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적 신체 개념: 그 존재론적, 인식론적 지위
이 현 복(한양대 철학)
1. 들어가는 말
모더니티, 그것은 하나의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이른바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 목적론적 자연관에서 기계론적 자연관으로의 전회를 감행한 사건이었다. 이제 더 이상 인간에게는 신의 가호 아래 신의 형상을 그리면서 행복을 꿈꿀 수 없는 시대적인 조건이 마련되었다. 사회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자연과학적으로 인간은 세계의 중심에서, 자연의 중심에서 독자적으로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독자적으로, 이 말은 인간의 자부심을 의미하기도 하기만, 그것은 동시에 고독의 심연 속으로 인간을 몰고가는 말이기도 하다. 이제 인간은 신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궁국적인 피안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주변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함으로써, 어쩌면 신 마저도 자기 영역으로 끌여들여 정당화함으로써 자신의 설 자리를 마련하고, 이 속에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현세의 행복을 추스려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이제 인간은 홀로 세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세계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해야 한다. 그렇다면 입지를 구축하는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고, 주변 세계는 어떻게 형성되어 있단 말인가? 근대인들은 어떤 시대의 인간들보다 이 문제를 절박하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를 알아야 세계를 통찰할 수 있겠고, 세계를 알아야 세계를 지배하고 정복할 수 있겠기에 말이다. 신이 세계 안에 설정해 놓았을 수도 있을 목적에 대해 탐구한다는 것은 무용한 것처럼 보였고, 그저 인간은 자신의 역량으로 세계의 법칙을, 그것도 수학적으로 측정될 수 있는 법칙을 탐구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으며, 심지어 인간 자신에 대해서도 그것의 목적인이나 실체적 형상보다는 작용인을 연구하는 데에 초점을 마추었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는 근대의 여명기에 살았다. 그들은 어떤 근대인 보다도 더 고독한 삶을 보냈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조국인 프랑스를 떠나 네델란드에서 은둔의 세월을 보냈으며, 스피노자는 유대교에서 파문당하는 고초를 겪으면서 광학렌즈를 닦으면서 사색의 세월을 보냈다. 그들은 스스로를 반성하고 성찰함으로써 영원하고 무한한 신과 만나고, 이 신과 더불어 주변 세계를 둘러 보았다. 그렇지만 주변에 시선을 던지고,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문제 거리를 제기하고 해명하는 주체는 여전히 자기 자신이었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철학적 화두는 어떤 삶이 행복한 것인가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후회없는 삶, 자유로운 삶이라고 마침내 단정했다. 그것은 인간의 조건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데카르트가 보기엔 인간은 유한하고 불완전한 존재자이다. 이것은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창조된 그래서 유한한 인간은 잘못과 죄악을 범하지 않을 수 없다. 잘못을 저지르는 않을 수 없는 인간에게는 데카르트가 본 것은, 그렇더라도 후회는 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포기도 체념도 단념도 아니다. 인간은 삶의 과정 속에서 개개의 사안에 대해 필연적으로 나름대로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런 때는 이런 결정을, 저런 때는 저런 결정을 반드시 내려야 한다. 결정에 따라 행동을 하고, 이 결정과 행동이 잘못되었으면, 비난을 받고 따라서 그 결정과 행동에 대해 후회를 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된다. 데카르트가 보기엔, 이 양심의 가책과 후회가 즐거운 삶을 방해하고 있다. 기쁜 삶의 영위 속에 영혼의 만족감이 있고, 이 영혼의 만족감 속에 인간의 행복이 놓여 있다면, 저 후회와 가책이 철학의 궁극적 제거 대상이 된다. 철학이 삶에 유용한 것이라면, 그것은 종국적으로 저것을 제거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철학적 수행을 하면서 어떻게 후회없는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단지 어떤 결정을 내리고 행동을 하고 난 다음에도 후회하지 말자고 다짐하면 족할 것인가? 물론 그럴 수는 없다. 데카르트가 장대한 철학적 체계를 세운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형이상학을, 자연학을, 제반 분과 과학을 연구했을 때, 그는 이것이 바로 후회없는 삶의 필요 조건이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신과 신의 본성 및 현존을 탐구하는 형이상학 혹은 제일철학도, 자연의 원리를 탐구하는 자연학도, 자연의 현상을 해명하는 분과 과학도 모두 이것을 향해 초점이 마춰져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사안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고, 올바른 결정에 따라 행동해야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른바, “무지가 죄이다”.
