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다윈주의 윤리학 : 그 옹호

나뭇잎숨결 2020. 11. 6. 12:00

다윈주의 윤리학 : 그 옹호

Michael Ruse
최종덕 상지대 철학

이 번역원고는 한국학술협의회 주관 04년 석학초청 프로그램으로서 방문하는 생물철학자 마이클 루스가 보내온 논문을 주관자로부터 의뢰받아 번역한 것임.




윤리학은 사람들 사이에서 협동심을 갖게 하도록 하기 위해 자연선택에 의해 주어진 일종의 환상이다. (Michael Ruse and Edward O. Wilson 1985)

대략 40년 전 내가 철학 공부를 처음 시작했을 때, 진화윤리학은 일종의 구린내 나는 철학적 흉내였다. 사람들은 진화윤리학이 가짜이거나 기껏해야 싸구려 철학을 담은 냄비손잡이 정도로나 알고 있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G. E. 무어가 나타나서는 그의 책 <프린키피아 에티카>에서 그 모든 원성의 최대 책임이 바로 진화윤리학에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자연주의적 오류”를 통해 진화윤리학을 아예 무시하거나 절하하였다. 혹은 좀더 세심한 역사적 맥락에서 그 문제를 본다고 해도, 진화윤리학은 흄이 해놓은 “사실”과 “당위” 사이의 구분을 침해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지금은 일반인들도 엄청나게 변한 모종의 그 무엇을 받아드리고 있으며, 진화가 확실히 그 무엇을 설명한다는 것을 어느 정도 열의를 갖고 수용하려는 도덕 관련 철학자들에게 진화윤리학은 거의 규준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 무엇”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가? 이 문제는 여전히 논쟁거리이다.

규범윤리학

도덕성을 철학적으로 다룰 경우, 거기에는 항상 논의되어야 할 두 가지 수준이 있다. 하나는 (너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라)와 같은 당위를 다룬 규범윤리학 혹은 실체적 윤리학이다. 다른 하나는 (너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을 신이 원하고 있다)와 같은 당위적으로 해야 하는 것을 왜 해야만 하는 지를 다루는 메타윤리학이다. 진화론과 규범윤리학을 연관시키려면, 인간의 윤리적 관계성이 진화의 소산물임을 명명백백히 밝혀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절차는 그 본성 상 분명히 자연주의적 과정이다. 사람들이 도덕 명제에 대하여 어떻게 느끼는가를 보여주려는 시도 역시 그런 절차의 하나이다. 내용과 관계없이 그 어떤 논증도 배제하지 않는 접근방식일지라도,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도덕 명제를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도덕적 주제에 대하여 사실적 주장을 연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과 당위 사이의 입장일치와 같은 주제에 대한 토론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환자의 요청에 의한 낙태 허용에 관한 중대 처벌을 반대하는 입장에 대하여 의견일치를 보이는지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다. 혹은 평화를 위하여 이라크 전쟁 파병을 해야 하는 것이 나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봉쇄정책을 해야 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나는 이런 주제는 서술방식의 과제이면서 동시에 과학적 설명에 속한다고 본다.

지난 20년 동안 다윈주의가 (규범윤리의 기원을 보여준다는 뜻에서) 규범윤리학을 어떻게 설명하는 가를 보여준 많은 성과가 있었다.(예를 들어 Sober and Wilson 1997; Wright 1994; Gibbard 1990; Skyrms 1998) 철학계 내부에 비열한 말이 오가곤 했지만 (역자주: 윌슨 사회생물학에 대한 굴드 진영의 비난을 일러 말하는 것임), 타인을 도움으로써 어떻게 자기 이익을 획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문제들, 그리고 친족선택이나 호혜이타주의와 같은 다양한 모델등과 더불어 70년대 사회생물학의 발흥이 바로 핵심적인 연구 성과였다. 계몽된 (역자주: 이기적) 자아에 대한 모든 유형은 유전자 연구부문으로 관심이 모아졌다. “네가 나의 등을 긁어준다면 나는 너의 등을 긁어줄게” 라는 식으로 이기적 유전자를 접근하는 방식이다. 최근 들어 “이기적 유전자” 접근방식에 불만을 갖는 전일적 유형의 많은 학자들이 (역자주: 개체적 적응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비주류 해석에 해당되는) 집단적 적응을 강조하는 선택에 대한 이해방식을 진작하려고 한다.(역자 주: 루스와 윌슨 혹은 도킨스는 집단선택을 원래부터 반대했다.) 나 자신은 이런 방식의 관점을 별로 좋아 하지 않는다. 물론 이 자리에서는 그 문제를 갖고 논박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의 주요 쟁점은 양쪽 관점이 중첩된 것 중의 하나이다. 모든 사람들은 진화론적 과정의 결과로서 규범윤리학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즉 이런 설명은 어떤 방식의 자연선택이 진화적 변화의 주요한 인과적 힘이 될 것이라는 식이다. 후기 스테판 굴드(Stephen Jay Gould 2002)는 아마도 심리적 도덕 속성들을 포함시킨 것으로 여겨지는 심적 속성들은 어떠한 적응 효과도 갖지 않으며, 그런 요소들은 진화 과정의 부산물이며 일종의 “스펜드럴”이라고 불리우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역자주: 굴드는 1979년 기존의 적증주의를 반박하는 유명한 논문을 발표 했는데, 그 논문에서 등장한 스펜드럴이란 성 마르코 성당의 석가래를 받치는 기둥 부위의 삼각꼴을 말한다. 건축 구조물의 부산물인 삼각꼴을 마치 그림을 그려 놓기 위해 적응된 결과로 오해한 것이 적응주의라면서, 적응주의를 강하게 비판한 논문이다.) 굴드의 접근방식에 동감하는 철학자들이 분명 있기는 하지만, 진화의 시각으로 윤리학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전적으로 이런 굴드의 접근방식에 의문을 갖게 된다.

