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니소스 신화와 의식의 철학적 의미*
외대 철학과 교수 박 희영
들어가는 말
만약에 우리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신화와 그 신을 기리는 종교 의식(Dionisia)을 현대인의 개념 체계 속에서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지닌 비상식성 내지 비합리성--그 무질서와 광기, 집단 혼음과 生食(omophagia)등--때문에, 그러한 주제가 어떻게 철학적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 자체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근세 이후부터 학문적 탐구 도구로서의 계산적 이성(ratio)에 점점 더 가치를 부여해 온 서양의 전통 철학이 19 세기 말까지 왜 디오니소스 의식에 대해 철학적인 논의나 토론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었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20 세기 초부터 그리스 철학의 발생을 단지 그 당시의 신화적 사유의 전통과의 단절을 통해 이루어진 논리적 학문적 이성의 비약적인 발전 속에서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전통적 사유의 연속이라는 문화적 맥락 속에서 찾으려는 연구가 출현하면서, 디오니소스 신화와 종교 의식은 그것이 지닌 비합리성의 극치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철학적 탐구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한 변화의 직접적인 계기는 물론 인류학과 비교 종교학의 발달 덕분이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의 사상이나 제도 등에 대한 연구를 그 당시의 문화적 조건 속에서 찾으려는 보다 종합적인 시각을 지닌 학문 정신의 발달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그리스 비극의 탄생과 연관지어 니체가 행한 인간의 디오니소스적 본성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20 세기 초에 불어닥친 과학적 이성주의에 대한 회의와 비판의 풍조와 맞물리면서, 디오니소스 신을 합리성이라는 틀에 갇혀 있는 인간의 사유를 해방시켜 주는 해방신(Theos Eleutheros)내지 정열(pathos)의 신으로서 현대인들의 개념 체계 속에 강렬하게 각인시키게 되었다. 특히 최근 들어 ‘동일성 의미 이성 중심‘을 중시하는 전통 철학에 대해, ’타자성 비의미 감성 변두리 내지 주변‘의 가치를 살려내려는 탈근대주의적 사유는 비합리성에 대한 단적 표상으로서의 디오니소스 신이 함의하고 있는 의미에 대하여 철학적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새롭게 평가할 필요성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그러나 과연 디오니소스 신은 니체가 생각하였듯이 단순히 현대인의 개념 체계 속에서 이해되는 이성에 단적으로 대립되는 파토스를 표상하는 신일 뿐인가 ? 그리스인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로고스는 과연 파토스와 서로 배타적으로 대립되는 개념인가 ?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hubris를 범하지 않고 중용을 지킴’(meden agan)을 유한자로서의 인간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격률로 여겼던 그리스인들이 어떻게 디오니소스 신화 및 의식을 인정할 수 있었는지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눈에 질서와 정상의 세계로부터 이탈하게 만드는 그러한 종교 의식은 도대체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녔던 것인가?
본 글은 디오니소스 신화 및 의식을 우선 그리스인들의 종교적 개념 체계 일반 속에서 그 성격을 살펴보고, 그것이 그리스 비극과 희극의 발생 및 발달에 그리고 철학적 사유의 전개에 끼친 영향을 밝히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러한 고찰은 소위 인간의 두 기능으로서의 이성과 감성이 인간의 삶에 그리고 철학적 사유 자체에 어떻게 작용하는 것인지를 드러내 줌으로써, 지금까지 인류가 근대 사회로 넘어 오면서 그 두 기능을 상보보다는 대립의 관계로 바라보는 시각을 고정화시킴으로써 야기시켰던 많은 문제점들을 해결할 시각을 제공해 줄 것이다.
