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한철학회 논문집 철학논총 16, 99. 2 막스 셸러의 윤리학적 공감론 금 교 영* [한글 요약] 막스 셸러가 윤리학에서 감정을 적극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바를 우리는 주목할 필요 가 있다. 그에 따르면 감정도 고유한 법칙과 논리를 가지고 작용하며, 감지작용, 선취·후치작용 등의 고유한 정신작용을 한다. 따라서 감정을 통해서 훌륭한 가치를 감지하고 그것을 선취해서 우리는 윤리적 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 특히 감정작용들 중 공감지(mitfühlen)를 논의해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이 작용을 통해서 남의 감정에 훌륭히 참여한다. 그래서 남과의 공감(Mitgefühl)을 형성한다. 공감은 실로 나와 남이 한 마음을 갖도록 해 주고, 그래서 남에 대한 이해와 아량 그리고 용서도 쉽게 해 줄 수 있는 마음을 길러 준다. 따라서 진정한 공감을 가지는 가운데 보편적 인간애가 성립하고, 국수적이고 편협한 이기주의를 초극하는 보편적 윤리·도덕 의식이 성립한다. 그럼 공감지는 어떻게 쉽게 생길까? 막스 셸러에 따르면 우리가 사랑을 잘 하면 그로 말미암아 더 높은 감정이 잘 활동하게 되어 남의 감정에 대한 참여 활동도 잘 하게 된다. 남의 감정에 참여 활동을 잘 한다는 것은 곧 공감지가 잘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감지가 잘 될 때 남과의 공감이 잘 형성되어진다. 이상을 토대로 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말을 지을 수 있다: 이른바 공감이 보편적 인간애 생성에 기여하며, 그 인간애가 실현되어질 때 비로소 범세계적 인류애가 실현될 수 있다. 따라서 집단주의, 국수주의, 민족주의 그리고 종파에 얽매여 서로 투쟁하고 상극하는 일을 타파하고 초극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공감의 윤리학적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 머리말 윤리학에서 감정을 논의한 학자는 흔하지 않다.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가 감정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불충분한 '심정'(coeur)이란 개념을 사용하면서 이것이 이성과는 다른 논리로 작용하고 있음을 암시했고, 그의 전통을 이어받은 파스칼은 심정의 논리(logique du coeur)와 심정의 질서(ordre du coeur)를 감정의 자율적 법칙성이라고 언급한다. 이와 같은 전통을 이어받지는 못했지만 근대의 영국 경험주의 윤리학자들은 도덕감(moral sentiment)의 존재를 언급하면서 감정을 취급하고 있다. 대체로 윤리학사를 이끌어 온 윤리학설은 행복주의 윤리학설, 그리스도교 윤리학설, 명법주의 윤리학설 그리고 공리주의 윤리학설 등이다. 이 모든 윤리학설은 이성 내지 지성을 도덕 판단의 도구로 사용하는 윤리학설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과연 우리가 윤리적 삶을 사는 데 이성만이 필요한가? 막스 셸러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윤리적 삶을 사는데 이성 못지 않게 감정이 큰 기여를 한다. 감정이 가치를 감지하고, 감지된 가치를 선취 후치하는 일을 한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 인간이 더 훌륭한 가치를 실행하여 윤리적 의미의 선 악을 이행할 토대를 닦는다. 물론 현상학적 경험을 모르는 자가 가치와 같은 선천적 실질성을 갖춘 존재를 간취하지 못하고, 그러므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가치들에 유일히 다가갈 수 있게 하는 감정 작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단 감정을 윤리학에서 취급한다면 그 감정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논의해야 한다. 감정을 이성주의자들처럼 이해한다면 그것은 윤리학에서 취급할 하등의 꺼리도 없을 것이다. 이성주의자들은 감정을 정신이라기보다 감각들의 복합체 또는 무질서하고 저급한 마음의 상태로 보았다. 그들이 생각하는 감정은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는 상태 감정이다. 특히 칸트는 감정이 모두 감성적 감정일 뿐이고 모든 감정들은 질적으로 뿐만 아니라 그 깊이에서도 동류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감정들은 감성적 감정들만이 아니며, 감정들은 여러 종류로 존재하고, 그 종류에 따라 어떤 감정들은 작용하는 성격도 가진다. 감정의 여러 종류가 있고, 그 종류는 질적 차원 뿐만 아니라 깊이의 차원에서 네가지로 구분되는데, 그 차원들로 보아 더 높은 감정을 가지지 위해서는 그만큼 더 '사랑'의 마음을 발동해야 한다는 것이 막스 셸러의 독특한 견해이다. 사랑이 제일차적인 정신적 작용이므로, 사랑이 미지의 세계에로 우리의 정신적 시계를 넓혀 준다. 실로 우리는 사랑하는 것 이상을 결코 인식할 수 없다는 언표를 많이 들어 왔다. 따라서 어떤 미지 세계 예컨대 어떤 가치계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그 가치계에 상응하는 감정을 개방해야 하겠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윤리학에서 감정 문제를 논의할 때 '사랑'의 개념을 논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본 논문의 주제인데, 감정 작용에서 감지 작용이지만 일상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아닌 공감지(mitfühlen)를 논의해 볼 수 있고, 이를 통해서 얻는 공감(Mitgefühle)이 가지는 윤리학적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맥도갈(McDougall)에 따르면 우리는 공감을 통해서 남의 정서를 경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와 남의 즐거움을 향상시키고 고통을 감소시킬 수 있으며, 심리학자인 G. 올포트에 따르면 공감이 그 자체로는 도덕적 가치가 없지만 연대 의식의 고양으로써 도덕성의 발달을 촉진시키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공감이 인간애 생성에 기여하는 점을 정리하면서 진정한 인간애는 공감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한 것임을 확인해 본다. 2. 사랑과 감정 작용 막스 셸러의 윤리학 사상을 논의하려면 항상 '사랑'의 개념을 논의하게 된다. 그의 윤리학에서 '사랑'이 논의되지 않으면 않되는 이유를 이 장에서 밝힐 것이다. 막스 셸러에 따르면 사랑은 우리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정신 작용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환경 세계에 뿐만 아니라 이념적 세계에 그리고 더나아가 우리 자신의 내면 세계에 대한 의식 지향을 토대지우는 정신 작용이다. 