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적 가상의 진리적 성격에 대하여
- 칸트의 상상력과 가상 개념을 중심으로 -
김 상 현
“예술에 대해 미감적(감성적) 가상(ästhetischer Schein)이라
고 규정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다: 예술은 비가상적인 것
(das Scheinlose)의 가상으로서 진리를 가진다.”
1. 들어가는 말
우리는 흔히 예술적 이미지들에 대해서 가상(Schein)이라는 명칭을 주어 진리주장의 영역에서 배제한다. 그러나 일찍이 칸트는 미와 숭고에 대한 판단이 주관적이면서 동시에 보편타당하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말하자면, 예술 작품 또는 예술적 이미지들은 어떤 형태로든 일종의 진리주장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칸트 자신은 이 문제에 관해 ‘취미판단의 연역’이라는 제명하에 논하였지만, 여기에서는 상상력과 가상 개념을 중심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칸트의 철학에서 가상의 진리적 성격을 말하기 위해서는 가상의 기본 개념을 파악하고 특히 경험적 가상이 발생하는 원천에 대해 분석(상상력의 활동)해야 한다. 그래야만 동일한 상상력의 활동이 예술적 가상(künstlerischer Schein)을 만들어 내되, 그 가상이 학적 인식의 관점에서 볼 때 단지 오류에 불과한 경험적 가상이 아니라, 일종의 진리성(보편타당성)을 담지한 가상임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 논문은 칸트 자신의 관심사(비판철학의 과제)에서 다소 벗어나 가상의 기본 개념에 대한 칸트의 주장과 가상 발생의 원천인 상상력의 활동에 대해 추적해 보고, 그런 연후에 학적 인식의 관점에서는 단지 오류일 뿐인 예술적 가상을 성립시키는 상상력의 활동을 특징지워 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토대로 상상력의 초험적 성격을 규명해 볼 것이다. 이러한 탐구는 궁극적으로 상상력의 활동을 반성적 지평에서 고찰함으로써 가상이, 특히 예술적 가상이 존재론적 차원에서 일종의 진리일 수 있음을 입증하고자 하는 것이다.
2. 이론적 가상과 상상력
가상(Schein)이라는 개념은 칸트 철학을 이해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칸트의 가상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개연성(Wahrscheinlichkeit)과 현상(Erscheinung)을 가상으로부터 구분해야 한다. 칸트에 따르자면, 개연성이란 “진리이기는 하지만 불충분한 근거에 의해서 인식된 진리”(KrV. B349)를 말하며, 따라서 오류로서의 가상 ―경험적 오류이든 초월적 오류이든― 과는 구분된다. 아울러 가상은 “생각되는 한의 대상의 판단에 관해서 언명”(같은 곳)하는 것이므로 “직관되는 한에 있어서의 대상에 관한 언명”(같은 곳)인 현상과도 구분되어야 한다.
가상은 칸트 자신의 분류에 따른다면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경험적 가상, 논리적 가상, 초월적 가상이 그것이다. 하지만 가상이 진리와 상반된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서 볼 때, 미나 숭고에 대한 표상 역시 학적 진리라는 엄밀한 개념에 비추어 본다면, 일종의 가상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는 이론적 가상과 예술적 가상으로 명명할 수 있으며, 여기에서는 먼저 이론적 가상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이론적 가상에 대해서는 특히 경험적 가상의 발생 원천을 상상력의 활동과 관련하여 서술하고자 하는데, 왜냐하면 이 부분이 전체적으로 볼 때, 예술적 가상의 원천으로서의 상상력의 활동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1) 이론적 가상과 오류의 원천
칸트는 “지성의 법칙에 완전히 합치한 인식에 오류는 없다.”(KrV. B350)고 단언한다. 아울러 “감관에는 오류가 없다는 말은 참으로 옳다”(같은 곳)고 말한다. 나아가 칸트는 “라이프니츠-볼프학파에 반대하여 감성의 자립적이고 긍정적인 특성을 강조하였고 감성에 대한 여러 고발(Anklage)들에 반대하여 ‘감성을 위한 변호(Apologie für die Sinnlichkeit)’에 힘썼다”. 따라서 칸트에게서 오류는 감관이나 지성 그 어느 한쪽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범하는 오류 또는 가상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칸트가 비판철학의 주요 과제로 삼고 있는 가상은 초월적(transzendental) 가상이다. 초월적 가상은 내재적으로만 사용해야 할 순수지성의 개념을 초험적으로 사용할 때 발생하는 것이며, 이는 인간 인식에 있어서 ‘실로 자연스로운․불가피한 착각’(KrV. B354)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가피한 착각에 대해 폭로하는 것이 초월적 변증론의 과제임을 칸트는 천명한다. 다시 말해 지성의 범주를 내재적(immanent) 원칙으로만 사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초험적(transzendent) 원칙으로 사용함으로써 발생하는 각종의 이념들이 실은 가상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재래 형이상학에 종말을 고하는 것이 비판철학의 주된 과제인 것이다.
