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아리스토텔레스의 쾌락 개념

나뭇잎숨결 2022. 2. 12. 10:32
아리스토텔레스의 쾌락 개념

박 성 호

[한글 요약]


본고에서 필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존의 윤리설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쾌락에 관한 논증을 어떻게 구성하는지 요약하고 거기에서 야기되는 문제들에 관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론은 기존의 쾌락설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구성된다. 특히 행복과 쾌락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널리 수용되는 여러 견해들이 지니고 있는 난점들의 비판에 의해 윤리적 원리들이 밝혀진다. 이런 논의 방법에 의해서 도덕적 덕은 쾌락과 관련하여 설명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쾌락을 과정이 아니라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즉 활동과 삶에는 쾌락이 수반된다. 그리고 쾌락은 완전한 활동의 징표이다. 쾌락 자체는 선의 원리와 무관하지만 유덕한 활동의 부수적 현상이다. 유덕한 활동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은 도덕적 헥시스의 표시이다. 도덕적인 사람은 육체적 쾌락을 멀리하고 이렇게 절제하는 행위에서 기쁨을 느끼고, 부도덕한 사람은 그럴 경우에 괴로워한다. 이런 주장에 대해 엄슨은 육체적 쾌락은 애매하게 사용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 활동의 기쁨과 육체적으로 생긴 기쁜 느낌의 차이점을 어렴풋하게 의식했고 또 느낌의 기쁨을 활동의 기쁨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한다.

그렇지만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0권에서 쾌락은 삶의 활동에 수반하는 것이고, 모든 활동을 완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며, 이런 의미로 활동 그 자체는 쾌락과 결합된 것이라고 요약된다. 그에 따르면 쾌락은 인간적 능력을 실행할 때 생기는 것이다. 각각의 헥시스에 속하는 방해받지 않는 활동들이 있고, 모든 활동은 다른 쾌락에 의해 방해되지 않을 때 가장 바람직하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윤리적 행위에 수반되는 쾌락은 그 행위에 의해 '지각될 수 있는' 과정이라는 규정 대신에 그 쾌락과는 다른 어떤 쾌락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본성적 상태의 활동이라고 정의된다. 그리고 쾌락은 육체적 쾌락, 도덕과 관련이 있는 쾌락, 그리고 순수한 사유와 결합된 쾌락으로 구별된다. 쾌락이 활동을 완전하게 만들어 준다는 의미에서 도덕적 행위는 도덕적 헥시스의 징표이고 이때 그 쾌락은 덕행에 대한 흥미를 증진시켜 준다.







주 제 어 : 쾌락, 육체적 쾌락, 정신적 쾌락, 과정, 활동, 도덕적 덕

1. 문제의 제기



고대 그리스 덕론에서 행복주의라고 일컬어지는 소크라테스의 윤리 사상은 그의 주위에 모여 있었던 사람들에게 서로 다르게 이해되었고, 그후 윤리적 가치에 관한 그의 주장은 공리주의 또는 쾌락주의 또는 자연주의 등의 여러 가지 의미로 전달됨으로써 서로 대립되는 소크라테스 학파가 형성된다. 이러한 결과는 행복 개념의 다의성으로 말미암아 변질된 유형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쾌락주의가 그 중의 한 형태이다. 쾌락주의에 따르면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고 행복은 쾌락을 추구함으로써 달성되기 때문에 쾌락이 최고선이며 행위의 목표이다. 이러한 입장은 쾌락은 선이고 그 반대인 고통은 악이라는 전제에 기초를 두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명성에 이끌려 아테네로 온 아리스티포스는 키레네 학파의 창시자로서 그의 윤리설의 바탕은 쾌락주의이다. 아리스티포스는 행위 목표로서 가치를 근거지우는 문제와 유덕한 자가 추구해야 할 행복의 원리에 관한 문제의 해결을 위한 기준으로서 최고선을 쾌락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그는 미래가 우리의 능력 범위를 넘어선다는 이유로 신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눈앞의 감각적 육체적 즐거움에 국한하여 쾌락을 최고선이라고 강조한다. 순간의 쾌락들은 질적으로 동일하며 단지 강도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평가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현명한 자는 이런 쾌락을 즐길 줄 아는 능력을 소유하기 때문에 쾌락의 노예가 되지 않고 주인이 된다.

