흄의 전략적 회의주의와 철학적 유신론
이준호(동의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
목 차
머리말
1. 지각 분석과 전략적 회의주의
2. 계시 종교에 대한 인식론적․실천적 비판
3. 자연 종교의 기획 논증에 대한 비판
4. 흄의 철학적 유신론과 Logos와 Power로서의 신
맺는말
머리말
흄의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Dialogues concerning Natural Religion, 이하 <대화>) 제1부는 <대화>의 등장 인물들 중 필로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과학과 심오한 탐구에 문외한들인 일반인들은 학계의 끝없는 논란을 목격하고는 공통적으로 철학을 철저히 경멸하며, 자신들이 교육받은 유신론(theology)에 더욱 집착한다. 학문 연구에 갓 입문한 사람들은 학설들의 증거들이 새롭고 특이하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인간 이성에 지나치게 어려울 것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모든 장벽을 넘어 사원의 가장 성스러운 곳마저 침해한다.” 그런데 이 책은 12부에서 “학식있는 사람의 경우에 참된 철학적 회의주의자가 되는 것은 건전한 믿음을 갖는 기독교인이 되는 일차적이고 가장 본질적인 단계이다”라고 끝맺는다. 참된 철학적 회의주의자가 참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또 흄에게 있어서 왜 참된 철학자는 참된 회의주의자인가?
서양 철학사에서 흄이 회의주의자 또는 무신론자로 분류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지만 흄의 회의주의가 그의 철학 체계 전체에서 근본적 귀결이었는지에 대해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금세기에 들어서 흄을 회의주의자라기보다는 자연주의자로 해석하는 입장 역시 강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이와 같은 흐름을 신의 문제에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흄은 궁극적으로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기보다 기독교의 초월적 인격신의 존재를 회의주의를 통해 부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근대 이신론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 자연 신학에서 자연의 질서로부터 유비적으로 도출된 그 질서의 기획자로서 정신적 존재인 신을 흄이 옹호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필자가 ‘흄이 옹호하는 듯한 신’이라고 말한 것은 흄이 신의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적극적으로 논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흄이 자신의 주저인 <논고>나 <대화> 등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긍정한다는 점은 확실하다. 흄이 문제삼는 것은 신의 존재가 아니라 신의 본성이다. 흄은 <대화>에서 신의 본성에 관한 다양한 견해들을 비판적으로 논의하지만 자신의 견해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흄은 <논고>의 ‘초록’에서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회의주의자의 특권을 내세운다. 따라서 흄의 신 개념은 서양 근대라는 시대적 상황과 학문의 관계 및 방법론 등을 추정 근거로 삼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가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회의주의적으로 대응한다고 할 때, 그 회의주의는 어떤 성격인지부터 살펴보는 것이 편리하겠다.
1. 지각 분석과 전략적 회의주의
흄은 사실의 진리와 논리적 진리를 구별하기 위해 지각을 인상과 관념으로 구분한다. 지각은 그 형태에 따라 단순 지각과 복합 지각으로 구분된다. 이때 흄이 단순 지각과 복합 지각을 구분하는 것은 경험적 사실의 진리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 이미 로크가 먼저 주장했지만, 모든 인식의 기원을 경험이라고 했을 때, 감관을 통해 경험되는 것은 모두 복합 지각이며, 감각 경험 자체를 통해 주어지는 단순 지각은 없다. 단순 지각은 지각들에 대한 비교 과정에서 같음과 다름에 따라 구분되고 분리된 결과이다. 다시 말해서, 단순 지각은 감관을 통해 주어진 지각들을 이성이 비교함으로써 구별하고 분리한 결과이다. 따라서 단순 지각이라는 것은 비교를 통한 분석의 산물이다. 이때 이성은 상상력과 동일한 의미이다.
상상력은 서로 다른 단순 지각들을 임의로 분리하고 결합할 수 있는 자유를 갖는다. 그런데 상상력은 감각 인상들을 자유롭게 분리하고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념들을 분리하고 결합한다. 그렇지만 상상력에 의해 단순 관념들이 분리되어 재결합되지 않은 상태의 감각 관념, 즉 감관을 통해 주어진 인상을 그대로 모사하여 원래의 복합 인상의 구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관념도 있다. 여기서 흄 철학의 두 원리를 확인할 수 있다. 흄 철학의 두 원리는 ‘모든 관념은 인상의 모사이며, 인상은 그 대응 관념에 선행한다’는 흄 철학의 제1원리와, ‘상상력은 복합 관념을 단순 관념으로 분리하여 자유롭게 결합할 수 있다’는 상상력의 자유에 관한 제2원리 등이다.
