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나뭇잎숨결 2022. 1. 29. 09:39
 
 





인간 본성론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주제 교양


1. ‘人間本性論’이 왜 중요한가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아니면 악한 존재인가? 이 질문은 지난 2천 여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혀온 문제이며, 또한 ‘잘 나가는’ 철학자들 거의 대다수가 달라붙어 설전을 벌인 주제다. 그렇다면 수천년에 걸친 고민과 논쟁 끝에 도달한 어떤 합의가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인간 본성론’에 관한 한 어떤 합의도 정설(定說)도 없다. 즉,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보는 주장도 일리가 있고,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어, 어느 한 주장을 취할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문제를 검토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 이에 대한 관점은 개인적인 차원은 물론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우리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란 원래 악한 존재라고 보는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과 인간은 원래 선한 존재라고 보는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다. 또한 사회도 마찬가지다. 사회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인간 본성론에 대한 입장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난다. 이게 무슨 말인가는 뒤에서 자세히 검토해 볼 것이다. 둘째, 학문적인 차원에서 사회에 관한 정치, 경제 이론은 대개 자기 나름의 인간 본성론에 근거하여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현재까지 나온 정치, 경제 이론은 모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인간 본성론에 대한 규정을 근거로 해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가 사회를 분석하는 각종 이론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인간 본성론에 대해 검토해야 한다.


2. ‘이기적인 인간’- 홉스(Hobbes)의 인간 본성론


 
  <토마스 홉스>


홉스(Hobbes)1)는 우리에게 ‘사회계약설’을 주장한 학자로 널리 알려져있다. 많은 사람들이 홉스하면 떠올리는 말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다. 그런데 바로 간단한 이 말 속에, 근대 이후 서양에서 인간 본성론에 관한 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주장이 내포되어 있다.


홉스를 비롯한 다른 사회계약론자들, 즉 로크(J. Locke)와 루쏘(J.J. Rousseau)는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기 위해 맨 먼저 인간의 자연상태는 어떠한가에 대해 논술하였다. 홉스에 따르면, 인간의 자연상태란 바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다. 그리고 인간이 짐승처럼 이런 투쟁 상태에 빠지는 것은, 인간 본성이 바로 ‘이리와 같이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고 하는 홉스의 주장은 무슨 심오한 논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 즉 우리 모두는 전적으로 이기적이고,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타인들을 이용하려 한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홉스는 묻는다. 우리는 왜 집을 나설 때 문을 잠그는가? 왜 우리는 돈지갑을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 넣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다른 사람들은(그리고 나 자신도) 틈만 나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고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은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존재다. 그리고 이런 인간이 모여 사는 ‘자연상태’는 자연히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가 된다. 자기 생명과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의심하고 경계해야 하며, 언제 잔인한 죽음이 나에게 미칠지 몰라 공포에 떨며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홉스는 말한다. “(자연상태에서) 인생은 고독하고, 가난하며, 추악하고, 야만스러우며, 짧다.”
 
그러나 이런 홉스의 주장에 대해 우리는 즉각 반론을 펼 수 있다. 우리는 길가에 있는 거지를 보면 동정심을 느끼고, 또 많은 사람들은 자기보다 불행한 사람을 위해 돕지 않는가? 이에 대해 홉스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인간에게 자비심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면서 기뻐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홉스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능력있는 인간에게, 그 자신의 욕구를 성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타인을 도울 수 있는 능력도 자신에게 있음을 발견하는 것보다 훌륭한 논증은 없다.” 인간이 갖고 있는 동정심에 대해서도 홉스는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즉, “동정심은 타인의 불행을 보면서 자신에게 닥칠지 모르는 미래의 불행에 대한 상상 또는 허구”일 뿐이다. 결국 동정심이란 남에 대한 배려 때문에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관심 때문에 유발되는 것에 불과하다. 만약 동정심이 나 때문에 유발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심으로 남에게 어떤 관심도 기울이는 것이 아니다. 
 
홉스에 따르면, 이처럼 인간은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이기적인 인간들이 모인 사회에는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만이 유일한 규범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또 우리는 어떻게 사회를 유지하며 살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이 바로 ‘사회계약’이다. 이성을 가진 존재인 인간은 그냥 앉아서 자멸하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인간은 계약을 맺어, 이런 정글의 법칙을 끝낼 ‘리바이어던’, 즉 국가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계약을 ‘집행’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왜냐하면 설사 이기적인 사람들이 계약을 맺었어도 자신에게 손해가 되면 당연히 계약을 준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약이 집행되도록 하는 ‘강제력’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래서 홉스가 생각하는 국가는 막강한 힘을 가진 절대군주제 국가에 가깝다. 국가는 합법적으로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주권체로서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홉스에게 인간이란 이기적인 존재다. 이런 이기적인 인간들이 모여 사는 사회가 유지되려면 계약과 강제력이 필수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본성론에 근거한 하나의 중요한 국가와 사회 운영의 원리를 만나게 된다. 즉, 사회는 강력한 힘, 강제력에 의해 운영되어야 한다는 원리가 그것이다. 


