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적 이성 비판

나뭇잎숨결 2022. 2. 12. 10:27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적 이성 비판

 

양운덕(고대 교수)

 

근대성은 인간 해방을 바라는 모든 곳에서 온갖 장미빛 약속을 해 왔다. 한 예로 근대 건축을 대표하는 르 꼬르뷔지에는 근대인들에게 기계적 기능주의에 입각하여 완벽하게 이성적으로 설계된 근대 건축을 선물하였다. 그는 ‘살아가기 위한 기계’인 주택과 보다 복잡한 생활기계인 건물, 도시를 가장 쾌적한 환경으로 만들 수 있는 방식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이상적 도시로서 중심 업무지구, 녹지 공간, 상업지구, 생산지구 등으로 기능적으로 명확하게 구분되고 도심과 교외주거지, 오락, 생산지구 등을 소통시키는 교통체계에 따라 긴밀하게 연결된 이상적 공간을 마련한다. 그는 근대 건축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근대인의 삶을 이성적 공간에 배치하려고 했다. 물론 (우리가 지금도 가장 이상적인 도시계획으로 추구하고 있는) 이런 근대 건축은 그 단조로움과 획일성이 지닌 단점도 있지만 그 철저한 이성주의 때문에 아무도 살고 싶지 않은 ‘찬란한 도시’의 공간을 건설하는데 그쳤다.

 

이런 예에서 보듯이 과학, 기술, 이성의 발전에 의해 추진력을 얻은 근대성은 낙관론에 물든 일종의 문명 컴플렉스이다. 근대성은 개인을 해방시키고 전통적인 초월적 가치들을 세속화하고, 眞理, 도덕적 善, 美의 영역을 구별한다. 그런데 개인주의는 자율과 해방뿐만 아니라 원자화와 익명화를 낳았다. 세속화는 개인들을 종교적 독단으로부터 해방시키지만, 동시에 토대의 상실과 불안, 불확실성에 빠뜨린다. 합리화에 의해 가치들이 자유로운 진리 추구, 도덕적 자율성, 미적 고양으로 분화되면서 그것은 긍정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허무주의, 도덕적 퇴폐, 경박한 유미주의를 퍼뜨린다.

최근 근대 이성, 합리성에 대한 비판이 주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 이 논의를 단순하게 대비시킨다면, 이성의 해방적 능력을 신뢰하는 쪽과 이성을 억압과 지배의 수단으로 보는 쪽의 다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계몽적 이성을 검토하는 작업의 하나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논의를 살피고자 한다. 포스트 모던의 급진적 이성 비판을 선취하는 아도르노의 논의는 계몽의 전개가 인간의 자연지배와 인간지배로 귀결되는 점을 밝힌다.

이 글은 이성의 문제틀 자체를 문제삼는 이성비판이 마련해야 할 새로운 지반을 모색하는 시도의 첫 작업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이성에 대한 비판을 더 뛰어난 이성으로 고양시킬 것인지, 이성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것인지는 중요한 과제이다. 다만 이 논의는 이성 자체에 의해 정당화되거나 논거가 제시될 수는 없다. 이성은 이성 자신을 정당화할 수 없다.

1) 계몽과 지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을 통해 이성의 부정적 측면, 그것이 사회지배를 정당화하는 측면을 검토한다. 이를 통해 이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왜 인류는 새로운 야만 상태에 빠지고 말았는가?” 계몽은 인간의 불안을 없애고 인간을 주인으로 만들려는 목표를 내세웠지만 완전히 계몽된 세계는 불행이 넘쳐흐른다는 점에서 목표와 결과 사이의 부조화가 문제가 된다. 이들은 이런 문제의식으로 계몽적 합리성과 사회적 현실 간의 관련을 추적한다. 여기에서 문제의 촛점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려는 의도가 사회, 자연적 세계를 지배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계몽의 변증법』은 지배의 역사를 서구 문명 전체--창조, 올림푸스의 종교, 종교개혁, 부르조아적 무신론, 문화산업, 권위적 국가--와 관련짓는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사회사의 원천들로부터가 아니라 지성사로부터 간접적인 증거를 통해서 유럽 문명의 과정을 재구성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자유주의적-자본주의적 사회 뿐만 아니라 문명 전체 과정에서 증가하는 사물화를 문제삼는다. 이런 틀은 루카치의 사물화 이론과 관련을 갖는다. 루카치는 베버의 합리화 개념을 맑스주의적 자본주의 사회분석틀에 적용한다. 그는 부르조아 사회의 파편적이고 사물화된 의식형태가 상품교환의 추상화하는 힘에서 발전한다고 지적한다. 여기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사물들 간의 관계로 나타나고, 총체성의 전망을 상실한다.

그런데 『계몽의 변증법』은 자본주의 사회의 상픔교환의 합리성 자체가 형식적, 도구적 합리성의 한 사례일 뿐이라고 본다. 상품교환은 외적 자연에 대립되는 인간의 자기 보존 과정에서 형성된 합리성 양식을 확대시키는 사회적 매개체로 파악된다.

계몽은 신화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인간들이 자연을 통제하고 지배하도록 하는 사고틀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이 개념을 계몽주의 시대의 계몽 철학자들의 사고에 국한시키지 않고 보다 넓게 사용한다. 계몽의 ‘변증법’은 합리적 사고가 신화와 비합리성의 흔적들을 포함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계몽에 대한 비판은 과학, 기술,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으로 심화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과학, 과학적 이성, 기술이 현존 생산과정과 사회적 지배를 가능케 한다고 본다 (그들의 계몽 비판은 곧 이성에 대한 비판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헤겔이 지적했듯이) 베이컨이 제시한 계몽의 정식-지식은 힘이다-에 이미 자연지배의 기획이 드러난다고 본다. 여기에 계몽적 이성의 전체주의적 본성이 숨어 있다. 과학과 계몽적 이성은 처음부터 자연지배를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전면적 관리와 통제로 이어진다.

