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아리스토텔레스 인식론

나뭇잎숨결 2022. 2. 12. 10:29
아리스토텔레스 인식론

장영란(이대 강사)


인간은 다른 사람이나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과 세계에 대해 철학적 반성을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도 사랑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칫하면 피상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 관계를 심층적으로 다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변화의 정의와 가능태 개념]

- 모든 것은 변화한다?-

인간은 이 세계를 바라보면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몇 가지 아주 일반적 개념들을 발견해 냈다. 가령 우리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 비슷한 것과 비슷하지 않은 것 등을 구별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들 가운데 가장 일차적인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 혹은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일 것이다. 즉 인간이 가장 먼저 지각하는 것은 어떤 것은 움직이고 다른 것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존재와 무, 또는 동일성과 차이성 등과 같은 개념들도 여러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지만 형이상학적으로 상당히 발전된 내용 체계를 포함하고 있다. 가령 존재와 무의 경우에 우리는 가장 먼저 어떤 것이 존재하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통해 그것들을 지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러한 현상을 변화의 개념하에서 파악했다.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존재한다’와 상대적인 의미에서 파악되었을 뿐이며, 절대적인 의미에서 파악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의식의 발전이 필요했다. 또한 동일성과 차이성의 경우에도 수많은 대상들이 가진 특성들 간의 유사한 점들과 유사하지 않은 점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분류하고, 더 나아가 유 개념과 종 개념 및 종차(種差)를 파악해야 유사한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의 기준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역시 상당히 체계적인 사고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사유의 발전 과정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관심의 변천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초기 자연철학자들은 대부분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의 다양한 변화 및 운동에 주목하면서 변화하는 것들 가운데 변화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자 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변화한다. 물론 모든 변화하는 것은 변화하는 측면과 변화하지 않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변화하는 대상의 최소한 어떤 부분은 변하지 않아야만, 즉 연속성을 가져야만 그것이 ‘어떤 것’에서 ‘다른 것’으로 변화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변화하는 대상의 모든 부분들이 변화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변화한다’고 말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생성과 소멸만을 끊임없이 반복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단지 수많은 다른 것들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가령 어제 뜰에 피어 있던 장미는 하룻밤 사이에 ‘다른’ 장미라고 불러야 할 것이며, 나아가 어제 내가 살았던 이 세계는 하룻밤 사이에 다른 세계라 불러야 하며, 물론 나 자신도 ‘다른’ 나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또한 이 세계는 매순간 수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져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어제 내(1)가 살았던 세계와 오늘 내(2)가 살았던 세계가 유사한 세계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전혀 다른 세계들이 될 것이다. 사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이러한 방식으로 이 세계의 생성과 소멸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복잡한 개념적 장치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근본적으로 모든 변화는 변화하는 측면과 변화하지 않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우선 자연학의 개념 체계로 설명하자면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는 변화하는 측면은 한 대상을 이루고 있는 뜨거움과 차가움 같은 한 쌍의 대립물들 간에 일어나는 것이며, 변화하지 않는 측면은 물과 같은 ‘기체(hypokei-menon)’이다. 가령 뜨거운 물이 차가운 물로 변화했다고 하자. 여기서 물 자체는 변하는 것이 아니고 물이 처음에 가지고 있던 뜨거움이라는 성질을 잃게 되어 차가움이라는 성질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엄밀히 이것은 뜨거움과 차가움을 각기 따로 획득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뜨거움이라는 성질―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로는 ‘형상’을 말한다―을 잃게 되면 자연히 차가움이라는 성질로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변화의 기본 요소들을 설명하는 것으로 변화의 주체와 변화되기 이전 상태 및 변화된 후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형이상학의 개념 체계로 설명하자면 한 대상에서 변화하지 않는 것은 ‘본질’이며, 변화하는 것은 ‘우연적 성질’이다. 말 그대로 그리스어로 본질은 한편으로 논리적인 차원에서 시공간에 관계 없이 항상 ‘있는 것(to ti einai)’을 의미하며, 다른 편으로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처음부터 있었고 있으며 있을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대상이 변화하는 가운데서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지금도 계속하여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한다. 가령 소크라테스가 프로타고라스나 고르기아스가 아닌 소크라테스인 것은 소크라테스의 본질 때문이며, 또한 어린 소크라테스가 성인 소크라테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변화를 통해 얼굴이나 체격 등 여러 가지 신체적 특징들이 변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소크라테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수많은 변화를 겪으면서도 변하지 않는 측면인 소크라테스라는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연적 성질은 한 대상에 우연히 혹은 부수적으로 따라다니는 성질을 말한다. 그래서 그것은 때로는 있을 수 있으나 때로는 없을 수 있는 성질을 말한다. 가령 어떤 사람이 겨울에 ‘흰’ 피부를 가지고 있다가 여름에 ‘갈색’ 피부를 가지는 경우에 ‘흰색’과 ‘갈색’은 우연적으로 혹은 부수적으로 가지게 되는 성질이다. 따라서 한 대상에서 본질은 변화하지 않는 측면이라고 한다면 우연적 성질들은 변화하는 측면이라 할 것이다.


