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칸트의 ‘탄탈로스적인 아픔’

나뭇잎숨결 2020. 11. 1. 17:44


Kant의 ‘탄탈로스적인 아픔’

조 규 홍(한국교원대)

요약문
이 글은 1998년 독일의 한 대학교수 E. Schadel이 수년간 ‘Kant철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좀더 ‘폭넓은 시각’으로 ‘Kant’를 이해하였으면 하는 바램으로 발표한 책의 ‘핵심부분’을 번역한 글이다. 본문에서 저자가 직접 밝히듯, “지금까지 다른 한편으로 Kant를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경험주의적인 입장에서 그를 마치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뒤엎은 자’로서, 혹은 선험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입장에서 마치 ‘인간자아의 최상 원칙으로부터 모든 물질적인 것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한 자’와 같이 일방적으로 치달아서는 않될 것임을 시사한다. 오히려 이 두 가지 극단적인 입장이 종합적으로 엮어진 관점에서 ‘그의 전체 철학’을 해명해야 옳을 것”이라는 이유와 근거를 이 글에서 독자가 발견하기를 희망하는 의도에서 번역하였다. 저자는 그런 이해의 동기를 ‘Kant가 몸소 남겨준 한 편지’(1798. 9. 21)에서 발견하고, 그가 애절하게 말하는 ‘탄탈로스적인 아픔’을 그의 전생애를 다시금 되돌아보며, 곧 그의 삶과 철학활동(편지교류)안에서 그리고 그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진단을 시도하였다. 그러한 시도는 과연 “Kant를 넘어서는 일”이지만, 동시에 “Kant와 더불어” 이루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저자 Schadel 교수는 그리하여 Kant의 세 가지 <비판서>를 따라 ― 특히 <판단력비판>의 도입부(B LVIII / A LVI)를 따라 ― ‘전인적인 인간 연구’를 위해 Kant가 스스로 제안한 방식에서 비록 그가 ‘의도’했지만, 끝내 해결하지 못한 가운데 마침내 ‘그의 고통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남았으리라고 보는 ‘이해도식’을 다소 수정하여 생각하기를 청한다. 그것은 그러나 단순한 ‘개념 수정’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단절된” 관점에서의 ‘인간의 기본적인 세 요소’가 그저 ‘평면적인(neben-einander)’ 관점에서 서술되어서는 않되고, ‘심층적인(in-einander)’ 관점에서 비록 서로 ‘구별’되지만, 그럼에도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되새겨야 하겠기 때문이다. 그렇듯 ‘구별-연관’의 관계성 안에서 새로이 ‘Kant 철학’을 재고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그가 “목전에” 두고도 이룰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희망“만하였던 학문체계의 완성에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Kant의 고뇌, 그것은 그토록 ”어렵고 난해하게“ 저술된 그의 작품들이 단적으로 말해주듯, 우리로 하여금 그의 철학에 대한 이해를 힘겹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학문에 있어서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끔 보다 ‘절실하게’ 호소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 주요어 : 전체성, 조화(일치), 삼위일체적 이해지평, 존재와 이성





이 글은 1998년 독일 Bamberg대학 교수 Erwin Schadel이 수년간의 ‘Kant 연구’를 통해 ‘철학자 Kant의 남다른 고뇌’를 발견하고, 그 고뇌와 더불어 그의 ‘철학의 참모습’을 새롭게 파악하고자 발표한 책 을 소개하고자 쓰여졌다. 특히 이 책의 핵심단락을 번역 소개함으로써, 저자의 관점을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Kant 스스로가 그의 철학을 총결산하는 즈음에 토로하는 정신적인 갈등과 아픔’을 그의 한 편지에서 포착하고, 도대체 그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번민하였는지를 추적함과 아울러 과연 그 번민은 해소될 수 있는지 우리의 입장에서 다시금 생각해보려는 저자의 의도를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 Schadel은 이 책을 요약하는 중에, “Kant 자신이 자신의 大著 ‘세 가지 비판서’ , 를 저술한 후 8년이 지난 다음 한 친구에게 자신의 철학을 총망라하려는 시점에서 여전히 그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는 까닭에 ‘신으로부터 기나긴 고통 속에 처벌받은 탄탈로스’의 처지에 자신을 비유하며 고백하는” 실제 사건을 연구동기로 삼는다고 말한다. 이 연구는 나아가 “그 고통이 Kant의 학문적인 집념을 끊임없이 자극했음은 물론 이미 집필한 작품들 안에서 문득문득 발견되는 그의 내면적인 갈등의 중요한 요인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이해시키며, 다른 한편 그 고통이 ‘학문 全體라는 기반 위에서 터득된 온전한 앎’을 추구하려는 Kant의 남다른 집념에 불가피하게 제기되었다면, 이미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전통철학의 ‘이성적이며 실체적인 全體性 ― 存在全般 ― 에 관한 이해’를 새삼 되새기도록 이끌고 있으므로, 이제 ‘Kant의 비판철학’이 진정 의도하는 바를 새롭게 파악해야 한다”는 제의로 이어진다. 저자 Schadel은 그의 책을 통해서 Platon, Aristoteles, Plotin, Augustinus, Thomas von Aquin, Cusanus, Comenius 그리고 Leibniz에게로 부단하게 연결된 ‘존재의 全體性 이해’에 대하여 回想하고 있다 (특별히 Hauptteil의 Exkurse §29 [383-408쪽]에서 일목요연하게 제시). 서양정신사를 따른 회고 아래 지목되는 사실은 ‘참된 實體로서의 존재해명이 한마디로 存在와 認識과 行爲라는 삼위일체적인 기본도식에서 전체적으로 이해되질 때 보다 바람직한 해결점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저자에 따르면, “과연 Kant 자신이 비중있게 제시한 ‘세 가지 비판서’가 ‘존재’ (Sein)와 ‘인식’ (Erkenntnis)과 ‘행위’ (Handlung)라는 인간존재의 세 가지 기본요소와 충분히 상응한다”는 해석을 낳으며, 나아가 “Kant에 대한 ‘회의주의적이거나 차별주의적인 구구한 해석’과는 달리, 그 다양한 해석들을 제각기 인정하면서 동시에 모두 포괄할 수 있다”는 한층 종합적인 시각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제의는 그로써 “오늘날에 여전히 미흡하게 혹은 심지어 잘못 이해되어온 Kant 철학의 참모습을 ― 예컨대 ‘후기모데르니즘 (특히 W. Welsch)’에게서 그리고 ‘J. Habermas’과 ‘N. Hartmann’에게서 誤解된 Kant의 참모습을 ― ‘전체적인 인간 및 세계이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존재구조의 기본요소들의 불가해소적인 유대 위에서 다시금 파악하자”는 데에 중점을 둔다. 이같은 제의의 근거마련을 위해 저자는 이미 시도된 Kant연구의 다양한 해석의 원인을 그때마다 분석하는 작업을 소홀히 하지 않았고, 그로써 600여 쪽에 달하는 적지 않은 분량을 이 책에 할애하고 있다. 저자는 그러나 무엇보다도 ‘Kant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 (중심과제: Einführung §§ 7-11 [109-142쪽]; Hauptteil §§12-29 [143-408쪽])’를 현실적인 과제로 삼고, 그의 정신적인 고뇌의 배경이 되었던 과거로서의 ‘Kant 以前 歷史’연구 (전이해: Vorbemerkungen §§1-6, [15-108쪽])를, 곧 ‘서양정신사 안에서 實體에 대한 삼위일체적인 관점이 단절되었던 뒷배경을 근대전후를 따라 되짚어보는 데’에 그 첫 번째 연구 관심사로 지목하고 있다. 그런 다음 Kant의 사상에 대한 역사적 및 체계적인 연구를 따라 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원인을 분석하고, 그에 힘입어 후기모데르니스트 W. Welsch의 Kant에 대한 오해와 J. Habermas의 이성위주의 삼위일체적인 시도에 있어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나아가 그 해결방안 (Kant 철학의 영향: Nachbermerkungen §§30-36 [409-538쪽])을 제시한다.

여기 번역 소개하는 부분은 본문의 ‘중심연구’ 가운데 그 첫 번째 단원 (Einführung §§7-11: 부제 ― 존재전체에 관한 이해의 관점에서 시도하는 인간 Kant의 고뇌에 대한 분석과 그 치유방안)’으로서 저자의 연구 동기 및 의도가 구체적이고 이해하기 쉽도록 전개되어 있고, 이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그 서순도 함께 수록한다.
1. 연구의 시발점으로서 인간 Kant 이해를 위한 역사적 단서
2. Kant의 ‘탄탈로스적인 아픔’에 관한 분석시도
2.1. 회상 (아픔의 발단)
2.1.1. Kant의 ‘이성의 이율배반성(Antinomie)’의 문제
2.1.2. Kant의 세 가지 ‘비판서’의 탄생 경위
2.1.3. Kant의 학문적 태도의 문제점 (‘자연학’과 ‘윤리학’에 앞선 ‘논리학’)
2.2. 진단 (아픔의 실제)
2.2.1. ‘지적인 세상’과 ‘감각적인 세상’의 결렬
2.2.2. ‘전체성’을 통한 화해개념의 결여
2.2.3. ‘감각’에 대한 불신
2.3. 치유 (아픔의 해소)
2.3.1. ‘이성의 자율성(Autonomie)’에서 ‘존재의 전체성(Ontonomie)’에로
2.3.2. Kant의 학문적 태도에 따른 문제점의 해결방안*
2.3.3. 인간의 세 요소로서 ‘느낌’, ‘생각’ 그리고 ‘의욕’에 대한 재고
3. Kant의 태도를 통해서 바라본 철학의 과제: ‘조화’

(* 목차 ‘2.1.2. Kant의 세 가지 기본학문의 구성’와 ‘2.3.2 Kant의 세 가지 인간기본 요소의 구성’의 내용은 원문에서 실제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여기서는 저자의 의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하나로 묶어 소개한다)


