 양에 있어 유한한 것으로 그리고 그 안의 각 사물들 역시 수와 양에 있어 유한한 것으로 간주했다고 특징지울 수 있다.

 

 

    Ⅱ. 무한 개념의 필요성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 제3권에서 사람들이 무한을 어떤 존재자로 생각하는 다섯가지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무한이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는 믿음은 대체로 (다음) 다섯 가지 근거에서 고찰자들에 의해 일치한다, i) 시간의 경우(왜냐하면 이것은 무한하기 때문에) 그리고 ii) 양적인 것의 나눔의 경우(왜냐하면 수학자들 또한 무한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iii) 생성물(to gignomenon)이 무한으로부터 생성되어진다면, 그러면 오직 그 방식에서만 생성과 소멸은 멈춰지지 않게될 것이기 때문에; 또, iv) 만약 항상 어떤 것이 반드시 다른 어떤 것과의 관계에서만 한정된다면, 그러면 한정된 것은 항상 어떤 것과의 관계에서 한정되고, 따라서 어떤 것도 한정자이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v) 대부분의 경우에 그리고 결정적으로, 모든 이에게 공통적 난점을 만드는 것; 왜냐하면 사유 안의 것은 멈춰지지 않고 그리고 수도 수학적 양들도 천상 밖에 있는 것도 무한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천상 밖의 존재가 무한하다면, 몸체도 우주들도 무한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왜 진공이 저쪽이 아니라 이쪽에 있어야 하는가? 따라서 어떤 덩어리가 정말로 한 곳에 있다면, 그러면 그 덩어리는 모든 곳에 있다. 동시에 만약 무한한 진공과 공간이 있다면, 무한한 몸체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가능함과 실재함은 영원한 것들 속에서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203b15-30).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희랍인들과는 달리 무한 존재자의 실존을 부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한’이란 개념이 절대적으로 부정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206a9-12). 그것은 ‘무한(apeiron)’이란 개념이 어떤 형태로든 실제로 사용되고 있고 또 아리스토텔레스도 자신의 체계 내에서 그 개념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어떤 경우에 ‘무한’ 개념을 필요로 하는지 알아보자.

 

