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흄의 과학의 확장과 그 인식론적 기초

나뭇잎숨결 2020. 11. 19. 13:38

흄의 철학과 근대 과학: 과학의 확장과 그 인식론적 기초

최 희 봉**** 고려대학교 철학과

【주제분류】근대 철학, 인식론,
【주 요 어】흄, 근대 과학, 자연주의, 뉴튼, 인식론
【요 약 문】
이 논문의 목적은 데이빗 흄(David Hume)이 근대 자연과학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탐구하는 데에 있다. 그 수평적인 관련을 보면, 흄은 근대 자연 과학의 방법과 성과들에 자극되고 고무되어 이러한 방법을 인문·사회 과학의 주제들에 확대 적용하려 시도한 초창기의 인문사회학자로 이해된다. 수직적 관련에서 보면, 흄은 과학적 지식의 인식론적 기초와 밀접히 결부되어 있다. 이렇듯 17,18세기 자연 과학이 흄의 철학에 종적·횡적으로 미친 영향을 재확인하고 재인식하는 일이 이 논문의 일차적인 목적이다.
이러한 탐구를 위해 논자는, 먼저 흄 철학의 과제와 방법에 미친 뉴튼 과학의 영향을 살펴본다. 첫째로 논자는 뉴튼의 실험 철학의 출현 배경과 그 내용을 살펴보며, 나아가서 뉴튼이 가설을 거부하는 입장의 배경과 그 진의를 검토한다. 둘째로 논자는 흄의 <논고> 서론에서 보이는 철학의 과제와 방법에서 관찰되는 뉴튼 과학의 영향을 검토한다. 다음으로 논자는 근대의 새로운 과학적 지식의 기초가 되는 근본 신념들의 정당화 문제에 대한 흄의 견해를 그가 <논고>에서 다룬 주제들의 순서대로 살펴볼 것이다. 인과성, 물리적 대상의 존재, 자기 동일적 자아의 문제가 그것이다.
나아가서 이러한 탐구를 통해 흄 철학의 성격을, 특히 흄의 자연주의의 성격을 보다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 이 논문의 또다른 목적이기도 하다.
1. 머리말
이 논문의 목적은 데이빗 흄(David Hume)이 근대 자연과학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탐구하는 데에 있다. 이를 위해 이 논문은 흄과 근대 자연과학을 크게 수평적·수직적으로 관련짓는다. 먼저 수평적인 관련에서 보면, 흄은 근대 자연 과학의 방법과 성과들에 자극되고 고무되어 이러한 탐구방식을 흄 당시 불모지였던 인문·사회 과학의 주제들에 확대 적용하려 시도한 초창기의 인문사회학자로 이해될 수 있다. 수직적 관련에서 보면, 흄은 과학적 지식의 인식론적 기초와 밀접히 결부되어 있다. 즉 ‘과학적 지식의 정당화 문제’라고 하는 근대 인식론의 대표적인 탐구 과제를 철저히 구명(究明)한 선두 철학자 그룹에 속하는 인물이다. 이렇듯 17, 18세기 자연 과학이 흄의 철학에 종적·횡적으로 미친 영향을 재확인하고 재인식하는 일이 이 논문의 일차적인 목적이다.
이러한 탐구를 위해 논자는, 먼저 흄과 근대 과학의 수평적 관계의 고찰로서 흄 철학의 과제와 방법에 미친 뉴튼 과학의 영향을 살펴본다. 그 첫 번째 절에서 논자는 뉴튼의 실험 철학의 출현 배경과 그 내용을 살펴보며, 나아가서 뉴튼이 가설을 거부하는 입장의 배경과 그 진의를 검토한다. 이렇게 보면 뉴튼의 새로운 과학은 그 출발부터 건설적 측면과 더불어 비판적, 파괴적 측면도 지닌 것으로 드러난다. 두 번째 절에서 논자는 흄의 ?논고? 서론에서 보이는 철학의 과제와 방법에도 이 두 가지 측면이 관찰되고 있음에 주목하여, 이 두 측면에서 관찰되는 뉴튼 과학의 영향을 검토한다.
다음으로 수직적 관련을 살펴보기 위해 근대의 새로운 과학적 지식의 기초가 되는 근본 신념들의 정당화 문제에 대한 흄의 견해를 살펴본다. 과학적 지식의 기초에 관한 인식론적 탐구는 근대 철학의 중요한 과제였으며, 경험론의 대표자인 흄은 근대 합리론자들이 시도한 과학의 형이상학적 정초 작업과는 다른 방식으로, 즉 경험론적인 방식으로 근대 과학의 토대 문제에 접근한다. 이에 대한 흄의 논의를 그가 ?논고?에서 다룬 주제들의 순서대로 살펴볼 것이다. 인과성, 물리적 대상의 존재, 자기 동일적 자아의 문제가 그것이다.
혹자는 흄 철학에 미친 자연 과학의 영향에 관한 연구가 흄 연구에서 지엽적인 문제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근래의 흄 연구에서 흄의 철학은 대체로 자연주의 또는 회의주의로 규정되며, 이에 관한 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는 듯 국내 흄 관련 논문에서 근대 과학과 흄을 주제로서 다룬 것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이 주제에 관한 탐구는 흄 철학의 성격을 규정하고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몫을 한다는 것이 논자의 견해이다. 이는 특히 흄을 자연주의자로 규정할 때 더욱 그러하다. 이 몫을 해내는 것이 이 논문의 또다른 목적이라고 하겠다.

