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의 김각론
정 대 훈 서울대 철학
머리말
필자는 논문을 쓰는 동안 데카르트의 철학 안에서 논쟁점이 되는 세 가지 주제를 발견했다. 첫째 주제는 영혼과 신체의 관계의 문제이다. 영혼과 신체는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양자는 서로 결합되어 있는가, 아니면 서로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가? 양자는 인과적으로 상호 작용을 하는가, 아니면 양자간의 직접적인 작용은 불가능한가? 둘째 주제는 데카르트의 '감각 내용(sentiment)' 개념과 관련한 그의 '의식(conscience, conscientia)' 혹은 '사유(pensee, cogitatio)' 개념이다. 감각 내용은 정신적인 현상인가, 아니면 물질적인 현상인가? 그것은 정신 혹은 의식 없이도 가능한가, 아니면 항상 의식과 관련되어야만 가능한가? 감각 내용이 항상 의식과 관련된 사유의 양태라면 감각 내용과 의식의 관계는 무엇인가? 의식은 항상 감각 내용을 수반하여 그것을 반성적으로 파악하는가, 아니면 의식은 감각 내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감각 내용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인가? 이 주제는 데카르트와 동시대인이면서 {성찰}과 함께 출간된 {반박과 답변(Les Objections et les Reponses)}의 두 반박자인 홉스(T. Hobbes)와 가센디(Gassendi)가 이해하는 의식과 감각 개념이 데카르트의 의식과 감각 개념에 비교되어야 온전히 이해될 것이다. 셋째 주제는 (합)목적성(finalite)의 개념이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형이상학과 자연학에서 이 관념을 배척했다. 그리고 영혼과 신체의 결합과 관련해서만 이 관념을 인정한다. 영혼을 탐구하는 학문이 형이상학이고 물체를 탐구하는 학문이 자연학일 때, 영혼과 신체의 결합과 관련해서 형이상학과 자연학에 대응하는 어떤 학문이 성립하는가? 아니면 학문의 영역에서 배척되는 것처럼 보이는 (합)목적성의 관념이 영혼과 신체의 결합과 관련해서 학문적 지식을 대체하는 어떤 기능을 할 수 있는가?
첫째 주제와 셋째 주제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데카르트 이후의 근세 철학사에서 지속적인 문제가 된 영혼과 신체의 관계의 문제는 데카르트에게서 영혼과 신체의 결합의 보존이라는 (합)목적성의 관념에 의해서 특징지어질 수 있다. 1644년에 출간된 {여섯째 성찰}과 1649년에 출간된 그의 마지막 주저인 {정념론}에서 이 관념은 데카르트의 사유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둘째 주제는 다른 두 주제와의 명시적인 연관이 발견되지 않는 이상 따로 다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지면 관계상 이 문제가 따로 다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위에서 말해진 세 가지 주제 중 서로 연관된 두 관념이 다루어질 것이다. 영혼과 신체의 결합이라는 관념은 이 결합의 보존이라는 (합)목적성의 관념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영혼과 신체의 결합은 논리적 필연성에 따라서 영혼과 물체로부터 반드시 연역될 수밖에 없는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라, 사실적이고 경험적인, 따라서 논리적으로는 우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어떤 원리가 작용하여 영혼과 신체의 결합을 지배한다. 그 원리는 영혼과 신체의 결합의 보존이라는 (합)목적성의 원리이다. 나아가서 이 두 관념의 연관이 다루어질 때 감각 내용과 정념(passion)이 반드시 함께 다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감각 내용과 정념은 영혼이 신체와 결합되어 있는 한에서 생기는 현상이며, 이 결합의 보존이라는 (합)목적성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합)목적성의 원리가 실행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두 현상 때문이다. 이 현상들은 (합)목적성의 증거이자, 영혼과 신체의 결합의 증거가 된다. 이 둘은 영혼과 신체가 상호 작용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 상호 작용은 논리적인 근거를 가져야 하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적인 성격의 문제이다. 감각 내용과 정념은 영혼과 신체의 결합의 보존이라는 합목적성을 위해 기능하면서 영혼과 신체가 상호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증명한다.
아래에서는 우선 데카르트의 철학 내에서 영혼과 신체의 결합이라는 주제가 가지는 대략적인 위치와, 일반적인 철학적 주제로서의 영혼과 신체의 관계 문제에서 영혼과 신체의 결합과 상호 작용이 가지는 난점, 그리고 데카르트에게서 이 난점이 해결될 수 있는 방향이 검토될 것이다(1장). 그리고 나서 데카르트의 감각 비판 과정을 통해서 드러나는 감각 내용의 성격을 검토할 것이다. 감각 내용은 영혼과 신체의 결합의 보존이라는 (합)목적성을 가진다는 자신의 성격을 통해서 영혼과 신체의 결합과 상호 작용의 증거가 된다(2장).