1. 연구의 시발점으로서 인간 Kant 이해를 위한 역사적 단서

Breslau의 한 대중철학자였던 친구 Christian Garve로부터 74세의 Kant는 갑작스레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되는데, 그 친구가 더 이상 치유될 수 없는 ‘괴종양’으로 고통받으며 얼굴 한쪽이 점차 썩어가고 있다는 슬픈 내용의 편지였다. 이에 Kant는 그 친구를 위로하고자 다음과 같이 글을 써 보낸다:
“가장 미더운 그대 벗에게 ... 그대의 육체적인 고통은 물론 오히려 몸에 해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듯 편지를 썼다는 것은 과연 그대의 정신적인 힘이 그러한 고통을 능히 물리치고 가장 훌륭한 것을 위해 언제나 순수하게 매달리는 그대의 높은 뜻으로서 나에게 더없는 경이로움을 자극하네. 그러나 나는 비록 나의 입장에서 그와 엇비슷한 노력을 기울임에도 나에게 떨어진 작금의 運命은 그대가 생각하기에 어쩌면 전혀 고통스럽다고 여겨지지 않을지라도, 예컨대 비록 육체적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지만, 정신적인 작업 중에 나는 마치 온몸이 온통 마비가 된 듯한 느낌일세. 왜냐하면 이제 ‘(나의) 철학의 전체’를 총결산하는 일을 목전에 두고도 여전히 그것이 아직 불완전하게 보인다는 사실 때문일세. 비록 이것이 내가 해야만 할 과제임을 자각함에도 말일세. 이는 마치 ‘탄탈로스적인 아픔’이라고나 할까! 그럼에도 나는 이것이 희망이 없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우리는 여기서 Kant의 인간적인 연민, 친구에 대한 사랑을 의심 없이 목격한다. 비록 그 친구가 두 달도 채 못 넘기고 죽게되지만, 진정으로 자신의 정신적인 불행에 비해 ‘보다 강인한 정신력으로 알차고 복되게 살아온 친구’임을 위로하고 있다. 우리는 다른 한편 Kant가 과연 육체적으로 누구 못지 않게 건강을 유지하며 살아갔던 사실을 기억한다. 새벽 5시에서 오후 10시까지 나름대로 정해진 하루일과는 변함이 없었고 날마다 정오가 되면, 정확한 시간에 산책을 하였던 그를 통해 Königsberg의 시민들이 시계를 맞췄다는 이야기는 과연 1803년 10월, 그러니까 그가 죽기 넉 달 전에야 비로소 침대에 눕기까지 그는 한 번도 병을 앓지 않았으며, 자신의 금욕적인 생활방식에 만족하며 살았다.
그의 철저한 삶은 학문적인 명성을 얻는 데에도 어김없이 관여하였다고 본다. 그의 저 ‘세 가지 비판서’는 Königsberg를 넘어서 유명세를 떨쳤다. 1797년 (앞선 편지를 쓰기 한 해 전) 여름 자신의 고향에 있는 대학에서 학문적 활동을 시작한 지 50년째가 되는 해에 그를 위해 축하연이 베풀어졌었고, Kant는 거기서 ‘철학자로서의 더없는 명예’를 얻는다. 곧 그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로 칭송받았던 것이다.

“플라톤 - 뉴우톤 - 오, 얼마나 아득한가!
그대의 깊은 통찰이 그들을 앞섰으니“.

그럼에도 Kant는 앞선 편지에서 쓰고 있듯이 남모르는 아픔에 번민한다. 157cm의 그 작은 몸체에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고통으로 Kant는 여생을 번민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그가 ‘번민’하고 있는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그의 철학 안에서 이 번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자. 또한 그럼에도 이러한 고통의 치유가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그의 말속에 어떤 뜻이 담겨있는지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이상의 궁금증은 이제 우리로 하여금 (1) Kant의 “탄탈로스적인 아픔”의 근거에 대한 回想을 추적하도록 이끌며, (2) 이에 그 “고통”의 원인을 면밀히 分析해내고, (3) 나아가 그 어떤 治癒方案이 마련될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이끈다.

물론 그에 앞서 잠시 이 신화적인 인물 ‘Tantalos’를 비유하면서까지 말한 그 고통이 그에게 과연 얼마만큼 심각한 것인지를 생각해봄직 할 것이다.
Tantalos는 그리스 신화에서 알 수듯이, 소아시아의 한 왕으로서 그의 아들을 神들의 전지전능함에 대한 시험수단으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아들의 살(육체)을 神들의 식탁에 올려놓음으로써 저지른 神에 대한 불신과 모독은 마침내 神들로 하여금 노여움을 사게 되어, Homer가 전하듯, 어떤 커다란 호수에 갇히는 처벌을 받았다. 호수의 물은 그의 목 아래까지 차 있으나, 그가 목이 말라 마시고자 할 때마다 물은 아래로 내려앉고, 그의 머리 바로 위에 매달려 있는 果實은 배가 고파 손을 뻗을 때마다 바람에 날아가 붙잡을 수 없는 고통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이로써 ‘탄탈로스적인 아픔’은 삶을 위해서는 필수적이기에 노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더 이상 충족되지 않는 딜레마에 시달리게 되는 고통을 대변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과연 Kant의 앞선 편지 내용 안에서도 엿볼 수 있게 되는데, 다시 말해 이제 자신의 철학을 총결산하면서 ‘결실을 맺어야 하는 시점에서’ 더 이상 결실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아픔과 비교된다. 그 ‘열매’는 자신의 目前에 있음에도, 붙잡을 수 없는 것이 Kant에게는 분명 탄탈로스적인 아픔이요, ‘인간본질 및 삶에 대한 물음 하나로 개별적인 인식 및 실천에 관한 여러 물음’을 종합하려고 노력했던 것처럼, 자신의 철학을 ‘총망라하고자 하던 필수적인 욕구’를 自覺하면서도 그 전체를 제시하는 데 있어서 ‘여전히 불완전하게만’ 포착되는 현실적 처지에서 Kant는 남다른 아픔을 안고 번민하였으리라 능히 짐작케 한다.
Kant는 그럼에도 다른 한편 이러한 ‘아픔’에 대해 다소 긍정적인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앞선 편지에서 “이것이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라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가 같은 해(1798년)에 발표한 글 안에서 다음과 같이 ‘대자연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애썼던 흔적에서도 엿볼 수 있다: “대자연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살아가도록 (행동하도록) 다그치는 가운데 그 고통을 부여한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계속 노력하게끔 말이다. 그로써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서 우리가 결국 ‘비교적’ 나은 삶에 만족하도록 이끈다. 비록 ‘순수하거나 충만한 의미’에서의 만족을 주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이 같은 설명은 앞서 내린 자신의 결론, 곧 “이러한 (노력하는) 행위자체가 바로 우리의 삶을 만끽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라는 결론과 일맥상통한다. Kant는 자신의 말대로 이 가장 훌륭한 방법으로서의 ‘행위’ 및 ‘노력’을 중단 없이 계속하였다. 이를 두고 K. Jaspers는, “Kant는 마감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작업해나갔으니, 그의 두뇌가 그 일을 마다할 때까지 노력하였다”고 소개한다. 이와 유사하게 Kant 생애에 관한 한 러시아 연구자 A. Gulyga는 “그 어떤 것도 Kant의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시도하였고, 절대적인 것을 발견하고자 애썼다. Kant는 그의 이론을 (끊임없이) 개선하고 가다듬고 또 손질하였다. 그의 삶은 멈추지 않는 정신적 여정이요, 영원한 추구 그 자체이다”.
우리가 이러한 Kant의 학문적 태도를 기억한다면, 그가 노력하기를 마다 않던 ‘총체적인 철학체계’에 대한 바램을 고려하면서 그를 이해해야 옳을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다른 한편으로 Kant를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경험주의적인 입장에서 그를 마치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뒤엎은 자’로서, 혹은 선험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입장에서 마치 ‘인간자아의 최상 원칙으로부터 모든 물질적인 것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한 자’와 같이 일방적으로 치달아서는 않될 것임을 시사한다. 오히려 이 두 가지 극단적인 입장이 종합적으로 엮어진 관점에서 ‘그의 전체적인 철학’을 해명해야 옳을 것이다. 최소한 그의 의도가 앞선 그의 편지에서 비춰지듯이 ‘철학의 종합’을 궁극적으로 꾀하려는 데에 있다고 보아지는 한에서 말이다. 여기에 Kant의 의도를 되살려 아마도 W. Windelband의 표어가 다소 걸맞을 수 있을 것이다: “Kant를 이해하는 일은 다름 아닌 그를 넘어서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더 알맞게는 아마도 “Kant를 이해하는 일, 그것은 ‘그와 더불어’ 그를 넘어서는 일”이라고 말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2. Kant의 ‘탄탈로스적인 아픔’에 관한 분석시도
2.1. 회상 (아픔의 발단)
2.1.1. Kant의 ‘理性의 이율배반성(Antinomie)’의 문제