본 론
1, 그리스인들의 종교적 사유 체계
그리스는 역사적으로 지금의 스페인에서 흑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700 여개의 크고 작은 도시 국가를 지니고 있었고, 각 도시 국가마다 서로 다른 신화와 종교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다양한 신화와 종교 의식들을 하나의 체계로 일반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시대적 조건에 따라 변화 발전되는 문화의 통시성을 고려에 넣는다면, 그 일반화는 더욱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의 종교적 사유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대인이 종교라는 시니피앙에 대해 갖고 있는 획일적 시니피에--인간을 초월해 있는 유일신 사상, 특정의 불변적 교리 및 의례 절차, 정치 및 사회 생활과 유리된 개인적 차원에서의 종교적 신앙--를 잠정적으로 괄호에 넣고, 그들이 생각하였던 개념 체계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러한 노력을 기울일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어에 왜 성스러움을 지칭하는 어군(hosios, hagios, threskeia등)은 있어도, 오늘날의 의미에서의 신앙 체계로서의 종교를 지칭하는 단어는 없는지에 대하여,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 종교는 왜 성과 속을 분리시킬 수 없을만큼 정치적 사회적 삶과 제도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신의 세계를 인간의 세계와 그렇게 가까이 있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의 신화 및 만신전의 체계는 인간중심적이고 다신주의적이었으며, 다른 어떠한 나라보다도 많고 다양하며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현상의 직접적 원인은 권력이 한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수렴되는 정치 체제를 일찍이 청산시킨 정치 사회적 조건과 광장(agora)에서 타인들의 검증을 받아야 진리로서 인정되는 철학적 조건이 그들의 종교적 개념 체계 자체를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문화적 조건 때문에 그리스의 성직자들은 인도의 브라만 계급이나 켈트족의 드뤼드 계급과 같은 세습적 성직자 계급을 형성할 수 없었고, 에집트나 바빌론의 성직자들처럼 정치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지닐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오늘날의 고급 종교에서처럼 신자들을 신념의 차원에서 구속할 수 있는 정교화된 절대적 교리나 신적 계시등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오직 신지, 예언, 지혜로써 민중들을 사로잡아야 했다. 따라서 上古期 말기의 그리스에서는 도시 국가 자체가 모든 종교 행사를 중재하고 감독하는 주체가 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국가 당국이 도전을 받을 때에는 전통적 의식(ta nomizomena)과 조상들의 관습(ta patria)에 호소하여 난국을 타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전통에 대한 강조는 경직성에 빠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보수주의와 혁신주의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대립과 긴장은 전통적인 것을 무조건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끊임없이 수정하고 새로운 것을 도입하는 방법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었다.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 그리스의 모든 종교적 의식들과 그 의식을 거행함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원인론적 (aetiological) 신화--소위 헤리슨의 용어를 빌리자면-들은 통시적으로 구신석기 시대의 특성과 청동기 철기 시대의 특성을 함께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시적으로 다른 나라의 이질적 특성들도 포괄하여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그리스 신화는 현대인들에게 올림포스 신화 체계에 치우쳐져 알려진 관계로, 언뜻 보면 그리스에는 제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가부장적 위계 질서가 잘 확립된 청동기의 신화 체계만 존재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이러한 오해는 현대인들이 중세 서양 기독교의 유일신 개념의 틀을 통해서만 그리스의 신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한 오해는 역사적으로 그리스의 신들이 지닌 인간중심주의적 성격과 방종에 가까운 자유로움을 문학 내지 예술의 상상력의 촉발제로만 여기게 만들었지, 철학적 사유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그리스 신화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그리스의 신화 체계가 각 시대의 개념 체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고, 올림포스의 신화 체계도 구신석기의 신화 체계 속에서 형성된 사유의 전통을 연면히 이어 받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전통을 인위적으로 단절시킨 유태인들의 신화 체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에만 가능하게 된다.
그리스인들의 종교적 사유의 또 다른 특성은 각각의 신격들이 특정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 기능에 따라 결정되는 신화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베르낭이 지적하고 있듯이, 그리스의 신화 체계는 개별적 신들이 지닌 고정된 기능들 내지 특성들이 단순히 합해진 전체로서의 체계가 아니라, 여러 신들의 기능들이 상황에 따라 서로 배척 또는 조화를 하며 상호 작용하는 하나의 유기체적 전체로서의 체계다. 예를 들어, 아테네 여신이 직조술내지 기술의 수호신으로 규정될 때는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와 한 짝을 이루지만, 아테네 도시 국가의 수호신으로 규정될 때는 전쟁의 신 아레스와 한 짝을 이루게 된다. 마찬가지로 보통 때는 이성을 상징하는 아폴론 신과 대립되는 디오니소스 신도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서 행해지는 신탁을 묻는 의식에서는 디오니소스 신과 한 짝을 이루게 된다.
