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들뢰즈의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Le Pli, Leibniz et baroque)

나뭇잎숨결 2022. 2. 12. 10:28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Le Pli, Leibniz et baroque, 1988)?

- 질 들뢰즈, 이찬웅, 문학과 지성사, 2004(원P.192, 번272)

 

 

 

 

라이프니츠: 주름들 안의 지각, in 들뢰즈 "주름"

 

제7장 주름들 안의 지각 (VII. La perception dans les plis)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Le Pli, Leibniz et baroque, 1988)?

 

들뢰즈, 이찬웅, 문학과 지성사, 2004(원P.192, 번272)

 

* 라이프니츠는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에서 에피스테메(진상)와 독사(허상)라는 두 영역을 긍정하고 싶은 것이다. 먼저 에피스테메로서 수학적 물리적 연역체계의 완전성 또는 완결성을 긍정하고 싶었고, 그리고 독사라고 여겼던 현실의 세계를 부정할 수 없기에, 새로이 전개된 미분의 내용(미세부분)으로 보아 운동적(에너지) 심리적(영혼) 체계도 현존할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둘을 플라톤이 비유로 놓았듯이, 그는 이 둘 사이에 현실적 유형들을 층위로 놓았을 것 같다. 위층과 밑층 사이에 있는 다양한 유형들에서, 즉 미분소들에서 개념을 성립시키고자 하였고, 그리고 위층은 밑층없이 현존할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하였다. 우리로서는 밑층을 아페이론으로 위층의 극한을 이데아로 보는데, 라이프니츠는 밑층의 극한 미분의 극한으로서 미분소로 보고, 위층의 극한을 우주로 보았을 것이다. 이 들다가 그의 개념으로 모나드인데, 극미 미분소도 모나드, 우주 전체도 모나드라고 보는 측면에서 우주의 총량은 항상적이라고 보았을 것 같다.

 

이 밑층은 겹으로 또는 접혀져서 이중적으로 겹주름으로 현실 속에서 표상된다. 그런데 상층은 추억처럼 겹쳐지되 겹주름이 아니라 하나의 결로서 펼쳐질 주름이라는 것이다. 두 층에 각각의 완결성을 부여하는 선가정(모나드 이론) 때문에, 영혼을 벡터로 물질을 스칼라로 설정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러한 추론은 물질과 영혼의 소통을 만들었지만, 또한 둘 사이에 이웃하지만 닮지는 않는다는 데 이른다.

 

두 층위(이층집)의 구별에서 암묵적으로 영혼에게 우선성을 주었고, 물질 속에서 작동하는 양식들(스탈일)도 주었지만, 모나드라는 창없는 단자라는 명제의 정립 때문에, 영혼은 갇혀있을 수밖에 없고, 암묵적으로 신의 지도하에 놓이게 된다. 자유는 신의 지도하에 자유일 수 밖에 없으리라.

 

스피노자와 달리, 라이프니츠는 두 층으로 플라톤의 비유방식을 따라가면서도 둘 사이의 법칙과 지위가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형이상학적 상층과 현실적 밑층이다. 그럼에도 수학적 미분 계산 방식으로 상층은 완결 아닌 무한정으로 보아, 영혼은 위상적이라 할 수 있고, 물체에서 미분은 비율의 결정이 향한 방식이 정해져 있어서 유형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은 사실상 들뢰즈가 니체를 설명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그러면 스피노자에서는 자연의 권능이 위상적이고 속성들이 현실의 양태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유형적이다. 둘 사이에서, 스피노자에서는 신체의 감화와 양태가 내적 힘의 과정에서 생성되는 것인데 비해, 라이프니츠에서는 신체와 영혼을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위계를 정하고, 따라서 신체 없는 영혼을 만들면서도, 위계의 상위에서(바로크의 이층집에서) 영혼을 자유롭게 하려는 의도에서 미분비 내용에 따른 모나드들 각각의 자율성을 부여하였고, 영혼과 천사가 더 자율성을 지닌 모나드가 되어버렸다. 바로크 성당의 높이에서 자유, 20세기 화가들에서 주름들 위에 표현하는 화가의 창의성, 조각가들의 프락탈과 같은 미소 변이의 변곡들을 이용한 창조성 등은 물질 기반 위에서 창조적 작품을 창안하는 영혼의 자유란 측면을 잘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자연 속에서 권능과 함께하며 감화(감응과 감동)로 인민들을 함께 양태로 끌어올리려는 스피노자와는 다른, 지식 엘리트의 측면이 라이프니츠에게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스피노자에서 표현은 발생적 생성적인 것으로 보이며, 생성된 양태들이 개체인데 비해, 라이프니츠에서 모나드들 각각이 이미 무수히 미세한 지각 요소들의 혼성(composant)[표현지대]이며, 이 요소들의 조합에서 개체와 개념화작업이 성립한다. (53RMJ+TLC)

 

<내가 그때 얘기 한 것처럼 그 무한정자의 원인(aitia)으로서의 성격이 방황해(errant). 방황하는 원인(planômenê aitia)은 방황해. 그런데 원인은 확실해야 돼. 그렇지만 여기서는 충족이유율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523) [무한정자가 장소가 아니다. 장소란 무한정자가 이데아와 첫 접촉하는 장소(공간)이다.] - 박홍규: "「고별강연(1984)」 검토(4)"(1989, 02)>

 

이 충족 이유율이 성립하지 않은 “플라노메네 아이티아”는 우연(hasard)의 위상이다. [이점을 강조하고 사유를 확장하면, 들뢰즈의 니체에서 주사위 놀이와 상응할 것이다.] 스피노자와 벩송에서는 권능의 작동(puissance d’agir)이 실재하며, 존재론의 의미에서 보면 정지가 아니라 운동이며, 표현의 방식에서 보면 관념(이데아)이 아니라 지속이며, 형이상학적으로 공간이 아니라 시간의 위상이다. 그럼에도 정지와 운동, 관념과 지속, 공간과 시간의 두 쌍들은 모순관계나 대립관계라기보다, 방향의 연관을 논의해야 할 것이다. 인식적인 측면에서 상층에서 심층의 방향에는 속좁은 이성(지성)의 기하학적 사고가, 심층에서 상층으로 풀려가는 생명적 사유가, 즉 두 방향이 성립한다. 생명의 사유(작동)이 먼저이고, 반성적 또는 회고적으로 기하학적 사유를 한다. (53SKI)