피상적으로 말한다면 모든 객관에 대한 관심 지향의 토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랑은 우리 인간의 감정 또는 이성이 작용할 자리를 마련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 자리란 것은 방향과 영역 내지 한계를 일컫는다. 그래서 사랑이 어떤 곳에 선행하지 않든지 사랑이 그 곳에 미치지 않을 때 그 곳에 관한 앎이 생기지 않는다. 사랑에 관해서 위와 같이 말할 때, 우리는 사랑이 직접적으로 우리의 앎을 불러 일으킨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서 사랑이 인식하거나 의식하는 작용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사랑은 정신 작용 이를테면 감정 작용, 이성 작용이 보다 원활히 능률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의 마음을 가질 때 아름다운 그림을 아름답게 감상할 수 있고, 아름다운 멜로디를 아름답게 들을 수 있고, 어떤 사리를 판별해도 정확하게 판별할 수 있으나, 우리의 마음이 온통 증오로 가득차 있을 때 아름다운 그림도 아름답게 감상할 수 없고, 아무리 아름다운 멜로디일지라도 그 멜로디를 아름답게 들을 수 없고, 어떤 사리를 판별할 경우 그 사리를 정확하게 판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 하다는 것이다. 막스 셸러의 윤리학에서는 이성 작용보다도 감정 작용이 더 많은 논의꺼리가 된다. 그 이유는 가치를 의식하는 주체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기 때문이고, 또 감정을 통해서 근본적으로 타자와의 합일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사랑이 감정에 기여하는 점을 논의해야 할 것이다. 이 논의에 앞서 먼저 감정에 대한 보다 깊고 포괄적인 이해부터 해 보자. 막스 셸러에 따르면 감정들은 네가지 종류의 감정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이 종류의 감정은 감성적 감정, 생명적 감정, 심적 감정 그리고 정신적 감정이다. 이 감정들은 우리 인간의 심정에 공존하고 있으면서 때로는 어떤 감정이 다른 감정보다 더 강렬히 발하기도 하고, 또 다른 감정이 그 어떤 감정보다 더 강렬히 발해 있기도 한다. 이런 양상은 우리의 심정에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그 네 종류의 감정들은 서로들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는가? 그 감정들은 서로들 위계 서열을 갖추고 있다. 어떤 감정은 다른 감정보다 고귀하고, 어떤 감정은 다른 감정보다 저속하다. 그리고 어떤 감정은 다른 감정보다 더 지속적이거나 덜 지속적이고, 의미통일성이 강하거나 약하다. 또 각 종류의 감정들이 지향하는 가치들도 다르다. 이처럼 감정들은 그들의 종류에 따라 질적 기능적 차이를 보이며, 작용의 대상 차이도 보인다. 감성적 감정보다는 생명적 감정이 더 고귀하고 더 지속적이고 의미통일성이 더 강하다. 또 생명 감정보다는 심적 감정이 그리고 심적 감정보다는 정신적 감정이 더 그러하다. 감정적 감정이 지향적으로 작용하는 대상 즉 가치는 감성적 가치 즉 고통, 간지러움과 가려움의 가치이고, 생명적 감정이 지향적으로 작용하는 가치는 허약, 갈증, 병환, 건강의 가치이고, 심적 감정이 지향적으로 작용하는 가치는 슬픔, 즐거움, 비애의 가치이고, 정신적 감정이 지향적으로 작용하는 가치는 지복, 실망, 양심의 가책, 구원, 후회의 가치이다. 그래서 우리가 감성적 감정을 다른 감정보다 더 발하도록 해 있으면, 우리는 감성적 가치를 지향해서 추구하는 노력을 다른 노력보다 더 많이 할 것이며, 우리가 생명 감정을 다른 감정보다 더 발해 있도록 한다면 우리는 생명 가치를 지향해서 추구하는 노력을 다른 노력보다 더 많이 할 것이며, 우리가 정신적 감정을 다른 감정보다 더 발해 있도록 한다면 우리는 정신적 가치를 지향해서 추구하는 노력을 다른 노력보다 더 많이 할 것이다. 감성적 가치를 추구하는 삶은 감성적 삶 내지 물질적 향락 삶이며, 생명적 가치를 추구하는 삶은 신체적 건강과 생명적 안위를 위하는 삶이며, 심적 가치를 추구하는 삶은 심적 안락과 행복을 위하는 삶이며,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삶은 진리 가치, 윤리 가치, 미의 가치를 추구하는 정신적 삶이다. 이러한 측면으로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이 보다더 훌륭한 삶인지를 짐작할 수 있고, 따라서 어떤 감정이 발해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그의 육체적 삶을 잘 살 수 있도록 그의 감성적 감정 및 생명적 감정이 잘 발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심적 감정 더 나아가 정신적 감정은 그리 잘 발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심적 가치를 지향해서 추구하는 노력을 많이 하지 않고, 정신적 가치를 지향해서 추구하는 노력을 더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의 활동을 훌륭히 행한다면, 그 근원적 활동이 우리 인간의 여러 감정들을 개방해 주고, 세계로 향하여 열어젖히게 해준다. 다시 말해서 사랑이 우리 인간의 심정에 잠재하고 있는 심적 감정뿐만 아니라 정신적 감정을 잘 발동케 한다. 그래서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그 각각의 감정에 대응해 있는 가치들을 지향해서 추구케 한다. 막스 셸러는 감성적 감정, 생명적 감정, 심적 감정, 정신적 감정 순으로 감정들의 위계가 더 높아진다고 했다. 이 위계가 더 높은 감정일수록 그 감정은 우리 인간들에게 간주관성을 확보해 줄 수 있는 능력을 더 갖춘다. 예컨대 감성적 감정은 피부의 접촉을 통해서 느끼는 아픔, 혀를 통해서 느끼는 음식의 새콤함, 귀를 통해서 감지하는 음률의 감미로움, 코를 통해서 맡을 수 있는 꽃향기의 달콤함 등을 감지한다. 그러나 이런 감성적 가치들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느낄 수(mitfühlbar) 없고 더 나아가 뒤따라 느낄 수(nachfühlbar) 없고 앞서 느낄 수(vorfühlbar)도 없다. 다만 이 가치들을 현재의 <자신의> 감정만이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심적 감정과 정신적 감정은 그것들이 감지한 감정 상태를 재생할 수 있고 동감 경험을 할 수 있다. 이상을 통해 볼 때 위계상 더 높은 감정은 그에 대응해 있는 가치를 공감지하든가 추감지하든지 선감지할 경우에 더 적확히 할 수 있다. 따라서 더 높은 감정이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확보하도록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그런 삶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공감을 더 잘 할 수 있게 하고, 윤리적 연대성을 더 잘 확보할 수 있게 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3. 