최소한 지난 20년 동안 나는 규범윤리학을 자연주의적이고 진화론적인 기반에서 논의해 왔다. (Ruse 1986, 1995, 2001b) 그렇다고 해서 나는 유물론적인 무엇으로 취급하려는 의도는 없다. 솔직히 말해서 나 같은 철학자가 이런 논의를 할 수 있는 수준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주의적 접근은 바로 과학자의 성과를 인정하는 일이다. 이는 영장류 연구자들비교문화학자들, 게임이론가들, 진화심리학자들 혹은 경제학자 등과 같은 사람들의 성과들을 말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려는 모든 것은 그런 성과물에서 찾아낸 것들이다.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나에게서 과학자들의 성과물 외에는 따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오히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철학과 과학이라는 방정식의 한 쪽으로서 순수 철학적 부분인 정당화의 문제로 전환하는 일이다. 이제 다윈주의 메타윤리학에 대하여 질문을 던져보자.

메타윤리학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철학자들 가운데 모종의 유보적 입장이 여전히 남아있다. 즉 규범윤리학을 경험론에 넘기는 문제에서 그렇다. 플라톤, 아퀴나스 그리고 칸트 전통에 서있는 것을 여전히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근본적으로 철학적일 수밖에 없는 질문들에 대하여 경험과학의 결과가 진정으로 답변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이러한 양면성은 이미 유명한 철학자 필립 킷쳐의 최근 발언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다음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진화론과 윤리학의 관계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그는 예비적 답변을 제공한다.

우선 단순한 답변부터 시작하자. 진화생물학과 윤리학의 관계에 대한 상이한 과제들이 많다. 어떤 것은 거의 완벽한 수준에 놓인 것도 있지만, 다른 것은 결함투성이도 있다. 거대한 다윈주의 프로그램의 야망은 우리들의 역사를 보는 이해력이 어떻게 근본 도덕원리를 새롭게 포섭해 내는가를 보여주는 데 있다. 어느 정도 야망의 정도는 떨어지겠지만, 예를 들어 도덕판단은 진리값을 가질 수 없다거나 혹은 도덕인식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어떤 독특한 메타윤리적 관점을 다윈주의가 지지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좀더 부드럽게 말해서, 인간종의 진화론적 이해를 도덕성과 사회적 체계의 역사를 포함한 인류 역사의 모든 측면들을 추적하는 수단으로 간주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기존에 다루어져 왔던 도덕원리를 대체할 수 있는 생명체의 근사성이 무엇인지를 인지함으로써 우리들은 새롭게 유추되는 도덕판단들을 접근할 수 있다. - 아마도 우리는 다른 동물들을 특별한 방식으로 다루지 말아야 할 의무를 갖는 것으로 우리 자신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단순한 답변은 뒤의 두 가지 내용이 매우 탄탄한 근거를 지니지만 앞의 두 가지 도전적인 내용은 비추론적임을 보여준다. (Kitcher 2003, 411-12)

킷쳐는 이런 단순 답변이 3/4 정도만 옳은 것이라고 논증한다. 답변의 두 번째 부분은 어쩌면 틀릴 수도 있다. “더 문제가 되고 더 흥미로운 것은 다윈이 메타윤리학에 대하여 무관심했다는 주장이다.” 좋다, 또한 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흥분해서는 안 된다. 킷쳐는 자신의 작업이 다 끝나기 전까지는 어떤 분명한 결정을 내리기를 회피한다. 사실 모두가 하나로 결합되기 전까지는 마지막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고 아주 현명하게 입장을 유보하는 그런 농후한 베일 안에 그는 항상 숨어 있다.

대체로 우리는 도덕성을 동정심과 이기심 사이의 충돌을 조절하는 장치로서 진화의 역사로 편입된 인간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조절은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 결정적 구실을 한다고 본다) 나아가 도덕성은 다양한 사회집단 사이의 상호작용과 그 상호작용에 미치는 구성원의 영향력 등을 통해서 표현된다.

이런 식의 이해를 철학계에서 모르는 바가 아니다. 과학이 앞으로 잘 풀린다면 나는 당신들보다 앞서 있었을 터이고,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해도 내 탓은 아니다. 자연주의라고 하는 토끼는 달려 나가고 반자연주의라고 하는 사냥개는 쫒아 가는데, 그렇게 양면적인 당신의 모습은 사실 과학을 탓해야 한다.

