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형이상학의 두 태도와 후설의 현상학

나뭇잎숨결 2020. 10. 23. 10:44

형이상학의 두 태도와 후설의 현상학

경북대 철학 교수 강 동 수

Die Zwei Einstellungen der Metaphysik und Husserls Phänomenologie
Dong-Soo Kang


1. 서 론: 형이상학의 두가지 태도에 대한 예비적 고찰

형이상학은 우리가 대면한 자연, 즉 세계를 “하나의 통일적인 원리에 의해서 설명하려는” 학문이다. 형이상학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은 “자연이 인간밖에 인간과 무관하게 존재하고 있고, 이 자연 속에서 자연에 외적인 인간이 자연의 산물을 이용하여 자신의 삶을 펼쳐나간다”는 자연주의적-객관주의적 의미와 “인간에 의해서 근원적으로 구성된 자연, 즉 인간과 필연적인 상관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자연”이라는 주관주의적 의미로 파악될 수 있다. 이에 따라 형이상학은 ‘…으로부터(원인)’에서 설명할려는 태도와 ‘…에로(목적)’에서 해명할려는 태도로 나누어진다. 형이상학적 태도는 현존하는 삶의 토대인 자연을 결과로 파악하고 그 원인을 찾음으로써 자연의 현상태를 설명·이해하려는 인과론적 태도와 자연의 현상태를 최종적인 목적의 실현을 위한 과정으로 파악하고, 최종 목적에서부터 자연을 해명·이해하려는 목적론적 태도로 구분된다. 특히 목적론적 태도는 “소우주로서의 인간 자신, 그의 본성과 세계에서의 그의 위치, 그의 동료들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인간의 삶과 행위는 어떻게 하면 개선될 수 있는가를 찾아내려는 실천적-윤리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닌다. 형이상학은 태도의 구분에도 불구하고 자연, 즉 세계를 보편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이론적 성격과 이론적 탐구를 통해서 세계의 변혁시도하는 실천적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원인으로부터 자연의 현상태들을 설명하려는 객관주의, 인과론적 태도는 “자연은 전혀 생명이 없고 이성이 없는 힘, 또는 우연이며, 세계 자체, 계절의 진행, 동물과 식물, 그리고 무생물계는 물질의 우연적 결합들의 결과”로 보고, 자연에 존재하는 물질적 인과법칙을 탐구함에 인간의 관여, 또는 탐구자의 의도를 배제하는 객관주의적 태도로 진척된다. 객관주의는 물질의 우연적인 결합과정을 탐구함로써, 물질적 자연의 인과법칙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이 바탕으로 인간의 삶을 자연 속에서 풍요롭게 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이를 위해서 객관주의는 자연에 대한 이론적 태도를 강화하면서 주제의 세분화와 더불어 개별적인 분과학문으로 세분화되고, 실천성을 이론적인 고찰의 부차적인 결과물로 취급한다. 특히 객관주의는 자연의 영역적 인과관계와 체계에 대한 물음만을 의미있는 학문적 물음으로 간주하고, 자연의 궁극원인, 자연의 전체적인 체계와 체계의 구성가능성에 대한 물음을 수행하는 형이상학, 즉 제일철학을 ‘無名의 학문’으로 밀쳐버린다.
이러한 객관주의는 관찰과 실험에 의한 귀납적 탐구방법을 강화하고 자연에 대한 영역적 지식과 체계를 구축하면서, “형이상학적 태도” 자체를 거부한다. 객관주의는 형이상학적 관조 또는 직관을 사변으로 간주하고, 형이상학적 관조 또는 직관에 의존해서 정신에 대해서 탐구하는 형이상학을 학문영역에서 추방한다. 객관주의는 물질적 자연에서 “이성과 이성의 이념에 대해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적으로 체험된 세계 즉 현실적 경험세계의 권리를 부단히 주장한다.” 하지만 객관주의는, 자체의 목적과는 무관하게, 관념을 가지고 존재자를 해석하고 포착하며 조작하는 인식활동으로, 먼저 인식체계·지식·이론·관념을 전제하고 이것들에 관해서 사량(思量)·분별·계탁(計度)하면서 진리를 찾아내고 이를 실천에 옮기게 되는 것에 불과하다. 실로 이렇게 파악된 자연은 객관주의의 이념이자 편견에 고착된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연을 자연으로 자연스럽게 화육(化育)하지 않고 기정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공화함으로서, 자연은 스스로 태어나는 생산적 자연으로부터 인간 행동의 소산물인 소산적 자연 즉 자연 사물 또는 자연물로 고착되어 파악되기 때문이다.
객관주의는 경험을 통해 이미 자명하게 미리 주어진 세계의 토대 위에서, 그 세계의 “객관적 진리”에 대해, 즉 이성적인 사람에게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것에 대해 그리고 세계는 그 자체로 무엇인가에 대해 묻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주의는 이러한 물음을 보편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참된 인식(Episteme), 이성(Ratio) 또는 철학의 임무(Sache)라고 파악하면서 “이러한 인식과 함께 사람들이 궁극적인 존재자에 도달하게 되며, 이 궁극적인 존재자를 넘어서 그 이상 그 배후를 되돌아가 묻는 것은 결코 아무런 이성적 의미도 지닐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객관주의는 형이상학의 두 성격을 망각하고 있다. 첫째로 객관주의는 형이상학의 발생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 그 때문에 객관주의는 인간적 이성의 직관능력을 부정함으로써 필연적으로 형이상학의 부정에로 이어진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은 객관주의가 파악하듯이 각기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관관계에 있다. 상관자인 인간을 배제한 자연에 대한 탐구는 이미 자연은 생기가 없는 물질적 사물의 집합체에 불과하게 된다. 인간을 물질적 집합체에 불과한 자연의 일부분으로만 간주하는 객관주의는 자연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가 아니라 일면적인 이해에 불과하다.
둘째로 객관주의는 자연의 전체적 이해가 제 영역의 탐구로부터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전체적 조망을 통해서 비로소 제 탐구영역이 형성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자연에 대한 탐구의 순서를 역전시킴으로써 근대적 학문의 이념이 생겨날 수 있었다. 영역적 탐구에서 자연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을 추출하려는 근대적 학문의 태도에서 “반성적-이론적 태도”의 의미가 변화되었다. 자연의 전체를 조망하는 태도로서의 이론적 태도와 자연의 한 영역을 체계화하려는 태도로서의 이론적 태도사이에 드러나는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근대 학문은 경험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통해서 실험과 관찰만이 자연에 대한 실질적인 설명과 이해를 제공해 주는 행위로 파악하면서 전체적-반성적인 태도의 의미를 간과하고 무시하였다.
