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성 박사가 번역한 스윈번과 슈우메이커의 인격 동일성에 대한 논쟁. 출처 : 서강대 포럼
철학의 대논쟁 시리즈
인격 동일성
시드니 슈우메이커와 리챠드 스윈번
의식과 인과성
디.엠.암스트롱과 노만 맬컴
목차
인격 동일성: 이원론적 이론
리챠드 스윈번
인격 동일성: 유물론적 이론
시드니 슈우메이커
리챠드 스윈번의 논평
시드니 슈우메이커의 논평
참고문헌
색인
철학의 대 논쟁 시리즈에 관하여
소크라테스 이후로 대화는 철학적 탐구와 설명의 막강한 수단이 되어 왔다. 이 새로운 시리즈의 목표는 철학의 테마 중 오늘날 주요 쟁점이 되고 있는 주제들을 논쟁의 형식으로 소개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사고의 교환에 의해 생겨나는 지적 흥분을 전달하고 철학적 논변의 묘미를 맛보게 하는 것이다.
어떠한 논변도 보통 두가지 이상의 입장들이 있기 마련이며, 서로 다른 입장의 논쟁자들일지라도 어떤 면에서는 서로 동의하는 부분도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 책의 논쟁이 선택된 주제에 관한 모든 입장들을 반드시 다루게 되지는 않을 것이며 또한 극단적인 논변을 계획적으로 전개시키지도 않을 것이다.
이 시리즈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철학적 사고를 촉진시키는 논쟁이라는 대화의 형식을 통하여, 형식 논리로부터 오늘날의 윤리적 쟁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명료하면서도 간결하게 소개하는 것이다. 이 시리즈는 철학 교수들이나 학생들 그리고 일반 독자들의 흥미를 끌 것으로 기대된다.
왜냐하면 각 권마다 두 사람의 아주 뛰어난 철학자들이 오늘날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주제를 논의하면서 문제의 해명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던져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는 두 사람의 철학자가 먼저 각자의 입장을 표명하는 주 논문을 소개하고, 그 논문들이 서로 교환되어 읽혀진 후 상대방의 입장에 대한 논평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결과로서 독자들 사이에 후속적인 토론과 논변과 논쟁이 일어난다면 이 책은 성공적이라 하겠다.
인격 동일성에 관한 이원론적 이론
리챠드 스윈번
감사의 말
이 논문의 대부분은 내가 많은 장소에서 강연이나 세미나의 논문을 통하여 이미 발표했던 것이다. 최근에 개최된 1982년 9월 아델라이드 대학교에서의 세번의 세미나와 1983년 2월 카디프 대학에서의 세번의 강연, 그리고 1983년 봄 학기 애버딘 대학의 기포드 강연에서 한 세번의 강연들이 그것이다. 강연 때마다 내가 받은 관대한 환대와 유용한 비판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인격 동일성에 관한 나의 현재 입장의 원천적 토대라 할 수 있는, 그 주제에 관한 나의 최초의 논문은 ?아리스토텔레스 확회보?(Proceedings of Aristotelian Society) 74호(1973-1974), 231-248면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내 논문의 대부분은 나의 새 책에 포함 될 것이다. 그 책은 ‘인간’(Man)이란 주제로 발표한 두 번의 기포드 강연 시리즈의 내용을 토대로 한 것인데 훨씬더 많은 내용을 담게 될 것이다.
1. 경험론적 이론
인격 동일성(personal identity)에 관한 철학적 질문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질문은 시점 t2의 인격 P2가 앞선 시점 t1의 인격 P1과 동일한 인격이기 위한 논리적 필요 충분 조건은 무엇인가이다.1) 좀 느슨하게 표현한다면, P2와 P1은 동일한 인격이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하는 질문이 되겠다. 둘째 질문은 시점 t2의 인격 P2가 시점 t1의 인격 P1과 동일함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관찰가능한 경험적 증거는 어떤 것들이냐 (그리고 다양한 증거들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의 문제이다. 그러나 인격 동일성에 관한 글을 쓰는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한 쪽 질문에 대한 대답만을 주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격 동일성을 성립시키거나 반증한다고 주장되는 경험적 증거를 사용하여 인격 동일성의 논리적 필요 충분 조건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격 동일성에 관한 주장의 의미와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경험적 증거를 엄격히 구별하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이론을 경험론적 이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장에서 나는 기존의 몇몇 경험론적 이론을 간략히 검토한 후 그러한 입장들은 결코 인격 동일성의 문제에 대한 만족스러운 설명을 줄 수 없다는 점을 주장하려 한다. 또한 위의 두 질문은 각기 구별되는 것으로 서로 다른 답을 가진다는 것을 주장할 것이다. 나는 인격 동일성을 주장하는 것과 그 주장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증거의 제시는 각기 구별되는 별개의 것임을 보이고자 한다.
사람들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인격 동일성에 관한 가장 자연스러운 이론은 그것이 신체 동일성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이다. 즉, P2의 신체가 P1의 신체와 동일한 경우 P2는 P1과 동일한 인격이다. 지금 당신과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존’이 당신이 지난 주에 ‘존’이라고 부르면서 함께 이야기한 그와 동일한 인격이기 위한 필요 충분 조건은 그 둘이 동일한 신체를 가지는 것이다. 한편 신체 B1과 신체 B2가 같다는 것은 그 두 신체가 완전히 동일한 물질을 함유한다는 뜻은 아니다. 신체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호흡하는 것에 의해서) 계속 새로운 물질로 대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동일한 신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물질로의 대치가 서서히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나의 신체를 형성하는 물질은 팔, 다리, 심장, 간과 같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들은 각기 연결되어 물질과 에너지를 일정한 방식으로 교환한다. 오늘 나의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과 그 구조는 어제의 것에 비하여 (물론 조금은 없어지고 조금은 새로 생긴 것이겠지만) 대부분 동일하기 때문에 오늘 나의 신체와 어제 나의 신체는 동일한 것으로 간주된다.1)
이와 같은 신체 동일성 이론은 물질적 대상이나 식물의 동일성을 부여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방식과 대단히 유사하다. 이러한 생각의 기원은 멀리 아리스토텔레스(형이상학 제 7 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다. 그는 실체와 속성을 구별했는데 실체는 책상, 의자, 자동차, 나무와 같이 개별적인 것들을 말하며 이러한 개별자들은 네모나다, 둥글다, 빨갛다와 같은 속성을 가진다. 많은 실체들이 둥글거나 네모나듯이 속성은 수많은 실체들에 의해서 공유될 수 있기 때문에 ‘보편자’라 한다. 실체는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질료와 그 질료에 주어진 형상으로 인하여 각기 개별적인 실체로 존재한다. 실체는 개별자이며 질료와 형상으로 되어 있다. ‘형상’이 의미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형태적 그리고 구조적인) 속성으로, 한 실체가 다른 실체가 아닌 바로 그 실체이게끔 하는 것으로 그 실체가 존재하는 한 반드시 갖고 있는 본질적 속성을 말한다. 우리는 실체의 본질적 속성 -실체의 형상을 구성하는 -과 실체의 우연적 속성을 구별한다. 어떤 참나무가 있을 때, 참나무라면 갖고 있어야 하는 일반적인 참나무의 형태, 모양, 성장 주기(봄에 잎이 나고 가을에 열매를 맺는 따위)가 참나무의 본질적 속성이라면 그 나무의 정확한 높이, 위치, 가장 긴 가지에 달린 나뭇잎의 분포 상태와 같은 것들은 우연적 속성에 속한다. 만약 그 참나무가 베어져 널판지 더미로 된다면 참나무는 그 본질적 속성을 결여하게 되므로 더 이상 참나무로서 존재하지 않게 된다. 한 실체의 본질적 속성이 그 실체의 종을 정의해 주며 그 실체의 형상을 구성한다. 그래서 우리는 실체를 항상 어떤 종류의 것 --- 예를 들면 참나무나 양치류와 같은 자연적인 종이나, 자동차나 책상과 같은 인공적인 종 --- 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의 질료 덩어리에 오직 하나의 종을 귀속시킨다. 예를 들어 우리가 참나무 종으로 분류하는 어떤 질료 덩어리를 다른 종 ---예를 들어 ‘6미터 높이 이상의 초록색 물체’라는 종으로 분류한다면 그것은 매우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다. 실제로 한 실체가 높이 6미터에 초록색인 물체로서 그 색깔이 갈색으로 바뀌게 되면 더 이상 그 실체로 존재하기를 그친다 해도, 그와 같은 속성이 그 실체의 종을 형성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러나 어떤 질료는 승용차와 자동차의 경우와 같이 다른 종류로 생각될 수 있으며 이런 경우에 그 질료의 형상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실체를 구성하는가에 관한 우리의 판단에 의존한다. 만약 승용차가 화물차로 변형된다면 승용차였던 실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나 자동차인 실체는 계속 존재하는 것이다.
한 실체를 앞선 시점의 실체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그 실체의 형상을 구성하는 본질적 속성이 지속되는 가운데, 그것의 질료가 동일하게 지속되거나 부분적으로 조금씩 대치되는 데에 있다. 오늘 내가 그 위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책상이 어제 내가 그 위에서 글을 쓰던 책상과 동일한 이유는 지금 이 책상과 어제의 책상이 동일한 물질로 (어쨋든 대부분이 동일한) 이루어져 있으며 동일한 방식으로 책상의 형상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상과 같이 생명체가 없는 것들은 아무리 점차적이라 해도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의 거의 대부분이 다른 물질로 대치될 때에는 동일성을 상실하게 된다. 만약 책상의 서랍 중 하나만이 다른 것으로 대치된다면 그 책상은 여전히 동일한 책상이라 할 수 있지만, 만약 책상의 서랍과 측면과 윗면이 차례차례 모두 다른 것으로 대치된다면 우리는 그 책상은 더이상 원래의 책상과 동일하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무와 같은 생명체는 그것을 이루고 있는 모든 물질이 대치된다거나, 또는 그것의 생리적 기능과 해부학적 구조까지 혹시 변화한다 해도 그 변화가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는 한 동일성이 파괴되지는 않는다. 참나무는 그것이 자라나온 묘목과 동일하다. 왜냐하면 참나무 묘목을 이루고 있는 질료의 대치는 점차적이며 그것의 형태, 생리, 생태와 같은 참나무의 형상이 대부분 그대로 지속되고 있으며 혹시 변화가 있다해도 역시 점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1) 식물의 동일성에 대한 이와 같은 설명 방식은 국가나 군대 또는 단체와 같은 사회적인 존재물에도 적용된다. 두개의 군대는 그 군대를 구성하고 있는 군인들이 점차적으로 대치되며 대치된 새로운 군인들이 군대의 조직에서 동일한 역활을 담당하고 있는 한 동일한 군대이다.
