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아리스토텔레스의 교환정의론

나뭇잎숨결 2022. 2. 12. 10:31
아리스토텔레스의 교환정의론
(A theory of catallactic justice)

박 전 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5권 5장에서는 공정한 교환이론이 논술된다. ‘건축가와 제화공, 여러 켤레의 신발 대 집 한채’ (1133 a 23-5)에 대한 교환논술은 Scott Meikle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사상’ (Ari- stotle’s Economic Thought, Clarendon, 1995)에 관련되어 경제적 가치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정치학에서 보다 윤리학에서 논술되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다. 5권은 정치적 정의에 관한 것인데, 정치가 인치일 때에는 실천적 지혜 (phronesis)가 중심적으로 연구되지만, 법치일 때는 정의론 (dikaiosune)이 중심이 된다. 정의는 일반과 특수로 나뉘어지고, 특수로는 다시 명예와 공공선의 분배에 관한 분배정의, 평등한 사람에게 동등하지 않은 몫이, 평등하지 않은 사람에게 동등한 몫이 분배될 때 비롯되는 싸움들에 관해서 논해진다. 마라톤의 출발점에서 같지 않게 세워지거나 종착점에서 같게 명예와 상이 수여된다면 불공정할 것이다. 그리고 교정정의 (diorthotiken)는 불공정한 이득과 손실에 균형을 되찾도록 교정하는 정의로, 19세기까지는 일반적으로 정의를 둘로 나눈 다음 셋째 번 정의는 더 잘게 나눈 재분으로만 논의되었다.
Ritchie (Aristotle’s Subdivision of Particular Justice, Classical Review, 1894)가 벌써 교환정의의 중요성을 일깨우면서, 정체 (polis)의 기초에 놓은 뒤, 이 정의를 catallactic justice라고 불렀는데, 1972년 경제부문 노벨상을 획득한 Hayek이 이 철학이론을 빌려다 commutative justice 와 구별하고 그의 자유주의 경제이론을 구축하여 크게 성공한다. 세계시장에서 정보화에 의한 교환형식은 경제정의가 실현되는 경제질서로, 고대희랍사가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에 archaic의 주고 받는 것 (give and take)을 대치하고 있었다는 이론이 속출한다.
플라톤은 (Rep. Ⅱ, 369e-371b) 노동이 분할된 사회에서 교환은 뗄 수 없는 상관관계에 놓이게 된 것을 서술하면서, ‘돈이 교환의 상징’이라고 한다 (Rep Ⅱ, 371b). 교환된 사물의 가치에 대한 상징이 없이는 국가사회도 없을 것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에 이어 이 이론을 발전시킨 것이다. 그도, 교환이 없다면 사회생활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Richie는 이 공정한 교환이 5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 가운데 다른 form의 정의 보다 우위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오늘날 재조명되어 재음미되고 있다. 사회관계는 윤리관계를 함의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교환정의가 ‘국가의 구원’ (NE 5, 1132b 33)이라고도 한다. 구원은 기독교의 독점인 듯 하나, 나라를 구하는 것이 공정한 교환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구원론은 중세를 거쳐 기독교 사회교육의 또 다른 기초가 된다. 사회가 붕괴되지 않고 유지되고 있는 것은 교환정의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판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윤리학에서 논했던 것에 조회하면서 다시 되풀이된다. 그리고 교환에서 상호성 (to ison, to antipeponthos)이 교환정의의 원리다 (Pol.2, 1261a 30-1).
- 농부의 제화공에 대한 상호성은, 제화공이 만든 것의 양이 농부가 만든 것으로 교환되기 위한 양이다.
- 교환에서 공정성은 비율적 유비론 (analogia)을 적용하여 상술된다 (1133a 32-3).

