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성과 합법성의 관계에 대한 고찰*
―칸트와 헤겔의 인륜성 개념을 중심으로
김 석 수 전남대 철학
1.들어가는 말
이 글은 서양 근대인의 삶의 양식에 나타난 권리와 의무의 관계를 분석하고, 나아가 그것을 바탕으로 인간 삶의 바람직한 조건을 전망해보는 데 있다. 하지만 권리와 의무의 관계에 관한 근대 철학자들의 이론을 전반적으로 다룰 수는 없다. 다만 여기서는 근대의 사상에 가장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칸트와 헤겔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인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관계를 맺는 양상은 수직적 관계일 수도 있고 수평적 관계일 수도 있다. 또 그 각각의 관계에는 내적 관계와 외적 관계가 있을 수 있다. 수직적 관계가 중시되는 사회는 인간의 신분화가 명시화되는 경향이 강하다면, 수평적 관계가 중시되는 사회는 인간의 탈신분화에 대한 지향이 담겨 있다. 일반적 차원에서 볼 때, 고․중세는 수직적 관계가 수평적 관계를 앞서가는 면이 강했다면, 근대 이후는 수평적 관계가 수직적 관계를 앞서가는 면이 강하다. 따라서 근대 이후는 복종이나 순종보다는 자유와 평등이 더 중요한 가치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근대 이후는 lex로부터 ius로 이행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내적 관계와 외적 관계에서도 근대를 기점으로 매우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이전에는 인간의 내적 관계에 바탕을 둔 덕치(德治)가 중시되었다면, 근대 이후에는 자기 보존(conatus essendi)을 중심으로 하는 외적 관계에 바탕을 둔 법치(法治)가 중시되었다. 그러므로 근대 이후는 법과 도덕을 연결선상에서 바라보려는 자연법론적 입장보다는 이들 사이를 단절로 바라보려는 법실증주의적 입장이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와 같은 양상은 근대만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특징은 아니다. 왜냐 하면 각 시대마다 이런 양상은 정도를 달리 하면서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다만 그 양상이 근대를 기점으로 대단히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되는 요소다.
하지만 덕치의 시대든 법치의 시대든 그것이 의도하고 있는 본질과는 상관없이 인간의 관계를 매우 왜곡시키는 상황이 존재하였다. 전자의 경우는 법이 외적 규제의 차원을 넘어 내적 규제까지 확장되었으며 동시에 도덕이 내적 규제의 차원을 넘어 외적으로 강제하는 기능으로까지 확장되었다. 그로 인해 교회법과 율법이 종교 집단의 규제 기능을 넘어서 현실 형법의 기능까지 담당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종교의 정치 권력화와 맞물려 있으며, 따라서 성직자 중심의 신분 사회를 정당화하는 데 이바지했다. 한편, 후자의 경우는 내적 관계와 외적 관계의 분리를 추구함으로써 관계를 구속하는 강제력이 효율성에만 너무 집착되고 정당성과 윤리성이 배척되는 면을 보이게 됨으로써 관계가 지나치게 물적이고 외적인 관계로 전락되고, 급기야는 도덕적 관계의 정립이 외면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관계가 피상적인 상태로 전락되는 면을 보이게 되었다. 근대인의 이와 같은 새로운 관계의 형성 역시 또 하나의 주도 계급, 즉 신흥 상업 계층으로 대변되는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근대 부르주아 계급은 내적 관계와 외적 관계의 경계가 부정되고, 수직적 관계가 수평적 관계를 압도해버리는 앞 시대의 부조리를 용인할 수 없었다. 익히 알다시피 근대인은 종교 개혁과 시민혁명을 통하여 관계에 대한 새로운 정립을 요구하게 되었다. 중세 말기의 유명론(唯名論)은 보편자 실재론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게 되었고, 또한 수아레츠(F. Suarez)를 중심으로 한 존재와 당위의 분리론이 강하게 대두되면서 마침내 루터와 칼뱅은 종교의 정치 권력화를 차단하고자 했다. 심지어 근대 초기의 국제법학자인 그로티우스(H. Grotius)는 신을 괄호 속에 넣으면서 ‘2×2=4라는 것은 신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데카르트가 “cogito ergo sum”을 아르키메데스적 점으로 설정하고, 칸트가 인간 이성이 용기를 지니고 “스스로 생각함(Selbstdenken)”을 계몽이라고 주장하게 된 이래로, 근대인은 자신의 이성의 자발성을 바탕으로, 한쪽에는 실험을 들고 다른 한쪽에는 원리를 들고서 우상을 타파하고, 세상을 문초하고 닦달하는 주체의 시대를 열어놓았다. 이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평등은 그 발전의 통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무질서와 혼란이라는 자연 상태를 감당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근대 시민사회 속에 존재하는 신흥 상업 계층들의 욕구의 분출 과정을 무리 없이 규제하는 새로운 질서가 요구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근대인은 자연 상태로부터 시민 상태로 이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무법적 자유의 시대로부터 법적 규제의 시대로 이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되었듯이 근대의 사회계약론으로 이어지면서 법질서가 이미 자기 보존(conatus essendi)에 주안점을 두고 확립됨으로써 법의 정당성(윤리성)보다는 법의 효율성(유용성)에 더 치중되었다. 그러다보니 법과 도덕은 단절되고, 인간의 삶에서 권리와 의무의 관계에서 내적 관점보다는 외적 관점이 중시되었다. 이와 같은 관점은 공리주의를 통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발전되었다.
