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의미 부여자'로서의 인간

나뭇잎숨결 2022. 1. 29. 09:46

'의미 부여자'로서의 인간

금교영

(영남대)

 

 

목 차

1. 머리말

2. '의미'존재에 관한 기존 견해들

3. '의미'존재에 관한 주장

4. '의미 부여'의 원리

5. '의미 부여자'로서의 인간

6. 맺는 말

 

1. 머리말

'의미'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 개념 자체가 의미하는 것이 있단 말인가? 우리는 이처럼 물을 수 있다. 본래 '의미'는 '의미하다'란 동사가 半切된 명사이다. 우리 한글 활용에서 처럼, 영어와 독일어 활용에서도 그렇다. 영어의 'mean'에서 'meaning'이 파생되어 나왔고, 독일어의 'sinnen'에서 'Sinn'이, 'bedeuten'에서 'Bedeutung'이 파생되어 나왔다. 이와 같이 일상 언어 활용의 측면으로는 그것도 얼핏봐서는 '의미'란 개념 그 자체는 어떠한 정의체(definiens)도 갖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의미' 문제에 관해서 언급한다면, 그것은 곧장 언어에 대한 이해, 언어의 본성, 구조, 의미 및 사용 양태를 연구하는 언어학의 일인 것처럼 생각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런 영역의 의미 문제를 철학에서도 연구하고 있다. 특히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에서 그런 성격의 의미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여, 영미 분석철학의 인공 언어학파와 일상 언어학파들이 그 문제를 본격적으로 취급한다. 물론 이들보다 훨씬 이전에 수리 철학자인 G. Frege가 의미 문제를 취급하였다. 그는 그의 저서 [Über Sinn und Bedeutung](1892)을 통하여 논리학의 기초를 위한 언어 활용상의 의미에 관한 관심을 보여 준다.

그러나 프레게의 영향을 받은 후설도 언어 활용상의 그런 문제를 취급하나, 조금 방향을 달리하여 '우리 인간의 의식 활동에 의해서 대상에 관한 명증적인 의미를 구성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더 관심있게 취급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가치 철학자들 특히 하르트만에 이르러서는 의미에 관한 존재론적 사고를 하게 된다. 의미의 객관적 존재 문제에 관한 사고를 하게 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바로 이 문제의 방향에서 논의해 보고자 한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 사용하는 '의미' 개념은 위에서 언급한 '의미' 개념의 차원을 넘어서 좀더 의미심장화된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 개념은 정의체를 갖고 있다. 그런 의미를 철학사적으로 고찰해서, 그 때마다의 의미의 존재적 본성을 밝혀 본다. 예컨대 의미는 우리 인간의 의식과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초월적인 것인가? 아니면 비록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우리 인간의 의식과 관계하여 비로소 그 존재적 의의를 갖게 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전적으로 우리 인간의 의식에 의해서 존재하게 되는 의식의 산물인가? 등으로 그 본성을 철학사적으로 정리해 본다.

그 다음 니콜라이 하르트만을 위시로 한 현상학자들의 '의미' 존재에 관한 견해를 고찰해 본다. 여기서는 의미란 도대체 어떤 존재이며, 그것은 과연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존재하는 이념적인 것인가, 그러면서 또한 이데아와는 달리 우리 인간의 정신과 관계함으로서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 인간에 대해서 존재하게 되는 그러한 존재인가를 알아 본다.

이념적 존재인 '의미'에게 인간 정신이 관계함으로써 비로소 그 존재가 우리 인간에게 의의가 있게 된다는 것이 밝혀지므로, 우리는 다음과 생각할 수 있다. 즉 머나먼 선험적 세계에서 잠자고 있던 '의미'가 우리 인간에 의해 비로소 현실계에서 일깨워지고 빛을 발하게 된다. 그래서 그 '의미'가 우리 인간에게 제구실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우리 인간이 '의미'가 그렇게 되도록 할 수 있는지, 다시 말해 우리 인간의 정신이 이념적인 '의미'를 현실계로 등장시킬 수 있고, 더 나아가 그 일을 정당하고 보편타탕하게 할 수 있는지, 만약 그런 능력이 우리 인간에게서 인정된다면, 그 때는 바로 우리 인간은 현실계 내에서의 '의미 부여자'라고 할 수 있지 않는지를 살펴 본다.

