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흄에 있어서 자아의 동일성 문제

나뭇잎숨결 2020. 11. 19. 13:40

 

흄에 있어서 자아의 동일성 문제


양 선 이 서울대 철학


I. 들어가는말

[인성론]에서 무엇보다 당혹스럽고 결론이 쉽사리 날것 같지가 않은 부분 중의 하나가 '자아의 동일성에 관하여'란 장이다. 흄 자신은 인성론의 [부록]에서 그 부분을 검토해 보았을 때, 그 부분이 그의 철학내에서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고 말한다.

[부록]에서 [인성론]의 자아의 동일성에 관한 이론이 아주 골치 아프고 혼란스럽다고 흄이 불평을 털어 놓고 있긴 하지만, 이 문제를 해명해 볼려고 하는 진지한 노력은 정작 몇 안된다.

최근에 이에 관한 많은 논의들이 있긴 하지만, 자아의 동일성에 관한 흄의 설명의 이점들에 관해서 해석이 다양하고, 흄이 왜 그 이론에 관해 불만을 표시했는지에 관해 서로 이견이 분분하다. 필자가 보기에, [부록]에서의 흄의 불만에 관해 지금까지 제시된 견해들 중 어떤 것도 흄이 그토록 고심해야만 했던 문제를 제대로 해명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

이에, 필자는 본 논문에서 이러한 문제를 검토하고, 자아에 관한 흄의 견해를 적절하게 해석하고자 한다.



II. 문제제기

Hume이 탐구의 과제로 삼았던 주제 가운데 자아의 동일성에 관한 문제는 특별히 우리의 주의를 끈다. 왜냐하면 Hume은 이 주제에 관하여 [인성론]의 [부록]에서 불만을 표시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이론에 관한 불만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제시된다.

"마음을 구성하는 과거 지각들의 연속을 반성할 때, 사고만이 자아의 동일성을 발견하며, 과거 지각들의 관념들이 서로 연결되고,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서로를 소개함을 사고만이 인식한다 ㅗㅗㅗㅗㅗㅗ 그러나 내가 우리의 연속적인 지각들을 우리의 사고 혹은 의식에 연합시키는 원리들을 설명하게 될 때, 나의 모든 희망은 사라진다. 이 주제에 관하여 나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어떤 이론도 나는 발견할 수 없다. 간단히 말해, 내가 일관적으로도 만들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내 능력으로는 그들 중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없는 두 원리들이 있다. 그러한 것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우리의 모든 분리된 지각들은 분리된 존재들이며, 마음은 분리된 존재들 사이에서 어떤 실제적 연결(real connection)도 결코 지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T 635-636)


많은 주석가들은 Hume이 자아의 동일성에 관한 자신의 이론에 대해 어떤 결점을 인식했으며, 만일 그렇다면 Hume 체계 자체에 비일관성이 있을 수 있다고 해석한다. 따라서 필자는 본 논문에서 자아의 동일성에 관한 Hume의 입장과 그에 대한 Hume의 불만의 의미를 고찰하는 가운데 Hume 체계에 정말로 비일관성이 있는지를 밝혀 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Hume 체계가 비일관적이지 않다면, 즉, 일관적이라면, Hume의 불만은 어떤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우리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Hume 철학의 일반적 특색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먼저 '자아의 동일성' 문제에 관해 Hume에게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간략히 소개해 보기로 하겠다.

Hume은 [인성론]에서 자아에 관해 다발 이론을 제시한다. 이러한 자아의 다발 이론에 관해서는 두 가지 비판이 가능하다.

첫번째 비판은 지각들이 개별적인 다발들로 분류될 수 있는 기준을 설명하는 것과 관련된다. Hume이 말했듯이, 마음이 단지 지각들의 다발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어떤 기준에 의해서 너의 마음을 구성하는 지각과 나의 마음을 구성하는 지각을을 구별할 수 있는가?

두번째 비판은 '자아의 동일성 문제'와 관련하여 Hume 체계가 일관적인가 하는 것과 관련된다. Hume은 [인성론]에서 자아에 관한 다발 이론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의 인간학의 일반적 전략으로서 왜 우리는 현재와 같이 믿고, 행위하고, 느끼는가 등등에 관한 자연적 신념을 기술할 때 Hume은 지속적이고 능동적인 활동을 하는 자아의 존재를 전제하는 듯이 보인다. 그렇다면, 자아에 관해 Hume은 명백히 비일관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예를들면, '자아의 동일성에 관하여'란 장에서 우리자신의 내부를 들여다 보면 우리는 지각들의 연속들만을 관찰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때 안을 들여다 보고, 지각들의 연속들만을 발견하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지각들의 다발이 이러한 작업을 할 수는 없다. 인과관계와 외부대상을 논의할 때, Hume은 어떤 종류의 지각들이 과거의 어떤 종류의 지각들을 뒤따른다는 것을 마음이 기억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지각들을 기억하는 이러한 마음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그러한 것은 지각들 다발 그 자체일리는 없다. 이와 동일한 종류의 비판이 [인성론]의 다른 부분과 관련하여서도 제기될 수 있다. Hume은 마음이 지각들을 관찰할 뿐만 아니라 지각들을 연합하고, 혼동하며, 믿는다고 말한다. 비록 Hume이 공식적으로는 지각들의 다발에 불과한 것 이상의 자아인 초월적 자아의 존재를 거부했다고 할지라도, 그와 같은 초월적 자아의 개념은 Hume의 사고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마음을 구성하는 지각들의 다발 이외에,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지각들을 다루는 자아의 존재를 Hume이 전제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자아의 동일성 문제'와 관련하여 본 논문에서 필자는 두번째 비판에 대하여 Hume을 변호하고, 첫번째 비판은 자아의 동일성 문제와 관련하여 Hume에게 문제가 되지 않음을 보이고자 한다. 왜냐하면, '자아의 동일성'과 관련하여 Hume의 문제는 한지각 다발내에서 그 지각들이 어떻게 결합되는가에 관한 문제로, 이는 결합 원리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문제가 극복될 수 없는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Hume은 지각들을 개별적인 다발들로 나누는 원리 즉, 연합원리에 관해서 말했다. 그러한 것이란 유사성과 인과관계이다. 그러나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연합이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두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한가지는 연합이 지각 다발 이외의 어떤 능동적 주체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지각들의 유사성과 인과관계에 의해 지각들이 연합된다는 것이다. 연합을 전자와 같이 보는 것은 Kant(보다 정확히 말하면 Hutcheson)적인 모델을 따르는 것이고, 두번째와 같이 보는 것은 Newton의 모델을 따르는 것이다. 연합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과 관련하여 Hume의 비일관성에 관한 논의가 있다. 주석가들은 연합을 이런식으로 해석하고, Hume이 연합에 관해 두 모델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인성론]의 [부록]에서 '자아의 동일성'에 관한 문제에 대해 Hume이 불만을 표시했다고 해석한다. 우리는 이러한 해석이 타당한지를 제 IV장의 비일관성에 관한 논의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Hume이 이러한 의심스러운 비일관성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Hume의 체계는 일관되게 해석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III. [인성론]에 나타난 자아의 동일성에 관한 문제

[인성론]의 제 4부 6장에는 Hume의 자아의 동일성에 관한 유명한 논의가 있다. 이장은 Hume이 자아의 동일성에 관해 불만을 표명했기 때문에 주목을 끈다. 즉 [인성론]의 부록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전의 나의 생각들을 어떻게 수정해야 할지를 모르겠으며,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어떻게 일관적으로 만들어야 할지를 모르겠다."(T 636)

그의 어려움은 이러한 말들 속에서도 나타난다.