1. 영혼과 신체의 결합
데카르트는 일반적으로 합리론(rationalisme)의 계보에 속하는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데카르트에 관해 쓰여지는 글은 명석 판명한 인식에 근거한 직관과 연역의 방법에 의해 구축되는 그의 학문론을 다루리라고 예상되는 것이 보통이다. 또한 그의 철학은 명석 판명한 직관과 연역에 근거하여 영혼과 신체(일반적으로는 물체)를 구별하여 순수하게 비물질적인 사유와 순수하게 물질적인 연장으로 구성되는 이원론을 전개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철학 안에는 이 날카로운 이원론과 모순되게 보이는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원론 못지 않게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영혼과 신체가 결합되어 있어서 상호 작용을 하고 있고 이 때문에 감각 내용(sentiment)이나 정념(passion)과 같은 인간에 고유하게 속하는 현상들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을 멀리서 조감하면 영혼과 신체가 분리되면서 동시에 결합해 있다는 것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이론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영혼과 신체는 각각 실체이므로 존재하기 위해서 자신 이외의 다른 사물에 의존해서는 안 되는데, 실체로서의 영혼과 신체가 결합된다는 것은 서로 의존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러할 경우 영혼과 신체가 더 이상 실체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 두 이론이 모순되지 않은 채로 이해될 수 있을까? 우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영혼과 신체의 구별과 결합을 모순되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1) 데카르트의 학문 체계에서는 영혼과 신체의 문제가 영혼과 신체가 구별되는가, 아니면 결합되어 있는가의 이항 대립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이 문제는 삼항의 병렬적 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영혼과 신체의 문제를 이루는 삼항은 다음과 같다. 지성의 지각들과 의지의 작용들과 같이 영혼에 속하는 것들을 파악하는 데에 가장 기초가 되는 관념인 사유와, 형태, 운동 등 물체에 속하는 것들을 파악하는 데에 기초가 되는 관념인 연장, 그리고 영혼과 신체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 나타나는 감각 내용, 정념 등을 파악하는 데에 기초가 되는 관념인 영혼과 신체의 결합. 이러한 삼항의 병렬적인 관계 속에서 영혼과 신체의 결합은 사유나 연장의 관념과 어떠한 관련도 맺지 않는다. 결합의 관념은 사유의 관념으로부터도, 연장의 관념으로부터도 연역되지 않는, 그 자체로 파악되는 독자적인 관념이다.
데카르트에게서 영혼에 속하는 각각의 속성들과 물체에 속하는 각각의 속성들은 오직 자신이 속해야 할 실체에 귀속되어야 한다. 만약 신체에 속하는 속성이 영혼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거나 영혼에 속하는 속성이 신체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다면, 데카르트가 구축해 놓은 순수한 기계론(mechanisme)으로서의 자연학과 순수하게 비물질적인 영혼과 신을 다루는 형이상학이 혼동되어 서로를 오염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데카르트는 영혼에 속하는 것들과 신체에 속하는 것들이 정확히 구별되어 인식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혼과 신체의 결합에 속하는 것들이 다른 것들과 구별되어 인식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 결합은 영혼이라는 실체와 신체라는 실체가 우선 이해된 다음에 두 실체의 결합을 통해서야 이해되는 어떤 파생적 관념이 아니다. 결합은 영혼의 본성인 사유와 신체의 본성인 연장과 나란히 처음부터 그 자신에 의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데카르트는 결합을 다른 것을 통해서, 즉 서로 구별되는 영혼과 신체로부터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의 이해는 애매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고 경고한다. 서로 구별되는 영혼과 신체로부터 출발하여 결합을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는 '사유하는 연장'이나 '연장된 사유'라는 애매한 관념을 가지게 될 뿐이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결합을 파악하고자 한다면 지성(entendement)이 아니라 '감각(sens)'을 사용하라고 권고한다. 지성에 의해서 결합은 '사유하는 연장'이나 '연장된 사유'와 같은 모순된 개념으로 파악될 뿐이다. 결합은 지성의 명증적인 관념들인 사유와 연장으로부터는 그만큼 명증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결합은 사유와 연장의 관념으로부터 연역되지 않는다. 결합은 실제로 영혼과 신체가 상호 작용하고 있다는 경험에 의해서 명석하게 파악된다. 이경험이 바로 위에서 말해진, 영혼과 신체의 결합을 명석하게 파악하는 '감각'이다.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서 결합의 관념이 용이하게 이해된다.
일상적이고 즉각적인 경험에 의해서 우리는 영혼이 신체를 움직이게 한다는 사실과 신체가 정신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영혼이 걷고자 하는 의지를 가질 때 신체가 움직이는 사실은 전자의 사례가 되고 우리가 다양한 감각 내용과 정념들을 가진다는 사실은 후자의 사례가 된다.
데카르트에게서 영혼과 신체의 결합은 '자연의 설정(institution de la nature)'이라는 또 다른 원리에 의해서 설명된다. 데카르트에게 자연은 신의 피조물로서 이해된다. 따라서 자연의 설정은 신에 의한 설정이다. 자연의 설정은 {여섯째 성찰}과 {정념론}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한다. 목마름의 감각 내용과 물을 마시려는 영혼의 의지가 연결되는 것은 자연의 설정에 의한 것이다. 나아가 일반적으로 각각의 영혼의 사유들과 각각의 신체적 운동들이 연결되는 것은 자연의 설정에 의한 것이다. 하필이면 왜 이러이러한 영혼의 사유와 저러저러한 신체적 운동들이 연결되는지에 대한 이해가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데카르트에게 양자간의 인과적 연결이 있다는 것은 반박 불가능한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영혼과 신체의 결합과 인과적 상호 작용은 자연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결합과 상호 작용은 신에 의해서 설정되어 있다.
그런데 영혼이 걷고자 하는 의지를 가질 때 신체가 움직이는 사례가 영혼이 직접 신체에 작용을 가할 수 있다는 원리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반론의 전형이 기회 원인론(ocassionalisme)이다. 이에 따르면, 영혼의 각각의 의지와 신체의 각각의 운동이 직접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마다 제 삼의 어떤 존재자가 양자가 동시에 일어나게 해 준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영혼과 신체가 신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에 있다. 신은 영혼과 신체를 따로 만들고 그 다음에 영혼의 어떤 의지와 신체의 어떤 운동이 언제나 동시에 일어나도록 그때그때 개입한다. 이 개입이 반복되고 양자의 동시적인 발생이 반복될 때 인간은 영혼의 의지가 신체의 운동을 일으키는 것으로 믿게 된다. 일상적으로 즉각적인 우리의 경험이 가르쳐 주는 영혼과 신체의 상호 작용은 인간 중심적인 착각일 뿐이다. 따라서 영혼과 신체의 구별과 결합이 모순되지 않게 이해될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은 우리에게 분류되어 파악되어야 할 다양한 현상들을 이해하기 위한 서로 다른 기초적인 세 가지 관념들을 제시해 줄 수는 있지만, 영혼과 신체가 결합되어 있고 상호 작용을 한다는데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할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영혼과 신체의 결합의 보존이라는 감각 내용이 가지는 (합)목적성이다.