그 후 쾌락주의는 테오도루스에 의해서 이타적 행위를 거부하고 정신적 기쁨을 목적으로 추구하는 이기주의적 쾌락론으로 바뀐다. 그리고 헤게시아스에 의해서는 현실에서 쾌락이 획득되지 않는다는 쾌락주의의 이상을 비관하여 오히려 고통의 회피를 강조하는 염세주의로 변모된다. 이러한 염세주의에 이르러 키레네학파의 쾌락주의는 행복의 추구라는 목표와 반대로 외적 세계에 대한 무관심을 최고선으로 추구하는 역설에 빠지게 된다.

그 외에 에우독소스 역시 쾌락이 윤리적 선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원론적으로 찬성하고 쾌락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만 그의 쾌락설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비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독소스 뿐만 아니라 아리스티포스의 쾌락설, 스페우시포스의 쾌락설 등 기존의 쾌락설을 통념적 견해로 간주하여 이것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자신의 덕론을 구성한다. 특히 일반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여러 견해들이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난점을 비판해 가는 자신의 방법에 의해 윤리적 원리들이 밝혀진다.1) 모든 견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없을 때에는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수의 견해와 가장 유력한 견해들을 검토하고 또한 여러 가지 견해들 중에서 미심한 것을 제거해 감으로써 윤리적 원리들이 밝혀질 수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한다. 이런 방법은 쾌락과 관련하여 도덕적 덕을 설명하는 통념적 쾌락 개념에 관한 비판에서도 역시 적용된다.

그는 쾌락에 관한 여러 가지 견해들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들의 검토 과정에서 어떤 주장은 논박하고 또 어떤 주장은 지지함으로써 자신의 덕 윤리학을 완성해 간다.2) 쾌락이라는 용어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전체에 분포되어 나타날 정도로 그의 윤리학적 논의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앞부분(제1권에서 제5권까지)에서는 선과 행복과 쾌락 등의 개념을 인간의 기능과 관련시켜 분석하면서 도덕적인 덕의 정의를 내린다. 이런 시도에는 행복이 윤리적 제1원리로서 찬양할만한 것(τ?μιον)이라는 당시의 일상적 용어에 의한 지지와 도덕적 승인이 전제되고 있으므로,3) 쾌락의 개념은 도덕적인 덕과 행복의 설명을 위해 검토된다고 볼 수 있다. 이 경우 덕은 쾌락과 고통에 있어서 중용을 선택하는 성격의 상태라고 정의되고, 행복은 덕과 동일하다는 견해가 수용된다. 이런 점에서 쾌락은 윤리적 제1원리인 행복과 관계 있다. 제7권은 실천지를 쾌락과 관련하여, 즉 육체적 욕망과 쾌락에 대한 억제와 무억제에 관해 윤리학적으로 논의한다. 특히 제11장에서는 쾌락에 관한 세 가지의 견해 - '모든 쾌락은 선이 아니다.' '어떤 쾌락은 선이지만 대다수의 쾌락은 악이다.' '모든 쾌락이 선이긴 하지만 최고선은 아니다.' - 에 대한 비판에서 자신의 쾌락 개념이 확립된다. 쾌락에 관한 제12-13장의 설명에서 "방해받지 않는"이라는 규정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는 쾌락과 행복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주목할만하다. 제8-9권에서 쾌락이라는 용어는 단지 우애라는 덕의 설명을 위해서 사용된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인 제10권에서는 쾌락에 관한 가장 성숙되고 조심스런 설명이 제시된다고 여겨진다.4) 여기에서 쾌락은 기쁨을 만족해 가는 과정(κ?νησι?; process)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한 것(τ?λειον, 완료된 만족이라는 뜻)이라고 주장된다. 이런 의미는 덕성의 경향성을 가리키는 활동(?ν?ργεια)의 개념과 연관된다. 본고에서는 쾌락에 관한 견해에 기초를 둔 기존의 윤리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적 논증이 전제하고 있는 쾌락의 개념을 해석하고 거기에서 야기되는 문제들을 논의하고자 한다.





