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집합행위에 대한 엘스터의 설명 논리 비판

나뭇잎숨결 2022. 1. 29. 09:24

집합행위에 대한 엘스터의 설명 논리 비판




백 충 용


1. 들어가는 말

엘스터로 대표되는 방법론적 개인주의는 모든 태도, 행동 유형, 사회 과정 등의 활동, 속성, 관계가 원리적으로 개인의 측면에서만 설명되어질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사회구조 등의 거시 영역 생산의 매개인 집합행위 역시 방법론적 개인주의의 방식으로 설명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집합행위에 대한 그러한 설명 방식은 그다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집합행위가 왜 특정한 유형을 띠는가에 대해 적절한 대답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조적 관점에 기초한 행위 유형적 접근만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 이 글의 의도는 집합행위에 대한 엘스터의 설명 방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함과 동시에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집합행위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이론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논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우선 엘스터의 인간 이해를 간략하게 짚은 다음, 게임 이론의 지위를 다룬다. 그의 인간 이해는 합리적 선택 이론의 핵심인 게임이론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구성의 오류와 반결과성과 관련한 집합행위에 대한 그의 설명 방식을 다룰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설명 방식을 비판하면서 행위 유형적 접근이라는 대안적 방식을 모색할 것이다.

2. 관계적 개인과 게임이론의 지위

엘스터에 따르면 합리적 선택 이론은 무엇보다도 규범 이론으로서, 목적 달성을 위해서 가능한 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말해준다. 그것은 행위자의 합리성과 의도성에 기초해 그들의 행위와 사회구조 등의 거시 영역을 설명한다. 따라서 모든 행위와 사회 현상은 개인들의 합리성이나 의도성으로 환원되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환원주의 입장인가? 그러나 그는 환원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

엘스터의 입장은 Diderot나 La Mettrie 등의 기존의 원자론과 확연히 다른 측면을 갖고 있다. 양자가 개인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개인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차이가 있다. 원자론은 어떠한 종류의 관계든 '관계'는 설명적 개념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오직 비관계적으로만 구성된 실체만이 설명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회 현상들은 오직 개인들 자체에 기초해서만 설명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에 반해 엘스터는 개인을 실체적 속성으로 보지 않고, 관계적 속성을 지닌 존재로 본다. 예컨대 '권력이 있다', '친구가 있다'라는 사실들은 그저 독립적인 개인의 실체적 속성들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를 기초로 하고 있는 개인들의 관계적 속성들이다. 개인들 그 자체로 환원될 수 없는 개인들 간 관계의 인정은 그가 반환원주의적 입장임을 보여준다.

개인들의 관계적 속성이 개인들 자체로 환원될 수 없다면, 그들 간의 관계 자체는 개인들의 관계적 속성 이전에 존재해야만 한다. 예컨대 '친구가 있다'는 관계적 속성은 친구 관계를 전제로 해야 가능하다. 물론 이 관계는 개인들의 합리적 선택이 일어나는 토대이다. 다른 하나의 환원 불가능한 영역은 사회구조이다. 그것은 의도 종속적sub-intentional 인과성의 형태가 아니라, 의도 초월적 supra-intentional 인과성 형태로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 엘스터에 따르면 전자는 사회구조에 의해 결정된 이해관계의 내용과 형태를 추구하려는 개인들의 욕망과 목적을 규정하는 심리적 인과성이고, 후자는 욕망이나 목적에 영향을 미치면서 개인들이 의도되지 않은 결과로 나타나는 사회구조나 사회 현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상호관계 속의 개인들은 사회구조에 의해 결정된 이해관계의 형태와 내용을 자신들의 목적, 믿음, 욕망 등의 논리에 근거해서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구조와 개인들 간의 상호관계는 설명적 지위를 갖는 것인가? 우선 사회구조의 경우에는, 상식적으로 볼 때 일견 그것은 개인의 행위에 설명력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구조는 개인들의 선택과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선 선호와 신념에 따른 행위가 어떻게 사회구조로부터 나오는가에 대한 설명으로 보충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엘스터에 따르면, 이러한 상식은 적어도 틀리지는 않지만, 불확실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태도이다. 현상의 원인을 넘어서서 원인의 원인을 탐구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언제나 처음 원인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원인의 원인을 찾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모든 것은 '내부적'endogenously 원인을 통해 설명되어야만 한다.............신념이나 선호가 사회구조에 의해서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이 메카니즘이 어느 한계에까지 작용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한계를 뛰어 넘어서 반란이 실제로 가능한가 등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 한다.