A, B 양측 C, D. 그들이 교환에 의해서 획득한 산물 analogia는 우선 수식으로 A:B = C:D의 교환비율은 A:B=D:C로, A, B가 획득하는 것의 순서가 뒤바뀐다. 여기서 우선 앞의 두 특수정의의 경우와는 다르게, ratio가 C:D가 아니라 D:C가 되는 것이 특성이다. 교환의 경우, 건축가는 자신이 만든 것 (집)의 몫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 (농부 또는 제화공)의 산물과 바꾸어, 자신이 만든 것과는 다른 것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S. Meikle은 5장에서 경제적 교환가치에 관해서 상론한다고 주장한다. 건축가와 제화공은 불평등하다. 그러나 그가 ‘standard view’라고 부르는 관점에 의하면, 양자가 불평등한 특성을 측정하여 가치를 비교 (William, The Nicomachean Ethics of Aristotle, London, 1868)한다. Gant는 노동의 질 (Ethics of Aristotle)을 비교한다고 상론하며, Rackham은, 여러 다른 산출자는 여러 다른 사회적 가치와 여러 다른 보수율을 할당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한다. Burnet는 ‘그의 탁월성에 비례해서 그가 준 것 보다 그의 친구로부터 더 많은 봉사를 기대하는 경향’에 관해 ‘Ethics of Aristotle’에서 상론한다. Melk는 (Aristotle’s theory of Ex- change) 산출의 신분과 기량에 따라, Soudek는 다만 기량 만으로 측정 (Aristotle’s Economic Imputation)한다고 상론에서 제 각각 다른 견해를 밝히나, 아무도 Ratio가 어떻게 공정한 교환에 대하여 standard를 정립하는가에 대해서는 설명하고 있지 않다. Ratio는 양적이요, 한 집에 대해서 몇 개의 신발일지 계산할 수 있을 만큼 정확해야 할 것이라고 하는 데서 Ritchie, Ross, Hardie, Schumpeter는 ‘노동의 시간’을 들어, 한 시간의 A의 노동가치와 B의 한 시간의 노동시간 사이의 Ratio가 합리성 또는 타산성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Ross, Ethica Nicomachea, Oxford, 1925; Schumpeter, History of Economic Analysis, quantifiable in principle, a conjecture) NE, 5.5 chapt. 1에서는 모든 산물의 공통된 특성을 탐구하여, 이들이 어떻게 통약가능 (commensurable)한가를 설명하려 한다. ‘5개의 침대 = 한 집’과 같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 한 대로 양적 등식을 세워야 할 것이라면 동량이 가능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특성을 가지고 시도한다. 첫째는 돈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 둘째는 chreia의 대상인 것.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in truth (τὴ μὲν ούν ἀληθεια) 이와 같은 특성은 있을 수 없다고 거부한다. 이와 같은 특성에 관한 인지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불가능하다고 거부된다 (1133b 18-20). Joachim은 이들 사이에 Ratio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라고 묻고, 끝에 가서 자기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The Nicomachean Ethics, Oxford, 1951). Standard view는 옹호할 수 있는 version으로는 가장 약한 것이라고 하여 이 장은 경제학적으로는 혼돈이라고까지 한다. Heath, Guthrie, Jolif는 (l’ Ethique à Nicomaque, 2vols., Paris, 1970) XD = C, XD:C = 1 A:B = 1일 때만 등식화, 통약가능성 (commensurability)이 정확하게 경제학적으로 성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데 대해서, Finley는 건축가와 제화공은 1:1로 동등하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은 주장은 수용할 수 없다고 논의한다 (1133a 6-7). 그리고는 불가지론 (agnosticism)을 고백한다. 다른 종류 간의 비율이 공정하다는 것은 두 항목 (term) 간의 비율이 아니라 두 다른 비율 간의 비율인데, 이를 혼돈한 데서 불가능성, 불가지론이 나온다고 하는, 좀 더 복잡한 논증은 ratio의 평등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비율은 적어도 1:1의 건축가와 제화공 간의 비율 뿐만이 아니라 그가 만들어 낸 산물 간을 합쳐 네 항목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 (Magna Moralia 1093b 37). 이들은 상호성이 대각선으로 결합된다 (he kata diametron sunzenxis NE, 1133a 6-2). A:B = 1인 것은 교정정의에서, 도둑은 법 앞에서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평등한 것과 같이 평등하다. 그러나 마라톤의 우승자에 주는 명예와 같이 공동체에 대하여 분배정의는 우승자와 꼴찌가 평등할 수가 없다. 그러나 개인소유의 재화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교환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 우열한 자와의 교환은 더 유리할 것이요,
- 집 한채에 주어질 신발의 수는 아직 정확하게 알 수 없을 것이다 (Hayek, New Study, 1972).
한 집에 대해서 공정성은 같은 비율로 교환되는 데서 성립한다. 너무 많은 신발을 주어서는 공정하지 않다 (1133a 10-12). 그러기에 아예 산출자는 제외되고, 익명의 산물에만 교환의 공정성은 적용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교환에서 공정성으로서의 정의는, ① 상호성 (1132b 31-2) ② 상호성은 동등성에서가 아니라 비율적으로 유비론으로 (1132b 33) ③ 이 상호성은 교환할 산물 간의 비율을 동등화하는 것에 의하여 실현된다. ④ 산물 간의 비율이 동등하려면, 산물은 공통분모 (같은 척도로 잴 수 있는)로 통약이 가능하여야 하는데, 이 통약가능성이 설명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 ratio에 관한 연구는 다만 산물이 교환되는 ratio이요, 이 합리성에서는 만들어 낸 산출가와는 무관하다.