칸트가 오류의 또 한 가지 종류로 분류하고 있는 것은 논리적 가상이다. 논리적 가상이란 “<삼단논법>의 추리형식을 모방하기만 한 것”으로 “일반 논리학의 규칙에 주의하지 않는데서만 발생한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는 주의를 날카롭게 하자마자 가상은 곧 완전히 소멸된다.”(KrV. B353) 따라서 논리적 가상이란 일반 논리학의 추리규칙을 위반하는 데서 발생하는 오류, 즉 부주의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관심사인 경험적 가상으로서의 오류에 대해 살펴보자. 이 오류에 대한 칸트의 언명은 매우 적고, 그런 까닭에 우리는 단지 몇 개의 언명만으로 이 오류의 원천에 대해 추적하는 것에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칸트는 “진리이건 오류이건, 또 오류로 인도하는 것으로서의 가상이건, 그 어느 것이나 판단 중에서만 있는 일”(KrV. B350)이라고 말한다. 또 우리에게 감성과 지성 외의 다른 인식 원천이 없기 때문에, “오류는 감성이 지성에 남몰래 주는 영향에 의해서만 발생한다”고 한다. 도대체 ‘감성이 지성에 남몰래 주는 영향’이란 어떤 것일까? 이와 관련한 칸트 자신의 언명은 “... 감성이, 지성의 작용 자체에 영향을 주어서 지성의 판단에 간섭하는 한에서, 감성은 오류의 근거가 된다”(KrV. B351)와 “경험적 가상은 보통은 정당한 지성규칙을 경험적으로 사용할 즈음에 생기는 것이요, 이때에 판단력이 상상작용의 영향을 받아서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KrV. B352)는 정도이다.
이러한 구절을 볼 때 칸트는 오류 또는 경험적 가상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감성이 지성에 영향을 주는 것’은 곧 ‘판단력이 상상작용의 영향을 받는 것’과 거의 동일한 의미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오류의 발생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 있게 된다. 우선, 오류는 상상력의 종합활동에 문제가 있는 경우, 둘째는 판단력이 특수(상상력이 종합한 것)를 보편(지성의 개념)에 포섭시킬 때, 잘못 포섭시키는 경우일 것이다. 그런데 칸트의 언명에 따르자면, 판단력이 상상작용의 영향을 받아서 오류가 발생한다고 하였으므로 판단력이 부적절한 포섭활동을 하는 이유가 상상력에 있다고 하겠고, 그렇다면 오류의 원천은 사실상 상상력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상상력이 오류의 원천인 경우, 칸트는 그것을 경험적 가상이라 부르고 이는 비판철학의 과제가 아니라고 한다(KrV. B352 참조).
그러므로 칸트의 주장에 따르면, 초월적 가상은 순수지성개념의 초험적 사용에서 비롯하고, 논리적 가상은 추리규칙에 대한 부주의에서 발생하되, 경험적 가상은 상상력의 부적합한 종합활동에서 기인한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그런데 예술적 표상들(미나 숭고) 역시 학적 인식의 관점에서 보자면, 일종의 오류판단이요, 따라서 가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뒷 절에서 언급되겠지만, 이러한 예술적 가상들 역시 그 원천이 상상력에 있다. 그렇다면 동일한 상상력의 작용에 의해 야기되는 두 가지 가상(경험적 가상과 예술적 가상)은 어떤 면에서 동일한 가상이되 어떤 면에서 상이한 가상인가가 말해져야만 한다. 이는 동시에 예술적 가상의 진리적 성격을 규명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런 작업을 위해 상상력의 제 작용과 오류의 발생에 대해 좀 더 천착해야만 한다.
2) 가상의 원천으로서의 상상력
경험적 가상이 상상력의 판단력에 대한 영향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할 때, 우리는 상상력의 종합활동에는 ―지성의 종합작용에는 오류가 없지만― 어떠한 오류가 가능함으로 추측해 볼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이 점에 대해 좀 더 논구해 들어가기 위해서는 상상력의 종합활동 양태들에 대해 좀 더 심층적으로 알아보아야 한다. 이는 단지 경험적 가상의 원천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래적 관심사인 예술적 가상과 상상력과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1) 상상력의 여러 작용들
상상력이란 “대상이 현존없이도〔대상을〕직관하는 능력” 또는 “직관 중에 대상이 지금 있지 않건마는, 대상을 표시하는 능력”(KrV B151)을 말하며, ‘직관의 다양을 종합하는 능력’(KrV B103 참조)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데카르트적 전통은 상상력을 임의적인 감각능력이나 오류의 원천으로 생각하여 불신하였지만 칸트에게 있어 상상력은 인식에 있어서 중대한 역할을 하며 긍정적으로 간주된다. 이는 사실 라이프니츠로부터 시작하여 볼프, 그리고 바움가르텐에 이르는 경험적 심리학의 견지에서 호의적으로 논의된 상상력 이론에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전비판기 칸트의 감성과 상상력에 대한 견해는 바움가르텐의 하위의 이성 인식으로서의 감성적 인식(cognitionis sensitiva)에 대한 설명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칸트는 바움가르텐의『형이상학 Metaphysica』을 여러 해 자신의 강의 교재로 사용하였다. 또한 바움가르텐이 언급한 하위의 인식능력에 대한 주장을『인간학에 대한 반성(이하 ‘반성’) Reflexionen zur Anthropologie』이나 『형이상학 강의 Vorlesungen über Metaphysik』등에서 상(像, Bild)을 형성하는 능력, 즉 형성능력(Bildungsvermögen)이라고 부르면서 상당 부분 수용하며, 이는 비판기의 상상력(Einbildungskraft) 이론으로 계승된다.
