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artes 운동이론 연구 - Leibniz의 비판을 중심으로
박 지 수 서울대 철학
I. 들어가는 말
天文學的 발견으로 시작된 17세기 과학혁명은 "우리가 그 책이 쓰여진 글자와 언어를 배우지 않는다면 우주라는 웅장한 책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數學이라는 언어로 쓰여졌다"는 Galileo의 말로 대변된다. 과학혁명으로 시작된 근대과학의 주요작업은 자연현상을 기술하는 것 이외에도 원리에 의해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17세기 近代哲學의 기계론적인 思潮는 인간의 이해에 의해 자연 속에 있다고 여겨지는 신비함을 없애고, 자연을 '이성 앞에 완전히 투명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기본태도 중의 하나로 삼았다.
본 논문은 근대철학과 근대과학의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그러나 새삼스러울 것 없는 가정을 바탕에 깔고 있다. 즉, 과학 - 적어도 17세기에 비로소 성립하기 시작했던 근대과학의 대표격인 力學은 그것의 기본적인 원리나 정의들을 그 당시의 가장 유력했던 形而上學으로부터 원용했다는 것이다. 물론 形而上學은 과학과 다른 대상을 다루며 추구하는 목표 역시 다르다. 과학은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많은 정의와 개념을 세우고 그 바탕에서 이론을 건설한다. 그러나 과학이 자연현상을 이론적으로 파악할 때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개념적인 틀을 형성하고 규명하는 일은 과학의 영역 내에서는 이루어지기 어려우므로 두 분야의 관계를 밝히는 일은 철학적 분석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II. Descartes 운동이론의 성립과 구조
1. Res Extensa
a. [省察]의 검토 : 밀랍의 例
[省察](1641)은 Descartes의 철학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대표하는 著作이다. 그것은 그 이전까지 그가 논의해온 모든 철학 체계를 완성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내용적 측면에서는 자신의 철학을 정초하기 위한 Descartes의 노력을 보여준다. 거짓된 것들을 부정하고 정말로 참된 것을 찾으려는 Descartes의 회의는 첫번째 省察에서부터 시작되어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는 절망으로 끝난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물체에 대한 논변이다. 물체에 대한 그의 생각이 처음으로 표현되는 것도 바로 이 두번째 省察이다. '나'에 대한 치밀한 논변에 비해 물체에 대한 논변은 의외로 간단하게 시작된다. 그 문단을 살펴보면 결과적으로 물체에 대해 Descartes가 내놓게 되는 거의 모든 것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편의상 주장된 내용을 다음의 몇가지로 요약하여 정리해보자.
1) 규정될 수 있는 모양과 정의될 수 있는 위치를 가진다.
2) 다른 어떤 물체를 배척하는 방식으로 공간을 차지할 수 있다.
3) 여러 감각에 의해 지각될 수 있다.
4) 스스로 움직일 수 없고 다른 물체에 의해 여러가지 방식으로 움직여질 수 있다.
1)과 2) 같은 주장은 별다른 문제없이 받아들여져 온 것들이다. 또한 3)의 주장은 거의 당연한 것으로 인정되며, 오히려 물체들이 지각되지 않는다면 그 존재조차 의심될 것이다. 4)는 평범한 경험을 기술하는 내용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여기서 1), 2), 4) 등은 어떤 경향을 가진 주장으로 보여진다. 완전히 참된 것을 찾기 위해 회의를 진행하면서 이렇게 잘 규정된 속성들을 열거한 의도에 대해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물론 그가 말한 대로 이 내용은 "물체에 대하여 나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그 本性을 판명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이 주장들은 아직 회의의 방법에 의해서 엄밀하게 검토되지 않은 것이다.
이제 Descartes는 확실한 것을 찾기 위한 회의를 진행하면서 유명한 밀랍의 例를 전개한다. 물체의 본성에 대해 고찰하는 이 例에서 그는 "공통적으로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판명하게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들, 즉 우리가 만지고 보는 물체들"을 생각할 것을 제안한다. 특정한 물체의 例로서 밀랍이 등장한다. 밀랍을 두드려보고, 냄새맡고, 맛을 봄으로써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그러나 불 가까이에 가져가서 밀랍을 가열시키는 등의 과정에 의해 그것들은 사라져버리게 되므로, 그 성질들은 밀랍에 고유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성질들은 변화하거나 사라져버리지만 바로 그 동일한 밀랍은 "남아있다", 혹은 "남아있다고 인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밀랍에 고유한 성질은 감각을 통해 나에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 정신 속으로 들어오는 '생각' 속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상상하고 있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 주의를 집중하고 밀랍에 속하지 않는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남게 되는 것을 살펴보자. 그것은 단지 延長的이며, 구부러지기 쉽고, 변하기 쉬운 어떤 것이다. "([省察] AT VII, 31)
즉, 물체는 a) 延長的이며, b) 구부러지기 쉽고, c) 변하기 쉬운 어떤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도 변화하기는 마찬가지이다. 延長的이라는 것은 물체의 크기가 변함에 따라 변화하며, b), c) 두가지 역시 변화한다는 것도 명백하다. 또한 우리는 밀랍이 여러가지 변화를 무수히 겪을 수 있다고 파악할 수는 있지만, 이러한 변화를 모두 다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무수한 변화들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그 어떠한 것이 있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일단 감각으로 지각되는 성질은 제외된다. 그것은 정신의 도움이 없이는 참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눈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은 사실상 단지 내 정신 속에 있는 판단력에 의해서 파악한 것이다." 따라서 앞서의 b), c)는 물질의 본성에서 기각된다. 또한 정신의 도움없이는 참된 것을 인식할 수 없다는 이러한 주장은 정신이, 즉 정신적 실체로서의 내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강화해준다. 따라서 두번째 省察의 제목대로 "인간의 정신의 본성과 정신이 신체보다 더 알려지기 쉽다"는 것이다.
다섯번째 省察의 첫머리에서 그는 나의 바깥에 있는 것들에 대한 관념을 고찰하여 그 중에서 판명한 관념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한다.
"量, 즉 철학자들이 흔히 '연속적인' 量이라고 부르는 것은, 내가 판명하게 상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길이, 너비, 깊이에 있어서의 量의 延長 또는 오히려 量化된 사물의 延長을 판명하게 상상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의 참은 받아들이기가 매우 쉽고 내 본성과 매우 잘 조화를 이루므로 ..."([省察] AT VII, 63)
이러한 언급은 바로 앞에서 보았던 물체에 대한 언급과 그리 부드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b)와 c)가 기각되고 a)만 남은 상황에서, 여기서 말하는 '量化된 사물의 延長'이라는 등등의 언급은 현격한 논의 上의 비약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반해 이 주장에 대해 Descartes가 제시하는 근거는 '매우 잘 알려져 있으며 분명하고', '받아들이기 쉽고', '내 본성과 잘 조화된다' 등등뿐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정당화의 근거로 받아들이기가 힘들다고 생각된다.
b. [哲學原理]로의 移行
[哲學原理]에서 설명하는 방식은 [省察]에서와 상당히 유사하다. "실체라는 말로 우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만을 이해한다." 따라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피조물에는 서로 상이한 의미의 '실체'개념이 적용된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 자신에만 의존하므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실체이다. 그러나 우리는 통상적으로 하나님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도 실체라고 생각한다. 피조물들은 하나님에만 자신의 존재를 의존하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실체는 아니지만, 우리는 "그것들이 오직 하나님이 함께 작용하는 도움으로만 존재할 수 있음을 지각한다. ... 피조물들의 경우에 몇몇은 다른 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본성을 가지며, 반면에 몇몇은 존재하기 위해 오직 하나님의 일상적인 동시작용에만 의존한다." 그러므로 後者에 해당하는 피조물만이 실체라고 불릴 수 있다. 그렇지만 실체가 존재한다고해서 그 자체로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은 아니다.
"... 無는 아무런 특성, 즉 속성이나 성질을 가지지 않는다는 일반적인 생각에 의해 우리는 물체의 속성 중 하나에 의해 실체를 쉽게 알게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속성의 現前을 지각한다면, 그것이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존재하는 사물이나 실체가 現前함이 틀림없다고 추론할 수 있다."([哲學原理] 1부, 52항)
따라서 우리는 실체를 알기 위해 그것의 속성에 의해야만 한다. 어떤 실체가 가지는 속성은 여러가지일 수 있다. Descartes는 실체는 어떤 주요한 속성을 가지며, 다른 속성들은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소위 本質主義 essentialism라는 오래된 形而上學的 입장을 취한다. Descartes는 바로 이러한 입장에 서서 물질적인 실체의 본질로 延長을 주장한다.
"만일 우리가 知性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물질 또는 물체의 본성이 ... 감각에 작용하는 어떤 것이라는 것에 있지 않으며, 단지 길이, 너비, 깊이에 있어서 延長的인 어떤 것이라는데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哲學原理] 2부, 4항)
물질이 '延長的인' 어떤 것이라는 이 주장에 대해 어떠한 직접적인 정당화 논변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잘 생각해보면 그러하다는 식의 주장이다. 아마도 그는 [省察]에서 본 바와 같이 이 주장이 물체에 대해 명석하고 판명하게 알 수 있다고 간주한 것 같다.
