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하이데거의 칸트 해석 연구

나뭇잎숨결 2022. 2. 8. 18:49

하이데거의 칸트 해석 연구

- 미학적 논의를 중심으로 -

 

 

 

 

 

 

고려대학교 대학원

철 학 과

장   승   규

 

감사의 글

 

  이 작은 논문이 나오기 까지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었다. 먼저 논문을 지도해 주신 임홍빈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지난 1년 반 동안의 작업을 통해 하이데거적 언어의 굴레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의 매서운 질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어설프기 짝이없는 논문을 세세하게 검토해 주시고 애정어린 충고를 잊지 않으신 김상봉 선생님과 서울대학교의 박찬국 선생님께도 특별한 감사를 표한다. 특히 김상봉 선생님과 함께한 ?판단력 비판? 수업은 칸트 미학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생님이 보여주신 진지한 사고와 열린 마음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값진 교훈이었다. 오랜 동안 ?존재와 시간?을 함께 읽으며 정을 쌓아온 이병철, 임건태 兄도 빼놀 수 없다. 대학원에 들어온 첫 학기부터 여러모로 돌봐주신 兄들은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셨다. 철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잔인하기만한 이땅의 현실을 더욱 힘차게 헤쳐나가시리라 믿는다. 독일로 떠나며 귀중한 자료를 넘겨주신 세호 兄에게도 감사 드린다. 그러나 이 논문은 고향에 계신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두 분 형님과 누님의 결정적인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제는 이 분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인간으로 살기 위해 더욱 분발하리라는 소박한 다짐으로 미안한 마음을 대신하려한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마음 속 깊이 언제나 어깨를 함께하며 격려해준 淑敬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1999년 12월 27일 장 승 규

차       례

 

 

 

서   론 : 칸트 미학과 존재론의 문제                                               1

 

1부. 칸트 미학을 보는 하이데거의 근본 입장 : 미학비판과 존재물음                     6

     1장. 미학은 존재자를 주관의 감정 상태와 관련해 고찰한다                        6

     2장. ‘질료-형식틀’과 미학의 본질                                             7

     3장. 칸트의 존재 이해                                                      10

 

2부. 칸트 지각론과 감정론에 관한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해석                          14

     1장. 지 각                                                                14

         1절. 인간의 유한성과 지각의 구조                                        14

         2절. 존재론적 인식의 내적 가능성                                        18

         3절. 예술 작품과 세계의 근원적인 개방성                                  21

     2장. 감 정                                                                24

         1절. 무관심성이라는 조건아래서의 쾌 감정                                 24

         2절. 순수 감정과 그 본질 구조                                           27

         3절. ‘세계-내-존재’(In-der-Welt-sein)와 감정                             29

 

3부. 칸트의 ‘물러섬’과 하이데거의 존재사유                                        33

     1장. 칸트의 주관주의적 한계                                                33

     2장. 예술작품에서의 대지(Erde) 개념                                         36

 

결   론                                                                       39

 

참고 문헌                                                                     41

서론 : 칸트 미학과 존재론의 문제

 

  칸트 미학은 아름다움과 예술에 대한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해석이나 경험주의 미학을 넘어서 미적 자율성을 정초 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칸트 이후 미적 자율성은 근대적 합리성에 반대해 미학의 영역으로부터 삶의 총체성을 복원하려는 다양한 모색이 이루어지면서 오히려 비판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아름다움에서 참다운 인식이나 도덕적 가치를 더 이상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은 예술 자체의 가능성을 사멸시키는 요인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하이데거는 아름다움을 존재 진리의 차원에서 이해함으로써 칸트와는 전혀 다른 경향을 보여준다. 예술은 삶의 한 영역으로만 머물지 않고 현존의 존재론적인 근본 사건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은 존재 물음을 새롭게 제기한다는 하이데거의 근본적인 문제 설정 속에서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은 칸트 미학과의 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칸트 미학의 존재론적 재해석으로 간주될 수 있다.

  하이데거는 독일 관념론과 신칸트주의와는 다른 방향에서 칸트 철학을 해석한다. 독일 관념론이 선험적 자아의 문제를 중심으로 형이상학적 해석을 전개하는 반면, 신칸트주의는 칸트 철학을 자연과학의 토대를 정초 하는 인식론으로 이해한다. 특히 신칸트주의는 칸트가 전통 형이상학과 부정적 단절 관계에 있으며, ?순수이성비판?은 선험적 변증론을 통해 형이상학적 사고가 원칙적으로 불가능함을 입증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칸트 이론철학을 “경험이론”(Theorie der Erfahrung)으로만 보는 것은 칸트의 의도를 근본적으로 오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모색하고 있는 것은 인식론(Erkenntnistheorie)의 수립이 아니라 존재론, 즉 형이상학1)의 새로운 “정초”(Grundlegung)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이러한 문제설정은 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Kopernikanische Wendung)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다. 칸트는 모든 인식이 대상에 준거해야 한다는 종래 원칙을 폐기하고 오히려 대상이 우리 인식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혁명적 관점을 주장한다. 이것은 사물이 그 자체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경험 가능성을 형성하는 조건’을 통해서만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조건에 대한 앎은 대상의 존재적 인식(ontische Erkenntnis)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전에 대상에 관한 어떤 확정을 하는 것”2), 즉 경험독립적(a priori)3)인 존재론적 인식(onto-  logische Erkenntnis)이다. 보통은 주제적으로 의식되지 않지만 이러한 존재론적 인식이 모든 경험 속에서 이미 항상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대상과의 일치를 목표로하는 존재적 인식은 하나의 존재자가 존재자로서 앞서 개방되어야만, 즉 그 존재구성틀(Seinsverfassung) 속에서 인식되어야만 자신의 대상을 가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KPM 13)4). 하이데거에 따르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바로 이러한 존재론적 인식의 내적 가능성(innere Möglichkeit)에 대한 물음을 해명하려는 시도이다.

  칸트 철학을 평가하면서 하이데거는 선험적 상상력과 도식론(Schematismus)에 핵심적인 중요성을 부요한다5).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초판과 재판(再版)에서 선험적 상상력에 대한 상반된 해석을 전개한다. 초판에서 선험적 상상력은 감성이나 오성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유한한 인간존재의 근원적인 뿌리로 간주되는데 반해, 재판에서는 선험적 상상력의 자율성을 부정하며 오성 기능의 일부로 재규정되고 있다. 하이데거는 재판의 입장을 일종의 “물러섬”(Zurückweichen)으로 평가하며 칸트의 주관주의적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주장한다. 하이데거는 칸트가 전제하고 있는 주관주의적인 전통적 인간관(觀)에 대한 비판에 근거해 자신의 ‘기초존재론’(Funda- mentalontologie)에서 ‘현존재’(Dasein)라는 새로운 인간 해석을 제시한다.

  칸트 미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평가에서도 이러한 기본적인 관점이 그대로 관철된다. 칸트 미학의 평가와 관련해 다음의 두 곳에서 하이데거의 중요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하이데거는 “선험적 방법에 의해 미학 해석의 보다 크고 확실한 가능성을 얻었던 칸트조차도 근대적 주관 개념의 한계 안에 갇혀 있었다”6)고 지적한다. 하이데거는 예술의 본질을 “진리의 작품 속으로의 자기 정립”7)(Das Sich-ins-Werk-Setzen der Wahrheit)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진리’는 존재적 진리(ontische Wahrheit)가 아니라 존재론적 진리(ontologische Wahrheit)를 의미한다8). 따라서 선험적 방법으로 존재론적 인식의 내적 가능성을 묻는 칸트는 아름다움의 본질 해명에 가까이 다가갔던 셈이다. 둘째, 하이데거는 “판단력 비판에서 순수 상상력(reine Einbildungskraft)이 어떤 의미로 나타나는지, 특히 형이상학의 정초라는 앞서 언급된 특정한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지는 여기서〔?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 - 필자 추가〕 더 이상 설명될 수 없다”(KPM 155f.)고 말한다. 간접적인 언급이기는 하지만 ?순수이성비판? 초판․재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판단력비판?의 평가에서도 선험적 상상력이 그 근원성에서 해석되고 있는가 아니면 오성의 기능으로 환원되는가의 문제가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칸트는 아름다움을 상상력의 자유로운 놀이에서 오는 쾌감으로 설명한다. 물론 그러한 놀이는 오성의 합법칙성 일반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아름다운 예술작품은 다양한 표상들을 만들어내도록 상상력을 촉발함으로써 주관으로 하여금 연상법칙들   (Gesetze der Assoziation)에서 풀려난 자유를 느끼게 해준다9). 상상력이 자유롭게 만들어낸 표상들, 즉 미적 이념(ästhetische Idee)은 특정 개념으로 담아낼 수 없는 풍부함을 지닌다. 주관은 그러한 표상들을 통해 “언표할 수 없는”(unnennenbar) 많은 것을 “미전개된”(unentwickelt) 방식으로지만 사유하면서 인식능력의 활기를 얻는다(KU 197). 칸트 미학의 다른 주요 개념들은 바로 이러한 ‘사태’와의 연관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무관심성”(Interesselosigkeit)(KU 16)은 상상력의 자유를 위해 전제되는 것이며, “반성의 쾌감”(Lust der Reflexion)(KU 153)은 그러한 자유를 다른 측면에서 설명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쉴러가 무규정성(Unbestimmtheit)이 지배하는 태초 상태의 반복으로 규정하는 “미적 상태”10)(ästhetischer Zustand) 역시 동일한 사태를 겨냥하고 있다.

  그러나 칸트는 상상력의 자유와 관련된 문제들을 존재론과의 연관 속에서 다루지 않고 있다. 아름다움에서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도덕적 관심으로의 이행을 지나치게 무리한 비약 없이 가능하게 하는 역할”(KU 260)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성(Menschheit)이란 외적 강제에 영향받지 않는 자주적인 자기결정, 오성(이성)의 자발성의 완전한 구현에 있다는 칸트의 주관주의적 편향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오성(이성) 역시 선험적 상상력에 의해 근원적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칸트의 선험적 상상력은 궁극적으로는 하이데거에 의해 현존재의 근원적 시간성으로 환원된다.

  하이데거는 1936년 여름학기에 칸트의 미적 판단력 비판에 대한 세미나를 열었지만 그 내용은 아직 출간되지 않고 있다11). 따라서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이 칸트 미학과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지 하이데거 자신의 저술을 토대로 논의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칸트 미학을 단순히 ‘미학적’ 관심에 따라 해석하고 있지 않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칸트 철학의 전체적인 상황과 이에 대한 하이데거의 입장을 토대로 그의 예술철학의 전반적인 구도와 계기들을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는 셈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하이데거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을 전개하면서 다루는 지각과 감정의 문제에 주목한다. 지각과 감정은 전통적인 미학적 탐구에서 언제나 핵심적인 주제로 간주되어 왔으며 따라서 지각과 감정에 대한 하이데거의 존재론적인 해석은 미학과 미학적 태도를 그 토대에서부터 해체하는 작업으로 이해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기본적 관심 속에서 첫째, 칸트의 선험 철학적 방법이 어떤 점에서 아름다움과 예술의 본질 해명을 위한 ‘보다 크고 확실한 가능성’을 부여하는가? 둘째, 칸트가 이러한 가능성을 충분히 전개시키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가? 셋째, 칸트 미학에 대한 이러한 반성은 하이데거 자신의 예술철학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 하는 물음들을 제기하고 논의할 것이다. 우리는 칸트 미학과 하이데거 예술철학 사이의 관계를 구명하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미학의 극복변형12)(Verwindung)을 통한 존재망각의 극복 가능성 모색’이라는 하이데거 예술철학의 핵심동인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기대한다.

  1부에서는 칸트 미학을 해석하는 하이데거의 근본 입장을 미학비판과 이를 통한 존재물음의 제기라는 관점에서 정리한다. 먼저 미학의 성격을 규정한 후(1장), ‘질료-형식’이라는 미학의 주요도식을 통해 미학의 본질을 분석하고(2장), 칸트가 과연 존재론적 물음을 설정하고 있었는가에 대한 하이데거의 논의를 살펴봄으로써 하이데거의 칸트 해석이 극복-변형의 관점에 서있음을 밝힌다(3장). 2부에서는 지각과 감정으로 나누어 칸트의 논의와 이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 그리고 미학과의 연관성을 살펴본다. 지각에서는 먼저 지각의 복잡한 구조가 인간의 유한성에서 비롯됨을 제시하고(1절), 존재론적 지평의 문제(2절)와 이와 관련해서 예술작품이 지니는 의미(3절)가 분석된다. 감정에서는 칸트 미학에서 감정의 의미를 살펴보고(1절), 이와는 구별되는 존경에 대한 칸트의 논의와 이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2절), 그리고 칸트의 감정에 대한 하이데거의 존재론적인 해석(3절)이 논의된다. 3부에서는 칸트가 지닌 주관주의적인 한계와 이와 관련해 예술작품에서 대지(Erde) 개념이 지닌 의미에 대해 살펴본다. 먼저 칸트가 ‘고대 존재론’에 기반하는 전통적인 존재 이해와 이성중심주의적인 인간 이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지적한 후(1장), 주관성을 포기하는 새로운 사유의 어려움과 예술작품은 ‘대지’가 고유하게 보존될 때에만 세계를 ‘열어놓는’ 본질적인 힘을 지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2장).  