흄은 이처럼 인상이 관념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기억과 상상 등 두 측면에서 구별함으로써 사실과 허구를 구별한다. 우리가 갖는 다양한 관념들의 기원이 인상이라고 할 때, 그 기원으로 환원될 수 있는 관념은 적어도 사실에 기초를 둔 것이므로 그 관념은 사실에 대해 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인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관념은 상상력의 자유로운 작용을 통해 형성된 허구적 관념이다. 이런 점에서 흄은 진리 대응설을 옹호하거나 실증주의나 환원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흄이 인식 내용에 대한 당시의 구분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는 점이다. 당시 램지(A. M. Ramsay)나 박스터(A. Baxter) 및 크로우사츠(J. P. Crousaz) 등은 인식 내용을 실증(proof)과 개연성(probability) 그리고 논증(demonstration) 등으로 구분했다. 이와 같은 구분에 대해 흄은 감각 경험의 확실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실증이라는 것도 사실은 개연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인식 내용을 개연성과 논증의 영역으로 양분한다. 이것을 흔히 Hume‘s Fork(A. Flew), 또는 Hume‘s Dichotomy(J. Bennett)라고 한다.
인식 내용에 대한 이런 분류는 사실 문제에 관한 진리와 논리적 진리를 구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흄의 경우에 순수한 논리적 추론이라고 하더라도 그 추론이 사실 문제에 적용되는 한, 그 추론은 사실들의 변화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논리적 진리 역시 사실 문제에 적용된다면 개연성을 넘어설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당시까지 논증을 통한 필연적 진리로 이해되었던 기하학적 진리 역시 그 기준의 문제 때문에 개연성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흄은 사실 문제에 관한 한, 경험적 방법이나 논증적 방법 중 어느 것으로도 진리에 이를 수 없다는 결론이 이른다.
흄은 이성과 감관 모두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통해 퓌론적 회의주의에 도달한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서 이런 퓌론적 회의주의는 옹호될 수 없다. 자연적 존재로서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숨쉬고 느끼듯이 추론하고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추론 결과는 개연성을 확보하는 데에서 그친다. 이것은 인간 이성의 운명이기도 하다. 즉 일상 생활에서는 확실성과 필연성이 확보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성은 단지 의심의 근거들보다 신념의 근거들이 강하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논고> 제1권의 논지 중 한 가지인 이 아카데미적 회의주의는 경험이나 이성에 대한 맹목적 확신을 비판한다. 이것은 종교의 측면에서 경험과 무관하게 논증만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선험적 증명에 대한 비판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에 유행하던 이신론의 경험적 증명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비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종교의 본질을 드러내는 전략이라는 점에서 참된 종교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계시 종교에 대한 인식론적․실천적 비판
<대화>는 참된 종교의 본성을 모색하는 흄의 철학적 여정이다. <대화>의 등장 인물들 중 데미아와 클리안테스는 신의 존재를 옹호하고 그 본질을 규정하는 기존의 다양한 입장들을 대변하며, 필로는 회의주의를 하나의 전략으로 그와 같은 방법과 견해를 비판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클리안테스와 필로가 서로에 대해 우정어린 충고로 <대화>를 마무리하는 것으로 미루어, 흄은 필로와 클리안테스 두 인물의 대립 과정을 통해 참된 종교의 본질을 드러내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종교 문제에 대해 철저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필로 역시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을 제기하지 않는다. 다만 필로가 끊임없이 논박하는 것은 데미아와 클리안테스가 제시하는 신의 본성이다.
데미아는 필로와 함께 회의주의자이지만, 그는 전면적 회의주의를 근거로 신비주의의 초월적 신관을 옹호한다. 이신론자인 클리안테스는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경험적 유비를 통해 신인동형동성설(Anthropomorphism)을 옹호한다. 데미아와 클리안테스의 이런 입장은 각각 18세기의 계시 종교와 자연 종교를 대변한다. 특히 클리안테스의 입장은 근본적으로 추리를 통해 자연으로부터 신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보는데, 이것은 자연 과학의 성과에 자신감을 얻은 인간 이성 자신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전제로 한다.
신의 존재와 본성에 대한 선험적 논변과 후험적 논변은 클리안테스와 데미아 등의 견해에서 모두 나타난다. 먼저 신의 존재와 본성에 대한 이들의 선험적 논변과 이에 대한 필로의 비판부터 살펴보자.
계시 종교를 옹호하는 데미아는 회의주의를 통해 신 존재의 초월성과 무한성을 옹호한다. 이 계시 종교는 기적과 예언을 기초로 한다. 즉 기적의 원인과 예언의 근거로 신의 존재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자연 법칙에 위배되는 기적과 계시에 기초를 둔 예언은 이성으로 해명될 수 없다. 만일 기적과 계시에 기초를 둔 예언이 이성으로 해명될 수 있다면, 그것은 기적도 아니고 계시에 기초를 둔 예언도 아니다. 따라서 이들 계시 종교를 옹호하는 것은 인식론적 회의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필로는 이와 같은 데미아의 입장에 언뜻 동조하는 듯하다. 그런나 필로는 클리안테스와 함께 계시 종교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필로와 클리안테스에 따르면, 데미아가 옹호하는 계시 종교는 입장이 야비하고 무식한 회의주의(brutish and ignorant scepticism)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와 같은 회의주의는 ‘넘어지면 다칠 수 있다’는 가능성조차 의심하는 전면적 회의주의이다. 이 전면적 회의주의 때문에 일반인들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 편견을 가지며, 정교한 추론이나 증명이 필요한 모든 원리를 거부하게 된다. 또 이런 종류의 회의주의 때문에, 사람들은 유신론(theism)이나 자연 신학(natural theology)의 진리 뿐만 아니라, 전통적 미신(a traditional superstition)의 터무니없는 교의에도 동의한다.