내가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것일까? 윤리학에 대한 다른 철학 전통이 있다. 자연 세계의 의미를 강조하는 아리스토텔레스, 홉즈, 흄 등의 윤리학이 그것이다. 메타윤리학 수준에서 어떤 결단과 판단을 하기 위한 자료가 충분하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이 논의에서 내가 이런 믿음을 갖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려 한다. 물론 규범학 수준처럼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도덕의 자연주의적 발달의 상세한 모든 것이 -아마 거칠게 나마라도- 해명되지도 않았고 설명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앞서 주어진 마지막 인용문에서 킷쳐 스스로가 동의하듯, 우리는 어떤 무엇을 갖고 있다. 일단 논증을 위해 자연선택을 인정해놓고 보면, 생물학은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 간주하는 데 어떤 의미 있는 구실을 해왔다. 도덕성은 손과 이빨 그리고 음경과 질과 같이 적응된 무엇이다. 생물학이 그런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 분명할 뿐더러, 동시에 (역자주: 환경의존적) 문화 역시 어떤 의미 있는 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문화적이라는 빈 서판 가설 (역자주: 스티븐 핑커의 the blank slate hypothesis을 일러 말함)과 모든 것이 생물학적이라는 유전자결정론 가설, 이 두 개의 삐뚜러진 극단 가설 사이에서 무엇이 얼마나 더 의미 있는 지는 일단 열린 상태로 두도록 하자. 여기서 주요쟁점은 인간의 도덕성이란 적응 과정을 거친 것이며 또한 인간 진화에 의한 소산물이라는 데 있다.

사회다윈주의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을 왜 해야만 하는가와 같은) 도덕상의 기원과 정당화 문제를 부드럽게 접근하는 메타윤리학적 주제들을 고려하면서, 진화와 도덕의 관계를 다루는 전통 방식이 있다. 사회다윈주의의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Ruse 1996; Richards 1987) 한 범례로서 19세기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를 보자. 그는 사물의 사실성을 사물의 당위성으로 바꾸어서 주장했다. 진화의 원인과 메커니즘 등의 진화적 과정의 특성을 샅샅이 흩어가면서, (이미 주장된 바가 없었다면) 그런 진화 과정을 인간 영역에다 이전하여 적용하였다. 즉 유기체에 해당하는 사실의 문제를 인간 사회에 해당되는 의무감의 문제에 적용한다는 주장이다. (Ruse 1986) 스펜서 자신은 생존투쟁과 그 필연적 귀결인 선택결과라는 개념으로 시작했다. 다윈의 <종의 기원> 원고가 완성된 이후 그러나 출판되기 이전인 1852년 스펜서가 원고를 작성한 내용이었다. 여기서는 많이 다루지 않겠지만 실제로 그는 스코트 사람들과 아일랜드 사람들 사이의 서로 다른 행동과 본성 속에서 그들이 보여준 선택결과에 대하여 연구해 온 이후로, 그는 이 개념들을 인간 사회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사회에 적용되는 투쟁과 선택이 극단적 자유방임형 사회경제학으로 전환된다고 그는 주장했다. 즉 국가는 자기관심을 추구하는 개인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방임해야 하며, 불공평이나 불평등을 시정하거나 관행을 규제하려는 시도를 해서는 결코 안 된다. 결국 자유주의적 방임이란 사태의 사실적 방식뿐만이 아니라 사태의 당위적 방식이기도 한 것이다.

실제로 스펜서는 빅토리아 시대 중기(역자주: <종의 기원>이 출간된 이후)가 자유방임적 사회였다고 확신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될 것이라는 아주 강한 희망을 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현재의 불행을 막기 위하여 미래 세대에 남겨줄 더 큰 불행을 낳게 하는 겉보기 박애주의자라고 불러야만 한다. 그러나 ‘빈약한 법’을 옹호하는 모든 이들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에서 서로 구분되어야만 한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게으른 사람들을 심할 정도로 독려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을 강하게 족쇄 채우려는 엄격한 필요성을 그들의 친구들은 철폐하고자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사방에서 비탄의 상황을 낳게 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질서에 따라서 사회는 항상 신체적 약자들, 저능자들, 지진아나 결단력이 없거나 신의가 없는 사회구성원들을 자동 소거해 버린다는 사실을 눈감아 버린 채, 선의라 할지라도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정화 과정을 포기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런 타락을 증대시키는 영향력을 옹호한다. 예를 들어 지속적인 원조를 그들에게 제공함으로써 금치산과 무능력자들의 증가를 절대적으로 독려하고, 또한 가족 존속의 예상되는 장애를 상승시킴으로써 능력자와 검소한 사람들의 증가를 방해하는 일이다. (Spencer 1851, 323-4)

스펜서는 사회 내에서 불행한 이들을 돕는 사람들에 대하여 매우 잔인한 것으로 보여질 수 있다: “약자를 인위적으로 보존함으로써 한 사회의 질적 수준은 물리적으로 저하된다는 사실을 관행적으로 무시하는 것 외에, 또한 약자를 보살필 수 있는 사람들을 인위적으로 보존함으로써 한 사회의 질적 수준은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저하된다는 사실을 관행적으로 무시하는 일도 있다. 만약 무가치한 사람들이 그들의 무가치함으로 인하여 자연적으로 소멸(죽음)되는 현상을 예방함으로써 그들의 존속을 증가하도록 도움 받는다면, 그 선택결과는 세대를 거쳐 가면서 더 큰 무가치성을 생산할 수 있다.” (Richards 1987, 303)