실험과 관찰을 바탕으로 인과관계를 수학적으로 체계화하면서 객관주의는 자연에 관한 전체적-목적론적 조망을 공허한 사변으로 학문적 영역에서 제외하고 한갖 인생관이나 세계관으로 격하하게 만드는 동기를 제공한다. 과학적 태도에서 발원된 이론의 정확성에 대한 반성만이 오직 학문적인 반성으로 인정된다. 그래서 객관적-과학적 태도의 근거 자체에 대한 반성은 철저하게 거부되고 영역적인 학문의 방법과 태도에 국한된 반성만이 학문적 반성으로 추인되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이러한 반성이 철학적 반성, 즉 고전적 형이상학의 근원적 성격에 부합되는 반성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영역적 과학에 대한 철학적 반성은 그 자체의 성격상 자연에 대한 영역적-이론적 태도를 넘어서 객관주의적-과학주의적 태도 자체를 반성의 테두리에 넣게 된다. 왜냐하면 전체를 반성의 테두리에 포함할 떄에만 비로소 반성의 대상이 되는 태도에 대한 비판적 조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출발에서부터 과학적 태도에 의해서 공허한 사변으로 간주될 수 밖에 없으면서도, 학문적 태도의 성격상 끊임없이 요구되는 철학적 반성은, 즉 고전적 형이상학은 과학적 요구를 넘어선 인간의 본질에서 요구되고 수행되는 반성이다. 따라서 철학은 과학과 동일한 차원에 존립하는 학문이 아니다.
철학의 본질적인 성격에서 본다면 “철학에 의해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뿐더러 또한 해답을 얻어야 할 물음은 ‘왜?’라는 물음이다. ‘어떻게?’라는 물음에 대해 해답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이러한 입장에서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가 감옥에 앉아 있는 까닭”이 소크라테스의 육체에, 즉 물질적-신체적 원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있음을 강조한다.

그 참된 원인인즉, 내게 유죄투표를 하는 것이 보다 좋다고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며, 그러니까 또 나는 나대로 지금의 여기에 앉아서 기다렸다가 그들이 내리는 형벌을 달게 받는 것이 보다 좋고 또 보다 옳은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일세. 왠고하니 만약에 내가 국가가 내리는 어떤 형벌이든 국가의 명령에 좇아 달게 받는 것이 그것을 피하여 도망하느니보다 더 옳을 것도 또 더 좋을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들, 나의 이 근육과 뼈는 그 가장 좋은 생각에 의해 이미 오래 전에 메가나나 보이오티아 지방으로 옮겨져 있을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되니 말일세.

세계를 목적론적으로 설명하려는 입장은, 세계가 목적에로 부단히 진행한다고 파악하고, 이러한 세계의 목적을 인간을 頂点으로 탐구할려는, 즉 인간적 정신을 중심으로 세계를 탐구할려는 주관주의적 태도로 이행된다. 이러한 주관주의적 태도는 세계의 주체로서 주지된 인간의 자기발견에서, 그리고 이 주체를 자신의 이성을 통하여 존재 전체와 자기자신에게 관계되어 있는 인류중의 인간으로 발견함에서 발현된다. 주관주의적 태도는 근원적으로 자연과 인간의 상관관계를, 특히 자연의 구성에 관련된 정신의 의미, 즉 “인간성은 세계내에 존재하는 사물로서 인체성이 아니며 인체적 사물성이 아니다. 인간성을 통하여 비로소 인간과 사물의 사물성이, 세계의 세계성이 구성된다. 인간성은 바로 세계를 하나의 한계지어진 전체로서 있게 하고, 존재자가 존재자로서 세계내에 등장하게 되는 바, 세계의 한계이며 존재자가 현상하는 현장임”을 자각함에서 시작된다.
주관주의적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의 정신활동은 syllogismos(삼단논법 내지 연역추리), 즉 단계적으로 추리해 나가는 과정이 아니라, 가능태로부터 현실태로의 진행과정이다.” 가능태에서 현실태이로의 이행에는 일종의 소크라테스적 무지의 자각, 즉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의 무지를 깨닫고 있으므로, …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의 자세, 즉 쉽게 교만으로 오해된 지적인 겸손”에서 출발하는 자기반성적 태도가 근원적으로 요구된다. 이 자기반성적 태도는 “사유하며 행동하는 인간이 자연과 인간에 관여하는 방식으로 삶의 세계를 구성하고 생활의 짜임새를 엮어가면서 이따금씩 이 짜임새를 되볼아 봄으로써 막힌 데를 트고 어두운 곳을 밝혀 결과적으로 지속적인 삶 전체를 보다 더 자각적으로 의미있게 하는”태도인 셈이다. 객관주의에 대한 대항으로 출발하는 주관주의자는 “自己反省人(Selbstdenker), 즉 모든 편견(Vorurteile)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려는 의지에 찬 자율적인 철학자”이고자 한다. 그러므로 주관주의적 자기반성은 “그에게 자명한 것들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이 편견들이라는 통찰, 모든 편견이 전통에 의한 침전물로부터 발생한 불명료한 것들이며, 그렇지만 이 편견들이 그것의 진리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그러한 단순한 판단들은 아니라는 통찰 그리고 이러한 점은 ‘철학’이라고 부르는 위대한 과제와 이념에 대해서조차 타당하다는 통찰”에서 가능해진다. 이러한 자기반성은 형이상학적 태도의 근원적 성격이다. 이를 위해서 우선 주관주의적 태도에서 거론되는 반성적 태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객관주의적 태도에 근거하는 반성적 태도는 언제나 전제된 이념 위에서만 수행되고, 그러한 반성적 태도로는 언제나 인식의 주체인 인간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객관주의는 질서로운 세계가 이미 주어져 있다는 편견(Vorurteil)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객관주의는 개별적 인간과 무관하게 세계가 이미 갖추고 있다고 믿어지는 질서, 즉 법칙을 발견하려는 태도이며, 이를 포기하는 것은 객관주의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된다. 바로 여기에 객관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근원이 있다.

