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현상학의 잠정성과 지속성

나뭇잎숨결 2020. 10. 23. 10:48

현상학의 잠정성과 지속성
- 하이데거와 메를로 뽕띠 論 -

송 석 랑*충남대


하이데거와 메를로 뽕띠의 현상학은 예술처럼 언어의 이중성을 갖지만, 예술과 달리 언어의 본질에 대한 '위반'과 '순응'의 숙명을 동시에 갖는다. 따라서 그들은 형이상학의 언어를 변형시켜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예술가와는 달리 형이상학의 땅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오히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형이상학속에 거주하면서도 그것에 속박당하지 않고, 더이상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닌 무엇을 말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 그들의 철학, 즉 현상학은 형이상학의 전통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형이상학을 벗어나고 있다는 '이중의 관계'를 형이상학과 맺고 있게 된다. 그러나 이 이중관계의 외적인 유사성은, 예술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그들 철학의 유사성이 그러한 것처럼, 언어와 이해의 추상성과 구체성이라는 본질적 차이에 상응하는 변별성을 그 내면에 깔고 있다. 메를로 뽕띠의 현상학은 하이데거의 현상학과 마찬가지로 "인간과 세계를 보다 더 잘이해하기 위하여 자연적 태도로부터 나오는 확신들을 중지시키는 '초월론적 철학'이지만, 그것은 또한 세계가 반성되기 이전에 양도할 수 없는 현존으로 '이미 거기에' 항상 존재한다고 여기는 철학이자, 그 세계와의 '직접적이고도 원초적인 접촉'을 되찾아 그것에 '철학적인 법규'를 부여하려는" 특성을 갖는다. 이러한 것은 "존재의 도래"를 체험하며, 존재가 증여하는 의미에 응답해가는 하이데거의 입장과 비교해 볼 때 '학으로서의 철학'에 대한 관점의 깊은 차이를 보여준다. 학으로서의 철학, 즉 형이상학을 예비적 혹은 잠정적으로 승인하고 있는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비해, 메를로 뽕띠의 현상학은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현실적인 것으로 끝까지 지켜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잠정성'과 '지속성'은 궁극적으로 존재의 인간에 대한 '자율성'과 '구속성'의 차이 즉, 이해의 '추상성'과 '구체성'에 상응하는 언어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 기인한다.