 

무한정자의 흐름에서 파가 넘실된다. 파에는 마루와 골이 있다. 일반적으로 사건을 다루는 것은 마루의 것이고 골은 소멸한다고 여긴다. 둘 다 지나간 자국의 양면이다. 평등은 골로부터 마루로 위계질서는 마루로부터 골로 간다. (53SKI)

 

# 제7장 주름들 안의 지각 155 - VII. La perception dans les plis 113

 

L’exigence d’avoir un corps – Première étape de la déduction: du monde à la perception dans la monade – Les petites perceptions: l’ordinaire et le remarquable – Raooorts différentiels - Ré capitulation des singularités - Mécanisme physique de la perception hallucinatoire – Poussières et plis dans l’âme – Deuxième â étape: de la perception au corps organique – A quoi la perception “ressemble”-t-elle? Organes et vibrations: mécanisme physique de l’exitation – Replis de la matière – Le status du calcul / 신체 갖기라는 요구 – 연역의 첫째 단계: 세계에서 모나드 안의 지각으로 – 미세지각들: 평범한 것과 특별한 것 – 차이적 관계 – 특이점에 대한 요약 – 환각적 지각의 정신적 메커니즘 – 영혼 안의 먼지와 주름들 – 둘째 단계: 지각에서 유기적 신체로 – 지각은 무엇을 닮았는가? - 기관들과 진동들: 자극의 물리적 메커니즘 – 물질의 겹주름 – 미분적 지위 -

 

§7.1. 신체 갖기라는 요구 L’exigence d’avoir un corps [신체가 있다는 필수]

 

나는 하나의 신체를 가져야만 한다.이것은 정신적 필요성, ‘요구’이다. 첫째로 나는 신체를 가져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내안에는 어두운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첫째 추론에서부터 위대한 독창성을 보여준다. .. [둘째로] 반대로 정신은 어둡고, 정신의 바닥은 컴컴한데, 신체를 설명하고 요구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어두운 본성이다. (113, 155)

 

우리의 일차적 물질은 연장에 대한 요구일 뿐만 아니라. 저항 또는 대형에 대한 요구이며, 그리고 우리에게 속하는 신체를 갖기라는 개체화된 요구이기도 하다. (113, 156)

 

우리가 신체를 갖기 때문에 우리 안에 애매한 것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애매한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신체를 가져야만 한다. 데카르트의 자연학적 귀납을 라이프니츠는 신체의 정신적 연역으로 대체한다. (113 156)

 

§7.2. 연역의 첫째 단계: 세계에서 모나드 안의 지각으로 Première étape de la déduction: du monde à la perception dans la monade

 

그러나 이 첫째 추론은, 모순되는 듯 보이면서도 훨씬 더 독창적인 다른 추론에 자리를 내준다. 이번에는, 우리가 신체를 가져야만 하는 이유가 우리의 정신이 명석 판명한 특권화된 표현지대를 갖기 때문이다. 이제 명석한 지대가 신체를 갖도록 요구한다. 라이프니츠는 내가 명석하게 표현하는 것은 바로 “내 신체와 관계”를 맺고 있는 그것이라고 말하는 데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113, 156)

 

그럼에도 여기에는 어떤 관점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 인과성의 역전이 있는데, 그러나 이것 때문에 우리가 연역의 진정한 질서를 복원하지 못해서는 안될 것이다. 1) 각 모나드는 독특하고 비물체적이고 이상적인 사건들 몇몇을 압축하는 게 이 사건들이 아직은 신체를 작동시키지 않는다. ... 2) 모나드 안에 원초적 술어들로서 포함된 이 독특한 사건들은 이 모나드의 명석한 표현 지대, 즉 ‘구역’을 구성한다. 3) 사건들은 이 모나드에 속하는 신체와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그리고 이 신체에 직접적으로 작요하는 많은 신체들 안에서 구현된다. 간단히 말해, 각 모나드가 신체를 갖는 것은, 그것이 명석한 지대(une zoon claire)를 갖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 지대는 신체와 연관을 구성하는데, 주어진 연관이 아니라 발생적 연관을 구성하며, 자신의 고유한 “관계항(relatum)”을 낳는다(생장한다). (114, 156-157)

 

우리는 두 가지 어려운 점에 직면하게 된다. 왜 신체를 가져야 한다는 요구는, 어떤 때는 애매함과 모호함 안에서 수동성의 원리 위에 정초되지만, 또 어떤 때는 명석 판명함 안에서 우리의 능동성 위에 정초되는가? ... 아르노(Arnauld, 1612-1694)가 말했듯이, 내 신체의 모든 움직임은 단지 애매하게 인식될 뿐인데, 어떻게 내가 명석하고 판명하게 표현하는 것이 내 신체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114, 157)

 

각 모나드에 고유한 특이점들은 모든 방향으로 향하면서 다른 모나드들의 특이점들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각 모나드는 세계전체를 표현하지만, 그러나 애매하고 모호하게 표현한다. (114, 157)

 

세계는 세계를 표현하는 모나드들 밖에서 현존하지 않으므로, 세계는 지각들 또는 “표상자들(représentants)”의 형식으로 즉 무한하게 작은 현실적 요소들의 형식으로 포함되어 있다. (114, 157)

 