상식적으로는 초월적 영역의 설명적 지위를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엘스터에 따르면, 초월적 영역이 개인의 행위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를 해명하는 일은 매우 어려울 뿐 아니라, 이의 해명 자체가 대단한 난제이다. 때문에 그는 이에 대해 단호하다. 초월적 인과성을 받아들이지만, 이것이 개인의 행위를 설명하는 원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개인들 간의 상호관계는 어느 정도 설명적 지위를 가질 수 있다. 그에게서는 매개변수적parametric 결정보다는 전략적 결정strategic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이미 주어져 있는 외적 제약 요소들에 직면한 행위자들이 그 제약 요소들을 평가한 후,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후자는 개인들 간의 상호관계 속에서 상호의존성을 고려한 결정을 의미한다. 후자가 전자보다 더 중요한 한에서, 상호관계가 사회구조와 동일한 설명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상호관계의 성격이나 유형은 행위자의 선택에 강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경험적으로 인지 가능한 것이며 설명 가능한 것이다. 친구관계 속에서 그들이 맺는 상호관계의 성격과 상사와 부하 직원 관계 속에서 그들이 맺는 상호관계의 성격은 다르다는 것은 분명히 인지 가능하며, 그들이 수행하는 상호작용은 이 관계를 기초로 해서 설명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행위는 그 원인, 즉 개인의 선택에 기초해서 설명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따라서 개인들 간 상호관계가 설명적 지위를 갖는다고 해서 그것이 개인들의 선택에 대해 우선권을 갖지는 않는다. 부차적 지위를 가질 뿐이다.

그러나 관계적 속성을 지닌 개인들이 타인과의 상호 의존 관계, 즉 전략적 상황에서 선택하는 한, 그의 선택은 게임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가 게임이론을 합리적 선택의 핵심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관계적 개인들은 타인의 선택과 타인이 받는 보상을 염두에 두면서 전략적 계산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합리적 선택과의 연관성 때문이 아니라, 게임이론 그 자체에도 높은 의미를 부여한다.

나는 게임이론이 대부분의 사회과학에 대해 통일된 개념 구도를 제공한다고 믿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엘스터가 보기에 개인들의 선택이 게임 상황에서 일어나는 한, 그리고 사회 현상이 개인들의 선택에 기초하고 있는 한, 게임이론은 사회 현상을 통일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이론 장치이다. 따라서 엘스터가 "각자가 받을 수 있는 보상은 모든 사람이 받는 보상에 의존하고, 각자가 받는 보상은 타인의 선택에 의존하며, 각자의 선택은 타인의 선택에 의존한다"는 중요한 사회적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 장치는 오직 게임이론뿐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실 선택과 보상의 상호연관 체계 속에서 개인들이 선택하거나 행위하지 않는다면, 게임이론이 그처럼 높은 이론적 지위를 부여받을 리 없을 것이다.
게임 형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갈등과 협동의 혼합 형태인 총계 가변variable-sum의 비 협동 게임이다.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현실을 설명하는 데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협동 게임의 형태도 존재하지만, 현실적 게임 상황은 신념과 이해관계 등이 상이한 개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선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비 협동 게임이 현실의 갈등 상황을 설명하는 데 적합한 이론이라는 것이다. 또한 수인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게임(이하 PD게임)에서 양자의 선택에 따라 그들 형량의 합이 달라지듯이, 총계가 변화하는 게임 상황이 현실적으로 많이 존재한다. 그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수많은 충돌과 갈등 때문에, 게임 상황에 처한 행위자들은 각각의 상호관계를 고려함 속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에 비해 협동 게임은 현실의 복잡한 갈등 상황에 적합하지도 않다. 맑스의 모순 개념 등과 관련한 그의 논의도 비협동 게임을 통해 다루어진다.