데카르트 철학의 지향점이 행복한 삶의 영위임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 출발점은 아는 길, 즉 인식론인 셈이다. 어떻게 인간은 자신을 포함한 세계의 본질과 현상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이것을 위해 데카르트는 우선 정신을 개선시키고자 한다. 정신이 맑아야 자신과 세계를 투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신으로부터 주어진 정신의 능력 혹은 이성이 혼탁해져 있음을 그는 발견한다. 이런 이성을 갖고는 세계를 올바로 인식할 수 없기에, 본래의 이성으로 귀환하고자 한다. 이성의 빛, 그 원래의 빛을 발하도록 갈고 닦고자 한다. 반짝반짝 빛나는 이성의 빛으로 이제 세계는 환하게 조명될 수 있기에 말이다. 혼탁한 이성은 수학적인 훈련을 통해 빛나는 이성으로 복구된다. 수학만이 의심의 여지 없는 확실성을 담지하고 있다면, 단순한 수학 문제를 검토함으로써 이성을 점차적으로 세련되게 만들 수 있다.1)
이성, 정신, 양식이 선입견이나 감각으로부터 해방되어 그 본래적인 밝음을 되찾았다면, 이제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나를 먼저 알아야 세계를 알 수 있겠기에 말이다. 인간은 분명 이성적인 동물이고 사회적인 동물이다. 이것은 고대의 전통에 따라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이런 노선을 밟지 않는다. 너무나 진부하고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인간은 정신과 신체로 합성된 존재자라는 상식적인 규정을 제시한다. 인간은 정신을 갖고 있는 동시에 신체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2) 그렇다면 정신의 본성은 무엇이고, 신체의 본성은 무엇인가? 또 정신을 통해, 신체를 통해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 정신이 모르는 것을 신체가 알 수 있고, 신체가 모르는 것을 정신이 알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아니 처음으로 돌아가, 인간이 정신과 신체의 합성체라면, 합성체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이고 그렇게 되어 있다는 주장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2. 데카르트와 신체
데카르트는 정신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본성은 사유(cogitatio)라는 것을 그 유명한 ‘방법적 의심’을 통해 알게 된다. 이 세상에 확실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모든 것이 의심의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고 생각하는 정신은 현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의 현존은 인식의 질서상 가장 먼저 증득되는 지식이다. 그래서 그것은 철학의 제일원리이다. 모든 것은 이제 이 원리에 의존해서만 인식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한에서 그것은 진리일 수 있다. 직관과 연역이라는 데카르트적 방법론이 바로 그것을 뜻한다. 신의 현존이 제일원리가 아니라 피조물에 불과한 정신이 현존한다는 사실이 으뜸가는 진리라는 주장은 당대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았다. 데카르트는 그래서 이런 사실을 주장하는 데에 상당히 신중했다. 바티칸이 이런 그의 주장을 수용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현존하는 정신은 오직 사유하는 것(res cogitans)이다. 즉, 정신의 본성은 오직 사유이다. 사유만이 정신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사유와 정신은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사유가 없는 정신은 인식될 수 없고, 정신이 없는 사유는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사유는 정신의 본질적인 속성이다. 다른 많은 능력은 그저 정신의 우연적인 성질일 뿐이다. 데카르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영혼에 귀혹시켰던 것 가운데 나에게 속하는 것은 없을까? 우선, 영양을 섭취하거나 걷는다는 것은 어떨까? 나는 지금 어떠한 신체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이것들은 허구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감각한다는 것은 어떨까? 이것도 물론 신체 없이는 일어날 수 없고, 나는 또 꿈 속에서 많은 것을 감각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나중에 감각하지 않았음을 깨닫을 적이 있었다. 사유한다는 것은 어떤가? 여기서 나는 발견한다. 사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만이 나와 분리될 수 없다.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 이것은 확실히다. 그러나 얼마 동안? 내가 사유하는 동안이다. 왜냐하면 내가 사유하기를 멈추자마자 존재하는 것도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필연적으로 참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정확히 말해 단지 하나의 사유하는 것, 즉 정신, 영혼, 지성 혹은 이성”3)이다.
그렇다면 신체는? 신체는 물체의 일종이다. 여러 물질적인 부품들이 일정한 방식에 따라 움직이는 자동기계이다. 물론 신에 의해 창조된 자동기계이다. 그리고 신체나 물체는 오직 연장된 것(res extensa)이다. 그 본성은 오직 연장(extensio)이다. ‘오직’이라는 말은 정신은 연장적인 것이 아니며, 물체는 사유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정신과 물체는 실체적으로 혹은 실재적으로 상이하다. 정신은 물체의 도움이 없이, 물체는 정신의 도움이 없이 그 자체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정신과 물체는 서로 상이한 실체이다. 실체는 다른 것의 도움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사물을 가리킨다. 그런데 정신과 물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것들은 신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신이 창조하고 보존하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신이 협력을 거두어들인다면 그것들은 무로 전락된다. 그래서 정신과 물체는 유한한 실체일 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실체는 오직 신뿐이다.
