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다원주의 비판과 인간중심주의적 통치 원리

나뭇잎숨결 2022. 1. 29. 09:41

다원주의 비판과 인간중심주의적 통치 원리*1)

 

임 성 호**1)

 

Ⅰ. 서  론

   통치원리로서의 다원주의(pluralism)는 다양한 사회이익들의 자유로운 표출(ar-ticulation)을 중시하고 또한 그 사회이익들이 정부의 강제적 간섭보다는 그들간의 자발적 거래와 타협을 통해 공공정책(public policy)으로 집성(aggregation)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 오늘날 이 다원주의는 서구에서뿐만 아니라 비서구 신생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회에서 대중민주주의의 이상적 통치원리로서 교과서와도 같은 지향점이 되고 있다(March and Olsen 1986: 359). 그러나 겉으로만 다원주의를 내세우는 권위주의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다원주의 통치원리가 비교적 잘 작동되고 있는 서구의 미국이나 유럽 사회들도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을 겪고 있다는 것이 지배적 관측이다. 미국의 한 학자는 ‘정통성의 위기’(crisis in legitimation)라는 표현으로 미국 민주주의 체제를 진단하기도 한다(Dodd 1993). 기존 다원주의적 민주체제의 위기 상황은 여론 조사에 명백히 나타나는 대정부 불신감의 고조뿐만 아니라 투표율 하락, 전통적 정당체제의 와해, 정부내 정책결정과정상 교착상태의 증가 등에서도 관찰된다. 오늘날 민주주의 위기의 심각성은 시민들의 불신감 및 불만감이 단순히 몇몇 정책차원이나 정치인들에 국한되기보다는 정치체제 전반과 정책결정자들 및 정치권 거의 전체에 겨냥된다는 데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March and Olsen 1986: 342).

   이처럼 오늘날 민주주의가 현실에서 위기 증후군을 노정하는 상황에서 그것의 핵심 통치원리인 다원주의를 재평가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사실 다원주의에 대한 비판은 오래 전부터 다각도에서 진행되어 왔다. 상류 계층의 이익과 이익집단들의 좁은 사익(공공이익이 아니라)에만 유리한 통치원리라는 비판(Schattschneider 1960; Olson 1965), 절차적 형평성(procedural fairness)에만 치중하다보니 실제적 정의(sub-stantive justice)를 도외시한다는 비판(Lowi 1979), 개인주의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공동체 의식과 공공선을 추구할 여지가 없다는 비판(Sandel 1982, 1984; Mulhall and Swift 1992) 등이 이미 제기되어 왔다. 다원주의는 급진적 변혁보다는 기존의 틀 속에서의 점진적 변화를 선호하고 그에 따라 보수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는 맑스주의적 비판도 물론 빼놓을 수 없다.

   본고는 기존에 제기된 다원주의 통치원리의 여러 문제점을 재정리하기보다는, 필자가 보기에 다원주의의 가장 근본적 결함이지만 사회과학자들이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온 문제점에 초점을 맞춘다. 즉, 다원주의가 인간중심주의를 결여한다는 근본적 결함을 밝히고, 인간중심주의의 상실은 그 자체로서 규범적 문제를 야기할 뿐만 아니라 탈산업․탈주권국가의 전환기적 환경 속에서 다원주의가 통치원리로서 현실상 제대로 작동될 수 없도록 만든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본론에서 상술될 것이지만, 현대 대중민주주의의 통치원리로서의 다원주의는, 모든 시민은 각자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라 고정된(불변하는) 이익을 추구하며 통치는 시민들의 다양한 이익들의 중간점을 찾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제공하는 행위라는 기본 가정에 입각해 있다. 이 가정의 이면에 숨겨진 논리는, 인간은 내재적 의지를 갖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가치체계를 바꿀 수 있는 주체가 아니고, 특정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세력(혹은 집단, 정당, 정파)의 한 요소로서 최대다수로 구성되는 ‘승리 연합’(winning coalition) 형성을 위해 세어지고 동원되는 객체일 뿐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이익은 각자의 사회경제적 환경에 의해 자동적으로 규정되고 그 이익은 환경이 변치 않는 한 불변이라는 인식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이 통치원리는 각 인간의 독자성과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이 다원주의 통치원리에서 인간은 통치과정상 특정 이익을 위한 도구적이고 수적(數的)인 개념으로서만 존재가치를 가지므로 인간 존재 자체의 존엄성이 시현되지 않는다.

   이러한 다원주의 비판이 본고의 전반부를 이룰 것이고, 후반부에서는 현대 다원주의 통치원리를 대체할 새로운 민주주의 통치모델의 기본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즉, 의지를 가진 인간이 주체로서 행동하며 남을 설득하고 자신을 교육하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가치관도 바꿀 수 있다는 인간중심주의 가정에 입각한 새로운 민주주의 통치원리를 논할 것이다. 이 새로운 통치원리는, 인간들의 기존 이익과 가치관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상호 토의를 통해 새로운 방향으로 통합될 수 있다고 전제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통치란 기존 이익들을 단순히 조합하는 ‘결과’위주의 작업이 아니고, 인간들간의 원활한 토의를 보장하여 새로운 합일점을 도출하게 하는 ‘과정’위주의 작업이다. 이 새로운 통치원리는 인간이 공동선을 위해 각자의 가치관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다고 가정하므로, 특정 이익들에 의해 제약되지 않는 보편적 민주주의를 이루는 경로가 될 수 있음을 본고의 결론부에서 또한 강조할 것이다.