인격 또한 실체이다. (인간 또는 사람은 인격의 한 부류 ---즉 유사한 해부적 구조와 생리적 기능 그리고 진화의 기원을 갖고 있는 ---이다. 아마 다른 행성에는 인간이 아닌 인격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실체 동일성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일반 이론을 인격에게 적용시켜 본다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온다. 한 인격이 앞선 시점의 인격과 동일하기 위해서는 두 인격은 그 인격의 형상을 형성하고 있는 질료가 동일하거나 (또는 앞선 시점의 인격을 구성하고 있는 질료로부터 점차적인 방식으로 조금씩 대치되어) 거의 대부분의 질료가 동일해야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격의 형상을 구성하는 본질적 속성은 단지 인격의 형태와 생리적 속성만이 아니라 행동 양식, 그리고 생각하고 느끼는 정신적 삶의 용량이 포함된다. 따라서 시점 t2의 인격 P2가 시점 t1의 인격 P1과 동일하기 위해서는 P1과 P2는 반드시 인격(특정한 종류의 신체와 특정한 종류의 정신적 삶의 용량을 갖는)이어야만 하며, 그것을 형성하는 동일한 질료(즉, 부분적이며 점차적인 대치로 인하여 P1과 P2의 신체가 거의 동일한 질료)로 되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인격 동일성을 신체 동일성으로써 설명하는 이론이다. 이와 같이 신체 동일성 이론은 인격이 정신적 삶을 갖고 있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나 한 인격이 앞선 시점의 인격과 동일한 인격이 되는 근거를 그 신체의 동일성에서 구한다.1)
신체 동일성 이론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현대 철학자들에게 대두되는 이 이론의 난점은 다음과 같다. 두뇌는 신체의 한 부분이지만 나머지 신체의 모든 특징적인 반응 양식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두뇌는 단지 신체의 생리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움직이고 말하며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조절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팔이나 다리를 잃었다 해도 그가 수술 전과 다른 인격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어떤 사람이 심장이나 간 이식 수술을 했다고 해도 우리는 그러한 수술이 그를 다른 인격으로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면에, P1의 신체 B1에 속해 있던 두뇌1이 B1으로부터 분리되어 P2의 신체 B2로 이식되고 P2의 두뇌2 역시 B2로부터 분리되어 B1으로 이식된 경우(즉 두뇌가 서로 교환된 경우)라면, 우리는 P1이 여전히 동일한 신체를 갖고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 심각하게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우리는 아마 인격이 그의 두뇌가 간 곳으로 따라 갔다고 말할 것 같다. 즉 P1은 신체 B1을 갖고 있다가 이식 수술 후에는 신체 B2를 갖게 되었다고.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상당히 유력한 과학적 근거를 갖기도 하지만) 신체 B2를 가지는 인격은 자신을 P1이라고 주장하면서 우리가 P1이 과거에 한 것으로 알고 있는 행위와 경험들을 기억하며 P1의 성격, 믿음, 태도를 가지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어떤 인격에 대한 나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그 인격의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이 아니라 그가 자신을 누구라고 주장하는가, 그가 과거에 있었던 나와 관계된 일들을 기억하는가, 좀더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그가 세상에 대해 갖는 믿음들과 살아가는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인격 동일성에 대한 유물론적 기준을 구하는 철학자들은 그 기준을 신체 일반보다는 신체의 핵심 부위라 할 수 있는 두뇌에 두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수정된 신체 동일성 이론은 다음과 같이 기술된다. P2와 P1이 동일한 인격이기 위한 필요 충분 조건은 P2가 P1과 동일한 두뇌, 즉 기억과 성격을 조절하는 동일한 중추 기관을 갖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론을 두뇌 동일성 이론으로 부르기로 하자. 대체로 이러한 윤곽을 가진 이론(여기에는 중요한 수정이 가해지는데 이 점은 조금 후에 논의될 것이다)이 위긴스(D. Wiggins)의 ?동일성과 시공간적 지속?(Identity and Spatiotemporal Continuity)에서 제안되었다.1)
인격 동일성에 대한 신체 이론의 전통적 대안은 기억-성격 이론이다. 이 이론은 어떤 인격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중요한 영향을 주는 것이 기억 주장이나 성격이란 점을 고려하여, 기억과 성격의 지속이 인격 동일성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속성이 두뇌와 같은 어떤 신체적 기관의 지속성에 의해서 야기된 것인지와는 상관이 없다. 어떤 인격이 두뇌를 포함한 동일한 신체를 지속적으로 갖고 있을 경우 정상적이라면 그의 기억과 성격의 동일함 역시 동반되야 하겠지만, 이 이론에 따르면 두뇌와 신체가 동일하다 해도 동일한 기억과 성격을 갖지 않는 특별한 경우 인격 동일성은 유지되지 않는다.
이 이론의 가장 단순한 형태는 로크(J. Locke)에 의해 개진되었다. 그는 오로지 기억(또는 그가 표현한 대로 ‘의식’)이 인격 동일성을 구성한다고 주장했다. 로크의 이론을 대략 정식화해 본다면, t2의 P2와 t1의 P2가 동일한 인격이기 위한 필요 충분 조건은 P2가 P1이 과거에 실제로 수행했던 행위와 실제로 가졌던 경험을 기억하는 것이다.1)
로크의 이론을 면밀히 검토하기 전에 이 이론에서 말하고 있는 기억이 어떤 것인 지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첫째, 그것은 한 사람의 고유한 과거의 경험에 대한 기억으로 우리가 때로 사적 기억이라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사실 기억과 구별되어야 한다. 사실 기억은 1066년에 헤이스팅즈의 전투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경우처럼 이미 알려진 사실에 대한 기억을 말한다. 이것은 과거 자신의 경험에 대한 기억은 아니다. 또한 사적 기억은 어떤 일을 수행하는 방법 (예를 들어, 수영이나 자전거를 타는 방법)을 기억하는 것과도 구별되야 한다. 둘째, 로크의 기억은 약한 의미의 사적 기억이다. ‘기억하다’의 정상적인, 또는 강한 의미에 따르면, 우리는 실제로 행했던 일만을 기억할 수 있다. 나는 에펠 탑에 올라갔던 것을 ‘기억’한다고 말할 지도 오른다. 그러나 만약 내가 그 탑에 올라간 적이 없다면, 나는 그 탑에 올라갔던 것을 참으로 기억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참인 사실만이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있듯이 우리는 실제 경험만을 기억할 수 있다. 그러나 ‘기억하다’는 약한 의미로도 사용되는데, 그것은 한 사람이 실제로 어떤 일을 행하지 않았더라도 그 일을 했다고 믿고 있는 경우로, 그가 강한 의미로 기억한다고 믿고 있는 것에 대한 기억이다. 약한 의미의 기억은 필연적으로 참된 기억은 아니다. 문제는, 만약 강한 의미의 기억을 사용하여 인격 동일성의 기억 기준을 정의할 경우, 그것이 그다지 유용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P2가 P1의 경험을 자신의 경험으로 기억한다는 것은 이미 P2와 P1의 인격 동일성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P2와 P1이 동일한 인격인지를 의심한다면 그는 P2가 P1의 경험을 참으로 기억하는지도 똑같이 의심할 것이다. 로크가 말하는 인격 동일성의 기준은 약한 의미의 기억이다. 나는 이제부터 강한 의미와 약한 의미라는 두 사용법 대신 참된 기억과 심상적 기억(apparent memory)1)을 사용할 것이다(왜냐하면 강한 의미의 기억이 약한 의미의 기억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로크의 기억 이론은 다음과 같이 재기술될 수 있다. 시점 t2의 P2가 앞선 시점 t1의 P1과 동일한 인격이기 위한 필요 충분 조건은 P2가 P1이 실제로 행한 행동과 경험을 심상적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한 인격은 그가 스스로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인격이다. 한 인격이 스스로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과 그가 공적으로 자신이 누구임을 주장하는 것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자. 우리는 한 사람의 공적인 기억 주장이 참된 것이며, 자신의 참된 기억 믿음을 그대로 표현한다고 생각할 때, 즉 내가 전술한 의미의 심상적 기억으로 생각되는 경우에 한해서, 그러한 것들만을 인격 동일성의 증거로 받아들인다. 누군가가 어떤 기억 주장을 할 때 그가 그의 심상적 기억을 표현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의심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경우는 당연히 예외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기억한다고 주장하는 바의 진위를 가릴 수 있는 다른 객관적인 근거가 있고, 그가 거짓으로 꾸며낸 내용을 기억하는 척함으로써 어떤 이익이 그에게 돌아가며,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고 알려진 경우와 같은 것이다.
로크는 그의 이론의 성격과 결과에 대해서 아주 분명한 입장을 취했다. 그에 따르면 만약 내가 어떤 행위를 한 것을 심상적으로 기억하지 않으면 나는 그 행위를 한 인격이 아니며, 만약 내가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어떤 사람의 행위를 심상적으로 기억한다면 나는 바로 그 인격이라는 것이다.
