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하르트만 층이론의 인간 문제

나뭇잎숨결 2022. 1. 29. 09:29

하르트만 층이론의 인간 문제:하르트만 인간론에 관한 한 명제의 검토

양 우 석

요 약 문

하르트만의 비판적 존재론은 우리 나라에서 그리 널리 연구되지 못했다. 하르트만의 존재론에 대해서는 오히려 올바른 이해보다는 오해와 왜곡이 많이 되어 있는 편으로 보인다.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 의식에 의해서 작성되었다.
모델이 되는 논문에 제출된 명제는 하르트만의 존재론에 대해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간 문제에 관한 하르튼만의 존재론적 입장을 드러내고 있는 탁월한 논문으로 보인다. 하르트만 존재론이 포함하고 있는 문제점을 조목조목 정리하고 있는 것이 이 논문의 기조이다.
그러나 본 논문은 이 문제 제기야말로 하르트만 존재론에 대한 체계적인 오해와 왜곡을 일으킬 소지가 다분한 것으로 결론짓고 이에 대한 체계적 비판과 해명을 시도하였다. 우리는 철저한 분석을 바탕으로 저 명제는 하르트만 존재론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힌다.

※ 주요어 : 하르트만. 존재론, 인간학, 체계 이론, 층이론




1. 문제 제기

하르트만 연구에서 기념비적 업적을 남긴 소장 학자 모르겐슈테른은 그의 ?니콜라이 하르트만?(1992)에서 하르트만을 “과학적으로 지침된 철학자”, “철학 최후의 체계 구축가”라 극찬하면서 하르트만의 철학 개념을 “고전 철학적 문제론과 현대 방법론적인 비판-가설적 자기 이해와의 결합”으로 자리매긴다. 그는 20세기 독일 철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론의 새로운 정초자로서 하이데거와 하르트만을 나란히 들면서 양자를 다음과 같이 대비시킨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이 날로 증대되고 있는 반면 하르트만은 날로 잊혀져가고 있다. 이 영향사적 사실은 철학의 고전적 문제들에 대한 그들 각자의 업적을 고려해 보면 볼수록 더욱 놀라운 일이다. 하이데거의 철학 저술이 가지는 체계적 의미에 관해서는 분분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손 치더라도 다음과 같은 사실에는 추호의 의심의 여지도 없다. 즉 하이데거는 하르트만과는 정반대로 아래에서 전개하게 될 인식론과 존재론적 근본 문제에 관한 한 거명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미미한 업적밖에는 쌓지 못하였다. 하이데거와는 정반대로 하르트만은 논리적 경험주의나 분석 철학에 의해서 비판의 표적이 된 일이 없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는 하르트만이 망각되어야만 할 운명을 걸머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 업적의 화려함과 치밀한 분석력, 연구 분야의 방만성에도 불구하고 오늘에 이르러 하르트만은 독일 철학계, 나아가서 세계 철학계에서 거의 망각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모르겐슈테른이 적확하게 지적했듯이, 동일한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접근했던 하이데거에 관한 연구는 가히 르네쌍스를 맞이한 듯하다. 그러나 그 본래적 업적과 영향사적 사실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님을 고려할 때, 이 외면상의 사실을 절대화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하겠다. 한 예로 하르트만과 같은 신칸트학파의 일원이었던 에른스트 캇시러는 요즘 세계 철학계에서 새로이 각광을 받고 있다. 하르트만의 운명도 이와 다르다고 못박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히르트만이 급속하게 망각되는 운명을 걸머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첫째, 그가 원래 독일 출신의 철학자가 아닌 발트해의 철학자(ein baltischer Philosoph)이기 때문에 독일 철학에 익숙한 일반인들에게 낯설게 느껴지리라는 것이고 둘째, 사실 자체에로만 파고드는 그의 냉철한 저술 방식이 일반인의 흥미를 차단하고 있으며 셋째, 그의 철학적 바탕은 전통 철학과 건전한 과학이기 때문에 일반 독자들에게 무미건조하고 교과서적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던져준다는 것과 넷째, 그는 결국 현대 사상계에서 혐오의 대상인 체계 구축가일 뿐이라는 편견이 자리잡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로 하르트만은 올바로 이해되고 평가되기는커녕 언제나 부당하게 오해되어 마치 낡은 형이상학을 그대로 계승한 경직된 강단 철학자인 듯한 선입견만이 그의 인상을 포장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하르트만은 철저히 오해되고 무관심하게 소외되어 있는가 하면 심지어 어중간한 강단 형이상학자로 낙인찍혀 증오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실정인가 하면 하르트만 연구가들에게도 이러한 인상을 함께 덮어써야 한다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 나라 하르트만 연구의 선구자라고 할 하기락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도대체 하르트만의 철학 사상은 그의 생전에나 사후에나 누군가에 의해서 공정하게 평가되기는커녕 본격적으로 대결되어본 적이 아직 없다. 