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누구인가? 대구가톨릭대학교 철학과 신 창 석 1. 철학적 인간학을 위한 문제 지평 인간은 무엇보다도 인간 자신에 대해서 가장 관심이 많다. 철학적 물음도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철학적 관심은 주로 다음 물음과 함께 대두되어 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아가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을 그 대상으로 삼아, 다른 여타의 학문과 같은 방식으로 문제의 지평을 펼쳐왔다. 이는 “인간이란 무엇인가(Was ist der Mensch)?”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에머리히 코레트의 인간학 저서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물음의 부제가 말하듯이 이 저술은 주로 “철학적 인간학의 기본개요”(Grundzuege einer philosophischen Anthropologie)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하나의 보기에 지나지 않을 뿐, 대체로 인간에 대한 물음은 본질에 대한 물음을 중심으로 하는 무엇-물음의 지평에서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과연 생물학이 생물의 본질을 묻는 것처럼, 심리학이 심리의 본질을, 사회학이 사회의 본질을, 인류학이 인류의 본질을 묻는 것처럼 그렇게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의 본질을 문제시 삼는 것일까? 그렇다면, 생물학이 생물로서의 인간의 본질을, 심리학이 인간의 심리적 본질을, 사회학이 인간의 공동체적 구성의 본질을, 인류학이 인간의 역사적이고 전체적 본질을 탐구한다면, 이러한 학문들과의 경계에서 철학적 인간학은 특별히 무엇을 묻고 있는가? 과연 또 다시 물어야 할 어떤 본질이 남아 있는 것인가?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여타의 학문과 공유한다면 철학적 인간학을 위한 물음의 지평은 어디에서 특수화되고 공고히 될 수 있는가? E. 코레트는 철학적 인간학의 물음을 다음과 같이 정형화하고 있다.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이 물음은 철학적 인간학의 본질을 단적으로 특징짓는 물음이다. 철학적 인간학은 오로지 이 물음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이는 철학적 인간학의 경계를 분명히 선언하는 말이지만, 한 학문의 경계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개인적 선언보다는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근거가 필요하다.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대답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에 대한 대답을 요구하는 학문은 비단 철학적 인간학만이 아니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학문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근거로 삼는다. E. 코레트는 인간에 대한 본질적 물음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반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이 문제에 대해 특히 실존철학이 때때로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래서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물을 수 없고, 오로지 인간이란 ‘누구’인지를 물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무엇이 아니라 ‘누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은 물질적인 대상이 아니라, 일회적이고 인격적인 현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코레트는 이러한 이의가 올바른 것이라고 인정하는 동시에, 무엇-물음과 누구-물음의 차이를 드러낸다. 즉 인간에 대한 “누구-물음”은 “무엇-물음”에 선재하면서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 물음에 대한 답으로서 그 사람의 이름, 출생, 직업 등에 대한 대답, 즉 특정한 사람에 대한 신상명세서를 기대한다.” 나아가 누구-물음에 대한 대답은 인간에 대한 보편적 진술을 포함하는 동시에 그 자체의 유효성을 상실하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개별적이고 일회적 존재라는 사실을 언급하는데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에 비해 무엇-물음은 인간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하며,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그 무엇은 인간의 본질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결국 코레트는 인간에 대한 누구-물음은 곧 그 인간의 신상명세서를 말하고, 무엇-물음은 인간의 본질을 말한다고 결론짓는다. 따라서 코레트의 철학적 인간학은 무엇-물음으로 질주하는 동시에 누구-물음을 단적으로 배제한다. “우리는 보편적인 사전 지식의 지평 안에 있는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인간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 대신 다른 형태의 물음을 제기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방향 설정에는 실존철학적 방향이 누구-물음에 치우친 것을 견제하려는 의도를 깔고 있다. 