「자연학」에서 무한이 하나의 주제로 다루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운동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자연학」 제3권 1장에서 운동은 연속적인 것(to syneches)으로 이해되고, 무한이 일차적으로 이 연속성 안에서 드러난다고 말해지고 있다(200b16-8). 왜냐하면 ‘연속성’은 정의상 무한 분할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운동(he- kinesis) 또는 변화(he- metabole-)는, 그것이 연속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한, 그 과정은 무한 분할이 가능하고, 따라서 무한 개념이 완전히 배제될 수가 없다. 또 다른 시각에서 운동 또는 변화는 한 실체의 한 속성이 다른 속성으로 바뀌는 것으로 이해되므로, 이것은 하나의 속성이 사라지고 다른 속성이 생성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는데, 바꿔 말하면 한 규정자에 의해 규정된 것이 비규정이 되고 다른 규정자 측면에서 비규정이었던 것이 규정적인 것으로 되는 과정으로 생각될 수 있다. 즉 운동은 한 유한(peperasmenon)-규정된 것-이 무한(apeiron)-비규정적인 것-으로 그리고 무한-비규정적인 것-이 또 다른 유한-규정된 것-으로 바뀌는 과정으로 말해질 수 있다.26) 그러므로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무한(또는 비규정)의 개념이 필요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ho chronos)에는 끝도 시작도 없다고 말한다(203b16-7). 이는 시간과 순간(또는 현재; to nyn)의 관계에서 분명해진다. 순간은 마치 점이 직선의 나뉘는 곳에서 나타나듯이 시간의 한 구분점이다. 그래서 순간은 이전 시간의 끝이고 다음 시간의 시작점이다. 그런데 만약 시간이 유한하다면, 그것에는 시작점과 끝점이 있을 것이고, 그 점들은 한 순간일 것이다. 그러나 순간은 본성상 그 이전의 끝이고 그 다음의 시작이기 때문에 한 유한한 시간의 시작점은 그 이전의 끝이기도 하므로 그 이전 시간들이 있어야 하고, 한 유한한 시간의 끝점은 그 다음 시간의 시작점이어야 하므로 그 다음 시간 역시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시간은 시작도 끝도 가질 수 없으므로 무한해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시간은 운동 또는 변화의 수이고 또한 인간 정신의 산물인 것처럼 보인다(219b1-9, 223a21-9). 오히려 시간은 이 세계의 변화에, 그리고 궁극적으로 천상의 회전 운동에 그 실재성을 의존하고 있다고 말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추상적으로 유추되어 인간에 의해 사용되고 있고, 또한 무한한 것으로 상정되어 있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시간의 측면에서 무한 개념은 전적으로 부정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한 분할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고 있다. 왜냐하면 어떤 유한 양도 그것이 연속체라면 그것은 반드시 무한 분할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200b18-20).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양에 있어서 소위 나눔의 측면으로의 ‘무한’의 실존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나눔의 측면의 무한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한 유한 양이 무한 분할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무한히 많은 부분들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양에 있어서 나눔의 측면의 무한을 어떤 의미에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이것 역시 그가 무한 개념을 필요로 하는 한 이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ho arithmos)를, 일을 그것의 단위자(he- monas)로 해서 구성된 한 체계로 보고 있다(206b30-2). 그래서 수는 일 보다 더 작은 것으로 나뉠 수 없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에 있어서 나눔의 측면으로의 무한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보탬의 측면에서의 무한은 부정하지 않고 있다. 수는 일을 단위로 구성된 체계이므로 파생적으로 아무리 큰 수라도 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탬의 측면으로의 무한은 단적으로 부정될 수 없고, 또한 수학자들이 실제로 무한 개념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수에 있어서 보탬의 측면으로의 무한 역시 설명되어져야 할 것이다.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가 필요로 하는 무한의 종류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질료인의 본성으로서 무한(비규정성) 개념일 것이다. 그는 질료(he- hyle-)의 본성이 무한(비규정성)이라고 말한다(207a21-32).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기초 존재자인 우시아(he- ousia)는 형상적 측면과 질료적 측면을 갖는다. 형상(to eidos)은 우시아를 규정짓는 한정적 요소로 이해될 수 있고, 반면에 질료는 형상에 한정되어지는 또는 규정되어지는 요소로 이해되어질 수 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질료 그 자체는 어떤 형상도 갖고 있지 않고 또한 어떤 방식으로도 규정되어져 있지 않은 비한정적인 것, 즉 무한(비규정성)으로 언급되어지고 있다(207a21-32).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형상과 질료의 개념을 존재자들의 생성과 소멸 그리고 운동 또는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하고 있다. 그래서 이 두 개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체계 내에서 어느 한쪽도 포기되어질 수 없는 매우 중요한 개념 쌍이다. 따라서 질료의 본성으로서 무한(비규정성)은 어떤 방식으로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체계 내에서 유지되어져야 한다.

 

 

    Ⅲ. 가능태적 무한

 

이제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유한주의와 그의 유한주의 내에서도 필요로 하는 무한 개념들에 대해 알아 보았다. 그러므로 이제 그가 자신의 유한주의 내에 무한 개념을 수용하기 위해서 제시한 ‘가능태적 무한(to apeiron dynamei)’에 대해 논의해 보자. 그러나 이를 논하기에 앞서 먼저 ‘가능태’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자.

 