세계 속에서 영적인 존재자는 신과 천사를 제외하고는 오직 인간뿐이다. 인간만이 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신이 인간을 이쁘게 보아서 인간에게만 혼을 불어 넣었다. 다른 존재자는 어떠한 혼도 갖고 있지 않다. 그것들은 단지 물질 덩어리일 뿐이다. 이런 데카르트의 주장은 하나의 지적인 스캔들이었다. 인간 이외에 모든 창조물들에게는 혼이 없다. 식물에게도, 동물에게도 혼이 없다. 그래서 식물적 영혼(anima vegitiva)이나 동물적 영혼(anima sensitiva)이라는 말은 대상이 없는 공허한 단어에 불과하다.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허구에 불과하다. 짐승을 포함한 모든 자연의 세계 속에는 그 어떤 신비로운 영령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 인간은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해서 오래된 나무아래에서 절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따라서 자연은 단순히 조작의 대상으로 전락되었다. 수학적으로, 기계론적으로 자연의 세계는 분석, 해명될 수 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승리를 자축하는 순간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정신적인 존재인 것만은 아니다. 또한 물질 덩어리인 신체를 갖고 있다. 정신과 신체는 전적으로 상이하다. 그럼에도 인간은 정신과 신체로 합성되어 있다면, 합성체, 통일체라는 말은 또 무엇인가? 어떻게 상이한 것이 통일되어 있을 수 있으며, 또 통일되어 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리고 신체가 사유할 수 없다는 것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런 물음들은 데카르트의 당대에서부터 지금까지 문제시되고 있는 숙제이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신체 혹은 물체가 상이하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증명하고 있다.4)
1. 신은 우리가 명석 판명하게 인식한 모든 것은 우리가 인식한 그대로 만들 수 있다.
2. 우리는 정신이 사유하는 것인 한에서 물체없이 정신을, 물제가 연장된 것인 한 정신없이 물체를 명석 판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따라서 전능한 신은 정신과 물체를 서로 분리할 수 있다.
3. 신이 정신과 물체를 서로 분리할 수 있다면, 정신은 물체없이, 물체는 정신없이 존재할 수 있다.
4. 정신이 물체없이, 물체가 정신없이 존재할 수 있다면, 정신과 물체는 상이하다.
이런 정신과 물체의 상이성을 통해서 데카르트는 물체 혹은 신체는 사유할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대전제: 사유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정신이다
소전제: 물체는 정신과 실재적으로 상이하다. 즉, 물체는 정신이 아니다.
결론: 그러므로 물체는 사유할 수 없다.
사유할 수 없는 물체 혹은 신체와 사유하는 것인 정신으로 인간은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소박한 결론이다. 그렇지만 플라톤이 생각하듯이, 선장이 배 안에 있는 것처럼 정신이 신체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과 신체는 혼란스럽게 결합되어 있다. 그것들은 통일되어 있다. 이렇게 통일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감각이다. 배고품, 갈증과 같은 감각이다. 이런 감각은 정신으로부터 또 신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과 신체의 공동 작품이다. 이런 감각이 내 속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신체와 정신은 모종의 방식으로 결합되고 통일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형이상학적인 사물, 즉 정신과 신에 대한 성찰은 오직 순수 지성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고, 자연학적인 사물, 즉 물질적인 것에 대한 성찰은, 정신과 감각능력인 상상력이나 기억 혹은 감관의 도움으로 지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정신과 신체가 통일되어 있다는 것은 상식적인 차원의 성찰에 의해, 즉 일상적인 담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정신이 돌지 않았다면, 정신과 신체가 통일되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의심하겠는가 하는 주장이다.
철학사에서 데카르트는 스피노자 및 라이프니츠와 더불어 합리주의자 혹은 이성주의자로 거명된다. 그 반대 축이 홉스, 로크, 버클리, 흄과 같은 경험주의자이다. 일반적으로 합리주의는 인간의 이성만으로, 다시 말해서 감각의 도움 없이도 인식될 수 있는 지식이 있다는 주의이고, 경험주의는 모든 지식은 감각적 경험으로 환원 가능하다는 것, 즉 감각적 경험으로 환원될 수 없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라는 주장을 피력하는 주의이다. 그렇다면 데카르트는 오직 이성 혹은 정신 만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은 무엇이고, 그 위상은 어떠한가? 그것은 단지 형이상학적인 대상에게만 국한된다. 정신과 신을 인식할 때, 인식 주체는 이성만이다. 다른 능력, 예컨대 상상력이나 감관은 그 성찰에 있어서 오히려 방해 요인들이다. 그래서 이때 정신은 이런 능력들로부터 등을 돌려야 한다. 그래야 형이상학적 성찰은 성공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형이상학적 성찰은 삶의 단초일 뿐이다. 이것만으로는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오히려 이것을 발판으로 세계 속으로 나가야 한다.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그 삶은 이룩될 수 있다. 따라서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정신적인 능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비정신적인 능력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 긴박한 결정상황에서 우리는 추리하고 숙고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5) 저 난로에 손을 대면 우리는 정신적인 숙고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손을 피하게 된다. 이 본능성, 그것을 데카르트는 정신과 신체의 합성체로서의 구체적인 인간이 갖고 있는 본능, 자연적 본능(instinctio naturalis)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자연의 빛(lumen naturale)으로서의 이성과 구별된다. 자연적 본능에 의해서 우리는 많은 개별적인 앎을 얻을 수 있다.