이처럼 근대는 관계 정립에서 대단히 격변하는 시대였다. 내적 의무와 외적 의무, 내적 권리와 외적 권리의 갈등이 어느 시대보다 심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근대인의 이런 갈등 상황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간파하고 이 문제를 극복하려고 애썼던 사람이 바로 칸트와 헤겔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칸트는 1797년에 출판하게 된 자신의 ?도덕형이상학(Metaphysik der Sitten)?의 제1부인 외적인 의무를 다루는 <법론(Rechtslehre)>과 제2부인 내적인 의무를 다루는 <덕론(Tugendlehre)>에서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아주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특히 행위의 일치만을 고려하는 합법성(Legalität)과 동기도 함께 고려하는 도덕성(Moralität)에 대한 그의 분석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바람직하게 정립하는 문제에 매우 중요한 열쇠를 제공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도덕형이상학 정초(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1785)나 ?실천이성비판(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1788)에서 주장한 개인 윤리 차원의 도덕성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들 사이의 외적 관계, 즉 정의의 문제와 관련하여 합법성도 대단히 중요하게 다룸으로써 사회 윤리의 차원에까지 확장시킨다. 그러나 그는 도덕성과 합법성을 단적으로 통일시키거나 단적으로 분리시키는 그 어느 입장도 거부하고 구별 속에서 연결짓고자 하였다. 물론 그의 이런 작업은 그의 반성적 판단력이 지향하는 합목적성 이론과 연관되어 있다. 그는 역사적 진행 과정 속에서 이 둘 사이를 규제적 관점에서 연결짓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극단적인 자연법론자의 신화도 극단적인 법실증주의의 신화도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칸트의 이런 입장은 헤겔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는다. 헤겔은 칸트가 이론 철학에서 물 자체를 인식의 범주 바깥에 설정함으로써 악 무한(die schlechte Unendlichkeit)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듯이, 실천 철학에서도 법과 도덕, 합법성과 도덕성을 변증법으로 지양시키지 못하고 관계가 겉돌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자신의 ?정신현상학(Phänomenologie des Geistes)?(1807)의 <이성(Vernunft)> 부분과 <정신(Geist)> 부분에서 칸트의 도덕성과 합법성에 대해서 비판을 하고 있으며, 또한 그의 ?법철학 개요(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1821)에서도 추상법(das abstrakte Recht)과 도덕성(die Moralität)과 인륜성(die Sittlichkeit)을 다루면서 마찬가지로 비판하고 있다. 그의 비판의 요지는 외적 관계와 내적 관계의 대립이 해소되지 못하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의 이와 같은 비판은 그의 ?인륜성의 체계(System der Sittlichkeit)?나 ?자연법의 학적 다룸의 방식에 관하여(Über die wissenschaft- lichen Behandlungsarten des Naturrechts)?(1802)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헤겔의 칸트에 대한 이와 같은 비판은 칸트의 이론철학에 대한 비판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칸트의 인식은 대립자가 남아 있는 추상적 인식에 머물고 있고, 따라서 그의 자유 역시 추상적 자유로 머물러 있다고 보는 것이 헤겔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헤겔이 볼 때 칸트가 다룬 도덕성과 합법성에는 내적 자유와 외적 자유의 대립이 아직 지양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칸트에 대한 헤겔의 이런 비판이 과연 정당할 수 있는지는 다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칸트에게서 외적 관계와 내적 관계는 겉도는 것이 아니라 긴장적 조화 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합법성과 도덕성의 구별, 내적 의무와 외적 의무, 내적 자유와 외적 자유의 구별은 신화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으로 읽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헤겔식으로 변증법적 종합의 관계로 진행되면 결국은 내적 관계와 외적 관계의 구별이 무너져 또 하나의 신화가 초래될 수도 있을 것이다. 