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대타 존재(l’ être pour autre)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필리아(philia)

나뭇잎숨결 2022. 2. 12. 10:30

대타 존재(l’ être pour autre)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필리아(philia)


김 요 한(전북대 철학과)





1. 들어가는 말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 체제에 편승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1등, 특정대학 출신자, 자본가, 정규직 노동자들이 모든 것을 독식하는 체계로 급속도로 전환되었다. 그 이면에는 자유경쟁이라는 약육강식의 신자유주의 이념이 도사리고 있다. 신자유주의란 시장원리 준수, 자유경쟁 촉진, 정부규제 철폐, 기업구조 조정, 공공재 폐지 등을 주장하는 새로운 경제사상을 일컫는다. IMF 이후에 우리 사회에 드러난 신자유주의의 특징으로 자유경쟁의 촉진, 극대의 효율성 추구, 이윤의 극대화, 시장경제원리의 준수, 규제 철폐, 기업의 경쟁적 우위 확보, 공기업의 민영화, 노동시장의 유연성 촉진, 실질임금의 하향, 경직성 제거, 공공지출 축소, 중앙집권 지양, 정부기구 및 기업구조 조정, 사회복지부문에 대한 공공예산 삭감, 공공재의 개념 철폐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19세기 대영제국과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이 경쟁과 ‘자유무역’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빌어 식민주의를 합리화하는데 사용했던 고전적 자유주의의 변형이다. 신자유주의는 IMF나 WORLD BANK 처럼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들에 의해 설계되고, 추진되었으며, 보완되었다. 두뇌집단들과 대학연구소, 정부기관들은 신자유주의의 주창자, 계획자, 비판가들의 국제적 활동공간을 마련해 주었으며, 이러한 것들은 그 모든 형태에 있어 정부의 강압적인 힘에 의해서 뒷받침되었다. 신자유주의는 이데올로기인 동시에 하나의 전략이다.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시장”에 대한 숭배와 시장의 요구에 정부와 개인을 포함한 다른 모든 경제행위자들이 종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전략은 대략 사유화, 사회비용의 축소, 노조 해체, 토지에 대한 종획 혹은 울타리 치기, 저임금, 고이윤, 자유무역, 자유로운 자본의 이동과 자연의 가속적인 상품화 등이다.
물밀 듯 들어오는 신자유주의의 시대적 조류에 발맞춰 우리 사회는 급기야 ‘황금’이라는 바알신(Baal)을 숭배하는 황금만능세상으로 탈전통화가 이루어졌고 무한경쟁을 최고 도덕 가치로 숭상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우리는 내신, 대학 입시, 취업, 승진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경쟁 구도 속에 적자생존의 원칙에 따라 끊임없이 타인을 절대적 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왜곡된 타인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왜곡된 타인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사유 틀을 우리는 가질 수 없는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연구자는 이 글에서 다음과 같은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우선 사르트르의 대타 존재라는 개념을 통해 신자유주의에 의해 왜곡된 타인의 개념을 분석할 것이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인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묻고 자신을 초월해가는 자유로운 주체, 즉 자신의 행동으로 스스로를 창조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로 이 자유의 실현이 무한 경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씨앗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 모두가 함께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이 있는 가 그 가능성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사르트르는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 그 가능성을 마르크스주의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연구자는 이 가능성을 아리스토텔레스의 필리아 개념에서 확보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연구자는 그 핵심 개념을 ?니코마코스 윤리학? VIII 2와 ?수사학? II 4를 중심으로 살펴 볼 것이다. 이 연구는 인간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타인의 본질로 보고 서로에게 선의를 갖는 필리아의 개념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 안의 왜곡된 타인의 모습들이 회복될 수 있는지 살펴 볼 것이다. 연구자는 필리아의 개념 연구가 끊임없이 경쟁을 유도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타인과의 관계를 극복할 수 있는 도덕성의 기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 사르트르의 존재론
2.1 대자(對自) 존재와 즉자(卽自) 존재