Kant의 ‘전체적인 관점에서의 철학’에 관한 노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분석하고 종합하려고 했던 ‘이성에 관한 비판’의 역사적이고 의도적인 發展史를 살펴보는 일이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작업은 실상 B. Erd- mann에 의하여 시도되었고, 그는 Kant가 손수 집필한 다른 글들을 마침내 세상에 소개하는 일까지 착수하였다. 그로써 우리는 Kant의 ‘비판주의적인 사고방식’의 경로를 ‘그의 작품의 탄생경위에 따라’ (in statu nascendi) 보다 정확히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L. Kreimendahl의 <교수자격논문> 안에서 Kant를 보다 구체적인 근거와 더불어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게 된다.
Erdmann에게서나 Kreimendahl에게서 공통적으로 파악되고 있는 ‘이성의 이율배반성’에 관한 Kant 자신의 이해는 과연 “批判哲學의 가능성과 그 범위를 넘어서 새롭게 학문을 전개시키는 원칙적인 규범으로서의 기반을 마련”하였을 뿐만 아니라, Kant 철학의 전체적인 체계를 확립하는 토대로 급성장하였다. 앞서 언급한 ‘친구 Ch. Garve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Kant는 다음과 같은 자신의 철학적인 동기를 회상하고 있다: “신의 현존이나 불멸성과 같은 것들이 아니라, ‘순수 이성’의 ‘이율배반성’ 문제가 바로 내가 일찍이 관찰하며 분석하고자 한 관점이다: ‘세상은 창조되었다’ - (혹은 정반대로) ‘세상은 창조되지 않았다’는 식의 서로 모순적인 주장은 전통에 입각한 교의적인 가르침에 (무비판적으로) 젖어버렸던 나를 각성시켰고, ‘이성 자체의 비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 주어, 이렇듯 자기모순에 빠진 것으로 보이는 이성의 잘못된 惰性을 그 자체의 힘으로 새롭게 벗어도록 고무시켰다”.
그리하여 Kant 자신이 애초에 야심을 가지고 바랬던, 곧 형이상학으로 하여금 “확실한 학문의 길” (KrV, B XIX)을 定礎하려 했던 것이 이러한 ‘이성의 이율배반성’의 발견으로 가장 힘든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미 1766년 Kant는 <어느 한 사상가의 꿈>이란 자신의 책 안에서 밝히듯 환상적인 사고만을 일삼던 Emmanuel Swedenborgs와 결별하였다). 그러나 Kant의 집요한 노력으로 마침내 1769년 스스로 고백하듯, “커다란 빛”을 보게 되었다.
Kreimendahl에 따르면, 이는 분명 Kant에게 있어서 “비록 비판주의적인 입장이지만, 하나의 새로운 형이상학의 출발”을 의미하는 순간이다. 이러한 새로운 형이상학을 위하여 Kant는 우선 ‘물 자체’ (Ding an sich)와 ‘드러남’(Erscheinung)의 구별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자기모순적인 이성 자체’가 ‘환상적으로 빠질 수 있는 경험’을 경계하여 새로운 시각에서 ‘이성’과 ‘경험’을 區分한다. 이로써 ‘이성의 이율배반성’이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던 때문이다: “이성의 이율배반성은 단순히 변증법적이요, (사물의) 드러남에 의한 모순에 지나지 않는데, 그 모순은 ‘물 자체의 존재조건으로서만 유효한 절대적인 전체성’에 관한 개념을 단순히 우리의 ... 상상에만 존재하는 ‘드러남’에다 (잘못) 적용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KrV, B 534 / 506). 이러한 구별이 의도하는 것은 ‘물 자체’ (예컨대 Kant에게서는 영혼[Seele], 신[Gott]과 같은 초감각적이며 정신적인 존재는 물론 세계[Welt] 자체와 같이 우리가 마지막까지 경험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들)가 ‘이론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이성’의 가능한 대상 영역으로부터 배제되는 것이다. 이는 그의 전환적인 철학의 기초를 이룬다. 다시 말해 앞서 열거한 (전체성으로서의) ‘물 자체’는 이제 ‘금기조항’으로서 타부시 되고, 오로지 우리는 우리의 상상 안에 자리하는 ‘감각적이고 현상적인 드러남’에 몰두함으로써 (드러난) ‘물 자체’가 우리의 ‘주체적인 이성’에 의해 포착되고 정립된다는 자신의 확실성(믿음)에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이성의 이율배반성’을 해결하기 위하여 Kant는 인간적인 인식 및 그 과정을 단순히 ‘시공간적인 현상’ 안에만 제한시키고, 앞서 Des- cartes가 제시한 이원론적인 사고방식 안에서 ‘이미 주어진 自然’을 ‘형식없는 내용’ (formlose Inhaltlichkeit)로서 또 한편 ‘우리의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精神’을 ‘내용없는 형식’ (inhaltlose Formhaftigkeit)으로 설명하였다. 결국 ‘자연’과 ‘정신’ 사이에 원천적인 구별을 강조함으로써, ‘이성의 자유로움’이 마침내 ‘이율배반성’을 낳을 수 있다는 설명에로 나아가 그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천적인 구별’은 다시금 보다 심각한 어려움을 가져다주었다. 곧 ‘정신’이 ‘자연’이란 대상을 관찰하는 의미를 넘어서 그 ‘정신’이 파악한 사실이 과연 ‘자연’과 어떻게 (다시금) 하나될 수 있는지 하는 물음이 그것이다. ‘정신’과 ‘자연’이 서로 넘나들 수 없는 가운데 ‘근본적으로 구별되어 있다면’, 도대체 우리는 ‘자연’을 경험하며 설명하는 이성이 어떻게 사실대로 ‘자연’을 파악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더 이상 해명할 수 없는 입장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Kant 역시 몸소 이 문제의 심각성을 생각하고 있다. 한 예로 Kant는 1772년, 그러니까 자신의 논문 을 집필한 후 2년이 지난 다음에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한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어떻게 나의 오성이 온통 선천적으로 사물에 관한 ‘개념’을 그려내면서 동시에 ‘사물들’과 필연적으로 일치할 수 있을른지? 또한 어떻게 오성이 경험되는 사물들의 존재파악을 위한 실제적인 토대가 되며, 나아가 분명 오성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경험에게 신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지? 이와 같은 질적인 물음에 관련하여 마침내 ‘사물자체와 일치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서 유래하는지’에 대해 우리 오성능력이 앞서 가늠한다는 것은 항상 어두움 속에 감추어져 있다".
‘이성의 개념활동’과 ‘경험너머의 사물자체’ 사이에 ‘일치성 여부’를 놓고 고민하던 Kant는 결국 그렇게 불명료한 입장으로 마감한다. 그는 마침내 ‘이성’을 ‘사물자체 및 그에 대한 경험’과 철저히 구별함으로써, 결국 인간에게 전적으로 위임된 것으로서 ‘이성의 활동’, 그 자율성(Autonomie)에 최대한의 믿음을 두고 ‘선험적인 이성’만을 통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만, ‘경험된 사물 자체와의 자연스러운 교류 및 일치’는 근본적으로 해명되어지지 않았고, 이는 그에게 ‘탄탈로스적인 아픔’을 점점 키워나가는 원인이 되었다고 보아진다.
우리는 Kant의 결정과는 달리 이러한 물음에 관한 해답을 이미 Aristo- teles에게서 발견한다. 왜냐하면 Aristoteles는 ‘자연-내용’과 ‘이성-내용’의 ‘하나됨’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물질적인 요소’와 ‘정신적인 요소’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생명체로서의 합일점’을 그는 이미 합목적적으로 추구하는 까닭에 Kant에게서와 같은 ‘고뇌’가 더 이상 자리하지 않는다. 특별히 한 예를 따라 두 사람을 비교한다면, Aristoteles는 일찍이 “학문이란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한에서 존재를 바라보는 것” (Metaphysik IV 1 [1003a21])이라 함으로써, ‘존재’라는 하나된 기반 위에서 다져지는 ‘학문’을 염두에 두었었다면, Kant는 이에 반해 “학문이란 단순한 개념들에게서 선험적으로 비롯한 인식의 체계” (Metaphysik der Sitten [1797/21798], Einl., BA 19)라고 함으로써, 우리의 ‘인식’ 내지 ‘학문’이 ‘존재하는 실제’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지 않는 가운데 성립한다고 보았다. Kant의 이러한 입장은 과연 과거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원칙에서 벗어난 “새로운 사고양식이요, 혁명적인 발상” (참고로 KrV, B XI)이라 하겠다. 이러한 발상은 이미 중세후기에 시작하여 근대에 들어서면서 크게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유명론적인 개념주의자’들의 사상에서 유래한다고 보아진다. 예컨대 중세말기 스페인의 한 예수회 철학자 Suarez는 자신의 책 안에서 그 당시 유행하던 ‘유명론자들’이 제시하는 ‘형이상학’에 관한 정의를 소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에 의하면, 유명론자들에게 형이상학이란 “추상개념을 통한 학문”이라는 것이다. Suarez의 이 책은 1597년에 출간되어 17세기경에는 독일에도 보급되었으며, 특히 프로테스탄트 학교의 교과서 안에서도 활용되었다. 이는 예수회의 한 철학자가 소개하는 내용을 토대로 가톨릭 (유명론자 Ockham의 스콜라주의적인 태도)에 대해 학문적으로 견제하며, 나아가 전체 가톨릭의 교의적인 가르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려는 목적이었다.

‘유명론자들의 날카로운 면도날과 같은 구별’이 초래한 결과와 다르지 않게, Kant의 이 “새로운 사고양식과 혁명적인 발상”은 결국 ‘존재’를 망각하고 ‘이성’의 독단적인 자율성만을 제시하는 오류를 낳은 점에 대해서 이제 그 결과를 감당해야만 한다. 특별히 ‘물 자체’와 ‘그의 드러남’이 실상 내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에 대하여 부인하는 데서 뒤따르는 難關을 피할 길이 없다. Kant는 ‘물 자체와 그 드러남’ 사이의 내적인 연관에 대해 여전히 ‘알 수 없음’만을 고집한다: “(사물의) ‘드러남’ 뒤에 도대체 ‘드러난 것’과는 다른 무엇이 자리하고 있음에 대해, 곧 ‘물 자체’에 대해 시인하고 이를 인정하여야만 할지도 모르지만, 실상 우리에게 이내 제기되는 사항은, 그 물 자체는 우리에게 결코 인식될 수 없다는 사실과 그러므로 그들이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수용될 때에만 우리가 그들에게로 가까이 나아가더라도, 결국 그들 자체가 도대체 무엇인지는 결코 알 수가 없다” (GMS [=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 tten (1785/21786)], BA 106).

우리는 그럼에도 이 구절을 주의 깊게 살펴봄으로써 Kant 자신이 두 가지 관점 중에서 하나를 포기하고 다른 하나를 선택하는 사고방식을 엿보게 된다. 곧 포기된 하나는 ‘드러남 뒤에 숨어있다’고 여기는 ‘물 자체’이며, 그와 반대로 선택된 다른 하나는 ‘감지되어지는 현실상황’에서 ‘주체의 의식’이 ‘드러남을 일구어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Kant의 이 취사선택 이전에 우리가 기억해야만 할 것은, 「실제 ‘무엇인가’가 ‘감지하는 주체’를 앞서 자극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는 물론 ‘존재하는 한에서 존재하는 무엇의 내용’을 가리킨다. 이 ‘자극시키는 내용’이 ‘자극 받은 주체에게 드러나는 데’에는 비록 ‘주체의 태도’가 고려될지언정, 그 사물의 내용마저 주체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만 Kant는 난관에 부딪히는 것으로 보아진다.) 이로써 Kant에게 ‘주체의 선험적인 인식행위’가 한편 유감스럽게도 이미 Descartes 이후 제기된 ‘res cogitans’와 더불어 주된 관심사로 근대사에 자리를 잡게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이 결과적으로 ‘인간의 자아의식’ 및 그의 ‘자율성’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고조시킨 것을 분명하지만, 자신의 ‘학문적인 제의’, 곧 ‘물 자체에 대해 우리는 알 수 없고, 단지 우리가 생각해내야만 한다’ (참고로 KrV, B XXVI)는 제의를 따라 궁극적으로 ‘물 자체’와 ‘이성’ 사이의 실제적인 關係性이 의도적으로 무시되어 버렸음을 안타까워 해야할 일이다. 이를 두고 일찍이 Hegel이 중세의 스콜라학파를 가리켜 비난조로 비유한 이야기를 상기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수영을 할 수 있기 전에는 아예 물에 가려고 하지 않는 자와 같다”.