코레트에 의하면 “누구-물음이 인간에 대해 제기하는 유일한 물음으로 인정되고, 이로써 무엇-물음을 배제해버린다면, 인간이 물을 수 있는 무엇, 즉 인간의 공통적인 본질은 도무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가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 그러나 이러한 입장을 최대한 인정한다 하더라도 코레트의 방향 설정은 실존철학이 누구-물음에 치우친 그 만큼 똑같이 무엇-물음에 치우치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코레트의 결단이 누구-물음과 무엇-물음에 대한 철학사적 고찰이나 개념적 반성을 근거로 삼아 제시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러한 아쉬움을 해소하기 위하여 본고는 E.코레트의 문제 설정에 대해 몇가지 의문을 제기하는 가운데 인간을 탐구하기에 고유한 문제지평을 개진하고자 한다. 첫째, 과연 실존철학자들만이 인간에 대한 누구-물음의 지평을 제시했을까? 둘째, 누구-물음의 대답은 신상명세서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셋째, 코레트 자신도 밝히는 바와 같이 누구-물음이 전혀 다른 진로와 방향을 가지고 있다면, 그 지평은 과연 어디이며, 무엇-물음과 어떻게 다르게 전개되는가? 코레트가 누구-물음의 답을 신상명세서로 간주한다는 것은 물론 누구-물음을 학술 용어가 아닌 일상용어의 차원에서 본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서양의 일상언어에서 누구-물음의 답은 이름을 말하고, 무엇-물음의 답은 직업을 말한다. 동양언어 중에서도 특히 한국어의 경우에는 인간에 대해 직접 “당신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부정적 태도와 도덕적 실례에 해당된다. 본고는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철학적 인간학을 위해 적합한 문제제기인지를 검토하는 가운데,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간학에 나타난 인간에 대한 특수한 문제의 지평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즉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가지는 학문적 효용성의 한계를 밝히고,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어떤 철학적 지평이 가능한지 검토해 볼 것이다. 2. 인간에 대한 토마스의 문제지평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학”이나 “인간론”을 특별히 주제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신학대전』 제2부는 “인간론” 내지는 “윤리학”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제2부는 신론(神論) 내지는 창조론을 다루는 제1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제1부를 기초로 삼는 동시에 제1부의 문제제기에 준하여 전개된다. 이런 의미에서 제2부의 인간론에 대한 관점과 방향은 주로 제1부에서 제시된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토마스는 신(神)의 순수성을 다루는 질문의 세 번째 논항에서 신의 경우에 자기 본질과 [본질의 보유자로서의] 본성은 동일한가를 묻는다. 이에 대답하기 위해 토마스는 인간의 본질을 나타내는 인간성(humanitas)과 구체적 인간(homo)이라는 개념이 가지는 의미 반경의 차이를 명백히 한다. 여기서 인간성이란 첨예한 차이는 있지만 인간의 본질 내지는 본성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본질(essentia) 또는 본성(natura)은 오직 그 종(species)의 정의에 들어오는 것만을 내포한다. 그래서 인간성(humanitas)이란 인간의 [개념]정의에 주어진 것만을 내포한다. 왜냐하면 인간성이란 개념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이도록 만드는 동시에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각자 자신을 개별화하는 우연적 요소와 함께 하는 개개인의 질료(육체)는 이러한 종의 정의에 속하지 않는다.” 여기서 토마스는 각각 전혀 다른 여러 구체적 사람들을 하나의 “인간”이라는 종으로 파악하고 또 그럼으로써 한 “인간”이라는 개념으로 우리에게 이해되는 근거로서의 “인간성”이라는 개념과 이 개념의 반경에 속하지는 않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개인의 성립에 실질적으로 포함되는 어떤 것을 구분한다. 이렇게 “인간성”이라는 본질 개념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개인의 육체뿐만 아니라 그 육체를 성립시키는 근육과 뼈, 머리색깔과 피부색 등을 보기로 들고 있다. 토마스는 이러한 본질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 유일한 규정성들은 인간성의 개념 규정에 주어져 있지 않지만, 특정 인간의 존재 규정, 즉 인간은 누구인가(in eo qui est homo)에 포함됨을 명백히 한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대답에 해당하는 인간의 본질(humanitas) 개념과 인간은 누구인가의 대답에 해당하는 인간의 존재 규정은 상호 어떤 관계에 서있는가? 무엇물음과 누구물음의 개념적 영역은 어떻게 서로를 차지하고 있는가?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못박고 있다. “인간이 누구인 바의 내용(in se)은 인간성이 갖지 않은 그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 이로 인하여 인간[개념]과 인간성[개념]은 온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오히려 인간성이란 인간에 대한 형상적 부분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본질을] 규정하는 원리(요인)들은 개별화 하는 질료에 대해서 형상적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이미 1930년 대에 출판된 『신학대전』의 라틴어-독일어판의 번역은 이 구체적 “인간”의 개념 영역이 “인간성”의 개념 영역보다 “더 크다”(mehr, als)고 번역하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번역은 임의의 의역이 아니라 해당 문헌의 해제에서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근거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지이머(A.Siemer)와 크리스트만(H.Christmann)의 해제를 한국적 언어로 재구성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언어적으로 인간성이란 인성(人性)을 말하며, 인성은 인간의 본질(essentia)이나 인간의 본성(natura)을 말한다. 