Ⅱ. 인간중심주의의 의미

   인간중심주의 결여라는 다원주의의 문제점과 그것을 극복할 새로운 통치상(像)을 본격적으로 논하기 전에 인간중심주의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정립할 필요가 있다. 본고에서 말하는 인간중심주의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자율적 행위주체로서의 인간을 규범적으로 상정한다. 이 규범적 인간은 자신의 직업, 계급, 출신지역, 성별, 연령에 따라 외부적으로 주어진 자기이익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인간이 아니다. 이 인간은 설혹 자신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의해 외부적으로 규정된 자기이익에 부합되지 않는 행동이라도 자신의 의지로써 충분히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노동자든지 자본가든지, 농촌지역 거주자든지 도시 거주자든지, 고령의 여성이든지 젊은 남성이든지, 이러한 집단별 구분에 따라 자기 계층의 이익이라고 사회적으로 정의 내려진 것만을 절대적으로 추구한다고 가정되지 않는다. 이러한 인간중심주의 생각에 따르면, 인간의 내재적 의지가 인간행위의 원동력이고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특정 사회경제적 조건이나 환경은 부차적일 뿐이다. 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인간 그 자체가 독자적 주체이고, 인간 외부의 다른 어떤 추상적 개념이나 구체적 사물도 그 인간의 행동을 절대적으로 구속하지 못하고 반대로 그에 의해서 규정되고 만들어질 뿐이라는 것이라는 데서 이러한 생각의 인간중심적 성격을 찾을 수 있다.

   조영식 박사의 표현대로, “인간은 인간으로서 독자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자체로서 완성되는 것이며 문화와 가치의 창조자로서 개성을 구유(具有)하고 있는 것이다”(조영식 1953: 17). 이러한 사상에서 인간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어떤 외부적 조건이나 이익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 아니다. 조 박사를 인용하자면, “나는 인간을 독립된 실체라고 말했다. 생명을 가진 모든 독립된 존재는 수단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적인 의미를 지닌 하나의 자립적 존재[이다]”(조영식 1996: 207). 인간이 그 자체로서 독립적 의미를 지닌다는 말은 다시 말해 인간이 각자의 고유한 내재적 의지를 발휘할 수 있음을 뜻한다. 만약 외부 환경조건에 의해 개인의 이익과 정체성이 집단적으로 정해진다면, 그 개인은 자체로서 목적적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외부적인 다른 무엇―집단이익과 같은―을 위한 도구로서의 의미를 가질 뿐이 된다. 조영식 박사의 인간중심주의는 인권(人權)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녀야 하고 다른 어떤 가치를 위한 수단으로도 인식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 서구의 몇몇 학자들의 생각과도 일맥상통한다(March and Olsen 1986: 350).

   인간중심주의에서 규범적으로 상정되는 인간은 내재적 의지를 행사함에 있어서 공공선(公共善)이라는 목표에 의해 인도된다. 즉, 인간은 자기 개인의 이익이나 생각만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 성원들 전체의 공동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 조영식 박사를 인용하자면, “세간에는 간혹 타인이 이득할 때 손실감을 느끼고 타인의 손실중에서 자기의 이득을 발견하며 타인의 무소유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는 따위의 졸렬한 인간이 있으나 이런 퇴폐적인 인간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조영식 1953: 21). 대신에, “인간은  나 자신의 행(幸)을 인류의 행복 속에서 구득(求得)하며 타인의 손실중에서 자신의 손실감을 느끼는 인간이 될 뿐만 아니라 외부적 재물의 축적이나 신(神)을 위한 자기완성에서 만족을 느낄 것이 아니요 인류사회를 위해 봉사를 남기고 인류사회를 가장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조영식 1953: 21). 만약 외부적으로 주어진 자기이익만을 기계적으로 추구한다면 그 사람은 내재적 의지를 독자적으로 발휘할 여지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인간중심주의는 각 개인의 이익을 절대시하지 않고 인류 공동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개인주의의 대칭에 위치한다.

   공동선 지향의 내재적 인간의지를 가진 인간은 공동선을 위해서 자기의 선호체계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다. 공동선이란 자기 자신에 의해 선험적이고 절대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각기의 의지를 지닌 다른 모든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거쳐 경험적이고 상대적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각 인간의 가치선호체계의 가변성(可變性)이 가정되어야 하고, 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인간 상호간의 실생활에서의 토의나 대화가 중시되어야 한다. 이처럼 상호 토의를 통해 공동선에 대한 합의를 이루고 그에 따라 자기의 선호체계를 바꿀 수 있는 의지를 가진 사람은 사회적 인간(social man)이다. 그는 자기의 환경조건에 의해 규정된 자기 이익선호체계를 고정된 것으로 절대적으로 고수하는 경제적 인간(eco-nomic man)과 대조를 이룰 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사회적 상호작용과는 무관하게 영원불멸의 고정된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적 인간(religious man)과도 구별된다. 이러한 사회적 인간상(像)을 규범적으로 상정하며 조영식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철학의 임무도  절대가치관과 보편타당성 같은 추상적인 우주세계의 연구가 아니라 자기경험을 토대로 한 현실의 파악과 인간생활의 실제 문제를 어떻게 사색하고 단안하며 실천하느냐[이다]”(조영식 1953: 20).

   공동선은 각자 독립적 의지를 행사하는 인간들 상호간에 토의를 거쳐 인식되고 합의되는 것이므로, 인간중심주의에 입각한 통치는 정책결정 자체와 그 결과 못지 않게 정책결정이 이루어지는 전(全)과정을 중시한다. 정책결정과정에서 다양한 입장들간의 진지한 토의가 이루어지고 상충되는 생각들이 하나로 통합될수록 인간중심적 성격이 강하게 시현된다고 할 수 있다. 근래에 토의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부상하고 있음은 고무적이라 하겠다(Mansbridge 1983; Dodd 1993). 그러나 인간중심주의에서 강조되는 과정의 중요성은 다양한 이익들간의 거래와 타협을 효율적이고 형평하게 진행시켜 가장 최적의 균형점(optimal point)을 찾는 절차적 가치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후자는 현대 자유주의 및 다원주의 사상에 해당되는 경우로서, 각 개인의 이익선호체계는 고정된 채 다양한 이익선호들간에 가장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중간점을 찾는 절차가 강조된다. 반면에, 인간중심주의 사상에서는 여러 개인들이 상호 토의를 통해 공공선을 인식하고 이 공공선을 위해 필요하다면 자신의 가치체계를 바꿔 하나의 결론을 향해 통합적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중시된다.