2) 영혼과 신체의 인과적 상호 작용과 기회 원인론 중 어느 쪽이 진실인가? 우선, 전자는 치명적인 이론적 난점을 지니고 있다. 어떻게 비연장적인 영혼이 연장적 물체에 인과적 작용을 미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인과성을 사유 안에서의 논리적 인과성과 물체 안에서의 물리적 인과성의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한다면 영혼과 신체간의 인과적 상호 작용은 이해 불가능한 관념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우리에게 이 이해 불가능한 관념을 다른 각도에서 아주 용이하게 이해하는 방식을 가르쳐 주고 있다. 논리적 인과성이나 물리적 인과성으로부터 영혼과 신체간의 상호 작용을 연역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애매한 이해에 머무를 뿐이다. 우리의 지성은 이 상호 작용을 모순 없이 이해할 수 없다. 이 상호 작용은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부터 이해될 때 아주 명증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데카르트에게서 얻어질 수 있는 이 관점은 (합)목적성의 관점이다. 그리고 위에서 말해졌듯이 이 관념은 데카르트에게 고유한 감각 내용의 성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데카르트에게서 감각 내용은 외부 사물의 다양한 성질에 대한 상(image)이 아니라, 우리에게 감각 내용 혹은 감각적 성질을 유발시키는 다양한 원인들이 외부 사물에 속해 있다는 것을 지시하는 기호(signe)이다. 그에게 감각 내용 혹은 감각적 성질들은 외부 사물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는 순수한 인식적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니다. 데카르트에게서 감각적 성질들은 외부 사물 안에 속해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고, 다만 우리의 영혼 안의 감각 내용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감각적 성질들은 외부 사물의 본성이나 성질에 대한 지식을 전해 주지 못한다. 감각적 성질들이 지니는 주요한 가치와 기능은 생물학적인 삶을 보존한다는 실천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생물학적인 삶을 보존하는 데에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의 원인이 각각의 외부 사물 안에 있다는 것을 지시하는 기호이다. 이것이 데카르트에게 고유한 감각 내용의 성격이다. 감각적 성질은 외부 사물의 본질에 대한 지식을 구성하는 데에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 감각적 성질은 영혼에 속해 있는 감각 내용으로서 외부 사물에 속해 있는 다양한 성질들의 상이 아니라,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외부 사물 안에 영혼의 감각 내용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있다는 것을 지시한다.
데카르트에게서 생물학적인 삶을 보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삶을 보존한다는 것은 죽음을 방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죽는다는 것은 신체가 자신의 유기적인 통일성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체가 전체적으로 통일되어 기능하는 상태를 다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다면 그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데카르트에게서 신체가 죽는 순간은, 전통적인 희랍적 사고 방식에서와 마찬가지로, 영혼이 신체를 떠나는 순간이다. 결국 생물학적인 죽음은 영혼이 신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생물학적인 삶의 보존은 영혼과 신체의 결합을 보존을 의미한다. 감각 내용 혹은 감각적 성질이 삶의 보존이라는 목적을 갖는다고 할 때 이것은 감각 내용 혹은 감각적 성질이 영혼과 신체의 결합의 보존이라는 목적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영혼이 감각 내용이 영혼에 나타난다는 것은 영혼과 신체의 결합이 목적으로서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이 결합에 대한 증거가 된다.
2. 감각의 진리
데카르트의 감각 지각에 대한 비판은 자신의 자연학을 완성시키는 동시에 감각 지각에 그의 고유한 영역을 돌려주려는 시도이다. 감각 내용에 고유하게 속하는 영혼과 신체의 결합의 보존이라는 (합)목적성을 분명히 한다는 이 글의 목적에 다다르려면 우선 데카르트에 의해서 강조된 '감각의 오류', 정확히 말해서 감각 안에 포함된 오류가 밝혀져야 한다. 왜냐하면 감각 지각 안에 포함되어 있는 오류를 밝혀내는 작업은 데카르트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감각 지각의 기능으로 믿어지던 외부 사물의 본질에 대한 지식 제공이 실제로는 감각 지각의 기능이 아니라는 것과, 감각이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외부 대상의 본성을 인식하는 활동, 즉 자연학에서가 아니라 영혼과 신체의 결합을 보존하는 데에서라는 점을 명확히 하는 데에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장은 데카르트에 의해서 '감각(sens)'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그의 분석으로부터 출발할 것이다. 감각 지각이 행해지는 세 단계(degre)에 대한 분석은 감각 지각의 어떤 부분에서 오류가 발생하는가를 보여주는데 이것은 데카르트가 자신의 자연학에서 감각 지각을 배제하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나서 감각 내용이 다른 요소들로부터 분리되어 추출된다. 감각 내용은 자연학으로부터 배제되는 동시에 새로운 관점에서 고려된다. 감각 내용은 우선은 외부 사물에 의해서, 그리고 외부 사물에 의해서 자극받은 신체의 감각 기관들에 의해서 영혼에 나타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연학적인 인식으로부터 배제된 감각 내용은 이제 영혼과 신체의 결합을 보존한다는 (합)목적성을 가지게 된다.