만약 소크라테스와 퀸즈버러의 현 시장이 [의식의 동일성]에서 일치한다면 그들은 동일한 인격이다. 만일 깨어 있기도 하고 잠들어 있기도 하는 소크라테스가 동일한 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면 깨어 있는 소크라테스와 잠들어 있는 소크라테스는 동일한 인격이 아니다. 깨어 있는 소크라테스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잠들어 있는 소크라테스가 생각했던 것에 대해서, 깨어 있는 소크라테스를 벌하는 것은 마치 쌍동이 중 한 사람이 자신은 전혀 모르고 있는 다른 쌍동이의 행동 때문에 처벌받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로크, ?오성론?, 19장)
록크의 이론은 그에 수반되는 불합리한 결과를 피하려면 어느 정도의 수정을 요한다. 먼저, 토마스 리이드(T. Reid)가 제기한 반례를 살펴보자.
한 소년이 과수원 서리를 했다고 학교에서 매를 맞았다. 그는 청년 시절 장교가 되었고 첫 전투에서 적으로부터 적기를 빼앗아오는 용감한 행동을 했으며 노년에는 장군이 되었다. 이제 그가 적기를 빼앗았을 때 그는 소년 시절 학교에서 매맞은 일을 의식하고 있었으며, 그가 장군이 되었을 때 그가 적기를 빼앗은 일을 의식하고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그가 장군이 되었을 때 소년 시절의 매맞은 일에 대한 의식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또한 가정해 보자. 이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록크의 이론에 의하면 학교에서 매를 맞은 소년은 적기를 빼앗은 장교와 동일한 인격이며 적기를 빼앗은 장교는 장군과 동일한 인격이다. 그렇다면 논리 법칙에 따라 소년은 장군과 동일한 인격이다. 그러나 장군의 의식이 그의 소년 시절 매맞은 일에까지 닿아있지 않기 때문에, 록크의 이론에 의하면, 장군과 소년과 동일한 인격이 아니다. 따라서 장군은 학교에서 매맞은 소년과 동일한 인격인 동시에 동일하지 않은 인격이다. (리이드 <<지성론>> III, 6장)
이 반례는 동일성이 이행적 관계---만약 a가 b와 동일하고 b가 c 와 동일하면 필연적으로 a는 c와 동일하다--- 를 갖는다는 중요한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록크의 이론을 다음과 같이 수정함으로써 위의 반론에 대처할 수 있다. 시점 t2의 P2가 앞선 시점 t1의 P1과 동일하기 위한 필요 충분 조건은 P2가 P1의 행위와 경험을 심상적으로 기억하거나, 또는 중간 시점 t'의 P'가 P1의 행위와 경험을 심상적으로 기억할 때, P2가 P'의 행위와 경험을 심상적으로 기억하는 경우이거나 또는 이와 같은 중간 과정의 사슬이 계속 이어지는 두 경우 중의 하나이다. (즉 P2는 P'의 행위와 경험을 심상적으로 기억하며, P'는 P''의 행위와 경험을 심상적으로 기억하며, 이와 같은 연결이 P1의 행위와 경험을 심상적으로 기억하는 단계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만약 P1과 P2가 그러한 사슬로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들이 기억 지속성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슬의 각 단계에서 전 단계의 행위와 경험에 관해 갖게 되는 심상적 기억이 완벽할 정도로 정확한 기억일 필요는 없겠지만, 각 단계의 인격이 전 단계의 인격과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심상적 기억의 사슬은 어느 정도 정확성을 요구한다고 하겠다.
둘째, 일반적으로 볼 때, 심상적 기억이 인격 동일성을 보장하며 따라서 심상적 기억과 참된 기억이 차이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로크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한 종류의 한 예가 사실상 방금 언급했던 경우이다. 만약 한 사람이 자신이 과거에 어떤 행위를 했다고 심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해도 실제로 그러한 행위를 한 적이 없다면, 그 심상적 기억은 참된 기억이 아니다. 예를 들어 내가 1976년에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했던 일을 심상적으로 기억한다 해도 만약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의 심상적 기억은 참된 기억이 아니다. 또한 심상적 기억의 사슬이 그 인격 바깥으로 벗어난 인과의 사슬(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 제공한 정보)에 의해 연결된 경우도 참된 기억이 될 수 없다. 내가 태어난지 세 달쯤 되었을 때에 만난 증조 할아버지에 대한 나의 심상적 기억이 사실은 한참 후에 어머니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로 인하여 생긴 것이지만 더 훗날 나는 어머니가 내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사실은 잊어버린 채, 증조 할아버지를 만났었다는 심상적 기억만을 갖고 있는 경우가 되겠다. 마지막으로 만약 심상적 기억들이 일관성이 없을 경우(예를 들어, 과거의 한 시점에 나는 호주에 있었다는 심상적인 기억을 갖고 있는 한편 똑같은 시점에 영국에 있었다는 심상적인 기억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경우), 적어도 그 둘 중 하나는 참된 기억일 수 없다. 따라서 로크는 이와 같은 예외를 인정하고, 문제의 기억이 위의 세가지 예외 중의 하나에 해당될 경우에는 심상적 기억을 참된 기억으로 간주하지 않는 한편, 예외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는 심상적 기억이 인격 동일성을 보장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로크의 기억 이론이 단순한 기억 이론인 반면 흄(D. Hume)은 기억과 관련된 다른 점들까지 취하는 복잡한 기억 이론을 발전시켰다.1) 사람들이 어떤 인격에 대해 갖게 되는 태도가 단순히 그의 심상적 기억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그 인격을 어떻게 대우하느냐는 그의 기억외에도 그가 세상에 대해 갖고 있는 믿음들과 태도, 그것들이 가변적인가 항시적인가, 무엇이 그것들을 변화시키는가 등등, 한 마디로 그의 성격에 의존한다. 흄은 이러한 것들은 끌어들였다. 그가 인식하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기억은 잘못된 경우가 아니라면 (그 역시 심상적 기억은 정상적인 경우 참된 기억이라고 가정한다) 인과 관계라는 것이다. 만약 내가 과거의 어떤 경험을 강한 의미로 기억한다면, 그것은 나의 심상적 기억의 부분적 원인인 과거의 실제 경험을 포한다.
흄은 인격을 기본적으로, 신체가 덧붙혀진 정신적 상태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 정신적 상태란 사고, 감각, 영상들로 이루워진 ‘다양한 지각들의 다발이나 꾸러미’에 불과하다. 이들 중 어떤 것은 과거의 ‘지각들’에 의해 야기된 것으로, 과거 ‘지각들’의 희미한 복사가 바로 기억이라고 흄은 말한다. 현재 나의 정신적 상태인 다양한 ‘지각들’의 다발 C2는 어제 나의 정신적 상태인 지각들의 다발 C1과 다음 사실에 의해서 연결되어 있다. 즉, C2의 일부 구성요소가 C1의 구성요소에 의해 야기되거나 닮은 꼴을 이룬다거나 (예를 들어, C1의 구성요소에 대한 기억이나 유사한 사고를 포함하는 방식으로), 두 다발은 유사한 다발들을 통과하는 인과 사슬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흄은 무엇이 수많은 ‘지각들’을 하나의 다발로 묶어주는지 - 다시 말해 무엇이 한 시점에서 내가 가지는 모든 ‘지각들’을 모두 내게 소속되게 하는지 -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흄은 이와 같이 인과의 사슬로 묶여있는 동일성은 ‘허구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어떤 다발에 속하는 ‘지각들’은 다른 다발에 속하는 ‘지각들’과 서로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해도 실제로는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허구적 동일성을 완전한 불변의 상태로 존재를 지속하는 실체에 의해 소유되는 참된 동일성과 대조시킨다.
현대에 와서는 그라이스(Grice, 1941)와 퀸튼(Quinton, 1962)을 포함한 일련의 철학자들이 인격 동일성의 기억 이론을 좀 더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기억 이론의 옹호자들은 기억의 사슬을 연결시켜주는 심상적 기억이 실제 기억이어야만 하는지 아니면 가언적 기억으로도 충분한지에 대해서 항상 분명한 입장을 보여준 것은 아니다. ‘실제 기억’은 과거의 경험들을 실제로 회상하는 것을 뜻한다. 기억 이론이 실제 기억을 요구한다는 가정에 수반되는 문제점은,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과거를 회상하지 않으며 또한 과거 어느 순간의 행했던 행위와 경험들을 그 이후에 한 번도 회상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제까지 기술된 바의 기억 이론은 바로 이러한 가능성을 무시해 버린다. 만약 어떤 시점의 인격이 한 행위와 경험이 기억 사슬에 의해서 나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나와 그 행위를 한 인격은 동일하지 않다. 기억 이론이 이러한 불합리한 결과를 피하려면, 기억 사슬을 형성하는 심상적 기억은 단지 가언적 기억2) - 즉, 어떤 인격이 문제의 행위와 경험을 억하려고 시도할 경우 그러한 시도의 결과로, 예를 들면 어떤 자극의 결과, 갖게되는 심상적인 기억---이면 족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1)
그러나 인격 동일성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기억 이론에도 모두 적용되는 반론이 있다. 그것은 복제 가능성 반론으로, 처음에 리이드가 간단한 형태의 반론을 제기했고 후에 윌리엄즈(B. Williams,1956-1957)가 더욱 확장된 반례를 자신의 논문에서 주장하였다. 윌리엄즈가 상상한 예는 20 세기의 찰스라는 인물이 자신이 폭스(Guy Fawkes)3)임을 주장하는 경우이다.