2. 현대의 학문적 위기과 현상학: 객관주의에 대한 현상학의 비판

1)객관주의적 태도의 정신주체의 망각
객관주의적 태도에서 인식 주관의 유한성과 상대성을 이유로 생활세계적인 앎이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앎으로 간주된다. 그리하여 객관주의는 생활세계적 주관성을 추상함으로써 객관적 세계를 구성하고자 하며, 이 객관적 세계를 이념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과학주의적-객관주의적 태도를 정신과학이 자신의 이념적인 방법으로 수용한다. 비록 역사적인 정신과학이 “역사적으로 주어진 개별적인 정신성을 다루고, 국가와 법률을 그때그때의 개별적인 유형성에 따라 취급하며, 여러 민족들의 상태와 역사적 생성을 다루고, 역사적 사실로서 주어진 예술조류, 예술작가, 예술작품, 학문성 등을 취급”하지만, 정신을, 즉 “물리적 자연내에서 공간화되고 객관적으로 시간화된 영혼”을 물리적 신체의 인과적 부가물로 해석함으로서 과학주의적-객관주의적 태도를 검증없이 수용할 수 있었다. 자연과학이 자연에 인간적 정신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어떠한 의도에 대해서도 반대하듯이, 정신과학도 문화에서 물질적 자연을 배제하고, 정신의 역사성과 사회성, 공동체성을 탐구주관적 요소를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탐구할려고 한다. 이러한 객관주의적 태도에는 행위주체의 존재의미가 배제되고 망각되어 있다.
세계의 주관적인 형성을 배제함으로써 객관적 자연을 확보하는 자연과학주의적 태도에서 ‘자연이 실제로는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인식주체의 기준으로 측정되고 평가된 이념적 형성체이고, 이 이념적 형성체가 의사소통적으로 확증된 논리적인 개념일 뿐이라는 사실’이 망각되고, 객관적 세계에 주관적 세계에 대하여 존재우위성을 부여하는 신념화가 발생된다. 이러한 신념은 인간을 육체와 영혼(정신)으로 구분하고, 영혼적 관념을 한갖 영상(image)으로 취급함으로써 정당화된다. 정신과학도 자연과학자들의 인간구분에 따라서, “인간적 정신성(die menschliche Geistigkeit)이 인간적 신체(die menschliche Physis)에 근거를 두고, 모든 개별적-인간적인 영혼의 삶(Seelenleben)은 육체성에 기초되며, 따라서 각각의 공동체도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인 개별적 인간들의 육체성에 기초된다”고 인정한다. 여기서 객관주의적 정신과학은 자연과학적 태도처럼 세계를 탈주관화하고 문화세계의 구성주체(객관정신)과 현존하는 개별 정신(주관정신)을 구분하게 되고 문화적 정신을 객관적으로 연구하려고 하지만, 현존하는 개인적 정신이, 즉 주관적 정신이 세계구성에 결정적인 요소이라면, 개별 정신에 독립된 세계 그 자체, 또는 객관정신이란 무의미한 개념이 된다.
이러한 정신에 대한 망각에서 정신과학은 세계를 개인적-주관적 세계와 공동체적 세계로 구분하고, 공동체적 세계에 물리적 자연에 필적하는 독립성을 부여하면서, 개인적 정신과 공동체적 정신을 구분짓고자 한다. 정신과학은 주관적-개인적 정신이 신체에 의존하듯이 공동체적 정신 또는 객관정신도 공동체적 형성물, 즉 문화객체에서 드러나므로 이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서 정신과학은 개별적 정신의 독자성을 부정하고 공동체적 정신의 반영으로, 공동체적 정신의 자기실현을 위한 이용물로 간주한다. 이에 따르면 개별적 정신은 자체적인 존재의미를 보유할 수 없는 존재이고, 문화객체의 실재성에서 공동체적 정신 또는 객관정신은 물리적 자연에 필적하는 자체적 존재성을 은연중에 함축하게 된다. 그리하여 정신의 주체성은 철저하게 부인되고, 인간은 자신의 상관자인 세계구성권을 박탈당한다. 문화구성의 주체에 대한 의문을 정신과학은 공동체적 정신의 역사적 완결성을 부정함으로써 문화의 변동에 수반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정신과학은 정신의 개별적 활동이 갖는 역사적·공간적 제한성을, 동시에 문화세계의 역사성과 지속적 발전을 근거로 제시한다. 하지만 정신과학이 제시하는 역사성이란 단편적인 기록사적 편집성이며, 발전도 과거의 경우에 비추어 추정적으로 예측하는 단편적인 사건들의 계속적인 진행가능성에 불과하다.
정신과학적 태도에 따르다면 우리는 우리의 정신이 언제나 공동체적 정신, 즉 객관정신의 요소로만 존재할 수 있을 뿐, 정신 자체가 공동체적 정신일 수 없다는 엄청나게 기이한 신념에 사로잡히게 된다. 심신이원론적으로 정신을 영혼으로 이해하면, 정신은 영혼의 작용들 중에서 한 영역을 차지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특히 정신이 영혼의 주요 본질인 사유로 파악되고 사유작용은 육체의 영향에 민감한 작용으로 취급되면, 정신은 영혼의 사유작용으로 지극히 개인적인 작용으로 파악된다. 여기서 사유의 의미와 정신의 존재의미가 얼마나 왜곡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여기에는 인간의 정신성, 또는 인간성에 대한 오해가 잠복해 있다. 현상학은 바로 객관주의에 은폐된 주체의 자기망각을 반성의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세계 자체를 주관화하는 이러한 가장 철저한 주관주의는 어떻게 파악될 수 있는 것일까? 특히 세계의 존재가 주관적인 작업수행을 통해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그 밖의 다른 세계가 결코 생각될 수는 없는 명증성을 지닌 수수께끼”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 방법은 오직 “정신이 소박한 외면화의 전환으로부터에서 자기자신에로 복귀하고 자기자신에, 오직 자기자신에만 머무르는 경우에만 정신은 자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함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요구됨을 예감한다.. 왜냐하면 정신의 자립성을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또는 정신에 대한 심신이원론적 이해에서 원천적으로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학의 과제에서 본다면 “철학사는, 내적으로 보자면, 한층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는 성격, 즉 자신의 과제를 충실히 해결하고자 전력을 다하는 철학 ― 이성을 소박하게 신뢰하는 철학 ― 과 이성을 부정하거나 경험주의적으로 무가치하다고 거부하는 회의론과의 투쟁”인 셈이다. 이러한 투쟁은 객관주의가 귀납에 의한 인과론적 설명만을 인정하면서 인식의 주체인 정신을 영혼(psyche)으로 간주하고 과학적-객관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대상으로 파악함에 따라서 심화된다. 정신을 영혼(psyche, Seele)으로 파악하는 객관주의에서는 이성 자체와 이성의 ‘존재자’가, 또는 존재하는 세계에 자기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이성과 이것에 대립적인 측면에서 본 세계 즉 이성으로부터 존재하는 세계가, 결국에는 이성과 존재자 일반의 가장 깊은 본질결합성(Wesensverbundenheit)이 수수께기가 된다. 왜냐하면 객관적으로 고착되어야 할 정신은 객관화하는 안목 그 자체로서 언제나 객관화의 타당성을 부여하지만, 객관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객관주의는 근본적으로 탐구의 주체의 존재의미를 부정하고 탐구대상에서 배제해 버린다. 하지만 주체에 대한 객관주의적 해명은 자기반성적 태도에서 수행되는 철학적 자기인식의 성격을 간과함으로써 생겨난 해명이다. 이러한 사실을 이해할 때에만 비로소 후설이 정신과학의 근거학으로 자처하는 심리학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현상학과 심리학을 구별하고, 심신이원론을 극복하려는 이유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2)“앞서 주어져 있음”의 자명성의 문제
