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의식, 신체 그리고 인간에 관한 논의

나뭇잎숨결 2022. 1. 29. 09:23

의식, 신체 그리고 인간에 관한 논의
- 스트로슨의 칸트비판과 인간개념에 대한 고찰 -

김 선 하(경북대)


[한글 요약]

본고는 전체적으로 칸트의 비판철학에 대한 분석철학자인 스트로슨(P. F. Strawson)의 비판적 입장과 그의 인간(Person) 개념에 주안한다. 그리고 스트로슨의 인간개념에 대한 리쾨르의 분석과 비판을 간략하게 고찰한다. 분석철학자인 스트로슨은 칸트의 초월철학이 초재적 형이상학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칸트의 선험적 초월적 논증을 분석적 논증으로 재구성하고자 한다. 따라서 경험을 앞서 있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물자체 영역과 우리의 경험을 가능하게 하고 일련의 경험을 통일하는 초월적 자아를 배제시킨다. 대신에 인과적 자연법칙에 종속된 대상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능하게 하고 경험을 통일하는 토대는 공간적 실재인 우리의 신체가 된다. 이로써 스트로슨은 자신의 인간에 대한 이해를 정립하고 있다. 그에게 인간은 신체를 본래성으로 하는 공간적 실재로서 공적 존재이다. 그리고 리쾨르는 이러한 인간 개념을 해석학적 입장에서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스트로슨의 인간 개념은 공적 실체인 삼인칭 주어는 설명할 수 있지만, 자기의 역사성을 가진 일인칭 주어는 설명할 수 없다.


주제분야 : 칸트 철학, 분석철학, 현대철학
주 제 어 : 초월적 자아, 자기의식, 공간-시간, 신체, 인간
1. 서론 : 동기와 배경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철학사에서 끊임없는 논쟁의 장을 형성해왔다. 인간을 의식으로 보느냐, 물질로 보느냐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제 삼의 양태로 보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사조가 형성되어 왔으며 그 각각이 융합될 수 없는 이론의 담을 쌓고있음을 우리는 관찰할 수 있다. 물질에 대립된 개념으로 의식의 확실성을 주장한 데카르트가 인간을 의식으로 파악하고 있다면, 원초적인 생의 에너지인 무의식에서 삐쳐 나온 프로이트의 자아는 인간을 물질로 보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자아는 주어-술어의 언어형식에 상응하는 실체-속성으로 상정된 허구라고 주장하는 니체의 자아는 어느 쪽으로도 편승하기 힘든 자아 해체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단 하나의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논의들은 어느 시점에서 이미 종결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는 그 유구한 역사를 통해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밝혀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하나의 통일된 답을 제시할 수 없는 물음임을 확실하다. 오히려 그 질문은 답을 찾기 위한 물음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과 직결되어 있다. 또한 그 질문 뒤에는 인간이 누려야할 권리와 행복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가 내포되어 있다. 인간을 의식으로 보면서 진리를 발견했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인간을 물질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유를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철학의 목표 중의 하나가 인간의 자유와 행복이라고 한다면, 이제 인간을 어떻게 보아야 가장 행복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가에 대한 짧은 논의를 시작해보고자 한다. 그것이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하고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뿐이더라도 말이다.

이 글은 전체적으로 칸트의 비판철학에 대한 분석철학자인 스트로슨(P. F. Strawson)의 비판적 입장과 그의 인간(Person) 개념에 주안하고자 한다. 스트로슨은 칸트의 초월철학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인간에 대한 이해를 정립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모든 가능한 인식의 선험적(a priori) 원리를 탐구한다. 그것은 선험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분명히 밝혀내기 때문에 "초월 철학"(Transcendentale philosophie)이다. 칸트의 초월철학은 인식의 선험적 원리를 주관 안에서 발견한다. 그 주관의 원리에 의해 개별자를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 개념과 객관적 학문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래서 초월철학은 특수한 주관적 인식의 근원적인 원천을 들춰내고, 그로써 주관성 이론을 세우는 것 역시 과제로 갖는다. 그러나 칸트의 인식의 선험적 원리로서 주관성은 스트로슨이 보기에 형이상학적 잔영에 불과하다. 인식이 대상 사물로부터 촉발되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현상과 가상체라는 구분은 경험 관찰적 영역을 벗어난 형이상학이다. 경험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초월적 주관도 마찬가지로 스트로슨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설명이다. 자기의식에 선행하는 것으로서 종합적 통일을 수행하는 주관의 원리라는 칸트의 설명은 스트로슨에 의해 신체를 가진 인간 개념으로 대체된다. 공간과 시간 속에 위치를 가진 신체는 우리의 자기 의식을 선행한다. 이것은 데카르트의 설명과 역순이다. 물리적 신체를 가진 인간 개념은 심적 술어와 물리적 술어가 모두 귀속되는 종합적 개념이다. 이로써 정신에 치중했던 인간이해의 축이 신체로 쏠리면서 어느 정도 정신과 신체 사이에서 균형을 잡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트로슨의 인간 개념이 시간성과 역사성을 가진 인간의 자기 동일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논의가 요구된다. 리쾨르는 이러한 관점에서 스트로슨을 비판하고 있다.