2. 흄 철학과 근대 과학
2.1 뉴튼의 실험 철학과 가설
이 절에서는 뉴튼의 새로운 과학의 발생 배경 및 그 성격을 살펴보고, 또한 뉴튼의 ‘가설’에 대한 입장을 살펴본다. 이 두 가지는 다음 절에서 살펴볼 흄의 철학, 그 과제와 방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맥락을 제공할 것이다. 특히 뉴튼의 새로운 과학은 기존의 데카르트적 선험적 사변적 방법에 대한 반발과 대안 모색의 결과였음을 고려할 때, 그것은 파괴적 측면과 건설적 측면을 지닌다. 논자는 이러한 두 측면이 흄에게도 적용될 수 있으며 이 두 측면에서의 뉴튼의 영향을 다음 절에서 살펴볼 것이다. 이절에서 먼저 뉴튼 과학의 출현 배경과 그 적극적, 건설적 측면을 살펴보고, 다음으로 그 비판적, 파괴적 측면으로서 가설을 거부하는 뉴튼의 입장을 살펴본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서양 철학의 근저에는 하나의 '질서 있는 체계(cosmos)'가 존재하며,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 체계에 대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 깊게 뿌리박혀 있었다. 다시 말해서 세상만물의 근본 이치(rationale)가 존재하며, 이것은 인간에 의해 파악될 수 있다는 신념이 서양 철학의 근원적인 전제인 것이다. 이런 신념은 중세에 와서 종교적 체계의 근저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나아가서 서양 근대의 과학적 사고에까지 전달되었다. 16, 17세기, 과학 혁명을 거치면서 비로소 과학이 종교적 체계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지만, 이 과학도 이러한 우주의 궁극적인 근본 이치를 밝히는 체계의 한 모델로 이해되었다.
그렇다면 근대의 사상가들은 당시의 과학적 모델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와 같은 합리론자들은 과학이 지닌 수학적 성격에 주목했다. 이들은 수학이 자연과학의 핵심이라고 보고, 수학이 그 증명적 성격에 기초하여, 제일원리 또는 공리로부터 어떻게 결론들이 추론되는지를 증명함으로써 과학의 결과들을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과학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중대한 변화를 겪는다. 코페르니쿠스가 제시한 행성 운동에 관한 이론이 수학에 대한 단순한 신앙을 매우 복잡한 것으로 만들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가지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도전했던 것이다. 그러나 1543년에 출판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18,19세기까지도 완전히 수용되지 못했다. 수백 년 동안 코페르니쿠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두 체계가 물리적 현상들을 모두 설명했으며, 둘 다 정교한 수학적 형식 갖추고 있었다. 이런 사실은 과학에 대한 더욱 더 정교한 개념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학에 대한 더욱 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뉴튼이었다. 그는 실험 구상의 천재였다. 그는 다수의 경쟁 이론들이 저마다 수학적 설명 체계를 갖추고 있을 때에, 어떤 이론이 맞는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테스트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방법의 필요성을 제안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방법론적 필요성을 제안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런 실험을 고안하는데 주력했다. 실로 뉴튼의 위대성은 실험을 통한 테스트의 중요성을 간파한 데에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뉴튼의 이런 새로운 접근에 대해 “실험 철학(experimental philosophy)”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뉴튼의 실험적 방법이 스콜라주의적 방법, 데카르트주의적 방법과 근본적인 대조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런 뉴튼의 실험 철학에 큰 영향을 받은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흄이다. 흄의 새로운 철학으로서의 인간학의 구상과 실험적 방법의 적용에 관해서는 다음 절에서 살펴볼 것이다. 한편 이에 앞서 뉴튼에 관련된 한 가지 사항을 더 살펴본다. 이는 흄에게도 적용되는 흥미로운 대비가 될 것인데, 뉴튼의 ‘가설’에 대한 거부가 그것이다.
뉴튼의 새로운 과학은 건설적인 측면과 더불어 당대의 과학에 대한 비판적이고 파괴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측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그의 가설에 대한 거부이다. 논자는 이에 대한 뉴튼의 견해가 흄의 새로운 철학의 구상이 지닌 비판적이고 파괴적인 측면과 흥미로운 대비를 이루고 있음을 부각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뉴튼의 가설에 관한 견해를 살펴보자.
뉴튼이 그의 체계에 중력 개념을 도입했을 때, 그 개념은 기계론적 원리들과 상충됐다. 기계론적 원리들에 따르면, 원인들은 충격과 압력에 의해서만 작용한다. 그런데 뉴튼은 중력을 물체에 적용함으로써, 충격과 압력으로 설명될 수 없는 힘을 도입하는 셈이었다. 엄격한 원자론자들과 데카르트주의자들은 이 점을 비판했다. 기계론적 인과관계는 이미 알려져 있으며, 이 원리들이 설명원리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격 작용(action at distance)’인 중력은 그 자체로 이해되지 못하며, 실로 설명 원리로 사용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렇게 뉴튼은 과학에 "신비적인 성질(occult property)"을 도입했다 하여 비난받았다. 뉴튼주의자들의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는 슬로건의 의도는 이러한 비난을 반박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조금 더 상세히 살펴보자. 데카르트에 따르면, 원격 작용처럼 보이는 것은 기계론적 원리들로 설명되어야 하며, 이 원리들은 물체의 본질적 속성에 조회함으로써 설명되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만이 진정한 체계적인 설명이 이루어진다. 물질 현상에 대한 모든 설명은 다른 설명들과 연관되어 있으며, 이런 설명들이 합쳐져서 물체 자체의 본성에 관한 체계를 형성한다. (데카르트의 견해와 대조적으로 뉴튼의 설명과정은 잠정적이며, 개별 현상들은 그 자체로 설명되지 않는 원리들에 의해 설명되고 있다.) 그리하여 데카르트는 물체의 본질은 순전한 연장성에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출발한다. 연장은 연속적이며 틈새를 허용하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원자를 연속적 물체 안에서의 소용돌이로 설명한다. 하나의 원자 또는 소용돌이는 관련 원자들 사이에 연속해 있는 물체를 따라 진행되는 진동을 통해 다른 하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는 행성의 체계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설명을 채택한다.
뉴튼은 이러한 데카르트의 견해에 반대한다. 그에 따르면, 만일 데카르트의 견해가 참이라면, 관찰에 의해 테스트될 수 있는 결과들을 산출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뒤따르게 될 결과들은 관찰될 수 없으며, 그나마 관찰되는 것들은 그의 견해와 상충되는 것들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견해가 아무리 정합적이고 자체적으로 만족스러운 듯이 보일지라도 그런 견해는 거절되어야만 한다. 게다가, 만일 우리가 현상들의 설명에 기여하는 어떤 원리를 찾아낸다면, 그리고 관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결과들을 얻는다면, 그렇다면 적어도 잠정적으로는 그 원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리 그 원리가 불만족스럽거나 설명력이 떨어진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것이 ‘뉴튼은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이며, 이 슬로건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올바른 과학적 설명은, 뉴튼이 가설(hypothesis) 또는 사변(speculation)이라 부르는, 물체의 궁극적 본성에 대한 추정적 견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물체를 탐구할 때에 그는 그 궁극적 본성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현상을 밝히고자 하며, 이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설명을 낳는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뉴튼이 중력을 도입한 이유는, 그 본성을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현상들을 다른 방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는 중력의 본성에 관해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의 요점은 그 물음들은 다른 성격의 물음들이라는 것이다. 그 물음들은 그가 최초에 답하고자 했던 물음들이 아닌 것이다.

