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만하임과 월러스틴의 유토피아론 비교

나뭇잎숨결 2020. 10. 13. 12:25

유토피아와 유토피스틱스
: 만하임과 월러스틴의 유토피아론 비교

손철성(서울대 )


영문제목: Utopia and Utopistics
: A Comparison of Mannheim with Wallerstein in the Theories of Utopia
발표: {哲學}(제67집, 2001년 여름호), 한국철학회, 2001.5.30.


<논문 요약문>
유토피아는 새로운 미래 사회에 대한 전망과 함께 이를 지향하는 역동성을 우리의 삶에 부여한다는 점에서 매우 소중하다. 이러한 유토피아론이 비판적 사회 이론에서 제대로 자리매김되기를 기대하면서, 이 글에서는 근대적 유토피아 개념의 전형을 확립한 만하임과 최근에 '유토피스틱스'라는 개념으로 유토피아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월러스틴의 입장을 비교한다.

만하임은 기존 질서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파괴적인 실현 가능성이 있는 존재 초월적 의식이나 사고를 유토피아라고 본다. 이러한 유토피아 개념은 근대적 유토피아 개념의 핵심을 잘 지적하고 있는데, 근대적 유토피아는 고전적 유토피아에 비해 기존 현실에 대해 훨씬 더 비판적으로 작용하면서 현실을 변혁시킬 수 있는 실천적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유토피아를 이데올로기로부터 구분하려는 만하임의 시도는, 상대주의를 함축하고 있는 그의 전반적인 지식 사회학적 관점에 정합적으로 수용되기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에 비해 월러스틴의 '유토피스틱스'는 역사적으로 실현 가능한 대안적 체제들의 실질적 합리성을 평가하기 위한 학문적 활동으로서 과학, 정치학, 도덕 등 제반 학문의 통합적 연구를 요구한다. 이것은 현실 비판성, 실현 가능성 등 여러 측면에서 만하임의 유토피아 개념과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월러스틴은 만하임과 다르게 실질성 합리성에 대한 평가를 강조함으로써 만하임에게 가해진 상대주의라는 비판을 극복하고 유토피아에 대한 가치 평가가 들어설 자리를 마련하려고 했다.

<주제 분류> 사회 철학, 정치 철학
<검색어> 유토피아, 유토피스틱스, 근대적 유토피아, 만하임, 월러스틴, 한소트


1. 만하임의 유토피아 개념

블로흐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가능성을 기대하고, 희망하며 그리고 그것을 지향하는 것"이 인간 의식의 기본 형태라고 하면서, 인간의 삶에서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으로서의 유토피아가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만하임도 "유토피아적인 것의 완전한 소멸은 전체적인 인간화의 형태마저도 변화시키고", "인간 자신이 사물로 전락하는 정태적인 사물성(statische Sachlichkeit)의 상태를 만든다"고 하면서 유토피적 의식이 약화되고 있는 현실을 우려하였다. 이러한 지적처럼 유토피아는 새로운 미래 사회에 대한 전망과 함께 이를 지향하는 역동성을 우리의 삶에 부여한다는 점에서 매우 소중하다고 본다. 필자는 이러한 유토피아론이 비판적 사회 이론에서 제대로 자리매김되기를 기대하면서, 근대적 유토피아 개념의 전형을 확립한 만하임과 최근에『유토피스틱스』라는 저작으로 유토피아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월러스틴의 입장을 서로 비교하려고 한다.

칼 만하임은『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에서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의미로 통용되는 유토피아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버리고 이 개념을 엄밀하게 규정하려고 시도한다. 이를 위해 만하임은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데올로기 개념과 유토피아 개념을 서로 비교하고 있다.

유토피아적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존재'와 일치하지 않는 상태에 있는 의식, 즉 '현실 초월적 의식'을 뜻한다.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것에도 마찬가지로 현실 초월적 특성이 있기에 이런 측면에서는 유토피아와 이데올로기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기존 질서와 합치될 수 없는 표상들은 그와 같은 생존 질서 내에서는 스스로가 갖고 있는 내용을 도저히 작용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와 같은 표상에 의존해서는 결코 우리가 기존의 질서 내에서 생활할 수도 행동할 수도 없다. 따라서 이러한 표상들은 '존재 초월적'(seinstranszendent)이거나 비현실적인(unwirklich) 것이다. 이러한 존재 초월적 관념 형태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이다. (IU,170-171쪽 참조)
그런데 만하임은 유토피아적이라는 것을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현실 초월적 방향 설정에만 국한시킴으로써 유토피아적 의식을 이데올로기적 의식과 구분하고 있다.

"행동의 단계로 넘어가면서, 그때그때마다 현존하는 존재 질서를 부분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파괴해버리는 '현실 초월적인'(wirklichkeitstranszendent) 방향 설정만을 유토피아적이라고 말해야 한다."(IU,169쪽)

유토피아적인 것은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성격을 지닌다. 즉 현존하는 질서를 부정하고 비판한다. 반면에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기존 생활 체계를 실현하거나 또는 재생산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존재를 초월하는 관념 세계가 일정한 현실적인 역사적 단계에 속하는 세계상 속에 '유기적'으로 즉 변혁적인 작용이 없이 합일화되어 있을 때, 이 관념은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한다.

이처럼 유토피아나 이데올로기는 둘다 존재와의 불일치성을 빚고 있는 존재 초월적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지만, 그러나 기존의 '존재 구조'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지 여부, 실현 가능성의 여부에 따라서 서로 구분된다. 이데올로기의 표상은 그 내용이 실질적으로 실현되기가 도저히 불가능한 경우이다. 행동의 동인은 될 수 있지만 그러나 이데올로기적 성격, 즉 허위성을 띨 수밖에 없다. 이데올로기적 관념의 내용은 행동 과정에서 변질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노예 제도에서 기독교적 박애 정신은 존재 초월적이지만 그러나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이데올로기적이다. 이에 비해 유토피아적인 것은 존재 초월적이면서도 동시에 실현 가능성이 있다. 기존의 질서를 비판하고 파괴하여 새로운 이상과 관념을 현실 속에서 실현시킬 가능성을 갖고 있다.