동정 법칙들의 연관 관계 막스 셸러의 감정 이론에 있어서 동정(Sympathie)은 동일 감정이다. 동일 감정은 자아와 타자가 동일하게 가지는 감정이다. 예컨대 지금 TV에서 마라톤 경기를 중계 방송하고 있다 하자. 그리고 그 경기는 막바지에 이르러 선두 주자들의 그룹이 40여km를 달리고 있는 중이고, 그 선수들은 인고의 주력을 다하고 있다 하자. 선수들의 이러한 상태를 내가 보았을 때, 나는 그 선수의 감정 상태에 참여하여 그 선수가 가지는 인고의 감정 상태를 감지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선수와 동일 감정을 가질 것이다. 바로 이 감정이 동정이다. 그러면 동정을 가지게 하는 감정의 법칙들은 어떤 것인가? 다시 말해서 동일 감정이 생기기 위해서는 어떤 감정 법칙들이 작용하는가? 그 감정 법칙들을 동정 법칙이라 하는데, 동정 법칙에는 이입감지(Einsfühlung), 추감지(Nach- fühlung), 공감지(Mitfühlung), 인간애(Menschenliebe)가 있다. 이상의 네가지 동정 법칙들도 모두 감정 작용이다. 그 외에도 감정 작용에는 共情(Mitein- anderfühlung)과 감정 전염(Gefühlsansteckung)이 있다. 그러나 공정과 감정 전염은 동정의 법칙으로써 기여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공정은 예컨대 어떤 제3자의 고통 상태를 자아와 타자가 각자 감정을 통해서 감지 내지 체험하는 것이고, 그래서 이 양자간의 어떤 감정 교류가 없다. 그러므로 그 감정 작용은 그 양자의 동정을 유발하지 못한다. 감정 전염은 자아나 타자가 그들 각자의 감정을 통해서 주체적으로 자립적으로 어떤 가치를 감지 내지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분위기나 전통을 수용하는 감정 작용이므로, 감정 전염은 그 양자간의 어떤 동정도 유발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입감정, 추감정, 공감정, 인간애는 모두 동정을 유발할 수 있는 감정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이 작용하는 이입감지, 추감지, 공감지, 인간애는 모두 동정을 유발할 수 있고 따라서 동정의 법칙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이입감지는 무엇인가? 미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인 감정이입을 동사화한 개념이 이입감지이다. 이입감지는 어떤 자가 그가 소속하는 공동체의 감정 상태를 감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깊고 높은 수준의 감정 상태를 감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 인간이 생명자로서 모든 생명체와, 인류의 한 구성자로서 인류와, 민족의 한 일원으로서 민족과, 가족의 일원으로서 가족과 그들의 단순 감정 상태를 가지며, 생명체, 인류, 민족, 가족과 그들의 구체적인 감정 상태를 파악하지 않고도 그들의 감정 상태를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입감지는 항상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첫째, 이입감지의 무의식적으로 성장하는 이행, 둘째, 이입감지의 자동적 무임의적 결과들, 셋째, 활력적 의식의 영역에서 이입감지의 주관적인 결정성과 객관적인 결정성이다." 첫째의 특징을 설명하자면 이입감지는 우리 인간이 의식적으로 타자의 감정 상태에 참여하여 그 감정 상태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타자의 감정 상태를 가지게 되고 그 감정 상태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의 특징으로 이입감지를 설명하자면 이입감지는 우리가 자의에 의해서 자유롭게 우리의 공동체라든가 인류 나아가 민족의 감정 상태를 가진다는 것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의지와는 상관없이 감정 활동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라 한다. 셋째의 특징으로 이입감지를 설명하자면 이입감지는 활력적 의식 영역에서 보다 잘 이뤄지는 감정 활동인데, 그 이입감지의 감정 활동은 우리 인간의 주관적 측면에서도 이뤄지며, 인간 모두에게 객관적인 그런 방식으로도 이뤄진다. 실로 우리는 미개의 상태에서 이입감정을 발견하고, 개화 상태에서 추감지를 발견한다는 것이 아이에서 어른에 이르기까지 또한 동물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또한 미개인으로부터 문명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감정 발달의 근본 법칙이다. 우리는 아이의 여성적 의식에서 예컨대 <엄마 놀이>에서 아이의 아빠와의 순수 이입감정 내지 아이의 엄마와의 순수 이입감정이 성립해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첫 번째의 경우에서 한 이입감정을, 두 번째의 경우에서 한 이입감정을 언급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첫 번째의 경우에서 그 아이가 아빠와, 두 번째의 경우에서 그 아이가 엄마와 동일화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장한 아이가 그 놀이를 행한다면 그 아이는 그 놀이에 대해서 추감지만 할 것이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서 볼 때, 이입감정은 동정의 법칙들중 가장 기초적이며, 생명 활력적 영역에 의지하는 경향이 짙다. 다시 말해서 생명 감정에서 이입감정의 동정 법칙이 많이 이행하는 것 같다. 그럼 여기서 이입감지와 추감지의 관계를 좀더 논의해 보자: 인류사적으로 볼 것같으면 인간은 원시 시대 때 이입감지를 더 많이 행하고, 문명 시대 때 추감지를 더 많이 행한다. 그리고 동물 무리, 인간 무리, 자연 집단에서는 순수 이입감지가 많이 행해지는 반면에, 사회 공동체에서는 추감지가 많이 행해진다. 우리는 고대의 신화들에서 인간들이 이입감정에 사로잡혀 있음을 볼 수 있고, 신화로부터 역사적으로 발전한 희곡 예술에서 인간들이 이입감정 대신에 고급의 미적 이입감정과 추감지를 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고대의 아직 덜 발전한 희곡에서는 위의 두 형태가 비슷하게 혼재해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른 측면으로도 그것들의 관계를 논의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예컨대 전쟁으로 고통스러워하고 투쟁하는 우리 민족들과는 고통과 투쟁에 대해 이입감정을 가지는 반면에, 비록 문화권이 같지만 우리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들과는 그것에 대해 더이상의 이입감정을 가지지 못한다. 그 다른 민족들의 그것에 대해서는 추감지가 생긴다. 