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이르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죽음
강 손 근(동의대 철학 교수)
1. 머리말
우리는 늘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한다. 이것은 인간의 삶이 단순한 짐승들의 삶과 같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같은 동물에 속하면서도 인간 이외의 짐승들은 그저 타고난 본성대로 살 수 밖에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짐승들에게 있어서는 애초부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항상 사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에게 있어서 삶은 바로 사유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의식을 가진 존재, 즉 자기가 누구인가를 아는 존재이다. 자기 자신을 알고 자기가 아닌 것을 자기로부터 구별할 줄 아는 것이 인간이다. 더욱이 인간은 자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기 자신과 타인의 죽음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그러한 지식에 입각하여 죽음의 문제에 일정한 태도로서 접근한다.
인간은 일찍부터 죽음에 관하여 사색을 해왔기 때문에 그에 관한 고유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죽은 자의 시체를 매장하는 풍습이 오랜 역사를 가진다고 하는 사실이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죽은 자에게 꽃을 바치고 매장을 했던 최초의 흔적은 네안데르탈인(Neanderthal man)에게서 발견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매장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적어도 3~4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이야기다. 역사가들의 지적에 따르면 사람과 영장류 가운데는 불과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무리도 있었지만, 그들은 아직 매장을 할 줄은 몰랐던 것 같다. “인간 문명의 두 번째는 매장이다. 그러므로 라틴어에서는 <인간성> humanitas는, 바로 <매장하는 것> humando에서 유래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비코의 말처럼, 매장의 풍습은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고유한 문화현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아도, 죽음이 인간에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와 같이 인간이 매장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인간이 죽음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죽음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존재자”이고, “이러한 죽음에 관한 지식은 바로 인간과 짐승을 가르는 결정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물도 죽음의 위기가 다가오는 것을 직감으로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동물에 있어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능적인 것이지, 죽음에 관한 명확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자신이 죽음의 위기에 처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자신의 죽음의 가능성을 미리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임을 말해 준다. 따라서 인간만이 죽음에 관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죽음이 단순한 생물의 죽음과 구별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문화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또한 인간 생명의 존재양식을 규정하기도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제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죽음의 문제는 삶의 문제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가운데 삶이 이어져 있다. 죽음에 대해 어떤 태도로 접근하느냐에 따라서 죽음에 대한 의미부여와 해석도 달라질 수 있다. 여기에는 또 시대적 상황이나 사회적․문화적․환경적 요인도 작용한다. 때문에 죽음을 의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에 관한 사색은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죽음에 관한 의미부여나 해석이 모두 이성적 사유에 속하는 활동이라는 점에서 죽음은 이성적으로 보편적인 인식을 요청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죽음에 관한 이성적 인식으로서의 고찰이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여기서 새삼스럽게 죽음에 관한 이성적 인식으로서의 고찰을 문제삼으려고 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늘날 인간의 죽음을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고 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뇌사라고 하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하는 1967년까지, 인류는 三徵候에 의한 죽음, 이른바 심장사(cardiac death)를 개체의 죽음으로 생각해 왔지만, 그 무렵부터 여러 가지 문제점이 제기되어졌다. 소생술의 진보, 인공장기의 개발, 장기이식, 주로 이 세가지 요인에 의해 초래된 의료기술상의 중대한 변화가, 죽음의 문제에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현대과학의 진전이 전통적인 죽음의 기준의 변경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대의 의료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발달한 이식의료의 등장에 수반하여 전개되고있는 대부분의 죽음에 관한 논의에서 대상이 되는 죽음은 거의 타인의 죽음이고 대부분이 병원사이다. 이와 같은 죽음을 둘러싼 변화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선 자기 자신의 죽음이 실종되어 버렸다고 하는 현실일 것이다.