나아가 인간의 본성은 “이성적 동물”로 정의된다. 즉 이성적 동물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은 인간인 동시에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홍길동은 인간이다”는 문장은 결국 홍길동이 인성을 가진다는 것을 선언한다. 나아가 홍길동이 인성을 가진다는 것은 홍길동이 인간의 본성이나 인간의 본질을 소유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홍길동과 인간에 각각 “이성적 동물”이라는 정의를 술어로 대입해보자. ㉮ “인간(S)은 이성적 동물이다(P).” ㉯ “홍길동(S)은 이성적 동물이다(P).” ㉮와 ㉯에서 “이성적 동물”이라는 본질 규정은 주어와 각각 어떤 관계를 맺으며, 어떤 의미 반경의 변화가 일어나는가? ㉮의 경우에 술어 P는 주어 S의 정의이다. 따라서 술어는 주어에 아무것도 더하거나 빼지 않는다. 즉 모든 이성적 동물은 인간이므로, 주어와 술어는 교환 가능할 만큼 동등하다. 결국 인간=이성적 동물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그러나 ㉯의 경우에도 술어 P는 주어 S의 정의임에도 불구하고, 상호 교환하면 허위가 되고 만다. 즉 모든 이성적 동물은 홍길동이라는 문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의 경우에는 주어와 술어가 같은 의미 반경을 가지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즉 홍길동이 이성적 동물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의미 반경의 차이로 인하여 “이성적 동물≠홍길동”이라는 등식이 초래된다. 물론 홍길동은 인성을 가지고 있지만, 홍길동의 개념적 내연(Inbegriff)은 “이성적 동물”의 개념적 내연보다 어떤 식으로든 “그 이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달리 말하자면 홍길동의 개념적 내연은 “이성적 동물”의 개념적 내연에 “어떤 것”을 더 추가한다. 그리고 이성적 동물은 곧 인간의 본질 내지는 본성을 말한다. 따라서 홍길동은 인간의 본질이나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홍길동 자신은 그러한 본질이나 본성에 그 “어떤 것”(aliquid)을 추가한 존재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렇다면 인간에 대한 물음의 지평도 이와 함께 드러난다. 무엇-물음은 토마스 아퀴나스도 간파하듯이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다. 누구-물음은 개인의 단순한 신상명세서가 아니라 “이성적 동물”이라는 본질 규정 “그 이상”을 말한다. E.코레트는 명시적으로 철학적 인간학의 지평을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한정된다고 했다. 그러나 토마스에 의하면 이는 분명 “그 이상”을 너무 일찍 포기하거나 가려버리는 문제 지평이 되어버린다. 오히려 인간에 대한 진정한 물음은 “그 이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때 비로소 인성에 대한 물음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토마스의 관점을 따르면 인간의 본질 “그 이상”은 인간이란 누구인가라는 물음의 지평 속에(in eo qui est homo) 비로소 제대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물음의 지평에 드러나지 않는 누구-물음의 지평은 어떻게 전개되는가? 무엇-물음을 넘어서서 전개되는 누구-물음의 고유한 지평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되는가? 구체적으로 인간의 본질 내지는 인간의 본성에 추가되는 그 “어떤 것”(aliquid)의 지평이 바로 누구-물음의 고유한 지평이 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이머(A. Siemer)와 크리스트만(H. Christmann)의 해제는 먼저 인간의 본성과 그 본성의 보유자 사이의 차이를 밝히는 가운데, 누구-물음의 고유성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나간다. 본성의 주체는 본성을 가진 자인 반면에, 본성이란 그 주체를 바로 이런 본성에로 규정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체와 그 주체의 본성은 전체와 부분의 역할을 한다. “본질의 주체는 본성을 넘어서서 구체적 개별성을 지칭한다.” 이에 따라 구체적 인간은 일체의 생물 가운데 하나일 뿐만 아니라, 결정적이고 유일한 특수성을 부여받은 존재이다. 결국 이러한 개인의 고유성은 인간적 본성의 정의에서 언표되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지이머와 크리스트만의 “그 어떤 것”에 대한 해석은 개별성을 지적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래서 “하나의 특정 인간은 그 인간성이 아니다.” 여기서 의문이 제기된다. 인간 뿐만 아니라 물질적 사물이나 생물에 대한 개별성의 원리도 질료이다. 그렇다면 누구-물음은 과연 무엇-물음의 지평에 대두되지 않는 인간의 “개별성”이나 “고유성”을 지향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일까? 여기서부터 우리는 지이머와 크리스트만의 해석을 벗어나서 누구-물음이 지향하는 보다 의미있는 문제 지평을 탐색해 보아야 할 것이다. 3. 『신학대전』 제 2부, 서언에 나타난 문제지평 인간적 존재의 특수성은 여타의 생물과 달리 단순히 개별성을 차지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개별성에 기초하는 인격을 달성하고자 한다. 나아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인격은 각자의 존재 지평에 따라 각각 다른 완성도에 도달한다. 