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의 정치학 - 리오타르의 형상/담론 이분법에 대한 고찰
박영욱(고려대)
1. 들어가는 말
리오타르 자신의 진술에 따르자면 그에게 미학은 정치 활동가였던 자신에게 안락한 도피처나 알리바이가 아닌 정치적 무대의 밑바닥(le sous-sol de la sc ne politique)으로 향하는 틈새이며, 정치적 무대가 뒤집히고 전복되는 광경을 담고 있는 실천의 장소였다. 흔히들 미학 혹은 예술 작품이 정치적 성격을 갖는 경우는 그 작품이 정치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경우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른 바 사르트르의 참여문학이 이에 대한 가장 단순하고 분명한 입장일 것이다. 하지만 리오타르는 사르트르식의 참여예술을 전면적으로 거부한다. 그는 예술의 정치적 의미는 내용이 아닌 형식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고흐의 그림은 어떤 정치적 내용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형식적 측면에서 볼 때 과장된 원근법의 사용이나 원근법 자체의 파괴, 또는 매끈하지 않은 투박한 붓질 등은 재현의 패러다임에 갇힌 근대 부르주아지 세계관과는 어긋나는 회화적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부르디외에 따르면 보들레르나 말라르메의 상징주의 시는 얼핏 내용적으로 보면 부르주아지의 내면적 감상이나 갈등을 표현하고 있는 보수적인 예술로 볼 수 있지만, 당시 부르주아지 세계관을 반영하는 문학 스타일인 사실주의나 자연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분명 리오타르는 예술이 내용적 측면에서 정치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인 측면에서 정치적으로 고찰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따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예술이 내용에 집착할 경우 기호학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기의에 집중하게 될 텐데, 이 경우 기의의 내용은 기존의 해석 체계에 따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호 혹은 언어는 의미작용으로써 반드시 일정한 약호체계를 전제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약호체계 자체가 이미 사회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므로 해당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오타르에게 예술은 새로운 정치적 임무를 지닌다. 그것은 모든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으로서의 예술이다. 특히 보편적인 코드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에 대한 진정한 비판은 그 코드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리오타르가 예술에 부여한 과제는 바로 이것이다. 말하자면 예술은 단순히 기존의 형식을 거부해야 하는 것에 국한되어서는 안 되며 코드화되는 모든 양식 자체를 거부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규칙을 전면화하는 기호학적인 또는 언어학적인 담론 그 자체를 벗어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리오타르가 보기에 마크 로드코의 그림이나 존 케이지의 음악의 경우 그것들은 단지 새로운 예술 형식의 창조가 아니다. 가령 1964년 로드코가 그린 <무제4>를 보면 캔버스 전체가 단지 검은색으로만 덮여 있다. 그것을 일종의 기표로 보고 그 의미를 해석하려 하는 것은 거의 무의미하다. 그 그림은 오히려 기호학적인 관계 자체를 파괴하고 있다. 말하자면 일종의 무의미인 것이다. 존 케이지의 음악 역시 기존의 음악 체계로 보면 무의미하다. 이렇게 보면 존 케이지의 음악은 단순히 기존의 형식을 새로운 형식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리오타르가 예술에서 기대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예술이 기존의 담론체계를 넘어서 새로운 담론 체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담론 체계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 따라서 예술의 대상은 담론이 아니라 담론의 기준으로 보자면 무의미한 것, 즉 담론의 외부에 있는 것이다. 리오타르는 이것을 담론(le discours)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 즉 '형상'(la figure)이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형상은 담론과는 다른 어떤 것이다. 이는 곧 형상이 담론으로 이루어진 어떤 사회적 규정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게다가 형상은 담론 외부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담론의 허구성을 공격하고 조롱한다. 그럼으로써 기존 담론 체계의 붕괴를 유도하는 것이다.
리오타르가 보기에 이런 점에서 예술은 정치적이며, 그것도 가장 급진적인 성격을 지닌다. 아니 예술은 일종의 특권적 영역인 것이다. 어떤 다른 영역도 이미 담론화 되어 있지만 형상만이 담론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의 목적은 예술 혹은 형상에 대한 리오타르의 이런 급진적 생각을 이루고 있는 몇 가지 세부적인 논의들을 검토한 후 과연 그의 이러한 기획이 성공적인 것인가에 대해서 평가하는 것이다.
2. 형상과 담론의 구별
앞에서도 암시되었듯이 리오타르는 담론을 형상과 구분한다. 담론은 언어적인 세계라면 형상은 담론과는 구분되는, 담론과는 별개의 공간이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형상은 담론이 그 한계를 드러낼 때 나타난다. 형상이란 담론의 외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담론의 외부로써 형상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담론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형상과 담론의 구분을 밝히는 것이 목적인 그의 초기 저서『담론, 형상』(Discours, Figure)은 담론의 기초가 되고 있는 언어학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출발한다. 여기서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언어학은 당연히 소쉬르의 언어학이다.
