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마르쿠제의 사상에서 상상력과 유토피아

나뭇잎숨결 2020. 10. 13. 12:23

마르쿠제의 사상에서 상상력과 유토피아
영문제목 : Imagination and Utopia in Marcuse's Thought



손 철 성(서울대)



【주제분류】사회철학, 윤리학, 예술철학
【주 요 어】마르쿠제, 프로이드, 유토피아, 자아실현, 미학적 상상력
【요 약 문】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실증주의의 협소한 이성 개념 대신에 가치 판단적인 기능을 포함하는 포괄적 합리성의 차원에서 이성 개념을 이해하면서 '자유인들의 연합체'와 같은 이성적 사회를 추구하는 기획을 마련하였다. 비판 이론가들은 이러한 이론적 작업을 통해 유토피아적 차원을 복원시키기 위한 기반을 마련했지만 그러나 호르크하이머나 아도르노, 하버마스와 같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부분의 이론가들은 변혁 운동의 쇠퇴라는 시대 상황과 이로 인한 비관주의적 태도로 인해 소극적인 유토피아론을 전개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이에 비해 마르쿠제는 프로이드 이론의 수용과 변형 그리고 미학적 이론의 활용을 통해서 상당히 적극적으로 유토피아론을 펼치고 있다. 마르쿠제는 무의식 속에 내재하는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이나 환상 또는 상상력을 통해 유토피아로서 '억압 없는 문명'의 가능성을 전망하고 또 유토피아적 의식의 원천으로서 미학적 상상력의 역할을 강조하는 등 유토피아적 차원을 복원시키기 위해 적극적인 이론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적극적 유토피아론은 마르쿠제가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에 나타난 인간론을 수용하여 인간 본성의 자유로운 실현의 관점에서 자신의 유토피아론을 전개한 것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미적 형식 자체의 혁명성 주장이나 변혁의 주체 문제 등에서 마르쿠제의 입장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Ⅰ.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유토피아론
호르크하이머는 "이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ein ganz Anderes)에 호소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사회 철학적인 힘이 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과학주의나 실증주의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유토피아적 차원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상실된 유토피아적 차원을 회복시키기 위해 실증주의와 역사주의, 경제 결정론에 대한 비판적 작업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역사를 주체의 실천적 활동에 의해서 변화 가능한 것으로 보면서, '전체를 선취하는 인식'이나 '해석학적인 사전 이해' 등을 내세워 사실과 당위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실증주의적 태도를 비판하였다. 이들은 실증주의의 협소한 이성 개념 대신에 가치 판단적인 기능을 포함하는 포괄적 합리성의 차원에서 이성 개념을 이해하면서 '자유인들의 연합체'와 같은 이성적 사회를 추구하는 기획을 마련하였다.

비판 이론가들은 이러한 이론적 작업을 통해 유토피아적 차원을 복원시키기 위한 기반을 마련했지만, 그러나 마르쿠제나 벤야민 등을 제외한 호르크하이머나 아도르노, 하버마스와 같은 대부분의 비판 이론가들은 적극적인 유토피아론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호르크하이머는 플라톤 이래로 철학자들이 이성적 사회를 위한 이상주의나 유토피아를 모색해 왔다는 점을 부인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러한 이상이나 이념을 지구상에 실현시키기 위한 조건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유토피아가 더 이상 사회 문제를 다루기 위한 적절한 철학적 형식은 아니라는 것이다.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발전에 따른 일정한 사회적 조건이 요구되므로 우리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는 구체적 상황이나 경향들을 과학적으로 기술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판은 정치 경제학에 대한 변증법적 비판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도르노도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올바른 사회란 기존의 사회에 대해서 추상적으로 즉 내세워진 가치로서 대비되어야 할 것은 아니고, 오히려 올바른 사회는 비판에서 따라서 사회의 모순과 필연성에 대한 의식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성적인 사회란 상상력을 통한 추상적인 구성적 작업에 의해서가 아니라, 현실의 모순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하버마스도 '이상적 담화 상황'을 단지 규범의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형식적 조건으로서만 간주하고 있지 구체적인 이상적 삶의 형태로 보고 있지는 않다. 더 좋은 사회 제도나 더 좋은 삶의 구체적 형태를 기획하는 일은 사회 이론이나 담론 윤리의 과제가 아니라 담론에 참여하는 시민들에게 맡겨져야 할 과제라는 것이다. 하버마스도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다른 이론가들처럼 유토피아적 차원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의 이론적 작업은 기존 현실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나 경험 과학의 합리성의 토대를 해명하기 위한 형식적 조건의 탐구에 그치고 있으며 적극적으로 유토피아적 미래상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이처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부분 이론가들은 기존 사회의 사회적, 물질적 조건에 대한 현실적인 분석과 비판에 주안점을 두고 있으며, 유토피아적 미래를 기획하는 작업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유토피아론에 대한 이러한 소극적 태도는 그들의 비관주의와 연관되어 있다. 1940년대 이후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소련에 대한 실망과 환멸, 서구 노동자 계급의 혁명성의 상실, 대중 문화의 획일화 등으로 인해 비판 이론가들의 희망은 비관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비판 이론은 이론적으로는 근본적 변혁을 지향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실천과의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없게 되면서 비관주의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비관주의적 태도 때문에 그들은 긍정적인 유토피아적 미래상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기보다는 현실의 모순에 대한 비판과 부정에 머무르게 되었던 것이다. "주체와 객체, 언어와 사물이 현재의 조건에서 통합될 수 없는 한, 부정의 원리에 의해 우리는 거짓된 궁극성의 파편들로부터 상대적 진리를 구하기 위한 시도를 해 나가야 한다." 비판 이론가들에게는 시기 상조적인 해결책의 모색보다는 차라리 부정이 추구해야 할 진리의 형태이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마르쿠제는 프로이드 이론의 수용과 변형 그리고 미학적 이론의 활용을 통해서 상당히 적극적으로 유토피아론을 펼치고 있다. 마르쿠제는 무의식 속에 내재하는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이나 환상 또는 상상력을 통해 유토피아로서 '억압 없는 문명'의 가능성을 전망하고 또 유토피아적 의식의 원천으로서 미학적 상상력의 역할을 강조하는 등 유토피아적 차원을 복원시키기 위해 적극적인 이론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적극적 유토피아론은 마르쿠제가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에 나타난 인간론을 수용하여 인간 본성의 자유로운 실현의 관점에서 자신의 유토피아론을 전개한 것과 연관되어 있다.