칸트의 진정한 입장은 섣부른 도덕의 법화나 법의 도덕화, 외적 관계의 섣부른 내적 관계화나 내적 관계의 섣부른 외적 관계화를 경계하는 지대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칸트와 헤겔 사이에 발생하는 이와 같은 문제를 좀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논의하기 위해서는 칸트와 헤겔이 바라보는 도덕성과 합법성 개념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나아가 왜 헤겔은 인륜성을 더 강조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도덕성, 합법성, 인륜성 개념을 중심으로 칸트와 헤겔의 입장을 살펴보고 그 정당성을 반성적으로 고찰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2.칸트철학에서의 합법성과 도덕성
이미 앞에서도 암시되었듯이 근대인의 삶의 양식은 그 이전의 삶의 양식과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연성이나 초자연성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인간의 비주체성에 대한 근본적 반성이며 비판이다. 근대 이전의 삶은 자연성(physis)과 규범성(nomos)이 아직 분화되지 않은 상태로서, 규범성은 인간 주체가 함부로 처리할 수 없는 독자적인 타재성(他在性)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타재성은 주체를 근거 짓는 자연성이나 초자연성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 주체의 이성은 자신의 삶의 원칙이나 질서를 자기 속에서 형성해낼 수 없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도덕 일반에 관한 용어들, 이른바 Ethik, Moralität, Sittlichkeit와 같은 용어들에도 당시에는 자연성과 규범성의 분화가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즉, 이들 용어들은 원래 제각기 ethos, mos(복수 mores), sitte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관습이나 풍습의 위치를 가지고 있는 생활 양식이었다. 그리고 이들 생활 양식이나 관습은 인간 주체의 이성적 활동의 반성 속에서 확보된 것이 아니라 주체가 자각을 통하여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확립하기 전에 이미 몸담고 살아야 하는 상황 속에 존재하는 규율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인간의 자유를 열어주고 인간다움의 진정한 위치를 마련해주었더라면 우리는 그러한 생활 양식 속에서 계속적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러한 타자 의존적 삶의 양식 속에서 자라나고 있었던 억압의 부조리는 자유를 갈망하는 근대인의 주체적 활동을 차단할 수가 없었다. 즉, 신화적 삶에서 계몽적 삶으로 이행하려는 근대의 시민 주체들의 이성의 몸부림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근대의 계몽 주체들은 더 이상 규범성을 자연성이나 초자연성에서 찾는 전근대적 의식을 물려받지 않으려고 하였다. 따라서 당연히 근대인들은 자연성과 규범성이 미분화되어 있는 전통적 규범 개념을 수용할 리가 없다. 이들은 자연성과 규범성을 갈라놓게 되며, 규범성의 관장권을 주체의 이성 활동 안으로 귀환시켰다. 그러나 주체로의 회귀가 주체의 욕구를 절대화시키고 주체를 신격화시킬 목적으로 진행된다면 그것 역시 또 하나의 신화의 굴레를 만드는 것이다. 칸트는 바로 타자의 절대화나 주체의 절대화가 빚어내는 이데올로기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이성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냉엄한 비판을 통하여 이성의 자긍심과 겸손함을 동시적으로 확보하려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그가 이론 이성에 한계를 긋는 것은 이성에 겸손함을 확립하고자 함이며, 그가 실천 이성에 우위를 두고자 하는 것은 이성의 자긍심을 마련하고자 함이다.