사르트르는 존재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있기는 있되 자기 자신을 의식하면서 있고 또 자신이 의식하는 것(자기 자신)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는 존재이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의식할 수 없고, 따라서 그 자신 속에 닫혀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자라면서 많은 물건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기쁨과 슬픔을 느끼고, 자랑스러움과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애정과 분노를 느끼며 살게 된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의식하면서 산다. 그러나 우리는 나 자신의 기쁨이나 분노가 어떤 것인가를 의식할 수 있다. 우리는 그저 기뻐하거나 성낼 따름인 것이 아니라 기쁨을 의식함으로써 그 기쁨을 한층 더 만끽할 수 있고, 분노를 의식함으로써 그 분노를 더 깊이 마음속에 새길 수 있다. 이때 내 의식을 차지하고 있는 기쁨이 있고, 다음으로 의식을 차지하고 있는 그 기쁨을 또다시 의식하는 의식이 있다.
어떤 의식에는 늘 그 의식을 다시 의식하는 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비유적으로 의식의 거울에는 그 거울을 비추는 또 하나의 거울이 항상 준비되어 있다. 그런데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거울이 없듯이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는 의식은 없다. 거울은 자신이 비추는 것으로 가득 차 있듯이 의식은 의식된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또 비친 것이 없이는 거울이 아니듯 의식된 것을 빼 버리고 나면 도대체 의식이라는 것은 없다. 그런데 의식된 것이 바로 의식은 아니다. 여기서 사르트르는 의식의 존재가 아주 독특하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릇에 물이 가득 들어 있을 때 물을 덜어낸다고 해서 그 그릇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물을 부으면 부을수록 그만큼 점점 더 커지고 물을 덜어내면 덜어낼수록 그만큼 점점 더 작아지는 어떤 신기한 그릇을 가정해 보자. 그리고 그 그릇의 두께가 영(zero)이라고 해 보자. 물 자체가 그릇은 아니지만 물이 없어지면 그릇도 함께 없어질 것이고 그런 점에서 그릇과 물은 한 몸을 이루고 있다.
사르트르가 본 의식은 이러한 그릇과 유사하다. 그릇의 처지에서 보면 물은 곧 자기 자신이면서 또 한편으로 곧바로 자기 자신은 아니다. 의식은 자신 속에 가득 차 있는 의식된 내용들이 곧 자기 자신이면서 또 한편으로 자기 자신이 아님을 안다. 이같이 자기 자신을 의식하되 의식되는 자기 자신이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그리고 의식하는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그 가득 차 있는 것이 곧바로 자기 자신은 아니라고 부정하는 존재를 사르트르는 대자 존재(l’être pour soi)라 일컫는다.
이런 대자 존재와 대립하는 것으로 또 하나의 존재가 있다. 우리는 각 물건을 ‘이것’이라고 지시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이 책’, ‘이 돌’, ‘이 슬픔’, ‘이 무력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우리가 ‘이 돌’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 돌은 그 자체 또는 그 자신 속에 가만히 머물러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 돌’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돌이 그 자신을 벗어날 수 있다면 ‘이 돌’이라는 우리의 말은 발언하는 순간 그릇된 것이 될 것이다. 이처럼 자신을 벗어날 수 없는 것들의 존재를 사르트르는 즉자 존재(l’être en soi)라 부른다.
대자 존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거리 두기가 가능하다. 그러나 즉자 존재는 자기 자신과 아무런 거리도 갖지 않는다. 대자 존재가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거리를 둘 수 있는 것은 대자 존재가 성격상 그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때 대자 존재가 부정하는 자기 자신은 이미 결정되어 버린 자기 자신이다. 사르트르는 이처럼 순간순간 이미 이루어진 자신의 모습을 자신이 아니라고 부정하면서 미래로 도약해 가는 것을 초월이라 부른다. 그리고 바로 이 초월에서 자유를 찾는다. 이같이 기존의 자신을 부정하면서 미래로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의 모습을 사르트르는 “우리는 자유에로 선고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을 통해 자신을 초월하는데서 진정한 인간 주체의 존재, 즉 실존이 성립한다.

2.2. 대타 존재(l’ être pour autre)

초월은 주어진 상황에서 자기 스스로 행동을 선택하는 데서 구체화된다. 우리는 순간순간 어떤 방식으로건 어떤 행동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어떤 상황에서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것조차 하나의 선택이다. 행동을 선택한다는 것은 스스로 미래를 향해 뛰어드는 것, 또는 자신이 스스로 짜 만든 그물을 미래로 던져 미래를 건져 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즉자 존재는 자기 자신을 벗어날 수 없으며, 언제나 어떤 것으로 정해져 있다. 돌덩이가 돌덩이인 까닭은 이제까지 돌덩이였기 때문이다. 즉자 존재는 과거에 얽매여 있고,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그 과거에 따라 자동적으로 미래가 결정된다. 따라서 즉자 존재는 필연성을 자신의 근본속성으로 갖는다. 대자 존재는 주체적인 자유를 나타내고, 즉자 존재는 객관적 필연성을 나타낸다. 이런 점에서 즉자 존재는 대자 존재에 대해 도구로서 기능한다. 따라서 이 두 존재는 궁극적으로 결코 서로 겹칠 수 없고 서로를 밀어내는 배타적인 관계를 갖는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이 동일 존재양식이 인간관계에도 적용이 된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둘러싸고 첨예한 경쟁을 배운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소유하면 타인이 소유할 수 없고, 타인이 소유하면 내가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매사에 소유한 만큼 자유를 누리고, 소유하지 못한 만큼 구속받게 된다. 사르트르는 이같이 대자 존재와 즉자 존재의 이분법적 기본 얼개를 바탕으로 투쟁과 대립 관계의 장에 놓여 있는 인간 존재를 탐색하고 있다. ?존재와 무? 후반부에서 사르트르는 앞에 언급된 두 가지 존재 말고 또 다른 하나의 존재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남과 관련해 내게서 성립하는 존재이다. 예를 들어 내 아버지와 관련해서 볼 때는 나는 자식으로 존재하고, 국가와 관련해서 나는 국민으로 존재한다. 이처럼 나에게 속해 있기는 하나 언제나 남과 관련해서 성립하는 존재를 대타(對他) 존재(l’ être pour autre)라고 한다. 남은 나에게 남이고, 나는 남에게 남이다. 서로는 자신에게 자신이면서 서로에게는 남인 것이다. 처음부터 남은 내가 나의 의식에 의해 나 자신을 초월하는 작업에 동참할 수 없다. 초월은 나 자신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며 애초에 남은 내 속에 진정으로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은 나를 대할 때 나를 외면적으로 규정되는 어떤 대상으로 간주한다. 이를 사르트르는 남이 나를 객관화한다고 말한다. 즉 남은 나를 즉자 존재로 보는 것이다. 남이 나를 즉자 존재로 보는 것은 나를 그의 도구로 보는 것과 동일하다.
따라서 나는 타인과 더불어 살면서 타인이 나를 진정한 정신적 주체로 대우해 주기를 원한다. 내가 정신적 주체가 된다는 것은 내가 충분한 대자 존재로서 대타 존재 상태를 넘어서서 존재함을 의미한다. 내 속에 대타 존재 상태만이 가득 차게 되면 대자 존재로서 나 자신은 소실된다. 따라서 내가 충분히 대자 존재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남에 의해 즉자 존재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으로 만약 타인이 나를 노려보면서 자기 자신을 충분히 대자 존재로서 구축하게 되면, 그만큼 나 자신은 즉자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따라서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남이 나를 진정한 정신적 주체로 대우한다는 것은 곧 그 타인이 내가 그를 즉자 존재로 대상화해도 됨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타인은 좀처럼 나를 진정한 정신적 주체로 대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2.3. 가학증과 피학증