그는 독일에서조차 그의 체계를 더욱 발전시키고 보완해나갈 수 있는 계승자다운 계승자를 아직 갖지 못하고 있다. 후세대 철학자들은 그의 저작들이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사상재를 아직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의 철학 사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대결은 지금부터라 할 것이다.”
하르트만과 하르트만 연구가들에 대한 증오의 배후에는 하르트만의 근본 사상에 대한 오해가 자리잡고 있다. 서울에 안가 본 사람이 서울에 가본 사람을 이긴다는 말이 있듯이 하르트만 철학에 무지한 사람이 마치 하르트만 사상의 핵심을 간파하고 있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하르트만 연구의 측면에서 매우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지만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닐성 싶다. 정작 위험한 것은 하르트만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오해하고 왜곡시키는 일이다.
하르트만의 저술을 번역하고 초보적인 단계에서 요약적 논문을 내놓는, 한마디로 하르트만 연구의 황무지인 우리 나라에서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존재론적 도식에서 본 인간”이라는 논문은 이러한 선입견을 깨뜨리고 나름대로 하르트만을 알리는데 일조를 하고 있는 매우 드문 연구로 보인다. 여기 나타난 하르트만 존재론에 대한 체계적 이해는 평이한 하르트만 전공자의 수준을 넘어서 있으며 나아가서 하르트만 존재론에 대한 근본적 문제 제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히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우리가 아는 한에서 아직껏 이 논문에 대한 정당한 반박은 고사하고 체계적 평가나 도대체 이 논문에 대한 일말의 가치조차 알려진 일이 전무하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논문은 하르트만의 존재론을 아무런 철학적 반성 없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데서 끝나는 일반 논문들과는 달리 하르트만의 존재론이 안고 있는 근본적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물론 인간학적 측면에 국한된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 논문은 하르트만 존재론의 심층부인 층이론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그 한계점과 문제점을 드러낸다. 이에 대한 반박은 결코 간단하지 않은 작업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르트만 연구에 관한 한 대체로 이해와 요약, 소개의 수준에서는 좀처럼 허용되지 않는 지난의 작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우리는 대체로 탁월하다고 할 수 있는 이 논문이 하르트만의 존재론에 대한 통속적 이해가 빠지기 쉬운 전형적 오류를 대변해 주는 한 모델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하르트만 존재론에 대한 비판은 일견 철저하고 예리한 논리로 일관된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너무 조급하고 거칠게 하르트만 존재론의 본래적 경지를 도식화시켜 버림으로써 하르트만 존재론의 불후의 업적에 접근하는 길을 차단해 버렸다. 이렇게 하여 하르트만에 대한 왜곡되고 비뚤어진 오해가 버젓이 정론으로 자리매김될 소지가 다분히 있는 것이다. 본 논고는 이 하르트만 비판을 하르트만의 입장에서 다시금 역비판함으로써 그의 층이론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고 이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하르트만의 인간론에 대한 가능한 오해를 불식시키는 데 일조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다만 이 비판은 결코 감정적인 것이 아님은 물론 논자의 좁은 견해로는 아직까지 우리 나라에서 이토록 수준 높은 하르트만 연구 논문이 많지 않다는 찬사를 전제로 한 것이다. 논자는 다만 하르트만 철학에 관심을 가진 한 학도로서 이 논문과는 다른 견해를 학문적으로 개진하는 이외에 아무 사심도 가지지 않음을 밝혀 둔다. 여기서 이 논문은 단지 하르트만 존재론에 대한 일반적 이해를 대변하는 한 모델의 역할을 한다. 이를 통해서 사실상 이 논문은 어느 하르트만 연구 논문보다도 하르트만 존재론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2. 하르트만 인간론 이해의 한 모델

