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역사-발생적 관점에서 해명된 주체 개념

나뭇잎숨결 2022. 1. 29. 09:42
역사-발생적 관점에서 해명된 주체 개념


문 장 수** 경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주제분류】인간학, 형이상학
【주 요 어】주체성, 코기토, 주체철학, 주체해체, 주체복원
【요 약 문】
우선 논자는 역사-발생적 관점에서 주체 철학의 변형을 네 시기로 구분하고자 했다. 제 1 기는 데까르트에 의한 주체 철학 정립기이다. 제 2 기는 칸트에서 시작하여 후설과 메를로-퐁티의 현상학과 싸르트르의 실존주의에까지 이어지는 시기로 이를 논자는 주체의 구조 분석기라고 해석했다. 제 3 기는 실존주의 이후 등장한 프랑스의 구조주의적 흐름 속에서 해석된 주체 개념, 즉 정신분석학(프로이드와 라캉), 기호학(니이체에서 소쉬르를 경유하여 일반 기호학까지) 그리고 유물론(스피노자에서 시작하여 포이에르 바하, 마르크스를 경유하여 알튀세르까지)에 의해 해석된 주체 개념으로 이를 논자는 주체 해체기라고 해석했다. 말하자면, 인간은 죽었다고 선언된 시기이다. 그리고 제 4 기는 리쾨르의 해석학적 주체 개념으로 주체 복원기라고 해석했다. 주체 개념에 대한 이러한 역사적 발생들의 분석을 통하여 논자가 의도하고자 하고 강조하고자 하는 중심 관념 내지 결론은 이러했다. 우선 첫째로 주체 개념을 둘러싸고 있는 문제의 내용과 범위를 도식하는 것이었다. 둘째로, 주체 개념의 역사는 관념론적 정립(영혼 실체)에서 유물론적 반정립(신체적 마음)에로 진화를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셋째로, 주체 문제는 전통 철학적인 내성법에서 벗어나 다양한 과학적 방법론에 의해 재구성되면서 복잡성의 패러다임의 전형적인 한 테마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넷째로, 주체성 철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해방에 있다. 역사적으로 제시된 인간해방을 위한 많은 대안들 중에서도 노동 개념에 의한 인간해방이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대안들은 논자가 보기엔 결국 다음과 같은 의미를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비극은 오직 인간의 반성적 의식에 근거한다. 직관적 삶에 충실한 동물들에게는 비극은 없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반성적 인간의 이러한 모든 판단 중지를 갈구한다면 결국 잃어버린 동물성(반성 없는 직관적 행동에 만족하는 생)의 복원을 갈구하고 있다.




I. 서 론


여기서 말하는 역사발생학적 관점이란 발생학적 인식론에 고유한 두 방법인 정신발생학적 방법과 이것에 대비되는 역사발생학적 방법 중 후자를 당연히 지시한다. 잘 알다시피, 정신발생학적 관점이 한 개체로서의 개인이 유아에서 성인으로 발달하면서 어떤 특정의 개념을 어떻게 변형․발달시키는가에 초점을 맞춘다면, 역사발생학적 관점은 어떤 특정의 개념이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어떻게 변형되어 왔는가를 해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 발생의 문제는 결국 학문발생사, 즉 개념과학사의 내용을 구성할 것이다. 이에 자주 역사발생과 과학발생은 교환적으로 사용된다. 이런 맥락에서 본 연구는 주체 개념에 대한 과학적(학문적) 발생들을 탐구할 것이다.
실로 관념사 안에는 철학자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주체 개념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대개의 독자들은 우연적으로 접한 어떤 특정의 주체 개념 또는 자아 개념을 자기의 일생의 인생관을 결정하는 단초로 활용하고 따른다. 그리고 때때로 사람들은 자기의 그 특정의 주체 개념을 절대화하여, 모든 타자들의 인생관을 교조하려고 시도하기도 하며, 지나칠 경우엔 집단 자살이나 광신도들의 무모한 행동들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본 연구가 노리는 상호보완적인 세 목표 내지는 희망사항은 다음과 같다. 우선 첫째로, 다양한 주체 개념의 제시를 통하여 특정의 편견적인 주체 개념에 예속되어 있는 맹목적 추종자들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관념사 안에서 제시된 다양한 주체 개념들을 단순히 병렬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사이에 역사적 필연적 구조적 변형들이 있다는 것을 논증하고자 한다. 셋째로, 부수적 목표 혹은 철학교육적 목표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러한 변형 과정에 대한 정확한 구조적 분석, 즉 역사발생학적 분석으로서의 이 연구가 심리철학이나 주체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문제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연관 개념들의 전체적 관계성을 최대로 명료하게 표상하게 함으로서 주체 철학 강의의 역동성을 살리게 하는 한 계기 내지는 자료로 활용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감히 고대한다.
이에 논자는 역사-발생적 관점에서 주체 철학의 변형을 네 시기로 구분하고자 한다. 우선 제 1 기는 데까르트에 의한 주체 철학 정립기이다. 이는 의식, 사유, 주체가 동일한 지평의 것으로 이해되고, 나의 사유의 있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인식으로 정립되는 시기이다. 제 2 기는 칸트에서 시작하여 후설과 메를로-퐁티의 현상학과 싸르트르의 실존주의에까지 이어지는 시기로 이를 논자는 주체의 구조 분석기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 즉 자기 의식과 자기 인식의 분열의 구조와 이에 따른 인간의 비극적 운명의 의미가 제시되는 시기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아직 모든 의미는 의식의 지향성에서 정립되기에 인간이 여전히 의미의 담지자이다. 제 3 기는 실존주의 이후 등장한 프랑스의 구조주의적 흐름 속에서 해석된 주체 개념, 즉 정신분석학(프로이드와 라캉), 기호학(니이체에서 소쉬르를 경유하여 일반 기호학까지) 그리고 유물론(스피노자에서 시작하여 포이에르 바하, 마르크스를 경유하여 알튀세르까지)에 의해 해석된 주체 개념으로 이를 논자는 주체 해체기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인간은 죽었다고 선언된 시기이다. 그리고 제 4 기는 리쾨르의 해석학적 주체 개념으로 주체 복원기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방법론적 측면에서 볼 때, 제 1 기는 직관적 또는 내성법적 방법에 의한 접근이 지배적이었다면, 제 2 기는 인식론적, 분석적, 논리적 방법에 의한 접근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제 3 기는 인과적 과학적 체계적 구조적 방법에 의한 접근이 지배적이었다. 이에 비해 제 4 기인 해석학적 접근은 이러한 선행하는 모든 방법들을 수용하면서 특히 역사-비판적이고 변증법적인 방법을 지배적으로 활용한다. 리쾨르의 해석학적 관점에서 볼 때, 여기서 접근이란 근사법 또는 해석이라는 의미이며, 본질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접근이 본질과 전혀 무관한 환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해석 또는 접근이란 긍정적인 의미에서 상대적 진보적 인식의 확장을 함축한다. 말하자면, 논자는 일종의 진보주의를 지지하는데, 이러한 시기 구분과 그들 사이의 변증법적 진보 관계를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논자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리쾨르의 해석학의 본질적이고 일관된 기조이다. 이러한 예비적 고찰을 토대로 이하에서 각각의 시기에 고유한 주체 개념의 구조를 분석하고자 한다.