2. 행복과 덕에 있어서 쾌락



아리스토텔레스는 EN 제1권 제4장에서 윤리적 최고선에 관한 행복주의를 따른다. 행복에 관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통념적 정의들 - 즉 '행복은 덕이다' 또는 '행복은 실제적 지혜이다' 또는 '행복은 철학적 지혜이다' 또는 '이들 중 어느 하나의 것에 쾌락이 수반되어 있는 것이다' 등등 - 가운데 행복이 덕이라는 견해가 받아들여진다. 제4-12장에서 그는 행복을 쾌락과 동일시하는 일반적인 통념들의 근거를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인간을 위한 선'을 윤리학적 논의의 주제로 설정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을 위한 선은 덕에 일치하는 영혼의 활동이며, 만약 여러 가지 덕이 있다면 그 가운데 가장 완전한 덕에 일치하는 영혼의 활동이라고 정의된다.5) 선의 종류에 대하여 플라톤의 「에우튀데모스」 279a-b, 「필레보스」 48e, 「법률」 743e 등에서 외적인 선, 신체에 관계된 선, 정신에 관계된 선 등으로 구분한 것을 받아들이고 이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신에 관계된 선을 가장 참된 선이라고 지지한다. 그러나 행복을 덕과 동일하게 간주하는 그의 정의는 행복이 본질적으로 누스(정신)의 완전한 활동에 의해 구성된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오히려 지혜로운 삶과 유덕한 삶이 인간의 행복을 구성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가 행복에 관한 기존의 정의들 중에서 덕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견해를 받아들인 첫째 이유는 그가 실천적 행위에 보다 우위적인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은 그가 행복과 덕의 관계를 설명할 때 상대적으로 찬양되는 것(?πα- ινετ?ν)과 절대적으로 찬양되는 것(τ?μιον)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곳에서 나타난다.6) 덕은 가능태로 존재할 수도 있지만 행복은 결코 선의 가능태가 아니라 활동태이기 때문이다. 행복이 선의 가능태가 아니라 활동태로서 실천적 선인 한에서는 수단으로서 선이든 목적으로서 선이든 구별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최선의 것을 상대적으로는 찬양하지 않는다. 예컨대 우리는 신이나 인간 중에 신적인 사람을 상대적으로 찬양하지 않고 '행복한 존재'라고 불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행복은 행위의 제1원리이고 행복을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이 추구되기 때문에 행복은 절대적으로 찬양할만한 것(τ?μιον)이라고 주장된다.7) 그 반면에 선한 사람뿐만 아니라 유덕한 자는 그들의 행동과 거기에 포함된 기능 때문에 칭찬받는다. 그런 행동과 기능은 다른 어떤 것과의 관계를 내포하기 때문에 그리고 덕의 결과는 선한 행위를 산출하기 때문에, 그는 "?παινετ?ν이라는 말이 덕에 대해 어울린다"고 주장한다.8) 이런 의미로 ?παινετ?ν은 유덕한 행위(프락시스)를 평가하는 말이다. 그리고 중용도 역시 상대적으로 찬양할만한 것이다.9)