3. 집합행위에 대한 엘스터의 설명 방식

구조적 제약structural constraint 하에 놓여 있는 개인들의 선택적 행위를 통해 구조적 현상이 유지, 재생산되는 메카니즘을 추적하는 엘스터의 방식은 일반적인 비판에 노출되어 있다. 사회구조의 제약을 인정하면서, 개인들 행위의 설명적 우선성을 추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그러나 엘스터는 이러한 비판을 넘어설 준비가 되어 있는 듯 하다. 일반적으로 보면, 사회구조는 근본적으로 행위자들의 선택을 강요하고, 그들은 강요된 행위를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자본주의에서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은 생계 때문에 대개의 경우 임노동자의 길을 간다. 그러나 Giddens의 말처럼 어떤 경우에도 그가 '다르게 행위할 수 있는 개연성'possibility of doing otherwise은 존재한다. 대부분 사회구조가 강요하는 선택, 이른바 강제된 선택을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율성과 자유 의지를 가진 그들이 다르게 행동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따라서 구조적 제약과 개인의 선택은 양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엄연하게 존재하는 분명한 사실이며, 논리적 하자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구조는 선택의 조건일 뿐이다. 행위는 오직 개인들의 내부적 요인을 통해서만 설명 가능하다. 또한 사회 현상이나 사회구조를 재생산하거나 창조하는 개인들의 집합행위 역시 그들 내부적 요인을 통해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구조적 현상이나 구조 간 연관은 그것들의 미시적 기초를 밝힐 수 있을 때 비로소 설명된다. "설명한다는 것은 메카니즘을 제공하는 것으로, 블랙박스를 열어 거시적 결과를 발생시킨 박스 속의 나사와 조임쇠, 톱니와 바퀴, 그리고 욕구와 믿음 등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거시적인 맑스의 주요 개념과 명제들, 예컨대 '사회적 모순', '국가', '평균 이윤율 저하', '계급투쟁', '착취' 등은 게임 이론에 근거해서 보다 잘 설명될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엘스터의 관심은 집합행위에 집중되어 있다. 유의미한 거시 현상이나 구조적 현상은 개인들의 합리적 선택의 결과들로 나타나는 집합행위에 의해 야기되기 때문이다.
집합행위와 관련된 맑스의 명제들을 다룰 때, 엘스터가 특히 관심을 갖는 문제는 소위 '사회적 모순'이다. 우선 엘스터는 사회적 모순이 갖는 특별한 지위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엘스터의 모순 개념은 맑스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 물론 그는 변증법이나 모순 개념 등을 전체적으로 거부하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그는 합리적 선택 이론과 관련해서 사회적 모순 개념이 갖는 설명력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방식 역시 맑스와는 사뭇 다르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라든지, 생산양식의 자기모순이라든지 하는 거시 차원의 접근은 인정하지 않는다. 단지 그는 개인들의 판단과 행위 결과 사이의 관계와 관련해서 '사회적 모순'을 유용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의 '사회적 모순'은 개인들의 판단과 선택, 그리고 이들의 집합행위가 만들어 내는 거시적 사회 현상과 관련되어 있다.

맑스는 사회적 모순을 두 가지 경우에 사용하고 있다. 하나는 논리적 오류(구성의 오류)의 형태에 해당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적으로 합리적인 행동이 집단적으로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는 도치된 메카니즘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맑스는 케인즈보다 앞서 자본주의의 본질적 역설을 진단해냈다.........맑스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의 부정적 측면에 더욱 주목하였으며, 수인의 딜레마와 같은 자기패배적 합리성에 대해 주목하였던 것이다.