그러나 Kant는 계속하여 (‘물 자체’와 ‘그 [제한적인] 드러남’ 사이에 우리의 ‘생각’ 자체가 엮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따라 둘 사이의 ‘서로 다름’을 강조하며) 집요하게 말한다: “이성의 이율배반성은 어쩌면 아주 자연적인 전제조건, 곧 ‘물 자체’에 대한 의미들을 고스란히 대상화하는 작업을 거부하도록 요구한다. 오히려 그보다는 ‘그 드러남’만을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여, 그것에다 지적인 배당 [곧 초감각적인 것으로서 고유한 인식내용을 지니지 않는 단순 개념형식]을 할애하도록 요구한다” (KU, B 243 / A 240). Kant의 이렇듯 ‘물 자체’에 관한 회의적이며 거리를 두는 태도는 다른 한편 한동안 그의 심중에 어떤 운명적인 어려움으로 간주하도록 부추킨다: “우리 인간의 이성은 인식하는 방법에 있어 특별한 운명을 짊지고 있으니, 이는 이성이 피할 수 없는 많은 질문들에 의해 시달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질문들이 이성으로 하여금 대답할 수조차 없는 그 질문의 본성에 따라 그만 이성 스스로를 포기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질문들은 (비록 이성으로부터 유래하면서도) 이성의 모든 능력을 넘어서 있다” (KrV, A. VIII).

2.1.2. Kant의 ‘세 가지 비판서’의 탄생 경위

앞서 살펴본 Kant의 사고의 출발점에 있어서 재고되는 Kant 자신의 회의적인 태도는 물론 그가 ‘남다른 정확성’을 꾀하고자 노력하였기 때문이지만, 그럼에도 역설적으로 그때마다 ‘불명확함이 내심 끊임없이 제시되었던 사실에 대해 그 바람직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던 데’에 그 원인이 있다. Kant의 글들이 그토록 장황하고 난해하게 표현되었던 바에 대해, 그 역시 스스로도 밝히듯, “여러 곳에서 내가 제시하는 이론들이, 만일 그것이 그렇게까지 정확할 필요가 없었더라면, 좀 더 쉽게 납득하게끔 표현되었을 것이다”라고 했다면, 그가 이론적으로 정확하게 제시하고자 한 만큼, 그렇게 달리 난해하게 전개된 해결책에 얽힌 불명확함에 대하여 우리 역시 각별히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Kant의 ‘철저한 사고’를 향한 의지에 경의를 표하지만, 나아가 이제 이러한 그의 의지가 우리로 하여금 ‘그의 글을 읽는 데에 뿐만 아니라, 그의 심중을 이해하는 데에 더 큰 어려움을 가지도록’ 이끌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면 그가 그의 대표적인 ‘이성에 관한 비판서’를 어떻게 집필하여 나가는 지를 간단히 살펴보면서 그의 작품에 대한 올바른 접근을 위한 모색은 물론, 그가 작품을 써나가는 가운데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었는지 생각해보기로 하자.
우리가 이미 보아서 짐작할 수 있듯이, ‘순수이성에 관한 비판’이라는 개념이 처음 생겨난 (정확히 1769년) 이후 그에 관련한 가 세상에 나타나기까지 약 12년간의 세월이 흘러갔다. 이는 분명히 그의 집필에 많은 난관과 고뇌가 쉼없이 계속되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시사한다고 본다. 이를 두고 A. Gulyga는 이렇게 소개한다: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그에게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애써 찾은 진리가 이내 또 다른 상황에서 해결할 수 없는 수수께끼처럼 변하였다”. 과연 Kant는 을 1781년 세상에 내어놓았지만, 그로부터 만 6년이 지난 다음 다시금 크게 수정된 을 再版(21787)하게 한다. Jakob Amstutz는 한편 1781년 ― Kant가 을 처음 세상에 내어놓은 해 ― 을 가리켜 “철학사의 커다란 분수령”이라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는 과거 전통적인 사고방식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며, Kant에게 있어서는 이제 새롭게 전개시켜야 할 ‘이성의 자아의식’에 대한 이색적인 계획을 뜻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난해한 해결책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의 계속되는 세 가지 <비판서>에서 다소간 불만족스러운 연관성을 보게 된다. 다시 말해 애초에 ‘비판적인 형이상학의 정초’로서 단독적으로 고려되었던 “ 곁에 (또 다시) 별도로 이 1788년 등장하였고, 나아가 1790년 이 의미심장한 보충판”으로 출판되었다. 그밖에도 1783년의 는 일반대중들을 고려하여 의 중심내용을 요약 발표한 것이지만, Kant는 몇몇의 친구들과의 편지 안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의 출판시에 의식하지 못한 몇 가지 사실들을 소개하고 있다. 의 再版 역시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불가피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1785년 은 그가 에서는 도덕원칙에 관한 연역적인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내다보고 앞서 그 단서를 제시하는 데에 의의를 두고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그 작품 안에서 도덕원칙이 곧 “이성의 현사실성” (KpV, A 56)으로 소개되고 있다.
Kant는 과연 ‘형이상학의 새로운 정초’를 놓기 위한 최초의 계획으로서 ‘순수이성비판’을 지나치게 서둘렀다는 고백을 한다: “언어의 新造性과 육중하게 몰아치는 어두움” 사이에서 를 읽는 독자들에게 ‘편안하지 못한 점’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과 ‘대중성이 희박하다’는 사실에 대해 Kant는 1783년 8월에 직접 쓴 편지에서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동일한 편지에서 에 나타나는 특별한 점을 강조하였다. 예컨대 “하나의 완전히 새롭고 지금까지 시도되지 않았던 학문, 곧 선험적으로 판단하는 이성에 의한 비판”을 제시하고자 한다고 밝힌다. 또한 그는 과 을 집필하면서 하나의 체계적인 바탕을 마련하였으니, “(이성)비판을 향한 가시밭길” (KrV, B XLIII)을 감행했으며, “순수이성의 완전한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형식적인 조건들을 서술” (KrV, B 735f. / A 707f.)하고자 애썼다. 이는 다른 말로 “순수이성의 원칙들과 관련된 체계” (KrV, B 37)라 부를 수 있다. 그가 앞서 말한 것처럼 “지금까지 시도되지 않았던 학문”이란 점에 대해 Kant는 적지 않게 자각하고 있었으며, 나아가 “(전통적인 학문의) 억지 짜맞추기 식의 관찰들로 어우러진 역겨운 관행과 팔삭동이 식의 이성원칙론” (GMS, BA 31)에 반박하여 나섰다. 이러한 태도는 ‘철학의 전체성’에 관한 그의 확고한 신념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이 지금까지 여전히 결코 실재하지 않았다” (Prol, A 195)는 생각과 아울러 “더 이상 과거 역사적인 문헌연구를 제시하지 않으려는” (KrV, B 370 / A 313) 그의 색다른 의지를 시사한다. 그리하여 실상 그는 Aristoteles의 ‘형이상학’과 관련한 개념연구에 대하여 오로지 간접적으로만 ― 다른 사람의 연구 및 소개를 따라 ― 이해하였다.

2.1.3. Kant의 학문적 태도의 문제점 (‘자연학’, ‘윤리학’에 앞선 ‘논리학’)

Kant의 ‘선험주의적인 판단’에 관한 계획의 문제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도덕형이상학 원론>의 ‘서언’에서 밝히는 내용을 참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는 거기서 고대 전통철학이 원칙적으로 제시하는 철학의 ‘세 가지 분류’와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름하여 ‘자연학’, ‘논리학’, ‘윤리학’, 이 세 가지 학문분류를 수단으로 실상 고대철학은 ‘하나의 생동감 있는 전체’로서의 학문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이 모든 것을 총망라하는 철학이 그 때문에 ‘결실을 맺는 정원’처럼 비유되었다: “논리학이 정원주위를 에워싸는 울타리와 같이 그 영역을 명확하게 구별지어 주는 것이라면, 윤리학은 열매를, 자연학은 비옥한 땅, 혹은 그 땅에 자리잡은 나무들과 같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요소로 구별되는 ‘학문의 전체성’에 관한 개념을 확인한다: 1. 생산적인 존재로서 자연학, 2. 윤곽을 규정하는 논리학, 3. 결실을 맺는 실천적 의미에서의 윤리학이 그것이다.
그러나 Kant는 이러한 전통 안에서 소개된 그 외적인 구성요소는 수용하는 듯하지만, 실상 ‘자연학’과 ‘윤리학’이 ‘경험적인 입장’에서 이해되는 한에서 ‘물 자체’와 직접 연관을 짓는 까닭에 불확실한 것으로 내모는 반면, ‘논리학’이란 순수 이성적인 ‘선험주의적 관점’에 따라 독자적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는 원칙을 고수하면서 ‘논리학’에 그 우위성을 부여한다. 다시 말해 “논리학은 (경험되어지는) 대상과 관계없이 도대체 사고의 일반적인 규칙” (GMS, BA III)으로서 활용된다는 것이 Kant의 기본태도이다. 이로써 그에게는 ‘논리학’이 ‘형이상학의 일차적인 본질’로 자리잡는 반면, ‘윤리학’은 ‘도덕의 형이상학’이요, ‘자연학’은 ‘자연의 형이상학’으로서 ‘(경험과 결부시킨) 부차적인 학문’이라고 차별지어졌다 (참고로 GMS, BA III-V). 그러나 ‘자연학’과 ‘윤리학’ 안에서 “‘경험적인 것들’과 ‘이성적인 것들’을 서로로부터 조심스럽게 구별해야 하는” (GMS, BA VII) 과제를 두고서 Kant는 실상 어려움을 갖는다. 왜냐하면 그의 구별원칙에 따라 ‘자연학’ 안에서 ‘경험적인 부분’과 ‘이성적인 부분’을 갈라 세운다하더라도, 그 다음 과연 ‘선험적인 이성’이 어떻게 ‘경험적인 실제’에로 나아갈 수 있는지 (서로 일치할 수 있는지) 더 이상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윤리학’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과연 어떻게 ‘선험적인 도덕원칙’과 ‘실천적인 인간학’과의 관계가, 예컨대 어떻게 ‘세상과 근본적으로 遊離된’ 이성의 자율성에 근거한 도덕법이 그와 구별된 ‘세상 안의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진지하게 관여할 수 있는지 더 이상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Kant의 입장에 따르면, 결국 오늘날 ‘자연학’과 ‘윤리학’의 공통영역에 관한 경험 및 연구와 관련하여 그저 침묵하는 태도가 최선인 듯 암시되어질 뿐이다. 이는 Kant가 이성과 자연 사이를 구분하여 “원칙론적으로 전혀 다른 두 개의 부분들” (KU, BA XII)이라 말하고는 이 둘 사이의 연관성을 瓦解시킨 데에 그 어려움의 발단이 자리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2.2. 진단 (아픔의 현실)
2.2.1. ‘지적인 세계’와 ‘감각적인 세계’의 화해할 수 없는 결렬

‘자연학’과 ‘윤리학’이 서로 瓦解되고, ‘논리학’이 그 둘에 비해 우위성을 갖는다고 함으로써 Kant는 자신의 철학에 스스로 ‘탄탈로스적인 아픔’을 분만하고 있다고 보아진다. 이 아픔의 始原地는 바로 “지적인 세계와 감각적인 세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지 못한 점”에 있다고 이해된다. Kant 역시 이 문제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미 1770년 그는 자신의 논문을 통해 ‘감각적인 세상과 지적인 세상 사이의 구별’을 주제로 하여 초점을 맞추었지만, 여전히 명확하게 해명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그 이후로도 계속하여 이 물음에 고심하였다. 1772년 2월 그는 그의 친구 Marcus Herz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나는 나의 학위 논문에서 ‘지적인 想像’의 본질을 단순히 소극적인 의미로 파악하였으니, 왜냐하면 그러한 상상들이란 우리 영혼이 대상을 관찰함으로써 (합당하게) 얻은 산물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하나의 상상이 하나의 대상으로부터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감각적으로 수용되는 일 없이도 그 대상과 연관을 맺을지에 대해서 나는 침묵으로 대신했다”. 그는 또한 계속하여 뒤늦게 역시도 답을 구할 수 없는 중요한 질문들을 같은 편지에서 나열하고 있다: “무엇을 통해서 우리에게 ... 저 ‘사물들’이 주어질까? 만일 그 사물들이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수용되는’ 그같은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말이다. 또한 만일 ... 지적인 상상들이 우리의 내적인 활동이라 주장한다면, 도대체 그 어디로부터 우리의 내적인 활동과 독립된 대상들과의 ‘일치’가 이루어질까? 대상들에 대한 순수이성의 규범 역시도 의문이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 규범들이 대상들과 일치하게 되는가? 경험으로부터의 도움을 거부해도 좋다는 사실을 飜覆하여 그 일치를 생각해야 할까?”