소쉬르 언어학의 특징을 한 마디로 집약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언어가 자의적(arbitraire)이라는 것이다. 언어의 자의성이란 "기표를 기의에 결합시키는 관계가 자의적"임을 뜻한다. 그런데 기표와 기의의 결합이 자의적으로 이루어지고 그것이 언어의 세계를 구축하는 모든 것이라면, 언어는 더 이상 현실 세계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세계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소쉬르에게 "언어 기호가 결합시키는 것은 한 사물과 한 명칭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과 하나의 청각 이미지"(강조는 인용자)인 것이다. 말하자면 소쉬르 언어학이 흔히 획기적인 전기를 이루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언어의 기표가 기의와 자의적으로 결합함으로써 더 이상 언어외적인 여분의 세계가 필요하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언어는 그 자체로 완전히 자족적인 세계인 것이다. 이 말을 뒤집어 보자면 언어 혹은 담론의 세계가 곧 세계 전체인 것이다.
그런데 리오타르가 보기에 이런 소쉬르의 논리에는 두 가지의 논리적 비약이 존재한다. 우선 그는 언어가 기표와 기의의 결합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그 외의 것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이 말 속에는 이제 언어가 더 이상 그것이 지칭하는 현실적 '지시대상'(le r f rent)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언어에서 기표(le signifiant)가 의미하는(signifier) 것은 그것이 지시하는 현실 대상이 아니라 그 기표에 대응하는 개념, 즉 기의(le signifi )일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언어가 지칭하는 현실 대상, 즉 '지시대상'은 실종되고 만다. 소쉬르의 논리에 따르면 언어화되지 않은 현실 세계란 불가지의 세계이며 모호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전통적인 언어학에서 전제하는 지시대상의 세계는 불가지의 세계인 것이며 언어학의 고찰 대상이 아닌 것으로 간주한다.
리오타르가 지적하는 소쉬르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지시대상을 알 수 없는 것으로 괄호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더 나아가 기의를 은근히 지시대상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논리적 비약은 기표로써 언어 기호를 구성하는 변별적 차이의 원칙을 의미론의 영역에까지 확장시키는 것으로 실행된다. 가령 기표인 '말'은 물, 살, 갈, 몰과는 다르다는 음운적 차원에서의 변별적 차이에 의해서 자신의 존재성을 갖는다. 소쉬르는 언어적 기호가 이웃하는 다른 기호들과의 차이에 의해서 그 값이 결정된다는 의미에서 그 기호의 값을 '가치'(valeur)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가치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처럼 언어가 다양한 어휘들의 체계 속에 공존하면서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가지는 교환가치인 셈이다.
음운학적으로 볼 때 언어 기호를 가치로 보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소쉬르 언어학이 가지고 있는 결정적인 난점은 가치를 음운론이 아닌 의미론까지 확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가치가 기표의 차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기의의 차원으로까지 확장된다는 것이다. 가령 '자동차'라는 기표의 뜻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지각하는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적 자동차와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휘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결정될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소쉬르의 텍스트 속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지 않지만, Ren Amacker의 언급에 따르자면 소쉬르에게 "가치-(의미화)-기의는 동음이어"로써 전제되고 있다. 리오타르는 소쉬르가 가치를 기표들 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개념으로 보면서도 또한 그것을 암암리에 기의들 자체에 적용된다고 보는 사실에 주목한다.
소쉬르가 가치의 개념을 이렇게 기의의 영역으로 확장할 경우 언어는 현실적 지시대상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고도 자족적인 세계를 구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의 자족적인 세계, 즉 소쉬르의 언어학이 만든 담론의 공간은 우리 인간이 지각하는 현실 세계의 깊이를 모두 제거해 버린다. 소쉬르는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의 불투명성과 깊이를 편편한 담론의 공간으로 환원시키고 만다. 그는 이러한 딜레마를 의식하면서도 그것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있다고 리오타르는 생각한다.
"구조에 대한 그의 견해는 모든 의미화를 데꾸파쥬(d coupage), 말하자면 어휘들 간의 간격의 체계 혹은 가치의 체계로 흡수해버리고 만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마치 수직성이 수평선과 대립하고 깊이가 표면에 대립하는 것처럼 의미화가 가치에 대립한다는 생각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자신의 연구를 언어의 구조에 제한하는 언어학자로 남아있는데 실패하게 만든 요소, 즉 기호가 갖는 깊이(l'epaisseur du signe)를 체계의 투명성(la tranceparence du syst me)으로 끌어들이려는 유혹은 실수나 소박함 이상의 것이다."(강조는 인용자)
그가 변별적 차이에 의한 가치의 개념을 단순한 음운적 기호(기표)의 원리에 국한시키지 않고 그것을 의미론적 영역까지 확장시키는 것은 의도적이거나 혹은 명시적으로 의도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미필적 고의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소쉬르는 스스로 곧잘 지시대상에 대해서는 미지의 것으로 괄호친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상 기호 자체를 지시대상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인간이 경험하는 심층적이고 다양한 지각의 세계를 편편한 언어의 세계로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리오타르는 소쉬르 언어학의 이러한 허구성을 담론의 세계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폭로한다. 그는 소쉬르의 언어학이 지시대상을 추방하고 그 사실을 은폐하려 하지만 결코 그러한 기획이 성공적일 수 없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한 폭로를 위해서 리오타르는 언어의 기능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의미활동'(la signification)과 '지시활동'(la d signation)이 그것이다. 소쉬르의 경우 언어의 기능은 의미활동으로 제한되어 있다.