"유토피아도 역시 존재 초월적인데, 왜냐 하면 유토피아도 역시 현실화된 존재가 내포하지 않은 요소들의 방향으로 우리의 행동을 이끌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유토피아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유토피아는 반작용을 통해 기존의 역사적 존재의 현실성을 자신의 표상의 방향으로 변형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가 아닌 것이다." (IU,172쪽)

만하임은 이렇게 유토피아 개념의 의미를 규정하는 작업을 통해서 역사적 사유 속에서 개념을 정의하는 일이 얼마나 미래적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하면서, 절대적 유토피아와 상대적 유토피아를 구분한다.(IU,173쪽 참조) 절대적 유토피아(die absolute Utopie)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이에 비해 상대적 유토피아(die relative Utopie)는 상대적으로만 불가능한 것, 즉 현존 단계에서 볼 때 실현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으로 다른 존재 질서 속에서라면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유토피아적 의식과 이데올로기적 의식은 존재 초월적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유토피아적 의식은 기존 질서에 파괴적으로 작용하면서 실현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 의식과 구분된다. 이데올로기적 의식은 실현 가능성이 없이 단지 기존 질서를 재생산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만하임의 유토피아 개념은 '기존 질서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파괴적인 실현 가능성이 있는 존재 초월적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만하임의 유토피아 개념에서는 존재 초월성, 현실 비판성, 실현 가능성이 핵심적 요소가 되고 있다.


2. 근대적 유토피아 개념

만하임의 이러한 유토피아 개념은 근대적 유토피아 개념의 핵심을 잘 지적하고 있다. 근대적 유토피아는 고전적 유토피아에 비해 기존 현실에 대해 훨씬 더 비판적, 파괴적으로 작용하면서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실천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존 워링턴은 모어의『유토피아』를 소개하는 '서문'을 쓰면서 플라톤의『국가』나 모어의『유토피아』와 같은 고전적 유토피아와 17, 18세기의 근대적 유토피아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고 하면서 그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플라톤의『국가』 이래로 이상적인 법률과 제도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의 모습을 그리는 것은 사상가들이 즐기는 작업이 되어왔다. 그러나 오하갠 판사가 말하고 있듯이 18세기 이래 '이러한 상상의 놀이는 아주 다른 형태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이러한 공상을 실제적으로 실현하려는 계획으로 변형되어졌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광신적인 옹호자들을 얻게 되었다.'"

고전적 유토피아가 공상적인 상상이나 도락에 그친 반면에 근대적 유토피아는 사회 변혁의 계기나 도구로 기능하기 시작하면서 실천적 성격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17, 18세기를 전후로 유토피아 사상가들의 관점이 이렇게 많이 달라진 점에 주목하여 이 시기를 기준으로 한소트(Hansot)는 고전적 유토피아와 근대적 유토피아를 구분하였다. 고전적 유토피아(classical utopia) 사상가에는 플라톤, 토마스 모어, 베이컨, 캄파넬라, 안드레애 등이 속하며, 근대적 유토피아(modern utopia) 사상가에는 꽁트, 생시몽, 마르크스, 헉슬리, 벨라미, 웰즈, 호우웰즈 등이 속한다.
한소트에 따르면 고전적 유토피아와 근대적 유토피아는 추구하는 목적이 서로 다르다. 고전적 유토피아는 "고정된 판단 기준을 제공하고 그리고 사고 속에서 이념을 명료하게 하려고" 한다. 이에 비해 근대적 유토피아는 "현실을 변화시켜 유토피아와 현실을 일치시키려고" 한다. 따라서 근대적 유토피아가 유토피아적 전망을 현실화시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고전적 유토피아보다 훨씬 더 실천적 성격이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소트가 지적하고 있는 고전적 유토피아와 근대적 유토피아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PP,9쪽-10쪽 참조)