소위 ‘순수이성개념’만을 따라 체계화하려는 Kant의 의지는 분명 “한편으로는 이성의 범주와 다른 한편으로는 드러남이 동등한 수준에서 성립되어야만 하는 일종의 ‘제삼자’가 있어야만 할” (KrV, B 177 / A 138) 것이라는 가정을 수반한다. 그럼에도 Kant는 이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는 일련의 ‘무지론적인 입장’을 따라 전개하고자 한다: “이러한 우리 이성의 체계화는 ‘드러남’을 바라보는 관점과 그 단순한 형식과 관련하여 우리 영혼의 심원 속에 자리하는 하나의 ‘숨겨진 예술’이며, 그로써 그 참된 파악은 저 자연에다 어렵게나마 언젠가 밝히도록 내맡겨야 한다” (KrV, B 180f. / A 141).
이 같은 ‘무지론적인 입장’이 Kant의 ‘도덕철학’ 안에서도 등장한다. 예컨대 도덕원칙을 적용하는 마당에서 ‘(사물과의) 접촉문제’가 제기될 때 말이다. 이에 Kant는 “순수이성이 어떻게 실천적일 수 있을지를 설명하는 일, 그에 대해 우리 인간이성은 완전히 무능력하며, 이와 관련하여 그 어떤 설명을 추구하는 모든 수고와 시도가 마침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GMS, BA 125)고 선언한다. 달리 말해, 정언적 명령의 전제조건으로 제시되는 ‘자유’ 개념이 “그 자체로 어떻게 가능한지는 우리의 이성능력을 통해서는 더 이상 밝혀질 수 없다” (GMS, BA 124)는 것이다. 이것은 곧 Kant에게 있어서 “우리의 이론적인 이성활용의 전체적인 상황에 직면하여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현사실적인 처지” (KpV, A 74)를 그저 시인해야 함을 가리키며, “인간이성과 관련하여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는 하나의 문제거리” (KpV, A 129)로 간주해야 함을 뜻한다.
이러한 태도는 일찍이 Descartes의 학문적인 태도에서 비롯하였으니, Kant 역시 이 유산과 관련하여 “생각하는 것과 연장되어진 것 사이의 공통적인 유대”에 대한 ‘좋지못한 질문’ (참고로 KrV, A 392)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연구에 대한 관심을 따돌린다. 이는 Kant가 앞서서 ‘감각적인 것’과 ‘이성’을 두고 “우리 인식의 두 개의 큰 줄기”라 소개함으로써 ‘고려해봄직한’ 두 가지 源泉‘을 잠깐이나마 염두에 두었지만, 이내 유보적인 태도로 주저앉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Kant는 이 두 가지 원천이 “아마도 하나의 공통적인 유대를 맺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는 뿌리에서 출발하였다” (KrV, B 29 / A 15)고 하면서 그에 대한 계속적인 연구를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저 공통적인 유대로서의 뿌리에 관한) 물음에 답하는 일은 그 어떤 인간에게도 가능하지 않으며, 사람들은 이같은 지식의 공백을 결코 충족시킬 수 없다” (KrV, A 393)고 단정한 것이다.

2.2.2. ‘전체성’을 통한 화해개념의 결여

그럼에도 한편 ‘이론적인 이성’과 ‘실천적인 이성’ 사이에서의 ‘유대’를 추구하는 ― 왜냐하면 이 유대관계가 그 자신의 두 가지 철학적 입장을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 이끌어준다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KU, BA XX) ― 의 도입부에서 Kant는 그럼에도 Descartes의 ‘정신’과 ‘자연’에 관한 이원론적인 생각에 대해 비판없이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나름대로의 근거를 마련하는 일을 등한시 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Kant는 그로부터 서로 연관되어있어야 할 것들 사이에서의 “무시할 수 없는 틈” (KU, BA XIX)을 단순히 답습하는 인상을 심어준다. 곧 ‘이성’은 Kant에게 있어서 한편으로 ‘대자연을 위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 ‘인간자유를 위해서도’ 공히 선험적으로 제시되어야만 하고, 이렇게 공통적으로 제시된 규범적인 의미로서의 이성은 그러나 “(인간의 자유와 대자연이) 서로 주고받는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 감각적인 것과 초감각적인 것을 분리시켜야 한다는 커다란 틈[대원칙]을 통하여 서로로부터 완전히 구분되어졌으니, 자유개념은 자연에 관한 이론적인 인식에 아무 것도 규정하지 못하고, 다른 한편 자연개념은 또한 자유의 실천적인 규범에 아무 것도 규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의 영역에서 다른 영역에로 넘어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KU, B LIII f. / A LI f.)는 입장을 그대로 고수하였기 때문이다. 이같이 ‘(이성과 자연 사이의) 유대관계와 관련된 난관’은 바로 여기 에서 무엇보다도 심각하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의 의도대로 실상 ‘심미적인 의미에서의 판단능력’에는 ‘자연과 관련된 이론적인 이성’과 ‘자유와 관련된 실천적인 이성’이 동시에 고려되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Kant는 과연 이 작품에서 자신의 철학을 총망라하고자 뜻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 나는 나의 전체 비판적인 생각을 완결시키고자 한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순리적인 것에 치중할 것이다. ... 내 나이에 걸맞은 이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KU, BA X).
우리는 여기서 잠깐 Kant 자신이 그러면 ‘자신의 전체철학’을 어떤 표현양식(개념)을 통하여 추구하였는지 되새겨보도록 하자. 과연 그는 ‘인간이 지니는 기분(Gemüt)의 全體的인 능력’에 관하여, 다시 말해 ‘認識능력, 즐거움과 즐겁지 못함에 따른 感情 그리고 행위하고자 하는 意慾’ 전반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설명하고자 애썼다: “영혼의 모든 능력 혹은 잠재력은 ... 다음의 세 가지 점에서 (포괄적으로) 밝혀질 수 있겠는데, 이 세 가지는 저들의 공통적인 유대로서의 한 근거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다” (KU, BA XXII). 한편 이 ‘기분’의 세 가지 능력을 Kant가 자신의 대표적인 작품 하나 하나에다 적용하였던 것은 그의 남다른 애독자 Johann Nicolas Tetens의 자극에 의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실상 그에 앞서 Kant는 비록 “언제나 오로지 하나이며 동일한 이성이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선험적으로 판단한다는 원칙” (KpV, A 218)에 대해 운운하면서도, 이 ‘하나의 이성’이 실상 내적으로 어떤 전체적인 구조를 띠고 전개되는지에 관한 연구에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이는 그의 여러 가지 시도 속에서 제기되는 말마디를 통해서도 확인될 수 있다. 예컨대, “인식능력을 위해서는 오로지 이성 하나만이 규범적으로 주어졌다”고 하거나 “이 (인식)능력에 (또 다른) 의욕과 관련된 능력이 뒤섞여있지 않다” (KU, B XXIII)고 하거나 혹은 “즐거움과 즐겁지 못함에 관한 우리의 감정은 저 의욕과 (아예) 무관하다” (KU, BA III)고 하거나 혹은 “우리의 의욕을 위해서 (역시) ... 오로지 이성 하나만이 ... 선험적으로 또 규범적으로 제시되었다” (KU, B XXIV)고 단정하거나 혹은 “이성은 자연으로부터 유래하는 의지와는 완전히 결렬되어 있다” (KU, BA XV)는 생각이 바로 Kant의 특별히 고립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마침내 ‘趣向에 관련한 우리의 판단’ (Geschmacks- urteil)이란 “더 이상 (이론적이든, 실천적이든) 우리의 인식판단과 무관하다” (KU, BA 14)는 데에까지 다다름으로써 ‘느낌’과 ‘의지’와 ‘이성’을 완전히 결렬시키고 만다.
이 세 가지 ‘기분능력’ ― 곧 ‘인식’, ‘의지’, ‘감정’ ― 은 그리하여 Kant에게서 서로간의 유대와는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또 나아가 서로 대립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태도는 ‘전체철학’을 총망라하려는 그의 노력에 ‘고통’을 주었을 것이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서로 개별적으로만 관찰된 이 같은 세 가지 ‘기분능력’은 그저 저마다의 가치매김 아래 단순히 ‘형식적으로 곁에 나란히 배열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오히려 그 세 가지 구별된 능력이란 실제 ‘한 영혼’의 능력이요, 그런 점에서 ‘하나의 영혼’ 안에서 관찰되는 ‘내적으로 서로 연관된 세 가지 측면’임에 유의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2.2.3. ‘감각’에 대한 불신

