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 철학의 문제와 그 한계
(The Philosophy of Descartes-Its Problems and Limitation)
박상규
(Park, Sang-Kyu")
弘益大學校 문과대학 교수 ( HONG-IK UNIVERSITY College of Liberal Ares. Professor )
2-695-9401-02
pp.29-49
이 논문은 1994년도 홍익대학교 학술연구조성비에 의하여 연구 되었음. 영문요약
〈Abstract〉
〈contents〉
1. Cartsian Doubt
2. Cartsian Certainty
3. Problems derived
4. A puzzling matter of Morality
5. Historical Limitation
6. Affirmative appraisal
The Philosophy of Descartes has been recognized to have attained truth by the use of reason. And what he wart seeking was not to discover a multiplicity of isolated truths but to develop a system ol true Propositions in which nothing would be Presupposed which was not self-evident and indubitable. There would then be an organic connection between all the Parte of the system, and the whole edifice would rest on a sure foundation
With a view to discovering such an absolute certainty, he employed methodic doubt (or, Cartesian doubt) and thereby eventually found out the most evident truth in tIne affirmation ol'cogito. ergo sum'(I think, therefore I am) This basic truth was not derived from any other proposiition but was attained intuitively, he said. On this foundation of an ab,iolute certainty, he was now able to deduce his metaphyiiical reality, for instances existente of God and realm of the matter. The accepting of thin mind-body duality (thinking and extensional substances) has given rise to the problems and limitatation of his philosophy, of which the present writer treated a lot in this essay.
But, despite many difficulties and problems might be indicated in his dualistic philosophy. Descartes'influence upon modern sciences and Philosophy cannot be doubted. For a few illustration, we can cite Hegel and the German Idealistic philosophy, Husserl and the modern phenomenological philosophy, English philosophy of mind, his status in the contemporary "Modernity-Postmodernity" debate. Hegal looked on the philosophy of Descartes as a beginning of the development of absolute idealism and Husserl regarded it as an anticipation of Phenomenology : because, they have stressed on 'Subjectivity'as the Cartesian point of departure. Troublesme matter of mind-body duality in his philosophy also opens the way to the theories of mind and the currencl hot debates concerning post-structvalistic culture and society.
I.데카르트의 의심
사실 그대로의 모든 존재에 대찬 놀라움(경이, 그리이스인의 thaumazein)이 학문의 여명을 밝혔다고 한다면, 근세철학과 사상에 방향을 주고 박차를 가한 것븐 주어진 현실에 대한 심오한 회의였었다고 하겠다. 코페르니키쿠스, 케플러, 갈릴레이에 의해 정초된 천문, 역학, 물리 등 실증과학의 토대위에서 세계와 인간에 관한 유효한 정신적 인식에 도달함으로써, 스콜라 철학을 백지화하고 방법상의 새 혁명이 요청된다고 느낀 것은 바로 데카르트의 극단적인 의심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내성(內省)과 직관(直觀)의 철학인 프랑스 철학의 원조이며, 동시에 서양근세철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르네 데카르트는 1619년 11월 10일 밤, 하늘의 계시에 의해 어떤 관념을 얻었다고 전하는바, 이것은 학문의 방법에 관한 것으로서 오늘날 이해되고 있다. 데카르트자신의 발견으로 기록된 '해석기하학'geometrim analytique 이 기하학에 제시한 방법은 대수학이었다. 그것은 양(量)에 관한 과학으로서 고대인의 기하학보다는 훨씬 보편적인 것인바, 그의 이러찬 보편적 방법이 곧 철학에도 전용되기에 이른다.
1628년경에 쓰고 사후에 간행된 刃신지도의 규칙'Regulae ad directionem ingenii 에도 이미 이 방법에 대한 몇가지 규칙이 보이고 있거니와 최초의 프랑스어 철학서 '방법서설'Discours de la methide 1637 속에서 그는 제반 과학에 있어서의 진리탐구의 보편적인 방법이 되는 많은 규칙을 다음의 네가지로 요약했다.
(1) 분명히 진리라고 인식되지 않은 것은 어떠한 것도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 즉, 주의깊게 판단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자기의 마음에 명석판명하게 떠오르지 않는 것은 어떠한 판단도 내려서는 안될것.
(2) 문제를 모두 될수있는한 많이, 그래서 해결하기에 용이하게 작은 부분들로 분할할 것.
(3) 생각에 질서를 주기 위해서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쉽게 알수있는 것으로 부터 시작하여, 본래는 아무 순서도 없는 것들에게 까지도 순서를 매겨 차례차례로 가장 복잡한 인식에 까지 이르도록 할 것.
(4) 아무 누락이 없음을 확인할수 있을만치 모든 경우에 매거(桃擧)를 완전히 하고 엄밀하게 검토해 보도록 할 것. 1)
명증의 규칙, 분석의 규칙, 종합의 규칙, 매거의 규칙으로 각각 불리우는 이와같은 규칙에 관한 서술은 대상과는 독립된 지성 자체가 쓰는 방법을 규정하고 있다. 이것을 보편적 방법이라고 일컫는 것은 그것이 대상이야 어떻든 간에 여하튼 우리의 인식을 진리로 이끌어 가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땅법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의 정당함을 입증하고 형이상학이나 과학의 기초를 제공함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도 기초짓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점진적으로 의심의 여지없는 확실성의 근거에 도달하고자 순서있게 의심하는 일을 수행해 나갔다.
말하자면 그는 지성의 금욕을 수행찹으로써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로 알려진 저 불멸의명제에 도달한 것이다. 2)
감각을 신뢰해서 좋은가, 눈앞에 있는 것은 실재로 존재하며, 또 눈에 보여지는 대로 믿어서 좋은가. 그러나 실재로는 아무것도 존재치 않는데도 꿈에서는 그 존재를 의심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할 정도로 강한 표상을 느끼고 있다. '사이렌'이나 '사튀이르'와 같은 기묘한 형태의 구성물이 존재치 않음을 안다고는 해도 눈이나 머리 또는 손 등의 존재를 믿을 수는 있지 않는가, 또, 가령 여기까지는 의심을 한다해도 그 이상의 의심을 할수 있을 것인가.
결국, 그것들을 구성하는 하나의 간단한 것, 즉 신체적 자연 일반, 그 연장(延長), 형태, 양, 수, 시간, 장소 따위를 의심해도 좋은가. 산술과 기하학은 과학들 가운데서도 가장 확실한 것은 아닌가. 또 나는 전능한 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신이 전능하다고 하면 나를 기만하고 존재치 않는것의 존재를 나에게 느끼도록 할수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신이 존재치않는다고 하는것 까지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하는이도 있다.