2. 칸트에 대한 스트로슨의 비판

칸트는 주지하다시피, 우리가 인식하는 것 혹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에 대한 한계가 있음을 천명하고 가능한 경험의 일반적 구조를 밝히는 데 천착하였다. 그러나 칸트의 이러한 시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난점은 칸트 자신이 어떤 잘못된 추론에 의해 자신의 사유를 전개한다는 사실이라고 스트로슨은 비판한다. 분석철학자인 스트로슨에 따르면, 사물들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과 우리의 경험이 부분적으로 우리 자신의 구성에 의해, 말하자면 우리의 감각 기관과 신경계의 본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은 인과적, 과학적 관찰에서는 일반적인 사실이다. 즉, 우리 경험이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인간 지각 메커니즘의 작동은 과학적 경험적 탐구를 위한 문제이지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스트로슨의 첫 번째 비판점이다. 칸트는 물론 과학적 경험적 탐구가 비판철학의 관념들의 근본적인 구조에 대한 탐구와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각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인식의 근본 구조에 대한 탐구를 과학적 경험적 탐구와의 유추에 근거해 착안하였다고 스트로슨은 지적한다. 칸트는 경험의 한계나 필연성의 원천이 우리 자신의 인식적 구성에 놓여있다고 천명하였다. 그리고 이 원칙은 경험의 필연적 구조에 대한 지식의 가능성을 설명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칸트의 이러한 원칙은 스트로슨이 보기에 그 자체적으로 비정합적이고 그의 탐구의 본질을 설명하기보다 오히려 가리고 있다. {순수이성비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심적인 문제는 명백히 이러한 원칙에 얽혀 있는 모든 것을 풀어내는 것이라고 스트로슨은 강조한다. 그는 이 얽힌 것을 풀기 위해 {비판}의 선험적 종합적 논증을 분석적 논증을 통해 재구성하고자 한다. 그는 {비판}의 경험적 분석적 탐구는 받아들이면서, 종합적 논증은 거부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1) 칸트 인식론 비판에 대한 비판

칸트는 초재적 형이상학(transcendent metaphysics)을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역에 포함시킴으로써 자신의 작업에서 완전히 배제시킨다. 왜냐하면 그러한 철학은 한계 지워진 우리의 감각적인 경험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닌, 실재 그 자체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석철학자이면서 일상언어학파인 스트로슨의 입장에서 볼 때, 칸트의 초월적 비판 철학은 그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초재적 형이상학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감각 경험과 상관없이 관념들의 실재가 있다거나 경험과 혼합되지 않은 순수 사유에 의해 이러한 실재들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측면이 칸트에게서 발견된다는 것이 스트로슨의 또 다른 비판점이다. 칸트는 스스로 물자체와 가상체적 자아와 같은 초재적 실재를 내세움으로써 자신의 비판의 원칙을 위반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스트로슨은 보고 있다. 실제로 칸트는 경험적 지식에 본질적이고 우리가 형성하는 경험의 어떠한 정합적 개념 속에 함축되어 있는 그러한 관념들과 원칙들을 한정하는 틀에 대한 탐구를 {비판}에서 수행하고 있다. 그러한 작업은 초재적 형이상학처럼 경험과 무관한 대상의 영역에 관계하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경험적 탐구들 속에서 가정된 개념적 구조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비경험적이다. 이러한 종류의 탐구를 칸트는 종종 '초재적'(transcendent)과는 구별된 것으로 '초월적'(transcendental)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스트로슨에 따르면 칸트는 이 개념을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지 않다(BS 17).

칸트의 방법론은 전체적으로 이원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다. 즉 경험적인 측면과 개념적인 측면이다. 우리가 경험적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은 이 두 측면에 의거해 있다. 즉, 어떤 개별 항목을 우리가 의식적으로 경험하면 우리는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분류화할 수 있어야 경험적 지식이 가능하다. 말하자면, 우리는 개념 일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개별항목들을 그렇게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경험적 지식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또한 이러한 능력들이 실행될 수 있으려면, 우리는 그 능력들을 실행할 수 있는 질료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말하자면 개념 일반들의 개별적 순간들은 경험 속에서 만나져야 한다. 이와 같은 이원론적 설명은 우리 정신의 인식 능력을 설명할 때 강조된다. 칸트는 개념 일반들의 개별적인 순간들의 경험 속에서 자각에 해당하는 것을 직관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그는 감성의 수용적 능력과 개념을 만드는 지성의 능동적 능력을 구분하였다. 따라서 시간 공간 자체는 감성의 직관형식으로서 우리 속에 있는 것으로 천명되고, 우리는 그 형식을 통해 개념 아래 포섭될 수 있는 개별적인 사물들을 자각할 뿐이다. 만약 우리 경험에 있어서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이 개념 일반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시간 속에서 경험의 연속에 대한 자기 의식적 자각과 같은 어떤 것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개념 일반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은 경험 혹은 경험적 지식이 가능하기 위한 필연적인 조건이다. 그리고 이 필연성은 우리의 인식적 구성의 결과로서 드러난다(BS 19, 21). 이처럼 칸트에게서는 시·공간은 우리의 인식 능력에 할당되고 그것은 우리의 감성 속에서 작용하는 것으로 기술된다.