홉스의 이런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인간 본성론은 이후 서구 사회과학 이론 전개에서 기본적인 인간관으로 자리잡게 된다. 먼저 ‘법치주의’를 보자. 왜 우리는 ‘인간’에 근거한 통치 - 예를 들면, 플라톤의 ‘철학자 왕’과 유가의 ‘성인군자’에 의한 통치 - 가 아니라, ‘법’에 근거한 통치를 해야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인 아니라 성인 할아버지라도 일단 권력을 잡게 되면 그 사람은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늑대’로 변할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인간은 원래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기적인 인간’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공평한 ‘법’에 근거해서 통치를 해야 하는 것이다.
 
‘권력분립’도 마찬가지다. 현대 민주주의론은 권력분립론에 근거하고 있는데, 그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지역적으로 권력을 나누는 것 - 연방제와 지방자치제 - 과 기능적으로 권력을 나누는 것 -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 - 이다. 이처럼 힘들게 권력을 나누어 놓는 이유도 역시 인간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자 왕’ 아니라 그 할아버지가 권력을 잡아도, 일단 권력을 잡는 순간부터, 그는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잇속을 차리는 이리로 변할 가능성이 있다. 이 때문에 누가 권력을 잡더라도 가급적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최대한 권력을 나누어 놓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권력분립론이고 ‘견제와 균형의 원리’(미국 권력론의 이론)이다.
 
좀더 최신의 이론을 하나 살펴보자. 이른바 ‘공공재(公共財 ; public goods)의 문제’를 논하는 ‘합리적 선택 이론(the rational choice theory)’이 그것이다. 이 이론의 기본 전제는,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이며, 또한 ‘효용 극대화’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지금 한강의 수질 오염은 심각하다. 이 때문에 서울 시민 개개인은 가급적 한강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런데 한강 근처를 산책하고 있던 나는 지금 몹시 ‘쉬’가 마렵다. 나는 이기적인 존재이고 또 효용극대화를 추구하는 존재인데, 과연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노상방뇨’를 감시하는 경찰이 없거나, 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쉬’해도 전혀 ‘쪽 팔리지’ 않다면 나는 ‘쉬’를 할 것이다. 왜 그런가? 우선 나는 합리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계산을 한다. 내가 지금 쉬를 하면 얻을 수 있는 ‘개인적인’ 이익은 어떤가? 무지하게 크다. 만약 ‘쉬’를 참는다고 할 때 한강 수질 오염의 개선을 위해 내가 얼마나 기여를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무척 작다. 왜냐하면 나는 약 1000만명이나 되는 서울 시민 중의 한 사람일 뿐이고, 내가 혼자 참았을 때 한강 수질 오염 개선에 기여하는 것은 1/1000만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쉬’를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공공재의 문제’이다. 즉, 이기적 존재인 인간 개인은 무슨 일을 할 때, 항상 개인에게 돌아오는 이익과 개인이 지불해야 하는 희생을 계산하고, 그것에 입각해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공공재 - 맑은 물과 공기, 교통 질서, 치안 유지 등 - 를 생산하는 데 어려움이 발생하게 된다. 단적인 예로 현재 우리는 선거일만 되면 젊은 사람들의 기권 때문에 골치를 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공공재를 공급하려면 어쩔 수 없이 ‘강제력’이 동원된다. 노상방뇨를 하거나 담배꽁초를 버리면 벌금을 내야하고, 교통법규를 위반하거나 공해물질을 배출해도 역시 벌금을 내야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이런 이론도 결국은 홉스의 문제 진단 및 해결책과 유사한 것으로, 모두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라는 ‘인간 본성론’에 이론적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다.


3. ‘경제적인 인간’- 공리주의의 인간 본성론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의 인간 본성론은 홉스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하면서도 그것을 좀더 발전시킨 것이다. 홉스가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라고 주장할 때, 그가 생각하는 ‘利己’의 대상은 폭넓은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해, 홉스에 따르면 인간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자기 보존(생명)이었다. 그리고 그밖에도 ‘희소한 것’은 모두 욕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공리주의는 주로 경제 영역을 중심으로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을 논한다.
 