첫째, 변화의 대상이 서로 다르다. 고전적 유토피아는 우선적으로 개인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데서 출발한 것이지, 사회 변화의 모델로서 처음부터 제시된 것이 아니다. 이에 비해 근대적 유토피아는 일차적으로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는 데서 출발한 것이다.
둘째, 현실 사회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관점이 서로 다르다. 고전적 유토피아에서 시간과 공간 개념은 우연적이며 과학적 사고의 본질적 범주가 아니다. 공간적 연관 대신에 논리적 연관이, 시간적 전개 대신에 잠재태가 현실태가 되는 영원한 과정이 차지하고 있다. 이에 비해 근대적 유토피아에서는 유토피아가 가까운 장래에 현실화될 것이라고 희망하고 기대한다. 근대적 유토피아는 본질적으로 시간에 의해서 방향지워져 있다.
셋째, 유토피아의 상태가 서로 다르다. 고전적 유토피아는 정태적이고(static) 발전이 없는 완전한 사회이다. 이러한 고전적 유토피아의 불변성은 인간 본성의 불변성에 대한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이에 비해 근대적 유토피아는 변화를 유토피아 사회의 통합적 부분으로 수용하여 동태적이고(dynamic) 진보적이다. 즉 유토피아 사회 자체가 완결된 형태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변화 과정을 겪는 것으로 제시된다.
이처럼 고전적 유토피아는 정태적 상태로서 시간과 공간 개념이 결여되어 있으며, 인간 본질의 불변성을 토대로 개인의 완성을 추구한다. 이에 비해 근대적 유토피아는 동태적이고 진보적인 상태로서 시간과 공간 개념에 입각해 있으며, 인간 본질과 사회의 변화 가능성을 토대로 사회 구조의 변화를 추구한다.
고전적 유토피아는 인간과 사회를 측정하는 불변의 기준을 제공함으로써 '판단 기준'(standard of judgment)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러한 '판단 기준'은 기존 현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지만, 그러나 유토피아가 직접적으로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즉 유토피아가 변화를 위한 적극적인 제안이나 대안은 아니다. 이에 비해 근대적 유토피아는 '사회 비판'(social criticism)을 위한 수단의 역할을 담당한다. 유토피아가 기존 현실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위한 적극적인 제안이나 대안으로 제시된다. 유토피아가 현실에 대한 부정적 비판임과 동시에 새로운 사회를 위한 긍정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PP, 14쪽 참조)
따라서 고전적 유토피아에서는 유토피아가 "현실을 판단하는 도구로서 효과적인지 그렇지 않은지"가 문제가 된다면, 근대적 유토피아에서는 유토피아가 "현실을 변화시키는 도구로서 효과적인지 그렇지 않은지"(PP,16쪽)가 문제가 된다. 고전적 유토피아는 역사성과 현실성의 부족으로 인해 단지 판단과 비판의 기능만을 담당함으로써 실천적 성격이 약했다. 이에 비해 근대적 유토피아는 역사성과 현실성을 갖추고 있었기에 비판의 기능뿐만 아니라 사회의 재구성을 위한 변혁의 도구로 적극적인 대안적 기능을 담당함으로써 실천적 성격이 강했다.
한소트는 유토피아란 통상적으로 생각하듯이 비현실적이고 허구적인 사고가 아니라, 기존 현실을 비판하고 풍자하면서 미래에 대한 인간의 비전을 현실적으로 실현시키려는 의도와 노력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보았다. 유토피아는 단지 한두 가지의 사회 제도를 변화시키기 위한 제안이 아니라, "좋은 삶(the good life)을 위해 필요하거나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주요 사회 제도들을 기술하는 하나의 제안(proposal)"(PP,3쪽)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근대적 유토피아를 중심으로 하여 한소트가 유토피아 개념의 핵심적 요소로 보고 있는 것은 전면적이고 구체적인 적극적 대안성(전망성), 현실 비판성, 실현 가능성, 진보성(행복 증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한소트의 유토피아 개념, 특히 '근대적 유토피아 개념'은 만하임의 유토피아 개념에서 '상대적 유토피아' 개념과 공통적인 측면이 매우 많다. 이들은 둘다 현실 초월적이면서도 동시에 기존 현실을 비판하고 나아가 실현 가능한 대안이나 사상을 제시하여 사회 변화를 유도하는 것을 유토피아의 중요한 특성으로 보고 있다.
만하임의 유토피아 개념에 의해서 대표되는 근대적 유토피아 개념은 고전적 유토피아 개념에 비해서 훨씬 더 비판성과 실천성이 강화되었다. 근대적 유토피아는 초시간적이고 초공간적인 형태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일정한 시간성과 공간성을 갖춘 형태로 제시되었다. 그래서 기존의 현실적 문제나 모순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실현 가능한 대안이나 사회상을 추구하였다. 따라서 근대적 유토피아 개념은 사회 비판적 성격과 더불어 사회 변혁적 성격을 훨씬 더 강하게 띠게 되었다.