그러나 신이 존재치 않는다면 나는 자기 존재의 원인을 신보다도 완전치 않은 것에 구하는 것이 되니, 나는 진리를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도 결국 그릇된 생각을 지니기가 쉽게 되리라. 그런데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교활 기만적인 악령이 존재하여 우리를 오류에 빠트리게 할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과학을 창시하는 마당에서, 우선 틀림없는 진리를 인식할 규준을 제공하겠다는 배려는 천만번 지당한 일로서, 이 결과 데카르트의 '의심'은 극단의 것이 되었고, 마침내는 '에포케'epoche(판단중지)를 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판단을 중지한다 항은 단렴을 의미하는데, 다행히도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의 과정에 주목해 볼때 다음의 증명이 필연적임을 인정하게 된다. 즉 설령 이제까지의 나의 생각이 잘못되었고, 또 가령, 악령이 존재해서 나를 기만하려고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를 기만하려면 내가 존재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아무리 나를 기만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뭔가 생각하는 한, 내가 아무것도 아너라고는 할수가 없다. 따라서 이런 일을 숙고하고 일체의 것을 주의깊게 음미한 결과, 최후의 결론으로서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고 하는 명제는 필연적으로 진이라는 것이 확립되지 않을수가 없다". 이것이 그의 제 2성찰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이라고 하는 유명한 명제의 요지이다.
데카르트의 사상형성에 있어 이 코기토는 결정적인 계기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두가지의 역할을 부과하고있는 것이다. 우선 코기토는 발견을 명시하는 최초의 진리이다. 왜냐하면, 이코기토를 방법적 회의에 의거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코기토는 또하나의 기능을 보증하는 특질이 내포되어 있다. 즉 이 명제가 지니고 있는 특질을 유의괘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명백히 들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최초의 인식중에서는 내가 인식하는 것의 명석판명한 지각밖에는 발견되지를 않는다. 이같은 지각은 만일 내가 그같이 명석판명하게 지각하는 것이 위(僞)인 경우가 있다고 한다면 나에게 진리를 보증하기에 불충분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내가 극히 명석판명하게 지각하는 것은 모두가 진이라고 하는 것을 보편적인 규칙으로서 받아 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3성찰은 이처럼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데카르트는 코기토로 부터 확실성을 주는 특질을 끌어내고, 모든 진리리 기준, 곧 그 시금석이 여기서 얻어지고 있다. 즉, 이후에 진인가 아닌가를 가리기 어려운 명제에 대해서는 명석판명한가 아닌가를 묻는 것으로 족하다. 명석판명하면 그 명제는 진이요, 아니면 그것은 의심되어 마땅하며, 확실히 될 때가지는 확신을 유보할 수 밖쉐 없는 것이다.
II.데카르트의 확신
의심할수 있는 일체의 것을 의심하고 명석판명한 명증성을 지닌 기본명제로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의 근본적 진리성을 확인한 데카르트는 의심의 저 깊은 늪을 헤어나, 확신의 세계를 도출해 나간다.
의식적 사실의 확실성과 그러한 의식활동의 준체로서의 '나', 즉, 자아의 존재를 확인한 그는 이제 그가 의심의 방법을 효과적으로 행사해가는중에 신념과 판단의 중지를 단행했던 모든 것. 즉 그 자신의 신체를 위시한 물적 세계 전체, 신의 존재, 과거의 세계, 수학의 세계 등에 대한 존재의 증명과 확인에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아르키메데스의 부동의 점'으로서의 의식의 확실성에 입각하여 그는 사고의 실체로서의 정신에서 연장의 실체로서의 물체의 존재를 연역코자했다 '제1철학에 대한 성찰' 의 본 제목이 '신의 존재와 영흔의 불멸이 논증되는 제1철학의 성찰'(제1판)로 부터 '신의 존재와 정신, 물체의 사실상의 구별이 논증되는 제1철학의 성찰'(제2판)로 바러고 있듯이, 신체와 신의 존재, 다시 말해서 의식작용은 확실한데 이와는 구별되어 있는 외적 존재세계의 확인이야말로 그에게는 중요한 과제가 되지 않을수가 없었다 신체는 분명히 사유하는 사람과는 다르기때문이다. 그러나 이 외계의 존재에 대한 증명을 그는 불가피하게 그 자신의 의식으로 부터 도출해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런데 그의 방법데 따르면 그가 명백하게 지각하는 것은 정신, 즉 사고하는 것res cogitarls 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요, 일차적으로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가능성은 여기에선 배제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 절차를 우회한다. 즉 어떤 초월적인 통로를 통해 신의 존재를 입증해 보고자 하는 것이니, 의식적 사실의 명증성이라는 데카르트적 인식론의 핵심이 손상되지 않고 이러한 일이 진행될수 있느냐는 문제가 될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스콜라 철학의 잔재를 완전히 일소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짙게한 그의 신 존재에 대한 증명의 집착과 종교적 이원론적인 형이상학의 구축은 명증성을 내세우는 데카르트의 미점을 흐려놓은 영구한 문제로서, 그 이후 철학의 역사를 또한 그렇게 방향지은 것이기도 하다.
신존재에 대한 데카르트의 논증도 물론 그 자신의 의식의 내용으로 부터 출발하는 것은 사실이다. 즉, 신의 존재는 불가지(不可知)의 것이라 하더라도 의식내에 신의 관념을 우리가 가진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완전무결하고 무한한 존재자로서의 신의 관념을 우리는 우리 정신 속에 지니고 있는데, 데카르트의 논증방식은 무엇보다도 스스로 자명(讓明)하다고 보는 전통적인 인과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이었다 즉, 어떠한 현상이던 거기엔 원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원인은 적어도 그 결과만한 실재성, 혹은 완전성을 지녀야 한다는 논법이다. 원인없는 결과를 상정한다거나 또 결과가 원인보다 그 실재성이나 완전성에 더 크다고 하면 그것은 무(無)에서 유(有)가 나온다는 모순을 드러내는 것임으로 합리적인 사고로서는 도저히 수용할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한하고도 불완전한 인간이 어떻게 이러한 완전하고도 무한한 관념을 소유할수 있는가. 그것은 그와 같은 존재가 인간정신속에 그러한 관념을 심어주지 않았다고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고로, 신에 대한 그와 같은 관념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 자체가 신의 존재를 이미 증명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3)
이러한 신존재의 증명은 물론 데카르트의 이성적 방법의 적용이기는 하지만, 역시 거기엔 난제가 수없이 끼어 든다. 이미 당대에 표현된 반론과 데카르트의 답변은 차치하더라도 버어나드 월리앙즈Bernard Williams 의 지적 4)
대로 데카르트 사상의 일반적인 문맥에 비추어 그의 논증에서 발견되는 두 가지 특징은 언급될만 하다 첫째는, 그의 논증이 뚜렷하게 명확하고도 결정된 신의 관념을 전제로 하고 있는 한편, 그것이 신의 무한성과 데카르트 자신(우리 자신)의 정신의 유한한 불완정성 사이의 대조를 들어내고 있음으넌 해서 이런 사실이 자아내는 어떤 분명한 긴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인간의 신 관념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매우 제한되고 불완전할수밖에 없다는 전통적 견해를 강화해 주는 것 뿐이다 이런 긴장상태는 비단 데카르트만예 있어서가 아니라 그를 뒤따르는 17세기사상가들, 특히 빠스칼에 있어 현저하게 나타났던 것이었다. 그 둘째는. 데카르트가 그토록 철두철미하게 호소하는 실재성, 혹은 완전성의 정도 개념이라는 것은 그가 자임하는바, 그 무전제적 탐구에 분명코 전통적인 관념의 도입을 허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가 상당한 정도로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고 본, 바로 그 전통사상의 일면을 또한 끌어 드리는 것이라고 하는 점이다. 우리는 놀랍게도 그의 적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이 여기에 침투되고 있음을 목격할수가 있겠다.