이처럼 칸트는 이성의 주체적인 반성이 동반되지 않는 고대적 인륜 체계를 총체적으로 비판하고 이성이 스스로의 활동 속에서 엄정하게 확립할 수 있는 선험적 윤리 체계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도덕 이론과 법 이론을 정초하는 데에서 경험적 요소를 벗어나 완전히 순수 이성의 활동 원리에 근거해서 확립하고자 한 것은 전통적 생활 양식 속에 담겨 있는 권위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며, 근대 이후 전개된 계산적이고 도구적인 합리성의 비인간성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그는 한편으로는 과거의 생활 양식 속에서 전개된 도덕의 과도함이 법의 옷을 입고 인간의 내면 세계까지도 송두리째 지배하려고 하는 과도한 권위주의에 대한 도전을 보이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에 문고리를 잠그고 계산적 합리성만 확대하려고 하는 과도한 도구주의에 대해서도 견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칸트의 이와 같은 점은 합법성과 도덕성의 관계에 대한 그의 논의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칸트는 의지에 근거를 둔 자유의 법칙을 자연 법칙들과 구별하여 “도덕적(moralisch)”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자유의 법칙이 순전히 외적인 행위들이나 외적 행위들의 합법칙성에만 관계하는 한에서 “법적(juridisch)”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자유의 법칙이 행위들을 규정하는 근거로서 요구되면, 그때는 이 법칙을 “윤리적(ethisch)”이라고 일컫는다. 그래서 법적인 법칙들과 일치하는 것은 행위의 ‘합법성’이 되며, 반면에 윤리적 법칙들과 일치하는 것은 ‘도덕성’이 된다. 나아가 전자의 법칙에 관계하는 자유는 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만이 될 수 있으며, 후자의 법칙에 관계하는 자유는 “그 자유가 이성의 법칙을 통해서 규정되는 한에서 ‘자의’의 외적 사용(법적 사용)에서 뿐만 아니라 내적 사용(윤리적 사용)에서도 자유가 된다.”
따라서 법적인 입법에 따른 의무들은 외적 의무만 해당된다. 왜냐 하면 이 입법은 내적인 의무의 이념이 그 자체로 ‘자의’를 결정하도록 요구하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법칙에 적합한 동기만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한편, “윤리적(ethisch) 입법은 내적 행위를 의무로 삼지만 외적인 행위를 배제하지 않고 의무 일반의 모든 것에 관계한다. 그렇지만 이 입법은 단지 자신의 법칙 안에서 행위에의 내적 동기(의무의 이념)만을 포함하므로 이러한 입법은 외적인 입법에서 나타나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윤리적 입법은 그것이 비록 다른 입법에 의존하는 의무들을 취한다 하더라도 외적일 수는 없다.
모든 의무들은 단지 그것들이 의무들이기 때문에 윤리학에 속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의무들을 위한 입법이 항시 윤리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이 의무들 중 상당 부분이 윤리 바깥에 있다. “따라서 윤리는 내가 맺은 계약이 비록 상대편이 그 계약을 이행하라고 강제할 수 없다 할지라도 계약을 이행할 것을 명한다. ……하지만 동의한 약속이 준수되어야 한다는 입법은 윤리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법(Ius)에 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윤리의 경우는 외적 준수 여부와 상관없이 내가 나에게 명하는 명법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지켜야 한다는 동기만으로 충분하다. 만약에 이런 구분이 서지 않는다면, 모든 윤리적 영역에 법적 강요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관용적 행위는 고려될 수 없을 것이다. 준수를 강제적으로 이행하도록 하는 것은 법의 의무이지 덕의 의무가 아니다. 반면에 그 어떤 강제가 없어도 여전히 어떤 의무를 지키려고 하는 것은 “덕스러운 행동(eine tugendhafte Handlung)”이다.
“따라서 <덕론>과 <법론>의 구별은 그것들이 갖는 상이한 의무들에 의해서라기보다는 하나의 동기 혹은 다른 동기를 그 법과 연결시켜주는 입법의 차이에 의해서 구별된다.” 윤리적인 의무는 외적인 것에 관여할 수 있다 할지라도 윤리적 입법 그 자체는 외적일 수 없다. 의무 차원에서는 법과 윤리가 공통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의무지움(Verpflichtung)의 차이에서 이들 사이의 구별이 이루어진다. 의무 그 자체를 행위의 동기로 삼는 경우에만 윤리에 고유한 것이 된다. 이것은 “직접적인 윤리적 의무(direkt-ethische Pflichten)”며, 그렇지 않은 내적 입법은 간접적인 윤리적 의무들이다.
나아가 그는 구속성(Verbindlichkeit)과 의무(Pflicht)와 관련하여 합법성과 도덕성의 문제를 논한다. “구속성은 이성의 정언 명법 아래 있는 자유로운 행위의 필연성이다.” 인간은 신과 달라서, 실천적 법칙이 하나의 명법으로 다가온다. 따라서 이러한 명법에는 의무가 필히 뒤따르게 된다. 의무란 누군가를 구속하는 행위며 따라서 구속의 내용이다. 이런 의무가 결여되어 있는 행위는 도덕과 관계가 없다. 스스로에게 법칙을 부과하는 자율적인 인격(Person)으로서의 인간은 책임과 자율성을 결여하고 있는 사물(Sache)과는 달리 의무에 합치하거나 의무에 반함(factum licitum aut illicitum)에 따라서 그의 행동이 옳거나 잘못된 것이며 또한 위반이 된다. 이들의 행동이 외적 법칙에 합치하면 정당하고(iustum) 그렇지 않으면 부당하다(iniustum).