- 불평등과 차이 (1133a 18)를 가진 산출자가 교환 이후에는 자신의 것을 소유하게 되었을 적에, 그들은 평등해지고, 불평등의 갈등이 해소되어 화해될 수 있다 (1133b 3). Hayek도 catallagein의 사전적 의미를 그대로 사용하여, 교환은 적을 친구로 바꾸어 갈등이 화해로 해소되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한다.빈곤이라는 적이 교환에 의해서 민주적 평등으로 바낀다고 말 할수 있겠다. 산물 간의 비율동등성 (equality of proportion)이 정립될 필요성이 실재한다. 왜냐하면, 한 사물은 다른 사물에 대해서 너무 많아서 (excelleni Kritton) 그들은 동등하게 되어야 한다 (1133a 12-14). 집을 신 한 켤레 받고 주기로는 너무 kritton하다. 두 의사 간의 교환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의사와 다른 농부 간에 (heteron, 1133a 16-18) 이루어진다. 다르고 부등한 가치를 산출하는 사람들이 (persons), 그들의 산물이 평등해질 수 있기 때문에 associate되어 서로 돕는다.
- 정의는 일종의 평등이다 (isotēs). 평등 없이 정의가 없고, 정의 없이 평등이 없다. 우리들은 더 탁월하고 너무 탁월한 것 (pleon)을 수용하는 행동에 관해서 말하고 있고, 더 적고 너무 적은 것을 수용하는 활동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데, 이 때 중용이 평등이다. 이것을 middling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 το πλὲον과 το ἒλαττον을 수용하는 행동에서도 middling에 의해서 το ἴσον 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1131a 2-3, Jackson).
Analogia는 ‘ratio의 평등’을 의미한다. Person의 ratio는 A, B 그들이 획득하는 것의 ratio C, D (1131a 29-32)라고 한다면, 그리하여 prescription에 의하면 분배정의에서는 부동이요, 교정정의에서는 동등하여야 하는 것이 다른 정의에서는 정의가 전혀 다른 상호성 (antipeponthos)의 원리에 기초한다 (1132b 23-33). 그러나 팔고 사는 교환으로 생기는 결과는 prescription에 의하면 한 쪽이 승리자요 다른 쪽이 패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갖게 되어야 하기 때문에, 부동했던 것이 동등해져서 자신이 공정하다고 할 수 있다 (1131a 20-4). 그러니까 제화공과 건축가의 ratio가 A:B = 1 또는 XD:C = 1로 동등해졌을 때 공정해졌다고 한다. (1133a 10-12)이것이 공정한 교환이요, 다시 바꾸어 말하면, 공정한 교환에 의해서 빈부의 불평등은 평등해져야 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재화의 비율적 평등성이 존재하고, 상호적 활동이 있어 우리들이 말하는 결과가 실현된다. 오늘날 미국 철학자가 매우 의심스러워하는 normative prescription이 아니라 현실에 관한 description이라고도 할 수 있다.
- Aquinas의 NE 5 주석은 commensurability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Soudek은 analogia가 조화를 이루는 중용 (Aristotle’s Theory of Exchange), Von Leyden은 작품의 탁월성은 수요와 공급관계로 측정될 것이라고 한다 (Von Leyden, Aristotle on Equality and Justice). 교환가치의 본성을 개념적으로 탐구한 근대철학자로 제 1인자는 Marx다. ‘교환은 평등성 없이 존재하지 않으며, 평등성은 commensurability 없이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Aquinas와 Marx의 탐구의 point가 접합된다 (Böhm, Bawerk, Marx and the close of his system, 68)




경제와 윤리는 양립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그러나 중첩되기도 한다. 윤리가 경제성장과 발전에 장애물이 될 수 있고, 경제가 윤리적으로 나쁠 수도 있다. 그러나 영국 자유주의자와 Marx와도 일치한 생각은 국제 시장경제에 도달하는 데 늦게되면, 중대한 손실을 가져 올 것이라는 현실적인 관점에서이다. 그리하여 세계시장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과 경제적 관점이 양립하지 않게 보임에도 불구하고,
-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비록 종류는 다르지만 다 같이 경제적 사고의 초보적 기초를 예시한 것이라는 설은 반복해서 나타났다. 그러기에 평등하게 되는 정의가 실현되는 가장 이상적인 institution은 시장이라는 Hayek의 주장도 아리스토텔레스에 조회한다.
- 그 한 종류로 의미있는 이론은 Marx의 노동가치 이론이다. 그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스러운 활동 가운데 노동이 다른 활동과 다른 목적 (telos)을 갖는 데서 다르다는 생각의 기초를 제공한다고 하고, 자신의 사상의 아버지라고 한다. 한 활동은 다른 활동과 그의 목적에 의해서 다르게 정의된다.