스트로슨의 비판적 관점에 따르면, 이러한 칸트의 설명은 자체적으로 많은 모순을 안고 있다. 칸트에 있어서, 자연적 세계는 철저히 해명된 우리의 인식구조의 특성들에 의해 조건지워진다. 그러나 스트로슨에 따르면, 우리의 경험은 본질적으로 자연법칙에 지배되는 대상들의 경험이고, 시간 공간적 세계에 대한 경험이다. 그것은 우리 인식의 구성의 결과로서의 세계와는 구별된다. 그런데 칸트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성과 지성은 구성된 존재의 경험 속에서처럼 세계가 나타나는 방식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사물들의 외관과는 다른 것으로 사물 자체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지식이든지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지식은 경험될 수 있는 것으로서만 가능하고, 경험은 우리의 감성과 지성에 의해 부과된 형식들이 주관화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이 스트로슨이 보기에 경험적 과학적 차원을 떠나는 칸트의 설명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transcendental idealism)은 모든 자연 세계가 단지 외관이라고 설명한다. 이 입장은 전통적인 경험주의적 관념론(empirical idealism)의 입장과 구별된다. 칸트가 자신의 입장과 분리시킨 경험주의적 관념론은 실재하는 것을 의식의 시간적인 연속으로 간주하고, 실재 존재 혹은 공간 속에서 우리의 존재, 즉 신체에 대한 지식을 의문시하거나 부정한다. 반면에 칸트는 자신의 초월적 관념론은 경험적 실재론이라고 말한다. 즉 존재의 실재나 확실성에 있어서, 물리적 대상들에 대하여 의식의 우위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스트로슨이 보기에 칸트가 얼마나 이러한 주장에 기초하고 있는지는 회의적이다. 칸트가 "바깥의 감각"의 물리적 대상들에 대한 지식을 직접적인 것으로 인정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의 형식은 공간이다. 그리고 심리적 상태에 대해 "내적인 감각"의 대상의 형식은 시간이다. 그리고 그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인식구조로서 우리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칸트에게 있어서, 우리의 외부지향적인 체험이 사물들 자체에 대한 지식을 산출하지 않는 것과 같이, 내부 지향적인 체험은 우리 자신 자체에 대한 지식을 우리에게 더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자연적 세계의 물질적인 성분과 정신적인 성분은 마찬가지로 단지 외관일 뿐이라는 원칙은 결국 신체와 의식의 상태에 대하여 동등한 입장을 취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말하자면, 신체를 비롯한 물질적 성분보다는 의식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스트로슨이 보기에 초월적 관념론자로서 칸트는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 것보다 더 버클리에 가깝다. 칸트는 초월적 주관주의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면서 물자체와 비슷한 가상적 자아를 상정한다. 이것은 바로 자연 세계의 경험적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지성으로 표현된다(BS 22). 이것이 스트로슨의 세 번째 비판점이다.

결국, 경험적 지식의 가능성은 칸트에 따르면, 초월적 주관주의에 의존해 있다. 자연을 만들어내는 정신의 이론을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자신이 재구성한 과학적 형이상학의 토대로 자인하였다. 경험의 본성에 대한 일종의 선험적(a priori) 지식을 우리 정신 구조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험 대상이 이 정신 구조에 맞추어져야 한다. 칸트는 유클리드 기하학, 뉴튼 물리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확신하였고, 따라서 그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물리적 공간의 구조에 대한 진리들만이 아니라 필연적 진리들의 유일한 근거가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에서 공간이 선험적으로 "우리 속에" 있다는 논증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트로슨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칸트의 설명은 선험적 초월적 차원을 경험적 과학적 차원에 유추하여 끌어낸 형이상학적 성격을 띠고 있다.

2) 칸트의 "초월적 자아"에 대한 비판

스트로슨에 따르면, 칸트의 [초월적 분석]의 근본적인 전제는 의식의 필연적인 통일이라는 테제이다(Kant B89, 90). 칸트는 이 "필연적인 통일"을 {비판}에서 "초월적 통각의 통일"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통각 혹은 의식의 통일을 또한 때때로 "자기의식"의 통일이라고 불렀다. 즉, "초월적 통각의 통일"(Kant§16)이라고 하는 것은 감성의 직관과 지성의 종합을 수행하는 주체를 의미한다. 이것이 초월적이라고 하는 까닭은 우리가 이 주체를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고 이것이 모든 경험의 필연적 조건이 되기 때문에 초월적이다. 칸트는 이 초월적 통각의 근본적인 구조를 통각의 종합적 통일(객관성 구성적 종합의 주관)과 분석적 통일(자기 반성의 주관)이라는 개념들을 통해 설명한다(Kant§15∼17). 통각의 종합적 통일이란 주어진 표상들을 종합하는 능력으로서 범주의 통일에 따라서 직관 일반의 다양에서 필연적 종합 통일, 구체적으로는 객관성을 산출한다. 이에 반해 통각의 분석적 통일은 여러 양상의 종합작용과 종합된 다양한 표상들 가운데서 근본적인 자기동일성을 사유하는 반성의 주관을 의미하며, '나는 나를 생각한다'는 명제로 표현된다. 이러한 자기의식 즉, '나는 생각한다'라는 통각의 분석적 통일은 다양한 표상을 통일하는 통각의 종합적 통일을 전제하고서만 가능하다(Kant B133). 칸트는 "통각의 필연적 통일이라는 원칙은 확실히 그 자신 동일적이요, 따라서 분석적 명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직관에 주어진 다양의 종합을 필연적인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런 종합 없이는 자기의식의 시종일관된 동일성은 생각될 수 없다"(Kant B135)라고 말한다.