II. 코기토와 제 1 확실성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첫 번째 지식은 무엇인가? 데까르트 이후 오늘날까지도 그 지식은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알고 있다. 즉 사유하는 나의 존재성, 사유하는 내가 있다는 사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사유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나의 존재가 나의 사유에 선행할 수 없다는 것, 즉 나의 존재와 나의 사유는 동시동연적이라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사유한다는 것이고 사유하는 것이 존재의 유일한 방법이다. 여기서의 사유는 근본적으로 너의 사유도 그의 사유도 아니라, 나의 사유이다. 사유가 있다면 그것은 나의 사유이고 따라서 내가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즉 사유, 나 그리고 존재는 삼위일체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라는 것이다. 이것보다 명석 판명한 지식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나의 사유의 있음과 동시에 나의 존재가 드러난다는 이 명제가 왜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가장 명석 판명한 제 1 확실성인가? 이를 증명하기 위해 데까르트는 소위 방법적 회의를 수행했다. 그 방법은 문제의 인식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다면, 심지어는 가상적으로라도 의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확실하지 않는 인식으로 배제해 버리는 철저한 제거의 방법이다. 데까르트는 우리의 인식을 크게 세 가지 종류로 일단 구분한다. 감각-지각적 인식, 논리-수학적 인식 그리고 사유하는 나의 존재에 관한 인식이다. 감각적 인식들의 변화무쌍성은 도처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지만, 데까르트는 극단적으로 꿈의 가설을 가져와 감각적 지식들의 확실성을 제거한다. 즉 내가 꿈을 꿀 때, 내가 바라보는 동산과 집들의 실재성을 나는 조금도 의심 없이 확신하지만, 꿈에서 깨어나면 그 동산과 집들은 환상이었다는 것을 자각한다. 마찬가지로 일체의 감각-지각적 지식들 자체가 그대로 실재하는 사물 자체의 모습이라고 확신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흔히 우리가 말하듯이, 우리들의 일체의 감각적 인식들은 일장춘몽일 수 있다. 감각적 인식의 진리성의 기준은 사유와 존재의 일치의 문제이기에, 꿈의 가설로서 그것의 확실성을 회의할 수 있지만, 논리-수학적 인식들의 진리성의 기준은 개념들 상호간의 내적 관계이기에 꿈의 가설은 회의의 좋은 방법이 아니다. 이에 논리-수학적 인식들의 필연성을 회의하기 위해 데까르트는 악신의 가설을 가지고 온다. 만일에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문자 그대로 전지전능을 자기의 속성으로 가지기에 그가 맘먹으면 하지 못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하여 우리 인간을 기만하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우리를 기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a>b고 b>c이면, a>c이다”는 명석 판명한 필연성도 사실은 전혀 필연적인 것이 아닌데, 단지 우리들의 정신상에서 그렇게 느끼도록 신이 우리를 기만하고 있다는 가정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가정이 가능한 한 논리-수학적 인식의 필연성의 확실성도 회의할 수 있다. 그러나 데까르트에 따르면, 사유하는 나의 존재의 확실성은 꿈의 가설도 악신의 가설도 더 이상 효력을 미칠 수 없게 하는 확실성이다. 왜냐하면, 꿈 그 자체는 나의 사유의 한 모습이기에, 사유하는 나의 있음이 단순한 꿈 또는 환상이라고 해도, 꿈으로서의 나의 사유, 환상으로서의 나의 사유는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은 나의 사유가 없는데, 나의 사유가 있는 것처럼 신에 의해 기만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미 나의 사유의 존재가 또 다시 드러난다. 왜냐하면, 기만당한다는 것은 기만당할 수 있는 사유가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꿈이고 환상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일체의 논리-수학적 인식들의 필연성이 또한 허구라고 할지라도, 나의 사유가 있음은 더 이상 회의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이다. 이를 데까르트는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요약했다.