- 아퀴나스도 인간의 활동의 특수성 (species)이 그의 목적으로부터 주어지는가 묻고, 긍정적이지만, 교환가치와 같이 비자연적, 다시 말하면 관례적이어서 차별화되지 않는 어떤 것의 실체를 구성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침대와 집을 통약 가능케 한 것은 아퀴나스에 의하면, 노동일 수 없다고 한다. 노동은 자연스럽게는 사물이 그럴 수 없는 것 처럼 통약 가능하지 않은 편이다. 행동은 그의 목적에 의해서 정의된다. Marx에 의하면, 다른 종류의 노동은 노동이 갖는 다른 목적 때문에 구별되고 통약 불가능하다. 쓸모있는 유익한 노동은 사용가치를 생산한다. 그러나 비자연적 (übernatürlich) 추상노동은 교환가치를 생산한다. 금, 철, 밀, 명주는 양적으로 다른 것과 통약 가능하다. 그러나 공리주의 행동이론에서는 목적은 단 하나, 쾌락과 유용성이요, 모든 행동이 이 목적의 수단이요, 도움을 주고 쓸모가 있을 때 서비스가 된다. 다만 효과에 있어서 차별화된다. Marx도 양에서 질로 변형되고, 시장경제에서 노동의 가격이 형성되며, 노동능력, 노동력에 관해 말하고, nomos와 phusis 간의 다리를 놓고,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구별하는 이론은 매우 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은 이 점에서 애매하다. 행동의 이타성은 그의 목적의 이타성 때문인데, 이 이타성은 경제에서는 단 하나의 목적, 즉 유용성 만이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여 극복된다. 이 이타성은 대가를 지불하고 산다. 그러니 공리주의 가치이론과 중첩한다. 맑스에 의하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는 폭넓은 차이 때문에 양립불가능한 목적을 갖는다. 양자는 한 사회에서 동시에 추구될 수 없다. Mill에 의하면 개인이나 국가의 부는 유익하고 기분좋은 것이며 교환할 수 있는 가치를 갖는다. 이와 같은 입장과도 중첩한다. M-C-M', 봉사활동은 인간복지와 사용가치에 봉사함고 동시에 애초부터 그와는 다른 목적, 즉 교환가치에도 봉사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목적에 관한 물음은 경제학 안에서는 공식화될 수 없고 묻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현대 경제학에서 사용가치는 머리를 한 번만 돌려도 교환가치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Keynes). 플라톤은 Protagoras에서, 여러 다른 종류의 사물은 통약 가능케 하는 길을 발견하는데, 질적으로 다른 차이를 양적 차이로 환원함으로써 가능하다고 한다. Nussbaum은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목적이 달라서 인간생활에서 생기는 문제는 극복될 수있을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모든 윤리적 그리고 정치적 목적은,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단 하나의 목적으로 환원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히 목적에 관한 논쟁을 축소하여 결의와 선택을 단순하게 할 것이다. 그 결과로 Bentham과 Sidgewick의 쾌락주의를 괜찮은 것으로 만들어 줄 것 같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쾌락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쾌락주의는 비판한다 (O. Wiggins, Weakness of Will, Commensurability and the Objects of Deliberation and Desire, ed. by A. Rorty, in: Essays on Aristotles Ethics, Berkeley, 1980). 다만 잘 먹고 웃으려고 열심히 일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보편적 통약성도 비판한다. 그렇다고 플라톤의 원리에 반대한 적은 없다. 현실적으로, 산물의 교환을 정립시킨 시장의 통약성은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으로 발견된다. 고아와 장기, DNA의 교환가치로 확대되면서, 교육의 교환가치가 추구된다. NE, 55, Pol. 1, 8-10에서 Finley는 어떤 종류의 경제학도 발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Meikle과 함께 분명히 교환가치가 상론되고 있고, 그의 분석, 발전, form, 효과가 분석되고 있다고 읽을 수 있으며, 체계적 교환의 대상이 됨으로써, 사물이 획득하는 특성은 분명히 쓸모있는 것을 추구하는 사용가치와는 구별된 특성을 획득한다. 아무 쓸모가 없는 경우에도 교환가치를 가질 수 있다. 물은 쓸모가 극대하더라도 교환가치는 별로 없고, 다이아몬드는 번쩍이는 특성 만으로 교환가치는 극대하다. 철학교육이 그럴 수 있다. Meikle은 (Aristotle and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Polis, Journal of Hellenic Studies, 99 (1979)) 아리스토텔레스가 맑스와 같은 것, 맑스가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점을 발견하고 Aristotelian Marxism을 논한다. 역사적으로 Aquinas의 사상이 물질주의가 아닌가라는 의혹을 받았고, Aquinas는 본질주의 오류 같은 문제는 토론할 만한 필요성이 객관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목적으로 교환가치를 추구하는 것과 목적으로 사용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대조시키고, 정치의 목적이 ‘인간적인 선’이라면, 이 원리를 가지고 정치나 윤리학적 목적에 관한 토론은 적어도 가능하며 그의 양립가능성에 관한 탐구를 진행시킨다. Finley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탐구는 경제학이 아니라 윤리적이요 정치적인 이론이라는 데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아버지로 하여 그의 이론을 기초로 하는 Marx의 인간활동의 목적에 관한 분석은 분명히 경제적이요, 세계와 세계 안에서 우리의 위치 또한 인간의 사회적 실존을 이해케 하는 기초이론이어서 정치적 선택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논한다. 스포츠로부터 음악, 교육에 이르기까지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 목적은 교환가치이며, 이것이 노동이 된다고 하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훌륭한 노동자로 보는 맑스의 관점을 이해시키려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목적의 가지론 (gnosticism)이 얼마나 잘못이고 착각인지 Hayek이 비판한 데서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catallage (교환)이론에 조회하는 것은 매우 흥미있을 뿐만 아니라 의미있고 가치있다고 생각된다.