찰스가 직접 보았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건과 자신이 직접 수행했다고 주장하는 모든 행위들은 과거의 역사적 실존 인물 - 예를 들어, 폭스 - 의 행적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의 모든 기억 주장은 역사가들에게 알려진 폭스의 생활 패턴과 완전히 일치할 뿐만 아니라 역사가들이 추적해 낼 수 없는 부분까지도 그럴 듯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오히려 설명되지 못했던 역사적 사실까지 잘 설명해주는 것이다.(Williams, 1956-1957, 332면)
찰스의 기억 주장이 ‘역사가들이 추적해 낼 수 없는 부분까지도 그럴 듯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오히려 설명되지 못했던 역사적 사실까지 잘 설명해 준다’는 사실은 그가 단지 폭스에 관한 책에서 읽은 것들을 기억한다고 주장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우리에게 심어주며 따라서 우리는 그가 그의 심상적 기억을 정직하게 보고하고 있을 뿐이라는 정상적인 경우라면 자연스러운 가정을 하게 된다. 기억 이론에 의하면 찰스는 폭스일 것이다. 그러나 윌리엄즈는 찰스의 이야기에 이어서 우리에게 또 하나의 이야기를 펼친다. 만약 로버트라는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나서 찰스 만큼이나 신빙성있는 기억 주장을 통해서 자신이 바로 폭스임을 우리에게 주장한다고 상상해 보자. 우리는 찰스와 로버트 그 둘이 모두 폭스와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다면 찰스와 로버트, 그 둘 역시 서로 동일한 인격이어야 하는데 현재의 그 두 사람은 다른 삶과 다른 생각과 다른 감정을 갖고 있는 다른 인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심상적 기억이 인격 동일성의 오류가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해도 그것이 인격 동일성을 구성할 수는 없다.
복제 가능성 반론은 다음 장에서 언급될 다른 난점들과 함께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많은 철학자들로 하여금 인격 동일성에 있어서 신체의 한 부분인 두뇌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였다. 이미 보았듯이, 두뇌 이론은 기억-성격 이론이 갖고 있는 통찰력을 고려하고 이러한 요소들의 중요성을 신체의 한 부분인 두뇌와 연결시킨다. 두뇌 이론은 기억과 성격의 지속성에 인과적 책임이 귀속되는 기관으로 두뇌를 선정함으로써 두뇌의 지속이 곧 인격의 지속을 성립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두뇌 이론도 역시 복제 반론에 부딪친다는 점이다. 인간의 두뇌는 매우 유사한 두 개의 반구로 되어 있다. 좌반구는 신체의 오른 쪽 부분으로부터 (그리고 두 눈의 오른쪽 부분으로부터) 받은 감각 정보를 처리하고 조절하는 주된 역할을 하며 우반구는 신체의 왼 쪽 부분으로부터(그리고 두 눈의 왼쪽 부분으로부터) 받은 감각 정보를 처리하고 조절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좌반구는 특히 언어 능력의 구사에 있어 중요한 역활을 한다. 성인의 경우 각 반구의 역할은 구별되지만 그들은 상호작용한다. 만약 유년 시절에 한 쪽 반구의 부분이 제거되면 그 부분의 역할은 다른 반구의 부분에 의해 수행된다. 두뇌의 상당한 부분을 제거하는 수술이 최근 행해지고 있는 것을 볼 때, 가까운 미래에는 생명의 위험 없이도 반구를 모두 제거하는 수술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P1의 한 쪽 반구를 다른 사람의 뇌가 제거된 빈 자리에 이식하고 P1의 다른 쪽 반구는 또 다른 사람의 뇌가 제거된 빈 자리에 이식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할 뿐만 아니라 가까운 미래에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사실 윌리엄즈의 폭스의 예보다는 반구 이식 수술의 예가 훨씬더 현실성이 있어 보인다. 만약 이러한 이식 수술이 성공적으로 수행된다면 그 결과 P1의 반구를 각각 이식 받은 두 사람은 분명히 어느 정도는 P1과 유사하게 행동하며 또한 P1의 심상적 기억을 어느 정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술 후의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을 P1이라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결국, 만약 P1의 한 쪽 반구만이 손상되어 폐기되고 나머지 한 쪽은 이식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으며, 수술 후의 P1이 예전의 P1과 같이 행동하며 P1의 기억 주장을 할 경우, 우리는 아무런 주저없이 그를 P1이라고 단언할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어느 쪽 뇌가 보존되었는 지와는 상관이 없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의 좌반구가 보존되었다면 우반구가 보존된 경우보다 언어 능력은 더 나을 것으로 기대되지만 이것은 단지 사소한 차이일 뿐이다. 우리는 앞서 인격 동일성은 두뇌의 지속에 의해 성립한다는 가정에 대한 좋은 근거들을 살펴보았으며, 이제 단지 반 쪽의 두뇌가 지속된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라는 것도 살펴보았다. 따라서 손상되지 않은 채 P1의 신체에 남아있는 반구를 다른 신체의 뇌가 제거된 빈자리에 이식하는 경우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마땅히 이식된 반구의 소유자를 P1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이식된 반구의 소유자가 P1인 지 아닌 지는 나머지 반구가 폐기되었는 지 아닌 지와는 무관한 것이며 또한 나머지 반구가 손상되지 않아서 또 다른 사람의 신체에 이식되었는 지와도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나머지 반구의 소유자 역시 P1이라고 해야 하지 않는가? 이와 같이 위긴스식의 이론은 각 반구를 소유하고 있는 두 인격이 모두 P1이라는 결론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나 폭스의 예에서도 지적된 바 있듯이 그 둘이 모두 P1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두 인격은 서로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긴스는 그의 잠정적 정의에 덧붙여, P2와 P1이 동일하기 위해서는 P2가 P1의 전체적 또는 부분적 두뇌의 지속이라는 기준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그 기준을 만족시키는 또 다른 인격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 한한다는 단서를 단다.1)
그러나 어떤 이론이라 해도 그것이 기억 이론이건, 두뇌 이론이건, 또 다른 이론이건 간에 문제의 기준을 똑같이 만족하는 또 다른 인격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만 인격 동일성이 확보된다는 단서가 붙은 이론은 불합리한 결과를 가져올 수 밖에 없다. 두뇌 이론을 가지고 이것을 설명해 보자. P1의 좌반구가 다른 신체로 이식된 경우를 가정해 보자. 이 이론에 따르면, P1의 좌반구를 이식받은 인격이 P1인 지 아닌 지는, 즉 P1이 이식 수술 후에도 계속 존재하는 지의 여부는 P1의 우반구가 어떻게 되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P1의 우반구도 어떤 신체로 이식된다면 기억과 두뇌 지속의 기준을 만족하는 인격은 둘이며 그 둘이 다 P1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반구를 이식하는 수술이 수행되지 않는다면 기억과 두뇌 지속의 기준을 만족하는 인격은 단 하나뿐이므로 그가 P1이 된다. 따라서 수술 후에 내가 살아남는 지의 여부는, 내가 정말 살아남을 경우 나의 신체가 될 신체와는 무관한 신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에 의존한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 지가 어떻게 제삼의 신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의존할 수 있겠는가? 기억 이론에 유사한 복제 금지 조항을 덧붙이는 경우에도 이와 같은 불합리한 결과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복제 금지 조항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다시 원래의 난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것은 어떤 기억 기준이건 두뇌 기준이건 또는 그것들을 복합시킨 복합 기준이건 간에 동일성의 기준을 만족하는 인격이 둘 이상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또한 다음과 같은 사실에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데, 위의 기준들은 모두 정도에 따라 차이를 둘 수 있는 기준들이라는 점이다. P2는 P1의 두뇌의 90%나 80%, 또는 50%미만의 양을 가질 수 있으며 심상적 기억과 성격의 유사성도 그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한 인격이 앞선 시점의 인격과 동일하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동일성 기준을 만족시켜야 하나? 이에 관한 어떤 식의 설명도 다 인위적일 것이다. 아마 원래의 뇌물질의 50% 이상을 소유해야 한다는 주장은 자의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오직 한 인격만이 원래 두뇌 물질의 50% 이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반면에 우리의 기준이 그보다 적은 비율을 요구할 경우 한 명 이상의 인격이 그 기준을 만족시키게 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상상해 보자. P2는 P1으로부터 두뇌의 60% (따라서 반 이상)를 이식받고, P3는 P2의 두뇌의 60%를 이식받고, 이런 식으로 P6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정말 P6가 P1과 동일한 인격이라고 말하고 싶을까? P6는 P1의 두뇌 물질의 아주 적은 양만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뇌물질의 반 이상’이란 기준에 의해서 P6는 P5와 동일하며, P5는 P4와, 이와 같이 동일성의 이행적 속성에 의해 P6는 P1과 동일하게 된다. 이와 같이 볼 때, 두뇌 물질의 이식 비율에 대한 기준이 그럴듯하려면 과거에 유사한 이식이 있었는지, 이식 수술의 간격은 얼마 만큼인지를 고려에 넣어야만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기준의 인위성을 마주하게 된다.
이 문제는 철학자들로 하여금 다음 두 가지의 해결 방법 중 하나를 선택케한다. 첫번째의 해결 방법은 인격 동일성은 정도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이다. P2는 두뇌 물질과 기억의 유사성의 정도 만큼 P1과 동일하다. 결국, 생명이 없는 것들이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며 존속하는 것은 정도의 문제이다. 우리가 책상을 조금씩 점차적으로 대치한다면, 대치된 책상은 원래의 것과 다소간 동일할 뿐이다. 그리고 만약 나의 자동차가 조각 조각 분해되어 어떤 부분은 새 차를 만드는 데 들어가고 어떤 부분은 또 다른 새 차에 들어간다면 두 대의 새 차는 원래의 차와 부분적으로 같고 부분적으로 다르다. 사람에게도 똑같은 원리를 적용시켜 말할 수 있지 않은가. 보통 사람들의 동일성을 그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두뇌 수술은 매우 드문 경우이며 반구 이식 수술은 결코 행해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앞선 시점의 인격과 동일한 인격이라 할 수 있는 후보자는 보통 기껏해야 하나이며 그 후보자는, 앞선 시점의 인격과 거의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 두뇌와 매우 유사한 심상적 기억과 성격을 소유함으로써, 사실 매우 유력한 후보자가 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우리는 동일한 인격인지의 여부에 대하여 그렇거나 아니거나의 가 부 간 중 하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논변에서 보여지듯이 인격 동일성의 논리적 성격은 그렇지 않다. 원래의 인격과 어느 정도 동일하며 어느 정도 다른, 중간 단계의 경우들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며, 이 가능성이 경험적 가능성으로 연결될 수 있다.