따라서 상호 투쟁의 인간관계에서 삶을 유지하는 방식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첫째, 내가 나 자신만의 세계가 주는 불안에서 달아나 남이 나에게 부여하는 가치에 따라 살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남의 주의를 끌어야 하고, 남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는 남의 욕망에 적절한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나의 욕망을 포기한다. 이때 남은 내 주인이 되고, 나는 남 앞에서 부자유의 수치심을 느낀다. 이런 삶의 전략을 사르트르는 마조히즘, 즉 피학적 삶의 방식이라 한다.
그러나 수치심은 나의 대자 존재인 자유로운 삶의 방식을 일깨워 주기 때문에 피학적인 삶을 계속 유지할 수 없다. 이제 나는 오히려 남을 내 각본에 따라, 나의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배우로 만들어 수치심을 통해 깨닫게 된 나의 자유로운 주체성을 확보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남은 자신의 자유로운 주체성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저항한다. 그런 과정의 결말에서 나는 남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남에 대한 폭력을 통해서 자신의 자유로운 대자 존재에 의거한 주체성을 향유하려는 삶의 두 번째 방식을 사르트르는 사디즘, 즉 가학적 삶의 방식이라고 부른다. 이같이 사르트르에게서 개인적 실존의 초월적 주체성의 자유는 나와 남과의 상호 투쟁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비극적 자유로 귀착한다. 그래서 사르트는 “남은 지옥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 ?존재와 무?에서 보여지는 이와 같은 허무한 관념론을 극복하기 위해서 마르크시즘을 실존주의에 접목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끊임없이 남을 지옥으로 간주하며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인간을 역사의 흐름 속에 위치시키고, 인간을 쓸모없는 정열을 지닌 자로서가 아니라 역사 창조의 의미 있는 참여자로서 재규정하고 있다. 그것은 어떻게 개인이 자신의 고립을 파기하며, 공존의 확실한 의식을 발전시키며, 자신의 개인적 양심을 순수히 무화(無化)하는 자유가 아닌 타자의 자유를 반영하며, 그것에 의해 반영된 자유로서 간주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려는 시도였다. 또한 거기에는 타자의 자유의 실존은 결국 인간을 자유롭게 할 행위, 또는 실천을 유발하는 역사적 힘들이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의도도 함께 담겨져 있다. 무한 경쟁으로 인한 인간 소외 현상은 결국 혁명의 조건이 된다. 이 상황에서 혁명가가 등장한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전(全) 계급(인간)을 위해서 변혁하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혁명가의 사상은 휴머니즘이다. 따라서 우리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주장이 모든 혁명의 기반이 된다. 혁명가는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반대로 권리라는 개념 자체를 파괴하는 사람이다. 그의 휴머니즘은 인간적 위신에 자리 잡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어떤 특정한 위신도 부정하는 것이며, 인간을 지배하기 위한 통일이 아닌 인간 종족으로서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인간 종족이다. 단지 그 발전의 여러 사정들이 인간에게 일종의 내적 불균형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혁명가는 그의 임무를 통해서 현재의 불균형 상태를 극복하고 더욱 합리적 균형을 찾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3. 아리스토텔레스의 필리아(philia)

사르트르는 초기에 인간이 자신을 초월해 가는 자유로운 주체로서 자기 스스로를 창조하는 존재임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런 인간은 개인으로서의 인간으로 내면적 인간에 국한된다. 그래서 결국 구체적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타인을 지배하거나 그에게 함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공동체성을 통해서, 즉 우리가 인간이라는 점에서 인간 모두가 함께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만 한다. 이런 방식을 통해서만 진정한 초월, 진정으로 자유로운 주체가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연구자는 이와 같은 시도의 구체적 사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필리아 개념을 제안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자아실현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아실현은 그의 사회성에 달려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1169b18-22). 이 사회성은 ‘필리아’란 개념으로 명시된다. 필리아는 인간의 자아실현을 위한 규범적 가능성이다. 선용하지 않을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것이 품성으로서 최고로 계발되고 발휘된다면 인간은 최고의 자아실현을 체득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필리아를 통해서 우리에게 스스로 사랑할 만한 존재가 되도록 노력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함으로써 또 다른 자아인 친구를 사랑하게 되고 바로 그 사랑 안에서 보다 나은 자기반성, 기쁨을 주는 관조, 행복이라는 활동에 이를 수 있다고 권고하고 있다. 여기서 연구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는 필리아의 개념은 무엇이며 그것이 갈등과 경쟁으로 점철되어 있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타인을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 하는 물음의 사유 틀을 어떻게 제공하고 있는지 고찰해보고자 한다.