담론은 언어들의 차이의 체계에 의해서 구성된다. 언어가 의미를 갖는 것은 오로지 담론 내에서다.
그러나 소쉬르의 언어학은 언어가 차이의 체계일 뿐, 그것이 언어 외부에 있는 어떤 대상을 지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가령 '자동차'라는 언어 기호는 현실 세계의 자동차라는 물질적 대상과 관계가 없는 것으로 전제되는 것이다. 하지만 리오타르가 보기에 이러한 사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자동차라는 기표는 그것의 특정한 개념인 특정한 기의와 결합되어 있지만 동시에 어떤 현실적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리오타르는 언어가 결코 지시대상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언어에서 사용되는 '지시사'(deixis)에 주목한다. 언어에서 여기, 지금, 나, 너와 같은 지시사는 여타의 언어 기호처럼 자신과 이웃하는 다른 언어 기호들과의 차이에 의해서 존립할 수는 없다. 반대로 여기, 지금, 나 등의 지시사는 그것이 지시하는 현실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만 드러날 수 있다. 가령 '여기'(ici)라는 말은 그것이 지시하고 있는 현실적인 공간과 관계하지 않고서는 의미를 확정할 수 없다. '나'(je)라는 인칭대명사의 경우에 이 사실은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인칭대명사 '나'는 다른 일반 명사들과는 달리 어떤 고정된 기의도 갖지 않는다. 말하자면 "'나'는 의미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현실 담론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의미를 갖는 <지표>(un indicateur)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나'는 담론 내에서 그 담론을 말하고 있는 주체를 지시한다. 따라서 '나'는 담론의 주체를 지시하는 것이지 결코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지시사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언어는 의미화의 과정만으로 완전무결하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리오타르는 언어가 결코 지시대상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Bennington의 지적처럼 여기서 리오타르의 논의를 프레게처럼 단순히 소쉬르에게 지시대상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그것의 복귀를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리오타르의 주된 관심은 의미화의 과정만으로는 현실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구체적인 경험을 결코 포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계와 인간의 관계는 언어적인 관계와는 다른 방식의 관계도 포함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지시적인 관계이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그런 지시적인 관계를 애써 배제하려 했지만 이미 담론 속에서도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가령 언어학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언어로 기호화할 수 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담론의 의미화가 모든 감각을 다 포괄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가령 이 나무가 푸르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푸른 색 자체를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현실적으로 푸른색에 대한 경험은 언어적으로는 표현될 수 없는 또 다른 경험이다. 인간은 언어적 방식 이외에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이 곧 지시작용이며, 언어로 포괄된 수 없는 경험적 세계가 바로 형상(la figure)인 것이다. 언어 혹은 담론이 세계의 표피만을 드러낼 뿐이므로 "언어가 그것(현실 세계의 사물-인용자)의 깊이를 구성할 수 없다"면 형상은 언어로 드러나지 않은 깊이의 세계이다. 따라서 형상은 언어처럼 투명하지 않으며 항상 우리에게 불투명한 것으로 남겨지며 의미화를 거부한다.
3. 두 가지 부정과 형상의 반변증법적 성격
리오타르가 소쉬르의 언어학을 비판하는 핵심은 결국 언어학이 불투명하고 울퉁불퉁한 현실의 지각 세계를 담론이라는 편편한 공간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담론의 공간 속에서 감각의 이질적인 불투명성은 제거되어버리고 서로 등가적인 교환관계를 이루는 언어체계만 남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소쉬르의 언어학은 마치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 관계처럼 사물들을 기호로 동일화시키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리오타르가 소쉬르를 비판하고 있는 점은 바로 이것이다.
얼핏 보면 이러한 평가는 부당한 듯 하다. 왜냐하면 하나의 기호는 다른 기호들과의 변별적 차이에 의해서 자신의 가치를 갖는다는 소쉬르의 견해는 동일성의 논리가 아닌 차이를 옹호하는 논변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타자의 부정을 통해서 자신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변별적 차이의 원칙인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코 진정한 부정의 관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분명 소쉬르에 따르면 하나의 언어가 다른 것이 아님(가령 '말'은 몰, 살, 갈, 꽥 등이 아님), 즉 다른 것에 대한 부정을 통해서 존재한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결코 타자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말'의 존재는 자신이 부정한 바로 그 타자(몰, 살, 갈, 꽥 등)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타자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타자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오타르는 두 가지의 부정(n gation)을 구별한다. 그 하나는 이미 살펴 본 "언어의 체계 내에서 작용하는 부정"이다. 편의상 이런 유형의 부정을 '언어학적 부정'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언어의 체계 내에서 작용하는 이런 부정은 등가체계 내에서 작용하는 부정이다. 그것은 자신과 다른 타자를 부정함으로써만 자신을 드러내는 그런 부정적 관계이다. 이러한 언어학적 부정은 사실상 타자에 대한 부정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에 타자가 부정된 것이 아닌 자신의 존립 근거가 된다. '말'은 몰, 살, 갈, 꽥 등이 없으면 '말'로써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그것들은 자신에게서 부정된 또 다른 자신일 뿐이다.