1. 프롤로그

형이상학 이전에 있는 의미를 형이상학이 사용했던 언어로써 이야기해야 한다는 모순을 예술이 수행하고 있는 '언어의 역설'을 통해 극복해 낸 하이데거와 메를로 뽕띠의 현상학은 예술과 마찬가지로 '침묵'과 '소리'의 이중성을 띠게 된다. 그러나 "예술가와는 달리 (창조적인)철학자들은 침묵의 경험 속에서 '이해하는 자신의 실존'과, 말하는 가운데 명료하게 '해명하는 자신의 실존' 사이에 놓인 간격을 연결해야 하는 과제를 갖고 있다." 그래서 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현상학은 '말하여진 것'과 '말하여진 것 속에서 여전히 말하여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 사이의 "틈새"(der Riss), 혹은 "빈터"(les creux d'espace) 로부터 지금껏 말하여지지 않은 존재의 의미를 예술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끌어 낸다.
하이데거와 메를로 뽕띠의 현상학은 예술처럼 언어의 이중성을 갖지만, 예술과 달리 언어의 본질에 대한 '위반'과 '순응'의 숙명을 동시에 갖는다. 이같은 것은 예컨대 "시의 본질을 시를 통해 써내려가는 휄더린"이나 '회화의 본질을 그림으로 그려내는 세잔느'에 비해, '철학자는 철학의 본질을 철학을 통해 이야기해야 한다'는 사실의 귀결이다. 철학의 본질을 철학을 통해 이야기하는 그들은 어떤 새로운 철학이 이미 실현된 미래를 살았던 것이 아니라, 끝나지 않은 형이상학의 시대를 살았다는 사실에 주목하면 그러한 귀결은 더욱 분명해진다. 따라서 그들은 형이상학의 언어를 변형시켜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예술가와는 달리 형이상학의 땅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오히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형이상학속에 거주하면서도 그것에 속박당하지 않고, 더이상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닌 무엇을 말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
예술로 환원되지 않는 한 그들의 현상학은, 마치 닮음과 차이의 이중관계를 예술과 맺는 것처럼, 극복과 양립의 이중관계를 형이상학과 유지하게 된다. 그리고 이 이중관계는 그들의 현상학이 말하는 "이해"와 "언어"에 대한 본질적 차이만큼이나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하이데거와 메를로 뽕띠의 현상학이 형이상학과 맺고 있는 이중의 관계를 살펴보기 위해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언어와 사유의 본질이 침묵이라고 해서 침묵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 이다. 그들에게 침묵은 필수적인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침묵의 진술" 내지 "침묵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적합하게 말하여지게 될 것'에 대해 진술하는 문제인 경우, 극도로 사유에 찬 발언은 단순히 침묵을 유지해 나간다고만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비진술 속에서 명명되는(시작의) 방식을 통해 '적합하게 말하여지게 될 것'에 대해 진술하는 가운데 성립된다." "사람들은 작가나 철학자들로부터 의견과 조언을 요구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이 세계를 허공에 매어 놓은 채 확고히(표명)하지 않고 놓아두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을 해야만 하는 인간의 책무를 거절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하이데거와 메를로 뽕띠는 언어의 본질에 상응하는 발언 - 이야기하는 침묵과 침묵의 목소리 - 을 통해 침묵의 의미를 보존하려 했을 뿐, 그들의 '강연'과 '저서'가 증명하듯이 글쓰기와 이야기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그 의미를 보존하려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의 현상학은 어쨌든 이야기의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또 그것만이 의미가 있다. 이야기되지 않은 철학은 유추를 통해 닿을 수 있는 하나의 가상체일 뿐 사실상 철학으로 현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야기되지 않은 의미'라는 것도 이야기된 것 속에서 그 존재성을 획득할 수 있을 뿐이다. 하이데거와 메를로 뽕띠의 현상학은 예술의 "명명" 및 "현존화"에서 작용하는 '경험'과 '언어'를 통해 성립되지만, '침묵의 의미자체가 갖는 의의'와 '이해의 방식 및 존재의 역사성과 비은폐성 등'을 화두로 삼아 정복하려하는 "진술"(sagen)과 "표명"(formuler)의 방식으로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예술과의 차별성을 보인다. 그들은 모두 예술과는 달리 철학의 전통속에서 철학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철학의 전통은 형이상학을 의미하므로(하이데거와 메를로 뽕띠에겐 형이상학을 거부했던 니체와 마르크스의 철학, 그리고 실증주의 등도 주관에 의존하고 있는 한, 전도된 형이상학이 된다), 그들의 철학, 즉 현상학은 형이상학의 전통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형이상학을 벗어나고 있다는 '이중의 관계'를 형이상학과 맺고 있게 된다. 그러나 이 이중관계의 외적인 유사성은, 예술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그들 철학의 유사성이 그러한 것처럼, 언어와 이해의 추상성과 구체성이라는 본질적 차이에 상응하는 변별성을 그 내면에 깔고 있다.