각 모나드 안에 포함되어 있는 그러한 표상자들 안에서만 세계는 현존한다. 이것은 하나의 찰랑거림, 웅성거림, 안개, 먼지들의 춤이다. [또한] 이것은 죽음 또는 경직, 잠 또는 졸음, 실신, 마비 상태이다. 이는 마치 각 모나드의 바닥이, 모든 방향으로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무한히 작은 주름들(변곡들)로 구성되기라도 한 것 같다. 그래서 각 모나드의 자발성이 침대 위에서 이리저리 구르는 잠자는 사람의 자발성과도 같은 것이 된다.세계의 미시지각들 또는 표상자들은 세계의 모든 방향으로 향하는 작은 주름들, 주름들의 안의 주름들의 위의 주름들 따라 있는 주름들, 한타이(Hantaï, 1922-2008)의 그림 또는 클레랑보(Clérambault, 1872-1934)의 중독성 환각이다. (115 158)

 

거시적인 것은 지가들을 구분하고, 또한 하나의 지각에서 다른 지각으로서의 이행인 욕구들을 구분한다. 이것은 구성된 커다란 주름들, 나사 천의 주름들의 조건이다. 그러나 미시적인수준은 미세지각들과 작은 성향들을 더 이상 구분하지 않는다. 모든 지각의 불안정성을 야기하는 동요의 자극들. (116, 159)

 

미세 지각 이론은 또한 두 가지 이유에 근거한다. 형이상학적 이유 .. 심리학적 이유. .. 우주론에서 미시적인 것으로, 또한 미시적인 것에서 거시적인 것으로. (116, 159)

 

§7.3. 미세지각들: 평범한 것과 주목할 만한 것 159 Les petites perceptions: l’ordinaire et le remarquable /

 

세계를 가루로 분쇄하는 것, 또한 이 먼지들을 정령화하는(spiritualiser) 것은 지각에 속하는 일이다.모든 문제는 어떻게 사람들이 미세지각들에서 의식적 지각들로, 분자적(moleculaires) 지각들에서 그램분자적(molaires) 지각들로 이행하는지를 아는 일이다. (116, 159-160)

 

그러나 라이프니츠가 이따금 총체라는 용어를 끌어들여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등질적인 부분들의 합산 이외의 다음 무엇이 중요하다.부분들-전체의 관계는 여기에서 중요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전체도 부분만큼이나 감지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116, 160)

 

사실 라이프니츠는 전혀 부족함 없이 미세 지각에서 의식적 지각으로 연관이 부분에서 전체로 연관이 아니라, 평범함(ordinaire)에서 주목할만함또는 주의할만함(remarquable ou notable)으로 연관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특별한 것은 그렇지 않은 부분들로 구성되어야만 한다.”최소한 두 개의 이질적 부분들이, 특이성을 규정하는 차이 연관[미분율] 안으로 들어갈 때, 의식적 지각이 발생한다는 점을 문자 그대로, 말하자면 수학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마치 원주 방정식 일반(ydy + xdx = 0)과 같은데, 여기에서 미분율(dy/dx = - x/y)은 규정할 수 있는 크기들 표현한다. 녹색(la vouleur verte)이 있다고 해보자. 물론 노란색(le jaune)과 푸른색(le bleu)는 지각될 수 있지만, 그러나 만일 이것들의 지각이 작은 지각으로 되면서 사라진다면, 이것들은 녹색을 규정하는 차이적 연관(db/dj)로 들어간다. 당연히, 노란색 또는 파란색은, 각각을 고려해보면, 우리를 벗어난 두 색깔의 미분율에 의해서 또는 명암의 두 정도 차이의 미분율(dy/dx = J[jaune])에 의해 이미 규정되어 있을 것이다. (117, 160-161)

 

§7.4. 차이적 연관/ 미분비 161 Rapports différentiels 117

 

모든 의식은 문턱(seuil)이다.물론 각 경우에 있어 왜 그 문턱이 이렇거나 또는 저런지 말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문턱이 최소한의 의식(minima de conscience)만큼으로 주어진다면, 미세지각작용들(les petites perceptions)은 이 가능한 최초치보다 매번 더 작다. [이것들은]이런 의미에서 무한히 작다. 즉 각 질서 안에서 차이적 연관들 안으로 들어가는 지각작용들이 선별되어 있고, 또 이 지각작용들은 고려된 의식의 문턱에서 솟아나는 성질들을 이렇게 생산한다. (117-118, 161-162)

 

라이프니츠로 회귀한 최초의 포스트(후기) 칸트주의자인 살로몬 마이몬(Maimon, 1753/54-1800)은 피히테(Fichte, 1762-1814)이상으로 지각의 이러한 정신적 자동기제의 귀결을 모두 이끌어낸다. 지각은 우리를 감화할 수 있는 대상과 조건들을 가정한다. 그 조건들하에서 우리는 감화될 수 있다. 차이소들의 상호 규정(dy/dx)이 대상에 대해 완전한 규정을 마치 지각처럼 끌어내고, 그리고 시-공의 규정가능성을 마치 조건들처럼 끌어낸다. (118, 162)

 

내적 차이란 “차이적인 것의 양태가 개별적 대상, 그리고 차이적 관계들, 서로 다른 대상들 사이의 관계들을 구성”하는 그러한 것이다. 자연적 대상과 수학적 공간은 둘 모두 지각의 초월적(차이적이고 발생적) 심리학을 지시한다.시공간은 순수하게 주어진 것이기를 멈추고, 주체 안에서 차이적 관계들의 집합 또는 연쇄가 된다. (118, 163)

 

라이프니츠에서처럼 마이몬에게서도, 차이소들(des différentielles)의 상호규정은 신적 오성이 아니라, 유한한 자아 안에 있는 세계의 표상자로서 미세지각들을 지시한다(무한한 오성과 연관이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유한한 자아 안의 현실적 무한은 정확히 평형의 위치 또는 비평형의 위치, 즉 바로크이다. (119, 163)

 

§7.5. 특이점에 대한 요약 Récapitulation des singularités

 

우리는 이제 어떻게 같은 추론이 때로는 애매함에 때로는 명석함에 준거하는 것인지 이해하게 된다. 즉 라이프니츠에게 명석함은 애매함에서 나오며, 끊임없이 그 안으로 빠져 들어간다. (119, 164)

 

