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하버마스의 '합리성이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

나뭇잎숨결 2022. 1. 19. 18:46

하버마스의 '합리성이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

- 개념분석적 전략과 사회이론적 전략의 상충을 중심으로


선 우 현 서울대 철학


I.머리말

인간해방과 자유왕국의 실현을 내걸고 추진된 계몽의 기획은 현재의 시점에서 그리 성공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비록 근대화의 중심부에 위치했던 서구사회가 이론적 합리성에 토대를 두고 발전해온 과학·기술의 눈부신 성과에 힘입어 그 어느 때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향유하고 있지만, 그같은 풍요의 이면에는 수많은 근대화의 병리가 자리잡고 있다. 비인간화한 소외된 삶의 확산과 전지구적인 생태학적 위기의 증대 등이 그것이다. 이는 무지의 상태를 벗어난, 성숙된 자율적 인간의 추구라는 계몽의 이념과 배치되는 것이다. 계몽의 이념에 기초한 근대화의 과업은 이처럼 새로운 억압체계에 인간을 감금함으로써, 진보와 발전이 아닌 역사의 퇴행을 초래하였으며 자유의 실현 대신에 비인격적인 경제적 힘의 지배, 관료적으로 조직된 행정의 지배를 야기했을 뿐이다.

계몽과 근대화의 성과에 대해 이렇듯 회의적 시각이 주류를 이루는 현재의 시점에서 하버마스의 사회비판이론은 두가지 점에서 주목된다. 첫째 근대화의 과정에서 드러난 숱한 부작용과 역설적 결과에 대해 비관적 관점에서 체념적으로 이를 받아들이는 베버를 위시한 선대의 사상가들과는 달리, 하버마스는 보다 희망적인 입장에서 근대화의 역설을 해명하고 그것에 대한 치유적 극복책을 제시코자 한다는 점이다. 둘째 이성과 계몽에 대한 회의적 관점에서 더 나아가, 이성 자체의 폐기를 주창하는 일단의 비이성주의적 입장에 대해, 하버마스는 이성과 그것의 능력에 대한 신뢰에 바탕한 계몽의 기획이 여전히 달성될 수 있다는 '이성주의적 입장'을 굳건히 견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하버마스의 철학적 조망은 합리성 개념의 의미론적 확장과 포괄적 합리성의 정초, 그리고 목적/의사소통합리성의 범주적 구분에 기초해 제시된 이단계 사회이론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와 관련해 이 글의 일차적 목표는 합리성의 복수적 공존에 의거하여 정초된 포괄적 합리성을 비판의 척도로 삼아, 근대화의 병리와 역설을 해명하고 나아가 치유적 처방책을 제시하려는 '합리성이론'의 기획에 대해 그것의 성과와 한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데 있다. 이러한 검토의 작업은 합리성 개념에 대한 형식적 분석을 통해 도출된 다양한 합리성 형태의 공존과 조화에 기초하여, 도구적 합리성의 횡포를 합리성의 도구적 축소화로 규정, 규범적 차원에서 비판을 제기하려는 '개념분석적 전략'과 합리성 유형의 범주적 구분을 사회진화론적 지평으로 확장하여 체계/생활세계의 이원적 구조틀을 통해, 근대화의 병리를 의사소통합리성의 목적합리적 왜곡화로 설명하려는 '사회이론적 전략'에 대한 고찰을 중심으로, 특히 두 전략간의 이론적 상충에 주목하면서 이루어질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고찰을 통해 합리성이론의 개괄적인 면모를 검토해 보고자 하는바, 개념분석적 전략과 관련하여 합리성이론의 보편화용론적/행위론적 측면을 살펴보고, '이단계 사회이론'을 축으로 하는 사회진화론적 측면은 사회이론적 전략과 관련지어 다루어 볼 것이다. 아울러 하버마스의 합리성이론에 기본적 틀을 제공하는 베버의 합리성이론이 갖는 철학적 공과를 검토하고 그것이 하버마스의 이론틀 내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재구성되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어 하버마스의 합리성이론이 갖는 철학적 의의를 개괄한 후, 그의 이론이 갖는 난점과 한계를 대략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끝으로 하버마스의 합리성이론에서 개진된 두 전략 사이의 상충에 대해 간단히 조망해 볼 것이다.


II. 하버마스 합리성이론의 철학적 의도

하버마스는 그동안 서구사회에서 통용되온 합리성 개념이 극도로 일면화되어 협애하게 사용된 점, 특히 과학기술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이론적 차원에 합리성을 국한시켜온 점에 주목한다. 더우기 도구적으로 협소화된 합리성의 횡포야말로 합리성의 일면화가 갖는 심각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경험적 사례이다. 하버마스는 이를 다양한 합리성 개념의 조화와 균형을 통해 벗어나고자 하며, 그 결과 새로운 비판사회이론의 기획을, 행위의 주·객관 모델을 지향하는 의식철학의 개념틀이 아닌 언어철학의 개념틀을 통해 새롭게 해석하고자 시도한다. 이같은 시도의 배후에는 합리성 유형의 다양성에 토대해 정립된 포괄적 합리성을 본래적 합리성의 형태로 제시함으로써, 그것을 일면적 합리성의 폐단에 대한 비판의 규범적 척도로 삼고자 하는 의도가 놓여져 있다(AWD,169-170).

합리성의 도구적 협소화에 대한 하버마스의 비판은 무엇보다 '실증주의'에 대한 공격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호르크하이머에 의해 '이성의 부식'으로 명명된 실증주의의 폐해는 무엇보다 인간의 이성에서 가치합리적 측면을 배제함으로써 인간의 이성을, 목적달성을 위해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선택함에 있어 계산만을 수행하는 이성으로 변질시킨다는 점이다. 이점에서 비판이론 일세대의 노선을 따르고 있는 하버마스는 이른바 '객관성'의 이름 하에(EI,322) 자행된 몰가치적이며 익명적인 실증주의적 사고방식의 횡포를 규탄한다(EI,326). 요컨대 실증주의적 사유방식은 과학기술주의를 확산시키고 그것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위해 의사소통적 실천의 영역을 기술관료적으로 관리·조종함으로써 기술적 합리성의 요구에 의사소통의 영역을 종속시킨다는 것이다(TWI,83-84).

합리성의 도구적 축소화에 대한 하버마스의 비판 전략은 기술적·도구적 합리성에 대해 무비판적 긍정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해방의 수단으로 이해한 마르크스의 입장과 합리화의 역설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인 베버의 비관적 전망, 아울러 이성에 대해 급진적 부정으로 선회한 비판이론 일세대의 입장을 모두 겨냥한 것이다. 베버는 다양한 합리성 개념을 제시하고도 사회현상을 오직 목적합리성의 일면적 차원에서 해명함으로써,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선택적 특성을 간파할 수 없는 비관적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의 추종자인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인간 이성이 도구적 이성으로 변질되는 사태를 제대로 적시했지만, 그러한 사태를 벗어날 수 있는 적극적인 극복안의 제시로 이르지 못하고 이성의 전면적인 부정으로 선회함으로써, 목표상실의 체념적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마르크스의 경우, 자본주의사회의 소외와 물상화는 그것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목적합리성에 기반한 생산력의 발달에 따라, 그에 부합하는 새로운 생산관계의 정립과 조정을 통해 지양될 수 있다고 전망한다. 하지만 이같은 관점은 의사소통합리성에 기초한 생산관계의 측면(상호작용)과 목적합리성에 토대한 생산력(노동)의 차원이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놓여있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것으로(EI,58), 생산관계를 생산력에로 환원하는 오류 즉 의사소통행위를 도구적 행위로 환원하는 잘못을 범한 것이다(RHM,35). 이는 마르크스 또한 합리성의 도구적 일면화에 봉착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고전적 사회이론들은 목적합리성의 일면화에 매몰되어 포괄적 합리성의 지평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까닭에, 소외를 비롯한 사회적 병리에 대해 체계적인 해명은 물론 그것의 치유책을 제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를 간파한 하버마스는 합리성의 복수성에로 회귀코자 하며, 그로부터 근대화의 왜곡을 인식적 합리성이 다른 두 합리성 측면을 점진적으로 배제한 결과로서 바라볼 수 있는 준거점을 확보코자 한다.