리오타르는 언어학적 부정을 헤겔의 변증법과 연관시킨다. 한 눈에 보아도 언어학적 부정은 쉽사리 헤겔의 변증법과 유사하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변증법은 애초에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 제시되었던 직접적인 것이 사실상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존립하는 매개된 존재로 상승하는 과정이다. 그럼으로써 변증법은 타자와 자신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곧 외면적인 존재로 간주되었던 타자의 존재가 결코 외면적인 것이 아닌 자신의 존재의 계기를 이루는 내적인 존재로써 통일을 이루게 되는 화해의 과정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담론의 논리를 대변하는 핵심 인물로써 헤겔이 리오타르의 표적이 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는 비교적 상세하게 헤겔의 『정신현상학』첫 장인 '감각적 확신'(die sinnliche Gewi heit)의 논의구조를 분석한다. 여기서 리오타르의 주목을 끄는 것은 감각적 확신에서헤겔이 지금, 여기, 이것 등의 지시사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헤겔은 인간 정신(여기서는 의식)의 가장 원초적인 양태를 감각적 확신으로 보았는데, 그러한 의식에 상응하는 세계의 양상은 가장 직접적인 감각적 세계일 것이다. 그러한 감각적 확신의 대상은 아무런 규정도 갖지 않는 텅 빈 것으로써 그저 '개별적인 것'(das Einzelne)에 불과하다. 그리고 개별적인 것은 어떠한 규정성도 갖지 않으므로 '지금 여기에 있는 이것'으로 규정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런데 헤겔에 따르면 고립된 개별자를 지시하는 '이것'은 이미 매개된 보편적인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런 전도가 가능할까? 예를 들어 '이것'이라는 규정을 구성하고 있는 계기들인 '여기'와 '지금'을 살펴보자. 헤겔에 따르면 '지금 여기에 있는 이것'이 감각적 확신의 대상의 직접성을 표현하는 유일한 규정인데, 사실상 지금과 여기는 직접적인 규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이라는 말은 밤에 지금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밤을 지시하지만 낮에 지금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낮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어떤 개별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보편적인 것이고 매개된 것이다. '여기'라는 규정 역시 마찬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결국 헤겔에 따르면 감각적 확신의 대상인 직접적인 존재를 지칭하기 위한 지금, 여기, 이것 등의 지시사는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언어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감각적인 대상으로 주어진 것은 언어적 규정을 피할 수 없으므로 이미 보편자인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러한 변증법적 과정은 언어학적 부정을 포함한다. 가령 헤겔은 지금은 밤이 아닌 것으로써만 낮으로 규정될 수 있으며, 또한 낮이 아닌 것으로써만 밤으로 규정될 수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지금은 항상 '부정적인 것 일반'(ein Negatives berhaupt)으로써만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헤겔에 대한 리오타르의 비판은 헤겔이 말할 수 없는 것, 즉 감각적 세계의 대상을 언표가능한 것으로 환원시킨다는 데 있다. 헤겔은 언표불가능한 것을 보편성에 의해서 지배되는 의미론의 영역 내에 위치시키려는 시도인 것이다. 감각적 확신의 대상인 직접적인 존재는 의미화작용을 통하여 언표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지시될 수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이것'이라는 언어적 규정은 대상에 대한 의미규정이 아니라 일종의 지시작용일 뿐이다. 헤겔 역시 그러한 지시적 규정으로부터 출발하였지만 어느 순간 그것을 언어학적 부정의 매커니즘을 통하여 의미규정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결국 감각적 확신에 나타난 헤겔의 변증법적 부정이 보여주는 것은 언어로써 언표할 수 없는 지시적 대상을 언어적 차원으로 끌어들여서 그 흔적을 지워버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헤겔의 감각적 확신의 대상은 이미 감각적 대상이 아닌 언어적인 대상에 불과하다. 이렇게 언어학적 부정은 감각적 세계가 가지고 있는 원천적인 가능성을 배제시키고 언어라는 보편자의 틀에 가두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리오타르는 이러한 언어적 부정 혹은 변증법과는 다른 부정을 제시한다. 그는 이 다른 부정을 언어 체계가 아닌 "가시적인 것(le visible), 거리, 공간의 구성적 공간화 속에 함축된 부정, 혹은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경험되는 부정"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부정은 언어학적 부정과 달리 언어가 아닌 회화 속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고 리오타르는 설명한다. 가령 모네의 그림이 묘사하는 르왕 성당의 모습은 항상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그런 성당의 모습이 아니라 오로지 지금 존재하는 지각의 대상이다. 이것은 언어적 부정으로 환원될 수 없다. 왜냐하면 화가에게 마주치는 대상은 언표될 수 있는 것이 아닌 어떤 다른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그 자체일 뿐이다. 이것은 타자의 모든 규정을 거부하는 일종의 절대적 부정이다. 회화가 보여주는 것은 이미 기호화된 보편적 세계가 아니다. "회화가 보여주는 것은 만들어지는 과정 중에 있는 세계이다."