1부. 칸트 미학을 보는 하이데거의 근본 입장 : 미학비판과 존재물음

 

1장. 미학은 존재자를 주관의 감정 상태와 관련해 고찰한다

  미학(Ästhetik)은 오늘날 아름다움과 예술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포괄하는 명칭으로 폭넓게 사용되고 있지만, 그 명칭이 주제가 되는 사태와 어울리지 못한다는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헤겔은 ?미학강의?에서 미학(Ästhetik)이란 정확히 말하자면 “감각, 즉 감수성에 관한 학문”이란 뜻이며 “그 기원은 예술 작품에서 우러나는 쾌적함, 경탄, 공포, 연민 따위의 감정을 근거로 예술 작품을 고찰하려던 시기에 유행했던 독일의 볼프학파에게서 찾을 수 있다”13)고 말한다. 이에 반해 ?미학 강의?에서 다루는 자신의 논의는 ‘미학’ 보다는 “예술철학”(Philosophie der Kunst)이라고 불러야 하지만 용어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미학이라는 명칭을 고수한다고 밝히고 있다. 예술 작품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자신의 철학 체계의 핵심 부분으로 삼은 셸링은 미학이라는 명칭을 ‘철두철미하게’ 거부하고 예술철학이라는 명칭을 일관되게 사용한다. 이들은 미학이 18세기에 들어서 등장한 경향이며 그것으로는 아름다움과 예술의 본질 해명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공통된 이해를 보여준다.

  하이데거는 이들과 미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공유하지만 미학의 본질을 보다 예리하게 파악한다. 미학적 문제 설정이 헤겔과 셸링의 비판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제는 아름다움과 예술에 대한 논의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은 미학적 태도가 단순한 비판이나 배척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예술을 사멸시키는”(UK 67) 미학의 참다운 극복은 미학이라는 명칭이 아니라 미학적 태도의 뿌리를 밝혀내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본다. 미학의 근원을 밝히려는 하이데거의 탐구는 ?존재와 시간?의 바탕에 놓인 ‘존재 망각’(Seinsvergessenheit)이라는 근본 경험14)에 대한 성찰을 기반으로 전개된다. 존재를 말하는 곳에서 사실은 언제나 존재자만을 생각하고, 존재를 그 자체로 사유하지 못한다는 ‘기이한 혼동’15)이 미학적 태도를 움직이는 숨은 동력임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미학을 무엇보다도 존재와 존재자를 해석하는 근본 태도와 관련지어 분석한다. 미학은 주관의 감정상태(Gefühlszustand)에 근거해 존재자를 고찰하는 독특한 태도를 보여준다(NI 90 참조). 아름다운 예술작품은 주관에게 미학적 고찰의 대상이 되는 특정한 감정 상태를 불러일으킨다. 논리적 관계와는 분명하게 구별되지만 어떤 ‘느낌의 관계’가 대상과 주관의 감정상태 사이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 관계를 해명하는 작업이 미학의 중심 과제를 구성한다.

  하이데거의 비판은 그러한 과제를 수행하는 미학의 ‘기이한’ 태도를 겨냥한다. 미학은 항상 대상과 관련해 만들어지는 ‘관계’의 존재적(ontisch) 측면에만 주목하고 관계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ontologisch) 측면은 다루지 않는다. 미학이 무엇보다도 감정 상태를 중시해 주관의 감정상태를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 지각의 구조나 감정의 본질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은 결여하거나 충분히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감정을 자명한 사태로 간주하고 감정의 분류 목록을 다양하게 작성하는 작업이 진정한 분석은 아니라고 비판한다16).

  이처럼 존재론을 결여한, 바꿔 말하면 존재망각(Seinsvergessenheit)이라는 고유한 존재론을 지니고 있는 미학은 대상과 주관의 감정상태 사이에서 ‘자극-반응’만을 유일한 관계로 발견한다. 미학은 ‘어떤 각도의 직선이 인간에게 가장 고급의 쾌감을 주는가’ 따위의 연구만을 자신의 임무로 삼게된다. 감정상태를 신경조직의 흥분과 신체 상태로 설명하는 니체의 예술 생리학이 바로 그러한 미학의 최후 형태를 보여준다(NI 108)17). 따라서 미학은 존재 물음18)(Seinsfrage)을 새롭게 제기하기 위해서는 극복해야만 하는 대상으로 간주된다. 「질료-형식」이라는 미학의 기본 설명틀은 존재와 존재자에 대한 ‘미학적 태도’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2장. ‘질료-형식틀’과 미학의 본질

  예술작품을 질료와 형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미학의 영역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설명 도식이지만 그 적절성과 관련해서는 ‘미학’이라는 명칭만큼이나 자주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논란은 질료와 형식을 나누는 방식으로는 아름다움과 예술의 진정한 본질을 제대로 포착할 수 없다는 근본적인 회의에서 비롯된다. 아름다움이란 본질적으로 질료에 근거하는가, 아니면 형식이나 질료와 형식의 상호작용에 근거하는가? 구체적인 예술작품에서 어떤 것이 질료이고 어떤 것이 형식인지를 실제로 구분할 수 있는가? 우리는 암묵적으로 질료를 비이성적인 것, 형식을 이성적인 것으로 상정하고 질료보다는 형식을 중심 항으로 삼는데 이것은 이성 중심주의의 표현은 아닌가?(UK 12) 이러한 의문들은 질료와 형식이라는 자명해 보이는 구분이 사실은 매우 의심스러운 것임을 보여준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질료-형식틀’(Stoff-Form Gefüge)19)은 대부분의 미학이론에서 발견되는 기본 도식이며, 이와 관련해 제기되는 지속적인 회의는 그 개념틀의 본질유래를 밝힘으로써 해명될 수 있다. 질료(Stoff)-형식(Form)이라는 표현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휠레(ὕλη)-모르페(μορϕἠ), 그리고 이것의 라틴어 번역어인 마테리아(materia)-포르마(forma)에서 비롯되었다. 질료-형식틀의 최초 형태인 휠레-모르페 개념쌍 속에는 플라톤에 의해 세워진 존재자의 존재를 형상(εἷδος)과 이데아(ἰδέα)로 보는 특정한 존재자관(觀)이 내포되어있다.

  플라톤의 새로운 존재자관은 존재자의 존재를 퓌시스(ϕύσις)로 보던 초기 그리스인들의 근본 경험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이탈과 함께 그 후 서양 역사의 전 기간 동안 유지되는 존재 해석의 방향이 결정되었다고 주장한다. 퓌시스란 “본래대로 자라나고, 어떤 것에 압박 받지 않고 솟아오르며 생겨난 것, 그 스스로 돌아오고 지나가는 것”(NI 95)을 뜻한다. 이것은 그리스인들이 존재자를 自然, 즉 스스로 그러한 것으로 보았다는 것을 말한다. 이에 반해 형상과 이데아는 감각기관으로서의 시각을 비롯해 “알아차릴 수 있는”(vernehmbar) 모든 것에 대해 “보여진 것”, “어떤 사물이 보여주고자 하는 모습”20)을 뜻한다. 하나의 존재자는 이러한 보임새(Aussehen)에 의해 바로 그러한 존재자로서 존재하게 되므로 보임새가 그 사물의 원형(Urbild)이자 실체(οὐσία), 즉 본질로 간주된다. 이처럼 미학에서 통용되는 질료-형식틀은 퓌시스에서 이데아로의 전환이라는 존재해석상의 근본 사건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전환에서 중요한 것은 플라톤이 퓌시스를 이데아로 특징지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앞으로의 존재 해석에서 특정한 해석만이 유일한 것으로 남게 된다는 사실이다.  존재를 이데아로 보는 것 자체가 존재망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해석도 퓌시스라는 근본 경험의 결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데아로의 존재 해석은 이데아, 즉 본질(Wassein, 무엇임)만이 ‘있음’이며 그 밖의 것은 순수한 보임새의 실현을 방해하는 ‘있지 말아야 할 것’, 또는 ‘정말로는 있지 않은 것’이라는 주장으로 확대된다. 이와 함께 원형과 모방(Nachbild), 복사(Abbild)라는 분열과 위계 질서의 발생이 뒤따른다21).

  하이데거는 플라톤 존재 해석의 핵심 동인을 ‘제작’ 모형에서 찾는다. 제작은 무엇인가를 머리 속에 그려보는 데서 시작된다. 이렇게 미리 그려진 표본은 제작될 존재자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지를 앞서 규정한다. 제작이란 바로 그러한 형상을 질료 속에서 구현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제작 활동으로 방향 잡혀 존재자를 형식화된 질료로 보는 이러한 설명 방식은 만물을 신의 피조물로 보는 성서적 관점에 의해 확산되고, 종교의 지배가 사라진 후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된다. 질료-형식틀은 비이성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이라는 구분이 결부되면서 주체-객체 연관이라는 강력한 개념 장치로 작용하게 된다(UK 12 참조).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고호의 그림 「농부의 신발」을 분석하면서 특정한 존재 해석에 근거하는 질료-형식틀이 존재자의 본질 해명에 적합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UK 18이하). 신발이라는 존재자는 발에 신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사물로 고유한 ‘용도성’(Dienlichkeit)이 재료의 선택, 형태의 구성등 그 사물 자체를 속속들이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러한 신발이 지닌 특정한 용도성과 퓌시스에 귀속하는 ‘신뢰성’(Verläßlichkeit)을 구분한다. 신발의 용도성은 본질적으로 신뢰성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존재와 시간?의 논의 맥락을 따른다면 앞서 개방된 ‘사용사태전체성’(Bewandtnisganzheit) 속에서만 도구는 자신의 개별적인 용도성을 지닐 수 있다22). 그러나 질료-형상틀은 신발 자신이 발원하는 그러한 신뢰성은 사상(捨象)한 채 “적나라한 용도성”만을 보여준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하나의 존재자가 참으로 무엇인지는 “보임새, 이데아를 보는 것을 통해서는 결코 경험되지 않으며 하물며 사태에 적합하게 사유되지도 않는다”23)고 주장한다24).

3장. 칸트의 존재 이해

  앞에서 우리는 미학이 존재를 이데아로 해석하는 고대 존재론의 기반 위에 서 있음을 질료-형식틀에 대한 분석을 통해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존재자를 질료와 형식으로 나누는 설명방식에서 중심에 놓이는 것은 대부분 질료를 ‘규정하는’ 형식이다. 칸트의 경우 주관이 수행하는 자발적인 활동이 바로 그러한 형식을 부여한다. 칸트는 질료, 또는 질료의 수동적인 수용에서는 인식도, 도덕성도 결코 얻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칸트 철학이 질료-형식틀을 근간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고대 존재론의 존재 해석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아름다움을 대상의 형식에 근거하는 쾌감으로 설명하는 칸트의 접근방법 역시 하이데거의 입장과는 상당한 거리를 보여준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칸트 철학이 일면적인 평가를 허용하지 않는 복합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하고 칸트를 존재사유의 길과 마주한 “첫 번째이자 유일한 사람”25)으로 부각시키기까지 한다. 그러한 평가는 대부분 ?순수이성비판? 초판에서 이루어지는 선험적 상상력(transzendentale Einbildungskraft)에 대한 분석과 관계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전개되는 현존재의 시간성(Zeitlichkeit)에 대한 탐구를 칸트의 선험적 상상력에 대한 논의의 확대, 심화로 본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칸트가 “인간 영혼에 깊숙이 감추어져 있는 기술”26)을 처음 발견했지만 결국은 그 앞에서 물러섰다고 보고, 칸트와의 대결을 존재론 역사의 해체라는 자신의 작업에서 중심적인 과제로 설정한다27). 여기에서는 우선 “존재는 실재적 술어(reales Prädikat)가 아니다”라는 ?순수이성비판? 「선험적 변증론」에서의 주장을 중심으로 칸트의 존재 이해와 그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28)을 살펴보기로 한다.