계몽은 이런 목적에 봉사하는 사고양식과 검증방법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자연지배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성공적인 방법들이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 찬양된다. 유용성, 효율, 성공의 기준이 지식과 실천을 인도한다. 계산, 양화, 형식화 양식들은 계몽적 합리성이 수학적 물리학과 논리의 체계를 특권화된 진리모델로 삼게 한다. 그리고 이와 다른 사고양식들은 계몽적 합리성에 의해 자연을 지배하는 투쟁에서 열등하고 비효과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부르조아적 사고는 계산, 양화, 교환, 등가, 형식화, 조화, 통일에 대한 부르조아 가치평가에 의해 규제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사고양식들이 어떻게 자연지배의 사회적 과정들의 부분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계몽적 이성은 현존 사회에 개입하고, 보다 근본적인 사고양식을 대신하고, 그것을 인간 지배에 적용함으로써 지배의 관심에 봉사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논의는 헤겔이 계몽의 진리를 보편적 자기의식, 그것이 구체화된 유용성의 원리로 제시한 점에 공감한다. 헤겔은 계몽의 유용성 원리가 절대적 자유를 실현하려는 프랑스 혁명의 테러로 귀결됨을 지적했는데, 이것은 도구적 이성에 기초를 둔 과학, 실용주의, 윤리적 결단론, 야만(특히 전체주의적 야만) 간의 관계와 평행을 이룬다.

헤겔에게서 계몽은 보편적인 자기 의식의 세계 지배로 특징 지워진다. 과학적 지식은 자연을 장악하는데 쓰일 수 있는 잠재적 도구이다. 과학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통제의 열쇠이다. 헤겔은 계몽적 의식이 세계를 객체화한다고 지적한다. 계몽은 세계를 ‘순수하고 단순한’ 사물들의 ‘절대적 실재’로 해석한다. 여기에서 자연대상은 어떠한 내재적 의미, 중요성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이성의 조작과 변형에 내맡겨진다.

베이컨은 인간 정신은 인간의 주권을 위해 모든 형태의 미신을 극복할 수 있고,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것은 자연을 지배하고 타인들을 지배하기 위해 자연을 어떻게 이용하는 가이다....권력과 지식은 동의어이다.” (DA. S.8) 이러한 자연 지배가 계몽주의 철학의 기초이다. 한때 해방적 이성이었던 것을 억압적 장치로, 계몽을 전체주의로 변형시킨 것은 계몽 자체가 지닌 가능성이 드러난 것이다.

계몽의 근본적 성격은 그것의 자연 개념에 들어 있다. 그 개념은 “주관성과 자연의 근본적인 분리”를 암시한다. 계몽적 개념은 자연을 본질적으로 순수한 물질로, 법칙에 따라 구조화되어 있고, 수학적으로 형식화된 보편과학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물질로 인식한다.

이 틀에서 자연은 ‘순수한 객체들의 영역’이 된다. 이처럼 ‘자연은 유용하다’는 개념은 계몽의 관점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온다. 자연은 그것 자체로는 가치가 없다. 만약 그것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타자(인간)의 목적에 봉사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헤겔이 지적하듯이) 유용성은 계몽주의의 윤리이다. 모든 행동들과 개념들은 그것의 유용성, 유용한 결과에 따라 판단된다.

이처럼 자연지배는 인간과 자연 간의 특정한 관계를 지시한다. 자연은 그것이 유용성을 갖는 한에서 의미를 갖는다. 자연이 인간 목적에 도구적인 한에서 물질은 가능한 조작 대상으로 규정된다. 이것의 연장으로 인간들도 잠재적으로 통제가능한 존재로 될 수 있다. 자연 개념과 지연 지배 (나아가 인간 지배) 간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그러면 이런 논의를 구체화하기 위해 문명화과정, 신화와 계몽에 의한 자연지배의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2) 미메시스와 신화 단계

 

(1) 미메시스

인류는 前史的 단계에서 사물들의 혼란스러운 흐름을 지속적인 것으로 동일화(Identifizierung)하지 못한다. 자연은 무정형한 것으로 경험된다. “동물들의 새계에는 개념이 없다. 현상의 흐름 속에서 동일한 것으로 붙잡을만한 말이 없다. 비슷한 견본이 되풀이해서 나타나도 그것을 동일한 類로, 상황의 변화 속에서 똑같은 사물이라고 확정할 수 있는 말이 없다....흐름 속에서 지속적인 것으로 확정될 수 있는 것은 없다. 과거에 대한 확고한 지식이나 미래에 대한 밝은 예견도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은 동일한 상태로 머물러 있다....동물은 자아를 갖지 않으며 자신 안에 조용히 머무르면서도 자신을 기꺼이 내맡긴다.”(DA. S. 220) 이것은 개념이 없는 세계이다 (인간은 이후에 대상을 개념에 의해 동일화함으로써 이 상태를 벗어난다).

이 단계의 행동방식은 미메시스이다. 이 개념은 객체를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객체에 동화됨으로써 객체의 위력에 간접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이다. 이런 행동방식은 동물이나 전통적인 인간의 행동방식으로 대상을 객체화하는 근대적 행동방식과는 대립된다.

아도르노는 미메시스적 행동방식을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기 전에 인간이 그의 타자(자연, 사회)에 관계하는 방식으로 본다. 미메시스는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직접적인 되풀이이고 참여이다. 이것은 무엇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객체에 동화시키는 것이다. 동일성 사고가 대상에 맞서서 그것을 지배하려는 것과 달리 이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반사행동으로서, 자연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자연에 동화되고 자연의 위협에 고분고분하게 따르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보존이란 점에서는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긴 하다). 개념이 대상과 거리를 유지하려는데 반해 미메시스는 형상을 통해 대상에 유사해지려고 하고 대상에 접근한다.

이런 개념은 자연을 객체로 보는 (전통적인) 인간중심적 세계관에 대한 거부를 함축한다. 이것은 인간의 합리적 이성에 기초를 둔 사고에 대한 전면적 반성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고 주관성의 우위나 동일성의 전제를 거부하는 아도르노의 미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메시스는 마술에 의해 의식적으로 이용된다. 미메시스는 본능적인 형태로부터 목적지향적으로 이용되는 마술에서 의식적으로 숙달된 도구가 된다. 자기유지가 순진한 반사행동으로부터 의식적인 원리가 되면서, 자아가 서서히 형성되면서 미메시스는 악마를 묶기 위한 의도적인 행위가 된다. 미메시스는 합리성의 최초 형태로 자연에 대한 무력감에서 나온, 자연지배를 위한 기술이다.