그리스 만신전의 우두머리인 제우스가 초월적 존재로서 오직 유적 차원에서만 모든 것을 관장하는 기독교적 절대신과 다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실 제우스는 만신들의 정점에 서 있기는 하지만, 종적 차원 내지 개별자 차원에서의 존재자들에 관여하기 때문에, 그가 맡고 있는 기능들은 때로는 유한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자연의 특정 영역들을 관장하는 다른 많은 기능들은 하등 신들에게 일임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 만신전의 체계는 제우스 혼자가 아닌 모든 신들이 함께 일하는 하나의 공동 작업망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의 신들은 하나의 절대 불변적 신격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그 기능을 달리하는 다중적 신격--예를 들어, 제우스가 행복한 제우스(Zeus Olbios), 지하의 제우스(Zeus Katachtonios)등으로 불리듯이--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 체계의 작용 원리가 이렇게 기능적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외부에서 들어온 신격도 일단 그리스의 신화 체계의 그물망 속으로 들어오면, 질적인 변환을 하게 된다.
2. 디오니소스 신의 신격
그리스인들의 신화 및 종교 일반에 대해 품고 있던 개념 체계의 특성이 그러하다면,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디오니소스 신의 성격은 어떠한가 ? 일반적으로 디오니소스 신화 및 의식은 본래 다른 나라--트라키아, 크레타, 에집트 등--에서 유입된 외래의 것이고, 남성 위주의 그리스 사회에서 특이하게 여성들만이 참가하는 광기로 가득 찬 의식이며, 따라서 국가가 관장하지 않는 일종의 私的인 비밀 의식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보통의 의식과는 특이하게 다른 이 의식은 어떠한 이유에서 아테네 도시 국가에서는 융성하게 되었는가 ?
사실 디오니소스 의식은 그리스에로 유입되면서 경건함 속에서만 진행되는 다른 공식적 종교 행사와는 전혀 다른 특이성--신들린 상태에서 고함을 지르며 춤추기, 염소 가죽으로 만든 공 위에서 젊은이들이 외금발로 뛰기, 음란성을 띤 조롱, 여성이 행사를 주관하는 점 등--의 마력으로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였던 그리스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고, 더구나 그리스인들이 식후 행사로 드라마를 연출하는 제도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리스 안에서 더욱 꽃피게 된다. 그 결과 디오니소스제는 크게 두 종류--지방의 디오니소스제와 도시의 디오니소스제--로 대별되면서, 각각의 구(demes)에서 독립적으로 치루어질만큼 융성하였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곧장 디오니소스 신 자체는 그리스의 전통적 신화 체계 속에서, 중심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변두리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그 신을 기리는 디오니소스제는 어떻게 그렇게 융성할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갖게 된다. 그 이유는 브레머가 잘 지적하였듯이, 디오니소스 신이 올림포스 신들의 체계가 확립된 후 다른 문화권에서 유입된 것이 아니라, 그 체계가 형성되기 이전에 먼저 원초적 신격으로 주신의 자리에 있었지만, 이성과 질서를 존중하는 새로운 만신전에서 그 자리를 제우스-아폴론-아테네 신들에게 내어주고, 데메테르-포세이돈과 함께 변두리로 물러났기 때문이다.
사실 오르픽 종교의 창조 신화에 따르면, 디오니소스는 본래 Phanes(빛나는 자, 나타나는 자)로서 태초부터 주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디오니소스 신은 기능적 관점에서 작동하는 그리스 신화 체계의 특성상 질서와 Nomos 확립이 절실히 요구되던 시대에 그 중요성이 감소되었다가, 질서가 확립된 후에는 오히려 특정의 기간 동안 그러한 질서가 유보되는 일탈의 필요성이 느껴지는 시기에 외부에서 들어 온 디오니소스제와 다시 결합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디오니소스 신화 및 의식은 구신석기의 신화와 의식이 지니는 특성과 청동기의 신화와 의식이 지니는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것이다.