   종합하자면, 인간중심주의는 첫째, 인간의 외부적 사회경제적 조건보다는 그의 내재적 의지가 근본적으로 그의 행동을 지시해야 하고, 둘째, 인간은 공동선을 추구할 도덕적 잠재력을 갖고 있으며, 셋째, 다른 사람들과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가치선호체계를 바꿀 수 있어야 하고, 넷째, 그러므로 통치에서 인간들 상호간의 토의와 의견의 통합을 위한 과정이 중시되어야 한다는 규범적, 당위적 생각을 견지한다.

Ⅲ. 다원주의 통치원리에서의 인간중심주의 부재

   통치원리로서의 현대 다원주의는 서구의 여러 지적(知的) 전통들의 영향하에 형성되어왔다. 우선적으로 로크(John Locke)를 생각할 수 있다. 로크 사상의 중심 요소들―즉, 1) 공동체에 우선하는 개인, 2) 소유권이라는 사회경제적 조건으로 정의되는 각 인간의 이익 및 권리, 3) 법 적용의 절차상 만인의 평등, 4) 사회영역에서의 인간 상호관계에 대한 정부 간섭의 최소화 등―은 오늘날 다원주의 통치원리에 그대로 계승되어 있다. 로크는, 각자 이성적 판단에 따라 사회계약에 동의하고 대표자들을 뽑아 통치권을 위임하는 주체적 개인들을 상정한다(Locke 1980). 의지를 행사하는 개인들이 주(主)이고 그들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으며 그들에 의해 해체될 수도 있는 정부는 종(從)이라는 점에서 로크의 계약적 자유주의(contractual liber-alism) 사상은 인간중심주의의 편린을 어느 정도 노정한다. 그러나 로크도 인간들이 소유권으로 정의된 각자의 이익을 절대시한다고 가정함으로써, 상호간 대화를 거쳐 공동선을 위해 자신의 가치선호를 변화할 수 있는 주체적 의지의 인간상(像)은 상정하지 않는다. 공동선을 향한 내재적 의지가 상정되지 않고 외부 환경조건에 의해 주어진 특정 개인 이익―특히 소유권―이 인간 행동의 원동력이라는 점에서 인간중심주의의 결여가 엿보인다.

   그 후 로크의 후계자이자 현대 다원주의의 보다 가까운 선조라고 할 수 있는 여러 서구 사상가들에 와서 인간중심주의의 약화는 더욱 뚜렷해진다. 우선 18세기 후반의 매디슨(James Madison) 등 미국 헌법기초자들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이기적이라는 현실주의적 가정 하에, 어떠한 제도로써 인간사회의 병폐를 극소화할 것인가를 통치의 근본과제로 삼았다(Cooke 1961). 그들은, 인간의 본성은 불변하는 것으로서 인간 각자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의해 규정되는 가치관이나 이익선호는 의지로써 주체적으로 바꿀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그 효과를 제도를 통해 타율적으로 조절할 수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전개했다. 여기서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의 의지를 행사하는 주체가 아니고, 외부적으로 주어지고 고정된 가치관(자기 이익)에 따라 자동적으로 움직이며 따라서 인간행동의 해악(특히 정파의 위험성과 다수의 횡포)을 막기 위해 조종, 통제되어야 할 객체로 인식된다. 공공선을 지향하는 인간의지와 인간들간의 상호작용 과정을 통한 가치체계들의 통합이라는 인간중심주의의 요소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매디슨 등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시민들의 목소리가 보다 직접적으로 반영되는 ‘순수 민주주의’(pure democra-cy)보다는 그들의 영향력을 걸러내고 완충시키는 ‘공화주의적 민주주의’(republican democracy) 이상을 견지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반면에, 미국 헌법 기초자 및 지지자들인 ‘연방주의자’(Federalist)들에 대항하여 헌법 비준 반대운동을 전개한 ‘반연방주의자’(Anti-Federalist)들의 사상은 인간중심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띤다(Storing 1981). 그들은 인간이 자기이익으로 정의(定義)된 불변적 가치선호 체계를 갖는다는 생각에 반대하여, 인간은 공동선을 위하여 자기 가치체계를 바꿀 수 있는 시민적 도덕심(civic virtues)을 내부에 잠재적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잠재적인 그 도덕심은 정부의 규제(헌법이나 법률로 규정되는)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정, 학교, 교회 및 소규모 공동체를 통한 교육 및 사회화를 통해 충분히 계발, 표출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반연방주의자’들의 사상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행사하고 생각을 고쳐나갈 수 있는―물론 신의 섭리에 따른 것이지만―주체로 인식된다. 그러나 인간중심적 사고를 보다 크게 부각시킨 ‘반연방주의자’들은 현실정치에서 ‘연방주의자’들에게 패배했고, 그 결과 그들의 사상도 그 후 주류에서 소외되어왔고 현대 민주주의 통치원리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19세기에 유럽을 중심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한 공리주의적 자유주의(utilitarian liberalism)에서도 인간중심주의 사고는 마찬가지로 침식된다. 벤담(Bentham)과 밀(Mill) 등 공리주의자들은 인간이 고통(pain)을 피하고 낙(pleasure)을 추구한다는 대전제에서 논의를 시작하는데, 이 때 각 개인이 규정하는 고통과 낙의 내용은 고정된 것이지 대화나 교육을 통해 새롭게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가정이 이면에 깔려 있다. 개인들이 추구하는 고정된 이익(낙, 행복)은 각자의 사회경제적 환경조건에 따라 다양하므로, 결과적으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도모할 수 있도록 타협점을 찾는 것이 바람직한 통치라는 사고(思考)를 전개한다. 여기서 각 개인은 수적(數的) 개념으로 환원된다. 각자가 자신의 효용(individual utility)을 추구하는데, 보다 많은(과반수) 사람들의 효용이 일치될 경우 그것이 바로 공공의 효용(common utility)으로서 정부가 제도나 정책으로써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인간은 내재적 의지를 발휘하는 중심적 주체이기보다는 특정의 외적 사회경제 이익을 위해 세어져야(count) 하는 객체라는 논리가 숨어있다.