3. 만하임의 유토피아 개념의 한계
: 유토피아론과 지식 사회학적 입장의 대립

만하임이 유토피아와 이데올로기를 구분하고 있지만, 이러한 구분은 만하임 자신의 지식 사회학적인 기본 입장과 어긋나는 측면이 있어서 자신의 이론 체계에 정합적으로 수용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만하임은 유토피아와 이데올로기는 모두 존재 초월적이지만, 그러나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파괴하는지 아니면 기존 질서를 옹호하고 재생산하는지에 따라서, 또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 아니면 실현 불가능한지에 따라서 서로 구분된다고 본다. 그런데 만하임에 따르면 이러한 구분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각각의 경우에 어떤 것을 유토피아로 그리고 어떤 것을 이데올로기로 간주할 것인가는, 본질적으로 존재 현실성의 어떤 단계를 척도로 삼느냐에 달려 있다"(IU,172쪽)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존의 질서를 옹호하는 보수적인 지배 계층은 일정한 의미 내용을 실현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유토피아적'이라고 낙인찍는 경우가 많으며, 기존의 질서와 긴장 상태에 있는 급진적인 신흥 계층은 기만된 관념이라는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이라고 폭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IU,177쪽 참조)
또 어떤 것을 이데올로기 또는 유토피아라고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는, 이 두 가지 요소가 역사 속에서 서로 혼동된 상태로 마주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더욱 어려워진다고 한다. 왜냐 하면 오늘의 유토피아가 내일의 현실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흥 부르주와지의 '자유' 이념은 현실성을 내포한 유토피아였다. 그러나 이들이 권력을 획득한 다음에는 그 사회 질서 속에서는 더 이상 실현하기 힘든 것들이 있었기에, 여기에는 이데올로기적 요소도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만하임은 이러한 이유로 현재 진행중인 사상 투쟁에서는 유토피아와 이데올로기를 구분하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이라고 주장한다.(IU,177-8쪽 참조)
만하임의 이러한 주장은 상대주의적 경향을 내포하고 있다. 어느 사상이 유토피아인지 아니면 이데올로기인지를 판단하는 척도가 개인의 가치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만하임이 적절하게 지적하듯이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유토피아가 실현되어 이데올로기로 전환되기도 한다. 따라서 어떤 사상을 시간성을 배제한 채 절대적으로 유토피아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사상 투쟁이 이루어지고 있는 특정한 역사적 단계에서조차 유토피아와 이데올로기를 구분하기 어렵다고 하는 것은 판단을 포기한 상대주의적 태도이다. 비록 만하임이 자신의 입장은 상대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비판 이론가들이 적절히 지적하였듯이 그의 입장은 상대주의적 경향을 내포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만하임은 현재의 사상에 대해서는 유토피아와 이데올로기의 구분이 어렵지만 과거의 사상에 대해서는 이러한 구분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과거의 사상에 대해서는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의 판단 기준은 현실화의 여부이다."(IU,178쪽) 즉 어떤 사상이 실현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은폐 작용만을 했던 이념은 '이데올로기'이고, 이후에 형성된 생활 질서 속에서 적절하게 실현될 수 있었던 이념은 '상대적 유토피아'라는 것이다. 이처럼 만하임에서 현실 타파적인 상대적 유토피아와 현실 은폐적인 이데올로기를 구분하는 것은 역사가 진행된 다음에 사후적으로 가능한다. 현재 진행 중인 사상 투쟁에서는 어느 것이 유토피아이고 어느 것이 이데올로기인지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역사가 이미 진행된 다음에 과거의 사상에 대해서만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후적인 판단은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상 투쟁에 적극적 영향을 주지 못하며 따라서 실천적으로도 거의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헤겔처럼 만하임에게도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이 되어 날 뿐이다. 역동하는 역사가 지난 다음에 단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사후적으로 반추하는 역할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유토피아와 이데올로기의 구분을 상대화시키는 만하임의 이러한 태도는 그의 '지식 사회학적 입장'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만하임은 지식 사회학의 목적이 "이론적으로는 소위 지식의 존재 제약성(Seinsverbundenheit des Wissens)에 대한 학설을 정립하고 완성하는 것이며, 역사적 사회적 탐구로서는 과거와 현재의 지식 내용에서 이러한 존재 제약성을 이끌어내는 것"(IU,227쪽)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지식 사회학적 입장에 따르면 모든 지식과 의식이 존재에 구속되어 있다. 여기서 존재 제약성이란, 이론 외적인 요인 즉 존재 요인이 사유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존재 요인이 사유에 대해 발생론적 의의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나아가 사유의 내용이나 형식, 인식의 시각 구조에까지 결정적 영향을 준다.(IU,230쪽 참조)
존재 상황이란 사상의 역사적 발생에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사유의 결과에까지 구조적으로 깊숙히 관여하면서 내용과 형식에도 반영된다. 이처럼 모든 사상이나 언표 내용을 일정한 시각 구조 더 나아가 이것을 산출한 존재상의 전제라고도 할 일정한 사회 구조와 상호 관련시키는 것이 지식 사회학의 기본 입장이다. 따라서 유토피아나 이데올로기도 마찬가지로 존재와 연관되어 그것에 제약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어떤 것이 유토피아인지 아니면 이데올로기인지를 구분하는 객관적 기준을 제시하기 어렵다. 그래서 만하임은 현재 진행중인 사상 투쟁에서 이러한 구분이 어렵다고 한 것이다.
만하임은 유토피아 개념을 비롯한 모든 지식을 상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만하임이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는 주요 논점들 중의 하나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존재 제약성을 단지 자기의 적대자에게만 적용시키고 있으며 자기 자신에게는 적용시키고 있지 않다고 만하임은 비판한다.(IU,238쪽 참조) 만하임은 이러한 태도가 마르크스주의의 일관성을 해치고 있다고 하면서 이것은 탐구의 원칙을 포기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만하임은 마르크스주의를 단지 다양한 이데올로기들 가운데 새로 나타난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 대해 마틴 제이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만하임은 모든 지식이 각각의 사회적 맥락에 근거하고 있다고 즉 존재에 구속되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비판 이론이 고수했던 참된 의식과 허위 의식 사이의 마르크스주의적인 기본적 구분을 무너뜨린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만하임은 지식 사회학의 관점을 마르크스주의에도 철저하게 적용시켜 마르크스주의를 상대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상대주의적 태도는 만하임 자신이 제시한 근대의 네 가지 유토피아 의식의 유형과 발전 단계에도 나타난다. 만하임은 이러한 유토피아의 형태들에 대해 단지 시대적으로 나열하면서 서로의 차이점을 지적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일정한 역사적 단계에서 자유주의, 보수주의, 사회주의의 사상이 서로 투쟁을 벌일 경우에 어느 것이 유토피아이고 어느 것이 이데올기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만하임은 특정한 계급이나 계층이 처한 상황에 따라 현실 판단의 척도가 달라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단지 이러한 싸움이 끝난 후에 승패가 가려진 다음에야 사후적으로 유토피아와 이데올로기를 구분할 수 있다.
만하임은 자신의 입장이 상대주의를 함축하고 있다는 이러한 비판을 의식하고 있었다. 지식 사회학은 자신의 주제와 관련해서 "천재적 암시를 준 마르크스"(IU,266쪽)에게서 첫 돌파구를 마련하였다. 만하임이 인정하듯이 마르크스주의는 지식 사회학의 기본적 사고 방식을 "최초로 방법론적으로 철저하게 완성하였으며" 그리고 "계급적 이해 관계에 대한 학설을 마무리하였다."(IU,68쪽) 그런데 만하임은 이러한 마르크주의적 관점에서는 상대주의라는 인식론적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역사적 지식이 본질적으로 상관적이며(relational), 오직 입장에 연관된 것으로만 정식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함으로써 이러한 인식론적 전환을 일단 이룩하였다면, 다시 진리 결정의 문제가 떠오르게 된다. 왜냐 하면 어떤 입장이 최선의 진리를 위한 최대의 기회를 갖는지를 묻게 되기 때문이다."(IU,72쪽)