이 본능 역시 자연의 빛과 마찬가지로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능력이다. 그래서 이 능력의 신뢰성도 상당하다. 이른바 ‘자연의 가르침’도 삶에 유용하고 어느 정도 진리성을 간직하고 있다.6) 이런 자연이 가르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허기와 갈증을 느꼈을 때 음식과 음료수를 필요로 하는 신체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신체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 이것은 자연의 빛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의 본능에 의해서이다. 또한 정신은 신체와 아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정신적 존재로서 우리는 신체와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자연이 가르쳐준다. 정신과 신체의 합일, 이것 역시 자연의 가르침이다. 나아가 우리 신체 주변에는 많은 다른 물체가 있으며, 이것들 중 어떤 것은 추구해야 하지만, 어떤 것을 기피해야 한다는 것을 자연이 가르쳐 준다. 이른바 외부물체의 현존 역시 자연의 가르침에 의해 인식 가능하다. 더 나아가 색깔, 딱딱함, 소리등과 같은 감각을 유발시키는 것이 물체 속에 있다는 것을 자연이 가르쳐준다. 만일 이런 것들 모두가 자연의 본능에 의해 알게되는 것이라면, 이것은 형이상학적 지식 못지않은, 아니 더 중요한 것들이다.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이 봉착한 문제들, 특히 유아론적 입장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자연의 빛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적 본능에 의해 열려진다. 데카르트는 이것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다. 자연적 본능에 의해서 알려지는 것들 무수히 많이 있음을 주장한 데카르트의 입장은 합리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데카르트는 편협한 합리주의자가 아니다. 아니 어느 누구도 이런 합리주의자가 될 수 없다. 반대로 경험주의자 역시 편협한 경험주의자 일 수 없다. 모든 지식을 감각적 지식으로 국한시키는 경험주의자는 아무도 없다. 극단적 경험주의자라고 말해지는 흄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흄이 개연적 지식을 주장한 것은 “사실에 대한 진리”에 한정된다. “관념들의 관계”(relations of ideas)인 수학적 진리는 보편적과 확실성을 담지하고 있다. 흄은 이것이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한 연구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형이상적인 명제 혹은 지식은 감각적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래서 정신의 내부에 대한 지식, 즉 정신의 본성에 대한 지식이나 그것의 확대판인 신에 대한 지식은 정신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그러나 정신 외부에 대한 지식, 즉 신체를 포함한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지식은 신체를 매개로 해서, 감각적 경험을 매개로 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 정신이 자기 외부로 외출하는 길은 오직 신체를 통해서이다. 시각을 통해서 외부를 볼 수 있고, 촉각을 통해서 느낄 수 있으며, 청각을 통해서 들을 수 있다. 이렇게 수집된 자료는 기억 속에 용이하게 저장되어 필요할 때마다 꺼내 볼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 물질적인 것을 머리 속에 그려보는 상상력도 결코 무용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감각이나 기억이나 상상이나, 이런 신체적인 것들을 통해서 세계에 대한 유용한 지식은 획득될 수 있다. 자연의 빛의 역량을 늘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일상적인 지식 정보가 우리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해주는 것이라면, 신체적인 역량을 늘리는 것 역시 중요하다.
3. 스피노자와 신체
우리는 지금까지 신체에 대한 존재론적 그리고 인식론적 지위를 데카르트에 국한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것에 대한 데카르트의 입장은 심신 이원론이요, 동시에 심신 합일론이며, 신체적인 것이 외부 세계의 인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입장은 합리주의의 창시자인 데카르트에만 국한되는 것일까? 그의 후계자인 스피노자와 라이츠니츠 혹은 칸트의 경우는 다른가? 우리가 보기엔, 별로 차이가 없다. 스피노자의 주저인 ?에티가?(Ethica)를 들여다 보면, 자유의 윤리학에서 스피노자가 신체의 중요성을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가가 쉽게 드러난다.