공리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막연히 이기적인 존재, 탐욕스런 존재가 아니다. 즉, 인간은 ‘경제적인 효용극대화를 추구하는 존재’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이기적이면서도 계산을 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이에 근거하여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존재’다. 더 이상 인간은 ‘탐욕스런 늑대’가 아니라 ‘주판을 두드리는 합리적인 경제인’이다.
 
공리주의는 ‘인간의 행복’을 아주 구체적으로 생각한다. 즉,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사회의 정의이고 선이라는 것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사회 전체 또는 국가나 민족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행복이나 절대적 가치는 없다. 그 대신 개인을 단위로 하는 구체적인, 계산 가능한 행복만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어떤 마을이 있는데, 마을 사람이 모두 100명이고, 만약 그 중에서 80명이 행복하다고 느끼면, 그 마을은 60명이 행복하다고 느낄 때에 비하여 더 정의롭고 더 선하다는 것이다.
 
또한 공리주의에서는 인간이 이기적이고 타산적이며 동시에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이기심을 억누를 수 있는 제도나 질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제도나 질서는 홉스가 주장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홉스는 인간의 이기심을 막을 수 있는 ‘강제력’에 강조점을 두는 반면, 공리주의는 인간의 합리적인 ‘합의’에 강조점을 둔다. 따라서 공리주의에 따르면, 개인들의 합의에 의해 인간의 이기심을 막을 수 있고, 이에 근거하여 바람직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공리주의의 인간 본성론과 관련하여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이 바로 아담 스미스(A. Smith)의 인간 본성론이다. 우리에게 아담 스미스는 ‘자유방임주의’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사실 홉스나 공리주의의 인간 본성론에 토대를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아담 스미스는 인간이란 ‘이기적인 존재’이고, 또한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억지로 막을 수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이기심이라는 본성에 따라 최대한 이기심이 발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경쟁’이다. 즉,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희소한 자원을 놓고 당연히 경쟁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쟁을 통해 사회는 발전하게 된다. 비록 각 개인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이익을 주려고 전혀 생각하지 않지만, 결국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다른 사람의 욕망도, 자기 자신의 욕망도 충족시키면서 사회 전체의 이익과 발전을 가져 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상품의 품질을 높이고, 가격을 낮추어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려는 자본가(기업가)의 경쟁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하기 위해 국가나 정부, 그밖의 다른 그 무엇도 개인의 경제활동에 개입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바로 자유방임주의다. 
 
아담 스미스의 인간 본성론은 앞에서 살펴본 홉스의 그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우리는 아담 스미스가 제시한 인간 이기심에 대한 처방에서 홉스와는 다른 대안을 보게 된다. 즉, 홉스와는 달리, 아담 스미스는 똑같이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고 보지만 정반대의 처방 - 자유방임 상태에서의 경쟁 - 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아담 스미스의 대안(자유방임과 경쟁)은 홉스의 대안(강제력에 의한 통제)과 함께, 인간의 이기적 본성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전적인 해결책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라는 인간 본성론의 주장과 그것에 근거한 사회 이론의 전개를 살펴보았다. 이런 홉스와 아담 스미스의 대안 이외에도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을 막기 위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몇 가지 더 있다. 예를 들면, 개인의 자율과 책임, 윤리와 규범을 통한 해결이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교육’이 강조되고, 또한 전통과 규범, 관습이 중시된다. 그러나 이것은 만약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면, 이를 막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4. ‘창조적이고 인간적 유대감을 간직한 인간’ - 마르크스와 루쏘의 인간관


앞에서 살펴본 홉스와 공리주의, 아담 스미스의 인간 본성론이 서구 사회과학계의 ‘주류’라고 한다면, 그와는 다른 인간 본성론을 주장하는 ‘비주류’가 있다. 그것이 바로 마르크스와 루쏘의 인간 본성론이다.
 
 
마르크스(K. Marx)2)가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는 시각을 먼저 살펴보자.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성을 ‘그 자체’로 논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그는 구체적인 역사와 사회를 떠난 인간 본성이란 존재하지도 않으며, 또한 논의하는 것 자체도 
 