그러나 월러스틴이 지적하듯이, 만하임은 자신에게 가해진 상대주의라는 비판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이 제기한 문제, 즉 진리와 허위를 가리거나 또는 진리에 도달하는 최선의 방법의 문제를 정말로 해결하지는 못했다. 만하임은 진리에 도달하는 최선의 입장으로 어느 한 입장이나 계층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있는 '자유롭게 부유(浮遊)하는 인텔리겐챠'(die freischwebende Intelligenz)를 내세웠다.(IU,134-8쪽 참조) 인텔리겐챠는 교양을 바탕으로 한 공동의 정신적 유산에 참여함으로써 그 성원 사이에 유대가 형성되었다. 이 인텔리겐챠는 스스로의 존립 근거에 대한 깊은 자성과 더불어 숙명적으로 전체를 위한 지적 관심을 대표하는 입장에 서서 종합적 진리의 담지자로서 동태성과 전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방어하기가 힘든 테제이었다. 비판 이론가들은 만하임이 찬양한 '자유롭게 부유하는 지식인 계급'이라는 개념을 수용하지 않았다. 이들은 부유하는 것처럼 가장하는 지식인들이 근본적으로 변동되어야 하는 존재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았다. 즉 지식인조차도 일정한 존재 상황에 제약되어 있기에 진리의 담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만하임의 견해에는 누가 종합적 진리의 담지자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접어두고라도, 진리의 판정 기준이라는 면에서 만하임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월러스틴은 말한다. 그래서 만하임이 유토피아주의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엥겔스의 견해 속에 깃들인 문제, 즉 상대주의 문제를 간파하기는 했지만 이런 문제를 궤변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만하임은 진리의 판정 기준과 관련하여 자신이 내세운 입장인 상관주의를 상대주의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이 양자의 구분이 그렇게 명료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만하임에 따르면 상관주의(Relationismus)에서 말하는 상관화(Relationieren)란 사고나 언표 내용을 일정한 양식의 세계 해석과 관련시키는 것, 더 나아가서는 이러한 해석을 낳게끔 한 존재상의 전제라고도 할 일정한 사회 구조와 관련시키는 것이다. 즉 개개의 사고를 특정한 역사적-사회적 주체의 전체 구조와 서로 상관 관계에 놓이도록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철학적 상대주의(Relativismus)란 어떤 기준이나 질서의 존재의 타당성을 부정하는 입장이다. 상관주의는 논쟁의 진위를 판단하는 기준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언표 행위는 절대적으로 정식화될 수 없고 단지 '입장에 구속된 시각 구조'를 통해서만 정식화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IU,242쪽 참조) 만하임은 지식 사회학이 객관성이나 결정 가능성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이 우회적 방법을 통해서만 성립될 수 있다고 본다. 즉 이러한 결정이 본질적으로 시각에 구속된 상태에서만 가능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관주의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각각의 주장이 임의적이라는 의미의 상대주의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하임은 객관성이나 결정 가능성의 타당성이 어떤 방법으로 확보되는지에 대해 명료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 모든 지식이나 사상이 존재 구속적이기에 여기에서 벗어나서 사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입장이나 관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설사 만하임이 제시한 우회적 방법을 통해 어떠한 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친 시각 구조나 존재 구조가 밝혀졌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그 결정의 객관성이나 타당성을 확보해 주는 것은 아니다. 만하임이 제안하는 '간격 유지 과정'(Distanzierungsprozesse), '상관화'(Relationieren), '특수화'(Partikulariesieren) 과정을 통해서 어떤 한 집단의 내부에서 볼 때는 절대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다른 외부인의 입장에서 보면 어디까지나 그 집단에 제약된 편파적인 것으로, 즉 특수한 입장에 제약된 것으로 인식된다고 하자.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과정 자체가 사상이나 지식의 객관성을 확보해 주거나 또는 문제 상황에서 결정 가능성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어느 것이 현실 타파적이고 어느 것이 현실 옹호적인지를 투쟁의 과정에서는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유토피아와 이데올로기를 구분하려는 시도는, 상대주의를 함축하고 있는 지식 사회학의 기본 입장과 어긋나게 된다. 그리고 설사 사후적으로 이러한 구분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실천적으로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만하임은 왜 유토피아와 이데올로기를 굳이 구분하려고 했는가? 만하임이 유토피아를 이데올로기와 다른 어떤 것으로 구분하려고 시도한 점에 대한 엘리아스의 견해는 주목할 만 하다.

"만하임이 모든 이론은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견해에도 불구하고, 그 성격상 확실히 이데올로기적인 유토피아 개념에 이데올로기 이상의 일종의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사회주의를 상대화했을 때의 여러 함의들로부터 사회주의를 구출하기 위한 방법을 본능적으로 모색한 데서 기인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만하임의 지식 사회학 관점에서는 모든 이론이나 사상이 존재에 구속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갖게 되므로, 사회주의도 역시 하나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하임은 사회주의를 향한 자신의 본능적인 선호를 나타내기 위해 유토피아와 이데올로기를 구분하여 사회주의에 유토피아라는 특별한 지위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그의 전반적인 지식 사회학적 관점에서 수용되기 곤란한 측면이 있다. 이미 지적하였듯이 상대주의를 내포하고 있는 그의 지식 사회학적 관점에서는 유토피아와 이데올로기를 구분하는 타당한 기준을 설정하기가 곤란한다. 또 설사 이데올로기로터 유토피아를 구분해 냈다고 할지라도, 여러 가지 유토피아들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타당한지,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에 대한 판단 기준도 설정하기 어려워서 실천적으로도 기여를 할 수 없다. 지식 사회학적 관점에 토대한 만하임의 유토피아론은 각각의 유토피아에 대한 가치 판단이 들어 설 자리가 없는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이다.