  중세 존재론의 다양한 입장들은 존재자의 본질(essentia)과 현존29)(existentia)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구별된다. 존재자의 존재를 이데아, 즉 본질(무엇임)로 보는 고대 존재론에서 벗어나 현존의 해명이 문제된 것은 신이 만물을 창조했다는 종교적 교리의 정당화와 관련된 측면이 크다. 한 사물의 현존(있음)을 위해서는 본질(무엇임)이외에도 현존의 원인을 필요로 한다. 신이란 현존의 원인을 자신밖에 따로 가져야 하는 피조물과는 달리 자신의 본질(무엇임)이 이미 현존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피조물의 현존 원인이 될 수 있는 존재로 설정된다. 칸트가 앞서 언급한 자신의 존재 이해를 제시하는 것은 신의 완전성 개념에서부터 그 현존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는 전통적인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의 불가능성을 논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칸트는 “이러저러한 사물이 현존한다”(dieses oder jenes Ding existiert)는 말은 그 사물의 본질(무엇임)에 새로운 내용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가능한 백 탈러(Taler)는 현실적인 백 탈러와 그 개념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동일한 것이다. 이처럼 존재는 실재적 술어(reales Prädikat)가 아니기 때문에 신이 개념상 최고 실재성(höchste Realität)의 존재라고 하더라도 신의 현존 여부는 여전히 결정되지 않은 채 남아 있게 된다. 이러한 칸트의 논증은 존재에 실재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형이상학적 시도들을 비판하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중요한 전거(典據)로 사용되어 왔다. 존재가 실재적 술어가 아니라는 것은 곧 존재란 연계사로서의 서술적 의미만을 지닌다는 주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념의 사례(instance)가 있음”30)이 칸트가 이해한 존재 의미의 전부인가는 의문이다. 문제되는 문장에 바로 이어서 존재에 대한 적극적인(positiv) 규정이 제시되고 있다.

 

존재는 명백히 실재적 술어가 아니다. 즉 한 사물의 개념에 추가 될 수 있는 어떤 개념이 아니다. 존재는 단순히 사물 또는 어떤 규정들의 정립(Position) 자체일 뿐이다.(KrV 626, 강조, 번역 필자)31)

 

  하이데거는 “존재는 실재적 술어가 아니다”라는 앞 명제의 경우 존재론적 차이   (ontologische Differenz)를 표명한 것으로 간주한다. 존재(있음)은 존재자(있는것)의 본질(무엇임)과 단적으로 구별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어떻든 칸트는 이미 갖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명제에서는 ‘정립(Position) 자체’라는 말이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하이데거는 칸트가 말하는 실재성(Realität)이 요즘의 일반적인 용법과는 달라 혼란에 빠지기 쉽다고 지적한다. 칸트에게 실재성은 무엇(Was), 무엇임(Washeit), 사태내용(Sachgehalt)과 관련된다32). 이에 반해 현실성(Wirklichkeit)은 개념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그 사물이 주어져 있는가의 여부만을 나타낸다. 앞에서 예로 든 가능적 백 탈러와 현실적인 백 탈러의 경우 그 둘은 실재성의 측면에서는 동일하지만 현실성의 측면에서는 상이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는 실재적 술어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존재는 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이라는 뜻으로 본다. 현실성은 다름아니라 지각(Wahrnehmung)과 사물의 연관을 말한다33). 사물의 존재(현존)는 그 사물의 지각과 함께 정립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분석에 따르면 칸트는 지각을 ‘지각되어있음’(Wahrgenomenes), ‘지각함’ (Wahrnehmen)이라는 존재적 차원을 너머 지각의 존재론적 구조, 즉 지향적 향해있음(Sichausrichten auf)으로 이해하는 데까지 나아갔다34). 존재를 단순한 지각 현상과 결부시키는 것은 지각의 존재론적 구조에 대한 논의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개념의 사례’로 보는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하이데거는 선험적 상상력을 감성과 오성의 공통뿌리로 보는 칸트의 논의를 재해석함으로써 “칸트가 비록 분명하게 보지는 못했지만” 그러한 이해의  차원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2부. 칸트 지각론과 감정론에 관한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해석

 

1장. 지 각

  1절. 인간의 유한성과 지각의 구조

  주관의 감정상태와 관련해 존재자를 고찰하는 미학적 탐구에서 지각(Wahrnehm-  ung)과 감정(Gefühl) 사이에 형성되는 관계를 해명하는 것은 중심적인 주제중 하나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미학은 지각과 감정간의 관계를 설명하는데서 난관에 봉착한다. 탐구대상이 되는 관계 자체가 규칙적인 설명틀을 거부하는 ‘임의성’의 성격을 뚜렷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미학적인 탐구 노력이 아름다움과 예술의 본질에 관해 아직까지 만족할 만한 답변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미학자들의 무능력이 아니라, 근본적인 물음 설정의 오류에 기인하는 것일 수 있다. 미학적 탐구에서 지각은 주어진 대상을 받아들이는 수동적 기능으로만 고찰된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인식은 수용성인 감성을 통해 받아들여진 재료를 자발성인 오성이 종합하고 ‘가공’함으로써 이루어지며, 지각은 수용성인 감성에 속한다는 이해 방식에 근거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칸트 철학은 능동성과 수동성이라는 이러한 이원 구조를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이론체계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러한 피상적인 이해가 칸트 철학의 존재론적 해석 가능성을 처음부터 가로막고, 인식이론으로의 해석을 부추긴다고 지적한다. 여기서는 칸트 지각론을 존재론적으로 재해석하는 하이데거의 논의를 살펴봄으로써 아름다움과 예술의 본질 해명을 위해 미학적 문제설정이 어떻게 극복변형되어야 하는지 제시해보려고 시도할 것이다. 하이데거는 칸트의 지각론 자체가 존재론적인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칸트가 이미 처음으로 지각35)에 대한 존재론적이고 비감각주의적인 인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KPM 26).

  하이데거는 칸트 해석과 관련해 오랫동안 문제되어온 감성과 오성의 매개 문제는 선행하는 고립화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감성과 오성은 비로소 매개되어야만 하는 상호 분리된 두 기능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칸트 철학에서 감성은 자발적 수용성(spontane Rezeptivität)을, 오성은 수용적 자발성(rezeptive Spontaneität)을 지니며 이들은 모두 선험적 상상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해 하이데거는 근본능력의 삼원성36)(Dreiheit der Grundvermögen)과 줄기의 이원성37)(Zweiheit der Stämme)에 대한 칸트의 주장에 주목한다. 하이데거는 감성이나 오성과는 달리 선험적 상상력에게 고향이 없는 것은 이들이 공통된 뿌리, 즉 선험적 상상력에서 성장했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것이라고 이해한다(KPM 133). 감성에서 경험적 직관의 측면에만 주목해 수용성을 강조하고, 오성에서 자발성의 측면만을 부각시킴으로써 전혀 이질적인 두 능력으로 설정하는 것은 칸트의 본래 의도를 왜곡하는 것이 된다. 오성은 순수 자발성이 아니며, 감성 역시 순수 수용성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지각 작용에서 단순한 기계적 수용 이상의 자발성이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감성론의 첫머리에서 인간의 유한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식이 대상에 관계하는 방식과 수단이 어떠하든 간에, 그것을 통해 인식이 대상에 직접적으로 관계하고, 모든 사고가 수단으로서 겨냥하는 것은 직관이다. 직관은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일은 적어도 우리 인간에게는 대상이 어떤 방식으로 심성(Gemüt)을 촉발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KrV 33, 최재희 번역을  필자가 일부 수정)38)

 

하이데거는 여기서 칸트 철학의 두 가지 핵심적인 원칙이 제시되고 있다고 본다(KPM 21이하 참조). 먼저 모든 사유는 궁극적으로는 직관(Anschauung)을 위한 임무를 지닌다는 점이 분명하게 강조되어야 한다. 인간의 ‘고급능력’으로 간주되는 사유 역시 직관을 위해 봉사한다. 다음으로 인간이 유한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과장되어서는 안된다. 인간은 존재자들을 스스로 창조하면서 앞서 전체적으로 통찰하는 신의 무한 직관(unendliche Anschauung)이 아니라 주어지는 대상만을 부분적으로 알 수 있는 유한 직관만을 지니고 있다39). 따라서 인간의 직관행위는 대상이 그 자신의 편에서 주어져야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인간은 직관에 오성 규정을 부여함으로써 다른 사람과 그때그때의 직관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사유 자체는 여전히 인간 유한성의 징표로 남는다. 인간 직관의 유한성에 속할 뿐만 아니라, 직관이 갖는 직접성을 결여하고 있는 한, 사유는 그 자체 직관보다 더 유한한 것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 ‘신은 사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대상을 직접 창조하지 못하고 언제나 주어지는 대상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유한 직관의 이러한 수용적 특성 때문에 인간은 복잡한 지각 구조를 갖게 된다. 먼저 스스로 나타나는 대상을 받아들이는 기관으로서 감관이 필요하다. 하이데거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이 감관을 가졌기 때문에 수용적인 것이 아니라 수용적이라는 인간의 유한성이 감관을 비로소 존재론적으로 가능하게 한다. ‘감관도구들’(Sinneswerkzeuge)은 자극을 통해 ‘이미 존재하는 존재자’(das schon Seiende)들 한가운데 있으면서 그것들을 받아들인다(KPM 25 참조).

  여기서 ‘감관은 이미 존재하는 존재자를 받아들인다’는 주장은 좀더 자세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 하이데거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단순한 음향이 아니라 프로펠러의 모터 소리를 듣는다(UK 90). 이것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근원 사실(Fact)로서의 음향을 먼저 듣고 이것을 오성이 비교․종합한 뒤에야 비로소 그 음향이 프로펠러의 모터 소리임을 알게된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다. 단순한 음향 자체를 듣기 위해서는 오히려 추상적으로 듣거나, 기계적인 조작을 거쳐 들어야만 한다. 지각은 이처럼 그 본질구조상 하나의 존재자를 향해 처음부터 일정하게 방향 잡혀 있다.

 

유한하게 인식하는 존재가 자기 자신도 아니고, 스스로 창조한 것도 아닌 존재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이미 현존하는 존재자(schon vorhandene Seiende)가 스스로 나타날 수 있을 때뿐이다. (...) 유한한 존재는 마주서게하는 어디어디로 향함(entgegenstehenlassenden Zuwendeung-zu...)이라는 근본 능력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근원적인 향함 속에서 유한 존재는 비로소 어떤 것에 “조응”(korrespondieren)할 수 있는 하나의 활동 공간(Spielraum)을 갖게 된다.(KPM 67, 강조, 생략, 번역 필자)

 

이처럼 ‘향함’(Zuwendung)이 인간 지각의 근본 구조이지만, 그것 자체는 지각 가능한 어떤  존재자가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는 무(Nichts)와 같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무(無)에 의해서만 ‘무가 아닌 것’(nicht-Nichts), 즉 존재자와 관계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 무(無)는 절대적인 무(nihil absolutum)가 아닌 셈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무와 같지만 지각의 가능성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그러한 ‘어떤 것’(etwas)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지각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의 궁극적인 과제이다.

  먼저 구체적인 지각과정을 분석해 보기로 하자. 주관은 처음에는 무수한 감각의 쇄도 속에 놓여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주관에게는 무의미한 이러한 감각의 맹목적인 쇄도로부터 지각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감각 다양이 의미 단위로 묶여야 한다. 그러나 감각들은 스스로는 결합하지 못한다. 칸트는 “감관이 인상을 줄 뿐만 아니라 인상을 결합해서 대상의 심상을 성립시킨다고 믿는 것”은 오해이며 “심상의 성립을 위해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인상의 감수성외에 그 이상의 것, 즉 인상들을 종합하는 작용”(KrV A120)이 요구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아무런 노력 없이 대상이 통째로 주어진다고 은연중에 가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지각의 분석에서 문제되고 있는 것은 감성에 주어진 개별자(이미 그러한 것으로 존재하는)를 오성에 의해 보편자와 관련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자가 바로 그러한 존재자로서 존재하게 되는 근원적인 과정을 해명하는 것이다. 직관에서의 포착(Apprehension), 상상력에서의 재생(Reproduktion), 개념에서의 재인(Rekognition)이라는 삼중적인 종합을 통해 감각 인상들의 결합이 이루어진다(KrV A97 참조).