"간략히 말해 내가 일관적으로 만들 수도 없고, 그들 중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없는 두 가지 원리들이 있다. 즉 그것은 우리의 모든 분리된 지각들은 분리된 존재라는 것과, 마음은 분리된 존재들 사이에서 결코 어떤 실제적 연결도 지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T 636)

적어도 이 구절은 관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용된 원리들은 일관적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두 원리들은 Hume 자신도 포기할 수 없었던 제 3의 어떤 원리와 비일관적일 것이다. 많은 주석가들은 그러한 제 3의 원리가 자아의 동일성과 관련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Hume은 그를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코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았으며 그 가능성에 대해서 조차도 주석가들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이에 관한 탐구를 통해 Hume의 입장을 이해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는 제IV장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이에 앞서 먼저 우리는 [인성론]에서의 자아의 동일성에 관한 그의 논의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Hume 철학에서 주제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논의가 그러하듯이 자아의 동일성에 관한 논의에도 Hume 철학의 일반적 특색인 회의주의와 자연주의가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먼저 회의주의와 그 문제와의 연관성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자아의 동일성에 관한 회의주의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될 것이다. 왜냐하면 Hume은 '자아'라는 관념에 관하여 그것이 실체라는 것을 부정하면서 개념적 회의주의를 표명하는 듯 하지만 자아의 동일성에 관해서는 그러한 입장을 견지하는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1. 자아의 동일성 문제와 회의주의

A. 자아의 관념

'자아의 동일성' 문제와 관련해 Hume 철학의 회의주의적 특성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고대 철학에 관하여', '근대 철학에 관하여', '영혼의 비물질성에 관하여'라는 절에서 이다. '고대 철학에 관하여'와 '근대 철학에 관하여' 에서 Hume은 실체라는 개념과 제1성질과 같은 개념이 철학자들이 고안해낸 것에 불과하며 그것이 이성과 감각을 통해서도 정당화 될 수 없음을 논증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그의 논증은 실체 이론에 대해 의심을 제기하는 수준이고, 그리하여 실체에 관한 믿음을 그의 경험주의 원리로 설명하는 것이 충분하다면, 실체가 있건 없건 간에, 마음에 관한 그의 이론이 그러한 믿음을 설명할 수 있다는 정도에서 그의 논의를 끝내고 있다.

그러나 '영혼의 비물질성에 관하여'에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거기서 그는 "영혼이 실체라는 것은 완전히 이해불가능하다(unintelligible)"(T 250)고 말하고 있다. Fogelin은 이를 개념적 회의주의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영혼이 실체라는 것과 관련된 Hume의 회의주의에 관해 살펴보기로 하자.

흄에 따르면 실체라는 것은 우리가 경험중에서 친숙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것이 나타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경험에서 비롯된 관념들을 통해서이다. 흄은 영혼이 실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논박하기위해 세 가지 논증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러한 것을 대략적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철학적 용어가 그것에 결부된 관념이 무엇인지 분명치 않을 때, Hume은 항상 다음과 같이 물음을 던진다. 그러한 관념이 유래된 인상은 무엇인가? 만일 인상이 제시될 수 없으면, 그 말은 전혀 의미가 없다고 그는 결론내린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실체와 본질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검토한다. 만일 이러한 방법이 바람직하다면 이러한 엄격한 방법은 모든 철학적 용어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T 648-9)

실체라는 말을 이러한 방법에 적용시킨다면, "실체"라는 말에 결부된 인상이란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실체라는 관념은 ...상상에 의해 결합된 단순관념들의 집합에 불과하다."(T 16)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실체라는 개념에 대한 Hume의 태도는 별로 관용적이지 못하다. 여기서 그는 의미에 관한 경험주의적 기준과 유사한 어떤 것을 사용한다. 그러한 입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x에 관한 관념을 감각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얻기 위해서는 우리는 x에 대한 인상을 가져야만 한다. 우리는 제각기 자신의 인생 전반에 걸쳐서 동일한 것으로 남아있는 하나의 것으로서 자기자신에 관한 관념을 갖는다. 그렇다면 그와같은 관념을 야기할 수 있는 어떤 인상은 그 자체로 인생의 전반을 통하여 항상적이고 불변적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상들은 잇달아 급히 바뀌면서, 한순간 이상의 항상성을 유지함이 없이, 서로서로를 뒤따른다. 비록 그와같은 인상들 중 어떤 것은 다른 시간의 자아의 인상들이라고 할지라도, 단절됨이 없이 인생 전반에 걸쳐서 지속적인 어떤 것으로 남아있는 자아의 관념은 단순히 인상의 모사일 수는 없다. 따라서 자아의 관념은 감각들로부터 직접 유래될 수 없다. (T 233)

우리는 동일성의 관념 혹은 같음의 관념을 갖는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대상에 대해 그것이 시간을 통해서 불변적이고 비단절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다양성의 관념을 갖는다. 이것은 동시적으로 존재하거나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각각의 서로 다른 대상의 관념이다. 관련된 대상들의 계속적인 연속을 고려하는 것은 불변하고 비단절적인 대상을 고려하는 것과 너무도 유사하며 그리하여 우리가 마음의 어떤 작용 혹은 경향과 그것과 아주 유사한 또 다른 것과 혼동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T 253).

우리는 유사한 지각의 연속을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게끔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러한 연속을 분리된 두 시점에서 고려한다면 서로 다른 사물들 즉, 다양성의 경우가 나타나는 결론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러나, 유사한 지각들의 연속을(다양성의 경우를) 불변하고 비단절적인 것으로 보려는 경향이 너무 강해서 우리는 불가피하게 그 경향에 굴복한다. 과거의 철학자들은 이러한 때에 항상적이고 불변적으로 남아있는 어떤 것을 만들어 냈다.(T 219) 그들은 이것을 실체라 불렀고, 사람의 경우에는 자아, 혹은 영혼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동일성과 다양성 사이의 갈등은 명백히 해소된다. 그들은 또한 실체 속에 '내속하는(inhere)' '우연적인 것들'은 변하는 반면, 실체는 하나이고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이상을 통해 우리는 자아의 관념에 관한 Hume의 회의주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자아의 관념과 같은 철학적 개념에 관해 Hume은 그것이 이해가능하다고 하는 것에 대해 반박하는 개념적 회의주의의 입장을 취한다. 그리고 앞으로 검토하게 될 동일성에 관한 관념에 관해서는 그것이 감각에 의해서도, 이성에 의해서도, 정당화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Hume은 회의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그리고 Hume이 동일성에 관해 회의주의적 입장을 취할 때 이때의 동일성은 완전한 수적 동일성(numerical identity)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에 관해 이후에 검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Hume은 일상인들이 가지고 있는 그와 같은 믿음들에 대해서는 그러한 믿음의 가정된 토대에 대해 반박하는 즉, 그것의 합리적 근거를 부정하는 인식론적 회의주의의 입장을 취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믿음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즉, 일상인들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믿음에 대해서 우리는 발생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에 관한 논의를 다음 절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앞서 우리는 동일성의 관념에 관한 Hume의 회의주의적인 입장을 살펴보기로 하자. 동일성에 관한 논의는 [인성론] 제 1권 제4부 '감각에 관한 회의주의' 章에 잘 나타나 있다.