진리에 대한 어떤 정당화 기준도 없다는 퓌론적 회의주의자들의 주장을 이용하여 허구적인 것들에 대한 믿음마저 정당화하려고 시도하려는 것이 계시 종교 옹호론자들이다. 예컨대 계시 종교에서는 ‘마녀’의 존재를 믿지만, 정교한 논증을 통해 추론된 유클리드의 정리는 믿지 않는 인식론적 무정부 상태를 초래한다. 이 인식론적 무정부상태에서 “미신은 그것 고유의 세계를 열어 젖히고,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풍경과 존재 그리고 대상들을 제시한다.”
이런 세계관의 기초는 인식이 아니라, 정념이다. 즉 “공포의 상태에 처해 있는 사람은 종교적인 것에서 쾌락을 얻으며, 가장 참담하고 암울한 정념을 들뜨게 할 수 있는 사람보다 인기있는 설교자는 없다. 우리가 일상적 대상의 구체적 실재성을 느끼며 바로 이러한 실재성을 통해 살아가는 일상사에서 두려움과 공포보다 더 불쾌한 것은 있을 수 없다. 두려움과 공포라는 이 정념들은 오직 희극 공연이나 종교적인 설교에서만 항상 쾌감을 제공한다. 이 후자의 경우에 상상력은 게으르게도 관념 위에 잠들어 있다. 대상에 대한 신념이 결여됨으로써 나약하게 된 정념이 갖는 호의적인 결과는 정신에 생기를 불어넣고, 주의력을 속박하는 것뿐이다.”
이와 같은 계시 종교는 칭찬과 비난을 대중없이 만들어냄으로써, 실천적 측면에서 인간을 비굴하고 나약하게 만들어 노예 상태로 전락시킨다. 일반적으로
용기, 대담, 야망, 영예에 대한 사랑, 도량 및 그밖에 빛나는 이와 같은 종류의 모든 덕은 분명히 그 덕들 사이에 자부심을 강하게 뒤섞고, 그 가치의 대부분을 (자부심이라는) 기원에서 끌어낸다. ․․․ 종교계의 많은 변론가들은 이런 덕을 완전히 무종교적이고 미개하다(natural)고 공공연히 힐난하며 기독교의 탁월성을 우리에게 설명하고, 기독교는 소심(humility)을 덕의 반열에 넣고 세상 사람들의 판단을 수정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긍지와 야망의 모든 업적을 아주 일반적으로 찬양하는 철학자들의 판단까지 수정한다.․․․ 소심이라는 이 덕이 제대로 이해되었는지 여부는 내가 감히 결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 인용문에서 흄은 소심의 의미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대화> 제12부에서는 완전하고 영원한 지고의 절대적 존재인 신을 연약하고 불완전하며 변덕스러운 인간 존재와 대비시키며 미신은 강한 자에 대한 나약한 자의 복종을 의미하며, 이런 복종을 종교에서의 덕이라고 한다.
흄에 따르면, 이와 같은 종교의 오류는 관심의 일탈과 천박함 가치관을 제시함으로써 정의와 인간성이라는 자연적 동기에 대한 사람들의 애착을 극도로 약화시킨다. 따라서 이런 종교가 지배적일 때, 그 결과는 끝없는 논쟁와 싸움 그리고 당쟁과 박해나 시민 폭동 등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흄은 필로의 입을 빌어 참된 종교가 이처럼 유해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다고 한다. 흄이 말하는 참된 종교에 대해서는 이 글 4장에서 언급할 것이다.
3. 기획 논증에 대한 비판
<대화>에서 논의되는 신 존재에 대한 기획 논증은 후험적이지만, 라이프니쯔의 선험적 기획 논증에 대해서도 흄은 비판적이다. 세계가 신의 의지에 따라 조화롭게 결정되어 있다는 라이프니즈의 변신론도 세계의 질서와 변화 과정에 나타난 인과적 제일성과 합목적성을 근거로 세계에 대한 신의 기획을 옹호하는 논증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선험적 기획 논증이라고 할 수 있다.
선험적 기획 논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적 신 존재 증명에서 유래된 것으로 오랜 전통을 갖는다. 이 선험적 기획 논증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세계는 우연적 사실들의 무한한 연속적 계열을 포함한다.
(2) 이성의 진리는 환원적 분석을 통해 무모순율에 따르는 필연적 진리이다.