인간적인 죽음을 회복할 때이고, 그런 의미에서 죽음을 타인의 것으로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죽음으로서 냉정하게 바라보고 그것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삶이 보이지 않을까? 사람은 죽음을 의식할 때, 비로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의 목표는 바로 이와 같은 의미에서 죽음을 자기 자신의 문제로서 적극적으로 사색함으로써 현실에서의 자신의 삶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토대를 확보하는 것에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찾아보려고 하는 것이다. 죽음을 존재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한 중요한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하이데거의 입장은 이 논문의 목표에 부합하는 바가 많을 것으로 보인다. 또 죽음을 둘러싼 현대의 논의와 관련해서 생각한다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전에 우선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한 확고한 태도는 이상적인 삶의 영위를 위한 근본적인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이 당면하고 있는 최대의 위기에서 그를 구출할 수 있는 유일한 구제책이며 그의 중병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치유책” 같은 것을 하이데거의 사유에서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기대를 거는 것은 우선 죽음과 관련한 윤리적 관심이기 때문에 그의 철학의 전문적인 데까지를 비판하는 것은 이 연구의 범위 바깥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또 그것은 필자의 능력이 미치는 범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2. ‘죽음에 이르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죽음
1)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
하이데거는 그의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의 첫머리에서 이 논문의 의도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구체적으로 수행하는 것”이고, “시간을 모든 존재이해 일반의 가능한 지평으로서 해석하는 것은 이 논문의 당면 목표”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는 ‘존재한다’는 표현을 오래 전부터 사용해오면서도, 이 말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결코 대답할 수가 없기 때문에,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다시 제기할 필요가 있고, 또 우리는 이 ‘존재’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곤혹스러워 할 뿐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기 때문에 우선 이 물음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다시 촉구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취지에서 하이데거의 사유는 존재 일반의 의미를 밝히려고 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하이데거의 사유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다. 그러면 하이데거가 이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풀어 가는 실마리는 무엇일까? 그 존재 문제의 실마리가 되는 것이 우리들 자신인 인간이다. 그에 의하면, “수행되어야 할 물음에서 물어지는 것은 존재이다.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규정하는 그것이다. 존재자가 어떻게 설명되든 존재자는 존재를 기반으로 해서 그 때마다 이미 이해되고 있다. 존재자의 존재는 그 자신 존재자가 아니다.”(§.2, S.6, 소광희, P.11)라고 한다. 여기서 존재는 존재자와 구별되고 있다. 존재자와 구별되는 존재란 그 존재자를 존재하도록 하는 근거라고 보기 때문이다. “존재는 항상 어떤 존재자의 존재이지만, 동시에 존재는 존재자의 한 유(類)가 아니고, 존재는 존재자로서 개념적으로 파악될 수 없으며, 존재는 존재자와 같은 그러한 것은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존재는 모든 존재자를 초월하는 것이며, 존재는 ‘초월 그 자체’이다. 이 점이 그가 강조해 마지 않는 소위 ‘존재론적 차이’(ontologische Differenz), 즉 ‘존재와 존재자의 구별’(GP 321쪽)인 것이다. 이렇게 존재는 ‘존재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 점을 여러 곳에서 힘주어 강조한다. 전통적인 존재이해는 이 근본적인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으며, 그것이 존재이해를 오도해 온 측면이 있다고 그는 보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는 어디까지나 존재자의 존재이며,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규정하는 바의 것, 존재자가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그 때마다 이미 이해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즉 존재는 존재자와 전혀 무관한 것도, 또 전적으로 동일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올바른 존재이해를 위해서는 우선 이 양자의 올바른 관계를 제대로 파악해 두어야 한다.”
그런데 “존재가 ‘물어지는 것’이고 또 존재가 존재자의 존재를 의미하는 한, 존재물음에서 물음이 걸리는 것은 존재자 자신이다. 이 존재자는 말하자면 자기의 존재를 겨냥해서 캐물음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존재자가 자기 존재의 성격들을 왜곡되지 않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면, 그 존재자는 자기 측에서 미리부터 있는 그대로 접근 가능하도록 되어 있어야 한다. 존재물음은 물음이 걸려지는 것을 고려해서 존재자에 이르는 올바른 접근방식의 선행적 확보를 요구한다.”(§2. S.6, 소광희, p.12). 그러나 우리가 ‘존재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많은 것을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예를 들면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우리들이 이것저것과 관계 맺고 있는 것 전부가 존재하는(있는) 것이고, 우리들 자신의 본질도 상태도 역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존재사실과 존재상태도 존재한다. 이와 같이 존재는 존재사실과 존재상태에도, 실재성, 전재성(前在性), 존립, 타당성, 현존재에도, ‘주어져 있다’에도 (자리잡고) 있다(§2. S.6~7, 소광희, pp.12~13). 이렇게 되면 도대체 존재의 의미를 어떤 존재자를 상대로 하여 파악할 것이며, 또 어떤 존재자에 의해 존재가 開示되도록 해야할 것인가? 그 출발점은 임의적인가 아니면 어떤 특정한 존재자가 존재문제를 성취할 경우에는 우위를 가지는 것일까? 어느 것이 본보기의 존재자이고, 또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우위를 가지는 것인가? 