  하이데거는 이들이 상호 분리된 독립적인 공정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포착은 재생에 의존하며, 재상은 재인에 의존하고, 또한 재인은 포착에 의존한다. 감각 다양이 직관되기 위해서는 우선 다양한 것을 훑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한 개관(Sy-nopsis)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인상들은 다양으로 표상될 수도 없고, 다른 것들과 관계를 맺지 못한 순간들의 연속으로 남게 될 뿐이다(KrV A99). 인상들을 포착해 하나의 심상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상상력의 활동이 개입한다. 선행하는 표상을 잊어버리고, 다음 표상에로 전진해 가면서 선행 표상을 재생하지 않는다면 개관은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포착은 재생과 불가분 하게 결합되어 있다. 또 한편으로는 표상들이 무차별적으로 재생된다면 그 표상들 사이에서는 어떠한 연관도 발생하지 못하며 무규칙적인 집적만 남게될 것이다. 개념이 표상의 결합에 필연성을 부여한다.

  하이데거는 지각 작용에서 ‘자기 자신도 아니고, 스스로 창조한 것도 아닌’ 존재자가 지각된다고 말한다. 주관이 마음대로 조작할 수 없는 어떤 통일성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존재자를 ‘대-상’(Gegen-stand)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대상의 ‘대립’(Dawider)성격은 주관에 쇄도하는 감각 자체로부터는 결코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경험을 통해서는 필연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관 자신의 변양일 뿐인 감각에서부터 자체 통일성을 지닌 대상의 의미가 발생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러한 통일성이 앞서 전제되어야만 한다. 즉 포착과 재생을 이끄는 통일성으로서 개념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단순한 음향이 아니라 프로펠러의 모터 소리를 듣는 것이라는 하이데거의 앞서 언급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개념은 지각 작용에서 마지막 자리에 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미리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한 개념의 통일성이 주어져있지 않다면 기초적인 지각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40)

  2절. 존재론적 인식의 내적 가능성

  칸트는 지각을 단순히 존재적 작용연관으로만 보는 감각주의적(sensualistisch) 해석에서 벗어나 ‘~로 향함’(Zuwendung zu…)이라는 지각의 존재론적인 구조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지각 작용의 완전한 해명을 위해서는 그러한 존재론적 구조의 전체적인 윤곽과 계기들이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각에 대한 이러한 더 진전된 분석은 우선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지향적으로 향해있음이 지각을 가능하게 하지만 향해있음 자체는 지각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칸트 자신이 ?순수이성비판?에서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는 형이상학적 사고는 필연적으로 변증에 빠진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칸트가 경험독립적인 ‘존재적 인식’이 불가능함을 논증하는데서 멈추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선험적 상상력의 도식작용에 대한 짧지만 핵심적인 논의에서 칸트가 다루는 본래적인 물음은 바로 경험독립적인 ‘존재론적 인식’을 추구하는 새로운 존재론, 즉 새로운 형이상학의 내적 가능성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존재론적 인식의 내적 가능성에 대한 물음은 지각의 본질 구조에 대한 해명과 따로 떨어져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지각의 존재론적 성격에 따라 그러한 인식의 가능성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지각 작용은 앞서 주어진 개념의 통일성에 의해 주도된다. 그러나 지각에서 이러한 개념의 주도성이 곧 개념을 형성하는 오성 활동의 우월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개념 형성은 반성(Reflexion) 자체의 본질 구조인 순수 개념(범주)에 의해 규정된다. 개별적인 경험적 개념의 가능성은 열린 채 있지만, 그러한 가능성의 조건 자체는 근원적인 차원에서 제약되어 있다. 게다가 하이데거는 순수 오성을 선험적 상상력41)으로 환원해 설명하려고 시도한다(KPM 141이하 참조).

  경험적 직관을 위해서는 개념이 감각 인상들의 통합을 이끄는 규칙으로서 전제되어야 하지만, 개념 자체는 직관 표상과 같은 구체적인 모습42)(Anblick), 즉 하나의 상(像, Bild)이 아니다. 이 점은 지금 여기 있는 이 집(Haus)은 개념인 ‘집’ 자체가 아니며 둘은 닮은 점이 전혀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분명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 이 존재자를 하나의 ‘집’이라고 말한다. 칸트는 도식론(Schematismus)을 통해 개념과 경험적 직관이 그처럼 일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까닭을 설명한다. 개념은 하나의 구체적인 상(像)의 형태가 아니라, 잡다한 감각들을 통합해 여기 이 집을 구성하는 활동 중에서 작용하는 방식으로만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개념은 자신의 도식, 즉 잡다한 감각들을 통합해 대상을 만드는 다양한 규칙들의 목록을 갖고 있다(KrV 179f). 여기 있는 이 집은 그러한 다양한 현시가능성중 하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개별적인 존재자는 집으로서 허용될 수 있는 가능한 보임새(mögliche Aussehen)의 범위, 즉 ‘집’ 개념의 도식 속에 포함될 때에만 하나의 집으로 지각될 수 있다. 따라서 도식은 개별적인 존재자의 지각에 앞서 미리 주어져야만 한다.

 

따라서 현존하는 것(Vorhandene), 예를 들어 이 집의 직접적 지각 속에 이미 필수 불가결하게 집 일반과 같은 것을 도식화하는 앞선 봄(Vorblick)이 놓여 있다. 마주치는 것이 집으로 보여질 수 있고 “현존하는 집”의 모습을 줄 수 있는 것은 다만 그러한 표-상(Vor-stellung)에 의해서이다. 따라서 도식작용이 필수적으로 유한한 우리 인식의 토대에서 일어난다. (KPM 97, 고딕 강조, 번역 필자)

 

이처럼 개념의 기초에는 하나의 근원적인 상(像)이 아니라 도식이 놓여 있다. 따라서 지각을 위해 개념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은 곧 그 개념의 도식을 미리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칸트는 도식을 ‘경험독립적인 순수 상상력의 산물’(ein Produkt  der reinen Einbildungskraft a priori)이라고 설명한다(KrV 181). 구체적인 지각을 위해서는 도식화하는 앞선봄 (Vorblick, 예비적인 눈길)이 유한 존재인 인간의 근본능력으로서 전제되어야만 한다.

  도식론에 대한 논의는 순수 개념과 관련해 보다 복잡한 형태로 전개된다. 우선 순수 개념은 경험적으로 직관 가능한 상(像)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순수 개념은 순수 상(像)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칸트는 시간이 바로 순수 개념의 도식에 필수적인 순수 상(像)(reines Bild)이라고 말한다(KrV 178). 이것은 시간이 단순히 균질적이며 등방(等方)적인 경험적 직관 일반의 공허한 형식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그 동안 칸트 “주석가”들이 순수직관인 시간은 오직 “직관의 형식”(die Form der Anschauung)이어야 한다는 데에만 집착해 순수 직관에서 어떤 것(etwas)이 직관된다는 사실을 부정해왔다고 비판한다. 칸트는 직관의 형식뿐만 아니라 “형식적 직관”(die formale Anschauung)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43). 순수직관에서 공간과 시간을 직관의 형식으로만 본다면, 칸트가 오성의 종합(Synthesis)과 구분해 직관에서의 종합을 개관(Synopsis)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KPM 140).

  순수 직관에서 직관되는 공간과 시간은 물론 구체적인 존재자는 아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공간 자체가 경험적 표상작용에서 표상 되는 어떤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표상된 것이 연장을 지닌 것으로 공간 속에서 보일 수 있기 위해서는 공간이 앞서 파악되어야만 한다. 하이데거는 바로 순수 직관에서 시간44)이 직접적이고 전체적으로 주어진다고 주장한다. 이 때 주어진 시간은 공허한 전체성이 아니며, 그 자신이 주제적 파악의 대상이 되지는 않지만 경험적으로 직관 가능한 것의 지평인 순수 모습(der   reine Anblick)을 형성한다. 하이데거는 순수 직관을 순수 상상력으로 보는 이러한 근원적 해석만이 순수직관에서 직관된 것을 적극적으로 밝힐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순수 직관은 그것이 순수하기 때문에 단순한 수용성에서 벗어나 직관 가능한 것을 발생하게 하는 “근원적 현시”(exhibitio originaria)(KPM 136)로 활동한다45).

  경험적 개념의 경우에는 그 도식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는지 경험을 떠나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순수 개념은 그것이 적용되어야할 경우를 경험독립적으로 들 수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KrV 178). 따라서 하이데거는 순수 직관에서 순수 개념의 도식이 직접적이고 전체적으로 주어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한 경험 독립적 앎이 바로 칸트가 그 가능성을 묻고 있는 존재론적 인식이다. 물론 이때의 앎은 존재자에 대한 존재적 인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갖게 된다. 존재론적 인식은 주제적이고 직접적으로 존재자와 관계 맺지도 않으며 경험적 직관에서는 더 이상 직관되지 않는 것, 즉 X이다. 그러나 존재론적 인식은 하나의 근원적인 지평으로서 지각 작용에 전제되는 개별적인 존재적 지평을 비로소 가능하게 한다.

 

무(Nichts)는 하나의 존재자를 의미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etwas)을 의미한다. 그것은 “오직 상관자로서만 봉사한다”, 즉 본질상 순수 지평이다. 칸트는 이 X를 “선험적 대상”, 즉 초월에서 또 초월을 통해 초월의 지평으로 보여질 수 있는 대립(erblickbare Dawider)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제 존재론적 인식에서 인식된 X가 자신의 본질상 지평이라면, 그러한 인식은 또한 지평을 그 지평 성격에서 개방유지하는 것이어야만 한다(dann muß dieses Erkennen    auch so sein, daß es diesen Horizont in seinem Horizontcharakter offen-   hält). 따라서 이 어떤 것(etwas)이 바로 파악의 주제 속에 직접적이고 유일하게 의도된 것으로 있을 수는 없다. 지평은 비주제적으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야 속에 있어야만 한다. 오직 그런 식으로만 지평은 그 속에서 마주치는 것  (Begegnendes) 자체를 주제 속에 몰아넣을 수 있다. (KPM 118, 고딕 강조. 번역 필자)

 

존재론적 인식에 의해 열린 지평이 초월, 즉 ‘~과 마주서게 함’(Gegenstehenlassen  von…)을 만든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거듭해서 지적하는 것처럼 지평 자체는 주제적, 대상적으로 지각되지는 않기 때문에, 일상적으로는 망각된 채 있다. 하이데거가 존재론적 인식에서 개방유지적(offenhalten, 열어놓는)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그러한 ‘망각’(Vergessenheit)의 극복이라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3절. 예술 작품과 세계의 근원적인 개방성

  유한 직관을 지닌 인간은 존재자의 존재구성틀을 미리 알고 있어야만 ‘자기 자신도 아니고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닌’ 존재자를 대상으로 지각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그러한 존재론적 인식을 통해 형성되는 ‘~로 향해있음’을 초월, 또는 넘어섬(Übersteigen)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넘어섬은 현존재의 근본 성격이기도 하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미리 존재하고 있다가 필요에 따라 때때로 넘어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현존재의 본질은 ‘탈존’(Ek-sistenz)에 있다. 넘어섬은 또한 항상 전체성에서 이루어진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런 저런 개별적인 존재자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존재자를 그 전체성 속에서 초월한다. 이러한 전체성 속에서 “개방가능한 존재자의 전체가 그 특정한 연관, 영역, 모양에서 고유하게 파악되거나 ‘완전하게’ 탐색되지 않고 이해된다”46).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의 존재구성틀을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현존재의 구성 계기 중 ‘세계’(Welt)가 바로 초월적 지평을 가리킨다. 여기서 ‘세계’는 사물의 집합체로서의 사물이 아니라 “존재론적-실존론적인” 의미의 세계로 이해되어야 한다47). 하이데거는 ‘세계’에 대한 분석에서 세계의 근원적인 개방성과 함께 ‘건너뜀’(Überspringen)이라는 독특한 현상을 지적한다. 예술작품의 본질 구명(究明)과 관련해 그러한 건너뜀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는 먼저 세계의 개방성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기로 한다48).