2. '의미'존재에 관한 기존 견해들

먼저 우리는 플라톤의 '의미'에 관해서 말할 수 있다. 그는 모든 존재들 가운데 의미의 존재를 가장 우월시 하고, 그것이 가장 높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의미에 관한 그의 형이상학적 근본 명제를 현대적 용어법으로 표현한다면, "모든 존재자들은 의미를 지향해 있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의미의 원리에 의해 지탱되고 보존되며, 존재로의 모든 생성은 동시에 의미의 실현이기도 하다." 이 근본 명제에서 진술하고 있는 의미는 사실상 이데아이다. 플라톤의 철학에서 모든 존재자들은 이데아에 의해서 존재하게 되고 지탱·보존되며, 모든 존재자의 생성은 현상계 내에로의 이데아의 불완전한 나타남이고, 따라서 모든 존재자들이 이데아를 지향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다.

그러면 이데아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현상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현상계 외의 다른 어떠한 세계도 단순한 경험과학의 차원에서 볼 때 존재한다고 인정할 수 없으므로, 이데아가 존재할 세계가 실재로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데아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우리 인간의 관념적 산물이 아닌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고는 너무나도 원시적인 것이다. 이것을 자연과학주의적 사고라고 하기에도 부족한 점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의 양자역학도 우리 인간이 만져 볼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원자의 미크로 세계의 존재를 확인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현상계 외에 미크로 세계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의 의식 세계, 그리고 저 하늘에 있는 별의 세계처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이념계도 있는 것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데아는 현상계에도 존재하지 않고, 우리 인간의 의식 속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그 자체적으로 존재하고 완전성을 보존하면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들로 구성된 하나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이데아 세계라고 할 수 있는 이념계를 말이다. 그러므로 이데아는 이념계에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데아의 이러한 존재 즉 이념계에만 있음은 곧 이데아의 초월성을 의미하고 있다. 플라톤 철학의 그 어디에서도 이데아 그 자체의 현실계에로의 실현은 말해지고 있지 않다. 이데아는 그의 온전성을 훼손한다 해도 현실계로 출현할 수 없다. 오히려 이데아는 현실계에 그의 그림자만 비추어 준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데아에게는 우리 인간의 정신도 아무런 역할을 가하지 못한다. 인간의 정신이 관계함으로써 이념계에 있는 이데아가 움직이거나 변화하는 것도 아니고, 현상계에 내려오는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이데아는 그 무엇으로부터도 간섭을 받지 않는 자존자족하고 영구불변·부동하는 존재인 것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의미는 바로 이러한 이데아인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에서는 의미의 '초월성'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플라톤은 이데아라 할 수 있는 의미가 사물들을 자신에게로 이끌어 올린다고 생각한다. 뒤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의미의 이러한 성격을 고려하여, 의미를 '부동의 원동자'라고 말했다. 의미가 이념계에 존재하면서 다른 모든 존재로 하여금 그에게로 향하고 그를 모방하고 그를 위하여 존재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그 당시의 목적론적 사고가 생겨난 동기가 있는 것이다.