스피노자의 철학 역시 인간의 자유로운 삶, 행복한 삶을 궁국적으로 겨냥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그에게 있어 피할 수 없는 것임은 두말할 여지 없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를 따라 인간을 정신과 신체를 지닌 존재자로 규정한다. 인간은 정신과 신체가 결합된 존재자로서 이 세계 속에 던져진 ‘세계 내적인 존재자’이다. 그는 다른 인간 혹은 다른 물체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세계 속의 존재자’이며, 나아가 자신의 내적인 감정과 끊임없이 싸우면서 살아가야 하는 ‘자기 속의 존재자’이다. 타자는 항상 주체의 존립근거를 위협하고, 내적 감정은 주체를 세계에 대해 무기력하게, 수동적으로 만든다. 인간이 하나의 세계 내적 존재자 혹은 ‘자연의 일부’인 한 인간은 다른 것의 도움 없이는 현존할 수 없고 인식될 수 없으며 활동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바라 본 인간의 조건이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노력(conatus), 능력 혹은 욕망을 갖고 있다. 외부로부터 혹은 내부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힘을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다. 이런 자기 보존 욕망이 인간의 현행적인 본질이다.7) 인간이 정신과 신체의 통일체라면, 인간은 당연히 정신적인 본질과 신체적인 본질을 갖고 있다. 정신이 사유의 양태인 한, 정신의 본질은 사유적인 것이고, 신체가 연장의 양태인 한, 신체의 본질은 연장적인 것이다. 또한 정신의 현행적 본질은 사유능력이며, 신체의 현행적 본질은 외적 사물을 자극하고 또 자극을 받는 활동능력이다.
데카르트가 정신과 물체를 유한한 실체로, 신을 무한한 실체로 규정하면서 정신과 물체에게도 실체성을 부여하고 있는 반면에, 스피노자는 유한한 실체는 실체의 정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간주하고, 신만을 실체로 규정한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 있어 실체란 그 스스로 존재하고 그 스스로 인식되는, 그래서 존재와 인식의 자기 근거자만에 한정되기 때문이다.8) 그래서 정신과 물체는 실체가 아니라 실체인 신의 양태, 즉 실체에 의해 존재하여, 실체를 통해 인식되는 양태에 불과하다. 나아가 정신은 신의 속성 가운데 하나인 사유의 양태이고, 물체는 연장의 양태이다. 이제 사유와 연장은 정신과 물체의 본질적 속성이 아니라 신의 속성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정신과 신체로 구성된 인간은 신적 양태의 합성물일 뿐이다. 즉, “인간은 신 안에 있으며 또한 신 없이는 존재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어떤 것이다. 또는 신의 본성을 어떤 일정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변용이거나 양태이다.”9)
무한하고 영원한 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 무한한 것 외부에 또 다른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무한성의 자기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신뿐이고, 다른 개별자들은 신이 그 현존과 본질의 내재적 원인이고, 신의 드러난 모습이다. 그래서 신은 곧 자연과 다름 아니며, 이 자연은 하나이고, 인간과 다른 존재자는 단지 자연의 일부이다. 달리 말해서, 신과 신의 속성은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이고, 양태는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이다.10) 능산적 자연은 드러내는 혹은 표현하는 자연이고, 소산적 자연은 드러난 자연 혹은 표현된 자연이다. 사유 양태는 사유의 표현이고, 연장 양태는 연장의 표현이다. 사유와 연장이 유일한 신의 두 측면으로서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이, 그 표현된 것인 양태는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신에 있어 사유 능력은 행동의 현실적 능력과 동일히기 때문에, 곧 신의 무한한 본성에서 형상적으로 생기는 모든 것은 신의 관념에서 동일한 질서와 동일한 결합을 가지고 신 안에서 객관적으로 생기기 때문에, 관념의 질서와 결합은 사물의 질서와 결합과 동일하다.11) 사유의 질서와 사물의 질서가 상응한다는 것은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이자, 근세 관념 철학의 주조를 이룬다.