존재 일반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서는 이러한 물음들이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필요하게 되는 것이 “존재를 관찰하는 방법 및 존재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것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본보기가 되는 존재자를 올바르게 선택할 가능성을 준비하고, 그 존재자에 거침없이 도달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이다.”(§.2, S.7) 그런데 관찰하는 일, 이해하고 파악하는 일, 선택, 접근을 묻는 일의 구성적인 태도들인데, 바꿔 말하면 이것은 어떤 일정한 존재자의 존재양식이다. 결국 그것은 묻는 자인 우리들 자신인 바의 존재자의 존재양식이기도 하기 때문에, 존재물음의 완성은 존재자묻는 자를 그 존재에 있어서 통찰함을 의미한다. 이 물음을 묻는 것은 존재자 자신의 존재양식으로서 그 존재자에 있어서 ‘물어지는 것’, 즉 존재에 의해 본질적으로 규정된다. 하이데거는 이 존재자를 가리켜서 현존재(Dasein)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이 존재자는 특히 묻는다고 하는 존재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자이다. 이와 같이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존재자가 현존재이고 그것은 바로 인간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특히 이 묻는 것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자, 즉 현존재인 평균적 일상적인 인간의 분석을 실마리로 하여 존재에의 물음에 답하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의 의미에 대한 분명하고 통찰력 있는 문제제기는 존재자(현존재)를 그 존재에 관하여, 미리 적절하게 분명히 해둘 것을 요구한다.” 여기에 하이데거가 시도하는 현존재 분석의 의의가 있고 또 그 때문에 그의 존재론이 현존재의 분석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이데거는 현존재 분석으로부터 존재론을 시작하는가? 그것은 현존재가 모범적인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해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현존재가 그것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태도를 취할 수 있고, 또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든 태도를 취하는 그 존재 자체를 실존”이라 부른다. 또 “이 존재자의 본질규정의 수행은 어떤 사상의 ‘무엇’을 진술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이 존재자의 본질은, 자기의 존재는 그 때마다 자기 자신의 존재로서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현존재라는 명칭은 이러한 존재자를 특징짓기 위한 순수한 존재표현으로서 선택된 것이다.”(§4. S.12)라고. 하이데거는 이 현존재가 자기의 존재에 있어서 존재 자체를 문제삼는다는 점에서, “즉 스스로 있으면서 이 있음 자체를 문제삼는다는 점”에서 존재적으로 탁월하다고 본다(§4. S.12). 이 때문에 현존재가 모범적인 존재자로 선택되는 것이다. 현존재가 모든 다른 존재자에 대해 중첩된 우위를 갖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곧 모든 존재론을 가능케 하는 존재적․존재론적 조건이 되는데, 이는 바로 이 존재론적인 현존재의 존재이해 안에 세계의 이해와, 세계 내부에서 접근 가능한 존재자의 존재의 이해가 등근원적으로 포함될 수 있기 때문에, 이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을 통해서, 그로부터 비현존재적 존재자를 주제로 하는 제 존재론 등 기타 모든 존재론이 비로소 생겨 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존재가 모든 존재론의 가능조건이라고 하는 바로 이 점으로 해서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은 ‘기초적 존재론’의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서술에서 우리는 왜 하이데거가 인간의 존재를 존재 문제의 실마리로 삼았는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파악했다. 정리해서 다시 말하면, 하이데거는 존재 자체의 의미를 해명하기 위하여 인간 존재, 즉 실존을 통로로 삼았다. 인간은 ‘거기(Da)’에서 자기 자신, 타자, 여러 가지 존재자들이 열어 보여지고 있는 바의 ‘세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고, 더구나 항상 이미 어떤 방식으로 그것들의 존재자와 실천적으로 관계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언제나 이미 일정한 ‘존재이해’(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양식을 분석하는 것에 의하여 존재 일반의 의미를 해명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양식은 인간에 있어서 본질적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Dasein)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현존재로서의 인간은 ‘실존’으로서 규정되는 것도 이미 보았다. 인간이라는 존재자에 있어서 존재가 어떻게 드러나게 되는가를 파악하기 위해, 이러한 현존재로서의 인간의 일상적인 존재양식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2) 세계-내-존재
하이데거에 있어서 ‘현존재’라 불리는 인간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즉 그것은 어떤 존재양식을 하고 있는가? 우선 인간이라는 존재자는 일상적으로는 여러 가지 도구적 존재자와 계속해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일에 관여하고 있다, 어뗜 것을 만든다, 어떤 것을 정리하고 돌본다, 어떤 것을 사용한다, 어떤 것을 포기하고 분실한다, 시도한다, 성취한다, 탐지한다, 물어본다, 고찰한다, 서로 토론한다, 규정한다 등등과 같은 방식으로 도구적 존재자와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간다. 이런 방식들이 인간이라는 현존재의 ‘배려’(Besorgen
)라는 존재양식이다(§12, S.56~57, 소광희 옮김, pp.84~85). 이 배려한다는 존재양식은 현존재가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라는 근본적인 존재구조에 근거하고 있다. 이 ‘세계내존재’가 존재하는 양식은 “컵 안에 있는 물, 장농 속에 있는 옷과 같이, 다른 존재자의 안에 있는 존재자의 존재양식’(§12)과 같은 것은 아니다.
인간은 이와 같은 양식으로 ‘세계 안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세계’(Welt)란 “현존재가 현존재로서 살고 있는 곳”(§14)이고 그 안에서 우리는 필기도구, 재봉도구, 작업도구, 여행도구, 측량도구들을 배려 속에서 만난다. 현존존재가 배려 속에서 만나는 존재자가 도구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하기 위한 어떤 것’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존재양식을 취하는 도구적 존재자는 ‘지시하면서 지시를 받는다’고 하는 존재구조를 이루고 있다. 도구는 그 도구의 성격에 따라 필기도구, 펜, 잉크, 종이, 밑받침, 책상, 램프, 가구, 창, 문, 방 등과 같이, 언제나 다른 도구에의 귀속성에 의존해서 존재한다. 즉 이것들은 서로 지시하는 관계에 있다. 이 상호 지시의 관계 전체는 결국 현존재의 일정한 존재양식에 귀속하게 된다. 궁극 목적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방금 열거했던 펜, 잉크, 종이 밑받침, 책상 등과 같은 도구들은 방이라는 도구 전체 속에서 서로 연관되어 있다. 또 그것들은 현존재의 ‘연구하다’라는 하나의 존재양식을 위하여 존재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세계는 이러한 상호 지시연관의 전체를 의미한다(§15).