지혜로운 행동은 세계질서에 부합한 것으로 자연스러운 것이 최선이다. 자연이 모든 좋은 것을 만들고, 인간 간의 합의에 의해서 이 좋은 것을 재는 단위 (etalon)가 성립하며, 인간들이 우선 필요로하여 욕구하는 것을 이 척도로 잰다. 지상의 좋은 것을 모두 갖기 원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관상하기 위해서 천문대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내용이 텅빈, 그래서 무력하고 아무런 값어치도 없는 그토록 많은 논리학이나 존재론은 폐기되어야 한다. 그토록 많은 사물, 동물, 사람들 몇이 있고 욕구가 있고, 돈도 있다. 이것에 관한 Legon, rhetoric 이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하늘에 있는 별의 아름다움과 비슷한 star blue diamond는 교환가치를 가지며 값이 책정된다. 깜박깜박 반짝거리는 빛 처럼 애매하다. 행복을 약속하고, 별과 같이 불멸한 것을 닮아간다. 사멸하는 모든 보배에 관한 지식은 근대화된 행복에 관한 논술이다. 부에 관한 반성과 분석의 근대화는 Hayek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조회하여 cosmos의 질서로부터 돈의 비밀로 유도하는 것은, 경제사상의 근대화가 천문학적이요 신학적인 것이 벌써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에서 시작된다. 돈과 교환의 알 수 없는 놀이에 비슷한 것을 알아 낸 것은 Hayek이 처음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경제학이 안다고 한다.




플라톤에 이어 아리스토텔레스는 돈에 관해서 논술하면서, standard가 모든 것을 통약 가능케 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의 가치가 돈에 의해서 측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 이와 같은 생각에 R. Rorty도 합류하는 것 같다. 그러나 반론으로, 돈이 통약성을 창조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비율에 의한 교환은 돈이 있기 전에도 실재했기 때문이다. 이 교환을 Schumpeter는 Barter라고 부르고, 이것을 원시경제라고 하는데, 원초적으로는 집 한 채의 교환가치는 5개의 침대에 의해서거나 다섯 minae라는 화폐가치와는 차별없이 표현된다 (1133b 23-8).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적 정의문제로 돌아가서, 공정함으로서 교환정의는 너무 많거나 너무 적은 것 간에서 중용의 문제라고 하는데, 실제 문제가 되는 것은 middling이 교환에서 어떻게 공정성을 일으키는가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교환이 그들이 만들어 낸 산물의 비율을 동등하게 할 것인가 라든가, 산물의 통약성을 설명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등식이 이론적으로 가능한가 라는 물음으로부터 NE. 5.5는 chreia에 집중되어 chreia의 역할분석이 중심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상품 간의 통약성을 가져오는 요소가 chreia라는 주장을 한 동안 견지한다. 교환에서 등식을 성립하게 하는 공통분모는, Soudek은 chreia를 ‘욕구만족’이라고 번역하고, 또는 필요 또는 수요라고도 번역되며, 시장에서 흥정에 의해서 등식은 성립한다. Newman은 “인식론적으로 (in truth) 너무 차이가 있어서 통약 불가능하더라도 수요와 관계시켜 통약될 수 있다”고 한다. Barker는 (political thought of Plato and Aristotle, 1907) 수요 또는 필요가 교환을 위한 연합에서 사람들을 함께 맞물리게 한다고 한다 (1333a 27). Ross, Rackham, ‘δει αρα τούτο ἰσασθὴναι’. 그러니 이것이 등식화되어야 한다 에서 이것을 그도 수요라고 번역한다. Irwin은 “그러므로 ‘이 등식’이 정립되어야 한다”, (Ross, 1133b 10에서) Ross는 “이 수요의 부동성이 동등하게 되어야 할 것이다” 라고 번역한다. 분명한 사실은, 교환이 실행되는 것은 각 산출자가 다른 산출자의 산물을 필요로 하는 데에 달렸다. 문맥으로 보면 이것이 이 수요의 부동성일까? ‘이것’은 조금 전 1133b 5에서 말한 산물 δ와 γ를 등식화하는 것과 관련된다. chreia는 ‘사용’, ‘유리함’, ‘도움’이라고도 사전에 의하면 번역될 수 있다. Finley는 신발과 집이 통약되고 등식화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하는 것을 chreia라고 하고, ‘어떻게든’ ‘공통된 척도’로 등식화되는데, 수요라면, 비과학적, 비인지적 통약가능성을 말하는 것이요, 조금 뒤, ‘실제적 목적을 위해서’는 이 수요로 충분하다 라고, “Really and in truth (τὴ μεν οὖν ἀλη-θεία), it is impossible for things that are so very different”라고 번역하고, 그러나 결국 통약된다 (1133b 19-20)를 읽고, 수요중심의 교환가치설을 굳힌다. 플라톤이 idea라고 한 데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적 경험의 확실성에 기대어, 토론 만으로 통약가능성에 관한 문제가 모두 해결되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토마스 아퀴나스도 따라서 경험에 기대어, 실제적 목적을 위해서는 부족함이 없이 충분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것을 경험에서 얻은 know how라고도 부른다. 이렇게 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용가치이론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정당화된다. Rackham은 엄격하게 인식목적을 고집한다면 통약가능성은 없다고 결론내린다. 이와 같은 주장은 Hayek의 자유주의 경제이론에 기초를 제공한다. 그러니 실제적 목적을 위해 설명해야 할 문제는 넷이다.