생활세계를 발생적 성격에서 고려한다면 생활세계는 이른바 “학문외적-전학문적 태도”에서 언급되지만, 그 원천상 정신적 세계는 ‘역사성’으로 담지하고 있다. 생활세계는 인간의 정신이 발현되는 ‘인간적 세계’이다. 세계는 인간에 대해서 그 자체로 존립하는 존재자가 아니며, 또한 자연과 세계는 대립관계도 아니다. 세계는 오직 인간과 자연의 상관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현상, 즉 의미의 통일체이다. 그런데 객관주의는 자연과 생활세계를 동일시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인간의 주체로서의 존재의미를 배제하게 된다. 객관주의는 생활세계를 인간의 생존을 위한 물리적 공간으로만 파악한다. 다른 한편으로 객관주의는 인간삶의 현장으로 파악된 생활세계의 정신적 측면을 문화로 파악하면서 문화를 심리학적 영혼의 작용과 결부시킨다. 그리하여 “인간은 일상적으로 공동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도 세계 내에서 존재한다”는 이 사실에서 객관주의는 세계의 선소여성을 세계의 독립성으로 해석한다. 여기서 객관주의는 “생활세계가 인간의 주관적 형성체, 즉 문화세계로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성장하게 되는 터전이지만, 다른 편으로는 인간의 정신을 고착시키고 정신의 본원을 은폐하는 장막, 즉 한계”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게 되고, ‘자연과 정신의 상관관계’의 산물인 생활세계의 주관성을 망각하게 된다.
정신의 주체적 의미를 간과하는 자연적-객관주의적인 반성을 통해서는 생활세계의 발생적 상관극인 ‘자연과 정신’의 상관관계가 이해되지도 인식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객관주의는 상상으로도 ‘정신 자체’를 그려낼 수 없다. 객관주의는 이러한 ‘자연과 정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자연을 실증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물리적 자연으로서의 세계로 그리고 정신을 신체적인 영혼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파악되지 않는 자연과 정신은 ‘객관적으로 생각될 수 없음의 영역’으로, 문자그대로 무의식의 영역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자연 그 자체’는 객관적인 태도의 한계이다. 하지만 객관주의는 생활세계의 토대위에서, 달리말하면 생활세계로부터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러므로 생활세계는 객관주의적 태도에서 본다면 자명하게 선소여되어 있는 세계이고, 이 세계의 존재를 문제삼는다는 것은 의미없는 물음이다. 문제는 백지로 출발하는 개별적인 인간이 세계를 참되게 인식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객관주의적 인식론은 세계의 부분의 인식가능성을 다루는 인식론이며, 언제나 생활세계를 전제하고 있다. 객관주의적 인식상황에서는 세계는 인간 바깥에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으며, 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한다는 것은 육체적 존재인 영혼의 입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의미있는 인식은 언제나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을 전제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이 不可思議한 현상으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세계인식 또는 세계의식은 인식을 위한 근거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적인 능력, 不可思議한 능력으로 요청될 뿐이다. 따라서 세계 자체를 한 대상으로서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여겨진다. 후설은 인식론적 경험의 대상인 개체인식과 세계의식의 차이점을 부각하고, 인식론적 태도 즉 경험적 태도에서 다루는 세계의식은 “주관성의 역설”을 야기시킬 뿐임을 명확히 한다. 객관주의에서 발생하는 주관성의 역설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세계의식이 객관주의적 태도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지 명확하게 재조명되어야 한다.
우선 세계의식은 경험적 태도에서 논의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 오직 선험적 태도에서만 의미있게 다루어질 수 있는 개념이다. 후설은 객관주의가 “생활세계”의 선소여성을 세계의 독립성으로 오인함으로서 주관성의 역설에 빠져들었음을 간파하고, 생활세계의 선소여성을 문제의 중심으로 부각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유아론적 해명과 현상학적 해명의 차이를 명확하게 구분짓는다. 세계에 대한 유아론적 해명은 근대철학의 심리학적 근거정초, 즉 객관주의적 정초에서 비롯된다. 근대철학은 정신을 신체적 영혼으로 간주하고, 능력으로서의 영혼이 작동하기 위한 자료를 외부에서 도입한다. 이 때 세계는 영혼의 외부에 존재하면서, 영혼에 필요한 체계적 자료들을 공급하는 장소이다. 영혼은 자체의 부족한 자료때문에 세계의 체계를 이해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근대철학에서 정신은 백지의 영혼으로 간주된다. 정신의 내용인 세계는 영혼 밖에 존재하는 또는 존재해야만 하는 세계로 취급된다. 정신의 상관자인 자연과 세계를 대치한 근대철학은 세계에 대한 물음과 자연에 대한 물음을 동일시한다. 근대적 영혼은 세계에 대한 정보를 외적으로 획득하기 때문에 세계의 존재의 의심한다는 것은 지금 자신이 획득한 정보의 부재를 의심하는 것이고,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으로 될 수 밖에 없다. 또한 세계에 대한 의심은 오로지 세계에서 주어지는 소여인식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영혼의 오인가능성에서 영혼의 내적 문제이다. 따라서 후설이 간파하듯이 “생활세계는 일상적 삶의 영위에서는 결코 문제로 되지 않으며 문제로 삼을 필요가 없다.” 세계가 앞서 이미 영혼 밖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자명한 진리이며, 이 세계를 인식하는 주관적 차이, 즉 개별적 차이를 극복함이 문제일 뿐이다. 