형성능력은 크게 인간의 감성적 직관과 관련되어 상(像)을 부여하는 ‘형성작용(Bildung)’과 ‘근원적 형성작용(Urbildung)’으로 구분된다. “원형을 형성하는 재능이 천재이다(Urbildendes Talent ist Genie).”라는 규정으로 미루어 볼 때 근원적 형성능력이 비판기에도 상상력의 한 능력으로 간주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천재를 예술의 능력으로 국한시키면서, “그 어떤 특정한 규칙도 부여될 수 없는 것을 산출하는 재능”(KU 182)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원적 형성능력이란 그 자체가 그 직관의 대상을 산출해내는 지적 직관과는 달리, 단지 이전에는 없었던 상(종래의 규칙으로는 산출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상)을 새로이 산출하는 천재의 능력을 염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형성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상은 다시 6가지로 세분되는데, 모상(Abbild), 재상(Nachbild), 예상(Vorbild), 상상(Einbild), 대조상(Gegenbild), 완성상(Ausbild)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모상과 재상 및 예상은 “표상들이 대상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유래하는가 또는 간접적으로 유래하는가(객관의 현존으로부터 유래하는가 또는 기억과 같이, 과거 표상의 현실성에서 유래하는가 또는 이런 표상들을 매개로 하여 미래에 있어서의 표상에서 유래하는가)”에 따라 구분된다. 즉 모상(模像)은 대상의 현존에 대한 감각적 다양에 직접 형식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하고, 재상은 과거 표상에 대한 기억을 통해 감각적 다양을 종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재상은 다시 과거의 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기억(Erinnerung)과 임의로 합성하여 재생해내는 환상(Phantasie)으로 구분된다. 마지막으로 예상은 감각된 상을 자신이 알고 있는 여러 상들과 미리 견주어 보는 것을 의미한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이것들은 나중에『순수이성비판』‘초월적 연역(초판)’에서 각각 포착(Apprehension), 재생(Reproduktion), 재인(Rekognition)의 종합으로 전환된다.
상상(Einbildung)이란 “현실적 표상(또는 현존)에서는 전혀 원인을 가지지 않고 오히려 정신(Seele)의 고유한 활동을 통해서만 발생하는” 표상을 말한다. 대조상(Gegenbild)이란 상징(symbolum)을 말하는데, 이 대조상의 형성능력은 “바움가르텐의 특징화 능력(facultas characteristica), 즉 의미를 매개로 표상하는 능력과 연관되어 있으며”, 지각된 것으로부터 유래하는 결핍을 보완하는 작용이 아니라 우리의 직관능력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능력이다. 즉 감각과 이성의 직접적 연결(대응)이 불가능할 경우 이를 의미나 상징적 유비(Analogy)를 통해 해결하는 능력이다. 마지막으로 완성상(Ausbildung)은 말 그대로 감각적 다양들의 종합을 완성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불완전하거나 미완성으로 보이는 것을 지각하였을 때 활동하게 된다. 따라서 이 경우에 형성능력으로서의 상상력은 경험에 있어서 결핍되어 있는 것을 보충하여 완전하게 만들어 ‘전체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게 된다.
칸트는 상기한 방식으로 상상력에 대해 세분한 후 이를 다시 재생적 상상력(reproduktive Einbildungskraft)과 생산적 상상력(produktive Einbildungskraft)으로 구분한다. 재생적 상상력은 경험에 있어서 연상의 법칙에 종속하는 상상력을 말하며 모상, 재상, 예상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나머지 형성능력들은 생산적 상상력에 속하는데, 생산적 상상력은 “일정한 조건하에서라면 어쩌면 산출될 수도 있는 가능적인 대상의 상만을, 즉 현전케 될 수도 있는 대상의 상만을 형성”하는 능력을 말한다. 따라서 대상의 상을 근원적으로 현시하는 능력이다. 물론 이 생산적 상상력의 근원적 현시(ursprüngliche Darstellung)는 “직관 활동을 통해 존재자 자체를 창조하는 원본적 직관처럼 ‘창조적’이진 않다.” 왜냐하면 상상력은 “이전에 우리의 감관 능력에 전혀 주어진 바 없었던 감관 표상을 산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 상상력과 가상
상상력의 제 작용을 고려해 볼 때, 경험적 가상(오류)의 원천은 상상력의 종합활동이 부적합하게 이루어지는 경우에 발생한다고 보겠다. 즉, 예를 들어 모상작용의 경우에 상상력이 감각의 다양을 미쳐 종합하지 못한 상태 또는 부정확한 종합(예를 들어 시각상의 착각)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임의의 개념을 적용하여 판단하거나, 모상은 제대로 형성되었으나 재상작용을 할 때, 착각이 발생하는 경우(잘못된 기억)를 들 수 있다. 또한 예상 작용에 있어서 다른 표상을 미리 적용할 때(부적절한 표상이나 지식의 적용) 역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칸트가 모상, 재상, 예상능력을 재생적 상상력으로 분류하고, 이를 연상법칙에 종속된 상상력으로 구분하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일반적으로 경험적 가상은 연상법칙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상상력이 활동할 때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칸트가 생산적 상상력으로 분류한 환상, 대조상, 완성상, 근원상 작용에서도 오류는 발생할 것이다. 환상이란 그 자체로 그에 상응하는 경험적 개념이 없다는 점에서 이미 가상이다. 완성상의 경우 우리가 대상의 일부만 보고, 나머지 부분을 예상하여 표상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 경우 대상이 통상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경우(이미 주어진 개념과 그 개념에 상응하는 감각상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 오류는 발생한다. 