이 과정에서 미메시스는 그로부터 나온 합리성에 의해 추방된다. “문명은 타자에의 유기적인 순응인 본래의 미메시스적인 행태 대신에 마술의 단계에서는 미메시스를 조직적으로 숙달하게 되며, 결국 역사단계에서는 미메시스를 합리적인 실천인 노동으로 바꿔놓는다.” (같은 책, S.162)

(2) 신화 단계와 주체형성

미메시스적 행동방식은 점차 언어형식에 의한 체계적인 보고로 대체된다. 聖과 俗의 분리가 이루어지고 세계를 질서 잡힌 우주로 관찰하며 인간이 독자적인 존재로 이와 마주할 때 신화적 해석이 가능하다.

신화는 보고하고berichten, 명명하고, 근원을 이야기한다. 또한 서술, 확정, 설명한다(DA.S.11). 보고는 가르침이 된다. 이런 신화는 자연에 관한 도구적 관점의 발전에 중요한 단계이다 (언어형태로 자연사건에 이름을 붙이고 설명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신화는 이미 계몽적 사고이다). 신화는 상징 형식 속에서 형상을 통해 보고한다. 그것은 기호와 형상이 매개된 상징으로 내용을 전달한다.

서사시인은 보편개념을 쓸 때에도 상징을 통해 구체적인 특수성을 놓치지 않는다. 이로써 언어적인 수준에서나마 미메시스적인 행동방식이 명맥을 잇는다. 그러나 곧 상징은 사물화되고, 형상은 경직되고, 과학적 사고와 함께 상징적 의미는 완전히 제거된다. 이에 따라 기호와 형상은 분리된다.

신화에서는 기호와 형상이 하나였다. 과학은 신화를 공상으로 치부한다. 기호로서의 언어는 자연과 유사해지려는 요구를 포기하고 자연을 객체로서 인식하고 지배하기 위한 계산 도구로 전락한다. 형상으로서의 언어는 대상을 표상, 재현하는 기호로 바뀐다. 이제 기호를 통해 재현된 것 뒤에는 어떠한 실재도 숨어있지 않다.

그러면 신화단계에서 자아의 형성과 소외를 『오딧세이』에 대한 독특한 독해를 통해 정리해보자. 『계몽의 변증법』에 따르면 『오딧세이』는 계몽과 신화의 상호함축, 근대적 자아의 형성과 소외를 보여준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오딧세이』를 “유럽문명의 기본 텍스트”로 본다.

『오딧세이』는 인간의 주관성과 문화의 발전에 관한, 계몽적 이성이 직면한 시련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서사시의 주요 성격은 자연으로부터의 해방-자기를 정립하는 자율적인 주체와 부르조아적 개인-형식을 예시한다. 오딧세우스는 운명과 유혹의 시련에 맞서 독립적인 삶을 위해 투쟁하는 개인을 표현한다. 그는 자아의 동일성을 위협하는 다양한 상황에서 지속적인 싸움을 벌인다. 위기와 유혹에서 주체는 자기 파괴의 위협에 직면한다. 그의 자기 보존을 확보하기 위하여 꾀(List)와 속임수를 사용하고, 실용적인 방식을 추구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특히 이를 위해 오딧에우스가 본능의 지속적인 희생과 억압을 통해서만 자기를 유지하는 점에 주목한다. 바로 이러한 부정, 모든 문명화하는 합리성의 핵이 부르조아 개인주의의 기본단위이다. 오딧세우스는 그 전형이다. 그는 자기자신을 항상 억제함으로써, 그의 직접적인 욕구들을 망각함으로써 그의 삶을 구한다. 그는 내적 본성에 대한 억압을 통하여, 외적 자연에 대한 의식적으로 고안된 적응을 통하여 존속한다. 그는 자연을 합리적 고려에 의해서 장악한다. 그의 슬기List의 정식은 도구적 정신이다. 오딧세우스는 운명의 힘에 맞서는 합리성을 표현한다.

여기에서 무력한 인간이 신의 힘을 회피하기 위한 ‘희생’을 살펴보자. 희생은 신들을 지배하기 위한 인간들의 장치이다. 신들의 힘은 제공된 제물에 의해 꺾인다. “모든 인간의 희생행위는 계획적으로 수행될 경우에 행위의 대상이 되는 신을 기만한다. 희생은 신을 인간적 목적에 종속시킴으로써 신의 힘을 해체시킨다. 신에 대한 기만은 자연스럽게 신앙심이 없는 목자가 신심이 두터운 교구민에게 행하는 기만으로 넘어간다.”(같은 책, S.48) 이러한 희생은 신에 대한 기만이자 자기기만이다.

오딧세우스는 자기보존을 위해 자신을 원초적 힘에 가상적으로 제공한다. 자기보존을 위한 공물은 자기부정으로, 내적 자연이나 본능의 억압이며 자연의 행복을 단념하는 것이다. 이러한 희생은 합리적 교환의 초기 형태를 표현한다. 그것을 통해 사람들은 ‘신들이 장악될 수 있는’ 고안물을 얻는다. 합리적 교환의 마술적 양식은 자연이 지닌 힘에 대한 어느 정도의 통제를 가능케 한다. 이 때 신들은 숭배되면서 바로 그 자체에 의해 내던져진다.