1. 감각 지각의 분석
데카르트는 {성찰}과 함께 출간된 {반박과 답변(les Objections et les Reponses)} 중 여섯 번째 답변의 아홉 번째 항목에서 감각(sens)을 세 단계로 분해한다. 첫 번째 단계는 "동물들과 공통적인 뇌의 운동"이다. 이것은 아직 우리가 보통 배고픔, 갈증, 색, 소리, 맛 등으로 부르는 감각 내용 혹은 감각적 성질이 아니고 다만 외부 사물이나 우리 신체의 변화에 의해서 유발된 감각 기관과 신경, 그리고 뇌의 물질적인 어떤 운동과 변화만을 지시할 뿐이다. 우리가 배고픔, 갈증 등으로 부르는 감각 내용들은 영혼이 신체와 결합되어 있고, 뇌의 물질적 운동들이 영혼에 전달되는 한에서 나타난다. 감각 내용들은 뇌의 물질적인 운동과 변화에 뒤따른다.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것이 이 지점에서부터이다. "우리가 감각을 지성으로부터 엄밀하게 구별하고자 한다면, 이것이 감각에 귀속시켜야 하는 모든 것"이다. 우리가 "고통, 간지러움, ..." 등을 느낀다고 말할 때 성립하는 것이 바로 이 두 번째 단계(degré)의 감각 지각이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너무 많은 것을 감각 지각에 포함시킨다. 즉 우리는 지성의 지각에 돌려야 하는 것까지도 감각 지각에 돌린다. 따라서 고유하게 감각 내용이라고 말해질 수 있는 것으로부터 제외되어야 할 것이 있다. "색에 대한 이 감각 내용으로부터" "내 밖에 있는 이 막대기가 색을 띠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두 번째 단계의, 고유한 의미의 감각 지각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이 막대기의 크기와 형태(figure)와 거리"도 감각 내용에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는 보통 물체의 크기나 형태를 감각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이것은 지성의 "추론"과 "연역"에 의해서만 알려진다. 이것이 세 번째 단계의 감각 지각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데카르트가 감각 지각의 셋째 단계 내에서 행한 구별에 주목해야 한다. 이 구별이 데카르트의 감각 지각 비판의 핵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 안에는, 현전하는 모든 사물들을 다루면서 우리가 내리는 새롭고 습관화되지 않은 판단들을 우리가 지성에 돌리고, 우리의 감각 기관들 안에 사물들이 형성하는 인상들을 계기로 해서 감각적 사물들을 접할 때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습관적으로 내렸던 판단들을 감각에 돌린다는 차이만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습관(coutume)은 우리로 하여금 이 사물들에 대해서 아주 재빠르게 추론하고 판단하게 하기 때문에(혹은 차라리 우리가 이전에 내렸던 판단들을 회상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판단 방식과 우리의 감각의 단적인 파악 혹은 지각[두 번째 단계의 감각]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세 번째 단계의 감각 안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감각 지각과 비판 후의 교정된 감각 지각을 대비시키고 있다. "우리의 어린 시절부터 습관적으로 내렸던 판단들"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감각 지각이다. 데카르트는 여기에 "모든 사물들을 다루면서 우리가 내리는 새롭고 습관화되지 않은 판단들"을 대립시키고 있다. 이 판단들에는 지성의 "새로운 관찰들"과 "반성"이 포함된다. 습관적인 판단이 교정되는 것은 지성에 의해서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막대기가 굴절 때문에 물 안에서 꺾어져 보인다고 말할 때, 이것은 어린아이가 이로부터 그 막대기가 꺾어져 있다고 판단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또한 어릴 때부터 우리가 습관화되어 있는 편견들에 따라서 우리가 동일하게 판단하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그 막대기가 우리에게 보인다고 말할 때와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이 다음에 덧붙이는 것, 즉 이 오류는 지성에 의해서 교정되는 것이 아니라, 촉각에 의해서 교정된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감각〔촉각〕이 우리로 하여금 막대기가 곧다고 판단하도록 해주며, 이것이 어릴 때부터 습관화되고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감각 내용(sentiment)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러한 판단 방식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시각의 오류를 교정하기 위해서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밖에 우리가 이 경우에 시각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판단보다 촉각에 따라서 내리는 판단을 신뢰해야 한다고 가르쳐주는 어떤 근거(raison)를 가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릴 때 우리 안에 있지 않았던 그 근거는 감각에 귀속될 수 없고 오직 지성에만 귀속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따라서, 이 예 자체에서, 감각의 오류를 교정하는 것은 지성뿐이며, 감각 지각보다 정신의 작용을 더 신뢰하기 위해서 오류가 발생하는 어떠한 감각이라도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지성에 의해서 교정되는 것은 무엇인가? 가령 시각에 개입하는 지성의 작용(operation)을 살펴보자. 물에 반쯤 잠긴 막대기가 눈앞에 있다고 가정하자. 데카르트에 따르면, 우리의 시각에 맨 처음 들어오는 것은 우선 우리를 주목하게 하는 막대기의 색깔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물의 색깔과 막대기의 색깔의 경계가 시각에 들어올 것이고, 마지막으로 이 경계가 구부러져 있음이 시각에 들어올 것이다. 시각에 의해서 형성되는 감각 내용은 여기에 한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데카르트가 말하는 두 번째 단계의 감각 지각이다. 지성을 통해서 막대기라는 사물의 관념과 물이라는 사물의 관념을 형성하고 있고, 길이, 넓이, 깊이에서의 연장 개념을 지성 안에 가지고 있는 우리는 이로부터 '막대기가 구부러져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그리고 부러져 있지도 않은 막대기가 구부러져 있다고 판단된다는 데에 의아해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레 그것을 만져 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촉각으로부터 이 막대기가 부려져 있지 않다고 판단할 것이다. 이 때 데카르트는 시각으로부터의 판단을 교정하는 것은 촉각이 아니라, 시각으로부터의 판단과 촉각으로부터의 판단 중 어느 것을 더 신뢰해야 하는지를 고려하는 지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시각으로부터의 판단을 "우리의 어린 시절부터 습관적으로 내렸던 판단들"의 예로, 시각으로부터의 판단과 촉각으로부터의 판단을 비교하여 막대기의 형태에 대해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새롭고 습관화되지 않은 판단들"의 예로 들고 있다.