구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는 한 집단의 구성원이 개별적으로 취한 행동이 그 집단의 구성원이 동시에 같은 행동을 취하게 될 경우, 개별적으로 의도한 결과를 야기할 것이라는 생각의 오류를 지칭한다. 예컨대 자본가들이 자본을 증식하면 할수록 생산력이 발전할 것이고 경제도 발전할 것이라 생각하고, 집합적으로 자본을 증식하려 할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경우 그들 간의 경쟁은 평균 이윤율 하락의 원인으로 작동하므로 결국은 투자의 기피, 시장의 축소로 귀결되어 그들이 생각한 것과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심지어 자본의 존속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러므로 구성의 오류를 범한다는 것은 개인들의 집합행위가 그들이 의도하지 않는 사회적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결국 그들에게 피해를 가져다주는 역설적 상황, 즉 반결과성에 처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렇듯 구성의 오류는 사르트르가 말한 반결과성counterfinality, 즉 전도된 실천inverted praxis 개념과 직결되어 있다. 엘스터에 따르면 사회적 모순 개념이 유일하게 타당할 수 있는 경우가 바로 반결과성이다. 구성의 오류는 반결과성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 장치일 뿐이다. 그가 구성의 오류를 사회적 모순의 논리적 형태라고 말하지만, 만일 반결과성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구성의 오류는 사라진다. 구성의 오류와 반결과성은 본질적 연관을 갖는다. 전자가 후자의 논리적 전제라면, 후자는 전자의 진위를 판별하는 사실적 결과이다. 구성의 오류를 범하는 개인들의 합리적 행위는 그들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역설적 상황, 즉 반결과성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최적화된 개인들의 행위로부터 결과하는 '최적화되지 못한 배치'sub-optimal allocations이다.
이러한 논리는 근본적으로 PD게임을 확장된 형태로 적용했을 경우에 잘 드러난다. 그리고 이 경우에 가장 큰 장해 요인은 무임승차자free-rider의 문제이다. 엘스터에 따르면, 다수의 게임 참가자들이 공공재화를 생산하려고 노력할 때, 각 개인들이 수행하는 합리적인 전략적 결정은 공공재화를 생산하는 데 참여하지 않고 혜택을 누리는 것이다(무임승차). 예컨대 엘스터는 맑스가 말한 평균 이윤율 저하 현상이 나타나는 것도 이 무임승차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에 따르면 평균 이윤율 저하 현상도 자본가들의 PD게임에 의해 잘 설명될 수 있다. 그것은 맑스의 말처럼 구조적 법칙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패배적 합리성 혹은 자본주의의 본질적 역설에 빠진 자본가들의 PD게임의 결과라는 것이다. 개별 자본가들은 경쟁에서 승리하고 이윤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생산수단의 대규모화와 자동화를 꾀한다. 소위 절대적 잉여가치를 추구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임노동자들의 저항이 거세질수록, 불변자본의 상대적 확대, 즉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를 통해 상대적 잉여가치를 추구하려 한다. 그러나 그들이 집합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 즉 최적의 공공재화 생산은 적절한 불변자본 투자를 통한 집단적 이윤의 추구이다. 따라서 그들이 최적의 공공재화 생산을 위해 불변자본 투자를 적절한 수준에서 묶어둔다면, 평균 이윤율을 적정한 수준에서 묶어둘 수 있게 된다. 이 게임의 보상 구조는 개인적 보상이 아니라 집단적 보상을 받을 때, 최선의 형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개별 자본가들은 적정한 투자를 추구하지 않는다. 불변자본에 대한 투자를 높임으로써 이윤량을 늘리고 경쟁에서 승리하려 한다. 이것은 엘스터가 말하는 무임승차이다. 무임승차하려는 자본가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평균 이윤율 저하의 폭과 속도는 점점 커진다. 따라서 평균 이윤율 하락은 무임승차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개별 자본가들의 합리성에 의해 나타나고, 결국 사회적 위기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엘스터는 선택과 보상의 상호 연관 체계인 게임 상황에 처해 있는 개인들의 합리적 선택에 기초해서만 집합행위가 설명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럴 때만이 집합행위의 결과로 나타나는 거시 영역을 미시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 결과가 비록 반결과성의 형태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집합행위는 결국 개인들의 합리적 선택으로부터 설명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설득력 있는 방식이라면, 평균 이윤율 저하, 계급투쟁, 혁명 등 거시 영역의 담론들뿐만 아니라, 사회구조 재생산도 통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도 확보할 수 있다.