행복과 덕을 동일시하는 견해를 수용하는 두 번째 이유는 제1권 제8장에서 유덕한 삶 그 자체의 기쁨 때문이라고 언급된다. 유덕한 사람들의 삶은 그 자체 속에 쾌락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로 그는 행복이 덕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쾌락과 관련해서 그는 에우독소스의 쾌락 긍정론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한다. "쾌락의 우위성을 옹호하는 그의 방법에 있어서 옳았던 것 같다… 비록 쾌락(?δον?)이 여러 가지선들 중의 하나이지만 그것이 상대적으로 찬양받을만하지 않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찬양받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임을 나타낸다고 그는 생각했다."10) 플라톤의 비정통 제자인 에우독소스의 쾌락주의가 수용된 것은 도덕적 행위에 수반하는 감각적인 기쁨과 행복 개념이 관련된다는 전제를 위한 것이고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절대적으로 찬양할만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절제에 관해 논의하는 제3권에서 영혼의 쾌락은 육체적 쾌락과 구별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한다. 이 주장은 행복이 쾌락과 대립된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의미한다. 즉 행복에 비해서 쾌락은 개인적인 욕망과 갈망의 반응으로서 본능에 예속되는 개인적 관심 사항인 반면에, 행복은 어떤 헌신에서 생기고 또한 양심의 반응으로서 초자아에 예속되는 사회적 관심 사항이라고 볼 수 있다. 행복을 의미하는 희랍어 eudaimonia가 eu와 daimon의 결합어라는 점을 고려해도 행복의 개념은 애매하게 이해될 수 있다. 전자는 good으로 후자는 spirit 또는 divinity의 뜻으로 번역되지만 이런 의미를 쾌락과 연관시키면 애매하게 이해될 수 있다. 그에 있어서 행복(eudaimon)은 감각적인 느낌의 기쁨(feeling good)과 도덕적인 활동의 기쁨(doing good)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육체적 쾌락과 영혼의 쾌락을 구별한 것은 느낌의 기쁨을 혐오스럽거나 저속한 것으로, 활동의 기쁨을 신성하고 고귀한 것으로 간주하는 의미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잘 알려져 있듯이 그는 인간을 정치적 존재로 보았고, 윤리학과 정치학을 밀접하게 관련된 연구임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쁨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하는 자연적 본성을 지니고 있지만 사회적 관점에서 선하고 싶어하는 사람의 도리를 행하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11) 즉 정치적 또는 사회적 존재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할 때 비윤리적이고 반면에 폴리스의 일원임을 자각하고 행위할 때에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영혼 또는 훌륭한 인격이라고 강조되는 듯하다.





3. 도덕적 덕과 쾌락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은 두 종류로 구분된다. 소피아, 프로네시스 등은 지적인 덕이라고 불리고 절제나 용기 등은 도덕적 덕(?θικ? ?ρετ?)이라고 불린다. EN 제2권에서 도덕적 덕은 "중용을 선택하는 성격의 상태"라고 정의된다. 앞장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이 중용은 절대적으로 찬양할만한 가치인 행복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찬양할만한 가치이다. 도덕적 덕은 중용이라는 기준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는 감정들의 바람직한 상태와 이것의 현실태를 의미한다. 행복은 이러한 덕에 일치하는 정신의 활동이다.12)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적 논의 방법에 따르면 선에 관한 다양한 통념적 견해들에 대해서 각각 어떤 전제로부터 논리적으로 이끌어낸 결론인지 검토할 뿐만 아니라 그 주제에 관한 일반적인 견해에 비추어서 검토해야만 하기 때문에,13) "우리에게 알려진 사실들을 드러내어 먼저 그 난점들을 논의한 후에 가능한 한 모든 통념(?νδοξα)의 진리성을 확립해야만 한다."14) 그리고 모든 통념들을 검토하지 못할 경우에는 보다 많은 그리고 가장 권위 있는 견해의 진리성을 확립해야만 한다. 이 인용 귀절에서 통념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엔독사는 '평판이 나있는 견해'를 가리킨다. 보통 어떤 특정한 주제에 관한 통념들은 혼란스럽게 보이고 심지어 그 통념들 사이에는 명백히 모순점이 드러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대체로 그 통념들이 적어도 진리의 한 측면을 나타내고 있음을 인정하고 도덕적 또는 정치적 주제에 관한 진지한 논의를 위해서 통념들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15)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적 덕을 쾌락과 관련시켜 설명할 때에도 역시 쾌락에 관한 통념적 견해들을 하나씩 검토한다. 그가 도덕적 덕을 쾌락(?δονη)·고통(λ?πη)과 관계지워서 설명하는 논증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덕이 행동[실천]과 파토스(π?θη)와 관련 있고, 모든 행동[실천]들과 파토스에는 쾌락과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에 덕은 쾌락과 고통과 관계가 있다.16) 덕이 쾌락·고통과 관계 있다는 주장의 전제로서 검토 대상이 되는 여러 가지 통념들이 있다. 예컨대 '쾌락은 비천한 행위의 원인이다', '선한 행위에서는 고통이 회피의 원인이다,' 그리고 '쾌락은 우리가 선택하는 모든 대상에 수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쾌락 및 고통이 행위의 표준이다' 라고 일반적으로 승인되는 견해들이 그것이다.17) 그는 이런 견해들(전제들)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고 논의함으로써 도덕적 덕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덕과 쾌락의 관계에 관한 설명은 EN의 전체에서 골고루 나타나지만 특히 마지막 부분인 제10권에서는 집중적으로 제시된다. 그 이유는 그에 있어서 쾌락이 "인간의 본성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 있고," "유덕한 행위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은 [도덕적인] 헥시스의 표시"18) 라는 전제에서 윤리학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지기 때문인 듯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시각 그리고 생각이나 관조 등의 삶의 활동은 대상(목적)을 가지고 있다. 어떤 활동과 그 대상이 가치를 지닐수록 그 활동은 보다 더 유쾌하고 완전하다. 그런데 활동의 탁월성과 대상의 탁월성은 그 활동을 완전하게 만든다. 즉 활동들의 탁월성(덕)은 완전함의 구성요소이지만 그런 활동에 수반되는 쾌락은 '마치 젊음의 매력이 육체적으로 왕성한 혈기의 징표인 것처럼 완전함의 징표이다.19) 그러므로 쾌락은 삶의 활동에 수반하는 것이고 모든 활동을 완전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활동은 그 활동의 쾌락과 거의 구별되지 않고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주장은 '쾌락은 선이 아니다' 라는 견해에 대한 비판에서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위해서 쾌락을 바람직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세 가지의 견해와 그 근거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 세 가지 견해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모든 쾌락은 선이 아니다.' '어떤 쾌락은 좋은 것이지만 대다수의 쾌락은 나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쾌락이 선이긴 하지만 쾌락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일 수는 없다.' 이런 통념적 견해의 논증은 EN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20)