<마르크스>


의미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본성은 어떤가를 중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우리가 마르크스의 인간 본성론을 논할 때에는 항상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단편적으로나마 마르크스가 생각하는 인간의 본성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가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홉스나 아담 스미스가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원래부터 탐욕스럽지도 이기적이지도 않았다고 한다. 대신 인간은 ‘창조적이고 인간적인 유대감을 간직한 존재’다. 이는 마르크스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인 ‘노동’을 근거로 인간 본성을 보았기 때문에 나오는 주장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간은 노동을 통해 ‘형성’된다.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이나 말하는 능력은 모두 노동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또한 인간은 노동을 하면서 무리(사회)를 이루게 된다. 이처럼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노동인데, 바로 이런 노동 과정을 통해 인간은 창조적으로 된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먹고 살기 위해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인간은 창조적으로 된다. 또한 이런 노동 과정을 통해 인간은 인간적인 유대감을 갖게 된다. 즉, 함께 사냥을 하고 밭을 갈면서 인간은 서로에게 정을 느끼고 서로 돈독한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인종과 문화가 달라도 인간인 이상 서로에 대해 어떤 유대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창조적이고 유대감을 느끼는 본성은 잘못된 사회, 정치 제도에 의해 왜곡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노예제 사회에서 똑같은 인간인 노예는 더 이상 창조적인 삶도, 인간 사이의 유대감을 느끼는 삶도 살지 못한다. 봉건제 사회에서의 농노도 마찬가지다. 이런 인간 본성의 상실은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주의에서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그것이 이른바 인간 소외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인간 소외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이 생산한 ‘상품이나 화폐에 의한 소외’가 있다. 원래 상품이나 화폐는 모두 인간의 물질적 편의, 삶의 향상이라는 목적을 위해 인간이 만든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수단이 목적으로 바뀌게 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는 이윤(돈)을 추구하는 사회이고, 이윤(돈)이 모든 것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품과 돈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물신숭배 현상이다. 이외에도 ‘노동의 소외’가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원래 인간에게 노동은 창조적인 활동이며, 자기를 완성해가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이란 단순한 돈벌이 수단이며, 또한 자기의 뜻이 아니라 생계라는 ‘보이지 않는 끈’에 얽매여 강제로 해야하는 고역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인간이 노동에 의해 지배받는 노동의 소외가 생기게 되었다. 또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도 심각한 문제다. 전통시대와는 달리, 지금의 인간 관계는 대개가 다 계약관계(돈을 매개로 한 관계)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삶의 방향을 이끌어주고 소중한 지식을 전달해주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니라, ‘지식 상품’을 파는 서비스업 종사자와 교육 소비자의 관계로 전락했다. 직장에서 상사와 동료의 관계도 마찬가지고, 결혼도 계약관계로 변해가고 있다. 결국 이런 상황 하에서 사람들은 인간적인 유대감을 느낄 수가 없으며, 그 결과 사람들은 ‘이방인’이나 ‘고독한 군중’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 현상이다.
 
그렇다면 이런 인간 본성의 왜곡 현상(소외 현상)의 근본 원인은 무엇이며, 그것을 해결할 대책은 무엇인가? 마르크스에 따르면, 그 근본 원인은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개인적 성격’의 모순이라고 한다. 그냥 쉽게 표현하면 ‘개인적인 소유제도’가 가장 큰 문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산은 대개 사회적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자동자 한 대에는 약 10만개의 부품이 들어가고, 이런 부품은 한 사람이 만들 수 없다. 대신 여러 공장과 사람에 의해, 즉 사회적으로 만든다. 이는 중세 시대에 장인이 혼자 마차를 만들었던 것과 비교하면 커다란 차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렇게 생산은 사회적으로 하면서도 소유는 개인적으로 한다. 예를 들어, 노동자는 임금을 받고 기업가는 이윤을 가져간다. 그리고 이런 부의 분배는 주로 생산수단 소유에서의 차이 때문에 불평등하게 이루어진다. 이처럼 생산은 사회적으로 하면서 소유는 개인적으로 하는 데서 여러 가지 사회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소외 현상과 빈부격차다.
 
따라서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런 인간 본성의 왜곡 현상을 막는 유일한 길은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의 기본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다. 즉, 생산의 사회적 성격에 맞게 소유도 사회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개인적 소유제도의 철폐다. 이를 위해서 노동자계급은 단결해야 하며, 자본가계급이 순순히 자신의 소유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혁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인간 본성론이 홉스나 아담 스미스의 그것과 또 하나 다른 점은, 인간 본성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마르크스는 인간 본성이란 구체적인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 따라 형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원래 창조적이고 인간적 유대감을 지닌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게 왜곡되었지만, 공산주의 사회가 되면 충분히 바뀔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면에서 홉스나 아담 스미스가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원래 그런 것으로 보는 것과는 차이가 난다.
 