이와 같이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현존재)은 본래 도구적 존재와 사물적 존재와 같은 존재자의 의미 연관 속에 존재한다. 현존재의 이러한 근본 존재양식이 ‘실존’(Existenz)이다. 다시 말해서 현존재는 실존이라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실존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존재를 묻는다’는 의미이고, 다른 말로 하면 ‘자기의 일정한 존재양식에로 던져서 기획한다’는 의미이다. 현존재가 도구적 존재자를 발견하고 그것에 배려하면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은 현존재의 이러한 존재양식 때문이다.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는 자기 존재에 있어서 이해하면서 이 자기의 존재에 대해 태도를 취하면서 실존한다. 또 현존재는 그때마다 자기 자신으로 있다. 이러한 것이 도구적 존재자와의 배려적 교섭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다. 현존재는 항상 이미 세계와의 친밀한 관계 속에 있다. 그러나 한편 세계와 맺는 친밀함은 일상적인 현존재가 도구적 존재와의 배려적 교섭에 몰입하여 그러한 존재자에 자신을 잊고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을 의미한다(§12). 이것은 현존재가 가장 자기다운 존재 가능성을 잊어버리고 물적인 것에 붙잡혀 있는 존재양식이다. 다시 말해서 일상적인 현존재는 자기를 상실한 자기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비본래적인 실존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인간을 현존재라는 술어로서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앞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현존재는 항상 따라다니는 죽음과 관련하여 순간마다 자기의 종말을 예측하고 있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Sein zum Tode)로 규정되기도 한다(§50, S.251). 이렇게 인간의 존재양식을 ‘죽음에 이르는 존재’로 파악하는 것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에서 전개되는 죽음에 관한 그의 논의이다(§46~§53).
3) 현존재에 있어서 죽음의 의미
현존재가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항상 어떤 형태로 죽음과 관계하면서 살고 있다는 의미다. 인간(현존재)이 늘 죽음과 관계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항상 죽음과 관계하는 이 현존재에 있어서 죽음이 가지는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하이데거가 죽음을 파악하는 방식은 좀 새롭다. 왜냐하면 그 이전의 철학자들의 죽음에 관한 이해가 주로 형이상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면, 하이데거의 그것은 비형이상학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죽음을 존재의 이해를 분명히 하기 위한 중요한 현상으로 본다(§47). “사망(Sterben)은 죽음(Tod)이 존재론적으로 각자성(Jemeinigkeit)과 실존(Existenz)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나타낸다. 사망은 어떤 사건(Begebenheit)이 아니라, 실존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현상(Phänomenon
)이고, 그리고 그것은 어떤 두드러진, 특히 한정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47, S.240) 여기에서 죽음의 각자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나의 죽음이라는 뜻이지 남의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들이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죽음은 대부분 남의 죽음(타자의 죽음)이다. 친한 사람의 죽음을 당했을 때에 우리는 매우 슬퍼한다. 그러나 아무리 친한 사람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자의 죽음이지 나의 죽음이 아니다. “타자의 사망에 임해서 우리는 한 존재가 현존재(또는 생명)라는 존재양식으로부터 ‘더 이상 현존재가 아님으로 급변한 것으로 규정되는, 이 기이한 존재현상을 경험할 수 있다”(§47. S.238)고 해도 이 경우에도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타자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고, 기껏해야 늘 거기 [죽음의 현장](소광희 옮김, p.342)에 있을 뿐이다.”(§47, S.239) 이렇게 하이데거는 죽음을 일반적인 의미와는 달리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나타내는 말도 달리 사용한다.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죽음’(Tod)은 “자기의 죽음을 향해 있는 현존재의 존재방식에 대한 명칭”으로서의 ‘사망’(Sterben)(§49, S.247)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것은 의학적 개념인 ‘失命’(Existus)나 생명체의 종말을 의미하는 ‘끝장’(Verenden)도 아니고 또 일반적인 의미로 생을 마치는 것을 의미하는 ‘종명’(Ableben)도 아니다.”(§49, S.247)
이와 같이 하이데거는 사망이라는 의미에서 ‘현존재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단지 생물적인 것이 세상을 떠나는 것’과 구별한다. 그는 생물적인 것의 종말을 나타내는 술어로는 Verenden(끝장)을 사용한다. 생명의 종말과 현존재의 종말을 구별함으로써 ‘현존재가 세상을 떠나는 것’ 즉 ‘사망’을 다른 것으로부터 분명하게 차별화 한다(§47, S.240~241. 소광희 옮김, p.344). 그러므로 하이데거에 있어서는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은 죽는 것이 아니라 다만 ‘생명을 마칠’(Verende) 뿐이다. 그들은 죽지 않는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만이 죽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만이 죽음을 이해하고 있다는 데서 근거한다.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한 이해는 죽음과 삶을 대립적으로 또는 연속적으로 파악되거나 또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점으로 생각한다든지 하는 차이는 있어도, 말하자면 죽음과 삶은 각각 독자적인 실체로서 다루어져 왔다고 할 수 있으나, 하이데거는 죽음이 삶과 동시적인 인간의 가능성, 즉 죽음은 삶의 한 현상이라고 보고, “가장 넓은 의미로는 죽음은 생의 한 현상이다. 