1. 뒤나미스(dynamis; the potential)의 사전적 정의는 ‘strength; power; ability to do something’이다(Lidell, Henry George and Scott, Robert, An Intermediate Greek-English Lexicon, 7th ed., Clerendon Press, Oxford, 1975).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운동 또는 변화와 관련하여 뒤나미스를 크게 두 대립적인 의미로 정의하고 있다(「형이상학」 제5권 12장 참조). 그 하나는 피동자(kine-ton) 이외의 소위 가동자에 의한(hei- heteron) 운동의 원리이고, 또 하나는 피동자 안에 내재된(en hetero-i), 움직임을 수용할 수 있는 운동의 원리이다. 전자는 현대어에서 주로 ‘능력 또는 힘’으로 해석되고, 후자가 소위 ‘가능태 또는 잠세태’로 해석되어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가능태’를 피동자(to kine-ton) 또는 수용자(to pathe-tikon) 안에 내재되어 있는 운동(he- kine-sis) 또는 작용(to poie-ma)의 ‘수용 가능성 또는 잠재적 실현 가능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뒤나미스를 최소한 「자연학」에서 만큼은 ‘가능태’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주어져 있다. 거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이 가동자와 피동자 중 피동자 편에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202a13-b29).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이 ‘피동자(또는 수용자) 안에서 가동자(또는 작용자)에 의해(toude en to-ide)’ 발생한다고 말하고 있다(202a13-b29). 따라서 운동과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뒤나미스는 ‘(피동 또는 수용 가능성이란 의미에서) 가능태’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을 ‘가능태적으로 어떠한 것인 존재자의 (그 어떠한 것으로의) 완결태(he- tou dynamei ontos entelecheia, he-i toiouton)’라는 좀 독특한 말로 정의하고 있다(201b4-5). 그래서 ‘가능태’의 의미를 좀 더 선명하게 보기 위해 ‘가능태’란 용어가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흔히 가능태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구리 인물상과 대립자들의 예{더움과 참(冷) 등}이다. 구리가 한 인물상이 될 수 있는 것은 구리가 그러한 인물상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갖고 있었기 때문이며(201a29-34), 더움은 언젠가 참이 되고 또 참은 언젠가 더움이 되는데 이는 더움이 가능태적으로 참이고 참은 가능태적으로 더움이기 때문이다(205a6-7). 이와 같이 ‘가능태’ 개념이 도입된 것은 희랍인들의 오랜 숙제였던 ‘운동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설명하기 위한 한 방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 제1권에서 운동의 원리로서 기체와 대립자들, 이렇게 세 가지를 제시했다. 그는 운동을 대립자들 상호간의 이전으로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대립자들의 이러한 상호 이전을 가능케 하기 위해 가능태(he- dynamis)와 현실태(he- energeia), 그리고 완결태(he- entelecheia)의 개념을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바꿔 말해서 우리가 변화를 Fa(속성 F를 가진 개체 a)가 개체 Ga(속성 G를 가진 개체 a)로 바뀐 것으로 표현한다면, 이것은 a에서 F가 사라지고 G가 생성된 것인데, 아리스토텔레스를 포함한 동시대의 희랍인들에게 있어서 무(無)에서의 생성(he- genesis)과 무(無)로의 소멸(he- phthora)은 인정될 수 없는 것이므로,27)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대립자들 상호 간의, 또는 특정 속성의 드러남(현실태)과 감춰짐(가능태)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변화는 변화되어진 것 안에 이미 그와 같은 변화를 가능케 하는 잠재적 수용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으로 변화될 수 있는 수용 능력이 그것의 가능태이다.

 