모델 논문(이하 이 논문과 그 저자는 “논문”과 “모델 논문”으로 지칭됨)은 하르트만의 근본적 철학 입장을 “존재론적 환원”으로 이해하면서 하르트만이 필생 “어떻게 비판적 존재론이 가능한가” 라는 물음에만 전념하였음을 상기하고 논문의 대전제로서 다음과 같은 명제를 제출한다: “원래 오늘날의 전문 철학적 인간학자들은 인간 해석을 존재론에 관련시키는데 극력 반대한다. 존재론의 도식적 설명이 자유로운 그리고 공정한 인간 해석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쉘러, 플렛스너, 겔렌 등 현대의 철학적 인간학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존재론을 반대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자세한 설명이나 존재론의 도식적 설명이 어떻게 인간 해석을 방해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논거 제시를 우리는 이 논문에서는 발견할 수 없을뿐더러 “존재론의 도식적 설명”을 하르트만의 층이론과 동일시한다는 것부터가 무언지 석연찮은 데가 있다. 하르트만의 존재론은 단순한 도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며 엄연히 그 나름의 내용과 방법론 그리고 경직되지 않은 내용의 충만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하르트만은 철학적 인간학자들이 행한 바와 같은 본격적인 인간 분석은 아직 구체적으로 수행하지 않을 뿐이다. 이는 하르트만의 철학하는 방법에 따른 것으로, 그의 ?정신적 존재의 문제?(1933)와 ?윤리학?(1925), ?존재론의 새로운 길?(1947), ?철학 입문?(1949)에서 간접적으로 그의 인간 규정을 추정해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논문은 이처럼 하르트만이 철학적 인간학을 독립된 주제로서 다루지 않은 이유를 하르트만의 “너무나도 응고된 존재론적 문제 설정과 삶의 어두운 깊이에로의 정열적 돌진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냉정한 사색가적 성격” 때문이라 추정한다. 결국 하르트만의 존재론이 “세계 이해로부터 인간 이해로” 나아가는 코오스를 취하며 이는 플라톤이 그의 국가론에서 “국가를 인간의 확대물로 보고 국가의 구조와 법칙으로부터 인간의 그것으로 유추해” 나아갔던 것과 일맥 상통하는 실례라는 것이다. 이 가설이 과연 정당한지의 여부는 검증을 필요로 한다.
논문은 헨네만(Gehard Hennemann)의 “하르트만 존재론에 있어서의 존재 세계의 질서가 결코 의미 질서 내지 가치 질서가 아니요 더구나 이성적 질서도 아니며 다만 존재 질서에 불과하다”는 말을 인용하여 간접적으로 하르트만 존재론의 근본 구조에 의문을 제기한다. 모델 논문은 먼저 하르트만 존재론의 핵심부를 이루는 사실 세계의 구조와 법칙을 매우 체계적으로 설명하면서 사실 세계의 범주 체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하르트만의 태도는 매우 고무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그것은 또한 그의 범주적 체계로 하여금 그 옹색함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경험을 향하여 열려 있는 개방적 성격을 띠게끔 해준다.” 여기서 먼저 심히 의문스러운 것은 과연 하르트만의 범주 체계의 “옹색함”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아무 데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아마도 위에서 논문이 하르트만 존재론의 근본 성격을 “너무나도 응고된 존재론적 문제 설정”으로 이해한 것이 이 문맥에서는 하르트만 범주 체계의 “옹색함”으로 전위되어 연결되는 듯하다. 하르트만 존재론에 대한 이러한 잠정적 이해는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나아간다: “각층은 인간 존재에 있어서도 서로 환원되어질 수 없는 독자성을 가지고 엄연히 버티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통일적 인간이라는 표상보다는 오히려 네 개의 성층 질서에 상응해서 네 가지의 인간, 즉 물체로서의 인간, 유기적 생명체로서의 인간, 심적 존재로서의 인간, 그리고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표상이 오히려 하르트만의 생각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입장을 요약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실 세계가 네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하르트만의 층이론을 인간 존재에 적용시키면 그 통일성보다는 그 분리성이 우세하여 결국 인간이라는 통일체보다는 네 층으로 분열된 인간이라는 인간 이해에 도달하고 만다는 것이다. 논문은 여기서 “네 개의 인간”을 결속시키는 통일의 원리가 하르트만의 존재론에 있어서의 세계 법칙 연관임을 주목한다. 즉 “인간에 있어서의 통일성도 사실 세계의 통일성과 같다. 인간을 이루고 있는 각층 내부의 또는 층상호간의 범주적 질서 조직은 하르트만에 있어서 인간을 통일하고 있는 유일한 근거이다.” 논문은 이로부터 제기되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특히 “아래층은 위층에 대해서 절대 독립되어 있으므로 아래층을 위층과의 관계에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하르트만의 범주론에 있어서의 범주적 법칙이 가지는 맹점을 “여기에 하르트만 존재론의 도식적 인간 해석의 최대 약점이 놓여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고 평가한다.
이제 이로부터 모델 논문이 끌어낸 하르트만 존재론에 의한 인간 이해의 결론을 종합적으로 정리할 단계가 되었다: “그의(하르트만의) 성층 도식에 의하면 인간은 4층의 성층 구조로 되어 있고 또 각층이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로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종류의 본질적 변화를 입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물질 법칙은 화강암에 있어서나 물리적 형태로서의 인간에 있어서나 동일하게 타당하고 생명 법칙은 소나무에 있어서나 생명적 유기체로서의 인간에 있어서나 동일하게 지배하고 심리 법칙은 유인원에 있어서나 심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있어서나 동일하게 적용된다.” 논문은 여기서 하르트만의 존재론적 인간 이해를 4층 상호간의 기계적 결합으로 결론짓고 인간을 이렇게 보았을 때 “인간이 동물과는 달리 정신을 갖고 있기는 하되 정신만으로써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유사 이전의 원시인에게 정신 능력을 부정한 것”이 부당함을 주장한다. 또한 하르트만 존재론의 범주적 법칙 중에서 의존 법칙(Der Grundsatz der Dependenz)을 염두에 두고 그 부당성을 비판한다: “위층은 아래층 없이는 존립할 수 없지만 아래층은 위층 없이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러므로...위층은 아래층과의 연관에서 다룸이 마땅하지만 아래층은 절대로 위층과의 연관에서 다루어서는 안 된다.” 나아가서 역사적으로 제기된 심-신-관계에 있어서도 하르트만의 존재론은 별반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신체 현상과 심적 현상과의 관계, 그리고 심적 현상과 정신 현상과의 관계, 나아가서 이들의 전체적 인간과의 관련이 어떠한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고 이것은 하르트만의 존재론의 도식에 집어넣어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논문은 하르트만의 세계관에 있어서 고유한 질서와 법칙을 가진 사실 세계에 의미와 가치가 부정되어 있음에 불만을 갖고 “‘의미와 가치를 갖지 않은 질서와 법칙’이라는 기묘한 표상은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그 자체 질서와 법칙을 지니지 않은 세계의 표상만큼이나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라 지적한다. 이 논지를 더욱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가. 하르트만의 범주론적 성층 분석은 “너무나도 응고된 존재론적 문제 설정”으로 인하여 “옹색”하며 이것을 인간 이해에 적용시키면 네 층 상호간의 기계적 결합으로 인하여 그 통일성이 분열되고 만다. 그 결과 유인원과 원시인이 동일시되는 오류를 범한다.
나. 하르트만이 분석한 성층 관계에 있어서 위층은 아래층과 연관해 다룸이 마땅하지만 아래층은 절대로 위층과의 연관에서 다루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은 납득하기 힘들다.
다. 인간의 심-신-관계, 정신-심리-관계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하르트만의 존재론은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다.
라. 하르트만이 말하는 고유한 법칙을 가진 사실 세계에 의미와 가치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제 우리는 하르트만 존재론에 따르는 인간 이해에 대한 이 명제들을 차례로 하르트만 자신의 층이론의 바탕 위에서 재검토하고자 한다.