대조상은 대상과 표상이 서로 직접적으로 상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왜냐하면 특징화 능력이므로) 이미 그 자체로 가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가상의 발생과 관련한 이러한 상상력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칸트가 ‘판단력이 상상작용의 영향’을 받아 오류가 발생한다고 한 것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자. 판단력(Urteilskraft)이란 일반적으로 “특수를 보편 아래에 포함된 것으로 사유하는 능력”(KU Einl.ⅩⅩⅥ )으로 정의되고, 이는 다시 ‘규정적 판단력(bestimmende Urteilskraft)’과 ‘반성적 판단력(reflektierende Urteilskraft)’으로 구분된다. 규정적 판단력이란 “보편이 주어져 있는 경우, 특수를 이 보편 아래에 포섭하는 판단력(같은 곳)”을 말하고, 반성적 판단력은 “오직 특수만이 주어져 있고, 판단력이 이 특수에 대하여 보편을 찾아내야 할 경우(같은 곳)”의 판단력을 말한다.
이제 판단력이 이렇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면, 가상의 문제 역시 이에 따라 구분할 필요가 생긴다. 규정적 판단력의 경우라면, 상상력이 주어진 개념에 알맞은 방식으로 종합하지 못한 경우 또는 판단력이 상상력의 잘못된 종합에 영향을 받아서 부적절한 개념에 포섭하는 경우 가상이 발생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앞 절의 경험적 가상의 발생에 관한 설명은 바로 여기에만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반성적 판단력의 경우에는 그 정의상 주어진 보편은 없고 새로운 보편을 찾는 경우이기 때문에 반성적 판단력의 상황에서 활동하는 상상력의 표상과 그 표상에 대한 개념의 적용은 ―규정적 판단력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미 그 자체로 가상이라 하겠다.
이를 판단의 측면에서 보면 보다 분명해 진다. 규정적 판단력의 경우 상상력의 활동 결과는 이미 주어진 개념과 결합한다. 그리고 이 결합의 결과가 객관적으로 타당하다면 경험판단(Erfahrungsurteil)일 것이고 주관적으로만 타당하다면 지각판단(Wahrnehmungsurteil)일 것이다. 지각판단은 경험판단과 동일한 진리가를 가질 수도 있겠지만, 이는 우연한 일치일 뿐이고, 그런 우연한 일치가 아니라면, 지각판단은 가상을 양산할 것이다. 말하자면 규정적 판단력의 지평에서 등장하는 가상은 단지 진리에 반대되는 오류로서의 가상일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동일한 주관적 판단인 지각판단과 취미판단을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칸트는『형이상학 서론』에서 판단을 지각판단과 경험판단으로 구분하고서는 지각판단을 ‘단지 지각들을 비교하고, 나의 특정 상태의 의식과 결합하는 판단’이며, ‘지성의 순수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오직 사고하는 주관에서 지각들을 논리적으로 결합하는 것만을 필요로 하는 판단’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지각판단에 대한 칸트의 규정을 고려해 볼 때, 지각판단과 취미판단은 최소한 세 가지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양자는 모두 주관적 판단이며, 따라서 주관의 특정한 의식상태에 의거한 판단이다. 또한 양자는 모두 지성의 범주를 필요로 하지 않는 판단이라는 점에서도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공통성은 취미판단이 혹여 지각판단과 유사한 일종의 경험적 가상에 대한 판단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그러나 지각판단과 취미판단에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우선 지각판단은 주관적 판단에 불과하지만, 판단자는 주어진 감각을 객관과 관련시켜 판단을 내리는 것임에 반해, 취미판단은 주어진 감각을 오직 주관의 내적 상태하고만 관련시켜 판단을 내린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그런 점에서 전자는 객관적 인식을 향한 판단이고 후자는 주관적 감정에 관한 판단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지각판단은 규정적 국면에서 이루어지는 판단인데 반해, 취미판단은 반성적 국면에서 이루어지는 판단임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지각판단에서는 연상법칙에 따르는 재생적 상상력에 의해 직관의 다양이 종합되겠지만, 취미판단은 ―뒤에서 언급되겠지만― 생산적․자발적 상상력에 의해, 다른 말로 하자면 자유연상에 의거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따라서 대상에 대한 객관적·학적 인식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양자는 모두 가상에 대한 판단이겠지만, 그 성격은 종별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3. 예술적 가상과 상상력
칸트에 따르면, 연상법칙을 벗어난 상상력 또는 생산적 상상력의 어떤 활동은 예술적 표상들, 즉 미와 숭고에 대한 표상을 가능하게 해주는 근거가 된다. 이 표상들은, 학적 인식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대상을 그와 같은 방식으로 표상하는 것은 오류임에 틀림없기 때문에 가상이라는 칭호를 받아 마땅하다. 칸트는 이러한 예술적 가상에 대해『판단력 비판』의 제 1부인 ‘감성적 판단력의 비판’에서 다룬다. 예술적 가상, 즉 미와 숭고에 관한 칸트의 분석은 예의 그의 범주 체계에 따라 시도되는데, 성질 범주상 무관심성이, 분량 범주상 보편성이, 관계 범주상 합목적성이, 그리고 양상 범주상 필연성이 주장된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 규명에 있어서도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행하는데, 그것은 바로 미의 문제를 실체 또는 대상의 속성의 문제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판단의 문제로 다루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의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다.