4. 비판과 대안

상식은 인간이 자신이 처한 구조적 상황을 무시하고 온전히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고 보지 않듯이, 그의 행위가 오로지 사회구조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지도 않는다. 그리 보면 엘스터의 입장은 상식에 잘 부합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집합행위에 대한 그의 설명 방식은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왜 특정 유형의 행위가 다수에 의해 수행되는가? 혹은 개인들이 왜 특정 유형의 집합행위를 수행하는가? 이에 대해 적절히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이해관계의 형태와 내용은 사회구조적으로 결정되고 이를 추구하려는 욕망을 가진 개인들이 합리적 선택을 한다면, 그들의 행위는 일정한 유형을 가진 집합행위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그의 설명 방식이다. 정교한 개념과 게임의 법칙들이 개입하지만, 큰 줄거리는 이것이다. 그러나 이 방식은 설득력이 높지 않다.
우선 합리성과 관련하여 그는 두 가지를 전제해야만 한다. 첫째 그는 '모든 개인은 합리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을 전제해야만 한다. 그러나 합리적 선택이론은 규범이론이다. 규범은 우리가 '해야 할 것'을 지시하지만,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합리적으로 선택해야만 한다'는 당위는 현실적인 우리의 행위를 설명하는 적절한 방식이 아니다. 따라서 합리성은 모든 개인의 행위 원리로서 실재하지 않는다. 요청될 뿐이다. 따라서 엘스터가 합리적 선택 이론을 규범 이론으로 자리매김하는 한, 개인의 합리성을 통해 현실적 행위를 설명하는 방식은 포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합리성을 Davidson처럼 합리화rationalization로, 즉 '행위의 이유를 합리적 원인'으로 이해한다면, 엘스터의 주장은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합리성을 최적의 수단이나 절차를 선택하는 능력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엘스터의 합리성은 합리화가 아니라 도구적 합리성이다. 또한 모든 개인이 합리적으로 선택한다는 명제를 입증할 수 있는 객관적 방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개인들이 합리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비약이거나 경험적 직관일 뿐이다.
둘째, '모든 합리적 선택은 객관적이다'는 것을 전제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개인들의 합리적 선택에 기초해 집합행위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의도의 다양성 때문에 정당화될 수 없다. 임금 관련 파업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리고 파업 당사자들이 합리적 선택을 통해 파업에 참여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파업이라는 집합행위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개인들의 합리적 선택은 적절하지 않다. 요컨대 명목적으로는 임금 인상을 목적으로 하는 파업에 참가하는 임노동자들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 찬성하지는 않지만 집행부이기 때문에, 자신은 현재 상태에 만족하지만 타인의 임금 인상을 끌어내기 위한 이타심 때문에, 임노동자를 무시하는 자본가의 태도를 고치기 위해, 임금 인상을 위한 투쟁이 분배 정의 실현을 위한 수단이 된다는 가치판단 때문에, 임금 인상 관련 경제투쟁은 정치투쟁을 위한 불가결한 전술이라는 전략 전술적 판단 때문에, 극단적으로는 일상이 무료해서 파업에 참가할 수 있다. 이렇듯 개인들의 의도가 다르다면, 개인들의 의도를 통해 이 파업이라는 집합행위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엘스터처럼 임금 인상 관련 파업에 참가하는 모든 임노동자들이 오직 임금 인상을 목적으로 파업에 참가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과도한 단순화일 뿐이다. 따라서 합리적 선택에 기초한 엘스터의 설명 방식은 객관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다음으로 집합행위와 관련한 엘스터의 설명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해관계의 형태와 내용이 사회구조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만 가지고서는 특정 행위 유형이 왜 특정 사회구조 하에서만 나타나는 지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특정 행위 유형이 특정 사회구조 하에서만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설명'되어야만 한다. 단지 '선언'될 수만은 없다. 그러나 엘스터는 특정 유형의 집합행위가 특정 사회구조에 의해 어떻게 결정되는지 그 메카니즘에 대한 설명은 제공하지 않는다. 전제할 뿐이다. 예컨대 임노동자들이 자본가들을 상대로 행하는 임금 관련 파업이라는 집합행위는 자본주의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의 임금 관련 파업은 자본주의라는 사회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며, 자본가와 상호관계 속에 있는 임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려는 욕망과 의도, 믿음에 근거해서 파업을 수행한다. 