후설은 일체의 편견으로부터 해방될 것을 결심한 철학자의 경우에도 그러한가?라고 반문함으로써 세계의 선소여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세계의 선소여성에 대한 물음은 오직 “세계 전체”를 문제로 고찰할려고 할 경우에만, 즉 세계의 경험적 가상 가능성이 아니라 세계의 선험적 가상을 문제로 삼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생활세계의 “앞서 미리 주어져 있음”이 객관주의적 해석처럼 세계의 선재성과 독립성으로 해석되어야 할 하등의 근거가 없다. 오히려 세계의 선소여성의 자명성은 객관주의적 태도의 한계를 설정하고 선험철학적 해명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근거일 수도 있다. 또한 후설의 현상학적 고찰에 대한 반론들, 즉 선험적 태도의 공허화에 대한 지적이나 유아론적 해명이라는 비난 또는 세계의 선험적 가상가능성에 대한 물음을 중단하려는 시도들이 현상학적 태도에 대한 빗나간 해석임을 확인시켜주는 근거일 수도 있다. 후설이 철학적 사유의 출발을 생활세계에 대한 되물음에서부터 시도하는 것은 세계에 대한 신화적 해석이나 논증적 해석을 부가하거나, 또는 세계에 대한 이해되지 않은 전제를 남겨두지 않으려고 함에 있다. 실제로 세계에 대한 현상학적 해명도 새로운 세계를 창출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명증적인 이해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후설은 “그러나 철학자에게는 바로 이 점에서 그리고 ‘객체로서 세계 속에 있는 주관성’과 동시에 ‘세계에 대해 있는 의식주체’라는 사실의 공존관계 속에서, 즉 이것이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를 이해해야 할 필연적인 이론적 문제가 놓여 있다”고 말한다. 후설은 생활세계를 바라보는 두가지 방식을 구분한다. 즉 자연적 태도(삶)에서 생활세계를 주제화하는 방법과 이와 전혀 다른 새로운 태도, 다시 말하면 현상학적 태도에 의해서 주제화하는 방법을 구분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정교한 방법적 수행이 요구되며, 이 방법을 수행함으로써 태도의 “일대전환”을 획득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은 절차를 필요로 한다. 그는 우선 주관적-상대적인 것으로 밀쳐졌던 영역이 갖는 의미를 해명하기 위해서 객관적 학문의 정립 일반을 에포케(Epoché)한다. 그는 다음으로 주관적-상대적인 것의 존재방식에 대한 물음을 통해서 생활세계의 선소여성에 대한 오해와 이에 따른 결과인 심리학적 태도를 분석함으로써 현상학적 태도의 의미를 해명한다. 특히 개체적 의식과 세계의식의 구분을 통해서 자아성의 성격, 즉 육체적 자아성과 영적 자아성의 근본적 차이를 해명함으로써 선험적 자아에로 환원이 정당화된다.
객관적 학문에서 “세계와 자아”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역설은 배후에 묻혀 있다가 세계에 대한 모든 해명을 무효화하는 근거로서 등장한다. 이 역설은 해명되지 못한 채로 유럽학문 속에서 끊임없는 성찰의 동기로서 작용한다. 이 동기는 주로 객관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또는 회의주의를 자극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지만, 후설에 이르러 선험적 동기로 포착된다. 왜 이 역설은 해명되지 않은 채로 남겨져 있었는가? 이는 정신(Geist, nous)과 영혼(Seele, psyche)의 차이가 간과됨에 기인할 것이다. 자연(physis)이 단순히 물리적 자연으로 의미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추상적으로 자연을 고착화시키고, 자연의 활동성을 물체적 운동이나 에너지의 운동으로 파악하는 자연과학적-객관주의적 자연관에서 자연과 정신의 상관성이 은폐되고 종국에는 망각되었다. 자연과학적 태도에 의하면, 정신이란 객체인 자연을 신체의 감관를 통하여 파악하는 영혼이다. 이러한 영혼으로 자연에 대한 전체적 이해란 한갖 사변적 가능성으로만 인지될 뿐, 결코 현실적인 가능성으로 이해되지 못한다. 여기에는 자연의 상관자인 정신이 언제나 배제된다. 이러한 사유태도의 전형이 자연과학적 탐구태도이고, 이를 모형으로 하는 실증주의적 탐구 역시 동일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인 정신은 언제나 자연과의 교감 속에서만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교감의 極(Pol)을 치워버림으로써 그 드러남도 함께 배제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제는 자아삶의 맥박(Puls)을 멈추어 놓고서 맥박을 재어보려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생활세계”는 일상적인 의미의 자연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그는 생활세계를 “근원적인 명증성의 세계이다”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생활세계는 논리학적 규범으로, 또는 수학적 규범으로 파악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생활세계의 명증성에서 논리학적 규범과 수학적 규범의 정당성이 획득된다. 그러므로 “논리적인 것이 논리적이 아닌 것에, 이성적인 것이 이성적이 아닌 것, 가령 감성적인 것에 터전을 가진다는 것이 왜 불가능할까?”라는 물음 자체가 무의미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물음의 토대인 생활세계는 감성적 영역이 아니라 정신적 영역, 즉 문화세계이기 때문이다. 생활세계는 신체적 활동의 공간이지만 결코 신체를 통해서 파악된 세계는 아니다. 오히려 신체는 정신(nous, animus, mens)의 자기객관화이다. 자연적 삶의 영위에서 생활세계는 신체적 주관 또는 신체적 자아에 의해서 파악된다. 그러나 신체적 주관 역시 세계 속의 객체들 중의 한 객체이므로 주관성의 역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실로 후설의 현상학적 태도 이전에는 이 역설을 제대로 보지 못하였고, 이 역설을 해명하지도 못하였다. 데카르트가 회의적 사유의 극점에서 자연적 태도에로 되돌아가게 된 동인도 역설을 제대로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역설은 정신, 즉 영혼(mens sive animus)을 육체, 즉 신체인 영혼(psyche or anima)으로 또는 영혼(psyche)의 한 능력(cogitatio)으로 파악함에서 비롯된다. 후설이 지적하듯이 신체는 “영화된 육체”이고, 영혼은 선험적 자아의 자기객관화이다. 정신이 자연과의 교감 속에서 구체화된 상태가 영혼이고이고, 신체가 그러한 영혼의 구체화이다. 정신, 즉 선험적 자아를 신체에 等立된 존재자인 영혼으로 파악하는 것은 정신의 의미를 망각함에서 비롯된다. 후설은 “생활세계”를 선험적 자아에로 나아가는 사다리로 사용하고 있을 뿐 종착점으로 삼지 않는다. 후설은 생활세계와 자아의 상관성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에 관심을 두고 있다.