III.개념분석적 전략: 합리성 측면의 확장과 포괄적 합리성 개념의 정초


1.합리성개념의 의미론적 확장

'합리화의 변증법'이라 불리우는 근대화의 이중적 사태(DNU,178-194)에 직면하여 그것의 근본적 원인에 대한 해명과 동시에 그러한 사태로부터의 탈출구의 제시라는 자신의 이론적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 하버마스는 다양한 합리성 유형에 대한 탐구를 시도한다. 곧 이론적 차원에 국한된 협애한 의미의 합리성의 한계를 벗어나 합리성에 관한 개념적 정의를 확대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이리하여 하버마스는 '비판가능성'(Kritisierbarkeit)과 '근거지움의 가능성'(Begründungsfä- higkeit)을 합리성의 중심적인 전제로 간주하면서도(TkH1,36), 기술적 지식의 사용과 관련지어 정의된 좁은 의미의 합리성 개념으로부터 벗어나(TkH1,27) 보다 확장된 의미의 합리성 개념을 규정하고자 한다. 우선 하버마스는 '합리적'이란 서술어구를 온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경우를 '상징적 표명'(symbolische Äußer- ung)뿐 아니라 '개인'의 차원까지 확대한다(TkH1,25-26). 즉 명제의 구조를 갖는 언명의 형태 외에 개인의 행위에 대해서도 합리적이란 어구가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 내의 사태와 관련된 지식의 언명과 어떠한 결과를 산출하고자 의도된 개인의 행위에 관해, 전자에 대해선 で진리と, 후자에 대해선 で효력と에 관한 전망을 요구하게 된다(TkH1,26). 따라서 표명 뿐 아니라 개인의 의도도 그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런 한에서 언어적 혹은 비언어적 표명의 합리성은 비판 가능성과 근거지움의 가능성에로 귀결된다. 이렇듯 이론적 차원의 합리성도 분화되어, 명제적 지식이 의사소통적으로 사용될 경우는 '의사소통합리성'으로, 비명제적 지식이 행위의 차원에서 사용될 경우 '인식적-도구적 합리성'으로 구분된다(TkH1,28). 물론 전자는 의사소통합리성의 인식적 합리성의 측면이 강조되어 부각된 경우이다.

인식적 합리성에 대한 해명에 이어, 하버마스는 비록 진리나 결과에의 요구와는 관련이 없지만 훌륭한 근거를 지니고 있는 다른 종류의 표명형태를 제기하면서(TkH1,34) 합리성의 또다른 측면을 설명하고자 한다. 확언적 언어행위(konsta- tive Sprechhandlungen)와 유사한 방식으로, 규범규제적 행위(normenregulierte Handlungen)와 표현적 자기진술(expressive Selbstdarstellungen) 등도 의미있고 이해가능하며 비판가능한 타당성 요구(Geltungsanspruch)와 연결된 표명의 특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사실'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규범' 혹은 '체험'과 연관된 것으로, 규범규제적 행위자의 경우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규범적 맥락과 관련지어 자신의 행위를 올바른 것으로 주장한다(TkH1,35). 요컨대 명제적 진리와 효력에 관한 주장과 연관된 행위와 마찬가지로, '규범적 정당성' 또는 '주관적 진실성'에 관한 타당성요구와 관련된 표명도 합리성이 지니는 주된 전제를 충족시키고 있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주장이다.(TkH1,35-36). 이렇게 해서 합리성의 차원은 단순히 지식과 관련된 명제의 형식에서 벗어나 보다 확장된 행위의 지평에서 논해진다. 그 결과 합리성의 작동영역은 명제적 지식을 다루는 이론적-인식적 차원 이외에, 도덕적-실천적 영역, 미학적-표현적 영역 그리고 자기성찰의 차원에로까지 확대된다.

합리성 차원에 대한 분석을 통해 세가지 합리성 형태를 이끌어낸 하버마스는 근대화의 도정에서 야기된 물화와 소외의 주된 원인이 바로 포괄적 합리성의 인식적-도구적 합리성에로의 축소에 있음을 지적한다. 곧 포괄적 합리성의 세 측면중 인식적 합리성이 나머지 도덕적, 심미적 합리성 측면을 배제하면서 지배적인 것으로 전면에 나섬에 따라, 포괄적 합리성이 탈가치적·도구적인 것으로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버마스는 축소된 합리성을 본래의 다양한 합리성 차원의 공존으로 회복할 것을 치유적 과제로 제안한다. 이는 세가지 합리성 측면의 균형과 조화로 이루어진 포괄적 합리성인 '의사소통합리성'의 정초화 전략으로 구체화된다. 이를 위해 하버마스는 우선 베버의 합리성이론을 검토하며 그로부터 포괄적 합리성의 원형에 대한 단초를 이끌어낸다.


2.베버의 합리성이론

2-1.실천적 합리성: 복합적 합리성개념

베버는 근대화의 세계사적 과정을 점진적인 합리화의 과정으로 해석한다. '합리화'란 합리성의 증가를 의미하며 그런 한에서 베버는 계몽주의의 계승자이다. 왜냐하면 계몽주의의 전통에서 역사는 이성을 향한 진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성을 향한 진보의 내용이 모호하게 비쳐지는 것은, 베버의 논의 속에 등장하는 합리성의 의미가 단순하지 않으며 복잡성으로 뭉친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베버의 이론틀 내에는 다양한 의미의 합리성 개념이 공존하며, 비록 완결된 형태는 아니지만 포괄적 합리성 개념의 원형이 제시되고 있다. 곧 형식적 합리성과 실질적 합리성(materiale Rationalität)을 포괄하는 복합개념인 '실천적 합리성'(praktische Rationalität)이 바로 그것이다(TkH1,239). 목적합리적 행위의 조건에는 가치에 따라 선택된 목적을 설정할 때 드러나는 '선택의 합리성'과 설정된 목적의 달성을 위한 효율적인 수단의 사용에서 나타나는 '도구적 합리성'이 존재하는 바, 두 측면을 묶어 '형식적 합리성'이라 부르고 있다(TkH1,242-243). 한편 행위자가 자신의 선호를 근거짓거나 가치를 지향하는 방식의 경우에도, 행위자가 이를 합리적으로 다룰 수 있는데 여기서 드러나는 합리성의 측면이 '실질적 합리성'이다(TkH1,243-244). 이러한 두 합리성은 서로 대립되는 개념으로 형식적 합리성의 관점에서 볼 때, 실질적 합리성은 비합리적인 것이다. 아울러 두 합리성의 상충은 자본주의 하의 모든 사회문제의 근원인데, 그것은 근대 경제질서의 형식적 합리성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제도적 기반 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형식적 합리성과 실질적 합리성을 포함하는 베버의 포괄적 합리성 개념인 실천적 합리성은 수단의 사용, 목적의 설정, 가치에의 정향이라는 세 관점에서 다루어진다. 곧 행위의 '도구적 합리성'은 주어진 목적을 위한 수단의 적용에 관한 효과적인 계획에 의해 측정되며, 행위의 '선택 합리성'은 정확히 파악된 가치들, 이용가능한 수단들 그리고 한계조건에 의거해 목적을 계산하는 정확성에 의해 측정된다. 또한 행위의 '규범적 합리성'은 행위기호의 근저에 놓여있는 원리와 가치기준을 통일·조직하는 힘과 통찰력에 의해 측정된다(TkH1,244-245). 이리하여 수단, 목표, 부수적 결과를 고려할 때 의거하는 형식적 합리성에 따르는 행위를 '목적합리적'인 것으로, 결과와 무관하게 무조적적 가치를 추구할 때 드러나는 합리성을 만족시키는 행위를 '가치합리적'인 것으로 구분하고 있다.