따라서 파업은 사회구조적으로 결정되지만, 그것은 임노동자들의 의도와 욕망에 기초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이것이 엘스터의 설명 방식이다. 구성의 오류는 행위자들의 이론적 오류이고 반결과성은 행위의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임금 관련 파업이라는 특정 유형의 집합행위가 왜 자본주의에서만 나타나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물론 집합행위의 주체는 개인들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이 집합행위의 유형을 결정할 수 없는 한, 그리고 집합행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면 그 유형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인 한, 그 유형에 대한 설명이 없다면 집합행위에 대한 온전한 설명이 될 수 없다. 단지 그 유형이 사회구조에 의해 결정된다고 선언하는 것에 그치는 한, 설명은 구체성을 잃어버린다. 예컨대 노예가 주인한테 집단적으로 저항하는 것과 임노동자들이 자본가들에게 집단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분명히 강자에 대한 동일한 저항 행위지만, 그 유형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행위자들의 사회적 지위나 인격적 독립의 상태, 저항의 대상, 저항의 구조적 배경 등이 모두 다르다. 이 요소들이 행위 유형이나 성격을 결정하는 한, 이 요소들에 기초해서 특정 유형의 집합행위(집단 저항)가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해야만 한다. 만일 이 과정 없이 집합행위의 유형이 사회구조에 의해 규정된다고 선언한다면, 이 요소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것들을 무시하고 어떻게 특정 유형의 집합행위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설명뿐만 아니라, 선언마저도 구체성을 결여하게 만들 것이다. 따라서 왜 특정 유형의 집합행위가 나타나는 지에 대한 설명은 필수불가결하다. 만일 엘스터가 집합행위 유형에 대한 설명 없이 집합행위를 통해 사회구조를 설명하고자 한다면, 그는 논점 절취의 오류마저 범하는 셈이다. 마땅히 설명해야 할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반쪽의 과제만 수행한 꼴이 된 셈이다. 사회구조를 통한 집합행위 설명과 집합행위를 통한 사회구조 설명이라는 두 문제가 동떨어질 수 없는 한에서, 그는 후자를 다루기 위해서는 전자를 우선 설명해야만 했다. 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집합행위에 대한 설명 없이 집합행위를 통한 구조 재생산의 문제를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엘스터의 설명을 온전하기 만들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가 설명하지 못했던 부분을 다루기 위해서는 그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만 한다. 그것은 사회구조로부터 접근하여 집합행위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의 방식은 행위자의 내적 동기와 관련해서 집합행위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행위자들의 믿음, 의도, 지성 등이 가장 주요한 설명 인자이다. 따라서 우리의 방식은 그의 그것과 정 반대이다. 물론 집합행위의 주체가 누구이며 그들이 왜 그것을 수행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집합행위가 왜 특정한 유형을 띠는가도 중요하다. 우리의 주제와 관련해서는 후자가 더 중요하다. 더욱이 캘리니코스의 지적처럼 사회구조와 행위가 본질적 연관을 갖고 있다면, 특정 유형을 띠는 집합행위에 대해서는 사회구조로부터 설명하는 방식을 수용해야만 한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구조적 접근법에 기초해서 집합행위를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라이트나 캘리니코스의 구조적 능력structural capacities 개념은 눈여겨 볼만하다. 구조적 능력은 생산관계 등의 사회구조 내에서 개인이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 규정되는 능력을 말한다. 구조적 능력은 특정한 위치에 있는 개인들이 행사하는 의식적으로 행사하는 조직적 능력과도 관련되어 있다. 라이트에 따르면 구조적 능력의 소유자는 계급이고, 조직적 능력은 계급 구성원들이 수행하는 의식적 능력이다. 따라서 구조적 능력은 대개의 경우 집합행위 형태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조적 능력 개념은, 그것이 구조적 접근법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집합행위에 대한 객관적 설명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엘스터에 대한 적절한 비판이 되기 위한 논리적 조건을 결여하고 있다. 예컨대 임노동자의 파업은 분명 구조적 능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특정한 계급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집합행위 형태로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구조적 능력의 행사는 분명 개인의 '선택'이라는 사실이다. 파업에 참여하고 안하고는 개인의 선택이다. 