-변화의 다양한 의미와 정의-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 혹은 운동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선 한 대상의 변화에 적용되는 범주와 관련하여, 한편으로 양의 관점에서는 증가와 감소로, 질의 관점에서는 질적 변화로, 장소의 관점에서는 장소 이동으로 설명하고, 다른 편으로 실체의 관점에서는 생성과 소멸로 설명한다. 다음으로 한 대상이 변화하는 원인과 관련하여, 먼저 한 대상을 구성하는 ‘형상인’과 ‘질료인’이 일차적으로 있어야 하고, 그 대상을 변화하도록 만드는 ‘작용인’이 있어야 하며, 그 대상을 변화시켜 도달하려는 ‘목적인’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를 정의할 경우에는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한다. 한편으로 변화는 변화가 일어나는 사물과 떨어져서는 성립할 수 없는 사물의 변화이다.1) 그래서 그는 변화의 주체와 변화의 대상을 설명한다. 다른 한편으로 사물의 변화는 어떤 상태로부터 어떤 상태에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변화는 항상 어떤 것으로부터 어떤 것으로의 변화이다. 이러한 설명은 이러한 가능태와 현실태의 개념을 통해 보다 명료해진다. 변화란 “그러한 것으로서 가능적인 것의 현실화” 혹은 “가능한 것으로서 가능한 것의 현실화”로 정의된다.2) 여기서 ‘그러한 것’이나 ‘가능한 것’이라는 단서는 '변화'와 현실태(energeia)의 차이를 드러내 준다. 이것은 ‘불완전한’ 가능태를 가리킨다. 즉 그것은 일정한 시간이 경과하더라도 완전히 현실화되지 않는 부분이 남아 있는 가능태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그리하여 변화는 ‘불완전한’ 가능태의 현실화라 할 수 있다.3)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운동이나 변화, 또는 인간과 그 외 다른 동물의 감각­지각이나 사유과정 등과 관련된 모든 변화를 설명할 때 넓은 의미의 가능태와 현실태의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가능태의 정의와 종류]

-가능태의 필요성-

이 세계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기본적인 전제는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있는 것은 있는 것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파르메니데스에 의해 더욱 엄격하게 정의된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이것은 절대적인 의미의 ‘있는 것’과 절대적인 의미의 ‘없는 것’만을 말하며, 근본적으로 생성이나 변화 및 운동에 대한 설명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해결책을 제시한다. 우선 어떤 것은 있는 것으로부터 생겨나든지 또는 있지 않는 것으로부터 생겨나야 한다. 그러나 어느 쪽도 불가능하다. 사실 있는 것은 생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없는 것도 생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최소한 기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4)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있는 것과 있지 않는 것 사이에는 생성이 있으며, 생성하고 있는 것이 있다고 한다.5) 파르메니데스의 ‘있는 것’ 또는 존재의 개념은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있다. 그는 절대적으로 있는 것과 절대적으로 없는 것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있는 것’을 이중적인 의미로, 즉 가능태와 현실태로 파악했다. 그리하여 모든 변화하는 것은 가능태로 있는 것으로부터 현실태로 있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가능태의 정의-