파핏(Derek Parfit, 1971b)은 이와 같이 인격 동일성을 정도의 문제로 보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반구 이식 수술의 결과 한 인격이 나눠지는 경우, 그 인격은 수술 후,자신의 반구를 각기 이식받은 두 인격으로 부분적으로 ‘살아남는다’고 주장한다. 수술 후의 두 인격은 그의 후속 ‘자아들’이 되겠지만, 엄격히 말해서 두 인격 모두 원래의 인격과 동일하지 않다.
파핏은 자신의 입장을 복합 이론이라고 불렀다.1) 그런데 이 이론 역시 근본적인 난점에 부딪히게 된다. 이 이론은 거짓일 수 있는 가능성을 단번에 알 수 있는 실질적인 경험적 주장을 수락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버나드 윌리엄즈(1970)의 유명한 미친 외과 의사의 예를 빌려 보자. 미친 의사가 당신을 강제로 잡아다가 당신의 양 쪽 반 뇌를 각각 다른 신체에 이식시킬 예정이라고 말한다. 그는 수술 후의 한 사람에게는 고문을 가할 것이며 다른 한 사람에게는 100만 파운드의 상금과 함께 자유롭게 해 줄 것이다. 당신은 고문당할 사람과 상금받을 사람을 선택할 수 있으며 의사는 당신의 선택에 따라 수술할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당신은 의사의 약속을 믿는다. 그러나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가? 당신은 보상을 받고 자유로와지는 쪽을 선택하고 싶겠지만 어떤 사람이 당신이 될 것인 지 알 수 없다. 이제 복합 이론에 따르면 수술후의 두 사람은 모두 당신의 두뇌를 갖고 있는 만큼, 또한 당신의 심상적 기억과 성격을 닮아 있는 만큼 당신과 동일하다. 경험적으로 볼 때 우반구를 이식받은 사람이 좌반구를 이식받은 사람보다 당신의 심상적 기억과 성격을 조금더 닮아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 차이가 대단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파핏은 다음과 같이 말해야만 한다. 당신의 선택이 어떻든 간에 그것은 별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물론 약간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수술 후의 두 사람이 모두 부분적으로 당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은 수술 후 --- 약간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 부분적으로 고통당하며 또 부분적으로 즐거운 존재가 될 것이다. 따라서 당신은 즐거운 기대와 끔찍한 예감 양쪽에 대한 이유를 갖는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과 같다. 혼합된 운명을 겪을 하나의 당신이 미래에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부분적인 즐거움과 부분적인 공포감에 대한 이유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부분적 생존의 개념이 의미있다 해도 좀 더 정말 심각한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다. 우리는 희생자가 선택을 잘못하여 보상받는 경험이 아닌 고문받는 경험을 하는 가정이나 또는 선택을 잘하여 고문의 경험이 아닌 보상받는 경험을 하는 가정을 이해할 수 있다. 인격 동일성 개념의 한낱 철학적 분석이 어떤 경험이 내일 당신의 것이 될 것인지를 말할 수는 없다. 윌리엄즈의 말을 빌린다면 어떤 선택도 ‘모험’일 뿐이다. 그러나 파핏의 견해에 따르면 여기에는 아무런 위험도 없다. 왜냐하면 두뇌, 심상적 기억, 성격의 지속성의 정도를 아는 만큼 당신은 미래 인격이 어느 정도 당신이 될 것인 지, 그리고 그의 경험이 어느 정도 당신의 경험이 될 것인 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나의 뇌가 양분되어 각각 다른 신체로 이식될 경우, 아마 각각의 반 뇌가 조절하는 두 신체의 두 인격으로 각각 부분적으로 생존할 수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나의 좌반구가 가는 쪽으로 갈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나의 우반구가 좌반구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신체를 조절하게 되는 순간 새로운 인격을 형성되거나 그 유기체는, 마치 하나의 인격체인 양 어느 정도 행동함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의식을 갖지 않는 대단히 복잡한 기계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팔과 다리와 같은 나의 신체적 부분들의 운명은 나의 운명과는 별 관련이 없다. 마찬가지로 나의 두뇌의 부분들의 운명 역시 나의 운명과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 나의 뇌에 생긴 아주 작은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후에도 나는 완전히 나로서 생존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두뇌의 아주 작은 부분이 아닌 조금 더 큰 부분이 제거되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수도 있다. 우리는 단지 알지 못 할 뿐이다. 그러나 만약 미친 의사에게 잡혀있는 희생자가 자신의 선택에 대해 방관하는 태도를 취한다면, 내 생각에는, 우리는 그가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정당화될 수 없는 독단적 태도를 취한다고 해야할 것이다.
복제 반론에 대한 또 하나의 대안은 다음과 같다. 심상적 기억과 두뇌의 지속이 인격 동일성의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들은 틀릴 수 있는 증거들이며 인격 동일성은 그러한 증거들과는 구별되는 별개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범죄 현장에 남겨진 혈흔과 지문이 어떤 사람의 것과 일치될 경우 그가 현장에 있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되며, 로마식의 건물과 동전의 발견은 그 장소에 살았던 사람들이 로마인들이라는 증거가 되듯이, P2의 심상적 기억이 P1의 그것과 유사하고 P2가 P1과 거의 동일한 두뇌 물질을 갖고 있다는 것은 P2와 P1의 인격 동일성에 대한 증거가 된다. 그러나 범죄 현장에 남겨진 혈흔이나 지문과 어떤 사람이 범죄 현장에 있었다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그가 현장에 있었다는 것은 후에 현장에서 발견된 혈흔과 지문에 의하여 분석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후자는 전자의 증거가 될 뿐이다. 혈흔과 지문의 소유자가 그 장소에 간 적이 없다면 그곳에 혈흔과 지문이 남아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기억 유사성과 두뇌 지속은 인격 동일성에 대한 증거임에도 불구하고 인격 동일성은 그것들과는 분병히 구별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를 파핏이 이름 부친대로 단순 이론이라고 잠정적으로 부르기로 하겠다. 이 이론은 우리가 논의했던 다른 이론들을 괴롭혀왔던 모든 난점들을 처리할 수 있다. 나의 두뇌가 분할되어 다수의 다른 신체로 이식된 경우를 상정해 보자. 복합 이론에 따르면, 수술 후 생겨난 다수의 인격들은 그 각각의 심상적 기억의 유사성과 두뇌 물질의 지속성의 정도 만큼 내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논리적인 문제다. 그러나 단순히 논리적으로 그러한 일이 결정될 수 있다는 가정은 실로 기이한 것 같다. 미래의 인격들이 나의 기억과 두뇌 물질을 얼마 만큼 나누워 갖고 있느냐 하는 사실 너머로 내가 과연 이식 수술 후에도 과거 경험들을 계속 갖고 있을지 그렇지 않을지에 대한 진실이 존재하고 있을 것 같다. 단순 이론은 인격 동일성과 두뇌 물질이나 심상적 기억의 유사성의 정도는 서로 구별되는 별개의 것임을 주장한다. 둘 중 하나가 다른 것 없이 발생한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두뇌 물질과 심상적 기억의 유사성은 인격 동일성의 강력한 증거다. 현재의 나와 지난 주에 나의 신체와 두뇌를 가졌던 인격은 실질적으로 거의 동일한 두뇌 물질과 심상적 기억을 가지므로 그 둘이 동일한 인격임은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두뇌 물질이 부분적으로만 같고 기억 연결이 강하지 않을 경우, 두 인격이 동일할 가능성은 개연성이 높을 뿐이다. 수술 후의 두 인격 P2와 P2*가 각기 수술 전의 P1과 일정한 지속성을 가질 경우, 경험적 증거들은 P2와 P1이 동일하다는 가정과 P2*과 P1이 동일하다는 가정을 각기 어느 정도 뒷받침한다. 경험적 증거가 두 가정 중 하나를 더 지지해줄 수 있지만, 덜 뒷받침받는 가정이 참일 수도 있으며, 두 가정 모두 참이 아닐 수도 있다. P1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두 인격이 새로 생겨날 수도 있다. 따라서 단순 이론은 단순히 논리가 어떤 경험들이 내것이 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완전히 인정하며 심상적 기억과 두뇌의 지속이 인격 동일성에 대하여 틀릴 수 있는 증거를 제공한다는 것을 허용한다. 그리고 우리가 두뇌와 기억 이론에 대한 비판으로 끌어들였던, 두 후속 인격들이 동일한 인격임을 허용하게 되는 복제 반론은 단순 이론에 대한 반론으로는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리가 두뇌와 기억 지속성 이론에 맞서서 제기한 복제 반론의 논점은 반 뇌 이식 수술 두 후속 인격들이 수술 전의 본래의 인격과 동일하다고 생각할만한 좋은 증거들을 똑같이 갖고 있다 해도 그 증거들은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오직 한 인격만이 한 시점에서 그 보다 앞선 시점의 인격과 엄격히 동일할 수 있기 때문에, 비록 두 경우 중 어느 하나가 틀렸는지를 모른다 해도, 한 경우는 틀린 증거를 갖는다는 것이 도출된다.
그러나 단순 이론과 관련된 다른 문제점들이 있는 데 이는 조금 후에 논의될 것이다. 다음 장에서 나는 단순 이론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고 그것을 발전시킬 것이다. 내가 단순 이론을 통하여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데카르트의 이원론 --- 인격은 신체와 영혼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과 같은 것이다. 3장에서는 단순 이론에 대한 검증주의자들의 반론을 논박할 것이며 이어서 단순 이론에 의하면 인격의 지속은 주체가 그 자신의 고유한 경험 속에서 의식하고 있는 어떤 것임을 주장할 것이다. 4 장에서는 두뇌와 기억의 지속에 의해서 인격 동일성이 구성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것들이 인격 동일성의 증거가 되는지에 대한 설명을 시도할 것이다.