2. 하이데거의 잠정성

형이상학을 극복하고자 하는 하이데거의 의도는 [존재와 시간]에서부터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는 현존재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을 통해 딜타이와 훗설의 인식론적 분석을 존재론적으로 심화시키며, 그들이 서구철학의 전통속에서 여전히 취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체계를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비판의 귀결로, 진리의 합리성을 형이상학 너머의 '의미세계' 위에서 전혀 새롭게 정초하기위해 "존재론의 역사를 해체"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 때의 해체란 "전통을 '떨쳐버리는 것' (Abschittein)이 아니라, 오히려 전통을 더욱 근원적으로 '자기화' (Aneignung)하는 것" - 하이데거는 후에 이 '자기화'를 "일어남" (Ereignis)으로서의 존재역운으로써 해명한다 - 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하이데거가 말하는 그 극복의 과제는 형이상학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과 타협하는데 있었다. 그저 형이상학을 외면한다고 해서 그것이 간단히 없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형이상학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은 형이상학의 존재를 허용하는 입장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존재자들과 무관하게 존재를 사유한다는 것은 형이상학과 무관하게 존재를 사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전히 형이상학에 대한 고려 또한 유효하며, 심지어 형이상학을 극복하려는 시도에서조차 그것은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의 과제는 모든 극복을 "단념" (ablassen)하는 일이며, 그것은 형이상학을형이상학 자신에게 "위임하는"( berlassen)일이 된다."형이상학을 극복한다는 것의 본래 의도는 형이상학을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견디어 이겨냄" (Verwindung)에 있었으며, 그것은 해체의 진정한 의미인 '단념'과 '위임'으로 이야기된다.
'형이상학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러나 '형이상학의 태도를 그대로 취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형이상학의 언어를 수용해 '진술'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의 극복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언어를 통해 비은폐되는 존재의 역사적 사건속에서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의 극복은 역사적 과정을 거처 종말에 다다른 형이상학의 존재망각 국면에서 어쩔 수 없이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유일한 언어인 형이상학의 언어속에 "흔적"으로 들어있는 존재의 의미가 도래할 때 자신을 "내맡기는" 실존의 이해로 비은폐될 때 가능한 것 이다. 형이상학의 언어를 수용한다는 것은 하이데거와 형이상학의 관계에 두가지의 의미를 준다. '기존의 형이상학을 텍스트로 삼아서도 존재의 의미를 해석해 낼수 있다는 것'과, '자신의 현상학적 사유가 여전히 형이상학의 언어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어느 경우든 그의 철학은 형이상학과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형이상학과 결별하려는 이중의 태도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이중의 태도로 인해 우리는 모호성에 빠지게 된다. "하이데거 I이 사유하고 있는 것을 거쳐야만이 하이데거 II에서 사유될 어떤 것으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이데거 I은 형이상학의 내부에서 사유하는 하이데거를, 그리고 하이데거 II는 형이상학의 외부에서 사유하는 하이데거를 가리킨다.
하이데거의 현상학은 형이상학의 "내부"와 "외부"라는 공간에 동시에 속해 있는 '이중의 철학'이다. 그의 철학은 형이상학의 내부에서도 존재의 은폐를 사유하거나 진술할 수 있고, 동시에 그 외부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내부와 외부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음으로써 외부에 있는 것이며, 동시에 외부에 있음으로써 내부에 있는 성질을 갖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철학은 "모호성" 내지 "잠정성" (Vorl ufigkeit)을 갖는다. 하이데거의 철학이 "잠정적이라는 것은 사유의 언어가 잠정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존재"(Sein)는 하나의 잠정적인 말일 뿐이다. '존재'라는 말은 초기에 기술된 의미에 비추어 볼 때 모호한 말이며, 이 모호성 때문에 그말은 형이상학에 속하면서 동시에 속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하이데거의 강의들과 저작들이 '존재'를 위해 쓰여진 한, 그 작업들은 잠정적인 채로 남아 있게 된다. 그 작업들이 잠정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그 작업들이 의심스러운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감적으로 들리게끔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가 '잠정적'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형이상학을 통해 형이상학과는 전혀 다른 곳에 "이름없이"(ohne Namen) 존재하는 사유를 향한 도정으로 자신의 철학을 규정하기 위해서였다. 형이상학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그의 현상학은 처음부터 그 내용과 진술의 방식에서 형이상학과 끊임없는 긴장관계에 놓여지게 된다. "근원적인 원천들로부터 나온 현상학적 개념과 문장이 하나의 '언명'(Aussage)으로 소통될 때 그 의미가 '변질' (Entartung)되기 쉽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을 벗어나는 길이 형이상학을 뚫고 나서야만이 열릴 수 있다면, 형이상학은 분명 하나의 장애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애물을 임의적으로 피할 수 없다는 것이 "고향상실"의 시대에 '위안'을 찾는 철학의 운명이다. 하이데거는 이 철학의 운명을 [시간과 존재]에서 '존재의 역운적인 전용의 사건'을 논한 후, 끝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것에 대한 진술을 명제적 진술의 형태로밖에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의 장애이다" 그러나 그 길이 형이상학을 넘어서는 길인 이상, 형이상학을 넘고자 하는 사람들의 임무는 "모든 장애물을 끊임없이 이겨나가는 데"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임무는 형이상학의 언어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경험하게 될 때 비로소 수행될 수 있다. 이 경험은 형이상학의 언어속에 은폐된 존재의 목소리를 감지해 내 "응답" (Entsprechen) 하는 "대화" (Gespr ch)에서 실현 된다. 그러한 경험속에서라면 장애는 극복될 수 있을 것이며, 예컨대 [시간과 존재]는 세미나의 형식을 통해 그 경험의 가능성을 현실화 시키려 했다.

"「시간과 존재]에 대한 이 세미나의 실험적 의의는 양의성을 갖는다. 우선, 이 세미나는 '중개적 언명' (mitteilenden Aus- sagen)으로써는 접근할 수 없는 '사실'을 '지시적으로 지적' (weisend hinzeigen)하려 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 세미나는 진술속에 들어있는 '명백히 드러날 수 없는 것에 대한 경험'을 참석자들이 스스로 경험할 수 있게끔 준비시키려 했다. 따라서 [시간과 존재]는 인식론적으로도 또는, 어떤 물음을 통해서도 타당하게 접근될 수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며, 오히려 '경험되어야만 하는 것'에 대한 시론(試論)인 것이다. 이 세미나의 실험적 의의는 그같은 경험을 준비시키고자 하는 데 근본적 의의가 있다."