B. 동일성 관념

내가 지금 지각하고 있는 것이 지속적 현존(continued existence)에 의해 앞서 지각했던 어떤 것에 연결되어 있다는 가정은 지금 지각하고 있는 것과 앞서 지각한 것이 동일하다는 거짓된 믿음과 관련된다. Hume은 동일성 관념을 단일성(unity)이나 다수성(multiplicity)의 관념을 통해 설명한다. 우리는 어떤 한 대상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다음에 다른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경우에 우리는 수의 관념 즉, 다수성의 관념을 갖게 된다. 그런데 또한 우리는 어떤 한 대상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경우에 우리는 단일성의 관념을 갖게 된다. 그러나 Hume은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어떠한 것도 없는 것처럼 단일성과 수 사이에도 어떠한 중간이 없다고 하면서 단일성과 다수성의 관념 그 자체 만으로는 동일성의 관념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는 동일성의 관념의 본성과 기원을 시간 혹은 기간의 관념에 의존해서 설명한다. 그리고 그는 불변적 대상이 시간 속에 있다고 말해지는 것은 오직 상상의 허구에 의해서만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지속적 현존과 분리된 현존에 대한 관념은 감각에 의해서도 이성에 의해서도 제공되지 않으며, 따라서 이 둘에 의해서 정당화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T 217-18). 지속적 현존이 감각에 의해 정당화 되지 않는 이유는, 지속적 현존의 관념을 가진다는 것은 감각되지 않는 것을 감각한다는 사실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리된 현존이 감각에 의해서 정당화 될 수 없는 이유는, 우리는 오직 일종의 오류와 환상에 의해서만 분리된 현존에 대한 인상을 가질 수 있는데, 감각은 우리를 속이지도 않으며, 속이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T 189). 한편, 지속적 현존과 분리된 현존에 대한 관념이 이성에 의해 정당화 되지 않는 이유는 설령, 외적 현존에 대한 믿음을 확립시킬 수 있는 확고한 이성적 논변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극히 소수에게만 알려질 것이며, 어린이, 농부, 인류의 대다수가 외적 현존에 대한 믿음을 그러한 논변에 의해서 갖지 않기 때문이다(T 193).

이렇게 Hume은 동일성에 관한 관념이 이성에 의해서도 감각에 의해서도 정당화 될 수 없다고 한 뒤, 그 근거를 상상력에서 찾는다(T 194-5). 우리는 다음장에서 상상력이 어떻게 작용하여 동일성에 대한 신념을 불러 일으키는지를 검토하게 될 것이다. 그에 앞서 우리는 이장을 마무리 하면서 동일성 문제와 관련하여 Hume의 회의주의의 일반적 특징을 검토해 봄으로써 다음장으로 넘어가기 위한 실마리를 찾아보기로 하자.

Hume은 '감각에 관한 회의주의'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이성과 감각 양자에 대한 회의적 의심은 근본적으로 치유될 수 없는 전염병이다. 이것은 우리가 아무리 쫓아버리려 해도 그리고 때로는 완전히 이것으로부터 벗어난 듯이 보여도 항상 우리에게 되돌아 온다. 우리의 이성과 감각을 옹호하는 것은 어떠한 체계에 기초해서도 불가능 하다. 우리가 그러한 방식으로 그것들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더욱 더 어려움에 빠질 것이다."(T 218)

이러한 Hume의 회의론적 견해는 다음과 같은 면에서 고대 퓌로니즘의 견해와 일치한다. 즉,

"우리는 인간지식의 본성과 근거에 대한 인식론적 분석이 보여주는바, 우리의 판단들에 대한 어떠한 합리적 또는 확실한 근거도 없으며 우리는 인간 지식의 어떤 근본적 영역들에서 우리의 상충되는 판단들 중 어느 것이 참이고 또는 선호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할 궁극적 기준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 있어서 우리의 판단들에 대한 합리적이고 확실한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Hume에 있어서 이러한 극단적 회의주의는 일상적인 신념들에 적용될 때 실패하며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아가 존재한다는 신념을 포함한 일상적 신념들은 실제에 있어서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Hume은 고대의 극단적 퓌로니즘에 대해 평가하면서 그것이 철학적으로 반박될 수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결코 아무도 그것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일상생활에서 퓌론적 회의는 무시된다.(T 268) 철학적 수준에서, 이러한 회의주의는 그 자체로 믿어지지 않는다.(T 183)

결국 회의론적 논증은 반박을 허용치 않지만 반면에 확신도 낳지 못한다. 즉,

"다행스럽게도 자연은 적절한 시기에 모든 회의적 논증의 힘을 분쇄하고, 이것들이 이성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한다."(T 187)

Hume은 그 자신이 극단적 회의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출구는 이성의 자연적 원리에 따라 동의하고, 생각하고, 결정하고, 추론하며, 논증하고, 예측하고,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반성적인 인간들은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원리에 의거해서 습관적으로 행위하게 되는데, Hume은 이러한 원리가 형이상학자들이 고안해 낼려고 하는 인위적인 어떤 것보다 더 믿을만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Hume에 의하면 우리가 회의주의에 건전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보다 덜 완전한 도구들을 가지고 탐구해야 한다고 한다. 회의주의자는 그러한 도구들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그 자신이 미묘하고 난해한 추론을 통해 가지게 된 의심을 보류하게 될 것이라고 Hume은 말한다.

"참된 회의주의자는 그의 철학적 확신과 마찬가지로, 철학적 의심에 대해서도 주저하게 될 것이다."(T 273)

이러한 점에서 실천적 문제에 직면했을 때, 완고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자살적 행위이다. 그리고 이론적 문제에 부딪혔을 때, 그와 같은 완고한 태도는 모든 과학을 소멸하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Hume에 따르면 '부주의와 무관심만이 우리에게 어떤 구제책을 가져다 줄 수 있다.'(T 218)

엄격한 회의주의를 설파하는 사람은 그가 실천적 요구들에 직면했을 때 그의 이론적 원리들을 어겨야만 하는 상황에서 당혹스러워 한다. 그들은 형이상학의 특권을 누린 후에 회의주의자들이 갖는 '철학적 우울함과 열광'(T 268)의 참기 힘든 분위기에서 빠져 나오고자 하는 자연적 충동 때문에 또한 당혹스러워 한다.

Hume이 회의주의자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 Hume은 회의주의가 무용하다는 것을 보이고자 했다. 한편, 그는 회의주의의 유일한 결과는 '순간적인 여흥과 우유부단 그리고 혼란스러움'(E, 155n)이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리고 그는 '어떻게 자연이 모든 회의주의적 논증들의 힘을 분쇄하는지'를 설명한다.(T 187) 그러나 '우리 인생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여전히 회의주의를 유지해야만 한다'고 그는 충고한다. 이와같은 모순적인 주장은 Hume 체계내에서 해결되지 않은채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어떤 때에는 그는 형이상학적 문제나 또 다른 문제에 대한 회의주의적 결론이 완전히 논박될 수 없는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또 어떤 때에는 동일한 주제에 대해 회의주의적 견해가 신빙성이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 한편 그는 어떤 도그마에 관해 회의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그는 우리가 그 도그마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그는 그 양 입장에서 벗어나 있다. 즉 독단주의자들과 회의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은 쓸모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그는 회의주의와 독단주의 간의 논쟁을 '습관, 변덕, 경향성'에 있어서의 차이를 나타내는 언어적 논쟁으로 특징짓는다.(D 219n)

이제 Hume의 회의주의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를 검토해 보고 이절을 끝맺고자 한다. Hume은 전통적으로 형이상학자들이 골몰했던 몇가지 문제는 완전히 해결될 수 없다는 걸 주장하면서, '철학자들의 사변에 대해 특별히 다른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그가 목표하는 바'(T 273)라고 했다. 동시에 그는 논증적 추론의 제한된 영역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경험적 방법 즉, '도덕적 주체에 추론의 실험적 방법을 도입하고자 하는 시도'(T 273)에 매진할 수 있었다.