III. 주체의 구조 분석과 낙관과 비관의 이원성 : 자기 의식과 자기 III. 인식의 분열


그러나 이처럼 명석 판명한 제 1 확실성으로 해명된 코기토 개념도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하부 구조들의 분석에 몰두하면, 엄청난 모순들을 새로이 만난다. 말하자면, 우리가 분석하고자 하는 이 장의 주제는 칸트에서 싸르트르로 이어지는 주체 철학의 제 2 기의 주요 내용, 즉 주체 개념의 하부 구조 분석과 그것에서 해명된 자기 의식과 자기 인식의 분열 또는 모순의 양상이다.
주체 개념에 대한 칸트적인 구조적 분석에로 나가기 전에 데까르트의 코기토 개념을 에워싸고 있는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해야 할 것 같다. 우선 첫 번째 문제는 코기토와 신의 순환성의 문제이다. 사실 데까르트가 증명한 사유하는 나의 있음의 확실성은 순수 주관적 확실성일 뿐 전혀 객관적 확실성은 아니다. 즉 내가 사유한다는 것과 동시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은 오직 나의 사유상의 확신일 뿐, 나의 사유를 떠나서는 그것의 진리성을 전혀 보증 받지 못한다. 나의 주관적 사유의 차원에서는 나의 존재가 아무리 필연적이라 할지라도, 객관적 입장에서 볼 때 나의 존재는 단순한 우연적인 한 사실일 수 있다. 실로 우리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생각할 수는 없지만(생각이 있자마자 존재가 동반되기에), 사실적 차원에서는 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리고 실로 항상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즉 우리가 죽을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다. 여기서 데까르트는 나의 존재성의 객관적 확실성을 증명하기 위해 완전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증명해야만 했다. 그렇게 하여 전지전능한 신이 나의 존재를 보증한다면, 이보다 더 확실하고 객관적인 확실성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완전한 존재자로서 신의 증명은 데까르트에게 있어서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완전하다고 느끼는 경우는 결코 한 번도 없다. 즉 나는 항상 불완전하다고 자각한다. 그런데, 내가 이러한 불완전함을 자각하는 것은 내 안에 완전성의 관념이 있지 않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즉 배경 없이 전경의 인식이 불가능하듯이, 완전성 관념 없이 내가 불완전성의 관념을 가진다는 것은 모순이다. 따라서 나는 완전성의 관념을 지참하고 있다. 그런데, 완전성의 관념을 내가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은 내가 자작한 것일 수 없다. 왜냐하면, 불완전한 자가 완전성의 관념을 만든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가지고 있는 완전성의 관념의 원인은 실존하는 완전한 존재자라야 한다. 왜냐하면, 그 결과가 존재하는데, 그것의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원인이 결과보다 덜 완전한 것이라는 모순이 발생하며, 또한 신의 관념은 그 자체가 완전성 관념과 동의어이기 때문에, 그리고 완전한 것은 일체의 속성을 다 가져야 하기 때문에 존재성의 속성도 또한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순이다. 따라서 완전자로서 신은 존재하며, 신은 완전자이기 때문에 나의 존재도 창조할 수 있고 또 창조했다. 이렇게 하여 나의 존재는 이제 객관적 확실성을 보증 받는다고 데까르트는 확신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순환성의 오류가 있다. 나의 사유와 존재의 객관적 보증이 신의 존재 증명에 의존한다면, 신의 존재 증명은 나의 사유와 존재에 의존한다. 즉 신의 존재의 증명은 나의 사유상의 확실성일 뿐이다. 여기서 코기토와 신의 순환성이라는 데까르트의 첫 번째 모순이 나온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보면, 내가 존재한다는 확실성은 내가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즉 확실히 존재하는 나는 누구인가? 즉 나는 무엇인가? 말하자면, 나의 본질은 무엇인가? 여기서 데까르트는 확실히 존재하는 “나”는 나의 모든 표상들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자기 동일적으로 있는 실체라고 생각한다. 즉 여기서 데까르트는 “나”의 개념을 “자아”의 개념으로 바꾸고 “사유하는 주체”의 개념을 “실체”의 개념으로 바꾼다. 나의 표상들이 아무리 다양하다 하더라도, “의심하고, 이해하고, 의욕하는 것은 자아이다는 것은 자명하며, 이를 설명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도 첨가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자명하다”. 뿐만 아니라, 이 사유 실체는 나의 육체와 외적 세계의 존재의 확실성보다 먼저 주어지는 확실성이며, 사실 후자들의 확실성은 여전히 의심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입장은 데까르트로 하여금 심신이원론을 주장하게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정신과 육체의 상호 통일의 문제는 그로 하여금 심신상호작용을 거부할 수 없게 했다. 여기서 심신이원론과 심신상호작용이라는 데까르트의 두 번째의 모순이 발생한다. 이러한 모순의 해결을 위한 시도가 나중에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 또는 정신과 물체는 한 실체의 두 속성이라는 스피노자식의 새로운 정의를 강요했다.
그런데, 코기토에 대한 데까르트적 자명성은 다시 칸트와 싸르트르의 분석 하에서 세 번째 종류의 모순 내지는 역설을 함축하는 것으로 해명된다. 데까르트는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의 진리성은 추론적 진리가 아니라, 직관적 진리라고 주장했다. 즉 “사유하는 모든 것은 존재한다(대전제). 나는 사유한다(소전제).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결론).”라는 삼단 논법의 형식에서 나의 존재의 확실성이 증명된 것이 아니라, 사유하는 사람이라면, 자기의 사유와 동시동연적으로 자기의 존재를 직관적으로 확신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확신은 그 어떠한 종류의 확신보다도 우선적이고 회의불가능적인 확실성이라는 것이다. 즉 나는 내가 존재함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직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나 싸르트르가 보기에 나의 존재의 확실성의 직관, 즉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아는 것과 나를 확실히 직관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말하면서, 데까르트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확실히 직관할 뿐, 나 자신을 확실히 직관한 것은 아니며, 실로 나는 나 자신을 직관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 인간의 인식론적 운명이라고 주장한다.