물론 그같은 세미나가 늘 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경험의 근원성을 인지하여 모든 철학적 사유를 형이상학의 언어 깊숙한 곳으로 끌고 가는 일일 것이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형이상학은 비록 자신을 보존시킬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의 언어를 통한 사유의 사실이 더이상 형이상학적 주관의 사실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미 극복되어지는 것이다. 형이상학과의 이중관계속에서 그가 주장하는 것은 그 언어와의 대화속에서 "비은폐의 사건"으로 일어나는 이해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이 이해를 위해 형이상학이 도달할 수 없었던 "사실성"(Sachlichkeit)을 지시적 제시를 통해 해석하는 한편으로, 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경험으로 사람들을 인도한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의 언어를 딛고 형이상학을 넘어선다. 그러나 그러한 작업이 형이상학의 언어에 매어있는 한, 그것은 이중적이거나 잠정적인 성질을 갖게 된다.
"일어남"의 사유를 위해 형이상학의 언어에 자신을 전용시키는 하이데거의 현상학은 종말에 다다른 형이상학의 역사 이후의 철학을 새롭게 여는 철학의 "대체현상" (Ersatzerscheinung)을 바로 그 형이상학의 역사 속에서 확실하게 마련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사유는 존재와 동일하다'라는 파르메니데스의 말은 서구사유의 근본주제가 되었으며, 본질적으로 볼 때 이 주제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된 것이 서구사유의 역사이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말은 적어도 철학의 시작을 보는 관점에 있어서 만큼은 헤겔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헤겔 역시 [철학의 역사에 대한 강의]에서 "파르메니데스의 그 말에 대한 설명의 진보가 곧 서구철학의 역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의 그 사유가 형이상학으로 이어지게 되는 과정에 대한 관점에서 하이데거는 헤겔과 상이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이데거는 파르메니데스의 그 말을 단지 형이상학의 출발단계로 보는 헤겔과는 달리, 그것을 "생소하고 위대한 것" (das Unheimlichste und Gewaltigste), 그래서 형이상학의 근거가 되는 것으로 보았다. 하이데거에게 파르메니데스 이후의 철학은 발전이 아니라 퇴락의 길을 걸어온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사유는 존재와 동일하다"는 파르메니데스의 말이 참되게 실현되는 것은 형이상학이 극도의 "완전성"(Vollkommenheit)에 다다른 헤겔의 철학에서가 아니라, 헤겔의 철학을 포함한 모든 형이상학의 역사가 "완결"(Vollendung) 된 곳에서이다. 형이상학의 역사가 완결로 마무리되는 곳은 헤겔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철학이 종말되는 "장소"를 의미한다. 이 종말의 장소에서 "모음"(Versammlung)의 사유가 일어난다.
"모음"의 사유는 더이상 형이상학이 사유해야할 문제가 아닌 어떤 것을 사유하면서도 형이상학을 유기하지 않으며, 동시에 형이상학의 역사 끝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회상" (Erinnerung)의 성질을 갖게 된다. 그러나 모음, 혹은 회상의 사유는 헤겔의 '역사적 회상'에서처럼 절대정신의 자기의식적인 "순수한 자기인지"(reine Selbsterkennen)가 아니다. 하이데거의 회상은 사유의 또 다른 방법으로서 하나의 "기리는 사유" (andenkendes Denken)이다. 이 사유는 헤겔식의 조작적인 사유로부터 이행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이행은 우리의 태도를 임의적으로 바꿈으로써 일으킬 수 있는 마음의 변화가 아니라, 수동적으로 겪게 되는 마음의 변화로 인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변화는 우리의 사유가 "언어의 고유한 규칙"속으로 진입해 들어감으로써 발생하는 데, 이는 '인간이 통제하는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언어로 개념을 형성하는 사유'가 인간을 "언어의 증여"속에 위치시키는 사유로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사유가 "언어의 본질 내지 본질의 언어"(Das Wesen der Sprache : Die Sprache des Wesens) 속으로 되돌아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그 언어는 형이상학의 언어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그의 사유는 형이상학의 근거로 되돌아가는 사유에 다름 아닌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사유는 "형이상학적인 동시에 형이상학의 밖에서 사유해야 한다" (mu metaphysisch denken und zugleich aus dem Grund der Metaphysik, d.h. nicht mehr metaphysisch)는 이중성을 갖게 된다. 형이상학의 극복을 통한 "귀향"의 행복은 형이상학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언어에 대한 지배권과 소유권을 포기할 때, 그리고 자신속에 스며들어 있는 은폐의 광범위하고도 위력적인 힘을 언어가 비은폐시킨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이해의 사유를 실현시킬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3. 메를로 뽕띠의 지속성