지금까지 우리가 바라본 Kant의 기본적인 태도에 관한 몇 가지 관찰은 그가 ‘실제하는 사물에 관하여 우리의 이성이 갖는 실제적인 관련성’을 보다 근본적으로 분석해내지 못한 까닭에, 비록 그가 내심으로는 부단히 의도했건만 자신의 ‘철학’을 전체적으로 유감없이 제시할 수 없었다는 점을 이해하게끔 이끈다. 이는 뚜렷이 Kant 자신이 ‘감각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어떻게 서로 관련을 맺고 있는지에 관하여 더 이상 해결할 수 없고 단지 ‘수수께끼’로만 내몰았던 데에 연유하며, 이러한 점에서 L. Kreimendahl은 Kant를 두고 “창문을 잃어버린 철학자”라 비유하고 있다. 실상 이같은 Kant의 ‘고립주의적이며 일방적인 태도’를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글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인식과정에 있어서 우리는 “오로지 우리의 상상으로만 일삼는다. 반면에 물 자체가 어떻게 존재할지에 대해서는 온전히 우리의 인식영역 바깥에 자리한다” (KrV, B 235 / A 190). 혹은 “우리가 ‘대자연’이라고 부르는 ‘드러남’에 있어서 ... 질서와 규칙을 실상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끌어내고 있으니,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그들 드러남을 발견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달리 말해 우리는 우리 기분을 (저 대자연 안에다) 원천적으로 심어놓았다” (KrV, A 125).
이것은 엄연히 ‘우리의 인식이 存在하는 사물로부터 이미 감각적으로 수용된 사실에 근거한다’는 점을 도외시하는 가운데, 그저 우리 이성의 독자적인 자율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사고방식이다. 이같은 태도로 말미암아, 곧 Descartes의 분리적인 관점에 근거하여 ’형상없는 감각내용‘과 ’내용없는 개념형식‘의 근본적인 결렬에 동의함으로 말미암아 탄탈로스적인 아픔이 Kant에게서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심각해졌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태도에서 비롯하는 Kant의 독특한 ‘심미적 판단’을 발견하게 된다. 곧 ‘하나의 순수 심미적 판단’은 예를 들어 “그 어떤 자극이나 접촉을 통해서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KU, BA 38)는 그의 독특한 입장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내가 바라보는 장미를 두고, 나는 (나의) 심미적인 판단(만)을 통하여 그것이 ‘아름답다’고 설명하고 있다” (KU, BA 24)고 주장한다.
이것은 아마도 Kant의 ‘자연사물’에 관한 不信과도 관계가 깊다. 일찍이 30세의 Kant는 그가 자주 찾았던 어떤 주점의 방명록에다 이렇게 쓰고 있다: “위대한 신사들, 아름다운 부인들, 그들은 서로 만나 즐거워하지만, 그럼에도 서로 믿기는 어렵다네”. Kant는 물론 (Schopenhauer처럼) 드러내놓고 여자들을 경멸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두 번의 약혼은 그를 행복으로 이끌지 못했으니, 이는 그가 결혼을 약속한 여인들이 Kant가 마침내 결혼을 결정하였을 때는 이미 다른 이들과의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에 Kant는 자신의 미완성적인 異性 간의 정열을 ‘형이상학적인 학문연구’에 바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아가 그러한 인간적인 사랑 속에 경험되는 불완전함을 넘어서 형이상학의 완전함에로, 다시 말해 이상적으로나마 ‘Happy end’를 다른 한편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우리는 Kant의 ‘탄탈로스적인 아픔’이 어쩌면 긍정적인 관점에서 일찍이 Platon 역시 추구하였던 열정, 자신의 불완전함을 극복하려는 Eros, 곧 ‘전체성을 향한 애닮음’에 또한 비유될 수 있다고 내다본다.



2.3. 치유 (아픔의 해소)
2.3.1. ‘이성의 자율성(Autonomie)’에서 ‘존재의 전체성(Ontonomie)’에로

Kant는 자신의 철학의 전체적인 조화로움을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선험적으로 판단하는 이성’의 고집적인 ‘자기폐쇄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까닭에, ‘탄탈로스적인 아픔’을 피할 수 없었다고 이해된다. Kant 역시 이미 의 도입부분에서 암시하듯, 만일 이성의 판단력이 ‘(자체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反省하는 차원에서 진행된다’는 생각이 완전히 무시되지 않았다면, ‘외부세계’에로의 “(자가)치유를 위한” 작은 빛이 열려 있는 셈이다. 분명 거기서 ‘자연의 규범에 대한 反省’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Kant는 “자연에 따라서! 곧 이것은 우리가 하나의 개념을 자연에다 이입하듯 관찰하는 의미에서의 ... 조건들에 따라서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KU, B XXVII / A XXV).
이 말을 바꾸어 표현하면, 진정 우리 주위에 제시된 ‘자연’은 확실히 고유한 잠재력과 생명력을 따라 벌어지고 있으니, 그런 자연을 향하여 자신을 열고 나아가는 인식주체에게 단순히 피동적인 차원에서 그 인식주체에 의해 그때마다 규정되기만 하는 물질성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능동적인 차원에서 ‘자신을 제공하는 (in-formierend)’ 가운데 인식주체의 실제 ‘앎의 수준’을 내용적으로 채워준다는 의미를 가리킬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 어쩌면 Kant가 한동안 잊었던 ― (자연과 인간이성의) ‘대화적인’ (dialogisch) 상호교류를 발견하면서 이를 통하여 Kant의 폐쇄적인 측면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Kant 또한 실제 그런 ‘대화적인 아쉬움’을 느꼈던 것으로 이해되는데, 그가 63세 이후로 집 안에서만 활동하였지만, 아마도 그런 폐쇄적인 삶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의 점심식사 때에는 여러 손님들을 집으로 초청하였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안에서도 그는 “만일 누군가가 자신의 판단 안에만 사로잡힌다면, 그는 진정으로 보다 나은 삶에로의 진보를 스스로 강탈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위의 책, BA 8). 이러한 대화적인 노력은 분명 뜻깊은 일이며, 이는 우리로 하여금 다름 아닌 ‘삶의 세계’를 그저 선험적으로 판단해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를 향하여 자신을 開放하고 ‘감각적인 것’들을 직접 마주하도록 이끈다. 이러한 ‘실제 생명력이 넘치는 세계’는 물론 우리의 ‘인식행위’와 뚜렷이 區別되지만, 결코 分離된 채 따로 떨어져 存在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생명의 세계’와 ‘인식하는 이성’ 모두가 하나의 존재바탕 위에 서있기 때문이다.
다시 설명하자면, 만일 인간이 스스로 마주한 실제세계를 두고 선험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세계가 자신에게 수용되어졌다는 사실과 함께 ‘(사물의) 감수성’을 인정한다면, 이제 자극하는 세계사물들에 대한 내면적이고 내용적인 접근이 필요하고 또 가능하다고 보아진다. 왜냐하면 사물 자체가 ― 비록 Kant에게서 ‘어두움’ 속에 감추어져 있는 무엇이라 하더라도 ― 인식하는 (이성적) 주체와는 다른 무엇(타자)으로서 인정되면서 동시에 그로써 ― 타자로 발견되는 한에서 ― 인식 주체에게 ‘감수성을 따라 자신을 제공하는 무엇’임이 능히 고려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신을 제공하는 무엇’이라는 사실과 관련하여 우리는 과연 Aristoteles의 말을 따라 ‘존재하는 한에서 우리는 존재하는 세계를 인식하는 이성과 더불어 그 진리(일치)여부를 판단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와 이성’, ‘실제와 이론’, 혹은 ‘사물과 정신’이란 상호 대립적이듯 파악되는 두 요소를 다시금 ‘존재론적인 토대’ 위에서 연관지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존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무엇’으로서 그 ‘내용’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이를 일컬어, 1) ‘내존재’ (In-sistenz)적 성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이는 정신에 앞서 존재하는 것으로서 우선 ‘수용’되어져야 할 ‘존재의 자체감정’을 가리킨다. 또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무엇으로서의 무엇’이라고 표현되어지는데, 우리는 이를 일컬어, 2) ‘외존재’ (Ek-sistenz)적 성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이는 정신적으로 개념화될 수 있는 ‘자기윤곽’ 내지 ‘자기표현’의 가능성을 가리킨다. 이제 그로써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무엇이자 동시에 그 개념화된 무엇 사이에서 부단히 일치를 문제삼고 해결하기를 꾀한다’고 보는 데, 우리는 이를 일컬어, 3) ‘합존재’ (Kon-sistenz)적 성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이는 지적으로 밝혀진 사물 내지 사실의 내용의 구체적인 실현 및 완성을 위한 자발적인 자극으로서 ‘자기실현’이라는 행위양식으로 소개될 수 있다. 이 세 번째 요소는 스스로 생명력을 가진 존재의 실존적 의지적 측면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세 가지 “내-외-합존재” (In-Ek-Kon-sistenz)적 성격을 통하여 ‘전체로서의 존재’가 어느 한 측면만을 따라서가 아니라, 종합적으로 소개될 수 있다. 이로써 의도하는 바는, 다시금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설명하자면, Kant의 ‘理性이 가지고 있는 자율성 (Auto-nomie)’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전체성 (Onto-nomie)’에로 나아감으로써 실제세계와의 구별을 인정하면서도 그 관계성을 잃지 않는 온전한 앎에 다다를 수 있도록 고무시킨다는 사실이다. 존재의 이 세 가지 근원적인 요소는 결코 어느 하나가 다른 두 가지를 대신할 수 없다. 그들 세 가지 요소는 제각기 고유한 측면을 따라 독보적이지만, 그럼에도 함께 ‘하나의 전체로서 존재’를 구성한다는 것이 이 도식의 중요한 의미이다. 이 도식이 무엇보다도 강조하는 바는 어느 한 가지 요소가 다른 두 가지 요소와 무관하게 있을 수 없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다시 말해 첫 번째 요소로서 ‘내적으로 (함축적으로) 머물러 있는 미학 (Äs- thetik) 내지 자연학 (Physik)’이란 그 자체로 ‘우두커니 머물러 있다면’, 아직 ‘온전한 존재’로서 이해될 수 없고, 이를 관찰하는 정신에 대하여 스스로를 개방하고 마주해야 한다는 원칙을 전해준다. ‘아름다움 및 실재하는 자연’은 그러므로 ‘관찰 및 발견되는 일’과 무관할 수 없다. 두 번째 요소로서 ‘외적으로 드러내는 논리학 (Logik)’이란 이론적인 표현을 통하여 사물 내지 사실을 수용하는 정신으로 하여금 ‘인상착의’를 再現해내고 있음을 전해주며, 이는 결코 ‘정신의 산물로만 취급될 수 없는 포착된 사실내용’과의 연관성을 전제한다. 세 번째 요소로서 ‘합존재적인 윤리학 (Ethik)’이란 실천적인 측면에서 존재를 구현하며 완성시키는 의지를 전해주는데, 이는 앞선 두 가지 요소의 완전한 일치를 회복하는 일에 몰두함으로써 참다운 존재로서의 실현에 다가감을 소개한다.