외부 세계와 정신의 실체성에 대한 우리의 자연적 신념을 보증하기 위해, 이론들을 고안하는 존재론자들을 Hume이 논박할 때, 퓌로니언 정신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과도한 회의주의는 증명될 수 없는 이러한 자연적 신념들에 대해 실천적 필연성을 유지하는 것을 반성함으로써 완화된다. 이러한 자연적 신념들은, 시간적으로는 변한다 할지라도, 영원히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완전한(total) 회의주의는 그것이 아무리 심정적으로는 그럴듯하다 할지라도 자기파괴적이기 때문이다. 포기된 신념들의 진리를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독단적인 시도에 불과하다. 반대로, 이러한 신념들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에 관한 설명들은 인간 본성에 관한 이론들에 의존한다. 그리고 그와같은 설명은 경험적 탐구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인간의 자연적 신념들이 의존하는 원리들과 경험으로부터 귀결된 습관의 방식이 발견되면 그러한 것 위에 과학을 근거짓는 것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의 유일한 토대'는 퓌로니언적 회의주의가 아니다. 그리하여 퓌로니즘은 인간 이성의 한계 뿐만 아니라 그 한계내에서 작업해야할 필요성을 깨닫는 완화된 혹은 아카데믹한 회의주의에 의해 보완된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는 인간 이성에 있어서 정당한 작용 영역을 감각 경험의 영역으로 규정하고, 경험적 방법이 적절한 방법이라고 규정짓는다. 이렇게 볼 때, Hume의 정신과학의 토대는 인간 이성에 관한 자연적 원리들에 있고, 완화된 회의주의는 그와 같은 원리들에 동조하고 있다.

이러한 회의주의의 제한하에서 Hume에게서 새로운 적극적 이론이 성립하게 된다. 그리하여 Hume은 극단적, 인식론적 회의론과 더불어 이와 병존하는 '자연적 신념의 우위'에 대한 적극적 이론을 구성한다. 이제 이러한 고찰을 바탕으로 자아의 동일성의 믿음에 관한 Hume의 적극적인 설명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2. 자아의 동일성 문제와 자연주의

A. 동일성에 대한 믿음

Hume에 따르면 동일성의 개념은 '상상력의 허구(the fiction of the imagination)'에 의해 일어나는 모순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그는 "어떤 중단이나 변화가 발견됨이 없이 어느 시간이나 조망되는 단일한 대상"이 동일성의 개념을 준다고 본다.(T 201) 그러나 우리가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대상의 단일성(unity)이 아니면 다수성(multiplicity)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관념들에다 시간 또는 지속의 관념을 적용시킴으로써 동일성의 관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즉 단 한순간에 존재하는 하나의 대상을 생각하면 그것은 단지 다수성의 관념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중단이나 변화가 없는 대상을 상정할 때, 우리는 여러 다른 시간을 통해서도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대상에 대한 관념을 갖게되는 것이다. 그런데 Hume에 따르면 동일성의 관념은 감각인상의 경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의 허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일종의 실수, 착각의 결과이다. 따라서 Hume에 따르면 이렇게 상상력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두가지의 단계가 필요하다. 첫번째 단계에서 마음의 근본적인 작용은 두개의 서로 다른 그러나 유사한 감각인상들을 동일화하는 작용이다. 감각인상들은 실제로는 수적으로 다르며, 그들 사이에는 시간적 중단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들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유사성을 동일성으로 혼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단계에서는 상상력이 어떻게 작용하여 완전한 동일성을 가진 물체의 연속적 존재를 가정하며, 더 나아가서 그것을 실제로 믿게 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유사한 지각들을 따라 진행하는 상상력의 평탄한 흐름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에게 완전한 동일성을 부여하게 한다. 그러나 유사한 지각들이 나타날 때 그러한 지각들이 보여주는 중단 현상으로 인해 우리는 그들이 매우 유사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중단 후에 구별되는 존재들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T 205)

이러한 모순된 현상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여 갈등으로 몰아간다. 그리하여 우리는 상상력을 통해 이러한 모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연속적 존재를 가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으로부터 비롯되는 당혹감으로 인해 우리는 연속적 존재라는 허구에 의해서 이러한 단절된 현상들을 통일시키려는 경향성을 산출한다."(T 205)

우리는 중단 이전의 지각을 기억함으로써 앞뒤의 지각들을 연결시키려는 경향성을 가진다. 이러한 경향성은 기억이라고 하는 생생한 인상들로부터 오며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허구에 생생함을 부여하고 연속적 존재를 믿게 한다.(T 208-209)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일성에 대한 신념의 근원은 결국 인상들의 어떤 특성에 상상력이 작용한 결과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동일성에 대한 신념이 어떻게 생기게 되는가를 검토해 보았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검토를 바탕으로 Hume이 자아의 동일성에 관한 신념은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B. 자아의 동일성에 대한 믿음

일반적으로 자아의 동일성에 관한 문제는 시간을 통해 사람을 재확인하기 위한 기준을 말하는 문제이다. 어떤 한 시점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지각들의 집합이라는 Hume의 견해가 주어지면 그 집합이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고 지속할 때, 그 사람은 동일하게 남아있는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끊임 없이 변한다. 즉, 우리는 기억의 망각을 통해서 관념들을 잃고, 새로운 인상들을 가지며, 옛날 관념으로부터 새롭게 관념들을 꾸며낸다. 그러므로 Hume에 따르면, 시간을 통한 사람의 지속성은 동일성의 관계에 의해서 이해될 수 없다. "동일성은" 복합적인 존재들(동물과 식물 그리고 시간을 통해 성장하는 것)에 우리가 실수로 부가한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물들에 대해 그것들이 시간적으로 연장되어 있다고 말할 때, 그것들 사이에 유지되는 유사, 그리고 인과관계가 불변하는 대상에 대한 느낌을 마음 속에 생기게 한다.

그러면 이제 [인성론]의 '자아의 동일성에 관하여'란 장에서 흄이 자아의 동일성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Hume은 '자아의 동일성에 관하여'에서 자아의 동일성과 단순성을 확신하는 철학자들을 비판하면서 논의을 시작한다. Hume은 실체에 대한 믿음을 대상의 단순성과 동일성에 대한 믿음으로 특징짓고 있으며(T 219-21), 그리고 '자아의 동일성에 관하여'에서는 실체적 자아에 대한 믿음을 자아의 단순성과 동일성에 대한 믿음으로 특징짓는다. 물론 이러한 믿음은 지지될 수 없다. 완전히 동일하고 단순한 자아에 대한 관념은 가질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념을 야기한 인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실제적인 관념(real idea)은 그 관념을 유발한 어떤 하나의 인상을 가진다. 그러나 자아는 어떤 인상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가진 여러 인상들과 관념들이 공통적으로 지시하고 있는 어떤 것이다. 만일 어떤 인상이 있어 그 인상이 자아라는 관념을 야기한 것이라면 그 인상은 우리 인생의 모든 시간에 걸쳐 변하지 않으며 동일한 것으로 지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처럼 지속적이고 변하지 않는 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통과 즐거움, 슬픔과 기쁨, 정념들과 감각들은 연속해서 서로를 뒤따를 뿐이며, 결코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자아의 관념은 이러한 인상들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러한 자아에 관한 실제적인(real) 관념은 없다.

이렇게 자아가 모든 시간에 걸쳐서 동일하며 단순하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고 논박한 후 그는 자아에 관한 믿음이 어떻게 생기는가를 지각들에 의존해서 설명한다. 자아에 귀속되는 모든 지각들은 서로 다른 것이고, 구별가능하며, 서로서로 분리가능하고 분리된 것으로 생각될 수 있으며, 따라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고, 그 지각들의 존재를 유지시켜주는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지각들은 어떻게 자아에 속하게(inhere) 되었는가? 그리고 그 지각들은 어떻게 자아와 연결되는가? 나는 나자신(myself)에 대하여 생각할 때마다 항상 어떤 특정의 지각, 즉 열과 냉기, 빛과 그림자 사랑과 미움, 고통과 즐거움 등등의 특정의 지각을 떠올린다. 따라서 나는 어떤 지각없이는 나자신을 파악할 수 없다(T 252).