데카르트는 그 자신의 존재의 원인으로서 신을 괄어들이는 고찰 방식을 이용하기도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창조할수는 없다. 속성을 창조해내는 것 보다도 자기자신을 창조하는데는 훨씬 더한 완전성을 요하기 때문이다. 사고의 실체로서의 자기자신을 창조할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면 완전한 속성도 그 자신에게 부여할수가 있었을텐데, 이런 능력은 그에게 없는 것씨다. 또한 우리는 우리자신이 저 영원으로 부터 존재해 왔다고 생각할수도 없다 태초부터 계속 실체성을 지니고 내려오도록 하는데는 훨씬 더한 권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릇, 창조되어진 것들은 신의 계속적인 활동없이는 항상 간단없이 존재성을 상실해가고 있음을 보는데. 이는 신의 창조적 활동이 창조된 세계와 얼마나 강력하게 관련되고 있는가를 예증해 준다고 할 것이다. 요컨데, 데카르트 추론 일체의 기반은 신의 관념의 존재인 것이다.
데카르트가 가지고 있는 또하나의 신존재에 관한 중요한 논거 역시 신 관념으로 부터 나온다. 그러나 이번엔 불완전한 존재가 그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는 달리 그 관념 내용에서 비롯되고 있다(제5성찰). 이 논거는 데카르트가 존재의 속성을 신의 관념에 포함된 주요 완전성의 하나로 볼수 있다는 관념에 의거한 것으로서, 신존재의 존재론적 증명의 한 수정판이라고 볼수 있는 것이다. 요는 삼각형의 내각(內角)의 합(合)이 2직각이 되는 것이 필연적이듯이 신이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이 논거를 첫번째 논거보다는 덜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여하튼, 데카르트는 신의 본질쉐 관해 그의 전지전능성과 자기원인성을 고려한다. 전자에 의해 신은 우리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도 능히 할수 있는 존재일 뿐더러 과오를 범하거나 결함을 들어내는 존재가 아니요, 후자에 의해 그는 오직 그 자신떼 대해서만 작용인(作用因)이라는 것이다. 절학원리'Principia philosophiae 에서 그는 "존재하는 어떤 것이 존재하기 위하여 다른 어떤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것" 5)
을 실체(實體)라 했는데 이런 의미의 실체는 실로 신 하나밖엔 존재치 않을것이다. 사실상, 데카르트는 일차적으로 이 개념을 신에게만 적용하고 그 다음 이차적으로 (유추적으로만) 피조물에 대해서 적용했다.
여하튼 신은 과오를 범한다거나 결함이 없다는 사실로 부터 "그가 기만자가 될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왜냐하면. '자연의 빛'Lumen naturale 은 기만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어떤 결함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제3성찰).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신의 이와 같은 성실성에 근거해서만이 외계(外界)와 과거의 지식 가능성을 설명할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외계와 과거의 세계란, 명석판명한 관념의 방식만으로는 의심의 여지없는 의식의 내용으로 부터는 어떠한 확실성에도 도달할수 없게하는 문제가 아닐수 없다. 이미지나 감각만으로는 이들에 상응하는 과거도, 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물적 세계도 있을수가 없으리라는 가능성을 남겨 놓는다 이성에 관한한 이러한 가능성의 여지가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가 이같은 관념들에 상응하는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으려는 강한 경향성을 갖는다는 것 이것이 곧 데카르트의 논증의 본질이다.
물론 이러한 것의 실재가 없다고 하면 그런 실재에 대한 믿음에 관한 우리의 강한 자연적 경향성이 그릇된 것익겠는데, 그렇다고 찬다면 신은 피조물에게 그같은 그릇된 신념을 갖게 하도록 조직적으로 그릇치는 책임을 져야만한다. 신은 기만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은 우리를 기만하지 않는 성실한자이므로, 우리는 우리가 감히 강하게 믿으려는 자연적 경향성을 갖는 것들에 대해 잘못을 저질르지 않을 것이요, 따라서 과거도, 외계도 존재한다는 생각에 잘못이 없다고 귀결할수가 있다. 그러므로 물체의 존재는 긍정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이성에 따르면 물체는 연장이라는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명백하게 비추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6)
이와 같이 물체의 개념은 궁극적으로 신에 의해 그 타당성이 주어지는 것이면서 동시에 정신과 신에 대한 데카르트적 기본 관념과 마찬가지로 본유적(本有的)인 이성의 순수관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코기토에서 증명된 심적 여건들외에 독립해 있는 그 무엇으로서의 외적 세계. 즉 물체의 존재가 신의 존재의 매개로 확인.된 이상 사유로서의 정신과 연장으로서의 물체는 서로에 대하여 독립적이며 아무 영향도, 의존도 없는 두개의 실체로 인정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물체의 세계는 목적인(目的因)을 완전히 배제한 순전한 기계론으로 석명되는 것인바, 자연세계를 이해하는 관건인 기초학으로서의 수리물리학의 지위를 확고히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신과 물체라는 두 실체를 직접 대면할수는 없다.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 실체의 속성들이다. 그러니까 서로 상이한 실체들에 근거를 둔 이들 속성이 현현되는 한에서 그것들은 실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속성들은 모두가 같은 레벨의 것이 아니다 실체의 본질을 나타내는 주요 성질이 있는가 하면 이 속성에 매어 달린 덜 중요한 성질들이 있다. 주어진 한 실체의 주요 속성이 무어냐 하는 것은 우리가 그 사물의 불가결의 어떤 속성으로서 명석판명하게 지각하는 것일터임으로 사실상 실체와 그것의 주요 속성과의 구별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정신적 실체의 속성이 사유이듯이 물체적 길체의 속성은 연장이라고 하게되는 것이다. 연장없이 사물의 형상이나 운동을 생각할수가 없다. 반대로, 형상이나 운동없는 연장은 생각할수 있다고 해돈 말이다. 따라서 장,광,고의 연장이야 말로 물체적 실체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은 데카르트의 물체적 실체가 기하학적 개념으로 파악되고 있음을 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7)
속성은 그 실체와 불가분리의 관계이거니와, 이보다는 거리가 있는 양태(樣態)가 있다 거리가 있다고 함은 양태가 실체와 무관하게 존재할수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런 양태들없이도 실체가 존재할수 있다는 뜻에서인 것이다. 가령, 사유는 정신에 있어 본질적이지만, 정신은 사유 이외의 모든 정신적 양태들, 즉, 판단,표상,감정 등을 지닌다. 마찬가지로, 연장은 물체에 있어 본질적이나 물체의 양태라 할 양,형상.운동.크기 등은 그것의 본질적 속성은 아니면서 그것에 의존되어 있다. 8)
이런 견지에서 볼 때, 변화가 없는 신의 경우는 속성 이외의 다른 양태란 존재치 않는다 여하튼, 하나가 그것의 존속을 위해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자성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정신과 물체는 두개의 실체라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확립되는 것이며 따라서 자연에 대해선 운동법칙에 의한 전혀 기계적인 설명이 가능하다고 하는 기계론적 자연관의 형이상학적 정초가 이루어진 것이다.