루쏘(J. J. Rousseau)의 인간 본성론도 마르크스의 그것과 유사한 면이 있다. 사회계약론자로서 루쏘도 자신의 이론을 전개시키면서 인간의 자연상태를 상정한다. 그러나 그 내용은 홉스의 주장과 다르다. 루쏘는, 비록 약간의 문제는 있지만, 인간의 자연상태는 평화롭고 평등한 상태라고 한다. 그리고 인간도 원래 그렇게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존재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던 것이 ‘사회상태’로 넘어오면서 사회 제도나 구조 때문에 심각한 인간 불평등의 문제가 발생하면서 인간 본성도 왜곡되었다. 그래서 루쏘는 ꡔ사회계약론ꡕ 첫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던 것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다. 그러나 인간은 모든 곳에서 쇠사슬에 얽매여 있다.”
 
그럼 이와 같은 사회의 문제와 인간 본성의 왜곡을 해결할 대안은 무엇인가? 루쏘는 마르크스처럼 혁명이나 사회주의 사회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잘못된 사회구조를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은 같았다. 구체적으로 루쏘는 국가에 의한 평등한 정책의 실현과 교육 등을 주장한다. 이런 루쏘의 주장은 그의 “국민은 다른 사람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해서도 안 되며, 자신을 팔아야 할 정도로 가난해서도 안 된다”는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마르크스와 루쏘의 인간 본성론을 살펴보았다. 마르크스와 루쏘는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창조적이고 인간적인 유대감을 간직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모두 이런 인간 본성이 잘못된 사회 제도나 구조에 의해 왜곡되었다는 데에 동의했으며, 따라서 그들은 인간 본성의 회복을 위해 사회 제도나 구조를 바꾸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이렇게 사회 제도나 구조가 바뀌면 인간 본성이 왜곡된 것도 해결될 것으로 보았다. 이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5. 동양의 인간 본성론


인간 본성론과 관련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동양의 철학자는 맹자(孟子)와 순자(荀子)다. 그리고 이들의 주장은 각각 ‘性善說’과 ‘性惡說’이라고 우리는 배운 적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화시키면 자칫 핵심을 놓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맹자>   


 
간단하게 당시 인간 본성론이 제기된 배경부터 살펴보자. 맹자가 살았던 시대는 전국(戰國)시대로 새로운 사회체제 형성을 위해 중국이 몸부림치던 상황이었다. 구체적으로 주나라의 지역분할 정치체제인 봉건제도에서, 왕(천자)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 즉 군현제(郡縣制)로 변화하는 시대였다. 이 때문에 크고 작은 전쟁이 잦았고, 그 결과 백 수십개였던 국가가 줄어 일곱 개의 강국이 자웅을 겨루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참담한 전쟁 상황 속에서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 본성에 대해 회의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 孔子가 살았던 춘추(春秋)시대에는 없었던 인간 본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인간 본성에 대한 회의 속에서 맹자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인간의 본성은 착하다’고 주장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맹자가 이런 주장을 한 근거는 비교적 간단하다. 사람들의 외모는 겉으로 보기에는 틀리지만 사실 공통점이 많다. 예를 들어, 신발을 만드는 사람들은 일일이 사람들의 발 크기를 재보지 않고 평균적인 치수에 맞추어 신발을 만들어낸다. 이는 사람들의 발은 수 천, 수 만 개이지만 발의 외모는 유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외모에 유사한 점이 있듯이, 인간의 심성 또한 그렇다.  즉, 사람들에게는 ‘도덕적 품성’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이 증거로 맹자는 몇 가지 예를 든다. 우리는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면, 대개는 달려들어 그 아이를 구하려고 한다. 우리가 아이의 부모로부터 보상을 받으려고 그러는 것도 아니고, 또 마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려고 그러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순수한 마음 -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 - 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맹자의 주장은 ‘착해질 수 있는 네 가지 실마리(四端)’라는 주장을 통해 더욱 확대된다. 또 사람들은 나무가 베어진 민둥산을 보고 ‘저 산에는 나무가 없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산에 나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즉, 사람들이 울창했던 나무를 베어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산이 민둥산으로 바뀐 것 뿐이다. 이처럼 현재 인간의 본성도 마치 사악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주변 환경이나 조건이 그렇게 만든 것이지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맹자는 이와 같은 주장(일명 ‘성선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단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착한 본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조건과 환경을 만들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맹자는 원래 인간의 본성은 착한데, 그런 인간의 본성이 잘못된 제도나 사회 구조 때문에 제대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인간의 원래 본성이 드러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바로 ‘왕도정치론’이다. 즉, 통치자는 무력이나 법에 의지해 백성을 다스릴 것이 아니라, 인(仁)과 예(禮)를 통한 정치를 해야하고, 그럼으로써 인간의 착한 본성이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왕도정치론과 함께 맹자나 유가에서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맹자의 인간 본성론을 앞에서 살펴본 서양의 철학자에 비유한다면 누구에 가까울까?  홉스나 아담 스미스보다는 차라리 마르크스나 루쏘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즉,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고 보기 때문에, 홉스나 아담 스미스처럼 인간의 이기심을 막기 위해 고심할 필요가 없다. 대신 그런 착한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사회 제도나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 면에서 마르크스나 루쏘의 주장과 통하는 면이 있다. 
 