① 모든 쾌락은 결코 선이 아니다. 왜냐하면 목적(완성적인 것)과 달리 쾌락은 자연적 상태로 지각할 수 있는 하나의 과정(κ?νησι?)이고, 절제의 덕을 지닌 사람은 쾌락을 회피하며 실천지의 소유자는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없는 것을 추구하고, 쾌락이 생각에 방해가 되고, 그리고 쾌락은 어린이와 짐승들이 추구하기 때문이다. ② 어떤 쾌락은 좋은 것이지만 대다수의 쾌락은 나쁜 것이다. 왜냐하면 비열하거나 비난의 대상이 되는 쾌락이 있고, 어떤 쾌락들은 건강을 손상시키는 해로운 쾌락이기 때문이다. ③ 쾌락은 최고선이 아니다. 왜냐하면 쾌락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쾌락이 과정으로서 목적과 다르기 때문에 모든 쾌락은 선이 아니며, 그리고 쾌락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에 쾌락은 최고선이 아니라는 견해를 잘못이라고 지적한다.21) 선에는 무조건적인 선과 어떤 사람에게 선인 것으로 두 가지 의미가 있고 자연적 성격에도 그것에 상응하는 두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견해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악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선에는 활동도 있고 상태도 있는데, 우리의 자연적 상태에로 건강을 회복시켜주는 과정(예컨대 환자에게 일어나는 치유의 과정)은 단지 우연적으로만 유쾌한 것인 반면에, 본능적 욕구에서 작용하는 활동은 자연적 상태의 한 부분적 활동이다. 예컨대 관조의 쾌락과 같이 고통 또는 본능을 포함하지 않는 쾌락이 있다. 그러므로 과정으로서 쾌락은 무조건적인 의미의 쾌락이 아니다. 또한 쾌락을 생기게 하는 활동의 대상이 서로 다르고 그런 대상들의 차이에서 생기는 쾌락에도 구별이 있다.22) 쾌락은 과정이 아니라 활동이며 그리고 쾌락은 우리가 어떤 감성 능력을 획득할 때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을 실행할 때에 생기는 것이라는 이유를 근거로 삼아서 그는 쾌락을 과정으로 보는 견해에 반대한다.