결론적으로 [省察]과 [哲學原理]에서 논의되었던 물체는 '다양한 크기, 모양, 위치, 장소적 운동 그리고 다양한 지속'등이 귀속되며 '단지 길이, 너비, 깊이에 있어서 延長的인 어떤 것'으로 정의된다. 여기서 앞서 두번째 省察에서 Descartes가 물체의 성질에 대해 회의하기 전에 내놓은 성질을 다시 생각해보자. 주장된 성질 중에서 감각에 의해서 지각될 수 있다는 성질 3)은 거부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성질, 즉 1) 규정될 수 있는 모양과 정의될 수 있는 위치를 가진다, 2) 다른 어떤 물체를 배척하는 방식으로 공간을 차지할 수 있다, 4) 스스로 움직일 수 없고 다른 어떤 물체에 의해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움직여질 수 있다 등은 물체의 정의로부터 간단히 도출될 수 있는 것들이다. 모양과 위치를 가진다는 것은 물체의 정의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延長만을 가지는 물체가 스스로 움직일 수 없음은 쉽게 이해된다. 물체는 그것의 延長에 의해 파악되므로 한 장소에 두개의 상이한 물체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물체는 다른 물체를 배척한다는 주장 역시 쉽게 이해된다. 그러면 왜 Descartes는 이러한 성질들을 아직 회의가 시작되지도 않은 곳에 삽입시켰는가 ? 정신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엄격하게 회의하고 논의했던 것에 반해 물체에 대해서는 그 논의 결과를 의외로 갑자기 주장했는가 ? Wilson은 여기에 물체와 정신을 다루는데 있어서의 어떤 '非대칭성'이 있다고 말한다. 비록 이러한 非대칭성이 물체를 정의하는데 문제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정의가 직접적으로 확실한 근거에서 나오지 않았음을 뒷받침해준다. 더 나아가 E. Burtt는, 물체를 幾何學的 속성으로 정의하는 근거가 그 논의 자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물질의 본성이 延長이라는 결론은 몇몇 다른 측면에서 고려될 수 있다. Descartes는 延長이 물질의 본성이라고 주장하고, 이것은 명석하고 판명한 인식이라는 것 이외의 다른 정당화나 설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그는 延長만이 물체의 본성인가라는 문제에는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다. 물체 속에 있다고 생각되는 여러가지 성질들은 延長으로 환원되거나 延長에 의해서 충분히 설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Descartes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는 그것의 개별성에 있어서 단지 상대적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따라서 여기에 공 하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공을 하나의 단위로 보는 경우에만 가능한 언급이며, 엄밀하게 말해서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분에 대해 그는 단지 우리가 그것들을 그렇게 생각하는데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延長을 물체의 유일한 본성으로 인정하게 되면 우리는 세계의 한계를 상상할 수 없다. '있는 것은 하나'라는 Parmenides의 주장처럼 존재하는 물질의 세계는 그 본성上 延長的이어야 하며 延長的이지 않은 물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물질에 延長性만을 귀속시키는 주장은 상당히 강한 것임을 Descartes 자신도 인식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延長性이 유일한 본성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물체의 참된 본성이 단지 延長에만 있는가를 의심할 두가지 가능한 이유가 여전히 남아있다. 첫번째 것은, 많은 물체들이 희박해지면 응축될 때보다 더 큰 延長을 가지게 되는 방식으로 희박화, 응축화될 수 있다는 널리 퍼진 믿음이다. ... 두번째 이유는, 만일 우리가 주어진 장소에 길이, 너비, 깊이에서의 延長 이외에 아무것도 없음을 이해한다면, 일반적으로 우리는 거기에 물체가 있다고 말하지 않고 단지 공간, 혹은 빈 공간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것이 전혀 아무것도 아니라고 확신한다."([哲學原理] 2부, 5항)
위에서 두번째 의심은 물체의 또다른 측면, 즉 물체의 본질이 延長뿐이라면 공간과는 어떻게 구분되는가의 문제를 일으킨다. Descartes로서는 완전히 빈 공간, 즉 진공을 인정할 수 없었다. 만일 진공이 존재한다고 인정한다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延長에 의해 진공은 물체가 되어야 한다는 불합리한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2. 운동의 정의와 구성요소
a. 외부 세계의 설명 : Descartes의 운동개념
세계가 延長的인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한 Descartes는 그 이전의 철학자들은 '熱', '차가움'과 같이 우리가 명확한 인식을 가질 수 없는 모호하거나 가정된 성질로 세계를 설명해왔다. 그의 [정신 지도를 위한 規則]의 규칙들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그는 예의 극단적인 [省察]을 행했던 것이다. 이 규칙에 따라서 그는 이전의 모호하고 불명확한 것 모두를 단번에 폐기해버린다. 그러한 성질들 자체가 설명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개념 대신에 '幾何學者들의 線'처럼 가장 단순한 개념으로 운동을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延長을 본성으로 가지는 물체에 있어서 운동이란 그것이 가지는 延長과 관련된 어떤 것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물질의 본성으로 延長을 주장한다는 것은 세계를 설명하는데 별다른 소용이 없다. Descartes에게 있어서 존재하는 것은 延長을 가지며 무한히 분할될 수 있으므로 아무것도 없는 공간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세계는 연속적인 물질로 꽉 차있다. 그러나 물질로 꽉 차있다는 것만으로는 다양한 자연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물질은 분할가능할 뿐만 아니라 사실상 분할되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할가능한 물질이라는 개념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부가적인 기본 개념'이 요구된다. 이에 해당하는 개념이 바로 '운동'이다. 따라서 운동은 延長과 함께 물리적 세계를 설명하는 두가지 기본원리를 구성한다.
"전체 우주에 존재하는 물질은 동일한 하나이고, 단지 그것이 延長的이기 때문에 언제나 물질이라고 인식된다. ... 물질에 있어서의 어떠한 다양성과 여러 형상에 있어서의 상이성도 운동에 달려있다."([哲學原理] 2부, 23항)
여기서 물체의 모든 속성들이 환원될 수 있는 '분할가능성'과 '운동가능성'은 물체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며, 延長과 운동이라는 두가지 기본원리에 대한 또다른 표현이다. 따라서 물질적인 세계의 모든 변화는 '운동에 의한 延長的인 물체의 다양성'으로 설명된다.
운동은 물체의 변화를 기술하는 주요한 측면이다. 그러므로 운동은 물체의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개념이어야 한다. 운동은 물체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여기서 우리는 물체 속에 존재한다고 이해되는 작용, 운동을 만들어내거나 정지시키는 작용이 아니라 단지 물체의 이동과 이동이 없음, 즉 정지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다. 따라서 이 이동은 운동하고 있는 물체의 바깥에 존재할 수 없으며, 물체는 운동의 이동이 있는 경우, 이동이 없을 때, 즉 정지하고 있을 때와는 다른 상태에 있음은 명백하다. 따라서 운동과 정지는 물체의 상이한 두가지 양태일뿐 다른 것이 아니다."([哲學原理] 2부, 27항)
Descartes는 '양태'라는 말을 "영향받을 수 있거나 변형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실체를 생각할 때" 사용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창조된 것의 경우에 언제나 변형되지 않고 남아있는 것 - 예를 들어 존재한다는 것이나 지속한다는 것등은 성질이나 양태가 아니라 속성이다." 운동은 물체와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으며, 운동은 항상 어떤 물체의 운동으로만 이해되어야 한다. 양태와 실체라는 다분히 스콜라的인 용어로 설명된 이 관계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거의 해석이 일치되고 있다. Descartes에게 있어서 延長的인 실체의 양태인 형태와 운동은 실체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으므로 실재적이지 않다.
또한 Descartes는 정지를 운동의 결여로 생각해 왔던 전통적인 개념을 불합리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반박한다. 따라서 움직이는 것과 정지하고 있는 것은 물체의 동등한 두가지 양태, 즉 상태이다. 이에 대해 Westfall은 운동개념을 다른 상태와 동등한 상태로 해석하여 그 개념을 명료하게 만든 것을 力學 발전에 대한 Descartes의 주요한 공헌이라고 말한다. 그는 두가지 양태로서의 운동과 정지를 '存在論的으로 동일하다'고 표현한다. 우리는 당분간 물체와 운동을 실체와 양태의 이러한 관계로 받아들일 것이다. 운동은 이동하는 작용이나 힘이 아니라, 이동 그 자체이므로 Descartes의 운동개념은 운동을 작용에 의해 일어나는 어떤 실재적인 것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Descarte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태나 부분들의 위치 그리고 부분들의 운동 등과 같은 延長의, 또는 다양한 양태들이나 延長에 속하는 다양한 양태들이 있다... 운동이 관련되는 限 우리는 그것을 산출해내는 힘에 대해 탐구하지 않고 단지 위치적인 운동으로 생각한다면 최선이 될 것이다."([哲學原理] 1부, 65항)
그는 자신이 운동의 원인이나 그 과정에 대한 언급없이 단지 운동하는 상태와 그것의 변화만을 양태를 통하여 설명하려고 함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b. 운동의 정의와 운동의 원인
[哲學原理]에서 그는 운동의 정의를 두가지 경우에서 검토한다. 첫번째는 일상적인 語法에 있어서의 의미이고 두번째는 용어의 엄격한 의미에서의 경우이다. Descartes의 운동은 일단 위치적 운동, 즉 장소의 변화로 제한된다. 이러한 논의의 제한은 그의 주장에 있어 분명할 뿐만 아니라 매우 자연스럽다. 물체는 그 본성上 공간 속에서의 위치와 형태 등 幾何學的인 속성으로 설명되어야 하므로, 운동은 그러한 속성의 변화 내지는 轉移로 표현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앞서에서 보았던 것처럼 延長과 공간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고, 어떠한 두개의 물체 사이에도 빈 공간 없이 모든 면에서 서로 닿아있으므로, 전체적으로 보면 물질은 하나의 덩어리로 되어있다. 따라서 물체의 위치적인 운동은 서로에 대해 상대적이다. 한 부분은 다른 부분에 대해 움직인다고 생각되며, 또한 또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그러하다고 말해질 수 있다. 그가 운동을 상대적인 것으로 설명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엄격한 의미에서의' 두번째 정의는 다음과 같다.
"운동은 어떤 물체 또는 물질의 한 조각이 그것과 직접적으로 닿아있는, 그리고 정지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다른 물체의 주변으로부터 다른 물체의 주변으로 이동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哲學原理] 2부, 25항)
좀더 정확하게 정의된 운동은 어떤 물체가 '직접적으로 닿아있는 것의 주변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표현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이 정의에서도 상대성은 제거되지 않는다. "이동은 맞닿아 있을 뿐만 아니라 '정지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물체의 주변으로부터 일어난다고 규정된다. 이동은 그 자체로 상호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두 물체 모두 운동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음을 함축한다. 어떤 물체를 정지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 물체에 고유하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엄격한 의미에서도 역시 어떤 물체의 운동은 다른 물체에 대해 상대적일 수 밖에 없다. 그에게 있어서 전체 공간은 균일한 연속체 plenum이며, 그 속에는 방향을 결정할 아무런 기준이 없다.
여기서 운동의 본성에 대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구분을 생각해보자. 운동의 첫번째 정의에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해가게 되는 '작용 action'이라는 언급이 있다. 그러나 두번째 정의의 어디에도 '작용'이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사소해 보이는 이러한 차이는 운동을 특징짓는다. '운동이 작용에 관계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작용은 운동을 일으키는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발로 공을 차는 행동을 할 때 공의 운동을 일으키는 것은 발 자체가 아니라 발에 의해 행해진다고 생각되는 어떤 작용이다. 일상적으로 이때 발은 능동적이며, 공은 수동적이라고 말해진다. 그러나 Descartes는 두번째 정의에서 그 작용에 대해 이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논의하겠다는 의도를 간접적으로 비치고 있다.
운동은 '힘이나 작용에 대립된 opposed 이동'이다. 작용에 의해 일으켜지는 것이 운동이라면 작용은 운동의 원인이다. 원인과 결과라는 보편적인 因果관계로 쉽게 표현할 수 있는 관계를 왜 그는 '대립되었다'는 말로 설명하는가 ? 그 이유는 운동의 원인에 대한 그의 설명에서 드러난다. 물체 자체는 자신의 운동의 원인이 될 수 없다. 延長을 본성으로 가지는 물체가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고 Descartes 자신은 강조했기 때문이다. 운동을 일으키는 것이 물체에 대립한 것이라면 운동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 Descartes는 운동의 정의에서 운동을 '작용'에 관계된 것임을 밝히고 있지만, 그 작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다음의 두가지를 원인으로 설명한다.