이러한 회화적 부정은 언어 체계에서 나타나는 동일성의 원칙을 원초적으로 거부한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회화적 공간 혹은 가시적인 것은 비언어적인 영역, 즉 '형상'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회화가 그러하듯 형상은 언어를 거부한다. 이는 곧 형상의 세계에서는 언어학적 부정이나 변증법이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형상은 그 자체로 이질적으로 불투명한 공간인 것이다.
4. 선 vs 글자 - 형상의 우위
형상과 담론의 구별은 '글자'(la lettre)와 '선'(la ligne)이라는 다소 은유적인 리오타르의 구별에서도 잘 드러난다. 리오타르가 제시하는 글자와 선이라는 개념은 동일한 것의 상이한 양상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글자와 선은 한 공간에 같이 겹쳐있으면서도 서로 완전히 다른 차원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 글자는 가독성(la lisibilit )에 조응하는 것이라면, 선은 조형성(la plasticit )에 조응한다. 가령 어떤 텍스트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그 속에 쓰여진 글을 읽을 때 그것의 조형성에 주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조형성을 억압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선으로 이루어진 글자를 특정한 의미로 파악하려면 글자의 선을 보지 않아야 한다. 이를테면 각기 다른 사람이 쓴 '가'라는 글자들은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이든 동일한 '가'로, 동일한 '의미'로 읽힌다. 말하자면 글자는 그 조형적인 차원을 무시하고 동일한 의미를 갖는 기호로 환원할 때 성립한다.
하지만 거꾸로 선의 조형성을 지각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을 글자로 보지 않아야 할 것이다. 어떤 텍스트를 담론으로 읽을 경우 그 속에 담겨진 형상들은 곧장 기호화되고 만다. 가령 글자로 쓰여진 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는 글자들의 조형성에 주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억압한다. 이러한 억압은 단순히 글씨로 이루어진 텍스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선과 글자의 대립을 확장시키자면, 조형 예술 역시 이제껏 선이 아닌 글자에 의해서 지배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리오타르는 글자를 담론적인 것으로, 또 선은 '형상적인 것'(le figural)으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보자면 리오타르가 보기에 모더니즘 이전의 모든 회화는 조형성의 원칙이 아닌 담론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즉 조형 예술에서 선으로 간주되었던 것들이 사실은 글자였다는 것이다.
중세시대의 회화를 보면 이러한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중세시대의 성화들은 비록 조형적 요소인 선과 색으로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지만 그 속에 드러난 조형들은 형상이 아닌 일종의 언어들이다. 왜냐하면 중세시대의 성화는 원천적으로 성경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것에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세시대의 조형예술에서 도상적 기표는 하나의 텍스트'로써' 구성된다." 중세시대에 그려진 그림들 속에 있는 모든 도상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회화적 공간을 갖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라는 텍스트에 의거해서만 읽힐 수 있는 기의로 해석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그 그림들 속에서 "이미지와 텍스트가 반영하고 있는 실제적 기의는 성경의 역사인 것이다."
중세의 회화는 이미 정해진 스토리를 따라 읽어나가는 일종의 담론적 공간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한 형상에서 다른 형상으로 가면서 말해지는 스토리는 우선 회화가 독자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을 제거"해 버린다. 그러므로 중세 회화에서 담론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난 순수한 회화적 이미지를 기대하는 것은 힘들다.
회화 속에서 조형적 이미지들이 신학적인 내러티브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한 것은 원근법의 탄생과 더불어서이다. 리오타르는 회화에 최초로 원근법의 원칙을 실행한 두치오와 마사치오를 이야기의 공간이 아닌 순수한 회화적 관람을 위한 새로운 조형적 질서의 창시자들로 생각한다. 그들은 비록 중세의 성화와 동일한 주제의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이미 그들의 회화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그 이야기가 아니라 조형성 자체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이야기에 종속된 담론의 공간이 아닌 비로소 '회화적 공간'(un espace pictural)을 탄생시킨 창시자들인 것이다. 가령 "마사치오의 조형예술에서 기표는 더 이상 텍스트처럼 쓰여지고 있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독립된 조형적 공간을 지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리오타르가 보기에 그들의 회화가 신학적 스토리로부터 탈피했다고 해서 담론적 성격을 완전히 벗어나서 순수한 형상의 세계로 들어 온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회화가 비록 신화적 주제로부터 벗어났지만 원근법이라는 새로운 공리체계의 지배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두치오나 마사치오가 창출한 공간은 외부의 이야기, 즉 신화로부터 독립된 회화적 공간이지만 그것은 일종의 '재현적 구성'(la constituition de la repr sent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회화는 재현적 구성의 원리라는 새로운 담론 체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 회화에서 "과학(혹은 기하학-인용자 첨가)이 기의의 자리를 차지하는 새로운 언어인 것이다." 이렇게 탄생된 "텍스트들은 구체적인 삶의 내용을 추상화시키고 일종의 공리 체계를 구성하게 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형식화는 이제 모든 종류의 서사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제공되는 것과 같다."