해로운 쾌락이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쁜 쾌락도 있다는 견해 역시 잘못이라고 비판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의 활동에 수반되는 어떤 쾌락은 건강을 해치는 경우도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쾌락이 생각에 방해되지는 않는다고 주장된다. 예컨대 실천지에서 생기는 쾌락은 생각에 결코 방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쾌락이 생각의 장애물이라는 이유로 쾌락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견해'는 잘못이라고 비판된다. 오히려 관조나 배움 등의 활동에서 생기는 쾌락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잘 관조하게 하기 때문이다.

모든 선이 어떤 기술의 결과물인 반면에 쾌락에는 기술이 결코 없으므로 '쾌락은 선이 아니다'는 견해에 있어서, 쾌락뿐만 아니라 활동이 기술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전제는 정당하게 인정된다. 하지만 활동을 위한 능력에는 기술이 있을 수 있다고 비판된다.

이상과 같이 쾌락은 선이 아니라는 견해를 반박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쾌락이란 느껴지는 과정(κ?νησι?)도 아니고 단순히 그런 과정의 결과물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가 단지 쾌락을 위해서 무엇을 행한다는 심리주의적 쾌락주의와 달리, 활동의 기쁨을 활동 그 자체와 거의 구별되지 않는 것("쾌락은 활동에 수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경우 과정의 개념은 가능태를 실현시키는 변화의 어떤 과정이라는 넓은 의미와 생성의 뜻을 내포한다고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과정이라는 용어의 독특한 의미는 성질이나 양의 변화에 국한된다.23) 즉 EN에서 쾌락은 감각의 건전한 능력의 활동과 좋은 대상에 관해 생각하는 활동에 동반되고 이런 활동에 의해 완료된 하나의 전체라고 정의된다. 쾌락을 활동 그 자체와 구별하지 않기 위해서 그는 쾌락은 과정이 아니라 시각처럼 완전한(τ?λειο?) 것으로서24) 하나의 완성된 전체라고 규정한다.

EN 제10권 제2장에서 플라톤의 비정통 제자인 에우독소스의 쾌락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이성적인 요소이든 비이성적인 요소이든 모든 것이 추구하는 것은 쾌락이기 때문에 쾌락은 곧 선이다.' 이 논증은 쾌락이 여러 가지선들 가운데 하나의 것이고 또 다른 어떤 선보다도 더 좋은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내포하고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해한다. 그는 "다른 어떤 선이 추가됨으로써 증가될 수 있는 선은 결코 선이 아니다"라는 명백한 기준을 가지고 에우독소스의 '쾌락은 좋은 것'이라는 견해에는 수긍하지만 그의 논증은 옳지 못하다고 비판한다.25) 플라톤 역시 이와 유사한 논증을 사용하여, 쾌락에 프로네시스(지혜)와 같은 다른 어떤 선이 결합될 때에 그 쾌락이 더욱 바람직한 것이 되기 때문에 쾌락 자체는 선이 아니라고 주장했던 것으로 소개된다.26) 이런 논증을 검토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쾌락이라는 선에 다른 어떤 선이 추가됨으로써 선이 증대될 수 있는 것일 때 그것은 결코 선이 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그밖에 선이 정의될 수 있는 것임에 비해 쾌락은 정의될 수 없는 것이라는 주장,27) 선은 완성적인 것(τ?λειον)인 반면에 쾌락은 생성의 운동 또는 과정(κ?νησι?)이라는 주장,28) 그리고 쾌락은 본성에 따르는 충족(?ναπλ?ρωσιν)이라는 주장에29) 대해서도 EN 제10권 제3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판한다. 그는 우리가 빨리 또는 늦게 기뻐할 수 없기 때문에 쾌락은 운동이나 생성이 아니라 완성적인 것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쾌락이 본성의 결핍(고통)에 대한 충족이라는 견해는 육체적 감정의 쾌락·고통을 전제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음식물 섭취와 관련된 쾌락·고통을 전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30) 그런 견해는 모든 쾌락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배움[기하학(μαθηματικ?)]의 쾌락은 어떤 고통도 전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배움의 즐거움은 영혼의 감성적인 부분에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애써 힘들이지 않아도 되는 지성의 집중에서 나타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이라고 엄슨은 해석한다.31) 그 외에 감각적 쾌락 중에서 후각, 시각, 청각 등의 쾌락도 마찬가지이라고 그는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쾌락이 다 선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도덕적 성질에 있어서 여러 가지 쾌락들은 구별된다. 즉 '도덕적 선에서' (?π? τ?ν καλ?ν) 생기는 쾌락과 '도덕적 비열함에서'(?π? τ?ν α?σχρ?ν)에서 생기는 쾌락은 종류가 다르다.32) 쾌락을 선이라고 생각하는 견해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견해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육체적 쾌락이 감각적 활동의 기쁨이라고 간주하고, 또한 육체적 쾌락은 갈증과 같은 고통스런 상황에서 생기기 때문에 지적인 활동의 쾌락보다도 덜 순수하다고 주장한다.