앞서 보았듯이, 각 모나드가 다른 모나드들과 같은 세계를 표현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타적으로 자신에게 속하며 다른 모든 모나드의 것과는 구분되는 명석한 표현 지대를 갖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자신의 “구역”(son département) (120, 165)

 

관념들에 대한 라이프니츠식의 분류화 작업에서 명석함과 판명함에 만족한다 하더라도 이런 것은 나타난다. 데카르트에 반대해, 라이프니츠는 애매함에서 출발한다. 즉 명석함은 발생적 과정을 통해 애매함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명석함은 애매함에 잠겨있고, 끊임없이 빠져 들어간다. 그것은 본성상 명석-애매하고, 애매함의 전개이고, 그것은 감각적인 것이 밝혀주는 바대로 다소간명석하다. (120, 165)

 

명석함 자체가 애매하게만 인식되는 것에 의존한다는 점. 왜냐하면 명석함은 첫째 필터(un filtre)를 통과하듯이 애매함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이 필터 뒤로 판명함과 모호함에 해당하는 많은 필터들이 이어진다.사실 차이적 관계들은 진정으로 필터의 역할을, 그에 앞서 무한히 많은 필터의 역할을 한다. (120, 165)

 

명석한 지각은 다른 지각들과 관계에서 뚜렷이 대조되며, 당연히 첫째 필터는 평범한것에 가해져 이로부터 특별한(명석하고 구별되는) 것을 끌어내기 위해 작동되는 필터다.그러나 고유한 의미에서 판명한 것은 특별한 것을 정규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이것에서 독특점들을 이끌어 내는 또다른 필터를 전제한다: 판명한 관념 또는 지각의 내적 독특성들, 독특한 것에서 평범한 것을 끌어내는, 그래서 마지막 필터가 우리의 역량을 넘어섬에도 불구하고 필터의 조직화가 순환적 체계가 되게 하는 적합한 것 아닌 완결적인 것의 셋째 필터를 내에워야만 할까? 이 모든 것은 발타자르(Balthazar, s.d.)처럼 다음과 같이 동시에 말할 수 있게 한다: 모든 것은 평범하다! 또한 모든 것은 독특하다!(121, 166)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관념의 이론의 전개라기보다 독특한 것의 상이한 의미들이다. 우리는 세 가지의미에 입각한 독특한 것을 만났었다: [1]독특성, 이것은 우선 변곡(l‘inflexion)이다. ...; 그리고 [2]이것은 관점의 관계에 따라 모나드의 시선점을 정의한다는 점에서 오목한 면의 곡률의 중심이다; [3] 끝으로 이것은 모나드 내의 지각을 구성하는 차이적인 관계들에 따르는 특별한 것이다. [4] 물질 또는 길이 안에서, 최소와 최대라는 “극점(extrema)”을 구성하는 넷째 종류의 독특성이 있다는 점이 보여질 것이다. (121, 166-167) [첨점으로 아제를 잠식하는 영온은 새로운 생성과 되기의 시도이며, 그 자체가 노마드(삶)이며 열린 모나드(단자)이다. (53SKH)] .

 

지각(la perception)으로 되돌아가보자. 모든 모나드들은 온 세계를 애매하게 표현한다. 세계가 같은 질서 안에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각각의 모나드는 자신 안에 무한히 많은 미세지각을 지니고 있다. (122, 167)

 

극단적인 경우에, 그런 빛의 지대를 갖지 않은 “완전히 헐벗은 모나드들”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들은 거의 어둠의 상태에서, 애매한 미세지각들의 현기증과 마비의 상태에서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러나 이런 극한-상태는 죽음에서만 나타나며, 다른 곳에선 어디라도 추상에 다름 아니다.가장 작은 극미동물도 자신의 먹이, 적, 무엇보다 파트너를 식별할 수 있게 해 주는 미광을 지닌다. (122, 167) [라이프니츠가 단세포동물까지 상상했다는 것이 미세지각의 의미를 풀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

 

대부분의 경우에서 영혼은 몇 개 안되는 명석한 또는 구별되는 지각에도 만족한다: 진드기의 영혼은 세 가지 지각을 갖는다. 빛의 지각, 먹이의 냄새를 맡는 지각, 가장 좋은 자리를 더듬는 지각.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은 진드기가 그래도 여전히 표현하는 광대한 자연 안에서 애매하면서도 통합되지 않는 미세 지각들의 먼지, 마비에 다름 아니다. (168)

 

이것으로부터, 모나드들의 지각적 특성에 기능하여, 모나드들의 요약적 분류화 작업의 가능성이 나온다: 거의 헐벗은 모나드, 기억하는 모나드, 반성적인 또는 이성적인 모나드.위대한 라이프니츠 신봉자들 중 한 사람이고, 모나드적 영혼의 정신적 메커니즘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정신물리학의 창시자인 페히너(Fechner, 1801-1887)는 이후 현기증(le vertige) 또는 마비(l’étourdissement)에서 출발하여 빛을 발하는 생명에 이르기까지 이 분류를 끊임없이 발전시킬 것이다. (123, 168-169)

 

모나드는 검은 방 또는 어두운 바닥으로 축소되고, 미세 지각들이 흡수되는 우글거림의 상태가 된다. 반면 여기에는 부활(une resurection)의 역량이, 즉 강렬하고 팽창하는 빛으로 다시 올라갈 수 있는 역량이,있기도 하다. [그러나 지각들이 차례로 꺼질 대 저주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은 모나드들은 거의 없다.] (123, 169)

 

그러나또한 자유와 관련하여, 영혼이 다시 획득되어, 회복하는 자가 놀라듯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때가 온다: 세상에(mon Dieu), 이 시간 내내 무엇을 할 수 있는 힘이 내게 있었던 것일까? (123, 169)

 

§7.6. 환각적 지각의 정신적 메커니즘 Mécanisme physique de la perception hallucinatoire

 