"첫번째로, 보편적이고 주요한 원인, 즉 세계의 모든 운동에 대한 일반적인 원인이 있다. 두번째로, 물질의 개별적인 부분에 이전에는 없었던 어떤 운동을 만들어내는 특정한 원인이 있다. 이제 일반적인 원인이 관련되는 限, 이것이 하나님 자신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님이 나에게는 명석하게 보인다."([哲學原理] 2부, 36항)
하나님은 물질을 창조하면서 물질 각각에 어느 정도의 정지와 운동을 함께 '나누어 주었다'. 따라서 운동의 일반적인 원인은 하나님이다. 지금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운동의 개별적인 원인, 즉 물체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의 주변으로 움직이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은 '직접적으로 닿아있는' 다른 물체의 운동이다. 그리고 운동은 엄격한 의미의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운동하는 물체와 정지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맞닿아 있는" 물체에만 관계된다. 이것은 물체가 延長을 본성으로 가진다는 것으로부터 쉽게 이해될 수 있다. 延長만을 가지는 물체가 다른 물체에 대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延長으로 생각되어야 하는 공간 상의 접촉밖에 없다. 따라서 연속체로서의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물체는 함께 움직이는 圓을 구성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운동을 일으키는 '작용'은 설명되지 않는다.
c. 운동의 量과 方向
하나님은 물질을 창조했다. 그리고 물체들은 상호충돌에 의해 작용하며 자신의 상태를 변화시킨다. 그리고 이 변화과정에는 주요한 원리가 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규칙적인 동시작용 concurrence 에 의해 처음에 만들었던 것과 동일한 量의 운동과 정지를 물질적인 우주 속에서 보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의 창조는 그것의 운동을 포함하여 생각되어야 한다.
우리는 앞서 운동은 물체의 상태를 표시하는 양태로 설명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따라서 물체도 보존되고 운동도 보존된다고해도 이것 모두가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실재하는 것이 아닌 운동이 다른 물체의 상태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 다시 말해서 운동은 어떤 방식으로 기술되는가 ? Descartes는 여기서 운동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오직 그 量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암묵적인 귀결로 넘어간다. [省察]에서처럼 그에게 있어서 量이라는 개념은 延長과 거의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왜 그가 운동을 기술하는 방식으로 그것의 量을 주장했는지 말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언급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운동의 量에 대한 그의 입장이 불분명한 것에 비해 그 개념이 수행하는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물체의 운동이나 상호작용은 모두 量的인 변화로 기술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운동의 量 quantity of motion'이라 불리는 것으로, 앞서 언급했던 상대적인 방향과 함께 Descartes의 운동이론에서 물체의 운동을 기술할 수 있는 유일한 두가지 요소이다. 따라서 운동의 量은 물체의 크기와 속력이라는 두가지 측면에서 고려된다.
운동의 量은, 물체의 크기가 두배이면 두배만큼 크며, 또한 물체의 속력이 두배인 경우에도 두배가 된다. 이때 운동의 量이 계산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주 전체 속의 운동의 量이 일정하다는 조건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정의된 운동의 量은 그것의 절대적인 量이 아니라 물체 사이의 비례에 의한 상대적인 값이기 때문이다. 이 값은 물체의 질량과 속도의 곱으로 나타내어지는 Newton의 운동량 momentum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이때 물체의 질량은 소위 관성질량이라고 표현되는 물체에 고유한 값으로 결정된다. 그 반면에 Descartes는 물체의 본성으로 延長만을 인정했으며, 延長은 물체에 대해 고유한 값을 가지는 질량이나 무게라는 개념은 포함하지 않는다.
또한 여기서의 속력 velocity은 단지 상대적인 빠르기의 정도만을 나타낸다는 점에서도 운동량과의 차이가 있다. 운동의 量 자체에는 물체의 운동방향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Descartes에게 운동의 빠르기와 방향은 분리되어 논의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것을 '두가지 종류의 반대 opposition'라는 말로 설명한다.
"어떤 운동이 동일한 속력으로 움직이는 또다른 운동과 결코 반대가 아니라는 것은 주목되어야 한다. 엄격히 말해서 여기서는 오직 두가지 종류의 반대만이 발견된다. 첫번째 종류는 운동과 정지사이의 반대이다. ... 여기에는 빠름과 느림 사이의 반대가 포함된다. 그리고 두번째 종류는, 주어진 방향으로의 운동의 결정과, 정지해 있거나 다른 방향으로 운동하는 다른 물체와 그 방향의 어딘가에서 만난다는 것 사이의 반대이다. 이 반대의 정도는 어떤 물체가 다른 것과 충돌할 때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다르다."([哲學原理] 2부, 44항)
즉, 운동의 量과 운동의 방향은 서로 독립적이므로 운동의 量은 물체가 어떠한 방향으로 움직이는가와는 상관없이 동일한 값을 갖는다. 따라서 운동이 변화된다고 할 때 방향의 변화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점에 주의하면 운동의 量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된다.
물체의 운동의 量 = (물체의 量 또는 크기 Q) ㄪ (물체의 속력 V)
또한 Descartes에 있어서 운동과 정지는 존재론적으로 동등하므로 "운동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정지하기 위해 요구되는 만큼의 작용이다"라는 것이 주장된다. 여기서의 '작용'이라는 것은 단순히 '요구되는 운동의 量'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변화를 일으키는 원인으로서의 '작용'은 Descartes의 운동이론에서 허용하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움직이는 물체는 그것의 운동의 量과 운동의 상대적인 방향으로 기술될 수 있다.
3. 자연 법칙과 충돌 규칙
Descartes는 幾何學의 公理와 같은 역할을 하는 세가지 원리, 즉 자연 법칙을 말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이 법칙들은 단지 운동의 방식을 기술하는 역할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즉, 정의와 公理의 관계처럼 운동에 대한 形而上學的 언급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이 자연 법칙들은 하나님에 대한 形而上學的 논의의 결과에 의해 얻어지고 또한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세계의 법칙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붙은 [世界] 의 제 7장은 자연법칙에 대한 논의로 채워져 있다. 그는 먼저 '自然 nature'이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하고, 자연 법칙이 담고 있는 내용을 정의한다.
"오히려 나는 이 단어(自然)가 물질에 귀속된다고 말한 모든 성질과 함께 생각되는 限,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했던 동일한 방식으로 그것을 계속 보존한다는 조건 下에서 그 물질 자체를 의미하도록 사용하고 있다. 단지 하나님이 그것을 계속 보존한다는 사실로부터 나에게 하나님의 행위에 적절하게 귀속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부분들의 많은 변화가 있어야 하므로, 내가 그것들을 자연에 귀속시킨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이러한 변화들이 발생할 때 따르게 되는 규칙들을 나는 '자연 법칙'이라고 부른다."([世界] AT XI, 37)
그리고 우리는 자연 자체나 자연 법칙을 생각할 때 하나님을 반드시 전제해야 한다. 자연에 대한 논의는 하나님의 불변성을 근거로 하여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가 자연 법칙을 다양한 운동의 '특정한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음에 주의하자. 이미 우리는 Descartes가 작용과 운동사이의 보편적인 因果관계를 배제했음을 보았다. 그런데 지금은 법칙이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이 법칙들은 하나님의 불변성으로부터 도출되었으며, 하나님이 운동을 보존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자연법칙은 현상을 기술하는 차원에서의 법칙이 아니라, 현상을 지배하는 지위를 하나님의 불변성이라는 形而上學的 원리에 의해 부여받는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의 불변성은 자연의 법칙이 항상적으로, 그리고 예외없이 지켜진다는 것을 보장해준다. 그러므로 이 불변성은 이 법칙을 드러내는 것, 즉 하나님에 의해 물체의 운동이 변화되는 이유가 된다. 하나님의 불변성은 자연법칙의 첫번째와 두번째 법칙에서 잘 설명된다.
"법칙의 첫번째는, 각각의 사물은 그것이 단순하고 분할되지 않는 限 동일한 상태를 가능한 限 언제나 유지하며, 外的 원인의 결과인 경우를 제외하면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물질의 특정한 조각이 ... 정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어떤 원인에 의해 움직이게 되지 않는 限 결코 운동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는 주장한다."([哲學原理] 2부, 37항)
하나님의 불변성으로부터 도출되는 이 법칙은 그 내용 上 물질적인 세계를 설명하는 모든 논의에 대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물체는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고 단지 외부의 영향에 의해 움직여질 뿐이다. 이에 반해 창조에 의해 생겨난 운동과 정지가 계속 보존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행위가 一回的이 아니라 매순간마다 행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보존은 우주가 존재하는 限 진행되고 있는 과정이며, 창조와는 아무런 실재적인 구분이 없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물리적 우주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항상성과 불변성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원래 하나님이 창조했던 동일한 量의 물질과 운동을 보존한다고 인정해야만 한다.
두번째 법칙은 운동이 보존되는 방식에 대해 직선운동을 주장한다. 두번째 법칙에서 주장하고 있는 직선운동으로의 경향성은 하나님의 불변성과 함께 단순성에 의해 설명된다. 직선이 곡선보다 더 단순하다는 것에는 다소 논란이 있을 수도 있다. Descartes 이전의 운동에 대한 설명은 - 예를 들어 Galileo 등의 운동개념 - 원운동을 기본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이에 대해 Descartes는 직선 운동이 단순하다는 근거로 원운동의 개념적 우선성을 부정한다. 다시 말해서 직선운동은 그 방향이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그 순간의 운동의 量의 변화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된다. 그러나 원운동은 운동의 방향도 역시 변화하며, 운동의 방향은 적어도 두 점 사이의 관계로 설명되어야 하기 때문에 운동과 함께 방향의 변화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Descartes에서 원운동은 운동이 연속체 속에서 일어난다는 사실로 설명된다.
자연의 세번째 법칙은 앞서의 법칙들과는 성격이 다르다. 즉, 첫번째 법칙과 두번째 법칙이 하나의 개별적인 물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에 반해, 세번째 법칙은 복수의 물체의 상호작용을 검토한다. 물론 이때에도 그 각각의 물체들은 앞의 두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물체들은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서만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물체 사이의 가장 간단한 상호작용은 두 물체 사이의 충돌이다. 설명의 편의上 Descartes는 理想的인 상황을 가정한다. 즉, 여기서의 물체의 충돌은 완전히 딱딱한 물체들 사이의 충돌, 즉 완전 탄성충돌이다.
물체의 충돌에 있어서 먼저 고려되어야 하는 요소는 물체의 量과 속력의 곱으로 표현되는 운동의 量이다. 또한 이때의 속력 velocity은 근대 물리학에서 사용되는 속도 speed 라는 개념과는 다르다는 점에 다시 주의하자. 운동의 量과 운동의 방향은 서로 독립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물체의 충돌에서 대비되어 생각되는 측면은 정지하거나 운동하는 것, 빠르거나 느리게 움직이는 것 그리고 물체들이 충돌하는 방향뿐이다. 따라서 충돌의 경우는 운동의 量的인 변화와 방향의 변화에 따라 각각 결정된다. 세번째 법칙은 이 결정방식을 규정한다.