   미국헌법기초자들의 현실주의적 시각과 공리주의자들의 시각은 20세기에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대중사회가 정착되면서 다원주의(pluralism), 즉, 달리 표현하여, 이익집단 자유주의(interest-group liberalism) 통치원리로 계승되었다. 다원주의 원리는 트루만(David Truman), 다알(Robert Dahl) 등에 의해 특히 2차대전 이후 체계화되어 오늘날까지도 강한 지적 영향력을 서구와 비서구를 망라하여 행사하고 있다(Tru-man 1951; Dahl 1956). 오늘날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다원주의 통치모델의 정당성에 별 이의가 제기되지 않는다. 심지어 다원주의와 민주주의는 동의어처럼 이해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다원주의는 규범적 원리일 뿐만 아니라 서구 몇몇 나라 현실의 경험적 진단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보다 보편적 차원에서 세계 각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규범적 통치이론으로서이다. 다원주의적 통치원리를 간략히 서술하며 어떤 점에서 그것이 인간중심주의에 입각해 있지 않은지 살펴보겠다.

   통치원리로서의 다원주의는, 다양한 사회이익들이 자유롭게 표출(articulation)되고 그들간의 자발적 거래와 타협을 통해 가장 균형적인 중간점이 정책으로 집성(aggregation)될 수 있도록 이익단체들이 주도적 역할을 맡고 정부는 조정자로서만 이차적 역할을 수행할 것을 당위적으로 주장한다. 이러한 다원주의의 기본 전제는 모든 개인들이 각자의 사회경제적 환경에 따라 특정 이익들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 전제의 이면에는, 개인의 선호도는 주변 환경의 변화에 의해서는 바뀔 수 있지만, 서로 다른 입장의 인간들간의 교류, 즉 대화와 토의로써는 바꾸어지지 않는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즉, 인간의 행동을 융통성 있게 지시하는 주체적 인간의지가 존재하기보다는, 인간의 이익과 가치선호를 자동적으로 규정하는 사회경제적 환경에 따른 집단 이익이 존재할 뿐이다. 인간이 적극적 주체로 역할을 하기보다는, 주어진 환경에 구속되는 객체로 이해되고 집단 이익이 더 큰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인간들은 현실적 이익달성을 위해 필요하다면 부분적으로 남을 위해 양보하고 타협을 하지만, 그것은 전략적 행동일 뿐이고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그들의 선호체계는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된다.

   다원주의 시각에서 볼 때, 인간들의 이익과 가치관은 고정된 것이므로 바람직한 통치란 다양한 모든 이익들이 표출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이 이익들을 잘 조합하여 가장 최적의 균형점(optimal point)을 정책 타협점으로 찾아내는 것이다. 이 시각에서, 각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통치과정에서 상호간 대화를 통해 설득하고 설득 당하는 토의(deliberation)를 하기보다는, 자기네 이익을 목청 높여 외쳐댐으로써 좀 더 유리한 타협점을 얻고 최대다수 세력인 ‘승리연합’(winning coalition)을 형성하려는 대결과 논쟁(argumentation)에 종사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이처럼, 외부 환경에 의해 주어진 자기이익을 절대적으로 고수하지 않고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자기 선호도를 바꾸어 공공선을 추구하는 시민적 도덕심(civic virtues)이 다원주의에서는 자리 잡을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의지로써 자신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주체가 아니고, 통치과정상 최종 타협점을 찍음시에 고려되는 집단이익세력들의 한 요소에 불과하다. 즉, 인간은 독립적이고 고유한 의지의 소유자가 아니라 특정 집단을 이루는 하나의 수(數)에 지나지 않게 된다. 자연히, 인간 개개인의 고유한 존엄성은 가치를 잃고, 인간은 집단들이 유리한 타협점을 얻기 위해 정치적으로 동원하는 객체로 전락한다. 다원주의 통치원리가 절차를 중시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여러 이익들간의 전략적 교섭과정에 효율적이고 공정한 게임규칙을 제공한다는 것이지, 인간들이 내재적 의지를 가진 주체로서 상호 토의하고 서로를 설득하며 공공선을 향해 생각들을 통합시켜나가는 과정을 중시하는 인간중심주의를 표방한다는 말은 아니다.

   물론 다원주의는 모든 시민의 표현․언론․결사의 자유 등 인권을 강조하고 다양한 이익들의 표출 및 집성을 촉진하기 위한 바른 정보의 배분 및 효과적 제도의 구축에 관심을 경주한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다원주의적 사상 속에서 인권이 중시되는 이유는 그것이 민주주의 체제의 기능을 전체적으로 활성화해주기 때문이지 그 자체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 아니다. 즉, 다원주의에서 인간의 중요성은 체제 유지라는 보다 근본적 목적을 위한 구조기능주의적이고 도구주의적인 관점에서 이해된다. 외부 사회조건과는 독립적으로 내재적 의지를 소유한 인간 그 자체가 목적으로서 의미를 갖고 중요하다는 인간중심주의 생각을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인간중심주의의 부재는 소위 합리적 선택이론(rational choice theory)에 와서 절정에 이른 듯하다. 근래 들어 사회과학 제분야에서 중심적 패러다임으로 떠오르고 있는 이 이론은, 모든 개인이 자신의 이익(그것이 무엇이든 간에)을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 얻고자 한다는, 즉, 자신의 효용을 방법론상 “합리적으로” 극대화하려 한다는 가정에 입각해 있다(Elster 1986; Monroe 1991).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인간(economic man)으로서의 개인들이 공동의 장(場)에서 상호작용할 때 어떠한 사회적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규명한다. 이 때 합리적 선택이론은 현상의 설명 혹은 예측의 차원에만 머물기도 하지만, 바람직한 통치란 정부가 불필요한 간섭을 하지 않고 “합리적” 개인들이 시장원리에 따라 자유롭게 각자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효율적이고 공정한 틀을 제공해 주어야 하는 것이라는 규범적 명제를 제시하기도 한다(Buchanan 1984).