1) 예술적 가상: 미와 숭고
1) 미와 상상력
칸트는 취미판단이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와 지성과의 조화’(KU 29)에 의해 성립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상상력의 자유 또는 자유로운 상상력의 유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서도 밝힌 바와 같이 칸트는 생산적 상상력과 재생적 상상력을 구분하였다. 그리고 이런 구분에 입각해 본다면 예술적 상상력은 우선 생산적 상상력으로 특징지워질 것이다. 이는 칸트가 취미판단의 제 1계기로 제시하는 ‘무관심성’을 고려해 본다면 보다 분명해진다. 관심(Interess)은 언제나 대상의 현존과 결부되어 있다(KU 5)고 정의되므로 ‘무관심성’이란 대상의 현존과 무관하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취미판단에 있어서 상상력은 대상의 현존없이도 상을 만들어 내는, 즉 연상의 법칙에 제한되지 않는 생산적 상상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형성능력 중에서 상상, 환상, 대조상, 완성상, 근원상의 능력 등이 생산적 상상력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란 이런 종류의 생산적 상상력의 활동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적 상상력의 또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새로운 도식(Schema)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라는 점이다. 칸트는 “어떻게 지성의 순수한 개념 속에 경험적 직관이 포섭될 수 있는가?”(KrV. B176)를 물으면서, 감성과 지성을 매개하는 표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한편으로는 지성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감성적인 표상이 필요한데, 이런 표상을 칸트는 도식이라고 한다.(KrV. B177 참조) 지성의 순수 개념, 즉 범주가 현상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초월적 시간 규정을 매개로 해서만 가능하다. 이 초월적 시간 규정이 곧 도식인데, 이 “도식은 그 자신으로는 언제나 단지 상상력의 소산”(KrV. B179)이다. 그런데 인식판단에 있어서 상상력은 지성의 순수개념에 적합한 도식만을 산출한다. 따라서 상상력의 순수한 자발성의 소산인 도식이 이 경우에는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고, 개념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이 도식은 취미판단에 고유한 상상력의 산물로 볼 수 없다. 다시 말해 인식판단의 경우 상상력은 지성의 개념에 적합하도록 종합작용을 행하지만, 취미판단에서는 상상력의 종합활동이 지성에 의해 제약되지 않는다. 즉 여기에서 자유로운 유희란 상상력의 종합활동에 있어서 “개념이 비결정적이거나 결정되어 있다하더라도 적용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연상의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운 예술적 상상력은 “현실의 자연이 그에게 부여하는 소재로부터 이를테면 하나의 다른 자연을 창조해내는 데 있어서 대단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KU 193, 필자 강조)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예술적 상상력은 직관의 다양을 종합함에 있어서 지성 개념에 의해 제약받지 않으므로 다양한 임의의 형식들을 산출해 볼 수가 있다. 이는 칸트가 지각의 예취(Antizipation)를 설명하면서 지각의 종합작용에는 정해진 순서가 없음을 언급한 점을 고려해 본다면 충분히 일리 있는 주장이다. 나아가 순수지성개념의 초월적 연역에서 칸트는 종합작용이 “시간 속에서 모든 표상들이 배치되고 결합하며 관계를 맺는”(KrV. A99) 것이라 하였고, 또한 도식이 시간규정으로 성립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예술적 상상력이란 “감각적 다양에 있어서 시간적 연속성의 조건을 산출해 내는 창조적 상상력”의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술적 상상력이란 결국 생산적 상상력이며, 이 때 생산적 상상력이란 기존 개념과는 무관한 새로운 도식을 산출하는 상상력을 말한다. 따라서 예술적 상상력은 시적 상상력에서 그 전형을 찾을 수 있는 창작능력(Dichtungsvermögen)으로서의 상상력으로 특징지워지며, 궁극적으로는 이념의 현시능력으로 특징지워진다. 그렇다하더라도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가 무제한적인 자유(unlimited freedom)를 의미하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제 3비판서 §22에서 칸트가 상상력의 자유는 그 어떤 형식과 합치해야 하며, 또 법칙에 대한 상상력의 자유로운 순응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사 미와 관련한 예술적 상상력이 ‘법칙에 대한 자유로운 순응’으로 특징지워진다 하더라도 이러한 상상력의 활동은 학적 인식의 관점에서 보자면, 한낱 가상에 불과할 것이다.