생은 세계내존재도 거기에 속하는 하나의 존재양식으로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존재양식은 현존재에 결여적으로 정위함으로써만 존재론적으로 확정될 수 있다.”(§49, S.246, 소광희 옮김, p.352)고 한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죽음은 현존재가 그때마다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의 존재 가능성이다. “현존재 자신은 죽음과 함께 자기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에 있어서 자기에게 다급하게 다가선다”(§50, S.250). 이제 실존으로서의 현존재는 존재의 가능성과 더불어 죽음의 가능성도 동시에 가지는 존재이다. 현존재에게는 살아간다는 것이 죽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현존재의 죽음은 ‘더 이상 현존재일 수 없다’는 가능성이다. 현존재가 이런 가능성으로서 자신에게 다가설 때, 현존재는 다른 현존재와 갖는 모든 교섭을 끊지 않을 수 없다. 이 가능성은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면서 가장 극단적인 성격을 띤다. 현존재는 존재 가능으로서 죽음의 가능성을 뛰어넘을 수 없다. 죽음은 현존재의 ‘절대적 불가능성’이라는 가능성이고, 따라서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으로서 죽음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현존재 자신이 죽음을 이미 잉태하고 있다고 하는 의미에서 이제 죽음은 확실한 것이고, 이 확실성은 모든 순간에 현존재 자신에게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은 이제 현존재에게 아주 가까이 임박한 것이 된다. 이러한 가능성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을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개시되어 있고, 더욱이 ‘자기를 앞지른다’는 방식으로 개시되어 있다는 데 있다”(§50)고 한다. 이상으로 현존재에 있어서 죽음의 윤곽은 어느 정도 드러났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의 실존에 있어서 현존재는 이미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 가운데 던져져 있다. 현존재는 자신이 죽음 속에 던져져 있다는 것을 아직 명시적으로 절실하게는 알지 못한다. 즉 죽음이 세계내존재에 속한다는 것 그 자체를 현존재는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50, S.251). 그러면 현존재가 자신이 죽음 속에 던져져 있다는 것을 더욱 절실하게 알게 되는 것은 무엇으로 인해서인가? 하이데거는 그것을 “불안의 심정성(Be- findlichkeit der Angst)”(§50, S.251)이라고 한다. 현존재에게 엄습해오는 “죽음 앞에서의 불안은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존재 가능에 직면한 불안이다.” 죽음이 불안한 것은 단적으로 현존재의 존재 가능 때문이다. 이 불안(die Angst vor dem Tode)은 자신의 생명이 끝난다고 하는 것에 대한 공포(einer Furcht vor dem Ableben)와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현존재의 근본 심정성이며, 현존재가 자기의 종말을 향해 던져진 존재로서 실존한다는 데 대한 개시성”이다(§50, S.251). 공포는 그 대상이 있지만, 불안은 구체적인 대상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무섭고 어쩐지 기분이 나쁜 것이다. 왜 그럴까? 죽음에 대한 불안은 불안 가운데서도 최대의 불안이라고 하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는 죽음에 대한 불안은 무(無)와 관련되어 있다는 데에 그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무는 그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그 자신의 대상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빼앗아버리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대답도 역시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한다. 죽음 앞에서의 불안은 자기 존재의 無化에 대한 불안이다. 이렇게 해서 현존재의 죽음, 즉 사망(Sterben)은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존재 가능을 향해 던져진 존재라고 하는 실존론적 개념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4) 죽음에 이르는 존재와 현존재의 일상성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는, 존재하는 한, 부단히 이미 자신의 ‘아직 아님’으로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존재는 이미 언제나 자신의 종말로 있기도 하다. 죽음이란 말이 의미하는 끝남은, 결코 현존재의 ‘끝막음’이 아니라, 이 존재가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는 것이다. 죽음은 현존재가 존재하자마자 그 현존재가 인수한 하나의 존재방식이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죽기에 충분할 만큼 늙어 있다.”(§48, S.245). 이와 같이 현존재는 항상 가능성으로서의 죽음과 관계를 맺고 있다. ‘죽음에 아르는 존재’인 현존재에는 죽음이 임박해 있다. 왜냐하면 현존재가 본질적으로 ‘자기보다 앞질러 가서 존재한다’고 하는 실존의 존재양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실존하는 한, 또 이미 이 ‘자기의 실존의 불가능성’으로서 죽음 속에로 던져져 있다. 그러므로 현존재는 죽음에 대한 불안이 항상 따라다니지 않을 수 없다. 현존재는 죽음에로 던져져 있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이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기분 나쁜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한 불안이 기분을 나쁘게 하기 때문에, 일상적인 현존재는 항상 ‘세계’에 몰입해서, 세인의 존재양식 속에 도피하여 세인의 죽음에 대하여 빈말을 지껄일 뿐이다. 이와 같이 자신이 스스로 인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죽음을 은폐하고 회피하는 것이 일상적인 현존재의 비본래적인 ‘죽음에 이르는 존재’임이 분명해진다. 이 ‘죽음에 이르는 존재’의 성격을 하이데거는 실존, 현실성, 퇴락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이러한 개념들은 죽음의 실존론적 개념을 구성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죽는다는 것( Sterben 사망)은 그 존재론적 가능성의 점에서 관심(마음씀)에 근거한다(§50, S.25, 소광희 옮김, p.359). 죽음에 이르는 존재와 마음씀 사이의 연관은 현존재의 일상성을 통해서 밝혀진다.