이제 '의미'존재에 관한 칸트의 견해를 살펴 보자. 의미에 관한 칸트의 견해를 고찰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당위에 관한 그의 사고부터 서술해 보자. "당위는 인간에게 외적으로 강제된 것이 아니고, 그 자신의 것, 그의 본질에서 나온 것, 그의 의지에 적합한 그런 것이다. 실천이성은 개인의 이성은 아니지만 신의 이성도 아니다. 그것은 유로서의 인간의 이성, 즉 그의 본질에 속해 있고 그의 본질을 이루는 그러한 이성이다." 당위는 인간의 내면에서부터 우러러 나오는 것이다. 양심의 소리이다. 어떤 사태 혹은 상황의 바람직하지 못함을 알고 바람직한 그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곧 당위라 할 수 있고, 또 실천이성에 의해 내려지는 무상명령이 당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실천이성은 전 인류 개개인에게 한결같이 공통적으로 주어져 있고 보편타당한 척도를 갖고 있는 것이다. 당위는 인간에게 세계 내에서 실현해야 할 과제를 부여하고, 인간이 이뤄내야 할 사명과 지향해야 할 목표를 부여한다. 따라서 그러한 것들로 형성된 목적 왕국을 操縱할 수 있겠는데, 이러한 목적 왕국은 바로 인간의 것이라 할 수 있다. 방금 언급했듯이 목적 왕국을 형성하는 인간의 과제, 사명, 목표는 인간의 내적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것들에 의해서 결정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지어 "칸트는 인간 생활에 의미를 부여하는 원리를 내세적인 세계로부터 다시 되찾아 와서, 그것을 인간의 고유한 것으로 되돌려 놓았다. 이것은 곧 이성의 자율적 원리로서의 도덕률의 발견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목적 왕국은 원래 세계 내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행위없이는 실현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의 본질이 어떠한지를 우리 인간은 경험으로부터는 결코 알 수 없다. 그것이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 그리고 우리 인간의 행위가 아닌 다른 그 무엇이 그것을 실현할 수 있을까? 자연 현상들이 그것을 실현할까? 또 그것을 우리 인간이 경험세계로부터 알아낼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도 우리들은 "목적 왕국이 인간 자신으로부터만 순수 선천적으로 창조되어지는 것임을 확신할 수 있고, 인간 밖의 세계의 어떤 힘에 의해서도 실현될 수 없는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이상의 두가지 측면으로 볼 때, 우리는 목적 왕국이 우리 인간 자신으로부터 선천적으로 창조되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목적 왕국이란 것은 어떤 것인가? "실천이성은 도덕 법칙을 통해서 자유의 실재성을 명시하고, 동시에 이 법칙으로 사변 이성이 지시만 할 수 있고 그 개념을 규정할 수는 없는 바로 그 가상계의 법칙을 명시한다"는 칸트의 사고로부터, 우리는 자유, 영혼 불멸, 신의 존재와 같은 것을 인식 이론적 측면에서는 아니지만 실천 이론적 측면에서 操縱하지 않을 수 없음을 그가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인식 이론적 측면에서는 결코 인정할 수 없는 가상계의 존재를 실천 이론적 측면에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가상계 또는 Noumena는 인간의 순수이성 가운데서 사고되지 않으면, 그 존재의 성립이 불가능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칸트는 자유와 도덕성 등의 실천적 분야에 대해 사고할 때, 비로소 그런 세계를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 자신이 그 자신의 도덕적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런 세계를 구축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일은 인간 자신의 사명이요, 이런 세계를 지향하여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삶의 의미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 있어서 꼭 실천적인 측면의 세계만은 아니지만 바로 그런 세계를 우리는 목적 왕국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상의 고찰을 토대로 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칸트의 '의미' 존재에 관해서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인식 이론적 측면에서 고찰해 볼 때, 목적 왕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천 이론적 측면으로 고려할 때 목적 왕국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이것의 존재를 확신하는 바는 우리 인간사에는 자연 현상계의 변화와는 달리 인과필연성만이 아닌 자의성 또는 자유가 성립하고, 그러므로써 자연법칙만이 아닌 도덕법칙이 통용된다는 것에 있다. 인간사에 자유가 있고 그럼으로써 그 자유가 허용하는 인간 자신의 자율성이 확보된다. 이 자율성에 따라 우리 인간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그런데 칸트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그의 내면의 세계로부터 우러러 나오는 '당위' 또는 '의무감'에 의해서 자율성을 규제하게 된다. 그러면 현상계에서는 없던 그것이 어째서 내면의 세계에 있게 되는가? 아니면 그것은 본래 내면의 세계에 있는 것인가? 아닌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 인간의 실천이성에 의해서 우리 내면의 세계에 부여한 것이고, 혹은 실천이성의 입법에 의거해 생겨난 것이다. 여기서의 이 내면의 세계 또는 가상계 혹은 실천이성의 입법계가 바로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의미'의 세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칸트에 있어서 '의미'의 존재는 우리 인간의 실청이성에 의해서 존재하게 되는 것, 쉽게 말해서 우리 인간의 정신이 관계하여 존재하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에게는 '의미'의 내재성이 인정될 것이다.


3. '의미'존재에 관한 주장

니콜라이 하르트만을 위시한 가치 철학자들은 '의미'의 존재 문제에 있어서 플라톤의 '의미' 초월성, 칸트의 '의미' 내재성이라는 견해들과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의미'는 플라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전적으로 이념적인 것으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칸트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전적으로 인간 정신의 창조물만인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이념적으로도 존재하면서 우리 인간에게는 그것에 관계하는 정신를 통하여 비로소 비춰지는 바로 그러한 존재라고 간단하게 정의해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그것의 존재는 어떤 것인가?