따라서 우리는 이입감지가 보다 미발달된 감정 정서에서 잘 발휘되는 것이라면, 추감지는 보다 발달된 감정 정서에서 행해지는 것이고, 이입감지가 자연적 공통체 등에서 강하게 나타나는 원초적 삶의 연대에 얽매여 발휘되는 것이라면 추감지는 생명적 삶의 굴레를 벗어나 좀더 의식적이고 사회성 있는 관찰자에 의해 행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 양자의 관계는 이입감지가 무의식적이며 근원적이라면 추감지는 의식적인 수행을 토대로 하는 것이므로, 이입감지가 보다 낮은 감정 활동이고 추감지는 보다 높은 감정 활동이라 할 수 있다. 그 다음 추감지는 '뒤따라 감지하는 것'으로서 감정 활동의 하나이다. 이 감정 활동은 타자의 감정 상태를 뒤따라 감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곧 타자 감정에 참여할 수 있다. 따라서 추감지는 동정 법칙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면 이 둘 동정 법칙들간의 연관 관계를 말해 보자: 추감지는 우리가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입감지를 토대로 해서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추감지가 가능하려면, 우리는 추감지된 상태의 성질을 우리가 추감지하는 주관 류와의 이입감정을 통해서 어쨌든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추감지하는 상태들의 성질은 추감지될 수 있기 위해서 어떤 체험된 현존 형식을 두루 갖출 필요는 없다. 그저 그런 성질은 추감지를 통해서 근원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입감지를 통해서 근원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다가오는 추감지할 상태 성질을 추감지로써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막스 셸러는 추감지가 공감지를 기초하고, 공감지는 추감지를 바탕으로 해서 작용한다는 의미에서 그것들간에 어떤 토대부여 법칙이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이 법칙에 따르면 공감지는 감각, 지각, 추감지와는 달리 선행하는 감정을 토대로 해서 비로소 작용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 보자면 모든 종류의 '함께 기뻐함' 또는 '함께 고통스러워함'은 어떤 지식의 형태, 체험의 본성과 성질 그리고 그러한 가능한 지식을 조건지우는 체험을 전제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과 '함께 기뻐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어떤 상황이나 처지를 우리가 먼저 이해하거나 파악한 후에 항상 가능하다. 공감지가 가능하기 위해서 파악 작용이나 감지 작용가 선행되야 한다는 것은 필자의 논문 "막스 셸러의 공감론(I)"(『철학논총』제13집) 4. 공감과 지적 작용들의 관계에서 상세히 논의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다만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 추감지가 선행해야 함을 논의한다. 추감지는 감지나 이해 작용을 통해서 인지된 어떤 감정 상태를 시간적으로 뒤이어 감지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추감지는 항상 먼저 인지된 감정 상태를 추후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일종의 감지 작용이기 때문에 일차적 감지 작용과는 다르지만 어떤 대상을 상대해서 작용하는 것이지, 감지된 것을 간접적으로 감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차적으로 감지한 것을 뒤따라 감지하고 그 결과는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감지는 일차적 감지이든 추감지이든 이 감지를 한 주관 즉 체험 주관과의 공감지이다. 이 주관을 통해서 그가 감지한 또는 추감지한 감정 상태를 간접적으로 가지게 되므로 이차적 감지 작용이라 할 수 있다. 그것도 체험 주관을 통한 감지이기 때문에, 그 감지 결과는 항상 체험 주관의 감정 상태와 동일하다. 이렇기 때문에 공감은 항상 기억을 필요로 한다. 알다시피 타아는 우리 자아의 사고와는 상관없이 본래 주어져 있으므로, 우리는 타아를 어떤 사고틀에 입각하여 이해해서는 안된다. 타아는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 않은 그의 고유한 사적 영역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타아의 이해 혹은 파악을 먼저하지 않고는 그의 감정에 참여할 수 없고 그래서 타아와 동감할 수 없다. 항상 먼저 타아의 이해 혹은 파악이 있고 난 이후에 이를 바탕으로 해서 비로소 그의 감정에 참여하여 공감을 가질 수 있다. 추감지가 공감지에는 필요하지만 공감지는 추감지에 필요하지 않다는 이 사실을 뒤받침하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나는 그들에게서 그들의 슬픔을 아주 훌륭히 추감지할 수 있지만, 나는 그들의 슬픔을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은 정당하다. 그래서 심지어 이를테면 저명한 역사가, 로마 저술가, 극작가는 그들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건들이나 인물들에 관한 추체험(Nacherleben)을 훌륭히 소지할 수 있으면 되지, 그들이 그들의 대상, 인물과의 공감은 거의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공감지는 타자 감정의 감지이지만 타자가 감지하는 대상에 대한 감지는 아니다. 그러므로 공감지는 현재 감정의 어떠한 체험도 한 상태의 어떠한 체험도 아니다. 이에 반해서 추감지와 추체험은 타자의 체험에 결코 참여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추체험과 추경험은 타자의 감정에 참여하고, 타자의 체험으로 빚어진 심경 상태에 참여하는 공감 내지 공감지와는 분명히 다르다. 추감지와 공감지의 또하나 차이를 언급한다면 다음과 같다: 추감지는 타자의 실재성을 꼭 필요로 하지 않는 반면에 공감지는 그것을 꼭 필요로 한다. 추감지는 타자 상태적 실재성만 있으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적으로 추구 활동을 하고 독서하는 소녀처럼 직접 작가를 만나지 않아 그를 순수 공감지하지 않는 한, 로마인들의 기쁨과 고통을, 극작가가 묘사한 드라마의 픽션화된 인물들의 기쁨과 고통을 추감지할 수 있지만 공감지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공감정은 공감지하는 대상의 현존를 본질필연적으로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대상 대신에 가상으로 주어진 대상이 나타나 있을 때 공감정은 생성되지 않는다. 이제 공감지가 인간애를 기초한다는 것을 논의해 보자. 