오딧세우스는 시민사회의 원리에 의해 살아간다. 그의 성공과 지식의 다른 측면은 타인들의 비참함과 무지이다. 이것은 사이렌과의 만남에서 잘 나타난다. 전설에 따르면 사람들은 사이렌들의 아름다운 노래를 들으면 그 유혹을 벗어날 수 없다. 사이렌은 ‘발생했던 모든 것’을 안다. 그들의 미래를 그 지식과 교환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과거의 기억들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이 지불해야 하는 댓가이다. 사이렌들은 모든 발전단계에서 ‘나’를 위협하는 커다란 유혹들 가운데 하나를 표현한다. 자기를 잃어버리려는 유혹은 그것을 유지하려는 맹목적 결정과 함께 항상 존재했다. 자기유지와 파괴의 경계는 깨뜨려지기 쉬운 것이다. 오딧세우스는 키르케의 경고로 닥칠 위험을 안다. 그는 그것을 회피할 두 방식을 찾는다. 그는 부하들에게 그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게 한다. 그의 배가 사이렌들 곁을 지나갈 때 그들은 그 노래를 듣지 못한다. 그들은 노를 저을 뿐이다. 오딧세우스는 노래를 듣지만 위험에 빠지지는 않는다. 그는 유혹의 선율을 듣지만 돛에 묶여 있어 응답을 할 수 없다. 여기에서 사이렌들의 매혹적인 노래를 듣지 못하고 배를 젓기만 하는 선원들은 피억압자들의 비유이다. 이것은 그들이 그들을 억압하는 자의 생활을 재생산함을 상징한다. 오딧세우스의 부하들은 그들의 노동을 즐길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강압적으로 그들의 감각이 정지된 채로 억압, 자포자기 속에서 수행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외된 노동이다. 그들의 육체와 영혼은 노예 상태이다. 그들의 주인은 노동하지도 않고, 직접적인 희열의 유혹에 빠지지도 않는다. 그는 관조할 뿐이다. (오딧세우스는 문화와 쾌락을 즐길 수 있지만 그의 쾌락은 행동으로 인도되지 않는다.) 예술의 향유와 육체노동은 분리된다.

오딧세우스가 부르조아 개인의 전형이라면, 그의 여행 국면들은 문명사, 희생의 내면화의 단계들을 표현하는 것일 수 있다. 오딧세우스는 자연과 인간을 장악하기 위해서 싸운다. 자기를 확립하고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자는 자연의 지속적인 힘에 대항해서 동일적인 자아를 주장해야 하며 그것을 다시 상실하지 않기 위한 끝없는 강제를 가해야 한다. 이것은 내적 자연을 억압하고 충동을 포기하고 자신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함으로써 가능하다. 자기보존은 자기부정, 체념, 희생을 통해 가능하다.

이처럼 인류가 자연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은 자신의 내적 자연에 대한 지배라는 댓가를 치른다. 자기유지는 항상 자기부정이었다. 자기유지가 맹목적인 원칙이 되어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다. 자연지배를 위해 조직된 사회에 소속되는 것은 그 이전의 자연이 요구하는 희생보다 더 큰 희생을 요구한다. “문명의 역사는 희생이 내면화되는 역사이다. 즉 체념의 역사이다.” (같은 책, S.51f.)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이것을 내적 자연의 억압, 객체 영역의 고정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로 본다. “자연의 활기넘침(Beseelung)을 해소하는 주관적 이성은 자연의 완고함(Starrheit)을 모방하고 자기자신을 활기넘치는 (animistisch) 것으로 해소시킴으로써 활기를 잃은(entseelte) 자연을 장악할 수 있다” (같은 책, S.53)

다른 사례를 살펴보자. 시클롭스 폴리페무스(Cyclops Polyphemus)는 외눈박이 거인이다. 야만적 시대, 수렵 채취 시대에 사는 시클롭스들은 잔혹한 자기중심주의에 따라 산다. 시클롭스는 오딧세우스와 그 선원들을 감금한다. 오딧세우스는 속임수로 탈출한다. 그는 거인과 친한 척해서 그의 이름이 우데이스/니만트(udeis/Niemand:아무도 아닌 자)라고 얘기한다. 그는 거인에게 포도주를 준다. 시클롭스가 술에 취해 잠이 들자 오딧세우스와 그의 부하들은 그의 하나밖에 없는 눈을 찌른다. 시클롭스는 고통에 못 이겨 소리지른다. 그의 동료 거인들이 달려오자 그들에게 ‘니만트가 나를 해쳤다(:아무도 나를 해치지 않았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다른 거인들은 그냥 집으로 돌아간다. 오딧세우스는 탈출한다.

신화에서 단어는 사실에 관한 직접적인 힘을 가져야 하고, 표현과 의도는 서로 침투한다. (같은 책, S.56) 거인에게는 아무도 가리키지 않는 ‘니만트’가 오딧세우스의 이름이다. 오딧세우스는 이름과 대상, 단어와 사물간의 구별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그 속임수는 유효하다. 여기에서 오딧세우스의 자기-긍정은 자기-부정의 형식이다. 그는 그의 동일성을 부정함으로써 동일성을 확립한다.

이 여행은 근대적 자아 형성의 은유이다. 인간은 사고하기 시작하면서 자연과의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인 관계를 끊고 외적인 자연과 내적인 자연을 구분하는 담을 쌓는다. 외적 자연의 지배는 주체가 자신을 통제하는 정도에 따라 가능하다. 자기보존은 자기부정과 체념Entsagung으로, 사회전체로는 노동의 조직화로 가능하다. 신화적인 자연을 탈마술화한 다음에는 자기보존만이 남는다.

이것을 정리해보자. 칸트의 선험적 주체에서 나타나듯이 자기는 대상에 대한 사고와 자기의식의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개념적 사고의 일관성에 대한 강요는 일관되고 통일된 자기를 전제한다. 자기 형성도 자기 보존의 기능으로 해석된다. 통일된 자기 형성은 그 자아의 토대가 되는 것이고, 생명을 유지하는데 봉사한다. 여기에서 자기가 자기보존의 기능이 된다. 자기보존을 위해 봉사하는 자기 형성은 동시에 자기 희생이기도 하다. 자기의 통일은 필연적으로 내적 본성의 억압과 규제라는 댓가를 치른다. 현재의 만족을 기다리는 모든 충동, 욕망들에 대한 억압과 규제가 이루어진다. 자기지배는 자신의 자아에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면서 잠재적으로 그것이 봉사하는 주체를 파괴한다. 자기보존을 위해 형성된 개념적 사고의 일관성에 대한 요구는 사고하는 자아 자체의 일관성에 대한 요구로 되돌아간다. 외적 자연에 대한 지배는 내적 자연에 대한 억압을 댓가로 가능하다. 정신은 생명체의 자기 보존에서 나온 것이지만 근원을 스스로 망각한다. 사물화경향은 살아있는 것인 정신이 개념적 사고가 파악할 수 있는 세계로부터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정신의 자기 망각은 그 고유한 자연성을 상실하고 주체 안의 자연성을 부정한다. 이렇게 되면 계몽은 자기 목적을 상실한다. (Wellmer,149-150참조)

3) 계몽의 변증법

계몽의 목표는 애니미즘을 몰아내는 것이다. 즉 인간에게서 공포를 제거하고 인간을 주인으로 확립하고자 한다. 계몽은 세계를 탈주술화/탈마법화하고, 탈신화화한다. 이를 위해 계몽은 유동하는 외적 세계를 고정적인 것으로 만든다. 개별적이고 특수한 사례들을 규정된 보편적인 類(bestimmte allgemeine Gattung)로 포섭, 동일화한다.