행위이론적 차원의 합리성 유형이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 적용될 경우, 형식합리성은 특히 근대 자본주의의 경제제도와 관료적 행정제도에서 명시적으로 구현되고 있다. 반면 실질적 합리성은 평등과 박애와 같은 궁극적 가치와 연관되어 드러나는 가치관련적 합리성으로,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의 척도로 제시되는 실천적 합리성을 구성하는 핵심인 규범적 차원의 합리성이다.


2-2.베버의 합리성이론의 이론적 한계

(1)의미상실의 테제: 가치상대주의적 상황인식

'탈주술화'(Entzauberung)의 보편적·역사적 발전에 관한 문제는 베버가 다루고자 한 실질적인 문제였다. 그런 한에서 고대의 신화적 세계이해에서 근대적 세계이해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계종교들의 합리화 과정은 '변신론'이라는 동일한 문제에서 출발해, 주술적 표상에서 탈주술적으로 정화된 세계이해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파악된다(TkH1,273-274). 이러한 진보의 과정과 더불어 프로테스탄트 윤리, 문화적 가치영역의 분화, 탈관습적 근대법이 출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베버는 과학, 도덕, 예술의 세부분으로 나누어진 가치영역의 분화를 발전적인 측면의 성과로 받아들이기 보다, 오히려 다양한 가치영역들을 통일하는 통합적 매체의 상실이라는 비관적 입장에서 바라본다. 즉 베버는 가치영역의 근대적 분리로 인해, 그 이전까지의 기독교적 신 혹은 총체적 이성에 의해 성취되었던 가치영역의 통일, 곧 생활세계의 통일이 붕괴된 것으로 파악한다(TkH1, 335). 그 결과 각기 자율적 독립성을 내세우는 가치영역들은 서로간에 결코 통합될 수 없는 이질적인 타당성 주장들을 제기하게 되는 바, 베버는 이러한 사태를 개별적 가치영역을 주관하는 신들 사이의 처절한 투쟁, 곧 '새로운 다신주의'에로의 회귀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비유적 표현을 통해 베버가 지적하는 '의미상실'(Sinnverlust)의 테제란, 총체적 이성이 분화된 가치영역의 다수성 내에서 분열됨에 따라, 이성 자신의 보편성이 파기되었음을 의미한다. 진·선·미로 분화된 개별적 가치영역 내에서만 작동되는 부분적 이성들 곧 이론적, 실천적, 미학적 이성의 출현으로 결과된 '이성의 분열'은, 더이상 보편 타당성의 추구를 불가능하게 했으며, 제한된 영역 안에서만 인정되는 상대적인 진리들의 공존을 초래한 것으로 파악한다. 여기서 베버의 가치상대주의적 상황인식이 드러난다.

이같은 베버의 상대주의적 입장은 문화적으로 계승된 특정한 가치내용과 보편적 가치척도를 분명하게 구별하지 않은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TkH1,340-341). 베버는 분화된 가치영역의 내용적 상이성을 곧바로 구조적 혹은 형식적 차원의 상이성으로 귀결지움으로써, 개별적인 가치영역에서 비록 주제화되는 대상의 내용은 다르지만 그 영역 안에 놓여있는 형식적 구조의 차원에서 보편 타당성이 확보될 수 있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TkH1,339-340). 요컨대 독자적인 합리화가 가능한 가치영역의 다수성에도 불구하고, 타당성 요구에 대한 논쟁적 해결의 형식으로 인해, 합리성의 통일이 보장될 수 있음을 베버는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2)자유상실의 테제: 합리화의 역설의 체념적 수용

자본주의의 성립에 있어 중요한 '문화적 가치영역의 분화'와 자본주의사회 발전의 특징을 형성하는 '목적합리적 행위의 하부체계의 점증하는 자율성'이야말로, 베버가 당시의 시대에 관한 실존적·개인주의적 비판과 연결짓는 두가지 주된 경향이다(TkH1,333). 특히 두번째 경향 곧 '자유상실'과 관련하여 베버는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고 확장시켜주리라 예견되던 근대법의 합리화와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자본주의 사회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고 구속하는 역리적 사태를 야기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다. 특히 '근대법의 합리화'는 경제와 행정의 효율성을 위해 고안된 관료제의 법률적 조직과 연결되면서 인간의 자유를 옭아매는 족쇄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관료적 지배형태는 개인을 자신의 주인이 아닌 억압과 예속의 새로운 지배체제 속에 감금된 존재로 변질시킴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소외된 삶을 초래하였다. 관료제로 인한 삶의 기계화와 비인간화는 역설적이게도 그것의 존재이유를 법적 형식화와 민주화에 힘입고 있는 것이다.

베버는 자본주의의 출현과 성립을 형식적 합리성과 그것에 기초한 목적합리적 행위의 제도화란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아울러 그같은 관점에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근대법의 역할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것들의 도움을 받아 목적합리적 행위가 경제와 국가 내에서 제도화되는 과정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로인해 베버는 탈관습적 근대법과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전적으로 자본주의의 확립에 기여한 측면만을 고려의 대상으로 삼아 탐구함으로써, 그것들 안에 내재된 가치합리성의 차원을 사상시키고 오직 목적합리성의 견지에서 그것을 파악하게 된다. 그 결과 사회적 합리화의 진행과 함께 실제로 이루어진 '가치합리성의 제도화'에 관한 일체의 탐구 조망을 확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TkH1,353). 이처럼 베버는 일면적으로 축소된 선택적 합리성의 관점에서 법률의 합리화를 논구함으로써, 불가피하게 억압과 예속의 감옥이라는 부정적 결과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다. 동시에 근대법과 연결된 관료제의 횡포 앞에서 그것의 부정성만을 비판할 뿐 그것이 갖는 긍정성은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이다.


(3)경험적 분석과 규범적 비판의 단절

베버의 실천적 합리성은 그의 합리성 이론에서 사회비판의 척도로서 기능한다(TkH1,239). 베버는 이같은 합리성에 기초하여 시대진단의 작업을 수행함으로써, 당시의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역사적 결과를 평가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베버는 계몽적 이성이 약속한 인간해방의 실현이 당초의 의도와는 달리 '의미의 상실'과 '자유의 상실'로 귀착되는 역리적 사태에 대하여, 가치연관적인 실질적 합리성을 핵으로 하는 실천적 합리성에 의거하여 강력한 '도덕적' 비판을 제기할 수 있었다. 아울러 그러한 역설이 역설일 수 있었던 것은 베버의 합리성 개념이 단순히 분석적이고 기술적인 것만이 아닌, 좀더 강력하고 포괄적인 이성의 이념과 연결된 규범적 함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대한 문제점이 드러난다. 그것은 다름아닌 베버가 자본주의적 합리화의 과정을 목적합리성의 증대로 분석하는 동안에는 실천적 합리성의 개념이 억제 당한채 전면에 등장하지 않고 있다가, '탈주술화의 과정'에서 초래된 어두운 측면을 반성적으로 고찰하는 과정, 곧 쇠철장에 갖힌 '영혼없는 전문가' 혹은 '의식없는 감각주의자'에 대한 반성적 비판의 작업에서, 비로소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자본주의적 합리화에 대한 '경험적 분석'과 근대화의 역설에 대한 실천적 합리성에 근거한 '규범적 사회비판'이 서로 단절된 채, 독립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베버는 형식적 합리성과 실질적 합리성을 구분하고 아울러 양자를 포괄하는 실천적 합리성을 상정해 놓고도, 자본주의의 출현과 확립의 과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는 형식적 합리성이라는 좁은 선택적 합리성에 의거하여 목적합리성의 구현과 제도화를 논구하고 있다. 그 결과 가치합리적 측면에 관한 탐구가 도외시 되고 그로인해 근대화의 도정에서 실제로 이루어진 가치합리성의 증대를 위시한, 다양한 합리성의 차원에서 상호 균형적으로 전개된 합리화의 과정에 대한 총체적 해명이 결여된다. 베버는 자본주의적 경제활동과 부르주아적 사법권 그리고 관료적 지배형식 등을 규정하고 해명하기 위해서 합리성의 개념을 도입했지만(TWI, 48) 협애한 일면적 합리성인 목적합리성에 매몰됨으로써, 기형적 형태의 사회적 합리화에 관한 이론적 입장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베버의 합리성 이론에서는, 근대적 합리화의 역설에 대한 비판은 가능하지만 그같은 역설적 상황의 성립과정에 대한 체계적 해명과 진단 그리고 그것의 극복을 위한 명시적인 처방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난점이 있다. 단지 운명적으로 그같은 사태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비관주의적 입장에 베버는 처해있는 것이다.