Ⅱ. 유토피아적 차원의 중요성과 현대 사회의 1차원성
마르쿠제는 물질적 조건의 변혁과 이를 토대로 한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비판 이론의 목표로 내세우면서 기존 현실을 초월하는 유토피아적 차원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마르쿠제는 비판 이론의 추진력이 잘못된 현실을 공격하면서 그것을 보다 나은 가능성으로 대치하려는 힘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즉 비판 이론이 단순한 부정만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더 나아가 초월적인 이상적 목표를 제시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판 이론은 새로운 질서를 비난할 때 사용하는 유토피아라는 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유토피아적 요소가 철학에서 진보적 역할을 담당한다고 말한다.

마르쿠제는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와 같은 다른 비판 이론가들과는 다르게 결코 유토피아적 '타자'가 파악하기 어려운 무형적인 것이라고 강조한 적이 없으며 상당히 적극적으로 유토피아적 요소를 수용하고 있다. 그는 정치적 이론과 행동을 산출하기 위해서는 해방의 목표들, 즉 대안적 사회에 대한 유토피아적 전망을 적극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으며, 그래서 새로운 사회와 해방된 인류라는 목표는 그의 사상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마르쿠제는 강한 유토피아적 충동(utopian impulse)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마르쿠제는 비판적인 개인은 사회의 합리성과 비합리성을 판단할 수 있는 관점을 가질 수 있다고 보면서, 베버가 자본주의적 합리화 과정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여 비극적 비관주의나 체념에 빠진 것과는 달리 이에 굴복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해방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려고 했다.

마르쿠제는 이러한 유토피아적인 미래적 요소를 이끌어내는 데는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가 언급한 공상이나 상상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이성적 현실과 현재의 현실 사이의 커다란 간격은 개념적 사유에 의해서 메워질 수 없다. 현재 안에서 아직 현재가 아닌 것을 목표로 삼기 위해서는 공상(phantasy)이 요구된다." 공상 또는 상상력은 비이성적 현실에서 이성적인 미래적 요소를 이끌어내어 이러한 미래를 미리 보여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미래가 현실적 가능성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공상은 끊임없이 이러한 목표를 눈앞에 설정하는 데 중요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미래와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공상이자 상상력인 것이다.

그렇다면 공상이나 상상력 또는 이를 토대로 형성된 유토피아적 의식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유토피아적 의식은 현실의 제반 영역에서 발견될 수 있는가? 마르쿠제가 {1차원적 인간}에서 밝히고 있듯이 기술적, 도구적 합리성이 지배하고 있는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영역에서 비판 의식이 상실되고 단지 효율성의 논리만이 지배하게 된다. 목적의 설정이나 목적의 정당성에 대한 논의 대신에 오직 주어진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계산적 사고만이 중시된다. 이러한 상태가 바로 '1차원적 사고'이자 '실증주의적 태도'이다. 이성이나 합리성은 기존 질서에 대한 비판보다는 기존 질서를 옹호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렇게 이성이 단지 기존 질서를 분석하고 기술하는 역할만을 담당하게 되면서 이성은 기술적,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게 된다.

기존 질서를 비판하고 부정하면서 새로운 이성적 질서를 모색하는 일은 더 이상 이성의 과제로 여겨지지 않고 비합리적인 일로 간주되었다. 이성적 질서나 더 좋은 사회와 같은 가치 판단과 관련된 일은 이성적, 합리적 논의 대상에서 배제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적 상태에서 유토피아에 대한 논의도 비합리적인 공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실증주의적 태도와 관료제적 조직화, 매스컴에 의한 대중 조작에 의해서 1차원성은 더욱 심화되고 비판성과 부정적 의식은 자리잡을 곳이 없게 되었다. 따라서 비판성을 토대로 현실을 초월하는 이상 사회를 추구하는 유토피아적 의식은 약화되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비관주의에 빠진 것도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다. 사회 전반에 퍼진 1차원성으로 인해 비판성과 혁명성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상황에서 대다수의 비판 이론가들이 취했던 비관주의적인 소극적 유토피아론과 다르게 마르쿠제는 낙관주의적 경향을 토대로 적극적 유토피아론을 전개하였다. 물론 마르쿠제 자신도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를 오고가는 굴곡 속에서 이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마르쿠제는 유토피아적 의식의 존재 가능성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가? 이러한 시도들 중의 하나가 프로이드 이론의 수용과 재해석을 통한 유토피아론의 구성이다.