만일 우리의 명석한 지각의 차이적 메커니즘이 고장 난다면, 미세 지각들은 그 메커니즘의 선별작용을 힘으로 부서뜨리고는 수면이나 마비 상태에서처럼 의식 안으로 난입한다. 검은 바닥 위에서 색깔을 가진 무수히 많은 모든 지각은, 우리가 그것을 더 유심히 살펴보면 원자가 아니다. (124, 169)

 

이러한 이유로 펼침은 결코 접힘의 반대가 아니며, 그것은 주름들에서 다른 주름들로 나아가는 운동이다. 때로 펼침은 내가 전개한다는 것, 내가 무한히 작음 주름들을 해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이 작은 주름들은 바닥을 끊임없이 흔들어대는데, 이는 형상이 나타나는 면 위에 커다란 주름을 그리기 위해서이며, 그리고 이것은 불침번(la veille)의 작업이다. 나는 세계를 “접힌 곳의 표면 위에” 투사한다‥…때로는 그 반대로 나는 내 모든 문턱을 지나온 의식의 주름들, 나를 둘러싸고 있고 나를 바닥으로부터 분리하는 “스물두개의 주름”을 차례로 해체한다. “화난 짐수레꾼의 가죽 채찍끈”처럼, 현기증의 작동에서, 나를 과도한 속도로 휩쓸어가는 움직이는 작은 주름들의 광대한 바닥을 단번에 발견하기 위해서.나는 언제나 주름들 사이에서 펼치며, 그리고 지각이 펼치는 일이라면, 나는 언제나 부름들 안에서 지각한다. 나는 언제나 주름들 안에서 지각한다. 모든 지각은 환각적이다. 왜냐하면 지각은 대상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커다란 지각은 대상을 갖지 않으며, 외부에서 그 지각을 설명해줄 자극의 물리적 메커니즘을 지시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모나드 안에서 그 지각을 구성하는 미세 지각들 사이의 차이적 관계들의 배타적인 정신적 메커니즘만을 지시할 뿐이다.(124-125, 170-171) [순수지각은 신체의 운동기제와 연결이 없다. (벩송)]

 

환각은 언제나 이중적인데, 마치 클레랑보(Clérambault, 1872-1934)가 클로랄의 상태(l‘état chloralique)에서 “작은 표면의 환각”과 “큰 표면의 환각”을 구분하듯이 말이다. (125, 171)

 

이 상황은 사실 라이프니츠와 퀸시(Quincey, 1785–1859)가 묘사하는 상황이다. 우리의 환각적 주시 속에서 군대 또는 무리가 다가올 때‥… - 사건(l’événement): “다음 시간 동안, 부드러운 아침 바람이 불면, 뿌연 먼지가 짙어져 공중에 광대한 휘장의 외관을 드러내고, 그 무거운 자락은 하늘에서 땅으로 처져 내려온다: ... ... 반면에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커지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화난 상태에서 만들어내는 외침, 비명 그리고 신음소리가, 오해될 수 없는 언어로, 이 구름의 막 너머에 벌어지고 있는 일을 드러내 준다.” (125-126, 171-172)

 

§7.7. 영혼 안에 먼지들과 주름들 Poussières et plis dans l’âme

 

연역의 첫째 단계는 모나드에서 지각된 것(au perçu)으로 향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든 것이 일종의 버클리적(Berkeley, 1685–1753)인 보류 속에 멈추어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 무엇도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진 신체의 현존이나 이 신체의 감화(변용)를 미칠만한 신체의 현존을 결론내리도록 보증하지 않는다. 모나드에 내부적인 것으로 지각된 것(le perçu)만 있으며, 현상은 바로 지각된 것이다. (126 172)

 

그러므로 의식 안에 지각된 것을 낳는 것은 무의식적인 심리적 메커니즘이다.이런저런 현상의 가변적이고 상대적인 통일성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것이다: 모든 현상은 한 무리, 군대나 무지개와 같이 집합적이다. 미세 지각들의 집합은 확실히 통일성을 갖지 않지만(마비), 그 대신 작동하는 차이적 관계들의 정신적 통일성을 수용한다.(126, 173)

 

왜 신체들이 생기지 않는가? 현상(le phenomène) 또는 지각된 것(le perçu)을 넘어서도록 우리를 유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이프니츠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만일 지각의 밖에 신체가 없다면, 지각하는 유일한 실체란 인간[생명, 영혼] 또는 천사의 실체들이 될 것이며, 이는 우주의 다양성과 동물성을 희생시킬 것이다. 만일 지각된 것의 바깥에 신체가 없다면, 지각하는 자들은 자체 안에 그만큼 적은 다양성만이 있을 것이다(이 지각하는 자들은 정확하게 신체들에 통합 ‘되어야만 한다’). (127, 173)

 

나는 어떤 고통을 겪는다. 이 고통은 중심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원 모양으로 나가가는, 우리 살을 파낼 만한 뾰쪽한 어떤 것의 운동과 닮았다.이 논증은 매우 어려워서 많은 예비적 주의 사항을 덧붙여만 할 것으로 보인다. 첫째로 라이프니츠는 지각이 어떤 대상과 닮았다고 말하지 않고, 그것이 어떤 수용기관에 의해 한데 모이는 진동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한다. 고통은 ... 살 안에서 사방으로 퍼지는 수천의 작은 운동 또는 타격을 재현한다. (127, 173-174)

 

고통 또는 색깔은 물질의 진동하는 판 위에 투사된다. 어떤 점에서는 흡사 원이 포물선이나 쌍곡선으로 투사되듯이. 이 투사는 “순서라는 연관(d’un rapport d’ordre)”의 이유이거나, 따라서 다음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유비의(s’analogie) 이유이다: 미세지각들/의식적 지각 = 물질의 진동/기관. (127-128, 174)

 

§7.8. 둘째 단계: 지각에서 유기적 신체로 174 Deuxième â étape: de la perception au corps organique 128

 