단순 이론은 일반적으로 인격의 불가분할성의 원칙과 결합해 있다. 인격이 나누어질 수 없다는 의미는 t2에 존재하는 오직 한 인격 P2만이 t1의 P1과 정도야 어떻든 간에 동일할 수 있으며 t1에 존재하는 오직 한 인격 P1만이 t2의 P2와 정도야 어떻든 간에 동일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인격의 불가분할성 원칙은 한 인격이 과거의 두 인격과 동일하다거나 미래의 두 인격과 완전히 동일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부분적 동일성도 부정된다(예를 들어, 파핏 식의 ‘생존’은 부정된다). 또한 인격의 융합과 분열 모두 불가능하다. 두뇌가 양분될 경우 후속 인격들 중 기껏 하나만이 본래 인격과 정도야 어떻든 간에 동일하다. 그리고 서로 다른 두뇌로부터의 반구들이 합쳐서 새로운 인격의 두뇌를 형성할 경우, 이식하기 전 두뇌의 본래의 인격들 중 기껏 한 인격만이 후속 인격과 정도야 어떻든 간에 동일하며 어떠한 동일성도 완전한 동일성이며 부분적 동일성이란 없다. 우리가 간략하게 살펴본 불가분할성 논제를 지지하는 논변(18면)은 분열을 앞에 둔 인격 P1이 서로의 경험을 전혀 나눌 수 없는 P2와 P2* 두 인격의 경험들을 정도야 어떻든 간에 갖게 된다는 가정에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분해 후의 두 자동차나 두 책상은 원래의 것과 부분적으로 동일하고 부분적으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자동차나 책상은 경험을 갖지 않으며 따라서 위와 같은 난점은 일어나지도 않는다. 우리는 앞으로 인격 분열의 가능성을 논박하는 논변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인격 융합의 가능성을 논박하는 논변을 차례로 살펴봄으로써 인격의 불가분할성 논제의 양면을 모두 방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불가분할성 논제는 단순 이론과 결합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할 것이다. 나는 그것들을 분리시켰다.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단순 이론은 단순히 인격 동일성의 진실은 두뇌와 기억의 지속과 같은 틀릴 수 있는 경험적 증거에 의하여 분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주요 관심은 단순 이론이다.
2. 이원론적 이론
인격 동일성의 단순 이론으로 이끄는 1장에서의 두뇌 이식에 관한 논의는 두뇌와 기억의 의미있는 지속이 인격 동일성을 보장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논의는 두뇌나 기억의 지속이 완전히 불필요하다는 것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말해, 시점 t2의 P2가 앞선 시점 t1의 P1의 두뇌를 조금도 갖지 않고 P1의 행위과 경험에 대한 심상적 기억도 전혀 갖지 않음에도 불구하다 P2와 P1이 동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좀 더 황당한 많은 사고 실험들은 그러한 가정이 모순이 아님을 보여준다.
사후 삶에 대한 많은 종교적 설명이 주장하는 것같이 한 인격이 완전히 새로운 신체(완전히 새로운 두뇌를 포함한)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는 것 같다. 현재 내 방에서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이 신체를 나의 신체라고 말하는 것은 두가지를 말하는 것이다. 첫째, 나는 별도의 의도적인 행위를 하지 않고서 그저 나의 팔과 다리와 같은 신체의 부분을 움직일 수 있으며, 나의 신체를 움직임으로써 나는 나의 의도대로 다른 물리적 물체들을 움직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문고리를 잡고 있는 나의 손을 돌림으로써 나는 문을 연다. 나의 다리를 구부렸다 펴면서 나는 원하는 방향으로 공을 찬다. 나는 별도의 의도적 행위를 함으로써 나의 손을 돌리거나 나의 다리를 구부리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나의 팔이나 다리를 움직일 뿐이다.1) 둘째, 신체 바깥의 세계 상태에 대한 나의 지식은 나의 신체에 미치는 영향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물리적 물체를 봄으로써 그것의 위치에 관해 알게 되는데, 그것은 그 물체들에 의해 반사된 광선이 나의 눈에 부딪혀서 나의 시 신경을 자극시킨 결과이다. 이와 같이 나의 신체는 이 세계에 대한 나의 지식의 전달 수단이며 이 세계에서 내가 행위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물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의 신체가 더 이상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지 않고 그 대신 다른 신체가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가정해 보자. 이러한 가정이 모순을 포함하는가? 나는 내가 이제까지 사용해 온 나의 눈과 팔과 다리 대신 다른 눈과 팔과 다리를 움직여서 대상들에 대한 지식을 얻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완전히 새로운 신체를 얻은 셈이다. 만약 나의 새 신체가 예전의 것처럼 지구의 거주자라면 이는 동양 종교에서 흔히 말하는 환생이라고 불리우는 경우가 될 것이다. 만약 그 신체가 어떤 먼 별에 거주하거나 우리의 지구와는 다른 공간1)을 점유한다면 모든 서양 종교(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이해하는 부활의 경우가 될 것이다.
한 사람이 두뇌를 포함한 새로운 신체를 얻는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그것이 점차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을 가정해 볼 수 있다. 어느 날 아침 한 사람이 잠에서 깨어보니 오른 팔과 다리 등 신체의 오른 쪽 부분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가 자신의 신체의 오른 쪽 부분을 움직이려 할 때마다 이에 상응하는 왼 쪽 부분의 신체가 움직인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가 신체의 왼 쪽 부분을 움직이려 할 때마다 이에 상응하여 그의 부인의 오른쪽 신체가 움직인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 외부 세계에 대한 그의 지식은 그의 왼 쪽 신체와 부인의 오른 쪽 신체에 들어오는 자극에 의존하게 된다 (예를 들면 그의 왼 쪽 눈과 부인의 오른 쪽 눈을 자극하는 광선에 의해 물체를 보게 된다). 그의 부인은 그녀의 오른 쪽 신체의 조절 능력을 상실한 반면 그들의 신체는 마치 허리가 붙은 기형적 쌍동이처럼 생리학적으로 융합된다. 외부 세계에 대한 그의 지식과 조절 능력은 변화되어 간다. 그녀가 자신의 신체에 대한 조절 능력을 점점 잃어가는 반면 그는 그녀의 신체를 완전히 조절하게 되는 것으로써 그가 새로운 신체를 얻는 과정이 마무리되는 것을 우리는 가정할 수 있다.
한 인격이 신체와 분리될 수 있다는 가정 역시 모순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 인격이 신체를 갖고 있다는 것은 그가 특정한 하나의 물질덩어리를 사용하여 세계를 파악하고 세계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더 이상 그 물질 덩어리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어떤 한정된 공간에서 외부 세계를 파악하고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가정해 보자. 아마 그는 방안에 있는 대상들의 위치에 대하여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시각에 의한 것일 수도 있으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을 통하여 자신이 현재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치 우리가 팔, 다리의 위치를 알고 그것들을 자연스럽게 움직이듯이 그는 물체들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방이 마치 그 인격의 신체인 것처럼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단지 그렇게 하길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지식과 조절의 초점을, 예를 들어 옆방으로, 옮길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인격은 하나의 특정한 물질을 통해서 외부 세계를 배우거나 영향을 주는데 조금도 제한받지 않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를 신체와 분리된 인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격이 신체와 분리될 수 있다는 가정 역시 모순이 아닌 것 같다.
나는 이제까지 한 인격이 완전히 새로운 신체와 함께 계속 존재하거나 아니면 신체를 전혀 갖지 않은 채 계속 존재할 수 있다는 가정이 모순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 4 장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게 되겠지만, 위와 같은 경우 그는 방금 자신이 경험한 일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 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한 인격이 자신의 과거에 대한 심상적 기억을 전혀 갖지 않은 채 지속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이 경우는 단지 논리적 가능성만 허용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한 인격이 자신의 과거를 모두 또는 부분적으로 잊어버리는 기억 상실증의 예를 본다. 로크의 말과는 어긋나지만, 많은 인격들이 그들이 한 일의 대부분을 잊어버린다. 물론 우리는 이런 일이 그 인격의 두뇌와 신체가 지속되는 정상적인 경우에 한하여 일어난다고 가정한다. 한 인격이 그가 한 일을 잊어버린다는 가정의 근거는 그 인격의 신체와 두뇌 지속성에 관한 증거가 그가 지금 기억할 수 없는 행동을 한 바로 그 인격임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인격 동일성에 대한 주된 두 종류의 증거가 모두 결여된 경우에는 문제의 인격 동일성이 유지되고 있다는 가정은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4장에서 보게 되겠지만 동일한 성격의 지속은 그것만으로는 중요성을 갖지 못하는 부수적인 증거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말미암아, P2와 P1 두 인격 사이에 두뇌 지속이나 기억 지속과 같은 증거가 없는 경우에도 두 인격의 동일성을 가정할 수 있는 좋은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이 참이기 위해서 반드시 그 참에 대한 증거를 우리가 확보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가정은 검증주의자들의 독단일 뿐이다. 나는 검증주의는 정당한 근거가 없다는 것을 3장에서 주장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대하여 그것이 참이라는 증거를 가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이 참인 경우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새로운 신체를 얻는 인격이 예전의 신체에 대한 제어력뿐만이 아니라 그 신체의 도움으로 가졌던 그 동안의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가정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많은 종교들이 인격들이 레테의 강( 그 강을 건너면 한 인격의 전생이 잊혀진다는 망각의 강)을 건넌 후 새 신체를 얻는 이야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을 뿐, 그것이 말하고 있는 바를 잘 이해하고 있으며, (철학적 독단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이 이야기가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고 의심하지 않는다.