보다 세부적으로 분석하면, 이러하다. 데까르트는 자아의 동일성을 실질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의식을 일종의 자기 동일적인 실체로 간주했다. 그런데, 이러한 자아의 동일성은 이미 동일화하는 의식의 활동의 결과이다. 동일화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양한 공간과 시간 안에 있는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잡다들을 추상화하여 하나의 의식으로 통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외적 세계의 표상이든 나의 내적 심적 상태의 표상이든 이러한 동일화의 활동 없이는 나의 의식으로 등장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순수 통일의 활동성 자체를 우리는 주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데까르트의 자아란 이런 사유의 가능성의 사전적 조건인 통일성의 기능을 지시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이러한 통일성 그 자체로서의 자기를 사유하고 표상 하려고 한다. 이 때, 표상된 그 자기가 순수한 자기라고 할 수 있는가? 이미 구성된 자기이다. 즉 우리는 구성하는 자기와 구성된 자기를 구분할 수 있다면, 구성된 자기는 항상 구성하는 자기를 전제한다. 즉 내가 의식하는 나는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내가 아니라, 이미 의식의 구조에 의해 구조화된 결과로서의 나이다. 칸트가 제시하는 인식의 가능성의 조건은 공간과 시간이라는 감성의 선천적 직관 형식과 오성의 12 범주의 종합이다. 따라서 결국 내가 공간화하고 시간화하는 능력이라면, 내가 나를 직관한다는 것은 공간과 시간이라는 직관 형식이 직관 형식 자신을 직관한다는 것이다. 이는 모순이다. 이를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 또는 자아는 주체의 종합 능력이라는 사전적 조건하에서 가능적 인식의 대상일 수 있다. 이처럼 주체를 순수 종합 능력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주체의 활동을 통해서만 우리 자신에 대한 모종의 인식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자기 의식은 자기 인식이 아니며 자기 인식일 수도 없다.
이러한 사태는 후설에 의한 의식의 구조 분석에서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후설에 따르면, 일체의 의식은 무엇의 의식이다. 즉 모든 의식은 의식 내용을 갖고 있다. 의식 내용 없이는 의식도 없다. 그런데, 의식과 의식의 내용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의식 내용 또는 의식 대상은 의식 자체와는 다른 것이다. 이제 의식이 의식 그 자신을 의식하려고 할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의식은 항상 자기 자신과 다른 어떤 것에 관계할 경우에만 의식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데가르트적 코기토도 순수 의식 그 자체가 아니라, 순수 의식의 대상으로서의 자기이다. 즉 데까르트의 자기란 이미 사물화되고 대상화되고 개념화되고 시간화-공간화된 내용으로서의 자기일 뿐이다. 따라서 예를 들면, 내가 나의 과거를 표상할 경우, 이 과거는 나의 과거이기에 나는 이제 나 자신을 인식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과거의 인식은 현재 여기서 그것을 표상하는 순수 의식의 활동성을 다시 전제한다. 그리고 내가 존재하려고 기투하는 것은 나의 기대이고 나의 미래적 의도 내용이다. 즉 나는 나의 미래의 의도를 내가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나를 인식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미래적 의도를 이해하는 나는 다시 그 하부 구조로 전제될 뿐 인식의 현전에 생생하게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를 싸르트르는 직접적(전반성적) 의식과 반성적 의식으로 구분하면서, 모든 자기 의식을 반성적 의식으로 간주한다. 그렇게 하여 그는 자기의 초월성, 즉 존재론적 자기와 인식론적 자기의 근본적인 분열을 우리의 운명으로 해석하는 비관론적 인간학을 구성했다. 즉 자기 이해는 단지 자기 의식일 뿐, 즉 왜곡되고 변형되고 매개된 자기일 뿐 직접적인 순수 모습의 자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의식은 자기 인식이 아니다”라는 칸트의 주장과 이것의 연장인 후설과 싸르트르적 의식의 현상학의 결과는 비관적 인간관의 본질을 구성한다손 치더라도, 아직 여기까지, 즉 칸트, 후설 그리고 싸르트르까지는 주체가 우주의 중심이다. 즉 칸트는 세계이든 자아이든 주체의 종합 능력의 사전적 조건 하에서만 가능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후설과 메를로-퐁티는 인식(connaissance)은 그것의 사전적 조건인 의미(sens)에 의존하는데 그 의미의 담지자는 바로 주체적 의식이라고 주장한다. 즉 모든 의식은 자기 자신과 다른 어떤 것에 관한 의식이지만―이를 의식의 지향성이라고 한다―, 동시에 그 의식 내용이 그 어떤 것이든 간에 이미 의식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면 의식은 자기의 어떠한 신출귀몰한 활동성을 통하여도 그것을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의식의 구조의 분석에 드러난 의식의 지위의 이원성을 극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 만사가 의식의 산물이지만, 의식은 그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맹인의 상태에 머문다. 이것은 분명 인간의 비극적 운명이다. 그러나 데까르트는 자기가 자기를 인식하는 것은, 거울이 거울 자신을 보는 것, 나의 눈이 나의 눈을 보는 것, 나의 손이 나의 손 자신을 잡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라 할지라도, 어떠한 대상적 인식보다도 직접적인 인식으로 이보다 더 확실한 인식은 없다고 생각했으며, 헤겔도 긴 변증법적 운동을 경유하지만 결국은 자기가 자기를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낙관론적 운명을 강조했다.