Ⅲ. 유토피아론을 위한 프로이드 이론의 수용과 변형: 유토피아로서 '억압 없는 문명'
마르쿠제는 프로이드의 정신 분석학을 수용하고 재해석하여, 억압되지 않은 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문명의 성과를 활용하는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프롬이 신화로 돌려버렸던 '혁명적 프로이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어둠 속의 예언자로 바꿔놓은 프로이드를 되살리려고 했다. 마르쿠제가 {에로스와 문명}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는 정신 분석의 은폐된 경향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면서 프로이드 이론이 억압적 문명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억압 없는 문명'(non-repressive civilization)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고 말한다. 프로이드가 문명이 인간의 본능에 대한 영원한 억압에 기초하고 있다고 본 데 대해 마르쿠제는 동의하지 않은 것이다. 마르쿠제는 바로 이러한 '억압 없는 문명'의 가능성에서 유토피아적 전망의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마르쿠제는 억압과 과잉 억압, 현실 원칙과 수행 원칙을 구분한다. 문명에서 인류의 영속을 위해 현실 원칙에 따라서 본능을 억압하는 것을 '기본 억압' (basic repression)이라고 한다면, 특정한 역사적 단계에서 지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기본 억압 위에 추가로 부가되는 억압을 '과잉 억압'(surplus repression)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일부일처의 가부장적 가족 제도의 영구화, 노동의 위계적 구분, 개인에 대한 공적 통제 등이 이에 해당된다. 과잉 억압은 특정한 사회적, 역사적 조건의 결과로서 지배 계급의 특수한 이익을 위해서 유지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통용되는 원칙은 '수행 원칙'(performance principle)으로서 이것은 현실 원칙의 특정한 한 형태에 불과하다. 수행 원칙은 현실 원칙(reality principle) 자체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현실 원칙과 수행 원칙을 동일시하여 현실 원칙이 쾌락 원칙과 본질적인 갈등 관계에 있다고 보는 프로이드의 주장은 옳지 않다. 과잉 억압적인 수행 원칙이 폐기된다면 현실 원칙은 쾌락 원칙과 통합될 수도 있다.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문명의 본능적 원천인 에로스적 충동이다.

마르쿠제는 이러한 현실 원칙과 쾌락 원칙의 통합은 문명이 성숙한 조건에서 리비도가 억압 없이 발전할 수 있으면 가능하다고 본다. 수행 원칙에 따르는 "과잉 억압의 제거는 노동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노동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조직을 제거하는 것이다"(EC,155쪽). 그래서 새로운 조직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더 이상 생산성이 가치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해방의 기준은 단순한 물질적 풍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능의 보편적 충족이며, 내면적 또는 외면적 죄와 공포로부터 이성적, 본능적 자유이다. 과잉 억압에 따른 인간 소외가 사라지고 노동이 놀이로 변형된다. 노동이 놀이처럼 즐거움과 쾌락을 가져다 주는 에로스적 노동으로 전환된다. 성욕은 에로스로 변형되고 에로스는 지속적으로 리비도적인 작업 관계로 확장된다. 에로스에 의해 쾌락 원칙과 현실 원칙이 통합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기본적 욕구가 최소의 시간에 최소의 육체적, 정신적 힘의 지출로써 충족되는 문명이 고도로 성숙된 상태에서만 가능하게 된다"(EC,194쪽). 거대한 산업 기구, 전문화된 사회적 분업, 파괴적인 에너지의 합리적 재조직, 광범위한 대중의 협력 등이 그러한 전제를 이룬다. 물질적 생산의 합리적 조직은 자유로운 놀이를 위한 시간과 정력을 해방시키며, 전체적인 자동화는 자유의 최적의 조건이 된다. 따라서 이것은 과거로의 단순한 퇴행이 아니라 현재의 성숙한 문명의 성과를 토대로 한 것으로서 진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에로스는 높은 수준의 생산력을 바탕으로 사회 제도를 개선함으로써 현실 원칙과 쾌락 원칙이 통합된 '억압 없는 문명'이라는 유토피아를 가능하게 해 준다. 그래서 마르쿠제는 '억압 없는 문명'의 가능성으로 인해 어두운 비관론에 빠지지 않고 여기서 유토피아적 전망의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억압 없는 문명의 가능성이 어떻게 인식될 수 있는가? 현실을 과잉 억압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수행 원칙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계급 억압적인 현실을 비판하고 더 나아가 유토피아를 향한 변혁을 추구하는 의식을 어느 곳에서 확보할 수 있는가?
문명의 발달과 함께 쾌락 원칙은 현실 원칙에 의해서 대체되지만, 그러나 무의식에는 현실 원칙의 지배에서 벗어난 쾌락의 충동이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쾌락의 충동과 과거의 기억이 상상력을 자극하여 유토피아적 의식을 지향하게 한다. "무의식은 완전한 만족이 획득되었던 개인의 과거의 발전 단계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과거는 계속해서 미래를 요구한다. 즉 과거는 문명의 성과에 기초하여 낙원이 다시 창조되어야 한다는 소망을 불러일으킨다"(EC, 18쪽).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마르쿠제는 프로이드처럼 기억을 단지 치료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하여 기억을 유토피아적 의식의 근원으로 격상시킨다. 기억이 치료적 역할을 하는 것은 기억이 '진리 가치'를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이러한 기억의 진리 가치는 성숙하고 문명화된 개인에 의해서 배반당하고 효력을 상실하였지만, 그러나 과거의 한 때에 충족되었던 만족의 희미한 기억을 결코 잊을 수 없게끔 해주면서 만족에 대한 약속과 가능성을 보존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기억의 정신 분석학적 해방은 억압된 개인의 문명화된 합리화를 파괴하면서 유년의 억제된 심상과 충동을 떠올리게 하여 이성이 거부한 진실을 이야기해 준다. 과거의 기억으로의 퇴행은 오히려 진보적 기능을 떠맡는다. 다시 찾은 과거는 현재에 의해서 금기된 비판의 기준을 산출하고, 기억의 회복은 상상력의 인식적 기능을 회복시켜 준다. 현재의 억압에 대항하는 과거로의 방향 설정은 미래에 대한 방향 설정으로 향하게 된다. 이처럼 마르쿠제에서 유토피아적 의식의 근거는 '무의식에 보존된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이다. 마르쿠제는 프로이드의 이론을 변형하여 무의식에 보존된 기억을 치료적 기능을 넘어서 유토피아적 의식의 근원으로 고양시킨 것이다.