여기에서 칸트는 외적(현실적, 실정적) 입법이 가능한 구속력 있는 법(칙)들(die verbindenden Gesetze)을 일반적으로 외적 법(칙)(äußere Gesetze:leges externae)이라고 부르고, 이 외적 법(칙)들 중에서 외적 입법 없이도 구속력이 있는 이성을 통해서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법(칙)들은 외적이지만 자연적인 법(칙)들이라고 한다. 한편, 현실적인 외적 입법이 없이는 전혀 구속력이 없는 그러한 법(칙)들은 실정법(die positive Gesetze)이라고 명명한다. 그에게서 자연법은 실정법의 초월적 근거가 된다.
이처럼 칸트는 합법성과 도덕성, 실정법과 자연법을 완전히 분리하거나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구별 속에서 연결짓고자 한다. 칸트의 도덕성과 합법성에 대한 개념 규정은 법의 도덕화나 도덕의 법화가 빚어내는 신화를 막는 중요한 기초가 되고 있다. 바로 칸트의 도덕성과 합법성의 개념 구분이 법과 도덕의 관계 정립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았으며, 특히 그의 합법성 개념은 그의 도덕철학이 주관성에 매몰되어 있는 심정 윤리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해준다. 그의 합법성 개념과 함께 등장하는 의지는 단순한 바람(Wunsch)이 아니라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으며, 개인적이고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의지다. 칸트에게서 합법성은 도덕성에 우연적이고 임의적으로 관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덕성이 갖추어야 할 필연적 조건이다. “의무에서(aus Pflicht) 나온 행위는 의무에 적합한(pflichtmäßig) 행위와는 다르지만, 그렇다고 모순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회페가 주장하듯이 칸트는 실증주의처럼 합법성과 도덕성을 분리, 대립시키지 않으며, 이들 사이를 서로 길러주는 상호 보완 관계로 바라보고 있다.
결국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의지와 자의, 사교성과 비사교성을 동시에 가진 존재로서 도덕성이나 합법성 어느 하나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이 아무리 주관적인 도덕성을 갖추고 있어도 현실 사회의 제도적 정당성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사회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것처럼, 반대로 이 사회가 제도적으로 아무리 공정성을 유지하고 있더라도 개인의 주관적 도덕성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유지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 양자를 분리시켜버리거나 통합시켜버리면 결국 도덕을 사적 공간에 가두어 사회의 부정의를 제어할 수 없거나 법의 도덕화로 사적 영역을 완전히 침범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앞서 언급되었듯이 칸트는 도덕적인 의무는 직접적인 윤리적 의무가 되는 데 반해서 법적인 의무는 간접적인 윤리적 의무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적어도 법의 의무도 인간의 내면에까지 직접적으로 구속하는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경향성에 끌리는 존재로서 자신의 의지가 자의에게 밀리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의지가 자의를 자율적 단계에서 이끌기 위해서는 자의를 타율적으로 규제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불완전하고 광의의 의무인 덕의 의무는 완전하고 협의의 의무인 법의 의무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칸트에게는 법의 의무가 강조된다고 해서 덕의 의무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길러주는 기능을 해야 한다. 사실 칸트에 의하면 정치적 진보를 통하여 합법성은 증가될지는 모르지만 도덕성이 증가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즉 윤리적-시민적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그의 이론 철학에서 요청으로 남아 있었던 신의 영역이 여전히 중요한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그는 인간의 힘만으로 도덕성과 합법성, 의무와 행복이 일치하는 세계로서의 평화의 왕국, 목적의 왕국이 이 세계에서 완전히 실현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최고선으로서의 그와 같은 세계는 우리에게 하나의 이념으로서 역사적 과정 속에서 우리가 실현해야 할 과제로서 부과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에게는 도덕성과 합법성의 통일은 하나의 이념으로서 우리에게 규제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지 구성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칸트의 이와 같은 입장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인간이 외적 자유와 내적 자유를 완전히 실현하기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며, 동시에 미래에 대한 절망보다는 희망을 갖고 이 맡겨진 사명을 실현해야 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에게는 합법성과 도덕성, 법과 도덕의 조화로서의 역사적 진보는 이론적 필연성이 아니라 실천적 필연성이다.