① 비율 (비율유비론)에 의한 동등성 (τοκατα την ἀναλογίαν ἰσον) (1133a 10-11)
② 통약가능성 (summetria)
③ 척도, 통약성을 양화하는 단위
④ 노동분담과 국가사회의 결합, 함께 맞물리게 함 (sunnechei)
여기에 대한 간략한 해답은,
① 돈이 모든 것의 가치를 측정하기 때문에, 돈이 통약성을 이룬다.
② 돈이 있기 전에 교환은 행해졌다.
③ 산물은 돈과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통약 가능하다 (Pol. 1).
Rackham이 이른 바 standard view라고 부르는 관점, MacIntyre가 충분한 standard라고 하는 관점에서는, 척도와 통약하는 특성을 구별한다. Rackham은 수요라고 번역되는 chreia와 standard를 일치시킨 데 대하여, MacIntyre는 ethos와 관련하여, 더욱 복합적이다 (1133b-10). “수요가 단 하나의 standard로 쓰임에 의하여 결합을 함께 맞물리게 한다는 것은, 양측 또는 어느 한 쪽의 서로 돕는 것에 대한 요구 또는 수요가 없을 때는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로도 명백하다 ...... 그러니 이 수요의 불동등성이 동등하게 되어야 할 것이다”. ὥσπερ ἓν τι ὄν을 Rackham은 단 하나의 standard로 쓰임에 의해서 라고 번역한 것을, Ross와 Irwin은 단 하나의 단위로 번역하여, 단위가 여럿이 아니라 하나로 통일되어 결합을 유지한다 라고 이해시킨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 chreia를 끌어들여 연결시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ὄν이 아니라 ousa라고 여성을 썼어야 할 것이라고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chreia에 standard의 역할을 준 적은 없고, 다만 결합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준 것으로, MacIntyre는 공동체 (koinônia)에서 standard는 ethos라고 주장한다. 그것을 삶의 방식이라고도 해석하는 사람이 생긴다. 그는 경제공동체 대신에 인륜적 공동체 이론의 기초를 제공한다 (1133a 25).
- chreia가 모든 것을 측정한다 δει ἄρα ἐνι τινι παντα μετρείσθάι.
- 결합을 유지한다. 함께 물리게 한다 ἡ χρεία ἣ πάντα συνέχει (1133a 6-7).
- 통일된 한 단위로 결합한다 ἡ χρεία συνέχει ὥσπερ ἓν τι ὄν (1133b 6-7).
- 산물을 통약 가능케 한다. 그러나 not ‘really and in truth’ 통약 가능케 하지는 않는다 (1133b 19-20).
- 너무나 달라서, 산물이 ‘in truth’ 통약 불가능하다 (1133b 18-20). 노동은 목적을 갖는다. 산물의 point (목표, 효과, 의미) 또는 telos는 어떤 목적에 쓰인다. 유용하다, 사용가치가 있다. 이들 가치는 교환가치와 다르다. 교환하게 하는 데, 그리고 도시국가 (정체)를 유지하는 데 충분한 통약 가능한 산물은 교환가치를 갖는다. 노동분할과 개인적 교환은 국가사회 생활의 근본적 조건이다 (pol 3, 1280b 20 ff.). 먼저 NE 5에서도, “공정한 교환이 어느 형태의 정의 보다 ‘국가의 구원’ (1132b 33)이다”라고 하고, 다시 Pol. (1261a 30-1)에서 반복 조회하고 있다.
- 인지론적 통약가능성은 제 2차적인 것이다. chreia는 산물에 내재하는 특성이라기 보다는 교환자 안에 내재해 있다. ① 결국 chreia로 다시 돌아온다는 관점이 이해되고 받아들여 진다. ② chreia가 함께 맞물린 결합을 유지하고, 산물을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 충분하게 통약 가능하게 한다. ③ 그런데 chreia의 특성은 자연적으로가 아니고 규약에 의해서 존재하는 돈에 기초해서 찾을 것이 아니요, 산물의 특성도 아니요, Barter이건 사고 팔고 하건 간에 교환자의 정신상태에서 탐구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의미있는 물음이 물어진다.