그런데 마르쿠제는 무의식에 보존된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을 미래 지향적인 유토피아적 의식으로 고양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는 것이 상상력이자 환상이라고 말한다. 마르쿠제는 무의식의 과정을 지배하는 쾌락 원칙이 억압 없는 정신 상태를 구성할 만한 기준이 되지는 못한다고 본다.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환상이다. 환상(phantasy)은 의식 영역에서 현실 원칙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유를 유지하는 정신 활동의 하나이다. 환상은 전체적인 정신 구조에서 매우 결정적인 기능을 담당하는데, "환상은 무의식의 가장 깊은 층과 의식의 가장 높은 생산물(예술)을 연결시키며 꿈과 현실을 연결시킨다"(EC, 140-1쪽). 그것은 환상이 인류의 원형, 집단적이고 개인적인 기억의 영구적이지만 그러나 현재는 억압되어 있는 이상, 금기시된 자유의 이미지를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환상의 이러한 특성은 기존의 현실을 지배하는 수행 원칙을 비판하고, 더 나아가 미래 지향적인 유토피아적 의식을 갖게 해 준다. 환상은 억압적인 제도를 비판하고 더 나은 제도와 사회를 추구하면서 삶의 본능이 억압 없는 충족에 도달하는 에로스적인 현실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처럼 상상력은 현실 비판적인 기능과 함께 미래 예기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환상의 영역에서는 자유의 비합리적 이미지가 합리적인 것이 되고, 본능적 만족의 심층이 새로운 위엄을 갖추게 된다. 민속, 문학, 예술 속에서 생생하게 유지되고 있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또 다른 진리의 형태들 앞에서 수행 원칙이 고개를 숙이는 데 비해 상상력은 실존적 태도, 실천, 역사적 가능성을 위한 기준을 제공한다. 이처럼 마르쿠제는 상상력이 본능 억압적인 이성과는 다른 차원에서 독자적인 진리 가치를 가지면서 인식적 기능을 담당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렇게 서로 대립적 관계에 있는 상상력과 이성도 과학 기술의 진보에 의해서 상호 의존적인 관계로 바뀔 수 있다고 본다. 상상력이 물질적 욕구의 영역과 분리되었을 때 상상력은 환상적 논리와 연관된 단순한 놀이였지만, 기술의 진보가 이러한 분리를 제거하였을 때 상상력과 이성 간의 틈은 좁아진다는 것이다. 선진 산업 사회의 기술적 능력을 고려해 볼 때, 상상력의 모든 놀이는 실현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즉 과학 기술의 진보와 더불어 상상력은 그 실현 가능성이 더욱 높아져서 이성과의 거리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Ⅳ. 유토피아적 의식의 원천으로서 미학적 상상력
마르쿠제는 1차원적 사회에서 기존 현실을 비판하면서 미래를 예기하는 유토피아적 성향을 고양시키는 상상력이 보존되어 그 기능을 발휘하는 영역은 예술이라고 보면서, 미학적 상상력을 유토피아의 원천으로서 중시하고 있다. 선진 자본주의의 1차원적 사회에서 다른 많은 영역들이 수단적, 도구적 합리성의 지배에 의해서 현실 순응적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미학적 차원은 아직까지는 작가와 예술가들로 하여금 인간들과 사물들을 본래의 이름으로 부르게 만드는 표현의 자유를 보유한다"고 보고 있다. 즉 아직 예술의 영역은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쿠제에 있어서 미학적 상상력은 유토피아의 원천으로서 현실 비판과 미래를 예기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떠맡는다. 마르쿠제가 환상이나 상상력 중에서도 미학적 상상력이나 예술적 환상을 중시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마르쿠제는 미학과 예술적 상상력을 설명하면서 칸트의 견해를 수용한다. 칸트에서 미학적 차원은 감각과 지성이 만나는 매개체인데, 이 매개는 제 3의 정신 능력인 상상력에 의해서 수행된다. 상상력은 "현실적 자연이 부여한 소재로부터 말하자면 다른 자연을 창조하는 데 커다란 힘을 발휘하는데", 이를 통해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소재는 다른 어떤 것, 즉 자연을 능가하는 어떤 것으로 가공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시인과 같은 예술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이나 지옥 등을 감각화하려고 시도하거나 또는 경험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죄악, 사랑, 명예 등을 상상력을 매개로 하여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완전한 모습으로 드러나도록 하려고 시도한다. 상상력은 감각이 제공한 경험적 재료로부터 대상과 관계들을 변형시켜 자유의 영역을 창조하는 것이다. 상상력은 직접 주어지지 않은 대상에 관한 자유롭고 창조적인 재생산적 직관으로서 현존하지 않은 대상을 표상하는 능력이다. 이처럼 미학적 상상력은 감각적이고 수동적이지만 그러나 창조적인 것으로서 자유로운 종합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예술이 어떻게 해방의 이미지나 욕구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예술은 어떻게 질적인 차이를 나타낼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마르쿠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술에는 추상적이고 환상적이 자율성이 있다. … 예술은 불가피하게 현존하는 것의 일부분이며, 예술은 오직 현존하는 것의 일부분으로서만 현존하는 것을 반대하는 말을 한다. 이러한 모순은 친숙한 내용과 경험에 일탈의 힘을 부여하면서 새로운 의식과 지각을 나타나게 하는 미적 형식에서 보존되고 해소된다(지양된다)."