신화와 계몽은 그것들의 뿌리를 같은 기본적 욕구들--생존, 자기보존, 불안--에서 찾는다. 그러나 그 방식은 다르다. 후자는 사고와 현실 간의 근본적 구별을 정립하지 않는다. 과학은 그것의 대상 영역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개념들의 주권성’이란 우월한 지점을 확보하고자 한다. 과학에서 자연지배는 자연에 있는 인과적 결합과 규칙성들에 기초를 둔 과학적 법칙들을 발견함으로써 가능하다.

계몽의 개념적 언어에 의해 미메시스와 신화는 추방된다. 신화는 모든 현상들을 의인화하는 표상세계를 구축했고, 주체와 객체를 엄격하게 분리하지는 않았다. 체험의 주체와 사건의 객체를 유사성의 원리에 의해 연관지음으로써 양자 사이에 살아있는 관계를 만든다. 그런데 과학을 통해 인식주체와 인식되는 객체 사이의 균열이 생기고 심화된다. 신화, 마술이 성행하는 사회에서 주체는 객체에 의해 지배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비해 계몽은 주체와 객체를 근본적으로 분리한다. 계몽이 전개되면서 외적 세계는 조종가능한 양화된 객체들로 환원되고 이 과정의 연장선상에서 주체는 제2의 자연(‘문명적으로 구조화되고 미리 주어지는’ 것으로 나타나는 역사)에 의해 점점 더 억압되고 지배당한다.

신화가 실증주의와 경험주의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산업테크놀로지에 의해 주술의 맥락에 매인 실천들로 대체되어 사회적인 것이 사물화된다. 아도르노는 이를 ‘가짜 총체’라고 부른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점증하는 통제는 보다 더 큰 압박을 초래한다. 생산력의 확장은 해방된 사회로 가는 길을 열어놓았다. 해방의 잠재력은 확대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배의 도구로 기능한다.

계몽은 개념으로써 대상을 동일화함으로써 자연을 통일시킨다. 이때 개념과 그것이 파악하는 실재가 동일시된다. 즉 개념은 파악된 것과 동일시되고 진리는 개념적 사고와 동일시된다. 이런 추상화과정에서 질적 요소들은 제거된다. 개념적 사고없이 대상의 동일화나 인식이 불가능하다면 사고는 동일성의 강제 아래 사고의 타자를 포섭하는 것이다. 이 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개념과 파악된 것 사이의 동일성은 가상이다. 개념으로써 대상을 완전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 그런데 개념적 언어는 개념과 사물 사이의 비동일성을 은폐한다. 이러한 개념에는 지배적 성격이 들어있다.

계몽의 기본적인 사고틀을 정리해보자. 칸트에게서 선험적 형식에 의해 구성되는 경험가능한 대상들의 총체인 현실은 규칙적이며 인과론적으로 관련된 현상들이다. 그것은 자연과학적으로 인식가능한 대상이다. 계몽에게 자연과학적 서술과 설명의 척도에 맞지않는 것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과학주의와 계몽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이때 인간 역시 자연과학적으로 정초된 설명대상이다, 이것이 인간을 사물화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그리고 계몽은 도구주의적 관점을 강조한다. 그것은 현실을 기능적이고 실험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고 본다. 지식은 수리물리학의 논리법칙에 따르며, 그것은 도구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 이론적 지식과 그것의 기술적 이용 관계는 자연고학이론의 논리적 문법, 사고틀 안에 들어 있다. 이처럼 계몽에서 자연은 질료와 물질로 변형시켜 그것을 죽은 것으로, 인간은 사물화가능한 것으로, 사회관계는 기능연관으로 규정되고, 다른 한편, 기술적 지식의 도구적 합리성이 사고와 실천을 지배한다. 과학적 사고는 현존하는 것을 언제나 동일한 것의 단순한 예로 취급한다. 새로운 것은 미리 (알고)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것은 과학을 자기가 만든 감옥에 가둔다. 필연적인 것, 언제나 동일한 것으로 주어지는 사실을 벗어날 수 없다. 계몽을 통해 세계를 탈주술화하는 것은 세계를 계몽적으로 주술화한다. 탈주술화는 자연지배를 위한 의인론적 자연해석을 극복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동시에 살아있는 정신적인 자연을 죽은 자연으로 만든다.(Wellmer, 142이하 참조)

이처럼 개념은 인간의 자연 지배 도구이다. 개념을 통해 인간은 자연과 거리를 두고, 자연을 낯설고 적대적인 것으로 체험한다. 이 틀에서 자연은 오로지 조작대상으로 이해된다. “인간이 자신의 힘을 증가시키기 위해 치르는 댓가는 힘이 행사되는 대상으로부터 소외됨이다. 계몽이 사물에 대해 취하는 행태는 독재자가 인간들에 대해서 취하는 행태와 같다. 독재자는 인간들을 조종할 수 있는 한 인간들을 안다. 과학적인 인간은 그가 사물들을 만들 수 있는 한 사물들을 안다. 이를 통해 즉자적인 사물은 인간에 대한 사물이 된다.” (같은 책, S.12)

자기 보존을 위해 인간은 자연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익숙하지 않은 것은 불안을 가져온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알려진 관계 안에 포함시킬 수 있을 때, 즉 그것을 알려진 것과 익숙한 것의 연관 속에서 파악할 때 불안은 해소된다. “더이상 모르는 것이 없을 때 인간은 두려움으로부터 면제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탈신화화와 계몽의 궤도를 결정한다. 신화가 죽은 것을 산 것과 동일시한다면 계몽은 산 것을 죽은 것과 동일시한다. 계몽은 과격해진 신화적 공포이다....바깥이라는 관념 자체가 공포의 원천이기 때문에 어떤 것도 바깥에 있어서는 안된다. ”(같은 책 S.18)

계몽은 모든 것을 이성적 사고체계에 포섭하여 그것을 사물화한다. 애니미즘이 모든 것에 영혼을 불어넣는다면 계몽은 모든 것을 부정하고 죽이는 형식이다. 계몽은 새로운 신화를 만든다.