모든 개인은 그 인격성에 있어서 평등하지만, 각각의 인격이 성취하는 완성도는 차이 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결국 철학적 인간학이나 윤리학의 궁극적 과제는 이러한 인격적 완성도의 격차를 극복하는 것일진대, 어떻게 문제의 지평에서 도외시할 수 있는가? 토마스는 이러한 관점을 어떤 식으로 도입하는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II부는 인간학이요 윤리학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는 실재로 인간을 어떤 문제의 지평에서 고찰해나가는가? 그는 과연 무엇-물음에 충실한가? 아니면 누구-물음의 지평을 전개하는가? 이도 저도 아니면 무엇-물음과 누구-물음의 지평을 이중적으로 설정하는가? 『신학대전』 II부의 서문은 토마스의 인간학 전체를 위한 문제 지평이다. 그 전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다마세누스가 말하는 바와 같이, 인간은 신의 모상을 향하여 만들어졌으며, 여기서 모상이란 지성적이고, 자유로운 결단을 내리며 스스로의 권리를 가진다는 것을 뜻한다. 앞에서 원형이신 신에 대해서, 신의 의지에 따라 그의 권위로부터 창출된 것에 대해서 말했으므로, 이제 신의 모상인 인간에 대해서 고찰하는 것이 남아있다. 인간 역시 자기 과업의 원리이며, 자유로운 결단을 내리며, 자기 과업에 대한 권리를 가지기 때문이다.” “Quia, sicut Damascenus dicit, homo factus ad imaginem Dei dicitur, secundum quod per imaginem significatur intellectuale et arbitrio liberum et per se potestativum; postquam praedictum est de exemplari, scilicet de Deo, et de his quae processerunt ex divina potestate secundum eius voluntatem(cf. I q,2 intro.); restat ut consideramus de eius imagine, idest de homine, secundum quod et ipse est suorum operum principium, qasi liberum arbitrium habens et suorum potestatem”(STh. Ia-IIae, prolog.) 이 서언은 라틴어 원문으로 길기는 하지만 한 문장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앞으로 방대한 제2부의 윤리학이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의 지평을 그 만큼 간략하면서도 장엄하게 선언하고 있다. 토마스는 앞으로 고찰될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본다기 보다는 온전히 신의 모상으로 본다. 신의 모상이라는 개념은 물론 서양 사상사에서 다마세누스가 발전시킨 것이다. 토마스는 이를 계승하는 가운데 신의 모상으로서의 인간을 자기 과업의 원리, 즉 출발점인 자로, 자유로운 결단을 내리는 자로 그리고 자기 과업 내지는 활동에 대해 권리를 가진 자로 본다. 그렇다면 인간을 신의 모상이라는 보는 토마스의 관점은 어떻게 제시된 것인가? 신의 모상은 근거 없이 제시된 것이 아니라, 이미 제 1부의 창조론적 인간론에서 정제되고 계획된 인간 이해이다. 『신학대전』 제 1부, 93문제의 안내에서 창세기 1장 26절의 인간관을 불러온다. “인간은 신의 모상과 유사성을 향하여 창조되었다고 말하므로, 이제 인간을 만들어낸 목적과 목표에 대해서 고찰되어야 한다.” 여기서 토마스는 신의 모상과 유사성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관점을 충분히 고찰한 결과에 따라서 제 2부의 서언을 제시한다. 그런데 서언에서는 특별히 신(神)의 유사성은 배제하고 모상 개념만을 인간에 대한 관점으로 강조한다. 지금까지 서언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유사성의 배제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모상개념의 선택은 토마스의 인간학적 관점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토마스의 선택은 물론 모상이나 유사성 개념 가운데 어느 하나를 내용적으로 완전히 퇴출시키는 것은 아니다. 유사성 개념은 모상의 결과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서언에서 두 개념에 대등한 무게를 부여하는 것도 아니다. 토마스는 개념을 통하여 본질적 인간을 넘어서서 현실적 인간을 고찰하는 새로운 지평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는 제 1부의 고찰을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따라서 다마세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모상을 향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은 지성적이고 스스로의 권리에 따른 자유 결단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에, 유사성을 향해서라는 것은 인간이 이룩할 수 있는 한의 덕(德)에 있어서 [신과의] 유사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유사성은 개별적 인간 안에 이루어질 수 있는 모상의 다양한 성취도를 나타내는 한편, 모상 개념은 인간의 지성과 스스로의 권리에 의한 자유 결단을 내포한다. 토마스는 이러한 의미의 구분을 통하여 제 2부의 1부 서언에 이르러 인간을 바라보는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한 것이다. 토마스는 1부의 개념 구분과 2부의 모상 개념 소환에서 똑같이 다마세누스의 모상개념을 인용한다. 이는 충분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 과연 토마스는 글자 그대로 인용한 것일까? 모상 개념은 토마스 이전에 이미 명확성을 가진 것일까? 