그러나 인간을 구성하는 정신과 신체는 서로 통하는 창문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정신은 신체에 대해, 신체는 정신에 대해 아무런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의 송과선 이론을 비판하고 있는 스피노자의 입장에서 정신과 신체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되는 있는가? 스피노자는 여기에서 획기적인 견해를 제시한다. 관념이 인간 정신을 구성하고 있으며, 그 관념의 대상이 바로 신체라는 것이다.12) 즉, 정신은 단지 신체의 관념일 뿐이며, 그래서 정신은 그 발생상 신체의 관념이다. 신체의 관념이 아닌 정신, 대상이 없는 정신은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다. 정신이 신체의 관념이라면, 정신과 신체는 이제 관념과 관념의 대상이라는 관계에 놓여 있다. 그래서 그것은 결국 다른 두가지가 아니라 동전의 양면이라는 방식으로 한 사물, 즉 인간의 두 측면일 뿐이다. 신체가 없는 정신은 존재할 수 없고, 정신이 없는 신체는 인식될 수 없다. 정신의 질서와 신체의 질서는 처음부터 그렇게 신적 본성의 필연성에 따라 상응되도록 결정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을 구성하는 것은 정신과 신체라는 신의 양태이지만,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신체와 신체의 관념이다. 그래서 정신과 신체는 인간이라는 통일적 유기체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만 서로 구별될 뿐이다. 이것은 신이 사유라는 관점에서는 사유 실체이고, 연장이라는 관점에서는 연장 실체이지만, 사유와 연장은 하나의 실체 속에 있는 구별 가능한 속성일 뿐이라는 스피노자의 주장과 상통한다. 그렇다면 이제 정신과 신체의 통일체로서 인간의 자기 보존 욕구능력은 정신과 신체의 보존 능력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에 따르면, 개별적인 사유 혹은 관념으로 구성되어 있는 정신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한 힘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적절한 신체를 필요로 하며, 신체 역시도 자기 보존을 위해 외적 물체를 필요로 한다. 신체가 외부 물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자극하고 또 자극을 받을수록, 정신은 더 많은 것을 지각한다.13) 따라서 신체가 외적인 물체로부터 자기 보존의 힘을 축적하면 할수록 정신의 사유 능력은 그 만큼 강해진다. 그러므로 인간의 활동 능력은 신체의 활동 능력의 증대를 통한 정신의 활동 능력의 강화에 의해 확장된다.
정신이 신체의 운동을 좌우할 수 있는 절대적인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듯이, 정신은 외부 물체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 정신은 단지 자신의 대상인 신체라는 문을 통해서만 외부 세계를 들어다 볼 수 있을 뿐이며, 신체가 받는 변용의 관념을 통해서만 신체를 인식할 수 있고, 또한 자신의 신체를 통해서만, 정확히 말해서 신체의 관념을 지각하는 한에서만 정신 자신을 지각할 수 있다. 외부 물체의 상이 신체에 각인되면 신체의 변용에 대한 관념이 생기고, 이 관념이 정신을 형성하고 있지만, 이 관념으로서의 정신을 다시 대상으로 하는 관념이 생기는 바, 이 관념이 바로 정신의 관념, 관념의 관념(idea ideae), 혹은 관념의 형상이고, 이것이 바로 정신이 자신을 지각하는 자기 인식 혹은 반성적 인식이다.14) 따라서 물체, 신체, 그리고 물체의 자극에 의해 신체에 각인된 상의 관념인 정신, 이 관념의 관념인 장신의 자기 인식이라는 순서로 소산적 자연의 질서는 이루어져 있다.
이제 인간은 신이 이 세계 속에 펼쳐 놓은 신적 질서를 바라보면서 그 한 부분을 차지하면서 거주하고 있다. 정신은 관념의 세계 속에 혹은 무한한 신적 지성의 한 부분으로서, 신체는 물체의 세계 속에 혹은 ‘우주의 얼굴’의 한 부분으로서 자리 매김되어 있기에, 인간은 결국 자연의 한 부분을 점유하고 있다. 그런데 세속적인 인간은 자연의 일부라는 자신의 숙명적인 조건을 간과하기 쉽다. 자신이 자연의 중심인 것처럼 혹은 자연의 기원인 것처럼 쉽게 착각한다. 모든 자연 세계를 단편적인 것으로 혹은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이 세계가 신의 영원성의 표현인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연속적이고 인과적인 자연의 질서를 파악하지 못하는 데에 인간의 불행이 싹튼다. 자연의 필연적인 질서 혹은 영원한 질서에 대한 무지는 지금 여기에 대한 집요한 애착을 초래하고, 이 애착에 대한 좌절을 삶의 돌이킬 수 없는 회한으로 간주한다.