4. 월러스틴의 '유토피스틱스' 개념

월러스틴도 근대적 유토피아 개념을 정립한 만하임과 마찬가지로 유토피아 개념이 그 동안 통상적으로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유토피아 개념의 긍정적, 적극적 의미를 살리려고 한다. 유토피아는 '지금까지 어디에도 존재한 적이 없는 곳'이나 또는 '지상에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천상의 꿈'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유토피아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면서 환상과 환멸을 낳았으며, 또 잘못을 정당화하는 데 악용되었다는 것이다.
월러스틴은 이렇게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는 유토피아 개념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유토피아의 사회적 기능을 회복시키려고 시도하였다.『사회 과학으로부터의 탈피』(1991년)에서는 "유토피아는 기존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방식으로 항상 더 좋은 것을 정의해 가는 하나의 과정이다"라고 하면서 유토피아의 참된 의미를 되살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유토피아'라는 용어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거나 또는 그 의미가 왜곡되고 악용되면서 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매우 강하여 평판이 별로 좋지 않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와 다른 새로운 생산적인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유토피스틱스』(1998년)라는 저작에서 이 책의 이름이기도 한 '유토피스틱스'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고안해 내게 되었다고 말한다. 월러스틴이 밝히고 있듯이 utopistics는 'utopia'에 지식 활동의 의미를 갖고 있는 '-istics'라는 어미를 붙여 만든 신조어로서 '본격적으로 개선을 이룰 대안들에 대한 지식 활동'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유토피스틱스와 같은 작업이 왜 필요할까? 월러스틴은 우리가 위기에 처한 역사적 체제에 살고 있을 경우 무엇이 그것을 대체할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여할 수 있고 이와 더불어 상당한 범위의 진정한 역사적 대안이 주어진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월러스틴은 지금을 바로 이러한 위기의 시기로 보고 있다.

"우리는 현존 세계 체제, 즉 자본주의 세계 경제로부터 다른 세계 체제나 체제들로의 이행기(transition)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이행이 더 나은 것이 될지 더 나쁜 것이 될지 알지 못한다. --- 이 이행기는 갈등과 심각한 무질서의 시기가 될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도덕적 체계의 붕괴로 간주할 시기가 될 것이다. 또한 이 이행기는 '자유 의지'(free will) 요소가 최대한에 달하게 될 시기일 것인데, 이것은 개인적 행동과 집단적 행동이 세계의 미래를 구조화하는 데 '정상적인' 시기, 즉 역사적 체제가 지속되는 시기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역설적인 것은 아니다."(Utopistics,35쪽)

월러스틴은 현 시대를 위기의 시대, 즉 기존의 세계 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다른 체제가 들어서는 '이행기'로 진단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행기 또는 변혁기에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정상 상태보다는 훨씬 더 인간의 '자유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체제,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는 데 의식적인 활동이 필요하며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가능한 대안들을 탐구하고 평가하는 지식 활동인 유토피스틱스가 요청된다는 것이다.

"모든 역사적 체제들이 종말에 이른다는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체제도 역시 그럴 것이다. 또한 현존 체제의 장기적 추세들이 그것을 체제적 위기 또는 '이행'의 지대로 몰아넣는다 것을 믿는다면, 지금은 우리가 유토피스틱스 작업을 시작해야 할 더없는 때이다."(USS,270쪽)

이처럼 월러스틴은 이미『사회 과학으로부터의 탈피』에서 세계 체제론(world-systems theory)이 앞으로 탐구해야 할 과제들 중의 하나로 유토피스틱스 작업을 지적하면서 장래의 역사적 선택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 대안들의 득과 실을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월러스틴이 말하는 유토피스틱스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유토피스틱스는 역사적 대안들(historical alternatives)에 대한 진지한 평가이며, 가능한 대안적인 역사적 체제들의 실질적인 합리성(substantive rationality)에 대한 우리의 판단 행위이다. 이것은 인간의 사회적 체제들과, 이 체제들이 지닌 가능성의 한계, 그리고 인간의 창조성이 발휘될 수 있는 영역에 대한 냉철하고 합리적이며 현실주의적인 평가이다. 그렇다고 완벽한 (그리고 불가피한) 미래의 모습이 아니고, 대안적이며 신뢰할 수 있을 만큼 더 좋고 그리고 역사적으로 가능한 (그러나 확실한 것과는 거리가 먼) 미래의 모습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과학과 정치학, 도덕에서 동시에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Utopistics,1-2쪽)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유토피스틱스는 실현 가능한 역사적 대안들의 실질적 합리성을 평가하는 지적 활동이다. 그리고 이러한 '더 좋은 실현 가능한 대안적 사회'를 탐구하기 위해 과학, 정치학, 도덕 등 제반 학문의 통합적 연구를 요구한다. 이러한 '유토피스틱스'에서 추구하는 새로운 사회상의 주요 특징은 대안성, 현실 비판성, 실현 가능성, 진보성이라고 할 수 있다.