3.헤겔에게서의 합법성과 도덕성
헤겔은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이라는 변증법적 지양의 원칙에 입각하여 이념과 현실, 물 자체와 현상, 유한과 무한을 종합하고자 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관점은 사회 현상을 바라보는 데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는 고대의 직접적 공동체를 근대의 특수적 개별자와 다시 종합해내어 개체가 존재의 의미를 갖는 국가를 확립하고, 나아가 자연성과 규범성이 직접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고대적 인륜태를 이들이 분리되어 있는 근대적 세계를 매개로 하여 다시 통일하여 근대적 인륜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단순히 고대로의 복귀가 아니라 근대 시민사회의 이익 중심적 개체를 고려하는 내용이 채워진 복귀다. 즉, 그는 추상적 보편이나 추상적 개체를 거부하고 전체와 개체를 변증법적으로 종합한 <구체적 보편>으로서의 근대적 인륜성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헤겔의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칸트 역시 근대 세계에 빠져 보편과 개체, 자연성과 규범성, 도덕과 법의 분리 상태에 머물고 있을 뿐이지 고대를 통해서 변증법적으로 다시 지양해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헤겔은 변증법적 관점에서 칸트의 이원성을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정언 명법에 입각하고 있는 칸트의 도덕성은 이 땅의 국민 의식과 함께 자라나지 못하고 추상적인 정신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다시 말하면 칸트의 도덕성은 현실의 인정 투쟁 속에 담겨 있는 정신의 진정한 내용을 간파하지 못하고 공허한 주관적 형식주의로 경도되었다. 적어도 헤겔에 의하면 덕성(Tugend)을 통해 추구되는 개인의 당위적 보편성은 세계 행정(Weltlauf) 속에서 스스로의 희생을 통하여 현실성을 얻어야 한다. 그에게는 덕성과 세계 행정, 특수한 이해 관심과 보편성, 도덕성과 구체적인 세계가 서로 외적으로 관련된 채 대립되어 있는 분리의 세계가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지양되어야 한다.
그러나 헤겔은 칸트의 철학에는 이러한 상호 지양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고 본다. 헤겔에게는 존재와 본질이 이미 정과 반으로서 개념을 통해서 합을 이루게 된다. 그의 논리학의 존재론과 본질론은 개념론에서 완성을 보며, 존재의 질서와 이성의 질서인 논리학이 동렬에 있게 된다. 그는 칸트의 이성은 존재 자체를 ‘요청’의 영역에 남겨놓음으로써 자유는 한쪽의 자유가 되고 말며, 궁극적으로 갈등하는 자유가 되고 만다고 본다. 그러므로 헤겔은 리델(M. Riedel)이 해석하듯이 ‘자연의 법칙(Naturgesetz)’과 ‘권리의 법칙(Rechtsgesetz)’이 대립적 상태에서 결국에는 정신의 권리의 법칙이 물질의 자연의 법칙을 지양함으로써 자연의 왕국에 (이성)법의 왕국을 건설해야 한다. 그러므로 헤겔에게는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이미 자연법은 이성법이 되고, lex는 ius가 된다.
헤겔의 이러한 논리는 이미 그의 ?법철학?에 깊이 깔려 있다. 추상법과 도덕법은 구체적 보편에 이르지 못한 미발전 단계다. 전자는 계약법의 전형적인 특징으로서 외적 관계에만 몰입되어 내적 관계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으며, 후자는 내적 관계에 몰입되어 외적 관계로 구체화되지 못하고 있다. 전자는 홉스의 계약론적인 것이며, 후자는 칸트의 정언 명법적인 것이다. 칸트식 용어로 표현하면 합법성과 도덕성이 분열 상태에 있다. 그는 칸트가 이 둘을 구분해낸 것은 잘한 일이지만, 이 둘을 다시 통일시켜내지 못한 데 대해서 유감을 표시하고 있다.
“주관적인 선과 객관적인 즉자대자적(卽者對自的)으로 존재하는 선과의 통일이 인륜성(Sittlichkeit)이며, 거기에 개념에 따라 유화(宥和. Versöhnung)가 생긴다. 왜냐 하면 도덕성이 대체로 주관적인 면에서 본 의지의 형식이라면, 인륜성은 단순히 주관적인 형식이나 의지의 자기 규정이 아니라 인륜의 개념, 즉 자유를 내용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추상법적인 것도 도덕적인 것도 고립하여 존재할 수는 없다. 양자는 인륜적인 것을……기초로 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 하면 추상법에는 주관성이 결여되어 있고 도덕성은 오로지 주관성만을 그 계기로 하고 있어, 그렇게 해서는 양 계기가 고립되어 현실성을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합법성이 지배하는 법의 세계는 근대 사회계약론에 근거하는 추상법의 단계에 머물러서 외적 자유에만 관여하고 있고, 도덕성이 지배하는 윤리의 세계는 주관적이고 형식적인 정언 명법의 세계에 머물러서 현실적 자유가 아닌 내적 자유에만 관여하여 서로 대립한 상태로 겉돌고 있다는 것이 헤겔이 칸트를 바라보는 입장이다. 더군다나 일팅(Ilting)이 주장하듯이 그는 칸트의 자연법이 피히테의 영향을 받아 하나의 허구로 나타난다고 본다. 헤겔은 칸트가 자유를 위해서 법과 도덕의 문제를 고민했던 것을 극찬하면서도 그가 좀더 나아가지 못한 데 대해서 유감을 표시하고 있다. 그는 칸트가 도덕의 내면적 주관성과 법의 외면적 현실성의 구별을 분리(Trennung)로 영영 고착화시켜버렸다는 것이다.