III. 파생된 문제
정신과 물체(혹은, 신체) 를 확연히 구별짓는 이원론적 입장을 철저하게 지킨 데카르트도 이 이원론의 문제성을 그 생애의 만년에 들어서면서 예민하게 간파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정신이기도하고 신체이기도 한 인간은 정말 불가사의한 존재로서 그에게 있어선 심신(心身)의 어떤 교호작용이 엿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심신 이원의 관계 문제를 다룬 것이 그의 '정념론'(情念論)Les passions de 1'tome,1649 인바 보헤미아의 엘리자베드 왕녀로 말미암아 이 책을 서술할 기회가 주어진다 1642년 데카르트는 왕녀가 (성찰)을 읽고 평한 말을 듣고 감동하여 가까이 있던 왕녀를 헤이그로 방문. 이 재기발랄한 여인과 많은 서신 교환을 가졌었는데 그 가운데 1643년 5월 16일자 서한에서 왕녀는 이렇게 질문을 던졌다.
"인간의 정신은 사유하는 실체인 것에 지나지 않는데 어떻게 의지를 가지고 행동을 하기 위해 육체의 정기(精氣)를 움직일수가 있는지 듣고 싶습니다‥‥‥ "
이 예리한 질문에 심히 당황한 데카르트는 신체를 원인으로 해서 정신내에 일어나는 '빳시옹'Passion(수동,정념) 을 고찰하는 일에 착수한다.
데카르트의 체계에서는 정신과 물체는 상호 간섭이 없이 자체의 활동을 지니고 있으나 이제 여기에선 심신 양자의 어떤 밀접한 결합이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다. 스콜라적인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있어서는 인간존재란 마치도 질료에 대한 형상과 같이 신체에 대하여 영혼이 서는 하나의 통일성의 관계를 지님으로, 영혼은 인간의 지적인 생(生) 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감성적인 생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런 한에서는 영혼이 안간이라는 하냐의 실체를 형성하는 통일체를 이루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도 없겠으나 데카르트의 경우에선 이 양자간의 근본적인 관계가 없다는 그의 이원론의 문제를 왜 복잡하게 만들어 놓고 있다. 데카르트의 말대로 "나의 정신은 배에 타고 있는 도선사처럼 내 신체속에 있는 것" 9)
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자연이 가르쳐 주는바에는 어떤 진실이 있지 않을수 없겠는데, 자연이 만일 우리에게 고통을 느끼고 허기와 갈증을 느끼는 신체를 내가 지니고 있음을 알려 준다고 하면 여기에 무슨 진실이 있음을 의심할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자연은 이러한 고통, 허기, 갈증 등의 감각에 의해서 내가 그저 배에 탄 도선사 모냥 내 육체에 기거하는 것 만이 아니라 아주 긴밀하게 육체와 결부되어 있어 마치 그것과 더불어 내가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는 것을 지시해 주기도 한다. 만일 이와같지 않을 진댄, 나의 신체가 상해를 입었을 때 그저 사유적 존재로서의 나는 고통감을 느끼지도 못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와 같은 상해를 오성에 의해서만 지각해야 하겠으니까. 데카르트의 난관은 바로 여기에 개재한다.
명석판명성의 기준을 적용하면 심신의 현실적 관계는 명백하여 각기 하나의 완전한 실체로서 간주해야만 한다 그러나 현실적 경험은 영혼이 그저 신체에 깃들여 마치도 일종의 외부적 도구를 쓰듯 신체를 이용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기를 주저케 한다. 영혼은 신체의 영향을 받고 있고 신체는 영혼의 영향을 받아 어떤 면에선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양자의 교호작용이 양자의 통일체인 인간의 경우엔 불가피할것만 같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지극히 애매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기에 이른다.
"이 모든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혼이 사실상 신체 전부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며. 또 올바로 말해서 그것은 하나요, 어떤 면에서나 불가분의 것임으로 신체의 어느 부분은 제외하고 어떤 부분에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그러나) 영혼이 신체 전체에 연결지어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어느곳보다도 특히 그 기능을 좀 더 행사하는 어떤 부위가 있으며 이 부분이 뇌, 또는 심장‥‥‥이라고 보통 여겨지고 있다는 것도 역시 알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일을 검토해 보면 영혼이 그 기능을 직접 행사하는 신체의 부위가 절대로 심장인 것도 아니요, 또 뇌 전체이지도 않은 그 모든 부위들 중의 가장 내밀한 곳, 즉 그 한가운데 있는 어떤 아주 작은 선(線)이라고 내가 확언해 왔던 것 같다‥‥‥" 10)
데카르트는 이 "아주 작은 선"을 송과선(松果緣)으로 보았는데, 이는 필시 그가 뇌수에 하나 밖엔 없다는 독특성이 있고, 또 심신의 관계문제가 딴 동물들에는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의 결핍에 기인한다고 잘못 판단한 때문이 아닌가한다. 정신은 송과선을 직접 움직여 신체내의 이 기계적 변화들의 수압적인 전달체계라 할 '동물정기'(動物精氣)에 영향을 준다는 생각이다.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설명에 의하면 뇌수및 신경관에는 심장의 동맥혈로 부터 증발된 기체인 동물 정기가 충만하여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또 뇌실의 중심에 작은 선이 매달려 있는 바, 거기서 신체 표면에 있는 감각기관중에 대상이 가져다 주는 인상은 신경에 의해 뇌실의 내벽에 재현되며, 그것이 동물정기를 매개로 중심선에 전달되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정신의 영향을 받는것은 이런 정기의 운동의 방향일뿐 그 속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곧 '의지'의 행동방향인 것이다 반대방향으로는 감관에 대한 외적 대상의 영향과 같은 신체상의 변화가 정기에 의해 송과선에 전달되고 거기서 감각을 발생시켜 정신에 영향을 줄수가 있다고 한다. 11)
물론, 이 설명이 이원론의 틀로 인간의 경우에서의 심신관계에 대한 만족할만한 해팝을 제공했다고 볼수는 없다.