둘째로, 지각된 것이 어떤 사물과 닮았다는 것은 직접적으로 지각이 어떤 대상을 표상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데카르트주의자들은 지각이 기하학주의를 긍정했는데, 이에 따르면 명석 판명한 지각은 길이(l’étendue, 부피)를 표상하기에 적합하다. .. 라이프니츠의 관점은 이와 전혀 다른데, 그것은 같은 기하학도 아니고, 유사성에 대한 같은 위상도 아니다. 투영(사영) 기하학에 입각해 어떤 사물을 닮은 것, 따라서 “자연적 기호들”인 것은 바로 애매하거나 더 나아가 모호하기까지 한 지각들로서 감각적 질들이다. (128, 174)

 

기하학은 지각과 더불어 애매함 안으로 빠져든다. 특히, 닮음(la ressemblance, 유사성)의 의미는 완전히 기능(fonction)을 변하게 한다. 유사성은 유사자에(au ressemblant) 의해 판단되는 것이지, 피유사자에(au ressamblée) 의해 판단되지 않는다. (128, 175)

 

§7.9.지각은 무엇을 닮았는가? A quoi la perception “ressemble”-t-elle?

 

셋째로, 이때 피유사자는 앞서의 유비에 따라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 유비의 물질적 측면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영혼 내의 정신적 메커니즘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될 물질적인 물리적 메커니즘을 원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정신적 메카니즘은 모나드에 내부적인 것이어서 외적인 인과성을 모두 배제하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가 미분의 지위(le statut)를 문제 삼기에 이르렀고, 그리고 여기서 편하고 잘 정초된 허구만을 보기에 이르렀다. (128, 175)

 

라이프니츠가 물체들의 본질적 특성들을 정의할 때 그는 두 가지를 지정한다. 무한히 작은 부분들에 의해서 무한히 줄어들 수 있는 역량(puissance), 그리고 항상 흐름 안에 있을 수 있으며 끊임없이 왔다가 사라지는 부분들을 가질 수 있는 역량.물리적 매커니즘은 차이소들에 의해 작동하지 않는다. 이것은 언제나 의식[영혼]의 차이소들이다. (129, 176)

 

바로 이런 의미에서, 물질은 기관들로 충만하며, 또는 기관들이 충만하게 물질에 속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관들은 오로지 여러 파도 또는 광선의 수축시킨다는 점이다.이ㅣ것이 물리적 인과성 원리의 근저에 놓여 있다. (129, 176)

 

그러므로 늘 외부적인 물리적 인과성과 늘 내부적인 정신적 인과성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전자는 어떤 신체에서 이 신체에 효과를 미치는 모든 신체에게로 우주 안에서 무한히 나나간다(보편적[우주적인] 유입 또는 상호작용 체제).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는, 각 모나드로부터 이 모나드가 모나드 간의 모든 유입에 대해 독립적이면서 자발적으로 산출하는 우주의 지각의 결과들로 나아간다. (129-130, 176-177)

 

이러한 한두 가지 인과성에는 두 가지 미분법, 또는 분리 불가능하지만 구분해야만 하는 미분법의 두 가지 양상이 대응한다. 하나는 지각의 심리-형이상학적 메커니즘을 지시하며, 다른 하나는 자극 또는 충격 물리-유기적인 메커니즘을 지시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두 쪽의 절반과 같다. (130, 177)

 

§7.10. 기관들과 진동들: 자극의 물리적 메커니즘 177 Organes et vibrations: mécanisme physique de l’exitation 130

 

이것은 의식적 지각이 신체에 의해 수축된 진동들과 닮았다는 것, 또는 의식의 문턱이 기관의 조건들에 상응한다는 것을 막지 않는다. 앞의 유비에서 출발하여 페히너(Fechner, 1801-1887)의 정신-물리학이 발전시킨 것처럼 말이다. 의식을 통해 지각된 하나의 질은 유기체를 통해 수축된 진동들과 닮는다. (130, 177)

 

아마도 여기에서 라이프니츠와 뉴턴 각각의 미분법 해석과 관련되는 귀결들을 이끌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이 미분법을 같은 방식으로 구상하지 않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크기를 발생시키는 운동이나 증가의 속도에 따라 그 크기를 규정하면서(유율법), 뉴턴(Newton, 1642-1727)은 흐르는 물질의 운동,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이 기관에 미치는 효과에 적합한 미분법을 발명한다. .. 그 반대로 라이프니츠(Leibniz, 1646-1716)의 미분법은 ‘차이소들(différencielles)’의 상호적 규정위에 정초되어 있으며, 오로지 영혼만이 작은 합성요소들을 보존하고 구분하는 한, 그것은 “영혼”과 완전히 분리불가능하다.라이프니츠 미분법은 정신적 메커니즘에 적합한 반면, 뉴턴의 미분법은 물리적 메커니즘에 적합하며, 이 둘 간의 차이는 수학적인 만큼이나 형이상학적이다. (130-131, 177-178)

 

§7.11. 물질의 겹주름 Replis de la matière

 

연역은 두 단계를 지닌다. 하나는 모나드가 신체를 가져야 한다는 요구를 정립하는 것이며(일차적 물질 또는 제한-물질), 다른 하나는 이 요구가 어떻게 충족되는가를 보이는 것이다(이차적 물질 또는 흐름-물질). 지각된 것에서 신체로 나아가는 둘째 단계를 요약해보자. (131, 178)

 

1) 명석-애매한 지각은 진동을 하나로 모으는 물질적 수용자들과 갖는 유사성의 관계를 나타낸다.

 

2) 이러한 수용자들은 기관들 또는 유기적 신체들이라 불리고, 신체 안에 그것들이 무한하게 수용하는 진동들을 구성한다.

 

3) 신체들의 물리적 메커니즘(유율법)은 지각의 정신적 메커니즘(차이소들)과 동일하지 않지만, 후자는 전자와 닮았다.

 

4) 유사성이 모델이며, 필연적으로 신은 어떤 물질을 창조함에 있어 그 물질과 닮은 것[지각된 것]에 일치하도록, 즉 현행적으로 무한하게 진도하는 물질(무한하게 작은 부분들)을 차조하며, 그리고 수용 기관들은 이 물질 안으로 도처에 분배되며, 봉분된다(essaimés).