그러면 세인의 빈 말 속에 놓여 있는 심정적 이해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를 어떻게 열어 보이는가? 또 세인은 현존재의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면서 대응하는가? 어떤 심정성이 또 어떤 방식으로, 죽음에 맡겨져 있음을 세인에게 열어 보이는가? 하는 물음들이 어떻게 해결되는가?
하이데거에 의하면(§51. S.252 이하), 죽음에 이르는 존재에 있어서 현존재는 하나의 두드러진 존재 가능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해 태도를 취하지만, 일상성의 자기는 세인이고, 세인은 공공적 피해석성에 있어서 구성되고 또 그것은 빈 말 속에서 언표되므로, 빈말은 일상적 현존재가 죽음에 이르는 자기의 존재를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 해석하는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일상적 존재의 존재양식은 바로 사람이 죽는다고 할 때의 그 <사람은 죽는다>라는 말을 분석하면 드러나게 되는데, 이 말에서 드러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 죽음은 규정되지 않은 어떤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어디에선가 찾아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아직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렇게 걱정할 것은 아닌 것이다. 둘째, 죽음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 즉 세인에게나 해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로부터 이제 ‘죽는다’는 것은 현존재에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특별히 누구에게 속하는 것이 아닌 어떤 사건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본래 죽음은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는 것이 본질이다. 그러나 죽음은 일상적으로는 수시로 일어나는 사건처럼 여겨지게 되고 죽음의 가능성의 성격은 은폐됨과 동시에 몰교섭성과 뛰어넘을 수 없음이라는 죽음의 두 계기마저 은폐되어져 버린다. 이제 세인은 죽음에 이르는 가장 독자적 존재를 자기에게 은폐하는 것을 정당화하려고 하는 유혹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을 애써서 잊으려고 하는 것이고, 그런 세상 사람들 틈에 끼어서 죽음에 대해 태연한 척하는 것이고, 또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여기에 현존재의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인 존재 가능으로부터의 소외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51. S.254).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것은 현존재의 ‘퇴락’이라는 존재양식이다. 죽음에 이르는 일상적 존재는 퇴락하는 존재이고, 그것은 죽음으로부터 끊임없는 도피로서 그 모습이 드러난다. ‘세인(das Man)'은 이러한 죽음으로부터는 퇴락하면서 도피하고, 평균적인 ’아무도 아닌 자’에게 일어나는 죽음인 것처럼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하이데거는 이렇게 표현한다. “그 때마다 나의 것인 독자적 현존재가 현실적으로 언제나 이미 죽으면서 있다는, 즉 현존재가 스스로 종말에 이르는 존재 속에 있다는 이 현실을 현존재는 죽음이란 일상적으로 남들에게나 발생하는 사망사건이라고 변조함으로써 자신에게는 은폐한다. 그리하여 그 사망사건은 어쨌든 그 자신은 물론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더욱 분명하게 보증해주고 있다.”고(§51. S.254). 세인은 죽음의 ‘자기의’라고 하는 가장 독자성, 몰교섭성, 확실성, 추월 불가능성을 은폐하고, 애매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익명적인 ‘세인’은 죽는 것이 아니라 ‘실명’(Ableben)(§48. S.242)할 따름이다. 이것은 현존재의 본래적인 존재양식은 아니다. 이러한 존재의 이해방식은 결국은 자신을 남과 빠꿀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들이 세계로부터 자신을 이해할 때는 이렇게 자신의 존재마저 도구와 같은 것으로 보게 된다. 일상적인 현존재로서의 인간은 죽음에 대한 불안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대개는 거기로부터 눈을 딴 데로 돌려서 도피해버린다.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이런 상태를 가리켜서 ‘퇴락(Verfallen)’이라고 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가 실존하는 한, 그는 현실적으로 죽는다. 그러나 대개는 퇴락의 방식으로 죽는다”고 한다. 이러한 상태에 빠져 있는 인간을 가리켜서 하이데거는 ‘das Man'(세인)이라고 부른다.