다음으로 순자의 주장을 살펴보자. 그동안 순자는 ‘아성(亞聖)’인 맹자의 성선설에 맞서 성악설을 주장했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유가 철학 내에서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하고 순자가 성악설을 주장하게 된 배경이나 결론을 보면 양자의 차이점 못지 않게 또한 공통점이 있다.
 
우선 순자가 인간의 본성을 보는 관점은 맹자의 그것과는 다르다. 맹자가 인간의 본성을 주로 도덕적인 면에서 본 데 반해, 순자는 인간의 자연적이고 생리적인 욕구에 주목했다. 즉,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배고프면 먹고, 추우면 따뜻하게 하고, 피곤하면 쉬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욕구로 인해 인간은 누구나 이기심을 갖게 된다. 또한 이런 이기심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싸움이 생긴다. 전국시대의 참혹한 상황은 바로 이런 인간의 악한 본성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순자는 인간의 본성이란 악하다고 본 것이다.
 
순자가 맹자와는 달리 성악설을 주장한 것은, 이처럼 인간 본성을 다른 각도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맹자가 생리적인 욕구라는 측면에서 인간 본성을 본다면, 순자의 주장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었을까? 또 만약 순자가 맹자의 관점에서 인간 본성을 보았을 때 맹자의 주장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었을까? 역사에는 ‘만약’이란 없지만,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주장이 분명 서로 대립되지만 한편으로는 서로 보완하는 면도 있다고 유추할 수도 있다.
 
한편 순자는 이런 성악설을 근거로 어떤 주장을 전개했는가? 많은 사람들이 순자의 다음 주장을 무시하거나 잘 모르고 있다. 순자는 자신의 성악설을 기반으로 맹자와 비슷하게 올바른 정치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순자는 인간이란 생리적인 욕구 때문에 악한 존재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런 인간의 악한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순자는 ‘예(禮)’를 강조한다. 그런데 순자가 여기서 말하는 예는 공자의 예 - 주로 주나라 시대의 문물제도 - 와는 달라, 차라리 우리가 알고 있는 법과 제도에 가깝다. 즉, 순자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서는 예 -법과 제도 - 의 정비와 그것에 근거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또한 이런 악한 인간의 본성이 바르게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면에서 순자의 주장은 홉스의 그것과 유사한 면이 있으며, 결국 현실의 혼란을 바로잡을 수 있는 올바른 정치의 실현을 강조했다는 면에서는 맹자와 통하는 면이 있다.    
 
순자의 주장은 그후 이사(李斯)나 한비자(韓非子) - 이 두 사람은 순자의 제자였다 - 를 통해 법가로 흘러 들어가 법가의 인간 본성론을 형성시키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결과 법가의 인간 본성론과 정치론은 홉스의 그것과 거의 유사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맹자와 순자의 인간 본성론과 정치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6. 생물학적 결정론


한편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생물학적 결정론에서는 인간 본성론을 어떻게 다루는가? 아다시피 생물학적 결정론, 혹은 사회 생물학에서는 인간의 감정상의 선악이나 능력의 우열은 이미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개인이 지금 어떠한 상태에 놓인 것은 거의 대부분 유전적 자질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예컨대 동성 연애자는 기존의 설명 방식대로 그의 생활상 콤플렉스(특수한 경험이나 충격 등)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유전적 자질이 그렇게 되도록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성애는 이제 ‘생물학적 운명’이 된 것이다. 또 아이가 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 부모가 급하게 구하려는 마음이 우러나는 것도,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는 仁의 단서(仁之端)가 드러났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와 동일한 유전자를 세상에 많이 퍼트리려는 유전자의 이기심 때문인 것이다. I.Q의 경우,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조사 보고가 제출되었다. 남성보다 여성의 능력이 열등하다는 것은 굳이 과학적 증명을 통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경험이 가르쳐주는 바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적 부, 권력, 지위’ 등의 차이는 상이한 근본적인 능력, 특히 상이한 지능의 차이가 만든 결과인데, 그것은 이미 유전적으로 결정된 것이다. 이것은 성공한 집안의 가계를 조사해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생물학적 결정론에 따르면 지금까지 논의해 온 인간 본성론이 거의 무용지물에 가까워진다. 왜냐하면 어떠한 인간 본성도 이미 유전적으로 결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남는 것은 유전자의 이기심뿐이다.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면 인간 본성도 당연히 이기적인 것으로 된다는 논리만이 공허하게 맴돌 따름이다.
 