{성찰}에서 감각 지각을 비판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이러한 지성의 반성에 의해서이다. {세째 성찰}에서 맨눈에 보이는 태양의 크기와 천문학자의 계산에 의해서 산출된 태양의 크기가 대비되어 맨눈에 보이는 태양의 크기가 상대화되고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수학적, 기하학적인 양화(量化)를 가능하게 하는 지성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태양의 "크기"는 "우리 감각의 단적인 파악 혹은 지각"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지성이 개입된 판단의 결과이다.
우리가 태양의 크기를 감각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만 우리가 "어릴 때부터 습관적으로 내렸던 판단들을 감각에 돌리는" 데에서 연유할 뿐이다. 고유한 의미에서의 감각 지각, 즉 두 번째 단계의 감각 지각과 구별되어야 할 이 습관적 판단들은 지성의 작용에 돌려져야 한다.
두 번째 단계의 감각 지각과 세 번째 단계의 감각 지각의 구분은 '기초적 관념(notions primitives)'의 구분을 상기시킨다. 물체에만 적용되어야 하는 관념들에 관해서는 지성만이 적합하게 인식할 수 있고, 영혼과 신체의 결합에 적용되는 관념들, 예컨대 영혼에 의해서 신체에 가해지는 작용과 신체에 의해서 영혼에 가해지는 작용의 관념은 일상적이고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서만 명증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 "고통, 간지러움, 배고픔, 갈증, 색, 소리, 맛, 냄새, 뜨거움, 차가움" 등의 감각 내용들은 영혼이 신체에 결합된 한에서, 신체에 의하여 영혼 안에 결과되는 것이다. 그러나 색깔에 대한 감각 내용으로부터 막대기가 색깔을 띠고 있다고 판단한다면, 이 판단은 오류 판단이다. 왜냐하면 감각을 통해서 영혼 안에 형성된 감각적 관념들을 우리 밖에 있는 대상 안에 그대로 투사하여 그것이 대상의 본성이나 본질에 관한 정보를 준다고 판단하는 데에서 오류가 생기기 때문이다. 감각은 물체의 본성에 관련된 지식을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 감각 지각은 영혼이 신체와 결합되어 있는 한에서 우리의 영혼 안에 관념 혹은 감각 내용을 형성해 줄 뿐, 물체의 본성에 대한 지식을 주지 않는다. 데카르트에게 물체의 본성에 속하는 것은 지성과 상상력이 알려주는 연장과 형태, 운동이지, 감각 지각에 의해서 영혼 안에 형성되는 감각 내용이 아니다. 물체의 본성은 연장의 기초적 관념에 의해서 파악되어야만 한다. 감각적 성질들은 영혼과 신체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영혼이 그것들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이 감각적 성질들은 영혼과 신체의 결합을 보존하는 데에만 소용된다.
2. 감각 지각이 일어나는 메커니즘
데카르트는 {여섯째 성찰}에서 영혼이 감각 내용을 가지게 되기까지의 생리적 메커니즘을 설명하고 있다. 뇌로부터 몸의 각 부분으로 퍼져 있는 신경들은 마치 실과 같은 것이어서 그 줄의 어느 곳을 잡아당겨지더라도 한쪽 끝을 잡아당겨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른 한쪽 끝에 동일한 자극이 전달될 수 있다. 이 때문에 팔이나 다리가 절단된 사람이 이후에도 마치 그 절단된 부위에 통증을 호소하는 일이 일어난다. 팔의 말단부와 뇌를 연결하는 신경의 어느 곳이 잡아당겨지더라도 뇌에 동일한 자극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감각하는 것이 신체의 각 부위가 아니라 뇌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영혼이 외부 감각에 대해 기관으로 기능하는 사지(四肢)들 안에 있는 한에서 감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공통감(sens commun)이라고 부르는 이 능력을 실행하는 뇌 안에 있는 한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근거로 데카르트는 뇌를 손상 당한 환자의 예를 들고 있다. 그 환자는 뇌만 손상 당했을 뿐인데 어떠한 감각 내용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감각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뇌가 아니라 영혼이다. 데카르트는 이에 대해서 근거가 되는 또 다른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도취(extase)에 빠져 정신이 나가 있거나 사변에 몰두해 있을 때, 우리는 아무런 감각 내용도 가지지 못한다.
신체의 신경 메커니즘을 거쳐서 뇌에 도달한 자극이 영혼 안에 전달될 때 감각 내용이 나타난다. 감각 내용은 '정신적'인 것이다. 그것은 영혼의 한 상태, 사유의 한 변양태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체적인 운동과 변화가 원인이 된 영혼의 한 상태이다.