생활세계는 자연과 인간의 교감에서 등장하는 세계이다. 그래서 생활세계는 근원적 명증성의 세계이다. 그렇지만 다른 편으로는 생활세계 이전에 생활세계의 근거로서의 자연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자연은 실재가 아니다. 실재하는 자연은 이미 자연이 아니다. 자연은 인간의 교감에서 생활세계로 드러나며, 이 자연은 총체적 개념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자연은 인간 삶의 결과물을 수용함으로써 더욱 풍요롭게 된다. 여기에서 자연은 문화산물의 외형을 포함한다. 인위와 자연을 이분법적 도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구분한 연후에야 비로소 가능할 뿐이다. 그러므로 후설은 생활세계를 다른 한편으로 문화세계로서 표현하게 된다. 생활세계의 선소여성은 정신이 형성되기 위한 필연적인 요소이면서 동시에 정신의 자유로운 발현을 위해서 때때로 극복해야될 제약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후설은 생활세계가 자연적 삶(Dahinleben) 속에서는 결코 주제로 등장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파악한다. 신체가 이 생활세계에 익숙하게 겉침없이 영위되는데, 이를 억지로 문제삼는 것은 전혀 다른 태도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설은 “철학자는 생활세계의 자명성을 수수께끼로 삼아야 한다”고 의식적으로 말하게 된다. 왜냐하면 원천적으로 생활세계는 구성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 구성의 원천은 누구인가’라고 철학자는 물어야 한다. 생활세계의 자명성을 문제삼을 경우에만 우리는 ‘자연과 정신’의 선험적 상관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후설이 선험적 환원의 온전한 단계에서 그려내는 문(Tor)은 생활세계로부터 자연과 정신의 선험적 상관관계, 즉 선험적 영역에로 나가는 문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사람을 틀 속에 가두어두려는, 널리 이해될 수 있는 인간으로 한계지우려는 어떤 제약도 거부하는 몸짓이 이른바 “선험적 환원”의 특성이다. 그래서 후설은 “철학자의 유일무이한 고독”을 말하게 된다.

3. 형이상학의 완성으로서의 현상학 ― 정신(선험적 자아)의 발견
철학은 본질적으로 “편견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한다. “편견으로부터의 해방”은 궁극적으로 자기폐쇄로부터의 초월이 된다. 철학의 이러한 성격에서 현상학은 자기반성적 태도로 진행된다. 그래서 현상학은 세계적 태도들에 참여하기 보다는 “세계에 대한 방관자의 입장”을 유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관자의 입장에서 비로소 철학은 인간이 가진 수많은 세계적인 태도들(세상살이)의 근원을 추적하고 여러 태도들을 자리매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상학은 철학의 근원적인 본질에서 출발하기 위해서 자신을 포함한 세계에 대한 정립을 중지시킨다.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은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와 마찬가지로 사유주체의 자기반성에서 출발한다. 철학적 반성은 그때그때의 목적에 부합되게 시행되는 반성이 아니다. 철학적 반성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철저한 탐구를 통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후설은 자기 이전의 철학적 반성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그들이 주로 인간을 심신이원론적 파악하면서 정신과 영혼을 구별하지 않은 채로 자기반성을 수행했다고 비판한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의 반성은 객관주의에로 진행되거나 유아론적 세계해석으로 남게 되고, 자연주의적 태도의 소박성을 극복할 수 없었다. 후설은 그러한 반성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정신과 영혼을 구별하고, 영혼을 정신(즉 선험적 자아)의 외화성 즉 자기객관화으로 파악한다. 후설은 데카르트의 방법에 감추진 전제를 폭로하고 정신의 자기성찰을 수행가능하게 한다. 데카르트는 영혼(anima, or psyche)과 영적 자아(animus, or mens)를 동일시함으로써 영적 자아를 영혼(신체적 자아)의 한 속성으로 다루게 된다. 하지만 후설은 영혼과 정신의 구분을 통해서 생활세계의 구성이 ‘영혼에 의한 세계의 구성이 아니라, 정신(선험적 자아)에 의한 세계구성“임을 현상학적으로 해명한다. 이 현상학적 해명을 유아론적 해명이라고 비난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비난은 심신이원론적 태도에 입각한 세계해명의 내면적 모순성을 인정하는 비난이지만 현상학적 해명에는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은 영혼과 정신의 구분을 통한 “정신(animus or nous)”의 발견과 연관지워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후설의 정신개념은, 후설 자신이 칸트와의 단절을 스스로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칸트에 의해서 구체화된 오성의 수동성과 능동성과 대비하여 이해될 수 있다. 물론 후설은 칸트가 생활세계의 발견하고도 오성의 수동적 성격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생활세계의 의미를 망각하였다고 비판한다. 칸트는 자연의 외부실재성에 대한 확신에서 오성의 비자발성을 강조하고, 영혼이 구성한 현상세계를 인식적으로만 한정한다. 하지만 인간적-정신적 삶이 펼쳐지는 현상세계는 인식이론적 해명의 영역만은 아니다. 감정을 함유한 의지의 영역이며, 이 영역은 오직 인간 자신의 결단에서 세계로서의 의미가 부여된다. 따라서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의지자율성이 간과될 수 없다. 칸트는 현상세계의 인식론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서 의지의 인식관여적 성격을 간과하였다. 후설은 현상세계에 경험적-인식적 성격과 선험적-의지적 성격이 동시동연적으로 존재함을 확인하고, 세계에 선험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정신(선험적 자아)이 현상세계와 분리된 실체론적으로만 이해되어야 할 이유가 없음을 충고하고 있다. 칸트는 영혼의 실체론적 이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자아의 경험적 통각을 인정하지만 선험적 통각은 원리적 가능성으로 파악한다. 자연주의적 태도에서 본다면 선험적 통각의 가능성은 영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법칙에 따라서 운행되는 자연으로부터 추정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후설은 자연과 자아의 관계를 역전시켜서 파악한다. 자연은 오직 선험적 자아와의 상관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혼돈에서 질서로 드러나게 된다. 질서를 한 세계가 정립된 양태로 후설은 파악한다. 혼돈과 질서를 세계의 두 양태로 파악하게 되면 선험적 자아가 혼돈에 질서를 부여한다는 의미는 선험적 자아를 각각의 양태에서 독자적으로 존립하는 자아로 파악하게 한다. 이는 후설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나아가게 된다. 그들은 필경 현상학적 태도를 유아론적 태도로 간주하게 될 수밖에 없게 된다. 여기서 후설은 현상학적 자기반성과 자연적 반성의 차이를 강조하게 된다.