Hume은 자아에 동일성을 부여할 만한 경험적 근거가 없다고 말한 후, 자아를 지각들과 구별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다른 근거를 받아들인다. 이 다른 근거란 성향(propensity) 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신적 실체에 대해 우리가 믿게되는 근거가 된다. 이렇게 정신적 실체에 대한 일상적 믿음의 근거를 제시한 후, Hume은 마음을 극장에 비유하면서, 마음은 단지 다양한 지각들의 다발이나 집합에 불과하며, 그 지각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서로를 뒤따르고 있고, 영원한 흐름과 운동 속에 있는 것으로서, 거기에는 한 순간에서의 단순성이나 다른 순간에서의 동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음은 일종의 극장이며, 거기서는 각각의 지각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며, 무한히 다양한 형세나 상황들로 나타난다. 우리가 그런 단순성과 동일성을 상상하게 되는 자연적 성향이 어떠하건 간에, 지각들의 나타남 속에는 한 시점에서의 단순성도 없고, 다른 시점에서의 동일성도 없다. 그러나 극장의 비유는 우리를 잘못 이끌어서는 안된다. 마음을 구성하는 것은 오직 연속적인 지각들이며, 우리는 이러한 장면들이 나타날 장소에 대한 아주 어렴풋한 관념조차도 가지지 않으며, 그것이 구성되는 재료들에 관한 관념도 가지지 않는다."(T 253)

여기서 Hume이 주장하고자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즉, 마음을 구성하는 것은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지각들 뿐이라는 것과, 설사 우리가 그 모든 지각들이 하나의 마음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것이 지각들 사이에 유지되는 것으로 관찰되는 어떤 실제적 연결 때문일리는 없다는 것, 그러므로 지각들 사이에 그와 같은 실제적 연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원인과 결과의 연결조차도 엄밀히 검토했을 때, 그 자체는 관념들의 습관적 연합으로 환원된다."(T 260)

따라서 Hume에 따르면, 그러한 상이한 지각들이 그것들을 숙고하는 마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에 동일성을 부가한다. 따라서 Hume의 물음은 이러하다:

"우리가 숙고하는 지각들의 어떤 특징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이 단일한 마음을 구성한다고 가정하게 되는가? 그리고 지각들은 어떻게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가?"(T 252)

이를 위해 그는 동일성과 다양성을 다음과 같이 즉, 전자는 시간의 변화를 통해서도 불변적이고 단절되지 않는 대상에 관한 동일성으로, 후자는 연속적으로 존재하고 다른 분명한 관념들과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관념들에 근거한 것이다(T 253)는 정의를 바탕으로 마음이 완전히 동일하다는 믿음을 설명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C. 관념연합 원리

마음이 완전히 동일하다는데 대한 우리의 믿음을 설명하기 위해 Hume은 불완전하게 동일하고 단지 종적으로만 동일하며 영원히 변하는 대상에 완전한 수적 동일성(numerical identity)을 귀속시키는 원인들에 호소한다. 그러한 원인들이란 유사, 근접, 인과관계 이 세가지의 관계들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 세가지 관계에 의해서 동일성을 부여하게 된다. 이러한 세가지 관계 중에서 유사성과 인과관계만이 분리된 지각들 사이의 이전을 용이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 그리하여 그러한 지각들에 동일성을 부여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가 이전을 시키는 방식은 기억 속에서 유사성과 무수한 정신적 현상 속에서의 인과관계를 통해서이다. 유사성의 경우는 일단, 우리가 과거의 상당 부분을 기억하고 있을 때 가능하며, 그때 기억은 과거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고, 그 이미지는 과거의 대상과 닮은 것이므로, 서로 닮은 지각들을 빈번히 떠올리게 되면, 상상력이 하나의 연관에서 다른 연관으로 용이하게 이행하게 되어, 그 전체적인 흐름을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여기게 한다. 그러므로 기억은 인격의 동일성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지각들 사이의 유사성의 관계를 산출함으로써 인격의 동일성을 산출하는데 기여하게 된다. 그리고 인과관계란, 이것에 의해서 인간의 마음이 서로 연관되고 서로 다른 다양한 지각들의 체계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이것에 의해 인상은 관념을 낳고, 그 관념은 또 다른 인상을 낳는다. 지각들간의 인과관계를 논의하면서 Hume은 마음에 (완전한) 동일성을 부여하는 우리의 성향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는 마음과 연합체간의 비유를 제시한다. 즉, 인간의 마음은 국가에 비유될 수 있다. 국가의 시민들은 끊임없이 변하고 그 법률이나 제도도 끊임없이 변한다. 그러나 그 시민들은 통치와 복종이라는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국가는 동일한 국가로 여겨진다. 사람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여서, 어떤 사람이 아무리 많은 변화를 겪는다 할지라도, 그의 여러 부분들은 여전히 인과관계에 의해서 연관되어 있고, 그래서 그는 동일한 사람으로 여겨진다(T 260-262).

이렇게 인과관계를 통해 마음에 있는 지각들 사이의 규칙성(regularity)을 발견함으로써 국가나 마음 둘 다 변화를 통해서도 불완전하나마 동일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는 만족스럽지 못한 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마음은 국가에 비유될 수 없는 두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측면 중 첫번째는 국가는-예를 들어 프랑스 제 3공과국-1870년과 1940년 사이에는 단절없이 존재하는데 반해, 마음은 그렇지가 못하다. Hume에 따르면 마음은 오직 우리가 의식을 갖는 동안에만 존재한다. 둘째는 양자에 있어서 변화의 속도와 관계된다.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모임은 여러 해를 걸쳐 조금씩 변하는 반면, 마음을 구성하는 지각들은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계속해서 급속적으로 변하며, 영원한 변화의 상태에 있다. '(T 252) 첫번째 경우에 있어서 마음에 동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단절적인 소리에 동일성을 부여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리고 두번째 경우에 동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흐르는 강에 수적인 동일성을 부여하는 것과 같다. Hume은 단절적인 소리나 흐르는 강물에 그와같은 동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수적인 동일성과 종적인 동일성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마음에 동일성을 부여하는 것도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했다(T 258).

우리가 자아의 동일성을 믿을 때, 완전한 수적인 동일성을 잘못 귀속시키게 되는 요인을 설명하고 나서, Hume은 자아의 동일성에 대한 믿음의 토대를 찾아간다. 그는 그러한 토대를 기억에 둔다. 그렇다면 기억은 자아의 동일성의 토대라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인과관계에 대한 어떠한 생각도 가질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자아를 구성하는 지각들의 인과관계적 흐름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기억을 통해서 인과관계를 알고 나면, 우리는 인과의 사슬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사실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가 현재 기억하고 있지 못한 사실들에 대해서까지 확장할 수 있게 된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속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면, 그래서 그의 마음 혹은 사고원리를 구성하는 지각들의 연속을 관찰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가 과거 지각들의 상당한 부분에 대해 항상 기억하고 있다면, 그 모든 변화 가운데서 이러한 연속에 어떤 관계를 부가할 수 있는 것은(기억말고는) 어떤 것도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기억은 우리가 과거 지각들의 심상들을 떠올리는 능력이다. 그리고 하나의 심상은 반드시 그것의 대상을 닮기 때문에, 이러한 유사한 지각들을 사고의 고리 속에 두게 되면, 상상력은 한 고리에서 다른 고리로 아주 쉽게 이전하게 되므로, 전체를 한 대상의 연속과 같이 생각해야만 하지 않겠는가?(T 260-1)"

만일 우리가 우리자신에 대해서 더 이상 기억할 수 없는 간격 동안에도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원인과 결과의 이러한 고리로 그러한 간격을 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을 통하여 지속적인 것으로서 우리자신에 대한 관념을 제공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인과관계에 유사성을 추가해야 한다. 그리하여 마음은 단일한 인과적 고리를 형성하는 지각들의 연속물을 따라 쉽게 이전하고, 그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는 그러한 간격 사이에 존재하는 구성원들이 그러한 망각된 간격 동안에도 존재했다고 가정하게끔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자신이 시간을 통해서도 단일하고, 지속적이며, 연장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결국, Hume에 따르면, '우리가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이전하기 위하여 사고의 연결 혹은 결정을 느낀다는 것이 증명되고, 그리하여 마음을 구성하는 과거 지각들의 연속을 반성할 때' 사고가 자아의 동일성을 깨닫게 됨(T 635)' 으로써 우리는 자아의 동일성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이 가지는 문제점은 유사성과 인과관계라는 자연적 관계를 통해 자아의 동일성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를 충분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Hume이 이러한 사실을 인식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필자가 보기에 Hume의 발생적 설명은 인과관계와 지속적이고 분리된 대상의 현존의 관념에는 잘 맞는 듯이 보이지만, 자아의 동일성에 관한 관념의 경우에는 맞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가 아주 불완전하지만 강하게 표시한 혼란은 무엇인가? 그 문제는 어떤 문맥에 근거해서도 완전히 해결될 수는 없다. 단지 여러 주석가들의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할 뿐이다. 이장에서 필자는 우선 Stroud의 해석과 그리고 그에 대한 가능한 해결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IV. 흄은 자아의 동일성 문제에 관해 일관적이었는가?