모상에 대한 다마세누스의 규정은 이미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다마세누스는 모상 개념을 항상 “지성과 자유로운 결단”(intellectuale et liberum arbitrium)으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가끔 모상성을 “지성”(intellectus, nous), 혹은 “자유 결단”(liberum arbitrium, autexoúsion), 혹은 “지성과 정신”(intellectuale et mens, nous kai logos)로 규정하기도 한다. 나아가 그는 모상을 주로 “지성, 정신 그리고 자유 결단”의 종합으로 규정하기나, 아니면 “지성과 자유 결단”이나 “정신과 자유 결단”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다마세누스가 모상 개념을 이렇게 다양하게 종합적으로 규정하는 데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그는 사상사에서 처음으로 “모상” 개념이 어떤 방식으로 진술되는가에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이러한 다마세누스의 개념 규정을 인용하는 가운데 인간을 고찰하는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한다. 이러한 의도로 인하여 토마스의 다마세누스 인용은 글자 그래로 이루어지지 않을뿐더러 내용 그대로 수용하지도 않는다. 이런 변화는 제 1부 93문제의 인용을 거쳐 서언의 인용에 이르면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즉 토마스는 1부의 93문제에서 다마세누스가 모상을 정의한 “지성과 자유결단”에 “스스로의 권리를 가지는”(per se potestativum) 자유결단이라는 형용사적 의미를 덧붙인다. 나아가 제 2부의 서언에 오면 “스스로 권리를 가지는” 형용사적 의미는 라틴어의 특유한 용법인 “그리고”(et)를 통하여 “자유결단”과 동등한 문법적 지위를 획득하는 동시에 독립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나아가 서언의 후반부에서 앞으로 다룰 인간을 규정하는 구절에서는 형용사형의 “권리적”(potestativum)이 결정적으로 명사형 “권리”(potestas)로 표현된다. 그럼으로써 “권리”는 이제 모상의 의미 가운데서도 엄연히 독립된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이를 통하여 이제 인간은 단순히 지성과 자유결단을 가진 존재로 고찰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활동과 업적에 엄연한 권리를 소유하는 존재로 고찰된다. 이는 인간에 대한 무엇-물음에 대두되지 않는 내용으로써, 행위하고 과업을 성취해나가는 인간을 묻는 데에 새로운 지평을 개방하는 핵심적 요소가 된다. 그럼으로써 이제 신의 모상으로서의 인간은 스스로의 “권리”를 가지는 고유한 지위와 특별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고찰되는 지평에 선 것이다. 이제 인간은 단순히 지성과 자유 결단을 가진 존재를 넘어서서, 적어도 인간의 행위와 윤리 그리고 삶의 의미가 문제시 될 경우에는 자기 활동에 대한 권리와 책임을 가진 존재로 우뚝서게 된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모상개념은 『신학대전』 제 1부의 창조론적 인간관과 제 2부의 윤리학을 연결하는 “다리”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제 3부의 그리스도론을 준비하는 매개념 역할을 한다. 『신학대전』에서 모상 개념이 차지하는 이러한 관점 확장의 역할은 이미 호프만(A. Hoffmann)이 93문제에 대한 주석에서 밝히고 있는 바이다. 즉 토마스는 제 3부에서 그리스도의 인격(persona)을 완전한 “신의 모상”으로 서술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 2부의 서언은 인간에 대한 탐구를 개인의 인격에 무게를 두는 모상개념을 매개로 무엇-물음보다는 누구-물음의 지평에서 전개하겠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나아가 제 1부 93문제에서 다루어지는 “신의 모상”에 대한 물음은 지성과 의지를 가진 인간이라는 “본질적 지평”(per comparationem ad essentiam)을 넘어서서, 이제는 자기 과업에 대한 권리와 인격을 지닌 인간이라는 “현실적 지평”(secundum actus)으로 전이되고 있다. 4.. 누구-물음의 지평으로서 “신의 모상” “인간은 신의 모상과 유사성을 향하여 만들어졌다.” 창세기(1, 26)의 이 명제는 다마세누스와 토마스의 해석을 거쳐, 이제 인간에 대한 물음을 무엇-물음에서 누구-물음의 지평으로 확장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신의 모상이란 인간 이해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4.1 모상의 개념적 실마리 모상 개념에 대한 토마스 자신의 탐구도 수많은 평행 문헌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들 문헌에 대한 해석들 역시 다양해서 서로 일치하지 않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토마스의 모상론에 대한 상이한 해석 방향에 기인한다. 어떤 해석자는 토마스의 모상론을 플로티노스의 동질론(homoiousios-lehre)의 영향으로 보며, 또 다른 해석자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요소가 지배적인 것으로 보기도 한다. 여기서는 다만 철학적 인간학의 새로운 지평이라는 관점에서만 고찰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토마스는 모상 개념의 가장 기본적 의미에서 출발한다. 즉 “모상이란 어떤 것이 다른 것의 모방해 나가는 가운데 일컬어지는 말이다.” 여기서 “다른 것을 모방해 나가는 가운데”란 표현은 이미 모방 개념이 그 원형에 의해 조각되었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모상이 그 원형을 모방해 나가는 행위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단순히 신을 본따서 만들어졌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그 원형에 대한 모방의 행위를 자신의 현실로 삼고 있다는 의미에서 신의 모상이라 불린다. 즉 모상으로서의 인간은 그 원형인 신을 단순히 원천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목적으로 삼고 있다. 