3.1. 기초개념

희랍어의 필리아 개념은 우리말로는 ‘벗 사랑’, ‘우애’, 영어로는 ‘friendship’으로 번역되고 있다. 그러나 필리아는 많은 연구가들이 지적하듯이 훨씬 더 넓은 범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1) 단지 가까운 사람들 간의 (가까운 가족의 유대를 제외한) 친밀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2) 모든 종류의 가족관계들(부모 대 자녀, 자녀 대 부모, 형제 대 자매, 남편 대 아내)을 포함한다. 또한 필리아는 어떤 사업관계 또는 종교단체, 사교 클럽, 정당의 구성원들 간의 교제를 의미하는 3) 시민의 친교(civic friendship)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로스(W. D. Ross)는 필리아를 두 인간 사이의 상호 친화력(mutual attraction)으로 번역한다. 사랑과 미움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수사학? II 4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아함”(to philein)을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서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타인이 갖기를 원하는 것과 그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그러한 것들을 타인을 위해서 실행하려는 경향을 지니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1380b36-1381a2). 그리고 나서 친구(philos)를 타인을 좋아하고 타인에 의해서 좋아함을 받는 자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핵심 개념은 필리아가 자신에 대한 관심이 아닌 타인에 대한 관심에서 또는 타인을 위한(ekeinou heneka 1155b31) 어떤 사람의 선행(eu prattein)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가족이든 국가든 사업 동반자든 정치적 동지든지 상대방을 위한 관심으로부터 선행이 이루어지는 순간 필리아가 존재한다. 이처럼 필리아의 기초 개념은 상호 애호(mutual liking)로 ?수사학?에서 규정된 바에 따르면 서로에 관한 관심에서 출발하는 상호 선의(eunoia)와 선행이라고 정의된다. 여기서 필리아는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를 위해서 그에게 좋은 일이 생기도록 비는 혹은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순수성을 포함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필리아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행복한 인간의 삶의 본성은 타인에게 단지 그 자체로서 또한 그 자신을 위해서 관심을 갖는 행위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세 사람간의 친근하고 밀접한 형태의 실제적 우정이 행복한 인간의 삶의 필요조건일 뿐만 아니라 거시적으로 시민의 교제 또한 본질적인 인간 선임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공유 활동들이 관계의 핵심인 밀접한 인격적 우정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직접 연결되지 않은 동료 시민들을 서로 좋아하고 서로에 대한 선의와 선행을 할 수 있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코마코스 윤리학? VIII 2에 따르면 어떤 것을 좋아하는(philein) 일이 모두 다 필리아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나는 포도주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나와 포도주에 필리아가 존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첫째, 포도주는 역으로 나를 좋아할 수 없기 때문이며 둘째 나는 포도주가 잘 되기를 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타인을 위해서 타인에게 선의(eunoia)를 갖게 될 수 있을 때 그리고 이 선의를 갖는 것이 서로 교환 가능할 때 필리아가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니코마코스 윤리학? VIII 2에 나타난 필리아의 정의는 ?수사학? II 4에 나타난 순수성에 상호성을 결합시킨 정의이다. 따라서 필리아는 서로에 관한 관심에 의해서 친구 x가 친구 y를 위해서 그에게 잘 되기를 기원하는 상호적 선의이다.
한편 ?니코마코스 윤리학? VIII 2의 분석에 따르면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묶어주게 하는 요소에 따라 필리아는 세 가지 종류(eidē)로 구분된다. 교제를 발생시키는 그 첫 번째 요소는 쾌락(to hedy)이며 두 번째 요소는 타인으로부터 얻게 되는 유익(to chrēsimon)이다. 세 번째 요소는 타인의 도덕적 탁월성에 대한 인식(he agathoi)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필리아의 중심이 도덕적 탁월성의 인식에 근거한 필리아라고 주장한다. 이런 관계들을 갖는 사람들을 그는 훌륭한 사람(agathoi)이라고 부르며 그들의 필리아를 완전한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이 이론에 따른다면 오직 완전히 유덕한 사람들, 즉 완전한 지성과 품성을 완벽하게 갖춘 군자들만이 이 고급 필리아를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된다. 약간의 훌륭한 성품과 약간의 훌륭하지 않은 성품의 혼합체로 구성된 평범한 사람은 이 고급 필리아를 갖는데 적합하지 못한가? 일반인들은 완전히 사악한 자들처럼 단지 쾌락이나 유익에 근거한 저급 필리아를 갖도록 운명 지어져 있는가? 이 물음은 앞에서 언급된 필리아의 기초 개념이었던 타인의 선에 관한 관심으로부터 발생하는 선의와 선행이 ?니코마코스 윤리학? VIII 2에서 검토되고 있는 세 종류 필리아의 공통 조건이 될 수 없는가라는 물음과도 연결되어 있다.

3.2. 완전한 덕과 부분적 덕

?니코마코스 윤리학? VIII 2, 1155b27에서 상대방을 서로 좋아하게 만드는 원인들은 유익(to xrēsimon), 쾌락(to hēdy), 덕(aretē)으로 구분되며 이 요소들에 각기 대응하는 필리아가 세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앞에서 제기된 물음과 관련해서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일반적으로 쾌락 친구나 유익 친구의 경우에 서로 좋아하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몇 가지 쾌락이나 유익이며 그 몇 가지 것을 자신의 친구에게 제공한다는 점이다. 한 친구가 모든 면에서 또는 모든 상황에서 유쾌하거나 유익한 사람이 되어야만 필리아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필리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단지 몇 가지 방식 또는 상황에서 그 좋은 것을 제공하면 된다. x는 비록 유쾌하다고 생각되는 다른 일들에서는 y가 자신의 친구로서 부적합하다고 판단된다 하더라도, y가 유쾌한 술친구이기 때문에 y를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다. 따라서 x와 y가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쾌락/유익의 다양성과 범위가 크면 클수록 그만큼 그들의 쾌락/유익 필리아는 보다 완벽한 것이 될 것이다. 이런 관찰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필리아 이론이 군자에게만 해당되는 매우 엄격하거나 포괄적인 형태가 아닌 제한적이며 부분적인 관점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덕 필리아도 쾌락/유익 필리아와 유사한 구조를 갖는다. 어떤 덕 필리아는 모든 면에서 친구의 완벽한 덕의 인식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덕 필리아도 y가 소유하고 있는 몇 가지 도덕적으로 선한 품성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비록 y가 다른 면에서는 우둔하거나 매우 근면하지 않거나 또는 다소 방종 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알고 있을지라도 x는 y의 관대하고 개방적인 정신 때문에 y와 교우 관계를 갖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형성되는 필리아도 덕 필리아에 속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비록 y가 완벽하게 유덕한 품성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더라도 어떤 점에서 또는 어느 정도로 도덕적으로 선하다는 y에 관한 이해에 x의 필리아가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x가 y를 좋아하게 하는 것이 x에게 돌아오는 쾌락이나 유익이 아니라 y의 품성의 선한 성질이라면, 이런 좋아함은 덕 필리아라고 부를 수 있다. 비록 y의 품성의 성질들이 그렇게 훌륭하지 않은 다른 성질, 심지어 실제적으로 악한 인격적 특성들과 연관되어 있거나 x의 탁월함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렇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필리아를 덕 필리아로 만드는 것은 품성의 탁월함 중에 몇몇 부분적이며 불완전한 것이다. 완벽하게 유덕한 자의 완벽한 필리아는 이 품성들이 완전하게 발달했을 때 이뤄지는 것으로 아주 이상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덕 필리아의 핵심 요소는 완벽한 선의 필리아가 아니라 사람됨, 즉 품성의 필리아로 규정된다. 품성 필리아를 맺기 위해 x와 y는 도덕군자가 될 필요 없이 관계의 기초를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품성의 몇몇 선한 성질들의 인식에 두고 있으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필리아의 핵심으로 완벽하게 선한 인간의 필리아를 예시하고 있는 점은 다분히 그의 사유의 목적론적 배경 때문이다. 그는 어떤 종류의 것을 정의할 때 가장 최상의 것 또는 가장 완전하게 실현된 사례에 집중한다. 그러나 그는 그런 완벽한 사례들을 오직 소수 엘리트 집단에게만 적용하는 우를 범하고 있진 않다.
따라서 필리아의 핵심은 품성의 필리아를 모델로 삼고 있다. 두 사람이 서로의 품성을 알아가며 신뢰하는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서(1156b25-29) 그들의 인간성 때문에 서로를 사랑하게 될 때 그런 필리아가 성립하게 된다. 품성의 좋은 성질 때문에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정확하게 품성의 탁월성의 인식에서 친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선한 것을 그에게 소망하는 것이다. 또한 이런 종류의 선의를 품는 것이 상호응수(相互應手)적(eunoein allēlois 1156a3-5)이라는 점을 그들은 서로 알게 된다. 그들은 서로의 동료를 향유하며 그 관계에 의해서 이익을 얻게 된다(1156b12-17). 그 결과 그들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서로 함께 살아가기도 한다(synēmereuein kai syzēn 1156b4-5). 이 필리아는 일단 형성되면 영원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서로의 품성의 좋은 성질들에 대한 지식과 사랑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러한 특질들은 일단 형성되면 영원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1156b11-12).