(2) 숭고와 상상력
“미에 관한 취미는 평정한 관조에 들어가 있는 마음을 전제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데 반해서, 숭고의 감정은 대상의 판정과 결부된 마음의 동요를 그 특성으로 가진다. 그러나 이 동요는 주관적 합목적적인 것으로 판정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상상력은 이 동요를 인식능력에 연관시키거나 또는 욕구능력에 연관시키거나 두 가지 중 하나이다.”(KU 80) 이와 같은 상상력의 정조(이론적 정조와 실천적 정조)에 따라 숭고는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로 구분된다. 그렇다면 숭고에 있어서 상상력은 어떠한 동요가 일어나는 것일까? 이 점에 대해서는 수학적 숭고에 등장하는 상상력의 활동을 중심으로 추적해 보자.
칸트는 숭고에 있어서 상상력의 동요를 포착(Apprehension)과 포괄(Komprehension) 활동을 가지고 설명한다. 포착이란 대상들에 대한 표상에 있어서 부분들을 먼저 표상하여 그것을 집적해나가는 방식을 말한다. 이에 반해 포괄이란 대상을 표상함에 있어 전체를 먼저 표상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포착을 통한 양의 집적과정이 어느 수준에 이르게 되면 포괄을 통한 양의 표상과 동일해진다. 이후에도 계속 포착이 진행되어 포괄능력을 초과하게 되면, 포착되어 들어오는 양만큼 상실하게 된다. 그런데 대상의 크기에 대한 논리적 표상에 있어서는 언제나 포괄된 전체를 단위량으로 생각하여 수개념을 통해 집적해 나가기 때문에 최대니 한계치니 하는 말들이 성립하지 않는다. 반면에 미감적(감성적, ästhetisch) 표상에 있어서는 포괄능력에 한계가 있으므로 최대 또는 한계치가 성립한다. 즉 논리적 포괄(comprehensio logica)은 수적 단위로 전환되어 유한량으로 표상되지만, 미감적(감성적) 포괄(comprehensio aesthetica)은 최대량, 즉 한계치로 표상된다(KU 86-7, 90-1 참조).
이제 미감적(감성적) 포괄에 있어서 한계가 표상된다는 것은 상상력이 자신의 능력을 아무리 확대하여도 포섭할 수 없는 경계선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 경계는 곧 상상력의 무능력(Unfähigkeit)을 의미하며, 이러한 무능력이 감정과 결부된다면, 불쾌감을 낳는다. 왜냐하면 미감적 판단에 있어서 쾌(Lust)란 칸트가 ‘미의 분석’에서도 설명하고 있듯이 인식 능력들의 일치에서 비롯하는데, 포괄능력을 초과하는 표상에 관해서는 이러한 일치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표상은 논리적으로 본다면 유한량이지만 미감적(감성적)으로 본다면 무한량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무한을 포섭하고 있는 이성의 이념(절대적 총체성, absolute Totalität)이 일깨워진다. 즉 미감적(감성적) 무한 표상의 경우, 이 무한이라는 표상은 지성 개념으로는 파악될 수 없기 때문에, 상상력과 지성은 불일치하고 이에 따라 불쾌의 감정이 생겨나지만, 그와 동시에 상상력은 언제나 총체성(Totalität)을 요구하는 또 하나의 능력인 이성과 일치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따라서 대상에 대한 미감적(감성적) 표상에 있어서 상상력의 포괄 범위를 벗어나 무한한 것으로 느껴지는 대상은 총체성(무한성)이라는 이념과 결부되고 여기에서 불쾌의 감정은 쾌의 감정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런 감정상의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을 빗대어 칸트는 숭고(das Erhabene)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숭고의 표상은 상상력에 대해서는 심연인 무한자에 대한 표상이다. 그러나 실상 그 대상을 (과)학적 인식의 관점에서 보자면, 칸트 자신도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유한자이다. 그런데 숭고는 이러한 유한자를 무한자로 표상함으로써 성립하며, 나아가 무한자로 표상된 유한자를 한번에 포괄할 수 없음으로 인해 이념을 덧씌우는 것이므로 숭고는 가상에 불과하다. 또한 숭고의 가상은 미의 가상과는 달리 대상의 몰형식성과 반목적성 그리고 무한정성에서 성립하고 이는 감정상 놀라움이나 공포로 다가온다. 따라서 숭고는 놀라움이나 공포로부터 비롯하는 가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예술적 가상의 진리적 성격
인간은 초험적 진리(사물 자체와 우리의 인식과의 일치)를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이 칸트의 기본 입장이고 우리가 이를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인식 일반이 상상력과 지성의 합치(보다 일반화한다면, 인식능력들 간의 일치)에서 성립한다는 칸트의 입론을 수용한다면, 그렇다면 상상력이 어떠한 방식으로 감각적 다양을 종합하고 또 그러한 종합이 어떠한 인식능력과 합치하느냐에 따라 다른 세계가 우리 앞에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들은 적어도 초험적 진리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아무런 우열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 자체는 우리의 인식능력 너머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오직 지성에 의해 파악된 인식만이 ‘진리’라는 말을 전유할 수 있는가 또는 상상력은 ‘진리’의 문제에서 언제나 배제되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이 문제는 상상력이 존재론과 관련하여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대해 재조명해 봄으로써 설명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만약 존재이해에 있어서 상상력이 지성보다 근원적 혹은 선차적이라면, 지성에 준거하지 않는 상상력의 종합 역시 지성에 준거한 상상력의 종합만큼이나 타당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와 관련한 이런 관점은 특히 하이데거에 의해 제기되므로 우리는 거기에서부터 출발하도록 하자.