   이 이론에서 가장 핵심적 가정은 개인의 선호(preference)는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개인이 설득을 당해 진심으로 선호를 바꾸는 가능성은 배제되고, 각자의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라 외부적으로 규정되고 고정된 선호를 위해 책략을 바꿀 수 있을 뿐이다. 인간 행동의 원동력으로서의 내재적 의지와 도덕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주체적 의지에 대한 여지가 없고, 인간은 마치 입력된 명령만 따르는 로보트처럼 자기 이익을 절대적으로 좇는 객체로 이해된다. 여기서 인간중심주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물론 대부분의 합리적 선택이론가들은 자신들의 이론이 규범적 평가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단순화한(stylized) 가정에 입각하여 현상의 정확한 설명과 예측의 목적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이론을 차용하는 학자들의 글을 보면, 상당 부분에서 규범적 평가 또는 처방의 성격도 암묵적으로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자기 이익을 일관되게 추구하는 행동이 “합리적”인, 그래서 바람직한 것인 양 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또한 발생한 모든 정치적 결과가 개인들의 “합리적” 선택에 의한 것이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가치내재적 태도도 엿볼 수 있다.

   종합하자면, 민주주의 통치원리에 대한 서구―적어도 영미(英美)―사상사의 주류를 이루어온 로크의 계약론적 자유주의, 매디슨적(的) 현실주의, 공리주의, 그리고 그러한 지적(知的) 전통의 현대적 완결판인 다원주의 및 합리적 선택이론은 인간중심주의를 구현하지 못해왔다. 특히 통치원리로서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모델이 되고 있는 다원주의는, 공공선을 위해 자신의 선호체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주체적 의지의 규범적 인간을 상정하지 않는다. 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인간 개개의 독자성은 부각되지 않고, 인간은 각자의 사회경제적 환경에 의해 외부적으로 주어진 특정 이익에 따라 자동적으로 행동지침을 부여받고 그 이익세력을 이루는 하나의 수적(數的) 요소로 그래서 타율적으로 동원될 수 있는 객체로 인식된다. 현대 대중사회 현실의 모든 측면에서 인간성이 정말로 상실되었는지는 쉽게 판단 내리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현대 대중민주주의 통치원리를 이루는 주요 이론시각들에서 인간중심주의가 부재함은 심각한 우려를 자아낸다.

Ⅳ. 전환기적 사회환경과 다원주의의 한계

   앞 절에서 살펴본 대로, 주체성을 상실하고 객체로 전락한 인간상(像)을 상정하는 다원주의 시각은 인간중심주의를 구현하지 못한다는 점 그 자체로서 규범적 문제를 초래한다. 뿐만 아니라, 비(非)인간중심주의적 다원주의 시각이 대중사회의 민주주의 통치원리로 계속 받아들여진다면, 급격한 사회환경의 변화를 겪고 있는 오늘날 그리고 그 전환기적 변화가 더욱 확산될 다음 세기에 서론에서 언급한 민주주의의 위기가 더욱 심각해지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회환경 변화가 이런 예측을 낳게 하는가? 우선, 미래사회에서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모든 인간들이 학력이나 소득수준과 상관없이 전세계적 전파네트워크 속에 예외 없이 편입되어 메시지를 쉽게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환경변화를 생각해보자. 이런 변화를 잘 이용한다면, 시민들이 통치과정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상호간 그리고 국정수행자들과 활발한 토의를 전개하고 필요하다면 각자의 가치선호를 바꾸며 합일점을 찾아나갈 수 있는 인간중심주의적 통치를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기술의 발달 덕택에 개인들간에 의사소통이 훨씬 용이해질 수 있고, 그에 따라 인간들이 자신의 고정된 이익만 고수하기보다는 상호 토의를 통해 공공선의 내용에 합의하고 이를 위해 각자의 가치선호체계를 바꾸는 내재적 의지의 발휘가 쉬워질 수도 있다.

   그러나 고정된 이익들의 단순한 조합 혹은 집성을 추구하는 기존의 다원주의 통치원리가 계속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전세계적 전파네트워크 속에서 인간들은 오히려 독자성과 주체성을 잃고 특정 집단이익을 위해 동원되는 객체로 전락할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정치인들은 상호간 및 시민들과의 이성적 토의를 거쳐 새로운 합일점을 찾아나가기보다는, TV, 라디오, 컴퓨터 모니터 등을 통해 각자의 일방적인 주장을 일반대중에게 직접적으로 호소하고 대중의 집단이익을 부추기는 선동적 책략에 더욱 많이 의존할 수 있을 것이다(Kernell 1993; Tulis 1987). 이러한 선동정치―서구 학자들이 “going public,” “plebiscitary politics,” “rhetorical pol-itics” 등으로 표현하는―는 고대부터 존재해왔지만, 전세계적 전파네트워크 때문에 규모로 보나 확산속도로 보나 그 효과가 매우 커질 수 있다. 만약 통치원리가 계속해서 사람들의 다양하지만 외부적으로 주어지고 고정된(불변의) 이익들을 다원주의적으로 집성하거나 조합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그 결과는 ‘승리연합’(win-ning coalition) 형성을 위한 선동정치의 걷잡을 수 없는 횡행으로 이어질 것이다. 반대로, 인간이 주체적으로 가치체계를 변화시켜나갈 수 있는 인간중심주의가 통치원리에서 강조된다면, 전파네트워크를 통해 사람들 간의 토의와 설득작업, 즉 공동선을 향한 내재적 의지의 발휘가 오히려 훨씬 용이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앞으로 더욱 확산될 탈산업의 사회환경적 변화들도 다원주의 통치원리의 한계와 문제점을 더욱 증폭시킬 것으로 여러 측면에서 전망된다(Bell 1973, 1996; Drucker 1995). 첫째, 안정된 전통적 산업구조가 바뀌어 유동성이 심한 정보사회 및 고기술사회에 접어들면, 대부분의 일반대중 특히 전문지식을 갖추지 못한 서비스 근로자들은 급변하는 사회상황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막연한 심리적 불안감, 불만감에 시달리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불안정한 경향이 심화될수록, 사람들은 각자의 외부 환경조건에 의해 규정된 좁은 자기이익에 피동적으로 이끌리고 공공선을 향한 주체적 의지의 발현을 시도하기 어려워진다. 공공선을 향한 내재적 의지와 도덕심을 일반대중이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주의적 가정에 입각하여, 고정된 기존 사회이익들을 집성하는데 우선순위를 두는 다원주의 통치원리는 이러한 상황을 더욱 조장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둘째, 탈산업화가 진행될수록 인간들이 사회성원으로보다는 원자화(原子化)된 개인들로 존재하는 경향이 커진다. 산업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회사, 노조, 이익단체 등의 대조직에 속하기 때문에 공동체 의식이나 집단 의식이 제법 형성된다. 반면에, 직업구조가 작은 규모의 단위들로 매우 다양하게 쪼개지는 탈산업사회에서는 인간들의 원자화가 촉진된다. 원자화된 개인들은 자연히 강한 사회적 소외감을 느끼고 공동의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된다. 공동선보다는 자기의 외부적 환경조건에 의해 규정된 자기 이익만을 절대적으로 고수할 여지가 커진다. 그런 만큼 사회이익들의 다원주의적 집성과 타협이 더욱 더 어려워지고, 그 결과 민주주의의 원활한 작동이 방해되고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이 심화된다. 다원주의 통치원리는 인간들의 원자화가 심화되는 탈산업사회에서는 제대로 기능하기 어려운 것이다.