따라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말르브랑슈Malebranche. 줄랭스Geulinx 등의 '기회원인론'(機會原因論)과 스피노자의 '심신병행설' 라이쁘니찌의 '예정조화론' 등의 묘안이 나오는 등, 17세기 유럽대륙의 합리주의 형이상학의 개화가 이루어지거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문제는 궁극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아포리아'로 남는다.
데카르트는 이미 〈정념론〉 서두에서 이 양자의 관계를 보이는 것같은 결정적인 예.E. 정념이 정신상으로는 '수동'(受動)이요 신체상으로는 '능동'(能動)을 나타내는 이중적 구조이 것임을 명백히 함으로써 처음부터, 이 문제가 그의 이원론을 손상시키지 않고 대답되어질 것임을 암시한바 있었다 즉 "뭔가 새로 발생하는 것은 모름직이 철학자들의 일반적으로 쓰는 말로는 그것이 발생하는 것을 받아 들이는 주체쪽에서 보면 수동passion, 즉 정념이라 부르고 그것을 일으키는 주체쪽에서 보면 능동action 이라고 철학자들에 의해 불려지고 있다. 따라서 능동자와 수동자와는 많은 경우 매우 다르기는 해도 그것들은 항상 동일한 것이어서 그것은 두개의 다른 주체에 관계지어지는 데 따라 능동,수동이라는 두개의 이름을 지니는 것이다"
프랑스어의 '정념'이라는 말은 본래 '수동'이라는 의미인데 그것은 정신의 편에서 보아 수동태요, 신체 편에서 보면 능동태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신체를 능동자로 해서 일으켜지는 상념이 있는바, 그것이 마음의 수동=정념이라 불려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따라서 신체의 신경 작용에 의해 발생되어지는 수동적 의식인 것인바, 동물정기의 맹렬한 운동에 의해 일어나서 유지되고 강화되어 간다. 코기토를 원형으로 하는것과 같은 능동적 의식의 움직임, 즉 지성이나 의지의 움직임은 신체로 부터 전혀 독립적이어서 동물정기의 움직임밖에는 어떠한 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나 인간의 마음에는 뇌실에 있는 등물정기의 운동에 의하여 발생하는 수동적 의식, 즉 정념이라는 것이 있다고 보는 생각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기본적인 이 정념으로서 여섯가지를 들고 있다. 경이. 애정, 증오, 욕망, 기쁨, 슬픔. 12)
이들 정념은 모두가 신체에 관계되는 것으로 신체에 부합하고 있는 한에서의 정신에 대해서만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가령. '경이'는 무언가 새롭고 이상한 대상이 감각될때에 직접 생기는 정념이요, '사랑'은 정기의 운동에 의해 일어나는 정신의 어떤 감동으로서 정신으로 하여금 스스로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대상에 자신의 의지로 결합시키려 드는 것이다 또한, '증오'는 유해한 것으로서 정신에 떠오르는 대상으로 부터 거리를 두고져 의지하도록 정신을 촉구하는 것이요, '욕망'은 정기에 의해 야기되는 정신의 동요로서 정신이 자신에 적합하다고 상상하는 것을 미래를 향해 의지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기쁨'은 정신의 유쾌한 감동으로 정신에 의한 선(善)의 향수의 기초를 이루는 것인데, 그 선이란, 뇌의 인상들이 정신 자체의 것으로서 보여주는바의 선인 것이다. '슬픔'은 정말 무활동 상태로서, 뇌의 인상이 정신 자체의 것으로서 보여주는 바의 악으로 부터 정신이 받아 들이는 불쾌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다. 이 모든 정념은 외적 대상의 자극에 따라 신체내쉐 일어나는 동물정기의 운동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요, 정신 자체의 힙에 의해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데카르트 '정념론'의 골자이다. 그런만치 그는 자기의 기존 체계의 근간을 혼들어 놓지않고 교묘하게 심신관계 문제를 기계론적으로 설명하였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자각되지 않으면서 정념의 움직임이 정신 그자체의 것으로 받아 를여지고 이성적 의지에 의해 통제되지 않은채 내부로 부터 격발한다는 것에 유의하지 않을수가 없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그 메카니즘을 객관적이고 기계론적으로 분걸하여 그 원인을 인식하고 그리하여 거기에 따라 정념을 주체화하는 일 즉 그것이 지니는 수동성을 능동성으로 돌려 놓는 자유의지의 능동성에 합일시키는 일이 요구된다. 데카르트에게 있어 과연 이런 일의 수행이 가능할 겄인가? 만일 불가능하다면 인간 도덕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수가 있는가?