메를로 뽕띠의 현상학적 존재론 역시 형이상학과의 이중적 관계속에서 형이상학을 넘어서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하이데거처럼 형이상학의 외부를 지향하지 않았다. 그는 형이상학의 내부에서 형이상학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그의 철학은 "전통적인 존재론 혹은 형이상학과 엄밀하게 구분되기를 원했던 새로운 존재론" 내지 형이상학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전적인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반성'과 '변증법' 그리고 '직관'과는 전혀 다른 사유의 토대위에서 형이상학이 아닌 형이상학을 전개시키고 있다. 그에게 형이상학을 한다는 것은 "'고립된 인식의 세계'(un monde de connaissance s par )로 몰입하거나, '공허하고 단조로운 공식을 반복' (r p ter des formuls st riles)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리키는 역설의 경험을 분명하게 만드는 것"으로서, 현상학적 방법을 사용해 세계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그러나 세계의 본질을 탐구한다는 것은 "그것을 논의의 주제로 만든 후 '관념속에서' 찾아 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논제화에 앞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실속에서'(en fait pour nous avant toute th matisation)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탐구는 정신의 질서가 아닌 육체의 질서를 토대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고전적 형이상학의 주관중심주의를 넘어선다. 물론 메를로 뽕띠의 현상학 역시 '존재'(l' tre) 중심적인 사고를 전개시키고 있지만, 그 존재의 한가운 데에 인간의 육체가 자리잡고 있음으로 인해 동시에 인간중심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고 있다.
이러한 것은 메를로 뽕띠의 현상학이 하이데거의 그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형이상학과 이중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하이데거의 철학에선 존재론적 인간(현존재)이 인간중심적인 휴머니즘의 사유를 탈피하려하고, 따라서 인간의 행위인 형이상학 자체를 벗어나려는 태도가 지배적인데 비해 메를로 뽕띠 철학의 존재론적 인간(신체)은 여전히 인간적인 휴머니즘의 사유를 지향하고, 따라서 인간의 행위인 형이상학 '자체'를 받아들이는 태도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하이데거는 인간의 형이상학을 거쳐 존재의 의미로 진입하려는 기획, 다시말해 우선은 자기의식적으로 형이상학을 회상의 형식 속에서 외관상 취하면서 결국은 형이상학을 벗어나려는 전략 - 이러한 전략으로 인해 그의 현상학은 형이상학 안에서 외부를 지향하며, 그 외부를 위해 형이상학의 내부에 있게 되는 잠정적이고도 이중적인 태도를 가졌다 - 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메를로 뽕띠는 그와 달리 '인간의' 형이상학 내부에서 존재의 의미영역으로 진입하려 한다. 따라서 메를로 뽕띠가 형이상학과 맺고 있는 이중관계는 형이상학의 안과 밖이라는 두 요소의 이중관계가 아니라, 형이상학 내에서의 이중관계를 뜻한다. 그것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는 종래의 형이상학'과 '현상학적 존재론으로서의 새로운 형이상학'간의 이중관계라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현상학적 존재론 자체까지 벗어나려는 시도하에 그것을 잠정적인 것으로 여겼지만, 메를로 뽕띠는 그것을 끝까지 고수해내려 하기 때문이다. 메를로 뽕띠에겐 종래의 형이상학적 이성과 현상학(새로운 형이상학)의 지각간의 이중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그의 현상학은 반성적 이성을 여전히 취한다는 점에서 전통의 형이상학의 영역에 머무르지만, 반성이전의 지각을 취한다는 점에선 전통형이상학을 벗어난다. 그러면서, 지각의 현상학은 여전히 인간의 질서로 세계를 해명한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의 차원에 놓여 있다. 물론 이러한 형이상학은 세계를 초월하거나 구성하는 철학이 아니라 "모든 합리성과 가치"가 전제하는 구체적 세계의 조직을 해명하는 철학이 된다.
형이상학의 내부와 외부의 이중관계가 아니라 형이상학 내에서 외관상 전통형이상학의 반성형태를 취하면서, 동시에 그것 너머의 비반성적인 지각의 영역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메를로 뽕띠의 철학은 하이데거의 철학과 변별성을 갖는다. 그러나 메를로 뽕띠의 철학과 형이상학의 관계가 처음부터 그렇게 하이데거의 그것과 명확하게 갈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메를로 뽕띠는 [소설과 형이상학] (Le Roman et La M taphysiqu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이상학적인 것은 인간의 내부에 있을 뿐이며 결코 경험적 인간의 '저편'에 있는 것, 예컨대 신이나 의식일반에 부가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바로 자신의 존재 자체속에서,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신의 행위속에서, 개별적이거나 혹은 집단적인 자신의 역사속에서 이미 인간은 형이상학적이다, 그러니 더이상 형이상학을 마치 데카르트가 말했던 것 처럼 다달이 시간을 정해 수행해야 할 일거리로 여겨서는 안된다. 형이상학은 파스칼이 그렇게 생각했듯이 "마음의 아주 작은 파동속에"(dans le moindre movement du coeur)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형이상학의 축을 외적실체나 인식주관으로부터 삶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메를로 뽕띠의 그같은 발언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진술된 하이데거의 다음 말과 일치하고 있다. "형이상학은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 그것은 강단철학의 한 분과나 임의적 착상이 아니다. 형이상학은 현존재 내부에서 일어나는 근본사건이자 현존재 자체이다." 이 말만 한정해서 생각하면 하이데거는 메를로 뽕띠와 같이 새로운 형이상학 즉, '형이상학이 아닌 형이상학' 내지 그의 표현대로 "특정한 형이상학적 물음"(eine bestimmte metaphysische Frage)을 통해 형이상학을 극복하려한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그러한 입장은 그의 전 사유과정을 통해서 볼 때 하나의 통과점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는 형이상학을 폐기하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그가 원했던 철학은 "주관의 반성으로부터"(aus der subjektiven Reflexion) 나오는 사유가 아니라 "더이상 철학(형이상학)이 아닌(nicht mehr Philosophie) 사유"로서, 그것은 자신이 말한 '특정한 형이상학'까지도 초월한다. 그러한 철학이 형이상학의 내부에 있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한도내에서일 뿐, 그 철학의 본질은 더이상 '학으로서의 존재론'이 아니다. 이에 비해서, 메를로 뽕띠에겐 "더이상 철학이 아닌 사유"는 여전히 철학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철학은 주관중심주의적 형이상학을 넘어섰다는 점에서 더이상 형이상학이 아니며, 인간의 능동적 탐구의 측면에선 "새로운 학 혹은 존재론", 다시 말해 '전혀 새로운'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다. 메를로 뽕띠의 철학은 형이상학의 내부와 외부에 존재하는 형태로 형이상학과 양립과 극복의 이중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 내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양립과 극복의 이중관계를 유지한다.