3. 하르트만 존재론에 대한 오해의 해명

첫째 명제부터 검토해 보자. 이 명제는 다음과 같이 대체로 3개의 주장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가. “하르트만의 범주론적 성층 분석은 (1) “너무나도 응고된 존재론적 문제 설정”으로 인하여 “옹색”하며 (2) 이것을 인간 이해에 적용시키면 네 층 상호간의 기계적 결합으로 인하여 그 통일성이 분열되고 만다. (3) 그 결과 유인원과 원시인이 동일시되는 오류를 범한다.”


(1)의 “하르트만의 성층 분석은 응고된 존재론적 문제 설정으로 인하여 옹색하다”는 좀 감정적인 주장은 현대 철학적 인간학의 입장을 배후에 숨긴 발언으로 느껴진다. 이 명제는 논문의 고유한 주장이라기 보다는 대체로 현대 철학적 인간학에 동조하는 입장에서 제기되고 있는 의견으로 보인다. 쉘러, 겔렌, 플렛스너 등의 철학적 인간학은 어떤 의미로는 존재론에 대하여 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역으로 하르트만 당대의 대표적 존재론자인 하르트만과 하이데거의 경우를 본다면, 먼저 하이데거는 철학적 인간학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조류로서 치부해 버린다. 그의 눈에는 철학적 인간학은 결코 “철학적”이지 못하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칸트의 물음을 해결하기는커녕 제대로 문제 제기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이와는 달리 하르트만은 대체로 철학적 인간학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철학적 인간학에 대하여 그는 단편적인 입장 표명을 하는 데 그쳤으나 상기 논문의 대전제와 같이 그의 존재론은 인간학을 위한 좋은 토대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서 그가 반대해 마지 않던 서양 철학의 근본 오류, 즉 세계 이해를 인간 이해에서 유추하는 의인관과는 반대로 세계 이해에서 인간 이해로 나아가고자 했던 것이 하르트만의 숨은 의도인지도 모른다. 반대로 모델 논문이 위에서 예로 든 플라톤의 경우는 오히려 인간 이해에서 세계 이해에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의인관적이라 하겠다. 논문이 이해한 국가의 구조는 인간의 영혼의 구조와 동일하며, 세계 또한 국가의 확대물, 아니 인간의 확대물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의 철학적 인간학의 입장에서는 그러나 어떤 입장을 취하든 간에 존재론에 대해서 대체로 부정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보기에 세계의 본질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며 세계의 중심 존재자인 인간이야말로 생성을 본질로 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존재론자들의 문제 설정은 이러한 생성적 본질을 화석화하고 응고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하르트만의 층이론을 응고된 존재론적 문제설정으로 인해 옹색하다고 표현된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한다면, 하르트만의 존재는 결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처럼 추상적이거나 응고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에 가까운 개념이다. 그의 존재는 철학적 인간학자들이 비판하는 존재와 다만 용어상으로 일치할 뿐이다. 그의 존재론은 오히려 세계의 본질인 생성과 과정을 파악하고자 하며 그의 층이론은 세계를 생성하는 양상에서 파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층이론을 계승하고 있다.
다음으로 (2) “이것을 인간 이해에 적용시키면 네 층 상호간의 기계적 결합으로 인하여 그 통일성이 분열되고 만다”는 주장 역시 성급하게 (1)에서 도출한 것이다. 하르트만의 층이론은 결코 응고된 존재 도식이나 기계적 결합의 산물이 아니다. 그의 층이론은 생성, 변화하는 사실 세계의 구조를 가장 보편적인 형태로 파악하고자 한다. 사실 세계의 네 층이 기계적으로 결합되어서 그 통일성이 분열된다는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사실 세계가 네 개의 층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학문하는 입장에서 편리상 그렇게 구분한 것이지 사실 세계 자체에 무슨 층간의 본질적 괴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사실 세계 자체가 층의 구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분리나 분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연결하여 관통하는 범주들의 통일, 결속이 더욱 우세하다. 제출된 명제의 주장은 하르트만의 층구조에 있어서 층간의 본질적 이질성으로 인하여 다만 부차적이고 기계적인 결합이 이루어져 결국 그 통일성이 분열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인간 이해에 적용하면 마찬가지로 “하나의 통일적 인간이라는 표상보다는 오히려 4개의 성층 질서에 상응해서 4가지의 인간, 즉 물체로서의 인간, 유기적 생명체로서의 인간, 심적 존재로서의 인간, 그리고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표상”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하르트만의 층이론이 하나의 통일적 세계라는 표상보다는 4가지의 세계, 즉 물체로서의 세계, 유기적 생명으로서의 세계, 심적 세계, 정신적 세계라는 분열되고 독립된 세계를 얻게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하르트만의 층이론은 절대적으로 하나의 통일된 세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이론 체계이다. 위의 주장은 하르트만 층이론의 어디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
(3) “그 결과 유인원과 원시인이 동일시되는 오류를 범한다”는 소결론은 1) 인간은 정신만으로 동물과 구분되지는 않는다 2) 유사 이전의 원시인에게 정신 능력을 부정한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을 포함한다. 논문은 1)을 뒷받침하는 논법을 전개하지 않는 반면, 2)에 대해서는 그 정신관이 지나치게 편협하다는 주장을 덧붙인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논자는 제출된 명제의 주장을 정확하게 반박할 수는 없으나 아마도 1)의 입장은 인간의 정신뿐만이 아니라 그의 무기물인 신체나 생명 기능, 심리 작용부터가 다른 동물이나 식물 혹은 물체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논문의 생각처럼 하르트만이 이 입장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하르트만의 층도식에 따르면, 원시인과 유인원이 결국 정신 능력을 갖지 않고 다만 심적 능력만을 가졌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진화론에 따른다면 인간이 유인원과는 다르지만 그 공동의 조상을 가지고 있을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2,500만년전의 드리오피테크스가 공동 조상임). 그러므로 유인원과 원시인이 동일시된다는 것은 오류라고만 볼 수는 없다. 2)의 주장은 하르트만의 결론이 유사 이전의 인간이 문화와 문화 능력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르트만이 의미하는 유사 이전이란 저자가 생각하는 유사 이전과 그 시기적 차이가 현격하다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모델 논문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이 유사 이전에 문자적 기록은 없지만 훌륭히 문화와 문화 능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인 반면에, 하르트만의 의미는 인간의 진화 역사상 유인원과 구분이 되지 않던 시기까지 소급하며 그렇다고 그 문화적 능력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능력으로 말한다면, 진화론의 본래적 의미를 받아들일 경우 구태여 인간만이 아니라 유인원이나 고등 동물, 나아가서 동물이나 식물도 그러한 잠재적 능력을 가진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인간은 결국 아메바덩어리에서 진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 “하르트만이 분석한 성층 관계에 있어서 위층은 아래층과 연관해 다룸이 마땅하지만 아래층은 절대로 위층과의 연관에서 다루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은 납득하기 힘들다.”