"어떤 움직이는 물체가 다른 물체와 충돌할 때 직선으로 계속 가려는 자신의 능력이 다른 물체의 저항보다 적다면, 운동의 量은 보유되는 반면에 그 방향은 변경되도록 빗나가게 된다. 그러나 계속 가려는 능력이 다른 물체의 저항보다 크다면, 그 물체를 함께 움직이며 다른 물체에 나누어주는 것과 동일한 量의 운동을 잃게 된다. ... 물체가 겪는 변화의 모든 특정한 원인은 이 세번째 법칙에 의해 다루어지거나, 적어도 이 법칙은 그 자체로 물질적인 모든 변화를 다룬다. "([哲學原理] 2부, 40항)
여기서 '물체의 저항'이란 앞서 운동의 量의 정의에서 언급된 것처럼 '정지한 물체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 요구되는 운동의 量'이다.
Descartes는 세번째 법칙의 두 부분 각각에 대해 증명을 제시한다. 첫번째 증명에 따르면, 운동의 방향은 물체의 저항에 의해 변화되지만 운동의 量은 또다른 운동에 의해 변경되지 않는다. 이것은 운동의 量과 그 방향이 독립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 또한 두번째 증명에서도 Descartes는 하나님의 불변성을 근거로 주장한다. 첫번째 법칙이나 두번째 법칙과 마찬가지로 세번째 법칙의 두번째 부분은 '形而上學的 근거'를 가짐을 알 수 있다. 세번째 법칙에서는 움직이는 물체의 운동의 量에 대비되는, 물체의 저항하는 능력이 충돌 상황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세번째 법칙에 등장하는 요소는 운동의 量, 운동에 저항하는 물체의 능력 그리고 운동의 방향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심각한 개념 上의 혼동이 있다. 우리는 그가 운동을 물체의 양태로 생각했음을 그의 주장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여기서 운동은 '물질에 영원히 고정되어 있지 않고 상호적으로 이동되는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어떤 물체의 양태가 다른 물체로 이동되는 어떤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는 모순을 일으킨다. 양태는 실체와 떨어져서 생각될 수도 없는 것이라는 그의 기본적인 정의는 이것과 반대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어떤 이는 그가 저항하려는 '능력'이라는 표현을 쓴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그러한 능력이 물체에 있다면 다른 물체의 양태인 운동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반론은 물체에 그러한 능력을 인정하지 않으려했던 그의 形而上學的 입장에 직접적으로 대치된다. 이 반론이 유효하려면 幾何學的인 量인 延長과 물체가 양태로서 가질 수 있는 운동의 量 이외에도 물체 內在的인 또다른 어떤 것을 인정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이 단지 개념上의 혼동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Descartes의 운동이론에 대해 지나친 호의를 베푸는 것이다. 앞서에서 말한 것처럼 운동을 물체와 별개일 수 없는 '물체가 가지는 상태'로 간주한 것은 Descartes의 운동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의 필연적인 - 혹은 적어도 최선의 - 해결책이었다.
4. 上位 원리와의 관계 : 운동이론은 연역된 것인가 ?
우리는 이제 앞서 살펴보았던 운동이론의 구조에서 세가지 자연법칙과 그것의 구체적인 적용규칙인 충돌규칙이 Descartes의 形而上學에 대해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를 검토할 것이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의미를 갖는다. 즉, Descartes가 건설한 形而上學이 옳다면 혹은 건전하다면 그것의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주장되는 자연법칙 역시 참이어야 한다. 우리는 그가 제시한 7개의 충돌규칙이 세번째 자연법칙의 정식화임을 앞서 살펴보았다. 따라서 자연법칙이 참이라면 그것의 구체적인 정식화인 충돌규칙 역시 참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충돌규칙이 일상적인 경험과 모순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그 자체에 있어 내부적 모순을 가지며 그 모순의 해결이 자연법칙의 테두리 내에서 성공할 수 없음을 보았다. 그러므로 Descartes의 물리학이 논리적으로 그의 形而上學으로부터 연역된 것이라면, 그의 물리학이 논박된다는 것은 그의 形而上學도 똑같은 운명에 처하게 됨을 의미한다. 물론 물리학이 논박된다고 해서 그의 形而上學 전체가 거짓으로 간주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주장한 二元論의 한쪽 날개, 즉 물질적인 외부세계에 대한 그의 주장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나무의 비유'는 Descartes에게 있어서 形而上學과 物理學이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Descartes는 다양한 기준, 즉 그 탐구의 대상, 形而上學的 주장의 확증에 적합한 증거의 종류 혹은 여타의 지식과 비교하여 그것의 역할이 기본적이라는 점 등에 의해 形而上學을 특징짓는다. 이 중에서 세번째 특징이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哲學原理]의 불어판 序文에는 이에 대한 그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다.
"무엇보다 먼저 나는 철학이 가장 공통적인 점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임을 설명되기를 바랬었다. ... 이러한 종류의 지식이 완전해지기 위해서 그것은 第一原因으로부터의 연역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을 획득하기를 시작하기 위해서 우리는 第一原因 혹은 第一原理에 대한 탐구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이러한 원리는 두가지 조건을 만족해야만 한다. 이러한 원리들로부터 그것에 의존하고 있는 사물에 대한 지식을 연역함에 있어 우리는 우리가 이끌어내는 전체 연역의 연쇄 속의 모든 것이 매우 명백하다는 것을 확신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哲學原理] AT IX-2, 2)
이러한 그의 기본 입장에 의한다면 여타의 것들에 대한 지식은 形而上學的 원리에 의존해야만 하며, 특히 그것들은 '연역의 연쇄'라는 관계로 연결되어야 한다. 여기서도 나타나듯이 Descartes는 자신의 물리학이 形而上學的인 근거로부터 연역되었음을 강조한다. 소위 形而上學으로부터의 물리학의 연역은 Descartes 방법론의 선험적인 설명의 표준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몇몇 주석가들은 이에 대해 반론을 펴고 있다. 이들은 Descartes가 자신의 방법론과 과학적 작업 모두에서 모호함이나 불일치를 일으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그의 방법론적인 著作은 과학에 있어서의 선험적 추론의 역할에 대해 모호하며, 물리학의 경우에는 순수하게 선험적 연역이 불가능함을 지적한다. 만일 그렇다면 물리학의 구체적인 이론으로서의 운동이론의 경우에서는 어떠한가 ?
Descartes에 있어서 形而上學은 지식의 第一原理, 즉 다른 어떤 것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참으로 구성되며, 하나님과 분리된 영혼에 대한 탐구 및 경험과는 독립적으로 자연의 빛에 의해 알려지는 주요한 개념 혹은 公理를 포함한다. 그러나 Descartes는 이것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논의된 세가지 자연법칙을 연역하기 위해서는 '나는 존재한다', '하나님이 존재하며 완전하다',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고 보존한다' 등등의 일련의 形而上學的 원리들이 필요할 것이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구분하기는 힘들다. 다만 그러한 形而上學的 원리의 성격을 대강의 기준으로 삼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Descartes의 운동원리에 있어서는 세가지 자연법칙을 물리학적 원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가 구체적으로, 그리고 자연을 설명하는 원리로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연법칙이 '하나님의 단순성과 불변성'으로부터 연역되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러한 그의 주장이 과장되었다거나 다른 언급과 불일치하는 측면을 지적하는 반증이 없는 限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Descartes가 확실한 지식을 얻는 것을 자신의 至上의 목표로 추구했음은 잘 알려져있다. [規則]에서 그는 확실한 지식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직관과 연역을 제안한다.
"이러한 모든 고찰로부터 우리는 몇몇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먼저 ... 인간에 의해 얻어질 수 있는 참에 대한 확실한 지식으로 향하는 길은 명백한 직관과 필연적인 연역뿐이다."([規則] AT X, 425)
'직관 intuition'은 "우리가 이해하는 명석하고 주의하는 정신의 생각으로,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이 쉽고 판명한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직관을 통해서 사물들 속에 있는 '절대적이고 단순한 본성'들을 알게 된다. '자연의 빛' 혹은 '명석하고 판명한' 등은 직관에 의한 지식획득을 지시하는 언명들이다. 따라서 물질의 본성이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이러한 과정에서 얻어진다. 그리고 '연역 deduction'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직관과 더불어 또하나의 앎의 양태, 즉 연역을 제안하는 이유에 대해 의심이 있을 수 있다. 연역은 확실하게 알려져 있는 어떤 다른 명제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으로서 어떤 것에 대한 추론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명하지 않은 매우 많은 사실들이 확실하게 알려지기 때문에 그것들은 각각의 개별 명제들이 명석하게 직관되는 연속적이고 중단없는 생각의 움직임을 통하여 알려진 참된 원리들로부터 추론되는 경우에만 이 구분이 행해져야 한다."([規則] AT X, 369)
그러나 이러한 정의에서 볼 때 연역은 그 형태와는 상관없이 직관이라는 행위에 의해 연결될 수 있는 모든 단계에 대해 적용될 수 있다. 물리학의 기본법칙들이 形而上學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연관관계를 통칭하여 Descartes는 '연역'이라고 불렀다. 일반적으로 연역이 필연적인 연관성을 나타내는 것임에 반해 그가 생각했던 연역이 이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D. Garber는 Descartes가 "삼단논법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의 논변으로 연역을 생각했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다른 참을 근거로 하여 어떤 참을 연역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을 때 우리는 논리학자들의 격언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몇몇 사람들은 놀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저항할 수 없이 필연적으로 결론이 도출되는 어떤 형식을 규정한다. ... 그러나 참은 종종 이러한 규정을 벗어나며 ... 다른 몇몇은 이러한 규정에 걸리지 않는다."([規則] AT X, 405-406)
위의 인용문에서 볼 때 Garber의 지적은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그가 어떤 논변을 연역적이라고 인정했는가는 이러한 정의로부터 완전히 결정될 수 없으며, 그가 생각한 '연역'이 정확한 논리적인 함축관계를 의미할 수 없음은 인정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관계가 '연역' 보다는 '설명'의 성격이 더 강하다는 주장이 있다. Descartes에 있어서 경험의 역할을 강조하는 D. Clarke는 세가지 자연법칙이 形而上學的 원리로부터 연역되지 않았음을 뒷받침하는 두가지 이유를 지적한다. 첫번째 이유는, Descartes가 자신의 形而上學과 물리학이 엄격한 함축관계에 있음은 인정한다면 물리학에 대한 논박이 形而上學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귀결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으므로, 그 연역관계를 '느슨하게 함으로써' 이러한 결정적인 귀결을 피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Descartes가 참의 원천으로서 이성보다 하나님의 계시에 더 우선성을 부여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典據를 들어 Descartes의 자연에 대한 주장들은 가설-설명적인 의도를 담고 있으며, 形而上學이 지식이론으로서 물리학 등의 과학적 지식의 가능성을 입증하는 것이라는 立論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Descartes의 著作의 도처에서 나타나고 그 자신이 반복하여 주장했던 입장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立論일뿐 그것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근거는 그것의 반대를 뒷받침해주는 근거에 비해 상당히 취약하다. 더구나 그 당시의 사회와 學界에 미치고 있는 교회의 영향력을 생각해 볼 때 Descartes가 이와 같은 언급을 하게 된 眞意를 의심하는 것은 지나친 일은 아닐 것이다.