(3) 우연적 사실들의 무한한 연속적 계열은 최초의 원인을 그 계열의 외부에 갖는다는 것은 필연적 진리이다.
(4) 이 최초의 원인은 자기 원인적․자기 의존적 존재로서 자기 이외의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5) 자기 원인적이며 자기 의존적 존재인 신은 단순하고 완전하며 절대적 존재이다.
(6) 물체는 동력인에 따라 운동하고 정신들은 목적인에 따라 작용하지만, 신의 피조물인 동일한 하나의 세계에 대한 표상들이므로 조화를 이룬다.
(7) 이 조화의 원리는 이 세계의 건축가인 신에 의해 예정된 것이다.
(8) 따라서 이 세계의 질서를 예정한 존재는 신이고, 사물은 자연의 흐름에 따라 저절로 신의 은총으로 나아간다.
이와 같은 선험적 기획 논증은 라이프니쯔가 이성의 진리와 사실의 진리를 구별하면서도 신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사물은 신의 계획에 따라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변신론에 기초를 둔 것이다. 이에 대해 흄은 이성의 진리(논리적 진리)는 그 자체로 필연적일 수 있지만, 논리적으로 필연적이라고 하더라도 사실문제에 적용될 때에는 우연적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흄은 단순한 것이 불가분적이라고 하더라도, 단순 지각도 창조주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소멸된다고 주장함으로써 라이프니쯔의 단자와 신의 관계를 부정한다. 이것은 이성주의자들처럼 단순한 것에 대한 의미 분석을 통해 무한성이나 완전성 또는 불변성을 추론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원인에 대한 지나친 탐구를 자제하는 것이 철학적 회의주의 다시 말해서 참된 철학이라는 흄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라이프니쯔는 선험적 기획 논증뿐만 아니라, <단자론> 후반부에서 후험적 기획 논증도 제시한다. <대화>에서 라이프니쯔와 유사한 후험적 기획 논증이 클리안테스의 입을 빌어 제시되고 필로에 의해 비판된다. <대화> 제2부에 제시된 클리안테스의 후험적 기획 논증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무질서하게 흩어진 건축 자재들은 건축물이 아니다.
(2) 건축물을 완성하기 위해서 건축 자재들을 일정한 방식으로 구성하는 것이 있 어야 한다.
(3) 그런데 건축 자재들을 배열하는 구조는 건축가의 정신에서 나온다.
(4) 따라서 건축물이 존재하므로 건축가의 정신도 존재한다.
(5) 자연에는 많은 사물들이 존재한다.
(6) 자연의 만물들은 일정한 질서로 배열되어 운동하고 변화한다.
(7) 유사한 결과는 유사한 원인에서 나온다.
(7)’ 사물들을 일정한 질서로 배열하여 운동하고 변화하도록 하는 것은 정신이다.
(8) 그러므로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여 일정한 방식으로 자연이 운동하고 변화하 도록 한 정신이 존재한다.
(9) 자연에 질서를 부여한 것은 지고의 존재인 신이다.
(10) 그러므로 신은 정신이다.
위와 같은 후험적 기획 논증에 대해 필로는 클리안테스가 제시한 유비적 사례들은 자연의 일부분이며, 인간의 의도에 따라 기획된 것들에 불과하다는 점을 들어 이 기획 논증을 논박한다. 즉 인간의 의도에 따라 기획되고 제작된 것은 자연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주가 건축물과 닮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유비적 근거는 약하다. 우주의 질서에 대한 기획자로서 정신의 존재를 막연히 추측(presumption)할 수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후험적 기획 논증은 확실성이 거의 없다.
<대화> 제2부는 필로가 클리안테스에게 기획 논증에 대한 경험적 정당화를 요구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후험적 기획 논증에 대한 흄의 이 비판은 우주의 기원에 관한 경험이 없다는 데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 비판의 근거는 모든 지각의 기원은 감각 인상이라는 흄 인식론의 제1원리이다. 이를 미루어보더라도 흄의 제1원리는 그의 사상 전반에 걸쳐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클리안테스는 <대화> 제3부에서 인위적으로 제작된 것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물들이 일정하게 질서지워진 구조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특정 동물의 신체는 그 종이 살기에 적합한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구조로 기획한 존재를 정신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반박한다. 물질적 세계가 그와 유사한 관념적 세계에 좌우된다면, 즉 물질적 세계의 원인이 관념적 세계라면, 이 관념적 세계의 원인은 무엇인가? 나아가서 이 관념적 세계의 원인을 지고의 존재인 정신이라고 한다면, 그와 같은 정신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 원인에 대해서 더 이상 물어서 안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추론 방식은 무한 소급에 빠질 수 밖에 없다. 클리안테스의 후험적 기획 논증에 대해 필로는 로크(J. Locke)의 ‘인디언 철학자와 코끼리 사례’로 반박한다.