3.하버마스 합리성이론의 형식화용론적/행위론적 측면

3-1.베버 합리성이론의 재구성

하버마스는 베버의 합리성이론을 그것의 이론적 한계를 극복하면서 의사소통합리성에 촛점이 맞추어진 새로운 합리성이론으로 재구성하고자 한다. 먼저 하버마스는 가치영역의 근대적 분리를 '총체적 이성의 분열'로 바라보면서 보편타당성에 대한 추구가 불가능한 것으로 파악하는 베버의 가치상대주의적 입장에 대해 특수한 문화적 가치내용과 가치영역에 내재한 보편적 형식의 차이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보편적 진리가 여전히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또한 자유를 확장해 줄 것으로 예견되었던 프로테스탄트윤리와 근대법의 합리화가 관료제와 연결되면서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고 억압하는 역리적 사태를 체념적으로 수용했던 베버의 입장에 대해, 목적합리성이라는 선택적으로 일면화된 합리성에 집착함으로써 그것들 안에 내재된 가치합리성의 차원을 간과한 것으로 비판한다. 아울러 분석적 차원과 규범적 비판의 차원의 분리로 인해, 도덕적·규범적 특성을 지닌 합리성을 포함한 다양한 합리성 유형들을 제안하고도, 이론적으로 종합화하여 완결된 형태의 포괄적 합리성 개념으로 제시하지 못했던 베버의 철학적 한계를 벗어나 가치영역의 근대적 분리에 조응하는 합리성 측면들의 탐구를 통해 다양한 차원으로 구성된 포괄적 합리성의 개념을 완성하여 제시코자 한다.


3-2.행위합리성: 의사소통합리성의 분화된 세 측면

의사소통합리성은 복수적 합리성 개념으로, 세 측면의 합리성으로 구성된다. 칸트의 이성개념 구분에 조응해 구분된 합리성의 세 차원은 인식적 차원에 국한되었던 합리성을, 이론적, 도덕적, 미학적 합리성에로 확장한 것이다. 이처럼 형식적 차원에서 분석된 의사소통합리성의 분화된 측면들은 언어이론적 기본가정과 관련된 '표준화된 언어행위' 안에 끌어들여지며(TkH1,427-439), 그 결과 의사소통합리성의 세 유형과 연결된 '행위합리성'의 측면으로 드러난다. 곧 객관화하는 태도와 함께 진리에 대한 타당성요구를 제기하는 '확언적 언어행위(대화)'의 기초가 되는 인식적 합리성, 규범동조적 태도를 지니면서 정당성에 대한 타당성요구를 제기하는 '규범규제적 행위'의 토대인 도덕적 합리성, 표현적 태도를 취하면서 진실성 혹은 진정성에 대한 타당성요구를 제기하는 '연출적 행위'를 가능케하는 표현적 합리성이 바로 그것이다(TkH1,440-448). 이처럼 의사소통합리성의 세 측면들은 각 측면에 대응하는 의사소통행위의 작동토대라는 점에서(VE,584- 589), 행위합리성으로 간주된다. 동시에 이러한 행위합리성으로서 의사소통합리성은 필연적으로 담론적, 절차적 합리성의 형태를 함축하는바, 타당성 요구의 제기와 그것에 대한 비판과 정당화의 과정을 거쳐 '타당성 요구의 완수'에 이르는 전과정의 기저에는 의사소통합리성이 절차적 합리성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처럼 행위합리성 혹은 절차적 합리성으로서 '의사소통합리성'이 세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한 언어행위 안에서, '명시적 혹은 암묵적으로' 제기된 타당성 요구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의사소통합리성이 비강제적·통일적인 논쟁적 담론의 합의유도적 힘과 연결된 주도적 체험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TkH1,28). 즉 의사소통능력의 소유자는 누구나 상대방의 타당성 요구에 대해 비판을 제기할 수 있으며 동시에 상대방의 비판에 대해 근거와 이유를 대어 자신의 주장을 옹호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VE,353-358).


3-3.사회비판의 규범적 토대로서 의사소통합리성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합리성 개념은 세가지 차원의 합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왜냐하면 합리성의 도구적 일면화를 거부하는 그에게, 의사소통합리성에 대한 개념적 설명은 어느 한 차원에 국한될 수 없으며 모든 차원에 적용될 수 있을 만큼 포괄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같은 포괄적 합리성은 헤겔 철학에서와 같이 총체적·통일적 이성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합리성 측면들간의 '조화와 균형'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을 지닌 포괄적 합리성으로서 의사소통합리성은 전통적 비판이론이 상실한 사회비판의 규범적 척도로 제시된다. 곧 가치관련적 차원을 포함한 다양한 합리성 측면으로 구성된 의사소통합리성에 입각해, 탈가치적 도구적 합리성에 의해 자행된 후기 자본주의의 사회적 병폐에 대한 규범적 차원의 비판이 가능해진 것이다. 특히 그러한 비판이 윤리적-도덕적 차원에서 제기되고 있다는 점에서, 의사소통합리성은 도덕적-실천적 합리성의 측면에 중심이 놓여있는 합리성으로 이해된다.

의사소통합리성의 규범적 특성은 합의를 목표로 이루어지는 일상적 대화 속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대화참여자들은 주제화되는 문제와 맥락에 따라 상이한 '형식적 세계'를 배경으로 그에 부합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상대방에게 '암묵적인' 타당성요구를 제기한다. 이어 비판과 근거지움을 통해 서로간의 이해도달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언어행위 안에서 협력과 양보를 통해 공통적인 이해도달에 이르게하는 일련의 과정은 일상적 언어행위에 본래적으로 내재된 것으로 아무도 이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그러한 상호이해의 원천으로 주어진 것이 의사소통합리성이다. 이로써 체계적으로 왜곡되거나 혹은 고의적으로 훼손된 의사소통의 구조를 비판하고 검증할 수 있는 비판의 척도가 마련된다.

한편 대화참여자들은 타당성요구를 통해 사회적으로 결속된 인식을 가능케하는 상호주관적 관계를 성립시키는데, 이는 협력과 조화에 토대한 상호작용을 통해 성립되는 사회적 통합과정이 대화자들간에 동의와 합의를 산출케하는 의사소통의 구조와 그것의 기반인 의사소통합리성에 의존하고 있음을 또한 말해주는 것이다.