IV. 주체 해체의 세 가지 길


그러나 이러한 “주체” 개념은 20세기를 접어들면서 세 가지 방향에서 부정되기 시작하여 급기야 해체라는 선고를 받게 된다. 그 세 방향이란 프로이드에서 라캉으로 이어지는 정신분석학, 니이체와 소쉬르 이후 프랑스의 구조주의 언어학 그리고 이 양자를 참조하면서 마르크스를 재해석한 알튀세르의 유물론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세 입장은 데까르트가 사물들의 실재성에 대해서 부여했던 동일한 회의를 의식 그 자체의 실재성에 부여했다.
또한 주체 문제에 대한 이러한 세 접근법은 이전까지의 단순한 내성법적 명상적 논리적 분석에 의한 접근과는 다르게 과학적 체계적 구조적 접근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1. 정신분석학과 주체 해체

먼저 정신분석학에서의 주체 해체의 내용을 살펴보자. 자기의 모든 행동과 욕망을 의식할 수 있고 그리고 그것들을 자유 자재로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도덕적 책임감의 전제 조건이다. 실로 프로이드 이전까지는 이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은 우리는 우리들의 대부분의 행동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유와 욕망들을 의식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즉 이것들은 우리에게 무의식적으로 머문다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데까르트 이후 주체란 통상 의식 또는 사유와 교환적인 용어이다. 이 때 의식과 동의어로서 주체 개념은 자기 자신을 자기 스스로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를 무엇보다도 일차적인 특성으로 갖는다. 즉 의식, 사유 그리고 주체의 일차적 속성은 자유이다. 즉 그 누구도 사유하는데 구속을 느끼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나의 사유가 내 스스로 자유롭게 구성한 사유가 아니라,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그 어떤 무의식적인 것이 나로 하여금 이러저러한 의식적 사유를 갖게 한다면, 주체의 절대적 주권의 개념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주체의 전지전능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 주체적 자기와 전혀 다른 어떤 타자의 관점의 승리를 허락하는 것이다.
관념사 안에서 볼 때, 프로이드가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자는 아니다. 이미 라이프니츠가 지각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의식적 차원에서 선명한 지각을 갖기 이전에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미세한 지각이 있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라이프니츠는 무의식을 미세 지각으로 정의했다. 그리고 그 이후 베르그송이 또한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조금 직전에 우리의 의식에 현전시켰던 모든 기억을 생생하게 우리의 의식에 무한하게 보존시킬 수도 없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그때그때 행동에 유효하게 사용하고 도움이 되는 기억만 가지면 된다. 사실 기억은 현전적인 한 의식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한 번 지각한 것 또는 사유한 것은 저장되는데, 생생한 기억의 형태로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형태로 저장된다. 만일 우리가 본 지각들을 생생하게 의식 상태에 그대로 누적한다면 우리의 의식은 무한하게 넓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의식은 저 무수한 지각들로 폭발할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베르그송은 의식 하부에 신비한 무의식의 저장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동시에 우리가 체험한 모든 것을 의식할 수도 없고 오직 시간적 질서를 따라 계기적으로 의식할 뿐이다. 결국 의식은 하나의 작은 출입문이고 그 하부에 무한한 무의식의 창고가 있다고 가정된다. 이렇게 하여 라이프니츠와 베르그송의 무의식의 정의는 현존하지 않는 것 또는 지금 의식할 수 없는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프로이드의 무의식은 의식의 부재 또는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소극적 의식을 단순히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프로이드의 무의식이란 능동적인 심적 힘이다. 따라서 프로이드에게 있어서는 의식이 무기력하고 수동적이고 타성적인 사유라면, 무의식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능동적 행동으로 실질적 사유이다. 의식적 사유도 자기 자신이 복종하는 그 나름대로의 규칙을 가지고 있듯이, 무의식도 의식적 사유 규칙과 다른 생생한 규칙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의식과 무의식은 각각 상호 독립적인 체계를 갖는다. 그러나 이 둘은 전체로서의 정신 현상에 공존하는 두 가지 양태의 기능이다. 그런데, 프로이드는 의식적 체계를 다시 전의식과 의식으로 세분한다. 결국 이렇게 하여 무의식, 전의식 그리고 의식이라는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의 첫 번째 삼분법이 도출된다. 그러나 설명 단위로서 구분되는 체계는 무의식적 체계와 전의식-의식 체계라는 이분법을 활용한다.
프로이드의 전문적 분석에 따르면, 일체의 의식적 사유뿐만 아니라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표정, 제스추어, 병적 행동, 신경병리적 행동, 꿈 등은 무의식의 드러난 상징들이다. 즉 무의식적 실질적 행동의 의미(sens en acte) 없이는 어떠한 현실적 심리 현상(상징적 의미화)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의식할 수 있고 관찰할 수 있는 행동이나 말들은 이미 상징적 의미화(signification symbolique)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징적 의미화는 그 하부에 숨어 있는 의식되지 않는 실질적 행동의 의미가 드러난 모습이다. 즉 일체의 심적 생산은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무의식으로서의 이러한 실질적 행동 의미는 자기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자기를 숨긴다. 따라서 다양한 상징적 의미화들이 지시하는 정확한 실질적 행동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정신분석학적인 해석이 요구된다.
무의식이 이러한 모순적인 존재 방식을 드러낸다면, 그것은 무의식은 갈등적 대립 양상, 즉 대립적 힘들의 유희를 그의 본질로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심적 증상들은 이러한 무의식 단계에서의 모순적인 경향 내지는 힘들의 타협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사태를 설명하기 위해 프로이드는 이드(id), 자아(ego) 그리고 초자아(superego)라는 두 번째 삼분법을 상정한다. 첫 번째 삼분법과 두 번째 삼분법 사이의 관계는 이러하다. 이드는 무의식적이다. 이드를 구성하는 내용은 다양한 무의식적 욕망들, 성적 충동, 자기-보존 본능 등이다. 그런데 이드를 구성하는 이러한 다양한 요구들은 상호 대립적이다. 초자아도 무의식적이다. 초자아는 부모와 사회에 의해 강요된 금기들을 내면화하면서 구성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선천적 도덕 법칙을 지참하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 사회가 강요하는 금지 조항들을 내면화하면서 소위 양심이라는 사회 가치적 자아(초자아)를 구성한다. 초자아는 무의식적 충동들의 요구가 지나치게 표출되어 주체의 존립을 위협할 때, 이들을 검열하고 억압시키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아는 한편에서는 무의식적 체계에 관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전의식-의식적 체계에 관여한다. 우리가 이전까지 주체라고 간주된 자기 의지적 사유 의식이 자아이다. 이런 점에서 자아는 의식적이지만, 그러나 그 자기 통일적 의식 자아는 선천적 이성도 아니며 영원불멸의 영혼도 아니라, 먼저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나아가 사회적 일반적 타자에 나를 동일화시킨 무의식적 활동의 결과이다. 즉 세 가지 자아가 모두 무의식적 활동의 결과이다. 말하고 사유하는 자아는 이드적 자아의 욕구적 대립들과 초자아의 억압적 체계를 최대로 절충하여 타협적 방안을 무의식적으로 구성한다. 즉 무의식적 방어기재들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말하는 방어 기재란 완전 범죄에 상응할 수 있는 그런 완전한 속임수를 지시한다.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동이 교문 앞에서 배가 아파서 집으로 돌아와야 할 때, 의식적 자아는 배가 아프다는 것을 완전히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방어기재라는 것을 알자마자 더 이상 그것은 방어 기재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며, 이제 그보다 더 파괴적인 새로운 방어기재를 준비해야 한다. 이 세 자아들의 적절한 타협이 실패하면, 주체는 소멸의 위기를 갖는다. 신경증 환자들의 행동들은 사실은 자기의 상황에서 생존하기 위한 마지막 대안들인 것이다. 확대하면, 종교, 예술, 문학 활동들도 사실은 생물학적 요구들과 사회학적 가치들의 갈등에서 적절하게 적응하지 못한 자, 소위 사회적 부적응자들의 사회적 적응의 한 모습일 뿐이다.