2.2 흄, 인문학의 뉴튼
논자는 앞 절에서 뉴튼 과학의 출현 배경과 실험 철학의 건설적 성격을 살펴보고 나아가서 그 비판적, 파괴적 성격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 절에서는 이러한 뉴튼 과학이 흄의 철학에 미친 영향을 살펴본다. 그럼에 있어 논자는 이 절에서의 논의를 ?논고?의 서론에 나타난 흄의 철학의 과제와 방법에 한정될 것이다. 그 진행에 있어, 먼저 흄의 인간학을 구상하게 된 배경으로서 당대의 잘못된 학문 풍토를 배척하고 거부하는 내용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인간학의 확립에 관한 건설적 요소를 검토한다. 이 양 측면에는 당대 뉴튼 과학의 영향이 깊이 자리 잡고 있음을 밝힐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첫 번째 절에서 살펴보는 흄의 사변적 형이상학의 부정이 뉴튼이 당대의 사변적 원리로서의 가설을 거부하는 입장과 같은 맥락에 있음을 알 수 있다.
2.1.1 사변적 형이상학의 부정
흄은 ?논고? 서론에서, 당대 철학의 혼란, 그 치유책, 및 참된 철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러한 흄의 논의에서 뉴튼의 영향을 볼 수 있다. 흄에 따르면, 뉴튼의 방법을 따르고, 인간 본성의 학을 발전시킴으로써 철학의 혼란과 무질서가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다.
흄은 ?논고? 서론의 서두를 당시의 철학 또는 형이상학의 불만족스러운 상황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철학은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잃고 외면당하고 있다는 것이 흄의 현실 진단이다. “신용만으로 받아들인 원리들, 이것들로부터 어설프게 추론된 결과들, 부분적으로는 정합성 전체적으로는 명증성의 결핍, 이런 것들은 가장 저명한 철학자들의 체계들 곳곳에서도 발견되며, 철학 자체를 망신시키고 있는 듯하다.”(T xiii) 이런 현실에서 철학자들마다 온갖 궁극적 물음들에 대해 견해를 내세우고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저마다 달랐다. 당연히 철학에서는 논쟁이 끊이지 않고, 이런 잡다한 논쟁에서 “승리는 미늘창과 검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아니라 군대의 나팔수, 고수와 같은 악대가 가져가고 만다”(T xiv)는 흄의 지적은 풍자적이면서도 날카롭다.
당대의 철학 현실에 이런 불만족스럽고 혼란스런 사태를 초래한 장본인으로 흄은 형이상학을 지목하면서 이에 대한 불신의 풍조를 우려한다. “내 견해로는 이런 상황에서 온갖 종류의 형이상학적 추론들에 반대하는 일반적 편견이 생겨나고 있다. 심지어 학자로 자처하면서 다른 학문 분야에 대해서는 정당한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 속에서조차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T xiv)는 것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추론들이 잘못된 이유는 궁극적인 원인들에 대한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데에 있다.
즉 형이상학의 잘못은 크게 보아 두 가지로 구별된다. 그 첫째가 궁극적 원인들이 알려질 수 있다는 전제의 잘못이요, 둘째가 그 전제 위에서 사변적인 방식으로 탐구를 진행한다는 잘못이다. 이런 잘못에 대해 흄의 새로운 철학은 궁극적 원인들이 알려질 수 있음을 부정함으로써 인간 능력의 한계를 인식하고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방식이 아닌 실험적인 방법을 채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흄에게서 형이상학의 전제들에 대한 부정은 인간 한계의 철저한 인식을 동반하는데, 이것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결론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흄의 말을 직접 전하는 것으로 그치겠다.

“...만일 진리가 어쨌든 인간 능력의 범위 내에 있다면, 그것은 아주 깊고 심원한 곳에 놓여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우리가 힘든 노력도 없이 -- 가장 위대한 천재들도 극도의 노력을 기울이고도 실패했음을 볼 때 -- 그 진리에 도달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분명 다분히 부질없고 주제넘는 짓으로 여겨져야 한다. 주장하건데 내가 지금부터 펼치고자 하는 철학에는 그런 소득에의 기대는 아예 없으며, 만일 [주장된] 진리가 과연 아주 쉽고 빤하다면, 나는 그런 진리주장을 오히려 진리에 반하는 주제넘는 억측으로 간주할 것이다.”(T xiv-xv)