 

5) 이렇게 해서 지각의 한 측면으로부터 다른 측면으로 나아간다. 여기에서 지각은 더 이상 단순히 세계의 표상자가 아니라, 기관들에 일치하는 대상의 재현이 된다. 예컨대 신은 모나드의 지각들에 상응하는 기관들 또는 유기적 신체들을 그 모나드에 제공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름 이론의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131, 178-179)

 

§7.12. 미분 계산의 지위 Le status du calcul

 

나는 명석하고 구별되는 표현 지대를 갖는다. 왜냐하면 나는 원초적 독특성들, 나에게 운명으로 부여된 잠재적인 이상적 사건들을 갖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시작하여 연역이 도출된다: 나는 신체를 갖는데 이는 내가 명석하고 구별되는 표현 지대를 갖기 때문이다. ... 나는 명석한 또는 특권적인 표현지대를 갖는데, 이는 내가 신체를 갖기 때문이다. 내가 명석하게 표현하는 것, 이것은 내 신체에 일어나는 것이다. (132, 179)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것은 기관들 안에서 발생하는 것을 재현한다”.그러므로 모나드는 “겪는다(pâtir)”라고 말할 수 있다.사실 모나드는 자신으로부터 지각된 모든 것을 끌어내지만 마치 모나드의 신체에 작용하는 신체들이 그 모나드에 작용을 미치고 그 모나드의 지각들을 야기하는 듯이 나는 행위한다. 단순히 말하기 방식인가, 아니면 인과성의 분석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보다 심오한 문제인가? (132, 179-180)

 

(7:22, 53RMJ) (12:07, 53SKI)

 

 

 

참조:******

 

<<박홍규: 그것은 각 개체, 신체(sôma)가 어디서 나왔냐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어. 가령 내가 이 사물에 대해서 운동을 한다거나 더 일반적으로 영혼(psychê)이 작용(poiein)한다고 할 때, 그것은 사물의 변화될 수 있는 측면에 대해서이지. (145) [개체의 자발성이란 영혼이 개입할 수 있는 정도이라는 의미이다. 영혼이 모든 측면에서 개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맺을 수 있는 측면에만 한정하는데, 그만큼의 자발성이라고 할 수 있다. 형이상학적인 자연의 자발성이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능동의 힘(poiein)이 물질 속에 있어야 한다는 추론이 나온다. 그렇지 않고 물질이 수동성으로만 있을 경우에는 영혼의 자발성이 작동을 해도 물질은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방황하는 원인처럼) 운동하기 때문이다. (51UKC)]

 

언제든지 변화될 수 있는 측면에서 작용(poiein)은 수동(paschein)하고는 정반대로 가. 그래서 베르그송은 내려가는(descente) 길과 거슬러 올라가는(ascente) 길이라고 하지. (146) [이 하강과 상승의 방향에 대한 형이상학적 견해는 플로티노스에서 왔다. 벩송은 실증적으로 심리학적으로 또 생물학적으로 설명한다.]>> -박홍규: 자기 운동 II: "파이드로스", 245c-246a(1986)

 

 

 

# 인명록 **

 

1596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프랑스 철학자.

 

1612 아르노(Antoine Arnauld, 1612-1694) 포르르와얄 학파. 쟝세니스트

 

1636 라미(François Lamy (1636-1711) 프랑스 신학자, 베네딕트 수도승. ?De la connoissance de soi-meme(1704)? - 이 책에서 예정조화에 대한 반대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응답으로: Leibniz, Addition à l'explication du système nouveau touchant l'union de l'âme et du corps, (1704).

 

[1636 발타자르 마리티노(Balthazar Martinot, dit « l'Aîné », 1636-1714) 프랑스 시계공, 프랑스 왕후 안 오트리쉬의 시종(écuyer, valet). 시간은 통상, 일상(평범)이다. - 시계의 주변(위 받침대, 위의 장식)주변의 세공이 바로크이다.]

 

1646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 독일의 철학자, 수학자. sur la liberté de l'homme, 1670-1671; Méditations sur la connaissance, la vérité et les idées, 1684; Discours de métaphysique(1686); L’origine radicale des choses, 1697; De la nature en elle-même(1698); Nouveaux essais(1704); Monadologie(1714); Essais de Théodicée(1714) sur la bonté de Dieu, la liberté de l'homme et l'origine du mal 1714; Principes de la nature et de la Grâce fondés en raison 1714; §

 

1654 바리뇽(Pierre Varignon, 1654-17221) 제수이트 신부, 프랑스 수학자. 정태학에 기여했다. 라이프니츠와 편지 교환.

 

1656 하르트쇠케르(Nicolas Hartsoeker, 1656–1725) 천문학과 수학을 공부한 네델란드의 생물학자, 물리학자. 그는 1694년 (정자)전성설(homunculus)를 제시했다. .

 

1668 데 보스(Bartholomew Des Bosses, 1668-1738), 벨기에 제수이트 신학자, 네델란드 철학자. 라이프니츠와 많은 편지교환.

 

1685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1753) 아일랜드의 철학자, 성공회 주교. 그의 정식(esse est percipi aut percipere (« être c'est être perçu ou percevoir ») ?Théorie de la vision, 1709?. ?Principes de la connaissance humaine, 1710?(라이프니츠가 이 두 작품을 읽었을 것이다)

 

1724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일 계몽주의 철학자. 관념론자.

 

1747 헤르츠(Marcus Herz, 1747-1803) 독일 의사, 계몽기 철학자. 칸트와 교류.

 

1753 마이몬(Salomon Maimon, 1753/54-1800) 리투아니아 태생의 유태계 독일 철학자. 독일에서 칸트철학을 이어받아 물자체를 부정했다. 확실한 학문은 수학뿐이라고 주장하며 흄의 회의론을 인정하였다. ?Versuch über die Transscendentalphilosophie 1790? / 게루( Martial Gueroult), La Philosophie transcendantale de Salomon Maïmon, Jan. 1929

 

1762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 독일 철학자. 칸트의 비판적 계승자이며 헤겔, 프리드리히 셸링과 더불어 독일 관념론을 대표자이다.