또 <대화> 제4부에서 우주의 기획자로서 신을 인간의 정신과 유사한 정신이라고 하더라도 무신론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비판한다. 실제로 이것은 흄의 <논고> 제2권에서 논의된 인간 정신에 대한 분석을 기초로 하고 있다. 즉,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인간의 정신은 두뇌의 생리적 작용이며, 그 결과로 파생된 감사․분노․사랑․미움․찬동․부인․연민․질시 등 다양한 정념들로 구성된 복합체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이 정념들의 역학 관계에 따라 발생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 신체의 해체에 따라 인간 정념들도 소멸하고 해체됨으로 인간의 정신도 사멸하게 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복합체로서의 사멸적인 정신을 이른바 단순하고 불멸적인 정신, 또는 최고선으로서의 영원한 정신인 신과 비유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불경스러운 무신론이 이르게 된다.
흄의 근본적 입장이기도 한 필로의 이런 비판에 대해 클리안테스는 <대화> 제4부에서 어떤 사고 작용이나 의지 또는 정념도 없는 순수 정신의 존재를 제안한다. 그러나 필로는 이미 정신이라는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의미 분석을 통해 정신이 다양한 지각들의 다발일 뿐이라는 것을 논변하고 있는 것이며, 순수하고 불가분적인 단순한 정신에 대한 어떤 예증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 대한 클리안테스의 반박은 없다.
필로의 비판에 따르면, 데미아가 옹호한 계시 종교의 신과 클리안테스의 신은 다를 바가 없다. 즉, 데미아와 클리안테스는 모두 적어도 야비하고 무지한 인식론적 회의주의를 발판으로 각각 자신들의 신을 구성해낸다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신 개념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개연성조차 가질 수 없다. 자연의 만물이 일정한 질서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그렇게 자연을 구성한 정신의 존재를 타당하게 추론할 근거나 방법은 결코 없다.
데미아와 클리안테스 어느 입장이든, 이런 방법으로 신의 본성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모두 그와 같이 시도하는 당사자의 신만을 정당한 유신론적 신으로 파악한다. 이것은 그밖의 모든 신 개념은 무신론이라고 부정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다. 따라서 이와 같은 논증을 시도하는 모든 호교론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지도 못하면서 다른 논증은 무조건 부정하는 독단의 늪을 헤어날 수 없다. 이와 같은 독단들은 실천적 측면에서 편파성의 원천으로써 시민 전쟁과 박해, 내란, 억압과 굴종 등과 같은 맹목적 미신들의 유해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 결과들은 ‘잘 살고 싶다’는 인류의 보편적인 실천적 욕망에 반하기 때문에 유해하다.
<대화> 제3부에서 필로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경험의 한계 안에서의 신 개념을 파악할 것을 제안한다. 이것은 계시 종교와 자연 종교, 특히 자연 종교의 이신론적 호교론 중에서 선험적 기획 논증과 후험적 기획 논증이 갖는 한계와 실천적으로 유해한 결과 등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된다. 이런 필로의 신 개념을 자연주의자들이 말하는 철학적 유신론의 신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4. 흄의 철학적 유신론과 Logos와 Power로서의 신
지금까지 흄이 동시대까지의 계시 종교와 자연 종교의 이신론을 인식론적 측면과 실천적 측면에서 비판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와 같은 비판의 전략은 퓌론적 회의주의였고, 그와 같은 종교관들이 ‘잘 살고 싶다’는 인간의 보편적인 실천적 욕망에 반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흄은 철학적 유신론을 제안한다.
기존 종교에 대한 흄의 비판이 인식론과 실천 철학의 측면에서 진행되었듯이, 그의 철학적 유신론은 인식론적 측면과 실천적 측면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리고 실천적 측면에서 철학적 유신론의 기초는 인식론에서 철학적 유신론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인식론적 측면에서 흄의 철학적 유신론을 먼저 살펴 본 다음에, 실천적 측면에서 흄의 철학적 유신론을 살펴보겠다.
이 글 3절 말미에서 밝혔듯이, 흄은 계시 종교와 당시의 자연 종교 모두에 대한 인식론적 대안으로 경험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를 제안한다. 이에 따라 흄은 신의 개념도 경험의 한계 안에서 파악할 것을 제안한다. 다소 길겠지만, 흄이 필로의 입을 빌어 자신의 철학적 유신론을 제안하려는 <대화> 제4부의 다음 구절을 직접 인용하여 검토해보자.
인디언 철학자와 그의 코끼리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이 이야기는 이 주제에 가장 잘 어울릴 것이다. 만일 물질 세계가 (물질 세계와) 유사한 관념 세계에 의존한다면, 이 관념 세계는 반드시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할 것이고, 이 의존 관계는 끝없이 이어진다. 따라서 현재의 물질 세계 밖으로 눈길을 돌리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물질 세계가 그 자체 안에 그 질서(를 규정하는) 원리를 포함하는 것으로 가정함으로써, 우리는 물질 세계를 신이라고 쉽게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신적 존재에 빨리 도달할수록 더 좋다. 그대가 경험적 우주의 체계(mundane system)를 한 걸음만 넘어서면, 그대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호기심 강한 기질(inquisitive humour)에 휩싸일 뿐이다.