3.3 미래와 과거

필리아의 핵심 개념이었던 덕 필리아가 더 이상 지고지순한 선의 필리아가 아닌 인간 품성의 필리아로 재규정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덕 필리아는 가장 인간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쾌락/유익 필리아와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세 가지 필리아가 가지고 있는 어떤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VIII 2와 ?수사학? II 4에서 필리아의 기초 개념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를 위해서 그에게 선의를 갖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형식이 어떠하든 모든 필리아는 x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 y를 위해서 y에게 선한 것을 원한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또한 이 내용이 서로에게 인지되어야 하며 선의를 갖게 되는 것이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응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VIII 2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서로 알려진, 상호응수적인 호의(eunoia)가 필리아에 본질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친구들은 호의를 가져야하며(eunoein) 서로에게 선한 것을 원해야하며, 앞서 언급된 근거들 중에 하나로, 이것을 행하는 것이 서로에게 알려져 있어야한다(1156a3-5).”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친구가 유쾌하고 유익하고 존경할만한 품성의 성질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선의를 갖게 되는 메커니즘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쾌락 필리아에서 선의를 품는 x의 쾌락이 계속 유지되거나 증가될 수 있기 위해서 그는 y가 행복해지기를 바랄 수 있다. 즉 쾌락/유익에 근거한 선의를 갖는 x는 x 자신에게 돌아올 쾌락이나 유익을 얻기 위해 y에게 선의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은 다음과 같은 반대에 직면한다. x는 x 자신의 이익과 동시에 y의 이익을 위해서 y에게 선의를 가질 수 있다 하더라도, x 자신의 유익이나 즐거움을 확보할 목적으로 y의 이익을 위해 y에게 호의를 가진다는 것은 자체모순이 될 것이다.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의 선을 바람은 자기 자신의 선을 위한 도구가 아닌 것으로서 타인의 선을 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선의(eunoia)를 갖는 것은 절대적으로 타인을 위해 선의를 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IX 5와 ?에우데모스 윤리학? VII 7, 1241a1-14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만일 우리가 타인이 우리 자신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타인에게 선한 것이 이뤄지길 원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타인의 이익이 아닌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원하는 것이다. 반면 eunoia는 선의를 갖고 있는 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선의의 대상이 되는 타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1241a5-8) 여기서 그의 주장의 핵심은 eunoia가 선의를 갖는 행위(eunoein)일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 선의를 품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VIII 2, 1156a4에 나타난 선의를 갖는 행위(eunoein)의 모범에 따르면 쾌락/유익 필리아에서 x는 y의 쾌락과 유익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y에게 선의를 갖게 된다. 왜냐하면 y가 x에게 유쾌하거나 유용하기 때문이다(dia to hedy, dia to xrēsimon). 만일 ‘왜냐하면’(dia)이 미래 일을 고려한 것이라면, 즉 선의를 가진 x가 y의 번영을 통해서 산출하거나 성취하기를 소망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 구절은 올바르게 해석될 수 없다.
그래서 dia의 해석을 “-을 위해서”라고 고친다면 품성 필리아와 유사한 주장을 이끌어낼 수 있다. 품성 친구x는 친구y에게 덕을 위해서(di’ aretēn), 즉 품성의 탁월함을 위해서 선의를 품는다. x는 y가 보다 유덕한 행위들을 증대시키고 계속해서 유덕한 행위들을 유지하기 위해서 y가 번영하길 원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품성의 덕 친구x가 y의 품성의 탁월함 때문에 y에게 선의를 갖는다는 주장의 올바른 이해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때문에”(dia tēn aretēn)는 “친구가 선한 품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을 통해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y가 번영하기를 바라면서 선의를 가진 x가 가지고 있는 어떤 목적을 표현하기보다는 단지 y가 도덕적으로 선하다는 결과를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품성 필리아에서 x는 y가 번영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x는 y의 선한 성품을 인식하고 있고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들에게 번영하는 것이 적합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때문에”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 아닌 과거에 관한 것이다. 선의와 선행은 친구가 무엇이고 무슨 일을 했는가에 대한 반응이지 단순히 그가 미래에 무엇이 될 것인가 또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소망이 아니다.
이와 같이 과거 원인에 의거한 방식으로 dia를 해석하고 필리아의 세 가지 형식과 관련지어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선의(eunoia)를 필리아의 세 가지 형식에 공통적으로 적용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쾌락 필리아에서 x는 y를 유쾌한 동무로 그리고 계속 그래왔던 사람으로 인식한 결과 y의 이익을 위해서 y에게 선의를 품게 된다. 마찬가지로 유익 필리아에서 x는 y가 자신에게 정기적으로 유익을 베풀거나 과거에 그렇게 했다는 사람으로 인식한 결과 y의 이익을 위해서 선의를 품게 된다. 서로 동료애를 향유했거나 교제를 통해 상호 이익을 보았던 x와 y는 그들이 받은 유익과 쾌락의 결과로 자기 자신의 복리나 쾌락의 고려와는 무관하게 타인의 선을 위해서 선의를 품고 그렇게 행위하기 원하는 경향이 생긴다. 그렇다면 완벽한 필리아는 이러한 선의들이 상호응수적으로 존재하면서 x와 y 모두에게 인식될 때 성립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4. 본질과 우연