가, 디오니소스 자그레우스
우선 올림포스 신화 체계가 형성되기 이전에 발견되는 디오니소스 신의 가장 원초적인 신격은 구석기 시대의 문화적인 것과 야만적인 것의 경계선에서 자연을 경작내지 개척하는 문화 영웅, ‘사냥꾼으로서의 디오니소스’(Dionysos Zagreus)의 모습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살아 있는 동물을 산채로 잡는 사냥꾼’을 의미하는 Zagreus나 ‘살아 있는 동물을 잡기 위한 함정’을 의미하는 zagre가 ‘자연의 생명력’을 뜻하는 zoe와 ‘동물’을 뜻하는 zoon과 어원학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디오니소스의 신격의 본질을 직관하게 해준다. 사실 인간의 포획 대상이 되는 동물들은 토테미즘적 사유에 있어서, zoe 즉 신이 현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신의 현현체인 동물을 포획하는 사냥꾼 자그레우스는 그 자연의 생명력을 얻는 자이면서, 동시에 그 자연의 힘을 제어할 수 있는 자이다. 케레니가 지적하였듯이, 크레타에 최초로 나타난 사자 두 마리를 맨 손으로 꽉 잡고 있는 디오니소스 신의 모습은 야생 동물들을 길들임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세인들에게 야만적인 것으로 비난을 받는 생식도 사실은 신의 생명력이 들어 있는 동물 자체를 갈기 갈기 찢어 먹음으로써 그 신의 생명력을 자기의 것으로 동화시키려는 토테미즘적 사유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 생식은 훗날 불에 구워 먹는 요리가 발달한 후에는 레비-스트로쓰가 구분한 구운 것(le cuit)/문화(la culture)에 대비되는 날 것(le cru)/야만(le sauvage)을 상징하는 것이지, 그 이전의 단계에서는 짐승이라는 자연적 대상을 사냥이라는 노작(operatio)을 통하여 먹을 것이라는 문화적 대상으로 바꾸어 줌을 상징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비록 아테네 도시 국가로 들어오면서 여신도가 날 것을 먹는 의례상의 시늉만을 연출하는 것으로 바뀌지만, 일부 지방에서 실제로 행해졌던 생식(omophagia)도 충분히 이해되어질 수 있다.
어쨌든 디오니소스 자그레우스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신격은 첫째로 인간은 모든 생물에 들어 있는 자연력을 제어해야만 하고, 또한 제어할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둘째로 모든 생물에 현존해 있는 zoe라는 것이 인간 스스로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때(스스로를 그 세계에로 열을 때), 인간은 일종의 제 2의 안광(혜안)을 통하여 그것을 지각하고 정신적 실재로서 받아들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나, 그 해의 다이몬(Eniautos Daimon)으로서의 디오니소스
디오니소스 신의 두 번째 신격은 신석기 시대의 ‘유한한 개별자이기 때문에 죽어야 하는 슬품과 다시 부활하는 기쁨을 모두 겪는(pathetikos) 대지모 여신의 아들’ 의 모습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신격의 기원은 농경술의 발달로 인류가 한 곳에 정착 생활을 하게된 신석기 시대에 농작물의 파종 추수의 과정을 곡물을 주인공으로 의인화하여 표현한 농경 신화 속에서 찾아질 수 있다. 이 신화는 대지의 어머니(Terra Mater) 여신을 ‘만물을 낳고, 자라게 하지만 또한 그것을 죽게도 만드는 자연력’ 자체를, 아들 남신을 ‘해마다 봄에 태어났다가 겨울에 죽는 곡물내지 지상의 모든 존재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종류의 신화는 그리스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수메르의 인안나-둠무지 신화, 아카디아의 이쉬타르-탐무즈 신화, 에집트의 이시스-오시리스 신화, 아나톨리아의 키벨레-아티스 신화 등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여러 문화권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의 경우, 이러한 신석기 시대의 어머니 여신-아들 남신의 원형은 청동기 시대의 제우스 중심의 올림포스 신화 체계의 두터운 표층에 의해 덮혀져 있기 때문에, 그 심층을 투시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푸꼬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고고학적 에피스테메를 직관할 수 있는 사람은 데메테르-페르세포네, 아프로디테-에로스, 데메테르-디오니소스 신화등의 흔적 속에서 그 원형을 생생하게 바라볼 수 있다.