이 논의에 앞서 인간애의 성질에 관해 조금 언급해야겠는데, 인류의 훌륭한 정서적 활동이 인간애가 없는 가운데 공감정에서 훌륭히 실행될 수 있다는 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인간애는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인 인간 가치들 내지 우리가 공감하는 감정의 가치들의 사이에서 어떤 선행하는 구별들에 의존하지 않는다. 순수한 인간애는 자기 민족과 타민족, 범법자와 착한 자를 구별하지 않고, 또한 인종 가치와 인종 반가치, 시인과 부인을 구별하지 않고, 또한 선과 악 등 등을 구별하지 않는다. 인간애도 공감정과 똑같이 모든 인간을 감싼다. 인간애가 이럴 수 있는 것은 이 때의 공감 이행자가 동물도 신도 아닌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쉽게 공감과 인간애의 관계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막스 셸러에 따르면 인간애는 순수 공감을 통해서 한 번 활동하게 된다면, 그 편의 순수 공감의 기능 영역들을 능동적으로 확장할 수 있음이 확실하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더 이상의 공감이 있지 않아도 인간애가 발동하게 된다. 그 이유는 능동적인 보조 실행으로부터 얻어지는 경험들을 통해서 ―물론 사랑이 그런 실행을 초래하지 수동적인 공감이 그것을 초래하지 못하지만― 가능한 공감의 대상권이 항상 더욱 확장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공감 일반은 인간애의 가능한 생성에 필연적으로 토대부여한다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공감 일반이 인간애를 기초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위의 사실 외에도 실로 공감지가 잘 발동해서 타자의 감정에 참여하고 그래서 타자 감정과의 공감을 이룰 때, 우리가 타자를 잘 이해하게 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타자를 잘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거기에서 인간애가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통해 볼 때도 공감이 인간애를 기초한다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4. 공감 생성의 실태 다른 정신 활동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공감이 잘 생성되어지기 위해서는 사랑이란 근원적 활동이 잘 이뤄져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공감지 일반은 사랑에 기초를 두고 있고, 모든 공감지는 사랑없이는 중지하고, 그 역방향은 결코 가능하지 않고, 공감지의 대상이 사랑에 의해 결정되어지고, 공감지가 사랑의 방향을 완전히 그리고 거의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통해서 볼 때, 우리가 사랑한만큼만 그리고 그 깊이로만 공감지가 가능함이 명확해진다. 우리는 감지하는 대상을 깊이 사랑하지 않는 경우에, 우리의 공감은 당장 끝장 나고 타자 인격에까지 확실히 들어가지 못한다. 우리가 타자의 감정을 공감했다면, 우리는 공감지한 타자를 이미 먼저 사랑했음에 틀림 없다. 이처럼 공감에 그 토대를 부여하는 사랑이 가족, 민족, 인류이든지, 또는 민족 구성원, 가족 구성원, 인류의 일원, 더나아가 한 생명 존재이든지 간에 이들에게 행해질 때, 공감지가 이들의 구성원이거나 일원인 한 인간에게 생긴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랑이 지향해서 발동하는 대상이 공감지의 대상과 꼭같을 수는 없다. 공감지 작용은 그것을 포괄하는 사랑 작용 속에 파묻혀질 수 있다. 바로 이럴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공감지하는 것은 제법 가능하지만, 사랑하는 경우에 공감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공감을 잘 생성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사랑'이란 근원적 작용이 필요하다. 그럼 공감지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그것은 하나의 기능이다. 그래서 '함께 슬픔함'에서 주어진 B의 감정 상태는 공감지를 통해서 타자에게도 똑같이 주어진다. 그 감정 상태는 함께 슬퍼하는 A에게서 특별히 변화하지 않는다. 그 감정 상태는 함께 슬퍼질 뿐이며, 결코 A에 의해 실재적 체험으로 소유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타자의 감정 상태를 감지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감정 상태가 참으로 슬프다는 것, 그리고 실로 그 결과로 이를테면 '함께 기뻐함'이 우리를 그 감정 상태에서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기쁨을 함께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기뻐하는 기분 속으로 빠져들어야 할 필요없이 말이다. 바로 이것이 놀라운 사실이며, 순수 공감의 현상이다. 그럼 공감은 어떻게 생성되는가? 우리들이 알기로 '함께 슬퍼함'은 남의 슬퍼함에 참가한 슬픔이다. 이런 슬퍼함은 단순히 나의 슬픔과 남의 슬픔이 일치하거나 일체가 될 때 얻어지는 그런 슬픔이 아니다. 나의 슬픔과 남의 슬픔의 그 어떤 종류의 감정이입 또는 동일화에 의해서 그들의 '함께 슬퍼함'이 가능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컨대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이의 시체 앞에 서 있을 때, 그들은 서로 똑같은 아픔과 동일한 슬픔을 느낀다. 이것을 우리는 일컬어 그들이 공정(共情)하고(Miteinanderfühlen) 있다고 한다. 이 경우에서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감정 기능은 상이한 것으로 주어지고, 그들이 오직 감지한 슬픔과 그 가치태가 오직 동일할 뿐이다. 따라서 공정은 동정의 법칙이라 할 수 없다. 군서 동물의 생활에서 인도수가 행하는 암시와 그 동물의 집단 행동을 살펴 보자. 여기서 우리는 감정 전염이 군서 동물의 생활에 막강한 영향을 행사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사실 <전통>은 하나의 체험 전염이다. 이 전염이 비록 사상 전염이든지 행위충동 전염이든지 간에 말이다. 이를 통해서 볼 때 감정 전염(Gefühlsansteckung)이 유의미한 감정 전달 활동이라 할 수 없으므로, 동정의 법칙이라 할 수 없다. 그런데 발생학적 이론은 공감이 우리가 이미 체험한 타자의 체험과 체험 통일체에 필연적으로 제약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알다시피 <우리가 벌써 한 번 실재로 체험한 것만을 이해할 수 있다>는 명제는 실제로 타당치 않다. 우리는 슬픔과 기쁨으로도 생생한 공감을 가질 수 있고 또는 그것들을 직접적으로 공감지할 수 있고 그리고 타자가 감지하는 가치 감정을 감지할 수 있다. 