최고 존재의 이성을 구성하는 상이한 관념들이 스스로 그 본성에 따라 질서지워진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엄밀한 의미없이 말하는 것이다. 만약 그 말이 어떤 의미를 갖는다면, 물질 세계의 부분들이 스스로 그 자신의 본성에 따라 질서지워져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와 같은 의미가 없다는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꼭 알고 싶다. 전자의 견해를 이해할 수 없지만, 후자의 견해를 이해할 수는 없을까?
사실 우리는 알려진 어떤 원인도 없이 스스로 질서지워진 관념들을 경험한다. 그러나 확신컨대, 생식과 성장의 모든 사례들에서 그처럼 질서지워진 물질들을 더욱 많이 경험한다. 이 경우에 그 원인에 대한 철저한 분석은 인간의 모든 이해력을 넘어서게 된다.
이 인용문에 담긴 ‘물질 세계를 신이라고 쉽게 주장할 수 있다’는 구절은 당시의 일반적인 신 개념에 비추어 아주 혁신적인 것이며, 신의 존재를 정신이나 이성의 맥락에서 파악하려던 입장에서는 무신론자들의 궤변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위의 인용문을 흄의 근본적 입장으로 보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논고>에서 흄이 정신과 신체의 구분을 거의 무시할 뿐만 아니라 정신의 지각들의 자율적 체계로 파악하면서 그 기원을 신체의 감각 작용에 두기 때문이다. 그리고 흄은 <대화> 제2부와 제7부 등에서 필로의 입을 빌어 정신을 두뇌의 생리적 작용이라고 하는데, <논고>에서도 정신 작용을 두뇌의 생리적 작용으로 파악하는 부분들이 여러 곳에 있기 때문이다. 또 흄에 따르면, “참된 철학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원인에 대하여 탐구하려는 지나친 욕망을 자제하는 것, 그리고 충분한 실험에 따라 어떤 이론을 정립하면서 더 이상의 연구가 그를 어렴풋하고 불확실한 사변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에 만족하는 것 등이다.”
참된 철학에 대한 흄의 이 같은 견해는 클리안테스가 물질 세계의 원인을 그와 유사한 관념의 세계로 파악하려는 것이 어렴풋하고 불확실한 사변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점을 필로가 비판하는 것과 일치한다. 그리고 흄이 이와 같은 사변을 그 원인에 대한 지나친 탐구욕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하고 경험적 우주 안에서 그 원인을 파악하려고 시도하는 점에서도 필로와 일치한다. 이 때 경험적 우주라는 것은 다름 아닌 물질 세계를 의미한다.
위의 인용문에서 필로는 ‘물질 세계의 부분들이 스스로 그 자신의 본성에 따라 질서지워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하면서, 다음 단락에서 이 명제는 경험적으로도 상당한 개연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상당한 개연성을 가지며 반례를 찾기 어려운 이 명제를 넘어서 사변에 빠질 필요는 없다. 이것은 <논고> 전체에 일관된 하나의 원리이다. 이런 점에서 자연을 구성하는 사물들과 사물들의 운동과 변화의 원리 속에서 신의 모습을 파악하려는 필로의 입장이 흄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흄은 <논고> 제1권에서 형이상학적 회의주의에 대한 반론을 논적도 없이 논란을 벌이는 쓸데없는 사변으로 몰아붙이며 자연의 원리에 따를 것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자연은 절대적이고 불가항력적인 필연성으로 우리가 숨쉬고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판단하도록 결정했다. 우리가 깨어 있으면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할 수 없고, 밝은 햇빛 속에 있는 주변 대상으로 눈길을 돌리면서 그 대상들을 보지 않을 수 없듯이, 어떤 대상들이 현전하는 인상과 습관적인 연관을 갖는다면 더욱더 강력하고 충분한 빛 속에서 그 대상들을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전체적 회의론(total scepticism)의 트집을 반박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누구든지 실제로는 논적(論敵)도 없이 논란을 벌였으며, 자연이 미리 정신에 심어두고 피할 수 없도록 했던 직능을 논변을 통해 확정하고자 애쓴 것이다.
흄은 <논고>의 ‘서문’에서 철학적 회의를 치유하고 개선하는 것은 자연 종교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논고> 제1권 4부 1절에서는 독단적 이성과 회의적 이성의 대립이 실제로는 이성의 필요없는 사변에서 유래된 질병이며, 이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자연이라고 주장한다. 이 때 자연이라는 것을 사실들의 체계, 즉 경험적 우주의 체계(mundane system)이며, 이 생동하는 거대한 체계가 하나의 신이라는 것이다. 이 자연의 체계는 자기 원인에 의해 스스로의 질서에 따라 존재하며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흄이 인식론적 비판 과정을 통해 확보한 결과는 사실 문제에 관한 인식은 개연성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신의 본성에 관한 사실 인식의 문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런 입장에서 신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에 대한 지식이 개연성에 그치듯이, 신의 본성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도 개연성에 머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적어도 인간은 자연이 인간에게 드러내는 만큼 자연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앞서 직접 인용했던 <대화> 제2부의 문맥에서 물질 세계를 신이라고 한다면, 이 경험 가능한 자연의 통일된 체계가 곧 신이다. 이제 신을 이해하는 것은 곧 자연을 이해하는 것이다.