헤겔의 관점에서 볼 때 칸트의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정치학과 윤리학이 분리되어버려, 현실 정치학의 문제가 주관 속에서 해소되고 만다. 헤겔주의자들은 칸트가 개인의 이익에 중점을 두고 있는 부르주아 사상가여서 사회 이익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는 현실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이해 관계가 얽힐 수밖에 없는데 이 문제를 사회적 맥락을 넘어선 초도덕성에 호소함으로써 비현실성을 지니게 된다고 비판한다. 칸트에게는 개인의 이익 추구와 정언 명법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칸트의 원전을 인용하여 그의 인륜의 법칙을 단지 “인간적 심정의 능력”에 지나지 않으며 인륜(Sitte)의 의미는 생활 습관(Manieren)이나 생활 방식(Lebensart)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칸트의 인륜의 법칙을 내면에 침잠하는 ‘덕(德)의 기사(騎士)’에 지나지 않으며, 단순한 의욕만의 월계수는 결코 푸르러본 적이라곤 없는 메마른 나뭇잎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헤겔은 칸트의 이러한 도덕성과는 달리 도덕성을 내적인 자유의 의무를 한정짓는 데 국한시키지 않고 내적인 자유가 현실화된 제도에까지 관계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제 헤겔에게는 “도덕성으로부터 (칸트에게서는 단지 법 아래 질서지어져 있던) 가족이나 사회나 국가라는 제도들로의 이행은 곧 인륜성의 이행으로 파악된다.” 그는 고대의 추상적 인륜성과 칸트의 추상적 도덕성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여 구체적 인륜성으로서의 제도적 현실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실현하고자 한다. 따라서 “인륜적인 것은 선의 경우와 같이 추상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내밀적인 의미에서 현실적이다.” 그러므로 헤겔의 인륜성은 법과 도덕의 변증법적 통일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근원적으로 자연성과 규범성의 변증법적 통일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처럼 그의 인륜성은 의무론과 목적론의 변증법적 종합에 의해서 성립되며, 덕의 길과 세계의 길이 변증법적으로 하나가 된다.
4.나가는 말:도덕성과 합법성의 관계에 대한
반성적 고찰
그러나 이처럼 헤겔이 칸트를 비판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과연 칸트는 내적 자유와 외적 자유가 겉도는, 그래서 도덕성과 합법성, 도덕과 법은 구별이 아니라 분리가 되고 말았는가? 그리고 칸트의 도덕성은 단순히 주관적인 공허한 형식에 불과한가? 이미 칸트의 합법성과 도덕성 부분에서 언급되었듯이 칸트는 합법성과 도덕성을 분리, 대립시키지도 않았으며 또한 도덕성을 단순히 개인의 주관적 차원에서만 다루지도 않았고 객관적인 사회 윤리적 차원에까지 확장시켜나갔다. 우리가 존재-당위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경험적인 전제들로부터만 논증해서 안 되듯이, 도덕적으로 잘못된 추론을 피하기 위해서 규범적인 요소들에만 호소해서도 안 될 것이다. 칸트는 바로 이와 같은 문제 의식 속에서 보편과 개별, 존재와 당위의 관계를 규제적 원리, 반성적 판단력의 합목적성에 입각해서 접근하고자 하였다. 사실 칸트의 이와 같은 입장은 현실의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이성의 한계를 엄정하게 반성하고 찾아낸 결론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유한한 자로서 자신의 이성의 능력으로서 사유와 존재, 내적 자유와 외적 자유, 도덕성과 합법성, 존재와 당위를 완전히 일치시킬 수 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탈역사적으로 선언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진행 과정 속에서 이들 사이의 간격을 좁히고자 하는 우리들의 이성적 노력을 열어놓고 있다. 다만 그 노력이 모든 것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주장을 단언적으로 하도록 허용하지는 않는다. 그는 언제나 이 아픈 거리를 ‘요청’이라는 개념을 통해 메워보려고 한다. 칸트의 ‘요청’이라는 개념에는 주체의 오만함에도 타자의 오만함에도 결코 손을 들어주지 않을 태세를 갖추고 있다. 오히려 그것은 주체의 오만함을 겸손함으로, 무력함을 당당함으로 인도한다.