그러나 ‘가능태’란 말은 단일한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Fa가 가능태적으로 Ga이다’라는 말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 경우로 구분할 수 있다: 만약 Fa가 가능태적으로 Ga라면, i) Fa는 언젠가 Ga가 되거나 또는 ii) 언제까지고 Ga가 안될 수도 있다. 또한 iii) Fa는 언젠가는 반드시(?) Ga가 되어야만 하거나 또는 iv) 결코 Ga가 될 수 없거나 이다. 이들의 예들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모든 구리는 가능태적으로 어떤 한 인물상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모든 구리는 조각상의 재료로 사용될 수 있다’라고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구리가 다 조각상의 재료로 사용되지는 않았고, 모든 구리가 지금 조각상의 재료로 사용되고 있지는 않으며, 또한 앞으로도 모든 구리가 다 조각상의 재료로 사용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무엇이 될 수 있음’과 ‘실제로 무엇이 됨’은 다르기 때문이다. 모든 구리가 조각상의 재료로 사용될 수는 있지만, 그것들 중 어떤 것은 조각상의 재료로 사용되었고,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언젠가는 사용될 것이고-i)의 경우, 그리고 어떤 것은 결코 조각상의 재료로 사용되지 않았고,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그리고 앞으로도 사용되지 않을 것이다-ii)의 경우. 그러나 대립자들의 경우는 오히려 필연적인 것처럼 보인다-iii)의 경우. 왜냐하면 앞서의 구리의 경우는 그것은 오직 가능태적 인물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동전, 팔찌, 술잔 등 가능태적으로 여러가지에 속할 수 있지만, 더움과 참, 건조와 습함과 같은 대립자들은 가능태적으로도 자신의 대립자 이외의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205a19-b1).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능태나, 현실태 또는 완결태 개념을 끌어들인 것은 운동 또는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라는 점이다. 즉 이 개념들 속에는 운동 또는 변화라는 현상이 전제되어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계의 운동 또는 변화를 먼저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나서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러한 개념들을 끌어들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제 앞서의 가능태의 네 경우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운동과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은 ‘만약 Fa가 가능태적으로 Ga라면, Fa는 언젠가 Ga가 되거나-i)의 경우, 또는 Fa는 언젠가 반드시 Ga가 된다-iii)의 경우’의 두 경우로 봐야할 것이다-ii)의 경우는 운동 또는 변화가 발생하지 않은 경우이므로 이미 전제되어진 운동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언급되어질 이유가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언급된 가능태의 예에 대해 하나의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한 종류의 씨앗(그것이 동물의 것이든 식물의 것이든)은 그것이 발아 생장할 경우 자신의 선대의 완결된 형상을 쫓아 생장하는데, 이 경우는 앞의 두 경우 중 어느 쪽에 속하는가 하는 의문이다. 각 씨앗은 이미 자신의 선대의 완결태적 형상을 가능태적으로 갖고 있고, 그래서 발아할 경우 그 형상을 쫓아 생장한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필연적인 과정처럼 보인다. 그래서 iii)의 경우에 속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특정 종류의 씨앗은 그 종류의 개체로만 성장한다고 말해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면, 이것을 iii)의 경우에 포함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모든 씨앗은 그것이 발아 생장한다면 항상 어느 특정 형상으로만 발아 생장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 씨앗의 변화 가능성의 전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각 종류의 씨앗들 중 극히 일부만이 자신의 선대의 대를 이을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다른 씨앗들은 각기 다른 변화의 길을 겪게 되고 이것 또한 그것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각기 다른 가능태들에 따라 행해지는 변화의 길로 언급될 수 있다. 그래서 씨앗의 경우 역시 i)의 경우에 속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씨앗의 경우는 구리의 경우와는 다르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씨앗이 가능태적으로 그것의 선대의 형상을 갖고 있음’이 ‘구리가 가능태적으로 인물상임’과는 다른 경우처럼 보이는 것은 다만 정도의 차(오히려 심리적 정도의 차)일 것이다. 그래서 씨앗의 경우도 i)의 경우에 속한다고 봐야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능태나 현실태 또는 완결태 개념을 끌어들인 것은 운동 또는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이고, 이 개념들에는 이미 운동 또는 변화가 전제된 것이므로, 따라서 ii)의 경우는 언급되어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미 지적되었다. 그러나 iv)의 경우는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소위 ‘가능태적 무한(to apeiron dynamei)’이 속해 있는 경우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떤 개체 Fa가 가능태적으로 Ga이지만, 그 개체는 결코 Ga가 될 수는 없다’는 말은 그것의 가능태적 속성 G가 결코 현실태화 또는 완결태화될 수 없다는 의미이므로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무한 개념인 ‘미결성’과 일치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적 무한’이 앞서의 iv)의 경우에 해당한다고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적 무한’에 대해 언급해 보자.