위의 주장은 하르트만 범주론의 범주적 법칙중에서 의존 법칙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에 의하면, 위층은 아래층에 의존하며 특히 위층의 범주는 언제나 아래층의 범주를 전제로 하지만 위층의 범주가 아래층의 범주 가운데 전제되는 것은 아니다. 아래층은 위층에 무관하게 자립적이며, 아래층 범주가 위층에 재귀할 때는 그 가운데서 질료의 역할을 한다. 또한 위층은 아래층보다 위약하나 아래층으로부터 자유롭다. 대체로 이것이 하르트만 의존 법칙의 의미이다. 이는 상하층간의 존재 법칙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주장이 상하층간의 존재 법칙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학문적으로 다루는 방법 절차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르트만의 주장은 존재 질서에 관한 것인데, 명제의 주장은 존재 질서가 아닌 존재 질서를 취급하는 방법 절차에 관계한다. 즉 하르트만 자신은 이러한 주장을 한 일이 전혀 없다. 논문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 낸다: “이제 심리적, 정신적 기능을 A라 하고 정신 현상을 B라 할 때 A와 B는 다같이 인간을 이루고 있는 본질적 요소이다.... 그런데 B의 A에 대한 관계는 따지되 A의 B에 대한 관계는 따지지 말라는 요구는 납득하기 어렵다.” 논문이 하르트만의 존재 질서에 관한 명제를 그것을 다루는 방법 절차에 대한 주장으로 뒤바꾸어 놓았지만 이를 잠시 도외시하고 제출된 주장의 본의를 추적해 보자. 아마도 그 의도는 하르트만의 존재 법칙이 상하층 상호간의 관계를 부정하고 위층의 아래층과의 관계만을 인정하지 아래층의 위층과의 관계는 부정한다는 사실의 부당성을 말하고자 함일 것이다.
그러나 하르트만은 결코 상하층간의 상호 관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의존 관계의 방향과 강약 관계에 주목할 뿐이다. 의존 법칙이 담고 있는 주장은 아래층이 위층보다 강인하며 따라서 위층이 아래층에 의존한다는 것, 그러나 위층은 아래층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사실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의존 법칙이 상하층간의 상호 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상호 관계는 이미 전제되어 있다. 위층은 아래층보다 위약하여 그에 의존하고는 있지만 그로부터 독립하여 자유로운 활동 공간을 가진다는 이 사실은 이미 상하층간의 상호 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지 다만 일방적 관계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관계라는 것부터가 이미 상호 관계를 뜻하지 한갓된 일방적 관계일 수는 도저히 없다. 위층이 아래층에 의존한다는 것은 한쪽은 부담하고 다른 쪽은 부담되는 쌍방의 관계를 전제로 한다.
논문의 다른 의도는 아마도 화강암이 1층, 소나무가 2층, 고등 동물과 유인원이 3층, 인간이 4층이라면 이는 4층 건물에 비유될 수 있으며, 인간은 다른 존재자들에 대해서 다만 층수가 4층이라는 사실에 의해서만 구별이 된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논문의 저자가 보기에 “인간은 정신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심리 작용과 신체 기관부터가 이미 철저하게 인간 특수의 것이다.” 인간은 다만 층수가 다른 존재보다 한층 더 높다는 기계적 의미로 다하여질 수 없는 독특한 점을 가지고 있어서 그의 신체나 생리적용, 심리 작용은 다른 존재자들의 그것과 현격히 다르지만 하르트만의 기계적 층도식으로는 이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르트만은 스스로 위층이 아래층에 개입하는 현실을 인간 정신을 대표로 해서 이 정신이 물리적 자연, 유기적 자연, 심리적 존재에 어떻게 관여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힌다. 또한 인간의 정신은 스스로의 유기적 자연이나 무기적 자연, 혹은 심적 능력, 정신 능력에 관여하는 일이 매우 어려움을 말하면서 그 이유는 “인간은 최고로 발달된 따라서 변화할 것이 가장 적은 동물”임을 들고 있다. 또한 하르트만은 4층을 가진 존재자로서 인간 이외에도 그리스의 폴리스를 예로 들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폴리스도 그 지리적인 상황 속에 물리적 구조를 가지며 유기적 생명과 충동 그리고 경제적인 세계가 자라나도록 하는 욕구, 심리적인 생활, 정신 생활도 영위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르트만은 과연 인간과 폴리스를 4층을 가졌다는 점에서 동일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논문의 주장대로라면 하르트만의 층이론의 도식은 기계적이며 따라서 4층을 가졌다는 점에서 인간과 도시는 전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도시만이 아니다. 전체로서의 세계 역시도 하르트만은 4층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역시 인간과 세계는 4층을 가진다는 점에서 완전히 동일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과연 이것이 하르트만의 주장인가?
하르트만의 의존 법칙이 염두에 두는 것은 개체들의 층이 아니라 범주의 층이다. 모델 논문이 층의 각각에 화강암, 소나무, 유인원, 인간을 배치하여 이를 하르트만의 층이론의 모델로 설정하여 논의를 전개하는 자체가 논점 변경의 오류인 셈이다. 하르트만은 범주의 층을 말하고 있는데 논문은 개체들의 층을 염두에 두고 논의를 진행시킨다. 하르트만의 의존 법칙은 철학사적으로 볼 때, “위로부터의 형이상학”(Metaphysik von oben)에 대한 반대 명제를 지지한다. 위로부터의 형이상학은 위층의 범주로 아래층의 범주를 설명하고자 하는 경향을 띤다. 세계 과정이 제일 형상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목적론, 플라톤의 이데아론, 라이프니즈의 단자론, 쉘링의 예술 철학, 헤겔의 정신 형이상학 등이 그 실례이다. 그렇다고 하르트만이 “아래로부터의 형이상학”(Metaphysik von unten)의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아래층의 범주를 위층으로 옮겨 놓는 유물론, 생기설, 심리주의 등을 위로부터의 형이상학과 마찬가지의 한계 초월의 오류를 범한다고 하르트만은 본다. 의존 법칙은 위층이 아래층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천명한다. 위층은 아래층으로부터 질료상의 제약을 받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자유로운 고유 활동 공간을 가진다는 것이다. 위층이 아래층으로부터 가지는 자유는 말하자면 제한적 자유인 셈이다.