앞서 밝혔듯이, 흄에게 있어서 자연에는 단순한 사실이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단순한 것들은 모두 다른 단순한 것들과의 관계 안에서 존재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단순한 것들의 복합체이다. 단순한 것은 이성의 구별을 통해, 즉 분석을 통해 인식된다. 이 단순한 것은 아무런 구조적 성질이나 형체적 속성을 갖지 않는 단계로까지 분석될 수 있고, 관찰 수단의 진보에 따라 단순한 것은 더욱 세분될 것이다. 따라서 ‘단순함’은 분석의 한계 개념이며, 경험 가능성의 한계에 제약된다. 또 지금 ‘단순한 것’이 설령 구체적인 어떤 사물을 가리킨다고 하더라도, 관찰 수단의 진보에 따라 그것은 더욱 단순한 것으로 세분될 가능성은 열려 있다.
이 단순한 것들이 하나의 단일체(unity)로 결합되는 원리는 유사․인접․인과 등 연합의 원리이다. 이것은 자연을 구성하는 사물들이 운동하는 원리이며, 동시에 하나의 정신을 구성하는 단순 지각들이 서로 합일되고 결합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인력(attraction)이다.
흄은 <대화> 제7부에서 “생성이나 이성이라는 말은 자연의 어떤 능력(powers)이나 힘(energies)의 기호일 뿐이며, 그 결과는 우리에게 알려진다”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앞서 인용했듯이, ‘물질 세계의 부분들은 스스로 그 자신의 본성에 따라 질서지워져 있다.’ 그리고 스스로의 본성에 따라 질서지워져 있는 이 물질 세계를 신이라고 했을 때, 능력이나 힘은 신의 본성이다. 즉 적어도 우리에게 알려진 신의 본성은 힘(power)이다. 그리고 이 힘의 작용 원리는 자연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이합집산하는 원리, 즉 연합의 원리이다. 이 연합의 원리를 곧 Logos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알려진 신의 본성은 힘과 힘의 작용 원리에 지나지 않으며, 신이 그밖의 다른 어떤 속성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알 수 없으므로 말할 수도 없다.
흄이 옹호하려고 했던 신의 본성은 힘과 힘의 원리로 운동하며 변화하는 자연의 체계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철학적 유신론과 궤를 같이 한다. 자연을 신으로 파악하는 흄의 자연 종교는 다중적이고 중첩적인 자연주의적 존재론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앞서 언급했듯이, 자연 체계 안에서 모든 존재들은 고정된 형태없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고, 분석적 환원을 통해 에너지 형태로도 이해될 수 있으며, 구체적인 개별자들의 관계도 가족과 지연 공동체 그리고 사회 및 국가 등과 같은 중첩적인 맥락에서 동시에 파악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단순한 것들의 복합체는 우주 전체로 확장된다.
이 우주 전체에서 어떤 단순한 것은 그것이 구성하는 모든 복합체의 구성 요소이다. 예컨대, ‘나’는 ‘나’의 신체를 구성하는 각 기관으로 구성되어 있고, ‘나’는 가족의 구성원이며, 어떤 지연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의 구성원이며, 특정 사회 단체의 구성원일 수 있다. ‘나’는 이 모든 복합체를 구성하는 구성원이며, 이다양한 관계는 동시적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다양한 복합체들은 하나의 구성 원소를 동시에 공유할 수 있고, 그 구성원들의 상호 관계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화한다.
실천 윤리의 측면에서 볼 때, 자연주의적 유신론에서 신으로 이해되는 자연 체계 안에는 어떤 도덕도 찾아 볼 수 없다.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능력이나 힘이며, 그것들의 운동 원리들뿐이다. 이것은 종교에서 도덕 원리를 찾고자 했던 기존의 신 개념이나 종교관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논고>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흄은 <대화> 제11부에서 신과 도덕의 무관성을 주장한다. 이것은 신이 ‘지고의 선’이라는 기존 종교적 도덕관에 대한 비판이며, 신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종교 집단의 다양한 만행에 대한 실천적 비판이기도 하다.