칸트는 [범주의 초월적 연역](Kant§14)에서 우리의 경험 속에서 어떤 연결과 통일이 객관적이고 법칙 지배적인 세계의 경험을 구성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라고 반복해서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가 잡다한 경험 속에 적용하는 초월적 통각의 종합적 통일이 그러한 통일을 구현한다는 주장한다. 그러한 종합적 통일 아래 경험들의 법칙 지배적인 연결은 명확히 의식의 필연적인 통일을 위해 전제되고 요구된다. 특별히 자기의식의 가능성을 위해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인식을 구성하는 의식이 의식을 인식 대상으로 구성한다는 것은 순환성의 모순에 빠지기 때문이다. 스트로슨은 칸트의 이러한 설명에서 자기의식의 필연적 통일은 분석적 논증으로서 채택하지만, 종합적 통일의 측면은 자신의 설명에서 배제시킨다. 왜냐하면 그의 일관된 비판적 관점에 따라, 잡다한 표상들을 종합하고 경험에 통일을 부여하는 주체의 종합적 통일이라는 것은 경험적, 과학적 차원을 넘어서는 설명이기 때문이다.

스트로슨이 보기에, 칸트의 논점들은 결코 명백하지 않다. 칸트의 설명에 따르면, 경험들은 시간적 연관 속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자기 의식이 가능하기 위해서, 우리 경험의 배열과 독립적으로 그러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대상들의 배열 사이의 구별이 가능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대상에 대한 지식을 가지기 위해서는 일단 대상 자체의 질서가 있고, 그것을 우리의 인식구조가 받아들여 정리한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 경험의 대상은 지속하는 틀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인지되어야 한다. 그 틀은 대상들이 의식의 틀에 상관없이 대상들 자체의 공존과 연속 속에 짜여진 틀로서, 그 대상들에 대한 단지 우리 경험의 주관적인 순서를 산출하는 틀이다. 이 지속적인 틀이라는 것은 칸트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가 알 수 없는 물자체의 영역이지만, 스트로슨에 따르면 물리적 공간이다. 따라서 스트로슨은 즉각적으로 공간 속에서 대상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우리 경험에 대한 의식은 동시에 나 밖의 다른 사물들의 존재에 대한 즉각적 의식이다"(Kant B276)라고 칸트는 말하고 있다(BS 26, 27). 경험의 가능성을 위해서는 경험의 주체가 세계 속의 직관적 대상이어야 한다고 스트로슨은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 그는 공간 속에서 신체 개념을 의식에 앞선 일차적 개념으로 제안한다.

이상의 칸트의 논의를 스트로슨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만약 우리가 경험을 통해 대상을 인식할 때 그 경험이 통일된 객관적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누구도 자기의 경험을 시간 공간적으로 객관적인 것으로서 의식할 수 없다. 이점에 대해서는 스트로슨은 칸트와 그리 다르지 않다. 개인적 경험은 인식의 틀을 거치면서 객관성과 보편성을 확보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칸트는 경험에 통일을 주는 초월적 통각의 종합적 통일이 자기반성적 의식을 선행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둘째로 자기 의식을 선행하는 주관의 종합적 통일이라는 개념은 칸트식으로 주관 내재적인 개념이 아니라, 경험 속에서 실제로 사용된, 그리고 직접적으로 적용된 개념의 특성 속에서 함축적이어야 한다고 스트로슨은 주장한다. 적어도 적용된 개념들은 공간 속에서 영속적이고 재확인 가능한 대상들의 개념을 포함해야 한다. 어떠한 일련의 개념들도 그것들 스스로 이와 같은 개념을 산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단순한 감각적 성질 개념들의 경험론적 배열로서는 보편성과 객관성을 확보할 수 없다. 그리고 영속적이고 재확인가능한 대상 개념에 속하는 대상들은 일반적으로 인과적 법칙에 종속되어야 한다(BS 28). 스트로슨은 일련의 경험의 통일과 객관성을 담보하는 칸트의 초월적 주관을 경험적 과학적 차원의 공간 속에서 재확인 가능한 대상들의 개념으로 대체한다. 그러한 대상들은 과학적 인과법칙에 종속되는 대상들이다. 결국, 칸트는 자기의식이 가능하기 위해, 혹은 경험의 자기귀속이 가능하기 위해 경험이 요구되는 것처럼, 그러한 경험의 주관의 영역에서는 경험의 어떤 시간적으로 확장된 연속의 구성요소들 중에 어떤 통일이 있어야 한다는 자기의식의 필연적인 통일의 테제를 제시하였고(BS 24) 스트로슨은 이를 자신의 비판적 관점에서 분석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하고 있다. 그는 자기의식의 통일성을 의식 내부에서 찾지 않고 경험적으로 부딪힐 수 있는 공간적 실재에서 구하고자 한다.