2. 기호학과 주체 해체

이제 두 번째로 기호학적 경향에 의한 주체 해체의 내용을 살펴보자. 잘 알다시피,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가 제시한 인간 언어에 대한 구조주의적 해석 모델은 옐름슬레우에 의해 기호학적 모델로 일반화되었다. 그렇게 하여, 이러한 기호학적 모델은 언어에 대한 분석뿐만 아니라, 사회-문화 현상 연구의 방법론으로 확장되었다. 그런데, 언어학 연구에 고유한 협의의 기호학적 모델이든 이러한 언어학적 모델을 사회-문화적 현상의 연구에 적용한 광의의 방법론으로서의 기호학적 모델이든, 일체의 기호학적 모델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기본적인 전제 위에 서 있다.
첫째로, 언어는 랑그와 파롤로 구분된다. “파롤은 개인적이고 통시적이고 우연적이며, 나아가 단일한 과학이 다룰 수 없을 만큼 이질적”이다. 이에 반해 랑그는 약호 혹은 약호들의 집합이다. 즉 파롤에 메시지가 대응된다면, 랑그에는 약호가 대응된다. 따라서 메시지가 개인적이라면, 랑그는 집단적이다. 그리고 메시지가 시간의 통시적인 측면을 구성하는 사건들의 연속 속에 있는 시간적 사건이라면, 약호는 요소들의 집합, 즉 공시적 체계로서 시간 속에 존립한다. 그리고 “메시지는 의도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누군가에 의해 의미화된 것이다. 약호는 익명적이며 의도된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약호는 무의식적이다.” 그러나 이는 프로이드의 무의식과 다르다. 프로이드의 무의식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의식하지 못하는 “욕구”와 “충동”을 지시한다면, 랑그로서의 무의식은 비리비도적이며 문화적인 구조로서의 무의식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대립은 파롤로서의 메시지는 자의적이며, 우연적이다. 그러나 랑그로서의 약호는 체계적이며, 주어진 언어 공동체에 대해서 강제적이다. 이 때문에 언어학의 대상은 랑그이다. 그리고 랑그는 문집의 형태로 주어져 있는 사회적 약정 체계이기에, 랑그의 과학으로서의 언어학은 경험과학이다. 그러나 여기서 “경험적”이라는 용어는 단지 관찰 가능성의 우선적 역할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귀납적 조작들을 자기의 하부에 종속시키는 연역적 계산을 인정한다. 결국 언어학을 공시적 언어학과 통시적 언어학으로 구분할 때, 랑그의 언어학이 공시 언어학이라면, 파롤의 언어학은 통시 언어학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것은 상대적인 것이기에 절대적 객관성과 보편성을 이상으로 하는 과학의 이상에 부합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파롤의 언어학은 언어학에서 거의 무시되었다.
둘째로, 랑그의 체계에 한정하여 분석할 때, 문제의 그 체계에 속해 있는 그 어떠한 요소도 절대적인 요소는 없다. 즉 일체의 요소들은 상호의존적 관계에서만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따라서 언어는 상관관계적 형식일 뿐, 결코 어떠한 실체를 지시하거나 실체 자체가 아니다. 따라서 언어 속에는 오직 차이들만이 있다. 즉 일체의 언어적 표현들은 어떤 실체를 그 자체적으로 온전히 지시하거나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용어를 둘러싼 다른 용어들과의 대립성과 차이성의 조건에서만 소극적으로 모종의 대상을 지시한다. 즉 음운적 단계에서 “어”는 “아”와 “오”의 대립 속에서만 변별력을 행사할 수 있듯이, 어휘적 단계에서 “어머니”는 “아버지” 또는 “아들” 등과의 대립 속에서 모종의 의미를 제시할 수 있을 뿐, 그 자체가 직접 외적으로 실존하는 구체적 여인을 온전히 지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이중적 자의성 개념이다. 우선 외적 사물과 기호는 직접적 필연적 관계가 없다. 즉 “개”라는 소리와 글자는 외적 실존물로서의 구체적 “개”와 아무런 필연적 관계가 없다. 즉 언어는 약정적 체계일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언어 기호 내에서 기호는 “기표”(능기)와 “기의”(소기)로 구성되어 있다고 분석할 수 있다. 즉 기호 형식과 기호 내용 사이에도 아무런 필연적 관계가 없다. 즉 “개”라는 소리 또는 글자의 모습이 그것이 지시하는 의미, 즉 “네 다리를 가지고 있는 포유동물로서 애완 또는 식용으로 사용되는 가축”이라는 의미와 구조적 측면이나 형상적 측면에서 어떠한 필연성도 없다.
셋째로, 그런데, “개”의 의미를 구성하고 있는 이 표현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또 다른 표현들일 뿐 그 자체 아무런 실체들도 아니다. 즉 기의란 사실 상대적 구분일 뿐, 사실은 다른 종류의 기표일 뿐이다. 즉 우리가 의미라고 생각한 것은 기표의 기표이다. “외적 세계”, “본질”, “원초적인 것”, “체험”, “경험” 등은 언어로 번역되기 전의 어떤 대응물이 아니라, 언어적 기호가 구성한 또 다른 기표이다. 이런 맥락에서 “기표 우선성” 또는 데리다의 “흔적” 개념 등이 유래했다. 확장하면, 세상만사는 기표들의 유희이다. “기호학적”이라는 용어는 바로 “기표주의적”이라는 용어와 거의 교환적이다. 즉 기호학에서 정의하는 광의의 기호 개념은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자연적 현상으로서의 “지표”, 자연적 현상을 생략하거나 축소시킨 따라서 상대적으로 자의성이 거의 없는 “아이콘”, 도로 표지판이나 몰스 부호처럼 자의성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신호 체계” 또는 “상징 체계”, 그리고 완전히 자의적 관계인 “언어적 기호”를 포괄한다.
넷째로 따라서, 주체란 단순한 기호적 대립이 만든 하나의 기호일 뿐이다. 우리의 일체의 사유는 기호에 의존해서만 가능하기에 순수 의식, 순수 사유, 정신, 주체 등도 단순한 관계 개념이다. 즉 아버지의 의미가 어머니, 아들 등의 관계를 떠나서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듯이, 주체나 정신도 물질 등과 같은 대립적 기호에 의해 발생되는 기호 대립적 가치만 가질 뿐이다.