가능태(dynamis)는 운동 또는 변화의 원천이다. 변화는 변화하는 것과 변화되는 것을 포함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태를 다른 것 속에 있는 변화의 원천으로서, 또는 다른 것으로서 자신 속에 가지고 있는 변화의 원천으로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6) 즉 가능태는 통상적으로 변화되는 대상과는 다른 것에 속하지만, 때로 스스로 변화하는 경우에는 그 자신 속에 있기도 하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자의 경우로서 집을 짓는 것을 예로 든다. 집이 존재하게 된 변화의 원천은 집짓는 기술이다. 이 기술은 집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건축가 속에 있다. 후자의 경우로 의사가 자기 자신을 치료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의사는 일반적으로 자신과 다른 환자들을 치료하지만, 때로는 자기 자신을 치료할 수도 있다. 의사가 자기 자신을 치료한 경우는 ‘다른 것으로서 자신 속에 변화의 원천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가능태의 두 가지 측면-

가능태는 항상 현실태를 향한다. 가능태가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변화의 측면들과 관련하여 능동적 가능태와 수동적 가능태를 구별할 수 있다.7) 능동적 가능태는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며, 수동적 가능태는 변화를 겪는 것이다. 수동적 가능태는 현실화되기 위해 그 대상의 외부에 있는 원천에 의존한다. 다시 집짓기를 예로 들면 집은 집짓는 기술에 의해 완성된다. 집짓는 기술은 집 자체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집을 짓는 사람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능동적 가능태는 현실화되기 위해 자기 내부에 있는 원천에 의존한다. 그것은 운동과 정지의 원천이다. 그러나 능동적 가능태와 수동적 가능태는 목적에 관해서는 일치한다. 가령 의사는 치료술이라는 능동적 가능태에 의해 적절한 환자를 치유할 수 있으며, 또한 환자는 의사의 치료에 의해 완치될 수 있는 수동적 가능태로 인해 치유될 수 있다. 또는 선생은 가르칠 수 있는 능동적 가능태에 의해 적절한 학생에게 지식을 전달할 수 있으며, 학생은 배울 수 있는 수동적 가능태에 의해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 이러한 능동적 가능태와 수동적 가능태는 완치 또는 배움이라는 목표에 있어서는 일치할 것이다.


-가능태의 이중적 의미와 구조-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와 현실태는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즉 그것은 한편으로 ‘능력’과 ‘활용’으로 사용되며, 다른 한편으로 ‘과정’과 ‘목적’으로 사용된다.8) 전자의 경우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감각 능력들과 사유 능력들이 가능태들로 표현되고 이러한 능력들을 활용하고 있는 상태들은 현실태들로 표현된다. 후자의 경우는 가능태로서의 도토리가 현실태로서의 참나무라는 목적으로 향해 변화해 나가는 과정이라 말할 수 있다. 가능태와 현실태는 연속적인 변화의 과정에서 중층적인 구조를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경우를 세분화하여 설명할 수 있다. 영혼은 한편으로 지식과 같이 어떤 능력을 ‘소유’한 상태로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관조처럼 지식을 ‘활용’하는 상태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영혼을 제1현실태로 보는 것은 영혼이 바로 어떤 능력을 소유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아직 그리스어를 배우지 않은 사람을 가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최소한 인간으로서 이성적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어를 배울 수는 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어를 아직 배우지 않은 상태(1)이지만 그리스어를 배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그리스어를 배웠다(2)고 할 때, 전자는 후자에 대해 ‘가능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아가 그가 그리스어를 과거에 배운 상태(2)이지만 현재 사용하지 않은 상태(3)라고 할 때 전자는 후자에 대해 ‘가능태’로 존재한다. 우선 (1)과 (2)의 관계에서 (1)은 가능태라 할 수 있으며 (2)는 현실태라 할 수 있고, 다음으로 (2)와 (3)의 관계에서 (2)는 가능태라 할 수 있으며, (3)은 현실태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연속적인 과정으로 설명해 보자면, (1)은 제1가능태이며, (2)는 제1현실태이자 제2가능태이고, (3)은 제2현실태라고 할 수 있다.