스트로슨에 따르면, 범주의 [형이상학적 연역]은 일반적으로 경험의 개념에 대한 분석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에로 나아간다. 즉 특정한 객관성과 통일은 경험의 가능성의 필연적 조건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초월적 심리학의 상상적 주체에 관여한다. 칸트가 경험의 필연적 통일과 결합을 모든 초월적 필연성들과 마찬가지로 정신 작용의 산물로 간주했기 때문에, 경험의 필연적 통일은 주관의 능력에 기인한다. 특히, 이성에 의해 통제되는 상상력과 기억이 그러한 통일을 잡다하고 분리된 경험들에 대한 감각 자료나 인상들 속에서 산출한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을 산출하는 과정을 칸트는 "종합"이라고 불렀다. 종합이론은 초월적 심리학에서 우리가 종합의 진리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주장할 수 없다는 딜레마에 노출되어 있다. 왜냐하면 종합이라는 것은 경험적 지식의 선행하는 조건이라고 주장되는 데, 그러면서도 다시 그것의 발생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경험의 선행하는 조건으로서 종합의 발생에 대한 믿음 그리고 종합하는 과정이 질료들의 분절된 인상들을 선행해서 발생한다는 믿음은, 스트로슨이 보기에 엄밀하게 분석적인 논증이 아니며 필연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그 이론은 칸트의 설명적 모델에서 불가피하게 배제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보여준다(BS 32). 따라서 스트로슨은 경험을 넘어서 선험적 방식으로 설명되고 있는 칸트의 종합에 대한 이론은 포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종합에 대한 포기는 대답해야 할 문제를 남긴다. 즉 경험에 있어서 필연적 통일을 말할 때, 그렇게 통일된 경험항목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러한 필연적 통일은 어디에서 구성되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스트로슨은 대답한다. 즉 경험의 통일된 항목들은 바로 우리가 보고 느끼고 듣고 하는 등등의 일상적으로 이루어진 경험들이다. 두 번째로, 대상 개념의 법칙들 아래에서 이러한 경험들의 통일이라는 것은 바로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것들에 대한 일상적인 기술의 일반적인 통일과 일관성 속에서 예시된 것이다. 여기서 스트로슨은 칸트 인식론의 초월성을 경험의 실재성 영역으로 끌어내리고 기술(description)이라는 언어적 차원을 도입하고 있다.

살펴본 바와 같이, 칸트의 분석의 결론에 대한 스트로슨의 공격은 종합하는 초월적 자아이라는 원리에 집중된다. 그것은 대상 경험에 통일을 주는 원리로서, 그 자체가 순수하게 비물질적이고 비혼합적인 사유하는 대상이고 우리들 각자가 존재에 대해 알 수 있는 원리이다. 그러나 스트로슨은 만약 우리가 시간을 통해 수적인 정체성 혹은 통일 개념을 적절하게 사용하려면 우리는 그것들을 경험적 기준 아래 경험 속에서 마주친 대상에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만약 우리가 신체를 전적으로 추상화하고, 단순히 우리의 경험들 혹은 의식의 상태만을 고려한다면, 의식 상태의 영속적인 주관으로서 우리가 동일화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고 주장한다.


3. 경험의 객관성과 통일의 원리로서의 신체

칸트의 설명에 따르면, 자기 의식이 적어도 가능하기 위해서는 일련의 경험 요소들 가운데서 단일한 객관 세계의 경험들을 통일적으로 구성하는 그러한 통일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그러한 조건의 달성이 자기 의식의 가능성의 기초적 토대를 구성한다. 그러나 스트로슨은 경험의 통일성과 객관성을 위한 기준을 의식 내부에서 찾는 칸트의 방식을 거부하기 때문에 경험을 자기자신에게 실제적으로 귀속시킬 수 있는 그 이상의 조건들이 요구된다고 본다. 칸트에게 경험의 자기귀속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기에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식의 통일에 앞서서 경험에 통일을 부여하는 자기의식의 종합하는 능력을 배제하고 나면, 경험의 자기 귀속의 기준이 설명되어야할 문제로 남게 된다. 말하자면, 시간을 통해서 경험의 주체의 정체성을 경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기준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한다.

칸트는 "나는 나 자신의 존재를 시간 속에서 규정된 것으로 의식한다"고 하면서, "모든 시간적 규정은 지각 속에서 고정불변하는 것을 전제한다"고 말한다(BS 126). 그리고 "사유하는 존재는(…)그 자체 외적 감각의 대상이다(Kant B415)"라고 말한다. 스트로슨은 이러한 칸트의 논의를 통해 공간 안에 있는 신체 개념을 경험의 주체의 정체성의 기준으로 끌어온다. 말하자면, 경험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경험의 귀속성이 요구되는데, 경험의 귀속성이 객관성의 필요조건은 되나 아직 충분조건은 아니다. 이를 위해서 주체에 경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확인 기준이 요구되고 스트로슨에 따르면, 그것이 바로 공간 안에 있는 신체이다. 스트로슨에게 있어서 신체와 정신의 속성을 나타내는 술어들이 모두 귀속되는 인간(Person) 개념은 '순수 자아의식'이나 '의식 자체'에 비해 논리적으로 우선한다. 이러한 논증은 스트로슨의 공간-시간에 대한 논증에 기초하고 있다. 그의 논증은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첫째, 공간-시간 체계는 유일한 것이며 통일되어 있다. 둘째, 공간-시간 구조는 경험이나 사건의 실재성의 조건이다. 셋째, 공간-시간 구조는 개체의 동일화를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공간-시간 속에 있는 신체야말로 우리의 실재성과 동일화를 가능하게 하는 기준이 된다.