자연의 필연적인 질서에 대한 인식은 직관지(scientia intuitiva), 즉 자연의 질서의 영원한 상 아래에서 전체를 관조하는 인식에 의해 도달될 수 있다.15) 그렇지만 이 직관지에 의해서도 인간은 신만이 누릴 수 있는 절대적인 자유에 도달 할 수가 없다. 그것은 인간은 단지 정신과 신체라는 양태의 통일체로서 자연의 일부라는 운명적인 조건 때문이다. 기껏해야 인간은 자신을 생기게 한 근원으로서 신의 모습을 직시하고, 신 속에서 자신의 위상을 올바로 인식하면서 일탈되어 있는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 안주하는 것에서 생겨나는 소극적인 자유만이 주어진다. 이 세상 만사로부터 나에게 어쩔 수 없이 주어지는 모든 불행한 사태를 일차적으로는 이성적인 이해와 인식을 통해 극복하지만, 내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포기하는 일이 곧 신적 질서의 필연성을 인식하는 것이고, 신을 지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변하고 일시적인 사물이 아니라 불변하고 영원한 사물인 신, 즉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 직관지의 특징이다. 이는 신적 본성의 질서에 참여하는 것이고, 따라서 신과 합일하는 것이다. 이것에서 신의 지적인 사랑(amor Dei intellectualis)이 움튼다.16) 신의 사랑은 오직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지적인 것이다. 지성에 의해서만 신의 사랑이 가능하다. 또한 신의 사랑은 인간 정신이 신을 사랑하는 것이고, 나아가 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정신이 신의 양태라면, 신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신이 정신을 사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고, 정신이 신을 사랑한다믄 것도 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17) 이런 사랑으로 충만된 인간은 타인과 외적 사물을 자신과 완전히 분리된 존재자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또 다른 부분으로 인식하여 그것을 사랑하고 관인한다. 모든 것이 자신의 위치에서 전체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고 활동한다면, 타자에 대한 증오나 질투도 없을 것이고, 따라서 최고의 자기 만족감, 즉 지복(beatitudo)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정신이 자신이나 외적 사물을 인식할 때 항상 신체라는 문을 통해야 하듯이, 정신이 시간이나 지속 아래에서(sub duratio)가 아니라 영원과 필연의 상 아래에서(sub forma aeternatis) 사물을 인식할 때도 역시 신체라는 매개를 통해야 한다.18) 정신과 신의 영원성에 대한 정신의 자기 인식은 신체의 본질을 영원한 상 아래에서 고찰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19) 이른바,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명제는 직관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적용된다. 신체의 변용의 관념인 정신이 명석 판명하게 혹은 타당하게 인식하는 한에서 사유의 영원한 양태이고, 이것은 또 다른 사유의 영원한 양태에 의해 결정되며, 이렇게 계속되어 모든 양태는 신의 영원하고 무한한 지성을 이룬다.20)
“많은 것에 적합한 신체를 가진 자는 그 가장 큰 부분이 영원한 정신을 소유한다”.21) 여러 가지에 적합한 신체를, 즉 외적 원인에 가장 적게 의존하는 신체를 가진 사람은 나쁜 정서에 거의 사로잡히지 않으며, 그래서 그 사람은 신체의 변용을 지성에 일치하는 질서에 따라 연결하는 힘에 따라 신체의 모든 변용을 신의 관념과 연관시키는 힘을 소유한다. 이로써 그 사람은 신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되며, 그 사람은 가장 큰 영원한 정신을 소유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외부 물체를 지각하기에 가장 적합한 신체를 소유한 사람은 그 만큼의 직관지를 소유하고, 신에 대한 사랑으로 충족되는 희열을 느끼며, 그 만큼 더 영원한 정신 혹은 지성을 소유하게 된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에 적합한 신체를 가진 사람은 나쁜 정서에 사로 잡히지 않으며, 그래서 그는 신체의 변용을 지성에 일치하는 질서에 따라 질서잡고 연결하는 힘을, 따라서 신체의 모든 변용을 신의 관념에 관계시키는 힘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더 이상 수동적인 인간이 아니다. 인식과 행위의 결단은 자기 내부에서, 신의 질서에서 비롯된다. 그는 능동적인 인간이며, 자유로운 인간의 전형이다. 이것이 바로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굴레에서 자유로, 상대성에서 절대성으로 나아가는 제2의 탄생이고 해탈이다.
“이런 인간의 신체는 여러 가지에 적합하기 때문에 다음의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즉, 이런 인간의 신체는 자신과 신에 대해 커다란 인식을 소유하고 그 가장 큰 부분이나 주요부분은 영원하며, 따라서 죽음을 거의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과 관계되는 본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사실에 주의히야 한다. 즉, 우리는 끊임없는 변화 안에서 살고 있고, 우리가 더 좋은 것이나 더 나쁜 것으로 변화하는 데 따라 우리는 행복하거나 불행하다고 말하게 된다. 왜냐하면 유아기나 소년기에 죽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말해지만, 이에 비해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을 갖고 일생을 보내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어린이나 소년처럼 아주 적은 것에 적합하고 외적 원인에 아주 많이 의존하는 신체를 가진 사람은, 그 자체만으로 고찰할 때 자신과 신과 사물에 대해 거의 의식하지 않는 정신을 소유한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서 그 본성이 허락하는 한 그리고 본성에 도움이 되는 한 무엇보다도 어린이의 신체를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려고 애쓰는 것이다. 즉, 많은 것에 적합한 신체, 자신과 신과 사물에 대해 가장 많이 의식하는 정신과 관계되는 신체로 변화시키려 애쓴다. 이렇게 변하게 되면 또한 앞에서 말해듯이 정신의 기억이나 상상력에 속하는 것은 모두 지성과 비교해 볼 때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22)
4. 맺음말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는 이성주의적 전통에 서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분명 정신의 능력인 지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지성 혹은 이성만이 참된 이론과 정당한 실천을 가능하게 해주는 능력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은 학문의 영역에서는 타당하다. 그러나 현실적인 인간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직면하는 다양한 사건 속에서 자신의 역량을 드높일 수 있는 기제는 오직 정신만이 아니다. 인간은 몸을 갖고 있고, 그 몸을 통해서 세계와 접촉하고 인식한다. 정신의 자기 인식도, 신에 대한 인식도 인식되는 자료가 있어야 가능하다. 인식 자료는 상당 부분 물질적인 것에서 유래한다.