-가능태에 대한 반론-

그런데 우리는 가능태와 현실태 개념을 아주 제한된 의미로 또는 부정하는 방식으로 반론을 제기하는 시도를 검토할 수 있다. 메가라 학파는 어떤 것은 단지 현실태로 있을 때에만 가능태로 있을 수 있고, 현실태로 있지 않을 때에는 가능태로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9)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가령 집짓는 기술을 예로 들자면 어떤 사람이 집짓는 기술을 활용하고 있는 경우에만 가능태로 집짓는 기술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집을 짓고 있지 않다면 건축가가 아닐 것이다. 나아가 그가 집짓는 기술을 가지고 집을 짓고 있다가 잠시 쉬고 있는 때는 그 기술을 잃어버리는 것이 된다. 또한 그가 즉각 다시 집을 짓기 시작한다면 다시 그 기술을 회복한 것이 된다. 또 다른 경우로 감각 능력을 예로 들자면, 우리가 감각 능력을 활용하고 있는 경우에만 감각 능력을 가능태로 가진 것이 된다. 그래서 비록 우리가 감각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지금 우리가 감각­지각을 하지 않고 있다면 감각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이 된다. 만일 그렇다면 사람들은 하루에 여러 번 눈이 멀거나 귀가 먹는 일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라 이러한 능력을 단순히 소유한 상태를 가능태라 하고 활용하고 있는 상태를 현실태라 한다면 이러한 문제를 손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주장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다음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10) 즉 가능태가 단지 현실태로 있는 것에만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변화도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일어나고 있지 않는 것은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있을 것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변화는 없다. 그래서 서 있는 것은 항상 서 있을 것이요, 앉아 있는 것은 항상 앉아 있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주장은 운동과 생성을 부정한다.



[가능태의 적용과 검토]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 개념과 관련하여 우리는 몇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 중의 하나를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우리는 임신중절의 문제와 관련하여 가능적 혹은 잠재적 인간으로서의 태아에 대해 다뤄 볼 수 있을 것이다. 임신중절 반대론자들은 실천적 삼단 논법을 통해 반대 논증을 펼친다.

대전제:인간을 죽이는 것은 잘못이다.
소전제:태아는 인간이다.
결론:그러므로 태아를 죽이는 것은 잘못이다.

이 논증에 가장 중요한 논쟁거리는 소전제에 나오는 ‘태아가 과연 인간인가?’라는 것이다.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대전제에 나오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정의를 수용한다. 태아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생물학적 종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지만 흔히 인간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이성적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 물론 그 외 다른 능력들도 완전하게 발달된 상태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임신중절 찬성론자들은 태아가 완전한(?) 인간이 아니며 단순히 다른 미성숙한 혹은 미분화된 생물체와 같은 상태에 있으므로 임신중절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임신부는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서 신체의 자유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자신의 신체의 일부인 미분화된 부분을 마치 맹장이나 암세포처럼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태아는 우리의 신체의 일부, 즉 팔이나 다리 또는 맹장처럼 그 자체의 목적이 완수된 ‘완전태(entelecheia)’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잠재태 혹은 가능태로서의 인간이다. 인간으로 완성되기 위한 일정한 조건이 만족되고 방해 요소가 없다면 그것은 자연히 완전한 인간으로 성장할 것이다. 태아가 ‘잠재적’ 인간 혹은 ‘가능적’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태아가 성숙한 인간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태아는 성숙한 인간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가령 태아가 타자에 의해 임신중절이 될 수도 있고, 또 태어나자마자 병이 들어 죽을 수도 있고 또는 사고로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태아가 비록 가능적 인간이라고 해서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가능성’이라는 말로 다양한 범위의 의미를 가리킬 수 있다. 가령 정치가 민중이 유력한 대통령 후보라고 하자. 그러나 그는 대통령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경우에 가능적 혹은 잠재적 대통령으로서 민중은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대통령이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잠재적 대통령으로서 민중은 내적 필연성에 의해 혹은 본질적으로 현실적 대통령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태아가 가능적 혹은 잠재적 인간이라고 할 때 태아는 특별한 방해 요소만 없다면 내적 필연성에 의해 인간이 된다. 즉 가능적 인간이라 해서 그것이 자라나서 인간이 되지 않고 소나 돼지 혹은 개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인간의 유전자를 받은 잠재적 인간으로서 태아가 반드시 현실적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은 유전공학이 발달해서 수정란에 유전자 조작을 하면 반인반수의 존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아리스토텔레스가 단서를 달고 있는 것처럼 현실적 인간으로 될 수 있는 과정을 방해하는 요소일 수 있다. 따라서 그 수정란이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이제 그것은 오히려 잠재적 반인반수로서 존재하며 현실적 반인반수가 될 것이다. 오늘날 인간은 게놈 프로젝트의 완성으로 수정란을 조작하여 인간의 유전적인 질병을 제거하고 부모가 원하는 성격과 재능을 가진 맞춤 아이가 태어나도록 할 수 있다. 더욱이 이러한 인간을 개량하는 일련의 작업이 거듭된다면 우리와는 다른 새로운 인류가 탄생할 수도 있다. 이 새로운 종은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다른 명칭으로 불릴 수 있다.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이 새로운 인류의 가능태는 과거의 자연적 유전자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유전자를 가진 존재일 것이다.