다. “인간의 심-신-관계, 정신-심리-관계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하르트만의 존재론은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다.”


심-신-문제는 서양 철학의 가장 오랜 형이상학적 난문중의 난문이다. 이는 주로 근세의 실체 형이상학에서 본격적으로 문제로 제기된 것이다. 하르트만의 층이론의 견지에서 이 문제를 본다면, 주로 정신(이성)과 물질(자연) 중에서 어느 한 편을 중심으로 인간을 이해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르트만이 보기에 설령 이 두 측면을 동시에 고려하고자 하는 학설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이론은 양극중 어느 한 편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런데 하르트만의 층이론은 물질과 심리 가운데에 생명을, 정신과 생명 사이에 심리를 삽입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모델 논문은 “신체 현상과 심적 현상과의 관계, 그리고 심적 현상과 정신 현상과의 관계, 나아가서 이들의 전체적 인간과의 관련이 어떠한가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고 이것은 하르트만의 존재론의 도식에 집어 넣어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하르트만의 존재론이 어떤 중요한 인간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는지는 자세히 논구되지 않고 다만 암시되어 있을 뿐이다. 층간의 상호 관계는 물론 각 층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있기 때문에 아직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부분이 있음을 하르트만은 인정한다.
하르트만은 인간이 각층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세계에 있어서의 인간의 위치라는 형식으로 표방한다. 이는 현대의 철학적 인간학자들의 태도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인간만이 정신의 층을 가지기 때문에 여기서 하르트만이 의미하는 인간이란 정신층과 다른 층들과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하르트만에 의하면 인간은 무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물리적 자연의 영역은 주로 인과 관계와 상호 작용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이 법칙을 알기만 하면 물리적-물질적인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 그러나 하르트만은 이처럼 정신층이 물리층을 지배한다고 해서 범주적 의존 법칙을 위배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정신이 물질을 지배하는 것은 물질의 법칙을 이해하는 한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유기체의 영역은 그렇게 간단히 지배할 수 없다. 인간은 종의 법칙이나 기타 유전 법칙 등을 간단히 무시할 수도 완전히 구명할 수도 없다. 그러한 한에서 인간은 유기체를 다만 부분적으로 지배할 수 있을 뿐이다. 유전 공학이 상당히 발달한 오늘날에도 인간이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유기체 전체의 영역에 비추어 보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하르트만은 인간이 자기자신의 유기체, 즉 생명 영역에 대해서는 더욱 무력함을 인정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최고도로 발달한 동물이기 때문에 변화의 소지가 그 만큼 적기 때문이다. 인간은 심리 영역에 대해서는 더욱 어려움을 가진다. 본능이나 충동 등 직접적인 감정들을 제어하는 중용이 덕으로 여겨져 온 것을 하르트만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한다. 중용의 덕은 이러한 자연적 마음을 다스리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간은 그만큼 중용의 상태를 유지하기 힘듦을 말해주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마음의 평정을 높은 마음의 경지로 보았고 동양 철학에서는 마음을 닦는 수양론(공부론)이 가장 중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르트만은 인간은 바로 자기자신, 즉 정신적인 존재와 관계할 때 가장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고 말한다. 인간은 다른 인간과의 관계, 즉 사회 관계에 있어서 생존하는 존재이다. 여기서 인간은 계획이나 목표도 없이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계획을 세우고 상대방의 의도를 꿰뚫어 보고 좌절시키려고 광분하는 적대자에 맞서게 된다. 바로 이곳이 인간의 윤리적 덕성의 본래적 고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단지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고 타인에 의해서 인정받는, 한마디로 공동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이는 지난의 일이다. 국가를 책임지고 역사를 이끌어 가는 개인은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야 하지만 역사는 번번이 이 일이 빗나갔음을 알려 준다고 하르트만은 본다.
이쯤 되면 하르트만이 층들간의 내밀한 관계를 알지 못했다고 단언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르트만은 철학적 인간학자들이나 실존 철학자들이 즐겨 했을 삶의 어두운 내면 역시도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는 이를 주제적으로 천착할 시간적 여유를 가지지 못했을 뿐이다.