  하이데거는 도구 분석을 통해 세계성의 의미를 사용사태 전체성으로 드러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그것〔세계 - 필자 추가〕는 그 자체 여러 다른 것들 가운데 있는 손안의 것(Zuhandenes)은 결코 아니고, 예컨대 손안에 있는 도구에 기초를 주고 있는 눈앞의 것(Vorhandenes)은 더욱 더 아니다. 그것은 그 모든 확정과 고찰 이전에 “거기에” 있다. 그것은 그 자체, 둘러봄(Umsicht)이 언제나 존재자를 다루는 한, 둘러봄에게 접근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둘러봄에 그때마다 이미 열어 밝혀져 있다. “열어밝힘”(Erschließen)과  “열어밝혀져 있음”(Erschlossenheit)이 다음에서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훤히 열어보임”, “훤하게 열려져 있음”을 의미한다. “열어밝힘”은 따라서 “간접적으로 추론에 의해서 획득함”과 같은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49). (SZ 75, 생략, 추가 필자, 이기상 譯)

 

세계는 손안에 있거나 눈앞에 있는, 즉 사용되거나 관찰되고 있는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존재자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앞서 개방되어있어야만 하는 존재론적 지평이다. 하이데거는 세계를 존재적 대상으로 해석하거나, 인과관계에 근거해 파악하려는 시도는 세계의 세계성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이데거는 세계의 개방성이 지닌 근원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사물의 일차적인 실재성의 증명근거로 사용되는 “저항”(Widerstehen)의 경험도 세계의 개방성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SZ 210). 저항이란 ‘뚫고 나가려는 의욕’이 ‘뚫고 나가지 못함’에 부딪히는 것이다. 따라서 의욕이 향하려고 하는 어떤 것이 이미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그 ‘어떤 것’이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다고 해도, 저항 경험이 존재론적으로 오직 세계의 개방성에 근거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세계의 근원성이 대부분의 경우 건너뛰어진다는 ‘놀라운’ 사실에 주목한다(SZ 96). 현존재는 앞서 열어밝혀진 세계 속에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일상적으로는 그것을 고유하게 주제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전통적인 철학적 탐구에서도 ‘세계’는 건너뛰어져 왔다. 그것은 세계가 존재자를 가능하게 하는 지평이지만, 그 자신은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대부분의 경우 ‘친숙함’(Vertraut-  heit) 속에서 세계에 ‘빠진 채’(verfallend) 세계를 잊고 살아간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이러한 세계의 건너뜀을 현존재의 단순한 잘못이나 실수로 간주하지 않고, 현존재 자신의 내적인 본질 구조에서 비롯되는 필연적인 사건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예술의 본질을 “진리의 작품 속으로의 자기 정립”(Das Sich-ins-Werk-    Setzen der Wahrheit)으로 본다면 이러한 건너뜀, 또는 망각은 예술자체의 가능성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실제로 서양의 역사에서 존재의 망각과 위대한 예술의 종말이라는 결정적 사건의 “기묘한 동행”을 발견한다(UK 69). 작품과 주관의 감정 상태 사이에 자극과 반응이라는 존재적 연관만을 설정하는 미학적 관점이 주도할 때 예술은 본질적 힘을 잃고 기껏해야 문화 현상(Kulturerscheinung)이나, 삶의 표현(Lebens-ausdruck), 또는 인격성의 발달(Persönlichkeit-entfaltung)과 관련해서만 논의될 뿐이다50). 따라서 예술에 대한 하이데거의 관심은 현대 기술공학 시대에 예술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 더 본질적으로는 존재 망각의 극복 가능성에 대한 물음과 맞닿아 있다.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예술 작품의 본질을 해명하기 위해 고호의 그림과 함께 그리스의 신전 건축을 사례로 들고 있다. 신전 작품은 세계를 개방하고(er-  öffnen), 동시에 세계를 대지(Erde) 위에 세운다(aufstellen)(UK 28).

  

세계는 우리 앞에 세워져서 직관될 수 있는 그러한 대상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탄생과 죽음, 축복과 저주의 궤도가, 우리를 존재 가운데로 밀어 넣는 한, 세계는 항상 우리가 복종하고 있는 비대상적인 것이다. 우리 역사의 본질적 결정이 내려져 우리에 의해 받아들여지거나 버려지고, 오해되거나 다시 물어지기도 하는 그 곳에서 세계는 세계화한다(weltet). 돌은 무세계적이다. 마찬가지로, 식물과 동물도 세계를 갖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들어가 있는 주변의 은밀한 쇄도 가운데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해, 촌 아낙네는 존재자의 열린장(Offene) 속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세계를 갖는다. (...) 세계가 열리면서 모든 사물들은 느긋함과 조급함, 멂과 가까움, 넓음과 좁음을 얻는다. (...) 하나의 작품은 그것이 작품이기에 저 공간성(Geräumigkeit)을 받아들인다. 받아들임(Einräumen)은 여기서 특히 열린장의 열림을 자유롭게 하고, 그 열림을 자신의 구성 가운데에 맞추어 넣는 것(ein-    richten)을 의미한다. (...) 작품은 작품으로서 세계를 건립한다(aufstellen). 작품은 세계의 열린장을 개방유지한다(offenhalten). (UK 30f., 강조, 생략, 번역 필자)

 

하이데거는 여기에서 세계가 존재론적인 개념임을 설명한 후, ‘역사적 민족이 거주하는 세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것은 세계가 하나의 존재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구체적인 존재자와 동떨어진 곳에 홀로 존재하는 것도 아님을 말해준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존재자들과 관계 맺으며 생활하는 그곳에 세계도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세계가 세계화한다’(welten)고 말함으로써 그러한 세계의 있음을 대상의 단순한 현존과 명확하게 구별하고 있다. 예술작품의 본질은 일상적으로는 건너뛰어지는 세계를 개방유지한다는데 있다. 작품은 세계를 건립한다. 여기서 건립(Aufstellen)은 하나의 대상을 전시장의 진열장 위에 서있도록 설치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건립되어야 할 ‘세계’ 자체가 단순한 존재자처럼 설치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따라서 ‘건립’을 찬양과 봉헌이라고 말한다. 찬양과 봉헌을 통해 성스러운 것이 성스러운 것으로 개방된다. 마찬가지로 작품을 통해 세계가 그 세계성 속에서 열린 채 유지된다.

 

2장. 감 정

  1절. 무관심성이라는 조건아래서의 쾌 감정

  아름다움과 예술에 관한 미학적 탐구에서 중심적인 주제 중 하나는 감정에 대한 연구이다. 미학은 감정 상태를 중시해 감정을 본위로 존재자를 고찰하며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을 감정상태로 환원해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미학은 대상과 그것에 영향받아 발생하는 감정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존재하며, 우선은 논리적이지 않아 보이지만 그러한 관계의 해명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대부분의 경우, 대상과 주관의 감정 상태 사이에 설정되는 그러한 관계는 자극과 반응이라는 존재적 작용연관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미학적 물음 설정이 감정에 관한 ‘근원적’인 이해를 가로막는다고 지적한다. 미학은 감정의 존재론적인 본질 구조에 대한 고찰에는 무관심한 채 다양한 감정들을 구분하고 분류하는데 에만 몰두한다. 그러나 예술작품을 감정 상태의 단순한 ‘자극원’이 아니라 세계를 근원적으로 개방유지하는 존재론적인 사태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감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칸트 미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감정 이해 역시 기본적으로는 감정을 “부수적인 심리 현상”(SZ 139)으로 보는 관점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칸트가 자신의 윤리학에서 ‘도덕법에 대한 존경(Achtung)’이라는 도덕 감정을 분석하면서 전혀 다른 견해를 보여주고 있음에 주목한다. 칸트에 따르면 존경은 “경험에 근원을 가지지 않고 경험독립적으로 인식”된다는 점에서 다른 감정들과는 단적으로 구별되는 특별한 감정이다51). 하이데거는 이러한 ‘존경’을 감정 일반의 본질 구조를 보여주는 “순수 감정” (reines Gefühl)(KPM 151)이라고 평가한다. 우리는 순수 감정과 그 본질 구조를 밝히는 하이데거의 논의52)를 앞에서 살펴본 지각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과 함께 미학의 중심 개념인 지각과 감정을 그 근원성 속에서 재해석함으로써 ‘예술을 통한 존재 망각의 극복 가능성’이라는 보다 큰 물음 속에서 이해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여기서는 먼저 칸트가 미학과 관련해 감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칸트는 감정53)을 생명 감정(Lebensgefühl), 즉 생명력이 촉진 또는 저지되어 있는 자기 자신의 상태에 대한 내적 지각으로 파악한다. 인간은 신체적 존재이기 때문에 이러한 감정을 지닌다. 따라서 칸트는 만약 인간이 순수하게 이성적인 존재라면 내적 지각에서 비롯되는 감정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KU 129). 그러나 보통은 자극이 주어지지 않으면 주관은 자기 자신의 상태를 의식할 수 없다. 일정한 자극이 주어지고 이 자극을 수용하기 위한 주관 자신의 변양(Modifikation), 즉 표상이 만들어지면서 비로소 감정이 ‘부수적으로’ 발생한다. 초원의 녹색은 ‘녹색’이라는 객관적 대상에 대한 정보와 함께 이 표상에 의해 촉발되는 주관 자신의 상태에 대한 감정을 준다(KU 9). 따라서 감정은 항상 자극을 전제한다. 칸트는 자극과 반응이라는 인과 관계를 넘어서는 감정, 예를 들어 예감과 같은 것을 가정하는 것은 “광신”이라고 규정한다54).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쾌 감정을 향유의 쾌감(Lust des Genusses), 법칙적 활동의 쾌감(Lust der gesetzlichen Tätigkeit), 관조의 쾌감(Lust der Kontemplation), 반성의 쾌감(Lust der Reflexion)으로 구분한다(KU 155). 그러나 이것은 감정을 촉발하는 표상의 “소재와 근원에 따라”55) 나눈 것일 뿐이지 고급 감정과 저급 감정이라는 질적 구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칸트는 감정에서는 그것이 오성에서 유래한 것이든 감관에서 유래한 것이든 관계없이 주관이 느끼는 만족․불만족의 양적 크기만이 문제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칸트가 감정에 근거한 윤리학을 배척하는 이유 역시 감정이 본질적으로 경험적, 주관적 성격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칸트는 아름다움을 ‘무관심성(Interesselosigkeit)이라는 조건 아래서의 쾌 감정’이라고 말한다56). 여기에서 핵심적인 것은 무관심성이라는 조건이다. 무관심성에 의해 쾌 감정이 질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편적인 전달가능성을 확보하게 된다. 감관 감각에 직접적으로 영향받는 쾌 감정을 칸트는 아름다움과는 구별해서 쾌적(An- genehm)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쾌적의 판단은 완전히 주관적이기 때문에 어떤 색이 객관적으로 쾌적하다거나, 다른 색 보다 더 쾌적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취미 판단에서는 모든 관심(감관의 관심이든 이성의 관심이든)의 배제라는 부정적인 방식으로 객관성이 주어진다. 칸트는 그러한 ‘주관적 객관성’에 공통감(sensus communis)이라는 가정을 추가함으로써 보편타당성을 부여한다.

관심은 “어떤 대상의 현존 표상과 결합되어 있는 만족”(KU 5)을 의미한다. 따라서 무관심성이란 대상의 현존에 냉담하다는 것, 즉 대상에 대한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모두 배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조건은 구체적으로는 표상의 형식적 측면만을 고려하고, 직관이나 반성(Reflexion) 과정에서 개념을 전제하지 않음으로써 충족된다. 물론 실제로 예술 작품에서는 그것이 하나의 제작된 사물인한 개념을 전제하지만 상상력이 그 개념을 넘어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대상을 반성하면서 상상력과 오성이 노동(Arbeit)에서 벗어나 “은혜로운” 조화를 이룰 때, 이러한 조화의 사실은 쾌 감정을 통해 알려진다(KU 31). 천재의 예술작품은,

 

상상력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그리고 어떤 주어진 개념이라는 제한 안에서, 이 개념과 조화되는 무한히 다양한 가능적 형식들 가운데에서, 이 개념의 현시를 어떠한 언어로도 완전히 표현될 수 없는 풍부한 사상(Gedankenfülle)과 결합시키는 형식, 그리하여 미감적으로 이념에로 고양되는 형식을 제시함으로써, 심의(Gemüt)를 넓혀준다.(KU 215, 강조 필자, 최재희譯)

 

하이데거는 칸트가 분석하고 있는 이러한 미적 상태 중에서 상상력의 자유로운 활동에 주목한다. 상상력은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통해 자유를 누릴 때에도 여전히 경험적인 ‘재생적 상상력’에 머무는가 아니면 선험적 기능을 수행하는 ‘생산적(순수) 상상력’으로 활동하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칸트에 따르면 주관은 예술작품이 촉발하는 상상력의 자유로운 활동 속에서 상상력의 경험적 사용을 지배하는 연상법칙들(Gesetze der Assoziation)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를 느낀다(KU 193). 즉 아름다움에서 상상력은 재생적 상상력과는 달리 경험적 제약에 구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곧 환상(Phantasie)을 창조하는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환상은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탓에 더 많은 자유를 허용하지만 여전히 경험적인 내용을 지니는 한 재생적 상상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선험적 상상력만이 이러한 재생적 상상력과 단적으로 구별될 수 있다. 이처럼 아름다움이 허용하는 상상력의 자유가 선험적 상상력과 관계되는 것이라면, 미적 상태란 다름아니라 순수 직관에서와 같이 선험적 상상력에 의해 존재론적 지평이 개방유지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상상력이 자유롭게 만들어내는 표상들을 통해 언표할 수 없는 많은 것을 미전개된 방식으로나마 사유하게된다는 칸트의 언급은 그가 주제적 파악에는 이르지 못했다하더라도 바로 그러한 사태를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KU 197).