3-4.목적합리성과 의사소통합리성의 범주적 구분

합리성이론을 사회이론의 지평으로 확장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하버마스는 형식적 분석을 통해 도출된 다양한 합리성 복합체를 '사회 행위론'과 연결하여, 행위이론적 차원에서 합리성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하버마스는 애초에 자신이 노동을 '목적합리적 행위'와 동일시하면서 제안했던, '노동'과 '의사소통행위'의 구분을(TWI,61-63) 보다 정돈하고 세련화한 행위유형의 구분으로제시한다. 우선 하버마스는 인간의 행위를 '사회적 행위'와 '비사회적 행위'로 양분한후, 사회적 행위를 다시 성공을 지향하는가 아니면 이해도달을 지향하는가에 따라 '전략적 행위'와 '의사소통행위'로 구분한다. 비사회적 행위는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성공지향적 행위로 '도구적 행위'라고 불리운다. 사회적 행위중 전략적 행위는 타인에게 자신의 '의도'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위이며, 의사소통행위는 행위자 상호간의 '이해도달'(Verständigung)을 목표로 이루어지는 행위이다(TkH1,377-379).

도구적 행위와 전략적 행위는 둘다 인식적-도구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행위유형으로서 전통적 의식철학의 '독백적 행위모델'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 안에는 행위주체의 독단적 의식에서 나타나는 '목적-수단연관'이 자리를 잡고있다(TkH1, 377-379). 반면 이해도달을 지향하는 의사소통행위는 독백적 행위모델과 달리, 2인 이상의 언어행위자들이 서로간에 협력과 조화를 통해 '동기지워진 동의'를 산출코자 하는 행위유형이다(VE,576). 여기선 상대방이 자신의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적 대상이 아니라 합의에 이르기 위해 서로 필요로 하는 협력자로 인식된다. 그러한 한에서 의사소통행위는 이해도달의 '상호주관성'에 바탕을 둔 행위이며(TWI,63), 상호이해의 과정에서 구현되는 의사소통합리성에 기반하여 추동되는 행위이다. 이처럼 하버마스는 목적합리성과 의사소통합리성의 범주적 구분을 '사회 행위론'과 연결지움으로써, 합리성이론을 사회이론의 지평으로 확장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하였으며 그것은 목적합리적 행위와 의사소통행위에 각각 의존하는 체계/생활세계의 이단계 사회이론으로 정식화되어 나타난다.


IV.사회이론적 전략: 이원적 사회구조틀을 통한 근대화의 병리에 대한 해명


1.이단계 사회이론의 정식화

도구적으로 왜곡된 일면적 합리성의 병폐를 벗어나기 위해, 하버마스는 합리성의 본래적 형태인 포괄적 합리성에로의 복귀를 시도한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단순히 목적합리성을 의사소통합리성으로 대체하는데 있지않다. 오히려 하버마스는 합리화의 과정을 두개의 상반된 사회구조틀로 분화·해명함으로써(TkH2,173- 181), 목적합리성과 의사소통합리성의 상호보완적 공존을 제시코자 한다(LP,21). 이를 위해 하버마스는 형식적 분석에서 도출된 합리성 유형들을 사회행위론과 연관지우고 그로부터 인식적 합리성에 기초한 성공지향적인 '목적합리적 행위'와 이해도달을 지향하는 '의사소통행위'의 구분을 이끌어낸다. 이어 그같은 행위의 범주적 구분을 사회이론의 지평으로 확장하여 생활세계/체계의 구조틀과 연관지움으로써, '이단계 사회이론'으로 제시한다. 하버마스는 이를 통해서 자신의 합리성이론이 사회진화론의 관점에서 사회의 발전과 합리화과정을 해명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하버마스는 생활세계와 체계의 두 영역이 동시적으로 서로 관련을 지우며 분화하는 것을 '사회진화' 내지 사회적 합리화로 파악한다(TkH2,230). '생활세계'는 타당한 지식의 보존, 집합적 연대의 안정화, 책임있는 행위자의 육성을 통해 상징적 구조를 재생산함으로써(TkH2,209) 합리화를 진행해 왔다. 동시에 생활세계의 합리화 과정에서 분리되어 생활세계의 존속을 위한 '물질적 재생산'을 전담하는 역할을 맡게된, 화폐와 권력을 매개로 조종되는 '체계'는 복잡성의 증대를 통해 합리화의 과정을 수행해 왔다(TkH2,230). 즉 의사소통합리성을 토대로 하는 상징적 재생산 영역과 목적합리성을 토대도 하는 물질적 재생산 영역은 각자의 자율적인 통합구조를 발전시키면서 상호의존적으로 합리화를 진행해 온 것이다. 이같은 사실을 통해 하버마스는 의사소통합리성 개념에 의거해 사회적 합리화의 전면모를 해명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TkH2,10), 목적합리성과 의사소통합리성으로 분화된 두가지 합리성 유형에 따라 사회를 분석코자 시도한다.


2.하버마스 합리성이론의 사회진화론적 측면

2-1.상징적/물질적 재생산의 작동토대: 의사소통합리성과 목적합리성

하버마스에 의하면 생활세계는 문화적 창조와 전승, 성원의 사회화, 사회적 통합, 즉 상징적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터전이다(TkH2,208-209). 이처럼 언어를 매개로 하는 상징적 재생산은 생활세계의 구조에 의해 산출되는 의사소통합리성에 기초하여 진행되며, 동시에 의사소통합리성에 토대하여 이루어지는 이해도달의 과정을 통해 생활세계가 존속하게 된다(TkH2,191). 곧 생활세계는 의사소통합리성을 산출하는 지반이자 동시에 그것에 의해 자신의 구성적 요소들이 재생산되는 영역인 것이다. 이러한 생활세계는 '형식적 세계'개념과는 다른 지위를 갖는다. 예컨데 객관적 세계에 속하는 대상을 객관적인 (어떤) 것으로 지시하듯이, 화자와 청자는 생활세계의 도움을 받아 '상호주관적인 것'으로서 그 무엇을 가리킬 수는 없다. 또한 의사소통참여자들은 생활세계의 지평에서 움직일 뿐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다. 생활세계의 구조는 가능한 이해도달의 상호주관성의 형태를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TkH2,191-192).

한편 생활세계는 그것이 지니는 문화적 내용의 차이로 인해, 생활세계 상호간에 상대성과 차이성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들 내에는 보편적 형식이 존재한다. 의사소통행위를 가능케하는, 형식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보편적 구조가 바로 그것이다(TkH1,386). 각기 상이한 생활세계에 속하는 개인들간에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요컨대 상이한 생활세계에 소속된 대화참여자들이 세 가지 형식적 세계중 한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 관한 표명의 타당성에 대해, '협동적 해석과정'을 통해(VE,576) 합의에 도달하는 일련의 과정이 '언어의 내재적인 목적'으로 놓여 있으며(TkH1,387), 그러한 보편·절차적 구조의 작동토대로서 의사소통합리성이 절차적 합리성으로 주어진다(PDM,386).

그러나 일차적 삶의 터전인 생활세계는 단순히 구성원들의 언어행위를 통해서 유지될 수 없다. 생활세계의 유지와 구성원들의 존속을 위해서는 물질적 재생산이 담보되어야 한다. 이렇듯 생활세계는 재화의 생산과 그것의 효과적인 달성을 위한 조직의 측면에서 체계 의존적이며, 사회화된 개인의 재생산과 일관된 문화전통의 연속성 때문에 체계는 생활세계에 의존하고 있다. 이처럼 두 영역은 철저하게 상호의존적이며 복잡한 방식으로 서로 작용하고 있다.