 

2.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몸체가 무한히 많은 부분들을 가질 수 없다고 말했다(205b24- 206a8). 그러나 또한 그는 연속체의 무한 분할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200b18-20). 이것은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 찰튼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연속체의 무한 분할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한 몸체가 무한 부분들을 가질 수 없고 한 현실적 운동이 무한 운동을 만들지 않는다(제논에 의해서 제기된 이 문제는 연속체의 무한 분할 가능성의 전제로부터 출발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 제안한다.28) 그러나 찰튼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제로는 연속체의 무한 분할 가능성을 부정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의 차는 ‘가능성’이란 말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이러한 의미 차는 가능태의 의미 차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미 가능태는 네 가지로 분류된 바 있고, 이 중에서 ‘가능태적 무한’의 ‘가능태’는 네번째에 해당된다. 즉, ‘어떤 것이 가능태적으로 무한하다’는 것은 ‘그것이 언제고 무한해 질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현실적으로 또는 완결태적으로 무한해 질 수는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래서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적 무한’이 어떻게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지를 검토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필요로 하거나 전적으로 부정하지 못하는 무한 개념은 시간의 경우와 양적인 것의 나눔의 경우, 그리고 수의 경우의 무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한이 이 세 가지와 관련하여 존재한다고 말한다(206a9-12). 앞에서 우리는 운동과 질료인에 관련하여서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무한 개념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운동은 일종의 연속체로 파악되고 있고, 그래서 이 경우는 양적인 것의 나눔의 경우로 환원하여 설명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질료인의 경우에 대해서는 우리는 조금 다른 얘기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인의 본성이 무한이라고 말했기 때문에(207a21-32) 이것은 앞서 언급한 ‘가능태적 무한’과는 다른 경우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질료의 실존은 오직 가능태적이다. 그것은 독립적으로 실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질료는 분명 가능태적 존재이다. 그러나 질료인이 ‘가능태적 무한’이라고 말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질료의 본성이 무한이기 때문이다(207a21-32).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무한인 질료가 가능태적으로만 존재한다’라고 말해진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앞서 언급된 것들은 ‘무한한 그러한 것들이 가능태적으로 존재한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 것같다. 왜냐하면 그는 그러한 무한 존재자들의 가능태적 실존도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아리스토텔레스가 필요로 하는 무한 개념과 관련하여 앞서 제시한 세 가지 경우의 검토를 통해 소위 ‘가능태적 무한’이 오직 가능태적으로만 무한한 그러한 것인지를 확인해 보자.

 

앞서서 우리는 시간과 양적인 것의 나눔, 그리고 수가 무한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유를 보았다. 이러한 무한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공통적이고 특징적인 언급을 하고 있다. 그것은 이들이 무한하다는 식이 아니라 무한히 진행된다는 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어떤 것이 취해지면 항상 그것 넘어 또 다른 새로운 어떤 것이 취해지는 그러한 방식으로 언급하고 있다(207a1-2). 이러한 존재방식의 예로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의 경우와 인간의 종(種)적인 연속성과 양적인 것의 나눔의 경우 등을 들고 있다(206a25-7). 한 개별적 인간은 유한 존재자이다. 또한 한 시점의 인간들의 수는 유한수이다. 그러나 인간은 번식을 통해서 무한히 존재할 수 있고 또한 그 수도 무한히 번창할 수 있다. 이렇게 무한히 존재하는 인간은 어떤 동일한 개체가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종적인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인간에 의해 그 존재가 유지된다. 그러나 인간의 종(種)은, 그것이 아무리 오래 존속된다 해도 그것은 더 오래 존속될 수 있으므로, 결코 무한히 존재할 수는 없다. 또한 인간의 수에 있어서도 그 수가 아무리 커도 그것이 수인 한에 있어서는 그것은 헤아려질 수 있고, 그것이 헤아려질 수 있다면 그것은 유한수이므로 여전히 더 큰 수가 될 수 있으므로, 그 수 역시 결코 무한수는 될 수 없다.

 