과학의 방법론적 형식은 단지 자연에 관한 실천적 통제란 관점에서 드러나는 규칙성들을 찾아내고, 기술은 자동화된 수준에서 인간적 통제행위의 요소적 구성부분들을 재생산한다. 호네트는 이것을 ‘도구적 인식론’이라고 부른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생산력의 발전을 자연과정을 통제하기 위해 개입하는 근원적 행위에서 얻어지는 지식 성장으로서 자연과학과 기술의 근대적 성취를 완성시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사회적 자기-보존이란 주도적 관점에서 자연에 대한 사회적 권력을 중대시키려는 목적으로 자연환경은 객체화되고 개발된다. 이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분석의 일차적 관심은 (사회적 부의 증가가 아니라) 사물화란 효과들이다. 자연을 가공하는 것은 자연의 감각적 다양성을 중립화함으로써 대가를 치른다. 즉 살아있는 자연을 배제하게 된다. 결국 자연통제에서 실재의 유일한 측면은 조작과 재생산의 요구에 따라 배치, 조직된다. 따라서 생산력의 발전은 자연을 사회적 지배가 투사된 평면으로 희석시킨다.

이성과 사회지배의 관계를 살펴보자. 루카치의 (자본주의적 노동분업의 산물인) 파편화된 과학과 사물화에 대한 비판은 사회 현실과 과학적 사고 양식의 발전 간의 상관관계를 지적한다. 이것은 (양적 사고와 논리, 정신의 컴퓨터화가 득세하는) 현대 사회에서 과학과 기술의 역할에 관한 이론적 고찰과 연결된다. 사회지배와 연결되는 과학적 사고양식에 대한 인식론적 비판을 마련한다.

맑스주의자는 과학, 기술을 사회와 분리된 것으로 본다. 그것을 진보적 생산력으로, 비합리적 생산관계를 비판하는데 쓰일 수 있는 보다 합리적 사회를 건설하도록 인도하는 힘으로 본다. 초기에는 이런 입장을 견지했던 비판이론은 1940년대에 루카치의 영향으로 과학, 기술과 사회의 상관관계에 보다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이 입장은 과학에 대해 사회적, 인식론적 비판을 가하는 루카치보다 한걸음 더나아가 객체화와 양화 안의 관심-자본주의적 이윤, 사회통제에 대한 관심과 연결-이 과학기술을 지배수단으로서 구성한다고 지적한다.

“과학의 연역적 형식까지도 위계질서와 강압을 반영한다. 조직된 부족과 그것의 개인에 대한 권력을 표현하던 최초의 범주들과 마찬가지로 전반적 논리적 질서, 의존, 연쇄, 개념들의 포괄과 통합은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현실-노동분업- 조건들에 근거를 둔다. 물론 이런 사고범주들의 사회적 성격은 뒤르껭이 주장하듯이 사회적 연대의 표현이지만 사회 지배의 불가사의한 통일의 증거이다. 지배는 그것이 그것 자체에게 설정한 사회전체에 대해서 증가된 인과성과 힘을 빌어온다” (DA.S.23)

자본주의 사회에 지배적인 등가교환은 구체적 특수성으로부터 추상화를 요구한다. 등가교환은 자본주의적 시장 경제의 중심 측면의 하나이다. 이것은 경제, 정치, 법, 문화, 일상생활의 영역에 침투한다. 모든 현상들이 교환가치의 담지자인 상품으로 바뀐다. 맑스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환가치가 사용가치에 우선하고, 그것을 지배한다고 본다. 이에 비해 비판이론은 등가교환과 사고, 지배의 관계에 주목한다. 등가의 틀은 사고 양식과 사회 과정 모두에서 개별성과 특수성을 희생시킨다. 양적, 추상적 사고 양식은 등가와 대체의 원리에 지배된다. 유사하지 않은 사물들이 추상적 양들로 (개별적 질을 배제하는) 환원에 의해 비교가능한 동질적인 것으로 바뀐다.

모든 타당한 사고와 지식은 계산, 등가. 체계화의 원리에 순응해야 한다. 이러한 계몽의 원리는 순응적 사고양식을 마련한다. “계몽에게 계산과 유용성의 규칙에 순응하지 않는 모든 것은 의심받는다. 계몽은 전체주의적이다.”(DA.S.9f) 계몽은 모든 신화, 주관성, 가치, 질, 미학, 감정들, 특수한 것들을 타당한 사고로부터 배제시킨다. “계몽의 이상은 모든 것이 그것에 따르는 체계이다”(같은 책, S.10) 그것의 합리주의적, 경험주의적 변형 모두는 과학적 통일의 원리를 목표로 삼는다.

이러한 양적 사고양식은 개념과 대상, 낱말과 사물 간의 동일성을 전제한다. 특권적인 수학논리만이 사물들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 아도르노는 사고와 존재의 비동일성에 대한 강조로 이에 대항한다. 모든 대상, 객체는 그것의 고유한 특수성과 유일함을 지닌다. 그것은 범주로 포섭될 수 없고, 모든 존재를 체계화할 수 있다는 사고양식을 믿는 것은 전체주의적이다. 계몽적 합리성은 논리적으로 파시즘을 이끈다. 계몽적 질서, 통제, 계산가능성, 지배 체계 원리를 사회에 대한 전체주의적 관리에 적용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근대성과 전면적으로 관리되는 사회의 관련을 살피면서 칸트가 합리적 사고 범주들을 체계화하는 것을 문제삼는다. 이 체계는 모든 진리와 현상을 포함하고 체계 바깥의 모든 것을 비실재적, 비합리적인 것으로, ‘본체계’의 영역으로 배척한다. 이것은 철학을 폐쇄된 합리적 체계로 보는 생각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칸트적 이성은 자연과 역사를 초월하는 주체의 이념을 투사한다. 이 주체는 그 자신 안에 완전한 질서, 위계적 감독, 초-관료적인 선험적 자아에 의한 모든 개념들과 경험들의 관리를 포함한다. (같은 책, S.74쪽 이하 참조)

그래서 칸트의 순수이성의 체계는 자본가계급에 의해 공장들과 감옥으로, 사드(Sade)에 의해 성적 방탕함으로, 나치에 의해 수용소의 전체주의적 사회질서로 전이된다. 계몽적 합리성은 모든 것이 그것의 자리를 찾고, 모든 것이 위계적으로 질서지워지고 관리되는 체계, 질서, 관리와 조직에 대한 사랑을 공유한다. 일탈들은 처벌받는다. 칸트에게서는 도덕법칙을 깨뜨린 자로 양심과 도덕법칙에 의해 처벌받고, 노동을 거부한 자는 실업과 빈곤으로, 유대인법에 복종하길 거부하는 자는 감금으로, 체계의 법률들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자는 죽음으로 처벌받는다.