그래서 예컨대 우리는 죽음의 공포 자체를 결코 체험하지 못할지라도 죽음을 <이해하고> <추감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공감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당해 상태나 가치의 요소들을 예컨대 공포의 요소들을, 그 어떤 <죽음에 있는 감정>을 우리로부터 실재로 체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핑계는 완전히 그릇된 것이다. 이처럼 발생학적 이론은 적극적이고 순수한 공감 작용을 설명하지 못하고, 공감 작용 기능의 경험적이고 변화하는 수반 현상들만 설명한다. 이 수반 현상들은 공감작용을 창조하고 발생시키기보다 오히려 훼손시키고 부분적으로 지배한다. 재생에 의한 자기 체험으로 공감지와 타자 상태에 끼어드는 것은 순수하고 적극적인 공감지가 결코 아니다. 특히 다윈과 스펜서가 이와 같은 사고를 했다. 다윈이 그의 저서『인간의 기원』과『정서 운동들의 표현』에서, 스펜서가 그의 윤리학과 사회학에서 제시한 이와 같이 사고를 하게된 원리들을 여기서 언급해 보자. 다원은 그의 원리들을 두가지로 제시한다. 첫째로 동정 감정의 성립과 생성은 사교적 본능의 성립과 생성의 결과 현상이다. 즉 사교적 삶의 방식에서 그들의 종 보존의 욕구를 발견하고, 그런 삶의 방식에서 삶 형태가 고정되는 동물에서는 동정 감정이 지배적인 유용성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비사교적인 삶에서는 동정 감정이 생성되지도 않고 발달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동정 감정은 사교적 삶과 <사교적 본능>을 위한 준현상들이다. 둘째로 한 번 생성된 동정 감정은 지적 발달과 연대성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의 관심들의 상호 결합이 진보하는만큼 발달한다. 비록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바로 이런 근본 사상들을 우리는 스펜서에서도 발견한다. 스펜서는 이 사상을 인류 역사에도 적용시켰는데, 비정상적인 이기주의와 동정 감정의 결여가 있을 때 <인류의 진보>가 더 많이 일어나는 경향이 있더라는 것이다. 따라서 스펜서에게는 전쟁의 폐지, <산업 시대>의 도래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회적 평등권>의 획득은 동정 감정의 결여를 보충하는 과정에서 얻는 <돌연 변이>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원리들이 인정될 수 있을까? 셸러는 긍정하지 않는다. 다윈은 타자에 대한 전참여작용에 있어서 이해의 구성자들을 공감과 거의 전적으로 혼동하고 있다. 동물에서 타자 체험이 어쨌든 규정되어지고 활동하게 하는 바로 그 과정이 틀림없이 있다. 인간도 순수한 무리 짐승처럼 행동할 때 타자 체험을 규정하고 활동시키는 과정을 가진다. 동물에서는 일반적으로 감염을 통한 전염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과정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언제나 사교적 삶 방식의 양에 의존한다는 것은 확실히 옳다. 따라서 감염을 통한 체험의 전염가능성 뿐만 아니라 이해와 추감지가능성의 실행도 사교적 삶 방식의 크기와 강도와 더불어 성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른바 고유한 <공감>에 정반대되는 감정들과 충동들 예컨대 야만, 잔인, 악의, 질투, 시기, 비열심 등등에서 이뤄진다. 이상의 고찰로 볼 때, 우리가 생명 존재를 단순히 지각하는 기능과 그 지각 체험의 파악이 무엇인지 고찰한다면, 지각하는 기능과 그 체험 파악이 확실히 사교적 삶 방식의 결과가 아님을 알 수 있으므로, 다윈의 전제는 전혀 근거 없다. 공감의 형이상학적 이론을 제시한 쇼팬하우어는 '공감에서 자아의 다수성에 근거하고 있는 존재의 통일성이 해명되어진다'고 했다. 공감을 통해서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가상>을 분쇄할 수 있다. 쇼팬하우어에 의하면 우리는 특히 '함께 슬퍼함'에서 특별히 직관적인 방식으로 세계 근거의 통일성을 파악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가 칸트와 반대로 정서적 기능을 윤리학에서 중요시했다는 것이 주목될 수 있다. 그는 '함께 슬퍼함'이 타자 슬픔에 직접적인 참여이지, 타자에 대한 추론이나 그 어떤 기술적 방식의 합일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또한 그는 '함께 슬퍼함'에 지향적 의미가 있음을 승인하고, '함께 슬퍼함' 자체를 단순히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맹목적 영혼 상태로 간주하지 않는 점에서 현대 이론을 능가하고 있다. 여기서 공감의 형이상학적 이론과 그런 부류의 형이상학적 이론을 완전히 제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공감의 형이상학적 이론들은 공감의 논의에서 경험심리학적 경험발생학적 이론들보다 더 정당하다. 그 이론들은 우리가 고찰한 것 그리고 경험발생적 이론에 대한 우리의 비판과 거부가 제시한 것 즉 추감지와 공감은 그것의 본질에서만 증명될 수 있는 근본 현상들이며, 심리발생론적으로 단순한 사실들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사실들이 아니라는 것을 거의 수용하고 있다. 그러면 공감의 작용적 특성을 논의해 보자. 공감에 관해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공감이 '함께 기뻐함' 또는 '함께 슬퍼함'과 상관없이 오직 추감지에 근거해서 얻어진 감정이며 자발적 작용은 아니다고 주장한다. 더나아가 공감은 반작용이지 어떤 적극적 작용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이들에 따르면 공감은 다만 사랑의 방식과 깊이에 수반되어 생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로 공감지는 일차적 감지 작용과 마찬가지로 지향적 본성을 가진다. 그래서 타자의 감정 상태를 감지할 수 있다. 지향적 본성이 없다면 그것은 작용을 하지 못하고 따라서 타자의 감정에 참여할 수 없다. 그런데 셸러는 공감지의 지향적 본성을 공감지의 질료부여적 기능과 마찬가지로 정당히 인식할 수 있다고 언표한다. 둘째, 순수 공감 작용은 적극적 윤리학적 가치를 담지하지만, 타율정념적 감정 일반은 그런 가치를 담지하지 못한다. 이 윤리학적 가치는 1. 정신적, 심적, 활력적, 감성적 공감의 순으로 낮아지고, 이 가치는 2. 순수한 공감적 '함께 슬퍼함'에서 더 높고, 단순한 <어떤 사람에 대한 함께 슬퍼함>에서 더 낮다. 3. 공감지가 인격의 중심적 자기 감지와 자기 가치 주장에 관계하는지 어떤지에 따라 그 윤리학적 가치가 더 높거나 낮다. 그 외에도 공감지의 윤리학적 가치는 4. 타자 슬픔과 자기 기쁨이 발생하는 바로 그 대상 가치에 따라 높고 낮다. 그러므로 인격 상태의 공감지는 재화의 공감지를 선취함에 틀림없다. 