2.3.2. Kant의 학문적 태도에 따른 문제점의 해결방안

우리는 앞서 잠시 언급하였지만, ‘미학 (Ästhetik)’은 ‘자연학 (Physik)’과 일치한다. 왜냐하면 자연학은 자연적인 사물 내지 사실 자체의 최초 수용과 관련되어 있기에 아직 ‘인위적인 요소’가 배제되어 있는 한에서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논리학’은 Kant에게서 가장 중요한 기초로 등장하면서 다른 학문에 앞서 제시되어야 한다지만, 실상 그것은 ‘구체적인 실제 및 경험세계’ 안에서 그때마다 질문되어져야 하듯, 도대체 하나의 존재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τὶ ἐστιν)하는 물음을 낳게 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내용없는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내용을 이미 전제하고 그것을 지향하고 있는 입장에서 이를 밝히려는, 곧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끔 표현해내는 학문적인 태도’라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하는 소크라테스적인 물음은 일찍이 ‘내용으로서의 사실적 존재’를 전제하고 그것을 밝혀나가는 일에 초점을 두었는데, 이는 Aristoteles에게서 또한 ‘삼단논법 (Syllogismen)의 원칙’으로서 다루어졌고, ‘진리탐구를 위한 논리학의 기본원칙’으로서 제시되었다. 그것은 곧 ‘논리학’ 자체가 참됨을 내용적으로 결정하는 독자적인 학문으로서가 아니라, 존재를 규명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방법적인 학문이라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이와 동일한 관점에서 ‘윤리학’ 역시 학문의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Kant에게서 등장하는 이분법, 곧 ‘존재’와 ‘당위’의 구분 내지는 더 나아가 ‘호기심’과 ‘의무’의 구분은 ‘물질적인 삶의 세계’와 ‘형식적인 도덕원칙’이 서로 대립하는 상황에서 발생하는데, 실상 이 도덕원칙은 물질적인 삶의 세계 안에 조화롭게 적용되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그 對立이 지양될 수 있을 것이다. ‘삶을 구현하는 실제세계’의 전체적인 맥락을 뒤로하고, 그 세계의 ‘외부로부터’ 부과된 ‘규범’이란 과연 의미롭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의식 내지 이성이 ‘세계’를 파악하고 구별하는 일은 우리가 감각적으로 수용한 ‘세계’를 물질로부터 정신적으로, 외부로부터 내적으로 분별하는 데 (타자화하는 데)에서 비롯한 것일 뿐, 존재의 전체성 위에서는 ‘하나’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기본적인 입장에서 Kant 스스로가 야심을 가지고 제시한 ‘세 가지 기분능력’에 관한 설명이 과연 종합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 살펴볼 만 하다고 본다. 다시 말해 ‘존재의 세 가지 근본요소’로서 ‘내존재, 외존재, 합존재’의 형식은 곧 ‘있음’과 ‘앎’과 ‘삶’이라는 세 가지 존재질서로 풀이된다고 볼 때, 이른 바 ‘내가 있고 (존재)’, ‘내가 알고(인식)’, ‘내가 원하는(의지)’ 가운데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지만, 실제 ‘느끼고, 인식하고, 의지하는 나’는 그러나 ‘하나된 존재’ 안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과연 Kant에게서 실제 어떻게 소개되느냐는 것이다. Kant 역시 이 점을 고려하여 의 도입부 (B LVIII / A LVI)에서 다음과 같이 나름대로 종합적인 안목을 제시하자 애쓰고 있다:
‘기분’의 종합적인 능력 인식능력선험적인 원칙적용의 대상인지능력
(Erkenntinsvermögen)오성
(Verstand)규범성
(Gesetzmäßig-keit)자연
(Natur)즐거움과 즐겁지 못함의 기분 (Gefühl der Lust und Unlust)판단력
(Urteilskraft)합목적성
(Zweckmäßig-keit)예술
(Kunst)의욕 및 실천
(Begehrungs-
vermögen)이성
(Vernunft)궁극목표
(Endzweck)자유
(Freiheit)
Kant는 를 전개시키는 중에도 ‘미학’을 ‘논리학’ 앞에 다루고, 미학적인 행위의 우선함을 특별한 방식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분명 “감정”이란 존재론적으로 가장 먼저 그리고 기초적인 존재요소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첫 번째 기초적인 “감정”에 근거하여 “인식”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감정을 통해 느낀 주체가 느꼈던 바를 표현해내는 것이 곧 인식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감정”과 “인식”에서 마침내 “의지”가, 곧 인간이 자신의 감정과 인식을 다시금 자유로이 구현하는 행위가 뒤따른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Kant의 개념나열 속에서 충분히 발견할 수 있고, 위 표에서는 왼쪽 첫 번째 칸(‘기분’의 종합적인 능력) 아래 정렬시켜 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각 줄에 표기된 ‘인식능력’, ‘즐거움과 즐겁지 못함의 기분’, 그리고 ‘의욕 및 실천’이라고 하는 세 가지 존재요소가 각각 오른쪽 선을 따라 이해된다면, ‘인식’이 ‘오성’을 통해 그리고 ‘규범성’을 그 원칙적인 내용으로 다루고 있음을, ‘기분감정’이 ‘판단’을 통해 ‘합목적성’을 꾀하고 있음을, ‘의욕’이 ‘이성’을 통해 ‘궁극목표’를 끊임없이 지향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Kant의 이같은 견해에 다소 불분명한 부분이 있음을 보게된다. 예컨대 그에게서 ‘미학’이 선재하는 ‘실제세계’로서의 ‘자연학’과 이를 다시금 적용하려는 단계에서의 ‘실천적인 윤리학’ 사이에서 ‘중복 적용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의 의도 속에 함축된 주된 사실은 ‘인간 주체성의 (선험적인 이성을 소유한) 원칙’을 가장 앞세운 그이긴 하지만 그 역시 인간행위의 다양한 측면들, 예컨대 ‘인식’과 ‘느낌’과 ‘의지’를 綜合的으로 밝히고자 애쓰고 있다는 점이다. 좀 더 나아가 세 번째 칸에서 제시된 세 가지 서술 가운데 ‘합목적성’과 ‘궁극목표’를 우리의 입장에서 보다 명확하게 구별한다고 할 때, 우리는 이것을 다시금 ‘규범성’과 더불어 ‘내용성’과 ‘합목적성’으로 새롭게 배열하는 것이 옳을 것이며, 이것은 다시금 ‘객관적인 대상에 근거하여 세 가지 요소’가 종합적으로 소개되어야 함을 가리킨다. 그로써 네 번째 칸에서 제시된 ‘자연’과 ‘예술’은 실제 하나로 통합되고, 새로이 ‘자연’, ‘이성’, ‘자유’라는 세 존재요소로 정리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하여 우리는 Kant의 의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가운데 위 도식을 새롭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컨대,
Kant의 세 비판서주체적 삼 요소객체적 삼 요소학문의 종합적 분류KU느낌
(Fühlen / Sein)내용성
(Inhaltlichkeit)자연학 (Physik)KrV인식
(Erkennen)규범성
(Gesetzmäßigkeit)논리학 (Logik)KpV의지
(Wollen)합목적성
(Endzweck)윤리학 (Ethik)
만일 누군가가 이러한 도식을 통하여 Kant의 생각을 크게 와전시켰다고 말한다면, 여기서 다음의 세 가지 점을 그 근거로 보충하고 싶다.
1. Kant는 이와 같은 세밀한 전개구조가 “사실 내지 사물의 자연본성 안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그의 의 도입부의 말미에서 설명하고 있다 (B LVIII / A LV).
2. Kant는 일찍이 “순수이성능력에 관한 전체적이고 통일적인 시각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작업을 계속할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KpV, A 162). 그는 철학적인 여러 영역을 구분하여 말하면서도 마침내 완전한 하나의 체계를 소개하려는 데 노력하였으니, “전체에 관한 생각을 올바르게 제시하기 위해, 또 저마다의 부분적인 영역을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성 안에서 파악하여 전체에 관련한 개념을 도출함으로써 순수이성능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 위해” (KpV, A 18) 줄곧 시도하였다. 다만 그는 ‘세 가지 부분적인 영역이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성’에 대해 말하고 있으나, 그것을 ‘그저 나란히’(Nebeneinander), 곧 평면적인 차원에서 형식적으로만 配列하는 가운데 그만 심층적인 차원에서의 ‘내적인 연관성’을 깊이 있게 설명하지 못한 까닭에 급기야는 ‘탄탈로스적인 아픔’에 처하게 되었다고 본다.
3. 만일 Kant가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상위범주에 자리하는 기분능력’에 관하여 존재적인 측면에서 상호연관성을 고뇌하지 않았었다면, 1799년 8월 7일 Fichte의 연구방식과 연관지어 해명하는 중에 Fichte의 책망, 곧 “Kant는 자신의 ‘선험철학’ (Transcendental Philosophie)의 단순한 예비지식을 소개하려 할 뿐, 그 철학 자체의 ‘(전체적인) 체계’를 전하려고는 하지 않았다”는 반론을 맞아 그토록 거칠고 냉담하게 반응할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2.3.3. 전인적인 인간의 세 요소로서 ‘느낌’ (πάθος), ‘생각’ (λόγος) 그리고 ‘의욕’ (ἦθος)의 재고