라. “하르트만이 말하는 고유한 법칙을 가진 사실 세계에 의미와 가치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하르트만은 전체로서의 사실 세계를 이념권과 사실권이라는 존재 방식, 사실 세계의 네 층의 관계 규명을 통해서 밝혀내고 있다. 그에게는 존재의 질서, 인간과의 관계를 벗어난 그 자체로서의 존재 세계의 질서를 구명하는 것이 존재론의 과제였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그 자체로서의 존재 세계란 언제나 인간의 사유와 반성이라는 현상 방식을 매개로 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존재 세계가 인간 주관에 의존해 있다는 것은 인식론적 차원의 것이지 존재론적 차원의 것은 아니다. 하르트만은 주어진 현상에서 점차 자체 존재를 추출해 내어 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가운데 객관적이고 존재론적인 자체 존재의 질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위 명제가 하르트만의 존재 질서에 의미와 가치가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세계를 단번에 의미와 가치의 세계로 단정하는 전형적인 의인관적 입장을 대변한다. 하르트만은 다른 존재론자인 하이덱거가 존재론의 출발점을 존재의 의미(Sinn von Sein)에서 구하는 것을, 존재론에서는 존재의 의미보다는 의미의 존재(Sein von Sinn)를 문제로 삼아야 한다고 반박한다. 그러나 의미의 존재란 보편적 존재가 아닌 특수한 존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존재론의 출발점으로는 역시 부적합하다고 한다. 하르트만은 의미와 가치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아니면 그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기 위해서라도 우선은 자체존재하는 세계가 존재해야만 한다는 입장이다. 인간은 자체존재하는 세계에 대해서만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하르트만의 고유한 법칙을 가진 사실 세계가 가치와 의미를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한편으로 정당하다. 하르트만은 사실 세계 이외에 이념 세계(ideales Welt)를 설정하는데, 수학적 존재, 사실의 본질, 논리적 법칙, 가치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대체로 사실 세계와 부분적으로 일치한다. 즉 사실 세계와 겹치는 부분도 있으나 사실 세계를 벗어나는 부분도 있다. 특히 가치는 대체로 순수한 이념의 영역에 속한다. 이를 사실 세계에 실현시키는 것은 정신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인간은 사실 세계에서 정신층에 속하지만 그의 정신 능력 덕택으로 이념 세계, 특히 가치계를 이해하는 자이다. 칸트는 이점에서 인간을 두 세계의 시민이라 불렀던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는 사실 세계에 실현될 수 없는 가치를 읽어내어 이를 사실 세계에 실현하는 역할을 할 줄 아는 자이다.
그러나 위의 주장은 다른 편으로 부당하다.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실 세계는 정신이 존재하는 4층의 세계이다. 인간은 정신 생활을 영위하는 정신 존재 혹은 문화 존재이다. 인간은 순수한 존재의 질서, 존재의 세계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여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존재자이다. 즉 사실 세계에는 이미 그때마다 의미와 가치가 실현되고 부여된 세계이다. 이점에서 하르트만의 사실 세계가 가치와 의미를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인간은 역사와 문화를 가진 존재이다. 역사와 문화 역시도 불변의 것이 아니라 시간 추이에 따라 생성하고 성장하며 소멸한다. 즉 사실 세계에서의 의미와 가치, 다시 말하면 문화와 정신 세계 역시도 사실 세계의 일부분이다. 이를 하르트만은 역사적 정신층이라 부르며, 그는 정신의 존재 방식을 개인적 정신, 객관적 정신, 객체화된 정신으로 분석하였다. 그러므로 하르트만의 사실 세계는 이미 사실 세계이면서 가치와 의미의 세계이기도 하다.