하이데거는 칸트가 주장하는 무관심성이 대상에 대한 모든 관계를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배제된 관심에 의해 대상과의 본질적인 관계가 비로소 가능해진다고 지적한다57). 위대한 예술작품은 이렇게 확보된 가능성 속에서 세계를 개방유지한다. 이 때 인간은 “그의 본질에 근거하여 충일케 되는 인간 존재의 근본 상태로 들어간다”(NI 131). 이처럼 자극과 반응이라는 존재적 작용연관의 틀에서 벗어나 미적 상태를 새롭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감정의 본질 구조에 대한 ‘근원적인’ 분석이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2절. 순수 감정과 그 본질 구조

하이데거는 ‘감정’에는 대상으로부터 영향받아 발생하는 주관 내부의 반응이라는 일반적인 이해로는 제대로 파악될 수 없는 존재론적 차원이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미학적 탐구는 감정이 지닌 그러한 존재론적 구조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자극-반응이라는 존재적 모형 속에서 길을 잃고 만다. 하이데거는 감정이 단순히 주어진 대상에 대한 관계, 즉 ‘~에 대해 감정을 가짐’(Gefühlhaben für~)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러한 감정을 지니는 자기 자신을 느낌’(Sich-fühlen des Fühlenden)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KPM 152). 감정 속에서 자기 자신, 즉 자아가 느껴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칸트는 이미 ?순수이성비판?의 오류추리론에서 자아에 대한 인식이 불가능함을 입증했다. 자아는 범주들의 가능 근거로서 자아에 의해 조건 지워진 범주가 다시 자아 자신에 적용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론적 인식과 관련해 자아에 관해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아란 ‘나는 생각한다’는 순 논리적 형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는 윤리적 측면에서는 책임 능력을 지닌 인격(Person)이다. 칸트는 이러한 인격을 본래적 자아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아가 이처럼 인격이기 위해서는 비록 대상적으로 인식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현실적인 어떤 것(etwas)이어야만 한다. 하이데거는 “도덕적 자기의식이 이론적인 ‘나는 나를 사유한다’라는 의미의 이론적인 앎과 구별”되어야 한다면, 그러한 도덕적 자기의식은 “일종의 감정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58). 따라서 하이데거에게 감정은 대상에 대한 단순한 반응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칸트가 이미 윤리학과 관련해 ‘도덕 법칙에 대한 존경’(Achtung)을 분석하면서 감정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이데거는 칸트가 ‘도덕 감정’(moralisches Gefühl)이라고 부르는 존경을 감정 일반의 본질 구조를 보여주는 ‘순수 감정’(reines Gefühl)으로 간주한다. 존경이 순수 감정일 수 있는 것은 존경이 관계하는 대상, 즉 도덕 법칙의 독특한 성격 때문이다. 도덕법칙은 경험적으로는 결코 주어질 수 없는 순수한 이성 개념이다. 따라서 존경은 구체적인 경험적 대상에 의해 촉발되는 일반적인 감정과는 단적으로 구별된다. 하이데거는 감정이 자아를 개방하는 방식은 감정을 갖는 대상의 성격에 따라 본질적으로 상이하게 규정된다고 말한다(KPM 152). 일반적인 감정이 경험적인 자아와 관계하는 반면 존경은 자아의 본질 구조를 개방한다. 물론 그러한 개방을 통해 자아 자체가 대상적으로 인식되지는 않고 느껴지기만 할뿐이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실천이성의 동기’(Triebfeder)라는 제목 아래 존경에 관한 논의를 전개한다.  도덕법칙은 경향성, 충동, 쾌․불쾌의 감정등 모든 감성적 동기에 대한 저항 위에 존립한다. 그러나 ‘감정은 감정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는 스피노자의 원칙에 따른다면 그러한 도덕법칙 역시 하나의 감정과 연결되어 있어야만 한다. 칸트는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이 도덕법칙을 따르도록 이끄는 “유일하고도 동시에 의심할 수 없는 도덕적 동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59).

 

(도덕감정이라고 불리는) 이 감정은 그러므로 오로지 이성이 산출한 것이다. 그것은 행위의 판정에 쓰이지 않고 혹은 객관적인 도덕법칙 자신의 확립에도 쓰이지 않고, 오직 도덕법을 그 자신에 있어서 준칙으로 삼기 위한 동기로 쓰일 따름이다. 그러나 감각적 감정과 비교할 수 없는 이 특수 감정에 어떠한 이름을 붙여 주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인가? 그것은 자못 독특한 것이라서 오로지 이성의, 그러면서도 실천적인 순수 이성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것으로 생각된다.60)

 

  존경은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에 의해 촉발되는 감정이 아니라 지성적인 근거에서 발생해 경험독립적으로 인식되는 유일한 감정이다61). 따라서 존경은 도덕적 행위를 위해 앞서 전제되어야만 한다. 하이데거는 칸트가 이러한 분석을 통해 경험적인 인간 능력이라는 의미의 감정 개념을 극복하고 그 자리에 도덕적 자아의 초월과 관련된 선험적 근본 구조를 놓았다고 평가한다(KPM 154). 하이데거는 칸트가 존경을 ‘도덕 감정’과 ‘나의 실존 감정’이라고 말할 때 의도한 것은 ‘감정’을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해석할 때에만 충분하게 해명될 수 있다고 말한다.

존경은 자아를 그 자신에게 ‘본래적인’ 방식으로 드러나게 하다. 나는 “존경하는 나”(das achtende Ich)로서 개방된다. 이 때의 나는 경험적 자아와 구별되는 보편적인 ‘나는 생각한다’라는 논리적 형식으로서의 선험적 자아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 책임지고 있는 개별성 속에서의 ‘나’이다. 존경에서 나는 나 자신을 도덕 법칙에 복종시킨다. 이것은 곧 “나를 순수이성으로서의 나 자신에게 복종시킨다”(KPM 153)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나를 나 자신에게 복종시킴’(Mich-mir-selbst-unterwerfen)에서 나는, 진정한 자유가 자신의 법칙에 스스로 복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한, 자유로운 존재로서 고양된다. 이것이 본래적인 자아존재, 즉 실천이성의 본질이다. 하이데거는 존경의 본질 구조가 선험적 상상력의 근본 구성틀을 드러내 준다고 말한다.

자신을 복종시키면서 직접적으로 ~에 내어줌은 순수 수용성이다. 그러나 자유롭게 스스로 법칙을 앞서 줌은 순수 자발성이다. 이 양자는 그 자체로는 근원적으로 하나이다. 존경에서 법칙뿐만 아니라 행위 하는 자아가 대상적으로 파악되지는 않지만, 그러나 근원적이고 비대상적, 비주제적인 방식에서 당위와 행위로서 개방되고, 그것들이 반성되지 않은 행위 하는 자아존재를 형성하는 한, 이러한 실천이성의 근원은 선험적 상상력으로부터만 이해될 수 있다. (KPM 154, 강조, 번역 필자)

 

하이데거는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에서 실천이성이 감성(Sinnlichkeit)이나 순수 이론이성과 마찬가지로 선험적 상상력으로 환원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칸트의 ‘존경’ 개념에 대해 논의한다. 하이데거는 선험적 상상력을 선험적 도식 작용을 통해 존재론적 지평을 형성하는 현존재의 본질로 이해한다. 이러한 선험적 상상력은 현재의 연속이라는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라 보다 근원적으로 파악된 시간, 즉 현존재의 시간성(Zeitlichkeit)일 뿐이다. 감정은 현존재가 선험적 상상력을 통해 개방된 ‘세계’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순수 직관과 함께 존경을 통해서 세계가 근원적으로 열어밝혀진다. 하이데거가 시도하는 감정의 존재론적 해석은 인간을 ‘현존재’(Dasein)라는 자신의 독특한 개념으로 규정하려는 그 자신의 ‘기초 존재론적’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절. ‘세계-내-존재’(In-der-Welt-sein)와 감정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의 근본구성틀은 “세계-내-존재”(In-der-Welt-sein, 세계-안에-있음)이며, 현존재의 존재는 염려(Sorge)라고 파악한다. 인간은 ‘사유하는 실체’나 또는 ‘나는 사유한다’는 추상적인 논리적 자아가 아니라 염려 자체이다. 여기서 세계는 앞에서62) 살펴본 것처럼 다양한 존재자들의 집적(集積)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존재자들을 비로소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 지평을 의미한다. 인간은 그와 같은 존재론적 지평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도 아니며,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닌’ 존재자들과 관계 맺을 수 있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세계’를 현존재 자신의 실존 범주라고 말한다. ‘세계-내-존재’의 또다른 구성 계기인 ‘안에-있음’(In-Sein)은 인간이 개방된 하나의 세계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세계는 대상적, 주제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일종의 존재자가 아니다. 그러나 존재자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그러한 존재자보다 ‘더 존재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세계가 순수 직관에서 근원적으로 개방유지된다고 말한다63). 세계의 열어밝힘이 비대상적, 비주제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감정과 관계함이 분명하다. 하이데거는 존경이라는 ‘순수 감정’을 존재론적으로 분석하면서 이러한 가능성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감정의 존재론적 구조에 대한 하이데거의 탐구는 ?존재와 시간?에서는 불안과 공포라는 상호 구별되는 두 감정에 대한 논의에서 다시 전개된다. 하이데거는 불안과 공포를 ‘처해있음’(Befindlichkeit)의 양태(樣態)들이라고 말한다. 현존재는 이미 열어밝혀진 하나의 세계 속에 ‘처해있다’. 하이데거는 감정에서 존재론적인 맥락을 강조하기 위해 ‘기분’(Stimmung)이라는 독특한 용어를 사용한다. 하이데거는 감정에 대한 전통적인 논의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그러한 현상들〔처해있음의 상이한 양태들 - 필자 추가〕은 감정이나 느낌이라는 명칭 아래 오래 전부터 존재적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철학에서 언제나 이미 고찰되어왔다. 감정에 대한 첫 번째의 전수된, 체계적으로 수행된 해석이 “심리학”의 테두리 안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정(πάθη)을 그의 ?수사학? 둘째 권에서 탐구한다 (...) 감정에 대한 해석이 스토아 학파에서 계승되고 그것이 교부신학과 스콜라 신학에 의해서 근세까지 전승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주목되지 못하고 있는 점은, 감정에 대한 원칙적인 존재론적 해석이 도대체 아리스토텔레스이래 거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진전을 보일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감정과 느낌은 주제적으로 심리현상 아래 분류되어, 대개는 표상과 의지 곁에서 심리현상의 세 번째 부류로서 기능하고 있다. 감정과 느낌이 수반현상으로 격하되어 버린 것이다. (SZ 138f, 추가, 강조, 생략 필자, 이기상譯)

 

  감정을 자극과 반응이라는 존재적 작용연관으로만 보는 미학적 태도 역시 이러한 전통적인 감정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기분’으로서의 감정은 주관 내면의 심리상태에 그치지 않고 “그때마다 이미 ‘세계-내-존재’를 전체로서 열어밝히고 있다”(SZ 137). 그러한 개방은 본래적 방식(‘불안’)으로 이루어지거나 비본래적 방식(‘공포’), 즉 빠져있음(Verfallen)의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물론 여기서 개방된다는 것이 인식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이데거는 인식의 열어밝힘은 “기분의 근원적인 열어밝힘에 비할 때 너무나 짧다”(SZ 187)고 말한다.

  감정에 대한 논의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감정이 세계의 근원적인 개방성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하이데거는 니체의 의지 개념을 분석하면서 감정의 근본 특징을 “개방하고 열린 채로 유지함”(eröffnender Offenhalt)이라고 규정하고 이것을 인간의 신체성과 관련지어 해석하는 주목할만한 작업을 수행한다. 감정은 “우리가 우리 자신 곁에서 그리고 동시에 우리 자신이 아닌 사물과 존재자 곁에서 우리를 발견하는 방식”(NI 58)이다. 즉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이 아닌 존재자가 관계하는 방식이 감정 속에서 개방되고 열린 채로 유지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아닌 존재자와 관계 맺기 위해서는 존재론적 지평이 앞서 주어져 있어야만 하며, 그러한 지평이 감정 속에서 개방 유지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감정이란 주관 ‘내면’에서만 움직이는 수동적 상태라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우리 밖에서 존재하는 근본양태”(NI 117)라고 주장한다.