잠재적 형태로 존재하던 체계는 생활세계의 합리화가 진전됨에 따라, 후자로부터 분리되어(TkH2,230) 물질적 재생산의 기능을 떠맏게된다. 체계는 물질적 생산을 담당하는 '경제'와 그것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조직된 '행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체계는 급변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 부단히 하부체계를 분화하고 복잡하게 증대시키는 과정을 통해 합리화를 진척시키는데(TkH2,246-256), 이러한 과정은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거친 합의적 견해가 상층부로 전달되는, 합의도출적 의사소통의 과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물질적 재생산이 차질없이 원활히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상부의 결정기관에서 내려지는 일방적인 명령과 지시를 통해 이루어진다(LP,64). 이처럼 체계는 '탈언어적 의사소통매체'인 화폐와 권력을 조종매체로 하여 운영되는 까닭에(TkH2,246-248), 합의적 의사전달의 과정이 무시되며 오직 효율성의 차원에서 모든 것이 재단된다. 여기서는 의사소통의 낭비를 줄이고 목적에 부합되는 효과적인 수단의 선택만이 주된 관심의 대상일 뿐, 목적설정의 정당성이나 수단선정의 규범적 적합성은 모두 배제된다(TkH2,271-272). 그 결과 체계 내에는 모든 규범적 맥락에서 자유로운, 가치가 배제된 목적합리성이 전일적으로 관류하고 있다.


2-2.생활세계의 내적 식민지화: 의사소통합리성의 목적합리적 왜곡화

하버마스는 사회적 합리화를 목적합리성의 출현에 국한하여 기술하는 고전적 사회이론은 결코 근대화의 역설에 대한 해명에 성공할 수 없다고 본다. 베버는 형식합리성의 관점에 치우쳐 근대화를 바라보고 있으며,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사회에 대해 경제주의적으로 편향된 해석을 제공하고 있고(TkH2,504), 전통적 비판이론은 의식철학의 영역에 갇혀있어(TkH2,518) 근대의 병리현상을 제대로 포착,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면적 합리성인 목적합리성 외에 포괄적 합리성을 제시하고 그로부터 합리성의 범주적 구분을 통한 체계/생활세계 이론에로의 확장을 통해서만, 목적합리성에 기초한 체계와 의사소통합리성에 토대한 생활세계 사이의 '비대칭적 상호작용'에 의한 근대화의 장애가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확신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생활세계와 체계, 양자의 합리화가 서로 균형을 이루며 진행되는 한에서 사회의 지속적 발전과 진보는 계속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체계의 구조가 생활세계의 의사소통구조 안으로 침투해 들어갈 때, 사회적 합리화의 균형이 깨지면서 근대화의 장애가 일어난다(TkH2,293). 의사소통의 절차를 통해 합의적 결과를 도출하는 생활세계의 내적구조를, 화폐와 권력을 매개로 조종되는 자족적 체계인 목적합리적 하위체계의 메카니즘으로 대체하려는 시도에 의해, 생활세계의 고유한 특성과 정합적 체제가 붕괴되고 상호이해의 통합적 구조가 무력화됨으로써, 이른바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내적 식민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TkH2,293,488,539,593).

근대화의 병리를 해명하기 위해 제시된 생활세계의 식민화 테제는 합리성의 일면적 축소화의 과정을, 보다 확장된 사회이론적 지평에서 새롭게 각색한 것이다.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자본주의 경제와 근대적 관리행정은 과학의 영역에 권력과 통제의 기능을 특권으로 부여하였다. 그에 따라 기술적 합리성이 생활세계의 전영역을 침투·지배함으로써, 의사소통합리성의 '목적합리적 왜곡화'를 초래하였으며 이는 곧바로 포괄적 합리성인 의사소통합리성의 개념적 범위와 역할 그리고 목표를 모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V.하버마스 합리성이론의 철학적 성과

하버마스 합리성이론의 이론적 난점에 대한 비판적 검토에 앞서 그것이 갖는 철학적 의의와 이론적 성과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실증주의가 초래하는 문제점의 본질을 합리성의 도구적 일면화를 통해 규명한 점이다. 실증주의는 자신의 인식론적 입장에 관해 무반성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자신의 방법과 관점만이 유일무이한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증주의는 일체의 가치를 배격하고 현상에 대해 가치중립적으로 기술하는 것을 본연의 임무로 삼고 있는 까닭에, 현실의 상황을 정당화하여 지배권력의 입장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아울러 과학기술을 포함한 실증주의적 성과물의 악용에 대해 이렇다할 저항이나 반성적 통찰을 수행할 수 없다(EI,59). 왜냐하면 실증주의적 사유방식은 가치합리적 측면이 배제된, 도구적으로 축소된 목적합리성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개인들간의 자유로운 대화를 통한 정당한 목적의 설정이나 실증주의적 과학기술의 왜곡된 사용에 대한 일체의 반성적 토론이 일체 허용되지 않는다.

둘째, 전통적 비판이론에서 상실됐던 사회비판의 규범적 토대를, 의사소통합리성 개념을 통해 새로이 확보했다는 점이다. 비판이론 일세대가 겨냥한 비판의 촛점은, 근본적 목표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책무를 방기한 이성이 총체적으로 도구화되어 가는 과정, 그리고 그로인해 초래된 '도구적 이성의 전횡'에 대한 폭로와 비판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비판의 과업을 수행하는 이성, 그 자체의 지위가 문제시된다. 왜냐하면 이성의 총체적인 도구화로 인해 그것을 고발·비판하는 이성마저도 이미 도구적 이성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비판의 규범적 토대가 붕괴되며, 이에 하버마스는 사회비판의 새로운 규범적 척도로서 의사소통합리성을 제시한다. 가치합리성을 포함한 복수적 합리성으로 구성되는 의사소통합리성에 의거할 때, 합리성의 도구적 축소화와 그로부터 초래되는 사회적 병리를 진단하고 극복할 수 있는 준거점이 마련될 수 있다. 나아가 '더나은 논증의 힘'에 의해 담론의 결과가 결정되게끔 강제하는 절차적 합리성에 기초한 이상적 대화상황은 왜곡·억압된 의사소통구조에 관한 비판적 척도로 작용한다. 그 결과 조작이나 기만 그리고 합당한 의사소통의 절차를 밟지않은 부당한 권력의 남용을 비판하고 극복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는 것이다.

세째, 근대화의 역설이 계몽의 필연적 산물이 아니며 극복될 수 있다는 철학적 조망을 제시한 점이다. 하버마스 이전에도 근대화의 역설에 관한 많은 탐구가 이루어졌지만 뚜렷한 극복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지나친 비관주의나 체념주의 아니면 대안없는 낙관주의에 머물고 있다. 하버마스가 보기에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 합리성을 목적합리성이라는 일면적 합리성에 편벽되게 제한해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기껏해야 목적합리성의 확장에 따른 근대화의 진척과 역설이라는 '근대화의 이율성'을 포착했을 뿐이다. 그러나 근대화 그 자체는 긍정적/부정적 측면을 동시에 지니는 것이 아니며, 단지 목적합리성과 의사소통합리성의 두 측면에서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합리화 과정의 균형이 깨어져 후자가 침해될 때, 이른바 역설이 초래되는 것일 뿐 그것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생활세계 내에 침투한 체계의 메카니즘을 원상태로 복귀시키고 의사소통적 절차과정과 영역을 탈환하여 원래의 생활세계의 구조를 되살려, 체계와 생활세계 양자의 균형을 회복함으로써 근대의 병리적 현상은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다.