자신을 일상적이고 평균적인 ‘세인’과 같이 보는 이러한 존재 이해의 방식은 결국 자신의 죽음까지도 도구나 타자의 것으로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자신을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할 때인 것이다. 인간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살고 있다. 혹은 가능성을 미래로 향하여 열면서, 그것에 향하여 살고 있다. 인간은 돌이나 동물과 달리, 아무리 막연할지라도 미리 어떤 목표를 설정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가능성의 실현을 기대하거나 이러저러한 가능성을 생각하고 고민하거나, 때로는 절망하거나 혹은 또 그 나름으로 만족하거나 하면서.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어떤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들 개개의 가능한 미래에 대한전망은 자신이 살아 있다고 하는 최대이자 가장 극단인 가능성의 위에서, 비로소 성립하는 가능성인 것이다. 죽음은 모든 가능성이 끝나는 것이므로, 죽는 것을 가능성이라고 하는 것은 좀 이상하지만, 우리들은 아직 죽지는 않은 것이므로 역시 가능성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또는 모든 가능성이 끝날 가능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가능성은 원리적으로 실현되지 않는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실현되었을 때에는, 그것을 경험할 본인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계획이 가능성(dynamis)으로부터 현실(energeia)로 바뀔 수는 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최후의 가능성만은 가능성인 채로 끝나는 것이다. 이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머무는 죽음에 진지하게 직면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진정한 출발점이라고 보는 것이 하이데거의 입장이다.
이미 ?존재와 시간?의 논의에 입각하여 그 대강의 윤곽은 파악하였다. 이제 그것에 의거하여 하이데거가 말하는 그 ‘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란 어떤 것일까?
첫째, 나의 죽음은 살아있는 내 자신의 가능성이다.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닌, 가장 내 자신다운 일이다. 죽음이란 나라고 하는 인간이 언제나 스스로 인수해야 할 가능성이다. 죽음이 아니고 다른 일이라면, 내 대신에 누군가 내 가까이 있는 사람이 그 일을 인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만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나 대신에 누군가가 死地에 가 준다고 하는 일은 있을지도 모른다. <대역의 죽음>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지만, 그 죽음은 그의 죽음이지, 나의 죽음은 결코 아니다. 대역의 죽음에 의하여 나 자신으로부터 죽음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닌 것이다. 그 사람이 내 대신 죽어주었기 때문에, 나는 이제 죽지 않아도 좋아졌다, 불사하게 되었다는 식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의 죽음은 누가 떠맡을 수 없는 것이고, 또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닌 내 자신의 가능성이자, 내 자신이 떠맡아야 할 가능성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내 자신의 존재는 내가 스스로 떠맡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절대로 도구와 남이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죽음은 얽매임이 없는 가능성이다. 자신의 존재는 타인으로 대신하게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달리 표현하면, 인간의 존재가 고독하다고 하는 것이다. 아무리 친하고 변함없는 애정으로 맺어져 있다 해도 자기 자신이 죽을 때, 인간은 각자 혼자서 죽어 가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지켜보거나 슬퍼해 주거나 하여 주더라도, 죽을 때는 역시 혼자인 것이다. 함께 죽어 줄 사람이 있어도, 자신의 죽음을 인수하는 것은 그 혹은 그녀가 아니라, 바로 나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상상해보면, 자신이 본래 얼마나 고독하게 존재하는 개체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것을 내 자신은 체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죽음이라는 현실에서는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로, 죽음은 추월할 수 없는 가능성이다. 우리들은 미래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일을 계획한다. 여러 가지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절박한 일이 생기면, 당초의 계획은 바뀐다. 우리들은 여러 가지 가능성 가운데서 가장 절박한 가능성에 먼저 몰두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제일 절박한 것은 사실은 죽는다는 것의 가능성인 것이다. 예를 들어, 앞으로 해야 할 여러 가지 일은 계획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직무상의 일이든, 영업상의 것이든, 아니면 쇼핑이나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과의 데이트 등의 일들일 수 있다. 그러한 일들이 자신에게 있어서는 모두 그때마다 절박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내가 살아있는 한에서는 계획대로 추진될 수도 있고 또는 취소되거나 연기되거나 변경될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음은 사정이 다르다. 내가 다른 일로 취소하거나 연기하거나 변경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누구든지 항상 가지고 있는 <죽을(존재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가능성에 몰두하여 이 문제를 안전하게 하여 두지 않으면, 그 이외의 모든 가능성은 있을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우리에게 있어 죽음은 뒤로 미룰 수 없는 가장 절박한 가능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개개의 가능성을 뛰어넘어서 그것들의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죽음이라는 최종적인 가능성에까지 앞질러가야만 비로소 나 자신이 존재자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우리들은 존재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진정한 의미에서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 ‘세인’의 존재양식으로 살아가는 태도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 자신의 죽음은 확실히 다가올 가능성이면서도 그것이 언제 올 것인지 그 시기는 미정이다. 