"모든 인식은 '공리들의 토양위에서'(sur un sol de postulats) 지탱되고 있으며, 최종적으로는 합리성이 일차적으로 수립되는 '세계와 우리의 의사소통'에 의존하고 있다. 철학은 근원적인 반성으로써 그러한 근거를 스스로 요구하지 않아 왔다. 그러나 철학 역시 역사속에 존재하는 한, '세계와 구성된 이성'(monde et la raison constitu e)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모든 종류의 인식에게 물었던 질문을 자신에게도 동등하게 던지지 않으면 안되며, 그 때문에 철학은 끊임없이 '이중화 될' (se redoublera) 것이다. 훗설의 말처럼 철학은 끝없는 대화와 성찰이 될 것이며, 그 태도에 충실한 한 자신의 종착지를 결코 미리 알지 못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메를로 뽕띠가 말하는 이 철학은 물론 현상학이다. 현상학은 구성된 이성의 반성을 통해 세계의 지각적 의미를 끊임없이 되새기듯 사유하는 철학으로서, 전통형이상학의 반성적 면모와 그것을 넘어 지각의 세계와 소통하려는 면모를 함께 갖는 이중의 작업이다. 이때 이 이중의 작업은 지각의 가능성이 갖는 크기로 인해 언제나 미완성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좌절이 아니라 늘 새로운 지평을 향해 열려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그 작업은 하이데거의 '잠정적 현상학'에서와는 달리 존재의 역운에 자신을 내맡기는 실존이 아닌, 그래서 존재가 인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인간의 존재를 드러내는 철학이다. 철학자는 "영원히 시작하는 자"(un commen ant perp tuel)이며, 이에따라 철학은 자신의 시작에 대한 거듭되는 새로운 실험이 된다. 그러니까 메를로 뽕띠의 현상학은 "그 시작을 서술하는 것이 자신의 전부"라는 사실과, "자신이 '아직 반성되지 않은 삶'(une vie irr fl chie)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메를로 뽕띠의 현상학은 하이데거의 현상학과 마찬가지로 "인간과 세계를 보다 더 잘이해하기 위하여 자연적 태도로부터 나오는 확신들을 중지시키는 '초월론적 철학'이지만, 그것은 또한 세계가 반성되기 이전에 양도할 수 없는 현존으로 '이미 거기에' 항상 존재한다고 여기는 철학이자, 그 세계와의 '직접적이고도 원초적인 접촉'을 되찾아 그것에 '철학적인 법규' (un statut philosophique)를 부여하려는" 특성을 갖는다. 이러한 것은 "존재의 도래" (Ankunft des Seins)를 체험하며, 존재가 증여하는 의미에 응답해가는 하이데거의 입장과 비교해 볼 때 '학으로서의 철학'에 대한 관점의 깊은 차이를 보여준다. 학으로서의 철학, 즉 형이상학을 예비적 혹은 잠정적으로 승인하고 있는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비해, 메를로 뽕띠의 현상학은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현실적인 것으로 끝까지 지켜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잠정성'과 '지속성'은 궁극적으로 존재의 인간에 대한 '자율성'과 '구속성'의 차이 즉, 이해(또는, '이해'에 주어지는 의미)의 '추상성'과 '구체성'에 상응하는 언어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 기인한다. 존재의 자율성과 구속성의 차이는 위에서 언급한 탈(脫)휴머니즘과 휴머니즘의 차이와 일치한다. 그 구속성과 자율성의 기준이 결국은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을 특권적 위치에 넣고 그 귀착점을 보편적 본질로서의 인간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휴머니즘은 형이상학과 직결된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경우, 휴머니즘 내지 인간에게 부여된 특권에 대한 비판은 그의 사고가 반휴머니즘적이라거나 비인간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한다. 하이데거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가 하고 있는 일은 정반대의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전통적 휴머니즘을 비인간적으로 만든 주관중심주의를 자신이 애써 피하고 있으며, "보다 고차원의 휴머니즘 즉, 인간을 모든 존재의 중심이자 종국적인 목적으로 숭앙하지 않는 휴머니즘을 위한 토대를 자신이 마련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을 그 중심에 놓지 않고 있는 한, 그는 이미 전통적 의미에서의 인문주의자가 아니다. 물론 메를로 뽕띠 역시 존재론적 실존을 논의의 축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인식론적 주관을 철학의 중심으로 삼고있는 종래의 인문주의와 거리를 두고 있지만, 여전히 논의의 중심에 의미의 "인간적 기원"에 놓여 있다는 점에선 인문주의자와의 끈을 놓지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니체의 인간도, 헤겔의 인간도 아닌 "이전의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의 '자유와 미래의 우연성'( la contingence de l'avenir et la libert )에 대해 날카로운 감각을 지닌 인간"의 '고통'을 수반하는 성실성에서 '위기의 시대'를 이겨낼 수 있는 의미 내지는 진리의 합리성을 찾고 있는 것이다.
메를로 뽕띠의 현상학이 형이상학의 '안'과 '밖'이 아니라, 확장된 형이상학의 지평안에서 형이상학을 극복하고 있는 것은 일차적으로 휴머니즘을 옹호하는 태도에서 유래한다. 형이상학의 지평안에서 형이상학을 극복한다는 것은 메를로 뽕띠 역시 종래의 형이상학적 언어를 수용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의 현상학이 받아들이는 것은 '자율적인 존재의 의미'가 "흔적"으로 내재된 언어가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 관계에 매달려 있는 존재의 의미'가 "침전물"로 내재된 언어였다. 따라서 메를로 뽕띠가 형이상학의 언어를 통해 사유하는 것은 '스스로 비은폐되는 존재의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신체적 질서로부터 발생하는 존재의 의미'가 된다. 그는 언어를 섬기지 않고 부린다. 달리 말해, 언어의 흔적을 "회상"하지 않고, 신체가 탄생시키는 의미를 "반성"한다. 이러한 것은 형이상학과 맺고 있는 메를로 뽕띠 현상학의 이중의 관계가 하이데거의 경우와 달리, 인식주관 너머로 확장된 형이상학의 영역에서 형이상학을 벗어나려하는 데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4. 에필로그