비일관성의 문제는 [부록]에서 흄이 그 자신의 이전의 견해들을 어떻게 일관적으로 만들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생긴다.

그러나 흄이 겉으로는 비일관성을 주장하는 듯이 보여도, 이미 우리가 살펴 보았듯이 비일관적이라 말해진 그 명제들은 비일관적이지 않다.흄에게 있어 비일관성을 부여할 만한 구절은 연합원리와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앞으로의 논의는 이러한 맥락에서 고찰될 것이다.


1. 스트라우드의 해석과 그에 대한 평가

자아의 동일성 문제와 관련하여 흄이 일관적인 입장을 견지했는지의 여부를 다루기 위해서는 [부록]에서 그가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구절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이전의 나의 생각들을 어떻게 수정해야 할지를 모르겠으며,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어떻게 일관적으로 만들어야 할지를 모르겠다."(T 636)

"간략히 말해 내가 일관적으로 만들 수도 없고, 그들 중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없는 두 가지 원리들이 있다. 즉 그것은 우리의 모든 분리된 지각들은 분리된 존재라는 것과, 마음은 분리된 존재들 사이에서 결코 어떤 실제적 연결도 지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T 636)

Stroud에 의하면, 위에서 인용한 구절의 두 원리들은 자아의 동일성을 설명하는 어떤 것과 비일관적이고 Hume은 마음의 구성요소들 사이에 실제적 연결을 지각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불만스러워 했으며, 그렇다면 두 원리들이 요구하는 것은 우연적 연결이라고 해석한다. 따라서 이렇게 해석하면, Hume의 불만은 우리가 자아의 관념을 어떻게 가지게 되며, 우리로 하여금 지각들의 다발들이 지속적인 자아를 구성한다고 생각하게끔 하는 것은 무엇인지 하는 것과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Hume에 따르면, '우리가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이전하기 위하여 사고의 연결 혹은 결정을 느낀다는 것이 증명되고, 그리하여 마음을 구성하는 과거 지각들의 연속을 반성할 때, 사고가 자아의 동일성을 깨닫는다.(T 635)' 여기서 Stroud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한다.'어떻게 사고라는 것이 자아의 동일성을 발견하게 되는가에 대한 발생적 설명이 왜 문제가 있다고 Hume은 생각했는가?' Hume에 따르면 우리는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지각들의 연속물을 따라 마음이 '쉽게 이전'하기 때문에 자아의 관념을 갖게 된다. 그러나 어떤 지각들이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두 종류의 지각들 간에 항상적 연결을 관찰해야만 한다. 달리 말하면, 두 개의 서로 다른 종류의 지각들이 그 사람의 마음 속에서 항상적으로 연결되어 나타나야만 한다. 만일, 단일한 사람의 마음의 범위 내에서가 아닌 데서 B라는 지각들이 A라는 지각들을 뒤따른다면, 우리는 A라는 지각들이 B라는 지각들을 야기했다는 사실을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믿음을 가지기 위한 '자료들'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라고 Stroud는 주장한다. Stroud는 Hume이 인과관념과 자아의 동일성에 대한 기원을 설명하는데 있어 그의 생각들과 믿음들을 형성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들'로서 그 자신의 지각들에 의존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Hume은 지각들에 관한 기본적 사실로 간주했다고 Stroud는 해석한다. 그러나 Stroud에 따르면, 그 사실이 부인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Hume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Hume은 자아의 동일성의 관념을 만들어 내는 자료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그와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고 Stroud는 주장한다. 그리고 만일 그러한 자료들이 그런 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Hume의 설명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Stroud는 주장한다. 그리하여 Stroud는 Hume이 자아의 동일성의 관념을 만들어내는 자료들이 어떻게, 그리고 왜 그와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의 초월적 자아를 필요했으리라고 주장한다. 간단히 말해, 만일 자아의 관념의 기원에 관한 Hume의 설명이 성공적이라면 그 자료들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설명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Hume에게 있어서 관념이론은 지각들이 속할 수 있는 실체가 없음을, 그리고 지각들 간에 실제적이거나 증명할 수 있는 연결들이 존재할 수 없음을 함축하며, 그리하여 Hume이 이러한 사실 때문에 불만을 표시했다고 Stroud는 해석한다. 그리하여 Stroud는 Hume이 자아의 동일성에 관한 설명에 있어서 그의 관념이론으로서는 인정할 수 없는 실체의 개념과 지각들 간의 실제적 연결만이 그를 구제해 줄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해석한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이 알려지건 알려지지 않건 간에 지각들을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서 초월적 자아가 있다는 것을 Hume이 인정했다고 Stroud는 해석한다. 그렇게 되면 Hume의 관념이론은 무너지게 되고 그 때문에 Hume의 한탄이 통렬한 것이라고 Stroud는 주장한다.

필자는 Stroud가 Hume의 불만을 확인하는데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옳다고 보지만 자아의 동일성의 관념을 만들어 내는 '자료'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그와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할 수 있기 위해 지각들을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서의 초월적 자아를 Hume이 요구했으며, 그렇다면, Hume은 관념이론을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Hume이 그 문제에 관해 곤란을 느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것에 관해 어떤 설명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Hume은 이 문제를 Newton의 중력 이론의 모델을 통해 설명하려고 했다. 그리고 중력 모델을 통해 그 문제를 설명하게 될 때, 기억이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만일 Hume이 자신의 이론에 대해 어려움을 느꼈다면, 기억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충분한지 하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Hume은 기억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으며, 「인성론」의 결론에 나타나 있듯이, 만일 그가 다른 가능성을 인정한다고 하면, 미래에 더 나은 이론이 나온다면 이 문제를 보다 더 잘 해명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정도였다. 필자는 이러한 Hume의 견해에 대해 Hume이 자신의 이론을 포기하고 다른 이론을 받아들여야 했음을 의미하며, 이 때문에 Hume이 불만스러워 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Hume 이후의 사람들이 다른 이론적 지식을 가지고 Hume을 해석한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Stroud의 이러한 주장은 Kant 노선을 택하는 사람들이 Hume을 Kant적인 생각으로 넘어가기 위한 도상에 두려고 하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Hume의 불만에 관한 Stroud의 해석이 이런식으로 평가될 때, 필자는 Hume이 비일관성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본다. 그리하여 우리는 Hume의 체계가 일관되게 해석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대략적으로 말하여 Hume의 체계가 일관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유는 이러하다. 즉, Hume은 「인성론」의 서문에서 자신의 철학의 목표를 제시했는데, 그러한 것은 Newton의 "실험적 방법을 정신적 주제에 적용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인성론」 전반에 깔려 있다. '자아의 동일성'문제와 관련하여 Newton의 영향은 관념연합 이론에 중력 모델을 도입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Hume은 '자아의 동일성'에 관한 문제를 설명하는데 있어, Newton의 중력 모델에서의 인력(attraction) 개념과 기억이란 개념을 이용한다. 그렇다면 Hume이 Newton의 모델과 Kant적 모델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Hume에게 비일관성을 부여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부록」에서의 Hume의 불만에 관해서도 글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될 것이다. 필자는 「부록」에서의 Hume의 불만을 해석하는데 있어, 기본적으로 Hume의 체계가 일관적이라고 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Hume이 자신의 이론에 대해 불만스러워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혀 보려고 한다. 그러기에 앞서 Hume의 체계를 일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기 위해 지각다발 이론을 재구성하는 시도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2. 메킨타이어의 해석과 그에 대한 평가