다시 감각 지각 안의 단계들에 대한 분석으로 돌아가 보자. 데카르트는 감각 지각의 첫째 단계로서 뇌 안에서의 물질적 운동에 대해서 말하였다. 따라서 이 첫째 단계는 감각 내용 혹은 감각적 성질이 영혼에 나타나기 위한 생리적 조건이다. 이 생리적 메커니즘에서 주목된 한 가지 사실이 다시 반복될 필요가 있다. 외부 사물이 보내주는 모든 자극 원인들은 영혼에 감각 내용을 형성하기 전에 뇌 안의 어느 지점에 모인다. 데카르트에 의해서 송과선(glande pineale)으로 지목된 이 부분은 데카르트의 감각 지각 이론에서 중요한 이론적 함축을 지닌다. 자극 원인들이 신체의 어느 부위에 있는가와 상관없이 그것들은 일단 뇌의 이 부분을 거쳐야만 영혼의 감각 내용을 형성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뇌의 운동이 영혼에 감각 내용 혹은 감각적 성질을 전달해 준다는 설정은 자극 원인들이 어디에서 유래했는가의 문제를 감각 내용의 형성과 무관한 문제로 만든다. 이러한 관점은 감각적 성질의 형성을 뇌와 영혼의 관계로 환원시킴으로써 감각적 성질이 어떤 외부 자극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견해를 배제한다. 감각적 성질은 외부 원인에 대한 인식적 가치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감각적 성질의 인식적 가치가 원천적으로 배제된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감각적 성질 혹은 감각 내용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관해서 감각 내용과 외부 대상간에 상정되는 데카르트의 새로운 견해를 참조해 보자. 감각 내용과 외부 대상의 관계가 새롭게 설정된다면 우리는 자연학에서, 즉 외부 대상에 대한 물리적 지식의 영역에서 배제된 감각적 성질이 자신의 새로운 가치를 획득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3. 기호의 문제
이제까지의 감각 지각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하면서 반복된 결론은 다음과 같다 : 감각적 성질은 외부대상의 성질과 닮아 있지 않다. 이 결론은 기초적 관념 분류에 의한 데카르트 자연학의 구획에서도 핵심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자연학적 지식의 구획이라는 구도에 맞추어 위 결론을 변형시킨다면 다음과 같다 : 감각적 성질은 외부대상의 본성에 대한 지식에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 외부대상의 본성은 길이, 넓이, 깊이에서의 연장이므로, 이에 대한 지식은 지성에 의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
감각 내용들은 보통 애매하고 혼잡하며 종종 거짓된 것을 알려 준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혼동과 오류를 피하기 위하여 감각 내용 혹은 감각적 성질과 외부 대상간의 관계에 대한 종래의 의견과는 다른 새로운 입장을 개진한다 : 감각적 성질은 외부 대상의 성질에 대한 상(像; image)이 아니라 감각적 성질을 영혼에 일으키게 한 원인을 지시하는[signifier] 기호(signe)이다. 데카르트는 {굴절광학(La Dioptrique)}에서 스콜라 철학자들의 상(image)을 비판한다. 기호의 문제는 스콜라 감각 지각론과 자연학의 선입견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대상들에 의해서 뇌에까지 보내지는 어떤 상들(images)"을 "가정"했다. 그들은 대상들과 그것들을 "표상[representer]”하는 상들이 "닮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어떻게 그 상들이""외부 감각 기관들에 의해서 수용될 수 있으며 신경들을 통해서 뇌에까지 전달될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어떻게 외부 대상을 닮은 "그림(tableau)"이 감각 기관과 신경을 거쳐 뇌에 전달될 수 있겠는가? "반대로 우리는, 예를 들면, 자신들이 지시하는(signifient) 사물들과 전혀 닮지 않은 기호들(signes)과 말들(paroles)처럼 우리의 사유를 자극할 수 있는, [그리고] 상들(images)과는 다른 ... [어떤] 것들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감각적 성질에 대한 데카르트의 새로운 생각은 '표상[representer]'의 문제가 '지시[signifier]'의 문제로 대체된다는 데에 있다.
우리가 감각적 성질 혹은 감각 내용을 갖게 되는 것은 외부 대상이 자신을 닮은 상들을 보내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 대상이 감각 기관들에 일으키고, 신경을 통해서 뇌에 전달된 물질적 운동(mouvement) 혹은 변화 때문이다. 이 운동과 변화는 "직접적으로 우리의 신체에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서의 우리의 영혼에 대해 작용하여 영혼으로 하여금 그러한 감각 내용들을 가지도록" 한다. 감각 내용들과 이것을 야기하는 신경과 뇌의 물질적 운동과 변화들은 전혀 닮아 있지 않다. 신체의 물질적 운동이 어떠한 유사성도 가지지 않은 감각 내용을 유발한다.
물질적 운동과 감각 내용간의 이 연결은 "자연에 의해서 설정되어(instituée de la Nature)" 있다. '자연에 의해서 설정되어' 있음은 데카르트에게서 '자연의 빛'이나 '자연적 경향성'처럼 더 이상 그 근거를 캐어물을 수 없는 근본적인 현상이다. 이것들은 모두 신의 피조물들로서, 신이 선하고 진실하다면, 자신의 참된 기능을 수행할 뿐이다.
감각 내용과 이것을 야기하는 물질적 운동 혹은 변화 사이에 성립하는 연결은 보다 일반적으로는 영혼과 신체간에 성립하는 그것으로 환원될 수 있다. 감각 내용과 물질적 운동의 연결에 어떠한 필연성도 없는 것처럼 영혼과 신체간의 연결(결합) 또한 우연적이다. 전혀 필연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러한 연결이 자연에 의해서 설정되어 있다는 것은 데카르트에게 하나의 놀라움이다.
4. 감각의 진리
감각적 성질은 영혼의 어떤 상태이다. 그것을 외부 대상의 본성과 관련되는 어떤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데카르트에 의해서 '형상적 오류(faussete formelle)'로 단호하게 배척받았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은 비판에 직면할 것이 예상된다. 우리가 일상의 경험으로부터 알고 있듯이 우리는 감각적 성질을 영혼과 결합되어 있는 신체를 포함한 외부의 물체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할 때에만 감각적 성질들은 우리에게 소용되고 유용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손이 뜨거운 난로에 접촉되었을 때 신속하게 손이 움츠려지는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에, 보통 난로가 뜨겁다고, 다시 말해서 난로가 뜨거움이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만약 데카르트와 같이 감각 지각과 관련된 모든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서 모든 감각적 성질들을 영혼의 상태, 사유의 변양태로 국한시킨다면, 우리는 오류를 저지르지 않을 수는 있지만 감각적 성질들을 영혼 안에만 감금시키는 꼴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난로에 손을 데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데카르트의 감각 지각 비판의 효과를 전혀 감소시키지 못한다. 그는 오류를 피하는 데에만 급급하여 모든 감각적 성질들의 유용성을 버릴 만큼 옹색하지 않다. {여섯째 성찰}은 데카르트가 감각적 성질의 유용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장소이다. 그런데 그 유용성이 살아나는 것은 외부 대상의 본성과 관련된 인식의 측면이 아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데카르트는 감각 지각을 오직 영혼과 신체의 결합을 보존하는 데에만 한정시켰다. 감각 지각은 오직 결합을 보존하는 데에서만 '명석하게(clairement)' 인식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역에서 감각 지각이 명석하게 인식하는 것은 무엇일까? 애매하고 혼동된 사유 양태일 뿐이었던 감각 지각이 어떻게 갑자기 명석한 인식의 지위로 상승하는가?