너무나 달라서 통약 불가능했던 물건이 어떻게 현실적으로 교환하게 되고 그래서 함께 맞물리게 될 수 있도록 충분하게 통약 가능하게 되는가, 어떻게 신발과 음식물이 교환되도록 비율이 등식화되는가? 왜냐하면, 동등하지 않고 교환되지 않고, 통약가능성 없이 등식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환에서 침대는 집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 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 양립하지 않는 문제로 한 편으로는 질적으로 너무 이질적이어서 통약 불가능하다. 다른 한 편으로는 질적으로 같아서 통약 가능하며, 다만 양적으로만 다를 때(1133b 18-20) chreia는 수요, 유용성, 욕구만족으로 번역되며, ‘충분히’는 결코 과학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니나, ① 어떻게 공정함과 동등성이 교환에 들어오는 지 ② 공정한 교환에서 무엇이 등식화되는가 ③ 산물 사이에 무엇이 통약 가능한가 ④ 통약 가능하게 하는 특성의 크기는 어떻게 측정되는가 ⑤ 측정의 단위는 무엇인가 ⑥ 무엇이 교환을 함께 물리게 하는가? 등이 알 필요가 있겠고, 아는 것이 유용하며, 알려고 하는 욕구가 만족되기 기대된다. 그러나 이 지식은 과학적 지식과는 다른 새로운 산 지식이다. 무엇이 국가공동체를 유지하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chreia line이 있는데, 한 사람의 chreia와 다른 사람의 chreia와의 등식을 발견하기란 어렵다. ‘합의된 것은 어느 것이나 공정하다’. 이것은 그러나 설득력이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교환이 이루어져서, Hobbes는 현실적 교환이 이루어지는 계약 보다 더 공정한 것은 없기 때문에, 계약의 정의가 교환정의라고 한다 (Hobbes, Leviathan, ed. by R. Tuck, Cambridge, 1991).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adikos (불의)는 anison (불평등)이다 (NE, 1129a 32-3). 계약은 불공정하고 불평등하게도 맺어진다. Thales (Pol 1, 1256a 6-36)의 경우 일종의 독점매석은 불의다. ‘Really and in truth’ 그토록 다른 물건들이 통약 가능한 것은 불가능하다. 철학에서 과학철학과 다른 철학과의 통약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교육의 chreia 면으로는 충분히 통약 가능하다 (NE 5, 1133b 19-20). 아리스토텔레스에 이어 토마스의 통약가능성 이론은 인식론적으로 만족한가? 이 장에서는 맞는 것 같지 않다. 교육의 통약가능성 의 기초로 노동과 사용 가운데 어떤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 같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유용성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노동개념이란 Hayek과 Marx를 기다려야 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만 교환가치를 추구했다는 설이 등장하고 있다. “교환은 평등성 없이는 존재하지 않으며, 평등성은 통약가능성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을 오스트리아의 맑스주의자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통약가능성에 관한 분석으로는 토마스의 것이 더 탁월하다는 생각이 대다수를 이룬다. 고전철학자는 다시 ‘존재한다’라는 description의 애매성에 관해 토론하기 시작했고 oikodomos는 ‘builder’만은 아니요, 그 번역은 ‘constructor’, ‘Bauer’, ‘edificateur’ 다시 ‘세우는 사람’이라고 하는 번역이, 교환정의에도 어떤 엉뚱한 이론을 내세우는 것 보다는 더 좋은 번역을 기다리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이 생각된다.