따라서 공감도 그것을 초래케 하는 감정의 위계에 따라 그 윤리학적 가치 서열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셋째, 공감 작용도 보다 높은 단계의 감정에서 보다 확실하고 정확하게 이뤄질 수 있다는 중요한 사실이 언급되야 할 것이다. 감정이 감성적 단계에서 활력적 단계를 거쳐서 정신적 단계에 나아 갈수록 공감 작용을 더욱 잘 한다. 감성적 감정들에서는 감정 감각을 확실히 이해하고 공감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재생이 필요하다. 병적인 감성적 쾌락을 순수하게 이해하는 것은 예컨대 정상적인 것에서는 확실히 거의 가능하지 않고, 그 쾌락을 공감하는 것, 고통 감수를 공감하는 것은 얼마만 가능할 것이다. 또한 일본인이 구운 생선을 먹을 때 가지는 쾌락을 공감지하는 것은 어렵고, 그림에서 서민의 감상법으로 예컨대 순수 공동 즐거움을 얻도록 하기 위해 시끌벅적한 음악 등의 즐거움을 공감지하는 것은 어렵고, 동물의 감성적 쾌, 불쾌의 유형들은 우리에게 대부분 낯설고 그 공감은 여기서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 감정의 상이한 방식들을 주목할 때 이해와 공감이, 비록 동물 영역에서의 특별한 성질들에는 배제되어 있을지라도, 전생명계에서 두루 두루 생기고 있다. 목소리의 죽음의 공포, 목소리의 <생기 발랄함> 또는 <피로함> 등등은 우리에게 이해될 수 있고, 우리의 공감을 자극한다. 그래서 그 목소리의, 그리고 그것의 특별한 감각 기구에 의존하는 감성적 감정의 성질들이 우리를 완전히 부여 잡고 있다. 그리고 어떤 그림을 그의 감성적 감상 형식들로 이해할 수 없고 공감지할 수 없는 바로 그 사람도 그의 생명 감정으로 그 그림을 이해하게 되고, 그림의 이해에 더 참여하게 된다. 심적 감정, 더나아가 정신적 감정은 이해와 공감 가능성에 있어서 자아를 자극하는 모든 동요 폭들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있다. 그래서 케세만 산에서 예수의 비애는 역사적 변천과 민족 변화, 더나아가 인류 변천에 독립해서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다. 그 비애에서 구원을 받는 모든 열려진 심정에서 그 비애는 자기의 작거나 큰 고통의 기억 수단이나 재생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이전에는 결코 알려져 있지 않은 보다 크고 새로운 고통의 계시이라는 종교적 발언이 설득력 있을 것이다. 5. 공감과 인간애 생성 앞 장에서 공감이 어떻게 생성되어지며, 그것의 실태가 어떤지 알아 보았다. 이제 공감이 인간애의 생성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알아 볼 차례이다. 인간애가 어떤 것인지는 3장에서 상세히 진술했다. 그리고 거기서 공감이 인간애를 기초한다는 본질 연관도 진술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인간애 생성에 공감의 기여'와 '인간애가 주는 윤리학적 의미'에로 바로 접근해 논의한다. 우리 인간의 감지 작용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대상을 일차적으로 감지하는 작용도 이입감지하는 작용도 추감지하는 작용도 공감지하는 작용도 있다. 따라서 공감지 작용도 감지 작용에 속한다. 그것은 다만 가치라든가 어떤 가치태를 직접적으로 일차적으로 감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일차적으로 감지한 타자를 통해서 그런 것들을 감지하는 것이다. 물론 타자가 감지한 것의 현상만을 감지하는 것은 아니고, 타자의 감정에 참여하여 그가 감지한 것을 함께 감지하는 것이다. 물론 타자의 감정에 훌륭하게 참여하여 공감지가 잘 이뤄지기 위해서는 사랑이 잘 발동해야 함은 앞에서도 많이 언급했다. 공감이 이뤄진다는 것은 나와 남, 우리와 타자, A란 공동체와 B란 공동체가 공동 감정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X란 사태에 대해서 남이 가지는 감정을 내가 그의 감정에 참여하여 같은 가치를 감지하고 그래서 같은 감정을 가진다. 그리고 Y란 사태에 대해서 타자가 가지는 감정을 우리가 그들의 감정에 참여하여 같은 가치를 감지하고 그래서 같은 감정을 가진다. 마찬가지로 Z란 사태에 대해서도 B란 공통체가 가지는 감정을 A란 공동체가 그들의 감정에 참여하여 같은 가치를 감지하고 그래서 같은 감정을 가진다. 그래서 나와 남이, 우리와 타자가, A란 공동체와 B란 공동체가 함께 슬퍼하기도 하고, 함께 기뻐하기도 한다. 바로 이렇게 될 때 나와 너가, 우리와 타자가, A란 공동체와 B란 공동체가 하나가 되고, 서로 이해 가능해지고, 서로 교류가 빈번해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애, 박애를 초래케 한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고 있는 <현대의 인간애>(Humanität, 박애 등등)는 오로지 조국애, 그리스도적 인격애 그리고 신적 사랑에 대한 <르쌍티망>으로부터 생겨 나오므로, 어떠한 순수한 자율적인 사랑 발동도 인간 정신의 본질에서 고유하고 적극적인 토대를 가지지 못하고, 오히려 한편으로 그리스도적 인격애와 신의 사랑에 대한 투쟁과 저항이고 다른 편으로 조국애에 대한 그런 것일 뿐이다. 오늘날도 우리는 보편적 인간애의 이념이 이런 의미로 르쌍티망에 기초하여 적대적으로 종종 변화되어 왔음을 보고 있다. 더나아가 우리는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적 인격애와 신의 사랑뿐만 아니라 조국애 내지 국가 사랑과 자기 문화권의 인간에 대한 사랑 등등에 대한 인간애의 가치 우위, 더나아가 이웃 사랑에 대한 유토피아적 <원인애>(니체)의 가치 우위는 오로지 발동하는 르쌍티망의 결과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인간애가 순수 공감 활동으로부터 생성되어지고, 공감 작용에 기초해서 성립되어진다면, 그 인간애는 가장 일반적이며 보편적일 것이다. 그러나 공감 활동이 발달하지 못하고 그래서 공감 작용을 통해 인간애가 성립하는 일이 없으면, 결국 인간애는 르쌍티망의 결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후자는 훌륭한 도덕 현상이 아니다. 항상 그릇된 도덕 현상의 변조로서 르쌍티망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런 과정을 통한 인간애의 생성에는 시행 착오와 후회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생성된 인간애는 항상 국소적인 것이고 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럼 이제 공감 활동을 통한 보편적인 인간애의 생성을 논의해 보자. 공감에 기초하고, 인간들 사이에서 어떠한 가치 구별도 어떠한 사랑 실행의 구별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인간애라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다. 