앞서 살펴본 인간의 삶에 관련한 세 가지 근원적인 요소는 단순히 형식적인 측면에서 우연적인 연관성을 따라 이해되어서는 않되고, 오히려 하나의 ‘살아있는 내적인 구조적 관계’를 통해 필연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세 가지 기본요소는 저마다 고유한 존재양식을 따라 서로 구별되지만, 그럼에도 동시에 ‘인간존재의 삶’을 구현하는 데에 하나로 동참한다. 이는 우리의 실생활 안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되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느낌’을 지니고 ‘생각’하며, 또 그때마다 자신을 성숙시키고자 ‘행위’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인간존재의 근본적인 요소는 인간 각자를 저마다 두드러지게 특징짓는 ‘전형적인 토대’로 소개될 수도 있다. 예컨대 ‘느낌이 보다 더 강한 情的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생각이 보다 월등한 知的인 사람’이 있고, 혹은 ‘의지가 무엇보다도 강한 意志적인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요소 하나하나에 분명 ‘장점’으로서 고유한 의미 내지 긍정적인 내용이 담겨져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느낌이 강한 사람’에게서는 ‘보다 뛰어난 감수성’을, ‘생각이 탁월한 사람’에게서는 ‘명쾌한 분별력’을, 그리고 ‘의지가 강한 사람’에게서는 ‘불굴의 투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세 가지 인간존재의 근본적인 요소를 그러면 우리가 ‘하나의 존재론’ 안으로 엮어 소개한다 할 때, 이것이 굳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하나의 인간’, ‘하나의 삶’이 제시하는 인간 각자의 삶에 대해서 우리가 말하고, 또한 그런 개별적인 삶 및 존재의 권리와 책임에 대해 말할 때마다 그의 ‘느낌, 인식, 의지’에 대해서 우리가 전체적으로 고려하고 있는 것처럼, ― 우리가 한 인간존재를 고려함에 있어서 이 세 가지 요소 가운데 어느 것 하나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한다면, 이내 인간존재에 대한 불충분한 해명이라고 지적할 것이다 ― 이 세 가지는 그렇게 ‘하나의 삶’에 함께 관여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 이 세 가지 요소가 그저 형식적인 측면에서 ‘나란히’ 관찰되고, 그래서 단순히 우연적으로 배열되어지는 것으로 족하다는 경험을 넘어서게 한다. 오히려 ‘하나의 인간존재’를 형성하는 요소들로 파악되는 가운데 ‘서로 내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관점을 지지한다. 곧 ‘느낌은 인식에 자료(내용)를 제공하고, 그 인식과 더불어 행위를 수반하도록 이끌며, 다른 한편 인식은 느낌을 그때마다 소중히 하면서도 그와 거리를 두고 분별하는 가운데 올바른 느낌, 바람직한 의지적 행위선택을 고무시킨다. 의지적 행위 역시 다시금 느낌과 인식을 위한 단순한 동기부여를 넘어 느낌과 인식의 일치를 구현하는 한에서 이 세 가지 요소는 서로를 전제하고 서로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한 인간존재의 삶이란 그런 의미에서 이 세 가지 요소가 한 인격체 안에서 지우침 없이 어느 만큼 ‘실제적으로 또 조화롭게’ 엮어져 있느냐는 데에 있을 것이다.
인간은 과연 이 모든 요소를 타고났다. 그것은 ‘인간존재’가 갖는 자연적인 본성이며, 아마도 이 때문에 우리는 모든 인간에 대하여 ‘존엄성’과 함께 ‘자유’와 ‘잠재적인 능력의 실현’을 기대하며 또 보장할 수 있다고 여긴다. ‘존재’ 자체가 이미 ‘이성’을 배태하고 있으며, 그로써 그의 ‘실현의지’를 본성적으로 수행한다는 것이다. ‘존재(내용)’와 ‘이성’ 그리고 ‘의지’가 하나의 ‘실체’라는 사실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전통적인 철학적 해석이며, 우리는 이같은 사실을 특히 고대 후기의 ‘신플라톤주의’ 및 ‘중세철학’ 안에서 파악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인간존재에 관한 ‘삼위일체적인 해석’이 이제 근대사상에서 ‘존재망각’으로 인해 오해된 이원론적인 해석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3. Kant의 태도를 통해서 바라본 철학의 과제: ‘조화’
― ‘양자택일’이 아닌 ‘양자택이’로서의 ‘철학의 최고과제’

‘존재해명에 관한 학문의 전체성’을 위해 Kant가 정녕 고뇌하였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가 그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최소한 그 방향을 이제 좀 더 분명하게 모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과연 오늘날의 철학이 짊져야 하는 ‘과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Kant의 남다른 노력과 고뇌를 따라 그가 시도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향’을 다시금 역전시키는 의미에서의 ‘고대철학적인 전통’에로 넘어갈 필요는 없으며, 그런 의도에서 ‘보수주의적인 입장’을 회복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Kant의 비판철학이 제시하는 과거전통의 ‘구태의연함’에 대하여, 다시 말해 ‘존재하는 세계에 대하여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이성적인 주체를 소홀히 여겼던 점’에 대하여, 혹은 ‘완전한 신적 존재에 근거한다는 믿음을 통하여 인간의 자유를 상대적으로 무시하였던 점’에 대하여 편중된 생각들의 역사적인 오류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 앞서 말한 ‘이 두 가지 현사실성 (존재와 이성)’이 서로 구별되지만, 서로 分離된 관점에서 뿔뿔이 소개되어서는 않된다는 원칙을 따라 ‘철학의 과제’를 재검토하자는 것이다. Kant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향’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 ‘우리의 인식’이 단순히 ‘사물의 대상’에 따라 결정되어진다는 사실에서 오히려 ‘사물의 대상’이 ‘우리의 인식’에 의하여 결정되어진다는 사실에로의 전향을 가리킨다 (참고로 KrV, B XVI). 과거 전통적인 철학적 방법에 비하여 ‘관념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Kant의 이 태도에 대해 N. Hartmann은 다소 지나친 반응을 보인 것 또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는 Kant의 생각이 관념주의적이라는 점을 비판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이제 “불합리한 것들의 보다 큰 영역 안으로 합리적인 것들을 전적으로 함축시키는 일이 필요하다”고 함으로써 다시금 ‘고전적인 자연관’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상대적으로 일방적일 수 있는 비판에 머물지 않도록 Kant의 ‘양자택일’적인 구분을 ‘양자택이’적인 유대관계에로 개선시켜야 옳을 것이다. 다시 말해 ‘물 자체’와 ‘이성’의 구별과 그 상이성을 고려하여 Kant는 예컨대 “(우리의) 想像들과 (저 사물의) 對象들이 상응하도록 이끌기 위해서는 오로지 두 가지 가능성이 남아있다: 곧 對象이 想像을 실현하든, 아니면 想像이 對象을 구현하든 하는 것이다” (KrV, B 124f. / A 92). 이와 유사한 내용으로 Kant는 이렇게도 말한다: “(인간의) 경험가능성의 원칙과 자연의 잠재력에 관련한 규범이 ... 서로 일치하는 일은 오로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능성에서 발견된다: 곧 그 규범들이 경험을 수단으로 자연으로부터 빌어 사용된 경우, 아니면 거꾸로 자연이 경험가능성의 원칙들로부터 도대체 유도되어지는 경우이다” (Prol. § 36, A 112). 이미 보아온 것처럼 Kant는 ‘선험적인 이성’을 근거로 여기서 후자의 경우를 선택하였고, 전자의 경우를 포기하였다.
아무튼 이러한 경향을 우리는 우리의 철학사 안에서 드물지 않게 발견하게 된다. 곧 한쪽만을 상대적으로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다른 한쪽을 아예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는 학문적인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사물 자체에 대한 우리 경험의 막연함 내지 상대성’을 근거로 ‘사물’을 ‘이성’ 다음에다 부차적으로만 적용하려 하는 ‘관념주의’나 혹은 ‘인간이성의 자유분방함 내지 추상 및 환상에로의 위험성’을 근거로 ‘합리성’을 포기하고 ‘감정 및 자연주의’에로 나아가는 경향을 우리의 역사 안에서 마주치게 된다. 이러한 불일치 내지 부조화는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제 (최소한 ‘中庸’의 입장을 기억하면서) 그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참됨’을 발견하고자 애쓴다면 해결될 수 있으리라 본다. 다시 말해 ‘자신을 傳達하는 사물’ (das sich in-formierende Ding)과 ‘이를 受用하는 인식의 주체’ (das dieses empfangende Subjekt)의 공동협력적인 관점에서 두 가지가 함께 관계하는 ‘참됨’이 밝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Aristoteles는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감각적인 대상의 실제성 (Wirklichkeit)과 (우리) 감각기관의 그것은 하나요 동일한데, 다만 그 존재방식에 따라 서로 다를 뿐이다”. 또한 그는 이를 우리의 ‘청각현상’과 관련하여 이해를 돕고 있다: “들을 수 있는 자가 듣기 위해 애쓰고 또한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 실제 소리를 낼 때, 비로소 ‘들음’과 ‘소리를 냄’이 동시에 實現된다”. 이와 같은 ‘동시적이며 공동협력적인 영향력’에 의하여, 곧 ‘객체로서의 사물이 스스로를 드러냄’과 동시에 ‘주체로서의 인식이 이를 수용하는 일’이 실제적으로 벌어지고, 비로소 ‘사실의 참됨’이 확인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의 발언이 진정 ‘참된 명제’에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가 서로 맞물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과가 달다”는 발언이 참된 명제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사과를 맛보는” 구체적인 경험과 더불어 “사과가 과연 단 과일로서의 실제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혹은 “저 사물이 이렇게 혹은 저렇게 보인다”는 발언이 참된 명제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저 사물을 보는” 일과 “저 사물이 그렇게 보일 수 있는 가능성”과 일치될 경우인 것이다.

‘전체성 안에서의 이해’란 결국 “‘사물’과 ‘이성’ 사이의 하나된 조화로움” (Über-ein-stimmung, 곧 희랍어로 ἁρμονία)을 겨냥하고 있다. 우리는 그러므로 이제 단원을 마감하는 이 자리에서 되돌아 볼 때, Kant의 ‘양자택일적인 태도’와 관련하여 그가 감각적인 요소와 정신적인 요소의 ‘조화’보다는 ‘이성의 선험성’을 우위에 두는 그의 선택으로 인해 그 “탄탈로스적인 아픔”을 피할 수 없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끝으로 우리가 앞서서 간단하게나마 비유적으로 살펴본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 Tantalos 역시 마침내 그가 저 Orpheus의 ‘조화로운 음악’을 경청함으로써 자신의 숙명적인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신화적인 해석은 미분화된 과학적 사고양식을 통해서나마 도대체 인간이 우주 대자연과 존재의 터전에서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그럼에도 Kant는 그런 ‘존재적’ 의미와 관계성을 자신의 철학 안에서 좀 더 근본적으로 따져 묻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Kant는 그 때문에 Leibniz의 ‘(존재의) 예정된 조화’ (prästabilierte Harmonie)에 관한 이론을 두고 단적으로 “아예 철학을 모조리 파악하고 있는 신비로운 우상”과 같다고 비난함으로써 더 이상 고려하지 않았다. 이것이 어쩌면 그로 하여금 그의 철학을 ‘그 어떤 강요된’ 調和로부터 해방시키고자 부추켰고, 그로써 그는 ‘탄탈로스적인 아픔’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과연 그의 ‘고통’은 ‘조화’를 忘却한 데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그 고통은 아마도 우리가 만일 저 Orpheus의 ‘조화로운 음악’을 Sokrates의 철학적인 방법과 함께 재해석한다면 능히 치유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다시 말해 Sokrates가 가르치고 있듯이, ‘시와 노래 등의 예술적인 작업’ (Musendienst: μουσικὴν ποιείν)이란 ‘조화에 터한 자연’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또 달리 ‘조화에로 접근하려는 인간’의 노력으로서 “영혼의 정화 혹은 수양” (τὴν αὑτού ψυχὴν θεραπεύειν)과도 직결되기에, 이 두 가지가 가장 탁월한 철학적인, 그리고 학문적인 과제로서 이해되며, 그로써 인간존재의 모든 고뇌에 찬 물음이 온전하게 해소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참 고 문 헌

(※ 를 위하여)
Kant's gesammelte Schriften (Hrsg. v. der Königlich Preußischen-Akademie der Wissenschaften. Bd. I-XII, Berlin 1922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