교환 없이 사회적 연합 또는 결합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이론화 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이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모든 교환활동은 추구되는 목표 또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거의 모든 교환활동은 교환가치를 목표로 추구한다고 공식화 할 수 있다. 그런데 교환가치가 활동에 들어오게 되면, 이와 같은 활동의 실재적 목적은 교환가치의 목적을 위한 수단 또는 도구가 된다. 그리하여 실재적 목적은 타협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파괴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교환가치가 문화, 교육, 사상에도 들어오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동이론에 의하면, 행동은 그의 목표에 의하여 정의된다. 교환활동에 관한 토론 중에 다른 형식의 교환으로 추구되는 두 다른 목적을 구별할 것을 정초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오스트리아 학파가 알아낸데로 마르크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와 같은 행동실천이론을 신봉하여, 목적에 따라 동일시해야할 실천과 차별해야할 실천을 구별한다. 그리하여 이른바 예술노동이나 과학 또는 종교노동까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노동의 종류는 다르고 교환에서 두 다른 종류간에 비율을 결정할 동등성은 없다는 설을 견지한다. 이와 같은 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동이론과 달라진 것이거니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교환이론에 조회하면서 마르크스의 비판을 비판하는 하옉은 ‘교환에 기초를 둔 현대사회에서 대부분의 개인은 소득을 얻기 위하여 일하는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서 교환행동을 조정하는 주된 규칙은 정상적으로 자신들이 노력해서 얻는 것이 증대될 가망이 있는 방향으로 노력을 쏠린다고 한다.’ 그런데 다시 아리스토텔레스로 되돌아가 재발견되는 것은 모든 형태의 교환이 경제적 성장과 발전을 목표로 하는 행동과 중첩은 되더라도 다 같이 하나만의 목적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한 형식의 교환은 한 목적을 위해 그리고 다른 형식의 교환은 다른 목적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맥킨타이어의 Koinonia이론으로 해석되고 공동체의 공동선을 위해 봉사한다고 할 때 공동체는 국가와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단체, 가족에도 조회된다. 맥캔타이어가 선생님으로 신봉하는 아퀴나스도 인간의 실천행동의 류가 그 목적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하고(Summa Theologiae Ⅰ-Ⅱ 91a3), 니코마코스윤리학 주석에서는 교환이 성립케하는 공통분모 찾기에 골몰한다. 일반적으로 상호성이 있는 정의로운 교환은 사업 또는 작품의 공통분모를 함의 할뿐 아니라 사업가, 예술가와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공통분모를 찾아내야 한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공정한 교환은 상호성의 한 형태이다(1132b 31-2). 그런데 상호성은 단순한 동등성이 아니라 비율을 동등하게 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교환될 작품도 그리고 다른 가치를 갖는 작품을 제작하는 제작자도 동등하지 않으나 서로 교환될 그리고 인물간에는 공통분모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상호성으로서 정의에 관한 토론과 공통분모에 관한 토론이 연계되어 있는 것이 보다 더 분명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 N.E.5.5의 대부분이 모든 작품에 공통된 특성을 찾는데 노력이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재로 그러한 특성은 존재하지 않는다.’(1133b18-20)라고 한다. 마르크스가 생각하는 형이상학적 공통실체 같은 것도 착각이라고 하는 하옉의 비판도 “아리스토텔레스에 조회한다. 다른 제작자의 작품은 다르고 동등하지 않다. 다른 것은 같다고 할 때, 정의문제는 폭력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렐레스는 또 다른 곳에서 그들이 그들 자신의 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동등하다.’ 라고 한다. 동등한 것을 동등하지 않다고 하여도 정의의 문제가 생긴다. 이 둘은 화해될 수 있는가?” 실천과 행동에 있어서 상호성으로서 정의는 동등한 비율로 교환하는데서 성립한다고 그 다음 단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한다. 그러기에 교환자간의 상호성으로서 정의는 공동체의 기초에 같은 척도로 잴 수 있는 균형 잡힌 상응성으로 공통분모를 놓는다. 그런데 한 쪽이 다른 쪽에 비해 너무 많거나 너무 적은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교환은 이루어지는데, 그때 이들은 교환을 위해서는 동등해져야 한다.(1133a12-14) 합리적인 교환은 균형 잡힌 비례를 가진 동등성이라는 원리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석에도 발견된다. 그러니 불의는 너무 지나치거나 너무 모자라 비율 밖의 것을 칭한다. 많고 적은 곳에는 반듯이 평등이 있기 마련이고, 이와 같은 평등을 토마스는 중용이라고 일컫는다. 이 중용이 사랑의 한 형태인 형제애 또는 우애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평등과 형제애는 오늘날 공동체 생활을 하는데 어떤 것보다 더 기초적인 인권과 연계시키고 인권을 위해 더불어 행동하는데 참여하는 사람들 간에는 상호성의 원리와 같은 상응성을 함의한다. ‘공정한 교환은 상호성의 한 형태이다.’(1132b31-2) 교환에서 더 많은 것을 얻어 낼 때, 득이오 승자라고 할 수 있으나, 이것은 자신의 선 개념에 따라서이오, 노동이나 부담과 같은 악에 대해서는 그 반대일 것이다 토미즘을 신봉하는 철학자들은, 그의 지도에 따라 얻는 것과 잃은 것 사이에 중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상호성의 원리에 의심이 생기면 마치 중용에 닿은 듯, 형제애, 동등성과 같은 공통분모를 찾아내기 위하여 중재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로 되돌아간다. 이와 같은 중용사상은 동양의 가르침과도 그리 다를 것이 없는 공통분모를 갖는다. 교환 전 또는 후,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우리 것을 보존하여 가지고 있다면,’ ‘인간은 모두 평등하며 형제라고’ 선언하는 인권선언의 보편적 이상과도 양립하는 것이며 공동체의 목표와도 양립하는 목적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상과 목적을 실현할 능력과 효과 있는 도구가 없을 때도 도덕적인 목적 선택은 무의미 한 것이 될 것이다. 도구와 목적의 순환이 바로 상호성으로서의 정의를 실현하는 교환활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