흄은 선․악의 문제를 자연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으로 구분한다. 자기 보존이라는 자연적 정념을 중심으로 연합의 원리에 충실하면 자연적 덕(natural virtue)이며, 그렇지 못하면 자연적 부덕(natural vice)이다. 예컨대, 우리 사회에서 고위 공직자나 재력가들이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기 위해 여러 가지 편법을 쓰는 것은 자연적 덕이다. 오히려 자식을 폭력과 억압과 굴종으로 얼룩진 군대에 보내는 것이 자연적 부덕이다. ‘나’와 거리가 먼 다른 사람이 가는 것은 관심없지만, 아니 어쩔 수 없이 군대에 끌려가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군대에 가지 않을 수 있는 자신의 우월감에 긍지를 느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와 가까운 나의 자식과 나의 친척과 나의 친구가 가는 것은 거북하고, 그들을 군에 입대시키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무능에 대해 혐오스럽고 굴욕감을 느낀다.
이것은 정념의 자연적 원리에 따른 것이며, 개인들의 자연적 관계를 중심으로 느껴지는 정념에 기초를 둔다. 유사․인접․인과 등 자연적 관계에서 덕과 부덕의 중심이 되는 것은 자기 중심성(selfishness)과 편파성(partiality)이다. 이것은 자연에 대한 해부학자로서 참된 철학자가 밝혀낸 참담한 인간의 존재 방식이기도 하다.
자연적 상태에서 이런 자기 중심성과 편파성은 타자에 대한 끊임없는 경계와 대립 그리고 충돌을 야기함으로써 개인은 늘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고 자기 보존의 원리에도 위배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중심성과 편파성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를 구성하고, 정의의 원리로서 도덕 규범을 인위적으로 구성한다. 흄에게 있어서 이 도덕 규범은 묵계(convention)에 기초를 둔 자연법이다. 이 자연법에 따라 도덕적 덕․부덕이 구별된다. 이 자연법의 원리는 공정성이며, 이 공정성을 통해 인간은 자기 중심성과 편파성을 극복할 수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군복무를 회피하려는 것이 인간의 자연적 덕이다. 그러나 사회는 이 자연적 덕에 따라 병역 의무를 회피하는 것이 도덕적 덕에 따라 수행하는 것보다 손해(처벌, 사회적 제재)가 되도록 법제화함으로써 병역 의무의 공정성을 확보한다. 이것은 곧 자기 보존과 자기 확대라는 자연의 원리에 부합되도록 병역과 관련된 규범을 제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규범의 기초는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라는 점에서 인위적이 도덕 규범의 기초도 역시 자연의 원리이다.
자연에는 군대가 없다. 군대는 인간이 만든 사회 조직의 한 종류일 뿐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은 그것을 구성한 인간의 몫이다. 이것은 도덕이 인간의 문제일 뿐 신과 무관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흔히 흄이 사실과 가치가 별개의 문제라는 점을 인식한 최초의 철학자로 평가되는 것을 이런 맥락에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맺는말
근대 종교의 문제는 근대 과학의 성과를 기존 종교적 세계관과 접목시키려던 서양 근대 철학자들의 공통적 과제이기도 했다. 근대 과학의 방법론을 통해 인식의 한계 안에서 흄이 드러내는 신의 본성은 자연의 구조 안에서 파악된다는 점에서 다른 근대 철학자들의 신 개념과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자연의 구조 안에서 신의 본성을 이해하려고 했던 흄의 신 개념은 실험과 관찰이라는 근대 경험주의의 근본 원리와 부합된다. 흄은 신 개념을 재정의함으로써 근대 과학의 성과와 종교 문제를 일관되게 조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종교의 문제에서 근대 인식론의 성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흄은 근본적으로 사실에 대한 인식의 한계가 개연성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이해하는 신의 본성도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이것은 다양한 종교의 가능성도 열어둔다. 이런 점에서 <대화> 제12부에서 사회는 다양한 여러 종교에 대해 어떤 형태로도 차별할 수 없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러나 사실과 무관하게 오직 인간의 상상력에 기인한 다양한 종교의 행태들이 자연법을 위배하는 경우에 처벌받을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이것은 모든 종교에 대한 관용과 사회적 제약을 함께 허용한다는 것이다.
흄이 이와 같은 종교관과 도덕관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말하는 참된 철학․참된 회의주의(온건한 회의주의․완화된 회의주의) 때문이다. 물론 이 참된 철학이나 참된 회의주의는 퓌론적 회의주의를 하나의 전략으로 사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 결과로 흄이 제안하는 종교관과 신 개념은 흔히 철학적 유신론으로 불리기도 하며, 오늘날 자연주의적 유신론과 흡사하다.
참고문헌
D. Hume, Dialogues concerning Natural Religion, edited by James Fieser (jfieser@utm.edu).
D. Hume, A Treatise of Human Nature, edited, with an analytic index, by L. A. Selby-Bigg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0.
D. Hume, Of Superstition and Enthusiasm edited by Christopher MacLachlan (cjmm@st-andrews.ac.uk)
G. Leibniz, Monadology, (http://www.uh.edu/~gbrown/philosophers/
leibniz/leibniz.html).
소흥렬, <자연주의적 유신론>, 서울: 서광사, 1992.
이준호, <흄의 자연주의와 자아>, 울산대학교 출판부.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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