그러나 세 가지 필리아의 공통점을 도출하는데 아직도 다른 장애가 있다. 왜냐하면 ?니코마코스 윤리학? VIII 3-4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품성 필리아에서 친구를 절대적(haplōs 1157b4) 친구로 규정하며 쾌락/유익 필리아에서는 친구를 우연적(kata symbebēkos 1156a17, b11, 1157b4) 친구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x와 y는 그들이 서로 친구라는 관점에서(tautē he philousin 1156a9-10) 서로 상대방에게 선의를 갖고 있다. 그래서 유익/쾌락 필리아에서 x는 y가 유용한 것 또는 유쾌한 것이 된다는 점에서(he xrēsimos ē hēdys a16) y에게 선의를 갖는다. 따라서 유익/쾌락 필리아에서 x와 y는 단지 우연적으로 친구인 반면 품성 필리아에서 x와 y는 그런 우연적 요소에 기초하지 않기 때문에 절대적 친구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유쾌한 또는 유익한 것으로서 존재하는 y에게 x가 선의를 갖는 될 때 어떻게 이 선의를 갖는 x가 y에게 단지 우연적으로 친구가 되는 것일까?
쾌락/유익 필리아에서 x가 y에게 유익한 것 또는 유쾌한 것이 되는가 그렇지 못한가는 x의 우연적 특성에 속한다. 다시 말하면 x의 유익/유쾌함은 x가 소유하고 있는 어떤 속성들 또는 능력들이 어느 시점에 y를 규정하고 있는 욕구나 필요에 아주 우연적으로 대응할 때 발생하는 순수하게 외적이며 우연적인 사실에 기인하고 있다. 따라서 x가 y를 유쾌한 것 또는 유익한 것으로서 바라본 결과에 의해 발생하는 필리아는 우연적인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품성 필리아에서 x와 y는 서로에게 있어서 본질적인(kath’ hautous 1156a11, di’ hautous 1156b10, 1157b3) 또는 절대적인 (haplōs) 친구라고 주장한다. 그의 덕 윤리 이론에서 인간의 품성의 덕은 인간에게 본질적인 속성이다. 한 개인은 윤리적 탁월성으로 간주되는 품성의 속성들을 얼마만큼 완전하게 소유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인간의 본성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개인은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에 의해서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기 때문에, 개인은 인간됨 즉 윤리적 탁월성들을 보다 완벽하고 적합하게 소유하면 할수록 자신의 본질적인 본성을 보다 완전하게 자각하게 된다. 따라서 x는 y가 소유한 선한 도덕적 성질 때문에 y에게 선의를 품고 있다면, x는 y의 우연적 속성이 아닌 본성(인간됨)을 인식한다는 의미에서 절대적 친구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y는 우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x가 y를 인간으로서 바라보는 결과로서 얻게 되는 속성 즉 y와 친구가 되는 결과로 얻게 되는 속성은 x를 y와 우연적으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관련시킨다고 말해질 수 있다. 품성 필리아에서 x의 친구 y는 그가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 즉 인간이기 때문에 x가 y에게 선의를 갖게 된다. 그러나 쾌락/유익 필리아에서 x와 y는 서로가 본질적 존재라는 인식 속에서 서로에게 선의를 갖지는 않는다.
여기서 핵심은 품성 필리아에서 x가 y에게 선의를 갖게 만드는 것은 x가 갖는 y에 대한 이해, 즉 그가 인간이라는 이해이다. VIII 2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x와 y가 쾌락과 유익과 도덕적 탁월성 때문에 서로에게 선의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쾌락/유익 필리아에서도 x는 y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y에게 선의를 갖는다. 타인에게 선의를 갖는다는 기본 입장은 필리아의 세 가지 모든 형식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품성 필리아를 형성하는 선의와 쾌락/유익 필리아를 형성하는 선의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VIII 3-4에서처럼 오직 품성 필리아에서만 x와 y가 본질적으로 우연적인 조건 없이 존재하는 친구가 된다. 그 이유는 품성 필리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타인에 대한 선의가 그가 목적 지향적인 인간, 자아실현을 내재하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단지 그 하나만의 이유로 그에게 선이 이루어지도록 선의를 갖는다는 점이다. 인간 본질과 도덕적 품성의 탁월성을 연관시켜 생각해 본다면 품성 필리아의 선의가 쾌락/유익 필리아의 선의보다 얼마만큼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품성 필리아에서 x는 y의 행복을 y가 선한 사람이기 때문에 원한다. 품성의 선한 성질들은 한번 획득되면 영구적이다(1156b12). 왜냐하면 이런 속성들은 인간으로 y의 본질적인 본성에 속하기 때문이다. y의 본질적 본성은 한번 완전히 실현되면, y가 무엇인가의 영구적인 부분으로 남게 된다. 반면 쾌락과 유용성은 그것들이 개인의 우연적 속성들이기 때문에 변화하게 된다(1156a21-22, 1156b1). 따라서 품성 필리아가 쾌락/유익 필리아보다 훨씬 영원한 사랑이다. 물론 여기서 y의 선은 군자가 갖는 절대적 선이 아닌 앞에서 언급된 가장 인간적 선을 의미한다.
또한 쾌락/유익 필리아의 시간적 제약은 또 다른 제한을 함의한다. 친구 y에게 자신에게 되돌아올 유쾌/유익 때문에 선의를 갖게 될 때 x는 암암리에 자신의 선의에 한계를 설정하게 된다. y의 선에 관한 x의 관심은 y가 특수한 종류의 사람, 즉 유쾌하거나 유익한 사람으로 남아있는 동안에만 유지될 수 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필리아에서 x는 x 자신의 선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y의 이익을 위해서 y가 번영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x가 y와 교제하면서 얻었던 쾌락이나 유익을 더 이상 얻지 못한다면 x는 y가 번영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y가 유쾌하거나 유익하기 때문에, x가 y의 이익을 위해서 y에게 선의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x의 첫 번째 관심은 y의 유쾌함이나 유익함이란 속성의 보유사실이다. 따라서 y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y가 가지길 x가 원하는 어떤 선은 x가 자신의 친구로서 y에게 선의를 갖게 하는 특수한 속성의 보유와 양립해야만 한다.