IV. 도덕의 문제
데카르트 철학에서도 도덕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의혹이다. 사실 그 많은 데카르트 연구가들에게서 조차 윤리.도덕의 문제에 초점을 두고 그를 고찰한 이는 별로 눈에 띄지를 않기 때문이다. 13)
뭐니해도 그가 철학의 방법적 탐구에 열중하고 그것을 통해 유독 빛나는 철학사상의 위치를 점유했다는 건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방법적 의심을 전반적으로 적용할수 있다는 사실은 곧 인간의 자유를 전제로 하며 이 자유의 인식이야말로 하나의 '본유관텀'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명증적인 기본 명제인 'Cogito, ergo Sum 이라는 것은 근본쏘여로서의 자유의지가 선행되지 않고는 획득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극단적인 의심의 작용속에 뛰어드는 것은 자유에 속한 일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를 창조한 이가 누구로 밝혀지건, 또 그가 비록 전능하면서도 기만적인 존재로 입증이 된다 할지라도 우리가 거기 대해 확실한 인식을 갖지 않는 것들을 논란의 여지가 없는 진리로서 받아 들이기를 삼가할수 있도록 하는 어떤 자유를 우리는 역시 경험한다. " 14)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누구나가 자연히 인간이 자유임을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인간이 자유임에 대해 우리는 확신을 가지는바, 이같은 확신은 신존재에 관한 확신보다도 논리적으론 선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신의 존재가 증명된 이상, 신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이 비추어 인간의 자유는 다시 검토를 받는 일이 필요해진다 왜냐하면, 신은 영원으로 부터 존재하는 것이어서 현재를 알고 또 미래를 예정하고 있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가 신의 예정과 어떻게 화해될수가 있는가의 문제가 야기된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여기에 얽힌 신학적 논쟁을 회피하려는 의도에서였던지 이 문제의 적극적인 해결을 기도하는 것 같지가 않다. 인간의 자유에 대한 우리의 화신과 신의 전능성에 대한 우리의 명석판명한 인식사이에 개재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지어야 할것인가? 데카르트에 충실한다고 하면 이런 문제의 해결은 우리의 오성능력을 벗어나는 것이 되리라고 본다. 그래서 그가 (철학원리)에서 제시하는 해결책은 우리의 사고의 유한성과 신의 무한성을 구분하는 것으로 처리될수가 있다는데 그칠 뿐이다. 즉, 신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예견하고 '예정'하나 인간의 의지를 결정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는 하등의 마찰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공존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은 인간이 그것을 수행하고자 하는 까닭에 그의 자유로운 행동을 예견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신이 그것을 예견하기 때문에 인간이 그것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문제를 건드리는 이 지점에서 데카르트가 신의 예정과 인간의 의지적 행동과의 충돌을 이토록 회피하는 방향에서 처리하고 있다는 것은 순수 철학적인 이론의 영역을 넘어 그 시대와 사회의 승인된 관렴과의 화해를 이룩하려는 철학자 개인의 의지가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이점, 그 뒤를 잇는 두 사람의 합리주의 철학자들, 즉 스퍼노자와 라이쁘니찌에 관련시켜 볼 때 그가 양자의 사이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말하자면 당시 교회의 교조적인 주장에 정면으로 충돌, 험난한 생애를 감수하는 스피노자와 현실순응 내지 현실 찬미의 '콘포미스트'가 되는 라이쁘니찌와의 중간 위치이다 그가 도덕 문제에 별반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자연철학에 열중했다고는 하지만, 이 자연철학 부문에서조차 그 결론이 교회의 주장과 어긋난다고 보여질 경우엔 서슴지 않고 발표를 삼가했다고 하는 사실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좀더 깊은 의미에서 도덕적, 실천적인 문제를 표출한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갈릴레이적 문제성을 여기서도 분명히 목격하는 까닭이다.
사실에 있어서 데카르트의 관심사는 오직 인간으로서 과오를 범하지 않는 문제에 집중되었다고 할 것이다. 즉 그는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경우의 명제에 대하여 동의하지를 않고, 또 동시에 한 명제의 진(眞)이 확실시 될 때 어쩔수없이 동의하지 않을수 없는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자유롭게 과오를 받아들이거나 거절하거나 하는데서 신의 책임을 벗어나게 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어쨌든 인간의 자유가 이와같이 전제된바에야 적어도 도덕론이 설수 있는 자리는 마련되었다고 보겠다. 사실 데카르트는 학문 전체의 통일성에 대한 비젼을 가졌었으며 이를 '지식의 나무' 상(像)으로 표현한바 있었다. 즉 그 뿌리는 형이상학이요, 줄기는 자연학, 그리고 가지들은 기타 제반과학, 의학 도덕 등의 학문이라는 것이었다. 15)
그러므로 그의 계획대로 한다면 참다운 도덕학의 구상이 분명 있었다고 할수 있겠으나, 실제로 이 문제를 만족스럽게 다룬 곳이 그에게서는 좀처럼 발견되지를 않는다 만년의 (정념론)에 윤리문제에 관련된 단편적 취괍이 눈에 띄일 뿐, 그 주제의 충분한 전개가 이루어진 것은 없다. 결국 그는 심신 분리의 이원적 형이상학설을 폐기하지 않고 심신합일의 경험적 사실을 어떻게 정합적으로 설명할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에 봉착하였는바. 여기에 성공했다고는 볼수가 없다.
V. 역사적 한계
오늘의 견지에서 볼 때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입장과 형이상학적 학설및 자떤. 윤리에 대한 이론과 주장에는 한결같이 그 역사적 한계를 들어내고 있다.
데카르트의 철저한 방법적 탐구는 주관의 명증성을 지향하게 함으로써 정신의 내면에로의 귀환을 촉구했다. 따라서 그 이래의 철학으로 하여금 의식의 심화를 통한 극도의 주관주의에의 경도를 초래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데카르트에게서 시작하여 헤겔에 이르기 까지 근대 서양철학이 기본적으로는 의식 중심적인 입장을 강화함으로써 하이덱거의 이른바 '존재상실', '존재망각'의 길을 계속 걸어왔다는 비판도 이런 뜻에서 그 적절성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호 이 철저하게 주관주의적인 철학이 존재로 부터 등을 돌리고 지식 일반의 입장에로 치중했다고는 해도 잠재적으로는 존재쉐의 지향을 깊숙히 그 속에 감추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 철학이 심적인 현실존재 자체를 문제삼지 않을수 없었던 것은 이런 이유에꺼이다. 우리는 여기서 데카르트적 '의식'으로 부터 출발하여 과연 현실존재에 도달하는 깃이 가능한 것인가, 의식으로 부터 존재에로의 전환이 논리적인 비약없이 이루어질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부딛친다. 이 문제는 분명히 '의식 대 존재' 의 도식이 아닌, 새로운 시각과 접근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같은 돌파구가 마침내 열린것은 데카르트로 부터 2세기 반이라는 오랜 세월이 경과한 이후이다.
훗설이 창도한 현대의 현상학은 데카르트의 중요성을 그 특유의 방식으로 인정하면서 오늘날 획기적인 철학상의 한 새로운 방법을 확립해 놓았다. 데카르트는 철학이 자기반성적인 자아의 성찰로써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고 물적 세계의 존재를 '괄호안에 넣음'으로써 그것을 주관, 즉, 의식적 자아에 관련된 현상으로 취급하게 되었는데 이 점은 곧 현상학의 선구로서의 어떤 역할을 했다고 볼수가 있다. 16)
그러나 그는 그 자신의 이 수속절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데서 단순히 근대철학의 한계점으로서 남게 된 것이다 자아를 순수의식으로서 다루어 순수주관의 현상으로서의 본질 영역을 개척하지를 못하고 자아를 하나의 사유실체로서 받아 들여 인과성의 원리에 입각한 철학을 전개찬 것이 바로 그의 한계라는 말이다.