즉 예술의 해방적 측면은 기존 현실로부터 예술의 자율성에 있으며, 이러한 자율성은 미적 형식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미적 형식이란 "어떤 작품을 그 자체의 구조와 질서(스타일)를 갖춘 하나의 자족적인 전체로 만드는 성질들(조화, 리듬, 대조)의 전체"를 의미한다. 예술 작품은 이러한 성질에 의해 현존하는 질서를 변형하며 이러한 변형이 '환상'이다. 이 환상은 기존 현실의 질서를 괄호 속에 넣거나 무효로 만든다. 조화적 환상, 이상주의적 변형, 현실로부터 예술의 분리가 미적 형식의 특징들이다. 마르쿠제는 예술의 비판성을 이러한 미적 형식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르쿠제는 마르크스주의 미학에 비판적이다. 마르쿠제는 마르크스주의가 예술을 사회적 제 관계 속에서 파악하고, 예술에 정치적 잠재력을 부여한 점은 수용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미학이 사회적 조건에 대한 정확한 묘사와 같은 예술 작품의 내용에서 비판성과 혁명성을 찾는 점은 비판한다. 예술이 가진 정치적 잠재력은 예술 그 자체 속에, 즉 미적 형식 자체 속에 있다. 그리고 미적 형식에 의해서 예술은 사회 관계로부터 자율성을 유지한다. 예술 작품에서 자아와 이드, 본능적인 목표와 정서, 합리성과 상상력의 통합은 억압적인 사회에 의한 사회화에서 벗어나 허구의 세계에서이기는 하지만 자율을 지향하게 된다. 이 자율성으로 인해 예술은 사회적 관계를 초월하여 이에 대항할 수 있으며, 지배적인 일상적 의식을 전복할 수 있다. 즉 예술에 비판적 힘을 부여하는 것은 그 내용이 아니라 미적 형식의 자율성이다.

미적 형식에 자율성을 부여하여 예술을 비판적, 혁명적으로 만드는 상상력에 의해 구성된 미학적 차원은 본질적으로 비현실적이다. 상상력이 자유롭고 창조적으로 현존하지 않은 대상을 표상하여 재구성한 것이 예술 작품인 것이다. 재구성은 집중, 과장, 본질적인 것의 강조, 여러 가지 사실의 재정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예술 작품은 허구적인데, 바로 이러한 허구성이 예술에 비판적, 해방적 힘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허구의 세계와의 만남은 의식을 재구성하고 반사회적 경험에 감각적 표상을 부여한다. 그렇게 하여 미적 승화 작용은 유년기와 성년기의 행복과 슬픔의 꿈을 해방시키고 그것의 타당성을 확인시켜 준다."

그렇다고 예술 작품이 비현실적이라고 해서 그것이 기존 현실보다 못하다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기존 현실과 질적으로 다른 그 이상의 것을 담지하고 있기에 비판적, 해방적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일상적 현실은 여러 가지 제도나 관계 속에서 신비화되어 있다. 그러나 가상적 세계에서는 사물은 있는 그대로 또한 있을 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기억과 있을 수 있는 다른 것의 이미지를 창출하는 욕구는 항상 예술의 토대이다. 예술 작품은 현존하는 것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폭로한다. 따라서 허구적 세계 또는 가상의 세계로서 예술 작품은 일상적인 현실 그 이상의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마르쿠제는 하버마스와의 대화에서 "이론적 진리와 미학적 진리는 그 형식적인 면에서 서로 일치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론이 이론적 개념을 통해서 현실을 파악하는 데 비해, 예술은 그 개념들을 감성화하는 행위로서 현실에 대한 기록이고 상상이며 발명이다. 따라서 예술적 진리는 형식화한 내용, 즉 미학적 형식 속에 있다는 것이다.

예술은 현실 원리에 의해 억압되지 않은 본능적인 쾌락 원리를 드러냄으로써 현실 비판적인 급진성과 해방의 이미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예술 작품 속에서 에로스와 미가 내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예술의 진리가 이루어진다." 완성된 예술 작품은 만족하는 순간의 기억을 영속적인 것으로 유지한다. 예술 작품은 그것이 현실의 질서에 자기 자신의 질서를 대치하는 정도에 따라 아름답다. 예술이 이러한 행복의 약속을 갖고 있고 실패한 목표의 기억을 지니고 있는 한, 그것은 하나의 '규제적 이념'으로서 세계 변혁의 투쟁에 참여할 수 있다. 이처럼 예술은 기존 현실에 대한 단순한 부정성뿐만 아니라 초월적인 긍정적 대안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마르쿠제는 단순한 부정은 추상적인 나쁜 유토피아일지도 모르지만, 위대한 예술에 나타난 진정한 유토피아는 결코 현실 원리의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작업의 수행 과정에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초월적 보존(지양)"이라고 하면서 이것은 회상(recollection)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한다. 모든 사물화는 망각인데, 예술은 이러한 사물화와 대립하면서 회상을 통해 고뇌의 극복과 기쁨의 영속에 대한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과거의 사물에 대한 회상은 세계 변혁을 위한 투쟁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창조적 힘으로서 기억은 과거의 행복과 슬픔에 대한 기억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 유토피아'를 실현시키려고 하는 충동으로서 그리고 미래의 실천 이념으로서의 기억이다. 그래서 미학적 상상력과 이를 토대로 한 예술은 적극적 유토피아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것이다.