이러한 공간 안에 있는 신체에 대한 타당성을 스트로슨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최근의 혹은 기억된 경험들을 우리 자신에게 귀속시킴으로써 "나"라는 말을 사용할 때, 우리는 실제로 나라는 것을 따로 분리해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플 때, 아픈 것이 나라는 것을 아프다는 경험적 사실에서 분리해서 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나라는 것으로서 지속적이고 동일적인 주체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 지식은 정체성의 어떤 경험적 기준에 독립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나"라는 힘을 경험적 배경으로부터 추상하고자 한다. 그 경험적 기준이 되는 배경은 지속적인 주체를 지시하는 그 힘을 '나'에게 제공하고 여전히 '나'가 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경험적 기준이 되는 배경으로부터 '나'를 추상화한다면, 의식 일반만이 남게 된다. 혹은 경험의 가능성의 일반적 조건들만 남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경험의 통일을 나라는 의식일반의 통일성의 경험과 혼동한다. 그리고 또한 영혼을 지속하는 비물질적인 것으로서 착각하는 오류가 발생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착각일 뿐이라고 스트로슨은 말한다. 이것은 어떠한 경험적 의미도 유효하지 않기 때문에 단지 무의미한 이론일 뿐이다. 이러한 입장은 한편 칸트에 동조하고 한편 칸트를 거부한다. 칸트는 순수 영혼과 같은 지식에 대한 주장의 공허함을 증명하는 것이 자신의 비판 철학의 본질이라고 밝혔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당하다면, 우리의 지식은 경험의 영역을 능가할 것이 분명하고 우리가 알 수 없는 물자체의 영역으로 들어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BS 38). 그러나 경험의 통일의 근거로서 가상체적 자아를 상정한다. 이것은 스트로슨이 볼 때 이미 형이상학적 주장이다.

스트로슨에 따르면, 실제 있는 사물과 그것이 나타나는 외관으로서의 사물 사이의 대조는 자신의 입장과 칸트 입장 사이에서 구분이 없다. 즉 우리가 사물들에 의해 영향을 받음으로써 그렇게 영향을 받은 우리 존재의 결과로서 그 사물들이 인식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사물들 자체는 자각할 수 없다. 그런데 그 다음 설명에서는 확연히 달라진다. 칸트와 달리, 스트로슨의 입장은 우리에게 감각적 외관을 산출하도록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물들 자체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부정하지 않는다. 칸트의 입장은 우리에게 감각적 경험을 산출하게 하는 실제 있는 것에 대한 어떠한 경험적 지식의 가능성도 배제한다. 이러한 입장은 과학의 물리적인 대상들이 우리가 알 수 없는 물자체라는 영역에 속한다고 설명하기 때문에 스트로슨은 이것을 거부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경험을 통일하고 객관성을 담보하면서 모든 경험에 앞서 적용되는 초월적 통각의 통일이라는 가상체적 자아는 이미 경험적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이기 때문에 거부한다. 언급되었듯이, 칸트에게서 인식내용의 자기 귀속이라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므로 경험적 기준이 필요 없는 것이다. 반면, 스트로슨은 자기의식의 종합의 필연성을 제거하는 대신 시·공간적인 경험적 주체인 신체를 가진 개별자로서 인간을 경험의 자기 귀속의 기준으로 주장한다.