   셋째, 탈산업의 전환기적 상황은 기존의 사회질서 및 규범을 이완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에 따라 정부를 비롯한 모든 제도적 권위에 대한 대중의 불신감도 증가하게 된다. 이럴 경우, 정부의 이익 집성 및 조정 능력에 제동이 걸리고, 다양한 이익들의 중간점을 찾기가 그만큼 어려워진다. 정부의 어떠한 정책 결정도 많은 이익집단들로부터의 반발에 부딪칠 공산이 커진다. 과거 산업기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정부와 대기업들이 유착되어 안정된 지배연합을 이루고 이들간에 정책상의 그리고 이념상의 합의(consensus)가 존재했었다. 정부는 기업규제를 극소화하고 동시에 재정기원, 세제혜택 등을 통해 기업(특히 과점기업)을 지원하며 기업의 자유로운 산업활동을 통한 경제성장을 최대목표로 삼았었다. 경제활동의 주무대는 대기업에 의해 주도되는 시장이고 정부의 역할은 보조적 성격을 띤다는 기업자유주의(corpo-rate liberalism)에 콘센서스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런 과거의 경우에는, 사회 이익들간의 타협도 용이했고 필요시 정부가 조정자로서 내린 결정에 대한 반발도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으므로, 다원주의 통치원리가 비교적 잘 통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제도적 권위가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한 탈산업기에는 다원주의 통치원리가 잘 작동되기 어렵고, 그에 따라 민주주의 위기 상황이 심화되는 것이다. 시장메커니즘이 아니라 공공권위에 의해 결정되고 조정되어야 할 문제들―예를 들어, 도시계획, 의료혜택, 사회복지, 정보관리, 교육, 환경보호, 공원조성 등―이 탈산업기에 비중이 더 커질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우려는 더 커진다.

   전세계적 전파네트워크의 확산 및 탈산업화라는 환경변화 외에 탈주권국가화라는 환경변화도 미래사회에 다원주의 통치원리의 한계를 증폭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오늘날에도 이미 금융기관의 규제, 금리조정, 첨단무기 개발, 환경보호, 인권보호 등 중요 쟁점들에서 국제기구, 다른 국가정부들, NGO들이 해당 국가의 정부에 큰 제약을 가할 수 있다. 이러한 탈주권국가화는 앞으로 더욱 배가될 전망인데, 이에 따라 배타적 국민주권국가 시대의 산물인 다원주의 통치원리의 적실성에도 문제가 초래될 가능성이 보인다. 즉, 한 국가 내에서는 상충되는 사회이익들간의 타협과 조정이 비교적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 있지만, 탈주권국가적 상황에서는 국가 경계를 초월하여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하게 갈등을 빚는 이익집단들간의 절충을 찾는 메커니즘의 고안이 쉽지 않다. 고정된 사회이익들간의 거래를 통한 문제 해결을 강조하는 다원주의 원리가 이런 상황에서 원활히 기능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상에서, 전환기적 사회환경의 변화 때문에 다원주의 통치원리가 작동상 한계를 노정하며 민주주의 체제의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고 앞으로 더욱 그럴 것이라는 점을 논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마치(March) 및 올센(Olsen)의 주장과도 일치하는 바, 그들은 말하길 다원주의처럼 이익들의 집성을 목표로 하는 집성적(aggregative) 통치모델은 자원이 충분하여 갈등의 해소가 보다 용이한 소위 “좋은” 시절에 더 잘 기능한다고 하였다. 즉, “자원이 감소할 때보다 증가할 때에 상호 수용할 만한 거래(trades)의 확인 및 집행이 보다 더 가능해진다”는 것이다(March and Olsen 1986: 360). 다원주의 통치원리가 안정적 산업기에는 큰 탈없이 작동했었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근본적 체제변화를 겪고 있으며 아직 새로운 사회체제로 완전히 이행되기 전(前)단계인 오늘날의 불안정한 탈산업기에는 다원주의 통치원리가 상대적으로 잘 기능하지 않고 있다. 새로운 시대상황하에 적실성을 상실하고 있는 다원주의를 대체할 다른 통치모델의 모색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Ⅴ. 인간중심주의에 입각한 민주주의 통치원리

   인간을 단순히 외적 환경조건에 따른 이익집단의 한 구성요소인 수동적 객체로만 간주하는 다원주의 통치이론은 인간중심주의의 부재를 노정한다는 점, 그리고 이 원리가 앞으로도 계속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민주주의의 위기는 전환기적 현실에서 더욱 증폭될 것이라는 점을 앞 절들에서 논하였다. 그렇다면 인간중심주의에 입각하고 다원주의의 현실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민주주의 통치원리는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하는가? 그 모습의 체계적 구성과 구체적 실천방법의 모색은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미룬다. 여기서는 다만 인간중심주의적 통치원리의 가장 근본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코자 한다.