[인간의 가능태와 목적]

-인간이란 어떠한 존재인가-

가장 일반적으로 인간은 영혼과 신체로 이루어진 존재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영혼과 신체란 무엇인가? 그리스어로 영혼과 신체는 단순히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용어들은 아니다. 신체를 가리키는 소마(soma)는 인간뿐만 아니라 그 외의 동물들과 식물들을 비롯한 돌, 나무 등의 모든 물체들에 사용된다. 영혼을 가리키는 프시케(psyche)도 역시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영혼의 개념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추상적인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니라 아주 단순한 경험적 관찰로부터 발전된 개념이다.

인간이 감각기관을 가지고 가장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움직일 수 있으나 다른 것들은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왜 어떤 것들은 움직일 수 있고 다른 것들은 움직일 수 없는가? 고대인들은 바로 이러한 문제 의식으로부터 영혼의 개념을 발견해 냈다. 영혼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단지 장소나 공간 속에 이동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영양 공급을 할 수 있으며 성장하고 쇠퇴하며 감각­지각과 사유를 할 수 있는 것도 포함한다. 따라서 어떤 것이 이러한 기능 가운데 하나라도 가지고 있으면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뿐만 아니라 그 외의 동물들은 물론이고 식물들까지도 영혼을 가진 것으로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식물은 영양 공급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동물은 장소 이동 능력과 감각­지각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은 지성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물론 이러한 각 존재들은 이러한 영혼의 능력들을 각기 따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식물로부터 동물을 거쳐 인간에 이르기까지 점차 부가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구성하는 영혼과 신체의 관계를 설명하면서도 가능태와 현실태의 개념을 도입한다. 가령 그는 이러한 개념들을 통해 영혼이 “가능태로 살아 있는 자연적 신체의 제1현실태”11)이며, 또 “기관들을 가진 자연적 신체의 제1현실태”12)라고 정의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과 신체에 대한 정의는 영혼과 신체 각각에 대한 독립적인 정의를 해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영혼과 신체가 존재론적으로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분리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다. 왜냐하면 소위 영혼의 정의에는 이미 반복적으로 “살아 있는 자연적 신체”라는 방식으로 영혼과 유사한 개념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가능적’이라는 제한 사항만을 가질 뿐이다. ‘살아 있는’과 ‘자연적’은 영혼의 기능들과 기본적으로 중첩되는 기능들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영혼과 신체를 구별해 줄 수 있는 차이점은 바로 영혼이 그것의 ‘현실태’로 있다는 것뿐이다. 가능태로 살아 있다는 것은 영혼을 배제하거나 혹은 잃은 것이 아니라 영혼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13) 즉 인간의 신체는 이미 영혼의 기능을 갖추고 있지만 아직 현실태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의 정의는 사실상 영혼과 신체의 관계를 단순히 상호 규정하는 특징만을 보인다. 왜냐하면 영혼은 실제적으로 신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개념적으로도 신체와 독립적으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이 죽으면 영혼은 신체와 분리된다거나 혹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으며, 또는 영혼이 신체와 함께―신체가 영혼보다 좀더 늦게―소멸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 죽음 후의 신체는 인간의 신체가 아니다. 그것은 이름만 인간의 ‘신체’와 동일할 뿐이지, 실제로는 인간의 신체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음이의어 원리를 통해 마치 도끼가 도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형태가 비슷하다면 진짜 도끼와 이름만 동일할 뿐이지 전혀 도끼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14)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간의 신체가 신체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형태만 비슷하다면 진짜 신체와 이름만 동일할 뿐이지 전혀 신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인간은 어떠한 가능태들을 가지고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다양한 가능태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간의 변화 혹은 운동의 원천으로서 영혼의 능력을 ‘가능태’라고 자주 표현하고 있다.15) 영혼의 능력들로는 감각, 판타시아, 지성, 욕구 등이 있다. 감각 능력은 우리가 이 세계를 인식하는 출발점이다.16) 우리는 감각 능력을 통해 인식의 기초 자료들을 획득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단 감각의 종류를 크게 ‘자체적 감각’과 ‘부수적 감각’으로 구별한 다음에, 자체적 감각을 다섯 가지 고유 감각과 공통 감각으로 구별하고 부수적 감각을 추가하여 세 가지 종류의 감각으로 세분했다. 그는 이러한 구별을 통해 감각­지각이 초래할 수 있는 오류의 범위와 원인을 규명할 수 있게 해준다. 가령 우선 고유 감각은 거의 오류 불가능하며, 다음으로 부수적 감각이 오류 가능성이 높으며, 마지막으로 공통 감각이 오류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와 같이 감각의 종류를 분류하여 감각의 오류 가능성을 진단함으로써, 감각­지각 전체에 대한 원천적인 불신을 제거하고 최소한 인식의 단초로서 감각­지각의 확실성을 확보하는 데 있다.