4. 스트로슨의 인간 개념에 대한 비판

{개별자}에서 스트로슨은 인간(Person)이라는 개념이 신체 개념과 같이 그것을 전제하지 않고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이 다른 것으로부터 유래한다고 논증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모든 개념의 기본이 되는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을 근원적 개별자(Basic particulars)라고 부른다. 인간이라는 개념은 마치 칸트식으로 말해서, 이것을 제거하고 나면 경험에 대해 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일종의 초월적 연역이다. 우리는 경험의 주체와 의식상태를 오직 근원적 개별자인 인간을 확인할 수 있을 때에만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신체를 확인하고 또 재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심리상태의 주체로서 인간을 확인할 수 있다는 설명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러한 설명은 의식이 대상을 앞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적 가설에 정반대되는 설명이다. 스트로슨에게 있어서 의식상태의 필요조건은 물리적인 동일성, 즉 신체이다. "내가 인간이라는 개념으로 의미하는 것은 특정한 유형의 존재에 관한 개념이다. 그것은 의식의 상태에 관한 속성과 물리적인 특징이나 물리적인 상황 등에 관한 속성이 모두 동일하게 특정한 단일 개별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라고 스트로슨은 말한다. 말하자면, 인간이란 개념은 물리적 속성을 나타내는 술어와 심적 속성을 나타내는 술어 모두 귀속될 수 있는 존재 개념이다. 만약 우리가 물리적인 대상인 신체를 확인할 수 없다면 물리적인 속성에 관한 어떤 존재 개념도 가질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심적 상태에 관한 개념 역시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시공간적 실재인 신체를 뺀 인간은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런데 공간-시간 구조에 의거해서 동일성을 확보한 신체개념과 인간 개념은 순환논리에 빠져있다고 윌리엄스(B. Williams)는 비판한다. 스트로슨은 우리의 개념체계 속에서 물리적 개체의 동일화가 유일한 공간-시간 구조 속에 연결되어있다고 논증하면서, 물리적 신체의 근원성은 이 구조에 의존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장소가 물질적 신체에 의해 동일화되고, 물질적 신체는 장소와 시간에 의해 동일화된다. 스트로슨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크게 방해받지 않는 듯하다. 그는 오직 사물과 장소에 대해 동일성을 귀속시키는 것을 비판하고 수정하고 확장하는 그러한 기준을 기술하는 것에 관심을 가진다.

또한 스트로슨이 말하는 기본적 개별자로서의 인간은 리쾨르(P. Ricoeur)가 보기에, 말하는 주체라기보다 오히려 말해지는 "사물들"에 가깝다. 공간-시간적 실재로서 신체를 가지고 있고, 시공간적으로 재확인 가능한 스트로슨의 인간 개념은 말하면서 자기 지시하는 화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말해지는 대상 내용 편에서 설명된다. 그 인간개념은 일인칭 주체라기 보다 삼인칭의 공적 실재에 더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어떤 형태의 내용만이 아니라 자기(self)로서 만드는 자기지시의 능력에 대해 얼마나 스트로슨의 인간 개념이 충족적인 설명을 제시하는지에 대해 리쾨르는 회의적이다. 다시 말하면 스트로슨의 전략 속에서는, 경험의 자기귀속의 중심적 주체로서 기준이 되는 기본적 개별자인 인간을 요청하고 있다. 이 기준의 토대는 물리적인 공적 공간-시간 도식에 개별자들이 속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다른 개별자들과 동일한 공간-시간 도식 속에서 인간은 즉시 중성화된다.

{개별자} 속에서는, 리쾨르에 의하면 말하는 사람이 누구라는 것에 강조점을 두지 않고, 인간들을 포함하여 말해지는 개별자라는 대상에 강조점을 둔다. 그리고 기본적 개별자로서 인간에 대한 모든 분석을 그 인간을 포함하고 있는 공간-시간 도식과 관련하여 공적 표시의 도면 위에 위치시킨다. 여기서 인간의 재동일화의 문제가 다시 제기될 수 있다. 스트로슨에 따르면 그것은 공간-시간적 표시에 의해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동일한 장소와 동일한 시간 속에 있는 존재로서 표시된다. 결국 근본적인 동일성은 공간-시간적 틀의 동일성 그 자체이다. 다른 경우들에 대해서 우리는 동일한 공간-시간의 틀을 사용한다. 이때 "동일한" 틀이라는 것은 유일하면서 반복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이러한 설명 체계에서 우리 신체는 다른 물체들과 마찬가지로 객관적인 물체로 취급된다. 따라서 인간이 세계에서 존재하는 방식으로서 자기의 양상을 가진다는 사실이 간과될 수밖에 없다.

논의를 정리하면, {개별자}에서 스트로슨의 첫째 주제는 근원적 개별자가 신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체는 우선적으로 유일한 공간-시간적 도식 속에서 위치결정의 기준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신체 개념은 동일성을 확보하는 일차적 기준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체는 우리가 동일자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동일화할 수 있고, 재동일화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정신적 사건과 의식적 차원은 인간에 주어진 어떤 술어들 가운데 일부로 전락한다. 따라서 리쾨르가 보기에 공적 실체로서 인간과 사적 실체로서 의식 사이의 이러한 분리는 해결되어야할 모순을 안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난점은 신체의 문제가 유일한 공간-시간적 도식에 단지 귀속되는 것으로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체와 신체들의 객관적 세계에 대한 관계에 의해서 전면에 부상한다는 것이다. 명시적인 자기 지시 없이, 순전히 지시적인 문제 속에서 실제로 자기 신체의 문제는 없다.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확인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 "내가 나의 신체라고 명명하는 것은 적어도 하나의 신체 곧, 물질적인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타인의 것이 아닌 나의 것이다. 따라서 나의 신체와 신체들의 객관적 세계에 대한 관계의 문제가 남아있다. 마찬가지로 신체적인 속성을 나타내는 술어들을 귀속시킬 수 있는 인간에게 심적 술어들을 귀속시킬 때, 동일한 문제가 발생한다. 심적 사건의 개념 속에서 인간이 특정한 술어들의 주체로서뿐만 아니라 언술행위 속에서 자기지시를 하는 일인칭 주체로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리쾨르에 따르면, 스트로슨의 인간 개념은 이것을 보충적으로 설명해야할 과제로 남겨두었다.