마르쿠제는 이러한 "미학적 경험이 인간을 노동의 도구로 만드는 폭력적이고 착취적인 생산성을 억제시킬 것"(EC,190쪽)이라고 보았다. 예술은 제도화된 억압에 반대하여 자유로운 주체로서 인간의 이미지를 구성함으로써 유토피아적 변혁의 전망을 제공하고 이를 추동시킨다. 그리고 상상력은 과학의 생산적인 힘들을 기존 세계의 급진적이 재건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미적인 것은 생활 세계의 변형 속에서 자신의 표현을 발견할 수도 있다. 즉 미적인 것이 사회적 생산력으로 변화할 수 있는 역사적 가능성이 있는데, 이러한 유토피아적 목표는 혁명에 의존한다. 이러한 고차적인 단계에서는 사회적 생산력이 예술의 창조적 능력과 비슷한 것이 된다. "해방적 예술과 해방적 기술의 통합"이 가능한 단계인 것이다.

그렇다고 예술이 혁명을 대신할 수는 없다고 마르쿠제는 본다. 예술은 정치적 내용이 초정치적으로 되는 미적 형식 속에서 단지 혁명을 환기시킬 수 있을 뿐이다. 모든 혁명의 목표인 평안과 자유의 세계는 오직 비정치적인 매체 중에서 미와 조화의 법칙에 의해 나타난다. 따라서 "예술은 정치적인 내용이 전혀 없이 정치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마르쿠제에 있어 미학적 상상력은 비현실적인 것으로서 질료에 구속되지 않고 순수한 형식적 질서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예술에 자율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미학적 상상력의 자유로움과 창조력은 미와 에로스를 결합하여 과잉 억압적인 기존 질서와 인간 소외를 비판하면서 '억압 없는 문명'이라는 유토피아적 전망을 제시하여 이것을 향한 급진적 변혁을 고취시킨다.

Ⅴ. 마르쿠제의 유토피아론에 대한 평가: 마르크스의 사상과 비교를 중심으로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마르쿠제는 비판 이론이 단순한 비판과 부정에 그치지 않고 여기서 더 나아가 유토피아적 전망을 제시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위해 마르쿠제는 프로이드 이론을 수용하여 무의식 속에 내재하는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이나 상상력을 통해 '억압 없는 문명'이라는 유토피아적 차원을 되살리려고 하였던 것이다. 특히 미학적 상상력이 발휘되는 예술은 기존 질서를 초월하는 유토피아적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해방적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보았다. 선진 산업 사회에서는 노동자 계급마저도 고도의 사회적 통제에 의해 혁명성을 상실하고 1차원화됨으로써 체제 순응적으로 된 상황에서 마르쿠제는 정신 분석학이나 미학 이론을 통해서 비판성과 함께 유토피아적 의식을 회복하려고 시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마르쿠제의 유토피아론은 마르크스의 입장과 공통점과 함께 차이점도 갖고 있다. 이것은 마르쿠제가 실증주의적, 과학주의적 경향으로 인한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성과 혁명성의 상실을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을 중심으로 하여 변증법이나 인간학을 부활시켜 비판성과 실천성을 복원시키려고 한 것과 관련이 깊다.

마르쿠제는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에서처럼 인간학적 관점에서 유토피아론을 전개하고 있다. 마르쿠제가 말하는 유토피아로서 '억압 없는 문명'은 현실 원칙과 쾌락 원칙이 통합된 것으로서 본능에 대한 억압이 없는 상태이자 본능적 욕구가 보편적으로 충족된 상태이다. 이러한 상태는 '놀이적 노동'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노동이 놀이처럼 즐거움과 쾌락을 가져다주는 에로스적 노동으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말하는 '유적 본질의 실현으로서 공산주의'와 동일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노동 소외가 극복되어 노동이 유적 본질을 실현하는 계기가 되는 등 인간이 자신의 본질적 능력을 전면적으로 발휘한다. 따라서 인간학을 바탕으로 인간 본성의 자유로운 실현의 관점에서 유토피아론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마르쿠제와 마르크스는 입장을 같이 한다.

이러한 공통점은 마르쿠제가 호르크하이머나 아도르노와 다르게 {경철 수고}에 나타난 인간론을 수용하여 철학적 인간학의 가능성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마르쿠제에 따르면 {경철 수고}의 중심 테마는 감성이 갖는 잠재적 파괴력 또는 해방의 현장으로서 자연이다. 이 저작은 전(前)과학적 성격과 포이에르바하의 철학적 자연주의의 경향을 갖고 있지만, 그러나 공산주의의 가장 근본적이고 전체적인 관념을 옹호하고 있다고 본다. 마르크스는 "모든 인간적 감각과 성질의 완전한 해방"을 사회주의의 특징으로 보았는데, 마르쿠제는 이러한 해방된 감각이 자본주의의 도구적 합리성을 거부할 것으로 보았다. 해방된 감각은 소극적으로는 자아와 타자 및 대상 세계를 공격적 획득이나 경쟁의 대상으로 대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는 자연의 인간적인 점유를 통해서 "유적 존재로서 인간의 고유한 능력 즉 창조적, 미적 능력을 자유롭게 전개한다"는 것이다.