   무엇보다도, 각자의 사회조건에 따라 고정적으로 규정된 자기이익만을 가장 효율적으로 극대화하고자 하는, 즉 방법론상의 ‘합리성’(rationality)만을 절대시하는 인간을 상정해서는 안된다. 대신에, 다른 사람들과의 토의 속에서 공동의 목표에 대한 합일점을 공동으로 찾아나갈 수 있고 그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자신의 가치선호체계를 바꿀 수 있는 ‘이성적’(reasoning)이고 ‘도덕적’(moral)인 인간을 규범적으로 상정해야 한다. 즉, 외부적 집단이익에 의해서 이끌리지 않고 공공선을 위해 자기 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주체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이 논의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규범적 전제가 없이는, 전술한 다원주의 통치원리의 인간중심주의 부재라는 심각한 한계와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 이러한 규범적 전제가 경험론적으로 얼마나 타당한지는 쉽게 판단 내릴 수 없는 문제지만, 그것이 절대적으로 타당하지 않다는 다원주의의 현실주의적 가정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서는 안된다. 인간의지(human will)와 시민적 도덕심(civic virtues)을 부정하는 가정에 입각한 다원주의 통치원리가 심각한 한계를 노정하는 만큼, 이제는 인간의지 및 시민적 도덕심을 규범적으로 전제하는 인간중심주의적 통치원리를 새로이 모색할 때인 것이다.

   주체적 인간들이 각자의 입장만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고 개방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고쳐나가며 최종적인 합의를 도출할 수 있기 위해서는 토의(deliberation)가 강조되는 통치원리를 세워야 한다. 다양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간의 충분한 토의를 위해서는 통치시 정책결과만 강조하지 말고 결정과정에 더 많은 비중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주어진 고정된 이익들의 효율적 집약(aggregation)과 조합(combination)에만 치중하기보다는 사회성원들이 각자의 다양한 생각들을 창조적으로 통합(inte-gration)하여 그들이 공유할 새로운 지향점을 찾을 수 있도록 제도적 경로를 만드는데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March and Olsen 1986, 1996). 이처럼 과정 속에서의 토의를 통해 공동선을 향한 이익의 통합을 성취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요할 것이고 변화도 점진적으로 생길 것임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물론 내재적 의지를 발휘하는 인간들간에 토의가 오래 진행된다고 해서 다양한 기존의 생각들 및 이익들이 공동선을 향해 항상 성공적으로 통합되어 나갈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통합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다원주의 모델에서처럼 기존 이익들간의 조합적이고 타협적인 균형점을 찾을 수 있도록 통치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도 문제로서, 토의가 충분하면 할수록 주체적 인간들 간에 이익통합의 합일점 도출이 보다 용이해질 수 있다. 이익통합을 위한 노력을 거친 후에는 설혹 합일점 도출에 실패하여 할 수 없이 다원주의적 방식으로 최종 타협점을 찾아 정책으로 결정한다하더라도 그 결정의 정통성(legitimacy)이 그만큼 높아진다.

   기존의 여러 사회이익들을 단순히 평균하여 중간점을 찾는 ‘집성형’(aggrega-tive) 통치모델보다는, 대표자들 및 시민들이 충분한 토의를 통해 개진된 여러 의견들간의 간격을 메꾸고 새로운 특정 방향으로 통합해 나가는 ‘통합형’(integrative) 통치모델이 바람직한 민주주의상(像)으로 추구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마치 및 올센 두 학자에 의해 제시되어 있다. 이들이 제시하는 ‘통합형’ 모델은 인간중심주의적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는 바, 앞으로 인간중심주의 통치원리를 체계화하는 과제를 위해 좋은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이해의 도모를 위해, 대조되는 두 통치모델들의 차이에 대한 두 학자의 해설을 <표 1>에 요약하였다.

   통합적 모델의 핵심은, 인간이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고정된 선호를 가진 합리적(rational) 인간이 아니라 상호 토의를 거쳐 사회적으로 정의되는 공익을 위해 선호를 바꿀 수 있는 이성적(reasoning)이고 의지적(意志的)인 인간이라는 규범적 가정이다. 이러한 가정에 입각할 때, 통치는 현존하는 여러 사회이익들의 중간점을 찾아 정책으로 만드는 결정 자체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고, 사회성원들이 공유할 바람직한 지향점을 토의를 통해 모색하는 과정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국민의 대표자들은 주어진 다양한 사회집단이익들간의 전략적 거래와 제휴를 위한 중개인이 아니라, 사회성원들이 장기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규범을 통합적으로 창조하는 과정에서의 토론자로서 기능하게 된다. 이런 통합적 통치원리가 제대로 작동될 때, 인간은 각자의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라 외부적으로 주어진 집단이익을 기계적으로 따르는 수동적 객체가 아니라 자신의 내재적 의지를 자유롭고 독자적으로 행사하는 능동적 주체로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표 1> 민주주의 통치의 두 모델:

집성적(aggregative) 모델과 통합적(integrative) 모델

 

  집성적(aggregative) 모델 통합적(integrative) 모델
 국민(people)의 의미  현 시점의 시민 집합체  현재뿐 아니라 과거 및 미래의
 시민을 포괄하는 집합체
 각 시민의 속성에
 대한 가정
 자기이익(self-interest)을 추구
 하는 합리적(rational) 행위자;
 고정된 선호(preference)를 가짐.
 사회규범에 의해 정의되는 공익
 도 추구하는 이성적(reasoning)
 행위자;
 가변적 선호를 가짐.
 국민의사 표출경로  선거운동, 정치연합, 여론  제도적 규범(institutional norm),
대표자들 간의 토의(deliberation)
 대표자의 역할  주어진 다양한 이익들간의 제휴
 와 조정을 위한 중개(brokerage)
 역할
 사회전통과 미래를 위해 독자적
 판단에 따르는 수탁자(trustee)
 역할
 통치과정의 의미  국민의 현재 이익들을 즉각적
 으로 정책결정에 반영해야 하는
 과정;
 사회의 지향점은 이 이익들에
 의해 이미 규정되어 있음;
 과정보다는 결과물인 정책이
 가장 중요.
 사회성원들이 공유할 바람직한
 지향점을 점진적으로 형성하는
 과정;
 현재의 일시적 계산과 감정에
 휩싸이지 않도록 하는 과정;
 결과물인 정책보다 과정 자체가
 더 중요함.
통치기능의 평가기준  주어진 모든 다양한 이익들을
 효율적으로 충족시키는지의 여부
 공익을 추구하기 위한 이성적
 토의가 이루어지는지의 여부