이 문제는 감각적 성질의 유용성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감각적 성질은 영혼과 신체의 보존한다는 목적을 가진다. 감각 지각은 형이상학과 자연학의 영역으로부터 애매하고 혼동된 지각으로서 영원히 추방당하였지만 비판을 통하여 새로운 면모를 갗추고 귀환한다. 감각 지각의 세 단계 분석에서 감각 내용 혹은 감각적 성질은 영혼의 한 사유 양태로서 영혼 안에서만 생각되는 한 어떠한 오류도 가지지 않는다고 위에서 언급되었다. 그러나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상이 있다. 그리고 이 '그 이상'은 세 번째의 기초적 관념에 의해서 이해될 수 있다. 영혼은 신체와 결합되어 있으며 상호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 결합을 보존하는 것이 감각 지각의 목적이다. 영혼과 신체가 상호 작용하는 것은 양자간의 결합을 보존하기 위해서이다. 이 목적을 실행하는 한에서 감각 지각은 명증할 수 있다.
감각 지각이란 본래 정신을 한 부분으로 갖고 있는 결합에 무엇이 이롭고 이롭지 않은지를 정신에게 보여 주기 위해 자연이 나에게 준 것일 뿐이며, 이런 한에서 감각 지각들은 충분히 명석 판명한 것이다.
감각 지각은 오직 영혼과 신체의 결합에게만 '명석 판명'하다. 그리고 그것이 명석 판명한 것은 이 결합에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영혼에게 지시해줄 때일 뿐이다. 색, 소리, 맛, 냄새, 굳기, 뜨거움, 차가움, 그리고 배고픔, 목마름, 고통 등의 감각적 성질들은 그것들이 이 결합에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가르쳐준다는 의미에서 명석 판명하다. 이 감각적 성질들은 신체의 보존과 건강에 기여한다. 자연이 우리에게 준 '감각의 진리'는 살아 있는 피조물로서의 우리에게 유용하다. 감각적 성질들은 결합에 이롭고 해로운 것들을 우리에게 지시해 준다[signfier]. 감각적 성질은 외부 사물의 성질과 유사할 필요가 전혀 없다. 난로가 뜨거움이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영혼에 뜨거움의 감각적 성질을 일으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단지 난로는 뜨거움의 감각적 성질을 영혼에 전달하는 물질적 자극을 우리의 신체에 야기할 뿐이다. 난로에는 뜨거움의 감각적 성질을 일으키는 원인이 속해 있지만 이 원인의 본성은 감각 지각에 의해서는 파악되지 않는다.
5. 감각의 목적성
감각 내용 혹은 감각적 성질은 우리 신체를 보존한다는 고유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만약 감각 지각이 신체에 해로운 것을 이로운 것으로 지시해 준다면 이는 감각 지각이 자신의 목적에 기여하지 못하는 것이다.
감각 지각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왜냐하면 감각 내용은 신체의 생리적인 메커니즘에 따라서 영혼에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기계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어떤 목적을 가진 과정이 아니라 오직 기계적이고 자연적인 과정일 뿐이다. 이 관점에서는 수종 환자(hydropique)의 병세가 악화되는 경우에서도 기계적인 법칙들이 정확히 지켜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는 신체가 물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메마른 목 때문에 고통스러워 할 것이고 또 이 메마름은 보통 영혼에 갈증의 감각 내용을 야기하게 마련이고 그래서 이 갈증이 신경이나 다른 부분을 움직여 신체가 물을 마시게 되면 그 병세는 더욱 악화"된다. 이 환자의 경우에도 목마름의 감각 내용은 기계적이고 자연적인 법칙들이 정확히 지켜지는 과정을 거쳐서 일어날 것이다 : "이는 건강한 신체가 목이 마르면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물을 마시는 것과 똑같이 자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영혼과 신체의 결합을 보존한다는 (합)목적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수종 환자의 경우 감각 내용은 신체를 보존한다는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 환자의 신체가 "뼈, 신경, 근육, 혈관, 혈액 및 피부로 잘 짜여진 일종의 기계"로서 "자연의 법칙을 정확히 지키고" 있음을 인정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각 지각이 자신에게 부여된 어떤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감각 지각은 신체의 보존이라는 목적에 기여하는 한에서 어떤 진리를 지니고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다 : "... 신체와 결합된 정신의 관점에서 본다면 물을 마시는 것이 자신에게 해가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갈증을 느낀다는 것은 그저 하나의 명칭(denominatio)이 아니라 자연의 진정한 오류(verus error naturae)이다."