따라서 인간애는 적들간의 화합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친구에서 그리고 적에서, 자유의 몸으로 태어난 자에서 그리고 노예로서 태어난 자에서 가능한 사랑의 대상으로서 그리고 증오의 대상으로서 구별되어지는 한, 그리고 친구에 대한 사랑과 적에 대한 증오, 자유인에 대한 존경과 노예에 대한 경멸이 도덕적으로 인준되고 그리고 금지되는 한, 인간애는 적의 경우가 아니라 친구의 경우에만, 노예의 경우가 아니라 자유인의 경우에만 타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 그래서 개개인에 대한 사랑도 <인간>이란 류의 <모범>으로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면서 이해하려는 보편적 인간애와는 명확히 구별되며, 개별적 인격 사랑은 보편적 인간애와는 다르다. 그리고 그럴 경우에 보편적 인간애는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자기의 활력과 타자의 활력의 공감을 통한 실재적 동일화가 이미 실행되었을 때, 또 그것에 기초한 자발적인 인간애가 항상 더 넓고 깊은 층들에로 ―인격 존재가 인간에서 시작하는 바로 그 곳에까지― 파고 들 때, 보편적 인간애가 성립된다. 그리고 그 자체로 개별화된 정신적 인격 중심체 일반에게 전체로서 인류에 현존하는 그 충만이 주체의 가능한 인격 사랑으로 드러나고 현상하기 위해서는 보편적 인간애가 필요하고 실로 무조건 필연적이다. 이렇게 볼 때 내가 타자의 감정 참여를 통한 근본적 공감 생성 없이는 보편적 인간애가 성립할 수 없음이 확연해진다. 6. 맺는말 이제 본 논의의 결론으로 '감정'이 공감 생성을 통해 갖추게 되는 윤리학적 의미를 간추려 보자. 조선 성리학의 가장 훌륭한 논쟁이었던 사칠논변에서도 칠정을 감정 일반으로 보았다. 단지 감정을 어떤 법칙이 조종·순화시키느냐 아니면 감정의 자연스런 발로가 바로 인·의·예·지를 스스로 형성시키느냐에 따라 主理냐 主氣냐로 나누어졌을 뿐이다. 주리는 어떤 로고스가 먼저 있어 그것이 감정을 조종·순화시켜서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의 선한 마음을 발동케 한다고 주장하고, 주기는 어떤 법칙이 먼저 있어 이것이 감정을 지배·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자연스럽고 정상적으로 발동할 때 그 감정이 인·의·예·지의 마음을 형성시킨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막스 셸러도 감정이 잘 발동하여 타자의 감정에 참여를 잘 할 때, 타자와의 공감을 잘 형성하게 된다고 했다. 타자와의 공감이란 것은 예컨대 '함께 슬퍼함', '함께 기뻐함', '함께 고통스러워함', '함께 유쾌함' 등이다. 이런 공감은 이를테면 불쌍한 아이를 보고 그 아이를 측은해 하는 마음이 생기는 측은의 감정, 연민일 것이며, 불의를 보고 그 불의를 타파하고 정의를 세우려는 마음이 생기는 수오의 감정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갈증으로 목이 타면서도 물 마시는 순서를 서로 양보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도 감정이 잘 발하여 타자와의 공감을 잘 형성해 겸양의 감정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며,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도 시비의 감정을 가졌기 때문이다. 필자는 여기서 이퇴계의 생각보다는 기고봉이나 이율곡의 생각을 따른다. 이퇴계는 사단을 理의 발현으로 보는데, 이는 인간의 본성에서 도덕의 근원을 확보하려 한다. 기고봉은 '사단도 언제나 절도에 맞는 것은 아니다'고 말하면서 칠정의 훌륭한 발동을 강조한다. 그리고 칠정의 훌륭한 발동은 '發而皆中節'이라든가 '氣가 발할 때 理가 자연히 모여 기의 올바른 발동을 돕는' 것이다. 따라서 이퇴계의 생각은 감정 자체의 활동이나 작용보다는 이것을 주재·지배하는 어떤 법칙, 로고스에 미련이 더 있고, 기고봉의 생각은 어떤 선천적 로고스보다는 감정 자체의 작용에 미련이 더 있다. 그래서 후자가 막스 셸러의 생각과 흡사하다. 본문에서 언급했듯이 감정도 스스로 고유한 논리로 작용하는 정신이다. 감정이 사랑이란 근원적 힘의 도움을 받아 활발히 그리고 정상적으로 작용해서 타자에 대한 참여 활동도 훌륭히 할 때, 우리 인간은 타자와의 공감을 훌륭히 형성할 수 있다. 그래서 남들과 같이 슬퍼할 수도 있고 기뻐할 수도 있고, 남들과 같이 함께 울 수도 있고 웃을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이 남들과 더불어 살아 갈 수 있는 공동 연대의식 내지 윤리 의식을 형성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들이 바로 집단주의, 민족주의, 국수주의, 종교적 집단 등을 초극케 하는 인간애를 생성시킬 것이다. [Abstract] Max Scheler's ethical Mitgefühlslehre Kum, Kyo Young (Yeungnam Univ.) It is notable that Max Scheler emphasizes the function of our Gefühl in ethics. According to him, our Gefühl has it's own rules and logic to follow when it functions. Especially, we are interested in his 'mitfühlen' with which he says we are able to participate in other people's feelings, to the result that we establish 'Mitgefühl' with others. Mitgefühl let us share feelings, and let us understand or forgive others. In having a Mitgefühl, we can achieve a universal love for humanity or general morality that overcome the nationalistic narrow egoism. How can Mitgefühl obtained? When we love someone, according to Scheler, we exercise the functions of high Gefühl that will provide an opportunity to participate in other's feelings or Gefühle. To participate someone else's feelings is to 'mitfühlen' well. Therefore, in order to fortify ethical solidarity with others, what is needed is 'Love others!' Mitgefühl contributes to the achievement of universal love for humanity, and when a love for humanity is realized, the pannational humanity can be achieved too. It seems necessary for us to have a true love for humanity through Mitgefühl, if we would want to overcome collective egoism, nationalism or sectarism in relig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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