Ⅵ. 결  론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는 인간은 가장 귀한 것의 처음이요 끝이요 전부라고 아니할 수 없다”(조영식 1996: 234)라는 인간중심주의 사상은 현대 다원주의 통치원리에서 찾아볼 수 없다. 현대 대중민주주의 사회의 통치원리로서 전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온 다원주의의 이면에는 인간은 각자의 집단이익에 따라 지시되고 동원되는 객체라는 논리가 깔려 있다. 불변하는 집단이익이 인간행동의 원동력이라는 다원주의 논리에는 주체적 인간의지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비(非)인간중심주의적인 다원주의 통치원리는 특히 새로운 세기의 전환기적 사회환경 속에서 원활히 작동되기 어렵고 민주주의 위기 상황을 심화시킬 것이라는 점을 앞에서 밝혔다.

   우리는 이제 인간중심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통치원리를 시급히 모색할 시점에 와있다. 외부적으로 주어진 집단이익도 초월할 수 있는 내재적 의지를 인간들이 소유하고 있고, 그들이 상호간 토의를 통해 공동선을 모색할 수 있다는 규범적 가정에 입각한 통치원리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규범적 전제 없이는 다원주의의 문제점들을 극복할 수 없다. 주체로서 의지를 행사하는 인간은 자기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른 특정 이익을 자동적으로 절대시하지 않고 공공선을 향해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에, 계급․지역․민족․국가 등의 경계를 뛰어넘는 보편적 규범을 추구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다. 기존의 다원주의 시각에서는 여러 변수들을 건너뛰는 보편적 가치의 형성을 생각할 수 없고, 다양하고 고정된 가치들의 절충적 조합만이 가능할 뿐이다. 반면에, 이익통합적, 토의적, 과정중심적 성격을 지니는 인간중심주의 통치원리는, 모든 사람들의 공영을 목표로 하고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보편적 민주주의’를 이루는 토대 혹은 경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상 이 글에서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조영식 박사의 말로 압축적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의 복권을 이루어야 한다. 인간이 독립된 인격적 실체로서 제자리를 잡지 못하였던 예속적 위치에서 자기확립을 하고, 또 물량 계수의 대상으로 전락한 인간의 경시 풍조를 시정하여 자존자립할 수 있도록, 즉 인간 생명과 인간권리를 보장하고 존중해 주는 인간에로의 복권을 이룩해야 한다”(조영식 1996: 238). 인간 복권을 위한 한 방편으로서 인간중심주의에 입각한 통치원리가 요구된다는 점은 이 글에서 강조되었다. 이제 인간중심주의적 통치원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시키고, 그것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인간의 내재적이고 도덕적인 의지를 어떻게 배양시키고, 궁극적으로 보편적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의 보다 근본적이고 어려운 과제에 착수할 때이다.

 

 

 

참 고 문 헌

 

조영식, ?오토피아? (서울: 경희대학교 출판국, 1996).

      , ?문화세계의 창조? (대구: 문성당, 1953).

Bell, Daniel, The Coming of Post-Industrial Society (N.Y.: Basic Books, 1973).

      , The Cultural Contradictions of Capitalism (N.Y.: Basic Books, 1976).

Buchanan, James M., “Politics without Romance: A Sketch of Positive Public Choice The-ory and Its Normative Implications,” in J. Buchanan and R. Tollison (eds.) The Theory of Public Choice―II (Ann Arbor, Michigan: Th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84).

Cooke, Jacob E. (ed.), The Federalist (Middletown, CT: Wesleyan University Press, 1961).

Dahl, Robert, A Preface to Democratic Theory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6).

Dodd, Lawrence C., “Congress and the Politics of Renewal: Redressing the Crisis of Legi-timation,” in Lawrence C. Dodd and Bruce I. Oppenheimer (eds.), Congress: Recon-sidered, 5th edition (Washington, D.C.: Congressional Quarterly Press, 1993).

Drucker, Peter F., “The Post-Capitalist World,” in James P. Pfiffner, Governance and Ame-rican Politics (Fort Worth, TX: Harcourt Brace College Publishers, 1995).

Elster, Jon (ed.), Rational Choice (N.Y.: New York University Press, 1986).

Kernell, Samuel, Going Public, 2nd edition (Washington, D.C.: Congressional Quarterly Press, 1993).

Locke, John, Second Treatise of Government, Edited by C. B. MacPherson (Indianapolis, In-diana: Hackett Publishing Co, 1980).

Lowi, Theodore J., The End of Liberalism, 2nd edition (N.Y.: W. W. Norton & Co., 1979).

Mansbridge, Jane, Beyond Adversary Democracy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3).

March, James, and Johan Olsen, “Popular Sovereignty and the Search for Appropriate Insti-tutions,” Journal of Public Policy, Vol. 6, No. 4 (October/December 1986).

      , “Institutional Perspectives on Political Institutions,” Governance: An International Journal of Policy and Administration, Vol. 9, No. 3 (July 1996).

Monroe, Kristen Renwick (ed.), The Economic Approach to Politics: A Critical Reassess-ment of the Theory of Rational Action (N.Y.: Harper Collins, 1991).

Mulhall, Stephen, and Adam Swift, Liberals and Communitarians (Oxford, U.K: Balckwell, 1992).

Olson, Mancur, The Logic of Collective Action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65).

Sandel, Michael, Liberalism and the Limits of Justice (Cambridge, 1982).

      , Liberalism and Its Critics (N.Y.: New York University Press, 1984).

Schattschneider, E. E., The Semi-Sovereign People (N.Y.: Holt, Rinehart, and Winston, 1960).

Storing, Herbert J., What the Anti-Federalists Were For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1).

Truman, David B., The Governmental Process (New York: Knopf, 1951).

Tulis, Jeffrey K., The Rhetorical Presidency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