Clarke가 제시한 두번째 이유는, Garber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논증과 연역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엄밀하지 않다는 것이다. '연역'과 '논증'에 대한 자세한 문맥적 분석을 통하여 그는 "그것들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지만, "'연역'이 똑같이 모호하거나 그렇지 않거나간에 적어도 논증한다는 것이 '설명한다' 혹은 '확증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음은 Descartes 자신의 언질로부터 명백하며... 이성의 자연적인 빛이 어떤 주어진 추론을 결론적이라고 평가한다면 그것의 논리적인 구조가 어떠하든간에 그러한 추론은 '연역'이라고 불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Descartes 자신이 '일상적인 경험'에 의한 확증을 주장했음을 지적한다. 즉, "만일 법칙들이 선험적인 形而上學的 명제들에 의해 함축된다면 그것들이 일상적인 경험에 의해서 확증된다는 사실을 讀者들에게 환기시키는 것은 불필요할 것이다." 또한 연역되었다는 이유 이외에도 자연법칙들이 인정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논변들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는 연역되었다는 주장을 강화해주는 근거는 아니라해도 적어도 그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근거는 아님에 틀림없다. '연역되었으며 더구나 경험에 의해서도 확증된다'라는 표현은 자연에 대한 법칙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흔히 행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주장에 동의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예를 들어 앞서 보았던 '물질적 실체의 본성은 延長이다'라는 形而上學的 원리와 '운동은 위치적인 변화이다'라는 물리학적인 정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음은 Descartes 자신의 언급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後者가 前者를 설명하거나 확증하기 위해 제시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사실상 그가 연역이나 논증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는 불분명하며, 적어도 그가 현대의 논리학에서 의미하는 엄격한 논리적 함축으로 간주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에 위험할런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법칙들이 하나의 가설로서 도입되었다는 주장은 해석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일뿐 Descartes 자신의 입장이 아님은 분명하다. 따라서 자연법칙들은 하나님에 대한 形而上學的 원리에서 어떤 의미에서든 '연역되었거나' 혹은 "그 법칙에 따라 하나님이 이 새로운 세계의 자연을 작동하도록 만든다고 생각되어야 하는 두세가지의 주요 규칙(즉, 자연법칙)"이라는 점은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물리학적 원리와 形而上學的 원리 사이에 가설적인 관계 이상의 강한 연관관계가 있음이 인정되는 限 Descartes의 形而上學이 어떤 오류를 포함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III. Descartes의 운동이론 검토와 Leibniz의 비판
1. 운동의 상대성 : 어떤 것이 움직이는가 ?
Descartes는 운동의 정의에서 '정지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물체에 대한 상대적인 의미로 어떤 물체가 움직이는가를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운동의 상대성의 두가지 측면을 구분해보자. 첫번째 상대성은, Descartes의 공간에는 아무런 기준점이 없기 때문에 위치나 방향은 상대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상대성은, 그러한 공간에서 운동하게 되는 물체는 다른 물체, 즉 정지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물체에 대해서만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Descartes가 운동의 정의를 두가지로 제시했음을 이미 살펴보았다. 그 때 그는 소위 "일상적인 語法"에 의한 정의가 다양한 의미를 갖는 '장소'라는 말을 포함하므로 그 정의는 불충분하다고 거부한 바 있다. 그 거부의 이유가 바로 이러한 위치와 방향의 상대성이었다. 우주 내에는 고정된 점이 없으므로, "어떠한 것도 영속적인 장소"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 기준틀을 채택하여 그 기준틀 속에서 관찰된 운동을 물체에 귀속시킬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렇게 해도 다른 기준틀에 따라 생각되어진 다른 경우에 대해 아무런 특권적인 지위를 가지지 못함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첫번째 상대성을 Descartes에 대해 好意的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즉, 그 당시 Galileo의 경우처럼 Descartes에게도 天體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어떤 것이 움직이는가는 매우 중요한 神學的 의미를 가진 문제였다. 그러한 문제에 말려들 것을 두려워하여 [世界]의 출판을 포기했던 그가 [哲學原理]에서는 운동을 상대적으로 설명하려는 의도를 논의 속에 삽입하여 논란거리를 회피하려 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태양과 지구 중 어떤 것이 움직이는가는 생각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주장은 神學의 입장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好意的인 입장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Descartes의 운동이론에는 다음과 같은 더 근본적인 불일치가 남아있다.
두번째 상대성에 의하면, 충돌하는 두 물체 중에 어느 물체가 움직이고, 움직여지는 물체는 어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더욱 곤란하게 된다. Descartes는, 마치 형태가 도형 혹은 형태있는 물체의 양태이듯이 운동과 정지를 "물체의 상이한 두가지 양태"일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두가지 양태들이 그 물체의 동등한 상태로 해석됨을 이미 보았다. 이는 Descartes의 운동이 그 이전의 전통적인 개념과는 달리 과정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에게 있어 운동은 진행되어가는 상태의 靜的인 표현이다. 만일 운동과 정지가 상대적으로만 지시될 수 있다면, 이 두가지는 '상이하다'고 생각될 수 없다. 물체의 양태는 "영향받을 수 있거나, 변형될 수 있는" 실체의 측면, 즉 물체의 어떤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 반면에 어떤 물체가 운동하고 있는지 혹은 정지하고 있는지가 단지 상대적으로 결정될 수 밖에 없다면 그러한 물체는 상대적인 양태를 자신의 상태로 가진다는 문제가 생긴다. 비록 몇몇 양태들이 서로 상대적으로 알려지는 경우는 가능하지만 어떤 한 양태가 상이한 양태에 대해 상대적으로 결정되는 경우는 생각하기 힘들다. 물체에 대해 또다른 양태로 주장되는 형태가 그 물체에 특정한 것임을 생각해볼 때, 운동과 정지를 상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운동과 정지를 동등한 두가지 양태로 생각한다는 것과 갈등을 일으킨다.
어떤 물체가 움직인다고 결정하는 것이 다른 물체에 대해서만 가능하다는 위에서 말한 두번째 상대성은 다시 연속체로서의 세계라는 개념에 관련된다. Descartes에게 있어서 우주는 연속적으로 맞닿아있는 물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들 사이에는 빈 공간이라는 것은 없다. 운동이라는 위치적 이동은 물체 사이에서만 규정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움직이는가'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Descartes는 어떤 물체가 운동하고 있다고 간주하는데 있어서 두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그는 "만일 서로 떨어져 있는 두개의 맞닿아 있는 물체들이 있다면 운동은 왜 그것들 중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귀속되는가"([哲學原理] 2부, 30항)라고 묻고 이에 대답한다.
"이에 대한 원리는, 운동을 운동하는 물체 전체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맞닿아있는 더 작은 물체의 주변으로부터 어떤 부분이 이동하기 때문에 지구 전체에 속한다는 것은 이해될 수 없다." ([哲學原理] 2부, 30항)
따라서 그러나 그 다음 항에서 그는 또다른 기준을 제시한다.
"각각의 물체는 오직 하나의 고유한 운동만을 가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과 맞닿아있고 정지해있는 물체의 오직 한 무리로부터 멀어져간다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哲學原理] 2부, 31항)
Descartes는 "사실상 어떤 물체가 상대적으로 다른 운동을 하는 많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을 수도 있지만, 나는 '한 물체' 또는 '물질의 한 조각'이라는 말로 주어진 시간에 이동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연속적인 물체로 구성된 세계는 명목적으로만 '하나' 혹은 '단일한'이라는 한정어구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 물체'라는 말은 그것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는 운동이 있는 경우에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첫번째 기준을 단일한 물체를 구성한다고 주장한 것과 비교하면 난점이 발생한다. 즉, 한 물체는 그것이 전체로서 움직일 때만 움직인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체가 전체로서 움직인다는 것은 또한 그것이 한 물체라고 말할 때 사용되는 기준이다. 만일 두 운동이 한 물체에 귀속되야 한다면 Descartes는 그것을 움직이는 물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한 물체가 두 운동을 가진다면 두번째 기준에 의해 그것은 한 물체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것이 움직이는가'를 결정하려면 일단 어떤 물체를 지칭해야 하지만, Descartes에 있어서 어떤 물체를 지칭한다는 것은 그것이 전체로서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위의 두 기준은 동일한 것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말하고 있을 뿐 어느 것이 움직이는가를 말해주지 않는다.
2. 연속적 운동개념의 요구
a. 直線운동과 圓운동 : 경향성
Descartes가 두번째 자연법칙에서 규정한 운동은 직선운동이다. 그러나 연속체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운동은 원운동뿐이다. 직선운동이 曲線운동, 즉 圓운동에 대해 우선성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여러가지일 수 있다. 그러나 운동이 직선적으로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운동의 정의에 의해 설명될 수 있는 것을 넘어선 것처럼 보인다. 운동은 단순한 위치적 이동이므로, 운동이 직선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은 또하나의 전제를 요구한다. Descartes가 제시했던 직선이 곡선보다 더 단순하다는 설명은 幾何學的인 고려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이 운동을 보존하는 방식이 '불변적이고 단순하다'는데 근거한다.
하나님은 바로 직전의 운동을 그 이전과 동일한 방향으로 보존한다. 따라서 물체가 직선으로 계속 움직이게 된다는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무한히 짧은 시간에 어떤 대상의 운동이 부여될 수 있는 유일한 경로, 즉 무한히 작은 線의 조각은 직선이라는 점이 밝혀져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단순성이나 불변성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시간에 대한 원자론적인 견해를 전제해야만 가능한 설명방식이다. Descartes는 투석기에 매달려서 회전하고 있는 돌의 운동을 "언제나 직선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성을 가지며, 강제 下에서는 원을 그리며 움직인다"고 설명한다. 이 설명은 지금까지 운동에 대한 그 자신의 설명과는 매우 다른 형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사실상 원운동하는 물체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는 직선운동으로의 '경향성 tendency'를 언급한다. 즉, 운동을 '위치적인 이동'으로 정의했던 것 이외의 다른 것으로 설명되어야 할 문제가 등장한 것이다. 이는 단지 그의 운동이론이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만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Descartes에게 있어서 운동은 물체가 가질 수 있는 상태 중에 하나이며, 상태라는 靜的인 개념은 경향성이라는 動的인 요소를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직선운동만을 보존한다면 원운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원인으로서의 경향성은 설명될 수 없다. 따라서 보존되는 것은 실제 운동이 아니라 실제 원운동의 경우처럼 모든 점에서 직선으로 운동하려는 순간적인 경향성이다. 순간적인 경향성은 한 물체에 있어서 실제 운동방향과 다를 수 있다. Descartes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종종 다수의 상이한 원인들이 동시에 동일한 물체에 작용하므로, 한 원인은 다른 원인의 효과를 방해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원인에 의존하여 그 물체는 동시에 상이한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경향을 가지거나 노력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哲學原理] 3부, 57항)
이 언급으로부터 '동시에 상이한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경향'은 위치上의 변화인 물체의 운동과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어떤 물체가 특정한 방향으로 운동을 하게 될 때 그 방향뿐만 아니라 그와는 '상이한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경향성'이 나타날 수 있음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Descartes는, "운동의 단순한 본성과 지속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관이 있으므로, 모든 지속을 결여한 운동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만일 그의 말대로 운동의 본성으로서의 양태와 지속으로서의 경향성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면, 이는 하나님이 어떤 지속적인 연속성을 제공하면서 불변적으로 모든 순간에 직선운동하려는 경향성을 보존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단 보존되는 것은 운동이 아니라 '경향성'임이 밝혀지면 운동의 상대성 문제는 위에서 지적한 '양태로서의 운동'이나 '순환논변'의 경우보다 더 심각한 모순을 드러낸다. 분명히 경향성은 상대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Leibniz의 初期 著作인 [物理學 硏究] (1671)는 내용상 Descartes의 이론과 많은 공통점을 갖는다. 이 著作의 첫번째 부분에서 그는 '추상적' 운동이론을 전개한다. 여기서 '추상적' 운동이란 개념적으로 설정된 延長的 대상의 운동을 의미한다. 이는 아직 그가 완전히 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 著作에서 특이한 점은 'conatus'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그는 물체의 운동이 오직 충돌에 의해서만 전달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Descartes의 설명처럼 운동의 量이 충돌 前後에 변화한다거나, 운동은 물체의 상태를 나타내는 양태라는 등의 靜的인 설명을 거부한다. "운동은 연속적인 것, 즉 정지의 작은 간격에 의해 중단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운동을 상태나 상태의 변화 등으로 생각하는 대신에 위치변화의 과정적인 측면, 즉 動的인 설명을 제시한다. Descartes가 '경향성'으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Leibniz의 'conatus'로 대치되어 상당히 잘 설명된다.