하이데거와 메를로 뽕띠의 철학은 모두 형이상학과 양립하면서 동시에 형이상학을 넘어서는 이중의 관계를 형이상학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양립의 관계는 '전통형이상학의 주관중심주의의 이원적 탐구방식 자체를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의 수용'을 의미한다. 전통의 형이상학은 자신의 깊이에 존재의 의미를 흔적 또는 침전물로 갖고 있지만 늘 그것을 회상하거나 반성해내지 않고 개념적인 표상과 설명의 차원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의 언어를 수용한다는 것은 두가지의 중요한 해석학적 의의를 갖게 된다. "존재와의 일상적인 접촉"을 통해 이해된 의미가 형이상학의 언어로 해석된다는 것과, 그러한 이해와 해석이 텍스트에 대한 이해와 해석의 기초를 이룰 때, 형이상학의 언어로 이루어진 텍스트 속에서도 존재의 의미가 이해되고 해석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그들의 철학은 텍스트 해석의 의의를 넘어 세계를 향해 있는 존재론이다.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텍스트해석의 근거가 되는 존재이해이다. 그들의 철학은 근본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전통의 형이상학과의 관계속에서 그것을 넘어서면서 탈주관적인 "이해"로 존재의 "현상"을 해석하는 해석학 . 존재론적 현상학이라는 친족성을 갖는다. 하이데거와 메를로 뽕띠는 언어의 역설을 극복해나가는 가운데 자신들의 철학이 한편으로는 시,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형이상학과 상호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철학을 "해석학적인 존재론", 혹은 "현상학"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경우엔 그같은 명칭을 싫어할지도 모른다. 그는 후기에 이르러 더 이상 자신의 철학을 해석학(현상학) 혹은 해석학적(현상학적)으로 부르지 않고 "아직 규정되지 않은 사유" (das noch unbestimmte Denken)로 남아 있길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사유가 잠정적으로 "현상학을 통해 존재의 사유를 수행하는"(durch die Ph nomenologie in das Denken des Seins) 것 이었던 한, 그의 철학은 여전히 해석학적 '현상학'으로 불릴 수 있다. 사실, 일급의 평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하이데거의 후기 저작들을 [존재와 시간]에 대한 일련의 각주로 보고 있으며, 그의 해석학적인 현상학의 사유 역시 "변한 것이 아니라 더욱 심도있게 진행되었다"고 보고 있다. 또, 메를로 뽕띠의 경우엔 현상학이 해석학이라는 말과 연결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생소할 수 있다. 메를로 뽕띠의 저작엔 해석학에 대한 직접적인 논의가 나타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말대로 "현상학적 '기술'의 의미가 해석"이라면 지각세계의 체험적 의미를 기술해가는 메를로 뽕띠의 현상학은 전형적인 존재의 해석학이 되며, 또 텍스트 해석의 존재론적 토대가 될 수 있다. 오히려 메를로 뽕띠의 현상학은 해석의 의미를 인간에 붙들어 둠으로써 끝까지 지속된다. 하지만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철학은 모두 체험의 이해에 대해 해명하고, 또 그 이해에 주어지는 의미를 형이상학과의 이중관계 속에서 기술하는 해석학적 존재론으로서의 현상학이다.
그러나 이때, '이해에 대한 해명'과 '의미의 기술'이 별도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해석은 이해를 명료화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존재의 의미는 이해의 방식을 해명하는 가운데 이미 해석되는 것이지, 의미의 내용이 따로 기술되는 것은 아니다. 메를로 뽕띠와 하이데거의 현상학은 의미를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를 그 앞으로 끌고가 그것을 보여줄 뿐이다. '현존재의 해석'이나 '지각의 해명', '비은폐의 진술'이나 '살의 구조에 대한 표명' 등은 모두 그 보여줌을 위한 해석학적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 해석은 '침묵의 언어속에서 이루어지는 이해의 내용을 담고 있는 소리나는 언어'속에서 이루어지는 이중의 개시작용 즉, '비형이상학적 사유'와 '형이상학적 사유'의 중첩 속에서 이루어진다. 어차피 소리나는 언어가 그들 현상학의 외관을 이루고 있는 한, 그들의 현상학은 가시적인 이해의 방식을 일차적으로 해명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 해명은, 마치 소리나는 언어가 그 본질속에 감추고 있는 의미를 드러낼 수 있듯이, 가시적 이해의 방식속에 들어있는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형이상학을 넘어 이중의 목소리로 말해주는 현상학의 의미가 "존재"의 '추상성'과 '구체성'에 각각 매달려 있는 한, '새로운 진리의 합리성'을 향해 있는 두 길 앞에서 우리는 하나의 물음을 갖게 된다. 추상의 숙고에 그때 그때 증여되는 위안인가? 아니면, 구체의 고통이 모험속에서 생산해 내는 희망인가?

