'의미'는 이념적 존재로서는 우리 인간의 의식과는 상관없이 선천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는 현상계에서는 결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고, 그러므로 경험적으로 접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는 우리 인간에게는 우리 인간이 지향해야 할 목표, 그의 삶이 아니 그의 삶의 모든 것이 우러러 향해야 할 목표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의 이념은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이념, 즉 그와 같은 본성과 존재방식을 갖춘 이념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는 E. 후설이 '이념 통일체'라고 명명하는 의미들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실사적 존재로서의 '의미'는 이념적인 '의미'에 대해서 우리 인간의 정신이 관계를 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후설에 의하면, 그 의미는 인간의 의식 작용 즉 의식의 지향 작용에 의해서 형성되어지는 것이라고 하는데, 의식이라는 것은 반드시 그 무엇에 대한 의식일 것이다. 따라서 그 의미는 이념적인 의미에 대한 지향적 직관 작용을 필연적 토대로서 삼아서 인간이 의미화하여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의미는 원초적인 어떤 하나의 것, 어떤 보편적인 것, 즉 우리가 현실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들의 배후에 상정해야 할 어떤 보편적 존재 속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는 경험세계에 주어져 있고, 우리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만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런 의미는 "인간에 대한 존재"의 형식을 취한다. 따라서 이런 의미는 자체적 존재의 방식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이념적인 의미 즉 자체적 존재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 인간 정신이 관계하여 비로소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의미에도 두가지의 종류가 있을 것이다. 이념적 존재로서의 의미와 실재적 존재로서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후설도 이념적 존재로서의 의미 자체와 의식 작용의 결과로서의 의미를 구별하고 있다. 이념적 존재로서의 의미 자체는 의식이 지향하는 바의 대상이고, 의식 작용의 결과로서의 의미는 의식이 이미 지향한 결과로 획득된 대상이라는 것이다. 전자는 플라톤적 의미일 것이다. 현대 독일 가치철학은 물론 전자에 관해서도 많은 논의를 하지만, 특히 후자에 관해서 더욱더 많은 논의를 한다. 따라서 그 가치철학이 의미에 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으냐고 묻는다면, 의미 초월성, 의미 내재성의 견해처럼 한마디로 대답할 수 없다. 먼저 가치철학의 '의미'에 관한 견해가 그러하다는 것을 말하고, 이제부터 그들의 '의미' 에 관한 견해를 서술해 보기로 한다.

하르트만에 의하면 "현실 세계로부터의 도피가 최후의 해결책이 아니다. 이데아의 직관까지 상승해 간 자는 단지 거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고, 다시 지상계로 돌아와서 진리의 빛을 그것이 비치지 않은 곳에 밝혀야 한다. 최종적 목표는 이데아를 보게된 자에 의해서 무의미한 현실이 의미를 부여받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 그의 정신을 통해서 직관한 이념적 의미를 다시 현상계에 끌어내려야 한다. 그래서 무의미한 현실에 의미를 채워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역활이고 권리이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해서 현상계에 존재하게 되는 '의미' 바로 그 의미가 문제가 된다. 이런 의미는 항상 우리 인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고, 바로 우리 인간의 정신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관계하지 않는 이상 그런 의미는 현상계에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심지어 이념적 의미에 대한 우리 인간의 주관 관계성이 그런 의미를 결정하게 된다고 할 수도 있다.