진보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어떻게 정당화하겠는가? 무어와 그 밖의 사람들이 그 오류를 찾아내었다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사물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있다는 사실의 차원이 바로 사물이 이런 방식으로만 있어야 한다는 당위의 차원으로 유도되는 것은 아니다. 나 자신은 이런 비판에 동의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내 경험 상 사회다윈주의자 (오늘날 이런 이름으로 경향 지워 말하기는 어렵게 되었지만)들은 이런 비판에 대하여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고 본다. 가끔 나와 같이 원고를 쓴 에드워드 윌슨은 “사실‘에서 ”당위”로 전이하는 일이 많은 경우 진정한 현실임을 지적했다. - 그 사례로서 그는 브라질의 강우성 열대숲을 보존하는 것이 생물종 다양성을 증진하는 것이라는 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열대숲이 필요하다는 (사실적) 전제로부터 열대숲 보존을 꼭 해야만 한다는 (당위적) 결론을 이끌었다. 이런 유추가 그 자체로 추론적 오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Wilson 1984, 1992, 1994) 과학에 있어서 어떤 언질에서 다른 언질로 유추하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며, 이것이 그 자체로 오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가스이론에서 볼 때 폐쇄 공간 내의 상이한 속도를 갖는 분자 충돌운동에 대한 언질에서부터 압력과 온도의 증가로 표현되는 언질을 유추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인간은 숲을 필요로 한다”라는 말에서 “인간은 숲을 보존해야만 한다”라는 말로 유추하는 것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지 않은가? 우리는 사회다윈주의의 메타윤리학을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그 확신에 대한 참된 근거가 분명해진다. 어떤 사람들에게 사회다윈주의는 - 당신이 원한다면 전통 진화윤리학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 진보적이다. 그들이 생각하기를, 진화의 경로는 악이나 비도덕에서부터 선이나 도덕으로 또는 최상가치로 변화하는 상향적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진보적 통로를 유지하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일이다. 예를 들어 허버트 스펜서를 보자. (Spencer 1857) 그에게 있어서 진화는 미분화 혹은 “동형적”이라는 것에서부터 완전히 잡종적이거나 “이형적”이라는 것으로의 전이이다. 진보는 단순히 생물학적 현상이라거나 아니면 사회적인 현상이라고만 할 수 없었다: 진보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세계철학이었다.

먼저 유기체의 진보 법칙이 모든 것의 진보 법칙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지구의 발생에서, 생명체의 발생에서, 사회의 발생에서, 정부의 발생에서, 공업의 발생에서, 상업의 발생에서, 언어, 문학, 과학, 예술의 발생에서 혹은 그 어떤 것을 말하던지, 연속적인 분화의 과정을 거쳐 단순성에서 복잡성으로 가는 동일한 진화가 그 어느 것에도 적용된다. 더듬어 최초로 올라갈 수 있는 우주적 변화에서부터 문명의 최후 승리에 이르기까지 동형성에서 이형성으로의 전이는 진보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며, 우리는 이러한 전이과정을 밝혀내야만 한다.

나중에 이와 비슷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다. 에드워드 윌슨을 참조해 보자: “생명의 역사를 관통하는 총체적인 평균치는 단순하고 희소한 것에서부터 더 복잡하고 다수적인 것으로 이동해 왔다. 지난 수십억 년 동안 동물들의 체형의 크기, 섭생과 방어 기술, 뇌와 행동의 복잡성, 사회적 조직화 그리고 환경적 제어능력의 정확성 등의 전체적인 측면에서 동물들은 상향적으로 진화해 왔으며, 그 각각의 경우에서도 그들의 단순 조상종이 해왔던 방식 훨씬 이상으로 비생명적 상태에서부터 진화하는 속도가 빨랐다. (Wilson 1992, 187)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었다: ”그래서 진보는 동물 행동의 지향성과 목적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포함한 거의 대부분의 직관적 가능기준에 따른 독립 생명체 진화의 한 속성이다.“ 이제 관점은 성립됐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고려하는 것은 사회 다윈주의의 메타윤리학에 대하여 의심될 만한 이유이다. 보통은 그것이 어찌되었건 바로 그런 진화의 진보 개념은 문제를 꼬이게 만든다. 자연선택이 진보를 조장하는 것인지, 진보가 실제로 발생하는 것인지, 적어도 분명하고 계량적인 방식으로 볼 때 이런 문제들은 아주 불확실하다. 어떤 이는 인간을 존재의 최고 정점으로 당연히 설정한다. - 나 자신도 바로 이런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지만 어쨌든 그러한 설정은 적어도 진화 문제에서 볼 때 자의적이다. 개나 그 흔한 꽃미나리를 존재의 정점에 설정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에이즈 바이러스는 고릴라보다 훨씬 성공적인 존재이지만, 그 누구인들 바이러스가 고릴라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며 혹은 가치 있다고 말하려 드는 사람이 정말 있다고 보는가?

언제나 그랬듯이 지나치게 과장하는 버릇을 지닌 스테판 제이 굴드는 다음처럼 쓰고 있다: (Gould 1988) “진보는 불건전하며, 문화적으로 끼어든 것이며, 증명할 수 없으며, 실효성도 없으며, 다루기도 어려운 개념이다. 만약 우리가 역사의 유형을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그 개념은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야만 한다.” 인간 진화의 측면에서 (역자주: 진화를 목적적 진보에 유추하는 루스의 입장과 완전히 다르게, 진화를 완전한 우연의 역사로 보는) 굴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공룡이 현저하게 큰 뇌용량으로 변하지 않았으며, 그러한 가능성 역시 파충류의 설계능력 밖에 놓여진 것이므로 , , , 우리는 우주 충돌이 공룡을 희생물로 삼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면 우리 행성계에서 의식이 진화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정을 해야만 한다. 완전히 문자적 의미에서, 우리는 일정 크기와 이성을 지닌 포유류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지구라는 행운의 별 때문이라고 감사할 따름이다.” (Gould 1989, 318) 약간의 극단적인 측면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의 도덕적 규약의 근거로서 생물학적 진보에 관하여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할 충분한 타당성이 있다. 사회다윈주의를 규범윤리학으로 보는 것은 그것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건 간에 메타윤리학의 관점에서는 그 정당화가 좀 허약한 듯 보인다. 예를 들어 인위적 규제를 반대하고 자유방임형의 정책을 전적으로 좋아 하는 것이 아닌 나 역시 열대숲과 그 보존을 크게 열망하고 있다는 점 등은 메타윤리학적으로 그 정당화가 조금은 허약하다는 뜻이다.