데카르트와 훗설-이 양자사이에는 근본적인 면에서 놀라운 공통점이 존재하면서 동시에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다같이 수학자로서 자기시대와 철학의 타락상에 심각한 회의를 느끼고 대철(大哲)들에게서나 볼수 있는 소박성과 자신감을 가지고 철학을 근본적으로 다시 출발시킹으로써 의심의 여지 없는 확실성의 근거를 찾으려 했던 것은 양자의 공통점이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경우. 사유실체와 연장실체, 즉 정신과 자연의 근본적인 이분화(二分化)가 너무도 뚜렷해서 그것들만의 관계문제가 야기되었으나. 훗설에 있어서는 그런 문제가 해소되어 버린다는 차이점이 들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양자의 수학관(數學觀)에도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간과할수가 없다. 전자는 수학이 막 새로운 과학, 천문할에 대해서 그 화실성과 가치를 입증하기 시작한 16-17세기의 안정된 세계에 살았다 수학은 명석판명한 합리적 활동의 한 모델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였고 또 철학은 그것을 모방하면 될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는 모든 철학을 근거시킬수 있을 절대적으로 확실찬 제1원리를 추구했으며, 그것을 의심할수 없는 명제 "Cogito, ergo Sum" 에서 발견한다.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Cogito가 철학에서 갖는 기능은 곧 논리의 공준이 수학에서 갖는 기능과 같은 것이쪘다.
그러나 훗설이 일에 착수하는 19세기말에 와서는 수학의 공리조차도 의문의 대상이 되었다. 훗설은 철학이 결여찬 확실성의 근거는 수학과 논리가 아무리 확실해 보인다고 해도, 그러한 과학 내지 방법론의 이면에 까지 돌아가 봄으로써 획득되어야만 하리라고 믿은것이다 철학에 대해서 확실성을 주는 근거라면 수학과 자연과학에 대해서도 그와같은 근거를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2세기 반이 경과한 이후 데카르트철학에 대한 철저한 점검은 그의 철학이 오히려 덜 철저하다는 사실을 알게 하였고 따라서 더욱 엄밀한 학의 기초가 요청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점에서 '데카르트의 의심' 에는 차라리 문제가 있먼다고 보게된다. 세계의 존재를 체계적으로 의심해 감으로써 그가 사고한다는 것의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직관했다고 하지만 훗설은 데카르트의 이런 방법이 오히려 불만이었다. 좀더 철저하고 좀더 근본적이어야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특수적 사물들의 존재에 대한 의심은 사실, 세계존재에 대한 신념의 틀속에서 수행되고 있었다. 즉 의심되어져야 할 세계가 있다고 믿을 때라야 오직 그 세계의 특수적인 대상들(또는 세계의 특수적 지각들)을 의심할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데카르트의 의심을 엄밀하게 수행한다면 세계자체의 부정에 이르는 것이 되지 않을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이 방법적인 회의는 그 스스로가 사유적 실체임을 결코 의심하지 않음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의 문제는 늘 사유적 실체가 어떻게 비사유적 실체에 관계지어지는가를 설명하는 일에 걸려 있었는데, 이 문제를 그는 해결치 못했던 것이다. 그는 결국 화이트 헤드의 이른바 '자연의 이분화'Bifurcation of Nature 17)
의 한계에 부딛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현대의 현상학자들은 오히려 데카르트의 의심을 더욱 철저화함으로써 이 난관을 극복 한다. 즉, 세계의 비존재를 단언하지 않고, 그것의 실재 혹은 비실재에 관한 우리의 판단을 중지ePochal 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변화시키지 않은채 다만 새로운 견지, 새로운 관점에서 볼수 있게 하는 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이 판단 중지는 물론 우리 자신의 의식 Cogito에 강조점을 두면서도 데카르트에게서와 같이 새계내의 또 하나의 사물(대상)ruts cogita로서 생각되는 것이 아니다 세계의 본질의 한 상관자로서 생각될 따름이다. 그러므.E., 정신과 물체 이 두 실체사이의 실재적 구별에서 비롯되는 데카르트적 난점이 발생하지는 안는다. 정신과 물체, 의식과 사물, 주관과 객관 등의 구별은 자아의 순수 경험(의식)의 내재적 구조로 환원됨으로써 이의 분석,기술로써 족하다 실체로서의 심.신 이원성의 관계문제가 이렇게 극복되어지고 만다 데카르트의 명증적인 의식(순수사유)으로 부터 구체적인 존재에 도달하려는 난망(難望)의 작업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육화(肉化)된 의식의 지향적 구조를 분석,기술함으로써 사상(事象)의 구체성을 포착한다는 것이다. 18)
이와 관련하여 싸르트르나 메를로 뽕티와 같은 실존주의적 현상학 19)
의 입장은 더욱 시사적이다. 철학의 출발점이 개인의 주관성이라고 보아 Cogito를 제1차적 전제로 받아 들인 싸르트르도 타자의 존재앞에서 나 자신이 파악되고 있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즉 주관적 의식이라는 것도 세계내에서의 자아의 의식인 것으로 기술된다는 말이다. 정신과 물체, 의식과 사물의 이원적 실체가 아닌 이 양자의 교섭관계, 나와 타자와의 교섭관계가 이미 선재(先在)하며 따라서 더 근본적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의식의 존재 방식을 결정하고 있기때문이다 나의 헌실존재는 어떤 경우에도 홀로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직접적 교섭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의식을 던거 전제로 하고 이둘 상호간에 사회적 교섭관계가 성립한다고 보는 건은 오히려 사실을 전조시킨 생각이요, 하나하나의 의식이, 사회적 교섭 관계에 있어서 상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형성되고 있다고 해야 옳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명제, "인간의 의식이 그의 존재를 규정하는 건이 아니라 역으로 그의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고 한 바는 정당성을 지닌다. 확실히 고림화된 추상화된 의식의 상(像)ㅂ이 지워지고 상호침투된 구체적 의식의 상이 부각되고 있음을 목격하며 따라서 그렇게 독립된 실재들사이의 관계를 실체론적으로 무리하게 연결짓는 것이 아니라 이미 상호교섭과 관계하에서 형성된 명백한 현상을 주시하고 기술하는 일이 오늘의 학문의 과제로 되고 있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데카르트의 인식론, 형이상학, 우주론, 윤리학 등이 함께 안고 있는 역사적 한계성은 불가피한 것이다.
VI. 긍정적 평가
Cogito에 근거한 의식의 확실성 자아의 존재확인, 지식의 객관성 함리성의 보증-이러한 것들은 17세기 이래 프랑스 사상뿐만 아니라 전 서양철학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데카르트의 '방법'은 우연의 연속으로 부터 얻어진 사실을 뒤에 질서짓는 것이 아니라 생산적 이성으로 부터 출발한 관념의 생성운동인 것이었다. 코기토는 서양 중세시대 이래 거기서 헤어날수 없었던 저 캄캄한 어둠을 비춘 조명작용에 의해 인간의 사유가 자기자신을 의식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순수한 지성 작용에 의해 자기 스스로를 해방함으로써 인간을 해방하고자 한 것이었다고 볼수있을 겻이다.