1) 상상력과 존재론의 문제
하이데거는『순수이성비판』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칸트가 내린 직관에 대한 정의와 우월성(?)에 대한 언급에 주목한다.
인식이 대상에 관계하는 방식과 수단이 어떠하든 간에, 인식이 대상에 직접 관계하고 또 모든 사고가 그 수단으로서 구하고 있는 것은 직관이다.(KrV. B33 칸트 자신의 강조)
범주 자신은 사고형식 외에 다름아니요〔....〕범주로부터 우리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직관을 제거한다면, 범주는 저 순수한 감성적 형식보다 더 의의가 없다. 왜냐하면 감성적 형식을 통해서는 적어도 객관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지성에 고유한 다양의 결합방식은 만약 다양이 그 안에서 주어질 수 있는 직관이 부가되지 않는다면, 전혀 아무런 의의가 없는 것이다.(KrV. B306)
하이데거는 칸트의 이런 언급에 주목하여 “『순수이성비판』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이를테면 머리 속에 주입해야 할 점은, 인식활동은 일차적으로 직관활동이라는 사실이다. 이로써 분명해지는 점은, 인식을 판단(사유)으로 바꿔 해석하는 것은 칸트적 문제의 결정적 의미에 어긋난다”라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인간 인식이 언제나 직관을 향해있다는 점, 상상력만이 직관을 개념에 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도식없이는 개념이 직관을 규정할 수 없는데, 도식 역시 초월적 상상력의 작용이라는 점 등을 근거로 초월적 상상력을 ‘감성과 지성의 뿌리’라고 주장하고, 이런 관점에서 칸트가 시도한 존재론의 정초 작업을 순수 직관과 순수 사유를 초월적 상상력으로 환원하는 시도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예를 들어 메이트랜드는『순수이성비판』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 즉 상상력을 중심으로 한 존재론적 재해석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면서도 상상력의 존재론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다. 메이트랜드와 같은 비판이 성립하는 이유는 하이데거가 간과한 바가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칸트가『순수이성비판』에서 다룬 인식 이론은 ―『판단력비판』과 비교한다면― 규정적 인식의 이론이었다는 점이다.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규정적 인식에 있어서 상상력은 언제나 개념에 적합한 종합만을 행한다. 따라서 그가 생각하듯이 초월적 상상력에서 존재의 다른 국면(지성에 의해 은폐된 국면이 아닌)이 근원적으로 개시된다고 보기 어렵다. 즉 지성의 주권 하에 있는 상상력은 언제나 존재의 이론적․학적 인식의 국면만을 개시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존재론의 관점에서 상상력이 지성에 선행하는 우월성을 지녔다거나 지성에 의해 규정되는 바와는 다른 국면을 개시할 수 있다는 주장, 즉 “존재는 그 내용과 방식에서 순수 상상력의 순수 종합에 달려 있다”는 주장은 규정적 인식의 지평에서는 성립될 수 없다.
따라서 하이데거가『순수이성비판』의 작업을 “형이상학의 기초지움으로 해석하고 그럼으로써 형이상학의 문제를 기초존재론의 문제로 드러내기 위함”으로 규정하면서 칸트가 인식론을 가지고 형이상학을 대체하거나 극복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는 지적이 타당하다 할지라도, 그리고 존재의 문제와 관련하여 직관과 상상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에 있어서 타당성이 있다고 할지라도,『순수이성비판』에 의거하여 초월적 상상력을 존재 개시의 근본 능력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상상력이 존재의 또 다른 국면을 개시한다고 하는 주장은『판단력비판』, 즉 예술적 인식의 지평에서는 거론될 수 있고 또 거론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예술적 상상력은 주어진 개념에 의존함이 없이 자유롭게 존재를 개시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적 상상력에 대한 앞 절의 고찰은 존재론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열어 준다. 말하자면 하이데거가 칸트의『순수이성비판』에서 이끌어 내고자 하였던 바이기도 한 감성의 존재론을 구축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 준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론이 유의미해진다면, 예술적 가상 역시 일종의 진리임을 주장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 예술적 상상력의 초험적 성격과 가상
『순수이성비판』에 의거한다 하더라도 분명히 “상상력은 학적 인식의 내부에서 개념을 통한 범주적 종합을 선구성하는 기능을 한다.” 선구성적 기능이란 지성이 경험을 구성함에 앞서서 구성함을 말하고, 따라서 개념적․범주적 종합에 앞서는 선개념적(vorbegrifflich) ․선범주적(vorkategorisch) 종합을 말한다. 비록 학적 인식의 경우 상상력의 이러한 선구성적 종합이 근본적으로 개념에 의해 제약되기는 하지만, “상상력이 개념에 의한 적용영역을 산출한다”는 점에서, 즉 도식을 산출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상상력은 지성에 대해 선행함에 틀림없다. 단 이 경우 학적 인식에 있어서 상상력은 언제나 개념에 알맞은 종합을 수행할 따름이므로 다만 선행성만이 주장될 수 있을 뿐, 이것이 우월성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이에 반해 칸트가 규정적 판단력이 아닌 반성적 판단력에 대해 언급하였다는 것은, 다시 말해 그가 예술적 상상력을 초월적 도식작용에 국한시키지 않고 지성의 개념작용을 벗어난 자유롭고 창작적인 활동력으로 규정하였다는 것은 우리들의 경험 일반이 반드시 그리고 항상 지성(의 개념)에 의해 제한되는 것은 아님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세계에 있어서 인간 경험의 모든 국면이 범주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경험의 도덕적 차원과 감성적 차원은 이론적 지성에 의해 영원히 은폐된 존재의 어떤 국면을 개시할 수 있다는 것이 뒤따른다.”