x와 y가 친구라고 하는 관점에서(tautē hē philousin 1156a10), 즉 y가 x에게 유쾌한 사람 또는 유익한 사람(a16) 또는 선한 품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hēagathoi b8-9)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서 x는 y에게 선한 것이 일어나길 원한다. 그렇다면 y가 x의 쾌락/유익 친구가 될 수 있음을 규정하는 x가 생각하는 y에 관한 이해는 x가 y에 대해 갖는 선의에 제한을 가한다는 주장은 품성 필리아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비록 인간에게 있어 신이 되는 것이 가장 선한 일이지만, x가 y의 선을 기원할 때 y가 신이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이 되는 것은 인간됨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y는 인간 x의 친구가 되는 것이며 또한 x는 인간으로서 y의 번영을 원하고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쾌락/유익 필리아에서 x는 자기 친구로서 y에 관한 제한된 이해를 바탕으로 쾌락/유익이라는 특수 속성들의 존재와 지속이라는 조건 속에서 그것들의 소유자들로서 y의 번영을 원하게 되는 동일한 방식으로 품성 필리아에서도 x가 요구할 수 있을 정도로 y가 그 자신의 본질(인간됨)에 머물러 있는 범위 내에서 x가 바라는 y의 선은 인간적 선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제한된 방식으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나타난 세 종류의 필리아에서 x는 자신의 친구 y의 선을 y자체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원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필리아가 단지 순수하게 이기적인 목적에서 갖는 타인에 관한 관심이 아니라 이기적이며 동시에 이타적인 동기에서 타인에 관한 관심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사업가는 빈번한 이익관계를 통해서 품성 때문에 서로 사랑하게 되는 부부나 두 명의 가까운 친구처럼 고객과 친구가 된다. 사업가는 무엇보다도 이 필리아를 통해서 상호이득을 찾는다. 하지만 그는 고객에게 자신의 이익의 기준에 따라 봉사의 질을 계산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대체로 이익이 될 수 있는 관계를 지향하지만 고객을 단지 자신의 궁극적인 이득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고객에게 봉사한다. 이처럼 총체적 이익가능성의 일반적 상황이 진행되고 있다면 지금 당장 이윤이 발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업가는 고객에게 선의를 갖게 된다. 이윤 창출은 교우관계의 총체적 조직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사업가의 필리아에는 이기적 선의와 선행과 이타적 선의와 선생의 복합체로 구성된다. 쾌락/유익 필리아에서 x의 최우선적 관심은 그 자신의 이익이다. 그러나 x의 모든 행위와 모든 욕망이 궁극적으로 그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어떤 것의 실현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쾌락/유익 필리아에서도 총체적 쾌락/유익 창출 가능성만 존재한다면 x는 순수하게 자신의 친구 y를 사랑하고 y의 선에 관한 이타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x는 적어도 전적으로 사리사욕에 근거하지 않는 선의와 선행을 y에게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물론 x는 몇몇 선행을 베푸는 것은 거절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선행들을 베푸는 일에 너무 많은 비용이 들고 그 교제를 통해 x에게 돌아올 일반적 수익성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쾌락/유익 필리아에서는 이타적 선의와 이기적 선의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품성 필리아에서 이기적 선의의 침투는 쾌락/유익 필리아에서 발생하는 것보다 훨씬 적다. 왜냐하면 품성 필리아에서 x는 y를 y에게 우연적으로 속한 것이 아닌 본성적으로 속한 속성(인간됨)들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이다. x는 y를 y자신의 본질(인간성)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지 y의 외적 속성 또는 y가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쾌락/유익 필리아에서 x는 y에 대해서 이타적 선의를 통해서 이기적인 쾌락과 유익을 기대하고 있는 반면 품성 필리아에서 x는 y에 대해서 그가 인간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를 사랑하고 그가 더 선한 인간됨을 바라는 선의를 갖는다. 따라서 x는 y가 선한 인간이라는 점에 일치된 방식으로 y에게 선의를 품게 된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x는 y와의 교제로부터 쾌락과 유익을 얻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부산물들을 지향하는 것은 필리아 그 자체의 본질적 측면은 아니다. x는 y가 사람이라는 사실 때문에 또한 y의 품성의 탁월함 때문에 y와 교제한다. 그 과정에서 쾌락과 유익은 적당한 시점에 부수적으로 생겨나는 부산물이다. 따라서 품성 필리아를 유지하는 x의 선의는 y의 품성의 탁월함에 고정되어 있다. 물론 이 탁월함은 완전한 탁월함이 아닌 완전을 지향하는 부분적인 탁월함이다. 따라서 비록 필리아의 세 가지 모든 형식에 이타적 선의가 존재한다할지라도 품성 필리아의 선의가 다른 필리아의 선의보다 더 완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결론: 왜 아직도 아리스토텔레스인가?