마르쿠제는 급진적 감성이 해방적 사회를 형성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본다. 자유로운 사회의 형성은 종래의 세계 경험 즉 병든 감성과의 단절을 전제로 하는데, 급진적(radical) 감성이 이러한 이성적인 질서를 형성하는 데 능동적인 구성적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마르쿠제는 마르크스가 초기 저작의 인간론에서 이성의 역할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감성의 역할도 중시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유토피아적 사회를 감성을 비롯한 모든 인간의 능력이 전면적으로 실현되는 사회로 보고 있다. 켈러의 지적처럼 마르쿠제는 지속적으로 인간 해방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인간 본성에 대한 규범적 이론에 근거하여 전개시켰던 것이다.

마르쿠제는 마르크스처럼 자본주의의 고도의 생산력을 바탕으로 계급 착취적인 사회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유토피아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본다. 마르쿠제가 말하는 유토피아로서 '억압 없는 문명'이란 문명의 성과물을 활용하되 계급 착취적인 과잉 억압만을 제거한 상태이다. 이미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마르쿠제는 현실 원칙과 수행 원칙을 구분하여 과잉 억압은 수행 원칙에 따른 것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과잉 억압적인 수행 원칙이 폐기된다면 현실 원칙과 쾌락 원칙이 통합된 '억압 없는 문명'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즉 성숙한 문명의 성과인 높은 수준의 생산력을 토대로 하여 착취적인 사회 조직을 개선함으로써 유토피아적인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마르쿠제의 관점은 마르크스에게 가해진 비판과 동일한 비판, 즉 생태학적 문제를 간과한 기술적 낙관주의에 입각해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가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마르쿠제는 마르크스와 차이점도 있는데,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마르쿠제는 마르크스에 비해 좀더 적극적으로 유토피아론을 전개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특히 후기에 갈수록 실증주의적, 과학주의적 태도를 강하게 취하면서 기존 현실의 경제적 모순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비판에만 집중하고 사회주의적 미래상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작업은 꺼려하는 등 반유토피아주의적 경향을 드러낸다. 이에 비해 마르쿠제는 마르크스의 반유토피아주의의 원인이 되었던 실증주의, 역사주의, 경제 결정론 등에 대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 작업을 토대로 좀더 적극적으로 유토피아론을 전개하였다. 그는 포괄적 합리성의 관점에서 유토피아적 전망의 확보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미학적 상상력의 가치를 인정하고, 또 인간학이나 인간 본능론에 입각하여 본능을 억압하지 않는 문명이 더 좋은 사회라고 하면서 유토피아로서 '억압 없는 문명'에 대해 가치 판단적인 정당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유토피아적인 변혁 의식을 어디에서 확보할 것이며, 변혁의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에서도 마르쿠제는 마르크스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마르크스는 이 문제에 대해 역사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접근하여, 경제적 토대에서의 사회적 생산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의식에서 이러한 유토피아적인 변혁 의식을 찾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에서 지배 계급인 부르주아지는 기존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보수적인 데 비해서,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프롤레타리아는 기존 질서를 부정하는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마르쿠제는 비판적, 혁명적인 의식의 가능성을 프롤레타리아 의식에서만 찾고 있는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면서, 이에 대해 정신 분석학이나 미학의 관점에서 접근하여 유토피아적인 변혁 의식은 과거의 기억에 대한 회상이나 미학적 상상력에 의해서 확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선진 자본주의 사회가 물질적 풍요를 바탕으로 비판적 의식을 마비시키고 현실적 모순을 은폐하면서 노동자의 계급 의식마저 사물화시키는 상황에서, 현실에 대한 비판과 부정 의식을 마르크스처럼 프롤레타리아에서 찾는 데 회의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르쿠제는 비판적인 변혁적 의식을 정신 분석학적인 잠재된 과거의 기억이나 미학적인 상상력에서 찾게 되었다. "초역사적, 보편적 진리에 의해 예술은, 특수한 계급의 의식에 호소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의 삶을 고양시키는 모든 능력을 발전시키는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 존재의 의식에도 호소하고 있다." 미학적 상상력을 통해 구성된 예술 작품 속에 드러난 비판적, 유토피아적 의식은 보편적 진리를 보존하고 있는데, 이러한 의식은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특정 계급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 의식에 의해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예술의 진리성을 보존하여 재형성할 수 있는 의식은 보편적인 요구와 자각으로 결합되어 있는 개인들의 의식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학적 상상력 및 이것에 의해 구성된 예술 작품에서 유토피아적 변혁 의식을 찾고 있는 마르쿠제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판이 가해질 수 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문화 산업'에 대한 분석을 통해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예술이 이윤을 추구하기 위한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하여 문화가 하나의 산업이 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예술 영역도 자본과 상품의 논리가 지배하면서 예술 영역의 자율성이 침해되고 있다. 계몽적 이성이 변증법적인 자기전개 과정을 거치면서 기술적,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여 해방적 성격을 상실하였으며, 문화와 예술의 영역도 예외가 아니어서 계몽은 상상력마저도 붕괴시키고 있다. 그래서 전 세계가 문화 산업이라는 필터를 통해 걸러지게 되면서 여기에는 상상을 위한 공간은 남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지적에는 타당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문화와 예술의 모든 영역이 이러한 문화 산업과 상품의 논리에 의해서 전적으로 지배된다고 볼 수는 없다. 