 

1785 퀸시(Thomas de Quincey, 1785–1859), 영국 작가, 옥스퍼드 대학에서 아편중독으로 학사 학위를 마치지 못했다. ?어느 영국인 아편 중독자의 고백(Confessions of an English Opium-Eater (1821). Confessions d'un mangeur d'opium anglais (1821)?, ?Revolt of the Tartars (1837)?(La Révolte des tartares).

 

1801 페이너(Gustav Fechner, 1801-1887) 독일 철학자, 생리학자. 베버-페히너 법칙(Loi de Weber-Fechner) [벩송이 이들의 문턱(멱)이론을 비판한다.]

 

1843 타르드(Jean Gabriel Tarde, 1843-1904) 프랑스 사회학자. 심리학적 사회학파의 대표자. ?Monadologie et sociologie: Les monades et la sociologie (1893)?, ?Essais et mélanges sociologiques (1895)?. Études de psychologie sociale, 1898, Les Lois pénales : essai d'une sociologie, 1898.

 

1859 벩송(Henri Bergson, 1859-1941) 유대계 프랑스 철학자. MM (1896),

 

1861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 영국 철학자, 논리학자, 수학자. avec Bertrand Russell, ?Principia Mathematica, 1912?. ?과정과 실재성(Process and Reality: An Essay in Cosmology, 1929)?

 

1864 윅스퀼(Jakob Johann von Uexküll, 1864-1944), 독일 생물학자, 철학자. Mondes animaux et monde humain suivi de La théorie de la signification, 1934 ; trad. fr. éd. Denoël, 1965. 콘라드 로렌쯔에 앞서 행동주의 연구자.

 

1872 클레랑보(Gaëtan, Gatian de Clérambault, 1872-1934) 프랑스 정신과 의사이다.

 

1888 페르난도 페소아(Fernando António Nogueira Pessoa, 1888–1935) 포르투갈 시인, 작가, 문학비평가, 출판가, 철학자. 거의 75개의 필명으로 글을 썼다.

 

1889 꼭또(Jean Cocteau, 1889-1963) 프랑스 시인 그라피스트, 소묘가, 극작가, 영화가 1955년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 ?La Difficulté d'être, 1947? 꼭또와 미쇼가 같은 해 태어나 둘다 시인인데, 공식적으로 서로 교류가 없었던 것 같다.

 

1889 미쇼(Henri Michaux, 1899-1984) 벨기에 출신 프랑스 국적(1955년), 작가, 시인, 화가. ?Ailleurs, 1948?, ?La Vie dans les plis, 1949?

 

1891 게루(Martial Gueroult, 1891-1976) 프랑스 철학자, 철학사가. 17세기 전공. La Philosophie transcendantale de Salomon Maimon, Paris: Alcan, 1929. Dynamique et métaphysique leibniziennes, suivi d'une Note sur le principe de la moindre action chez Maupertuis, Paris: Les Belles Lettres, 1934.

 

1905 카네티(Elias Canetti, 1905-1994) 세파라드 유대 가정출신, 불가리아 태생 영국시민 독일어로 작품 활동 작가. 1981 노벨 문학상. ?덩어리와 권능(Masse und Macht, 1960; Masse et puissance)?

 

1908 블라발(Yvon Belaval, 1908-1988) 프랑스 철학자, 문헌학자, 라이프니츠 전공자. Confessio Philosophi: La Profession de Foi du Philosophe(1672) 출판 1961.

 

1922 한타이(Simon Hantaï, 1922-2008) 헝거리 태생 프랑스화가. 독창적 주름잡기(le pliage)[폴딩(Folding)] 방법(주름 위에 색칠하기)

 

1922 로비네(André Robinet, 1922-2016) 프랑스 철학자, 철학사가. 브뤽셀 자유대학교수. Leibniz et la racine de l'existence, 1962. Leibniz: lecture du Treatise de Berkeley, Etudes philosophiques, 1983, 참조

 

1930 세르(Michel Serres, 1930-2019) 프랑스 철학자, 과학사가. ?라이프니츠의 체계와 그의 수학적 모델(Le Système de Leibniz et ses modèles mathématiques, 1968)?

 

1938 발타자르(Herman Balthazar, 1938-) 플라망 출신의 벨기에 역사가. 강(Gand) 대학 교수. 벨기에 영화 평론가 닉 발타자르(Nic Balthazar, 1964-)의 아버지.

 

1939 질(José Gil 1939-) 포르투갈 철학자, 수필가, 살라자르(António de Oliveira Salazar, 1889-1970)가 포르투갈 통치기간 프랑스로 추방되었다. 리스본 대학에서 가르치다. Fernando Pessoa ou la métaphysique des sensations [(pt) Fernando Pessoa ou A Metafisica das Sensações, 1988], Paris : Éditions la Différence, 1988.

 

1940 라방(Claude Rabant, 1940-), 프랑스 정신분석가, 철학자. 8대학 교수, ENS, 철학교수자격, 프로이트 서클의 잡지 파티오(Patio)의 주간이다.

 

1951 프레몽(Christiane Frémont, 1951-), 철학교수자격 통과, 제3과정 박사. 연구자(Chercheur au CNRS) - [Discours sur la théologie naturelle des Chinois – 1 octobre 1987 de G. W. Leibniz (Auteur), Christiane Frémont (Sous la direction de)].?존재와 관계(L’être et la relation, 1981)?, Ed. Vrin 수록. 라이프니츠 연구자 [미셀 세르 제자?]

 

[P. Brissy / K. Friha, Les aventures de Balthazar Fox, 3권, 2019. 대상 10세부터, 주인공 발타자르 폭스는 아주 일상적인 고등학생이다(Balthazar Fox est un collégien tout à fait ordinaire)] –

 

(8:14, 53RMJ) (14:40, 53SKI)(15:15, 53TL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