또한 판타시아(phantasia)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판타시아를 감각이나 지성과 같이 독립적인 영역을 가진 능력과는 달리 그 자체로 존재하는 능력으로 보지 않지만, 판타시아와 다른 능력들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지적하면서 그것의 독자적인 기능을 해명하고 있다. 판타시아는 단순히 거짓된 이미지, 즉 환상이나 공상만으로 이해되지 않으며, 인식론에서 다양한 긍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판타시아는 감각­지각을 통해 수용된 감각 대상의 형상들을 통해 감각­자료들을 형성하고, 이와 함께 과거에 경험했던 기억 내용들과 결합 또는 보완하여 전체적인 인상을 구축하는 역할을 한다.17) 그것은 감각­자료들을 체계적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개념으로 규정짓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어떤 것으로 볼 수 있도록 하나의 종류로 느슨하게 묶어 하나의 그림과 같은 판타스마(phantasma)를 형성한다. 판타스마는 감각­자료들이 가진 결속력으로 인해 일정한 지속성을 가지며,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감각과 지성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상호 작용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판타스마는 우리들 각자가 가진 생리적 구조에 따라 지속력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인식 주체의 능력과 기능에 따른 인식 내용의 수용과 보존 상태에 의해 오류 가능성의 정도가 현격하게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판타스마는 한편으로는 지식의 주요 원천이 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꿈이나 환상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성의 두 가지 측면을 구별하였는데, 우리는 이것을 수동 지성과 능동 지성 또는 가능적 지성과 현실적 지성이라 부를 수 있다. 전자는 가능태로 있으며 모든 것으로 되는 것이며, 후자는 현실태로 있으며 모든 것을 만드는 것이다. 수동 지성은 마치 백지와 같이 사유 대상들을 수용하며 다양한 결합과 추론 과정을 통해 지식의 기본적 형태를 만들 수 있다. 능동 지성은 마치 빛과 같이 그 자체로 직접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성의 작용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능동 지성과 수동 지성이 상호 독립적인 기능이나 역할을 한다고 보기 어렵다. 근본적으로 능동 지성은 수동 지성이 작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종의 원리 혹은 원인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으며, 수동 지성은 다양한 사유 작용들을 수용하여 연합 및 결합을 통해 다양한 사유­자료들을 형성하는 것으로 일종의 질료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지성은 우리가 태어날 때 생성하지만 소멸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즉 모든 인간은 죽지만 불멸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지성이다.