정치와 경제를 포함한 사회의 제반 영역들 중에서 그래도 자본과 상품의 논리로부터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기존 질서에 대한 비판 의식과 상상력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예술 영역이라는 점에서 마르쿠제의 시도는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마르쿠제는 미학적 상상력의 유토피아적 변혁성과 진리성이 예술 작품의 순수한 미적 형식에 있다고 하면서 이것에 의해서 사회나 정치로부터 예술의 자율성이 확보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켈러의 지적처럼 여기에는 예술과 정치 사이의 해소될 수 없는 긴장이 내재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문제가 발생한다. 마르쿠제는 한편으로 혁명적 희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정치적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가장 혁명적인 예술은 정치 투쟁의 요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 예술의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예술의 자율성이나 순수한 미적 형식이 그 자체로서 혁명성을 담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고급 예술에는 전복적 요소도 있지만 또한 혁명적인 정치적 잠재력을 침해하는 이데올로기적 요소도 있는데, 마르쿠제는 이러한 부정적 요소를 과소 평가하는 등 혁명 운동에서 예술의 역할을 제대로 분석하고 있지 못하다. 예술 작품의 혁명성 여부는 미적 형식 그 자체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으며, 예술 작품의 형식과 내용, 작품과 맥락, 제작과 수용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중심으로 이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마르쿠제는 예술이 때로는 민중의 의식과 대립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왜냐 하면 자본주의 체제와의 결별만이 민중 속에 작가의 '장소'를 만들 수 있는데, 이 장소를 만드는 과정에서 작가는 민중과 대립할 필요가 있으며, 때로는 민중의 말을 사용하는 것이 방해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작가가 창조하는 예술 작품의 비판성과 혁명성이 기존 질서에 동화된 민중들과 대립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중들의 의식보다는 오히려 작가와 같은 엘리트의 의식이 더 진보적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는 엘리트주의라는 비판이 가해질 수 있다. 대다수의 민중이 '허위 욕구'에 사로잡혀 있을 때 '참된 욕구'를 느끼고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소수의 엘리트이며 그래서 진리를 발견한 이들 소수가 다수를 해방시키기 위한 재교육을 해야 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르쿠제는 개인의 내면적 주관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하나의 반대 세력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내면으로의 도피나 사적인 영역의 고수는 인간 생존의 모든 면을 관리하는 사회에서는 방호벽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기에, 개인의 내면성이나 주관성은 경험의 반전과 다른 세계의 출현을 위한 내적, 외적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유토피아적인 변혁 의식을 개인의 내면적 의식에서 찾고 있는 이러한 관점에 대해 "해방이 공적 기획이기를 중단하고, 자연과의 비지배적인 관계 및 혁명적인 에로스의 계기들 속에서 성취되는 해방에 대한 하나의 사적 경험이 되었다"라는 비판이 가해질 수 있다.
유토피아적 변혁의 주체 문제에서도 마르쿠제는 마르크스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마르크스가 유물론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계급적 조건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프롤레타리아를 변혁의 주체로 삼고 있는 데 비해, 마르쿠제는 국외자나 소수 민족과 같은 집단을 변혁 세력으로 보고 있지만 그러나 이에 대해 상당히 비관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마르쿠제는 전반적으로 진보 운동이 침체되었던 시기에 변혁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하였다. 선진 산업 사회의 제도와 수단에 의해서 해방의 잠재력이 점차 제거되고 있다고 보면서, 민중들이 이전에는 사회 변동의 효소였지만 이제는 사회적 통합의 효소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민중 대신에 다른 계층에서 변혁의 힘을 찾으려고 하였다.
선진 산업 사회에서 민중들이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통제에 의해 비판적, 혁명적 의식을 상실함으로써 체제 순응적인 보수적 세력으로 전환된 데 비해, 기존 체제에 편입되지 않고 체제 외부에 존재하는 계층은 반체제적인 혁명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세력에는 인종 차별에 의해 억압을 받는 사람이나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해 권리가 박탈된 불법 이민자, 실업자 등과 같은 체제 외부의 하부 계층이 속하게 된다. "이들은 민주주의 과정 밖에 존재하며, 그들의 생활은 견딜 수 없는 조건과 제도를 종식시키려는 가장 급박하고 가장 절실한 요구이다." 그래서 이들의 반대는 체제에 대해 밖으로부터 타격을 가한다. 마르쿠제는 이들의 저항과 투쟁은 "게임의 규칙을 어기는 기초적 힘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 게임이 부당한 게임이라는 것을 폭로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게임 속에서가 아니라 게임의 규칙 자체를 부정하는 혁명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소수의 체제 외적인 세력을 변혁의 주체로 삼고 있는 마르쿠제는 이들의 반체제적 저항성이 성공적인 결과를 낳을 것으로 보지는 않는 등 결국 비관주의에 빠지게 된다. 기존 사회의 경제적, 기술적 힘이 이들의 저항을 충분히 무력화시키고 마비시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비판 이론이 현재와 미래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는 개념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 기대를 주는 것도 성공을 보여주는 것도 아닌 채, 단지 부정적인 것으로만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비관적인 태도를 보인다. 비판 이론은 희망 없는 '위대한 거부'에 자기 생명을 바칠 따름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마르쿠제의 유토피아론은 문제점을 안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사회 이론과 사회 변혁에서 유토피아적 차원이 차지하고 있는 역할과 그 중요성을 인식하여 인간 본성의 자유로운 실현의 관점에서 미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적극적 유토피아론을 전개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자아 실현적 관점은 대안적 체제의 실질적 합리성을 평가하는 유토피아론에서 가치 평가의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탈전통화와 개인주의화, 전지구화에 의해서 특징지워지는 성찰적 현대 사회에서는 제도의 개혁과 관련된 해방 정치뿐만 아니라 자아 실현의 문제와 관련된 '생활 정치'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학적 상상력은 더 좋은 대안적 사회를 기획하는 이론적 작업에서 활력소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유토피아적 기획은 미학을 비롯한 철학, 정치학, 사회학 등 제반 학문의 성과물을 활용하는 통합 학문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