원천과 목적은 개개인의 모상으로서의 존재를 실현하는 가운데 발견될 것이다. 결국 모상이란 특히 인간의 인간다운 존재방식을 겨냥한 표현이 된다. 또한 토마스는 모상의 개념적 특성을 통하여 보다 새로운 의미를 구축하고자 모색한다. 그는 논박해야할 대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상은 선행하는 것과 후차적인 것이 주어져 있는 모방행위로부터 나온 말이다.” 그러나 이 명제는 선행이나 후행이 없는 신의 위격들 사이에서 거론된 명제이며, 당연히 신의 위격들 사이에서는 부정된다. 그러나 이 명제가 인간의 모방에 적용된다면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토마스는 모방 행위에 주목하면 현실적 인간에게 고유한 모상의 의미를 도출하고자 한다. 4.2. 신에 대한 모방의 인간학적 고유성 토마스는 모상의 인간학적 의미를 찾기 위한 실마리를 언어방식에서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는 일찍이 『명제집 주해서』에서 다음과 같이 모색한다. “모상의 개념적 근거는 모상이라는 단어가 파생되는 모방에서 비롯되며, 이마고(imago)는 이미타고(imitago)와 유사하게 소리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이미타고는 어원학적 근거를 가진 것이 아니라, 토마스가 임의로 만들어낸 조어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타고”라는 조어를 통하여 원래 모방하다라는 라틴어의 수동태형 동사원형 “imitari”의 능동적이고 적극적 의미를 강조하고자 한다. 이렇게 토마스는 모방의 능동태를 기초로 두 가지 의미를 도출해 낸다. “모방의 의미에는 두 가지가 고찰된다. 물론 하나는 모방이 비롯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서로 모방의 관계에 서있는 것이다.” 여기서 전자는 모상에게 본질적으로 구현되는 모방의 대상을 말한다. 반면에 후자는 모방행위 자체를 말한다. 이 모방 행위가 가지는 사실성에는 동등성이나 유사성이 가지는 관계 내지는 원형과 모상이 맺는 어떤 질서가 성립된다. 그리고 이러한 모방 행위 자체의 사실성에 기초하여 신의 모상이 가지는 어떤 고유성이 드러나기 한다. 다음 단계로 토마스는 지극히 중세적 질문을 통하여 인간에 대한 현대적 관점을 도출해 낸다. 즉 천사는 인간보다 더욱 완전한 방식으로 신의 모상이 되는가? 그리고 이 질문은 “신에 대한 모방”이라는 관점에서 고찰된다. 이하는 상기 논항의 본론에서 행하는 토마스의 논술을 정리한 것이다. “우리는 모상에 대하여 두 가지 방식으로 말한다. 첫째, 어디서 모상의 개념 규정이 일차적으로 생각되는가 하는 관점에 따라서이다. 이는 다름 아닌 본성 내지는 본질이다. 그리고 인간과 천사의 경우에 이것은 지성적 본성이다. 둘째로, 어디서 이차적으로 생각되는가라는 관점에서 인간 안에 있는 신의 모상을 고찰할 수 있다. 이는 물론 인간 안에서 발견되는 신에 대한 모방이다.” 첫 번째 관점에서는 물론 천사와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지성적 본성이 각인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당연히 천사의 지성이 인간의 지성보다 완전할 것이다. 천사는 정신적으로 인간보다 더 순수하고 완벽할 것이다. 그러나 천사의 모상성에는 어떤 차등이나 서열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부들은 이러한 입장에 서 있다. 그러나 두 번째 관점은 모방 행위의 현실에서 발견되는 어떤 상호 교환적 관계나 질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결국 토마스는 두 번째 관점을 통하여 서양 사상사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다. 즉 이제 인간이 처한 모상으로서의 존재방식은 모방의 현실성을 기초로 고찰되기 시작한다. 이런 관점에 의한 토마스의 답변은 단호하다. “이런 [두 번째] 관점이나 이와 유사한 관점에서 보면, 천사보다는 오히려 인간 안에 신의 모상이 더 많이 발견된다.” 물론 여기서 토마스가 제시하는 첫 번째 관점과 두 번째 관점은 주된 관점과 부수적 관점이라는 어떤 근본적 차이나 차등을 말한다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물음의 목적에 따라 다른 각도에서 보기를 권고하는 지평의 구분이다. 즉 첫 번째 관점이 본질적 관점에 해당된다면, 두 번째 관점은 실천적 관점에 해당된다. 실천적 관점에서는 인간이 단순히 지성을 가졌다는 사실보다는 신의 완전성을 모방해 나가는 인간의 고유한 현실이 더욱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신의 모상이라는 인간적 존재방식은 이제 자아의 실현이라는 지평에 이르러 천사보다도 더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결국 여기서 철학적 인간학에 대한 결정적 관점의 전향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4.3. 신에 대한 인간적 모방의 조건: 인격 토마스가 취한 두 번째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과연 누구인가” 하는 현실적 지평은 인간의 원천인 신에 대한 모방에서 구현된다. “1] 신은 신으로부터 존재하는 바와 같이, 인간은 인간으로부터 존재하는 만큼, [인간 안에는 신에 대한 모방이 구현되며], 2] 마치 신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바와 같이, 인간의 영혼은 인간의 육체 전체에 온전히 존재하는 동시에 육체의 각 부분에도 온전히 존재하는 만큼, 인간 안에는 신에 대한 모방이 구현된다.” 이제 신에 대한 모방은 인간에게 내재하는 모상의 특수성으로 파악되는 동시에 행위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가장 근본적 이해로 자리잡는다. 따라서 토마스의 관점은 이제 본질적 인간이해를 넘어서서 현실적 인간 이해의 지평으로 전개되며, 여기서 인간은 인격적 존재와 영육(靈肉)의 통일성으로 진정한 모습을 드러낸다. 인간의 특수성으로서 인격적 존재와 영육의 통일성은 인간의 본질을 나타낸다기보다는 인간의 현실을 나타낸한다. 따라서 이는 인간은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으로 명백히 드러나며, 토마스의 철학적 인간학과 행위론 그리고 윤리학은 현실적 지평에 악센트를 두면서 전개된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이란 누구인가에 대한 토마스의 대답을 찾아보자. 