4. 결론적 고찰

우리는 위에서 제출된 하르트만의 존재론의 시각에서 재구성해 본 인간의 문제, 인간학을 네 가지 명제로 압축하여 이에 대한 논변을 전개하였다. 이 네 가지 명제 이외의 중요한 다른 명제도 모델 논문에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고 보인다. 그리고 본고에 대한 재반론 역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위에 제출된 명제에 관한 한 대체로 하르트만에 대한 오해를 근간으로 하는 까닭에 이를 바로잡지 않을 수 없었다.
하르트만은 자신의 층이론을 비롯한 범주론이 단순한 도식으로 격하되어 도그마화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여기서 나타나는 도식은 불가피한 방편이지 그 자체 궁극적인 것은 아니다. 존재 세계의 질서와 그 의미는 도식으로 다하여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하르트만 존재론의 범주적 도식, 층이론의 도식은 제한된 의미로 읽지 않으면 안 된다.
하르트만 층이론을 인간 문제에 적용시키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며 또한 생산적이라고 본다. 다만 너무 도식적 이해를 앞세우게 되면 오히려 하르트만의 인간 이해, 층이론의 내오에 간직되어 있는 깊은 의미를 그르치게 될 수도 있다.
다만 예컨대 현대의 철학적 인간학자들이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 인간을 너무 다양하게 이해함으로서 객관적이고 통일된 인간상을 이루는 데 다소 장애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된다. 인간을 너무 의미론적으로만 이해하게 되면 도저히 잡히지 않는 불가사의로 인간을 해석할 소지가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각자의 취향대로 인간을 해석하여 인간을 정신적 존재라든가 탈중심적 존재 혹은 제도적 존재 아니면 현존재라는 실존론적 존재 등으로 해석하여 종잡을 수 없는, 결국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다시 던지게 하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하르트만은 인간을 사실 세계의 네 층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으며, 따라서 세계 전체를 관망하고 옛날의 형이상학이 하느님에게 부여했던 속성들, 즉 예견, 목적 활동, 자유, 가치감 등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가지는 존재로 보았다. 이로 인해서 인간은 그때마다 일정한 상황 속에서 행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로 보았다. 그런가 하면 인간은 이러한 행위로 말미암아 다른 존재자들과는 달리 문화를 창조하고 이를 발전시켜 후대에 물려주고 물려받는 존재, 그러면서도 그 자신 어디까지나 동시에 물질, 생명, 심리, 정신의 영역에 속하는 존재자인 것이다. 인간의 위대성은 무엇보다도 이념권에 관계하여 이를 사실 세계에 실현하는 능력이라고 하겠다. 이를 바탕으로 인간은 우리의 일상 생활의 기반인 객관적 정신의 영역을 가지게 된다. 학문, 예술, 습관, 도덕, 법, 종교 등등 모든 영역은 인간의 창의적 의미, 가치 부여 활동의 산물이다. 그러나 인간은 어디까지나 개인으로 그치기 때문에 초개인적 영역을 움켜쥐는 의식 같은 것은 가지지 않는다. 쉘러의 가치 윤리학의 인격주의를 찬성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쉘러는 개인으로서의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공동체를 인격으로 보며 그 단계에 있어서 마지막에 있는 하느님을 세계의 총체 의식을 간직한 인격으로 본다. 하르트만은 이러한 형이상학적 인격주의가 결국은 모든 것을 미리 섭리하고 결정하는 하느님의 인격으로 인하여 인간의 자유와 행위를 불가능하게 한다고 본다.












참 고 문 헌

Hartmann, N., Einführung in die Philosophie(1949), (Vorlesung im Sommersemester 1949 in Göttingen), Hannover 1956.
, Neue Wege der Ontologie, 2. Aufl.(1947), Stuttgart 1968.
, "Sinngebung und Sinnerfüllung", in: ders.: Kleinere Schriften, Bd. 1, Berlin 1955
Heidegger, M., Kant und das Problem der Metaphysik, in: Martin Heidegger Gesamtausgabe Bd. 3, Frankfurt am Main 1975.
Morgenstern, M., Nicolai Hartmann. Grundlinien einer wissenschaftlich orientierten Philosophie, Tübingen/Basel 1992.
Wolandt, G., “Nicolai Hartmann-ein baltischer Philosoph", in: ders.: Letztbegründung und Tatsachenbezug, Bonn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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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우석(옮김)(M. Morgenstern),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비판적 존재론?, 서울(서광사) 2001.
하기락 외(옮김)(N. Hartmann), ?정신 철학 원론?, 대구(이문 출판사) 1990.
허재윤, ?인간이란 무엇인가? 철학적 인간학에 대한 연구?, 대구(이문 출판사) 1986.












Zusammenfassung

Das Problem des Menschen bei Schichtungtheorie N. Hartmanns
― Eine Betrachtung in Thesis Herrn J. Y. Hers ―

- Yang, Ou-Sork -

Nicolai Hartmanns Kritische Ontologie ist in Korea nicht so breit untersucht. Eher das Misverständnis und Verdrehung als das richtige Verständnis liegt vor in Hartmanns Kritische Ontologie. Unsere Untersuchung findet in diesem Problembewußtsein statt.
Ein Aufsatz von Herrn Her scheint mir ein vortrefflicher, das die Position der Hartmannschen Ontologie über die Frage des Menschen aufzeigt. Dieser Aufsatz kritisiert die Probleme von Fall zu Fall, die Hartmanns Ontologie einbezieht.
Unsere Untersuchung führt zur Konseqenz, daß die Problemstellung Hers das systematische Misverständnis über Hartmannsche Ontologie bewirken könnte, versucht, daran systematisch zu kritisieren und das herauszuarbeiten. Auf die durchsetsende Analyse der Thesis Hers zeigen wir auf, daß diese aus dem falsche Verständnis über Hartmanns Ontologie herausgezogen werden.

※ Schlagwörter : Hartmann. Ontologie, Anthropologie, Systemtheorie, Schichtungtheor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