-인간은 어떠한 가능태로서 존재하는가-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18) 그것은 인간의 고유한 기능 혹은 능력을 잘 발휘하며 사는 것이다. 인간은 다양한 기능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을 그 외 다른 모든 동물들로부터 구별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성 혹은 지성이다. 그렇다면 인간으로 인간답게 사는 것, 혹은 인간으로서 잘 산다는 것은 이성적 능력을 잘 발휘하고 산다는 것이다.

영혼의 모든 기능들 가운데 이성 이외의 다른 능력들은 모든 동식물들에 공통된 능력이며, 이성만이 인간에게 고유한 능력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이성을 가졌기 때문에 동물과 똑같이 감각­지각을 하더라도 다른 차원의 감정을 가진다. 가령 동물도 기쁨과 슬픔을 느낄 수 있으나 인간과는 다르다. 인간은 단지 물리적 자극에 의해서만 신체적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며, 정신적 작용에 의해 지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더욱이 인간은 자신의 실존적 상황에 대해 절망과 고독을 느끼며, 타인의 실존적 상황에 대해서도 분노와 동정 및 연민을 느낀다. 인간은 이성을 가졌기 때문에 동물과 다른 차원의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복잡한 사유 체계를 통해 다양한 방식의 행동을 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이성적 능력을 잘 발휘하고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합리적이고 냉철한 것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수학적 계산을 잘하고 공부를 잘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이성이 작용하는 범위는 매우 넓다. 그것은 단지 그 자체만 아니라 다른 능력들인 감각과 판타시아 및 욕구 능력 등과 상호 작용하여 우리의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이성을 잘 발휘하고 사는 것은 이성 자체의 기능뿐만 아니라 이성이 상호 작용하는 감정과 욕구 및 행동 등을 올바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말한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실현해야 할 가능태는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궁극적으로 행복을 추구한다고 한다.19) 즉 인간의 최고의 목적은 행복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즐겁고 기쁘면 행복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이란 아주 엄밀한 용어이다. 그는 우리가 삶 전체를 알지 못하면 행복한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를 확실하게 판단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가 아직 삶을 다 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제까지 살아온 과거와 현재의 상황을 미루어 보아 아마도 미래에도 행복할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복잡한 양상을 지닌다. 따라서 행복의 조건도 복잡한 양상을 나타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해지기 위한 현실적인 요건들을 고려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좋은 외모와 높은 신분, 그리고 재물도 필요하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죽은 이후의 평판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다.20)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제반 조건들을 갖출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이라고 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행복은 인간으로 가장 인간답게 사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인간의 최고의 탁월성을 드러내는 영혼의 활동이라고 한다.21) 인간은 세 가지 유형의 탁월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신체의 탁월성과 성격의 탁월성, 그리고 지성의 탁월성이다. 신체의 탁월성은 어느 정도는 인간의 행복에 본질적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지나치게 못생겼거나 병약하다면 행복을 감소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격의 탁월성과 지성의 탁월성은 인간의 이성적인 삶 속에 포함된다. 성격의 탁월성은 영혼의 비이성적인 부분의 탁월성이기는 하지만 이성에 귀를 기울인다. 그것은 훈련 혹은 습관에 의해 획득할 수 있다. 성격의 탁월성은 중용에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의 탁월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지성의 탁월성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행복한 삶은 불변하는 진리를 성찰하는 관조적인 삶이라고 한다.22)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적인 삶이 신의 삶과 가장 비슷하며 신은 최고로 행복한 존재라고 한다. 그는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것들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주목해서는 안된다고 한다.23) 최소한 우리가 불멸하는 존재로서 행동할 수 있고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최고의 것에 따라서 살려고 노력할 수 있는 한 말이다.