5. 만하임과 월러스틴의 유토피아론 비교

월러스틴의 이러한 유토피스틱스 개념은 근대적 유토피아 개념을 잘 보여주는 만하임의 유토피아 개념과 우선 '실현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월러스틴이 자신이 고안한 유토피스틱스 개념을 사용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들 중의 하나는 '역사적 실현 가능성'이라는 문제 때문이었다. 유토피아라는 용어가 실현 불가능한 환상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강해서 이 용어의 사용을 포기하고 유토피스틱스라는 개념을 고안한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 실현 가능성이 유토피스틱스 개념의 핵심이 되고 있다.
월러스틴은 우리가 아무 것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세계를 멋대로 조작하는 철인왕이 아니라는 인식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비록 주어진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확장하여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실제로 현실성이 있고 가능한 것들의 틀 안에서" 이러한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월러스틴은 이런 측면에서 만하임을 상당히 높게 평가한다. "우리가 유토피아를 요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성적 의지를 요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만하임의 결론은 절대적으로 옳다. 게다가 유효하지 않은 유토피아는 유토피아라고 불릴 만한 자격이 없다는 말도 또한 옳다."(USS,183쪽)
이처럼 월러스틴은 유토피아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회적 기능을 인식한 만하임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또 만하임이 유토피아의 중요한 요소로서 실현 가능성이라는 실천적 성격을 강조한 점은 매우 타당하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월러스틴은 유토피아를 실현 불가능한 공상이 아니라 만하임처럼 "유효하고 합리적인 변혁의 매개물"(USS,184쪽)로 간주한다. 즉 일정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실현 가능한 대안이나 새로운 사회상을 제시하는 것으로 유토피아를 자리매김하고 있다. 따라서 유토피아의 적극적인 사회적 기능을 인정하고 또 역사적 실현 가능성을 유토피아의 중요한 특성으로 간주한 점에서 만하임의 유토피아 개념과 월러스틴의 유토피스틱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만하임과 월러스틴의 유토피아론에는 차이점이 있다. 이미 위에서 지적하였듯이 만하임은 지식 사회학적 입장이 안고 있는 상대주의적 경향을 의식하고 이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몇 가지 시도를 하였지만, 그러한 시도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월러스틴도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만하임의 유토피아론을 비판했다. 월러스틴은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를 대립시킨 만하임의 견해가 잘못이라고 비판하면서, 엥겔스의 입장에 동조하여 "유토피아는 항상 이데올로기적이다."(USS,183쪽)라고 주장한다. 비록 만하임이 이러한 엥겔스 주장에 깃든 상대주의적 문제를 간파하고 이를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의 구분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이 문제를 그러한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또 만하임은 자신에게 가해진 상대주의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진리에 도달하는 최선의 입장으로 '자유롭게 부유하는 인텔리겐챠'를 내세웠다. 그러나 월러스틴은 이 테제가 방어하기 힘들다고 하면서, 만하임의 설명을 궤변적이라고 비판한다. 월러스틴은 기존 현실을 비판하고 좀더 좋은 것을 정의해 나가는 과정인 유토피아의 작업은 소수가 아니라 다수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본다. "사회적으로 중립적인 인텔리겐챠도, 그 어떠한 정당도 이러한 변혁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한편으로 이들이 전혀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USS,184쪽) 즉 유토피아의 이론적, 실천적인 주체는 만하임이 내세우는 가치 중립적인 인텔리겐챠도 아니고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내세우는 전위적 정당도 아니라는 것이다. 주체는 이러한 소수가 아니라 다수로서, 이들 다수가 자신을 위해 스스로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월러스틴과 만하임의 유토피아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차이점은, 월러스틴이 가능한 역사적 대안들의 실질적 합리성에 대한 평가를 강조한 점이다. 이것은 만하임에 가해진 상대주의라는 문제를 해결을 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으로 볼 수 있다. 유토피스틱스는 역사적으로 가능한 여러 가지 대안들을 비교하고 판단하며 그 중에서 더 좋은 대안을 모색하여 그것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실질적 합리성'에 대한 평가이다. 위에서 지적했던 '진보성'이라는 유토피스틱스 개념의 특성에서 알 수 있듯이, 유토피스틱스는 '확실히 더 나은' 미래의 모습, 즉 진보적 사회를 추구한다. 따라서 이러한 진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능한 대안들을 비교하여 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실질적 합리성'에 대한 평가이다.
여기서 실질적 합리성이란 베버가 사용한 개념으로서 '형식적 합리성'과 대조된다. 형식적 합리성(formale Rationalit t)이란 특정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선택하기 위해 기술적이고 계산적으로 행위하는 것으로서 수단의 합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실질적 합리성(materiale Rationalit t)이란 가치 평가적인 전제가 되는 정치적, 윤리적 요구와 같은 궁극적인 가치에 의거하여 판단하고 행위하는 것으로서 가치의 합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월러스틴은, 잉여 가치의 착취가 이루어지는 기존 사회를 해체하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대안적 전략이나 시나리오를 세울 때 "반성적이면서 도덕적인 적극적 지성과 적극적 조직력"(USS,169쪽)이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대안적 체제를 평가하고 선택하는 작업에서 도덕적 가치 평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도덕률은 우리에게 최선의 목표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고자 한다. 그리고 정치는 이러한 목표의 현실적 성취에 관한 일이며, 적어도 그렇다고 주장한다. 유토피스틱스는 우리의 목표가 무엇이어야 하는가, 다시 말해서 수단이라 불리는 부차적이고 부수적인 목표가 아니라 우리의 전반적인 목표에 대해 과학과 도덕 그리고 정치학으로부터 우리가 배우는 것을 조화시키는 일이다."(Utopistics, 2쪽)