어머니 여신-아들 남신의 신화는 농경 신화의 원형으로서 각 문화권에 공통적으로 존재하지만, 그것을 종교 의식 속에 어떻게 구현하고 더 나아가 인간의 일상적 삶에 연결시키는가는 각 문화권마다 다르게 전개된다. 사실 에집트인들은 이 신화를 오시리스의 부활을 기리는 Sed 의식의 근거로 삼으면서, 파라오의 권력 승계의 정통성을 인정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였다. 바빌론인들은 일찍부터 이 신화의 모델을 버리고, 왕권 신수의 정통성을 과시하기에 더 적합한 모델--아들 남신 마르둑이 어머니 여신 티아마트를 살해하는 청동기 시대의 신화--을 채택하여 신년제의 근거로 삼았다. 그리스인들도 또한 이 신화적 모델을 근거로 하는 엘레우시스 비밀 의식이나 디오니소스제등을 도시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지키기 위한 정치적 이유에서 도시 국가의 의식으로 도입하고 발전시켰다. 그러나 앞서 말한 그리스의 독특한 정치적 문화적 조건은 이 의식을 집권자의 권력 승계의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들이 모두 하나의 구성원이라는 동아리 의식으로 공고히 해주고 그들에게 삶의 진리를 깨닫도록 해주는 의식으로 승화시키게 된다.
이러한 결과 속에서, 우리는 원초적 자연을 개척하는 영웅으로서의 디오니소스의 모습이 이제는 일상 생활에서의 문화적 삶을 개발하는 신의 모습으로 바뀌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일찍이 헤리슨은 그리스인들이 디오니소스제에서 경기를 통해 가장 강한 사람을 뽑아 디오니소스 신으로 분장시킨 이유를, 그가 한 해 동안 내내(eniautos) 자연력 뿐만 아니라, 도시 국가 및 개인들을 지켜 줄 힘을 지닌 수호신(Daimon)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갈파하였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더욱 중요한 점은 비록 그 해의 다이몬으로 뽑히지 못한 사람들도 그 의식에 참여하면서 자신을 디오니소스 신과 동일시 함을 통해, 한해 동안 내내 자신의 삶을 그 다이몬처럼 살아 갈 준비를 하게 만듦에 있다.
바로 이러한 근거에서, 그리스인들은 이 신화적 모델에서 아들 남신을 중시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 신화는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력 자체로서의 여신이 지닌 힘을 zoe로, 그 여신의 아들이 지닌 한시적 개체로서의 삶을 bios로 표상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zoe는 bios로서의 삶을 사는 개체를 그 개체 자신의 삶이 끝나더라도 또 다른 bios를 種的으로 영속시키게 해주는 역할을 해준다는 점에서 bios보다 더 중시될 수 있다. 그러나 인류 문화사에 최초로 인간적 지식을 정립한 민족답게 그리스인들은 인간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오직 형이상학적 유적 차원에서만 삶의 원리로 작용하는 것으로 막연히 느껴지는 zoe보다는, 구체적 삶의 차원에서 인간의 행동 하나 하나와 연관을 맺는 bios를 중시하였다. 그리스인들이 다른 개별자들과 선명하게 구별되는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강렬한 bios적 삶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그러한 삶을 체현하는 주체에 대한 표상으로서의 디오니소스 신을 중시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자기만의 강렬하고 독특한 삶이란 무엇인가 ?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자신이 속해 있는 민족의 기질, 기후 및 지정학적 조건에 따라, 삶에 대한 자세가 크게 달라짐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인생살이 자체를 苦로 보고, 생노병사의 고통을 초월하기 위하여 명상 속에서 최소한의 생명만을 유지하면서 삶의 고통을 최소화시킴에 주력하는 사람들은 zoe를 중시하고, 그 zoe가 내세에서도 지속되기를 바라게 된다. 반면에 인생살이를 고통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만의 유일한 경험으로 간주하며 즐기는 사람은 온갖 새로운 모험과 경험을 다 해 보고자 현세에서의 bios적 삶을 중시하게 된다. 케레니가 이야기하였듯이, 그리스인에게 있어 경험이 없는 존재, 경험의 중지는 더 이상 삶이 아닌 것이다.
다, 가면 그리고 드라마의 신으로서의 디오니소스
디오니소스의 세번째 신격은 종교 의식 속에서 쓰는 가면의 신, 그리고 드라마의 신이라는 모습 속에서 나타난다. 무릇 가면을 씀은 그 가면을 쓴 사람으로 하여금 가면의 모습에 자신을 합일시킴, 즉 그 가면이 지닌 속성을 자기 것으로 내재화시킴을 통해 현재의 나를 새로운 미래의 나에로 바꿔 줌을 의미한다.