‘어떤 것이 가능태적으로 어떤 특정 속성을 갖지만 그러나 결코 그 속성은 현실적으로 실현되지 않는다’는 말은 ‘어떤 것이 그 속성을 갖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나, 그것이 그 속성을 실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적 무한’은 시간과, 양적인 것의 나눔과, 수에 있어서 ‘그것들이 논리적으로는 무한할 수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무한하지 않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래서 ‘가능태적 무한’의 ‘가능태’, 즉 앞서의 iv)의 경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나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나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적 무한’과 결부하여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어떤 사물의 한 속성의 현실태화 또는 완결태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당시의 집합 개념29)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현재 또는 어떤 특정 시점에 그 속성이 드러나거나 완결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은 ‘어떤 특정 시점(또는 현재)에 그와 같은 속성이 드러나거나 완결될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간의 경우, 시간이 어떤 특정 시점에 나타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한 점 위에 우리가 선을 나타낼 수 없는 것과 유사하다. 양적인 것의 나눔이나 수에 있어서도 우리가 이미 검토해 보았듯이 그것들이 현실적으로 무한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어떤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한편으로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는 의미이고,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자기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므로,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자기모순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시간의 경우 그것은, 이미 언급된 것처럼, 그것의 시작점과 끝점인 현재(또는 순간)의 정의에 의해 현실적으로 시작도 끝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시간이 무한하다는 것은 정의상 모순을 갖지않으며, 따라서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더우기 시간은 관찰자에 의해 인지된 어떤 변화(또는 운동)의 ‘앞과 뒤(proteron kai hysteron)’의 차에서 이차적으로 인지되는 변화의 수이므로 지성의 산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성(즉, 관찰자)이 없다면, 시간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223a21-9).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는 시간 자체가 논리적인 존재자인 것처럼 보인다. 양적인 것의 나눔의 경우에 있어서 양적인 것은 연속적인 것이다. 그리고 연속적인 것은 정의상 무한 분할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양적인 것의 무한 분할 역시 연속적인 것의 정의에 의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 수에 있어서도 그것의 시간과 양적인 것의 나눔과의 관계에 비춰 봐서, 그리고 수의 체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와 관련해 생각해 볼 때, 그것이 무한하다는 것 역시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 더우기 추상적 수는 존재자의 속성 중의 하나인 개별적 수로부터 유추된 논리적 존재자처럼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논리적으로 무한하다’는 말은 시간적 제약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무한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한’을 미결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그는 ‘무한’을 ‘어떠한 양이 취해져도 그것 넘어 항상 새로운 어떤 것이 취해질 수 있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206b33-207a15). 연속체의 무한 분할의 경우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분할의 결과로 나타난 것들은 그것의 수가 아무리 많고 그리고 그것의 크기가 아무리 적어도 그것들은 여전히 더 나뉠 수 있으므로 시간적 제약이 없다면 그 작업은 끝없이 진행되어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무한 분할은 가능하다고 얘기되어질 수 있다. 수에 있어서도 이것은 그대로 적용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가능태적으로 무한하다는 말은 이와 같은 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간적 제약이 없다면 시간은 무한하다는 말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가능태적으로 무한하다는 말이 논리적인 가능성으로 해석되는 데에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시간은 현실적 존재자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논리적인 존재자처럼 보인다. 그에게 있어서 시간은 ‘있었지만 지금은 없고, 있을 것이지만 또한 지금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217b33-4). 시간은 변화의 수이므로 변화에 의존적이다. 또한 이것은 관찰자에게 의존적이다. 물론 변화도 관찰자도 또한 이 시간에 의존적이지만,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모든 시간과 모든 변화는 궁극적으로 그의 우주의 가장자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속적이고 그리고 신성한 천상의 원형운동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시간은, 개별적 시간이든 전체적 시간이든, 현실적 존재자는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 시간, 연속체의 분할, 그리고 수는 가능태적으로만 무한하다는 말은 그것들이 현실적으로는 결코 무한하지 않지만 논리적으로는 무한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면 이제 ‘그것이 무한하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나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다’는 말로 해석된 ‘가능태적 무한’ 개념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유한주의 내에서 수용가능한지를 검토해 보자.