자연현상의 변화에서 성립하는 자연법칙 또는 존재 법칙 일반은 필연적으로 예외를 용납하지 않는 방식으로 결정되어 있는 반면에, 인간의 현실 세계에서 성립하는 도덕 법칙, 역사 법칙, 사회학 이론, 경제 법칙 등은 그런 방식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 이런 법칙들은 그 작용에 있어서 자연 법칙처럼 그렇게 엄밀하고 인과필연적이지 않다. 개연적일 수 있다. 이런 법칙이 이럴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현실세계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인간 그 자신의 '인격'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인격의 활동은 自意 혹은 隨意的일 수 있다. 인격의 활동이 그러하기 때문에 인간의 주도 하에 이루어지는 인간의 현실세계에는 필연성만이 아니라 임의성도 존재케 되고, 그 세계를 설명하는 여러 법칙들은 인과 필연성의 논리뿐만 아니라 개연성의 논리도 갖게 되는 것이다. 다시 본 논의로 돌아가면, 인간의 현실 세계에 있어서는 가치있는 것도 있지만 반가치적인 것도 많이 있으며, 또 인간의 행위는 때로는 선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악하기도 하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왕 인간이 행위하기 위해서는 또는 이 세계를 주도적으로 이루어 나갈 바에는 보다 훌륭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이 목표로 혹은 전형으로 삼을 그 무엇가가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진리이든, 가치이든, 이념이든지 간에 말이다. 바로 이러한 것들을 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념계에 있는 이념적 의미를 현실화할 필요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의미를 현실화하기 위한 중개자가 필요할 것이다. 중개자는 그 스스로가 실재 세계 속에 실재적으로 존재해야 할 것이며, 목적을 설정하고 목적을 실현할 그 특유한 힘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 중개자는 의미를 목적으로 설정하고 그 의미를 현실화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지상에서 그런 중개자가 과연 누구일 수 있겠는가? 바로 인간일 것이다. 어쩌면 바로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세계 내에서의 인간의 고유한 지위일 것이다. 이념적 의미 세계에 있는 의미를 직관하고, 그런 의미가 이 지상의 세계에 없음을 아쉬워하면서 그 의미를 끌어내려 존재케 해, 이 세계를 의미있게 하는 바로 그 일은 인간의 고유한 권리일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인간의 고유한 권리에 의해 '의미'는 현상계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독일 가치론자들에 의하면, '의미'는 이념적 존재로서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만, 또한 우리 인간의 정신활동에 의해 현상계에도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의미 부여'의 원리

우리는 이제까지 '의미'의 존재에 관해서 고찰해 보았다. 의미의 존재를 플라톤은 이데아계와 같은 순수 이념적인 곳에서 찾으므로써 우리는 그가 의미 초월성의 사고를 했음을 알 수 있었고, 칸트는 그 존재를 인간의 내면적 세계에서 찾으므로써 우리는 그가 의미 내재성의 사고를 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하르트만을 중심으로 하는 가치 철학자들은 그 존재를 이념적인 세계와 현실 세계 그 양자에서 찾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전자의 두 사고들을 비판적으로 음미하면서, 후자의 사고를 바탕으로 하여 '의미부여'의 원리를 본 장에서 논의해 본다.

먼저 우리는 현상세계 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필요하고 또한 마땅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플라톤 <국가론>의 동굴의 비유도 현실 세계로부터의 도피가 최후의 해결책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플라톤이 우리 인간의 바람직한 삶은 이데아계에 있는 이데아를 관조하고 지향하는 삶이라고 말할 때, 그는 그저 현실세계를 버리고 이데아계만을 염두에 두는 것은 아니다. 이데아계를 原型으로 삼아 현실세계를 보다 훌륭하게 이루어 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윤리적 사고이다. 또한 칸트도 우리 인간의 이성이 무질서한 현상세계에 대해 입법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따라서 현실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바로 그 의미의 원천이 어디에 있든지간에, 그 의미의 원천으로부터 현상계에 의미가 끌어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현실세계 내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립해서 그 세계 안에 아직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 그리고 인간의 활동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있다. 오직 인간 자신으로부터 순수 선험적으로 성립되어야만 하는 것이 있다. 인간 밖의 세계의 어떤 힘에 의해서도 존재하게 되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이 개념이든 논리이든 규범, 규칙이든 좋음, 나쁨이든 옳음, 그름이든지 간에 말이다. 이런 것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로 미뤄 보아, 추호도 우리 인간이 개입할 수 없이 인과 필연적으로 움직여 가는 자연 현상계와는 달리, 인문 현실계 내에서는 우리 인간의 의미부여 활동이 이뤄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칸트가 처음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그는 이런 사실을 토대로 하여 그의 실천철학에서 '자유의지'의 위대한 힘을 과시코저 했다.