설령 구조적 능력을 인정한다고 해서 집합행위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들은 언제든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가지는 구조적 능력은 분명 사회구조에 의해 규정되지만, 그것의 행사가 논리적으로 볼 때는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이기 때문에, 이런 방식을 통해서는 개인들의 선택에 기초한 특정 유형의 집합행위를 설명할 수는 없다. 파업이라는 집합행위는 분명 구조적 능력 행사의 중요한 형태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파업은 개인들의 선택에 기초한 '행위' 집합이고 구조적 능력은 '가능성'이라는 사실이다. 임노동자의 구조적 능력이 파업과 같은 집합행위의 전제조건이기는 하지만, 능력과 행위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구조적 능력 개념은 사회구조 내의 특정한 사회적 지위로부터 나오는 능력 측면에서 개인들의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발생하는 집합행위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따라서 행위의 내부적 동기를 통해 집합행위를 설명하는 엘스터의 입장에 반대해서, 사회구조를 통해 집합행위를 설명하려는 캘리니코스의 시도는 성공적이지 않다.
따라서 사회구조로부터 접근하되, 캘리니코스 등과는 다른 방식으로 집합행위를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 방식은 엘스터처럼 개인들의 지성이나 욕망 등에 기초해서 설명하는 것이어서도 안 되고, 캘리니코스처럼 행위와 논리적으로 밀착되어 있지 않은 개념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어도 안 된다. 이 두 가지를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 곧 행위 유형적 접근이다. 이것은 사회구조로부터 집합행위를 설명하되, 행위와 논리적으로 밀착된 개념들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행위 주체가 아니라 행위 유형에 관심을 갖게 된다면, 행위 주체의 내적 동기가 아니라, 특정 행위 유형이 일어나는 사회구조적 배경에 초점을 맞추어야만 한다. 이 방식은 집합행위를 사회구조부터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행위 유형에 대한 객관적 설명이 가능하다. 또한 행위 유형에 대한 객관적 설명이 가능하다면, 집합행위로 인한 구조 재생산에 대해서도 객관적 설명이 가능하게 된다.
우리가 말하는 행위 유형은 사회구조와 관련해서 규정되기 때문에, 그것은 하버마스의 방식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사회구조로부터 행위 유형에 대해 접근할 경우, 행위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구조제약적structure-constrained 행위와 그렇지 않은 행위가 그것이다. 전자는 특정 구조 하에서는 반드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행위 유형을 의미하며, 후자는 그렇지 않는 행위 유형이다. 예컨대 자본주의에서 자본가와 임노동자들이 수행하는 경영(노동력 구매, 노동 과정 및 상품 판매 과정의 관리와 감독 행위 포함)과 노동이라는 집합행위는 전자에 속한다. 그에 비해 그들 간의 계급투쟁은 후자에 속한다. 캘리니코스가 말하는 구조적 능력 행사의 대표적 형태인 계급투쟁은 구조제약적 행위 유형이 아니다. 오히려 포스톤처럼 사회적 매개의 유사 객관적 형태quasi-objective form라고 말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면 왜 전자, 즉 경영과 노동이라는 집합행위는 특정한 구조 하에서는 반드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구조제약적 행위 유형인가? 이를테면 자본주의 경제구조는 그것을 유지시키는 기본 집단이라 할 수 있는 자본가와 임노동자 집단을 배제하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라고 말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정한 사회구조의 존재는 그것을 유지시키는 기본 집단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함축하며, 이들 집단 없이는 해당 사회구조가 유지, 재생산될 수 없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사실은 이들이 자본가와 임노동자로 존재한다는 것은, 각각 그들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적합한 행위를 하고 있음을 함축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특정 구조에서만 존재하게 되는 집단의 존재는 그 자체로 그들이 수행하는 특정 유형의 구조제약적 행위가 존재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개인들은 자신들의 삶을 표현하는 방식대로 존재한다. 예컨대 노예제 하에서 노예는 노예라는 사회적 지위를 지닌 채, 노예 행위를 함으로써 비로소 노예가 된다. 주인 역시 마찬가지이다. 만일 노예가 노예이기를 거부하고 주인과 투쟁한다면, 노예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주인에게 저항한다면, 그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다. 물론 노예제 하에서 노예의 선택은 현실적으로나 법적으로나 그리고 노예 자신의 정서상으로나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이러한 행위는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다르게 행위할 수 있는 개연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노예가 자신에게 강제된 행위를 거부하고 만일 죽음으로써 저항한다면, 그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며, 설령 죽는다 하더라도 노예로서 죽는 것이 아니다.