"비록 움직이는 물체가 멈춰지는 경우에도 자신의 운동을 진행시키지 않는다는 것은 부정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렇게 하려고 분투한다. ... 동일한 물체에도 동시에 반대되는 많은 conatus가 있을 수 있다. ... 왜냐하면 운동의 목적은 능동 conation이기 때문이다." ([物理學 硏究] L. 140)
이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Descartes의 경우와는 달리 Leibniz의 운동개념은 변화를 기반으로 하는 시간개념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을 포함하고 있다.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어떠한 것이나 분투하거나 움직이기 시작하고 멈추기 때문이다. 즉, 그 순간에 그것은 자신의 장소를 변경한다." ([物理學 硏究] L. 141)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시간개념이 명시적으로 등장한 것은 Descartes와 Leibniz의 운동이론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이 著作을 쓸 당시에 이미 數學的 微小 infinitesimal 이론과 연속체 continuum이론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 개념을 사용하여 그는 Descartes에 비해 훨씬 정교하고 분석적인 운동개념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 운동개념에 의하면 운동은 순간적인 위치변화 과정으로 간주되며, 원운동은 그 순간적인 변화를 나타내는 conatus 개념을 도입하여 잘 설명될 수 있다. 즉, 투석기에 매달려 있는 돌은 매 순간마다 여러방향으로 움직이려는 conatus를 갖는다. 원의 바깥으로 향한 conatus의 순간적인 분투는 줄을 팽팽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이 원운동을 하는 限 줄의 장력에 의해 직선으로 향하거나 원의 바깥으로 향한 conatus는 동일한 힘에 의해 저지되며, 그 결과 단지 원으로 움직일 수 있는 conatus만이 운동을 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에 의해 보존되는 것은 어떤 경향성을 가진 conatus이며, 幾何學的이고 운동학적인 Descartes의 운동이론에 대해 이러한 경향성 개념이 도입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는 귀결임에 분명하다.
b. 운동의 분석 : 'conatus'와 'impetus'
아마도 Leibniz가 운동개념을 완성시키는데 있어서 대표적인 기초개념으로 지속되어 왔던 것은 바로 'conatus'일 것이다. 원래 이 개념은 Thomas Hobbes로부터 '창조적으로' 빌어온 것이다. [De Corpore] (1655)에서 Hobbes는 conatus를 '미소운동 infinitesimal motion'으로 정의한다.
"conatus는 주어질 수 있는 것보다 작은, 다시 말해서 설명이나 숫자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 것보다 작은 시간과 공간에서의 운동이다. 그것은 한 점의 길이를 통한, 그리고 시간의 한 순간 혹은 점에서의 운동이다."
그는 conatus를 '노력 endeavour'으로 해석하여 물체의 장소이동뿐만 아니라 정신의 의도, 기억, 생각까지도 운동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함께 포괄하여 설명하고자 했다. 즉, 모든 대상을 운동하고 있다는 동일한 形而上學的 기반 위에서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만일 이러한 계획이 성공한다면 정신과 같은 非물질적 대상과 물체와 같은 물질적 대상 사이의 - Descartes式의 - 본질적 구분은 제거되고, 모든 대상은 그것들이 가지는 conatus의 정도차이만을 가지게 될 것이다.
또한 Hobbes는 Descartes의 '운동의 量'과 유사한 것으로 impetus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impetus는 움직이는 물체의 빠르기, 그러나 그것이 운동하는 몇몇 점 속에서 생각되어진 속력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impetus는 노력이 가지는 속력의 量일뿐이다. 그러나 전체 시간에서 생각해보면 impetus는 모든 시간을 통해 함께 생각되어진 움직이는 물체의 전체 속력이다. ... 어떤 물체의 속력은 다수의 빠르기의 총합, 즉 impetus에 의해 결정되는 量을 갖는다. 속력은 어떤 물체가 어느 시간동안 어떤 거리를 지나갈 수 있게 되는 능력 power이며 ..."
이 설명에서 물체의 '속력'은 단위시간당 물체가 움직인 거리라는 개념으로 보기 어렵다. 아마도 그의 속력 개념에는 물체의 크기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물체의 속력은 단순히 물체의 빠르기라기보다는 물체가 움직이므로써 가지게 되는 어떤 종류의 능력이라고 생각된다. 결과적으로 延長과 물체를 동일시하는 Descartes는 설명하기 힘든 경향성을 자신의 力學이론에 단순하게 덧붙였음에 반해, Hobbes는 이러한 난점을 conatus와 impetus로 구성된 독립적인 개념으로 해결했다.
그러나 兩者는 모두 幾何學的 이론기반 위에 있다는 공통점이자 한계를 가진다. 우리는 Descartes가 幾何學的인 기반을 가졌음은 이미 보았던 바이다. conatus의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Hobbes에 있어서도 이 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가 취하고 있는 幾何學的 기반과 마찰을 일으킨다. '주어질 수 있는 것보다 더 작은'이라는 언급은 사실상 점의 크기가 幾何學에서 제거될 수 있는 것임을 의미한다. 적어도 Hobbes에게 점은 부분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크기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幾何學的인 점은 그것이 아무리 작다고 해도 線을 구성하는 부분이다. 그에 따르면 크기를 가지지 않는 점에서의 물체의 운동, 즉 conatus의 총합은 바로 impetus를 구성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위치와 위치 사이에 있는 점은 무한개이므로 impetus는 결과적으로 무한한 量을 갖는다는 받아들이기 힘든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初期의 Leibniz는 Hobbes의 conatus개념에 거의 변경을 가하지 않은 채 그것을 자신의 이론 내로 도입한다. Leibniz의 정의는 이것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 정의는 幾何學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가 conatus를 도입한 것은 Hobbes가 한 것처럼 운동의 動的이며 연속적인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위의 경향성의 문제뿐만 아니라 앞으로 보여질 딱딱함이나 침투불가능성의 문제에서도 이 개념은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Leibniz의 conatus는 그의 실체개념이 전개되어감에 따라 幾何學的인 성격이 차츰 사라지게 되고 그 대신 물체의 內在的인 능동성을 표현하는 形而上學的인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된다. 특히 後期 이론에서 conatus는 '죽은 힘 dead force'이라는 상위개념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적어도 初期의 Leibniz와 Hobbes는 정지해 있는 물체가 중간과정없이 일정한 속도의 운동으로 갑자기 도약하지 않는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3. 운동과 延長性
a. 딱딱함과 침투불가능성
우리는 단지 延長만을 그 본성으로 갖는 물체를 개별적인 물체로 생각할 수 있기 위해서 운동을 그 설명원리로 도입했음을 이미 보았다. 그러나 여러가지 개별적인 물체 사이의 質的인 차이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 세계에는 延長이나 함께 움직인다는 사실만으로 구분되지 않는 여러 종류의 물체들이 있다. Archimedes의 두개의 王冠 경우처럼 만일 두 물체가 똑같은 크기와 형태를 가지고 서로에 대해 동일한 속력으로 움직인다면 서로가 구분된 물체라는 것은 알 수 있지만 그것들이 質的으로 다른 것으로 구분될 수 없는 것 같다. 그것들은 물론 개별적인 두 물체이지만 그 무게에서는 다른 金王冠과 銀王冠은 서로 質的으로 다른 물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에서 인용된 문단의 첫번째 문제는 아마도 Descartes가 설명하기에 가장 어려운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이러한 質的인 차이를 '딱딱함'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 설명은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한다. 물체의 크기나 모양이 감각에 의하지 않고 어떻게 지각될 수 있는가 ? 더구나 Descartes은 감각에 의해서 지각되는 성질을 모두 거부하고, 생각에 의해 그 본성을 탐구할 것을 주장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에 의존하는 이러한 논변으로 중요한 성질 중의 하나를 非이성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또한 우리는 지금 물체가 갖고 있는 딱딱함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설명은 극단적인 例를 들어 물체의 딱딱하다는 성질을 우리가 인식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성질 자체와 그것을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물체가 딱딱하다는 것은 두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번째 딱딱함은, 우리가 물체의 단위부피당 무게 혹은 질량을 보통 밀도 density라고 정의하여 물질의 성질을 나타내는 주요한 요소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게나 질량이라는 개념은 延長性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는 것이다. 물체의 딱딱함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상당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응축이나 희박에 의해 설명하거나, 세가지 기본적인 물질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설명은 선결문제의 오류를 일으킨다. 희박화되어 상대적으로 가벼운 물체를 설명하기 위해 더 가벼워야 하는 '다른 물체'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 '다른 물체'는 이 설명에 의해 다시 설명되어야만 한다. 또한 만일 우리가 이 설명을 받아들여서 '다른 물체'가 희박화된 물체보다 더 희박한 어떤 것임을 인정한다고해도 문제는 또 발생한다. 즉, 무엇이 이러한 異質的인 물체로 하여금 하나의 개별적인 물체로 행동하게 만드는가의 문제이다. 앞서 보았듯이 개별적인 물체로 생각하게 만드는 유일한 근거는 그 물체가 다른 물체에 대해 함께 움직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딱딱한 물체는 그 입자들이 서로에 대해 상대적으로 모두 정지하고 있음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 정지해 있다는 사실 이외에 딱딱한 물체의 부분들을 함께 묶어주는 접착제는 없다." ([哲學原理] 2부, 54, 55항)
그러나 물체의 상대적인 운동의 결여를 도입한 이러한 설명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Leibniz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만일 내가 종이의 한 부분을 민다면 밀려진 부분은 멀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반작용이나 저항력도 가정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멀어질뿐만 아니라 그것에 붙어있는 나머지 부분을 함께 움직이게 만든다." ([告白] L. 112)
소위 '응집 cohesion의 문제'라고 불리는 이것은 물체의 운동을 논의하는데 있어서 선결되어야 할 것이다. Descartes의 설명은 얼핏 보기에는 앞뒤가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어떤 물체의 한 부분이 움직여질 때 다른 부분이 함께 움직이게 되는 이유는 운동의 여부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Descartes 자신도 실제로 물체를 지시할 때는 밀도를 사용하여 무게나 질량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는 대신에 단순히 '물질의 量'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물질의 量 자체는 물체의 크기만을 의미할뿐 무겁거나 가볍다는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따라서 운동의 상대성 문제와 더불어 응집의 문제는 개별적인 물체에 대한 설명을 곤란하게 만든다.