죽음을 단순한 신체의 파괴로 생각하며 따라서 사후에도 생존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지구에서의 전생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다는 점에 대해 반드시 괴 과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오로지 살아남기를 원할 뿐, 지구에서의 전생에 대한 기억을 게속 지니는 것에는 관심이 없을 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분명히, 이러한 그들의 믿음이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은 (참인 믿음이건 또는 정당화된 믿음이건 간에) 정합적인 믿음인 것 같다. 명백히, 어떤 이야기나 믿음들이 겉 보기와는 달리 모순이 숨어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이야기에서 숨겨진 모순을 찾지 못한다는 사실이야말로 그 이야기에 숨겨진 모순이 없다고 가정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이다 --- 모순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우리는 정당하게 그러한 가정을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어떠한 문장도 숨겨진 모순으로부터 면제되어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한 인격이 아닌 바로 그 인격이기 위하여, 특정한 물질로 된 신체를 소유해야만 하거나 특정한 심상적 기억들을 소유해야만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연의 법칙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도 아니다.1) 자연의 법칙이 진화의 과정과 의식의 출현을 서술한다고 가정해 보자. 기원전 사십억년에 지구는 생명이 없는 원자들로 이루워진 차가운 공이였다. 우리는 자연의 법칙이 어떻게 이 공이 진화했는지, 또한 물질들의 어떤 배열이 의식체인 인간의 신체가 되며, 인간 의식의 한 부분인 심상적 기억이 어떻게 인간의 두뇌 상태에 의존하는가를 서술한다고 가정한다.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살아있는 신체가 당신이고 또 어떤 살아있는 신체가 나인지는 자연 법칙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동일한 물질의 배열과 동일한 자연 법칙이 나에게 지금 당신의 것인 신체와 (그리고 그에 준하는 심상적 기억들을) 줄 수도 있었으며, 당신에겐 지금 나의 것인 신체와 (그리고 그에 준하는 심상적 기억들을) 줄 수도 있었다. 각 인격에게 신체를 배당하기 위하여 요구되는 것은 신이나 확율이다. 자연의 법칙이 결정해 주는 것은 기껏해야 어떤 구조의 신체가 그 구조의 결과로 어떤 심상적 기억을 갖게되는 인격들의 신체라는 것이다. 현재 당신의 것인 신체가 (그와 함께 동반되는 심상적 기억도) 내것이었을 수도 있다(논리와 심지어 자연법칙도 이를 허용한다)는 것은 나의 신체를 현재 구성하고 있는 물질 중 어느 것도(또한 심상적 기억도)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데에 본질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 결정되야만 한다.
버틀러는 일찌기 18세기에 인격 동일성은 신체와 기억 지속과 같은 관찰과 경험이 가능한 현상으로 분석될 수 없는 궁극적인 어떤 것이라는 견해를 펼쳤으며 리이드도 덜 분명하지만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하였다. 최근에는 치즘(1969)이 유사한 견해를 개진해왔다.
나의 입장을 바로 이 정도 --- 인격 동일성은 분석될 수 없다 ---에서 견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방식으로 나의 입장을 개진하려고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인격 동일성의 문제가 포함하고 있는 것들을 보다 분명히 드러내고 그것을 철학적 사고의 또 다른 큰 전통과 연결시키는 데 유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장에서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동일성 이론을 전개했었다. 즉 한 시점의 실체가 앞선 시점의 실체와 동일하기 위한 필요 충분 조건은 후 시점의 실체가 전 시점의 실체와 동일한 형상과 지속적인 질료를 갖는 것이다( 5면에서 서술했던 의미로). 이 이론에 따르면 한 인격이 앞선 시점의 인격과 동일한 인격이기 위한 조건은 그가 앞 선 지점의 인격과 동일한 형상(즉 그 둘이 모두 인격의 형상을 가지며)과 질료를 지속적으로 갖는 (즉 동일한 신체를 갖는) 경우다.
분명히, 한 인격이 앞선 시점의 인격과 동일하기 위해서, 후 인격은 동일한 형상을 가져야만 한다 --- 즉 하나의 인격이어야만 한다. 만약 신체와 분리된 인격의 논리적 가능성에 대한 나의 논변이 타당하다면 인격의 본질적 속성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포함시켰을 것보다 범위가 좁혀진다. 나의 논변은 하나의 인격이 하나의 인격이기 위하여 요구되는 모든 것은 어떤 정신적 능력임을 암시한다. 그러한 능력은 인격이 의식의 경험(예를 들어 사고 또는 감각과 같은)을 갖기위하여 그리고 의도적인 행위를 수행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다. 앞서 묘사했던 종류의 사고 실험은 한 인격이 그의 신체를 잃어버린 상항에서도 의식 경험을 지속하며 의도적 행위를 수행하거나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사고 실험은 한 인격이 비신체적 상황에서 자신이 하려고 의도한 행위를 한다던가 자신의 목적에 맞는 효과를 초래하는 상황을 그려준다.
만약 두 인격이 신체적 질료 사이의 지속 없이도 동일할 수 있다는 나의 논변이 타당하다면 우리는 위에서 기술된 형식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동일성 이론은 단지 무생물과 식물의 동일성에만 적용될 뿐 인격 동일성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1)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 둘 중 하나의 선택과 마주한다. 하나는 인격 동일성의 기준은 나머지 실체들의 동일성 기준과는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동일성 이론보다 좀 더 일반적인 이론을 전개하여 인격과 나머지 실체들의 동일성을 함께 포괄하도록 시도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동일성 이론을 확장시켜서 후자를 시도하는 것은 가능하다. 우리는 단지, 서로 다른 두 시점의 실체 동일성의 필요 충분 조건으로 동일한 형상과 두 실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의 지속성을 말하면서 그와 동시에 실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에는 물질외에 다른 종류의 것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허용하면 된다. 나는 실체 동일성에 대한 이러한 이론을 확장된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우리는 실체를 구성하는 또 다른 종류의 것들, 즉 비물질적인 것이 존재하며, 인격은 정상적인 신체적 질료와 이 비물질적인 것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바로 이 비물질적인 것의 지속이 인격의 통시적 동일성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단순 이론을 표현하는 핵심이다. 이 이론은 지구에 사는 인격들이 물질적 부분인 신체와 비물질적 부분인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채택된다. 영혼은 인격의 본질적 부분이며 인격 동일성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이 영혼의 지속이다. 지구에서는 영혼은 신체에 연결되어 있다 (인격은 신체를 매개로 하여 물리적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지거나 그 세계에 대해 행위한다). 그러나 영혼은 신체로부터 분리될 수 있으며 신체와 분리된 상태로 존재하거나 (앞서 묘사된 방식으로) 새로운 신체에 연결되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이와 같은 표현 방식은 세기를 거쳐서 많은 종교적 전통에서 사용되어 왔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일단 인격이 신체의 죽음 너머로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경우 하나의 인격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표현해주는 매우 자연스런 방식이기 때문이다. 고전적인 철학 문헌으로는 플라톤과 누구보다도 데카르트에서 이러한 설명을 찾을 수 있다. 나는 이러한 견해를 고전 이원론으로 부를 것이다.
나는 고전 이원론의 핵심은 인격을 구성하는 것은 신체적 질료와 또 다른 어떤 것이며, 인격 동일성의 필수적인 요소는 바로 그 어떤 것이라는 점에 있다고 적었다. 데카르트와 같은 철학자는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비물질적인 것과 한 영혼으로 (신체와 함께 또는 신체없이) 구성된 것을 구별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데카르트와 그 밖의 고전 이원론자들은 인격의 분할 --- 즉 한 인격은 후 시점의 두 인격과 부분적으로 동일할 수 있다는 것 ---의 논리적 불가능성을 (암암리에) 전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영혼은 본질적으로 분할이 불가능한 기본 단위임을 암암리에 전제했다. 영혼의 불가분할성이야말로 인격의 분할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가정을 할 경우 (내가 1 장에서 하려던 것 처럼) 반드시 취해야하는 견해다. 영혼-요소가 본질적으로 분할 불가능한 기본 단위로 되어 있다는 가정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물질 덩어리는 그것이 아무리 작다 해도 둘로 나누워진다. 그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다해도 논리적으로는 항상 가능하다. 우리가 물질의 분할을 항상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물질은 연장을 가진다는 점에 있다. 물질 덩어리는 필연적으로 공간의 유한한 부분을 차지하며 이 유한한 부분은 더 작은 두 부분으로 나눠질 수 있다. 따라서 그 한정된 부분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물질 덩어리와 또 다른 반을 차지하고 있는 물질 덩어리를 서로 분리시킨다는 가정은 항상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생각이 비물질적인 것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속성을 필연적으로 갖는 비물질적인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해야할 이유는 아무 데도 없다. 만약 1장에서의 가정이 정확하다면 영혼은 나워질 수 없다는 속성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 일단 실체 동일성의 기준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이해를 수정하고 나면, 인격 동일성의 단순 이론은 고전 이원론 안에서 자연스런 표현을 발견한다. 데카르트가 그의 인격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펼친 논변들은 내가 단순 이론을 지지하며 펼친 논변들에 포함된다. 그리고 그 논변들은 확장된 아리스토텔레스적 체계를 당연시 하기 때문에 그 결과 고전적 이원론이 귀결된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을 제외하면 나의 본질이나 본성을 필연적으로 꿰뚫는 것은 어떤 것도 찾아낼 수 없다는 것 또한 확실히 알기 때문에 나의 본질은 오로지 내가 생각하는 존재라는 사실에 있다는 것을 나는 올바르게 결론짓는다. 나는 또한 내가 매우 친밀하게 함께하는 신체라는 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 나는 한편으로 내가 오직 생각하는 존재이며 연장을 갖지 않는 존재라는 명석 판명한 관념을 가지며, 또 한편으로는 나의 신체는 연장을 가지며 사고의 본성을 갖지 않는다는 또 하나의 명석 판명한 관념을 갖기 때문에, 이 나 [다시 말해서, 나의 영혼에 의해서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는 완전히 그리고 절대적으로 나의 신체와는 구별되며 그것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1)
여기서 데카르트는 그의 신체는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는 계속 존재하는 사고 실험을 기술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나 역시 앞서 그러한 사고 실험을 기술하면서, 사실 데카르트가 그랬듯이, 그의 신체는 그가 존재하기 위하여 논리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며 그의 본질적인 부분도 아니라는 결론이 귀결됨을 주장했다. 데카르트는 신체 없이도 ‘사고’를 계속할 수 있으며(즉, 의식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신체 없이도 계속 존재할 수 있다. 이제, 동일한 실체의 지속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어떤 것의 지속을 포함한다는 확장된 아리스토텔레스적 체계를 당연히 받아들일 경우, 데카르트라는 존재의 지속은 신체적 질료의 지속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데카르트를 구성하는 부분으로 신체적 질료외에 어떤 다른 것이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이 귀결된다. 데카르트의 본질적 부분을 구성하는 어떤 요소로서 그가 그의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의 존재가 추론되는 것이다.