리오타르가 보기에 선이 텍스트를 이루는 글자가 아닌 선으로써 자리매김을 하게 되는 것은 근대 회화와의 급속한 단절을 추구한 모더니즘 회화에서부터다. 그는 클레의 데생을 예로 들어서 그것이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가 보기에 클레의 데생은 모든 사물을 표현할 때 지켜야 하는 순수한 기하학적 법칙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클레의 데생은 오히려 그런 것들을 위반하고 있으며, 그의 선은 기하학적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
이렇게 보자면 비로소 선이 글자가 아닌 선으로써 자리매김을 하게 되는 것은 모더니즘 예술을 통해서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아방가르드를 위시한 모더니즘의 회화가 모든 언어적 규정을 거부하고 언표될 수 없는 순수한 이미지를 표현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비록 빈번하게 담론과 형상이 서로 이질적이면서도 겹쳐져 있는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가 추구하는 순수한 형상은 바로 담론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이다.
따라서 리오타르가 보기에 이러한 형상을 추구하는 예술은 그것이 현실 세계의 담론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측면에서 탈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갖는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모더니즘 예술은 담론을 위협하고 전복할 수 있는 요소로써 정치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리오타르가 담론이 아닌 형상에 부여하는 정치적 특권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형상의 이러한 정치적 기능은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일종의 무기력으로부터 주어진다. 형상은 담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때문에 자신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형상이 의사소통의 불가능성을 전제로 한다는 뜻이다. 리오타르가 형상이 담론과 완전히 단절시키지 않는 방법은 담론이 스스로 자신의 한계로써 형상을 언표하는 것이 아닌 지시하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형상에서 의사소통의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되고 만다. 형상에 부여한 탈이데올로기적 특권이 오히려 그것의 무기력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 사실은 형상이 가진 특성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리오타르는 담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 진 조형적 세계 - 가령, 클레의 데생 -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에서 의미가 현존하는 방식은 언어에 길들여진 정신이 보기에는 '불투명성'(la opacit )으로 보인다. 눈이 형태에 의해서만 그 의미를 파악하고, 또한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에너지를 교류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무한한 노력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조형적인 선, 즉 형상은 언어와는 완전히 단절된 이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의미를 읽어낼 수가 없다. 다만 눈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눈으로 봄으로써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노력이 필요하다. 결국 이 말은 의미의 파악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읽혀질 수 있다. 한 발 후퇴해서 그 의미를 파악했다고 치자. 그러나 그렇게 파악한 의미를 담론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그것은 전달될 수 없다. 말하자면 의사소통의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은 리오타르가 형상의 세계를 언어적 세계가 아닌 무의식에 세계와 결합시키고 있는 데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때 리오타르의 무의식은 라캉처럼 언어화되어 있는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리오타르는 그런 라캉의 입장을 철저하게 비판하며 무의식의 세계를 언어가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꿈이란 형상과 마찬가지로 언어가 배제된 순수한 공간이다. 그는 프로이드가 『꿈의 해석』 마지막 부분에서 '꿈작업'(Traumarbeit)와 '꿈사유'(Traumgedanke)을 구분한데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리오타르가 본 핵심은 "꿈작업은 사유하지 않는다."(Le travail du reve ne pense pas)는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꿈의 활동이 드러내는 표현 방식은 담론적인 것과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꿈은 욕망의 (언어적인) 발화(parole)가 아니라 그것의 활동일 뿐이다."(괄호안은 인용자 첨가)
순수한 꿈의 활동인 꿈작업은 결코 사유가 개입되지 않는 것으로써 프로이드가 말하는 '1차과정'(processus primaire)이 지배하는 영역이다. 1차과정은 이른바 쾌락법칙(principe de plaisir)에 상응하는 것으로 욕망은 어느 한 특정대상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부유한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욕망은 언어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이것이 바로 무의식의 활동으로써 꿈인 것이다.
그런데 리오타르가 보기에 라캉은 순수한 꿈의 활동을 꿈사유와 혼동하고 있다. 그것은 순수한 꿈이 아닌 이미 기억과 사유 활동 등 일정정도 자아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전의식의 활동이다. 말하자면 이곳에서는 '2차과정'(processus secondaire)이 발생한다. 이미 의식의 개입이 이루어지고 욕망은 통제가 이루어짐으로써 대상은 언어로 가공된다. 따라서 꿈의 사유는 이미 의식적 사유와 동종의 것인 셈이다.
라캉이 무의식과 전의식을 혼동하고 이러한 구별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는 것은 그의 텍스트 곳곳에 드러난다. 그것은 무의식의 활동으로서의 꿈이 이미 언어활동과 동일한 것이라는 가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은 라캉주의자인 Laplanche와 Pontalis에게서 보다 명시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가령 그들은 자신들이 편찬한 『정신분석학 사전』(Vocabulaire de la Psychanalyse)에서 그들은 1차과정과 2차과정의 대립을 쾌락법칙과 현실법칙의 대립과 상응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1차과정을 "고전적 심리학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의미의 부재(une absence de sens)로 특징지을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의미)의 끊임없는 미끄러짐(un glissement incessant de celui-ci)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강조는 인용자)고 명시한다. 그들이 말하는 요지는 결국 무의식의 세계란 언어가 배제된 세계가 오히려 언어의 본질적인 양상을 드러내는 영역이다. '기표 내에서 기의의 끊임없는 미끄러짐'이 라캉이 말하는 언어의 가장 본질적으로 심층적인 표현이라면, 그들이 보기에 바로 1차과정이야말로 언어의 심층적인 영역인 것이다.