칸트만이 인간의 그런 활동을 들추어 낸 것이 아니다. 독일 관념론자들도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특히 그들은 역사철학의 영역에서 그런 사고를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쉘링이 인간으로부터 자신의 삶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자기규정 능력을 박탈하여 선의 섭리에 위양하였다고 할지라도, 그는 인간이 세계 내의 사건들의 진행의 필연성의 사슬 속에 너무나도 꽉 얽매여 있어서 의미를 역사과정 속에 부여할 자유를 갖고 있지 않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 자유로 말미암아 인간이 그의 삶의 통일성과 목적성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된다고 하였다. 인간의 의미부여 능력을 과소평가 할지라도, 그도 인간에 있어서의 그 능력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결국 다음과 같이 '의미부여'의 원리를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르트만에 의하면, "그리스트교에서는 발견되지 못했던 다른 종류의 많은 인간적인 가치들이 인간의 가치의식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그것들은 예컨대 힘, 의지, 권력, 미, 생명의 충만성, 기쁜 감정, 기꺼이 책임을 떠맡으려는 마음 등등이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러한 인간적인 가치가 우리 인간에게 의식되려면, 이미 존재함에 틀림없다. 또 신에 의해서 존재케 된 것이 아니라면, 인간이 아닌 그 무엇에 의해서 존재케 되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인간적인 것이라면, 인간에 의해서 이미 의미부여되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실로 "니체에 의해 인간에게 행해진 명령 즉 '지상의 의미가 되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이 때까지 초인간적인 어떤 힘에서 헛되이 찾아 왔던 삶의 의미가 오히려 인간에 의한 의미부여 활동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존재케 됨을 암시해 준다.

5. '의미 부여자'로서의 인간

앞장의 진술을 통하여 지상의 의미만을 우리 인간이 부여한다는 것이지, 이념계에 존재하는 이념적 의미까지 부여한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지상의 의미를 부여할 때, 우리 인간은 어떻게 그것을 가능케 하는가? 앞에서 우리는 이념적 의미에 우리 인간의 정신이 관계함으로써 비로소 현상계에 의미부여의 가능적 조건을 갖추게 된다는 것을 알아 보았다. 그러면 먼저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이념적 의미에 관계하게 되는지 알아보고, 다음으로 그 관계를 통해서 인간이 어떻게 현상계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지 알아 본다.

우리 인간 정신의 근본 특성으로 지향성이란 것이 있다. 이 지향성은 대상을 향하여 나아가고, 우리 의식을 그 대상에 조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대상에게 인간의 의식을 내비춤을 의미한다. 이런 지향성을 통하여 인간 정신은 비로소 대상과 관계를 맺게 된다. 대상과 관계를 맺게 되므로써 그 대상에 관한 의식 활동이 일어나게 된다. 즉 그 대상을 감지하거나, 표상하거나, 지각하거나, 인식하게 된다. 그런 의식 활동을 할 때, 그 활동 결과의 타당성은 어떻게 보장되는냐고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상세계 자체 속에 진리와 법칙성이 놓여 있는 것처럼, 인간 정신 속에도 진리와 법칙성이 놓여 있다. 인간 정신에도 그의 고유한 질서와 논리가 있다는 것을 아우구스티누스 뿐만 아니라 파스칼도 그의 저술 <팡세>에서 말하고 있다. 후설은 그의 선험현상학을 통해서 인간 의식작용의 타당성의 근거를 찾기 위해, 의식구조 분석에 그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는 점을 봐도 그런 사고가 의미심장한 것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 의식의 명증성이 확보된다고 할지라도 또한 다음의 것이 문제가 된다. 인간의 의식이 현실적 사물て사건 등의 대상을 지향할 수도 있고, 혹은 물체적 존재가 아닌 정신적 존재 내지 정신적 산물 등의 대상을 지향할 수 있다. 전자의 대상들은 의식이 지향되어 관계를 맺을 때, 감각 표상의 도움을 받아 쉽게 인간의 의식 속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후자의 대상들은 의식이 지향되어 관계를 맺을 때, 그와 같은 도움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기가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의식이 지향되는 데에는 그 대상이 물체적인 것이든지 혹은 정신적인 것이든지 간에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즉 아무런 상관이 없이 의식은 지향되어 대상과 관계를 맺고 그것을 의식 속으로 들여올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정신적 존재인 이념적 의미에게로 나아가는 길이 확보된 셈이다.