후설은 우선 “객관주의적 정립”에 대한 판단중지를 통해서 생활세계를 밝혀내고, 생활세계에 대한 분석과 “심신이원론적 이해”에 대한 판단중지를 통해서 생활세계의 창출자인 선험적 자아에로 환원을 수행하도록 권고한다. 물론 후설도 플라톤이나 데카르트와 동일한 비판을 맞기도 한다. 즉 현상학적 방법도 영혼실체론적 입장을 토대로 하는 유아론적 해명에 불과하다는 비난이다. 이에 대해서 선험적 환원의 성격을 재정초함으로써 후설은 자아에 대한 현상학적 해명이 영혼실체론적 해명이나 영혼현상론적 해명으로 이해될 수 없음을 부각하려 한다. 후설은 에포케와 환원에서 드러난 생활세계와 선험적 자아의 관계를 “세계 속에서 구성된 것과 구성하는 자의 경험주의적인 관계”가 아니라 선험적인 상관관계로 해명한다. 경험주의는 자아가 구성하는 자로서 세계로부터 구성자료를 부여받고 이를 구성한다는 자아 개념을 취한다. 이에 반해서 후설은 선험적 자아의 생활세계 구성은 그와 다른 지향적 구성임을 강조한다. 즉 생활세계는 선험적 자아에 대해서 이미 앞서 주어져 있는 세계가 아니라 선험적 자아에 의해서 비로소 그 의미를 부여받는 세계이다. 물론 후설은 생활세계에 앞서 선험적 자아가 앞서 존재하고 있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생활세계의 구성에서 본다면 “질료(hyle) ―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자연”와 “선험적 자아”는 생활세계의 두 極이다. 양극은 경험적 태도에서 발견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후설은 자아가 실체도 현상(관념의 다발)도 아님을 의도한다. 선험적 자아는 세계 속에 내재하는 자아가 아니라, 세계의 존재의미를 되물음에서 비로소 발견되는 자아이다.
자기반성, 즉 선험 현상학적 반성에서 우리는 세계의 존재와 비존재에 관한 보편적인 판단중지을 통해서 객관주의적 지반으로부터 해방된다. “반성의 과제는 실로 근원적인 체험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체험을 관찰하고, 그 체험에서 발견되는 것을 해석하는 일이다. 이러한 관찰에로의 移行은 새로운 지향체험을 산출하며, 이 새로운 지향체험은 이전의 체험으로 소급하여 관계한다고 하는 지향적 고유성에서 다른 체험이 아닌 바로 이전의 체험 자체를 의식하게, 그것도 명증적으로 의식하게 한다. 이러한 반성에서 인식의 주체는 세계에 관심을 갖는 자아 ― 세계 가운데 들어가서 자연적인 방식으로 경험하고 그 밖의 어떤 방식으로 살고 있는 자아를 세계에 관심을 갖는 자아라고 부른다 ― 위에 현상학적 자아가 세계에 관심을 갖지 않는 방관자로서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자아분열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새로운 반성을 통해서 접근가능하며, 이 반성은 선험적 반성으로서 그 수행에서 정말 무관심한, ― 그에게 관찰하고 충전적으로 기술할려는 관심만이 있는,방관자의 태도를 요구한다.”
현상학은 본질적으로 형이상학의 본래적인 자기반성적 태도로 일관한다. 현상학의 근본주제는 “자연과 정신의 상관관계”, 즉 생활세계와 선험적 자아의 상관관계에 대한 해명이다. 상관관계의 양극인 자연과 정신은 일상적인 의미에서 자연이나 정신이 아니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자연은 이미 규정된 자연이고, 정신은 그 존재가 확정된 정신이다. 과학적-객관주의는 이러한 자연과 정신을 탐구하고, 그 결과치로 자연과 정신의 관계를 설명하려 한다. 다시 말하면 객관주의적 탐구는 이 규정된 자연과 정신을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윤곽지우는 탐구이다. 그러므로 이미 의미규정된 사례들을 통해서 의미부여하는 행위 자체를 검토할 수 없다. 이러한 검토의 시도는 무의미하게 되며, 종국에는 허무주의에로 귀속될 뿐이다. 왜냐하면 정신에 대한 객관주의적 탐구는 의미규정의 원천을 원리적으로 무한소급시키고 규정된 의미조차 무의미한 사례들로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미규정하는 원천, 즉 자연과 정신의 상관관계에 대한 탐구는 객관주의적 이론적-실천적 태도를 벗어남에서 가능하다.
현상학은 객관주의적 태도를 벗어나는 방법론이라는 성격을 일차적으로 가졌다. 객관주의로부터의 해방에서 우리는 정신에 대한 근원적 탐구를 수행할 수 있다. 현상학은 자연과 정신을 독립된 두요소로 파악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상학은 미리 주어진 생활세계의 존재의미를 주관적 구성물로 파악하고, 무엇이 이 세계에 객관적으로 속해 있는가 하는 단순한 물음이 제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에 있어서 제 1의 것인 주관성, 세계의 존재를 소박하게 미리 부여하고 그런 다음에 합리화(rationalisieren)하는 혹은 객관화(objektivieren)하는 주관성으로서 이해된 주관성”을 해명한다. 왜냐하면 주관성에 대한 해명을 통해서, 주관성의 내용과 더불어 그리고 학문 이전이나 학문적인 모든 방식으로 세계의 모든 타당성들을 궁극적으로 성취하는 주관성에로, 그리고 이성이 수행한 작업의 내용(Was)과 방법(Wie)에로도 되돌아가서 철저하게 문제삼는 것만이 객관적 진리를 이해하도록 만들 수 있으며 세계의 궁극적인 존재의미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상학은 본질적으로 철저한 주관주의적 태도를 형성한다.
객관주의적 태도는 정신(animus)을 영혼(anima)으로 대체하여 객체화하고 배제함으로써 정신, 즉 삶의 생동성(puls)을 망각하였다. 이에 반해서 후설은 “반성하는 삶 속에서 경험된 세계의 주체”를 영혼이 아니라 정신으로 파악하면서 세계구성 주체, 즉 정신의 작용을 중지시켜고 있을 뿐이다. 후설은 철학적으로 반성하면서 경험의 자연적인 존재신념을 수행않으며, 경험된 세계가 ‘나는 생각한다’는 사유작용(cogitationes) 속에서 의식되어 존재하고 나에게 타당한 세계 이외에 결코 다른 것이 아님을, 즉 사유작용 속에서 자신의 세계 삶 전체가 경과하며,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정초지우는 자신의 삶도 경험된 세계 삶에 속한다는 사실을 해명한다. 철학이 사변적 형이상학으로 전락하게 된 이유도 경험세계의 구성주체를 분석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경험적 주체, 즉 정신을 반성영역에서 추방함에서 비롯된다. 경험세계의 정신은 앞으로 전복되거나 변화될지라도 인간적 삶을 이끌어오는 태도이며, 이 태도에서 인간적 삶의 현장이 펼쳐졌었다. 인간적 삶의 현장을 단순히 폐기함은 바로 인간적 존재성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에 다름아니다. 따라서 현상학은 세계의식을 그 익명성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선험적인 것에로의 진입”을 성취하며, 즉 “통체적‧보편적 주관성의 영역으로서 선험적인 작업영역”을 획득한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후설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소박하지 않는 자연적인 태도에로 복귀함에서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일을 결과로서 가지게 된다: “나는 선험적 자아로서 결국 세계성내에서 [존재하는] 인간적 자아와 동일한 것이다. 인간성에 있어서 나에게 은폐되어 있었던 것을 나는 선험적 연구를 통하여 드러낸다. 선험적 연구자체가 세계-역사적인 과정인 것은, 선험적 연구가 세계자체의 구성역사를 확장하는 한에서 그러하며, 이러한 확장은 단순히 새로운 학문을 역사에 추가함으로써 성취될 뿐만 아니라, [또한] 세계의 내용을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풍부하게 함으로써도 성취되는 것이다; 모든 세간적인 것은 그것의 선험적인 상관자를 보유하며, [그러기에] 인간연구가에게, 심리학자에게, 새로운 발견(Enthüllung)이 있을 때마다, 세계내에 존재하는 인간에게는 새로운 규정들이 부가되는 셈이다.”