윤리적 회의주의

그러나 그보다 더 나은 것은 또 무엇일까? 앞서 말한 킷쳐처럼 분명한 결정을 미루는 유보적 입장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할까? 그런 입장이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킷쳐가 자주 말한 것이며 우리들도 동의해 온, 인간이 천성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 사회적 협동능력을 축조해왔다는 그런 논증을 잘 연상해보라. 그리고 이런 능력은 도덕감a moral sense에서와 같이 물리적 수준에서 그 자체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도덕성, 옳게는 도덕감이란 문화에 의해 전달되고 양식화되어 인간 내부에 강하게 깔려진 어떤 무엇이다. 도덕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사회적으로 협력하고 협동하도록 하기 위하여 자연선택에 의해 누적되어 왔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전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그 도덕감에 종속되거나 전적으로 규제받는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선택이나 결단에 의해 도덕감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도덕감을 갖는 것이다. (물론 도덕감이 없는 정신박약자의 경우도 있지만, 그 경우는 생물학적으로 예외의 상황임을 다 알고 있다) 결국 협동성이 이루어지는 현장 바로 그곳에서 인간이 인간임을 확인할 때 도덕성은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말은 우리들이 항상 협동적이거나 도덕적일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인간은 욕구나 이기심을 포함한 많은 요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도덕성 또한 이런 요인들 중의 하나이며, 대체적으로 우리 인간은 서로 협력하는 관계를 유지한다는 말이다. 때때로 도덕성은 불리한 상황을 낳기도 한다. 내가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러 스스로 물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그러다가 물에 빠져 죽기도 한다. 이런 일은 결국 나의 이익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것을 다 고려한다면 곤궁에 빠진 사람을 구해야만 한다는 감정을 소유하는 것은 나의 이익에 해당한다. 특히 곤궁에 빠진 아이일 경우는 더 그렇다. 왜냐면 내 자신이 그 어린이였다는 가정을 하거나 혹은 내가 내 아이를 갖거나 갖게 될 경우로 상황을 바꾸어 생각하면 그런 감정이 결국 이익이 된다는 말이다. 나는 나 자신 대신에 혹은 내 아이 대신에 누군가가 이 위험을 감수했으면 한다. 이를 인간이 순수 도덕감을 지니고 있다는 말로 강조한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 말은 칸트(1949) 같은 사람이 말하려는 모종의 도덕성이 된다. 이는 우리 모두가 이기적이고 최후의 이익만을 계산하는 인간이라는 의미에서 순수한 윤리적 이기주의를 설명하는 그런 과학적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의무감과 정의와 부정에 대한 감정 등의 진정한 도덕감을 갖는 인간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인과적 수준에서 볼 때, 이는 인간종의 최후 증식을 최대화하는 개체선택에 의해 훌륭히 이끌어 질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인간이 이기적 유전자에 의해 생산된다고 하여도 이기적 유전자는 이기적 인간을 필연적으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문자 그대로라면 이기적 인간은 그 집단 내에서 추방당하거나 아주 신속히 배제되는 경향이 있다. 이기적 인간들은 간단히 말해서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어떤 방식이든지간에 사회적 계약관계를 지닌다. 그러나 그 계약이라는 것이 (영화에서 보듯이) 꽤나 오래된 듯한 먼 과거 부족들의 회동에서 족장인 듯한 엄숙한 노인에 의해 이끌어지는 그런 계약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선택에 의해 선택되고 유형화된 것처럼 인간 유전자를 언급하는 인간 생물학에 의해 이끌어진 것이다.