네째, 이성에 기초한 '대화를 통한 문제의 해결'을 제시한 점이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합리성에 근거한 이해도달지향적 행위모델을 통해,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언어행위가 궁극적으로 상호이해를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처럼 우리의 언어행위 내에 이해도달을 목표로 한 의사소통적 구조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결국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이 원칙적으로 가능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행위의 본래적 형태 안에서, 대화에 참여하는 성원들은 각자의 전략적 목표를 지양하고 양보와 타협을 통해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호이해와 합의를 앞세운 하버마스의 '대화의 철학'은 혁명적 방식을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양·해결하려는 마르크스로 대변되는 급진적 사회이론과 결정적으로 갈라서는 분기점이 된다. 후기자본주의 사회는 마르크스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초기 자본주의 사회와는 질적으로 다른 사회이며, 문제의 해결방식 또한 근본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계급적 이익의 관철을 주된 목적으로 삼는, 도구적 합리성에 토대한 전략적 행위모델을 통해 자본주의의 문제를 설명·해결코자 시도하는 마르크스적 이론틀은 현재의 시점에서 그 타당성을 상실했으며 폭력과 강제가 아닌, 개인들간의 이성의 힘에 의거한 자유로운 대화에 의해 문제해결이 가능한(Reply,221) 그러한 시대라는 것이 하버마스의 기본 입장이다.


VI.하버마스 합리성이론의 이론적 난점과 한계


1.'축소되지 않은' 의사소통합리성의 정체

하버마스의 합리성이론은 한편으론 이론적, 도덕적, 표현적 합리성의 본래적 의미를 명확히 밝혀야 하며, 다른 한편으론 이해도달을 지향하는 행위 안에서 이러한 합리성들의 상호연관을 명료하게 드러내야만 한다. 이에 대해 하버마스는 의사소통합리성의 세 측면을 각기 '분리된 것'으로 취급하여 상론하고 있으나, 세 측면으로 이루어진 '축소되지 않은' 의사소통합리성의 개념에 관해서는 충분히 해명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분리성은 의사소통합리성의 형식적 구조가 드러나는 '논쟁양식'에 대한 설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즉 타당성 영역들의 분리가능성에 촛점을 맞추어 논쟁의 형식들을 각기 분화된 합리성개념에 관련지움으로써, 인식적 합리성은 이론적 담론에, 도덕적 합리성은 실천적 담론에 그리고 미학적 합리성은 치료적 비판이나 심미적 비판에 연결된다. 동시에 분리된 세 합리성은 자신과 연결된 개별적 담론을 전적으로 지배한다. 따라서 실천적 담론의 경우 이론적, 심미적 합리성은 배제된 채, 도덕적 합리성이 실천적 담론을 지배하는 가운데, 제기된 타당성요구의 규범적 정당성 여부가 결정된다. 이처럼 합리성 측면들을 '차이성'과 '분리성'에 촛점을 맞추어 설명하는 까닭에, 하버마스는 세 측면의 '내적연관'을 해명해야 할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으며 이는 분리되지 않는 의사소통합리성의 특성과 내용을 설명하는 과제와 직결된다.

이에 하버마스는 분리된 합리성 측면의 '통일성'을 논쟁적 근거지움의 절차적 통일성에서 확보하고자 하며, 이는 절차적 합리성을 축소되지 않은 합리성의 개념으로 제안하려는 의도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적 논쟁방식을 실천적 담론을 비롯한 여타 담론에 무리하게 적용함으로써 과도한 동일화의 오류를 결과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같은 동일화는 의사소통합리성을 비판의 규범적 척도가 아닌, 단순히 모든 근거지움의 '구조적 장치'(strukturelle Verfassung)로 환원시켜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또한 분리된 합리성들간의 '균형' 내지 '조화'를 통해 축소되지 의사소통합리성을 설명하려는 시도의 경우도 분리된 차원들을 인위적으로 결합하려는, 분리된 합리성 측면들에 대한 '비판적 간섭' (Übergriffe der Kritik)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하버마스의 주장과는 달리 분리된 합리성들의 통일은 논쟁의 형식적 통일에서 확인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논쟁 형식들간의 환원될 수 없는 '맞물림'에서 확인될 수 있다. 다시말해 의사소통합리성을 구성하고 있는 합리성의 제 측면들은 본래 '복수적, 비통합적이며 그럼에도 비분리적인' 상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버마스는 사회학적 관점에서, 가치영역의 근대적 분화에 따라 세차원의 합리성을 각기 분리된 것으로 받아들여 각 측면을 상세히 해명한 후, 철학적 관점에서 분리된 측면들을 다시 결합하려고 시도한다. 그 결과 합리성 측면들의 내적연관을 해명해야만 하는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2. 언어사용의 본래적 양식에 대한 규정

하버마스는 이해도달을 지향하는 언어행위를 언어사용의 '본래적 양식'으로 규정하고, 전략적 행위를 포함한 간접적 이해도달의 행위를 기생적 양식으로 파악한다(TkH1,388-389). 이러한 입장은 썰과 오스틴의 언어행위론에 크게 의존한 것으로, 특히 오스틴의 '발화수반적 행위'(illocutionary act)와 '발화결과적 행위'(perlocutionary act)를 차용하여 전자를 의사소통행위와, 후자를 전략적 행위와 연결하고 있다. 그러나 이해도달을 지향하는 의사소통행위도 목적론적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TkH1,151), 이해도달이 어떠한 행위의 결과나 목적의 달성을 위한 부수조건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아울러 무신론자와 벌이는 신의 존재에 관한 논쟁의 경우, 비록 양자간에 완벽한 이해도달이 이루어지더라도 상호 동의가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이해도달의 지향이 반드시 동기지워진 동의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점을 들어, 이해도달지향적 언어행위가 모든 언어행위에 내재한다는 전제의 부당성이 비판되기도 한다. 또한 후기구조주의도 다양한 말놀이의 이질성을 강조하면서 의견의 불일치를 언어행위의 본질로 내세우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해도달이 언어행위의 본래적 양태라는 하버마스의 주장이 정당화된 근거에 기초하고 있지 않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행위의 본래적 목표가 상호이해에 있다는 하버마스의 주장이 수용되기 위해서는 보다 설득력있는 근거가 제시되어야만 한다.


3. 권력관계에 대한 조망의 결여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합리성은 강제없는 자발적인 합의의 도출을 가능케하는 근거이며 그것에 기초한 '이상적 대화상황'은 현존사회에 대한 평가의 규범적 척도로 제시된다. 따라서 모든 억압과 구속에서 벗어난 이상적 대화상황에 비추어, 왜곡된 의사소통의 구조를 식별하고 비판할 수 있게 된다(TG,136-138). 그러나 이상적 대화상황과 그것이 토대로 삼고있는 의사소통합리성은 현실 사회 내의, 권력을 매개로 한 사회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언어행위나 의사소통을 분석함으로써 이끌어낸 것이 아니며,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이상적 상황에서 통용될 수 있는 언어행위에 대한 고찰을 통해 도출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현실의 사태를 점검하고 비춰보는 비판의 토대요 지향해야 할 목표로서 제시된 것일 뿐, 권력에 의해 조종되거나 무력화된 의사소통의 구조를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지침은 될 수 없다. 다시말해 규범적 척도로 제시된 의사소통합리성과 이상적 대화상황은 체계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인 무의식적 기만과 의식적 기만인 조작에 대한 비판의 준거점은 될지언정(TkH1,445-446), 그것들에 대한 현실적 극복책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현실에서 행해지는 언어행위와 그것의 매체인 언어는 현존 권력의 지배를 가능케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거나 혹은 지배권력에 예속되어 있는 실정이며, 이러한 상황에서 대등하고 자유롭게 행해지는 대화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지배권력에 의해 뒤틀린 의사소통의 구조를 바로잡아 온전한 상태로 유지하고 그러한 바탕위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의사소통행위가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권력의 그물망에 자리한 의사소통합리성의 현실적 양태에 대한 탐구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하버마스는 이해도달을 지향하는 의사소통행위에 대한 탐구를 수행하면서 현실의 권력관계를 배제하거나 간과함으로써, 마치 의사소통합리성이 이상과 현실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작동될 수 있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또한 권력에 의해 형성된 사회관계의 서열화에 위치한 구체적 양태로서의 의사소통합리성을 소홀히 다룸으로써, 일상의 대화나 의사소통이 상호이해를 지향하기 보다 권력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놓치고 있다. 마치 하버마스는 모든 의사소통행위가 '외적 권력에 무관하게' 보다 나은 논증의 힘을 통해 상호이해와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듯 싶다. 물론 그의 합리성이론은 현실사회를 가치관련적 차원에서 측정하고 비판하는 '규범적 사회비판이론'으로 제안된 것이며, 그런 한에서 현실의 권력관계에 대한 해명과 구체적 해결안을 제시하는 것은 불필요한 작업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잘못된 현실의 상황을 인정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하버마스의 합리성이론이 현재의 상황에 대한 비판적 해명에 머물지 않고, 보다 나은 사회를 지향하는 이론적 지침으로 자리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비판의 차원이 아닌 보다 적극적인 실천적 차원의 방안에 관한 진지한 모색이 뒤따라야만 할 것이다.