생물학적 결정론에 입각한 인간 본성론의 특징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생물학적 결정론이 자신의 논거로 내세우는 주장들에 대하여 몇 가지 의문과 비판을 제기해 보자.
 
먼저, 동성애가 유전적으로 타고났다는 주장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시절부터 제기되었던 논리다. 그런데 오늘날 동성애자는 예전에 비해 급격히 증가하였다. 갑자기 동성애자들이 자식을 많이 낳자고, 그래서 그들의 인구를 증가시키자고 결의라도 하지 않은 다음에야 이런 일이 생길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동성애에 대한 수많은 실험과 연구들은 동성애의 대부분이 어려서부터 겪어온 환경, 특히 이성에 의한 상처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는 점을 보고하고 있다.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는 부모를 단지 유전자의 이기심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산아제한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결코 설명할 수 없다.
 
백인의 I.Q가 흑인보다 높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다. 그러나 그 반증은 수없이 많다. 예를 들어 미국 북부의 흑인들은 남부의 백인들보다 I.Q가 높다. 이는 공장지대인 북부 사람들이 농경지대인 남부 사람들보다 머리 쓸 일이 더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아일랜드에서 이주해 온 백인들은 흑인들보다 더 I.Q가 낮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들은 미국에 거주하는 흑인들보다 더 교육환경이 나빴기 때문이다. 이런 실험 보고도 있다. 유태인 아이들 중 유럽계 유태인 아이들의 평균 I.Q는 85점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을 머리좋은 이스라엘계 아이들과 함께 집단농장에서 동일한 교육을 시킨 결과, 양쪽 다 동일한 평균 115점이 되었다. 이로 보건대 I.Q를 결정하는 것은 유전자가 아니라, 사회적 환경과 교육이다.
 
남녀의 능력 차이, 부자와 가난한 자의 능력 차이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은 유전적인 요인보다 환경과 교육의 차이에서 결정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이처럼 비과학적인 생물학적 결정론이 오늘날 유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1960년대 이후로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신우익 경향의 보수주의가 뿌리 내리는 역사적 배경을 먼저 검토해야 한다. 이 시기 영미는 대외적으로는 신식민지주의에 저항하는 제3세계 민중의 투쟁에 시달렸고, 대내적으로는 경기 침체와 이에 따른 실업이 증가하고 여러 형태의 사회 운동에 봉착했다. 이러한 대내외적인 도전에 대하여 지배 세력은 기존의 지배 질서를 정당화하기 위한 새로운 이념을 정립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신우익 이념은 단순한 보수주의를 넘어서서 구성원들 상호 간의 유기적 관계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생물학적 결정론은, 과학의 탈을 쓰고, 바로 이러한 신우익 이념을 뒷받침하는 극단적인 이론으로 등장한 것이다. 즉, 남성의 여성에 대한 우위, 부자의 빈자에 대한 우위, 이성애자의 동성애자에 대한 우위, 백인의 흑인에 대한 우위 등 모든 지배-피지배 관계를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된 유전적 요인으로 설명함으로써, 지배자의 우위를 당연시하고 피지배자들의 저항을 무마하려 했던 것이다.
 
생물학적 결정론은 홉스의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홉스가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인간관이다. 이러한 인간들이 모인 사회는 당연히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이다. 이 논리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사회를 단순히 개인들의 합으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즉, 사회는 개인의 합이다, 따라서 사회는 개인들의 성향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인간이 모여 만든 사회는 투쟁의 장이라는 논리인 것이다. 이에 대한 비판은 다음 주제 <개인과 사회>로 미루고, 여기서는 홉스의 이러한 ‘환원론’이 유전학적 결정론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는 사실만 지적하고자 한다.
 
유전학적 결정론은 ‘사회를 이루는 구성 요소로서의 개인’에서 한 걸음 더 나갔다. 즉, ‘개인을 이루는 유전자’라는 논리로 나갔다는 것이다. 이를 계열화시키면 ‘유전자 → 개인 → 사회’라는 도식이 성립된다. 홉스의 개인이 사회적인 요인과 무관하게 형성된 ‘늑대와 같은 인간’이듯이, 생물학적 결정론의 유전자도 개인의 경험이나 교육과 전혀 무관하게 처음부터 주어진 결정적 요인이다. 홉스가 인간의 본성이 어떠한 사회적 요인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본 것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적 결정론도 유전자의 이기심은 고정 불변의 것으로 본다. 생물학적 결정론은, 홉스가 국가의 강제력을 정당화한 것과 마찬가지로, 지배자의 우위를 정당화하는 논리다. 결국 생물학적 결정론은 홉스의 주장을 한층 심화시킨 이론이라 할 수 있겠다.