흄은 이런 형이상학적 풍조에 대한 처방으로 뉴튼의 ‘새로운 과학’에 비견되는 자신의 ‘새로운 철학’을 제시하는 단계로 진행한다. 이 새로운 철학은 예견컨대 인간 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그런 궁극적 원리들에 관한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탐구가 아니라, 우리가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 즉 우리 자신의 본성에 대한 고찰이 될 것이다. 이러한 측면, 즉 흄 철학의 건설적 측면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살피기로 하고 이 절은 비판적 측면의 의의를 살펴보는 것으로 일단락 지을 것이다.
흄의 철학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비판적 측면은 앞 절에서 살펴보았던 뉴튼의 자연 철학이 지닌 ‘가설’에 대한 비판적 입장과 일맥상통한다. 뉴튼이 가설을 거부했을 때 이는 명백히 궁극적 원리에 대한 사변적 추정을 거부하고 궁극적 원리에 관한 한 우리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뉴튼 방법의 본질은 궁극 원인들을 파악할 수 없는 자연 과학들의 한계에 대한 인정에 있다. 뉴튼의 이런 태도와 깨달음은, ?논고?의 서론에서 흄이 표방하는 진정한 철학에 대한 견해와 흥미로운 비교를 유발한다. 흄 역시 당시 철학의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의 원인을 사변적 형이상학에서 찾았다. 당시 철학의 진행방식은 데카르트의 그것과 흡사했으며, 그러한 철학은 곧장 궁극 원인들을 파악하려 시도한다. 그 결과는 형이상학적 사변 철학일 뿐, 소득있는 결실은 되지 못한다. 이런 상황 인식하에서 흄은 이런 잘못된 철학을 배격하면서 그 일환으로 인간 능력의 한계를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2.1.2 인간학의 확립
흄 자신이 말하는 철학의 과제는 그의 주저,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인간 본성에 관한 탐구에 있다. 이는 흄 자신의 다른 표현으로 ‘인간학(science of man)'을 확립하는 것이다. 인간학의 내용을 ’서론‘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흄 철학의 특징은 무엇보다 ‘인간학(science of man)’ 또는 ‘인간 본성의 학(science of human nature)'이라는 말로 압축될 수 있으며, 이러한 인간학의 정신과 목표, 그리고 탐구 방법을 포괄하는 표현이 바로 흄의 자연주의이기도 하다. 흄 인간학의 탐구 목표는, 인간 마음의 몇몇 뚜렷한 작용들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일, 즉 어떻게 그리고 왜 이런 저런 내용의 사고(추론), 지각, 믿음, 느낌 등등이 마음에 발생하는지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일이다. 흄은 ?논고?의 서론에서 자신의 중심 목표를 “인간 본성의 원리들을 설명하는”(T xvi) 연구를 확립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인간학의 몇 가지 특징들을 살펴보자.
무엇보다도, ‘인간 본성 탐구로서의 인간학’을 세우자는 흄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건설적이고 낙관적이다. 이것은 주로 17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된 계몽주의의 영향에 기인한다. 이런 점에서 흄은 18세기 유럽 계몽주의의 선구적 인물이다. 계몽주의의 한없는 낙관론에 고취되어 그는 인간 본성에 관한 일반 이론을 확립하고자 하는 대담한 기획에 나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인정해야할 중요한 것은 흄의 기획은 일차적으로 건설적이며, 낙관적이라는 것, 즉 부정적, 파괴적, 회의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인간학은 주로 ‘도덕적 주제들’에 관심을 가진다. 이 도덕적 주제들은 ‘물리적 주제들’에 대조되는 데, 후자가 자연세계의 대상들과 현상들을 포괄한다면, 전자는 인간의 마음과 사회에서의 인간관계를 포괄한다. 흄의 시대에는 인간과 독립된 자연세계를 다루는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과 인간 본성의 여러 측면을 다루는 도덕철학(moral philosophy)을 구분하는 것이 통례였다. 이렇게 보면 흄의 ‘인간학’은 도덕철학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이며, 이는 오늘날 인문·사회·경제·역사·종교학을 포괄하는 학문에 해당한다. 즉 그것은 (사고하고, 믿고, 지각하고, 느끼고, 언어를 사용하고 하는 등등의) 다양한 인간 활동들, 즉 (흄의 용어로) 도덕적 주제들을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
흄은 ?논고?서론에서 인간 본성의 연구를 논리학, 윤리학, 문예비평, 및 정치학과 밀접히 연관시키고 있다. 다시 말하여, 그는 전자가 후자들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 네 가지 학문, 즉 논리학, 도덕학, 문예비평 및 정치학 안에 거의 모든 것, 우리가 어떻게든 중요하게 알게 되는, 또는 인간 정신의 개량이나 장식이 될 만한 거의 모든 것이 포함된다”(T xv-xvi). 그렇다면, ?논고?1권과 ?인간 오성에 관한 탐구?에서 흄이 다루고 있는 것은 이 네가지 중에서 논리학에 관련될 것이다. 흄 시대에 논리학은 “추론의 기술”로 여겨졌으며, 그 목적은, 흄이 말하듯이, “우리의 추론 직능의 원리들과 작용들 및 우리 관념들의 본성을 설명하는 것(T xv)”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론에서 흄은 인간학을 “인간 오성의 범위와 힘”을 검토하고 “우리가 사용하는 관념들의, 그리고 추론을 통해 우리가 수행하는 작용들의 본성을 설명하는”(T xv)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제 서론의 다음 테마로 들어가서, 흄 인간학의 또 다른 뚜렷한 특징인 자연과학적 방법의 채택에 관해 살펴보자. 이것은 ?논고?의 부제를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그 부제는 “실험적 추론 방법을 도덕적 주제들에 도입하려는 시도”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실험적 방법’이 의미하는 바는 오직 경험에 의해 보장되고 지지되는 결론만을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그는 “인간학은 반드시 경험과 관찰 위에 놓여져야 한다”(T xvi)고 말한다. 그 이유로서 흄은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명백한 듯이 보이는 것은 마음의 본질이 외적 물체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며, 그렇기에 [물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힘과 성질들의 개념을 형성하는 일은 조심스럽고 정확한 실험 및 여러 다른 정황과 여건에서 결과하는 특정한 효과들의 관찰에 기초하지 않고는 그 어떤 다른 방식으로도 불가능함에 틀림없다”(T xvii).
이런 관련에서, 뉴튼 과학이 흄의 인간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흄 연구자들에게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실제로 흄은 그의 인간학을 뉴튼적 모델에 따라 진행한다. 이것은 다음의 글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도덕적 주제들에 대한 실험 철학의 적용이 자연적 주제들에 대한 적용 이래 꼬박 한 세기나 뒤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고찰하는 것은 결코 놀라운 생각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제로 이 학문들의 발원 사이의 시간적 간격이 대체로 같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탈레스에서 소크라테스까지 이르는 시기를 헤아려 보면 그 시간적 간격이 베이컨과 최근의 몇몇 잉글랜드 철학자들 사이의 간격과 거의 같다. 이 최근의 잉글랜드 철학자들은 인간학을 새로운 토대위에 세우고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대중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T xvi-xvii). “실험 물리학의 아버지”(T 646)로서 베이컨과 더불어 시작된 근대 자연 과학이 뉴튼에 의해 완성된 것을 고려할 때, 로크, 샤프츠베리, 만드빌, 허치슨, 버틀러와 같은 “최근의 몇몇 철학자들”(T xvii, fn. 1)과 더불어 시작된, 뉴튼 프로그램을 도덕적 주제에 적용하려는 인간학의 시도는 흄에 의해서 완성된다. 따라서 흄은 인간학 또는 인문학에서의 뉴튼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서론에서 흄은 ?수학원리에 관한 자연철학?3권에서 뉴튼에 의해 주어진 것들과 매우 유사한 추론 규칙들을 지지하는 듯이 보인다.