The Provisionality and Consistency of Phenomenology

- Song, Suck Rang -

This paper is concerned with the provisionality and consistency of phenonenology of Heidegger and Merleau-Ponty which appear as one aspect of their differences. Like art, the phenomenology Heidegger's and Merleau-Ponty's both take two-sidedness of language. But when compare the poet who writes poetry about the essence of poetry and the painter who paints about the essence of painting with the philosopher who must say about the essence of philosophy, we know that the two philosopher become fall in the destiny of betraying and adaptation to language. In fact, they also acknowledges that all attempts to say more than philosophy could say are confronted by the limitation. For example M.Heidegger confess that "Um jedoch diesem Versuch des Denkens innerhalb der bestehenden Philosophie kenntlich und zugleich verst ndlich zu machen, konnte zun chst nur aus dem Horizont des Bestehenden und aus dem Gebrauch seiner ihm gel ufigen Titel gesprochen werden"(Wegmarken). This is much clear limitation of them. But Heidegger and Merleau-Ponty convert that limitation into the positive posibility. In a few words, they unfold the philosophy which is both metaphysysical and no-longer metaphysic. Their philosophy, namely phenomenology stand on traditional metaphysic, and at the same time they are out of it. This fact means that they say with metaphysical language the non-metaphysical. In spite of this analogy Merleau-Ponty and Heidegger show one decisive discordance : provisionality and consistency. And we can say that there being abstract Sein and concrete tre on center of the discordance. Because Sein and tre in different way product the meaning which the two phenomenologists' language h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