McIntyre에 의하면 Hume의 근본적 문제는 다음과 같은 두 사실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1)사람들은 분리된 지각집합들의 연속물이다. (2)그러나 사람은 과거 경험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엄밀히 말해서, 나의 과거를 구성하는 집합들은 서로로부터 그리고 현재의 나로부터 분리되듯이, 현재의 나의 지각들은 이 순간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부터 구별된다. 이러한 다양한 집합들은 동일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정확히 동일한 구성요소로서의 지각들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과거 지각들만이 현재의 나의 믿음들을 야기할 수 있다. 현재의 나 자신과 나의 과거를 구성하는 지각들의 집합들 간의 관계는 동일성의 관계는 아니므로, 나의 과거를 구성하는 지각들의 집합들이 나의 믿음들의 형성과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습관의 힘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 그런데 Hume은 자아가 엄밀히 말하면 시간을 통해 동일하지 않다는 생각을 견지하면서도, 습관의 힘을 통해 나의 과거의 집합들이 나의 믿음 형성에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쉽사리 설명할 수 있다. 경험을 통해 지각들의 집합에 덧붙인 인상은 그것이 부가된 자아를 파괴한다. 계속적인 경험은 자아가 시간을 통해 동일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 중의 하나이다. 새로운 인상들은 다른 인상들 혹은 다른 관념들을 바꾸지도 혹은 파괴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그러한 인상들과 관념들이 속하는 집합을 바꾸며 파괴한다. 집합의 파괴는 그것의 부분들이 전부 파괴되는 것에 의해서 생기지 않고 그것들 속에 있는 어떤 것이 변함으로써 일어난다. 하지만 과거 지각들이 파괴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집합들로부터의 지각들의 영향은 결코 신비스럽지 않다 다시말하면, 나의 과거를 구성하는 지각들의 다발이 현재의 나인 다발들과 그대로 중첩한다면, 즉 그것들 모두를 내가 기억할 수 있다면, 현재의 나인 다발에 존재하지 않는 지각들에 대해 그것이 미치는 영향을 설명할 수 있다. 과거 지각들 집합의 일부는 나의 구성요소이고 나는 이 과거 지각들 집합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순간 순간의 지각들 집합이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게 되면 시간을 통한 개별적 지각들의 지속성의 토대가 흔들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각들이 수차례 여러 집합들을 통해 지속한다면, 물론 그개별적 지각들은 그것들이 나타나는 집합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적절하게 이해되었을 때, 지각들 집합으로서의 자아에 대한 Hume의 설명은 「인성론」 제I권의 주된 논의 속에서 자아가 해야만 하는 역할과 양립가능하다고 McIntyre는 주장한다. 연속물의 부분들이 중첩할 때 그 연속물의 (중첩하는)부분들이 현재에 존재하는 개별적인 것과 그리고 그것과 동일하지 않는 과거의 개별적인 것과의 연결을 인식하기 위한 토대를 제공한다. 이렇게 본다면, 지각다발로서의 자아에 대한 Hume의 설명은 「인성론」 제1권의 주된 논증속에 등장하는 자아의 역할과 양립가능하다고 McIntyre는 주장한다. 이렇게 볼 때, 자아가 동일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인성론」에서 인정할 수 있는 자아 이외의 어떤 것을 인정할 필요가 없으며, 그렇다면 Hume의 체계는 비일관적이지 않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McIntyre의 주장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Hume이 Newton적 모델을 끝까지 고수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면 그가 비일관성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부록」에서의 그의 불만은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필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다고 본다. 즉, Hume은 '자아의 동일성'에 관하여 Newton의 모델을 취하여 자신의 이론을 전개했으나, Newton의 중력 모델에서의 '인력'이라는 개념과 '기억'이라는 역할이 자아의 문제를 충분히 해명할 수 없는 것 같다고 「부록」에서 생각했다. 이제 필자는 이와같은 흄의 불만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고 본 논문의 논의를 끝맺고자 한다.



V. 결론

앞서 필자는 Hume에게 비일관성을 부여하는 사람들은 연합에 관해 Newton적인 모델과 Kant적인 모델 사이에서 Hume이 갈등을 겪었다고 해석한다는 것을 소개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은 근거가 없으며, Hume이 연합에 관한 어떤 입장을 취했다면 그러한 것은 Newton적인 모델이라는 것도 소개했다. Hume이 Newton적 모델을 끝까지 고수했다면, 그가 비일관성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부록]에서의 그의 불만은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필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다고 본다. 즉, Hume은 자아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Newton의 모델을 취하여 자신의 이론을 전개했으나, Newton의 중력 모델에서의 '인력'이라는 개념과 '기억'이라는 역할이 자아의 문제를 충분히 해명할 수 없는 것 같다고 [부록]에서 생각했다. 그러나 이때의 불만은 자아의 동일성 문제와 관련한 것이 아니라 자아의 활동성과 관련된다.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 듯이 (비록 Hume은 그러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가 마음(혹은 때때로 "상상")에 어떤 활동성(activity)을 부가했다면, 그러한 활동이 바로 마음 혹은 자아라는 믿음을 발생시키거나, 자아에 대한 의식을 생기게 함으로써 어려움을 초래하게 된다. 그는 그 주제에 관해 관찰하고, 인식하고, 연합하고, 믿고, 상상하는 등등의 활동들로부터 발생하는 습관들, 마음의 습성들, 그리고 기대하는 마음들에 관해서 말한다. 그런데 그와 같은 언급은 자아의 존재와 그 존재에 의해 우리가 관념을 가진다는 것을 이미 전제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인성론]의 지각다발로서의 자아 이상의 어떤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Hume은 자아의 동일성을 설명하는데 있어 지속적인 관념이 어떻게 생기는지를 경험적인 설명을 통해서 제시한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적 설명은 정신적 성향, 즉 자아의 활동성을 전제하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활동성은 그러한 활동성의 주체로서 동일한 자아를 전제하는 듯이 보인다. 그렇다면, 자아의 동일성에 관한 Hume의 설명에 순환성의 비난이 가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와같은 비판으로부터 Hume이 옹호될 수 있다는 것과 그러한 순환성은 겉으로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논의하고자 한다. 이러한 것은 [인성론]의 두가지 특징들로부터 비롯된다.

1) [인성론]에서 Hume은 상이한 관점에서 상이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외부대상이나 인과관계를 다룰 때는 자아가 그 단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므로 Hume은 그것에 관해 언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때에 자아는 전제된 듯이 보일 수 있다.