7. 인간 본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검토해야 하는 것은 인간 본성을 어떤 시각이나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왜냐하면, 똑같은 인간 본성을 이야기하더라도 보는 시각이나 관점에 따라 그 내용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먼저, 인간 본성은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는 것, 즉 고정불변의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다. 홉스나 아담 스미스가 이런 입장을 가진 대표적인 사람들로, 그들은 인간 본성이란 원래부터 이기적이고, 이런 본성은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는다고 보았다. 또 이와 비슷한 주장으로, 인간 본성은 원시 시대 인류의 생활 과정에서 만들어져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는 관점이 있다. 앞에서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정신분석학’으로 유명한 프로이트가 이런 입장을 갖고 있었다. 즉, 그에 따르면, 원시 시대에 인간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서로 투쟁을 했고, 이때 형성된 인간의 이기적이고 투쟁적인 본성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1996학년도 서울대 논술 문제의 지문이 바로 프로이드의 입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이외에도 현대 생물학의 연구 성과에 근거하여 유전자에 의한 인간 본성의 유전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처럼 인간 본성은 고정불변이라고 보는 입장에 따르면, 우리는 확고하게 인간 본성이 선하다 또는 악하다 단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관점도 있다. 즉, 인간 본성이란 사회와 역사 속에서 형성되거나 변하는 것으로, 고정 불변의 인간 본성이란 없다는 관점이 그것이다. 이런 입장에 선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마르크스다. 이 입장에 서면 인간 본성이 선하다 또는 악하다고 단정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그가 속한 사회나 역사의 성격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입장을 지지하는 논거로는 다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우선 인간의 본성이나 다른 동물의 본성은, 그가 처한 환경이 어떠한가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이 많은 실험이나 관찰을 통해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쥐는 넓고 탁트인 공간에서 생활한 쥐보다 더 사납고 공격적으로 된다. 또 풍족한 먹거리와 안락한 공간에서 생활하는 쥐는 그렇지 못한 쥐보다 온순하다. 비단 쥐뿐만 아니라 인간도 유사하다. 물론 만 명을 대상으로 실험 또는 관찰을 할 때 만 명 모두 이런 결과가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체적인 경향은 위와 같다.
 
다음으로, 인간의 본성뿐만 아니라 동물과 대비되는 존재로서의 ‘인간 그 자체’는 사회 속에서 형성된다고 하는 사실이다. 백인의 아이가 한국에서 자라난다면, 그는 외형상의 차이를 빼고는 한국의 아이들과 거의 같은 풍속과 말, 사고 방식을 갖게 된다. 이처럼 인간의 여러 속성은 사회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볼 때, 인간의 본성 또한 사회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인간의 사회적 속성의 대부분이 유전인자를 통해 후대에 유전되기보다는 다시 학습되는 것이라고 할 때, 인간 본성이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된다는 주장은 문제가 있다.
 
한편 인간 본성을 어느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인간 본성에 대한 주장은 달리 나올 수 있다. 먼저, 주로 인간의 생리적 욕구나 동물적 본능에 근거해 인간 본성을 보았을 때,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 착하거나 이타적이라고 주장하기 힘들다. 즉, 인간 본성을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인간은 다른 동물과 하등 차이가 없게 되고, 대개의 경우 인간 본성은 악하고 이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인간의 본성을 이성이나 도덕의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가 틀려진다. 이 경우에 인간은 자신의 생리적 욕구나 동물적 본능과는 다르게 또는 그것에 거슬러 행동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인간 본성은 착하다 또는 악하다,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두 관점 중에서 어느 쪽이 맞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두 관점 모두 틀렸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생리적 욕구나 동물적 본능도, 이성이나 도덕적 감성도 모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강도에서 어느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에게는 누구나 식욕과 성욕, 수면욕이 있으며, 누구나 이런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주로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원래 그랬는지 아니면 사회화를 통해 형성되었는지는 모르나(아마 후자가 맞을 것이다), 인간은 분명 이런 욕구와 본능을 억누르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이 두 관점 중에서 어느 일면만을 맞다고 보고, 그것에 근거하여 인간 본성을 논한다면 잘못을 범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마음에는 세 가지의 속성, 즉 에고(ego)와 이드(id), 그리고 슈퍼에고(superego)가 있다고 본 프로이트나, ‘두 마리의 말과 한 사람의 마부가 있다’고 본 플라톤의 주장이 맞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