이념적 의미에게로 나아가는 길을 좀더 상세하게 밝혀 보자. 후설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논리て이념적 진리를 감성적 직관을 토대로 한 본질 직관에 의해서 파악하게 된다. 즉 이념적 진리의 파악 더 나아가 명증적 진술은 그 진리 자체에 대한 원본적 소여 의식을 통하여 이뤄지는 것이다. 이념적인 존재로 나아가는 길로는 본질 직관 다시 말해서 현상학적 경험이 있을 뿐이며, 그것도 이념적인 존재에 대한 원본적 소여 의식만을 통한 본질 직관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결국 이념적 의미로 나아가는 길은 그 의미에 대한 원본적 소여 의식을 통한 순수 본질 직관 또는 순수 현상학적 경험임을 밝힐 수 있다.

이제 우리 인간이 그런 직관을 통해서 간파한 이념적 의미의 의식을 토대로 하여, 현상 세계에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지 알아 볼 수 있다. 후설의 저술인 <논리 연구>는 처음부터 주도적인 원리에 따라 온갖 이념적 대상성 특히 형상적 대상, 개념적 본질 및 본질 법칙 등의 소여성의 근원적 권리를, 직접적인 직관에 의해 자아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에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때, 우리는 그것들에게 개념적 파악의 근원적인 권리를 인정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상학적 경험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에게서 개념적 본질 및 본질 법칙 등의 소여의 원천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때, 그것들이 개념적 의미 부여의 원리를 갖고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개념적 본질 및 본질 법칙 등의 소여의 원천이, 이념적인 것의 현상학적 경험에 의한 우리의 의식에 이미 있음을 고찰했다. 따라서 과연 이념적인 것의 현상학적 경험에 의한 우리의 의식이 개념, 명사, 본질 등의 의미 부여의 원리를 갖고 있는지 알아 보자.

먼저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현상학적 경험을 통한 이념적 의미의 간파없이 단지 순전히 우리 인간의 머리에 의해서 현상 세계에 의미를 부여한다. 혹은 아니다. 우리는 현상세계에 의미를 부여할 때, 이미 간파한 이념적 의미를 토대로 하여 비로소 그러할 따름이다. 전자의 사고는 인간의 순수한 창의력을 너무 과신하는 소박한 사고이거나, 아니면 조야한 관념주의적 발상일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칸트의 사고에도 그러한 면이 없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후자는 막스 쉘러, 하르트만 등의 현상학자들의 사고이다. 플라톤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이념적 의미를 직관하고 알아야 한다고는 했으나, 그 의미를 토대로 우리 인간이 적극적으로 현상계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해야한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는 의미를 현상계에 부여하는 우리 인간 정신의 위대성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위의 현상학자들의 사고를 분석해 볼 때, 그들의 사고에서 인간의 의미 부여 원리가 나타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후설의 "<논리 연구>는 사태 자체를 呈示해 주는 직접적인 직관에게 모든 이성적 인식의 궁극적인 권리 원천을 두고자 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이성적 인식의 권리란 것은 개념을 부여하고 본질을 명명하고, 직관된 것을 진술하고 유비 추리하고 사고하는 것 등을 일컫는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사태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들이다. 이러한 일들이 인간 정신의 활동의 일부이고, 그 활동은 - 후설의 생각을 첨가한다면 - 사태 자체를 직관한 의식에 그 활동의 원천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의식에 의미부여의 원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인간의 의미부여 활동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아 보자. 인간이 어떤 대상을 향하여 그것을 대상화한다는 것은, 혹은 그것을 지향하여 의식화한다는 것은 곧 그 대상과 인간 정신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이 관계 맺음은 정신과 사물간의 단순한 관계 맺음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물을 대상화하는 정신 활동이라 일컫는다. 그 대상화하는 활동은 어떤 사물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인식 주체를 위한 그 대상의 대상성을 획득한다. 따라서 이러한 활동은 다른 모든 종류의 의식작용의 기반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의미부여 활동이 정신과 대상간의 관계 맺음 즉 대상화하는 정신 활동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심지어 대상화 활동을 통해서 존재하게 되는 대상성은 항상 인간 정신에 대해서만 존재한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그런 대상성을 향한 인식이 시작되면서 "그 대상성은 또한 그 자신이 정신이 없이도 존재해 왔던 모든 것에 의거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전 존재층이 그 자체로 있지만 그것이 밝혀지기는 정신에 의해서 이다. 그런데 이러한 조명은 인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목적 즉 이념에 의한 일체의 의미부여 작용과 인간의 창조 행위에 의한 일체의 실현 작용이 그런 조명에 함께 기여를 한다." 이러한 모든 작용을 통해서 세계를 조명하는 정신이 현상 세계로 하여금 왜 이렇게 복잡하게 현상하도록 하느냐고 주장하는 것도 이런 측면에서 일리있는 말일 것이다. 이처럼 정신이 현상 세계에서 행하는 일은 세계의 객관화의 기능으로써 이 세계를 밝히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 내의 모든 존재가 밝혀지는 데는 의미부여 작용이 한 몫을 한다는 것은 위의 사실을 통해서도 우리는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의미부여 작용이 인간에 의해서 이뤄지는 데, 그 작용이 진짜 신의 눈으로 볼 때 정말 이념적 의미 그대로를 현실 세계에 실현시킬 수 있는가? 그렇지는 못하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의미를 부여할 때도, 항상 우리 인간이 그 당시에 갖고 있는 에토스에 의존하게 된다. "의미부여 작용의 모든 핵심은 사실은 에토스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칸트와 헤겔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념계에 있는 의미 그대로를 우리 인간이 현실 세계에 옮겨 놓거나, 그것을 원형으로 삼아 바로 그대로를 현실 세계에 부여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어쨋든 우리 인간이 그 의미를 현실 세계에 부여한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인간은 의미부여 작용을 세계에 대한 그의 권리로서 또 세계 내에서의 그의 사명으로서 파악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의미부여가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세계의 근원으로부터 나온다면, 자유와 창조적 능력, 의미실현을 향한 노력 등의 능력을 갖춘 인간은 세계의 진행과정 앞에서 아무런 힘도 써 보지 못하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도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이러한 역할을 이미 말하고 있다. 세계 내에서의 새로운 영역의 확장과 더불어 삶의 의미의 내재화와 피안으로부터의 재탈환이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과제이고 사명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확장과 내재화와 재탈환이 인간에게 세계 내에서 활동할 여지를 마련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인간은 의미부여 활동을 그의 과제로 삼고 이 과제를 실행하는 가운데, 세계 내에서의 그의 있음의 意義를 찾게 되는 것이다.