  칸트는 감정을 신체성이라는 인간의 유한성과 관련지어 이해한다64). 신체를 지니지 않은 순수하게 이성적이기만 한 존재는 자기 자신의 상태에 대한 내적 지각에서 비롯되는 감정과 같은 것을 지니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신체는 정신적인 것과 구별되는 물체로서의 육신(肉身)이다. 앞에서65) 하이데거가 감관을 인간의 유한성, 즉 신적인 창조적 직관을 지니지 못했으며 따라서 본성상 수용적일 수밖에 없다는 인간의 존재론적 특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하이데거는 감관이 건드려지고, 촉발될 수 있기 위해서는 존재론적 지평이 앞서 개방되어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맹목적인 쇄도만으로는 결코 어떤 것이 ‘촉발’될 수 없다(SZ 137 참조). 인간의 신체는 인간이 자기 자신이 아닌 존재자와 관계 맺기 위해서는 존재론적 지평이 앞서 주어져 있어야만 한다는 유한성, 즉 현존재가 수용적 자발성, 자발적 수용성인 선험적 상상력 자체로 존재한다는 사태와 관련되어 있다. 하이데거는 신체를 단순한 물체로 간주하는 자연과학적 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가정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기 느낌(Sichfühlen)으로서의 감정이란 바로 우리가 신체적(leiblich)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다. 신체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신체라는 겉껍질이 여전히 정신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느낌을 가진 신체란 본래 우리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며, 사실 그러한 방식으로 신체는 그 신체적 상황성(Leibzuständlichkeit) 속에서 우리 자신을 관류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 신체는 단지 우리에게 수반되는 육신(Körper)이 아니며, 우리는 이것을 동시에 분명하든 분명치 않든 간에 직접적으로 확인한다. 우리가 신체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신체적으로 존재한다. (NI 116이하, 생략, 강조 필자, 김정현譯)

 

하이데거는 인간은 항상 이러저러한 “신체적 기분”(leibendes Gestimmtsein) 속에 존재하며 그 속에서 존재자들과 관계 맺는다고 말한다. 따라서 기분은 사유 행위나 의지 행위에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수반 현상이 아니며, 그러한 행위로 몰고 가는 단순한 충동이나, 또는 어쨌든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현실적인 상태만도 아니다66). 기분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또 우리 자신이 아닌 존재자와 함께 서 있는 방식이다. 하이데거는 “신체란 기분 속에서 유지되며, 기분은 신체적으로 짜여져 있다”(NI 124)고 주장한다.

  칸트가 존경이라는 ‘특별한’ 감정을 다른 일반적인 감정들과 구분하는 것처럼, 하이데거는 불안(Angst)을 공포(Furcht)를 비롯한 다른 감정들과 구분한다. 존경과 불안은 감정 일반의 존재론적 구조를 드러내 주는 ‘순수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공포가 세계 내부적인 존재자로부터 촉발되는데 반해 불안은 현존재 자신 안에서만 피어오른다. 달리 말하면 불안의 대상은 현존재 자신의 ‘세계-내-존재’이다(SZ 184f. 참조). 이러한 불안은 현존재를 개별화시킴으로써 본래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개방 유지한다. 반면에 공포는 세계 내부적 존재자에 사로잡혀 평균적 일상성 속에서 세계를 은폐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세계는 “우선 대개 피하는 돌아섬의 방식”을 통해 개방된다(SZ 136). 그러나 그러한 돌아섬(Abkehr)도 그 자체로는 열어밝힘의 한 방식이다. 돌아섬에서도 세계는 열어밝혀진 것으로 존재하며, 그렇기 때문에만 돌아섬은 돌아섬일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세계가 개방되는 상이한 양태들이 존재한다고 보고, 불안과 공포라는 독특한 감정을 통해 유형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다양한 양태들이 어떤 상호 연관 속에 놓여 있는가에 대한 분석은 전개하지 않는다(SZ 138). 불안을 ‘순수 감정’이라고 본다면 불안이 지닌 본래성의 계기는 일상적인 다양한 감정을 통해서도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이 원칙적으로는 주어져 있는 셈이다. 그러나 본래성과 비본래성이라는 날카로운 구분에 비해 그러한 가능성은 다만 원칙적으로만 주어져 있을 뿐이다67).

3부. 칸트의 ‘물러섬’과 하이데거의 존재사유

 

1장. 칸트의 주관주의적 한계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칸트는 지각과 감정을 단순히 존재적 작용연관 속에서만 고찰하는 일반적인 미학과는 달리 그러한 연관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 구조에 대한 이해에 접근해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칸트가 그러한 논의를 본격적이고 주제적으로 전개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칸트의 근본적인 한계는 그가 모든 새로운 관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근대적 주관 개념’ 속에 머물러 있다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초판에서 선험적 상상력을 감성이나 오성과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능력으로 설정하고, 지각에서 지각 자체의 가능성을 위해 전제되어야만 하는 존재론적 지평과 그것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의 문제를 탐구한다. 그러나 칸트는 결국 선험적 상상력이라는 인간 영혼의 숨겨진 근본능력 앞에서 하이데거의 표현에 따르면 “물러서”고 만다. 하이데거는 ?순수이성비판?의 재판(再版)에서 선험적 상상력이 오성의 기능으로 환원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칸트는 “종합은 그것이 직관과 관계되는 한에서만 상상력”이라고 불리지만 “근본적으로는 오성”이라고 말한다(KrV B151). 상상력의 선험적 종합은 “감성에 대한 오성의 작용이다”(KrV B152). 따라서 선험적 상상력은 더 이상 감성과 오성의 근원적인 뿌리로 작용하는 자율적인 능력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칸트의 이러한 물러섬은 “순수이성이 그를 더 강력하게 자신의 궤도 속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KPM 162). 이성(Ratio)과 로고스(Logos)가 철학적 논의에서 중심에 놓이는 것은 형이상학의 “영광스런 전통”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전통적인 관점을 따른다면 감성 내부의 ‘저급한’ 능력일 뿐인 상상력이 이성의 본질을 이룬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하이데거는 칸트가 범주의 연역과 관련해서 ‘객관적 연역’만을 수행하고 그러한 연역의 가능성과 방식에 대한 ‘주관적 연역’은 간과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칸트는 주관적 연역을 수행하지 않은 채 전통적인 인간학과 심리학이 제공하는 구성틀과 성격규정들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을 뿐이다(KPM 161 참조).

  이성의 기능과 본질에 대한 하이데거의 입장은 비교적 분명하다. 인간 인식의 궁극적인 목표는 직관에 있으며 사유는 이러한 직관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이다. 선험적 상상력이 직관과 사유의 근원적 뿌리라는 것은 직관과 사유의 가능성이 선험적 상상력에 의해 근원적으로 규정된다는 것을 말한다. 사유는 스스로 도식을 만들 수 없고 다만 선험적 상상력에 의해 형성되는 도식을 취할 뿐이다(KPM 146). 하이데거는 선험적 상상력이란 순수 자기 촉발로서 현존재의 시간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순수 자기 촉발로서의 시간과 순수 통각으로서의 순수 사유는 동일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순수 자기 촉발로서의 시간은 순수 통각 속에 이미 놓여 있다(KPM 185). 주관에게 앞서 주어져 있어야만 하는 존재론적 지평은 사유 자신이 만들어낸 산물로 간주될 수 없다.

  칸트 해석을 둘러싸고 카시러(E. Cassirer)와 벌인 1929년의 논쟁은 이성주의 전통에 대한 하이데거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68). 카시러는 하이데거가 모든 인식 능력을 상상력으로 환원함으로써 정신의 초월을 정당하게 평가하는데 실패했다고 비판한다. 카시러는 ‘상징’(Symbol)을 생산하는 선험적 상상력과 오성의 순수 개념의 기능에 동일한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시도한다. 인간은 하이데거의 주장처럼 유한 존재로서 닫혀진 채 내던져진 존재로만 머물지 않는다. 카시러는 도덕법칙의 보편성과 무조건성이 보여주는 것처럼 예지계로의 초월이 인간에게는 본질적이며, 이성은 인간이 그처럼 그 자신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하고 탁월한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성의 포기는 초월의 포기로 간주된다. 카시러는 칸트가 항상 자유의 이념 자체로 되돌아갔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인간이 유한성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초월이란 ‘돌파’가 아니라 현존재에 내재적인 운동을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하이데거는 칸트 철학을 유한한 인간의 실존 분석 위에 형이상학을 정초 하려는 작업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칸트가 주관의 자발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것이 칸트적 문제의식의 출발점과 모순되는 방향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카시러가 선험적 상상력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이성 능력을 강조하는 이성주의 입장에 서는 반면 하이데거는 끊임없이 이성을 그 유한성으로부터 고찰하려고 시도한다.

  하이데거가 칸트에게서 발견하는 주관주의적 한계는 결국은 칸트가 기반하고 있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전통적인 이성중심주의적인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것을 단순히 인간 본질에 대한 이해의 문제로만 보지는 않는다. 그것은 ‘존재 이해’라는 보다 근원적인 물음과 관련해 분석되어야만 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칸트가 현존재의 시간성의 차원에 접근한 “첫 번째이자 유일한 사람”임을 지적한 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가 완전한 통찰에 실패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두 가지의 것이 그러한 통찰을 방해했다. 첫째, 존재물음 일반의 소홀이 그것이고 이것과 연관지어 현존재에 대한 주제적인 존재론의 결여이다. 칸트 식으로 말해서 주체의 주체성에 대한 선행적인 존재론적 분석론의 결여이다 (...) 둘째, 시간에 대한 칸트의 분석은 그 현상을 주체에 되돌려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수된 통속적인 시간이해에 방향을 잡고 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는 칸트가 “선험적 시간 규정”의 현상을 그것의 고유한 구조와 기능에 있어 산출하는 것을 방해했다. (SZ 24, 강조, 생략 필자, 이기상譯)

 

  두 번째 지적을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하이데거는 시간을 주관 자신의 감성 형식으로 보는 칸트의 입장은 객관적인 외부 세계의 특성으로서의 전통적인 시간 개념을 탈피해, 시간성을 순수자아의 본질 구조로 이해하는 자신의 견해에 접근해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칸트는 근본적으로는 현재의 연속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통속적’인 시간 이해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SZ 26). 감성의 형식으로서의 시간은 등방(等方)적이고 균질적인 공허한 형식으로 머물 뿐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칸트가 시간에 대해 ‘형식적 직관’이라는 또다른 규정을 제시하고 있음에 주목한다69).

  하이데거가 첫 번째로 문제삼는 존재물음 일반의 소홀은 칸트 역시 플라톤에 의해 정립된 고대 존재론의 기반 위에 서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고대 존재론은 존재를 이데아, 또는 현존성으로 이해한다. 고대 존재론에서 존재에 대한 논의에서 중심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사물적 존재자들이다. 그러한 존재자들에 대한 탐구에 근거해 존재는 이데아나 현존성으로 해석되었다. 근대에 들어서는 이와는 반대로 데카르트 이래 주관이 존재론적 논의의 핵심적인 주제로 등장한다. 사물적 존재자 역시 주관에 근거해 주관으로부터 고찰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놀랍게도’ 그러한 전환과 함께 주관의 존재방식에 대한 철저한 존재론적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70). 하이데거에 따르면 근대는 그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통 속에 머물러 있다. 하이데거는 “근세철학의 철학적 방향전환은 존재론적으로 근본적으로 볼 때, 전혀 방향전환이 아닌 셈”이라고 말한다71). 데카르트는 ‘연장을 지닌 사물’(res extensa)과 ‘사유하는 사물’(res cogitans)을 구분하지만 사유하는 사물의 존재 양식에 대한 명확한 분석을 전개하지 않는다. 칸트 철학에서는 자아의 문제가 중심적인 주제 중 하나로 다루어진다. 칸트는 우선 경험적 자아와 선험적 자아를 구분한다. 경험적 자아는 대상화된 채 경험에서 주어지는 자아로 본래적인 자아가 아니다. 이에 반해 선험적 자아는 대상적으로는 결코 인식에 주어질 수 없는 순 논리적 형식이다. 칸트는 자아를 실체화하고 자아에 대한 경험독립적인 인식을 추구하는 형이상학적인 시도가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칸트는 선험적 자아와 구별되는 도덕적 자아에 대해서도 말한다. 도덕적 자아는 선험적 자아처럼 논리적 형식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목적 자체’로서 실재하는 것이다. 칸트는 목적 자체인 인격(Person)만이 본래적인 자아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칸트가 자아, 즉 목적 자체의 존재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 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칸트는 “인격의 있음을 한 사물의 있음에 관해 말할 때처럼” 이야기한다72). 하이데거는 칸트가 자아와 일반적인 사물을 구별하고 자아의 인식 불가능성을 주장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고대 존재론의 “제작” 모형에 기반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칸트가 자아의 본래적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창조자가 아니기 때문이다73). 창조자만이 본래적 존재를 인식할 수 있으며 유한한 존재에게는 제한된 인식만이 허용된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칸트가 자아를 포함해 모든 존재자를 “제작함의 지평 내에서 제작되어 있음으로” 개념파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비판에 근거해 인간을 현존재(Dasein, 거기 있음)로 파악하고, 현존재의 근본구성틀이 세계-내-존재 (In-der-Welt-sein, 세계-안에-있음)임을 밝혀내는 자신의 ‘기초존재론’을 전개한다.