이것이 도덕성의 본성과 진화에 관한 다윈의 관점 바로 그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철학적 맥락에 이를 적용할 때 이러한 사실이 어떤 역할을 할지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아이들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의무감 그리고 타인의 가족을 너머서 자신의 가족을 위하여 해야 할 의무감과 같은 주장에 대하여 어떠한 종류의 메타윤리학적 정당성을 줄 수 있는가? 역설적이지만 동시에 진정으로, 나는 궁극적으로 거기에 주어질 수 있는 정당성은 없다고 주장하려 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어떤 수준에서 볼 때 어떤 종류의 도덕적 회의주의를 주장한다는 말이다: 본질적 강령으로서의 회의주의가 아니라 근거주의라는 관점에서 본 회의주의임을 주목해 주시라. 결국 내가 말하고 있는 바는, 그것이 적절히 이해될 수 있다면, 윤리학에 대한 다윈주의 접근이 곧 도덕적 반실재론의 유형을 낳게 한다는 점이다. (Ruse 1986)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내가 이 논문에서 밀고 가려는 다윈주의 메타윤리학은 아주 극적으로 사회다윈주이라고 불렸던 전통의 다윈주의 메타윤리학과 다르다. 그 근본적이 주장 차이는 진화 자체의 특성에 놓여 있다. 허버트 스펜서와 에드워드 윌슨 같은 사람들은 어떤 일을 그렇게 함으로써 진화 자제의 발전이 증진되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 어떤 일을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진화적 과정을 미화하고 신성시하기 위해 인간 존재를 선전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자연주의적 오류의 총체적인 사례로서 혹은 (사실의 관계에서부터 당위의 관계로 유추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흄의 법칙을 심각하게 위반한 경우로서 철학자들로부터 비난받아온 논리 유추의 하나가 바로 그런 진화적 과정이다. 내가 말하는 진화론적 메타윤리학이란 자연주의적 오류가 분명 오류이고 또한 흄의 법칙을 위반한 것이라는 철학자들의 입장에 동의한다. 따라서 내가 말하는 진화론적 메타윤리학은 사회다윈주의가 그에 상응하는 죄과와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에도 역시 동의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진화론적 메타윤리학은 이러한 논리적 실패를 오히려 고유의 위상을 확보하는 반전의 도약대로 간주한다. 이 논문의 다윈주의 메타윤리학은 오류를 회피하는데, 그 방식은 그런 오류도 일종의 오류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오류를 끝까지 파헤치려는 작업을 함으로써 오류를 회피하려고 한다. 기존 방식의 오류를 옹호하는 그런 근거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진화론으로 그런 오류를 무마하려는 실수는 없을 것이다!

객관화

조금은 거칠고 솔직하게 말해서 실체적 도덕성이란 우리들을 사회적 협동으로 이끌기 위해 유전자에 의해 자리 잡게 된 일종의 환상이라는 것이 나의 다윈 해석이다. (Ruse and Wilson 1985, 1986) 그러한 환상이 그와 같은 성공적인 적응을 이루어낸 이유는 실체적 도덕성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과 더불어 그 실체적 도덕성이 객관적인 근거를 갖는다는 믿음 때문이라는 말을 덧붙여야 한다. 실체적 도덕성에 대한 현상학적 경험의 중요 부분은 우리들이 옳고 타당한 일을 해야만 한다는 당위를 느끼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정말 옳고 타당하기 때문에 우리는 옳고 타당한 그런 일을 해야만 한다고 느낀다는 점이다. 존 매키(John Mackie 1979)가 나보다 앞서 주장했듯이, 도덕적 경험의 중요 부분은 우리들이 실체적 윤리학을 객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는 그 근거가 없다. 단지 그런 근거에 대한 어떤 느낌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왜 이 일을 하는지에 대한 아주 괜찮은 생물학적 이유가 있다. 에모티비스트처럼 만약 도덕이 감정 이면에 어떤 정당화의 배후도 없고 그 어떤 규제도 없이 아주 단순하게 감정의 문제일 뿐이라고만 생각한다면 매우 빠르게 도덕성은 무익한 어떤 것으로 붕괴하고 말 것이다. 당신이 내 돈을 훔쳐가는 것을 나는 싫어 할 것이다. 그러나 왜 당신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그것은 느낌의 문제일 뿐이라고. 그러나 실제의 현실에서 내 돈을 훔친 당신을 내가 왜 싫어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단순하게 내 돈이 없어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잘못된 일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그리고 실제로 당신은 어떤 객관적인 의미에서 잘못 된 일을 한 것이다. 이 점은 나와 제삼자에게 당신을 비판할 권한을 준다. 실체적 도덕성은 우리가 그것을 환상이 아닌 실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말 효과적인 환상의 지위를 유지한다. 그래서 진화윤리학의 인식론적 근거는 일종의 도덕적 비실재론이며, 그러나 그것을 마치 도덕적 실재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화윤리학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을 나는 주장하고 있다.

(이는 로젠버그 (Alex Rosenberg 2003)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표현된 고민거리를 해결하는 내 방식의 설명이다. 그들은 내가 보증한 태도가 20세기 에모티비즘이라는 - 윤리 명제는 단순히 정의적 情意的 언급이라는 것 - 도덕철학의 막을 내린 것이라고 지적했고, 또한 에모티비즘은 분명히 잘못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영아 살해가 나쁘다는 것은 단순히 정서적인 호소만이 아니라, 그런 일은 진정으로 또한 실제로 잘못됐다는 언급이다. 나에게 실체적 윤리학은 단순히 감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윤리학은 주관적이지만 그 의미는 객관적이다.)