물론 가면을 쓰게 됨의 역사적 기원이 그리스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통시적 관점에서 이미 기원 전 15,000년 전에 프랑스 라스꼬 동굴의 벽화에서 사슴의 탈을 쓴 동물 샤만의 모습을 볼 수 있고, 공시적으로는 전 세계의 모든 문화권 속에서 고대인들이 가면을 썼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특별히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신을 가면의 신의 대표격으로 규정함은 그리스인들이 종교 의식에서 신의 가면을 씀을 통해 그 신적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고, 더구나 디오니소스제의 Dithyrambos가 발전하여 나타난 그리스 비극 및 희극 경연 대회에서 배우들이 가면을 씀을 통해 극중 인물의 성격을 표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종교 의식은 일찍이 엘리아데가 이야기하였듯이, 현실적 물리적 시공 속의 일상적 존재를 벗어나(ek) 신화적 시공 속으로 들어가 진정한 존재를 발견하게 만들어 주는 특별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의식들은 사회학적으로는 한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동질성을 부여해 주는 계기가 되고(통과 의례로서의 성인식등), 심리학적으로는 다른 차원의 신비(Mysterium)의 세계로 들어가게 해주는 계기가 되지만(입문식), 철학적으로는 정신적으로 새로 태어나게 해주는 깨달음의 계기가 된다.
이 때, 그 다른 세계에로 들어감의 도구 역할을 해주는 것이 가면(prosopon)이다. 가면은 자신의 눈(opon) 즉 얼굴에 직접 갖다 대고(pros) 쓰는 것이기 때문에, 일단 가면을 쓴 사람은 자신의 대자적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하고, 그 모습에 즉자적으로 동화된다. 따라서 디오니소스제에서 디오니소스 신의 가면을 쓴 그리스인들은 신을 인간이 넘을 수 없는 심연 저 편에 존재하는 초월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대화하며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친구와 같은 존재로 만나고 느끼는 체험을 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신과의 합일감은 모든 존재자(bios)들을 근원적 생명력(zoe)내지 신의 개별적 현현체라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에 인간과 동물 식물 신이 아무런 구별없이 서로 교통하는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만큼 존재론적으로 지평이 열린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다. 디오니소스는 바로 이 서로 교통하는 세계에로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하는 신이라 할 수 있다.
종교 의식이 이러한 우주론적 차원에서 모든 존재자들이 서로 교감하는 세계에로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한다면, 그리스의 드라마는 인간의 삶 차원에서 평범한 인간이 일상 생활에서 실천하지 못하는 행위를 가능케 해주는 영웅들의 이상적 행동의 세계에로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한다. 사실 극장에서 드라마를 관람하는 그리스인들은 영웅의 가면을 쓰고, 일상인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비극적 고통을 이겨내는 극중 주인공들의 행위를 보면서, 현실적 제약 조건들에 지나치게 쉽게 타협해 버리는 자신의 모습을 대자적으로 반성하게 되고, 자기만은 그 극중 인물처럼 현실에 굴하지 않는 이상적인 행위를 하겠다는 각오를 하게 된다. 즉 그들은 자신을 극중의 주인공과 동일시하는 체험을 통해, 자신이 마치 유리피데스 비극 작품의 주인공처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 어려움을 회피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정면으로 맞닥드려 극복해 내는 행위를 실천하겠다는 의지와 신념을 지니게 된다.
3. 가면을 벗김과 자아에 대한 내면적 탐구
우리는 지금까지 살펴 본 디오니소스 신격의 세 모습 속에서 그것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공통적인 특성을 발견해 낼 수 있다. 즉 우리는 자연적인 것을 문화적인 것으로 바꾸어 주는 디오니소스 자그레우스, zoe라는 생명력을 일상 생활의 삶과 제도 속에 구현시키는 Eniautos Daimon으로서의 디오니소스, 가면과 드라마의 신으로서의 디오니소스의 모습들 속에서, 특정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에로 초월하게 해주는 생명력 내지 욕구를 지닌 디오니소스 신의 철학적 특성이 관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생명력은 디오니소스가 벼락을 맞아 죽은 어머니 세멜레의 몸에서 꺼내져 아버지 제우스의 넓적 다리에서 다시 태어남을, 또는 티탄의 죽은 재에서 다시 부활(palingenesis)함을 묘사하고 있는 신화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즉 그것은 죽음의 세계를 뛰어 넘어 삶의 세계로 들어오는 힘 자체인 것이다.