4. 쾌락론의 문제점과 함의



쾌락에 관한 통념 그리고 기존의 쾌락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에서 도덕적인 행위와 지적인 활동에서 생기는 쾌락에 관한 그의 관심이 나타난다. 이러한 의도는 EN 제3권에서 쾌락을 정신적 쾌락과 육체적 쾌락의 두 종류로 구분하고,33) 절제라는 도덕적 덕을 여러 가지 육체적 쾌락들 중에서 특히 촉각과 미각의 쾌락과 관련시켜 설명할 때 명백히 드러난다.34) 그러나 제3권과 제7권 그리고 제10권에서 말하는 육체적 쾌락은 일반적으로 감각-지각 활동을 통한 즐거운 느낌이다. 무절제한 사람은 먹고 마시고 섹스하는 활동에 탐닉할 때 그 활동 자체를 즐기지 않고 그 활동들의 부산물로 생기는 육체적 쾌락을 위해 행위하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미각은 절제의 덕과 방종의 부덕과 관련 없는 것으로 제외된다. 도덕적인 절제와 무절제는 주로 촉각에서 생기는 쾌락과 관련시켜 설명된다. 여기서 그가 도덕적으로 비난하고자 하는 무절제는 즐거운 육체적 느낌이 생기도록 행위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무절제한 방종이 비난받아야 하는 이유는 촉각과 관계된 쾌락을 자기 분수에 맞지 않도록 지나치게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 지나친 상태는 짐승적 또는 노예적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촉각의 육체적 쾌락은 다른 여러 쾌락들과 구분될지라도 그 쾌락은 본능적 욕구로서 필요하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안하는 촉각의 쾌락에 있어서 지나치지 않는 중용적 기준은 무엇인지 모호할 수 있다. 하지만 촉각에서 느껴지는 육체적 쾌락 이외에 모든 쾌락과 관련해서 무조건적으로 무절제한 사람의 특징에 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명하는 부분이 그 문제의 대답을 위한 단서가 될 수 있다: 도덕적 덕과 관계 있는 육체적 쾌락에 있어서 무조건적으로 무절제한 사람은 "자기의 선택과 자기의 판단에 거역하면서 추구한다."35)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무억제한 사람은 자신의 선택에 거역하며 굶주림, 목마름, 더움, 추움, 그리고 그 외의 촉각이나 미각의 모든 대상에서 고통을 피한다는 특징이 지적된다. 이때 그런 무억제는 '참을성이 없다'는 비난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무억제와 방종은 동일시되고 억제와 절제는 동일시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확신한다. 또한 도덕적 덕과 관련해서 육체적 쾌락이 언급될 때에는 주로 절제의 영역에 포함되는 것이다.36)