4. 체계 모순에 관한 인식불가능성

하버마스는 현대사회의 위기를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내적 식민화로 파악한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체계적 통합형식이 상징적 재생산의 영역에 침범함으로써 발생하는 '생활세계의 체계로의 종속화'일 뿐, 체계 내의 소외나 물상화는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체계에서는 목적달성을 위한 효과적 수단이나 효율적인 노동의 조직만이 관심의 대상인 까닭에, 효율성에 저해되는 일체의 장애는 제거된다. 그 결과 물질적 재생산의 수행을 위해 기능주의적으로 재편된 행정조직이나 노동의 자본화로 인해 초래되는 병폐는 하등 문제가 되지 않으며 그 자체 정당한 것으로 간주된다. 요컨대 관료제의 횡포나 노동의 소외는 도덕적·규범적 차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단지 그러한 현상이 물질적 재생산을 저해할 경우에만 문제가 된다. 이처럼 체계 내에는 하버마스가 사회비판의 규범적 토대로 제시한 의사소통합리성이 자리할 공간이 없으며, 오직 일체의 가치합리적 차원이 제거된 목적합리성이 전일적으로 지배할 뿐이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목적합리성의 잣대에 의해 모든 것이 측정되고 평가되는 체계 내의 문제는 더이상 하버마스이 이론틀로 포착되지 않는다.

이로써 체계는 하버마스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비판코자 했던 합리성의 도구적 일면화의 유일한 예외 지역으로 남는다. 그 결과 사회적 병리는 생활세계 내의, 체계와 생활세계가 접하는 곳에서 발생하고 발견될 뿐(TkH2,581), 체계 자체는 그러한 병리에서 자유로운 공간이다. 아울러 생활세계적 통합을 가능케하는 의사소통합리성이 형식적으로 조직된 체계 안으로 침투하여 초래되는 현상, 예컨대 체계 내의 경제의 민주화나 노사의 자율적인 협상 등은 전적으로 무시된다.기껏해야 하버마스의 이론틀은 생활세계의 식민화의 발생만을 포착할 수 있을 뿐, 보다 적극적으로 그것을 예방할 수도 없으며 나아가 체계적 통합방식을 의사소통적 통합으로 대체함으로써 체계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생활세계가 전담하는 전인적 교육이 체계에 의한 기능인 양성 중심의 교육으로 변질되는 사태에 대해선 강력한 비판을 제기할 수 있는 하버마스의 비판이론이, 체계 내의 고통받는 노동자의 삶에 관해선 오직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사회의 비인간적 상황을 합리성의 도구적 축소화로 규정, 비판하고자 한 하버마스의 원래 의도와 어긋나는 결과를 접하게 된다.


VII.맺는말: 하버마스 합리성이론의 전략적 상충에 대한 이론적 조망

근대화의 병리를 합리성의 도구적 축소화에 기인하는 것으로 파악한 하버마스는 일면적 합리성에 의해 초래된 사회문제를 '합리성의 복수성'에로의 전환을 통해 해결코자 시도한다. 그리하여 세 차원의 합리성으로 구성된 포괄적 합리성 개념인 '의사소통합리성'을 정초·제시함으로써, 근대성의 증가에 따른 역설을 해명하고 나아가 세가지 합리성 측면간의 조화와 균형의 상태에로의 회복과 유지를 통해 '합리화의 비합리성'을 극복하고자 한다. 의사소통합리성은 가치합리적 측면이 제거된 목적합리성의 전횡에 대한 도덕적·규범적 차원의 비판적 척도로 기획된 것으로, 합리성의 세 차원중 도덕적 합리성이 주된 측면으로 부각된다. 그런 면에서 하버마스는, 비록 '자본주의적 근대화'에 관한 분석을 형식합리성에 의거해 수행하지만, 합리화의 역설에 대한 도덕적 비판을 가치합리적 측면이 강조된 실천적 합리성에 기초해 제기하는 베버의 입장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하버마스의 철학적 전략은 '목적합리성'을 '의사소통합리성'으로 완전히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양자의 범주적 구분을 사회진화론의 지평에 확대·적용하여 이끌어낸 '체계/생활세계 이론'에서 두 합리성을 체계와 생활세계 두 영역의 지배적인 합리성으로 제시함으로써, 목적합리성과 의사소통합리성간의 상호 균형적 공존을 유지코자 한다. 그러나 여기서 자신이 그토록 비판했던 목적합리성의 전횡적 지배를 체계 내에 허용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애초의 강력한 규범적 차원의 비판에서 후퇴하는 '절충적 입장'에 처하게 된다. 즉 일면적으로 축소된 목적합리성이 야기시킨 사회적 병폐를 그것과 범주적으로 구분되는 의사소통합리성에 의거해 비판하면서 동시에 비판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체계의 영역을 용인함으로써, 가치관련적 차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합리성의 일면화를 다시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결과의 배후에는 근대의 병리에 관한 '합리성의 일면화'를 통한 해명방식과 '생활세계의 식민화'를 통한 해명방식 사이의 이론적 부정합성이 놓여있다. 후자에 따르면 목적합리성과 의사소통합리성이 각기 자신의 지배영역을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작동할 경우, 두 영역간의 동시적인 상호의존적 합리화가 원활히 이루어지며 그에 따라 근대화의 병리는 발생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목적합리성이 체계를 넘어서 생활세계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경우일 뿐, 규범적 특성이 제거된 목적합리성의 체계에 대한 전일적 지배는 그 자체로 아무런 문제도 없는 정당한 것이다. 곧 생활세계 내에서의 의사소통합리성의 도구화가 문제이지, 체계 내의 도구적 합리성의 전횡적 지배는 정상적인 것이다. 따라서 소외와 물상화로 대표되는 근대화의 병리에 대한 규범적 비판은 단지 생활세계에만 적용될 뿐 체계 내의 모순과 병폐는 완전히 무시된다. 이로써 하버마스의 철학적 기획은 단지 반편적 성과에 그치고 있다.

도구적 합리성의 본질을, 세 측면으로 이루어진 본래적 형태의 합리성이 선택적·일면적 방식에 의해 도구적으로 축소·왜곡된 것임을 밝히는 것이 하버마스의 본래의 의도였다. 그러나 합리성 유형에 관한 형식적 분석의 결과를 사회진화론의 차원으로 확장하여 성립시킨 '이단계 사회이론적 전략'이 체계 내에 합리성의 도구적 일면화를 허용하는 결과를 낳음에 따라, 규범적 차원의 비판에 촛점이 맞춰진 '개념분석적 전략'과 기능주의적 차원과 규범적 차원이 혼재된 '사회이론적 전략'은, 하버마스의 이론틀 내에서 서로 상충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따라서 이같은 이론적 체계의 비정합적인 귀결에 대해 보다 적절한 해명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상당한 정도의 이론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규범적 사회비판이론으로서 하버마스의 합리성이론의 호소력은 반감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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