인간이란 누구인가? 우선적으로 인간은 하나의 유일한 인격이다. 그러나 토마스는 인간의 인격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다루기보다는 다른 인간학적 연구를 위한 기초로 고찰한다. 예를 들면 『신학대전』 제 1부, qq.94-101에 나오는 첫째 인간의 상태와 조건, 제 2부의 자유로운 행위 그리고 제 3부의 그리스도론을 다루는 가운데서 인격에 대해서 고찰한다. 그러나 토마스 이후의 연구들은 대체로 모상 개념에 대한 실천적 가치를 간과하거나 이차적 관점으로 치부해왔다. 모상이 가지는 신에 대한 모방의 조건을 실천적 관점에서 처음으로 해석한 사람은 막스 제클러(M. Seckler)이다. “인간의 역사적 과정에서의 번성은 결함의 징표만도 아니요, 약화된 연출력의 결과만도 아니요, 인간적 단편들의 군집 속으로 전래된 신의 충만성만도 아니요, 오히려 모방하는 실체적 번성(multiplcatio hypostasum)이다.” 이제 인간의 번성은 “천사와는 반대로 인간이야말로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인하며”, 인격이야말로 인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발생의 주체요 의미”라는 사실에 기초한다. 여기서 제클러가 말하는 결실 가능성은 단순히 생물학적 번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 속에 실현되는 모상의 충만성을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으로부터 비롯된다”는 토마스의 말은 “신은 신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말에 대비시킬 때 비로소 제대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으로부터 비롯되는 인간의 번식은 다른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생물학적 번식을 말할 것이다. “신은 신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명제는 신의 삼 위격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신적 위격들 사이의 관계를 말한다. 신에게 있어서 위격적 차이는 각각 어떻게 신적 본성에 상응하는가 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인간 역시 어떻게 자신의 본성에 상응하는가, 어떻게 자신의 본성을 완성시키는가 하는 방식에 따라 온전한 인격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신(神)에 대한 모방이란 단순히 개인의 보존이나 새로운 개체의 번식을 넘어서서 개별적 인격의 다양한 전개를 말한다. 즉 인격으로서의 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실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오직 인간에게만 고유한 개별적 과업으로써 그가 과연 누가 될 것인지를 실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단순히 자기 자신을 보존해야 하는 것과는 달리 자신의 인격을 전개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떤 윤리적 갈등도 생기지 않는다. 나는 과연 누가 될 것인가? 이는 오직 인간만이 가지는 고유한 실현 영역이다. 인간의 인격적 존재방식은 다름 아닌 다음과 같은 모방의 행위에 근거하고 있다. 즉 인간은 신적 인격에 대한 온전한 비례를 모방한다. 따라서 인간적 삶의 의미와 과업은 단순히 자기보존의 지평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인격의 전개와 성숙을 지향한다. 나아가 인간에게는 나는 과연 누가 될 것인가라는 물음에 온전히 천착할 수 있도록 지성적 본성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즉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인간의 본질로서의 인간성은 다름 아닌 개별적 인격의 전개와 성숙 내지는 자아 실현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더도 덜도 아닌 본질로서의 인간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는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하여 주어진 기초이다. 여기서 전자의 인간성은 보편적 공통성이지만, 후자의 인격은 개별적 주체성이다. 4.3. 신에 대한 인간적 모방의 조건: 영혼과 육체의 종합 토마스는 신의 모상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특수한 지평을 또 다시 다마세누스에게서 찾는다. 다마세누스는 모상에 대해 고찰하는 관점을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 모상 개념은 본성, 번식성 그리고 정신의 지배원리에 따라 언표된다. 이러한 개념적 특성은 인간 뿐만 아니라 천사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 해당된다. 그러나 둘째로, 모상 개념은 인간적 영혼의 특수성에 따라 언표된다. 인간의 영혼으로 현전하는 한에서의 영혼은 감각적 세계와의 결합 속에서 존재한다. 다마세누스는 영혼과 육체의 결합을 “매듭” 내지는 “이음새”(nodus)라고 표현하면서, 인간의 영혼이 존재하는 특수한 방식에 주목한다. 토마스는 이러한 통찰을 드러내는 동시에 보다 진전된 통찰을 가미한다. 그는 영혼과 육체의 결합을 신에 대한 인간적 모방의 두 번째 조건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인간적 영혼의 존재방식을 천사와 구별하는 가운데 특수성을 드러낸다. 즉 인간의 영혼은 그 육체 전체에 걸쳐 존재하는 동시에 육체의 모든 부분에 걸쳐 현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영혼의 존재방식은 오직 인간에게만 고유한 순간이다. 모상의 이러한 순간은 그 원형인 신의 존재방식과 유비 관계를 이룬다. 신도 세계에 대해서 전체에 걸쳐 존재하는 동시에 모든 부분에 걸쳐 현재하는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신은 세계의 모든 부분에 걸쳐 존재를 부여하며 그 존재 속에 보존하기 때문이다. 