“비록 우리의 실험을 궁극에까지 추적함으로써 그리고 가장 단순하고 가장 적은 수의 원리들에 기초하여 모든 결과를 설명함으로써, 우리의 원리를 가능한 한 보편화시키도록 노력해야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가 경험을 넘어설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인간 본성의 궁극적인 근원적 성질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가설들은 모두 주제넘고 터무니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우선적으로 거부해야 한다”(T xvii).

2.1.3 흄의 과학적 자연주의
이상에서 흄 인간학의 비판적 측면과 건설적 측면, 그리고 인간학의 과제와 방법에 나타난 흄의 견해는 뉴튼 과학의 영향을 고려할 때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이렇게 뉴튼 과학과의 수평적 관련을 통해서 드러난 흄의 자연주의는 과학적 자연주의 또는 방법론적 자연주의의 모습을 띤다. 흄은 뉴튼의 탐구 정신과 기획에 자극받아 자신의 인간학을 구상하게 되었고, 뉴튼의 실험적 방법을 (오늘날 인문 사회과학에 해당하는) 자신의 탐구 주제들에 적극적으로 적용시키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철학의 정신과 방법의 측면에서 당대의 자연과학으로부터 중대한 영향을 받았다. 이것이 흄 자연주의가 포함하고 있는 과학적 자연주의 요소이다.
그러나 흄의 자연주의의 한 구성요소를 과학적 자연주의라고 볼 때,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즉 이 측면이 너무 확대 내지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먼저 흄은 철학자들이 근대 과학에서 사용하는 수리 물리학 특유의 절차와 개념들을 자신의 인간학에 적용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이것은 불가능하다고 서론에서 분명히 못박고 있다.

“내가 어느 상황에서든 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 미치는 효과들을 탐색하다가 혼동 속에 빠질 때, 나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그 효과들을 그 상황에 적용하고는 이로부터 무엇이 결과하는 지를 관찰하는 일이다. 그러나 도덕 철학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내가 고찰하고 있는 대상의 자리에 나 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어떤 의문을 해소시키고자 노력한다면, 이러한 반성과 선고찰은 나의 자연적 원리들의 작용을 방해할 것이며, 그리하여 현상들에 기초하여 어떤 적절한 결론을 형성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임에 틀림없음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도덕학에서는 인간 생활에 대한 주의깊은 관찰을 통해 우리의 실험결과들(experiments)을 수집하여야만 하며, 집단을 이루었을 때의, 사건들에 관련되었을 때의 그리고 즐거움을 느낄 때의 인간 행동에 기초해서, 세계의 일반적 과정에서 드러나는 모습 그대로의 결과들을 받아들여야 한다.”(xix, 논자의 밑줄)