그런데 죽음의 세계를 건너 뛴 이러한 힘은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에로 초월하는 힘 일반의 원천이 된다. 만약에 인간이 역사 속에서 감각적으로 자명하고 경험할 수 있는 세계, 보이는 세계, 현실의 세계, 모든 것의 자기 동일성이 확연히 구별되는 정상적 질서의 세계에만 갇혀서, 경험할 수 없는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 이상적 관념의 세계, 모든 것이 해체되어 자기 동일성을 상실하는 미구분의 무질서의 세계에로 들어가 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인류는 실용적 기술과 지혜는 어느 정도 발달시킬 수 있었겠지만 적어도 정신 문화는 오늘날만큼 발달시키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특정의 기간 동안에 다른 세계에로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옴, 또는 가면을 썼다가 다시 벗음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과연 디오니소스제 같은 종교 의식을 통해 현실 세계에서 다른 세계에로 들어가기만 하면, 또는 신들린 상태에 빠지기만 하면, 지혜롭고 참다운 존재(Ekstasis)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또한 그리스 비극이나 희극을 관람하기만 하면, 저절로 영웅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는가 ?
참다운 존재가 됨, 또는 내면 세계의 승리자인 비극적 영웅이 됨은 사실 그 특정의 기간에 단순히 그러한 행사에 참여함을 통해서만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일상 생활 속에서도 계속하여 철학적인 내적 성찰을 기울여야만 비로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내적 성찰은 우리가 가면을 벗고 난 후에, 그 가면의 모습은 무엇이었는지를 되돌아보는 가운데, 그 가면의 어떠한 속성에 자신을 동화시켜야 되는지에 대한 탐구 즉 그 가면의 속성에 대한 벗겨냄 또는 들추어 내는 작업 자체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가면 들추어내기는 정적으로 고정된 모습으로서의 가면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가야 하는 역동적인 모습의 가면이기 때문에, 내면적 자아에 대한 탐구내지 인식의 작업이다. 이러한 내면의 탐구를 우리는, 앤더슨이 주장하였듯이, 자아 발견, 자기 창조의 도구라는 의미에서의 플라톤적 대화술내지 변증술(dialektike)과 동일시 할 수 있다.
결 론: 디오니소스 신화와 의식의 현대적 의미
지금까지 우리는 디오니소스의 신화 및 의식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그리스인들의 종교적 개념 체계 일반은 무엇이고, 디오니소스 신의 지닌 세 가지 신격과 그 철학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2,500여년 전에 그리스인들이 발달시켰던 그 종교 의식에 대한 고찰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던져 주는가?
그러한 고찰은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관습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가져온 종교나 인생관에 대하여, 지금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에서 되돌아 볼 것을 요구한다. 사실 현대의 종교인들은 고급 종교라는 허울 속에서 신에 대한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지식과 습관화된 종교 의식 속에 빠져, 진정한 자의식에 근거한 ‘삶의 방식에 대한 새로운 선택’이라는 의미에서의 종교(religio), 즉 성스러움에 대한 느낌을 실생활의 경건함과 연결시켜 줄 종교의 본질적 요소를 망각하고 있다. 오늘날의 신자들이 지나치게 자신의 행복과 구제만을 기원하는 개인주의적 경향이나, 성스러운 시공 안에서는 독실한 신자이면서도, 일상의 시공 속에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부정을 저지를 정도로 성과 속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함의 기원도 바로 이러한 망각 속에 들어 있다.
결국 디오니소스 신화와 종교 의식이 지니는 의미에 대한 우리의 고찰은 오늘날 습관화된 종교, 타성적 인생살이의 졸음을 조는 현대인의 어깨를 심하게 쳐줄 죽비와 같다. 물론 죽비를 맞았다고 모든 사람이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깨달음의 세계 속으로의 입문은 비달 나께가 있듯이, 실존적 영역의 존재론적 전이(mutation ontologique)라고 할 수 있는바, 그러한 전이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갈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자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다. 사실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아직 잠들어 있는 자가 어떻게 현실 세계의 졸음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Eleutheros) 디오니소스를 따라, physis/nomos, 선/악, 인간/ 비인간, 현실/ 몽상의 구분을 뛰어 넘어, 심지어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구분을 뛰어 넘어, 그러한 대립항들을 하나의 단일성 속에서 감싸 안아버리는 저 열려 있는 공간으로 초월할 수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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