반성적 판단력에 있어서 예술적 상상력의 작용이 개념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는 것은 마치 이성의 영역이 지성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는 것과 유사하며, 이런 의미에서 상상력과 이성은 모두 지성에 대해 초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적 상상력의 초험성은 이성의 초험성과는 다르다. 이성의 초험성은 언제나 지성에 의해 경험계(감성계)가 확정된 후에야 가능하다. 그러나 예술적 상상력의 초험성은 이중적이다. 즉 예술적 상상력은 한편으로는 지성의 개념 작용 이전에 그 개념으로부터 자유롭게 종합활동을 한다는 점에서(선행적이라는 점에서) 경험을 넘어서며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적 상상력의 자유로운 활동이 또 ‘하나의 다른 자연을 창조’하고, 이 자연이 지성에 의해 확정되는 합법칙적 경험 세계를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초험적이다. 따라서 예술적 상상력의 초험성은 선개념적(vorbegrifflich)이면서 동시에 초개념적(überbegrifflich)인 성격을 가진다.
우리가 여기에서 또 하나 유의해야 할 점은 설사 생산적 상상력에 의한 종합활동이라 할지라도 모상 작용 단계에서 이미 대상에 대한 선구성적(vorkonstitutiv) 작업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는 사물 자체(Ding an sich)에 의해 우리의 감관이 촉발되지만, 이 촉발을 표상함에 있어서 이미 상상력의 선구성적 개입이 일어나므로 인간은 영원히 사물 자체를 인식할 수가 없음을 의미한다. 즉 사물 자체의 불가지성은 지성이 감성적 직관만을 인식 대상으로 삼는다는 사실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이미 감성적 직관의 수용 그 자체에서 사물 자체는 상상력의 선구성적 개입에 의해 은폐된 채로 주관에 수용된다는 사실에 있다.
따라서 “초월적 상상력이 존재에 대해 선개념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 그래서 “미감적 경험이 자아와 세계의 기원에 대해 선개념적으로 개시”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할지라도, 이 주장이 곧 상상력에서 초험적 진리의 획득이 가능함으로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상상력의 상이한 종합방식에 따라 ―초험적 진리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각각 동등한 가치를 가지는 상이한 가상들이 개시되고,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상이한 가상들이기 때문에 각각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상이한 진리가 개시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5. 나오는 말
이제까지 우리는 칸트의 가상 개념과 그 가상의 원천으로서의 상상력을 이론적 상상력과 예술적 상상력으로 구분하여 고찰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고찰의 결과 상상력을 통한 존재의 상이한 드러남은 초험적 진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음을 보았다. 그러므로 예술에 대해 가상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것은 일면적 규정이다. 이러한 일면성은 리오타르가 “과학적 지식은 지식의 총체가 아니다. 그것은 일명 이야기적인, 뒤에서 그 특징이 고찰될 다른 종류의 지식과 항상 갈등적·경합적·부가적인 관계에 있다”고 하면서 과학적 지식의 부분성에 대해 언급한 것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니체에 대해 ‘그가 쇼펜하우어를 거치지 않고 칸트와 직접 대결하였다면, 자신이 ‘미란 선이나 진만큼이나 현존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바로 그것이 또한 ―비록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칸트의 견해이기도 하다는 점을 깨달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가 선이나 진만큼이나 현존하지 않는다’는 말은 역으로 ‘미가 선이나 진만큼이나 현존한다’는 의미가 된다. 확실히 칸트의 철학 전체를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칸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칸트의 철학은 하이데거적인 관점을 허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학적 인식의 관점에서 상상력의 어떤 작용들은 가상을 산출한다. 그리고 그 가상들이 학적 인식을 목표하는 경우 언제나 오류라는 명칭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다. 하지만 상상력의 또 다른 작용들은, 즉 예술적 상상력의 작용은 좀 다른 종류의 가상을 산출한다. 그것들은 대상에 대한 학적 인식을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에 가상임에는 분명하지만, 오류라는 굴레가 덧씌워지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이론적 가상과 같이 오류로서의 가상이 아니다. 오히려 진리로서의 가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경우 진리(Wahrheit)의 함의는 달라진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존재를 파악(규정)하는 것은 은폐이다. 그러나 존재를 느끼는 것, 존재와의 만남이 놀랍다는 것, 그것이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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