따라서 회페의 주장처럼 헤겔의 안경으로 칸트를 읽었던 독일의 논의에서 당위에 대한 헤겔의 비판을 다시 읽어야 하고 실체적 인륜성에 대해서 다시 이의를 제기해야 할 것이다. 사실 칸트의 역사철학에는 이미 도덕성과 합법성의 거리를 메우려는 작업이 시도되고 있었고, 이런 의미에서 헤겔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에토스로 돌아가 칸트의 도덕성에 인륜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당한 평가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칸트의 반성적 판단력이 근간으로 하고 있는 역사철학적 안목을 변증법적으로 확장시켜나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헤겔의 이런 작업은 사실 칸트적 입장에서 바라보면 또 하나의 문제를 유발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념의 현실화가 가져오는 이데올로기다. 만약에 헤겔의 논리를 따라가면 결국 도덕성이 합법성이 되고 합법성이 도덕성이 되는 상태에, 또 도덕이 법이 되고 법이 도덕이 되는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런 동일성은 단순한 형식적 동일성이 아니라 실체적-내용적 동일성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작업은 도덕의 법화나 탈도덕화를 초래할 수 있다. 비록 헤겔은 칸트의 규제적 원리에서 답답함이나 무력함을 느끼겠지만,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라는 적극적인 주장으로 나아가게 되면, 역으로 그만큼 구속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도덕주의적 법’을 벗어나 ‘도덕적 법’을 확립하고자, 법과 도덕을 구별 속에서 연관짓고자 했지 완전히 분리하거나 통합하려고 하지 않았다. 칸트의 비판적 정신이 암시하듯이 그는 이성에 과도한 주장을 확립하게 됨으로 인해서 발생할 수 있는 삶의 부조리에 대한 엄정한 경계를 제시하려고 하였다. 그는 근대인의 삶 속에서 고대인이 상실하고 있었던 주체의 자유를 건져내지만, 그렇다고 그 자유가 오만함으로 이어지는 것을 허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합법성의 날개를 타고 내면이 비어가는 영리한 인간도 원치 않았으며, 도덕성의 날개를 타고 현실을 잃어버리는 이상적인 인간도 원치 않았다. 그는 이 두 인간이 서로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자유를 찾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주의자들은 여전히 칸트의 이런 작업은 결코 성공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할 것이다. 칸트의 비판 정신은 허약한 요청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동일성과 비동일성을 동일성으로 지양시켜내지 못할 것이며, 추상법과 도덕성을 인륜성으로 지양시켜내지 못할 것이라고 볼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주의자들은 헤겔은 칸트를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라 칸트를 제대로 이해했으며, 헤겔적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결국 인간의 외적 관계와 내적 관계를 정립하는 데에 칸트와 헤겔 사이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칸트적인 반성적, 요청적, 규제적 태도를 취할 것이냐, 아니면 헤겔적인 사변적, 지양적, 변증법적 태도를 취할 것이냐에 있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이 과연 어떤 기능을 담당할 수 있는냐에 달려 있다. 이성의 한계를 믿고 이론 이성보다 실천 이성의 우위를 믿는 자는 칸트의 길을 선택할 것이며, 이성의 무한성을 믿고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고자 하는 자는 헤겔의 길을 선택할 것이다. 따라서 합법성과 도덕성에 대한 헤겔의 칸트 비판은 칸트의 극복이 아니라 칸트와 다른 길을 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칸트와 헤겔 사이의 이런 갈등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또 이런 논의가 제대로 살아 있는 생산적 논의가 되기 위해서는 이들 의식 철학을 비판하고 있는 하버마스의 사실성과 타당성에 대한 분석에서 나타나는 도덕성과 합법성의 관계에 대한 반성이 뒤따라야 할 것이며, 나아가 롤즈의 정치적 정의론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반성적 균형의 문제도 분석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아렌트의 공통감에 바탕을 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에 대한 논의도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특히 이 작업이 한국적 현실에서 적실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의 구조 분석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작업은 논문의 지면상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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