리오타르는 바로 이런 점에서 라캉의 입장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는 프로이드의 텍스트들을 애써 인용하면서 무의식은 결코 담론의 세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리오타르가 이렇게 무의식의 세계와 언어를 단절하는 것은 분명한 의도를 담고 있다. 그것은 형상이 무의식의 세계와 통하는 것이며, 어떤 담론도 배제된 것이라는 원칙을 확인하는 것이다. 순수한 꿈과 같은 형상의 텍스트는 언어적인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적인 텍스트이며 그것은 담론적 텍스트처럼 '읽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지시될 수 있을 뿐이다.
리오타르가 보기에 현실 세계가 전체가 담론으로 간주될 때 오히려 현실의 풍부함이 상실될 뿐만 아니라 담론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날 공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형상을 언어가 완전히 배제된 순수한 탈이데올로기적 공간으로 남겨둬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그럼으로써 형상은 언제나 담론을 위반하고 허물어뜨릴 정치적 가능성을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상이 처음부터 언표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 것이라면 그것은 모든 담론을 무기력하게 하는 것 이외에는 어떤 정치적 가능성도 갖지 못한다. 그것은 리오타르가 담론과 형상을 철저하게 대립시킨 결과이다.
5. 형상과 담론의 결합으로써의 회화적 글쓰기?
이렇게 담론과 형상은 철저하게 이질적인 것으로 구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오타르는 결코 그것들이 결코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원래적인 정의에 따르자면 형상은 담론의 외부(la ext riorit du discours)이다. 말하자면 형상은 담론으로부터 철저하게 분리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오타르는 우리가 형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오로지 "담론 내에서만" 가능하다고 언급한다.
이런 혼란을 해결하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형상을 담론의 외부도 내부도 아닌 그것의 '가장자리'(혹은 '경계', le bord)로 정의하는 것이다. 경계는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지만, 동시에 안이기도 하고 바깥이기도 하다. 리오타르 역시 명시적으로 "형상은 (담론의) 바깥이며 동시에 안이다."(괄호안은 인용자)라고 말하고 있다. 리오타르는 이런 방식으로 담론에서 배제된 형상을 다시 담론 속으로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형상이 담론의 경계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의 존재 방식은 오로지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형상이 담론 속으로 완전히 소진되지 않고 오히려 담론의 내부에서 그것을 교란하며 비틀고 때로는 전복시키는 담론 체계의 위반세력, 즉 바깥세력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형상은 담론의 허위성을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성을 확인한다. 그것은 뒤집어 보자면 담론이 자신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을 뜻한다.
리오타르는 원래 형상은 언어적인 대상보다는 회화적인 대상에 가까운 것이라고 하였다. 회화는 언어처럼 대상을 의미화하지 않고 그저 보여주기(지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화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리오타르는 언어를 통해서도 충분히 회화와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언어를 통해서 어떤 담론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담론체계의 한계를 보여줌으로써 담론의 외부에 있는 어떤 것, 즉 형상을 지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글을 가지고 그리는 것' 즉 회화적인 글쓰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회화적인 글은 그 자체 언어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이미 언어가 아닌 형상에 속하는 것이다. Carroll은 이것을 담론도 형상도 아닌 '담론-형상'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이중적 성격의 "대상은 두 영역의 차이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자체에 거주하면서 그것을 드러내며 근본화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대상은 담론속에 거주하고 있지만 담론 자체의 한계를 드러내는 메타적인 담론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비판적 담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리오타르는 이러한 회화적 글쓰기, 형상적 담론, 혹은 담론 속에 있으면서도 담론적이지 않은 그러한 담론의 가능성을 말라르메에게서 발견한다.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라르메는 산문적인, 즉 의사소통을 위한 기능을 가진 언어를 완전히 벗겨낸다. 그리하여 그는 언어에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힘(pouvoir), 즉 읽거나 이해되는 것이 아닌 <보일>(vu) 수 있을 뿐인 힘을 부여한다. 이 힘은 형상에 속하는 것이지 결코 기표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리오타르가 보기에 말라르메의 시는 산문언어가 닿을 수 없는 범위를 제시함으로써 그것의 불가능성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그의 시는 산문언어가 닿을 수 없는 범위를 제시함으로써 그것의 불완전성을 보여주는 일종의 메타적인 성격을 갖는다. 즉 담론의 한계 자체를 보여주는 비판적 담론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리오타르는 거듭 말라르메의 시를 일종의 '급진적 시'(la po sie radicale)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말라르메는 자신의 시 작업이 갖는 메타적인 기능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말의 두 가지 상태를 구분하였다. 하나는 '거칠고 직접적인 상태'(le tat brut ou imm diat)이며 다른 하나는 '본질적인 상태'(le tat essentielle)이다. 