 

 

    Ⅳ. 맺는 말

 

1. 시간이 가능태적으로 무한하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유한주의 내에 수용되는 데에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체론 자체가 시간의 가능태적 무한성을 보장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수와 연속체의 무한 분할 역시 그의 유한주의 내에 별 문제 없이 수용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이것들은 어떤 크기의 연속체라도 있으면 가능한 것이고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우주 자체가 하나의 연속체들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적 무한’ 개념은 그의 유한주의 내에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지적되어야할 점이 있다. 앞에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한주의를 무한한 감각적 몸체는 없다는 것으로, 그리고 어떤 개체도, 그것이 한 개별적 개체든 우주 전체든, 그것의 크기나 수에 있어서 그리고 그것의 부분들의 크기와 수에 있어서 유한해야 한다는 것으로 특징지었다. 그런데 이때 이들이 유한하다고 말해지는 것은 그것들이 현실태적으로 유한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가능태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무한할 수 없는가? 만약 이들이 가능태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무한할 수 있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떤 특정한 것들의 경우에만 그것들이 가능태적으로만 무한할 수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할 것이다. 물론 개체의 크기와 수에있어서 그것들이 가능태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무한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전체로서의 우주가 유한하고 그리고 거기에 포함된 개체들도 그 크기가 가능태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무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개체는 정의상 어떤 특정 크기를 가져야 하므로 그것들의 수 역시 무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부분들의 수에 있어서는 좀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개체의 부분도 그것의 크기에 있어서나 수에 있어서 무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물론 그것의 크기는 가능태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무한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들의 수 역시 가능태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무한할 수 없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태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연속체의 무한 분할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반대급부적으로 이렇게 나누어진 것들의 수는 가능태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무한하다. 그렇다면 개체의 부분들의 수 역시 가능태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무한하다고 말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결론부터 말해서 어떤 개체들의 부분들의 수도 가능태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무한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약 분할이 물리적인 분할이라면, 무한 분할 자체가 불가능하고 그래서 나뉘어진 것들의 수도 무한할 수 없다. 따라서 물리적인 분할을 통해 한 개체의 부분들이 가능태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무한해질 수는 없다. 만약 분할이 논리적 또는 상상에 의한 분할이라면, 무한 분할이 가능하고, 그로 인해 나뉘어진 것들의 수도 무한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개체의 부분들의 수도 무한해질 수 있다고 말해질 수는 없다. 개체는, 그것이 감각적인 것이든 지성적인 것이든 그것이 개체인 한, 연속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의 부분들 역시 전체와 하나의 연속성을 유지해야 한다. 더우기 아리스토텔레스 유한주의의 핵심은 어떠한 무한한 감각적 몸체도 없다는 것이므로 그가 다루고 있는 개체는 일차적으로 감각적 개체이다. 그래서 이 연속성 역시 감각적 연속성이다. 따라서 어떠한 분할도 한 개체의 연속성을 파괴할 수 없다. 더우기 어떠한 분할도 한 개체의 부분들의 수를 무한하게 만들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한 개체의 부분들이란 임의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할은 한 개체의 연속성을 파괴하지 않는 동시에 그것의 부분들의 연속성 역시 파괴하지 못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한 개체의 부분들의 수는 가능태적으로도 무한할 수 없고 그래서 이 세계 역시 가능태적으로도 무한할 수 없다.

 

2.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 또는 변화를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자연학」 에서 이 운동 또는 변화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하고 있다. 특히 무한을 주제로 삼고 있는 제3권에서 그는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이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어떤 것이 있어야만 한다고 말했던 일반적인 주장에 대해 반론을 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한한 어떤 것 없이도 운동 또는 변화가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소위 가능태와 현실태, 그리고 완결태라는 개념들의 집단을 통해 유한주의적 입장에서도 운동 또는 변화가 설명될 수 있음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무한한 어떤 것을 상정하지 않고서 운동 또는 변화는 설명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래도 여전히 ‘무한’이란 개념 자체가 완전히 파기될 수 없다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소위 ‘가능태적 무한’이란 개념을 통해 이 문제들을 해결하려하고 있다. 이 글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능태적으로 무한하다’고 말한 것의 의미를 밝히고 그리고 그것이 그의 유한주의 내에 수용가능한지를 검토해 보는 데 그 목적을 두었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유한주의에 대해 알아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한주의는 어떠한 개체도 그것의 크기나 수에 있어서 그리고 그것의 부분들도 크기와 수에 있어서 무한할 수 없다는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의 경우와 연속체의 무한 분할의 경우와 수의 경우에는 아리스토텔레스도 그것들이 무조건 무한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래서 그는 그것들이 가능태적으로만 무한하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가능태적으로만 무한하다’는 말을 가능태의 사례들을 구분함으로써 ‘논리적으로만 무한하다’는 의미로 해석했었다. 그리고 우리는 ‘논리적으로만 무한하다’는 말을 세 가지의 측면에서 검토해 보았다. 이렇게 밝혀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소위 ‘가능태적 무한’ 개념이 타당한 것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개념은 그의 유한주의 내에 수용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제기될 수 있는 반론들이 두 가지 있다. 그 첫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한주의 내에서 그의 ‘가능태적 무한’ 개념의 수용 가능성”이라는 문제제기의 타당성에 관한 것이고, 그 둘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 개념을 단순히 논리적인 것으로만 치부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반론들은 매우 있음직하므로 어떤 형태로든 답변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반론들을 정리해보면,