2) 순환성의 현상의 부담을 지는 두번째의 특징은 Hume이 "완전한" 동일성과 "불완전한" 동일성간에 구별은 했지만, 충분히 명시적인 구분을 하지 않아서, 그 결과로 우리는 자아를 부정하게 될 때 그때의 동일성은 오직 전자의 종류의 동일성이고, 후자의 종류의 동일성은 Hume의 경험주의 노선을 따라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는 아주 중요한 점을 쉽사리 간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자아의 동일성과 자아의 활동성(activity)을 동일시하는 그의 설명은 순환론이 아니라는 것과, 자아의 존재를 설명하면서, 그러한 허구적인 것에 활동성을 부가하는 것은 결코 불합리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자아의 동일성에 관하여'란 장에서 Hume은 자아에 관해 우리가 의식한다고 하는 주장을 두 가지로 분리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 두 가지의 반박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두가지 반박은 자아의 완전한 동일성과 관련된다. Hume이 그와 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즉, 항상적이고 불변적인 지각으로서의 자아가 있다는 것은 완전한 동일성을 갖는 자아가 있다는 것이고 이러한 것은 1)-i) 경험을 통해 발견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1)-ii) 그리고 개념적으로 모순이라는 의미에서 거짓이라고 Hume은 주장한다. 그리고 2) 연속적인 지각으로서의 자아가 있다는 주장에 대해 Hume은 우리 경험의 불연속성을 근거로 허구적인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Hume에게서 자아란 어떤 것인가? Hume이 자아의 인상이 없다는 주장을 통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앞서 필자는 [인성론]에서 Hume의 자아이론을 소개할 적에 지각다발로서의 자아에 관해 말했었다. 그렇다면 Hume의 이론에 따르면 상이한 지각다발로서의 자아는 어떠한 것인가? 이상에서의 검토를 종합해 본다면 그러한 자아는 불완전한 동일성을 갖는 자아라고 볼 수 있다. 만일 우리 자신이 불완전한 동일성을 갖는 존재라고 할수 있다면, 이때 우리가 불완전 하나마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앞서 우리는 지각다발로서의 자아의 동일성을 설명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기억이라는 것을 검토했었다. 이러한 것을 우리가 상기한다면 기억이라는 것이 불완전한 동일성의 토대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즉 기억은 자아의 동일성을 설명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록]에서의 Hume의 불만은 기억이라는 것이 자아의 동일성을 설명하는데 난점을 갖기 때문이라기보다 기억이 자아의 활동성이란 부분을 충분히 해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즉 기억이라는 개념은 지각들의 다발이 활동성의 주체라고 말할수 있기 위한 토대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것이 Hume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아의 동일성과 관련하여 Hume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지각들의 동일성이고 이와 관련해서는 연결이 문제되지 활동성이 문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아의 동일성 문제는 기억만으로도 충분히 해명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Hume은 제삼의 주체의 도움없이도 기억과 Newton의 인력이라는 개념으로 지각들의 연합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기억과 인력은 마음 혹은 자아가 갖는 다양한 지각들을 결합하는 접착제가 되는 것이며, 분리된 존재들 사이를 이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Hume이 자신의 이론이 아닌 다른 어떤 이론을 염두에 두었고, 그리하여 그 이론이 자신의 문제를 더 잘 해명할 수 있으므로 자신의 이론을 포기하려고 했다고 해석해서는 안될 것이다. Hume은 어떤 이론이 자신의 이론 보다 더 낫고, 그리하여 그 이론이 자신의 이론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만일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러한 해석은 Hume 이후의 어떤 이론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러한 이론을 염두에 두고 Hume을 해석하기 때문일 것이다. Hume은 [인성론]의 결론에서 미래에 자신의 이론보다 인간의 현상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나오기를 기대한다고 하면서, 그런 측면에서 '자아의 동일성'에 관한 문제는 전망이 있다고 말했다. Hume은 인간에 관한 현상이나 세계를 설명하는데 있어 어떤 도그마를 내세우는 것은 그 자체로 회의주의의 공격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러한 Hume의 입장과 관련하여 그의 회의주의를 이해할 수 있다. Hume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믿음들에 대해 그것이 이성적으로도, 감각적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점에서 회의주의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는 실천의 영역에까지 회의주의를 적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합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서, 실제로 아무것도 믿지 않고, 판단을 하지 않으며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연(본성)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행위하지 않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따라서 이점에 있어서 Hume의 회의주의는 완화된 측면을 지니며, 이러한 바탕하에 그의 적극적인 이론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철학의 적극적인 프로그램은 왜 인간이 현재와 같이 믿고, 사유하고, 행위하는가를 발생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자연적 신념을 정당화 하는 것이다.

'자아의 동일성 문제'를 이러한 것에 적용하면, 우리는 실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관념을 이해할 수 없지만(unintelligible),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인들은 지속적이고 불변하는 자아에 대한 거짓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그러한 믿음에 대해 합리적 근거를 댈 수는 없지만 그들이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Hume은 자아가 실체라는 거짓된 주장을 하는 철학자들에게는 그 개념이 이해불가능하다(unintelligible)는 점에서 개념적 회의주의를 취하는 반면, 일상인들의 잘못된 믿음에 대해서는 합리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인식론적 회의주의의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Hume은 이러한 회의주의를 실천에까지 적용하지 않는다. 즉, 일상인들의 믿음은 합리적 근거가 없긴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우리는 믿음없이,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고,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왜 그런 믿음을 갖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그의 인간학의 적극적 프로그램이 된다.

'자아의 동일성' 문제에 관해 일상인들의 믿음을 정당화하는 근저에는 Hume이 동일성에 관해 두가지의 구분을 하고 있음을 우리는 주지해야 한다. 즉, 그는 불완전한 동일성과 완전한 동일성을 구분하고 있다. 철학자들이 자아라는 실체를 상정하여 자아의 동일성을 설명할 때, 그때의 동일성은 완전한 수적 동일성(numerical identity)인 반면에, 일상인들이 믿는 동일성은 불완전한 동일성이다. Hume이 일상인들의 자아의 동일성에 관한 믿음을 정당화 할 때, 이때의 동일성은 물론 불완전한 동일성이다. 그리고 Hume이 자아의 동일성과 관련하여 동일성을 거부하는 것은 이러한 완전히 수적인 동일성이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Hume이 그의 경험주의 이론 내에서 자아의 동일성을 설명할 수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외부세계, 인과관계를 설명하는데 있어 지속적 현존, 필연적 연결과 같은 것이 허구적인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지각다발 이상인 허구적인 자아에 의존한다는 순환논증이 Hume에게 왜 적용될 수 없는 지를 쉽사리 알 수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허구들을 산출하는 자아는 비록 지각들에 불과한 것으로 구성된 것이라 할지라도, 특별히 그것은 그러한 지각들 이상의 어떤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한 지각들 이상의 어떤 것이란 완전한 동일성을 소유하는 지속적인 자아이다. 허구적인 것은 바로 이 후자(완전한 동일성을 소유하는 지속적인 자아)이다. 자아인 이러한 집합들의 완전한 동일성은 McIntyre의 제한된 의미에 있어서 조차도, 어떤 지각의 완전한 동일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완전한 동일성과 불완전한 동일성간의 구별을 진지하게 다룬다면, 우리는 엄밀히 말하면 순간순간 다르지만, 그래도 그 다른 순간들에 동일하다는, 그리고 지각들의 덩어리들의 다양한 연속물들에 의해 구성된 하나의 동일한 자아가 있다고 말하게 된다. 그리하여 어떤 성향들과 상상이 만들어낸 활동들이 외부세계, 외부세계의 물질적 대상들, 그리고 그것의 인과적 연결들에 대한 믿음들을 산출하도록 작동하는 것은 이러한 하나의 자아라는 일상적인 어법과 우리의 상식적 믿음이 비일관적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Hume이 말하고자 한 바는 마음들은 이와같은 것들 즉, 엄밀히 말하면 순간순간 다르지만, 그래도 그 다른 순간들에 동일하며, 그리고 지각들의 덩어리들의 다양한 연속물들에 의해 구성된 하나의 동일한 자아인, 그러한 것들이며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어떤 믿음들이 있다고 계속해서 말하게끔 하는 그런 것이다. 그리고 Hume은 우리가 그와 같은 허구를 믿게되는 이유를 설명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속적 자아라는 믿음에 대한 설명과 다른 믿음들을 설명할려면 불완전하게 동일하긴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genuine) 자아가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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