6. 맺는 말

이상의 고찰들을 종합해 보면, 현실 세계에 존재해 있는 모든 의미는 우리 인간이 부여한 것이다. 우리 인간이 저 객관적으로 존재해 있는 '이념적 의미'를 순수 직관하여 그 직관된 것을 현상 세계에 구현시킨 것이 바로 그 '의미'라는 것이다. 이러한 직관과 더불어 그 구현 작용도 바로 인간의 정신이 이행한다는 것이다. 인간 정신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논의꺼리임을 본 논의에서 충분히 감지했을 것이다. 물론 인간 정신이 그런 일을 완전하게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 인간 정신의 능력은 신의 정신 능력에 비하면, 매우 열등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인간 정신이 밝혀내는 의미가 본래의 의미와 완전히 딴판인 것은 아닐 것이다. 비록 그 의미가 불완전하고 불명확한 것이기는 할지라도 말이다.

이러한 인간의 정신 활동을 통하여 '의미'가 현상계에 부여되므로, 현상계에 있는 의미는 항상 우리 인간에 의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에 의해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고 해서, 의미가 -칸트의 생각처럼- 인간의 창작물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밝혀졌다. 이렇게 하여 존재하게 되는 의미들이 세계 내에 차츰 차츰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때로는 불완전하게 밝혀져 부여된 의미가 좀더 완전하게 밝혀진 의미로 대치되기도 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일들은 인간의 의미부여 활동으로 말미암아 지속적이고 다양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이 세계는 인간의 이런 활동의 덕택에 무의미의 상태에서 유의미의 상태로 전진하게 된다. 인간의 역사가 진행됨에 따라 이러한 일은 계속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확실히 세계는 인간에 의한 '이념적 의미'의 실현의 장소이고, 인간에 의해 이념계로 고양되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의 역사는 확실히 이념적 의미에 의해서 이끌려지는 과정이요, 그 의미 내용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의 전개요 실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 인간이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수행하여서, 이 세계를 훌륭하게 형성시켜 나간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의미 부여자'로서의 우리 인간의 역할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위대성을 간파한 막스 쉘러는 "이 세계근거(Weltgrund)의 自己神化의 장소가 바로 인간이며, 인간의 자아라고" 하질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