연구자는 지금까지 사르트르의 “대타 존재” 개념을 통해서 신자유주의적 경쟁 개념의 근원을 살펴보았으며 그 극복 가능한 대안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필리아 개념을 음미해보았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 사이에서 인간이 어떻게 특별한 존재인가를 다룸으로써 자신을 초월해 가는 자유로운 주체로서 자유로운 선택과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자신의 행동으로 자기 스스로를 창조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임을 드러냈다. 그러나 바로 이 자유의 실현이 무한 경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씨앗이 되었다. 따라서 이제는 구체적 인간관계(대타적 삶) 속에서 어떻게 인간 모두가 함께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이 있는가 그 가능성을 제시해야만 했다. 연구자는 이 가능성을 아리스토텔레스의 필리아로 제시하고 그 핵심 개념을 ?니코마코스 윤리학? VIII 2와 ?수사학? II 4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연구자가 고찰한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거의 모든 인간들이 단지 이기적인 동기들만을 가지고 서로 사랑한다는 주장에 반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이 상대방에 관한 상호인식을 통해서 그 교제로부터 단지 쾌락이나 유익을 얻게 되는 관계를 진정한 필리아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는 일반적 우정이라고 인식되는 쾌락/유익 필리아 자체도 이미 타인의 선에 대한 이타적 관심을 어느 정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필리아는 근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존경으로부터 최소한 타인의 선(유익과 쾌락을 포함해서)에 관한 실질적인 관심을 표명하도록 요구한다. 타인 자신의 이익을 위한 타인의 선에 대한 관심의 기대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필리아 개념의 본질이다. 전적으로 이기적인 관계를 필리아로 간주하지 않는 이유는 그런 관계들은 영원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영원한 필리아는 타인에 관한 그리고 그의 성품에 관한 지식과 관심에 기반하고 있다. 또한 이 이기적 사귐은 타인과 더불어 자신의 관심들을 병합시키고 그와 자신의 삶을 공유하지 않는다. 타인에 대한 관심 그리고 그가 인간이기 때문에 표명하는 관심이 필리아 개념에 담긴 이념이고 규범이다. 또한 이 필리아는 도덕군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품성의 선을 한 가지라도 이해할 수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그런 필리아이다.
그러나 왜 우리는 지금 신자유주의 시대에 타인에 관한 이런 당연한 개념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가? 우리에게 친숙하다고 생각하였던 필리아는 이제 결코 친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것이 더 이상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할 수 없다는 강한 의혹을 가지고 살고 있다. 타인이 사람 또는 다른 자아(alter ego)라는 이해는 역사적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필리아란 보편적 이념으로 남아 있지만 그것은 신자유주의 전통에서 우리에게 너무나 낯설게 느껴진다. 우리는 필리아(우정)이라는 낱말을 그렇게 많이 사용하면서도 그 낱말의 진정한 의미는 어쩌면 알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 ‘의리’, ‘덕’, ‘인간됨’과 같은 낱말에 의미를 부여하였던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맥락이 이미 사려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매킨타이어는 우리가 현재 서있는 시간과 장소를 하나의 위기로 진단한다. 이러한 위기는 자기 자신과 타인, 삶과 사회를 도덕적으로 평가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도덕적 어휘들이 아무런 공통분모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도덕적 어휘들은 궁극적으로 개인들의 주관적 의지와 기호로 환원된다. 모든 개인은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추구하며, 이 가치에 따라 다른 사람을 평가한다. 이와는 반대로 사회는 주어진 목표를 효율적으로, 성공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관료적 합리성을 추구한다. 이와 같은 관료적 합리성은 근본적으로 가치 문제에 관해서는 침묵하기 때문에 우리가 공동으로 추구할 수 있는 공동선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이처럼 개인의 차원에서는 ‘나에게 좋은 것은 좋은 것이다’라는 심미적 주관주의로 그리로 사회적 차원에서는 ‘성공적인 것이 좋은 것이다’라는 관료적 합리주의로 양극화된 현대 서양 사회는 일종의 “유령적 자아”를 산출한다고 매킨타이어는 비판한다. 그 유령적 자아는 자신이 처해 있는 구체적 시간과 장소로부터 벗어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본질적으로 시간과 공간에 묶여 있는 유한한 인간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자신의 역사적 맥락을 부정하는 자아는 유령적일 수밖에 없다고 매킨타이어는 단언한다.
오늘날 우리는 서양의 신자유주의의 태반(胎盤)인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함몰되어 있다. 그래서 개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필리아를 찾아야 한다. 연구자는 우리의 정체성을 이해 가능하게 만들며 가치 판단을 수행하는 역사적 맥락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윤리를 가지고 있을 때 현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의 절대화로 말미암아 생겨난 사고/가치 다원주의를 그 자체로 자유와 권리로 착각하는 것이 현대 신자유주의의 병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추구할 수 있는 공동선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신자유주의의 다원주의는 가치와 목적의 문제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자유의 토대를 침식시킬지도 모른다. 칸트가 “우리는 어떤 규칙을 따라야 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는 어떤 인간이기를 원하는가?”라고 묻는다. 매킨타이어는 바람직한 인간에 관한 해석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와 같은 역사와 전통 속에 퇴적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역사와 전통은 미래의 인간을 키울 수 있는 비옥한 땅이라고 단언한다.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를 돌아보는 것은 미래의 꿈과 희망을 키울 수 있는 땅을 일구기 위해서이다.

si quis vult primus esse
erit omnium novissimus et omnium minister



참고 문헌

1. 원전 및 번역, 주석서

Aristotelis Ethica Nicomachea, rec. Bywater, I., Oxford: Clarendon, 1894.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최명관 옮김, 서광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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