유토피스틱스는 단지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효율적인 수단을 탐구하는 활동, 즉 형식적 합리성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실질적 합리성을 평가하는 활동으로서 목적 자체, 즉 최고의 목적을 탐구하여 결정하는 학문적 활동이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설정해야 하는지, 어떤 목표가 최선인지를 판단하는 작업이다. 이것은 어떠한 새로운 사회적 원리 그리고 어떠한 새로운 사회적 모습이 우리의 대안적 체제가 되어야 하는지를 평가하는 작업이다. 이것은 가능한 다양한 유토피아들을 비교하고 평가하여 그 중에서 더 나은 유토피아를 선택하는 작업이다.
월러스틴의 이러한 입장은 '비판 이론'의 전통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호르크하이머는 '전통 이론'과 '비판 이론'을 구분하면서 전통 이론을 비판한다. 전통 이론에서는 사업이나 과학적 작업 등 사고 행위의 능력은 그 '효과'에 의해서 판단된다. 즉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데 얼마만큼 효과적으로 기여하는냐가 판단의 기준이다. 이에 비해 비판 이론은 기존 질서를 비판하면서 그것을 불변의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존 질서를 변화 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이성적인 사회를 건설하려고 한다. 여기서는 '구성적 사고'가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론가들은 정당한 사회로의 발전을 추구한다. 마르쿠제도 우리의 이성이나 학문이 단지 수단적 효율성의 논리만 추구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이것을 '1차원적'이라고 명명하였다. 이에 비해 목적 자체의 합리성과 정당성을 고찰하고 평가하는 것을 '2차원적'이라고 명명하면서 이러한 2차원성을 회복할 것을 강조한다. 우리의 이성이나 학문이 기술적 도구적 합리성에 매몰되지 않고 목적 자체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실천적 합리성을 확보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월러스틴과 비판 이론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실질적 합리성에 대한 평가는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까? 월러스틴은 가능한 역사적 대안의 실질적 합리성을 평가하는 유토피스틱스를 위해서는 "과학과 정치학, 도덕에서의 동시적인 작업"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그는 과학, 정치학, 도덕의 밀접한 연관이 근대 과학의 정신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뒤르껭을 말을 인용한다. "과학이 우리가 최선의 목표를 선택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없다면, 과학이 목표에 도달하는 최선의 경로를 어떻게 지시해 줄 수 있겠는가?"(Utopistics,2쪽) 즉 과학이 최선의 목표를 선택하는 실질적 합리성을 평가하는 작업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전반적인 목표를 정립하는 것이 어려운 작업이지만 그러나 체제의 분기점나 역사적 이행기에는 이러한 것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은 이러한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결정을 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래서 이행기에는 "정치적, 지적, 도덕적 선택들 사이의 실제적 구분이 점점 더 약해지고 있다"(USS,203쪽)고 말한다.
유토피스틱스에서 과학, 정치학, 도덕의 밀접한 연관성을 강조하는 월러스틴의 태도는 그의 학문관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월러스틴은 19세기의 사회 과학이 우리의 판단을 그르치고 편협하게 만든다고 하면서 이로부터 '탈피'(unthinking)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19세기 사회 과학의 문제점들 중의 하나가 바로 학문의 세분화와 고립화이다. 그래서 "19세기 사회 과학의 가장 끈질긴 (그리고 그릇되게 이끄는) 유산, 즉 경제적인 것, 정치적인 것, 사회-문화적인 것이라는 세 분야, 세 논리, 세 '수준'으로의 사회 분석을 구분하는 것을 극복하는 길"(USS,4쪽)을 모색해야 만 우리가 지적으로 전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월러스틴은 학문 분과의 통합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이것을 세계 체제론의 중요한 과제들 중의 하나로 제시하고 있다.(USS, 271쪽 참조) 그에 따르면 이러한 세 분야는 밀접하게 서로 연관되어 있다. 모든 경제적 활동은 사회 문화적 규범 및 편향들을 드러내며 또 정치적인 제약 요소들 안에서 이루어진다. 시장들 자체가 사회-정치적인 창조물이다. 또 모든 정치적 활동은 사회-문화적 목적들의 보강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익의 추구라는 목적에도 이바지한다. 마찬가지로 사회-문화적 활동은 그 자체가 경제적, 정치적 입지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처럼 "제약 요소들, 선택안들, 결정들, 규범들, '합리성'들이 마치 그물망처럼 서로 뒤얽혀 있어서, 경제와 정치, 사회의 범주들에 따라 '요소들'을 격리시킬 수 없다"(USS, 242쪽)는 것이다. 즉 이러한 세 영역은 자율적인 사회 행위의 장이 아니기에 개별적인 논리들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단 하나의 '규칙들의 체계'나 '제약 요소들의 체계'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월러스틴은 바로 이러한 통합 학문적 관점에서 실질적 합리성을 평가하는 작업에서도 도덕뿐만 아니라 과학과 정치학이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월러스틴에 따르면, 근대 세계에서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하며, 이를 통해 정당성(legitimacy)을 확보하게 된다.(Utopistic,3-4쪽 참조) 정당성이란 특정 종류의 설득이 핵심 성분으로 포함되는 장기적인 과정의 결과이다. 즉 체제 구조의 덕택으로 장기적으로 처지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점을 설득하면서 지지를 호소한다. 이렇게 새로운 사회 질서를 재창출하는 일은 대안적 체제를 구성하는 일과 함께 이에 대한 정당화 작업이 요구된다.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합리적 주장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합리적 주장들은 과학의 담론으로 제공되며, 공인된 과학적 지식을 근거로 그 타당성을 주장한다. 물론 과학적 지식도 절대적으로 참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실질적 합리성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집단적 지식의 타당성 문제가 핵심적인 쟁점이 된다.
월러스틴의 이러한 논의는 하버마스의 '의사 소통 행위 이론'을 수용했다고 볼 수 있다. 하버마스에 따라며 의사 소통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행위의 목적이나 목표의 설정과 같은 가치 문제에 대한 합의를 도출할 수 있다. 인간에게는 의사 소통 능력을 통해 합의에 도달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행위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제반 담론의 영역에서 타당성을 확보하려고 시도한다.
이처럼 월러스틴은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대안적 체제를 선택하여 구성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작업이 요구되는데, 이때 합리적 주장을 하기 위해 과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토피스틱스는 과학, 정치학, 도덕의 성과물을 활용하여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전반적인 목표를 설정하는 작업으로서 여기서는 실질적 합리성에 대한 평가가 핵심이 된다.
만하임의 유토피아론에는 유토피아의 실질적 합리성과 관련된 도덕적 가치 평가가 배제되어 있으며,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절차나 과정에 대한 논의도 빠져 있다. 이것은 이미 지적하였듯이 그의 지식 사회학이 내포하고 있는 상대주의로 인한 것이다. 이에 비해 월러스틴은 유토피스틱스에서 가능한 역사적 대안들에 대한 실질적 합리성을 평가하는 작업을 강조하면서 이를 위해 과학, 정치학, 도덕 등이 서로 통합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비판 이론과 하버마스의 의사 소통 행위 이론의 기본 입장을 수용한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전략을 통해서 월러스틴은 만하임과는 달리 가능한 대안이나 유토피아에 대한 가치 평가가 들어설 자리를 마련하려고 했던 것이다. 월러스틴의 이러한 시도는 비판적 사회 이론에서 유토피아가 현실 비판과 현실 변혁의 유용한 도구로 자리잡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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