유심주의spiritualism

어쨌든 지금까지 주어진 것은 증거의 문제이기보다는 바로 명제의 문제이다. 진화가 (근거 측면에서) 윤리적 회의주의를 지향한다는 나의 주장에 대하여 나는 어떤 정당화를 제시할 수 있겠는가? 실체적 수준의 도덕성에 기초한 도덕적 실재가 정말 존재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와 우리 시대의 생물학이 바로 그런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현대생물학적 접근을 혐오하는 객관화의 고속열차를 우리가 인식할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고속열차의 실재를 결코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Nozick 1981) 도덕적 직관 배후에 놓여 있는 객관적 정의와 객관적 부정이 궁극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언제나 그러했듯이 정의와 부정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다고, 그렇게 말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러나 도덕적 경우의 상황은 고속열차 사례의 경우와는 아주 다르다. 좀더 통찰력 있는 유추는 유심주의에서 이끌어질 수 있다. 일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었을 때, 그들의 부모, 아내, 애인 등의 유족들은 전쟁에서 죽은 그가 죽음에서 다시 되살아오기만을 희망하는 심령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들은 정말 고인과의 만남을 기대했다. 그들은 고인이 된 사람들의 영원한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예를 들어 심령 부적을 통해서 전달되는 메시지를 듣고자 했다. 그래서 심령주의로 회귀한 사람들은 심령전달자의 역할을 원했다. 자, 이런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사기꾼의 경우가 아니라면, 그들은 그들의 상실감을 보상받으려는 수단으로서 그들 자신만의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어떤 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아주 강력한 사회적 상황에 의해 수반된 개인적 환상과 같은 어떤 종류이다. 이미 죽은 히긴스 병장(der tote Gefreite Higgins)이 그의 부모님에게 정말로 실제의 말을 전달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실제로는 죽지 않았다는 것으로 나중에 밝혀진 드문 경우였다. 죽은 사람으로부터 잘 살아있다는 소리를 듣게 되고 실제로는 야전병원에서 부상만을 입은 채 살아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면 그 얼마나 놀랍겠는가?

유심주의의 경우 그가 말한 바를 왜 들을 수 있는 이유에 대한 인과적 설명이 가능만 하다면, 궁극적인 근거에 대한 요청이 더 이상 필요 없음을 우리는 인지하고 있다. 생물학적 경우도 이와 매우 비슷하다고 나는 주장하려 한다. 그 사례로서 협동에 대한 강한 생물학적 이유가 존재한다. 우리는 이기적 인간으로 되가는 경향이 있지만, 상호 협력자로서 우리는 그런 이기성을 돌파해낼 모종의 방식을 필요로 한다. 이기성을 스스로 극복하도록 생물학은 인간에게 도덕성을 부여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데, 이는 인간이 항상 도덕 지향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이 잘 알고 있듯이, 사실 우리는 선과 악의 이중적 혼재 속에서 살고 있다. (Ruse 2001a)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순수 도덕 감정을 인간이 갖고 있으며, 또한 생물학에 의해 그 도덕 감정이 적절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를 인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감정이 환상임을 알게 된다. 물론 인간은 그것을 객관화시키는 관습이 있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객관적 도덕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이 알고 있기 때문에 당신이 방종하거나 파괴하고 약탈을 시도할 것이라고 보면 결코 안 되며, 이런 점을 내가 분명하게 확신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진리는 당신을 항상 방종토록 놔두지 않는다.

진보를 다시 말하며

그러나 이성 존재의 필요조건과 같은 칸트 식의 형식으로서 혹은 객관적 도덕성이나 혹은 저기(there is) 실제로 존재한다는 플라톤 식의 객관적 도덕성에서처럼, 배후에 존재하는 객관적 도덕성을 부정하는 뜻이 아니라고 당신은 여전히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윈주의자들은 한발 앞선 논증으로 답변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초기에는 생물학적 진보를 매우 의문시 했다는 점이다. 모나드에서 인류로, 하잘 것 없는 무형의 생명체에서 인간으로 상향하는 그런 자연의 상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19세기 사람들은 자주 말하곤 했다. 그러나 진화는 오히려 방향 없는 과정이며, 목적 없이 떠도는 보이지 않는 진행이다. (Ruse 1993; McShea 1991) 이것이 이러한 특수한 맥락에서 의미하는 바는 인간만의 고유한 진화방식이 아예 없었다는 말이다. 즉 인간이 소유한 도덕 감정은 다른 생명체와 달리 아주 독특하게 진화했었어야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왜 인간이 아주 색다른 진화 과정을 거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유가 정말 없다는 점이다. 다윈주의 관점에서 볼 때, 도덕적 사유에 대한 존재론적 추동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칸트가 강조했듯이 사회적 동물은 필연적으로 행동에 대한 모종의 형식규칙을 필연적으로 소유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의 형식 규칙을 (실체적인) 공유감정으로의 도덕성으로 직접 일치시키는 일은 필연적인 경우가 아니다. 1950년대 냉전 시기 미국의 아이젠하워 집권 당시 국무성 장관의 이름을 따서 붙인 “존 포스터 덜즈 도덕시스템”(John Foster Dulles system of morality) 으로 불렸던 방식처럼 우리는 특별히 진화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덜즈 장관은 러시아인을 미워했고, 러시아인도 그를 미워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덜즈 장관은 러시아인을 미워해야만 한다는 그런 도덕적 의무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든 문제가 자기에게 쏟아 질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무감에 바탕한 이러한 서로간의 증오가 있었기에 실제로는 그들 간의 협동과 조화라는 모종의 수준이 존재했었다. 세계는 전쟁과 파괴로 붕괴되지 않았다. 다윈주의에서 보듯 인간이 도덕에 대한 덜즈 방식으로 진화했을 것이라고 시사하는 것은 충분히 그럴 듯 하다, 즉 최고의 윤리적 요청은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이웃을 미워하라고 하는 덜즈 방식을 말한다. 그러나 당신의 이웃이 당신을 미워하며 따라서 당신은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점을 항상 기억하라. 왜냐하면 당신이 그들에게 해를 끼치면 곧바로 그 역으로 그들도 당신에게 해를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아무리 양보한다하여도 이 사실은 적어도 고유의 (실체적인) 도덕성이 아니라, 어떤 대안적이고 매우 색다른 방식의 도덕성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도덕성은 동일한 형식 구조라도 그 내용은 분명히 다른 것일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만약 실체적 도덕성에 대한 객관적 근거가 존재한다면, 둘 중의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라는 점이다. 최소한도로 우리 인간은 인간의 행위방식대로 행동할 것이지만, 실제로는 객관적 도덕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여 그것은 우리가 믿고 있는 것과는 아주 색다른 어떤 무엇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생물학에 근거하여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을 믿고 있다. 또한 생물학에 근거하여 우리는 인간의 실체적 도덕성이 객관적으로 정당화된다는 것을 믿고 있다. 그러나 그 참된 객관적 도덕성은 기존의 것과 다른 무엇이다.