이때 본질적인 상태란 일상적인 언어로써 의사소통을 위해 체계화된 언어이다. 반면 거칠고 직접적인 상태는 의사소통으로부터 단절된 언어이다. 말하자면 산문적인 언어가 의사소통을 추구한다면 시는 거칠고 직접적인 상태의 표현이다. 여기서 그는 '순수시'(po sie pure)의 개념을 상정하게 된다. 이 순수시란 의사소통을 위한 산문이 아닌 언어의 순수한 형상성을 지향한다. 이런 의미에서 말라르메의 순수시는 리오타르의 용어법에 따르자면 '급진적인 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점이 있다. 그것은 의사소통을 지향하는 산문과 달리 순수시는 그러한 의사소통 자체를 거부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리오타르가 말하는 비판적 기능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리오타르는 여기서 형상적 담론, 즉 회화적 글쓰기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그것에 비판적, 급진적 성격을 부여하고 있지만, 그러한 기획은 결코 성공적이지 못하다. 왜냐하면 담론 자체가 급진적인 성격을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어떤 급진적 내용을 포함해서가 아니라 단지 담론 자체를 위반하고 그 존재성을 위협하기 때문인 것으로 가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자면 담론의 외부 혹은 그것의 메타 담론으로써 형상은 어떤 내용도 결여한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 단지 담론 외부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회적 규정이나 이데올로기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리오타르는 형상의 이런 순수한 측면 때문에 그것이 정치적인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보았으며, 동시에 미학은 정치적인 담론의 가장 심층적인 실천의 장소로 상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리오타르의 형상은 정치적이지 못하다. 비록 담론과 얽혀있다 하더라도 원칙적으로 형상은 모든 담론성이 제거될 경우에만 드러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회적 규정도 갖지 못한다. 따라서 형상은 이미 역사적 규정성을 상실한 초역사적인 어떤 것, 즉 초월적인 것으로 전제된 것이다.
주제 분야 : 프랑스철학, 미학, 리오타르
주제어 : 형상, 담론, 반변증법, 선과 글자, 회화적 글쓰기
<한글 요약>
이미지의 정치학 - 리오타르의 형상/담론 이분법에 대한 고찰
박영욱 (고려대)
리오타르는 예술이 개인의 내면적 주관을 표현하는 도구가 아닌 정치적 공간으로 보았다. 그는 예술의 내용에서가 아닌 형식의 측면에서 그 정치적 의미를 찾고 있다. 하지만 그가 예술에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형식은 어떤 특정한 질서가 아니다. 오히려 모든 내용적 규정을 벗어난다는 측면에서 내용과 대립된 형식성이다. 모더니즘 회화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술은 본질적으로 어떤 담론적 규정도 넘어선 이미지의 차원을 지니고 있다. 리오타르는 그의 초기 저서 『담론, 형상』에서 이러한 언어적 규정을 벗어난 이미지를 형상(figure)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형상과 담론을 예리하게 대립시키면서, 기존의 언어학이 가진 한계를 예리하게 지적한다. 나아가 '변별적 차이'에 기초하고 있는 소쉬르의 언어학에 대한 그의 비판은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선과 글자의 대립을 통해서도 드러나듯이 리오타르는 형상(이미지)과 담론(언어)을 완전히 이질적인 것으로 구분한다. 그가 예술의 정치적 기능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예술이 어떤 언어적 규정(즉 이데올로기)으로부터도 벗어난 형상의 측면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회화적 글쓰기'라는 담론과 형상의 모호한 절충은 설득력이 없으며 자신의 논리적 비일관성만을 드러낼 뿐이다.
La politique de l'image - la dichotomie de Lyotard entre la figure et le discours
Park Young-Uk (Korea Univ.)
Lyotard ne consid re pas l'art juste comme un milieu simple pour exprimer son int rieur mais comme une sc ne politique. Il recherche la signification de l'art pas dans son contenu mais sous ses formes. Mais en r alit la forme qu'il donne art n'est pas une norme sp cifique. Ce que signifie il est qu'il est au del de toutes les d finitions. Comme montr dans les pr tendues peintures modernis ves, l'art a essentiellement un aspect ce qui est au del de toutes les d finitions discursives. Cet aspect peut s'appeler l''image '. Dans son livre Discours, figure, Lyotard d finit cette 'image 'en tant que 'figure '. Il d limite brusquement entre la figure et le discours. Et il pr cise les limites de la linguistique Sassurienne. Sa critique contre la linguistique de Saussurean bas e sur le 'l' cart diff rentiel' m ne la critique contre la dialectique de Hegel. Comme nous pouvons impliquer de sa discrimination entre la 'ligne 'et la 'lettre ', il trace une ligne claire entre la figure (image) et le discours (langue). videmment, selon Lyotard le caract re politique de l'art provient de sa nature m me que l'art peut tre exempt de toutes les d finitions discursives sociales. Par cons quent son compromis ambigu entre la figure et le discours, le concept de 'peindre avec les mots n'est pas persuasif. Ce qui est encore plus mauvais, il montre la contradiction dans sa dichoto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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