“계몽이 염두에 두고 있는 체계는 사실들을 잘 다룰 수 있고 자연을 장악하는데 가장 효과적으로 개인을 뒷받침하는 인식형태이다. 그것의 원리는 자기보존의 원리이다. 미숙함은 자기를 보존할 수 없음으로 증명된다. 노예주인, 자유사업가, 관리자를 계승하는 형태로 부르조아지는 계몽의 논리적 주어이다.” (같은 책, S.76)

관리자는 보편적 규칙들과 조정들이란 측면에서 특수자들을 사상한다. 개체들에게 관리와 지배의 체계에 순응할 것을 강요한다. 그 결과 개별적 차이를 평준화된다. 자연지배를 위한 도구인 계몽적 사고는 인간지배를 위한 도구로 된다. 공장으로부터 전면적으로 관리되는 사회의 감옥으로, 수용소로 논리적 진전이 이루어지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다.

4) 평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논의가 갖는 불분명한 점을 지적해보기로 하자. 그들의 틀은 자신들이 원래 밝히고자한 사회지배의 자연적, 심리적 기원을 계몽적 사고틀을 통해 밝히고 있지만 사회지배의 특성에 대한 논의에 미진한 점이 많다. 자연지배 모델이 그대로 인간지배 모델로 그대로 전이되면 후자의 측면이 지닌 고유한 형식을 해명하기가 어렵다 (흔히 지적하듯이 이 논의에서 정치경제학이 결핍되어 있는 점도 구체적 사회분석에 걸림돌이 된다).

자연지배가 어떻게 사회지배로 전환되는가? 사회지배에 특유한 형식이나 동학은 없는가? 이들의 이론은 자연 지배와 개인적 자기-지배의 틀을 보충할 수 있는 사회 지배 형식에 관한 측면을 포함해야 한다. 그 이론에서 사회 내의 지배관계는 사회적 노동분업이론의 사고틀에 정초된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의 사회적 불평등에 관한 설명이 사회가 자연 가공을 강화하는 데 따른 것으로 설명될 뿐이다. 그것이 잉여산물의 생산으로 정립되는 분배의 문제와 관련되지 않는다.

이것은 특권계급의 노동계급에 대한 사회적 지배가 외적 자연에 대한 인간 지배의 사회내적 연관으로 본다. 이에 따르면 자연의 기술적 통제가 그대로 지배계급이 사회구성원들에게 노동을 강요함으로써 실행되는 사회적 통제로 연장된다. 이런 사고틀은 억압된 계급을 사회에 의해 지배되는 “물리적 자연의 사회적 후계자”(DA. S.64)로 본다. 이런 유비는 육체노동을 강요받은 집단을 억압된 자연의 사회 내적 대리자로서 해석한다. 이런 자연지배이론은 모호한 사회지배개념을 정당화한다.

억압받는 계급이 자연과 마찬가지로 기술적 메카니즘의 통제 대상으로 이해될 뿐이라면, 육체노동자의 문화적 빈곤은 사회적 지배, 또는 사회적 자연 지배에 상응하는 상관항으로, 자연의 탈정신화의 직접적 산물로 여겨진다. 이처럼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자연에 대한 도구적 통제, 지배 모델에 집착한다. 따라서 사회지배과정은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도구적 통제의 과정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Honneth, S.61이하 참조)

그렇지만 자연지배와 관련된 사회내적 관계에 관한 분석이 사회적 지배의 획득과 실행과정을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주체가 자신의 계획과 의도를 실현시키기 위해 다른 주체들에서 영향을 주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주체는 물리적 힘을 이용하고 다른 사회성원들은 사회적 노동의 불평등한 배분을 강제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한다. 여기에서 피지배집단의 복종을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지배형식에 주목해야 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역사철학은 문명사를 자연, 사회적 계급 지배, 개인적 본능 지배의 고도화과정으로 해석한다. 그것은 사회적 행위의 중개적 영역, 하버마스가 상호작용의 영역으로 부른 것을 무시한다. 사회적 자기 보존의 집단적 강제는 지배를 안정케 하는 계급에 특유한 강제로 전이될 뿐, 상호작용하는 집단들의 창조적 수행을 위한 사회적 공간이 더이상 남아 있지 않다.

두번째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이성 비판은 과학, 합리성, 계몽에 대한 미분화된 비판이 아닌가? 즉 ‘모든’ 과학, 이성이 자연지배와 내재적으로 결합된 것인가? 그들은 객체화와 사물화를 동일시하는가? 일반적으로 마르쿠제, 하버마스 (때로는 호르크하이머) 등은 비판적 이성에 근거를 두고 도구적이고 형식적 합리성에 대한 비판을 마련한다. 그런데 아도르노는 이성의 긍정적 개념을 거부한다.

이처럼 두가지 해석에서 보다 억압적이고 순응주의적인 유산에 맞서 계몽의 진보적 전통을 옹호하려는 시도(세계의 탈주술화, 신화, 미신, 무지의 해소, 과학과 기술이 인간의 복지 등에 기여한 방식들)와 아도르노의 후기 철학처럼 계몽적 합리성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 양립한다.