4. 결 론
현상학적 자기반성에서 관찰되고 기술되는 것은 “추정적인 모든 존재자, 모든 사물, 가치들, 목적들에 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이성”이다. 이러한 이성을 거부하는 것은 “세계가 자신의 의미를 갖게 되는 ‘절대적’ 이성에 대한 신념, 역사의 의미나 인간성의 의미에 대한 신념, 즉 인간의 개별적 현존과 보편적 인간의 현존에 이성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인 인간의 자유에 대한 신념”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 구체적이고 주체적 존재를 배제한 객관주의는 무의미한 이론을 산출하게 된다는 사실이 객관주의적 태도에서 출발한 자연과학들이 보여주는 연구성과에서 확인될 수 있다. 자연과학자들이 양산해내는 성과물들은 이미 인간적 삶에 무관하게 산출되며, 인간에게 뒤집어 씌우지는 죽음의 올가미에 불과하다. 인간 자신으로부터 필요에서 연구되지 않은 성과물은 인간으로 하여금 필요를 느끼도록 강요하며, 이 강요를 교묘한 유혹으로 위장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과학적 이론과 그 산물이 없으면 살지 못할 것처럼 믿으며 확신한다. 이 믿음과 확신에 도전하는 어떤 思想도 단호히 거절된다. 비롯 그 사상이 인간의 삶 속에서 인간적인 본질을 형성하고 있고 그래서 그 사상의 부정이 인간의 자기존재의 부정으로 이어진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그 사상을 단호히 부정해야 한다고 작심하고 있다. 사람들이 과학 문명에 굴복하여 과학적 방식으로 접근하는 내용만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하였으나, 과학적 문명의 급격한 발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과학적 사고방식의 급격한 변질을 확인하지 못한 채 그렇게 작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형이상학은 부질없는 사변에 불과하고, 누구도 형이상학을 통하여 우리를 계몽하지 못하며 ― 우리의 계몽은 오로지 과학에 의해서만, 그것도 과학적 통계수치만에 의해서만 정확히 우리를 계몽할 수 있는 것으로 믿는다 ― 만일 아직도 형이상학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의 소일거리로서 소용될 뿐인 것으로 결정내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표면적으로만 철학으로서의 형이상학에 대한 경건한 주목의 표시를 보여줄뿐, 내면적으로는 항상 경멸하고 조소한다. 모든 것을 과학적 이론으로 결정하는 과학만능주의 시대에 과학적-객관적 이론에 대한 거부는 또다시 과학적-객관적 이론으로 제시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도 이러한 과학의 시대 속에서 과학 문명에 대한 염증의 빛이 일렁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과학적 이론이 공상으로 보여서 일까? 사람들은 과학적 이론을 무의미한 이론으로 자각함에서 허무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태도의 일면성에서 비롯되는 이론의 불확실성에서, 전체성을 추구함에도 채우지지 않는 허망함에서 당혹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사람들은 무엇으로 이론의 전체적 성격을 확보할 수 있는가를 문제삼는다.
우리는 어디에서 이러한 과학적 독단, 즉 객관주의의 꿈으로부터 깨어날 수 있는가? 이 물음은 오직 하나 ‘진정한 형이상학적 태도’, 즉 철저한 주관주의적 태도를 형성하는 현상학적 태도 속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고, 해소될 수 있다. 후설의 현상학은 과학적 독단, 즉 객관주의의 소박성을 각성하고 객관주의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후설은 현상학적 태도에서 비로소 “경험하고 인식하며 실제로 구체적인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주관성을 전혀 문제로 삼지 않고 ‘객관성’에 대해 논의하는 소박함”이, 그리고 “과학자가 객관적인 것으로서 획득한 모든 진리들과 자신의 공식들에 있어서 基體인 객관적 세계 자체(일상적인 경험의 세계뿐만 아니라 높은 단계에서 이루어진 개념적인 인식의 세계도 마찬가지로)는 그 자신 속에서 형성된 그의 특유한 삶의 구성체(Lebensgebilde)라는 사실에 대해 맹목적인 과학자가 자연이나 세계 일반에 대해 논의하는 소박함”이 관심의 초점 속으로 들어오며, 그 작동이 중지된다고 강조한다. 후설은 이러한 자기반성의 수행을 철학의 출발점으로, 즉 철저한 자기반성을 철학의 근본적인 태도로 파악한다. 그래서 후설은 “모든 철학자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한번은 자기반성의 절차를 밟아야만 하고, 만약 그가 자기반성을 수행치 않았다면 ― 비록 그가 이미 ‘자신의 철학’을 실제로 갖고 있다 하더라도 ― 그는 자기반성의 절차를 밟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자기반성에 의한 현상학적 판단중지는 “명백하게 이제까지의 모든 학문들 ― 여기에는 심지어 필증적 명증성을 요구하는 수학조차 그 예외가 될 수는 없다 ― 의 타당성뿐만 아니라, 더욱이 학문 이전의 그리고 학문 이외의 생활세계 ― 따라서 항상 아무런 문제도 없는 자명한 사실로 미리 주어져 있는 감각적 경험의 세계와 이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영양분을 얻는 모든 사고생활, 즉 비학문적 사고생활과 결국에는 학문적 사고생활의 세계도 포함하는 생활세계 ― 의 타당성도 포괄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학적 판단중지에서만 우리는 “철학적 인간성을 통해서 철저하게 수행해 나가는 의지성향의 계승자이자 공동 담지자들인 진정한 우리 자신의 모습”에로 되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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