흄의 ‘실험(experiments)'이란 용어의 사용법은 ‘과학(science)’의 용어법과 마찬가지로 넓다. 오늘날 실험은 실험실과 같은 고립된 환경에서 관련된 요인들을 재생산함으로써 어떤 가설을 테스트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흄이 인간학에서 실험을 말할 때, 그 의미는 오늘날과 다르다.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학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흄은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덕학에서 실험을 이야기 할 때 흄의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시험에 붙이다(테스트하다)’, ‘사실에 견주어 확인하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흄에 있어서 실험은 자연 과학자의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가의 실험에 더 적합한 그런 의미이다. 인용문에서 보이는 흄의 견해는 통일과학의 이념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견해와 흡사하다. 학문의 방법과 절차는 그 탐구대상에 적합해야 하며, 학문들은 그 주제가 다양하기에, 서로 다른 탐구 방법을 요구한다는 것이 흄의 견해인 것이다.
3. 과학적 지식의 인식론적 기초들
앞장에서 논자는 근대 과학, 특히 뉴튼의 탐구 정신과 방법을 인문사회과학의 주제들에 수평적으로 확대 적용하려는 흄의 기획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제 이 장에서는 흄과 근대과학의 수직적 관련을 살펴본다. 철학자로서 흄은 근대과학이 낳은 새로운 지식에 대해 그것의 철학적 기초를 탐구하는 작업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과학이라는 근대의 대표적 지식체계에 관한 한, 이런 작업은 당연히 인식론의 몫이 된다. 사실이지, 근대 과학이 생산한 새로운 지식체계야말로 근대 인식론을 번성하게 만든 장본인인 것이다.
흄은 근대 인식론의 주된 과제 가운데 하나인, 과학적 지식을 떠받치는 근본 전제들의 정당화적 근거에 관한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되어 있다. 흄이 ?논고?에서 탐구 대상으로 삼았던 인식론적 주제들은 다름 아닌 당대의 전형적인 과학적 지식들의 전제들이었던 것이다. 이 장에서는 흄의 이러한 탐구들을 그가 ?논고?에서 다룬 순서대로 살펴본다. 먼저 흄은 당시 동력학의 전제에 해당하는 인과성 개념에 대해 그 인식론적 근거를 묻는다. 다음으로 물리학적 탐구의 전제에 해당하는 물리적 사물의 존재 문제를 다룬다. 나아가서 심리학의 전제에 해당하는 ‘자기 동일적 자아’의 존재에 대해 그 정당화적 기초를 문제 삼는다.
이러한 탐구의 결과로써 흄이 도달하는 결론은, 그러한 과학적 지식들의 전제들은 일종의 ‘자연적 신념들‘이라는 것이다. 이것들은 우리들의 사유와 실천의 밑바탕이 되는 것들로써, 우리 지식의 출발점이 된다. 또한 이런 전제들에 대한 그의 자연주의적 설명을 통해 흄은 그것들을 상상력이 낳은 ’습관‘으로 설명한다. 즉 그것들은 ’인간 마음의 자연적 성향‘으로서의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들은 정당화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인간 본능의 적나라한 사실로서, 이런 전제들에 대한 인식론적 탐구는 궁극적 정당화의 문제도 회의론의 대상도 아니며, 다만 인간 본성에 관한 사실의 기술로 끝난다는 것이다. 이제 다음에서 이러한 탐구의 상세한 과정을 살펴보자.
3.1 인과적 신념
먼저 인과 관계에 대한 우리의 신념을 보자. 우리가 두개의 사건들 사이의 인과적 고리를 과거에 경험해왔고, 지금 그 중 하나의 사건을 관찰한다면, 우리는 즉시, 다른 하나도 반드시 발생할 것이라고 믿게 된다. 흄의 용어로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의 관찰로부터 다른 하나의 관찰되지 않은 신념에로 옮겨간다. 우리의 귀납적 사고의 밑바닥에서 일어나는 일이 바로 이러한 마음의 활동이다. 흄은 이러한 추론 작용(마음의 전이)의 적법성을 문제 삼는다. 이러한 전이는 합리적 방식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그 추론을 정당화하는 어떤 이성적 논증이나 경험적 증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만 한다. 경험적 증거의 제시는 이미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문제의 신념은 그 자체가 관찰을 넘어선 어떤 것에 대한 우리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이성적 논증의 가능성은 자연의 일양성(the uniformity of nature)에 대한 우리의 신념을 비판하는 흄의 논증에 의해 제거된다.
결국 흄의 결론은, “우리는 우리가 경험했던 대상들과 우리의 관찰 한계 너머에 있는 대상들 사이에 유사성이 있음에 틀림없다는 것을 가정할 뿐이지 결코 입증할 수는 없다”(T 91-92)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험을 넘어선 사건들에 관한 그 어떤 신념에 대해서도 정당성을 얻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귀납에 관한 흄의 결론은, 그 어떤 논증도 귀납이 의존하는 일양성 원리를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귀납적 추론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상들 자체에는 그것을 넘어선 결론을 추론해낼 근거를 우리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그 어느 것도 없다. 그리고 대상들의 빈번한 또는 항시적 동반(constant conjuction)을 관찰한 후조차도, 우리는 그 어떤 대상에 대해 우리가 경험했던 것들 이상의 추론을 이끌어낼 아무런 이유도 가지지 못한다”(T 139). 결국 인과적 추론은 그 어떤 합리적 방법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 흄의 결론이다.
그러나 인과적 신념에 관한 흄의 탐구는 회의주의에서 끝나지 않는다. 흄이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주목한 것은, 이러한 신념이 이것에 상응하는 인상을 갖지 못할 지라도, 그리고 이성적으로 정당화되지 못할 지라도, 사람들은 어쨌든 인과적 신념을 확고하게 유지한다는 사실이다. 비록 원인과 결과 사이에 항시적 동반(constant conjunction)만이 관찰된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원인과 결과의 필연적 결합(necessary connection)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이러한 인과 필연성에 관한 믿음은 자연적 신념에 해당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일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또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그저 그럴 법한 일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터무니없는 소리처럼 들릴 것임을 흄은 분명하게 인정한다. 이러한 확고한 믿음은 뒤에서 살펴볼 물리적 대상 세계가 존재한다는 신념과, 지속적인 통일체로서의 자아가 존재한다는 신념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확고한 믿음은 어디서 왔는가? 궁극적으로는 우리 마음의 자연적 경향성에서 왔다고 흄은 결론짓는다. 그에게 있어 자연적 경향성이란 ‘상상력’이나 ‘본능’과 바꿔 쓸 수 있는 개념으로서, 우리 마음의 작용을 설명하는 근본 원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3.2 물리적 대상의 존재
다음으로 흄은 물리적 대상(즉 외부 세계)의 존재에 대한 신념에 대해서도 그 이성적 정당화에 대해 극단적인 회의주의 논증을 제시한다. 흄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에게 감각경험의 ‘항시성(constancy)’과 ‘정합성(coherence)’이 주어질 때, 물리적 대상의 지속적이고 독립된 존재를 믿게 된다. 이런 신념이 경험적 증거에 의해 정당화될 수 없음은 명백하다. 흄에 의해 제기된 물음 자체가 이미 우리는 지속적이고 독립된 물리적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자료가 보여주는 항시성과 정합성만을 관찰할 뿐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성적 논증을 제공하는 방법만이 남는다. 이에 대해 흄은 지각 표상설에 기초한 철학적 입장을 검토하고, 이런 입장의 난점을 지적함으로써 이성적 논증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철학적 체계는 일상적 체계와 동일한 기초 가정을 유지하고 있다. 흄에 따르면, “우리를 대상과 지각이라는 이중적 존재의 견해로 이끌만한 오성 또는 환상의 원리는 결코 없으며 우리는 단지 중단된 지각들의 동일성과 지속성에 대한 일상적 가설을 통함이 없이 그것[철학적 체계]에 도달할 수 없다”(T 211). 비록 그런 체계가 우리의 지각은 잠시적이고 사멸하며 감각 기관에 의존하다는 반성에 기초할지라도, 이성 혼자만으로는 지각들의 원인으로서 대상의 존재를 추론할 수 없다. 여기서 흄은 로크와 같은 표상적 실재론자들에 의해 자주 사용되는 ‘인과적 논증’을 비판하고 있다. 즉 “지각을 제외한 어느 것도 마음에 나타나지 않으므로 우리는 여러 다른 지각들 간의 원인과 결과의 관계 또는 연관은 관찰할 수 있을 지라도, 지각들과 대상들 간의 그것은 결코 발견할 수 없다”(T 212). 그러므로 흄은 지각의 존재 또는 성질들에 기초하여 대상의 존재를 지지하는 어떠한 논증도 구성할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이런 이유에서, 흄은 이러한 철학적 체계는 일상적 체계와 마찬가지로 상상력을 통해서 자신의 영향력을 획득한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전자의 체계가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은 상상력의 작용 때문이며, 그렇기에 전자는 상상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흄에 따르면, “철학적 체계는 이성에 대해서도 상상력에 대해서도 아무런 우위를 얻지 못한다”(T 213). 결국 철학적 체계가 지니는 그럴듯함은 이것이 극복했다고 주장하는 일상적 체계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흄의 결론은 인과적 신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당화에 대해 부정적이다. 지속적이고 독립적인 물리적 대상이 존재한다는 우리의 신념은 그 어떤 합리적 논증에 의해서도 정당화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인과적 신념의 경우처럼, 흄은 물질 대상에 대한 신념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신념 역시 일상인들에 의해 확고하게 받아들여지는 자연적 신념인 것이다. 흄은 ‘감각에 관한 회의주의에 대하여’라는 절의 서두부터 이를 분명히 밝혀두고 있는 데, 그 신념은 우리의 의지를 넘어선 어떤 것으로서, “자연이 미리부터 마음에 심어 놓아 피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추론에서 당연히 받아들여야만 하는”(T 183) 것이라고 말한다.