『계몽의 변증법』은 상품화, 합리화, 관리, 관료제, 교환에 대한 미분화된 비판을 제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베버의 근대성 비판과 친근하다. 베버(짐멜, 퇴니스)는 근대성의 진전을 타율의 증가란 측면에서 해석한다. 개인들은 점점더 기술적 관료제 장치와 그것의 작업양식, 정치, 일상생활, 사고에 의해 지배된다. 베버가 근대 역사의 진행과정을 합리화로 설명하고 목적합리성이 수단합리성으로 대체되고, 관료제의 지배로 설명하면서 인간이 합리화의 철창을 벗어날 수 없다는 비관론을 제시했는데 『계몽의 변증법』은 이런 전망이 전면적으로 관리되는 체제와 전체주의에 의해 실현됨을 보여줌으로써 그 구체적 내용을 제시한다.

아도르노는 계몽이 신화에 대립된 것으로 정립되지만 계몽 자체가 신화가 되고 신화가 계몽적 합리성에 침투한다고 본다. 그는 계몽적 이성이 지배를 가능케 하는 토대임을 밝힘으로써 인간이 제2의 자연에 의해 지배되고 소외되는 점을 지적한다. 다만 이런 지적에서 구체적인 사회적 과정들이 어떻게 지배형식들을 구성하는가에 대해서 충분하게 지적하지 않는다.

과학, 기술, 사고의 특정한 형식은 지배와 사물들, 자연, 인간을 사물화하는 관심에 봉사한다. 반면 다른 사고, 행위양식은 그 대상들을 반드시 사물화하지는 않는 다른 관심을 갖는다. 하버마스는 과학, 과학적 담론에 대한 전면적 비판에 맞서 보다 분화된 비판을 제시한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은 합리성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를 통해 합리성을 사회적 의사소통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적 이성을 통해 복원하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지배의 이론적, 실천적 근거를 해명하고 보다, 더 중요하게 지배를 벗어날 수 있는 규범적 틀을 제시하고자 한다.

하버마스적 틀을 언어철학적으로 전용한 입장의 비판을 살펴보자. 벨머는 아도르노가 전체지향적 이성에 대한 비판을 논증적 이성에 대한 비판과 동일시한다고 본다. 그는 아도르노처럼 체계화에 대한 강요를 넘어서기 위해, 경직된 동일성의 강요를 넘어서기 위해 개별화하는 형식을 사고하기 위해서 논증적(diskursiv) 이성을 넘어설 필요는 없다. 그는 비폭력적 동일성에 대한 전망은 논증적 이성 자체의 언어적 토대에 기반을 둔다고 본다. 논증적 이성에 대한 아도르노의 개념은 과학지상주의적 계몽주의의 이성상과 유사하다. 그리고 아도르노는 동일성 비판을 주객모델의 틀 안에서 수행한다. 그는 논증을 문장들 사이의 연역적 관계 모델에 근거한 것으로 본다. 형식논리학의 바탕인 관념화를 개념 자체의 특질로 보므로 보편 개념 자체에 이미 연연적 체계의 경직성이 들어 있다고 본다. 벨머의 입장에서는 논증은 개념에 주체의 다원성을 포함하고 연역적 문장관계의 경직성이나 직선적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 논증에서 고찰 방식이나 언어용법이 상충할 때 언어의미의 활동이 논증에서 반성적으로 검토될 수 있다. 따라서 언어의 의미활동을 밑받침하는 의사소통적 실천에 주목해야 한다. 동일성의 폭력, 비진리, 언어적 판단의 보편성의 연관에 대해 사고하려면 언어 내부에 있어야 한다. 아도르노는 도구적 이성과 다른, 보다 나은 어떤 것을 논증적 이성을 넘어서는 것으로 삼으려 한다. 그런데 동일성의 비진리는 언어 안의 비진리이다,그것은 언어적 의사소통, 그 사회적 실천이 특수하게 폐쇄되거나 왜곡된 것이다. 따라서 벨머는 하버마스의 주장에 기대어 이것을 의사소통의 장으로 가져와 반성적으로 논의함으로써 비판을 재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논의의 장에서 보편과 특수의 불균형이 비동일적인 것을 손상시키는 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의사소통이 특수한 장애이며 언어내적 자원을 통해 손상된 특수자의 권리를 찾을 수있다. 그는 아도르노가 비판하는 과학주의의 기초가 주체철학이기 때문에 동일성에 묶인 사고에 대한 비판은 의사소통적 모델을 택하지 않는 한 거꾸로 선 과학주의를 주장하거나 도구적 이성을 넘어선 것(이를테면 미메시스)을 개념적 사고 바깥에 설정해야 한다.(Wellmer, 86-97 참조)

이성의 안과 바깥이라는 은유로 문제를 정리해 보자. 아도르노에게 비판받는 지배를 지향하는 이성은 비동일성을 동일성으로 재단하고 흡수하는 점에서 이성 바깥의 것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시도이다. 이것은 자신의 안을 무한하게 넓히려고 한다. 이에 대해 아도르노는 이성 안에서 바깥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는 이성이 끌어들여 죽음으로 몰아낸 바깥의 진리를 이성 안에 응결된 비진리를 폭로함으로써 부각시킨다. 그는 동일화하는 개념을 벗어나기 위해 미메시스에 기댄다. 그리고 이성으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한다. 물론 그의 철학은 사고할 수 없는 것을 사고해야 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해야 하고, 개념을 매개로 개념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아포리아 한가운데서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푸코는 그의 권력작용에 대한 분석에서 아도르노가 제시한 인간의 자연지배가 사회지배로 연장되는 지형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성적 사회구성이 개체들을 지배하는 양식에 대한 논의인 권력이론에서 푸코는 지식-권력 개념을 통해 지식이 권력을 구체화하는 틀임을 밝힌다. 그에 따르면 인간과학은 인간을 통제하고 길들이는 테크놀로지이다. 인간과학은 인간을 권력 메카니즘이 작동할 수 있도록 인식가능한 대상으로 만든다. 개체들은 보이지 않고, 사회 전반에 두루 퍼져 있는 미시적 권력망들에 의해 감시받고 일정한 대상으로 분류되고 기록되어 권력이 작용하는 지점으로 구성된다. 이때 개체들을 권력의 질서 아래 길들여질 수 있도록, 개체를 정보의 대상으로 구성하는 역할이 지식체계, 담론 장치에 의해 마련된다. 계몽적 이성이 인도하는 인간과학은 해방의 안내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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