그러나 도덕적 덕과 쾌락의 관계에 관한 그의 설명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유덕한 활동의 쾌락이 무엇인지 아직까지 선명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 대해서 엄슨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지각 활동의 기쁨과 육체적으로 생긴 기쁜 느낌의 차이점을 어설프게 의식했고 또 느낌의 기쁨을 활동의 기쁨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했다.37) 즉 육체적 쾌락이라는 말의 애매성이 명백히 구분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 육체적 쾌락은 음악감상이나 운동경기를 구경하는 것처럼 감각의 사용을 포함하는 활동의 기쁨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다른 경우에는 접촉에서 생긴 육체적 느낌처럼 어떤 활동에 의해 획득할 수 있는 즐거운 느낌이라는 의미로 육체적 쾌락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이렇게 쾌락의 개념이 애매하게 사용됨에도 불구하고 EN 제10권에서 주장되는 내용은 쾌락이 삶의 활동에 수반하는 것이고 모든 활동을 완전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며, 이런 의미로 활동 그 자체는 쾌락과 결합된 것이라고 요약될 수 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쾌락이 본성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과정이지 목적과 동일한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쾌락은 선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논증의 그 전제가 적절하지 못함을 비판한다. 그는 이런 견해가 활동과 과정을 동일시하는 잘못을 범했다고 지적한다. 쾌락은 우리가 어떤 능력을 획득할 때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능력을 실행하고 있을 때에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쾌락은 "본성적 상태의 활동"이라고 정의되어야 하고, 쾌락은 '지각될 수 있는' 과정이라는 규정 대신에 '방해받지 않는' 활동이라고 바꾸어야 한다고 그는 반박한다.38) 왜냐하면 모든 쾌락들이 그 자체와는 다른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기 본성의 완성에로 이끌어 가고 있는 사람들의 쾌락만이 이 자체와는 다른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비열하고 비난의 대상이 되는 어떤 나쁜 쾌락이 있다는 전제에서 쾌락이 최고선일 수 없다고 부정하는 논증을 반박할 때에도, 그는 "각각의 헥시스에 속하는 '방해받지 않는 활동(에네르게이아)'들이 있다"39) 라고 주장한다. 이런 상태의 활동이 방해를 받지 않을 때 그 활동은 가장 가치 있는 활동이다. 즉 어떤 유덕한 활동에 수반되는 유일한 쾌락이 아닌 전혀 이질적인 다른 쾌락에 의해 방해받지 않을 때 그 활동은 즐거운 것이다. 우리는 완전성이라는 행복의 속성이 쾌락을 설명할 때에도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유덕한 행위에 수반하는 쾌락은 그가 말하는 윤리적 행복과 연결된다. 이 기쁨은 활동의 완전함에 대한 징표이며 저해당하고 있는 활동은 불완전한 것이라고 규정된다. 쾌락과 동일시되는 행복은 사회적 존재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유덕한 행위에 수반하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는 쾌락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방해받지 않는 활동이라는 개념을 쾌락의 정의로 제시하며, 도덕적 덕은 이 쾌락 개념과 관련지워 설명된다. 그에 의하면 쾌락은 육체적 쾌락, 도덕적 덕과 관련이 있는 쾌락, 그리고 순수 사유와 결합된 쾌락으로 구별된다. 그 가운데 도덕적 덕과 관련 있는 쾌락은 우리가 선택하는 [도덕적] 헥시스와 결합된 것이다. 그에 따르면 헥시스는 인간 특유의 기능을 단순히 소유하고만 있는 뒤나미스의 상태에서 나아가 이런 상태를 실행하는 에네르게이아라는 상태에 의해서 형성되는 능력 또는 경향성이다.40) 그리고 이런 경향성이 항상화된 상태가 덕이라고 불린다. 헥시스의 실천성이 쾌락이라는 삶의 본성적 질서와 연결되어 설명될 때 그에 있어서 윤리적 원리가 성립된다. 도덕적 성품(헥시스)의 지표는 "유덕한 행위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41)이다. 도덕적 행위의 대상이 가치가 있을 경우에 그 행위는 바람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방해되지 않는 활동이 쾌락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단지 '쾌락이 생각의 장애물이라는 이유만으로 쾌락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견해'는 잘못이라고 모욕하는 견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비판한다. 쾌락이 생각에 방해되지 않을 수 있다. 예컨대 실천지나 그 밖의 어떤 상태도 그것에서 생기는 쾌락에 의해 방해되지 않는다. 또 지적인 활동의 쾌락은 육체적 쾌락보다도 더 가치 있고 순수하므로 지적인 활동의 쾌락이 더 가치 있다. 관조나 학습 등의 활동에서 생기는 쾌락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그 활동을 더욱 증진시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