미래의 언젠가 반드시 다가올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발생기는 시기를 알 수 있으면, 어떤 형태로든 대비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은 확실히 그 시기는 불확실」(Mors certa, hora incerta)하다는 말처럼, 그것이 도래할 확실한 시점을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죽음이 기분 나쁜 것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존재의 끝은 우리들의 곁에는 아직 와있지 않다. 그러나 언젠가 오는 것은 확실하다. 언제 오든 당장 자신에게는 아직 오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예상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이다.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고 하는 것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죽음은 가능하다고 하는 사실일 것이다. 그것은 아무런 예도 없이 찾아온다. 준비할 틈도 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죽음은 언제라도 <생각하기보다도 더 빨리> 찾아올 수도 있다. 청춘에 요절한 자를 보고 우리는 애석해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너무 이른 죽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죽는 본인에게는 죽음이 언제든 <너무 이른>죽음일지도 모른다. 과실은 익어야만 떨어질 수 있고, 예술가의 작품은 그것이 다 완성되어야만 끝난다. 그러나 인간은 오래 살아서 완성되고 성숙된 다음에야 세상을 떠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죽음은 두려운 것이고, 분한 것이고, 불안한 것이다.
이와 같이 “죽음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끝남은, 결코 현존재의 ‘끝막음’이 아니라 이 존재자가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죽음은 현존재가 존재하자마자 그 현존재가 인수할 하나의 존재방식”이고, 또 그런 현존재로서의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죽기에 충분할 만큼 늙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48. S.245). 여기에 죽음에 대한 하이데거의 이해가 색다른 인상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것은 죽음의 의미를 해명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죽음을 실마리로 하여 실존으로서의 인간의 존재를 해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내 자신의 소중한 가능성으로부터의 도피하여 일상 속에 안주하여버릴 것이 아니라, 나라는 인간 존재가 ‘죽음에 이르는 존재(Sein zum Tode)'임을 직시함으로써, “일상적으로는 애매한 형태나 전도된 형태로 임하고 있는 죽음을 정면에서 다시 응시하는 것에 의하여, 자신의 삶을 전체로서 자기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리는 것이 아닐까? 죽음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하이데거는 존재론으로서의 철학의 기초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사색하는 것은 “철학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불가결한 실존적인 태도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또 자신의 존재가 매우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동시에 타인의 존재도 매우 소중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자신의 죽음의 가능성을 정면으로부터 계속 응시하는 것은 <인간에 있어서 진정한 사회성>의 성립을 위해서도” 절대로 필요한 기본적인 태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4. 결어
죽음에 대한 하이데거의 사유를 추적하는 가운데서 우리가 만났던 ‘세인(das Mann)’으로서의 현존재는 자기 존재에 직면하는 것이 아니라, 비본래적인 존재양식으로 불안으로부터 달아나는 모습의 인간이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바로 현대에 사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과도 너무나 닮아 있는 것 같다. 첨단의료기술이 발달한 오늘날 그 첨단의료장비가 갖추어진 병원에서 연명장치에 의존하여 가족으로부터 떨어져서 격리된 상태로 죽어 가는 것이 오늘 날 대부분의 사람들의 죽음의 방식이 되고 있다. 이런 죽음이 아마 P. 아리에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부정된 죽음”이 아닐까?
본론에서 살펴보았듯이 현존재에 있어서 죽음은 최대이자 최종의 가능성이고, 그것을 자각적으로 인수할 수 있는 것은 선구적으로 자기의 가능성을 사유할 수 있는 본래적 실존으로서의 현존재뿐이다. 그것은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에 있어서 가능하다. 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은 현존재가 살아 있는 한 가능한 것이고, 현존재가 가능성을 달성하면 삶은 없어지고 죽음도 없어진다. 이러한 죽음의 이해는 사후의 존재를 문제삼는 것과는 다른 새로운 관점임에 틀림없다. 인간 존재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가능성으로서 소유한다고 하는 것만이 확실해진다.
오늘날만큼 타자의 죽음이 논의의 대상이 된 적이 없다. 또 죽음이 인간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적도 없었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존재론이고, 직접적으로 인간의 윤리적인 삶을 구체적으로 논하는 것은 아니지만, 죽음에 대한 인간 존재의 분석은 사후의 세계를 무대로 하는 것은 아닌 만큼 우리들에게 인간의 生과 死를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하나의 관점을 제공하는 것이어서 앞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충분히 있어 보인다. 뿐만 아니라 죽음을 직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애써서 달아나려고 하거나 부정하려고 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죽음에 대한 하이데거의 이해는 충분한 메시지를 주고 있다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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