현재 의식을 갖고 있는 인격이라면, 그에 관해 현재 참일수 있는 모든 것과 상관없이, 그가 신체 없이 계속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면 그는 신체적 부분 말고 다른 부분, 우리가 그의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을 현재 실제로 갖고 있어야만 한다는 결론이 귀결된다. 그리고 그가 영혼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가 의식을 가진 존재라는 것에 의해 함축된다. 왜냐하면 만약 내가 오로지 물질로만 구성되어 있고 그 물질이 파괴된 후에도 내가 계속 존재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계속 존재할 수 있다는 단순한 논리적 가능성으로부터 나에게는 나의 신체외에도 무엇인가가 더 존재한다는 실제 사실이 도출된다. 그리고 신체외의 무엇이 바로 나의 본질적 부분이다. 따라서 한 인격이 의식을 가지는 것은 그를 이루고 있는 비물질적 핵, 그의 영혼이 의식을 가진 것으로 분석된다.1)
데카르트의 이와 같은 논변은 확장된 아리스토텔레스적 체계하에서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확장 이론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즉, 만약 두 시점의 실체가 그것들을 구성하고 있는 것 중 어떤 것도 (확장 이론에서 말하는 요소의 의미로) 서로 동일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서로 동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위의 결론은 타당하게 도출되지 않을 것이다. 확장된 아리스토텔레스적 체계는 사실적 진리보다 ‘요소’에 대한 부분적 정의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 비물질적 영혼을 가졌다는 말은 우리가 대단히 정밀한 현미경을 통해서 보통 현미경에는 잡히지 않는 아주 희귀한 구성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전통적 사고의 체계 안에서, 신체는 파괴되면 그 뿐이지만 사람은 신체의 죽음 너머로 계속 존재할 수 있다는 논리적 가능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특히 우리가 사람이란 신체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할 경우, 바로 그러한 생각을 아주 자연스럽게 표현해주는 방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확장된 아리스토텔레스적 체계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그 가능성을 설명하려 한다면, 물질로 만들어진 실체와 동일한, 그러나 아무런 요소도 포함하지 않는 실체가 있을 수 있다는 모순된 가정을 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신체가 그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라고 부르는 존재의 본성을 상세히 밝히려고 한다면, 우리는 팔, 다리, 그 밖의 모든 신체적 부분들은 분명 사람을 이루는 부분들임을 부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나의 팔과 다리는 분명 나의 한 부분이다. 단지 데카르트는 이 신체는 오직 우연적이며 아마도 일시적으로 나의 부분일 뿐이며 나의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대단히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바로 이 부분에서 선명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방금 인용된 ?성찰?에서나 또 다른 글에도 여러 번 나타나지만,1) 그 때로는 (부정확하게) 나의 신체는 나의 한 부분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또 때로는 (정확하게) 나의 신체는 나의 본질적 부분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단순 이론’을 주장하기 위해서 제시한 다른 논변들, 예를 들어 다른 시점의 다른 신체를 가진 두 사람이 그들 사이에 신체적 지속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인격 동일성을 가질 수 있다는 논변은, 확장된 아리스토텔레스적 체계를 전제한다면 우리가 방금 논의한 데카르트의 논변과 마찬가지로, 고전적 이원론을 지지하는 논변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이제까지 살펴본 대로, 고전적 이원론은 확장된 아리스토텔레스적 체계 안에서 인격 동일성의 단순 이론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 체계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생각하지 않은, 그러나 그가 용납할 만한 한 종류의 요소를 더 허용함으로써 우리가 확장시킨 것이다. 철학사를 돌아볼 때 단순 이론과 같은 생각을 설명하기 위한 시도는 빈번하였으며,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정하여 대단히 영향력 있는 사상을 전개시켰다(?이교도에 대한 대전 (Summa contra Gentiles)? 참조). 그는 실체는 그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질료로 되어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일반적인 원리를 받아들였다. 하나의 책상은 그 책상을 이루고 있는 질료와 그 질료에 부과된 형상에 의해서 바로 그 책상으로 존재한다. 형상은 속성들의 체계, 보편자들의 체계이다. 보편자 또는 속성은 그들이 개별적인 실체안에서 예화되어 존재하기 전에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아퀴나스에 의하면, 그가 특별히 영혼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형상은 다른 것들의 형상과는 달리, 신체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영혼은 동물이나 식물의 영혼과는 달리, 그의 용어를 빌어 표현한다면 ‘지성 실체’인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와 같이 수정하여 단순 이론과 양립가능하게 만들려는 시도는 분명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은 것 같다. 속성은 그들의 본성상 보편자이기 때문에 어떤 것에 결합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그들이 존재한다고 말하기란 힘들다. 더우기 속성이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말에 그 의미를 부여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보편자는 개별적인 실체 안에서만이 예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실체들을 개별화시키는 것은 그것들을 구성하고 있는 재료들의 다양성이다. 인간의 형상은 수 많은 인간들 속에서 예화될 수 있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인간의 형상의 자격으로 오로지 한 신체와 결합할 수 있는 개별적인 형상을 원했다. 형상이 일반적으로 보편자들의 체계인데 반해, 아퀴나스는 인간의 형상에 특별히 개별자로서의 형상을 부여했다. 나는 이와 같은 아퀴나스의 체계는 고전적 이원론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를 더 왜곡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퀴나스의 체계가 고전적 이원론보다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다면, 사람은 신체를 가진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며 신체로부터 분리된 경우는 일시적이며 순간적인 것이라는 것을 드러내준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보다는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를 지나치게 왜곡시키는데서 오는 문제점이 더욱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전통적 이원론이라고 부르는 입장을 선호한다. 나는 나의 견해를 가장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철학적 전통안에서, 즉 고전적 이원론의 체계안에서 단순 이론을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영혼의 불가분할성으로부터 영혼의 자연적 불멸성을 주장하는 고전적 이원론자들의 논변은 받아들이지 않을 생각이다. 영혼의 불멸성을 주장하는 논변을 검토하기 전에 먼저 영혼이 그 존재를 계속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수반되는 문제점들을 살펴보자. 한 사람이 행위나 경험의 능력을 행사하고 있는 한 분명히, 그의 영혼은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사람이 그러한 능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는 때에는 어떤가? 이 경우에도 아마 그의 영혼은 계속 존재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의식적인 상태에 있는 (즉, 어떤 행위나 경험를 하고 있는 상태가 아닌) 사람도 여전히 사람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하는 근거는 자연적 과정(즉, 자연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과정)에 따라 그가 다시 그의 능력을 행사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일상의 수면이 끝난 후, 또는 의학적인 수술을 받은 후, 사람들은 다시 의식의 능력을 회복한다. 따라서 우리는 한 사람이 무의식 상태에 있다고 해도 자연적 과정에 따라 그의 능력은 다시 회복될 것이므로 그의 영혼은 분명히 존재를 계속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그의 능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으며 자연적 과정(우리의 물질적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거나 또는 그가 옯겨간 새로운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건 간에)이 그의 능력을 회복시키지 않는 경우는 어떤가? 먼저, 그가 다시 삶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적 가능성을 근거로 그 사람과 그의 영혼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대안은, 내 생각에 이것이 좀 더 자연스런 대답이라 생각되지만, 정상적인 자연적 과정에 따라 그의 능력이 더 이상 행사되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과 그의 영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다시 존재할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마 신이 그를 다시 존재케 할 수도 있다). 후자의 견해에 반대하는 논변은 실체는 존재의 시작을 두 번 가질 수 없다는 원리가 될 것이다. 이 원리를 받아들이면, 한 사람이 정말 존재하기를 그칠 경우, 그는 다시 존재할 논리적 가능성조차 없어져야 한다. 이 원리와 함께 사람이 다시 존재할 수 있다는 논리적 가능성을 허용하면, 사람은 한번 존재를 시작하면 그가 경험과 행위의 능력을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항상 영원히 존재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우리가 이 원리 --- 어떠한 실체도 존재의 시작을 두 번 가질 수 없다 ---를 채택해야만하는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원리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영혼이 자연적 과정에 따라 자신의 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면 그 영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영혼이 다시 존재할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존재하기를 그친 영혼이 다시 존재를 시작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와 같은 영혼에 대한 설명 방식은 영혼이 그의 능력을 행사하지 않을 때에는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의 경우일 뿐이라는 주장에 구체적인 내용을 준다.
고전적 이원론자들은 영혼은 분할될 수 없다고 가정한다 (정확히 말해서 이것은 나의 해석이다). 이 가정으로부터 그들은 영혼은 파괴될 수 없으며,1) 따 서 불멸한다는, 어쨋던 자연적으로 불멸한다는 결론을 끌어내었다 (자연의 작용에 따라 불멸하며 또한 그러한 작용을 정지시키는 신의 행위를 제외한다면 불멸한다). 그러나 이 추론은 타당하지 않다. 물질적 신체의 경우에도 때로는 분할되지 않고도 본질적 속성을 잃을 수 있다 --- 예를 들어 참나무는 죽은 후 그것의 형태를 잃지 않은 채 화석이 될 수 있다. 영혼이 분할 불가능하다는 전제로부터 영혼이 경험과 행위의 능력을 잃을 수 없다는 결론은 따라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영혼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결론도 나오지 않는다. 내가 이제까지 주장한 것은 영혼은 신체와 결합해야만 한다는 논리적 필연성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혼이 본질적 속성(경험과 행위의 능력)을 가지고 존재를 계속하기 위해서 신체와 결합해야 하는 것은 물리적 필연성일 수 있다. 4 장에서는 인격 동일성에 관한 증거들이 물리적으로 필연적인 것인지 아닌지에 관해 간단히 언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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