우리는 이 장에서 감각 지각이 어떤 점에서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가와, 감각 지각의 고유한 기능과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았다. 감각 지각의 세 단계 분석에서 감각 내용 혹은 감각적 성질은 오직 영혼의 한 사유 양태로서만 간주된다면 어떠한 오류의 여지도 가지지 않는다는 점을 보았다. 감각 지각에 대한 분석은 한편으로는 사유 양태로서의 감각 내용 혹은 감각적 성질을 그것을 야기하는 생리적 과정으로부터 구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외부 사물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습관적 판단으로부터 구별하는 과정이었다. 이로써 감각 지각을 애매하고 혼잡한 것으로 만드는 요소로부터 명증한 사유 양태로서의 감각 내용을 추출하는 작업이 완성되었다. 이 감각적 성질을 외부 대상의 성질로 간주하는 것은 데카르트에 의해서 자연학을 오염시킨 행위로 금지되었다. 우리가 감각적 성질을 외부 대상의 상(像)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애매하고 혼잡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감각적 성질을 다른 요소들로부터 구별해내는 여기까지의 작업을 예비적 성격의 작업으로 간주해야 한다. 이 감각적 성질 혹은 감각 내용은 아직 자신의 온전한 성격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감각적 성질 혹은 감각 내용이 온전한 성격과 기능을 갖추려면 다른 요소가 필요하다. 그 요소는 감각적 성질이 외부 대상과 관련해서 가지는 기호의 성격에 의해서 특징지어진다. 감각적 성질 혹은 감각 내용은 그것의 자극 원인이 외부 사물 안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이 자극 원인들은 그것들이 속해 있는 외부 사물 자체 안에서 다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우리에게 이로운지 해로운지에 따라서 다양할 수 있다. 이로움과 해로움의 척도에 따른다면, 외부 대상에 대한 감각 지각은 그 이로움과 해로움의 강도에 따라서 명석하거나 애매할 것이다. 즉 우리의 생물학적인 삶의 보존에 얼마나 크거나 작은 영향을 미치는가가 그 감각 지각의 명증성의 정도를 결정할 것이다.
데카르트에게서 감각 내용의 개념은 자연학적 인식의 차원에서 생각되지 않는다. 감각 내용에 의해서 획득되는 인식은 삶을 보존한다는 차원과 관련된다. 영혼이 신체와 결합되어 있다는 것은 단지 사유를 본성으로 갖는 실체와 연장을 본성으로 갖는 실체가 결합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혼과 신체의 결합은 각각 독자적으로 존속하는 두 실체와 관련 없이 그 자체로서 생각되어야 한다. 데카르트가 결합을 또 하나의 기초적 관념으로 설정하는 것은 결합이 독자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합은 보존되어야 한다. 결합은 목적이다. 데카르트의 자연학에서 각각의 사물이 그것을 향해 운동하고 변화하는 목적은 자여학적 지식의 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에서 이 세계를 창조한 신의 목적은 지성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다. 그러나 영혼과 신체의 결합은 이미 그 자신이 목적으로서 제시된다. 신체에 이롭거나 해로운 어떤 외부 사물의 감각 내용이 영혼에 나타나는 것은 영혼과 신체의 결합이라는 목적을 위해서이다.
맺음말
필자는 이 글에서 영혼과 신체의 결합이 어떻게 데카르트의 철학 안에서 영혼과 물체의 이원론과 모순되지 않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려고 하였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영혼과 신체의 결합은 영혼을 다루는 형이상학에도, 물체를 다루는 자연학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 결합에 기인하는 현상인 감각 내용은 형이상학이나 자연학에 의해서 이해될 수 없다. 형이상학과 자연학의 구획은 영혼과 신체의 이원론을 공고히 한다. 그리고 이 구획 작업은 감각적 성질에 대한 종래의 의견을 비판하면서 이루어졌다. 감각적 성질은 형이상학과 자연학으로부터 추방되었다. 이 추방에 의해서, 그리고 영혼과 물체의 이원론에 의해서 데카르트의 학문 분류가 공고해졌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데카르트는 감각적 성질과 외부 사물과의 관계에 새로운 빛을 주고자 하였다. 이제 감각적 성질과 외부 사물과의 유사성은 빛을 잃었다. 감각적 성질은 영혼과 신체의 결합에 이롭거나 해로운 외부 사물을 지시하는 기호이다. 이 기호는 외부 사물 안에 있는 이로움과 해로움의 원인을 지시할 뿐이지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것은 아니다. 이 기호는 원인의 현존을 지시할 뿐이다. 그것은 사물에 속해 있는 성질이나 본성에 관해서는 무관심하다. 이 기호는 다만 괄호 쳐져 있는, 물음표로 남아 있는 이로움과 해로움의 원인이 그때 그때의 외부 사물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려 줄 뿐이다.
감각 내용이 가지는 기호로서의 성격은 감각 지각을 비판함으로써 형이상학과 자연학의 대상 영역을 확립한 후의 데카르트가 다시 학문 이전의 영역으로 돌아오면서 감각 지각에 돌려준 것이다. 감각 지각에 대한 데카르트의 비판은 형이상학과 자연학의 영역을 확립하기 위한 시도이다. 이 시도로부터 데카르트는 사유와 연장이라는 형이상학과 자연학의 영역을 기초짓는 기초적 관념 둘을 구별해 내었다. 그의 학문 분류에서 가장 강조된 것은 우리가 영혼을 이해하려 하거나 물체를 이해하려 할 때 이 기초적 관념을 혼동해서 적용하는 행위에 대한 경계이다. 영혼이 어떤 연장적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물체가 사유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형이상학과 자연학의 지식을 혼잡하게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데카르트는 학문의 영역에서 다시 학문 이전의 영역으로 돌아오면서 영혼과 신체의 결합이라는 기초적 관념을 제시한다. 이 관념은 사유의 관념으로부터도, 연장의 관념으로부터도 이해될 수 없다. 감각 내용은 데카르트가 반성되지 않은, 학문 이전의, 어린아이의 감각 지각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하여 형이상학과 자연학의 영역을 구획한 후 학문 이전의 영역으로 귀환하면서 결합의 기초적 관념을 토대로 새롭게 제시하는 개념이다. 의지의 작용들과 지성의 지각들이 사유의 관념을 토대로 이해되고, 형태와 운동이 연장의 관념을 토대로 이해되듯이, 감각 내용은 영혼과 신체의 결합의 관념을 토대로 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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