 

반론1) 아리스토텔레스가 유한주의자로 불리우게 된 동기는 그가 소위 ‘가능태적 무한’이란 개념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이 ‘가능태적 무한’ 개념은 그의 유한주의의 핵심이므로 그의 이 개념이 그의 유한주의 내에 수용가능한지를 묻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반론2) 이 논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순간(또는 현재)만이 실제적이고 시간은 단순히 가능태적 또는 논리적인 것으로 생각한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순간들 사이에서 드러나듯이 순간 역시 시간의 구분점으로 드러나므로 시간 역시 순간들 만큼이나 실제적이 아닌가? 그래서 시간이 단순히 가능태적이거나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면, 시간의 무한성 역시 단순히 가능태적이거나 논리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반론1)은 우리가 한 사람의 유한주의를 어떤 측면에서 평가하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유한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그의 어떤 진술을 근거로 하여 그를 유한주의자라고 부르는 지를 검토해 보면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찰튼은 “우리는 한 사람의 유한주의(finitism)를 그가 어떤 종류의 무한을 어떻게 부정하는가를 앎으로서 이해한다”고 말하고 있다.30) 우리가 찰튼의 말을 전적으로 옳다고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해도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유한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기본적으로 어떤 것들이 무한하다는 데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고 그리고 자신의 체계 속에 무한 개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것도 무한할 수 없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 것같다. 그러나 그가 어떤 특정 문제에 대해서는 이러한 입장을 유보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그가 자신의 기본적 입장을 끝까지 고수함으로써 스스로 지게 될 부담을 피하려는 한 방편으로 봐야할 것이다. ‘가능태적 무한’ 개념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유한주의의 한 특징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의 유한주의를 약화시키는 요소이지 결코 그것이 그의 유한주의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떤 것들은 가능태적으로 무한하다고 말한 것은 그것들의 무한성을 어떤 방식으로든 확보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듯이 실제적으로 무한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의 현실적 세계가 모든 면에서 유한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적 무한’ 개념의 그의 유한주의 내에서 수용가능성”이란 문제는 다른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무한하다고 생각했으나 자신은 가능태적으로만 무한하다고 생각한 사례들까지도 그가 자신의 현실적 유한 세계관 내에 수용하는 데 성공했는가를 묻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제기는 문제제기로서 결코 부당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반론2)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소위 시간의 실재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일반적으로 순간과 시간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문제의 요점은 시간없이 순간 또는 현재가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순간 또는 현재는 시간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야 할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시간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순간 또는 현재의 실재성만을 주장할 수 있는가 하는 반론은 단순히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적인 또는 논리적인 시간 개념에만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유한주의 전체에 관련된 반론이 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한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사상 중 하나는 그가 현존하는 것들의 실재성만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체계 내에서 무한 개념들을 배제시키는 근거들 중 가장 첫번째 이유는 그것들이 현실태화될 수 없다는 것이고, 이는 그가 현존하는 것들에 대해서만 그것들의 실재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한 징표이다. 그래서 만약 시간의 실재성을 문제 삼으려 한다면,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유한주의 전체에 대한 반론으로서 제기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유한주의를 특징짓고 그리고 그의 유한주의 내에서 그의 소위 ‘가능태적 무한’ 개념의 수용 가능성을 검토해 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 개념에 대한 반론은 별도의 주제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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