분명 이러한 방식의 객관성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는 객관적 도덕성의 의미와 전적으로 다른 모순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는 객관적 도덕성의 의미는 인간 본성으로 드러난 이기적 자아라는 사실을 구체화한다. 그런데 그 객관성이라는 것이 모든 인간에게 필연적이 아니라, 데카르트의 명석 판명한 관념처럼, 스스로를 계몽하는 어느 정도 수준이 있는 인간에게만 드러난 본성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다윈주의를 따른다면 우리는 그러한 객관적인 도덕성의 존재를 반박할 수 있다. 다윈의 진화생물학은 객관적 도덕성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과 무관하며 그래서 비진보적이다. 우리는 전적으로 잘못 생각했다. 그리고 객관적 도덕성이 결코 인식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나는 다윈 진화론이 도덕덕 비실재론의 한 유형인 도덕적 회의론으로 유도된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결론

결국 이 원고는 필립 킷쳐와 같은 사람들에 대한 대안적인 방식이다. 만약 당신이 지적하기를, 나의 독창성을 못 본 채, 도덕성이란 비자연적이고 객관적인 속성을 반영하기보다는 일종의 심리주의적 문제라고 사유했던 데이비드 흄과 비슷한 생각으로부터 나의 전반적인 입장이 출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것을 비판이 아니라 칭찬으로 받아들이겠다. 나의 입장은 찰스 다윈의 과학을 거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 발전한 데이비드 흄의 입장과 비슷하다고 나는 여기고 있는데, 이는 정말 사실이다. 더 나은 조언자가 누구인지 그 누가 이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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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최종덕 (상지대, 과학철학)




<개요>

윤리학은 사람들 사이에서 협동심을 갖게 하도록 하기 위해 자연선택에 의해 주어진 일종의 환상이라는 것이 루스의 기본 입장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도덕감을 진화의 소산물로 간주한다. 이러한 이해 방식은 분명히 자연주의적이며 진화론적 적응주의에 기반한다. 물론 그는 단순한 유물론적 접근이 아닌 철학적 이성과 인간학적 고유성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윤리학을 정초한다. 예를 들어 그는 도덕성을 동정심과 이기심 사이의 충돌을 조절하는 장치로서 진화의 역사로 편입된 인간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조절은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 결정적 구실을 한다고 보며, 나아가 도덕성은 다양한 사회집단 사이의 상호작용과 그 상호작용에 미치는 구성원의 영향력 등을 통해서 표현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주요쟁점은 인간의 도덕성이란 적응 과정을 거친 것이며 또한 인간 진화에 의한 소산물이라는 데 있다.

그는 사실과 당위의 문제를 혼용하는 것에 대한 지나온 철학적 비판들, 예를 들어 무어나 흄에 대하여 동조하면서 동시에 현실적인 윤리적인 상황에서 사실과 당위의 엄격한 단절보다는 열려진 연결가능성을 고려하였다. 또한 많은 비판을 염두에 두었는지 매우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역사의 진보와 생물학의 진화를 연결시키고자 했다. 그의 역사 인식은 기본적으로 문명적 진보관이며, 생물학적 현상에서나 아니면 사회적인 현상에서 진보가 적용된다고 한다. 그리고 유기체의 진보 법칙이 모든 것의 진보 법칙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것이 어떤 현상이든지 단순성에서 복잡성으로, 동형성에서 이형성으로 진화하는 것이 곧 진보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진보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세계철학의 주제라고 본다.

결국 인간의 진화는 문화에 이르게 되었고 도덕감 역시 문화에 의해 진화될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도덕감이란 문화에 의해 전달되고 양식화되어 인간 내부에 강하게 깔려진 어떤 무엇이다. 도덕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사회적으로 협력하고 협동하도록 하기 위하여 자연선택에 의해 누적되어 왔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그 도덕감에 종속되거나 전적으로 규제받는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선택이나 결단에 의해 도덕감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도덕감을 갖는다고 루스는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도덕감의 체계인 윤리학의 근거가 객관적이고 이상적이라는 데에 전적으로 반대한다. 윤리학에 대한 다윈주의 접근은 곧 도덕적 반실재론의 유형을 낳는다. 도덕성의 근거라고 실체적 도덕성은 우리들을 사회적 협동으로 이끌기 위해 유전자에 의해 자리 잡게 된 일종의 환상이라는 것이 루스의 다윈 해석이다. 그러한 환상이 그와 같은 성공적인 적응을 이루어낸 이유는 실체적 도덕성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과 더불어 그 실체적 도덕성이 객관적인 근거를 갖는다는 허상의 믿음 때문이라는 말을 덧붙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