3. 유물론과 주체 해체

유물론적 전통에서 주체 해체는 스피노자의 기계론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되어 포이에르 바하, 마르크스를 경유하면서 심화되어 알튀세르의 우발적 유물론에서 그것의 완성된 개화기를 맞이할 것이다. 그러나 논자는 알튀세르의 마르크스 해석에서 구성된 주체 해체의 내용만 간단히 살펴보는 데 만족하고자 한다.
우선 알튀세르가 해석하는 마르크스의 반인간주의에 대해서 말하자면, 마르크스는 사회적 생활로부터 독립적인 의지의 자유 주체로서의 인간 혹은 인간의 본질 개념을 더 이상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논의의 장에서 완전히 배제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마르크스 그 자신의 모든 논의를 사회학적 전체성의 인과성에서 진행시키지, 여기에 인간학적 본질들을 전혀 개입시키지 않는다. 즉 알튀세르는 라깡이 심리학적 차원에서 심리학적 자아 개념의 허구성을 잘 해명했듯이, 마르크스는 사회학적 차원에서 사회적 자아의 허구성을 잘 해명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유주의 인간 개념에 따르면 나 스스로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사회적 삶에 참여하거나 거부하거나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사회적 행동들의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주관 자신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행동은 사회적 구조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성, 선험적 자아 등은 언어적 상징적 관념의 산물이고, 인간은 사회적 환경 속에서 살아 남으려고 투쟁하는 생물체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들의 사유란 대부분 자기의 육체를 존속시키려는 생존적 전략들이다. 이런 점에서 이데올로기적 환상에 대한 비판 위에서 성립되는 인간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인과성의 무지에 대한 스피노자의 비판, 상상적 단계 또는 상징적 단계에서 구성된 환상적 이상적 자아 개념에 대한 라깡의 비판, 인간의 종말을 고하는 푸코의 비판에 대응될 수 있다고 알튀세르는 평가한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알튀세르가 해체한 것은 목적론적, 선험적,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주체 개념이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현실적 주체, 즉 생물학적, 심리학적 그리고 사회학적 장 안에서 행동하는 개인이 아니다. 오히려 쾌락과 부를 의욕하고 분노를 느끼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출세를 지향하는 구체적 상황에서의 개인, 소위 실존적 주체를 강조한다. 그의 “실천”이라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실존적 주체의 다른 표현이다. “실천은, 항상 자기자신의 존재조건들에 종속하는 전화의 과정이다. 이 전화의 과정은, 자신의 존재조건들의 장 바로 그 안에서, 유일 절대의 진리가 아니라, 절대적일 수 없는 복수의 진리들 또는 부분적인 진리를 생산하는, 말하자면, 결과들 또는 인식들을 생산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실천은 담지자들을 갖지만 자신의 목표, 기획의 존재론적 또는 선험적 기원으로서의 주체를 갖지 않으며, 자신의 과정의 진리인 목적을 갖지도 않는다. 그것은 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이다.” 우리 각자는 우리의 생의 구체적 과정의 전체이다. 그러나 이 생적 현실, 즉 실천적 전체 과정은 아무리 탁월한 문필가도 아무리 전체적인 개념도 드러내거나 표상할 수 없을 것이다. 전통적인 우리의 이성, 선험적 주체, 영혼 개념은 조야하게 말하면, 귀신 개념에 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알튀세르가 해체하고자 하는 것은 영원불멸의 이러한 영혼 개념으로서의 주체이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서로 의사소통하고 의지적 결단을 내리는 그런 구체적 개인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의지적 결단이란 사실 유기체의 생적 본능으로 환원할 수 있고, 유기체의 모든 과정은 선적 인과성은 아니라 할지라도 구조적 인과, 생물학적 차원이든 심리학적 차원이든 혹은 사회학적 차원이든, 소위 중층결정으로 환원하여 설명할 때 우리는 보다 과학적 설명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 실체란 생존의 공동 장인 사회 안에 있는 개별적인 생물학적 인간 종들에게 이데올로기의 작용이 만들어 낸 효과이다. 말하자면, 라깡의 정신분석학과 푸코의 고고학이 잘 해명하듯이, 주체란 거울적 현상들의 실재성을 믿는 상상의 환상 또는 언어적 상징체계가 만들어 낸 개념적 체계에 대응되는 어떤 실체가 존재한다고 믿는 착각에 기인한다.