두번째로 생각되는 딱딱함은 '힘에의 저항 resistance' 혹은 '침투불가능성 impenetrability' 등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는 물체가 외부의 힘에 대해 저항하거나 외부 물체가 닿았을 때 물체의 延長의 형태나 크기가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성질이 설명되지 않는다면 충돌에 의해 운동전달을 주장하는 모든 이론은 무너지게 될 것이다. Descartes는 물체가 충돌할 때 두 물체가 딱딱하거나 부드럽다는 차이에 의해 충돌결과가 달라짐을 인정한다.
"딱딱한 투사체가 어떤 다른 딱딱한 물체와 충돌할 때 멈추지 않고 반대방향으로 튀어나온다. 반대로 그것이 부드러운 물체와 만나면 자신의 모든 운동을 그것에 전달하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정지한다." ([哲學原理] 2부, 40항)
이 문단으로부터 '딱딱함'이 위에서 보았던 밀도와 비슷한 개념이 아님은 분명하다. 매우 촘촘하게 농축화되어 밀도가 매우 큰 납덩이가 서로 부딪힌다면 가벼운 나무공보다 더 크게 되튀어나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경험과 반대된다. 나무공에 비해 침투불가능성이 작은 납덩이는 충돌에 의해 찌그러지면서 되튀어나오는 정도가 감소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침투불가능성이나 힘에의 저항은 물체의 밀도라고 생각될 수 있는 딱딱함과는 구분되며, 오히려 응집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물체의 부분들 각각은 서로에 대해 자신의 장소를 다른 부분에 대해 보존하려고 분투하고 있다. 만일 이 분투가 실패한다면 그 물체는 응집하지 못하고 서로 분리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 부분은 다른 부분에게 자신의 장소를 내어주고 다른 장소로 밀려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체의 응집은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의 conatus가 서로에 대해 대립된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conatus 개념에 의한 설명은 물체의 충돌에서도 매우 적절하게 적용될 수 있다. 두 물체가 서로 충돌할 때 한 물체는 다른 물체와 표면이 닿으면서 그 물체에 압력, 즉 작용을 가한다. "압력을 가한다는 것은 이제껏 다른 물체가 차지하고 있던 장소로 들어가려고 분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충격을 받은 다른 물체는 이 작용에 대한 반작용을 일으킨다.
"충격 혹은 충돌의 시간에는 두 물체의 경계 또는 점은 서로를 꿰뚫는다. 즉, 공간의 동일한 점에 있게 된다. 충돌하는 두 물체 중의 하나가 다른 것의 장소 속으로 분투할 때 그것은 그 속에 있기 시작한다. 즉, 꿰뚫거나 결합되기 시작한다. ... 그러므로 서로를 밀어내거나 강제하는 물체들은 그것들의 경계가 하나이므로 응집상태에 있다." ([物理學 硏究] L. 141)
충돌하는 두 물체는 서로에 대해 밀어내는 분투를 행하기 때문에 반발하는 것이다. 물체의 충돌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은 물체가 가지는 응집이다. 응집은, 한편으로 물체를 하나의 개별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물체 사이의 충돌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응집은 물체를 생각하는데 필수적인 개념이다. Leibniz는 응집의 원인을 운동으로 설명한다.
"나는 응집의 一次的 원인은 움직임, 즉 동시발생적인 운동이라고 믿는다. ... 나는 균질적이고 전체가 동등한 분할가능한 물질 자체가 운동에 의해서만 분화된다고 믿는다." ([비판적인 생각] L. 406-7)
물체의 운동에 대한 그의 탁월한 분석은 물체 자체에 대한 논의로 진행하는 또다른 길을 열어주었다. 즉, 운동과 물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공간과 물체는 구분되어야 함을 알게된 Leibniz는 물체의 본성이 延長이라는 Descartes의 形而上學의 주장에 대해 논박을 전개한다.
b. '延長'에 대한 비판
Descartes의 延長개념에 대한 Leibniz의 비판은 먼저 延長이라는 속성과 延長的인 실체 자체가 동일시될 수 없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Descartes는 延長과 물체는 실체와 양태라는 관계이지만, 그것 사이의 구분은 단지 개념적인 구분일 뿐이라고 말한다. 물질적 실체의 속성으로서의 延長은 분명히 이 개념적 구분이 의미하는 조건을 만족시킨다. 그렇다면 이 구분이 물체에 있어서는 전혀 구분되지 않고 단지 그것을 이해하는 정신에 의한 '개념적인' 구분인가 ? 만일 延長과 물질의 구분이 정신에 의한 것이라면 우리의 이해가 延長만을 판명하게 지각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물질의 본성이라고 결론지은 결과가 된다. 이러한 해석은 Descartes의 가장 중요한 形而上學的 원리중 하나를 상당히 약화시키게 된다.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는 제외하고 우리는 여기서 다만 Descartes의 '개념적 구분'으로는 사실상 물체와 延長性이 다른 것이라고 말하기 힘들다는 것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延長과 물체를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없음은 분명하다. Leibniz 역시 이 점을 지적한다.
"생각과 延長을 생각하는 실체나 延長的인 실체 자체로 생각하는 것은 나에게는 올바르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은 것처럼 보인다." ([비판적인 생각] L. 390)
그는 延長과 물체의 동일성을 거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물체의 본성은 延長이다'라는 Descartes의 결론에 대해 비판을 전개한다.
그는 初期부터 Descartes의 延長的인 물체개념에 반대하여 非延長的인 존재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이 주장의 증명으로 그는 Zenon의 逆說을 생각나게 하는 例를 든다. 즉, 일정한 길이를 가지는 어떤 선분은 무한히 兩分될 수 있으므로 양 끝점의 어느 부분도 이 선분의 시작이라고 말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한분할가능한 것은 실제로 크기를 가지는 延長을 구성하지 못한다. 또한 延長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으로 물체들을 구분하기 어렵다.
"延長, 즉 크기, 형태 그리고 그것의 변양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물질적 실체는 없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서로에 대해 완전히 유사한 두개의 물질적 실체가 존재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는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第一眞理] L. 269)
'同一者 구분불가능원리 Principle of Identity of Indiscernibles'라고 불리는 이 원리는 물체에 또다른 어떤 것이 있어야 함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물론 그것은 延長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보다 더욱 강력한 것은 운동에 관련되어 제기된다. Descartes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初期에 그는 운동에 대한 고찰로부터 그러한 물체개념과 운동이 서로 양립할 수 없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나 물질을 좀더 정확하게 생각해보면, 운동가능성 mobility은 물체의 본성으로부터 나오지만 운동 자체는 그렇지 않다. ... 물체는 물질과 형태일뿐이고, 또한 운동의 원인은 물질이나 형태로부터 이해될 수 없으므로 운동의 원인은 물체의 바깥에 있어야 한다." ([告白] L. 111)
Leibniz는 여기서 물체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것과 물체의 운동 자체를 구분한다. Descartes의 延長개념은 공간 上의 장소를 차지하는 것으로 설명되므로, 물체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 즉 운동가능하다는 것은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물체 자체로 볼 때 어떤 물체는 한 장소에 영원히 머무르거나 또는 다른 물체에 의해 움직여져야 한다. 前者의 경우는 첫번째 자연법칙으로 설명된다. 즉, 외부의 원인이 없다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後者의 경우는 운동가능성과 운동 자체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Descartes의 운동이 물체가 가지는 양태로 정의됨을 보았다. 이는 물체의 운동가능성을 설명해줄 뿐 운동 자체는 설명하지 못한다. Descartes에 따르면 어떤 물체가 움직여지는 것은 움직이고 있는 다른 물체와의 충돌에 의해야 하지만, 움직이고 있는 다른 물체는 그 물체의 운동의 원인으로 생각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체의 본성은 延長이다. 그리고 延長에는 운동이라는 양태 이외의 운동에 관련된 어떠한 것도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 따라서 물체의 운동은 양태이므로 물체의 운동을 일으키는 원인일 수 없다. 어떤 물체가 다른 물체의 양태를 변화시키려면 첫번째 자연법칙에서처럼 '외부의 원인'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따라서 충돌에 의해 운동을 일으키는 물체는 자신이 가지는 양태 이외의 운동의 다른 원인을 가져야만 한다. 이 논의는 Leibniz 자신이 물체를 물질과 형태의 결합, 즉 延長으로 생각했던 것이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운동의 원인을 물체의 외부에서 찾게 된다면 그는 물체를 그 원인에 의해 다시 설명해야 하는 부담을 지게 된다. 이는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게 되므로 그 이후 그는 이러한 물체개념을 포기하고 물체의 운동과 운동의 원인을 물체 속에 있는 어떤 것으로 직접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앞서의 응집과 침투불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延長만을 본성으로 가지는 물체개념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더욱 강하게 암시한다. 물체와 공간의 주요한 차이점은 前者는 운동을 하는 것임에 반해 後者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이 延長的인 물체의 양태일 수 없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다른 어떤 것이어야 한다. 응집과 침투불가능성은 이 문제의 해답에 대해 실마리를 제공한다. 응집에 대한 설명에서 Leibniz는 conatus를 그 설명원리로 제시했다. 그러나 conatus는 물체의 부분이 행하는 동시적인 미소운동이긴 하지만 운동에 포함되는 것이므로 다른 방식으로 운동을 규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양태로서의 운동이 물체의 개별성을 보장하는데 실패했음을 지적한 그는 운동의 주체를 분명히 해야할 짐을 지게 되었으며 더우기 운동의 원인도 함께 설명되어야 하는 복잡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소시키기 위해서는 물체의 본질로서 延長 은 적절하지 않으며, 延長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본성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延長이 물질적 실체의 공통적인 본성을 이룬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매우 자신있게 주장된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이는 증명되지 않았다. 분명히 그것으로부터는 운동도, 작용도, 저항도 그리고 작용받음도 도출될 수 없다. ... 사실상 延長개념은 원초적인 것이 아니라 분해될 수 있는 개념이다." ([비판적인 생각] L. 390)
이는 결과적으로 실체개념에 대한 形而上學的 원리를 완전히 再편성하겠다는 야심적인 계획을 의미한다. 이 원리의 중심개념은 운동을 일으키는 작용을 설명할 수 있는 因果的 개념, 즉 '힘'이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힘이라는 개념은 아직 태동기에 있었기 때문에 통일된 내용을 가지지 못했다. 아마 힘개념을 보편적인 설명원리로 내세운 사람은 거의 Leibniz가 첫번째였을 것이다.