3.3 자아의 자기동일성
마지막으로 자아에 관한 신념에 대해서도 흄은 그 정당화 가능성을 부정한다. 먼저 그러한 신념은 우리의 감각에 근거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여, 그것은 경험적 증거에 의해 정당화되지 못한다. 우리는 ‘자아’라고 하는 단일한 인상을 관찰할 수 없으며, 자아가 한 무리의 지각들이라 여겨진다면, 이것들 사이의 동일성의 관념을 관찰할 수 없다. 또한 그 신념은 이성에 근거하지도 못한다. 즉 이성적 논증에 의해 정당화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아’라고 하는 실체를 가정함으로써 그 신념을 정당화하려는 그 어떤 형이상학적 이론도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흄은 경험주의적 성격의 형이상학적 논제를, 즉 영혼 또는 자아가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논제를 검토한다. 즉 흄이 첫 번째 과녁으로 삼는 것은 우리 저마다는 소위 자아라고 불리는 것을 우리 자신의 경험을 통해 직접 의식한다는 논제이다. 흄의 관찰에 따르면 “우리는 자아라고 불리는 것을 매순간마다 직접 의식하며, 그 존재와 존재의 지속성을 느낀다고 생각하며, 그것의 동일성과 단일성에 관해 증명의 명증성 이상으로 확신하는 몇몇 철학자들이 있다”(T 251). 만일 이들의 주장이 맞다면, 자아에 관한 우리의 신념은 감각으로부터 직접 오는 것이 될 것이며, 감각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흄은 이러한 가능성을 부정한다. 그러면서 그는 여느 때처럼 이렇게 묻는다: “이러한 관념은 어떤 인상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가?”(T 251).
나아가서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자아의 관념은 우리의 인상에 준거하므로, “만일 어떤 인상이 자아의 관념을 일으킨다면, 그 인상은 우리 삶의 전과정을 통해서 동일한 것으로서 불변적으로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아란 그런 식으로 존재한다고 상정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항시적이고 불변하는 인상이란 없다”. “결국”, 흄은 결론짓기를, “그런 관념은 없다”(T 251). 이렇게 흄은 우리의 관념의 근거 또는 근원이 우리의 감각에 있을 가능성을 부정한다. 흄은 이 논점을 계속 진행하여, 이렇게 말한다. “나로서는, 소위 나 자신이라는 것에 가장 근접해 들어갈 때, 나는 늘 더움이나 차가움, 밝음이나 그늘짐, 사랑이나 증오, 고통이나 쾌락 등의 몇몇 개별적 지각들만을 마주치게 된다. 나는 그 어느 순간에도 지각없이는 나 자신을 결코 파악할 수 없으며, 지각 말고는 결코 아무 것도 관찰할 수 없다“(T 252). 다시 말해서, 흄에 따르면, 내성을 통하여, 자아의 관념의 근원이 되는 아무런 인상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내부를 살펴볼 때, 우리는 다만 생각들 느낌들 및 바램들을 발견할 뿐이며, 우리의 자아들을 발견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흄은 앞서 살펴본 인과적 신념이나 물리적 대상의 존재에 관한 신념과 마찬가지로 자아에 대한 신념도 피할 수 없는 어떤 것, 즉 자연적 신념임을 인정한다. 흄에 따르면, “이러한 실수를 하는 경향성은 너무도 커서 ... 우리는 우리가 깨닫기도 전에 거기에 빠져든다; ... 우리는 ... 이런 치우침을 상상력에서 제거할 수 없다”(T 254)는 것이다. 뒤따르는 흄의 설명은 상상력이 어떻게 작용하여 우리에게 그러한 신념을 낳는가에 관한 설명이다. 그에 따르면, 자아의 관념을 일으키는 인상들은 ‘유사성’과 ‘인과성’의 성질을 보이는데, 이러한 두 가지 성질로부터 우리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동일성’의 관념 쪽으로 이전해 간다는 것이다.
3.4 흄의 인식론적 자연주의
흄은 앞서 살펴본 세 가지 신념들은 궁극적으로 우리 마음의 자연적 경향성에서 왔다고 흄은 결론짓는다. 그에 있어서 자연적 경향성이란 ‘상상력’, ‘본능’과 바꾸어 쓸 수 있는 개념으로서 우리 마음의 작용을 설명하는 근본 원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사물이 인과적으로 움직인다고 하는 우리의 신념, 물리적 대상들로 이루어진 외부 세계가 존재한다고 하는 신념, 그리고 자기동일성을 지닌 자아가 존재한다는 신념들도 결국은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 경향성으로 인해서 생겼다고 하는 것이 근대 인식론의 주요 주제들에 대한 그의 인간학적 탐구의 최종 결론이다. 흄에 있어서 이것이 우리의 지식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전부이다. 흄의 이러한 탐구는 비단 인식론적 주제들에 한정되지 않는다. 도덕과 종교에 관해서도 흄은 마찬가지 방식으로 탐구한다. 이러한 탐구가 바로 흄이 주창한 ‘인간학’의 내용이며, 이런 점에서 흄은 무엇보다도 인간 본성(human nature)을 탐구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경험주의자로 그리고 회의주의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흄에게 오늘날의 흄 연구자들이 추가적으로 부여하는 타이틀이 바로 ‘자연주의자’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흄의 자연주의적 탐구는, 관찰과 실험의 방법에 기초하여 어떻게 우리가 이러 저러한 신념을 가지게 되는 가를 설명하는 쪽으로 진행한다. 이러한 탐구는 그가 우리의 감각 자료와 신념들 간에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 후에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즉 우리의 근본 신념들의 정당화 문제에 대한 그의 회의론적 논증 이후에야 비로소 그는 충분한 정당성을 가지고 그런 신념들을 인간 본성의 몇가지 경향성들에 기초해서 설명해 나간다.
우리는 여기서 흄과 콰인 사이의 유사성을 관찰할 수 있다. 즉 그들은 모두 규범적이라기보다는 기술적인 인식론의 형태를 제안하며, 그것은 양자가 모두 인간의 사고는 항상 증거를 넘어서며 따라서 이것들을 정당화될 수 없고 다만 ‘외적 자극’과 이에 대한 ‘주관쪽에서의 반응’이라는 개념들에 기초해서 설명되어질 수 있을 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나쳐서는 안 될 흄 자연주의의 특징, 또는 현대 지식론에서의 자연주의와의 차이점이 있다. 즉 기초 신념들이 지니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 및 이 확신을 낳은 상상력의 작용이 그것이다. 흄의 인식론적 자연주의의 중심 논제는 ‘우리의 기초 신념들은 궁극적으로 인간 본성의 자연적 경향성에 뿌리박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런 신념들은 이것들이 우리의 이성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 본성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확고하게 유지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것들은 본능적 반응이다. 이런 특징이 흄 자연주의의 핵심이자 특징이며, 나아가서 바로 이것이 그 신념들의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4. 맺음말
흄을 자연주의자라고 부를 때 그 의미를 정확히 규정하거나 이해하기는 결코 쉽지 않으며, 흄 연구가들마다 그 자연주의의 의미가 서로 다르다. 현재로서 논자는 흄 자연주의를 규정하는 가장 안전한 개념으로 ‘인간 본성’을 꼽겠다. 즉 흄의 자연주의란 바로 ‘인간 본성 주의’(human nature-ism)를 말한다고 하면 가장 안전하리라는 것이 논자의 생각이다. 17,18세기 유럽 계몽주의의 흐름 속에서 인문학 쪽에서 진행된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 계획을 흄이 자신의 과제와 방법으로 채택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인간 본성에 속한 개념들을 가지고 인간의 제 현상들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흄에게서는 ‘인간 본성’이 핵심 개념이다. 물론 이런 의미 규정으로 흄의 자연주의를 이해하기에는 그 외연이 너무 크고, 그 내포가 너무 작다.
이런 이유에서 논자는 이 논문을 통하여 흄의 자연주의의 의미를 조금 더 분명히 이해해보고자 했으며, 이러한 시도는 흄 자연주의의 근대 과학적 측면과 인식론적 측면의 고찰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제 마지막 한 가지 고찰로 이 논문을 마치겠다. 흄과 근대 과학의 수평적·수직적 관련의 접점에 관한 것이 그것이다.
흄의 과학적 자연주의와 인식론적 자연주의의 접점은 무엇일까? 논자는 이것을 인간 능력의 한계에 관한 진정한 인식에서 찾고자 한다. 뉴튼 과학의 새로운 방법이 그랬듯이 흄이 도입한 방법이나 그 정신에서 우리는 인간 능력(이성적 감각적 능력)의 한계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본다. 또한 흄의 인식론적 자연주의에서 우리의 지식에 대한 궁극적 정당화의 한계에 대한 솔직한 자인(自認)을 본다.
흄이, 그리고 가설을 거부하는 뉴튼의 정신을 이어받은 과학이라면, 인간 인식의 한계에 대한 자각은 그 어느 탐구 영역에서든, 그 어느 시대에서든 망각해서는 안 될 중요한 앎 중의 하나임은 분명한 것 같다. 그래서 다시 흄 ?논고?의 서론에서 확인해보자.