 칸트는 감정과 관련해서도 감정을 주관 내부의 수동적인 심리 상태로만 보는 통속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존경이라는 도덕 감정에 대한 존재론적 분석을 전개한다. 그러나 존경은 일반적인 감정과는 전혀 다른 별종의 것으로만 이해될 뿐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논의에서도 ‘존경’을 통해 이루어진 감정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 채, 쾌․불쾌 감정과 관련해 감정의 존재적 측면만이 다루어진다. 하이데거는 전통적인 존재론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감정’에 대해서도 주제적인 존재론적 분석이 등한시 되어왔다고 지적한다(SZ 25 참조). 칸트는 전통적인 인간관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아름다움에 대한 논의에서도 쾌․불쾌 감정을 느끼는 미적 주체의 존재가 중심에 놓이게 된다.

 

2장. 예술작품에서의 대지(Erde) 개념

  하이데거는 칸트가 선험적 방법으로 인해 아름다움의 본질 해석을 위한 보다 확실한 가능성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주관’이라는 근대적 한계 안에 갇히고 말았다고 분석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칸트는 자아에 대한 철저한 존재론적 분석을 수행하지 않고 전통적인 인간관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 분석론을 전개함으로써 이성을 인간 해석의 중심에 두는 “빛나는” 형이상학적 전통을 비판하고,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인간이해가 기반하고 있는 고대 존재론의 해체를 시도한다. 그러나 전통은 항상 자명한 것으로 전제되며 그 자신의 유래 자체를 망각하게 함으로써 근원으로의 통로를 가로막는다(SZ 21 참조). 그러한 전통을 비판하려는 시도는 전통의 언어로 전통을 비판해야 한다는 원칙적인 난관에 빠진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기획투사’(Entwurf) 개념에 대한 오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존재와 시간?에서 말한 ‘기획투사’가 표상적인 정립이라고 이해된다면 그것은 주관성의 작용으로 해석된 것이고, ‘세계-내-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existen-  tialen Analytik)의 영역에서만 ‘존재이해’가 사유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획투사를 존재의 밝힘(Lichtung)으로의 탈자적 관여로 사유하지 않은 것이다. 주관성을 포기하는 사유의 충분한 수행은 ?존재와 시간?을 간행하면서 1부 3절인 「시간과 존재」가 보류됨으로써 한층 더 어려워졌다(?존재와 시간? 39쪽 참조). 거기서 전체가 방향 전환을 한다. 사유가 그러한 전향(Kehre)을 만족스럽게 말할 수 없고, 형이상학의 언어로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의 절이 보류되었던 것이다 (...) 이러한 전향은 ?존재와 시간?에서의 입장을 변경하는 것이 아니며, 추구되는 사유가 전향 속에서 비로소 ?존재와 시간?이 경험된, 그것도 존재망각이라는 근본 경험 속에서 경험된 그러한 차원의 장소에 도달한다74).

 

하이데거는 ‘세계’란 현존재의 기획투사를 통해 창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획투사는 이미 개방된 세계 속에 ‘내던져진 기획투사’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자신의 실존 개념을 휴머니즘의 전통 속에 서있는 사르트르의 실존과 분명하게 구분한다75). 주관성을 포기하는 새로운 사유를 모색하는 하이데거의 시도는 끊임없이 주관성으로 되돌아가 해석되는 ‘오해’에 부딪힌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자신의 후기 사유를 특징짓는 ‘전향’(Kehre)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전향은 “존재자 없이 존재를 사유하려는 노력”이다76). 하이데거는 이러한 존재 자체에 대한 사유이외에는 “오늘날 분명히 지구 위에 있는 것의 존재를 고유하게 시야로 가져올 가능성이 더 이상 없고, 더구나 이제까지 ‘존재’라고 불려온 것과 인간의 관계를 충분하게 규정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없다고 주장한다77). 이것은 존재자로부터 존재를 분석하는 작업이 존재 자체에 도달하지 못한 채 항상 존재자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탐구하는 근본적인 사태는 ‘전향’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유지된다고 할 수 있다. 세계의 근원적인 개방성을 열린 채로 유지하고 사유하려는 노력이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다만 끊임없이 샘물을 용출(湧出)시키지만 자신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시원”78)(Quelle)처럼 존재자에 사로잡힘으로서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를 무화시키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감추는 존재의 은닉 차원이 한층 더 강조된다.

  하이데거는 예술을 “진리의 작품 속으로의 자기 정립”(Das Sich-ins-Werk-Setzen der Wahrheit)(UK 25)으로 이해한다. 예술 작품은 ‘세계’(Welt)와 ‘대지’(Erde)를 상호 투쟁하게 함으로써 진리, 보다 정확하게는 존재론적 진리를 발생하게 한다. 하이데거는 예술 작품이 세계를 “건립”(Aufstellen)하고, 대지를 “설립”(Herstellen, 이리로 세움)한다고 말한다. 대지는 “자신을 닫아버리는 것”(Sichverschließende)으로서 앞에서 말한 존재의 은닉 차원을 표현한다. 평균적 일상성 속에서는 ‘건너뛰어지는’ 세계가 개방유지79)(offenhalten) 될 수 있는 것은 대지가 자신을 닫아버리는 것으로서 고유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색채(Farbe)의 사례를 통해 이러한 사태를 보여준다. 색채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파동수로 분해하자마자 사라져 버리고 만다.

 

색채는 그것이 은폐(unentborgen)되고 해명되지 않은(unerklärt) 채로 있을 때에만 나타난다. 이렇게 대지는 자신 가운데로의 모든 침입을 분쇄한다. 대지는 단지 계량적이기만한 모든 집요함(Zudringlichkeit)을 파괴한다. 그 집요함이 자연의 기술적-과학적 대상화라는 형태로 지배와 진보라는 빛을 가져온다할지라도, 그러한 지배는 무력한 것으로 남게 된다. (UK 33, 강조, 번역 필자)

 

예술작품이 이러한 색채를 그 고유성 속에서 드러나게 한다. 하이데거는 “화가는 색채를 소모(Verbrauchen)하지 않고 처음으로 빛남 가운데에” 이르게 한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시인은 언어를 일상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언어를 소모하듯이 사용하지 않고 진정한 언어”로 머물도록 한다(UK 34). 이런 점에서 예술작품은 대지를 ‘소모’하는 도구와 비교될 수 있다. 도구의 본질은 그 용도성에 있으며 모든 것은 그러한 용도성에 봉사한다는 점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사물’(Ding)은 앞서 개방된 의미전체성에서 잘려 나와 대상(Gegenstand)으로서만 간주되는 도구존재와는 달리, 근원적으로 유지되는 그러한 개방성 속에서 본래적으로 존재할 때의 존재자를 가리킨다80). 따라서 예술작품은 무엇보다도 사물로서 존재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작품은 세계를 개방유지할 수 있으며, 존재 망각에 대항해 존재 진리를 보존하는 ‘구원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결   론

 

  하이데거는 미학이 미적 대상과 주관의 감정상태 사이에 자극-반응이라는 존재적 작용연관만을 유일한 관계로 설정함으로써 오히려 ‘위대한 예술’을 사멸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해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예술을 통해 존재망각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하이데거에게 ‘미학’은 비판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미학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미학적 태도의 본질을 구명(究明)하고, 그 중심 개념들을 근원성 속에서 재해석함으로써 미학을 넘어서는 ‘극복 변형’의 방식을 취한다. 이와 관련해 하이데거는 칸트 미학을 여전히 미학으로 남아있으면서도 미학을 넘어서는 독특한 미학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칸트 미학을 주제적으로 분석하는 하이데거의 텍스트가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앞에서 우리는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에서 전개되는 칸트의 지각론과 감정론에 대한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해석을 검토하는 우회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특별히 지각과 감정의 문제에 주목하는 이유는 ‘주관의 감정 상태와 관련해서 존재자를 고찰하는’ 미학적 탐구에서 지각과 감정이 항상 핵심적인 주제가 되어왔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본론에서의 논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 미학은 지각과 감정을 단순히 존재적 작용연관 속에서만 고찰하고 그러한 연관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 구조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칸트가 비록 ‘의식적이고 주제적으로’ 전개하지는 않았지만 지각과 감정에 대한 존재론적인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이데거는 칸트가 완전한 통찰에 이르지 못한 것은 그가 인간의 존재방식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지 않고 근대적 주관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 하이데거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 초판의 범주의 연역과 도식론에서 선험적 상상력을 감성과 오성의 근원적인 뿌리로 해석하면서 지각의 존재론적 구조에 대한 인식에 접근했다고 주장한다. 지각은 단순한 수용성이 아니라 지향적 향해있음을 본질 구조로 지니며 이러한 향해있음은 존재론적 지평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칸트는 재판에서 선험적 상상력을 오성이 지닌 기능의 일부로 해석함으로써 보다 진전된 논의의 가능성 앞에서 ‘물러선다’. 하이데거는 순수직관에서 그러한 존재론적 지평을 개방유지하는 ‘근원적인 현시’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예술 작품은 일상적으로는 건너뛰어지는 ‘세계’를 개방유지하는 힘을 지닌다.

  - 감정은 주어진 대상에 영향받는 주관 내부의 수동적 반응으로 간주되어 왔다. 칸트 역시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감정이해를 갖고있지만 도덕 감정인 ‘존경’을 분석하면서 감정에 대한 존재론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이데거는 감정을 하나의 개방된 세계 속에서 현존재가 자기자신이 아닌 존재자들과 관계맺으며 존재(실존)하는 근원적인 방식으로 이해한다.

  - 하이데거는 칸트가 자신에게 주어진 가능성을 충분히 전개시키지 못한 이유를 근대적 주관 개념의 한계에서 찾고, 인간을 현존재(Dasein)로 해석하는 자신의 기초존재론을 전개한다.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에서 등장하는 대지(Erde)는 주관성의 강력한 영향으로부터 존재의 은닉 차원을 보호하고, 세계의 근원적 개방성을 개방유지와 연관되는 핵심적인 개념이다. 대지가 대지로서 드러남으로써 진정한 예술작품은 도구와 구별되는 작품 존재에 이를 수 있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우리는 하이데거가 지각, 감정, 세계의 근원적인 개방성등을 밀접한 상호연관 속에서 이해함으로써 ‘미학’을 극복변형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이데거의 이러한 관점은 존재물음을 새롭게 제기함으로써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기반하고 있는 존재망각이 극복해야하며, 이를 위해서는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수적이라는 그 자신의 근본입장과 분리될 수 없다.

  또한 앞에서의 논의를 통해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을 칸트 미학과의 연관관계에만 한정해 살펴봄으로써 하이데거 자신의 적극적인 견해가 충분히 제시되지 못했다는 이 글의 고유한 한계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미해결된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 세계의 개방유지는 감정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일상적인 다양한 감정들과 ‘순수 감정’의 관계는 만족할만하게 해명되지 못했다. 다만 그러한 모든 감정 역시 세계의 개방성과 ‘독특한 방식’으로 관계 맺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 존재론적 의미에서의 ‘세계’와 구체적인 세계가 어떤 연관을 지니는지 해명되어야 한다. ‘세계’가 공허한 개념이 아니고, 구체적인 세계 속에서 작용함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이상, 상호 구별되는 차이의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공속성의 관점에서도 고찰되어야 한다. 

  - 앞에서 분석되고 있는 칸트 지각론과 감정론에 대한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해석과 칸트의 주관주의적 한계에 대한 비판이 ‘전향’(Kehre) 이후에 나타나는 하이데거 자신의 후기 철학의 입장과 관련해서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 보다 분명하게 밝혀져야 한다. 만약 ‘전향’을 ?존재와 시간?의 근본 관점을 수정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같은 시기에 속하는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의 칸트 비판 역시 재검토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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