V. 폴 리쾨르와 주체성 복원의 전략들


리쾨르의 주체성 복원의 전략은 그 용어의 가장 철저한 의미에서 변증법적 방법과 역사 비판적 방법을 활용한다고 할 수 있다. 즉 리쾨르는 데까르트적 코기토의 명증성, 칸트와 싸르트르에 의한 자기 의식과 자기 인식의 분열적 구조, 그리고 급기야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 의한 무의식 개념, 구조주의 언어학에 의한 주체 해체, 알튀세르에 의한 인본주의의 이데올로기 비판 등의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너무나 잘 인식하고 있다. 주체 개념의 이러한 역사적 운명에도 불구하고 리쾨르는 어떻게 그것을 다시 복원하려고 시도하는가? 그 방법은 역사-비판적 방법과 변증법적 방법을 종합하는 리쾨르식의 방법, 소위 해석학적 방법이다. 즉 그는 한편에서는 데까르트적 코기토에 대한 칸트적 비판의 의미를 인정한다. 그러나 칸트적 해석은 오직 한 측면의 해석이다. 즉 인식론적 해석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해석의 결핍을 피히테와 나베르에 의한 존재론적 해석으로 보완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후설의 지각의 현상학에 의한 주체의 해석의 결핍을 리쾨르 자신의 의지의 현상학으로 보완한다. 그리고 피히테와 헤겔에 의한 관념론적 주체 해석의 결핍을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 의한 유물론적 해석으로 보완한다. 그리고 정신분석학적 해석의 결핍은 구조주의 언어학에 의한 주체 해석에 의해 보완되고 다시 구조주의 언어학(기호학)에 의한 주체 개념의 결핍은 리쾨르 자신의 담화의 언어학(의미론)에 의해 보완된다.
이러한 그의 역사비판적 변증법의 주요 내용들을 분석하기 전에 설명과 이해의 편이를 위해 우선 리쾨르로 하여금 주체 개념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을 추진케 한 그의 근본적인 신념을 요약하는 것이 좋겠다. 첫째로 리쾨르에 있어서 주체는 완결되어 있는 실체가 아니다. 둘째로 우리는 주체를 직접적으로 직관할 수 없다. 셋째로 따라서 시간과 역사에 따라 드러나는 다양한 모습들을 통해 우리는 주체를 이해해야 한다. 넷째로 이해한다는 것은 직접적 담화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학적 논의의 장에서의 이해란 본질적으로 텍스트를 독서하는 것이다. 즉 텍스트 해석이 중요한 문제이다. 이렇게 하여 그의 해석학적 방법이 탄생한다. 다섯째로 직접적 담화이든 텍스트에 의한 독서이든 일체의 사유의 운동은 언어 기호에 의해 진행된다. 따라서 주체의 이해는 주체가 수행하는 담화들과 그것들의 역사적 결과들인 텍스트들을 분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텍스트들에 대한 분석은 다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즉 기호학적 분석과 의미론적 분석이다. 이 양자는 철저한 배타적 관계이면서 동시에 상호의존적 관계이다.
그것이 직관철학이든 반성철학이든, 지각의 현상학이든 의지의 현상학이든, 주체의 원형학이든 정신의 목적론이든, 포괄적으로 말해서 관념론이든 유물론이든, 이러한 모든 이론들은 언어적 상징 기호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이론들이 모종의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기호학적 구조에로 다시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주체 문제까지 포함해서 일체의 것이 언어적 유희의 산물, 즉 단순한 언어 게임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데리다식의 해체론을 리쾨르는 거부한다. 그러나 우리가 언어적 기호를 사용하지 않고는 어떠한 의미 있는 객관적 사유도 교환할 수 없기 때문에 언어 바깥에 세계 실체와 인간 정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 그 자체 이미 언어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주체성의 복원을 위한 리쾨르의 전략의 가장 어려운 상황은 바로 기호론적 저항에 있다.
잘 알다시피, 이 기호론의 토대를 마련한 것은 소쉬르의 랑그의 언어학이다. 이에 리쾨르는 이러한 랑그의 언어학에 저항하기 위한 한 반명제로 담화의 언어학을 제안한다. 따라서 담화의 언어학은 리쾨르에 고유한 한 특별한 의미론이다. 조금 구체적으로 분석하면, 소쉬르는 언어를 구성하는 두 차원, 즉 랑그와 파롤을 구분했지만, 랑그만이 언어학의 대상이 될 수 있고, 파롤은 언어학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랑그는 보편적, 공시적, 불변적, 동질적, 구조적이라면, 파롤은 개별적, 통시적, 가변적, 이질적, 사건적(발생적)이기 때문이다. 즉 발화 사건으로서의 파롤은 일시적 발생이고 따라서 발생되자마자 시간과 함께 사라진다. 그러나 그 어떠한 파롤도 의미 있는 파롤이 되려면, 그것은 자기의 가능성의 토대인 사회적 인습 체계인 랑그의 규칙에 의존해서만 기능할 수 있다. 따라서 랑그만이 그가 가지고 있는 공시적 체계의 구조적 특성으로 때문에, 언어 과학의 유일한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리쾨르는 소쉬르가 버린 이 파롤도 언어학의 한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파롤이라는 이 용어를 담화라는 용어로 대체하면서, 담화의 언어학을 제창한다. 나아가 리쾨르는 소쉬르적인 랑그의 언어학을 기호학이라고 하고, 자기의 담화의 언어학을 의미론이라고 정의하면서, 양자를 대비시킨다. 리쾨르에 따르면, 이 담화가 랑그의 언어학보다 더 근원적인 언어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근거는 담화의 존재론적 선착성, 담화의 사건성과 명제성의 변증법, 담화 의미(meaning)의 두 측면인 관계 의미(sense)와 지시 의미(reference) 사이의 변증법, 그리고 말하기로서의 담화에서 글쓰기로서의 담화에로 발달될 때, 등장하는 이해와 설명의 변증법, 그리고 명제, 은유, 상징 그리고 주체의 생적 체험 사이의 상호 의존성과 순환성에 근거한 변증법 등을 심오하게 해명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리쾨르의 담화론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도달한 최종적 결론은 다음과 같은 역설이다. 명제적, 논리적 담화는 은유적 담화의 빙상일각이라면, 은유적 담화는 상징적 담화의 빙상일각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종류의 담화들은 실재 그 자체의 빙상일각이다. 말하자면, 명제의 토대는 은유이고, 은유의 토대는 상징이고 상징의 토대는 실재이다. 그리나 이러한 주장들 자체 이미 언어적 의미표현이다. 그 의미의 구성자와 담지자는 ‘나’라고 명명되는 주체이다. 그러나 이도 역시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근원적인 초월, 즉 심연, 틈, 분열이라고 명명되는 어떤 무엇을 자각한다. 이러한 지평에서는 세계의 초월성, 언어의 초월성 그리고 주체의 초월성 사이에 더 이상 인과적 선후를 따질 수 없을 것 같다. 세계, 언어 그리고 주체는 마치 삼위일체라고 할 만한 그런 어떤 것이다. 그러나 다시 사유, 의식, 언어는 세계와 인간 사이의 거리이면서 동시에 주체 자신에서 자기 자신까지의 거리이며 또한 인간의 위대성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비극의 근원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VI. 결론


주체 개념에 대한 이러한 역사적 발생들의 분석을 통하여 논자가 의도하고자 하고 강조하고자 하는 중심 관념 내지 결론은 이러했다. 우선 첫째로 주체 개념을 둘러싸고 있는 문제의 내용과 범위를 도식하는 것이었다. 둘째로, 주체 개념의 역사는 관념론적 정립(영혼 실체)에서 유물론적 반정립(신체적 마음)에로 진화를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셋째로, 주체 문제는 전통 철학적인 내성법에서 벗어나 다양한 과학적 방법론에 의해 재구성되면서 복잡성의 패러다임의 전형적인 한 테마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넷째로, 주체성 철학의 긍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해방에 있다. 즉 인간은 반성적 의식을 가짐으로 해서 자연적 대상 세계에서 초월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 때문에 자연적 대상물들이 갖지 못하는 불행 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불행 의식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초기 에피쿠르스 학파는 금욕과 절제를, 중세의 종교들은 피안적 세계에로의 도피를, 근현대 헤겔과 마르크스는 노동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결국 인간은 자기의 생존의 필요를 위해서 개발한 의식적 진화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이제 의식을 중단하고자 한다. 술, 담배, 마약 등이 감각적 마비를 통해 의식을 차단시키고자 한다면, 금욕, 종교, 예술, 참선 등은 의식을 통하여 의식을 극복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이런 것들 중에서도 노동을 통한 소외의 극복은 상대적으로 바람직한 것으로 고려된다. 결국 이러한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은 논자의 소신으로 귀결된다. 직관적 삶에 충실한 동물들에게는 이러한 비극적 반성이 없을 것이다. 반성적 인간의 이러한 모든 판단 중지의 갈구는 결국 잃어버린 동물성(반성없는 직관적 행동에 만족하는 생)을 복원하기 위한 방법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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