-인간은 어떻게 가능태를 실현할 수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행복한 삶은 불변하는 진리를 성찰하는 관조적인 삶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수평적인 차원에서 행복이라는 목적과 관련하여 논의된 것이고, 수직적인 차원에서 행복이라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과 관련하여 논의해야 할 것이다. 즉 우리는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과 과정들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성적 능력을 올바로 발전시킬 수 있는가? 이러한 인간의 고유한 기능인 이성을 올바로 잘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이다”24)라고 말한다. 그것은 결국 인간이 사회 혹은 국가(politeia) 속에서 자신의 기능을 탁월하게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는 완전한 공동체이며 다른 모든 형태의 공동체의 목표가 된다고 한다.25) 심지어 손가락이 손에서 잘라져 나가면 더 이상 손가락이 아니듯이, 인간은 국가를 떠나서는 더 이상 인간이라 말할 수 없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국가는 일반적으로 국가라고 표방하는 모든 국가 공동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즉 그는 그것을 완전한 공동체에 대해서만 사용하고 있다. 그는 국가체제를 세 가지 기본적인 형태인 군주제·귀족제·금권제와, 세 가지 타락된 형태인 참주제·과두제·민주제로 구별한 후에, 최선의 정체는 군주제이고 최악의 정체는 참주제라고 한다.26)

모든 타락한 국가 체제들에는 정의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 공동체는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보다 나은 삶 혹은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문제삼는다. 국가 공동체의 각 계층들은 법이나 권력에 의해 지배되는 것은 아니고 상호간의 우정 혹은 사랑(philia)에 의해 결속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공동체에 우정이 있다고 한다. 즉 우정은 하나의 사회적 관계로서 어떠한 공동체이든지 인간 관계가 형성된 곳에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공동체에 정의만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우정 혹은 사랑에 관심을 주목했다. 근본적으로 국가는 국민에게 정의로운 정치를 펼쳐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가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해야 한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또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듯이, 또는 형제가 서로 사랑하듯이, 국가도 국민을 사랑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든 공동체에서 사랑을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이익이나 공동체의 이익을 구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이나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과 세계에 대해 철학적 반성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랑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칫하면 피상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 관계를 심층적으로 다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고유한 기능을 탁월하게 발휘할 수 있다. 즉 우리는 다양한 인간 관계에서 파생되는 여러 문제들을 서로 비교하고 평가할 뿐만 아니라 추론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차원에서 논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데 사랑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우리는 사랑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훌륭한’ 삶을 살아가는 데 사랑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의 삶에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와 우리를 삶의 한가운데로 이끌어 내고 가장 높은 지혜로 향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인간이 가진 모든 기능을 가장 완벽하게 발휘할 수 있으며, 인간으로 가장 행복한 삶을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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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hysica, 200b32.
2. Physica, 201a10, 201b5.
3. Ackrill, J. L., “Aristotle's distinction between energeia and kinesis”, from New Essays on Plato and
Aristotle, Routledge & Kegan Paul, 1965, p139.
4. Physica, 191a27∼31.
5. Metaphysica, 994a27∼28.
6. Metaphysica, 1046a10∼11.
7. cf. Metaphysica, 1046a19ff.
8. cf. Charlotte Witt, Substance and Essence in Aristotle, Cornell Univ. Press, 1989, pp.130∼136.
9. Metaphysica 1046b19ff.
10. Metaphysica 1047a10ff.
11. De Anima 412a27.
12. De Anima 412b5-6.
13. De Anima 412b25.
14. De Anima 412b11∼14.
15. cf. De Anima 413a26;414a31;415a25.
16. 장영란,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 서광사, 2000년, 359면 이하를 참조하시오.
17. cf. De Anima, 428a12-15.
18. 장영란, 〈아리스토텔레스의 완전한 우정〉, 《성과 사랑, 그리고 욕망에 관한 철학적 성찰》, 서광사, 1999년, 38∼40면을 참조하시오.
19. Ethica Nicomachea, 1095a.
20. cf. Ethica Nicomachea, 1195b, 1199a, 1100a..
21. Ethica Nicomachea, 1098a.
22. Ethica Nicomachea, 1178a.
23. Ethica Nicomachea, 1177b∼1178a.
24. Politica, 1253a2∼3.
25. Politica, 1252b28, b31.
26. Ethica Nicomachea, 1160a∼1160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