5. 결론 : 전망과 과제

칸트에 따르면, 시공간의 도식을 벗어나 그 자체적으로 있는 사물에 대한 비감각적인 지성적 직관은 그 자체의 대상을 산출하는 창조적 자각이다. 그것은 근원적 존재에게만 가능하다. 칸트는 그러한 종류의 자각을 우리는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단지 물자체의 외관인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사물들을 자각할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칸트는 초월적 관념론의 현상과 가상체라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칸트의 기본적인 논의의 구도에 대해, 스트로슨은 분석철학적 입장에서 반박한다. 그가 거부하고 있는 것은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물자체와 경험에 통일을 주는 가상체적 자아라는 경험을 넘어선 형이상학적 설명이다. 물론 칸트는 그러한 문제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지만, 스트로슨이 볼 때, 칸트는 이미 초월(transcendental)과 초재(transcendent)를 혼동하고 있다. 따라서 경험을 앞서는 칸트의 종합이라는 초월적 개념은 분석적인 절차를 거쳐 경험실재적 차원에서 다시 논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가 알 수 없는 물자체라는 영역과 자기의식에 선행하는 초월적 주관이라는 것은 인과법칙 속에서 설명되는 경험적 과학적 차원에서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신 객관적이고 유일한 공간-시간 구조와 경험의 자기귀속의 기준으로서 공간-시간적 실재인 신체가 그 자리를 대체한다. 이러한 신체는 의식의 통일을 선행한다. 그 신체를 가진 인간은 근원적인 개별자로서 다른 모든 개별자들에 존재론적으로 선행한다. 이러한 인간 개념은 물리적 술어와 심적 술어 모두가 귀속되는 종합적 개념이며 신체를 뺀 의식이나 순수 사유라는 말로서 설명될 수 없다. 그러나 공간-시간적 동일성을 확보한 삼인칭 주체인 인간 개념이 자기의 성향을 가진 존재로서 자기 지시하는 일인칭 주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문제로 남아있다고 리쾨르는 지적한다. 인간의 자기 동일성을 사물 동일성과 같이 취급할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한 문제임이 틀림없다.

현대 해석학적 사유의 흐름 가운데서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는 리쾨르는 데카르트에서 칸트에 이르는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관념화된 자아개념과 스트로슨식의 물리주의적으로 물질화된 자아개념 사이의 차이를 해석학적 방법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이러한 그의 학문 방식은 시간 분석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그는 문학이론에 힘입어 시간분석에서 객관적인 우주적 시간과 주관의 관념적 시간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한다. 즉, 시간은 이야기라는 서술구조에 의해 우주적 세계시간과 개인적 체험의 시간 사이의 간격이 좁혀진다. 인간행위의 시간성과 경험의 역사성이 이야기에 의해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시간을 역사적인 시간으로 재구성한다. 자아개념에 대한 분석에서도 맥락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리쾨르는 분석철학에서 말하는 공적 자아 개념과 현상학적 주관의 경험적 내시간적 자아 개념 사이의 간격을 해석학적 방법으로 해소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자아 개념이 본 논문의 주제가 아니기에 여기서는 더 이상 지면을 할애할 수 없지만, 리쾨르는 계속해서 물음을 던진다. 공적인 확인이 가능하고 몇 번이고 모든 지시대명사의 동일한 지시 대상이 될 수 있는 삼인칭 '그'의 내면적인 시간적 체험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스트로슨식으로 말하면, 정신물리학적 통일체로서 인간의 자기정체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물음은 지속적으로 탐구되어야할 과제로 우리에게 남아 있다.

사족으로 덧붙인다면, 만약 우리가 경험적 지식의 일반적 구조를 발견하고자 하는 칸트의 기획에서 칸트를 포기한다면, 우리는 다른 무엇을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는가를 스트로슨은 반문한다. 그리고 이 물음에 대해 스트로슨은 왜 어떤 고차원적인 원리가 적어도 여기서 필연적인 것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고 일축한다. 인간에 의해 사용된 관념은 혹은 사유의 도식들은 물론 인간의 본성, 그들의 요구와 그들의 상황을 반영한다. 사유의 도식들은 정적인 도식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회적 형태들의 발전과 과학의 진보에 동참하는 무한한 순화, 수정, 그리고 확장이 가능하다. 철학적인 반성인 개념적 자기 의식의 단계에서, 사람들은 다른 것들 가운데서 그들의 상황과 요구의 특성 속에서 다양성을 생각하고, 지성적으로 그들의 사유의 도식이 그러한 다양성에 적응되는 방법을 논의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될 수 있는 다양성이 어떤 근본적인 일반적 관념의 틀 내에서 다양성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혹은, 더 이상의 발전이 단지 어떤 일반적 토대의 전개로서 혹은 그 토대로부터 생각되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문제삼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칸트의 설명과 같은 것을 요구되지 않는다고 스트로슨은 말한다(BS 43, 44). 이러한 주장은 일상언어학파이면서 분석철학자의 논변으로 간주되기에 문제가 없지만, 우리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구석이 있다. 칸트의 인식론 비판은 인식의 구조와 한계를 규명하기 위한 작업이었고, 그것은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는 먼지 앉은 틀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칸트의 물음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질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