데카르트 사상이 근대사상에 던져준 그림자는 너무도 짙었다.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그 중에서도 17세기 이래 19세기말에 이르기까지의 심리학의 발자취를 돌이켜 보고, 또 서구문명의 특질이라고도 할 산업, 공학적 진보를 가속화시킨 기계론적 가설의 개화를 돌이켜 보라. 이 형이상학적, 과학적 탐구의 두 방향은 사유와 연장(정신과 물체) 이라고 하는 두 실체를 구별한 그의 이원론에 의해 박차가 가해진 것으로서, 이러한 이원론의 해결을 위한 모색이 그 이후의 철학의 과제가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이원론적 체계의 철학적 문제를 떠나서, 데카르트가 근대적인 회의 작용을 개념 화한 첫번째 인물이었다고하는 점은 영구히 기억될만한 일이다. 왜나하면. 그가 바로 모범이된 이 근대적 회의작용은 그 이후의 모든 사고를 그리로 집중시켜온 축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데카르트 이래의 근대철학은 의낌하는 일의 분명한 표현이며 . 또 그 의심각용의 가기들로 이루어겼다". 20)
고 한 한나 아렌트 여까의 말에 퐁의하지 않을수가 없다. 인간은 오랬동안 긴체의 눈과 겅긴의 눈으로 본바에 다만 충길하기단 하면 실재와 긴리는 그의 감관과 이껑을 통해 쓰쓰로를 그대로 들어내게 되리라는 건을 신뢰할만큼 쏘박했거나 혹은 그렇게 기만당해 왔었다. 즉 감각걸인 긴리와 이겅적인 긴리의 이분화와 이 양가의 우열을 논하는 고전적 인식론의 한계와 모쑨이 이미 망원경이라고 하는 공같적인 도구의 충격과 이같은 새로운 현낄에 걸하여 철거한 근본걸 회의같용을 수행한 데카르트의 도건에 부딛혀 퇴객하고 만 것이다. 이제는 진리도 길개도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기는 건이 아니라는 이 분명한 논리앞에서 더 고식적이고 정태적인 실체관은 그 힘을 잃고 말앗다. 참된 기끽에의 길은 현강에 대한 인간의 관계 내기 교겁에 의해 열리고 있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보편적인 회의, 즉 일체(一切)가 일장춘몽이요 현길은 존재치를 않는 것이 아닌가, 또 그리고 세계를 지배하고 인간을 조종하는 건은 건긴(善神)이 아닌 악령인 것은 아닌가하는 이러한 악몽으로부터 벗어나는 건은 그 방법과 내용에 있어 마치도 진리로 부터 진실경계로, 그리고 실강으로 부터 긴빙껑에로 방향을 바꾸는 건과도 흡사하다. 인간정신의 현상적인 기능에로 방향전환을 이루고 있는 건이다. "우리의 정신은 사물 내지 진리의 척도가 아닐지라도, 우리가 긍정하고 부정하는 것의 척도는 분명히 되지 않을수 없다."고 하는 데카르트의 확신도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고 하지 않을수 없을 것이다.
지난 세기 이래. 우리는 역사시대의 대두를 보게 되었고. 첨예화한 까회의식의 부각으로 진리와 가치의 상대주의 내기 회의주의의 수렁에꺼 헤어나지를 몬하고 있다 식자와 무교육자의 구별이 흐려지고 도덕적 정당껑이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변조. 날조되는 정황을 우리는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학까들의 주장과 현실적인 제반조건이 한데 어울려 절대성의 근거는 이미 붕괴된지 오래이다. '아는 건은 힘이다'는 별로 사람들의 입에꺼 불려지끼도 않는 옛 노래가 되었고, 오히려 무지가 새 시대의 힘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차제에 우리는 데카르트의 '의심'의 오의를 되씹어 볼 필요가 있겠다. 걸령, 진리가 없다고 할런기 물라도 인간은 긴식할수가 있다. 또한 신뢰할만한 확실성이 존재하지 않을런지는 몰라도 인간은 역시 신뢰할만한 존재이다. 만일 우리에게 구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 자긴속에 있는 것이 아닐수 없으며, 따라서 오직 거기서 찾아져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의심하는 일로 생긴 의문에 대한 해결이 만일 존재한다고 한다던 그건또한 의심하는 일로 부터 나오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오늘날 군사가 의심스럽다고 해도 의심하는 일단은 적어도 확실하고 현실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데카르트에 따라서 익히 알고 있는 것이다.
'의심할수 있는 건은 일체를 의심해 본다'De omnibui dubitandum esc 라는 데카르트의 철학정신과 자세는 또 하나의 획기적인 문명시대를 준비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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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방법서설〉 제 2부.
2) 以下 〈弟1哲學에 대한 省察〉2 '인간 정신의 본성' 참조.
3) 〈성찰〉3; A.T.,VII, 50을 특히 볼 것.
4) Bernard Williams, "Descartes" in The Encyclopedia of Philosophy vol.2, Macmillan & Free Press, New York.
5) 〈철학원리〉I. 51; 혹은 A.T., VIII, 24 참조.
6) 〈성찰〉6; 혹은 A.T., VII 78-80.
7) 〈철학원리〉I, 52,53; 혹은 A.T., VIII, 25.
8) 〈철학원리〉I, 56: 혹은 A.T., VIII, 26.
9) 〈성찰〉6.
10) 〈情念論〉I,30-31.
11) 위 책 1,2,3에 걸쳐 자세히 논의되고 있음; A.T., XI, 328,342,349 참조 바람.
12) 위 책 §69.
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념'에 관한 그의 언급은 도덕 철학을 시사하는 윤리적 주제를 내함한다.
14) 〈철학원리〉I,6; 혹은 A.T., VIII, 6.
15) A.T.,IX-2, 14 I, 23-31.
16) 훗설은 〈데카르트?的 省察〉서두에서 그가 데카르트에게서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가를 밝히면서도 그의 한계를 지적해두고 있다.
17) A.N.Whitehead, The Concdpt of Natere, Ch.II(pp.26-48) Cambridge at the University Press, 1955 참조.
18) '육화된 의식'은 현상학자들중에서도 특히 Merleau-Ponty의 〈知覺現象學〉에 등장하는 주여 개념이다.
19) J-P.Sartre, L'etre et le neant, 1943. M.Merkeau-Ponty. Phenomenologie de la Perception, 1945 볼 것.
20) Hannah Arendt. The Human Conditi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 London, 1958),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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