특히 토마스는 인간이 모방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영혼에 대해 언급할 경우에 영혼과 육체의 관계를 본질적 관점에서 고찰하기 보다는 영역적이고 기능적 관점에서 고찰한다. 이는 토마스 이전의 전통적 인간 이해와는 다른 관점이다. 예를 들어 전통적 입장을 대표하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에 대해 보다 본질적 관점에서 그리고 육체와 대립시켜 언급하는 경향이 강하다. 토마스는 물론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혼론을 전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지만, 인간이 신의 모상이라는 관점에서는 영혼의 특수한 존재방식을 강조한다. 즉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영혼은 한마디로 육체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영혼을 본질적 관점에서 보면 그렇지만, 영역적이고 기능적 관점에서 보면 영혼은 당연히 육체 안에 존재한다. 토마스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인 한에서의 영혼은 인간 안에 있으며, 사실적으로 육체의 실체적 형상이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차이는 당연히 인간을 고찰하는 물음이 걸쳐진 지평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무엇-물음의 지평에서 보면, 영혼은 육체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토마스의 누구-물음의 지평에서 보면 영혼은 육체 안에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물론 논증을 통해서 밝혀질 수 있지만, 여기서는 드물게도 인간적 경험을 통해 강조된다. 즉 “누구든지 그 자신이 바로 사유하는 그 자라는 것을 경험한다.” 5. 철학적 인간학의 전망 지금까지 인간에 대한 무엇-물음의 한계와 누구-물음의 요청을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제 2부의 1부 서언에 나타난 모상 개념의 정의를 실마리로 살펴보았다. 물론 무엇-물음과 누구-물음의 지평에 대한 논쟁은 현대 철학적 인간학의 문제제기이다. 특히 인간 탐구에 대한 일부의 신토미즘과 실존철학적 입장의 차이에서 비롯된 논의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 제기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모색은 여기서 고찰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교부학 시대의 요안네스 다마세누스에서 시작되어 중세 황금시대의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 구체화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엇-물음은 물론 인간의 본질에 대한 보편 타당한 명제를 이끌어 내어 일반화시키려는 전통적이고 근본적 관점에 속한다. 그러나 이는 인간이 가지는 세계 내에서의 특수성과 인간이 지향하는 내적 목적을 도외시한 관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누구든지 인간이라는 측면에서는 더 인간도 없고 덜 인간도 없다. 이는 당연히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인간의 본질에 근거한다. 그러나 또한 인간이라는 모든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이 되고자 하며, 인간으로서 특수하게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으로서의 인간을 추구한다. 여기 후자에서 말하는 인간에 대한 탐구는 누구-물음의 지평에 이르러 비로소 진면목을 드러낸다. 즉 인간은 누구이며, 과연 누가 되고자 하며, 누가 되었을 때 비로소 만족할 수 있는 존재인가? 이러한 물음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인간의 본질 탐구를 통해서는 드러날 수 없으며, 오직 인간의 개별성과 인격을 통하여 고려될 수 있는 인간에게 고유한 특수성의 지평에서 비로소 관찰될 수 있다. 인간은 단순히 자신의 본질을 보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삶에서 자기보존을 넘어서서까지 추구하는 어떤 특수한 삶의 업적을 성취할 권리를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결국 누구-물음이 추구하는 지평은 나와 타인을 구별하는 개별성과 인간과 여타의 동물이나 천사와 구분하는 특수성의 지평이요, 개개의 인간이 삶의 여정에서 다르게 도달할 수밖에 없는 인간적 완성도를 드러내는 지평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인간으로서, 인간을 살아가는 존재로서 고찰하는 경우에는 더 더욱 누구-물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인간에 대한 무엇-물음은 누구-물음을 위한 원리나 기초로 도입해야 하는 한편, 결국 무엇-물음은 누구-물음을 지향할 때 비로소 철학적 인간학이나 윤리학을 위한 기초적 물음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철학적 인간학은 누구-물음을 통하여 인간에 대한 본질적 탐구의 시야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인간이란 누구인가라는 실천적이고 현실적 물음에 천착할 때, 비로소 철학적 인간학은 생물학이나 심리학에서 고찰되지 않는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오직 이러한 지평에서만 인간은 단순히 자기 보존의 목표에 던져진 동물과 차별화된 목적을 지향한다. 동시에 인간은 오직 이런 관점에서는 자기 실현과 개별적 완성도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배제된 천사와도 확연히 구분되는 것을 넘어서서 천사보다도 더욱 고귀한 존재로 자각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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