4. 운동의 量은 보존되는가 ?
앞서 살펴본 문제점들은 주로 물체의 본성으로서의 延長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Descartes의 '운동의 量'에 대한 Leibniz의 비판은 두사람 사이의 또다른 차이를 보여준다. 이는 외부세계를 설명하는 자연법칙에 관련된다.
Descartes가 자신의 체계를 세우는 시기를 전후해서 우주 내에서 운동과 관련된 어떤 量이 보존된다는 것은 近代 物理學에서 우주의 기본원리를 표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운동하고 있는 물체가 외부의 다른 원인이 방해하지 않는 限 계속 움직인다'는 그의 첫번째 자연법칙은 이러한 생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에 대해 Leibniz는 대체로 동의하지만 보존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Descartes와 의견을 달리한다. 그는 운동의 量이 보존된다는 Descartes의 주장을 매우 강력하게 비판했다. 운동의 量 보존법칙에 대한 그의 비판은 그의 初期 생각에서부터 後期 [單子論]에 이르기까지 일관적으로 강조되어왔다.
Descartes는 운동의 量을 물체의 量과 그 물체의 속력을 곱한 값으로 표현한다. 그가 제시한 충돌규칙에서는 이 보존법칙이 성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충돌규칙의 검토에서 보았듯이 충돌 전후의 운동의 量이 보존됨을 보이기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었다. Descartes가 단순히 하나님의 불변성과 항상성에 근거하여 운동의 量이 보존된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Leibniz는 "하나님의 항상성이 지극하다고 하더라도 ... 하나님이 보존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던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사실상 보존에 대한 Descartes의 주장은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하고 있다. R. Blackwell은 近代물리학에의 Descartes의 공헌을 언급하면서, 그의 보존개념이 形而上學的인 것이었음을 지적한다. 즉, '보존'이라는 개념은 물질적 우주의 구조에 內在한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現前하는 어떤 것, 즉 '불변성'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존되는 것이 운동의 量이라는 그의 주장은 자신의 운동이론이 물체의 속력과 크기 이외의 다른 운동의 요소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우리는 앞서 Descartes의 운동의 量을 논의하면서 그것이 물체의 크기와 속력의 곱으로 표시됨을 보았다. 이 때 속력은 크기만을 가질뿐 방향을 포함하지 않는 스칼라 量임에 주목했었다. Descartes의 운동법칙은 운동의 量과 운동의 방향, 즉 '결정 determination' 사이의 구분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앞서 세번째 자연법칙의 논의에서 Descartes는 운동의 量의 변화와 운동의 방향의 변화는 독립적으로 일어난다고 말한다. 이러한 설명방식에 대해 Leibniz는 "운동의 방향과 量을 구분하는 것을 인정하지만" 두가지 모두가 함께 변화하는 경우에 대한 검토를 요구한다.
"운동은 외부의 원인에 의해 파괴되기 전에는 단순한 상태로서 보존된다는 (Descartes의) 명제는 운동의 量뿐만 아니라 운동의 결정에 대해서도 참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우리가 방금 지적했듯이 운동하고 있는 물체의 결정이나 진행하려는 경향성은, 그 자체로 無 혹은 정지로 환원되는 것보다는 더 쉽게 감소하며 더우기 반대방향으로의 운동으로 변경되기 보다는 더 쉽게 파괴되거나 정지로 환원될 수 있는 그 자신의 量을 가진다." ([비판적인 생각] L. 397)
어떤 물체가 자신의 방향을 逆轉시키는 것보다는 자신의 운동의 量을 감소시키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이 Leibniz의 주장이다. 이는 그가 어떤 운동에 대해 정지보다는 반대방향으로의 또다른 운동을 가장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했음에 기인한다. 따라서 "어떤 물체가 단순히 정지하게 되지 않고 원래의 방향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되튀어나가기 위해서는 대립하는 더 큰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주장은 그가 운동을 연속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해준다. 앞서 보았던 침투불가능성은 충돌의 과정을 연속적인 것으로 만들어준다. 두 물체가 충돌할 때 서로 상대물체가 차지하고 있던 장소에 들어가려고 분투한다. 즉, "두 물체의 경계 혹은 점이 서로를 꿰뚫게 된다." 이것이 바로 충돌이다. 이때 각각의 물체들은 자신의 장소를 내주지 않으려는 분투를 하게 되고 또한 반대로 자신의 부분들이 쪼개지지 않도록 응집을 유지하려고 한다. 따라서 물체들은 서로에 대해 반발을 일으키게 된다. 그 결과 충돌 직후 동일한 크기와 속력을 가진 물체들의 경우 서로를 꿰뚫으려는 분투는 상쇄되고 자신의 운동방향의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려는 분투가 일어난다. 한 물체가 다른 물체보다 크거나 작은 경우에는 한쪽의 운동의 힘이 다른 한쪽의 반발하는 힘을 압도하므로 함께 진행하는 결과를 나타낸다.
충돌에 대한 연속적인 설명은 운동의 방향이 운동의 크기와 독립적으로 결정된다는 Descartes의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러나 문제는 해결된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또다시 '운동의 量'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Leibniz는 보존되는 것은 '힘의 量'이라고 대답한다.
Leibniz는 '힘의 量'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두가지 기본가정을 제시한다. 즉, "어떤 높이에서 떨어지는 물체는 자신의 방향이 바뀌어지거나 외부의 어떠한 것도 그것에 간섭하지 않는다면 원래의 높이에까지 되올려놓는데 필요한 것과 동일한 힘을 얻게 된다"는 가정과 "4만큼의 물체를 1만큼 올리는데 필요한 힘은 1만큼의 물체를 4만큼 올리는데 필요한 힘과 같다"는 가정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두번째 가정은 1만큼의 물체를 1만큼 끌어올리는데 필요한 힘을 한 단위로 하여 각각을 계산해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즉, 첫번째 경우는 1만큼의 물체를 4번 계속해서 1만큼씩 끌어올리는 것이되고, 두번째 경우는 1만큼의 물체 4개를 1만큼씩 끌어올리는 것이 되므로 兩者에 필요한 힘은 동일하다. 이 가정을 통해서 그는 Descartes의 '운동의 量 보존법칙'이 명백하게 틀렸음을 보여준다. 각각의 크기가 1과 4인 물체 A, B를 가정해보자. 그리고 물체 A는 4만큼의 높이에서 떨어지고, 물체 B는 1만큼의 높이에서 떨어진다. 첫번째 가정에 의해 두 물체는 각각 떨어지기 시작한 높이에까지 올라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며, 두번째 가정에 의해 두 물체가 얻게 되는 힘은 동일하다. 다른 한편으로 Galileo는 4배의 높이에서 떨어지는 물체는 2배의 속력을 갖게 된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에 따라 각각의 물체의 운동의 量을 계산해보면, 물체 A는 크기 1과 속력 2의 곱, 즉 2만큼의 운동의 量을 가지는 반면에 물체 B는 크기 4와 속력 1의 곱, 즉 4만큼의 운동의 量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두 물체의 운동의 量은 보존되지 않으며 그 물체가 가지는 힘의 量과 운동의 量은 일치하지 않는다. 만일 Descartes의 주장대로 운동의 量이 보존된다고 하면 두 물체를 연결하여 서로 힘을 전달하게 만들 수 있다. 가령 물체 B가 떨어져서 얻게 되는 힘으로 물체 A를 4만큼의 높이로 끌어올리고도 운동의 量은 남게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즉, 영속운동을 하는 기계를 만들 수도 있게 된다. 그러나 영속운동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세계 내의 운동이 어떤 식으로든 증가함을 의미하므로 하나님의 불변성과 항상성에 대해서도 모순된다.
Descartes의 운동의 量에 대응하여 Leibniz가 주장한 보존量은 '힘의 量'이다. 힘의 절대적인 크기는 힘이 가해지는 시간이나 속도가 아니라 오직 힘이 일으키는 결과라고 말해져야 한다. 힘이 속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사실은 운동의 방향도 역시 보존된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운동의 방향이 보존되려면 적어도 Descartes의 '운동의 量'으로 운동을 표시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운동의 크기는 운동의 방향을 포함한 어떤 量이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古典물리학에서 운동은 벡터로 표시된다. 그리고 어떤 방향과 크기를 가진 벡터의 절대적인 크기는 그 방향의 상대적인 결정에 따라 변화하게 된다. 따라서 충돌의 幾何學的인 분석, 즉 충돌방향이나 각도의 분석에 대해 운동의 크기는 상대적이다. 이에 반해서 벡터의 제곱은 數學的인 의미에서 방향이나 부호를 가지지 않는 절대값이다. Leibniz에 있어서 운동의 크기 혹은 힘의 크기는 절대적인 量으로 나타내어지며, 이는 그가 절대적으로 보존된다고 주장한 '힘의 결과'이다.
V. 맺는 말
우리는 이 글에서 Descartes의 二元論을 이루는 두 실체 중 延長을 본성으로 하는 물질적 실체에 주목했다. 적어도 延長만을 물질적 실체의 본성으로 인정하는 限 외부세계의 변화를 설명하려는 그의 시도는 충분치 못하며 더우기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첫번째 결론이었다. 물론 延長이 물체의 중요한 속성 중의 하나라는 점에는 반론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延長이 물체의 여타 성질들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본성이라는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통해 Leibniz의 비판은 궁극적으로 Descartes의 延長的 물체개념의 문제점을 드러낸다는 점은 분명하다. 물체에 있어서 능동성을 인정하지 않고 완전히 수동적인 본성만을 인정하는 形而上學的 원리에 근거하여 운동이론을 세우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Leibniz의 살아있는 힘은 Descartes의 운동의 量과 동일한 이론 내의 위치를 가지지만 단지 보존되는 물리량 이상의 깊은 形而上學的 함축을 가진다. 즉, 외부세계의 모든 변화는 실체가 가지는 살아있는 힘에 의해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되므로 외부의 원인을 따로 상정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 살아있는 힘은 하나님에 의해 실체의 창조와 함께 부여되는 것이므로 그 힘에 의한 변화를 설명하는 '예정조화'는 실체가 가지는 능동적인 측면을 반영하는 形而上學的 원리이다. 따라서 Descartes가 추구했던 대로 물리적인 변화를 완전히 幾何學的인 측면에서 설명하겠다는 시도의 성공여부는 그 설명이 근거하고 있는 실체와 운동에 대한 形而上學的 원리와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이는 우리가 논의의 서두에서 전제했던 "과학의 기본개념과 원리는 形而上學으로부터 원용되었다"는 기본가정을 확증해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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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PS) Studies in History and Philosophy of Science
* (JHP) Journal of History of Philos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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