“절망은 즐거움과 거의 똑같은 효과를 갖으며, 그리하여 우리가 욕망 충족의 불가능성을 깨닫게 되자마자, 그 욕망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이것처럼 분명한 것은 없다. 그렇기에 인간 이성의 궁극적 한계에 도달했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그 지점에서 멈추고는 그것으로 만족해한다. 비록 우리가 무지의 한가운데서 완벽하게 만족해하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세련된 원리들을 설명할 근거를 제공할 능력이 없으며 다만 그런 원리들의 실재를 경험하기만 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지라도 말이다.”(T xviii)

흄이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를 통해 얻은 가장 값진 지식이란 다름 아닌 ‘인간 본성의 한계’, 즉 ‘인간이 지닌 본성상의 한계’에 관한 지식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그저 역설적 표현에 불과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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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Hume and Modern Science: the Expansion of Science and its Epistemological Foundation
Heebong Choi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plore the relation between David Hume and Modern natural Science. Considering the aspects of their horizontal relation, Hume can be understood as an early humanitist who made an attempt to apply the methods of Modern Science extensively to the topics of humanities as he was stimulated and encouraged by the achievement of Modern Science.
In their vertical relation's aspect, Hume can be said to be closely related to epistemological foundation of scientific knowledge. In this respect, one of the prime aims of this parer is to reconfirm and recognize horizontal and vertical influences of natural science during 17th and 18th centuries on Hume philosophy.
For this purpose, the writer investigates the effect of Newton science on the tasks and methods of Hume philosophy. First of all, the background of the emergence of Newton's experimental philosophy and its content will be explored. Furthermore the context in which Newton denies Hypothesis and its real meaning will be examined. Secondly, the influence of Newton science that is evident on the philosophical tasks and methods shown in the Introduction of Hume's Treatise will be addressed. Next to this, the writer will take a careful look at Hume's views on the problem of justification of basic beliefs that provide the foundation of new scientific knowledge as the same order as the topics appear in the Treatise.
Another aim of this parer is to have a clear understanding of the nature of Hume philosophy and furthermore, Hume's naturalism through this study.

【Key words】Hume, Naturalism, Epistemology, Modern Philosophy, Modern Sci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