헤겔의 위대한 점은, 그가 인간의 자기산출을 과정으로서, 대상화를 '자기 바깥으로 됨'Entgegenst ndlichung으로서, 즉 외화Ent u erung로서 파악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는 노동의 본질(필자 강조)을 파악하고, 대상적 인간, 즉 현실적이기 때문에 참된 인간을 그 자신의 고유한 노동의 결과로서 포착했다는 점이다

헤겔과 맑스의 노동 개념에서 보이듯이, 개인들은 행위를 통해 대상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을 만들어간다. 만일 노예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노예로 정립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가와 임노동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구조제약적 행위 유형을 수행함으로써 비로소 한 사회의 기본집단의 일원으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할 수 있다. 따라서 특정 사회구조 하의 기본 집단은 해당 사회구조를 유지시키는 데 필수불가결한 기본 집단일 뿐만 아니라, 이들이 수행하는 구조제약적 행위는 구조 자체를 유지, 재생산한다. 일테면 자본가들의 '경영'과 임노동자들의 '임노동'이라는 집합행위 없이 자본주의는 유지, 재생산될 수 없다. 나아가 경영과 임노동은 그들 자신을 특정 사회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특정한 사회적 지위를 지닌 존재로 유지, 재생산한다. 따라서 특정 유형의 집합행위는 그것이 구조제약적 형태인 한에서, 특정 구조가 존속하는 한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수행되어야 비로소 특정 구조가 존속할 수 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그들의 구조제약적 행위는 구조제약적 상호작용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자본주의 하에서 누군가가 임노동자가 되고자 한다면, 자본가와의 상호관계에 들어가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자본가가 되고자 한다면, 그는 잠재적 임노동자와의 상호관계에 들어가야만 한다. "상품의 화폐로의 전화(화폐를 받고 노동력 판매)는 동시에 화폐의 상품으로의 전화(화폐를 통한 노동력 구매)이고, 따라서 판매와 구매는 동일"하듯이, 경영은 노동을 함축하고, 노동은 경영을 함축한다. 이들의 행위는 상호관계에서만 성립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불가분의 상호작용이다. 따라서 특정 유형의 구조제약적 집합행위는 특정 유형의 구조제약적 상호작용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런 측면에서 상호관계 혹은 개인들의 관계성을 강조한 엘스터의 입장은 적절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절대화시켜버렸다. 상호관계와 개인의 관계성이 사회구조에 의해 어떻게 규정되는 가를 고려하지 않고 이를 절대화시켜선 안 된다. 자본주의가 없다면 자본가와 임노동자 간의 상호관계와 그들의 상호작용이 가능하겠는가? 따라서 엘스터는 개인들의 관계성이나 게임 당사자간의 상호관계를 사회구조와 연관적으로, 즉 사회구조로부터 상호관계와 관계성의 특성을 규정하는 작업을 우선적으로 수행해야만 했다. 그가 말하는 상호독립적인 합리적 개인들의 게임 상황 역시 초역사적 타당성을 가질 수는 없다. 그것은 노예제 등에서는 적용될 수 없고, 단지 경제적 이익을 최우선시하고 그러한 태도를 가진 이기적인 동등한 인격의 체계인 자본주의 사회에서나 옹호될 수 있는 규범체계일 뿐이다.
엘스터가 집합행위를 개인의 선택의 측면에서 해명함으로써 거시 영역의 미시적 기초를 제공하려고 하였지만, 그의 시도는 성공적이지 않다. 무엇보다도 집합행위에 대한 그의 설명 방식이 가진 약점 때문이다. 집합행위의 문제를 다룰 때에는 행위 유형적 관점에서 우선 구조제약적인 것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 중요하다. 구조제약적 집합행위는 사회구조 유지와 재생산과 직결되어 있고, 사회구조는 여타의 사회 현상에 결정적 영향을 주기 때문에, 구조제약적 집합행위와 그렇지 않은 집합행위를 동렬에 놓을 수는 없다. 특히 특정 유형의 구조제약적 집합행위는 그것이 특정 구조가 존재하는 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형태인 한에서, 그리고 그것이 수행되어야 특정 구조가 유지, 재생산되는 한에서, 그것에 대한 설명은 구조 재생산과 관련해서 설명해야만 한다. 그러나 구조제약적이지 않은 집합행위 역시 엘스터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엘스터의 말처럼 이해관계의 형태와 내용에 사회구조에 의해 규정되고, 파업 등과 같은 집합행위가 이해관계를 추구하려는 개인들의 의도와 판단에 의해 매개되어서 나타난다면, 이런 집합행위의 양상이나 형태는 무엇에 의해 규정되겠는가? 그것은 사회구조이다. 사회구조가 다르면 개인들이 추구하려는 이해관계의 형태와 내용도 달라질 것이고, 이런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개인들의 선택에 기초한 집합행위의 유형도 결국 사회구조에 따라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집합행위의 유형은 사회구조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 파업이나 계급투쟁과 같은 집합행위는 어느 사회에서나 나타날 수는 있지만, 그 양상이나 형태가 사회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한 그것은 사회구조의 측면에서 우선 해명되어야 하고, 개인적 선택에 근거한 설명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이어야만 한다. 엘스터처럼 구조의 본질적 특징이나 규칙 혹은 법칙, 그리고 상호관계의 구조적 배경에 대한 분석 없이, 집합행위가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고 선언해놓고 모든 설명을 개인의 선택으로 돌려버린다면, 그것은 집합행위뿐만 아니라 집합행위에 의해 나타나는 거시 현상에 대한 설명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다.
따라서 구조제약적 집합행위든 그렇지 않은 집합행위든 그것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변화를 야기하는 것인 한, 그것들을 설명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회구조의 본질적 특징이나 규칙에 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하며, 그 다음으로는 상호관계의 구조적 배경에 대한 파악이 뒤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구조제약적 집합행위는 물론이고 모든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집합행위의 특성과 형태를 제대로 밝혀낼 수 없다. 엘스터가 사회구조의 힘을 아예 없애버리지 않았지만, 집합행위를 설명하는 데 있어 사회구조를 추상적으로만 처리함으로써 무력화시킨 것은 그의 치명적 약점이다. 앤더슨의 말처럼 구조와 주체(그리고 그들의 행위)는 상호의존적 범주로서 구조 자체를 무력화시키거나 사라지게 만드는 것은 분명 오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