데카르트가 정신 속에 선천적으로 내재하는 본유관념을 주장했을지라도 그 범위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심지어 그것 역시 현전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동기가 있어야 한다. 그 동기, 자극은 외적인 것에서 유래한다. 우리의 대부분은 지식은 본유적인 것이 아니라 외래적인 것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자기 정신에 대한 인식에 만족하지 않고, 타인이나 물질적인 것을 연구의 대상으로,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것으로부터 삶의 유용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이런 외적인 것을 직접 접촉하는 것은 정신이 아니라 신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스피노자뿐만 아니라 다른 철학자들도 거의 마찬가지 이다.
경험주의자로 일컬어지는 로크나 흄도 예외는 아니다. 인식의 주체는 물론 정신이다. 그러나 지식의 원천적인 자료인 관념을 구별할 때 그들은 반성과 감각을, 반성관념과 감각관념을 구별한다. 반성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것이고, 그것의 대상이 반성관념이다. 감각은 외부물체의 인상을 수용하는 주체이고, 이것의 대상이 감각관념이다. 그러나 감각이 없는 반성은 일어날 수 없고, 감각관념이 없이는 반성관념이 나타날 수 없다. 그래서 감각과 감각관념이 우선하고 일차적이다.
감각의 주체는 신체이다. 신체적 감각이 대상의 인상을 수용하는 창구이다. 이곳에서 모든 인식이 사실상 비롯된다. 그래서 신체는 경험론자들에게 있어서 인식의 출구인 셈이다. 신체의 자극이 없이는 어떠한 정신의 작용도 일어날 수 없다. 이런 것은 칸트에게서도 마찬가지다. 인식의 주체는 오성과 감성이고, 감성의 촉발에서 다양성이 주어진 다음에, 오성의 개념 작용은 일어나게 된다. 감성에 질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오성의 개념은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다. 따라서 칸트의 인식론의 출발점도 사실상 신체적인 감성이다. 모든 인식은 경험과 더불어 시작한다는 칸트의 명제가 이런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경험과 더불어”(mit der Erfahrung)이라는 말에 있어서 경험의 일차적 주체는 신체일 뿐이다.
참고문헌
1. R. Descartes, Meditationen de prima philosophia, 이현복 역, ?성찰/ 자연의 빛에 의한 진리탐구/ 프로그램에 대한 주석?, 문예출판사 1997.
2. B. Spinoza, Ethica, 강성위 역, ?에티카?, 서광사 1990.
La cartesienne conception du corps: le ontologique et epistemologique statut
Hyun-Bock LEE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는 모두 철학을 행복한 삶으로 나아가는 길(via)로 생각했다. 다시 말해서 철학이란 영혼의 평정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 간주했다.
그들에 있어 철학은 이론(theoria)과 실천(praxis)을 망라한 보편학(scientia universalis)이고, 이 보편학의 도달점은 실천이지만, 그 출발점은 인식론(epistemologie)이다. 왜냐하면 많이 알수록 잘 행위할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다. 그래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는 인간이 참된 인식(connaisance vraie)을 획득할 수 있는 길, 인식론을 철학의 전면에 내세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 참된 인식은 어떻게 가능하고, 또 그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하는 물음은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그들에 따르면, 엄밀히 말해서 인식의 주체는 순수 지성(ententment pur)이다. 순수 지성만이 지식(savoir)을 형성 혹은 발견할 수 있는 유일의 주체라는 것이다. 그 외에 다른 능력들은 그저 지성의 보조 수단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은 철학은 구체적인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형이상학적인 사물(chose metaphysique)이 아닌 물질적인 사물(chose meterielle)에 대한 인식에 더욱 정열을 쏟고 있다. 이런 인식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신체(corps humain)이다. 즉, 외적 세계에 대한 인식은 궁극적으로 신체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신체적인 인식, 감각적인 인식이 비록 절대적으로(absolute) 확실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행복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대부분의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는 신체의 현존(exitence)과 본질(essence)을 자세히 논의한다. 또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나아가 정신과 신체의 합성체(unite)로서의 인간과 신의 관계를 고찰한다. 이런 논의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어느 정도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신체에 관한 담론이 합리주의자들(rationaliste)에 있어서 다소 소홀히 취급되고 있을지언정, 그것은 자유의 철학(philosophie de liberte)에서 배제될 수 없는 핵심적인 부분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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